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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0/05 (01:22)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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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 위기와 성서신학적 반성
생태계 위기와 성서신학적 반성


김창락
 
Ⅰ. 제3의 물음 "아담아, 자연은 어디 있느냐?"
Ⅱ. 생태학적 위기

Ⅲ. 자연 파괴의 원인

Ⅳ. 성서의 자연관

Ⅴ. 맺음말

Ⅰ. 세 번째 물음: "아담아, 자연은 어디 있느냐?"
첫 사람이 최초로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던지신 물음은 "아담아, 네 가 어디 있느냐?"였다. 인류의 원죄라고 부르는 최초의 범죄는 에덴 동산 한가운 데 있는 한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 행위였 다. 왜냐 하면 그 나무의 실과는 따먹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금령을 거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죄는 하나님에 대한 범죄였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 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범죄 행위는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가 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물의 하나 - 선악과 - 를 매개로 하여 행해졌다 는 사실이다. 하와가 손을 뻗어 선악과에 닿게 하기 이전에 그녀의 마음속에 이 미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나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과 같은 정신적 죄가 작동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는 이 정신적 범죄를 상 징적으로 나타내는 구상적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원죄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성서는 원죄의 발생을 창조 이야 기의 맥락에서 서술했다. 창조 이야기에서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나누는 이분 법이 없었다. 따라서 범죄를 정신적 범죄와 육체적 범죄 따위로 구별하는 있을 수 없었다. 원죄를 정신적 범죄로 환원시키는 것은 창조 세계를 무화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원죄를 순전히 정신적 범죄로 보는 경우에는 선악과 나무 의 실체성도 결국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 간을 그의 창조 세계의 한 자락인 에덴 동산에 두어 살아가게 하셨다. 에덴 동산 은 인간이 살아 갈 삶의 공간이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드러나는 무대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유지되느냐 파괴되느냐 하는 문제는 인간이 창조 세계 안에서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먹고사는 동안은 하나님과 평화로 운 관계가 유지되었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에 범죄가 실행되었 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는 장소도 여전히 범죄가 행 해졌던 바로 그 동산이었다. 연극이 오직 무대 위에서 펼쳐지듯이 인간이 행하는 모든 활동은 이 땅이라고 하는 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하 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가 파괴되는 것을 뜻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의 관계 단절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파괴했다. 인간이 범한 그 처음 범죄의 결과는 한 몸이 되도록 만들어진 남자와 여자가 이제는 주객으로 분열되는 현상을 일으켰다. 범죄 하기 이전에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주객 분열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둘이지만 한 몸이 었다. 그러나 범죄가 행해 졌을 때 그들은 나와 그것(I and it, 주체와 객체)으 로 분열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각각 상대편을 '당신'으로 마주 하지 아니하고 그 남자, 그 여자로 맞서게 되었다. 그들 사이에 '나-너'이라는 인격적 관계가 파괴되 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이제 부끄러움이 개재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은 "아담 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셨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방향 설정에 관련된 근본적인 물음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파괴되고 난 후에 인간이 범 한 첫 범죄는 살인 행위로 나타났다.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살해했다. 왜 인간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범죄 행위가 살인 행위로 대표되었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 의 생명을 강탈하는 살인 행위는 인간 사이의 모든 범죄 중에 가장 극악한 범죄 이다. 인간 사이의 최초의 범죄 행위를 살인 행위로 대표한 것은 인간이 인간에 게 가하는 범행은 크고 작고 간에 모두 살인 행위에 해당할 만큼 끔찍한 것이라 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살인 행위가 형제 살인으 로 나타난 것은 비록 낯모르는 사람에게 가하는 살인 행위도 결국 형제를 살인하 는 행위임을 폭로하기 위함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게 하나 님이 던지신 물음은 "가인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타 락한 인류에게 던지시는 두 번째 물음이다. 타락한 인간이 연출하는 인류의 역사 는 범죄의 역사였다. 그런데 그것은 주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해악으로 구성되었다. 이 경우에 하나님은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가해자의 책임을 추궁하 신다. 공존, 연대, 협동이라는 인간의 본래적 관계는 범죄로 말미암아 약육강식의 적대적 관계로 왜곡되었다.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지금까지 인간이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과제였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는 물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원초적 관 계를 문제삼는 물음이며 "가인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인간과 인 간 사이의 수평적 윤리적 관계를 문제삼는 물음이다. 이 두 물음은 인간이 인간으 로서 바로 서기 위하여 매달려야 할 두 축이다. 지금까지 성서와 기독교는 이 두 물음만을 종교의 핵심 문제로 다루었을 뿐이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인류는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되 었다. 그것은 과거에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위기이다. 인간은 자연 환경의 무 제약적인 급속한 파괴로 말미암아 발생한 생태계의 파괴 현상에 직면하여 이제 그 생존이 위협 당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대의 예언자는 이제 하나님 이 인류를 향하여 던지시는 세 번째 물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 아, 자연은 어디 있느냐?"는 물음이다. "가인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는 물음 에 대하여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반문은 그의 무책임성을 폭로 한 것이다. "인간아, 자연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오늘날의 인간이 "내 가 자연을 지키는 자입니까?" 라고 반문한다면 그것은 가인의 뻔뻔스러움과 다름 이 없다고 할 것이다..

