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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5/10/19 (08:51) from 129.206.196.42' of 129.206.196.42' Article Number :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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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진짜 이유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진짜 이유

최준식
cjskor@ewha.ac.kr
  
2. 인간에게 종교가 필요한 진짜 이유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설명을 해왔다. 그런데 인간은 왜 이런 질문을 던질까?

따라서 그 다음 단계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왜 인간만이 이런 질문을 던지느냐는 것 아닐까? 인간의 어떤 조건이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제 그것을 탐구해보기로 하는데 인간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데에는 양면성이 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하며 동시에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우선 죽음과 연관해서 보기로 하자.

1) 인간은 죽음을 아는 유일한 동물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 이야기해왔다. 나는 이 주제를 죽음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싶다. 인간이 죽음과 같은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동물과는 달리 인간만이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인간은 한참 앞에서 본 것처럼 네안데르탈인들도 인간의 시신을 앞에 놓고 일정한 종교적 의례를 행한 것이다.

그러면 곧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동물도 죽는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런 증거로 소나 돼지들도 도살장에 끌려갈 때는 안 가겠다고 버티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 있다. 동물도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버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응이 정말로 동물이 죽음을 안다는 증거 자료가 될 수 있을까? 동물들의 이러한 반응은 인간이 죽음을 안다는 사실과 하등의 다른 점도 없는 것일까?

조금 성급한 결론이 될 수 있겠지만 생각컨대 동물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know)' 것이 아니라 다만 '느끼는(sense)' 것이다. 만일 동물들도 자신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자. 그러면 그들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강하게 느낄 것이고 나름 대로의 종교의례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에서는 그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우선 그들은 주위에서 동료들이 죽음을 맞이해도 거기에서 아무런 공포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가령 매일 같이 닭이 팔리는 닭집에서 양육되는 닭들이 죽음 때문에 심적인 공황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옆에 닭들이 인간에게 붙들려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아도 나머지 닭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닭을 잡을 때 온갖 비명 소리가 다 나도 그것을 듣고 있는 다른 닭들은 아무런 공포 상황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같은 상황이 인간에게 벌어졌다면 사람들은 거의 미쳐버릴 것이다. 주위의 동료들이 하나 둘씩 끌려가 온갖 비명을 지르면서 죽는 것을 목도하면 옆에 있던 사람은 실로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된다. 죽음 앞에서 인간이 어떤 공포를 느끼는가에 대해서는 앞에서 익히 보았다. 사형수들에게 언제 형을 집행한다는 것을 알리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집행하는 것은 그만큼 죽음에 대한 공포가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도적인 차원에서 배려해주는 것이다.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거는 반대 이유 가운데에는 반드시 '죄수가 사형장에 갈 때 느껴야 하는 고통은 비인간적인 것'이라는 조항이 들어간다.

2)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
--자의식(自意識)을 가진 인간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해서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이것을 가능케 하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능력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해보면 인간은 유일하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게 바로 죽음이다. 죽음과 삶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항상 같이 간다.

다른 하나가 없이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상대적 관계라 그 둘은 항상 같이 있다.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인간이 자신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 의식을 일컬어 전문적인 용어로 자(기)의식(自己意識, self-consciousness 혹은 reflective consciousness)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기를 (돌이켜)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을 말한다. 동물 가운데 인간만이 유독 자신을 인식 속에서 대상화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대상화시킬 수 있다는 게 무슨 말일까?

일상적인 실례를 들어 설명해보자. 인간은 자신을 미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미워하는 주체'와 '미움을 받는 객체'로 나뉘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른바 자기가 주관적 자기(subject-I)와 객관적 자기(object-I)라는 두 개의 자기로 나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나는 내 마음이 무엇인지(혹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어.'라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여기에 이 두 개의 자기가 잘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장에서 주어인 '나'는 주관적 자기, 즉 바라보는 주체(the seer)이고 '내 마음'은 바라보이는 객체(the seen)인 것이다.

인간만이 갖고 있다는 자기의식은 내적인 개념이라 징표가 없다면 언어의 소지 유무는 바로 인간과 동물을 갈라주는 외적인 징표 노릇을 한다. 그러니까 다소 과장되게 이야기한다면 동물에게는 언어가 없는 것이 된다. 언어란 것은 무엇일까? 언어에는 여러 수준이 있겠지만 언어와 추상적인 개념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우리에게 '어머니'라는 소리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 소리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그 소리를 대상화시켜 한번 돌이켜서(reflexively)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소리를 이미지화 시켜서 주체인 내 입장에서 객체인 그 소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때까지 그 단어와 관련해서 교육받았던 정보들이 다시 합성되면서 그 단어의 뜻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이 이렇게 한 단어를 이해하는 데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는 매우 복잡한 몇몇의 단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인간이 갖고 있는 능력은 결코 동물의 그것의 연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동물의 능력이 발달해도 인간의 능력과 같은 것을 소지할 수는 없다. 양자의 능력은 연속적이 아니라 불연속적인 것이다.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자연을 거역하는 동물인 인간

