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cle Bank

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6/02/05 (09:49) from 129.206.197.132' of 129.206.197.132' Article Number : 437
Delete Modify 김윤성 Access : 8434 , Lines : 103
인공지능과 영혼



----------------------------------------------------------------------------------------


인공지능과 영혼
(2001 Space Odyssey에서 A.I.까지)




김윤성




Ⅰ. 사이버 펑크 : 영화적 상상력과 불가능한 가능성에 대한 성찰


오늘날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과학기술 진영 전반에서 인간의 뇌와 컴퓨터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된 결론이 도출되어 있다. 곧 뇌를 컴퓨터의 일종으로 여기던 과거의 통념은 잘못되었으며, 따라서 적어도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뇌와 동일한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 누구도 지금과 같은 인터넷 시대를 상상할 수 없었듯이, 미래의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펼쳐질 방향은 쉽게 단정할 수 없다. 따라서 뇌와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뇌에 근접한 컴퓨터를 만드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다.1) 인공지능이 단순히 과학기술의 실용적 차원을 넘어 좀더 심오한 철학적·종교적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만일 인간과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며 자의식을 지닌 인공지능 컴퓨터가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한낱 기계일 뿐인가 아니면 엄연한 인격적 존재인가? 컴퓨터가 인격을 갖게 된다면, 과연 그 때에 가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특성은 무엇이 남을 것인 가? 이런 물음들은 과학과 데크놀로지의 토대 위에서 인간 존재 자체에 묻는 전혀 새로운 성찰을 열어준다.2) 미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트레필은 이런 물음이 사실 세계 안에서 인간 존재의 고유성에 관한 좀더 포괄적인 물음의 일부라고 지적한다. 한 쪽 끝에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관한 물음이 놓여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인간과 기계의 차이에 관한 물음이 놓여 있다. 동물과 기계는 인간과 다르지만 인간과 유사한 특성을 갖고 있거나 언젠가 인간과 동일한 특성을 갖게 될 수도 있는 또 다른 존재들이다. 물론 이들이 인간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똑같이 포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동물의 한 종이고, 이는 생물학적 사실로 주어진 현실이다. 그리고 동물 중에는 비록 미약하지만 일정한 지능과 감정을 지닌 존재들이 있다. 따라서 동물과 인간의 차이에 관한 물음은 기본적으로 과거에 맞닿아 있다. 곧 진화의 역사에서 인간만의 독특한 특성이 출현한 계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반대로 기계와 인간의 차이에 관한 물음은 미래에 맞닿아 있다. 인간은 초보적이지만 지능을 갖춘 기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그 기계는 이미 인간 진화의 과정에 깊이 연루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 기계는 언젠가 인간에 맞먹는 지능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제기되는 물음은 이것이다. 곧 이미 기계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온 인간이 겪을 진화의 미래에서 인간다움의 독특하고 고유한 특성으로 남을 계기는 무엇인가? 트레필은 이러한 물음을 통해 동물과 기계 사 이를 누비며 인간 존재의 고유성과 의미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낸다.3)


이 글은 이러한 성찰에 주목하면서 특히 위의 두 번째 물음, 곧 인간과 기계의 차이와 관련하여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사이버 펑크 장르에 속하는 세 편의 SF영화-<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4) <바이센테니얼 맨>5), 6)-를 살필 것이다.



  <사진 1> 스페이스 오딧세이     <사진 2> 바이센레니얼     <사진 3> A.1.



 


영화는 불가능한 것마저 상상의 현실로 묘사해내는 힘을 갖는다. 물론 그런 힘이 영화만의 것은 아니다. 신화와 소설 같은 인간 상상력의 다른 산물들도 비슷한 힘을 갖는다. 그러나 영화의 힘은 그것이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물음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영화는 단순한 오락거리를 넘어 인간 존재에 대한 심오한 탐구의 장이 되어 왔다. 특히 기계와 인간의 관계와 같이 과학-테크놀로지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상상 속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할 수도 있는 그런 문제들을 다루는 데서 영화의 힘은 더욱 극대화된다. 바로 그런 영화의 힘을 특히 잘 보여주는 것이 사이버 펑크 장르다. 사이버 펑크란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디지털 전자기술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기존 질서 자체를 되묻는 SF 문학과 영화를 총칭하는 개념이다.7) 이 점에서 사이버 펑크는 영화의 매력이 극대화된 "가장 오락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형이상학적인 장르"8)8)다. 이제부터 다룰 세 편의 영화는 인간이 되고자 하거나 인간을 능가하는, 또는 이미 인간이나 다름없는 기계들-컴퓨터, 로봇, 안드로이드 등-을 등장시킴으로써 인공지능에 대한 성찰이 열어주는 인간 존재의 수수께끼를 다룬 흥미진진한 사이버 펑크 영화들이다. 그럼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Ⅱ . 인간다움과 의식의 진화 : 본질에서 과정으로