오늘날 진보적인 신학계에서 자연 문제를 주요 관심사로 부각시키는 것은 환영 할 만한 일이다. 왜냐 하면 신학은 시대의 당면 문제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 다. 그들은 자연이니 생태계 보전이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 성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들은 10계명에다가 "자연을 파괴하지 말라"는 제11 계명이 새로이 첨가되어야 한다는 재치 있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1] 오늘날 인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종교적 문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윤리적 문제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생태론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과제 를 강조하는 나머지 지금까지 성서의 중심적 주제였던 두 가지 문제가 세 번째 문제로 대치되었다거나 그 두 문제에 대한 몰두가 세 번째 문제를 야기시킨 원인 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지금 자연의 문제가 중대하고도 위급한 사 안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앞선 두 문제와 관련 없이 독립적으로 해 결될 수 있는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자연과 역사는 배타 관계가 아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착취 행위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착취 행위가 근절되지 아니한 곳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 행위가 근절될 수 없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은 곳에 인간과 인 간 사이의 관계가 올바로 설 수 없다. 그러나 이 셋은 선후의 문제가 아니다. "아 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가인아,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인간아, 자연은 어디 있느냐?"는 세 가지 물음은 본원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물음이다. 이 셋은 분리해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동시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Ⅱ. 생태학적 위기

20세기 후반기에 인류는 미증유의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 른바 생태학적 위기이다. 생태학적 위기는 우리가 감각 기관으로 감지하는 단순 한 환경오염보다 더 심각한 것이다. 대기오염, 수질오염, 쓰레기 산적 등등으로 나타나는 환경오염 문제는 인간의 쾌적한 삶의 조건을 해치는 수준의 위험으로 인식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태학적 위기는 이 지구 덩어리 자체와 그 위에 살 고 있는 생명체 전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위기이다.

대기오염 문제는 이제 단순히 대도시 거주자들에게 신선한 공기를 박탈한다는 차원을 훨씬 넘어 섰다. 대기오염은 지구의 온실 효과, 오존층 파괴, 산성비 현상 을 일으켰다. 지구의 온실 효과라는 것은 탄산가스의 증가로 인하여 지상의 온도 가 상승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탄산가스의 증가는 석탄, 석유, 가스와 같은 화석 연료의 과도한 연소와 광대한 삼림 벌채에 기인한다. 지구의 온실 효과로 말미암 아 지상의 평균 온도가 이미 상당히 상승했으며 앞으로 몇 세대 안에 섭씨 4도 정도에 이르기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온도의 상승은 강우대(降雨帶) 의 변화와 함께 대홍수와 극심한 한발과 같은 기상 재해를 속출시키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지구의 온난화는 양극 지대의 빙산을 점차로 녹여서 해양의 수면을 해마다 높이고 있으며 마침내 해안 지대를 광범위하게 침수시킬 위험이 닥쳐 올 것이라 한다. 오존층은 성층권 부근에 형성되어 있어서 외부로부터 지구로 침입 해 들어오는 자외선을 흡수함으로써 지상의 생물을 자외선의 강렬한 파괴력으로 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냉장고, 전자 제품, 스프레이 등의 공산품 을 생산하는 데 프레온가스(CFCs)를 과도하게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오존층의 오존 량이 감소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존층의 군데군데에 구멍이 생기게 되었 다. 만일 지상의 생물이 이 오존층의 구멍을 통하여 직통으로 내리쬐는 자외선에 노출되면 생체 상으로 견디기 어려운 피해를 입게 된다. 1980-85년 사이에 오 존 량이 평균 3% 감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산성비는 삼림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식물의 생육을 방해하며 어패류에 기형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산성비는 오염된 대기 속에 섞여 있는 각종 중금속들이 비와 합하여 내리는 것이다. 삼림 의 파괴와 식물의 고사는 그 지대가 사막으로 변하는 첫 단계이다.

이 지구는 원래 적정한 양의 오염 물질은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 다. 그러나 이제 지구는 이 자정 능력의 한계점에 이르렀다.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의 경제 체제는 지구가 이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산업 폐 기물과 생활 쓰레기를 산출했다. 쓰레기 가운데는 플라스틱과 같이 반영구적으로 분해되지 않는 것도 있다. 쓰레기 속에 포함되어 있는 막대한 양의 맹독성 화학 물질들이 분해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땅, 하천, 호수, 바다를 오염시킨다. 공장 의 폐수로 인하여 강과 호수의 물고기가 순식간에 떼죽음을 당한 광경을 우리는 목격했다. 농약의 과도한 사용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미생물이 멸절되었다. 자연 파괴와 공해 문제는 이제는 더 이상 인간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지구상에 사는 생명체 전체에 관련된 문제이다. 환경오염과 동식물의 남획 등으로 말미암 아 해마다 수십 종의 생물이 이 지구에서 멸종되고 있다. 몇몇 생물의 멸종은 그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것은 결국에 생태계 전 체의 파멸을 일으키게 된다. 현재와 같은 환경 파괴의 진행을 종식시키지 아니하 고 그대로 방치한다면 이 지구는 생명체가 사라져버린 죽음의 유성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것이 생태학적 위기이다.

