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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5/10/31 (00:40) from 129.206.196.55' of 129.206.196.55' Article Number :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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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과 시간문제


종말론과 시간문제

호남신대 정기철                       

0. 들어가는 말
이 글의 일차적 목적은 시간의 종말문제를 신학적으로 고찰하여 한국의 사상과 문화 그리고 역사를 보다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한국의 사상은 시간을 서구처럼 종말을 통해 이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문화나 사상은 미래를 어떻게 표상하는가? 한국에는 그리스도교가 중시하는 미래가 삶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특히 유교는 과거의 전통을 중시한다. 그러면 거기에서는 새로운 것이 어떻게 생길 수 있는가? 새로운 것은 근원, 곧 옛 것에서 생겨나는가? 아니면 옛 것을 새롭게 평가하는 새로운 경험의 미래에서 생겨나는가? 어떻게 옛 것 속에 붙잡혀 있는 것이 새로운 것으로 극복될 수 있는가?
이 글이 의미를 가지려면, 시간문제를 고찰하여 한국과 서양 사이의 문화와 종교적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다리를 놓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작업이 성공하려면 다음 두 가지 사항이 전제되어야 한다. 먼저 서구신학이 시간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것이 한국의 문화나 전통들에서부터 제기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전제를 충족시키기 위해 서구신학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몇몇 사상가들의 작품과 내용들에 대해 분석해야 하고, 그런 다음 이 분석을 통해 한국의 역사와 문화 또는 종교와 사상 속의 중요한 주제들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확신 속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서구신학의 사유 틀이 한국사상과의 대화를 열어 주면서 동시에 한국의 문맥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게 되며, 그런 다음에야 시간에 대한 한국인의 경험과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가능하게 된다. 이런 전제가 충족될 때에야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가 논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종말론을 어떻게 소개하고 이해시켜야 할까?' '시간개념을 통해 종말론을 소개하는 시도도 없었고, 설령 그런 시도가 의미 있다고 해도 한국에는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시간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양자를 접목시키고 한국에 맞게 소개시킬 수 있을까?' '그런 시도는 어떤 정당성에 근거할 때 타당할까?'
서구신학이 시간문제를 종말개념을 통해 이해함으로 미래를 중시하는 사유체계와 문화를 건설했으나, 한국은 유교나 불교의 영향으로 과거와 현재만을 중시하는 문화와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한국사회를 위해 미래시간을 중시하는 그리스도교 종말론을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미래가 가져올 희망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 수 없을까? 시간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역사와 사고방식을 지배했기에 그리스도교의 미래가 우리의 삶에 중요성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을까? 종말론적 미래는 예기하거나 계획을 세움으로 역사의 전체성에 다다를 수 없는 전적 타자미래이다. 미래는 종말의 영역이다. 따라서 시간의 본질을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종말을 통해서 시간을 고찰할 때 가능하다. '시간을 종말을 통해 숙고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시간과 역사가 지향해야 할 참 목적을 제시하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내적 동인으로 작용하여 주어진 현실의 절대화를 거부하며 미래를 향하여 개방시키는 역사의 원동력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 사고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끝이 대 재난과 파멸이라는 소멸(annihilatio)을 뜻하는 세속적 종말(finis)보다 시간과 역사의 성취요 목적으로서 새로움의 가능 근거인 그리스도교 종말(telos)을 중시하게 한다. 전자가 직선상의 연대기적 시간상을 따라 과거적인 것으로부터 되어져 가는 미래(future)를 중시한다면, 후자는 궁극적인 미래로부터 현재로 온다(advent).
우리는 이 글의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할 것이다. 먼저 종말론에 대한 사전·개념적 정의를 소개하고 난 다음, 종말론의 성경적 뿌리에 대해 논할 것이다. 그런 다음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적 미래가 한국에서 논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볼 것이다. 그 배경으로 신학에서 이해하는 시간개념을 여러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살필 것이며, 마지막으로 성경이 말하는 미래에 대해 논구하고자 한다.

1. 종말론이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국어사전은 종말론을 "세상의 종말이 왔을 때 최후의 심판이 있음을 말하는 설"로 정의했다. 종교사적인 의미에서 종말론은 "궁극적인 것"(         )에 대한 직관이나 신앙표상과 연결되어 있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는 종말론(De Novissimis)의 테마를, 즉 '궁극적인 것'을 죽음이나 죽음 이후의 생명 또는 부활과 심판 등으로 나열했다. 20세기 신학은 종말론을 통해 신과 인간이 만나는 궁극적인 현실 문제를 다루었다. 이 "현실의 시간 차원"에 대한 해석학적 차원이 종말론의 핵심 주제가 된다.