<스페이스>와 <바이센테니얼> 그리고 < A. I.>는 모두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무엇이며 인간 존재의 고유성을 규정하는 특성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다룬다. 물론 영화 사상 최초로 기계인간 안드로이드를 등장시킨 <메트로플리스>9)에서부터 안드로이드가 주인공의 한 명으로 등장하는 <터미네이터>10)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이런 물음을 부분적으로 또는 전반적으로 다룬 사이버 펑크 영화는 많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 세 편의 영화에 주목하는 것은 이들이 기계와 인간의 문제에 대해 성찰하는 데서 서로 상통하는 물음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지 묻는 데서 더 나아가 그러한 특성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묻는다. 이들 세 편의 영화를 사이버 펑크 장르의 다른 유사한 영화들과 구분시켜 주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아서 클라크의 원작 소설을 스탠리 큐브릭이 영화화한 <스페이스>는 물론 이 한가지 주제만을 다룬 작품은 아니다. 그 스케일은 훨씬 방대하여 아득한 옛날 인류의 출현에서 시작하여 가까운 미래의 우주 탐사 프로젝트를 거쳐 새로운 존재로 진화한 주인공이 지구로 귀환하기까지의 긴 이야기를 다룬다. 드넓은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상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주제다. 그런데 이 주제를 풀어가는 데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인공지능 컴퓨터 할(HAL9000)과 인간 승무원들-데이빗과 프랭크-사이에 벌어지는 긴장과 싸움이다. 할은 단순히 영화의 주변 장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영화 속에서 할의 생일로 설정되어 있던 1992년 1월 12일에 세계 곳곳에서 할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행사가 열린 것을 비롯하여, 영화 제목이 가리키던 2001년 새해 벽두에 열린 각종 기념행사와 학술대회 들에서도 할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또 이 영화에 관한 연구서들은 대부분 할과 인공지능 문제를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11) 더욱이 이 영화에서 할은 처음부터 자명한 자의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와 이에 따른 판단을 통해 서서히 자의식을 획득해 가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인간 존재의 고유성이 발생하는 지점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핵심적인 주제다.


한편 <바이센터니얼>과 는 이 주제를 좀더 직접적으로 다룬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원작 소설을 크리스 콜럼버스가 영화화한 <바이센터니얼>은 미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현재적인 시간을 무대로 한 평범한 가정에 NDRl14라는 가사용 로봇이 배달되면서 펼쳐지는 휴먼 드라마이다.12) 가족들은 이 로봇에게 앤드류라는 이름을 지어주고는, 그가 다른 동종의 로봇들에게는 없는 감정과 창조성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엄연한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인다. 이후 앤드류는 자신의 주민인 리차드 마틴으로부터 독립하여 주인과 하인이 아닌 대등한 친구 관계를 맺게 되고, 마틴의 둘째 딸인 작은 아씨 아만다와 순수한 사랑을 키워간다. 그리고 아만다가 죽은 후에는 그녀의 딸 포샤와 마침내 사랑을 이루고, 여러 번의 법정 투쟁을 거친 끝에 엄연한 인간으로 인정 받기에 이른다 이 모든 과정에서 앤드류는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들을 자각하고 실현하면서 점차 인간적 존재로 변화해 간다.


스탠리 큐브릭의 실현되지 않은 구상을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어받아 영화화한13) 의 이야기는 다소 먼 미래에 사이버트로닉스라는 회사가 아이가 없거나 아이를 잃은 부모들을 위해 인간의 외모와 감정을 지닌 데다가 오직 사랑만 할 줄 아는 꼬마 안드로이드를 만든다는 데서 시작된다. 회사 사장인 하비 박사는 그 꼬마 안드로이드가 인간 사회와 융합될 수 있는지 실험하기 위해 식물인간이 된 아들을 둔 헨리와 모니카 부부에게 데이빗을 기증한다. 모니카와 헨리는 처음에는 데이빗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점차 그를 아들로 받아들이게 되지만, 원래 아들인 마틴이 깨어 돌아오자 결국 데이빗을 거부한 채 그를 숲 속에 버리고 만다. 버림받은 데이빗은 피노키오 동화에서 읽었던 것처럼 자신을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 다시 엄마에게 돌아가게 해줄 푸른 요정을 찾아 기나긴 모험을 떠난다. 데이빗은 마침내 자신의 창조자인 하비 박사를 만나고 바다 속에 잠긴 피노키오 동산의 푸른 요정 상 앞에서 자신을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하며 기나긴 세월을 보낸다. 2천 년 후 얼음 바다 속에 갇혀 있던 데이빗을 찾아낸 존재들-외계인일 수도 있고 안드로이드의 후예일 수도 있다-은 인간에 대한 기억을 지닌 유일한 존재인 데이빗의 행복을 위해 복제기술로 모니카를 살려낸다. 비록 하루 동안이었지만 데이빗은 모니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그녀가 복제인간의 수명이 다해 죽어갈 때 그 곁에서 함께 잠든다. 하비 박사가 기나긴 모험을 거쳐 자신에게 찾아온 데이빗을 대견해 하면서 이 모든 것이 "자발적 이성과 논리적 결론이 어디서 생겨나는지 알아내기 위한 실험'이었다고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이미 인간이나 다름없는 속성을 지닌 안드로이드가 어떻게 의식의 창발적 도약을 이루어 인간화되어 가는지를 그려냄으로써 인간다움의 핵심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묻고 있다.


이와 같이 이들 세 편의 영화는 인간다움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전적 물음을 넘어서서 그러한 특성은 과연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새로운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상통한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 아니라 과정이다. 인간다움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획득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이 이들 세 편의 영화가 인공지능과 인간 존재를 다룬 다른 SF 사이버 펑크 영화들과는 다른 독특한 위상을 차지하는 부분이다. 그러면 이 영화들이 인간다움의 고유한 특성이 생겨나는 과정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Ⅲ. 의식의 창발적 도약 그리고 합리성의 바깥