지질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태양계가 생긴 것이 약 50억년 전이다. 지구에서 처음으로 세포가 생성된 것은 40억년 전이요, 세포들이 산소와 결합하여 다세포 식물을 형성한 것은 20억년 전이요, 물고기와 곤충과 파충류가 나타난 것이 3억 년 전이요, 원숭이나 개나 고양이 따위의 동물들이 나타난 것은 3천만년 전이라 한다. 마지막 빙하기가 지나간 것이 330만년 전이요, 석기를 사용하던 유인원이 나타난 것이 260만년 전쯤이라 한다. 오늘날의 인간과 같은 모습을 갖춘 생각하 는 사람(homo sapiens)이 나타난 것은 불과 20만년에서 40만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 1만년 전부터요 가축을 기르기 시작 한 것이 8,800년 전부터라고 한다. 인간이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큰 변혁을 인류 문명사에 일으킨 것은 불과 200년 전 일이다. 약 5000년 전에 고대 문명이 발 생할 당시에 전 세계의 인구는 겨우 500만에서 1천만에 지나지 않았으며 400년 전에 현대적 민족 국가들이 생길 당시에 전 세계 인구는 5억 정도였는데 1900 년 초에는 16억이었다. 20세기 말 현재의 세계 인구는 61억이 되었으며 한 세 대 후인 2030년경에는 100억이 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러한 과도한 인구 팽창 은 천연 자원이나 지구의 생명 지탱력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는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지구 위에 전개된 장구한 생명 발전의 역사에 견주어 볼 때에 인 류의 출현 기간은 너무나 짧으며 인간에 의하여 야기된 자연과 생태계의 파괴가 위험 수위에 이른 것은 최근 몇 십년 사이의 일이다. 이러한 사태는 비유하자면 수십억년 동안 삶이 지속되어 오는 평화로운 마을에 어느 날 무뢰한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분탕질하며 마을 전체를 한 순간에 폐허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 다.

인간이 자연을 이렇게 마구 훼손시킬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 지금까지 인간은 자연에 대하여 철저하게 주인으로 군림했다. 자연은 인간의 사용을 위하여 존재 하는 자원이며 인간의 삶을 위하여 이용할 수 있는 단순한 소여(所與)에 지니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을 따름이다. 지금까지 인간은 모든 일을 철두철미 인간중심 적으로 처리했다. 인류의 문명 발달사는 자연 이용의 발전 과정사였다. 단순한 수렵 채취의 생활에서부터 목축과 농경 생활로의 이전은 자연 이용의 양과 질의 급상승을 뜻했다. 인류의 문명 발전 과정에서 최초의 급격한 혁명인 산업혁명은 천연자원을 최대로 이용하여 생산을 극대화하는 변화를 일으켰다. 20세기말에 이 르러는 제2의 산업혁명이라 할 수 있는 정보화 혁명시대가 바야흐로 열리고 있 다. 이 혁명은 산업 기술에 관한 정보의 초특급적 팽창을 뜻하는데 그 결과는 자 연의 무한대한 이용으로 귀착될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만 취급 하는 한 자연 환경의 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악순환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이 위기를 벗어나려면 인류는 지금까지의 인간중심적 사고 방식과 생활 태도에서 180도 방향 전환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시급하게 제3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 그것은 이른바 생태론적 혁명이다. 생태론적 혁명은 이전의 혁명들처럼 인간을 위하여 자연을 파괴하기까지 자연을 무한대로 이용하는 데 목적을 둔 혁명이 아 니라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도모하기 위하여 인간의 사회 경제 문화적 관계를 재 편성하는 혁명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오늘날의 인류에게 던지시는 제3의 물음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다.

Ⅲ. 자연 파괴의 원인

20세기 후반기의 인류가 직면한 생태학적 위기의 근본적 원인에 대하여 기독 교와 신학에 충격을 던진 글이 1966년에 발표되었다. 그것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기술사 교수인 화이트(Lynn White Jr.) 박사가 발표한 "생태학적 위기의 역 사적 뿌리"(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라는 논 문이다.[2] 화이트 교수는 자연 파괴와 생태학적 위기의 사상적 근원은 유대교- 기독교적인 인간중심적 자연관에 있다고 진단했다. 인간이 자연을 대규모로 그리 고 급속도로 파괴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과학과 기술의 발달 때문인데 과학 과 기술의 발달은 서양의 진보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이 진보 사상은 유대 교-기독교적인 종교의 토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했다. 성서의 창조 사상은 자연을 탈신성화, 탈마법화시켰다. 그 결과로 인간은 자연을 무제약적인 탐구와 이용의 대상으로 취급했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 의거하여 인간은 자연 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주인으로 행세했다. 인간은 자연 위에 군림하는 존재이지 자연의 일부가 아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오직 인간의 사용을 위해서 존재 할 따름이다. 이러한 유대교적-기독교적 자연관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자연을 무 제약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찍이 포이에르바하(L. Feuerbach)도 기독교 신앙의 이러한 맹점을 지적 한 바 있다. "자연, 세계는 기독자들에게 아무런 가치도, 아무런 관심도 없다. 기 독자들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자기 영혼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존재들이다."[3]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책임을 기독 교에 돌리고 있다. 베리(W. Berry)는 이러한 견해를 극명하게 나타낸다.

