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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5/08/10 (21:24) from 129.206.196.44' of 129.206.196.44' Article Number : 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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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러시아의 분쟁




成歡大激戰之圖




Li Hongzhang




hallshim




원구단




대한제국군


일본과 러시아의 분쟁


1895년 4월 청나라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일본의 시모노세키로 온 이홍장은 분을 삼켜야 했습니다. 청과 일 양

국이 자국의 명운을 걸고 맞붙은 전쟁에서 패한 후 패전국의 입장으로 적국에 온 것이니까요. 이때 조인된 시

모노세키 조약은 조선의 자주권 재확인, 요동반도 및 대만 할양, 막대한 전쟁 보상금의 지급이라는 조건을 걸

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런 조약은 청국에 이권이 걸려있던 독일, 러시아, 프랑스 삼국의 간섭으로 요동을 포기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제 청국에서 조선을 떼어놓았다는 것과 그래도 몇 부분의 청국 영토를 할양받고 막대한

전쟁보상금도 챙기는 등, 일본으로써는 재미를 본 셈입니다. 하지만 3국 간섭의 주동자 역할을 한 러시아에 대

해 매우 불쾌한 심기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지요. 당시 일본 수상인 이토 히로부미나 외무상 무쓰는 시모노

세키 조약 자체가 무산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삼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요동에서 물러난 것이

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감정은 썩 좋지 않았습니다.


한편 같은 해 10월, 일본은 조정내부의 친일내각과 흥선대원군의 재등장에 불안감을 느껴 러시아에 접근하는

중전 민씨를 견제하기 위해 그녀를 시해하려는 계획을 짜고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배후가 되어 중전 민씨를

죽이고 그 시신을 소각하니 이를 을미사변이라고 합니다. 즉 조선은 이미 아무런 힘도 없이 외세에 질질 끌려

다니다가 낭인에 의해 한나라의 왕비가 죽어야 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힘없는 고종은

아무것도 안한게 아니라 죽은 중전 민씨의 뜻에 따라 더욱 러시아에 접근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아관파천입니다.


러시아의 보호국 처지가 된 조선


을미사변 이후 정국은 일본이 뒤에 버티는 친일내각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제 3차 김홍집 내각은 이번 기회에

조선의 개혁을 위해 군제, 단발령, 태양력 사용 등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하나 왕비 시해 및 국정 간섭 등

일본에 대한 불만이 극도에 달한 국민들의 반감을 샀으며, 각지에서 이에 항의하는 의병들이 들고 일어납니

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은 친러파의 이완용등은 친일내각을 격파하고 불안해 하는 고종을 꾀어 러시아 공

사 베베르와 함께 파천 계획을 준비하게 됩니다.


1896년 2월 11일 고종과 왕세자는 각자 궁녀의 가마에 타고 건춘문을 나와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후, 조칙을 내려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 다섯 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이들 중 유길준과 조희연

만은 살아남으나 나머지 인사들은 성난 군중에 의해 난자되어 죽게 됩니다. 그 뒤를 이은 내각이 친러 내각이

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일본 측은 고종에게 여러번 궁궐로 환궁할 것을 권하며 대포와 군대

도 동원했으나 고종은 궁궐보다 러시아 공관의 방이 더 편하니 당분간 환궁할 수 없다 하여 버팁니다. 그 결과

로 러시아는 조선 국왕을 모시고 있다는 핑계로 조선의 보호국을 자청,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경원, 종성의 채광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을 차지했고, 여기에 덩달하 수호조약을 맺었던 구미열강들

도 러시아와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여 각종 이권을 수탈당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조선 내정에도 러시아의

영향은 깊숙히 파고 들어 러시아 무기를 구입하고 군제도 러시아 식으로 바꾸었고, 러시아의 재정고문을 들여

조선의 재정을 담당하게 했으나, 그게 될리 만무했죠. 결국 아관파천으로 일본은 닭 쫓던 개꼴이 되고 러시아

가 득세하게 되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갈등은 한층 더 깊어집니다. 아관파천은 일년 뒤인 1897년 고종이 국내외

에 들끓는 여론에 따라 러시아 공관에서 나와 경운궁으로 환궁했고, 같은 해 8월 광무란 연호를, 9월에 원구단

을 세우고 10월 12일 대한제국의 초대황제로 등극해 대한제국이 설립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으나, 여전히 대