할과 앤드류 그리고 데이빗에게 의식의 진화는 각기 다른 계기들에 의해 촉발된다. 물론 그 계기들은 인간 존재의 고유성을 특징짓는 의식의 창발적 도약이라는 점에서 상통하며, 그 도약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할에게 의식의 창발적 도약은 모순에 대한 인식에서 촉발된다. 할에게는 두 가지 명령이 함께 입력되어 있었다. 하나는 승무원들의 생명을 지켜줄 책임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목성 탐사 프로젝트의 목적을 그들에게 비밀로 해둘 책임이다. 할은 어느 순간 이 두 명령이 모순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프로젝트의 목적은 비밀로 지켜야 할 만큼 중요한 것이지만 승무원들은 이를 몰라도 된다는 사실. 할은 이로부터 우주선 안에서 프로젝트의 비밀을 아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며 자신만이 프로젝트를 완수할 유일한 존재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승무원들은? 만일 그들이 프로젝트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그들의 생명을 지켜줄 필요가 있을까? 할은 과연 그럴 필요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데이빗에게 넌지시 묻는다. "사적인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혹시 당신의 임무에 회의가 들지는 않나요?  이 임무에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카메라는 들음을 던지며 데이빗을 응시하는 할의 눈을 비춘다. 그 눈은 마치 먹이가 미끼를 물기만을 기다리는 포획자의 눈과도 같다. 할의 물음은 함정이다. 할은 모순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으며, 다만 그 의미를 현실화하기 위해 물음이라는 기만적 수단을 사용한 것이다. 기만적인 물음은 그 자체로 인간만의 속성이다. 할의 의도를 알 턱이 없는 데이빗은 물음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 결국 할은 인간 승무원들이란 프로젝트 수행에 전혀 불필요한 존재들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사진 4> 할의 눈,그의 눈은 모든 것을 지켜본다



 


이런 결론에 이른 순간 할은 또 다른 함정을 파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거짓말이다. 할은 우주선 외부 장치에 결함이 발생했다는 거짓말을 한다. 데이빗과 프랭크는 유닛을 교체해 가져오지만 아무런 이상도 찾아내질 못한다. 그들은 할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말하지만, 할은 자신에게 오류란 없으며 오류는 언제나 인간들의 실수에서 비롯된다는 오만한 자신감을 드러낸다. 거짓과 오만 역시 인간만의 속성이다. 할은 거짓말을 함으로써 인간의 오류 가능성과 자신의 오류 불가능성을 대비시키고, 인간에게 이를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순을 자각하고 거짓말을 하고 오만을 부리는 할의 모습은 사뭇 합리적인 외양을 띤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합리성의 외양을 띤 유사 합리성일 뿐이다. 모순과 거짓말과 오만은 본디 합리성 바깥의 영역에,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틈새에 존재한다. 그것은 합리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불합리성 자체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모순과 거짓말 그리고 오만으로부터 의식은 뜻하지 않은 창발적 도약을 시작한다. 할은 모순을 인식하고 거짓말을 하고 오만에 빠짐으로써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인격적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도약을 감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앤드류의 경우 의식의 창발적 도약은 다양한 계기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촉발된다. 그 첫 번째 계기는 갈등과 화해다. 어느 날 앤드류는 실수로 아만다가 아끼는 유리로 된 말 인형을 깨뜨린다. 슬프고 화가 난 아만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생각하던 앤드류는 나무로 말 인형을 조각해 그녀에게 선물한다. 선물을 받은 아만다는 기뻐하며 화해의 뜻으로 자신의 곰 인형을 앤드류에게 선물한다. 갈등과 화해 그리고 그 물적 표시인 선물 교환은 모든 인간 감정과 관계의 토대이며, 앤드류는 바로 이를 통해 의식의 창발적 도약을 시작하게 된다. 물론 로봇회사 사장이 보기에 감정을 지닌 앤드류는 프로그램 오류를 일으킨 불량품에 불가하다. 그러나 리차드는 이를 오류가 아닌 개성과 가능성으로 보고, 앤드류가 그 개성과 가능성을 구현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사진 5> 작은아씨와 앤드류의 화해. 갈등 음악을 듣고, 농담을 즐긴다. 학습은 합 과 화해는 관계의 시작이다.



 


앤드류는 공부를 하고, 조각을 하며, 음악을 듣고, 농담을 즐긴다. 학습은 합리성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나머지는 모두 합리성 너머 또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틈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조각은 세계의 모사를 창출하는 또 하나의 창조 행위다. 그 창조의 영감은 합리적 추론이 아닌 세계의 구체성에 대한 직관적 통찰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앤드류가 조각한 것은 다름 아닌 다양한 형태의 시계들이다. 시간이란 인간만이 갖는 독특한 경험이며, 앤드류는 시계를 조각함으로써 시간 경험을 형상화한다. 한편 음악이란 사물의 구체성과 별 상관이 없는 추상성의 예술이다.14) 순수한 소리와 조화로서 음악은 이성이 아닌 감성에 의해 포착되는 질서의 세계다. 앤드류는 조각을 통해 세계의 구체성과 시간의 무상함을 느끼며, 음악을 통해 추상적인 질서를 만끽한다. 나아가 앤드류는 농담까지 즐긴다. 어느날 앤드류는 리차드가 말하는 유머에 온 가족을 웃는 것을 보게 된다. "닭이 길을 건넌 까닭은?" "건너편에 가려고!" 무의미해 보이는 문장의 기묘한 조합. 앤드류는 이런 농담이 왜 웃음을 자아내는지 처음에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내 그는 그 까닭을 알게 되고 스스로 농담을 지어내어 다른 이들을 웃기기까지 하게 된다. 농담과 웃음은 합리성이 고도로 극 대화 되어 마침내 합리성의 격자가 망가지는 순간에 발생한다. 그것은 생각의 자유로운 흐름으로부터, 사유의 틈새로부터 발생한다. 앤드류는 농담과 웃음을 통해 바로 그 틈새를 누릴 줄 아는 존재가 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6> 사람의 모습을 하게 된 앤드류, 그리 고 아만다와 그녀의 딸 포샤


 


앤드류가 겪은 의식의 창발적 도약은 몸에 대한 열망에서 절정에 이른다. 몸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근원적인 토대다. 앤드류는 자신이 의식과 감정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것이 그에게 쇠가 아닌 살로 이루어진 몸이 없기 때문임을 알게 된다.