"세상에 대한 멸시 또는 세상에 대한 증오는 현금을 위하여 세상을 착취하려 는 소원으로 체현되며 또 '구원'을 위하여 세상을 멸시하려는 의욕으로 체현되 는데 이 현상은 우리 시대에 이르러서 가공할 정도로 극에 도달했다. 영혼과 육체 사이에,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갈라진 틈을 통하여 이 세상 안으로 이 세상의 파멸이 끼어들었다."[4]

이와 같이 오늘날의 무제약적 자연 착취와 그것으로 인한 생태학적 위기라는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책임은 상당 부분 기독교 종교에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자연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자연을 경시했다. 기독교 신학에서 자연이 들어 설 자리는 거의 없었다. 자연은 신학의 관심 영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마구 짓밟도록 내버려졌다는 것이다.

콕스(H. Cox)의 [세속 도시](Secular City)가 발간된 것은 화이트가 그 논문을 발표하기 꼭 1년전인 1965년이었다. 콕스는 현대 서구에서 꽃을 피운 세속화 문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 문명의 뿌리가 성서의 창조 기사에 있다고 주장했다. 창조 기사는 자연을 탈마법화시켜서 인간의 용도에 이용될 수 있는 대상물로 만들었다. 여기에서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성서와 기독교 신학은 과학과 기술의 모체가 되는 셈이다. 이 점에서는 콕스외 화이트의 견해가 완전히 일치한다. 다만 차이점은 콕스가 과학과 기술을 현재의 현재의 세속화 문명의 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는 데 반하여 화이트는 과학과 기술을 자연 파괴와 생태학적 위기의 주범으로 부정적으로 비판한 것이 다. 문예부흥 및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성서와 기독교 종교는 특히 자연 과학 발 전의 장애 역할을 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기독교회는 창조설에 입각하여 갈릴레 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을 극단적으로 탄압했다. 화이트의 주장대로 현대의 자연과학과 기술이 자연 파괴의 무서운 무기라고 하면 자연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방해한 과거 기독교의 이러한 처사가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의 도래를 막는 데 기 여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겠는가? 역사가 토인비(A. Toynbee)는 자연 멸시와 자연 착취의 원인이 종교의 유일신 사상의 발흥에 있다고 진단을 내린 후에 현재 의 생태학적 위기에서 탈출하는 길은 유일신 세계관에서 탈피해서 내재적인 범신 론으로 회귀하는 데 있다고 처방을 내렸다.[5] 또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구원론, 특히 이분법적 인간관에 입각한 영혼 구원의 강조를 자연 멸시와 착취의 원인으 로 규탄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종말론 신앙을 그 원인으로 규탄하 기도 한다. 영혼 구원 사상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한 현세의 모든 물질 세계를 악 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자연계에 대한 관심과 책임 의식을 각성시킬 수 없다. 또 종말 사상은 현세의 모든 물질 세계는 결국에 불에 타서 사라져버릴 것으로 여기 기 때문에 자연계에 대한 애착을 소멸시킨다.

성서와 기독교의 자연관에 대한 이러한 모든 비판에 대하여 찬반 양론이 있을 수 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우선 이러한 비판을 겸허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를 변호하려는 목적으로 이러한 비판에 송두리째 반격을 가하는 것 이 부당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러한 비판을 100% 수용하여 기독교적 전통을 통째로 폐기 처분하는 데서 문제 해결의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도 잘못이 다. 오늘날 생태학적 위기 극복에 대한 논의의 마당에서 성서적 전통이 점점 배 후로 밀려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맹신적인 전통 고수의 옹고집도 무차별 적 전통 파괴의 난동도 위기를 극복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성서의 사상을 철저하게 새로이 해석해야 한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전통적 인 왜곡된 자연관을 바로잡고 자연을 복권시켜야 한다. 우리는 성서로 돌아가서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 관계를 새롭게 물어야 한다.

Ⅳ. 성서의 자연관

성서는 하늘과 땅의 처음 창조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새 하늘과 새 땅 의 제2 창조에 대한 이야기로 끝맺는다. 하늘과 땅은 성서의 중심 주제인가? 확 실히 그렇지 않다. 성서의 대 주제는 구원사이다. 이 구원사라는 연극의 연출자 는 하나님이시고 주인공은 인간이다. 하늘과 땅은 이 구원사가 전개되는 무대요 그 가운데 존재해 있는 자연 만물은 이 연극에 소용되는 소품들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이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하이라이트(highlight)는 오직 인간의 행위, 그런데 그것도 인간과 인간 관계에서 벌어지는 행위에만 집중적으로 투사되었다. 자연이 인간에 의해서 어떠한 해를 당하고 있는지 또는 자연이 인간을 위한 용도 가치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어떠한 존재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 혀 주목되지 않았다. 이따금 자연은 자기 쪽에서 아무런 연고 없이 오로지 인간 의 범죄에 대한 연대책임으로 부당하게 저주를 당하는 존재로 언급될 따름이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 했을 때에 땅은 인간 때문에 저주 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창 3:17-18). 가인이 형제 살인의 죄악을 저질렀을 때에 땅은 그 생산력이 감퇴 당했다(창 4:11-12). 노아 시대 에 인간이 그 죄악 때문에 물로 심판을 받을 때에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도 덩달아 목숨을 잃게 되었다(창 6:7). 사실은 이뿐 만이 아니다. 이름 없는 수많은 미생물, 풀, 나무, 이끼와 같은 존재들도 죽임을 당했다. 더 나아가서 산과 들과 강 같은 무생물체까지도 막대한 피해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는 그러한 피해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아니했다. 또 묵 시문학적 종말 사상에 의하면 최후 심판날에 경건치 못한 자들만이 멸망을 당하 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벧후 3:6-13). 자연은 결국에 멸망당할 운명인데 잠시 그 집행을 유예 받고 있을 따름인 셈이다(특히 7절 참조).