이렇게 인간의 생각이 생각하는 주체와 생각되는 객체라는 두 가지 요소로 나누어지는 것은 인간의 인식 구조가 이미 주체적 자기와 객체적 자기라는 이원론적인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1) 어떤 학자들은 뇌의 일정한 부분에서 인간의 이러한 능력을 관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람이 갖는 특성은 모두 이 이원적인(dualistic) 자아 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위에서는 시범적인 예로 언어적인 능력에 대해서만 보았는데 더 구체적인 예를 통해 인간이 동물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보자. 동물과 비교해볼 때 시간 개념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전의 자기(혹은 이전의 외계)와 지금의 자기(혹은 지금의 외계)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기억이라 할 수 있다. 이 능력은 어디서 생기는가?

말할 것도 없이 자신을 대상화할 수 있는 능력에서 생기는 것이다. 대상으로 기억된 이전의 상태와 지금의 상태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은 모두 이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주체 개념이 없는 동물들은 외계에서 아무런 변화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자연과 하나가 돼서 살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동물과 자연의 관계를 살펴보면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더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앞의 설명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동물은 자연을 절대 거역할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의 유전인자 속에 저장된 정보에 따라서만 행동할 수 있다.

배고플 때만 먹이를 먹을 수 있고 발정이 될 때에만 교미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아프리카 초원에서 얼룩말과 사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한 번 포식을 한 사자는 며칠 동안은 아무리 먹이인 얼룩말들이 자기 앞에서 얼쩡거려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사자는 다만 자연을 따르는 것이다. 아니 그냥 자연의 일부로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인간의 자의식은 언제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2) 여기에 대한 가장 상세한 설명은 켄 윌버(Ken Wilber)의 《에덴으로부터의 도약--인간 진화에 대한 초개인적인 주장(Up From Eden--A Transpersonal View of Human Evolution)》에 잘 나와 있다. 윌버는 인간이 이런 자의식을 획득하고 더 나아가서 이 자의식마저 초월하는 과정이 바로 인간의 진화 과정이라는 대단히 폭넓은 견해를 밝혔다. 더 나아가서 인간 역사 자체도 이런 진화 과정을 밟고 나아가고 있다는 엄청나게 큰 견해를 주장했다. 윌버는 이 과정을 상세하게 논했지만 나는 세밀한 것은 생략하고 큰 줄기로만 보려고 한다. 너무 세밀한 것은 독자들의 이해를 오히려 떨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을 원하는 독자는 이 책을 참고하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그러나 번역된 윌버의 다른 책은 권할 수 있다. 가령 《모든 것의 역사--인간 의식과 온 우주가 진화해온 발자취》(조효남 역, 대원, 2004) 같은 책은 윌버의 모든 사상을 알 수 있는 대단히 훌륭한 책이다.

인간에게 이렇게 중요한 자의식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 갖게 되는 것일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바로 이런 의식을 갖는 것일까? 아니면 나중에 성장하면서 갖게 되는 것일까? 여기에 인간 진화의 비밀이 숨어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결론을 먼저 말해보면 인간은 태어났을 때에는 이런 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이 이런 의식을 갖게 되는 시기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두 살 즈음으로 추정된다. 이 시점은 아주 조용히 찾아오기 때문에 본인도 잘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니 이러한 상황에 처한 당사자들은 모두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본인들은 전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주위에 있는 어른들이 자신의 아이가 이런 상황에 진입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당사자가 언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기 시작했을 때이다. 혹은 아이가 갑자기 '아니'라는 부정사를 쓰기 시작하면 대체로 자의식이 형성된 것으로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라는 부정의 표현은 자기의 입장에서 그렇지 않다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자기라는 정체성이 서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식이 없다면 자기 입장이라는 게 없는 것이니 긍정할 것도, 부정할 것도 없는 게 되지 않겠는가?

이때 인간은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조금 단순한 표현이지만 이때 인간은 동물의 상태에서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변화는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이때의 변화에 비하면 사춘기 때의 변화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사춘기 때를 질풍과 노도의 시대라 하지만 그것은 인간 안에서의 변화를 말할 뿐이다.

하지만 2살 때의 변화는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변화를 지칭하기 때문에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이때를 '가증스러운 두 살(terrible two)'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변화가 심하고 자신의 주장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아이들이 말을 안 듣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이때라고들 말한다.

자의식을 갖기 이전의 상태에 대해 아주 간단한 용어로 직설적으로 표현한 학자가 있어 소개해야겠다. 그 학자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폴 틸리히로 역시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답게 명쾌하고 신선한 용어로 표현해 주목을 끈다. 그는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했던 유아 상태를 직접적으로 지칭한 것은 아니다.