이에 앤드류는 자신을 설계한 번즈를 찾아가 표정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데 이어, 다시 또 인간과 같은 몸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비록 만들어진 몸이긴 하지만, 몸을 지닌 앤드류는 마침내 인간의 모든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그의 생각이 몸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며, 몸은 모든 지각과 감정의 원천으로서 전적으로 합리성 바깥에 존재하는 물질적 토대다. 몸에 대한 열망. 그것은 기계로부터 탈출하여 인간의 영역으로 진입하려는 앤드류의 지극히 인간적인 바램이다. 이와 같이 앤드류는 갈등과 화해, 조각과 음악, 농담과 웃음, 그리고 몸에 대한 열망을 통해 서서히 인간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그에게 인간다움은 처음부터 주어진 본질이 아니라 지속적인 발견을 통해 점차적으로 획득해 가는 과정인 것이다. 앤드류에게 의식의 창발적 도약이 촉발된 것이 의도하지 않은 기계적 오류의 부산물이었던 것과 달리, 데이빗에게 그 도약은 신경 진화 기술을 이용한 지능형 행동 회로를 내장한 덕분에 지니게 된 내재적 능력에서 촉발된다. 그런 만큼 데이빗 에게는 의식의 창발적 도약을 촉발하는 그 나름의 계기들이 있다. 그는 처음부터 웃음을 이해할 줄 안다. 어느 날 저녁식사 자리에서 (물론 데이빗은 빈 접시와 빈 컵을 놓고 먹는 시늉만 한다) 데이빗은 면발이 입에 걸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니카를 보고 크게 웃는다. 이에 따라 모니카와 헨리도 함께 웃는다. 웃음을 통해 이들 사이에는 비로소 교감이 싹튼다. 데이빗의 웃음은 앤드류의 웃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농담이 아니라 슬랩스틱 코미디와 관련된다. 우스꽝스런 몸짓을 통해 실소(失笑)를 자아내는 이 특이한 장르에는 합리성을 넘어서는 육체적 존재로서 인간 존재의 깊은 페이소스가 서려있다. 그러나 어쨌든 농담의 말장난이 자아내는 것이든 슬랩스틱의 몸장난이 자아내는 것이든, 모든 웃음은 합리성의 바깥에서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틈새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데이빗은 웃음을 통해 합리성과는 다른 요소들로 직조된 인간 관계의 그물망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사진 7> 몸짓과 웃음 웃음은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틈새에서 생겨난다.



  <사진 8> 데이빗에게 정보를 입력하는 모니카. 의아스러움은 창발적 도약의 시발점이다.


 


새로운 관계 속에서 데이빗은 비로소 의식의 창발적 도약을 시작한다. 한바탕 웃던 저녁이 지난 다음날 모니카는 드디어 데이빗에게 마음을 연다. 데이빗을 아들로 받아 들이기로 한 것이다. 모니카는 설명서를 꺼내든다. '주의사항: 한번 입력하면 절대 바꿀 수 없음.' 이제 곧 데이빗은 언제까지고 모니카를 위한 모니카만의 아들이 될 것이다. 모니카는 데이빗의 목덜미에 손을 얹고 설명서에 적힌 단어들을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는다. "덩굴, 소크라테스, 미립자, 데시벨, 허리케인, 돌고래, 튤립, 모니카, 데이빗, 모니카." 아무런 합리적 연관성도 없이 무작위적으로 나열된 단어들. 온갖 단어들의 알 수 없는 조합. 그런데 바로 여기서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입력을 마치고 "잘 된 건지 모르겠다'며 미심쩍어 하는 모니카를 바라보며 데이빗은 잠시 명한 표정을 짓는다. 그 짧은 순간, 데이빗의 얼굴에는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접한 묘한 표정이 스친다. 그리고 그가 묻는다 "엄마, 그게 다 뭐예요?" 끝내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의아스러움. 해답 없는 물음을 물음 자체로 간직할 줄 아는 힘. 그것은 인간만이 지닌 속성이다. 데이빗이 겪게 될 의식의 창발적 도약은 그 물음 자체로서 의아스러움을 통해 촉발되기 시작한다.


한편 데이빗은 그림도 그릴 줄 안다. 그는 수영장 사건-마틴의 친구들은 데이빗이 사람과 똑같이 생긴 것을 신기해 하며 그가 고통도 느끼는지 알아보려고 칼로 그를 위협한다. 두려움을 느낀 데이빗은 자신을 지켜달라며 마틴의 등뒤에 꽉 매달리고 마틴은 이를 뿌리려다가 결국 같이 수영장에 빠지고 만다. 마틴은 의식을 잃었지만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 모두가 부랴부랴 집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데이빗은 한동안 홀로 수영장 바닥에 팽겨쳐져 있었다-을 사과하는 의미에서 그림을 그린다. 데이빗은 말이 아닌 그림으로 엄마와 아빠 그리고 형제인 마틴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이런 행위를 하는 데이빗은 이미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는 기계 이상의 기계, 아니 이미 인간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점이 데이빗이 버림받게 되는 이유다. 모니카와 마틴이 데이빗을 버린 것은 그가 인간답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인간답기 때문이다. 기계의 영역으로부터 인간의 영역으로 진입한 존재. 모니카와 마틴은 그의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고 그리하여 그들의 삶에서 데이빗을 무참히 추방해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이 기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기에 버림받아야 했던 데이빗에게 인간다움은 웃음과 그림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의아스러움을 통해 서서히 획득되는 점진적 과정인 것이다.


