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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30 (19:06) from 129.206.196.55' of 129.206.196.55' Article Number :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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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철학과 환경윤리




생태철학과 환경윤리  
구승회 /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교수




Ⅰ. 생태철학 :자연형이상학에서 자연미학으로

지금까지 이성철학의 역사는 자연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연 지배의 변증법적 과정이었다. 생태철학의 주된 과제는 주관철학, 인식철학을 비판하고, 나아가서 이성중심적 자연형이상학logoszentrischer Naturmetaphysik을 해체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이 자연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이성이나 정신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몸-중심적, 미학적으로 접근한다. 이성철학이 자연에 대하여 개념적으로 관계하였다면, 생태철학은 나Ich의 해방을 통해 자연 속에 몸구속적인 나를 자리잡게 한다.

1.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태도로서의 환경미학

영미의 철학적 전통에서 자연 및 환경에 대한 미학적 관심은 1960년대 말 환경문제가 부각되면서 실천적인 미학연구의 주제로 부상하였다. 이 시기에 환경미학은 미학, 심리학, 조경학, 건축학, 지리학 등 여러 분야에서 연구되어 왔는데, 자연경관의 미학landscape aesthetics이라는 용어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환경미학과 자연경관의 미학은 엄격히 구분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환경미학은 주로 미학, 예술철학, 환경심리학에서 다루어졌으며, 자연경관의 미학은 지리학, 조경학, 건축학 분야에서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태도에 기초하고 있으며, 자연감상을 어떻게 기술할beschreiben 것인가에 주목한다. 아놀드 벌리언트의 기술미학descriptive aesthetics은 바로 그런 관심의 전형적인 예이다.

환경미학은 자연물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소수의 그리스 문학작품을 제외하고, 그리스 철학 대부분은 미를 사고의 대상과 연관시켰지, 물질적인 대상과 연관시키지 않았다. 자연에 대한 사랑이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태도와 양립 가능한 전통 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암암리에 과학과 예술의 공존가능성이라는 원칙을 깔고 있다. 예를 들면 19세기에 미국 사람들이 옐로스톤이나 요세미티 지역을 국립공원으로 만들었던 이유는 단순히 그 지역 자연경관의 ‘숭고·장엄함’, ‘흥미로움’,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동물보호의 유용성, 생물·생태학적 정당성, 지질학적 관심 따위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당시의 공원화계획안에 보면 공원을 과학과 예술의 연습·실습장으로 간주하려는 의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2. ‘몸의 선험성’과 생태학적 자연미학

(1) 생태학적 자연미학은 자연의 감성적 인식가능 근거를 문제삼는다는 점에서 위에서 논의한 환경미학과는 다른 문제영역이다. 생태학적 자연미학은 예술을 지식의 유형으로 정초할 수 있느냐를 문제삼는다. 환경미학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실천적 정향을 규범적으로 다루는 데 반해서 생태학적 자연미학은 자연경험의 인식가능조건에 대한 인식론적 근거설정, 말하자면 자연미학은 ‘새로운 자연철학’의 일부로서 자연인식론이다. 사실 자연철학은 지난 19세기에 물리학의 철학으로 변질되면서 자연에 대한 철학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철학(과학철학)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내가 새로운 자연철학이라고 수식하는 이유는 자연철학이 그 고유한 철학에서 자연인식론으로 전환되어야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2) 생태학적 자연미학은 ‘분단된 자연철학/미학(예술이론)’의 관계를 복원, 통일시키려는 시도이다. 사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자연환경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철학과 미학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자연)환경에 의해 규정되고, 그것에 의해 존재한다. 자연환경이 급속하게 변화된 세상에서 ‘인간의 자기규정 역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인이 바라보던 자연은 오늘날 그 어디에도 없다. 한마디로 자연은 저만큼 멀어지고 있는데, 인간은 여전히 ‘근대적 정신으로 자연을 관조theoria’하는 것이다. 더욱 아이러니인 것은 멀어지는 자연과 함께 인간의 몸 역시 주체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술이론으로서의 미학은 대상세계의 미적 본질을 물을 것이 아니라,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자연철학 본래의 물음과 더불어 ‘생태학적 자연미’의 자기규정으로 돌아와야 한다.