이제 종말론에 대한 성경적 뿌리를 말해볼 차례다. 필자는 여러 곳에서 이에 대해 이미 논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대해서만 언급하고자 한다. 특히 시간개념과 관련된 묵시문학적 종말론을 살피고자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논하려는 주제인 종말론과 관련하여 볼 때, 묵시문학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종말론의 핵심 주제이기 때문이다. 묵시문학과 종말론의 관계를 여러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지만 이 글의 목적인 시간과 역사 개념을 가지고 둘의 관계를 푸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묵시문학의 역사성 또는 시간성을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왕대일 교수에 따르면 묵시문학적 역사이해는 "현재의 역사를 악의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에 기초한다. 또한 묵시문학에는 "현재 (옛 시대)와 종말 (새 시대)의 이분법적 시간 이해"가 자리 잡고 있다. 역사는 끝이 있고 닫혀져 있으며 괘도 수정이 불가능하게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이 지배하는 역사를 "닫혀 진 역사관"이라 부른다. 역사의 결정론은 이분법적 시간이해를 극복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의 고난과 악의 문제를 종말에로 떠넘기고 말면 그 현실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종말은 어떤 의미를 주는가? 고난과 아픔의 현실을 사는 사람에게 미래라는 시간구조 속에 있는 희망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현재의 역사가 악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다면, 그 역사에 대한 희망은 도대체 무엇일 수 있는가? 당연히 "비관적"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 현재의 현실은 악한 세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 시대가 와야 역사에서 악이 사라진다고 생각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예언자들의 역사이해 속에서 해결할 수 있다. 예언자들은 현재의 현실 속에서 고난이 끝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현실에 대한 이해는 묵시문학적 종말론이 아니라 예언적 종말론에 근거할 때 더 타당성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럴수록 더 묵시문학적 종말론의 역사·시간이해가 우리에게 더 필요한가? 왜냐하면 살아가면서 얻은 결론이지만, '선이 악을 이긴다'는 생각은 현실보다 미래에 근거할 때 더 맞을 것 같기 때문이고, 종말론의 출발점이고 종착점인 부활은 묵시문학적 종말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묵시문학자들은 역사의 무의미성을 절감했기 때문에 새 에온으로 도피"하고 있다. 필자에게 묵시문학적 종말론은 결국 "역사 속에 있는 인간 실존의 새로운 이해"를 위한 도구로만 보인다. 만약 이러한 이해가 옳다면, 오늘날 우리는 종말론을 통해 어떻게 우리 자신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까?


2. 불교가 말하는 미래
벤도르프(Rudolf Wendorff)가『우리가 사는 시간』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어느 일본 철학자에 따르면, 아시아에는 서구적인 의미의 "시간" 개념이 없다. 그렇다고 아시아 나름대로의 시간경험들과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세계를 이해하는 틀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에는 세속의 시간과 신적 시간 사이에 명료한 차이나 제한된 시간의 이념이 없었다... 시간은 영원한 과거에서부터 영원한 미래로 흐름일 뿐이다. 시간은 영원 속에서 태어나 영원 안으로 사라진다. 역사 속에서 드러난 모든 것은 영원의 토대로부터 그 모습을 갖게 된다. 역사는 영원한 지금 속에서 지속하는 회전이다. 남아시아나 남아시아 종교 특히 불교에는 세계의 창조와 종말에 대한 물음이 없다. 그리스도교에 따르면 신은 세계와 시간을 자유로운 창조행위 속에서 창조하셨고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까지, 즉 시간의 종말까지 제한된 지속을 가지지만 불자들에게 시간은 제한이 없고 따라서 시간과 영원 사이의 대립이 없다. 이들에게 시간은 영원한 흐름이고 리듬의 반복이며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한국의 학문분야 특별히 신학분야에서는 시간의 문제나 시간의 타자인 영원에 대해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국의 사유경향은 유럽처럼 시간을 신과의 관계에서 규정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링크(Christian Link)가 말한 '신의 고유한 시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시간'이라는 시간 개념이 한국 사람들에게는 낯설다. 그리스도교는 그런 시간을 신의 사람이 됨(incarnation), 곧 "때가 참"(갈 4, 4)이라 했지만, 이런 시간 표상은 불교와 유교에는 낯설다. 그러면 신의 시간을 한국에서 말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만약 우리가 시간을 신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하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현재 속에서 연결점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불교는 사람들에게 영원의 관점에서 살도록 요구한다. 왜냐하면 불교에서 영원은 절대적 현재를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바르트(Karl Barth)가 말한 "그 자체 시간이 없으면서 동시에 시간적"인 신의 시간을 순환적인 시간개념에서 출발하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로 이해한다. 물론 이러한 불교의 신의 시간에 대한 이해가 바르트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신의 미래를 중시하는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을 한국에서 말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주는가? 순환적인 시간개념은 종말의 사고에 낯설다. 그렇다면 그것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한국인의 사고 속에는 목적론적 종말론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만약 한국인이 그리스도교의 시간을 종말론적 시간으로 이해하고자 한다면, 미래적 종말론을 말할 수 있는 길은 있어야 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대화하기 위해서는 종말론적 시간이 직선적이면서 동시에 순환적인 시간이해를 통합해야만 가능하다.