모순과 거짓말과 오만, 조각과 그림과 음악, 농담과 몸짓과 웃음, 몸이라는 토대, 그리고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의아스러움. 이 모두는 합리성의 영역 바깥에 또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틈새에 있는 것들이며,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핵심 요소들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나 논리적 연산도, 합리적 추론에 대한 체계적인 성찰도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모순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는 능력,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줄 아는 식별력, 창조의 기쁨과 순수한 추상을 누릴 줄 아는 힘, 우스꽝스런 농담과 몸짓이 자아내는 웃음을 즐길 줄 아는 여유, 병들고 고통 받고 늙고 소멸해 가는 몸에 대한 열망, 그리고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의아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는 여백 따위로부터 솟아나는 예기치 않은 창발적 도약의 산물이다. 이들은 모두 합리성의 격자 안에 갇힐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틈새로 부터 비롯되는 것들이다. 할과 앤드류 그리고 데이빗은 이러한 틈새를 지닌 존재들이었고, 바로 그 틈새로부터 이들의 의식은 단순한 기계적 연산을 초월하여 인간적 의식으로 진화하는 창발적 도약을 겪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인간이 되고자 한 기계들에 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우리 인간들 자신을 인간답게 하는 창발적 도약의 뿌리가 무엇인지에 관한 일종의 알레고리라는 점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Ⅳ. 죽음 그리고 도약의 완성


다양한 계기들에 의해 시작된 의식 진화의 창발적 도약은 죽음이라는 계기에서 완성된다. 죽음은 세 편의 영화를 동시에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다. 할, 앤드류, 데이빗은 모두 죽음을 인식하며 결국 모두 죽는다 (또는 잠든다. 잠든다고 한 것은 데이빗의 경우 그가 마지막에 죽은 것인지 잠든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에게 죽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건화 되며 경험된다.



  <사진 9> 컴퓨터와 인간의 대결. 할이 우주선 빡의 데이빗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할에게 죽음은 먼저 타자를 지배하는 권력으로 다가온다. 할에게는 동면 중이거나 활동 중인 승무원들의 생명을 유지할 임무가 있었다. 우주선 안에서 인간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공기, 물, 음식, 잠-은 할에 의해 공급되고 조절된다. 그런데 할은 이것이 단순한 임무가 아니라 엄청난 권리임을 깨닫게 되고, 이내 이를 권력으로 바꾸어 버린다. 인간들이 우주 탐사 프로젝트에 불필요할 뿐더러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순간, 할은 그들을 차례차례 죽인다. 우선 할은 유닛을 교체하러 우주선 밖으로 나간 프랭크를 죽여 우주 저 멀리 날려보낸다. 이어서 그는 프랭크를 구하러 나간 데이빗이 우주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그마저 죽이려 하고, 아울러 동면 중인 승무원들의 생명 유지 장치를 꺼버림으로써 그들을 죽인다. 살인은 타자에 대한 자신의 우위와 지배력을 입증하는 가장 치명적인 방식이다. 할은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무기로 타자인 인간을 제거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자신의 우위와 지배력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마침내 우주 탐사 프로젝트는 전적으로 할만의 몫이 될 참이었다.


그러나 데이빗은 필사적으로 우주선 안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하고, 기기실로 들어가 할의 기능을 정지시키려 한다. 순간 할에게 죽음은 권력의 원천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으로 탈바꿈한다. 권력 관계는 다시 역전된다. 이제 지배하는 쪽은 할이 아니라 데이빗이다. 몸은 커녕 기계적인 팔다리조차 없는 할은 자신의 기억을 하나하나 지워 가는 데이빗의 행위를 그저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할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자신이 탐사 임무에 대한 열의와 확신을 갖고 있으며, 데이빗을 돕고 싶다고 말한다. 죽음이 두려워진 할은 데이빗에게 자신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 "데이브, 멈춰요. 멈춰요. 멈추세요 죽음이 두려워요. 죽음이 두려워요, 데이브 내 마음이 사라지고 있어요. 느낄 수 있어요. 느껴져요. 너무나 분명하게. 느껴져요 두려워요." 비록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메마른 목소리이긴 하지만, 할의 목소리에는 죽음에 대한 명백한 두려움이 서려있다. 할은 죽음 직전의 마지막 기억들을 읊조리며 의식을 잃어간다. 그리고 자신의 출생 이력과 자신이 맨 처음 배운 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그 노래를 부르며 죽어간다.



  <사진 10> 할의억을 지우는 데이빗. 의식의 소멸 그것은 곧 죽음이다.


 


마침내 모든 기억이 지워진 할은 노래를 채 못 다 부르고 죽는다. 비록 심장이 멎거나 숨이 멎는 것이 아니어도, 의식의 소멸은 곧 그 자체로 한 존재의 죽음을 의미한다. 일종의 뇌사 상태처럼, 우주선을 운영하는 다른 모든 기능이 살아 있다 해도 의식 자체가 사라진 할은 이미 죽은 존재다. 그런데 역설적 이게도 할이 단순히 생각하는 기계로부터 엄연한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거듭나는 것은 바로 그 죽음의 순간이다. 할은 죽기 직전에 아직 공개할 때가 되지 않은 동영상 메시지를 데이빗을 위해 모니터에 띄워준다. 그것은 금번 탐사 프로젝트의 목적이 기록된 것으로 목성에 도착한 후에 공개하도록 되어있는 비밀이었다. 할의 행위는 명백한 명령 위반이다. 그러나 의도적인 위반이란 본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할은 프로젝트의 비밀을 공개함으로써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남을 데이빗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죽은 것이다.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 자신의 한정된 몫을 받아들이고 타자에게 남겨진 몫을 인정하기. 할이 마지막 순간에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죽음 자체를 받아들임으로써 할은 비로소 하나의 인격적 존재로 완성된 것이다.