한제국의 미래는 불투명했던 것입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P.S 5장의 귀중한 사진을 제공 해주신 시지프스님께 감사드립니다. ^^

P.S 2 브로드피크님의 조언대로 민비라고 표기된 부분을 보고 이를 중전 민씨라고 개칭합니다. 그녀에 대한
칭호를 왜 명성황후라고 쓰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녀는 한번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되는데
그때가 1897년 10월 10일이니 그전에는 그냥 중전 민씨로 표기한 것입니다. 2편부터 그녀가 언급될 때
는 명성황후라고 칭할 것이오니....
러일전쟁 이야기 - (2) 동아시아에 울리는 새로운 전쟁의 서곡  

허울 뿐인 제국


볼테르는 신성로마제국을 가리켜서 '신성하지도, 로마답지도 않고, 제국 답지도 않다'고 말했습니다. 아쉽게도

이는 대한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번듯한 황제가 있는 황제국가가 되었으나 그 속알맹이는 여전히 외세와

내분으로 산산조각나기 시작하던 조선이었으니까요.


경제력은 뒤늦은 근대화와 잦은 전쟁 및 내란으로 인해 발전속도가 더뎠고, 돈을 만들어야 할 경제력이 달리

니 세금을 많이 걷는다해도 그 양이 적을 수 밖에 없지요. 경제정책들은 하나도 실효를 거두지 못한채 무너졌

으며, 이권이 개입된 부분에는 열강의 간섭이나 개발권 요구가 계속되었지요. 따라서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으

므로 대한제국의 산업인프라는 거의 갖춰지기 힘들었고, 따라서 이는 강력한 군대를 가질 수 있는 형편도 아니

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으니 무기를 살 돈은 제한되어있고, 특히나 값비싼 대형 전함등을 위시한 해군

전력의 확보도 어려웠으니, 대한제국군은 비록 신식군대이긴 하나 주변국가들에 비해선 턱없이 약한 군대였

던 것입니다. 또한 러시아에서 파견나온 재정고문과 군사고문단이 있었으니, 대한제국이 허물 뿐인 제국이라

고 함은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정한론은 어디에?


1870년대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축이 되어 '건방지고 오만한 조선'에 대한 침공을 주장한 정한론이 등장한 이

래(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와 이런 사이고의 생각이 당시 일본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신 정부간에 갈

등이 터진 것이 세이난 전쟁입니다. 신정부군은 사이고의 군대를 진압하여 승리를 거두나 사이고는 그 뒤로

부터 야마토혼(大和魂)의 화신이 됩니다.) 일본정부는 조선에 대한 야욕을 버리진 않았습니다. 신정부가 사

이고의 정한론에 반대한건 '준비가 안되서'였지 '양국간 평화를 위해'는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일본은 조선에

서 침을 흘리던 청국을 물리치며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나 러시아가 주동이 된 3국 간섭으로 인해 요동에서

물러나며 절치부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러시아를 건드릴 마음은 여전히 없었습니다. 아직 러시아의 세력에 견주어 볼때 일본이 이길 가능성

이 없다고 생각했으며, 중국에 진출해있는 열강들의 눈초리도 살펴야 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일본은 중국에

서 뿐만 아니라 친러성향으로 기울은 조선정부 덕에 다 지어놓은 밥(조선)을 빼앗기기 싫었고, 따라서 양국

은 1896년 6월, 조선에서의 양국 지위를 동등한 것으로 규정하는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2년 뒤인 1898년 니시-로젠 협정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재확인합니다. 러시아와 일본 모두 대

한제국을 놓고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터진 것이 바로 1900년의 의화단 사건

입니다.