우리의 관심은 시간과 종말 개념의 비교분석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서구사상과 한국사상의 해석학적 비교도 아니다. 오히려 시간과 종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미래를 새롭게 이해하고 열어보이고자 한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간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기존의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존재이해를 넘어서는 대안이 필요한데 그 작업이 이루어지려면 시간이해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했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어떻게 맞느냐에 따라 주어진 미래를 생산적으로 맞이했기 때문이다.
종말론의 시간개념은 미래가 중심이기 때문에 여기서 특별히 미래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인간은 미래적 존재이다. 그러나 미래가 없는 사람이나 민족도 있다. 한국에는 그리스도교가 중시하는 미래가 핵심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에게 미래는 어떤 의미를 가지며 종말을 어떻게 표상할까? 한국의 종교 중 불교 속에 그리스도교와 너무나 다르지만 나름대로 미래에 대한 시간 개념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미래와 한국 사상이 가지는 미래를 비교 분석하면서 새로운 대화의 모색 점을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불교가 말하는 미래 개념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불교 안의 모든 분파들의 시간 개념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의 논의에 필요한 사항만 설명할 수밖에 없다. 소승불교 가운데 구사론(俱舍論)의 삼세실유(三世實有)에 따르면 과거·현재·미래가 있어 생성 소멸한다. 이것은 현재의 과보(果報)는 과거의 업인(業因)에서 유래하고 미래의 과보는 현재의 업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인과법칙에 따른 시간이해이다. 그러나 경량부(輕量部)의 삼세론(三世論)에 따르면 과거와 미래는 실체가 없다(過未無體). 따라서 "가상의 시간관"이다. 그렇지만 과거나 미래는 "기억과 기대"라는 시간의 인식 형식과 관계하고 있다. 이렇듯 시간을 의식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는 유식론(唯識論)에 따르면 현재만 존재한다. 화엄종(華嚴宗)도 연속성을 부정하기 때문에 미래가 없고 단지 부동의 현재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삼론학파(三論學派)의 중론(中論)은 인과의 모순을 들어 시간 자체를 부정한다.
대승불교 중 특히 용수(龍樹, 150-250)의 공사상 중『중론』제 19장에 시간의 존재와 시간 인식 그리고 시간 존재의 근거 등 시간에 대한 고찰이 나온다. 시간의 존재는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예를 들면 "현재와 미래가 과거와 관계 위에 있다고 가정하면, 현재와 과거는 과거에 존재하는 것이 된다. 나아가 현재와 미래가 과거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현재와 미래는 어떻게 과거와 관계 속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19. 1-2). 시간의 존재는 시간의 인식과 분리될 수 없다: "고정적이지 않은 시간은 인식되지 않는다. 고정적이면서 인식될 수 있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되지 않는 시간이 어떻게 정립될 수 있는가"(19. 5). 시간이 존재하는 근거는 존재자와 무관하지 않다: "존재자를 조건으로 하여 시간이 있다면, 존재자와 독립해서 어떻게 시간이 있을 수 있는가. 게다가 어떠한 존재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19. 6). 이상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시간이 그 자체로 실체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시간의 실체성을 부인함으로써 "시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시간에 대한 "집착을 끊으려는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불교가 삼법인(三法印) 중의 하나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원리를 따라 시간을 독립된 실체로 보지 않고 어디까지나 존재자와 연관해서 규정했다는 것을 살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불교의 시간관을 윤회적 시간관이라고 말해왔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이의 명백한 차이를 거부하는 순환적 시간관을 뜻한다. 순환적으로 생각하는 불교를 위해서라면 세계 과정은 생성과 소멸의 끝없는 흐름일 뿐이다. 이러한 순환적 시간 개념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직선상의 종말 사상에 대립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직선적 시간관은 자연과학이 주장하는 시간의 화살과 일치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사가들이 중시하는 사적(historical)인 시간관 또한 기독교의 종말 사고에 낯설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종말은 사가들이 중시하는 사적인 것으로는 접근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종말에 일어날 일들의 총체인 시간성은 사적으로 결코 파악될 수 없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임박성 개념에 충실하자면 시간 개념은 종말론에 의해서야 올바로 이해된다. 종말론적 시간 개념은 직선적 시간 질서나 연대기적 결과로만 이해될 수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적 시간관도, 자연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직선적인 시간관도 종말론적 시간과 대립될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를 위해서라면 종말론적 시간관이 직선적인 시간 이해와 윤회적 시간 이해를 동시에 포함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3. 신학에서 시간이해
시간문제를 위한 신학적 기획들은 무엇인가? 종말론과 시간의 신학에 대한 연구는 시간의 철학적 분석과 밀접한 연관을 이루고 있는 신학적 분석과 더불어 제기될 때 풍부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그렇다고 시간개념 자체에 집중할 수만은 없다. 그 보다는 종말론을 신학적으로 적용해보는 일을 재검증하거나 시간경험의 난제 문제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신학에서 지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신학에서 종말론의 중심 주제는 20세기에 복잡한 논의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정리되고 있다. 루터(Martin Luther)와 종교개혁의 정통주의에서 발전된 미래 종말론의 문제는 계몽주의 시대에 더 이상 '세계의 소멸'에 대한 표상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옛 세계의 소멸이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전제이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직선적 시간의 전제 아래서 시대적인 새로운 시작을 파악하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철저하게 생각해야 한다. 옛 세계의 지속은 모든 연속성을 끝나게 하는 대 환란을 통해서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면 도대체 옛 소망의 내용을 옮긴 것이라 할 시간적으로 새로운 특정한 지평에서는 어떤 표상과 상들이 제공될 수 있는지 물어야만 한다.