이사야 11장 1-9절에는 메시야 왕이 이룩할 완전한 평화의 세계에 대한 환상 이 그려져 있다. 3-5절은 인간 사회에 일체의 불의나 억울한 일이 없이 완전한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생태학적 위기와 관련하여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6-9절이다. 거기에는 자연계에서도 완전한 평화가 깃들인다고 한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모든 산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사 11:6-9).

자연계에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것은 우선 이리, 표범, 사자, 곰 따위의 맹수들이 양, 염소, 암소, 송아지 따위의 순한 짐승들을 해치지 않고 평화 롭게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데서 실현된다. 그리고 사자와 같은 육식 동물들은 소처럼 풀을 먹는 초식 동물로 변화할 것이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독사나 살 무사와 같은 맹독 동물 곁에서 노는 어린아이들도 전혀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실로 평화로운 장면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자연이 인간으로부터 당 하는 피해, 즉 자연의 파괴나 생태계의 위기 따위의 불상사가 종식될 것이라는 꿈은 그려져 있지 않다.

로마서 8장 19-22절은 신약성서 전체에서 자연계의 구원을 언급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그래서 구절은 생태학적 신학의 논의에서 빠짐없이 인용된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 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 물도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 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해산의 고통 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롬 8:19-22).

'피조물'이라는 낱말은 창조주에 대한 대칭어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인간을 포함 한 천지 만물을 가리키며 인간에 대한 대칭어로 사용될 경우에는 자연계를 가리 킨다. 여기서는 구원받을 인간들을 뜻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장차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과 병행해서 모든 피조물이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그 자유를 얻기를 신음하면서 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으므로 '피조물'은 인간 이외의 자연계를 뜻한다.[6] 로마서 8장은 종 말론적 소망에 대한 진술인데 사도 바울이 인류의 구원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 곧 자연계의 구원까지도 이 소망 속에 포함시킨 것은 특히 주목할 만 하다. 현재 피조물은 허무에 굴복해 있으며 사멸의 종살이에 얽매어 있다. 그것은 피조물 스 스로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오 피조물 스스로가 저질은 죄과의 결과도 아니다. 오직 그것은 창조주께서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까지도 허무한 상태 에 처해 있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정적이다. 인간의 범 죄 때문에 피조물이 사멸의 운명에 처해 있듯이 인간이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 세 워지는 그 날에 모든 피조물도 그 사멸의 운명에서 해방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 들과 함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바울이 인간의 구원사의 틀 속 에 자연계의 구원을 끼워 넣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렇지만 자연계의 저주와 해방은 여전히 인간의 범죄와 구원 사건의 부산물로 언급될 따름이다. 여기서 모 든 피조물의 허무, 사멸의 종살이, 신음 소리는 인간이 자연계에 가하는 파괴 행 위나 생태계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시대에 자연 파괴나 생태학 적 위기 따위가 있을 턱이 없었으며 또 문제될 수도 없었다. 바울의 관심의 초점 은 인간의 구원에 놓여 있다. 인간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조차도 고대한다. 왜냐 하면 피조물이 현재 처해 있는 사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것은 인간이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이 새 창조를 말 하는 경우에 그것은 오로지 인간의 재창조만을 말한다(고후 5:17; 갈 6:15). 바울 서신에서도 신약성서 전제에서도 자연계의 구원은 무시되었거나 인간의 구 원 속에 매몰되어 있을 따름이다.

복음서에서 자연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찾아 볼 수 있는 곳은 매우 적다. 2천 마리의 돼지 떼를 익사시킨 사건(막 5:1-20 병행)과 무화과나무 저주(막 11:12-14 병행)는, 비록 돼지는 유대인에게 불결한 동물의 대표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무익한 것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고의적으로 자 연계의 생명을 파괴한 행위인 이상 예수의 부정적 자연관을 드러내 준 것으로 해 석될 수 있다. 하늘 아버지께서 공중의 새들도 먹이시며 들풀도 입히신다(마 6:26-31)는 말씀과 참새 하나라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막 10:29-30)은 자연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애정을 서술하 려는 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은 이와 비교해서 훨씬 더 돌보 아 주신다는 사실을 논증하려는 목적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한 송이 들 백합꽃이 솔로몬의 모든 영화보다 아름답다(마 6:29)는 말씀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낭만적 예찬론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허식적 문화에 대한 비판론이다. 바울에게서 와 마찬가지로 예수에게서도 자연에 대한 관심은 인간 구원에 대한 관심 속에 매 몰되어 있다.