의화단 사건 이후에 더욱 커진 러-일 알력과 일본의 속사정


의화단 사건은 사실 사기꾼들에 의해 청국 정부가 놀아난 것으로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사건이었습니

다. 하지만 이 의화단 사건으로 인해서 서구 열강과 일본은 청의 이권에 더욱 혈안이 되었지요.. 당시 연합군의

주력세력은 일본군이었는데, 일단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을 들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청일전쟁, 의화단

사건을 통해 보여준 일본군의 힘은 극동 지역에서 일본의 가치를 한층 더 높여주고 있었습니다. 의화단 사건

진압시에도 철저한 군율과 통제로 질서를 지켜 다른 연합군 군인들이 강탈을 할 때 비교적 덜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극동의 헌병'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일본의 눈에 슬금슬금 만주에 눌러앉은 러시아는 불

편하고 불쾌한 존재였을 것입니다. 기껏 공들여 밥 지어놨더니 똘마니 둘 데려와서 밥솥을 엎어놓고(청일전

쟁), 기껏 앞장서서 재주 부렸더니 뭐가 재주넘고 뭐가 돈은 챙긴다는 말이 현실이 되었으니까요. 만주가 넘어

갔다는 것은 청과 대한제국 모두에서 일본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무엇보다도 일본 국내 사정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받을 거액의 배상금

그리고 기업의 진출을 적극 후원하는 일본은행의 대출에 힘입어 제 1차 산업혁명이 성공하는 등 일본 경제가

활성화 되지만, 지속되는 금리 인상과 함께 의화단 사건이 겹치면서 1898년, 1900년 두 차례에 걸친 경제 공

황이 밀어닥치면서 경공업 중심의 일본 산업은 타격을 입었고, 특히 방적 산업 쪽은 큰 피해를 입어 수년간

피해를 복구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로 인구가 대거 유입되고, 도시와

농촌간의 수입에서 차이가 일어남에 따라 일본은 사회문제로 진통을 앓기 시작합니다. 또한 일본 정치계도

파벌이 갈려 잦은 내각의 교체와 정쟁으로 인해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제 3편에서 계속됩니다]

러일전쟁 이야기 - (3) 아시아의 보호자, 일본?  

아시아 보호자, 일본? - 후쿠자와 유키치를 파라!


우리나라 최고액권인 만원권에는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이 모델이 되어계십니다. 이웃 일본의 최고액

권인 만엔권에는 신에 가까운 '천황'이 아닌 어디서나 흔히 볼 법한 얼굴 하나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요.

이 남자가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입니다. 일본의 명문대 중 하나인 게이오 대학- 경응의숙(慶應

義塾)의 창립자이기도 하면서, 개화기 일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가끔 일본의 본

질을 논한다면서 말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이야기를 꺼내면 정작 모르는 사

람도 있더군요. 이 사람을 논하지 않고는 일본을 논하기 어렵습니다.


…… 서양인의 흉내를 내고 귀에 새로운 일, 눈에 새로운 일, 다른 사람과 다른 짓을 하면 모두 문명 개화
라고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문명이라는 것은 문자로도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즉 문(文)에 밝다는 뜻
으로 널리 배워서 세계의 일들을 바로 알고 그 장점을 취하여, 나의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하는 것이 참된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福澤諭吉/文明論之槪略 1875]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이라는 책에서는 문명이 곧 독립이라는 논조를 펼칩니다. 동아시아의 대

국 청나라가 무너지던 과정을 지켜보던 후쿠자와 유키치로서는 서구 문명의 도입을 일본의 생존과 직결시킵

니다. 따라서 '오늘날 일본을 문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오직 일본의 독립을 보전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나

라의 독립은 목적이며 국민의 문명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평가한 후쿠자와의 이러한 논리

는 당시 숨가쁘게 돌아가던 주변 상황과도 맞아 떨어졌던 것입니다.


중국같은 대국은 국토가 광활해 서구인들이 그 내륙까지 침투하지 못하고 해안에만 그 족척을 남겼다. 하나
이후의 형세를 추축해보건데 중국 또한 유럽인들의 밭과 정원에 불과하다. 서구인들이 미치는 곳에는 마치
토지가 그 생명력을 잃고 풀도, 나무도 자랄수 없는 곳이 된다. 심지어 인종이 멸망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우리 또한 동양의 작은 한나라임을 생각했을때, 비록 오늘날까지 우리가 대외관계로 큰 피해를
입진 않았으나 후일의 불행을 두려워 하지 않을 수 없다. [福澤諭吉/文明論之槪略 1875]