이런 시간의 이중구조가 계속 유지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현재 종말론과 미래 종말론 둘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이 둘은 신약성경에서처럼 '이미'와 '아직 아님'의 긴장으로 병합되어 있다. 피히트(Georg Picht)가 말한 것처럼 미래 종말론은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는 지평을 열어준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은유나 비유로 말할 수 있다. 현재 종말론은 이 시간의 도래를 우리의 시간과는 다르게 파악되는 세계 속에서 서술하려고 애쓴다. 이 두 종말론의 모델의 관계에 대한 많은 논란은 시간의 이 두 형태들이 어떻게 서로서로 제한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모아지게 된다. 우리가 그 일을 하고자 할 때, 리쾨르(Paul Ricoeur)가 한 것처럼, 이 두 범주적으로 구분된 세계들을 함께 논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들의 일상 시간 경험을 시간의 흐름과 관련하여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시간이 미래에서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과거에로 흐른다는 식과 거꾸로 시간이 미래에로, 즉 약속의 시간을 향해 흐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전자는 고고학적 고찰인데, 즉 시간이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발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후자는 목적론적 또는 종말론적 고찰이다. 고고학적 시간의식이란 시간이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함을 강조한 것이고 종말론적 시간의식은 시간이 하나님을 향해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역사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샤르뎅(Teilhard de Chardin)과 판넨베르그(W. Pannenberg)가 주장한 것처럼 역사의 경험은 인간의 자연적 시작에서 완성에로 향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역사의 경험은 인간의 눈으로 온전히 이해되지 않고 은폐되어 있다. 그럴 때 물어야 하는 것은 어떤 인식에 근거할 때 우리는 역사 속에서 역사의 의미나 역사에 관해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시간 속에 살면서 시간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누가 쉽게 그리고 간략하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감히 그것을 잘 이해하여 그 대답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일상 대화에서 시간보다 더 친근하게 그리고 잘 이해하고 있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시간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시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만일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묻는 자가 있어서 그에게 시간을 설명하려고 하면 나는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만일 아무 것도 흘러 지나가지 않으면 과거의 시간이란 없을 것이요, 만일 아무 것도 흘러오지 않으면 미래의 시간이 없을 것이며, 만일 아무 것도 현존하지 않는다면, 현재라는 시간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간을 신학에서 다룰 때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제자들 때부터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어려움들은 시간의 신학을 새롭게 정초해 보는데 근거하는데, 그것은 신학적 종말론 일반의 보편적인 문제설정으로 되돌아간다. 시간의 신학을 새롭게 정초하기 위한 기초는 19세기와 20세기의 종말론에 대한 집중적인 탐구와 해명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반으로부터 넓게 전개되지 못하고 있다. 활발한 전개를 위해 판넨베르크가 제기한 것처럼, 역사와 시간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다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고찰을 이끄는 인식관심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다. 시간성이 종말론의 본질인가? 시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신학적 기획들을 몇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시간문제를 시간 속에서의 창조냐 시간 밖에서의 창조냐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지 않고 시간과 영원의 차이를 통해 설명한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이 시간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흘러가 버리고 없는 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현재만이 기억 속에서 존재하고, 지속하는 현재는 직관을 통해 그리고 오지 않은 미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 속에서 인식되며 영혼의 팽창 속에서 흐른다. 인간의 영혼에는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현존하기 때문에 현실에 존재하는 시간은 현재뿐이다. 시간의 존재론적 문제가 의식에 주관적으로 주입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아우구스티누스 시간론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것의 출발점으로 볼 수는 없는가? 또 다른 질문이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시간을 영원을 통해 해명하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도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은 시간을 영원을 통해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시간의 창조에 대해 묻지 않았고 시간의 종말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의식적인 시간인식은 아주 친근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 사람들의 의식적 시간인식이 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 이론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을 한국 사람들이 가지는 시간의식으로 풀어줄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은 시간의 존재와 비존재의 물음을 모순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사람들은 의식 속에서의 시간은 더 이상 과거 현재 미래가 구분되지 않고 혼합되기도 하고 뒤섞이기도 하고 상호보완적이기도 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식의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런 시간인식을 체계화되지 않은 것으로 또는 모순되는 것으로 볼 것이다.