(3) 이성중심적 예술철학은 자연을 이해함에 있어서 마치 몸Leib이 없는, 정신(이성)으로만 마주 대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예술은 늘 인공자연ku?stliche Natur만을 문제삼아 왔다. 자연이해에 기술이 개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미학은 자연인식에서 ‘몸의 선험성’을 선취하는 것이다. 외적 자연이해의 눈부신 진보에도 불구하고, 내적 자연으로서 우리의 몸에 대한 이해는 ‘감성적 인식’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한마디로 몸에 의한 자연이해 기술이다. 생태계 위기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과학적, 실증적으로 설명되고 예술철학으로 해석된 자연이 아니다. 자연이 ‘어떻게, 왜 그렇게 있는가?’에 대한 감성적 수용이다.

자연에 대한 과학철학적 접근은 인식을 매개로 이루어지며, 이는 자연철학으로 나아가게 하는 반면 생태철학적 접근은 ‘몸의 선험성’을 매개로 이루어지며, 이는 생태학적 자연미학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자연에 대한 ‘감성적 인식원리가 이성적 인식원리를 대신’하는 곳에서, 새로운 자연과의 연대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생태학적 자연미학은 자연과의 연대성을 이루는’ 새로운 코드이다.

3. 생태학적 자연미학의 과제

자연의 도덕화
인간은 자연세계에 속하면서도 어떻게 우주 안에서 고유한 특별한 지위를 누리는가?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직 인간만이 자연의 원리를 통찰할 수 있는 존재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연을 초월하는 자연의 타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자연scho?e Natur이 아니라, 좋은 자연gute Natur에 주목함으로써 인간의 고유한 지위는 정당화될 것이다. 결국 생태학적 자연미학은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말처럼 자연을 도덕화Moralisierung der Natur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자연은 필연적으로 주체를 산출한다. 이러한 사실은 오직 선험철학적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주체는 그 이면의 근거가 파헤쳐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이미 경험적인 것을 넘어선다. 경험적인 것, 즉 자연은 주체 안에 자신의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이 주체성은 자연으로부터 산출된 우리의 주체성이 아니라, 절대적이며, 이상적인 주체성이라는 사실이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런 주체성은 자연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자연은 유기체적이며, 정신적인 세계로 자신을 순화시킬 수 있으며, 또 그래야 한다. 이런 식으로 칸트 윤리학을 수정함으로써 자연 역시 윤리적 의무의 대상임을 논증할 수 있다. 이 결론은 자연은 이념적 구조에 관여한다는 사실에서 도출된다. 즉 자연은 가치를 실현하며, 이 가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한,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육체적 참여와 ‘나’의 해방
하이데거는 근대철학을 존재사의 관점에서 주체의-자아-강화-과정으로 해석한 바 있다. 근대철학사는 존재론, 목적론이라는 형이상학에 주어져 있던 존재망각Seinsvergessenheit이 극단화되던 시기였다. 모더니티는 자연지배에의 노력, 인간의 교육, 삶의 방식의 합리화, 그리고 사회의 국가화로 규정되는 시대 정신이다. 불안을 만들어내는 억측들, 생존을 위협하는 욕망, 현실을 왜곡하는 환상, 그리고 제한된 자연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필연성… 이 모든 것은 이성적 인간의 생산을 불가피하게 했다.