창세기 1-2장의 창조 이야기는 한 편에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착취 행위의 근원으로 극렬하게 규탄 받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 의 관리와 보호에 관한 대헌장으로 찬양 받기도 한다. 그 가운데서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 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 1: 28)는 구절이 생태론자들로부 터 집중적인 포화를 받는 대목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복의 선언이었다. 그런데 오늘의 생태계 위기의 상황에서 볼 때에 인간이 생육하고 번 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은 인간에게 이제 더 이상 복이 아니라 재앙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지금과 같은 속도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는 앞으로 몇십년 내에 이 지구가 인간을 양육할 수 있는 한계선을 넘어 설 것으로 예측되 기 때문이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자연을 무제약적으로 이용하고 착취해도 된다는 면허장으로서 자연 파괴의 근본적 원인으로 작용했으며 모든 살아 있는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은 극도의 인간 중심적 세계관을 반영한 것으로서 인간을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생태론자들은 공격한다. 이 에 대하여 성서 옹호론자들은 '정복하다'와 '다스리다'라는 두 낱말은 오늘날 생태 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부정적인 함의를 이 문맥에서 지닌 것이 아 니라고 응수한다. '정복하다'(kabash)는 낱말은 히브리 성서에서 일반적으로 부 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것은 무력으로 어떤 나라나 땅을 정복하 는 것(민 32:22,29; 수 18:1; 삼하 8:11),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것(대하 28:10; 느 5:5; 렘 34:11,16), 강간하는 것(에 7:8)을 뜻한다. 다만 목적어 가 부정적인 것인 경우에는 '정복하다'는 동사는 긍정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미가 7장 19절에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는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것은 죄악을 짓밟아 없애는 것, 죄악을 극복하는 것을 뜻한다. 스가랴 9장 15절에는 '원수를 섬멸하다[삼키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상의 모든 용례에 비추어 볼 때에 '정복하다'라는 동사는 그 목적어의 가치론적 성격이 어떻든지 관계 없이 폭 력으로 제압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는 창세기 1장 28절에 적용될 수 없 다. 왜냐 하면 창세기 1장 28절의 말씀이 선언된 문맥은 나머지 것들과 전적으 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이른바 사제자료(P)의 창조 기사(창 1:1-2:4a) 에 속한 것이다. 이 말씀이 선언된 시점은 천지 만물의 창조가 갓 완료되었을 때 이다. 그러므로 그 시점에서는 아직 폭력, 파괴, 죽임, 정복, 압제, 예속, 노예, 착취와 같은 부정적 세력은 그 그림자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시점에서 인간에게 오늘날의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그 생태계를 파괴하는 그러 한 식의 폭력을 자연에 행사하라는 명을 내리셨을 리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활동의 셋째 날에 땅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다고 선언하셨으며 땅에 갖가 지 식물을 나게 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다고 선언하셨다. 여기서 좋다는 선언은 단순히 심미적인 가치 판단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목적론적 가치 판단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선하게 창조된 땅을 파괴적 폭력에 내맡긴다는 것은 창조의 근 본 정신에 위배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에게 복 을 내려 주시는 맥락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참된 의미의 복 은 타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되는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창 1:28절의 kabash라는 동사에 오늘날의 '정복하다'라는 낱말의 함의를 이입시켜서는 안된 다. 이 사실은 '다스리다'(radah)라는 동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스리다'는 동사는 가장 일반적인 용법에서 강자가 약자를, 또는 권력자가 백성을 지배하거 나 통치하는 것을 뜻한다(레 26:17; 겔 34:4). 또 '주관하다'(사 14:2), '억압 하다'(사 14:6), '부리다'(레 25:43,46,53), '억눌림을 받다[제어를 받다]'(느 9:28)도 위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또는 통치자 와 피통치자 사이의 관계는 상하의 위계 관계이며 그 사이에는 평등한 상호 교류 가 아니라 일방적인 명령과 요구만 관철될 따름이다. 이상적인 원래적 창조의 세 계에 이러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용인한다는 것은 창조의 근본 정신에 위배 될 것이다. 그래서 성서 옹호자들은 주장하기를 참된 통치자는 그 백성을 지키고 돌보는 것이라는 이상적 왕권 사상에 입각하여 창세기 1장 26절과 28절의 radah 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관리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 의 대리인으로서 생물을 관리하는 것은 폭군으로서 자연을 지배하고 자연 위에 군림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유화적이지마는 생태론자들은 비판하기를 이것도 역 시 인간을 생태계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생태계 위에 또는 생태계 바깥에 서 있는 특권적 존재로 자리 매김 하는 태도라고 한다. 자연의 관리자로서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잘 돌보고 가꿀 수 있단 말인가? 원시림이든 천연적 동물의 세계이든 무 릇 자연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더 잘 번창한다. 자연은 인간의 관리 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의 관리자로 자임하는 것은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사고 방식의 소산이다.