그가 거론했던 것은 구약(히브리 성서)의 첫 장인 창세기 장에서 주인공 역할을 한 아담과 이브의 상태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조직신학 책에서 이 두 사람은 '꿈꾸는 순진무구함(dreaming innocence)' 상태에 있다고 역설했다. 이 두 사람이 죄 없는 순수한 상태에 있긴 있는데 그 수준이 성자들이 지닌 수준 높은 천진함이 아니라 꿈꾸는 듯한 정신없는 그런 상태라 한 것이다.

나는 이 용어를 부연해서 설명하기를 조금 조야한 표현이지만 '똥오줌 못 가리는' 그런 상태로 표현했다. 실제로 아기들은 똥오줌 못 가리는 그런 원시적인 수준에 있지 않는가? 그것을 틸리히는 꿈꾸는 상태로 본 것이다. 내가 있는지 상대방이 있는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꿈꾸듯이 정신이 혼미한(?)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 아닌가 싶다.

이제 우리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까지 왔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도 이해가 확실히 되지 않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에는 이야기로 설명하는 게 제일 좋다. 이런 문제에 직면했을 때 철학적인 분석을 이용해 이해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인류에게는 또 다른 대단히 유용한 설명 방식이 있다. 신화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아닌 상태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이런 신비로운 과정을 설명하려 할 때 신화는 가장 효과적인 매개체이다.

태초에 아무 것도 없을 때 사물이 생기는 신비로운 과정을 신화가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듯이 자의식을 가진 인간이 태어나는 신이한 과정 역시 신화가 잘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런 신비로운 과정은 고도의 상징을 사용하는 신화가 가장 잘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그럼 어떤 신화가 우리가 위에서 본 인간의 진화 과정에 대해 잘 설명해줄 수 있을까?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답은 아담과 이브의 신화이다. 자 그럼 이 신화를 집중적으로 보자.

아담과 이브 신화에 나타난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1: 자의식의 발현

우선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소위 낙원이라는 에덴 동산에서 벌거벗은 채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벌거벗은 생태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자(記者)는 적고 있다. 이 단계에서는 이들이 벌거벗었다는 것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벌거벗었다는데 이들은 왜 부끄러워하지 않았을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이들이 아직 자기개념이 생성되기 이전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알 수 있듯이 아주 어린 아기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벗고 다니는 데에 아무런 수치심도 느끼지 못한다. 이들은 아직 자기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3) 자기 개념이 생겨도 수치감이나 죄의식을 가지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는 사회화 과정 같은 것이 들어가고 복잡한 양상을 띠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수치심이나 죄의식 같은 것은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을 때에만 생길 수 있는 인간의 특수 기능인 것이다. 이게 바로 틸리히가 말한 '꿈꾸는 순진무구함'의 상태이다. 이때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니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도 모른다. 그저 혼몽 상태이고 더 나아가서 자신이 혼몽상태에 있다는 것조차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니 자신이 죽는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인간은 이런 상태로 있다가 자의식을 갖고 인간이 되지만 동물은 그 상태로 일생을 보낸다는 것뿐이다. 동물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동물일 뿐이다. 이런 상태를 구약의 기자들은 낙원이라고 불렀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에덴에서 신과 같이 있으니 낙원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과연 에덴 동산에서 있는 상태를 낙원으로만 볼 수 있을까? 이 문제도 중요한 주제인데 이것은 조금 있다가 다시 거론하기로 하자.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어떤 과일을 따먹게 되는데 이것은 신이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한 금단의 열매였다.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이 열매를 먹게 한 것은 뱀이었는데 이 뱀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하는 것은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금기를 깬 것이 남성(아담)이 아니라 여성(이브)이라는 사실도 이 신화나 서구 기독교(혹은 유대교)를 이해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지만 이것 역시 우리의 주제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뱀이 '이 열매를 먹으면 (신처럼) 눈이 밝아지고 선과 악을 알게 된다'고 말한 것은 주의를 요할 만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도 다음 기회로 그 설명을 미루고 여기서는 아담과 이브가 열매를 따먹은 뒤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서만 보기로 하자. 이 상황은 이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이 열매는 이브가 먼저 먹고 그것을 아담에게 준다. 아담이 먹고 나니 그들에게 변화가 생긴다. 대한성서공회에서 나온 《성경전서》를 보면 '그러나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라고 되어 있다. 이 결정적인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라는 문구이다. 이에 비하면 '눈이 밝아졌다'느니 '나ant잎으로 몸을 가렸다'느니 하는 것은 부수적인 것에 속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겪은 이 사건은 인간의 자의식이 생기는 과정을 신화를 통해 매우 극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인간의 자의식이 생기는 과정을 묘사한 이야기는 더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 한글 번역본으로는 이 드라마틱한 순간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을 제대로 잡아내려면 영어 번역본이 훨씬 좋다.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라는 대목의 영어 번역은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naked를 괄호 안에 넣든지 생략해보자.

그럼 어떻게 변하는가?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가 되는데 이것을 직역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존재하는(were) 것을 알았다'가 된다. 이 말이 무엇인가?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을 구약의 기자는 아담과 이브의 눈이 밝아졌다고 표현한 것인데 이것은 인간에게 자의식이 생기는 순간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아담에게 자의식이 어느 날 느닷없이 작동하면서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담은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도 동시에 알게 된다. 그제서야 비로소 아담은 이브가, 이브는 아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상대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가 벗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이다.