영원과 시간의 대립, 하나님의 영원과 사람의 시간의 대립은 바르트에게 가면 더 극단으로 치우친다. 바르트만큼 20세기에 시간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의 초기 변증법적인 신학에서 이 대립은 풀리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었지만,『교회 교의학』에서는 체계적으로 매개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하신 말씀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육신을 입었다고 하는 것, 즉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시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새롭게 중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정 속에서 인식방식에 결정적인 전환을 이룩했고 신학적 시간개념을 내용적으로 규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인간학적인 시간이해에서 그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부터 그것이 얻어진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심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시간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시간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아직 은폐되어 있는 시간의 근원인 하나님의 영원은 하나님이 시간을 가지심이다. 그 시간은 기한이 정해진 시간이고 거기에서만 고유성을 가지게 된다. 이런 출발점에서부터 보면 계시와 역사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는 결과들이 주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성을 규정하기 위한 결과들이 제시된다. 바르트의 시간이해와 전혀 정반대인 사람이 바로 불트만(Rudolf Bultmann)이다.
불트만은 시간 안에서 종말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종말론을 시간 개념과 관련하여 볼 때 현재 종말론이라 칭한다. 또한 그의 종말론을 실존 종말론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실존을 종말론적 순간에 의해 새롭게 이해된 새로운 실존이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이라는 개념이 키에르케고어(Soren Kierkeggard)와 이를 수용한 하이데거(Marin Heidegger)에 의해 체계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불트만은 실존 개념을 이들과 달리 종말론적 궁극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 실존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실존은 시간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 속에서 종말을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물어야 한다. 종말론은 시간 안에서 현실화된다. 역사의 의미는 그 의미가 현실화되는 종말론적 현재 속에 있다. 역사의 의미는 종말론에 의해 규정된다. 기독교 종말론은 예수 안에서 충족된 역사의 의미를 말한다. 어느 때인가 있을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 매 순간 새로운 존재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종말론적 사건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고 케리그마를 통해 만난다. "지금은 그리스도와 만남으로 또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말씀과 만남을 통해 종말론적으로 특징지어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의 만남 속에서 세계와 그 역사가 종말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고 새로운 피조물인 믿는 사람을 탈 세계화하게 하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는 시간과 영원의 전통적인 대립을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전환시켰다. 그의 영향력 있는 초기의 저서인 {역사로서의 계시}에서 묵시사상으로서의 역사 이해가 결정적인 교량 역학을 하고 있다. 묵시 사상적 역사이해는 예수의 일어나심, 부활 개념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즉 마지막 것이 앞서 일어났다고 하는 그리고 다음과 같은 근본 명제, '예수의 운명 속에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고 선취되었다'는 명제가 성립되도록 도와준다. 이 명제는 묵시사상에서부터 세워진 직선적 시간 이해를 변형시킨 것이다. 무엇보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발견에서부터 미래의 우위성을 이끌어 내었고 그럼에도 이 미래의 시간구조가 해명되지 않은 채로, 비록 그것이 종말에 질적으로 평가된다 하더라도, 남아 있음을 잘 서술했다. 판넨베르크의 기획들은 역사상에 일치하는가? 이러한 종말론이 궁극적으로 시간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는 이러한 시간 이해가 주는 결과가 무엇인지 충분하게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아우구스티누스와 바르트 이래로 우리 시대에 몰트만(J. Moltmann)이 시간의 문제를 가장 집중적으로 다룬 사람이라는 평에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철저한 종말론적인 단초를 형성했고 이 세계를 위해 궁극적인 것에 대한 희망을 요청하고 있다. 몰트만은 연대기적인 차원의 시간에 대한 필요성도 인정하기 위해서 아이온적인 영원의 개방을 생각하려고 노력했고, 동시에 영원한 시간과 무상한 시간을 나누었다. 이 두 시간의 형태는 상호 제한적이다. 영원한 창조는 무상한 시간의 지평 속에 있으나 영원한 시간은 바로 볼 수 없는 세계의 영원한 시간의 지평 속에 있다. 우리의 미래, 곧 직선적으로 계속되는 역사 내적인 미래는 강림, 곧 종말에서부터 계시된 미래와 대립하고 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영원을 시간의 단순한 부정으로 생각하지 않고 창조하는 영의 충만함으로 이해하고 있다. 약속의 개념은 현실 세계의 모순 속에서 온전히 성취되어질 수 없다. 그 곳에서의 약속 개념은 전적으로 비유적으로 묘사된다.