사제자료의 창조 기사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된 kabash 와 radah 의 본래적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 구절이 유대교와 기 독교 전통에서 아득한 옛날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동안 자연을 인간 의 지배와 사용의 대상으로 취급하도록 작용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다. 그렇다고 해서 상당수의 생태론자들이 주장하듯이 성서의 창조론은 자연 파 괴의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서 의 창조론을 버리고 범신론적 세계관으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성서의 창조 기사에서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의 해답을 직접으로 끌어 낼 수 없는 것은 거기서 오늘날의 핵물리학적 물음의 해답을 찾을 없는 것과 마찬가지 다. 왜냐하면 창조 이야기가 구전 또는 문서로 전승되거나 정경 속에 최종적으로 정착될 당시에는 도대체 생태학적 위기와 같은 문제는 꿈에도 떠오르지 않은 문 제였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창조 이야기는 몇 천년 후 오늘날에 일어날 문 제를 예견하고 그 해답을 미리 제시해 놓은 예언의 말씀도 결코 아니기 때문이 다. 그렇지만 창조 이야기가 오늘날의 당면 문제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창 조 이야기가 오늘날의 문제에 던지는 의미는 그것이 과거에 원래 가졌던 의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접근 방법을 사용해야 한 다. 우리는 창조 이야기가 생성되고 전승된 삶의 자리 (Sitz-im-Leben), 즉 창조 이야기를 필요로 한 역사적 맥락을 규명해야 한다.

창조 이야기는 내가 출생하는 광경이 찍힌 CT 회로의 녹화 테이프를 어떤 사 람이 몇 십년 후 장성한 나에게 전해 주면서 나의 출생에 관한 객관적 정보를 제 공하듯이 태초의 창조의 현장에 설치된 자동 비디오 테이프와 같은 그러한 기록 자료가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자료는 있을 수 없다. 설령 그러한 장치가 창조의 현장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거기에 담긴 내용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 와 같을 수 없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지구중심적이며 태양과 별 들, 심지어 수많은 은하계까지도 지구의 종속물로서 창조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현대의 천문학적 지식에 전혀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처음으로 만들어 낸 최초의 이야기꾼, 그 이야기의 전승자들, 그 이야 기를 현재 형태의 창세기라는 정경 속에 손질하여 채록한 편집자가 그들의 입장 에서 그들이 직면한 현실적 문제와 씨름하는 가운데 그들의 눈으로 창조를 멀리 되돌아보면서 창조의 역사를 의미론적으로 재현해 낸 것이다.

창세기에는 두 가지 상이한 창조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다. 그 하나는 사제 자 료(P)의 창조 이야기(창 1:1-2:4a) 다른 하나는 야훼 기자(J)의 창조 이야기 (창 2:4b-25)이다. 이 두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그 내용이 서로 조화될 수 없 을 정도로 판이하다.[7] 사제 자료의 창조 이야기에 의하면 큰물을 처리하는 작 업이 창조 활동의 주요 내용을 구성했다. 둘째 날의 창조 활동은 물 한가운데 궁 창이 생기게 하여 위에 있는 물과 아래 있는 물로 가르는 일이었으며 셋째 날에 일어난 창조 활동의 하나는 아래 있는 물을 한 곳으로 모아 바다가 되게 하는 일 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추론하자면 이 창조 이야기가 생성된 지리적 장소 는 큰물이 있는 곳, 즉 큰물과 싸우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대한 과제가 되어 있 는 곳임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야훼 기자의 창조 이야기에 나타 난 창조 당시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땅 위에 는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땅에는 나무가 없고 들에는 풀 한 포기도 아직 돋아나 지 않은 상황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이 창조 이야기가 생성된 지리적 장소는 한발(旱魃)과 싸우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과제로 되어 있는 곳임을 추론할 수 있다. 두 창조 이야기는 모두 자연 환경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끊임 없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처지에 놓여 있을 잘 나타낸다. 첫째 이야기에서는 물 을 막아서 인간의 거주할 수 있는 땅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로 묘사되어 있으며 둘째 이야기에서는 오아시스와 같은 삶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이상적인 일로 묘사되어 있다. 이 두 이야기에 공통으로 반영된 인간의 삶의 정황은 무력 한 인간이 거대한 적대적인 자연의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하는 각박하고도 처절한 처지였다. 인간이 자연에 해를 끼친다거나 자연을 파괴한다는 관념은 있을 수 없 었다. 자연의 세력은 너무나 거대하였고 인간의 힘은 너무나 미약하였다. 그 뿐 만 아니라 창조 이야기가 생성되던 그 당시의 인간의 지식 수준은 낮았기 때문에 전염병, 화산, 지진, 태풍, 홍수와 같은 자연의 불가항력적 위력이나 또는 일식이 나 월식과 같은 기이한 자연 현상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무력한 존재였다. 이러 한 상황 속에서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다음 두 가지 중의 하나이다. 그 하나는 자연의 세력에 위압을 당하여 자연을 신으로 숭배함으로써 인간의 주권을 포기하는 패배주의적 태도이요 다른 하나는 자연을 자연 본연의 자리에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확보하는 적극적 태도이다. 창조 이야기는 자연이 아무리 위협적이라 하더라도 자연은 신이 아니고 피조 세계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규정짓는다. 해와 달과 별들은 더 이상 인간의 운명을 좌우 하는 신들로서 숭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땅에 빛 을 비추고 때와 절기를 매기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조된 피조물에 지나지 않 는다. 창조 이야기를 통한 자연의 탈신성화, 탈마법화는 자연 정복, 자연 파괴에 역점이 놓인 것이 아니라 자연의 위력으로부터 쟁취해야 할 인간 해방,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 역점이 놓여 있다. 인간은 이제 자연 속에서 살아갈 터전을 마련 해 주신 은혜로우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뢰 가운데서 자연을 다스리는 자로 서 당당하게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창세기의 두 창조 이야기는 인간중심적이다. 거기에는 인간은 단순히 피조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나머지 모든 피조물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자기 이해가 부각되어 있다. 첫째 이야기는 사람이 나머지 모든 피조물과 전적으로 다르게 창 조되었다고 서술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뜻하는가? 첫째로 사람 은 나머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임을 나타낸다. 둘째로 사람은 하 나님의 대리자로서 피조물 가운데 있음을 나타낸다. 다른 피조물들과 달리 인간 은 창조되기 전에 모든 동물들을 다스릴 사명이 미리 부여되었다. 둘째 이야기에 서도 역시 인간의 창조가 특별하게 묘사되었다.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 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셔서 생명체가 되게 하셨다. 인간에 게 맡겨진 사명은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이었다. '경작하다' (?abad)는 동사 는 '노역을 투여하다'를 뜻하는데 농부로서 일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점에서 인 간과 다른 동물이 획연히 구별된다. 다른 동물들은 환경에 순응하고 살아간다. 그들은 환경을 변화시킬 줄 모른다. 그들에게는 노동이 없다. 그들은 본능에 정 해진 대로 살아갈 따름이다. 이와 달리 인간은 환경에 순응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노동을 가하여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노동의 결과로 가 공되어 생겨난 것이 문화이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변화시켜서 문화를 창조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와 같이 창조 이야기에는 자연과 인간의 이분법,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이 극 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의 생태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 연의 존재 의미를 부정하거나 자연 파괴를 정당화하려는 논증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인간이 자연의 적대적 위협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아니하고 생존하려는 몸부림의 반영이다. 인간이 자연을 숭배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인간이 단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에 귀속되어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특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면서도 문화를 창조함으로 써 자연을 초월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Ⅴ. 맺음말