계속해서 기자는 이들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선과 악 같은 도덕의식은 모두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으로 자의식이 없으면 인간에게 생길 수 없는 의식이다. 물론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은 자의식이 생긴 바로 직후부터 가동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회화 과정을 겪은 다음에야 가능한 것으로 여기서 그 주제에 대한 상세한 언급은 삼가자.

이렇게 해서 인간이 탄생한 것인데 유대-기독교에서는 이 사건을 인간의 타락이라고 해석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교리를 구축해왔다. 그런데 그들이 내린 해석의 의미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들의 해석은 다소 지나친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아담과 이브가 신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에 그 벌로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고 본 것인데 이 해석에는 심대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 해석에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일까? 사람이 죄를 저지르려면 우선 자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의 자유의지와 책임감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는 내가 있은 다음에 지을 수 있는 것이지 자기란 개념 자체가 없는데 무슨 죄를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통상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아담과 이브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면서 그 의지를 사용하여 신의 말씀을 거역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열매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이브에게는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자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타자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담이 이브를 인식한 것도 열매를 따먹은 다음에만 해당된다. 그런 상태이니 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유의지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라는 내적 개념이 없는데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이다. 자기 개념이 생기고 그 다음에 자유의지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어려울 것 없이 유아를 생각해보면 된다. 엄마 품속에서 젖을 먹는 아기에게 무슨 자유의지가 있고 무슨 죄를 저지를만한 능력이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에덴 동산 사건은 인간의 타락이라고 해석할 게 아니라 인간의 자의식이 발현된 사건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 시작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작을 쓴 사람은 앞서 인용했던 켄 윌버이다. 윌버는 인간의 의식이 발전되는 과정을 적은 책을 저술하면서 제목을 "Up From Eden"이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을 "에덴으로부터의 도약"이라고 번역했다.

윌버는 이 책에서 인간은 에덴에서 타락한 것(Fall From Eden)이 아니라 에덴 동산에서 사람이 된 것, 즉 그곳에서 도약한(up)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나는 이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 이제 이렇게 해서 '똥오줌 못가리던' 아담과 이브는 진정한 인간이 되었다. 그 다음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신화의 기자는 그 다음 일에 대해서도-본인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매우 훌륭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 신화에 나타난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2: 고통의 시작

계속해서 이 이야기의 기자(記者)는 아담과 이브가 그들이 행한 죄값을 치르느라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된다고 적고 있다. 가령 여자는 애를 낳는 고통을 겪게 되고 남자는 먹고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해야 되는 게 그 구체적인 벌로 나와 있다.

그런데 만일 이 죄값 혹은 벌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곤란할 수 있다. 왜냐면 애를 낳는 게 반드시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며 노동도 수고스러운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누누이 말한 대로 신화란 절대로 씌어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들이 헤어나올 수 없는 고통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이들이 인간이 되면서, 다시 말해 자의식이 생기면서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의식이 생기면 왜 우리는 고통 속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소외나 고독이다.

인간은 이때 처음으로 자신이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타자에 눈뜸으로써 그 결과 인간은 자신이 (외롭게) 혼자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계는 밖에 저렇게 있고 나는 여기 이렇게 존재하는 것을 처음으로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나는 다른 모든 것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그 이전에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외고 고독이고 없다. 그러나 이제는 철저하게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이 외로움을 갖고 산다.

자의식이 생기면서 인간은 소외감과 더불어 모두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 그런데 이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이야말로 모든 고통의 원천이 된다. '나'라는 개념이 생기면 곧 바로 내 것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이게 만흉(萬凶)의 근본이 되는 욕심의 출발이다. 욕심, 탐욕, 갈애 혹은 갈망, 집착, 탐착 등등의 매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고통의 근원은 바로 '나'라는 자의식에 있는 것이다. 왜 욕심이 만흉의 근본일까? 그것은 이 인간의 욕심이란 것이 결코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참 앞에서도 보았지만 불교 경전에서는 전 우주가 보석으로 되어 있고 그것이 다 자기의 소유라 하더라도 인간의 욕심은 충족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는 식이다. 또 인간이 욕심을 부리는 것은 목마른 사람이 짠물 들이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짠물은 들이킬수록 더 많은 물이 필요하게 된다. 욕심도 마찬가지이다. 욕심은 또 다른-더 많은, 더 깊은-욕심을 낳게 해서 계속해서 커지면 커지지 줄어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욕심은 채울 수가 없으니 괴롭기가 그지없다.