4. 성경 안의 미래
우리는 이제 미래 개념을 성경의 차원에서 살펴야 할 차례이다. 신학적 해석을 위한 과제의 열쇠로서 시간이해는 종말에 대한 성경증언의 특수성이 가지는 '그것이 신학적이다'는 명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을 성경이 말하는 범위 안에서만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외에 종말에 대한 말들이나 해석은 임의적인 의미를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종말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성경 자체로부터만 전적으로 참으로 말해질 수 있다'는 전제, 즉 '오직 예수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는 전제에 기초한다. 따라서 종말론과 신학은 서로 함께 얽혀있다. 이런 둘의 연관성의 성격 때문에 신학을 종말론의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그러나 종말론의 관점에서 고찰하기 위해서는 어떤 모델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모델이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성경과 연결시키는 것을 허락하는 한 모델로 리쾨르의 '이야기 해석학'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이야기 해석학은 성경의 시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성경 속의 창조의 시간(과거)과 그리스도의 시간(현재) 그리고 종말의 시간(미래)을 어떻게 규정하는가? 먼저 이야기 시간에 대해 살피고 그런 다음 성경을 이야기하는 시간에 대해 살펴보자.
종말을 시간 속에서 규정함이 주는 중요성은 시간 자체나 시간에 대한 해석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은 부정될 수 없다'는 사실 속에 있다.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은 부정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일 때도 그 중요성이 유지되는가? 이러한 물음은 부정될 수 없는 일어난 사건을 의문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라는 말의 불명확함 때문에 생긴 질문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은 시간 속에서만이 아니라, 시간 밖에서도 시간을 지배하시기 때문이고, 시간 이전과 시간 이후도 지배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 속에서' 시간 속에 일어난 사건을 규정하는 문제는 당연히 이미 해석과 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시간 해석과 이해는 의미의 문제이다. 사건 자체가 주는 사실성 여부와 달리 사건 자체의 의미성 또는 진리성을 분명히 해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의 사실성과 진리성 또는 의미성을 분리함과 분리하지 않음에 따라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 부정되기도 하고 부정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부정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은 의미와 관련 없이 일어남'을 뜻하고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하려 할 때, 자연과학적인 사실과 해석학적인 의미가 분리되고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충적일 때 우리가 논의하려는 것에 더 가깝고, 우리의 논의에 도움을 주게 될 것이다. 특히 우리가 역사적인 사건을 접근할 때 분명하게 알 수 있듯이, 실증주의적 사실 접근과 이야기에 의존하는 의미 접근이 구분되지만 이 둘이 상호적일 때, 역사사건에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성을 근거 지워주는 이론이 바로 '이야기' 개념이다. 이야기는 사실적인 역사 사건과 허구의 시간 구성의 교차 지시체를 가지고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은 역사와 시간을 넘어 또는 역사와 시간 이전의 시간의 관점도 고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균형 잡히지 않을 뿐 아니라 종합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게 된다. 죽음과 역사의 끝에 일어날 사건, 그리고 죽음 이후와 역사 이후의, 즉 종말 이후의 사건을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 이 사건도 시간 안에서 규정했던 방식대로 사건의 의미성과 현실성의 상호성 속에서 보면 안 되고, 어쩔 때는 분리해서 보아야 더 정확하지 않을까? 우리의 제안은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는데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 자체의 의미성이 그 사실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는 것을 밝히려는 데에도 있지 않다. 그와 달리 사실성과 의미성의 상호성을 강조하는 제안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단순히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하려는데 있지 않고 시간을 넘어서는 사건도 말해야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끝나나, 죽지 않는 시간이 있다. 그런 시간이 바로 이이기 시간이고 이야기 시간은 죽지 않는다. 이 죽지 않은 시간이 예수께서 죽음을 죽으심으로 죽었으나 다시 사심의 시간을 말할 수 있는 한 모델이다. 이야기의 시간은 죽음 이후의 사건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의 사건인 예수의 부활도 사실은 우리에게 과거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는가? 라고 논리적인 시간 개념으로 이야기의 시간을 규정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논리적인 시간은 죽은 시간이다. 왜냐하면 논리의 시간은 의미의 시간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이야기의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하지만, 우리가 물리적인 시간도 말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물리적인 시간을 포함하지 않은데서 오는 범주적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시간은 물리적 시간도, 현상학적 시간도, 인간학적 시간도, 역사적 시간도, 심리적 시간도 포함한다. 또한 이야기의 시간은 내용과 사실, 의미와 사태를 독립하면서 동시에 연합하여 본다.