후쿠자와 유키치의 생각은 주변국과 힘을 합쳐 서구 제국에 대한 대항이 핵심입니다. 동양연대론, 그리고 훗

날 대동아공영권의 모태가 되는 생각입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구 문명을 절대적 선(善)의 개념으로 받아

들이지 않았고. 따라서 주변국과의 연계를 통해 서구 제국의 간섭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

다. 따라서 후쿠자와에게 청국과 조선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그는 조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인 학

자이기도 합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조선 개화파


구한말 개혁가인 김옥균은 이미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던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선 일본의 경험을 충분히 살려

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김옥균이 말하길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세아의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했었으며 일본과 친분을 유지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서재필 등에게도 이어져 서재필은 1897년 2월 15일『대죠선독립협회회보』

제6호에 게재된「동양론」 에서 말하길 ‘정치가 고약하고 인민이 완고하며 야만의 복식과 야만의 풍속을 숭상

하는 청국에 비해 일본은 근년에 구습을 모두 버리고 태서 각국에 좋은 법과 학문을 힘들여 배운 까닭에 오늘

날 동양 안에 제일 강하고 제일 부유하며 세계에 대접받기를 개화한 동등국으로 받으니 치하할 만하고 칭찬할

만 하더라. 그러나 일본도 아직 유럽 각국과는 겨뤄보기 어려워 조심을 하고 더 배우며 더 진보를 하여야 아주

독립권을 찾을 터일 것이다’ 라고 하여 일본의 근대화 정책을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을 개혁하여 일본의 아군으로 만든다는 생각의 후쿠자와 유키치와 청으로 부터 조선을 독립시

키고 근대화를 진행하여 서구문물의 수용에 적극적으로 나서 조국을 발전시킨다는 김옥균의 발상은 일치하

였으며,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 민간에 포진한 조선개혁지원론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습니다. 실제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김옥균의 조선개혁에 대해 적극적인 찬성의사를 밝히고 이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일본으

로 유학온 조선 유학생들의 생활 지원과 상급학교 진학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줬고, 유학경비마저 보조

해줌으로서 조선의 개혁을 돕게 됩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1884년 갑신정변이었지요.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에 대해 자신의 동양연대론이 현실화되어간다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무너지고 핵심인사

들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크게 낙담하면서, 그의 동양연대론 대신 그의 유명한 탈아론

이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탈아론, 그리고 제 1차 가쓰라 내각


보거순치(輔車脣齒)’란 이웃 나라간에 서로 도와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청국과 조선은
우리 일본을 위해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구 문명인의 눈으로 본다면 이 세 나라가 지리적으
로 서로 접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 삼국을 동일시하여 청·조를 평하는 정도로 우리 일본을 인정하는 경우도 없
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일본은 주변 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아세아가 함께 흥하기를 기다릴 수 없으며, 오히
려 그 열(列)을 벗어나 서구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 하고, 청국과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나라라고 하여 특별
히 대우할 것이 아니라 바로 서구인이 청·조을 대하는 법에 따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쁜 벗들과 친한 자
는 함께 오명을 면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으로 아세아 동방의 나쁜 벗들을 사절하는 바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이 살아남을 길로 주변국과의 연대를 주장하던 동양연대론에서 이제는 강한 자의 질

서에 편입되어 행동하게 되는 탈아론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일본은 더욱 적극적으로

서구화 되기 시작합니다. 청일전쟁과 의화단 사건은 이를 뚜렷하게 증명해주죠.


일본 내부에서는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일본이 맹주가 되어 아시아를 이끌어 가야한다는 생각이 1880년대

부터 팽배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1895년의 청일전쟁, 1900년의 의화단 사건은 동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우월감을 한층 더 고양시켰고, 특히나 1890년대만 하더라도 일본을 능가하던 해군력을 가진 청국을 무릎 꿇

렸던 일본의 저력에 대해 일본 국민들은 열광하고 있었으니까요. 이러한 분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이제

그 상대로 러시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타 구미열강들과는 달리 러시아는 국경이 동아시아 국가들과 맞닿아있고, 더우기 청일전쟁 이후 사사건건

간섭해대는 러시아는 일본으로써는 동아시아에서의 이익을 놓고 피할 수 없는 숙적이었기 때문이었죠. 이

런 상황에서 1901년 6월 일본정부는 개각을 단행, 영일동맹론을 주창하는 가쓰라 타로를 수상으로 하는 제

1차 가쓰라 내각을 출범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러일 전쟁을 촉발시키는 촉매제가 되지요.