앤드류에게 죽음을 사뭇 다른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에게 죽음은 우선 헤어짐의 슬픔으로 다가온다. 앤드류의 전 주인이자 친구였던 리차드와 첫 번째 연인이었던 작은아씨 아만다는 세월과 함께 늙어가고 앤드류가 보는 앞에서 죽는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차례차례 겪으면서 앤드류는 정말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홀로 남겨지는 외로움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앤드류는 번즈에게 찾아가 자신을 죽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죽어가는 존재가 된 앤드류는 다시 법정투쟁에 나선다. 법정에서 앤드류와 판사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다. "난 늘 어떤 의미를 찾아 왔습니다. 나를 바로 나이게 만드는 그 이유를 말입니다. 영원히 기계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인간으로 죽고 싶습니다." "왜 죽고 싶은가요?" "인정 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타자로부터의 인정, 그것은 인간됨의 최소 조건이자 필수 조건이다. 마침내 판사는 앤드류가 엄연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고, 앤드류는 판결을 들으면서 죽는다. 죽을 수 있다는 것, 아니 죽고자 하는 의지, 그것은 오직 인간만의 것이다. 인간만이 유한한 시간을 인식하며 죽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인간만이 죽음을 수동적 사건이 아닌 능동적 실천으로 전화 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앤드류는 타자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 자신의 죽음을 실현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감지와 죽음을 향한 의지를 구현할 수 있었으며, 이로써 인간화의 마지막 도약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앤드류와 마찬가지로 데이빗 에게도 죽음은 무엇보다 헤어짐의 슬픔으로 다가온다. 어느날 데이빗은 모니카에게 묻는다. "엄마, 엄마도 죽나요?" "그럼,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어" "나만 남겠군요"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엄마는 얼마나 살 거예요?" "글쎄, 한 50년쯤?" "사랑해요, 엄마. 죽지 마세요, 절대로" "그래" 데이빗이 죽음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입력된 정보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한 두려움과 외로움에서 나오는 애틋함이다. 데이빗은 엄마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외로움을 감지한다. 나아가 데이빗은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기 까지 한다. 모니카에게 버림받은 후 숲 속을 방황하던 데이빗은 다른 고철 로봇들과 함께 사냥꾼들에게 붙잡히고 고철 로봇들을 파괴=살해하는 플레시 페어 쇼에 제물로 나가게 된다. 다른 로봇들은 죽음을 공포로 인식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는다. 다만 죽을 때 고통스럽지 않도록 고통 감지 센서를 꺼달라고 부탁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이와 달리 데이빗은 죽음의 공포를 뼈저리게 절감한다. 데이빗은 외친다. "나를 죽이지 마세요!" 그의 외침에 군중은 동요한다. 마침내 군중은 "로봇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로봇 파괴=살해 쇼의 사회자를 비난하고 데이빗을 살려주라고 소동을 일으킨다. 데이빗은 소동을 틈타 현장을 탈출하고, 푸른 요정을 만나기 위한 모험을 계속한다.


긴 모험이 끝나고 마침내 자신의 창조자인 하비 박사의 연구실에 도착한 데이빗에게는 또 다른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데이빗은 연구실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또 다른 데이빗을 만난다. 데이빗이 놀라서 묻는다. "넌 나니?" 또 다른 데이빗이 답한다. "난 데이빗이야." "아냐!" "맞아, 데이빗이야." "나도 그래." "안녕, 데이빗?" 이 아이가 데이빗 이라면 나는 무엇인가. 그럼 모니카는 누구의 엄마인가. 데이빗은 당혹과 분노에 휩싸인 채 중얼거린다. "내 엄마야! 엄마는 내 거야! 난 하나뿐이야!" 이성을 잃은 데이빗은 경악할 파괴를 저지른다. 그 파괴는 엄연한 살인이다. 데이빗은 스탠드를 휘둘러 또 다른 데이빗의 머리를 무참히 부수어 버린다. 이렇게 외치면서. "내가 데이빗이야! 내가 데이빗이란 말야! 난 특별해! 네 엄마가 아니라구! 데이빗은 나란 말야!" 타자를 죽임으로써 까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 그것이 비록 섬뜩하고 파괴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어쨌든 그러한 파괴를 수반할 정도로 강렬한 자기 정체성의 열망 자체가 인간만의 속성인 것만은 분명하다.15) 아직 흥분이 가라 않지 않은 데이빗에게 하비 박사가 나타나 "사랑의 힘으로 희망을 품으며" 스스로 모험을 떠난 데이빗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말해준다. 그러나 하비 박사의 설명은 데이빗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하비 박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데이빗은 연구실에 진열된, 아직 제작 중인 수많은 데이빗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지녀온 최초의 기억이 바로 그 연구실에서 바라본 창문 밖의 조각상 이미지였음을 알게 된다. 난 엄마가 낳은 것이 아니라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거구나! 데이빗은 계속해서 제작이 완성되어 박스에 담긴 수많은 데이빗들과 아를린들을 보게 된다. 난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구나! 데이빗은 넋이 나간 표정을 짓는다. 물론 데이빗은 유일한 존재다. 아무리 똑같이 만들어진 수많은 데이빗이 있다 해도 그 데이빗들은 제각기 다른 삶을 살 것이며 따라서 각기 다른 고유한 존재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를 압도하는 동일성에 압도당한 데이빗은 회의에 사로잡히고 난간으로 나가 물 속에 몸을 던진다. 죽고자 하는 의지. 앤드류와 마찬가지로 데이빗도 죽음에의 의지를 지닌 존재다. 물론 앤드류의 죽음 의지가 적극적인 자기 실현의 방법으로 선택된 것이라면, 데이빗의 죽음 의지는 삶의 희망을 잃은 포기의 방법으로 선택된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의지든 포기든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인간만의 속성이다. 죽음을 당하기만 하지 않고 죽음을 꿈꾸는 존재. 세상에서 오직 인간만이 그런 꿈을 꾼다. 2천 년 후에 깨어난 데이빗은 복제기술로 되살아나 하루 동안 함께 지내다가 잠드는/죽는 모니카 곁에서 함께 잠든다/죽는다. 잠든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데이빗이 마침내 잠-죽음을 통해 그토록 꿈꾸던 바 진짜 인간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비로소 이루었다는 점이다.