성경은 하나님을 시간 속에서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시간은 역사의 시간 속에서 그 자신을 드러내시는가? 하나님의 시간 계시인 '때가 차매'와 역사적으로 경험하는 시간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는가? 이 질문은 본회퍼의 다음과 같은 물음과 동일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고, 누구였던가?" 시간은 스스로를 채울 수 있는 어떤 힘도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다. 시간이 스스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간으로 우리의 시간을 채운다. 예수는 그의 시간들 속에서 여러 방식의 시간들 속에서 그 자신으로(F.-W. Marquardt) 남아 계신다. 그래서 성경 선포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무엇이냐'는 질문보다 시간의 내용들이다. 즉 내가 텅 빈 때 속에 사는지 혹은 꽉 찬 때 속에서 사는지가 중요하다. '때가 차매'의 선포는 그 내용에 관한 진술로써, '때가 차매'라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구조 조건으로써 묘사되어야만 한다. '때가 차매'의 선포 내용은 '때가 차매'를 종말론적으로 선포하기 위한 가능 조건인 부활절 사건의 시간을 변화시키는 힘에 의존하여 신학적으로 해석된다. 십자가에서 깨어남은 시간의 힘을 파괴하는 사건으로, 이 시간이 아니고는 우리 자신을 실현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 통치의 시간은 이러한 기다림의 내용으로부터, 즉 그리스도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부터 파악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시간을 기술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오시는 새로운 세계인 때가 차매 속에 있다. 영원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심인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을 지배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종말의 시간을 인식하는 궁극적인 근거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으로 우리에게 오셨고 오신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기독교가 말하는 교리의 내용이나 진리는 전적으로 그의 창조를 넘어서 지배의 완성을 위해 오시는 하나님 자신의 미래에 달려있다. 기독교 신학은 사람이신 나사렛 예수에게서 우리에게 가깝게 오신 그러면서 경험 가능하게 된 하나님의 현재를 미래 희망의 근거로 해석한다. 희망의 시간은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인 시작된 미래 속에 근거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의 가까움을 선포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는 고유한 시간성, 특히 현재와 미래와의 그 연관성을 가진다.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약속된 미래는 종말론적인 완성의 개념에 상응하는 결국 미래의 미래화이다. 종말론적인 완성은 우리의 세계가 하나님의 미래 세계에 상응하도록 실재를 열어주는 가능성으로 표시된다.

가. 창조의 시간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면 아우구스티누스나 바르트의 말처럼 그것은 시간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성경이 기술하고 있는 창조를 자연과학적으로 파악되고 있는 자연과 연결시키려는 근대의 문제 설정은 이런 오래된 질문의 변양으로 보아야만 한다. 성경적인 시간이해가 종말론적인 미래로부터 그 통일을 이룩하려면, 창조를 종말론적인 미래로부터 이끌어 내야 한다. 창조는 몰트만이나 링크가 해석한 것처럼 종말론적으로만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런 방식에서 새로운 창조라는 약속을 신학적인 교량으로 제안할 수 있다. 그 작업에서 세계를 새로운 자연과학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과정 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가 제안한 열린 체계 이론이다. 종말론은 어떻게 새 창조를 말하는가? 새 창조를 또한 시간 개념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가?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성령에 의한 삶의 거룩함, 그리고 창조와 새 창조를 시간의 시작과 영원의 시작으로 그리고 창조의 완성이라 하듯이, 시간 개념으로 새 창조와 죽은 자들의 부활의 문제를 기술한다.
  
나. 섭리의 시간

섭리론은 수세기 동안 기독교 경건 신앙의 틀 속에서 주로 논의되어 왔다. 이 틀이 20세기의 대 혼란으로 깨졌지만 다시금 새롭게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섭리를 신의 사랑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인과원인으로 이해할 것이냐가 논란거리이다. 그러나 사실 인과원인은 신학적으로 아주 문제가 많다. 이 때 신은 라이프니츠처럼 세계를 설명하는데 필요한 작업의 가정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고 모든 사건이 직선적인 시간의 지평에서만 논의될 뿐이다. 그러나 섭리론은 시간에 대한 이해를 이런 관점에서 벗어나게 한다. 예를 들면 리츨(D. Ritschl)은 시간을 하나님의 집으로 소개하고 있다.