이성은 이성과 다른 것은 무조건 비합리화하고,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주어진다. 그래서 새로운 자연철학(생태철학)의 과제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계, 그리고 인간으로서 자신을 새로이 획득하는 일, 즉 사고 자체에 대해 사고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정적인 것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향해 반사되기 때문에 의식은 반성의 산물이다. 육체를 가진 나는 현실과 사회의 내적 재현으로 등장한다. 이성의 통제 때문에 나타나는 욕구나 사고 따위는 현실적-사회적 개념규정에 따라 진위·선악이 검증된다.

이 검증절차는 객관성, 논리성, 도덕성, 한마디로 이성에 관련된다. 그런데 이런 검증을 유발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육체적-감성적-영적 자극’에 의해서이다. 이런 자극을 왜곡하지 않은 채 보존하기만 하면 나의 육체적-감성적-영적 자아로부터 “나의 것”을 양도받는다. 그렇지 않은 경우 자극은 억압된다. 결국 현실과 사회라는 울타리는 더 이상 육체의 의식화가 아니라, 내적 통제의 계기로 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발상의 전환은 새롭게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프로이드와 니체가 시도한 바 있다.

우주론적 자연에서 생리학적 자연으로
생태철학은 자연을 거대하고 무한한, 즉 우주론적인 것이 아닌 생리학적인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이성철학은 우주의 무한함과 동일하게 자연을 대해왔다. 자연이 우주론적으로 이해됨으로써 무한정한 대자연 행위가능성을 믿었으며, 무한히 확대될 수 있다는 관념에 젖어, 무한한 우주에서 결핍과 유한한 것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이런 우주 내에서 인간의 기술-고착적인 행위의 부작용들은 언제든 추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생태철학은 자연을 유한하고, 일회적인 것으로 본다.

인간이 사는 생명의 공간(생태계)은 너무나 비좁다. 유기체인 인간은 생리학이나 실제적인 신진대사를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 우리는 공상과학의 우물 속에서 혹성, 은하계 왕국이라는 거대 공간의 정복자인 양 의욕해 볼 수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는 여전히 아주 제한적인 조건에 구속되어 있는 사소한 유기체임을 벗어버리지 못한다.

자연을 생리학적으로psysiologische Natur 이해할 경우, 인간 행위의 결과가 유기체의 번성에 필요한 환경적 조건을 어느 정도 온전히 할 것인지에 따라 자연 활용의 정도가 결정된다. 이로써 우리는 자연이 역사의 주체인 인간에게 언제나 적절한 위치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숙주를 죽이는 기생충처럼 자연을 대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생리학적 자연은 활용 가능한 생활공간, 생활수단의 유한성, 유기체적인 생존조건의 제한을 가진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마실 물, 숨쉴 공기 등 생명체에게 결정적인 요소들의 오염이 目前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과학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유독 물질이나 유해 물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며,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욱 민감하게 되었다. 생태철학은 자연을 이성적 기준에 맞게 변형시키라고 요청하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관계를 변화시키라고 말한다.


Ⅱ. 환경윤리: 자연보존과 생명존중의 마지막 근거

인간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 및 무생물의 자연에 대해 일정한 태도와 관계를 갖는다. 그것을 생명관, 혹은 자연관이라 부른다. 환경윤리는 생물학의 한 분야인 생태학에 관한 철학(윤리학)이 아니라, “생태계 위기, 환경 파괴에 직면한 인류가 생명가치, 자연물의 가치를 고양할 수 있는 환경친화적, 생태지향적인 규범 설정 및 그 가능성과 타당성을 탐구하는 윤리학의 한 분야”로서, “기왕의 규범적 이론과 원칙을 확대하여 동물보호, 자연보호, 환경보호의 원칙을 세우고, 나아가서 올바른 환경윤리적 의사결정을 위한 환경윤리교육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가는 새로운 연구 영역”이다.