-----------------------------------------------[제 4편에서 계속됩니다]  

러일전쟁 이야기 - (4) 팽창하라, 더 팽창하라 일본이여 영국이 그대들의 뒤에 있음이니.  

카쓰라 타로


카쓰라 타로라는 인물... 요새 한다하는 지식인들 가운데 미일관계를 두고 카쓰라 테프트 조약 운운 하고 있어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토 히로부미보다도 더 재미있는 인물

이 바로 이 카쓰라 타로인듯 해요.


카쓰라 타로는 일본 메이지 유신의 핵심 중 하나인 초슈번 출신의 군인정치가입니다. 군인으로서 공을 세운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 의해 1870-73년, 그리고 1884년 독일로 국비유학을 갈 정도의 인재였습니다.

나이는 좀 되었지만, 당시 독일은 일본과 같아 빌헬름 1세와 유능한 재상 비스마르크의 지휘하에 이제 막 유

럽의 '약대국'에서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던 시기였으니, 마찬가지로 이제 막 신생근대국가로 진입한 일본은

독일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인들과 기질이 어느정도 통했다는 것도 물론 한 몫 했겠지

만요. 그는 일본 정계의 거물 중 하나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비호하에서 대만총독, 육군상등의 신 정부 요직

을 거치면서 탄탄대로를 걸었고, 결국 1901년 일본의 수상이 됩니다.


당시 이토 내각이 국정 혼란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뒤 이노우에 카오루와 사이몬지 킨모치에게 새로 내각을

구성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으나 실패로 돌아갔었으며, 카쓰라 타로가 조각을 한 뒤에도 그의 내각은 '소(小)야

마가타 내각'이니, '차관내각'이니 하는 평가절하를 받게 됩니다. 아무도 이 카쓰라 타로의 내각이 오래갈 것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러나, 일단 수상에 오른 카쓰라 타로는 놀라울 정도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게 됩니다.


카쓰라 씨의 사업 - 영국, 일본....우리가 함께 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카쓰라 내각의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러시아를 견제,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패권을 유지할 수단으로서

당시 영예로운 고립을 택하고 있던 영국과의 동맹을 맺는다고 하는 영일동맹의 추구, 그리고 해군력의 확장을

통한-당시 제국주의에 물들어있던 다른 제국들이 해군을 확충했던 것처럼- 일본의 영향력 및 방위력 강화 등

을 목표로 삼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영일동맹론 외에도 대러시아 외교전략 중 하나로 만한교환론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즉,

만주에 대한 우월적 권리를 러시아가 가지게 하는 대신, 일본은 조선, 즉 대한제국에 대한 권리는 일본이

갖는다는 조약을 맺자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일본이 물리쳤던 청나라나 조선과는 급수가 다른 강국 중 하

나였으니 전쟁을 결심하기엔 쉽지 않았지요. 따라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누이좋고 매부좋고 하자는 전략

이었지요. 그러나, 러시아는 그럴 생각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 군대는 만주에

자리를 틀어놓은데다, 대한제국 안에는 친러성향의 인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포기해야 할 이유도 없지요. 둘 다 먹을 수 있는데 하나만 먹을리는 만무하니 말입니다. (대한제국 이후의

정치적 변동에 대해서는 제 5편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따라서 만한교환론은 서서히 힘을 잃어

갔고 반대로 영일동맹론은 힘을 얻기 시작합니다.


당시 영국은 그들의 '대영제국'을 위협할 세력으로 두 나라를 꼽는데, 바로 프랑스와 러시아입니다. 이 두 나

라는 당시 해군력을 확장하면서 바다에서의 영향력을 늘리기 시작하고 있었고, 영국으로써는 이를 좌시할순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멀리 극동지역에서 영국 해군을 뒷받침해줄 파트너가 필요했으니, 바로 신흥강국

일본이었지요. 일본은 의화단의 난 사건에서 그 군대의 위력을 여실히 보여주면서 그 실력을 보였던 바, 영국

이 파트너로 삼기엔 안성맞춤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1902년 1월 30일, 영국 외무상 랜스다운경과 하야시

타다스 주영 일본공사가 런던에서 조약을 체결, 이것이 바로 영일동맹(Anglo-Japanese Alliance)입니다.