불교가 말하는 인간의 여덟 가지 고통, 즉 팔고(八苦)에도 욕심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면 그게 고통이다'라고 하는 게 그것이다. 이렇게 욕심은 한없는 고통 제조기라 할 수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인 사성제에도 어김없이 욕망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인생 자체가 고통인데 그 고통의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집착이라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 집착만 버리면 고통도 끝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집착과 욕망 의 근저에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자의식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의식이 남아 있는 한 인간은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따라서 불교-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의 마지막 목표는 이 자아의식을 제거하는 데에 있다.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아놀드 토인비는 종교의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정의하기를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극복'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은 타락이 아닌 (고뇌에 찬) 진화의 모습

그런데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 사건을 인간의 타락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끝없는 고통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는 의미에서는 타락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타락이라는 어휘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내가 보기에 타락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심대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우선 에덴 동산이라는 곳이 정말로 낙원이었나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상태가 어떻다고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 상태를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에덴 동산이 낙원인가 아닌가에 대한 것은 사람이 주관적인 입장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는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누누이 지적했다시피 그들은 아직 주객관이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라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판단을 전혀 내리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낙원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전혀 없다. 게다가 그들은 아직 낙원은 좋은 곳이고 지옥은 나쁜 곳이라는 이원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아직 선과 악이라는 이원적인 개념을 구별해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태를 진정 낙원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들에게는 그저 낙원도 낙원이 아닌 것도 아닌 '혼몽'의 상태 아닐까 싶다.

여기에 대한 이해가 어려우면 아기들을 연상하면 된다. 엄마 품속에 있는 아기들이 거기가 낙원인지 지옥인지 어찌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 다음으로 지적할 수 있는 요건은 앞의 것과 직결되어 있다. 이 점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윌버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그는 《아트만 프로젝트》4)라는 자신의 저서 1996년 판(초판은 1980년) 서문에서 이 점과 관계해서 실로 날카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4) 이 책의 제목은 말 그대로 'Atman Project'이다. 굳이 번역하면 '아트만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윌버에 따르면 이 온 우주의 역사는 아트만이라는 대령(大靈, Sprit)이 스스로를 구현해 나아감에 따라 진화해가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이다. 이 점은 떼이야르 드 샤르댕 신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역사는 모든 인간이 신과 하나가 되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간다는 주장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윌버 책을 이미 두 권이나 번역한 조효남 교수가 이 책의 제목을 '아트만 투사'라고 번역한 것이다. 투사는 preject가 아니라 projection인데 조 교수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윌버에 의하면 인간의 진화 과정에 대한 낭만주의적(romantic) 견해는 인간이 원래 신과 하나인 지고의 상태에 있다가 거기에서 타락을 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정이다. 그 다음 단계는 원래의 상태를 회복해서 신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야 인간의 진화는 끝이 난다. 이런 모습은 대부분의 신화에도 나타난다. 인간은 최초에 신과 같이 있으면서 낙원에 있다가 실수로-혹은 죄를 짓고-신에게서 격리되어 인간계로 떨어진다. 그런 인간을 불쌍히 여겨 신은 구세주를 보내 인간을 구한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 구세주로는 무당이 그 역할을 맡게 된다.

이 과정에 대해 윌버는 첫 번째 과정에 대한 묘사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자신도 이전에는 낭만주의적 견해를 무비판적으로 따랐는데 최근에 와서 잘못된 점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 견해에서 잘못된 점은 첫 번째 단계를 낙원이라고 묘사한 것이 다.

낭만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의식하지 못하는 천당(unconscious heaven)'으로 시작해 '의식하는 지옥(conscious hell)'을 거쳐 '의식하는 천당(conscious heaven)'의 순서로 진화한다고 한다.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자의식이 생기기 전에는-대략 두 살 전에-아담과 이브가 에덴이라는 낙원에 살았듯이 천당에 살지만 의식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타락하면 그 낙원의 상태에서 쫓겨나가게 되고 당사자들은 자신이 지옥에 들게 된 것을 알게 된다. 이때가 지옥 단계라는 것은 앞에서 익히 설명했으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당사자가 신(혹은 절대적 실재)과 재결합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천당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이 절대적 실재와 재결합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의식하는 천당'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첫 번째 상태이다. 이 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다. 두 번째 단계로 도약하는 준비 단계로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단계는 두 번째 단계보다 하위의 단계이지 그보다 수준이 더 높은 단계가 될 수는 없다. 이 단계는 앞에서 본 것처럼 아직 주객이 분리가 안 된 하위의 단계이다. 이런 단계가 낙원일 수는 없다(낙원이라고 느낄 수 있는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낙원도 지옥도 아닌 그저 몽환 같은 상태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굳이 말한다면 지옥의 단계인 두 번째 단계로 간다는 의미에서 이 첫째 단계도 지옥의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단 의식하지 못하는 지옥의 단계이다. 따라서 이것을 윌버는 '의식하지 못하는 지옥(unconscious hell)'로 불렀던 것이다. 천당이라는 것은 주관과 객관이 한번 분리된 다음에 수준 높은 차원에서 결합될 때 만들어지는 것이지 주객이 나뉘어지지도 않은 상태는 참담한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리라.

