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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6/01/29 (10:56) from 129.206.197.113' of 129.206.197.113' Article Number :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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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의 소칼서평과 상대주의변호 비판




홍성욱의 소칼서평과 상대주의변호 비판

홍성욱의 논점은 소칼의 두 차례에 걸친 공격 (Social Text 의 실험; 지적사기 출판) 에도 불구하고 상대주의가 설 땅은 있다는 이야기다. 왜 소칼이 사회구성주의와 포스트모던을 동일시해서 공격했는가에 대한 미국의 컨텍스트 분석, 그리고 인식론적 가치론적 상대주의에 대한 얼핏 세련된 옹호는 읽을만한 얘기들이다. 물론 이 분석은 미국에서 소칼의 반대편에 섰던 인물들 - 소칼에게 당했던 인물들이 내 놓은 나름대로의 항변의 재탕이다. 또 사례들은 홍성욱의 것이지만, 그 상대주의 옹호결론도 미국서 나온 얘기들의 재탕이다. (홍성욱은 자기가 먼저 한 얘기가 아니면 출전을 밝혔으면 한다.)

아무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도 의미는 있다. 왜냐하면 그 동안 한글로 써진 소칼사건에 대한 평은, "미제국주의자"의 프랑스에 학문에 대한 "열등감"이 빚은 "삼류학자"의 "프랑스 철학" 깍아 내리기 "상업주의"에 불과하고 "무시하는 게 장땡이다" 라는 식; 이정우 "선생님"이나, 그 친구 자칭 소르본, 복면의 중상모략가 등등의 단발마적 찍소리 정도였으니, 본바닥토론 수준으로 끌어 올려놓아야 그 담에 뭐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해도 홍성욱교수의 글의 두 가지 커다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소칼의 의도, 동기에 대한 공상과학소설적 주장을 또 늘어놓았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홍성욱의 과학에 대한 상대주의적 인식론의 변호가 하나는 번짓수를 잘못 찾았고, 다른 하나는 전혀 근거부족이라는 점이다. 홍성욱이 제시한 과학사와 과학철학상의 사례들은 조금만 논리를 정리하면, 홍성욱의 희망과는 정확히 반대로 상대주의적 인식에 대한 공격으로 바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좀 살펴보자.

소칼의 동기와 홍성욱의 소칼사건 Contextualization

소칼이 스스로 이야기한 동기는 다음과 같다. 소칼 본인은 전통적 좌파로서 사실과 논리에 근거하는 이성이 현대의 억압과 불평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해 왔다. 미국의 문예이론가들이 인간이성과 그것에 근거한 과학을 상대화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조그만 실험을 한 번 해봤다. 고 실험은 물론 Social Text 라는 미국의 상대주의자+포스트모더니스트 들의 leading trendy 학술지에 Hoax 논문을 하나 보내 본 것이다. 홍성욱이 이 잡지가 trendy 하기는 하지만 leading 하지는 않다고 주장했는데 글쎄 캐나다 토론토에선 그런지 몰라도 보스턴이나 뉴욕에서는 leading 이다. 꽤 잘 알려진 고 분야 인물들이 직접 심사하는 잡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 또 안하게 하기 바란다. 복면의 중상모략가 소르본 수준으로 떨어지기 싫으면 말이다.)

소칼의 이 스턴트로 미국 내에서의 게임은 끝났다. 아마추어 인문학자의 장난과 심각한 학술논문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분야가 제대로 된 현대학문이 될 수 없는 것은 (복면 중상모략가인 소르본이 보기에는 혹시 몰라도) 미국의 학문세계에서는 학부학생들에게 까지도 명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 Hoax 논문을 쓰면서, 또 이후 논쟁과정에서, 소칼이 발견한 것은 미국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들이 논리부족을 메우기위해 주로 기대는 권위가 주로 프랑스 반이성주의 철학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소칼의 Hoax 논문이 정확히 이 맹점을 이용해서 출판이 되었다. 적당히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상대주의자들이 좋아할 말 몇 마디 한 다음, 그것과 비스무리하게 프랑스철학자가 한 말을 갖다 붙이면 그것이 가장 명확한 논거가 된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생각해 보면 남한 지식인들이 전형적인, 남의 권위를 -외국학자, 막연한국민정서 운운 - 빌어서 말하는 얼버무리기식 글쓰기하고도 매우 닮아있다. 그러다가도 논리나 지식이 딸리면 그 담에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둥, 글쓰기 자세가 먼저 되어야 한다는 둥 전혀 논점하고 상관없는 얘기로 빠져나가려는 비열한 책동과 대중 선동을 한다. 복면의 중상모략가 소르본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본바닥 프랑스보다 남한에서 대유행을 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면에서는 아주 당연한 얘기다.)