섭리의 시간이라 하면 하나님이 자신을 이 땅에 계시하신 예수의 시간을 지칭한다. 예수의 시간에 대해 종말론적 관점에서 말하고자 할 때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그 사건에 대한 의미 해명이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는 십자가의 죽음과 밀접한 연관 속에 있고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는 부활과의 밀접한 연관 속에서 펼쳐진다. 십자가의 부활을 서로 귀속시키는 방법에 대한 문제 접근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판넨베르크의 경우처럼,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근본적으로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전권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 몰트만의 경우처럼, 십자가의 부활을 부활로부터 이해하려는 입장을 부정하려는 경향이다. 우리는 부활로부터 예수의 고난을 상기할 수는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행위를 희망하는 속에서 그 고난을 참아내게 될 때, 오늘날 인간들에게 그 고난이 오히려 이바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 이 두 입장을 양자택일로 보는 신학 작업이 있다. 그러나 어떻게 실존적이고 실사적인 현실의 이원론 또는 한편으로 하나님의 행위와 또 한편으로 시·공 속에서 경험하는 현실의 양면을 서로 부가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 그렇기 위해서 다음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예수를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 현실에서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그것과 만날 때, 우리의 삶과 태도에 대한 인식의 그 무엇이 스스로 변하는 것인가? 이 문제는 시간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어떻게 예수의 시간을 '더 이상'(Nicht-mehr)이 아니나 결코 '아직 아님'(Noch-nicht)이 아닌 그러나 아직 시간 속에 남아 계신 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다. 종말의 시간

신학에서 종말론의 중심 주제는 20세기에 복잡한 논의 역사를 거치면서 정리되고 있다. 루터와 종교 개혁의 정통주의에서 발전된 미래 종말론의 문제는 계몽주의 시대에 더 이상 '세계의 소멸'에 대한 표상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옛 세계의 소멸이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한 전제이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직선적 시간의 전제 아래서 시대적인 새로운 시작을 파악하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 철저하게 생각해야 한다. 옛 세계의 지속은 모든 연속성을 끝나게 하는 대 환란을 통해서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면 도대체 옛 소망의 내용을 옮긴 것이라 할 시간적으로 새로운 특정한 지평에서는 어떤 표상과 상들이 제공될 수 있는지 물어야만 한다.
이런 시간의 이중 구조가 계속 유지되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현재 종말론과 미래 종말론 둘 중에서 선택해서는 안 된다. 이 둘은 신약성경에서처럼 '이미'와 '아직 아님'의 긴장으로 병합되어 있다. 미래 종말론은 피히트(Georg Picht)가 말한 것처럼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는 지평을 열어 준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은유나 비유로 말할 수 있다. 현재 종말론은 이 시간의 도래를 우리의 시간과는 다르게 파악되는 세계 속에서 서술하려고 애쓴다. 이 두 종말론의 모델의 관계에 대한 많은 논란은 시간의 이 두 형태들이 어떻게 서로 서로 제한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모아지게 된다. 우리가 그 일을 하고자 할 때, 리쾨르가 한 것처럼, 두 범주적으로 구분된 세계들을 함께 논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5. 마치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종말론을 시간개념을 통해 살펴보았다. 그 결과 종말론의 핵심은 바로 시간문제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 말은 종말론의 전통적인 핵심내용(죽음, 부활, 심판, 영생)을 더 이상 다루지 않았음을 뜻한다. 종말론을 시간개념을 통해 새롭게 고찰함으로써 전통적인 종말론이 가지고 있었던 여러 문제들을 새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종말을 창조와 섭리와 연관하여 고찰할 때 의미를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목적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거기에 기초해 한국의 사상과 문화 그리고 종교적 삶을 올바로 이해해 보려는데 있었다.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에도 그리스도교가 중시하는 종말론적 시간이 있는지 물었다. 그 답은 '없다'였다. 그러나 불교에 나름대로의 미래개념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시간인 종말론적 시간을 중요하게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계기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시간을 올바로 소개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그 작업을 했다. 필자가 가지게 된 결론은 한국과 그리스도 사이의 시간이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매개나 대안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작업을 통한 둘의 대화를 위해 종말론적 시간개념이 순환성과 직선의 성격을 포함해야 한다고 나름대로 주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시간에 대한 무리한 요구이고 변형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지라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적 시간개념 자체를 올바로 소개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을 따라 성경이 말하는 시간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이런 작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먼저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적 시간을 말할 수 있는 가능 근거를 물었고 그것을 리쾨르의 '이야기 시간' 개념에서 찾았다. 이 개념에 근거해 창조와 섭리 그리고 종말을 다 함께 이야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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