환경윤리라는 말은 60년대 말에 등장하였다. 이 무렵 미국의 각 대학에서는 실용교육 운동가들의 주도하에 교육과정 개정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그동안 단순히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의 대학 밖의 논의가 아카데믹한 차원의 논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간의 연구성과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는 환경윤리학의 4가지 입장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인간중심주의, 의식중심주의, 생명(생물)중심주의, 전체론이 그것이다. 이런 입장 차이는 “도덕적 주체는 누구인가?”, “인간은 자연계의 어디까지 도덕적으로 배려해야 하는가?”, “도덕적 의무가 없는 존재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상이한 태도로 나타나지만, 그러나 이들 네 입장이 서로 넘을 수 없는 분명한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 환경윤리 연구는 그동안 자명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도덕적 전통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환경문제의 근본 원인은 서구의 종교적 신념, 특히 유대-기독교적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연을 착취의 대상으로 본 17세기 이후의 자연관, 특히 데카르트와 베이컨으로 대표되는 ‘재구성된 자연개념’ 때문이라는 비판적인 태도를 불러 일으켰다. 초기의 환경운동가, 환경윤리학자들은 기독교, 근세 자연관, 그리고 그 적용인 과학·기술적 지식, 진보이념에 대한 비판이 환경운동과 환경윤리의 이념적 기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통을 무시하고는 어떤 바람직한 윤리도 주장할 수도, 성립될 수도 없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 환경윤리는 전통에 대한 반성을 통한 ‘반성적 평형’을 이루려는 노력으로 발전하고 있다. 린 화이트Lynn White Jr.의 기독교 비판은 일면적인 것으로 수용될 수 없으며, “너희들은 대지를 지배하라”는 베이컨의 창조의 계율은 자연적인 인과관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으로 자연을 인간의 목적에 ‘유용하게 활용한다’는 의미이다. 또 진보이념과 과학·기술은 인류에게 위험을 주기도 하지만, 새로운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마지막으로 그간의 환경윤리 연구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환경적, 생태학적 갈등상황을 매개하는 마지막 근거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歐美에서나 한국에서나 환경윤리보다는 환경운동이 먼저 시작되었다. 환경운동이 지배적이던 시기에 사람들은 환경문제를 산업과 상품소비에 따르는 단순한 공해문제로 인식했다. 그래서 공해추방운동, 자연보호운동이 주로 논의되었는데, 환경문제에 대한 철학적 반성은 환경친화적 행위, 생태지향적 행위의 정당화 근거를 마련했다.

동강댐 건설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동강과 어라연 계곡을 보존하는 것이 ‘더 좋으냐’, 아니면 수몰시키는 대신에 홍수를 통제하고, 전기를 만들고, 농업·공업용수를 많이 공급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냐’하는 문제로 압축된다. 사실 심리적이고, 미적인 가치를 다른 산술적 가치와 비교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어라연 계곡을 그대로 보존하여 1백년, 1천년 후의 후손들이 그 빼어난 경관을 감상하게 하고, 그곳에 다양한 생물종이 계속 살게 하는 것이 좋은지, 전기를 만들어 후손들이 충분한 에너지를 마음껏 쓰게 하고, 서울사람들이 홍수의 걱정 없이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 자연-미적 경험을 벌충할 수 있을 것인지는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 자연관의 문제이다.

개발이냐 보존이냐의 논쟁에서 그 이유가 자연과학적/기술적이든, 환경적/미학적이든 간에, 결국 ‘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으면 그 마지막 대답은 언제나 ‘윤리적 정당화’에 기초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 종의 다양성은 보존되어야 한다’, ‘인간은 긴급한 필요가 아니면 자연을 마음대로 변형시켜서는 안 된다’는 당위는 일단은 과학적·기술적 연구성과를 빌어 주장되지만, 과학적·기술적 지식만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고, 윤리학적인 반성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환경윤리는 자연과학적, 기술적 지식에 의해 촉발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계, 자연계 상호간의 갈등을 최종적으로 정당화해 주는 환경친화적 행위지침이다.



http://emerge.joins.com/200205/200205_08.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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