소칼은 그래서 이번엔, 아예 브릭몽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을 직접 한번 분석해 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미국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들의 스타일의 원전이 바로 거기가 아닌가. 재밌는 것은 미국포스트모던상대주의자들이 프랑스주인들에게 막연하게 권위를 빌 듯이, 이 프랑스의 마스터들은 현대과학과 수학의 권위를 막연하게 빌어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현대 과학과 수학에 대해 좀 아는게 있는 소칼은 그 잘못된 이해, 남용과 오용을 지적하는 책을 낸 것이다.

물론 나는 잘 모르는 얘기지만, 홍성욱의 주장처럼 미국 보수적 과학계 뭐 이런 사람들이 소칼사건을 이용해 먹으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소칼사건을 홍성욱처럼 Contextualization 하는 것은 X-file 식 음모론 수준이다. 또, 뭘 이용해 먹는 것이야 이용해 먹는 사람들 맘이지만, 설혹 이용당했다 하더라도 소칼의 스턴트나 분석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E=mc^2 가 원폭제조에 이용당했다 하더라도, 아인쉬타인의 업적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홍성욱의 상대주의 변호 비판

소칼이 문제로 삼고 공격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미국 과학철학이나 연구자들 사이의 미묘한 상대주의적 요소들이 아니다. 홍성욱은 의식-무의식적으로 소칼이 이들 모두를 다 공격했다고 몰고가고 싶은지 몰라도, 소칼이 털어놓은 동기와 그의 글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홍성욱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소칼이 직업적 과학철학자가 아니라, 포퍼를 상대주의자로 오인하는 등 철학에 대해 잘 모르고 앞 뒤 안가린 잘못은 분명 있다. 그건 내 글도 마찬가지고, 사실은 홍성욱 글도 마찬가지다.)

소칼의 공격 대상은 Serious Scholarship 에 관한 한 사회구성주의 과학기술사의 Strong Program 에 국한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 Strong Program 만이 바로 또, 미국 포스트모던 문예이론가들에게 반과학 반이성주의의 인식론적 타당성을 제공해주었다. 다시 정리하지만, 영미분석철학 관점으로는 프랑스 철학자들은 심각하게 철학적 인식론을 얘기하는 사람들로 보기 힘들다. 영미식으로 가장 비슷하게 그래도 인식론의 형태를 띠고 있는게 영국에서 나온 사회구성주의 Strong Program 의 인식론이다.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Strong Program 의 논리를 얼타 좋다하고 받아들인 이유는 영미에서 얘기하려면 프랑스식 인식론 부재로는 좀 말이 좀 안되기 때문에 그 공백을 사회구성주의 Strong Program 의 주장을 빌어 메꿀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Strong Program 의 상대주의적 존재론 인식론과 프랑스 철학자들의 현란한 수사를 결합하여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를 주장했다고 보이고, 소칼의 장난끼를 동하게 한 주장은 바로 이 미국식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런데 홍성욱은 훨씬 넓은 의미의 상대주의, 예를 들어 토마스 쿤의 상대주의까지 포함해서 상대주의를 변호하고 있다. 그런데 쿤의 상대주의와 Strong Program 의 상대주의는, 쿤이 Strong Program 을 강력하게 비판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쿤은 내 기준으로는 어느 모로 봐도 존재론적, 인식론적 realist 이다. 더구나 그의 비정통 철학책인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1962" 의 모호한 주장들과는 사뭇 달리, 그의 전문적 역사책인 "Copernican Revolution, 1957" 은 명징하게 어떻게 과학적 사고가 관측사실에 의해서 도전받고 수정되고 받아들여져 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정치도, 관습도, 실용적 필요성도, 사고의 편협성도 다 과학활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결국 과학적 이론의 우열을 결정하는 것은 "논리와"와 "사실" 이외는 없다는 Implication 아주 선명하게 쿤의 첫 노작인 Copernican Revolution 에는 찍혀있다.