윌버는 자신 있게 세상에 있는 모든 특수자(particular)-즉 모든 사물-는 그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절대적) 실재와 떨어져 있는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항상 그 실재와 하나가 되어(union)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게 절대적 실재와 떨어져서는 어떤 사물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재의 근원이 없이는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그 다음에 남은 일은 그 결합 상태를 의식하느냐 의식하지 못하느냐와 같은 두 가지 경우의 수만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미 윤회의 세계라는 생사고해(삼사라)로 들어오는 것이지 낙원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아기들은 자신이 삼사라에 태어났다는 것을 모를 뿐이다. 그런데 아기들은 왜 이리 평온할까?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마치 그들이 천당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할까? 여기에 대해 윌버의 생생한 말을 들어보자.

아기의 자아는 상대적으로 볼 때 평화스럽다. 그것은 그가 천당에 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지옥불을 기억할 만큼의 충분한 인지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기는 가장 확실하게 삼사라의 세계에 침몰되어 있다. 다만 모를 뿐이고 충분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 깨달음이란 결코 이런 유아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5) 윌버(1996) 『아트만 프로젝트-인간 발달의 초개인적 관점』(초판은 1980), 퀘스트 출판사(Quest Books), p. xi.


인간은 태어나면 삶과 죽음이 횡행하는 윤회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지 그것을 모두 초월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난 현실은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라고 하는 것이다. 윌버는 이 상태를 두고 아무 감각이 없는 '동상(凍傷)의 상태'로 비유하고 있는데 탁월한 해석으로 생각된다. 6) 윌버, 『모든 것의 역사』, p. 278.

이해를 돕기 위해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자. 우리는 위에서 말한 세 단계 가운데 첫 번째 단계를 전인격적(pre-personal) 혹은 전자아적 단계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아직 자아의식이 태동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pre)'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아가 없다는 의미에서 몰(沒)자아적 단계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두 번째 단계는 '전'이 빠진 그냥 인격적(personal) 혹은 자아적 단계이다.

드디어 개인이 탄생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인간들은 바로 이 단계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위에서 본 것처럼 죽음과 욕심 등 수많은 인간의 일들이 예서 벌어진다. 인간은 여기에서 나름대로 문제를 풀어보려고-다른 표현으로 하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라고 해도 좋고 혹은 '궁극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고 해도 좋다- 온갖 일을 한다. 돈과 권력과 이성 등의 탐구를 통해서 수많은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본 것처럼 이러 시도는 모두 무위로 끝나고 만다. 그래서 이 생의 모든 것은 허무하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허무로 끝나고 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에게는 그 다음 단계가 있다. 이름하여 초인격적 (trans-personal), 혹은 초자아적 단계이다. 7) 이 단계들은 다른 용어로도 표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잠재의식적인(subconscious) 단계부터 자의식적인(self-conscious)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초의식적인(superconscious) 단계로 나누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세 번째 단계야말로 인간이 가야 하는 마지막 종착역이다. 이곳은 인격적 단계에서 풀 수 없었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는 단계이다. 인격적 단계에서 생겼던 모든 문제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자의식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 자의식을 초월하면 모든 문제가 풀릴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바로 이 영역으로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까지 가지 않는 한 인생에는 그 어떤 것도 의미 있는 일이란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루어야 한다. 아직 이 두 번째 단계에 대해서 할 말이 남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두 번째 단계로 돌입하는 것은 결코 타락이 아니다. 비록 너무나 힘들고 엄청난 고뇌의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지만 이 단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면 인생의 종착역이라 할 수 있는 초인격적 영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두 번째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예외적인 일이 일어나도 전인격적 단계에서 초인격적 단계로 월반해서 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아직 자기에 대해 눈도 뜨지 않은 유아가 도인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자아를 초월한 단계라는 제 3단계의 입장에서 보면 자아를 초월하는 게 가능하려면 초월할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1단계에서는 자아(의식)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월할 대상도 없다.

초월할 대상인 자아가 생기는 것은 2단계에서이다. 따라서 1단계에서 바로 3단계로 넘어가는 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하지 않고 반드시 2단계를 거쳐 가야 한다. 이런 순서로 발달하고 진화하는 것은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사실이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이 신화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언급해야 할 사항은 인간 발달 단계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이다. 한번 진화하면 다시는 그 이전 단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거의 대부분의 인류는-영아들은 제외하고-제 2단계에 속해 있다. 8) 거의 대부분이라고 한 것은 제 3단계에 들어간 인류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깨달음의 임계점을 통과한 인류는 매우 한정되어 있지만 이전 시대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인류들이 3단계 가까운 쪽에서 그쪽으로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는 이전 단계인 1단계로 돌아갈 수 없다. 다시 동물의 상태나 영아의 상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퇴행이라는 병적인 체험도 아무리 강도가 강해봐야 2단계 안에서의 퇴행이지 그 전단계까지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 되었으면 끝까지 인간이지 다시 동물의 상태로 내려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의 포기가 된다.