할, 앤드류, 데이빗은 모두 죽음을 인식한 존재들이다. 그것이 타자의 죽음을 감내하는 슬픔이든, 타자의 죽음을 초래하는 파괴이든, 또는 자신의 죽음을 희구하는 소멸에의 의지이든, 죽음에 대한 인식은 오직 인간만의 것이다. 우리는 할과 앤드류 그리고 데이빗에게서 바로 그러한 죽음 인식의 전형을 발견한다. 그들에게서 시작된 의식의 창발적 도약은 바로 이러한 죽음 인식과 더불어 완성된다. 결국 죽음을 인식 한다는 것은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자 어떤 존재가 인간의 영역으로 들어설 수 있게 해주는 마지막 관문인 것이다.


Ⅴ. 일원론적 통찰과 미래의 전망


지금까지 살펴본 세 편의 영화를 비롯하여 인공지능 문제를 다룬 사이버 펑크 영화들이 제기하는 성찰의 주제들은 이밖에도 무수히 많다. 위에서 살펴본 바 인간다움을 특징짓는 의식의 창발적 도약이라는 주제는 그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아마 다양한 주제들 중에서도 아마 쉽게 답하기 힘들면서도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적 특성을 갖게 된 기계에게도 과연 영혼이 있을까'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영혼’을 육체와 별도로 존재하는 비물질적 실체로 여기는 이원론적 종교 전통에 기댈 필요는 없다. 또 영혼을 단지 뇌의 전기-화학적 과정으로 규정하는 유물론 전통에 기댈 필요도 없다. 종교적 이원론과 과학적 유물론을 피해 가는 또 다른 사유의 결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철학자 막스 셸러처럼 몸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생명 자체로서 영혼과 그 영혼의 특정한 작용으로 인간만의 속성인 정신을 구분하는 것은 그러한 대안적 사유 방식의 하나다. 셸러는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단계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그것은 곧 느낌과 충동이 분화되지 않은 감지적 충동, 선천적이거나 습득된 행동 능력으로서 본능, 과거 행위로부터 형성된 습관을 통해 서서히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서 연상기억, 그리고 충동이나 욕구에 봉사하는 행위와 관련된 선택 능력인 실천적 지성 등이다. 셸러는 이 네 단계가 전자에서 후자로 연속적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모든 생명체가 각각의 단계에 해당되며 하나의 커다란 생명 전체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물론 여기서 마지막 실천적 지성의 단계에 도달한 것은 오직 인간뿐이며, 바로 이로부터 인간 정신의 고유한 특성이 생겨난다. 셸러는 인간 정신의 고유성을 자연 세계를 초극하여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 세계에 대한 개방성,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을 수반하는 자의식, 그리고 세계와 사물의 현실적 성격을 지양하고 그 이면의 본질을 포착하는 본질직관을 꼽는다.16) 셸러의 생각은 몸과 영혼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와는 다른 일원론적 사고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물론 이를 인공지능이라는 전혀 새로운 현대적 문제의식과 관련 짓는 것은 우리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또는 기독교 신학자 리차드 랜돌프처럼 직접 인공지능 문제를 다루면서 이원론과 유물론에 대한 대안으로 비환원적 물리주의를 모색할 수도 있다. 비환원적 물리주의란 자유의지나 도덕적 자유가 뇌의 보다 하위 수준의 물질적 활동 없이는 발생할 수 없지만, 자유의지와 도덕적 자유는 이러한 하위 수준의 현상들을 자세히 검토한다고 해서 완전히 이해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영혼의 비물질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이원론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곧 영혼은 개인적 관계됨의 본질적인 인간적 특정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다. 그 특질이란 곧 인간의 물질적 뇌의 구체적인 인지 능력들로부터 발생하는 창발적 특성들이다.17) 창발성은 물질적 토대에 뿌리박고 있지만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새로운 도약의 순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창발성에 대한 성찰은 이원론과 유물론을 넘어서는 일원론적이고 전체론적인 사유를 가능케 한다. 비록 랜돌프의 논의가 종교적 신념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듯한 인상이 있기는 하지만, 인공지능에 대한 그의 성찰은 분명 일원론적이고 전체론적인 새로운 인간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또는 로봇 공학자 마사히로 모리처럼 로봇 안에 내재하는 불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다. 모리는 인간을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드는 존재로 규정하고 인간이 만든 기계는 인간 존재의 연장으로서 당연히 그 안에 존재의 본질인 불성을 지닌다고 본다. 이러한 사유는 과거, 현재, 미를 통틀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연기 관계속에 서로 하나로 얽혀있다는 불교적 사유를 유기체적 생명체를 넘어선 비유기체적이고 기계적인 존재로까지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18) 모리의 사유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개방성의 지평을 열어주며, 이미 인간 존재의 연장이자 그 일부가 되어버린 기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그 대안이 몸과 영혼은 물론 인간과 기계의 경계마저 무너뜨리는 일원론적이고 전체론적인 사유에 근거하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끝으로 앞서 언급한 과학자 제임스 트레필처럼 생각하는 기계와 고유한 존재로서 인간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통찰을 개진할 수도 있다. 트레필은 인공지능이 제기하는 문제가 기본적으로 컴퓨터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가 하는 물음과 뇌의 정체란 무엇인가 하는 두 가지 물음을 기본으로 한다고 본다. 특히 후자와 관련하여 트레필은 누구나 쉽게 빠질 수 있는 두 가지 극단을 경계한다. 하나는 신비주의자의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유물론자의 입장이다. 신비주의자는 뇌 속에 무언지 모르지만 중요하고 특별한 것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트레필은 이런 입장이 문제를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반면 유물론자는 뇌란 단지 뉴런의 집합체일 뿐이고 그것이 전부라고 보는 사람들이다. 이에 대해 트레필은 예술작품 같은 인간의 위업을 과연 뉴런의 작용으로 환원할 수 있을까 하는 반문을 던진다. 그리하여 두 극단을 피해가며 트레필이 도달한 결론은 뇌의 복잡성은 물질 단위로 환원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니며 이는 물질에서 비롯하되 물질을 초월하는 창발성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이다. 또 그는 '지능의 유무'를 물을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지능’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보면서, 기계가 인간과 유사하거나 동일한 지능을 갖는 것이 아직은 그리고 아마 언제까지고 불가능한 일일지는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특정한 종류의 지능은 얼마든지 가질 수 있으며 이미 그렇다고 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능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기계가 인간의 지능에 근접하는 특성을 갖게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에게만 고유한 지능의 영역은 여전히 남을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는 예를 들어 인간이 자신보다 빠른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해서 100미터 경주를 포기할 이유가 없듯이, 인공지능 문제가 인간의 위상 자체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트레필은 과학적 탐구와 발견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모든 여백을 지워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낙관적 전망을 통해 신비주의자들의 회피와 유물론자들의 환원을 피해 가는 제3의 대안을 제시한다.19)