왜 Kuhn 의 나중 책인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이 과학자 집단에게는 마이동풍이고 영미 분석철학에도 별 영향이 없었는 데에 반해; 사회구성주의 과학사가들, 인류학자들, 몇몇 사회학자들, 포스트모던 문예이론가들이 떠받드는 책이 되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Scientific Revolution에서 보이는 모습의 토마스 쿤까지도 자기를 오독해서 추종하는 사회구성주의자들 보다는 소칼과 백배는 인식론적으로 가까울 것이다. 쿤은 Strong Program 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 적은 있어도, 과학자집단의 직업적 활동을 규정하는 인식론을 비판한 적은 없다. After all he is a historian. He wrote about history of science that scientists make.

리얼리즘에는 여러 쉐이드가 있다. 가장 철저하게 객관적 사실과 그 사실의 인식에 관한 이성적 논리에 대한 믿음을 과시하는 이성옹호 리얼리스트로 알려져있는 John Searle 의 철학도 예를 들어 Marvin Minsky 의 두뇌와 인지에 대한 사고와 비교하면 "상대적"인 리얼리즘이다. 현대 Standard 론이나 슈퍼스트링 이론 연구를 하는 이론, 실험 물리학자들 내에서도 와인버그나 호킹보다는 "상대적인" 리얼리즘 인식론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더 많다. 스티븐 와인버그나 스티븐 호킹은 "완전한 궁극적 이론"이 우리 세대에 달성 가능하다는 희망이 있는 반면, 젊은 더 많은 물리학자들은 "인간의 두뇌가 과연 궁극적 이론을 찾아내고 이해할 만큼 되나?" 라는 상대적인 질문을 한다. 강아지에게 아무리 미적분학을 가르쳐봐야 별볼일없듯 (사실은 인류의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강아지하고 별반 다를 것 없는 인간의 뇌로 수학 좀 안다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젊은학자들의 생각이 훨씬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와인버그나 호킹의 꿈이 겨냥하고 있는 것도 사실 따져보면 우주와 인생에 대한 "궁극적 이론"이 아니라 겨우(?)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상호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소칼마저도 예를 들어 "신은 우주를 만들었고, 뉴튼 덕분에 우리는 우주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생각한 19세기의 라플라스에 비하면 과학적 진리에 대해 훨씬 상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조금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과학자들은 철저하게 존재론 인식론적으로 realist 들이다. 그들의 언변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그들의 직업적 활동은 실제와 더 부합하고 더 간단한 과학이론을 만들고, 실제와 맞는지 따져보고, 더 맞는 이론을 개발하고 하는 일이다. 내가 "패배주의철학2: 개똥철학"에서 정리한 Searle 식의 "실용주의적 리얼리즘"이 약한 형태의 실재론으로 이런 활동에 종사하는 광범한 과학자들, 리얼리스트 사회과학자들의 직업의 인식론을 포괄할 것이다.

리얼리스트들이 말하는 과학의 객관성이라는 것은, 과학이론이 사실과 부합할 때 살아남는 다는 얘기; 두 이론이 대립할 때 심미적 기준 등 다른 어떤 기준이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어느 이론이 더 사실과 부합하느냐에 따라 이론이 채택된다는 얘기다. 쉬운 말로 우겨서 되는 일이 아니라, 사실에 맞아야 된다는 말이다. 이 "사실의 독재"가 바로 사실과 상관없이 이뻐서, 그냥, 남들이 하니까, 혹은 우겨서 되는 비과학적 모든 영역과 과학이 갈라지는 명확한 경계이다. 듀엠-콰인 명제로 과학적 객관성이 부정된 것이 아니라, 과학적 인식론의 통계적 지평으로의 확대 과정으로 봐야되고, 이렇게 더구나 통계적 지평으로 연장된 과학적 인식론에 의하면, 홍성욱의 얼버무림과는 전혀 달리 검증과 반증은 결국 통일 되게 된다. 전통적으로 지나치게 강하게 주장되던 과학 이론의 "검증"은 "미반증", 혹은 "반증불능"을 말할 뿐인 것이다. 소위 "검증의 논리적 패러독스"는 이렇게 해서 반이성 반과학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허깨비에 불과해지고, 과학지식은 검증을 통해 증명된 진리가 아니고, 우리가 가진 관측능력에 가장 부합하는 이론으로 논리적 상호모순이 없는, 사실에 대한 해석이다.