생태계 위기는 오늘의 인류가 화급히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이다. 이 위기는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고 착취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했다. 지금까지 인간은 자연의 본유적 가치(intrinsic value)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직 인간을 위한 효용적 가치만을 인정했다. 그 결과로 인간은 아무런 가책 없이 자연을 무제약적으로 이 용 착취 파괴하게 되었다. 생태계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종래의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연은 인간의 소용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 목적이 있다고 보는 새로운 자연관이 요청되는 것은 물론이다. 또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생태계가 파괴 될 때 인간의 생존도 위험에 빠진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러나 변화된 새로운 자연관은 문제 해결 의 한 가닥 실마리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 열쇠는 되지 못한다. 범신론적인 동양 의 종교들에서 자연친화적인 요소가 많이 있음은 사실이다. 이러한 종교적 가치 가 지배하는 곳에서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지 자연 파괴가 전무하지 않은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연 사랑 또는 자연 파괴는 자연에 대 한 올바른 이해 또는 그릇된 이해에 근본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가 올바로 되어 있느냐 이즈러져 있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생태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토인비(A. Toynbee)처럼 기독교적인 유일신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서 동양적인 범신론으 로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처럼 지구를 생명의 모신(母神, Mother-God)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 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거나 착취하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도 하는 것은 사람의 가치에 대한 무지 때문만은 아니다. 남을 억업하거나 죽이는 사람은 비록 그가 사람의 귀중함을 알고 있을지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자기 의 이기적 욕심을 충족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연의 소중함을 인식한다 하더라도 자연 파괴의 고리를 끊기 어렵다. 그것은 인간이 대량 생산과 대량 소 비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자연 파괴와 생태계 위기는 인간이 구축 해 놓은 이러한 삶의 형태가 낳은 필연적 산물이다. 자연에 대한 인식의 전환도 요청되지마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의 태도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생 태계 위기 해결의 열쇠는 인간의 삶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명에서 찾아 야 한다. 자연과 생태계 보호는 결국 윤리적 문제와 종교적 문제로 다시 귀착된 다.

2000년 전 예수와 어느 율법 교사 사이에 벌어진 대화 한 토막은 21세기의 생태론자의 성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될 것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율법 교사 하나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중요합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 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 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셋째로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는데 그것 은 '자연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것이다. 이 세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 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 (마 22:35-40).

각주

[1] Rene Dubos, A God Within, New York: Charles Charles Scribner's Sons, 1972, p. 166.

[2]  이 논문은 Science, March 1967에 게재됨.

[3]  L. Feuerbach, The Esssence of Christianity, 287.

[4]  W. Berry, "A Secular Pilgrimage", in: Western Man and Environment Ethics: Attitudes Toward Nature and Technology, ed. Ian Barbour. Reading, MA: Addison-Wesley, 1973, 135.

[5] A. Toynbee, "The Religious Background of the Present Environmental Crisis", in: Ecology and Religion in History, ed. by David and Eileen Spring. New York: Harper and Row, 1974, 146f.

[6]  '피조물'(ktisis)의 의미의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는 황현숙, "구원의 희망 속에서 탄 식하는 피조물"(롬 8:19-22)", [창조보전과 한국신학], 한국기독교 신학총론 9. 서울: 한 국기독교서회, 1992, 141-42 쪽 참조.

[7] 다음의 진술에 대해서는 Georges Casalis, Die richtigen Ideen fallen nicht vom Himmel, Stuttgart et a. 1980, S. 91-110 참조.
 
 
in http://www.theology.co.kr/theologian/김창락/생태계.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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