이렇게 우리가 다시는 전 단계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아담과 이브 신화의 기자도 알아챘던 것 같다. 이 신화에서는 두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뒤 신은 동산의 동쪽에 날개 달린 존재-아마도 천사일 듯-를 세워놓고 '빙빙 도는 불칼'을 들게 해 생명의 나무로 이르는 길을 지키게 했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화의 기자는 에덴을 낙원으로 생각하고 죄인인 아담과 이브에게 벌로써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하게 이런 조치를 했다고 썼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어떻든 두 사람이 에덴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기정의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 다음 단계로 향하는 일뿐이다. 유아 때의 상태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사실은 좋다는 것도 알 수 없지만-인간은 절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이는 천사들이 불칼을 들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자궁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듯이 진화의 발전 과정은 거슬릴 수 없기 때문이다.

3) 인간 진화의 마지막 단계인 초인격적 단계에 대해

이제 인간은 인간 진화의 종착점인 제 3단계까지 왔다. 인생을 앞에서 본 것처럼 3 단계로 설정하는 데에 동의한다면 인간이 갈 길은 마지막 단계로 진입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다. 그러면 이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세계의 거의 대부분의 종교들은 이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 공통적으로 사랑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명상법을 고안해내 인류들이 이 단계로 들어가는 것을 돕고 있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사랑이란 한 마디로 자기희생이자 자기포기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자기 개아성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자기를 내세우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분석할 때 모든 문제는 자기로 응결됐는데 그렇다면 해결은 자기를 소멸시키는 데에서 찾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가능할지 모른다. 나라는 의식이 없어지면, 다시 말해 내가 없다면 이 세상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울러 내가 없는데 누가 그 궁극적인 행복을 맛본단 말인가와 같은 질문 말이다.

그런데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 초의식의 상태에서 자의식이 단순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론하고 있는 이 세 번째 단계는 그 앞에 있는 단계들을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상위의 과정으로서 포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상태가 바로 앞 단계인 자의식 단계를 포괄하고 있다면 이것은 이 단계에도 자의식이 남아있다고 볼 수는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의식적인 단계와 그것을 초월하는 상태가 공존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3 단계의 특징은 이와 같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1 단계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적지 않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의식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1단계의 몰아적인 경지와 3단계의 초아적인 경지를 혼동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는 위에서 본 것처럼 에덴 동산을 인류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로 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단계와 3단계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3단계는 앞의 1, 2 단계를 모두 융섭하고 있는 반면 1단계는 1단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3단계는 자아의식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서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자아의식이 있으면서 어떻게 그것을 초월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 가능할 게다. 다시 말해 이 두 상태는 이원론적인 논리의 입장에서는 양립할 수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적확한 지적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세 번째 단계인 초월의 영역에서는 두 번째 단계에서 통용되는 논리 외에 그것을 넘어서는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다. 2단계에서 이원론적인(dualistic) 논리가 통용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그런데 3단계에서는 이 이원론적인 논리 외에 비이원론적인(non-dualisitc) 혹은 초이론적인(trans-dualistic) 논리가 통용될 수 있다. 이 논리를 따르면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이 양립할 수 있다. 그래서 자아의식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아의식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존 종교에서 말하는 초월적 단계에 대한 몇몇의 묘사

기존 종교에서 이런 경지를 묘사하는 문건들은 대단히 많아 다 인용하기가 힘들 지경이다. 대표적인 것을 하나 들어보자. 불교의 『금강경』을 보면 그 핵심 개념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즉 '응하되 마음을 한 군데에 두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는 것이 있다. 이 문장에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적혀 있다. 우리가 마음을 내려면, 즉 생각을 하려면 일정한 하나의 관점 혹은 시각에서 생각을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시작하면 이미 그것은 편벽된 것이다. 한 시각에 치우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잠잘 때조차 꿈속에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인간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일단 죽었을 때 빼고는 그런 경우를 찾을 수 없을 게다. 그러나 선불교에서 말하듯이 한 생각만이라도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미 보편성은 떨어지게 된다. 한 견해에 주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은 하되 어떤 견해에도 안착하지 말고 보편의 입장에서 하라는 것이다. 이런 양립할 수 없는 견해가 같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제 3단계이다.

그런데 이 제3단계를 묘사할 때 가장 대중적인 구분은 불교를 비롯한 인도 종교에서 말하는 유상삼매와 무상삼매의 구분이 아닌가 한다. 삼매란 주지하다시피 자기를 초월한 망아경 상태로 제3단계에서 주로 발견되는 상태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단계가 있단다. 먼저 유상삼매는 아직 이미지 같은 것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러니까 일정한 상이 남아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 대상이 붓다가 되든 신이 되든 수련가의 뇌리 속에는 외부의 대상에 대한 일정한 이미지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궁극의 상태가 아니다. 외부의 것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원인적인(causal) 데로 들어가면 아무 것도 안 남는 상태가 도래한다. 외부 대상에 대한 이미지나 자기 마음속에 있는 어떤 경미한 생각이나 관념도 여기서는 남아나지 못한다. 그야말로 완전 공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절대의 상태가 될 수 있다. 같은 단계에 대한 묘사는 이어진다.