따라서 당시 초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일본이 손을 잡음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지위가 급격

히 올라간 것이 사실이며, 반대로 러시아로써는 결코 반갑지 않은 동맹이 맺어진 것입니다. 덤으로 일본 정

계에서 카쓰라 타로의 위상이 올라간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것으로, 내각을 구성한지 불과 6개월 남짓한

시간에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일본 정계의 거두, 이토 히로부미를 물먹였다는 것이

대단한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그리고 카쓰라 타로


실상 이토 히로부미... 굉장히 억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평가는

한일합방의 주역으로 당당히 등재된 인물이니 말이에요.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보다는 실제로 조선, 즉 대한

제국의 멸망을 이끌게 된 근본을 제시한 인물이라면 후쿠자와 유키치, 그리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라고 할 수

있거든요. 이토가 '왜 나만 갖구 그래'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한 인물이라면, 단연 야마가타 아리토모입니다. 카쓰라 타로의 영일동맹론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와의 생각과도 일치되는 것이며, 카쓰라 타로의 정치적 후견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생각과, 앞서

3편에서 언급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을 함께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1890년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의견

서를 보면, 그는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을 정의합니다. 자국영토방위를 의미하는 '주권선'이 가장 중

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나,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요충지대를 '이익선'이라고 부릅니다. '이익선'을 잃으

면 '주권선'이 위험해지고 반대면 '주권선'이 안전하게 되는 그런 전략적 요충지대가 "이익선"이며 이것을 확

보하는 것이야말로 신생 일본국 '대외정책의 핵심'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파합니다. 따라서 그의 주장대

로라면 일본의 대외정책은 이러한 '이익선'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가야하며, 이는 우리 민족에게는 불행이나

일본은 그들의 이익선을 지키기 위해 최소한도 대한제국을 '중립', 필요하다면 '보호국화' 해버리는 것이 바람

직 했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적극적인 외교보다는 다소 소심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조심에 조심을 한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카오루의 경우에는 무력충돌보다는 외교적 협상을 통해 대한제국의 이권을 찾고자 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나 카쓰라 타로의 경우는 조선을 발판으로 삼아 일본의 이익선을 확대하면서 근대국가로써

의 일본을 대륙세력으로 확대 발전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따라서, 카쓰라로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적 근본인 입헌정우회의 세력을 무력화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히로부미가 미국-유럽순방길에 오르자 그는 정치적 회유 등을 통해 정우회의 기반을 흔들기 시작했고, 이토

히로부미와의 밀약을 들이대면서 정부의 정책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정우회를 입막음 해버립니다. 당시

정우회는 총재인 이토 히로부미의 영향력이 강했으므로 총재가 이미 정부와 밀약한 이상 뭐라 할 말이 없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토 히로부미 순방의 목적인 대러 협상에서 실패했다는 소문을 정부에서 흘리면서

그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줄이게 되었고 이러한 일련의 정치공작은 큰 성과를 얻어내었습니다. 결국 1903년

코베 해군 관함식이 끝나고 이토 히로부미, 카쓰라 타로 등이 야마가타의 별장인 무린안에서 대러정책에 대

한 합의(일명 무린안 회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일본의 대러정책은 이제 서서히 전쟁의 방향으로 굳어지기 시작

합니다.


카쓰라 타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메이지 원로들이 모인 가운데 '곧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게 될 터인

데 소인은 이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원로 중 한 분께서 수상에 취임하시어 대업을 이루시라'는 요지의

말과 함께 수상직을 사퇴하겠다고 했는데, 원로들 중 누구도 이러한 요구를 받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카쓰라 타로는 원로들의 지지약속을 받아냄으로써 더욱 그 자리를 공고히 하게 한 채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합니다. 가쓰라 타로의 정치적 노련함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자, 그럼 일본이 영일동맹을 맺고 전쟁 준비를 하는 동안 러시아,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의 이해가 물려있던

대한제국의 사정은 어떠했을까요? 이를 제 5편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in http://brd3.chosun.com/brd/view.html?tb=BEMIL115&pn=1&num=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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