홍성욱이 든 사례들은 그래서 그의 주장대로 상대주의 옹호가 아니라, 반대로 정확히 과학적 객관성, realism 적 인식론을 강화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 오히려 적당하다. 뉴튼의 중력 법칙은 실재하는 무엇에 대한 과학적 객관적 지식이다. 아인쉬타인의 일반상대론은 그 뉴튼의 중력의 원인에 대한 더 포괄적인 해석임과 동시에 더 사실과 부합하는 이론이고, 양자론은 그 이론적 철학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관측 사실과 부합하기 때문에 도미넌트한 이론이 되었다. 수퍼스트링 이론은 바로 또 그 동안 논리적 충돌을 보여온 양자역학과 일반상대론을 포괄해서 양쪽을 더 일관된 포괄적 이론의 한 특수분야로 위치 지우려는 노력의 중요한 일각이다.

이 실제론적 인식론은 16 세기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에서 시작한 물리학에서 가장 선명히 확인이 되어왔고, 화학, 생물학 과 기술공학의 모든 영역을 별 어려움없이 점령했다. 더구나 나아가 18,9 세기 아담스미스와 맑스를 이어서 경제학, 일부 정치학에까지 확대된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역시 조금 더 이론적으로 정합적이고 사실과 부합하는 이론이 살아 남고, 또 발전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홍성욱의 상대주의 옹호라는 주장은 그래서 그의 사례로 보강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과학적 리얼리즘을 더 옹호할 뿐이다.

더구나 홍성욱은 마지막엔 도덕적 호소에 의존하여 상대주의를 보존하려고 하고 있다. "과학지상주의" "과학절대주의" 와 싸우는 상대주의라는 도덕적 보호 요청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잇다. 갑자기 적을 설정하고 (칼 슈미트의 Concept Political 의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돌변하는 건데. . . 괴벨스식 선동의 혐의를 쓰기 싫다면 우선 우선 과학지상주의와 과학절대주의를 정의하고 시작해야 될 것이다.

소칼도 그렇지만 나의 입장도 정확히 그런 애매모호한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과학지상주의, 과학절대주의가 뭔지, 왜 나쁜지는, 홍성욱도 누구도 정의 및 설명을 하지 않아서 아직 잘 모르겠지만; 설혹 그것에 무슨 폐해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얼버무리기식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더 과학적인 사고, 더 사실과 부합하는 과학적 이론으로 극복이 되는 것이다.

글의 마무리로, 홍성욱과 똑같은 도덕적 호소에 의존하여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를 배격해 봐야겠다.

남한의 지식담론은 한번도 미국처럼 물리학자를 비롯한 자연과학자들, 공학자 및 기술자들, 경제학자, 경영학자 등의 실용주의적 실제론자들이 헤게모니를 잡아본 적이 없는 전근대적인 수준이다. 이문열이나 이인화등의 소설가들, 사실과는 아무 상관없이 상상속에서 지어낸 얘기를 지껄일 뿐인 사람들이 지식인 행세를 하고, 기본논리공부도 안된 김대중, 유근일, 조갑제등이 얼치기 저널리스트들이 담론을 장악하고 있는 판이다.

이런 지식사회에서, 상대주의 옹호는 그 무지하고 지겨운 양비론의 양산, 근거없는 혹세무민식 글쓰기 외는 나을 것이 없다. 홍성욱이 두려워하는 과학지상주의, 과학절대주의는 뭔진 모르지만, 적어도 남한에서는 포스트모던 기버리쉬보다는 훨씬 장려되어야 하는 것처럼 들린다. 홍성욱의 상대주의 옹호는 마치 지금의 전근대적인 우물안 개구리식 남한 지식담론의 수준을 유지 강화 퇴행시키자는 주장으로까지 우려될 수 있다. 과학지상주의를 두려워 할 것인가, 전근대로의 퇴행을 두려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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