인도에서는 샹카라가 중심이 된 불이론적인(아드베이타) 베단타 (Advaita Vedanta) 사상이나 대승불교의 가장 저명한 사상가인 나가르쥬나가 설파한 중도 사상에서도 같은 경지가 설명됐다. 같은 불교전통에 속하는 화엄종이나 천태종, 그리고 선불교, 위빠사나 같은 지파 불교전통들에서도 같은 지경에 대한 언급이 종종 발견된다. 반면 기독교나 유대교, 이슬람교 전통에서는 신비주의 사상가들만이 같은 내용을 이야기한다. 아울러 서양 철학에서는 플로티누스가 중심이 된 신플라톤주의가 대표적으로 이 제 3단계에 대해 언급을 했다.

그리고 이 단계를 묘사하는 용어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공을 빼놓을 수 없는데 공은 불교에서 가장 좋아했던 용어이다. 그런가 하면 불교의 법신불 사상도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유신론에서는 이것을 (절대)신성(神性, Godhead)9)이라 말하는데 힌두교에서는 아무 상이 없다는 의미에서 니르구나 브라만이라고 부른다.  9) 이에 대해 폴 틸리히는 신을 넘어선 신(God beyond God)이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신을 넘어서 있는 신이 진정한 신이라는 뜻일 게다.

물론 중국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였던 도(道)라는 용어도 간과할 수 없다. 지금까지 본 용어들은 벌써 몇 천 년을 두고 쓴 것이라 진부하게 들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일 것이다. 이에 비해 윌버는 같은 것에 대해 이해하기 쉬운 현대적 용어로 풀이한다. 우선 이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그 어떤 것을 윌버는 '기본 형상'이라고 풀었다. 다음은 이 형상에 대한 그의 설명이다.

그러한 '형상'은, "원초의 패턴" 혹은 "일차적인 주형(primary mold)을 의미하는 용어인 실제적인 원형입니다. 하위적인 모든 빛들이 그것의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참 광명이 있고, 하위적인 모든 환희가 그것의 빈혈기 있는 모방에 지나지 않는 지복(Bliss)이 있고, 하위적인 모든 인지가 단지 그것의 반사에 지나지 않는 궁극의 '의식'(Consciousness)이 있고 더 하위적인 소리가 그것의 얄팍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원초적인 소리(Sound)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진정한 원형입니다. 10) 윌버, 『모든 것의 역사』, p.356. 번역이 매끄럽지 않지만 번역자의 번역을 그대로 따랐다.



글을 끝내면서

지금까지 우리는 종교가 무엇인가에 대해 오랜 시간을 탐구해보았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 우리는 종교란 인간이 자기의식이 생긴 뒤 그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종교라고 불리는 인간의 독특한 범주의 행위는 세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 그것을 원초의 패턴이라 부르든 일차적인 주형이라 부르든, 혹은 궁극의 의식이라 하든 원초적인 소리라 하든 그 '기본 형상'에 도달-아니 '도달'이라는 말도 적합한 게 아니다-하기 위해 하는 인간의 행위를 통칭해서 부르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따라서 무슨 종교를 갖든 그것은 아무 상관 없다. 그리고 어떤 종교가 더 진리성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도 의미가 없다. 위의 시각만 갖고 있다면 어떤 종교적인 길을 가든 그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위의 시각을 갖지 않는다면 특정한 종교를 아무리 열심히 믿는다 해도 그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다. 방향이 애초부터 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불교는 이러한 시각에 충실한 종교로 생각된다. 게다가 불교는 종교로서는 갖추기 힘든 자기 부정(혹은 초월) 기제(self negating 혹은 trascending mechanism)까지 갖추고 있는 대단히 훌륭한 가르침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인생이 자아 초월에서 완성된다면 종교 역시 스스로를 초월할 때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종교의 본령은 그 종교마저 초월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위대하게 보일지라도 우리 인간들을 위에서 제시한 궁극의 경지로만 끌고 가면 그 다음에는 버려야 할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면을 붓다는 뗏목의 비유로 일찌감치 설파해 놓았다. 반면에 유신론적인 종교들은 교리 상 그 종교마저 넘어서는 것을 대단히 힘들게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유신론적인 종교에서는 종교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위해서 있는 형국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종교를 어떻게 택해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는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

이렇게 훌륭한 가르침인 불교를 택하더라도 유신론적 종교를 믿는 것처럼 종교 자체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신앙이라 할 수 있고 유신론을 믿어도 그 도그마에서 자유롭다면 제대로 신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는 것으로 이 생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떤 종교이든 그를 궁극의 세계로 인도해줄 것이다.

최준식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국제한국학회장, 한국문화표현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콜라독립을 넘어서》《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유네스코가 보호하는 우리 문화유산 열두 가지》(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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