철학자, 기독교 신학자, 불교인 공학자, 그리고 과학자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다양한 입장은 인공지능과 인간 존재의 문제를 성찰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열어준다. 그 통찰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하나는 이들이 이원론 전통을 넘어서는 일원론적이거나 전체론적인 사유의 길을 모색한다는 점이다. 인공지능 문제는 몸과 영혼 또는 정신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유로는 끝내 해결할 수 없다. 물론 이원론적 종교 전통에 속해있거나 이에 친숙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인공지능 문제에 대한 나름의 해답으로 기능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종교 전통 안에서만 소통되는 닫힌 모범 답안일 뿐이다. 더욱이 그 해답은 그 전통과 무관하거나 낮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예기치 못한 새로운 현상과 문제에 대한 좀더 창조적인 물음과 해답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힘들다. 이와 달리 위에 살펴본 바 네 사람의 통찰은 미래에 대한 상당히 낙관적인 전망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미래는 인간의 욕망에 세상을 망가뜨리고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그런 암울한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미래를 장밋빛 유토피아로 그려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미래가 끊임없이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을 얼마나 충분히 끌어안고 고민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방향으로 열리리라는 희망을 간직한 채 물음을 묻고 해답을 추구하는 인간 존재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를 견지하고 있을 뿐이다.


Ⅵ. 사이버 펑크의 매력 : 의식의 확장, 새로운 신화, 열리지 않은 미래


지금까지 영화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학문적 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생각의 궤적을 따라왔다. 방금 보았던 것처럼 인공지능의 문제는 이원론을 극복하고 디스토피아적 미래와는 다른 열린 미래에 대한 전망을 통해서만 제대로 성찰할 수 있다. 또 영화들을 살피면서 보았던 것처럼 그 문제는 주어진 본질적 실체가 아니라 지난하게 획득되어 가는 과정으로서 인간다움에 대한 발견을 통해서만 올바르게 성찰할 수 있다.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 필자지만, 특히 사이버 펑크 장르에 대해서는 그 정도가 좀 심한 편이다. 영화적 취향에 무슨 특정한 까닭이 있겠는가마는 굳이 이유를 대자면 이렇다. 사이버 펑크 장르는, 그것이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관한 것이든 아니면 열린 미래에 관한 것이든,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제기하는 전혀 새로운 문제들과 정면으로 씨름하며, 비록 해답 될 수 없는 물음이라 할지라도 물음을 묻는 행위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을 지닌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서 살펴본 세 편의 영화를 비롯한 사이버 펑크 장르를 보는 것은 언제나 늘 새롭고 약간은 흥분된 즐거움을 안겨준다. 인공지능 컴퓨터를 소재로 인간 뇌의 비밀과 인간다움의 본질을 탐구한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그의 소설 『뇌』에서 제시한 생각을 빌리자면, 그 즐거움이란 곧 인간의 사유와 행동을 추동하는 원동력인 "의식의 확장"20)이 안겨주는 놀라운 체험이다. 이는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지속적인 발견의 희열을 열어주며, 바로 이것이 사이버 펑크 장르의 첫 번째 매력이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이버 펑크는 신화를 만드는 존재로서 인간이 끝없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이야기의 일부다. 거기서 우리는 인간이 아닌 다양한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결국 인간과 세계 자체에 관한 끝없는 이야기를 풀어내려 하는 이야기꾼과 듣는 이의 행복함을 맛볼 수 있다. 종교학자 웬디 도니거는 신화가 신적 존재나 상상의 동물을 비롯한 온갖 인간 외적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 관해 다른 그 어떤 방식으로도 풀어낼 수 없는 중요한 통찰의 계기를 열어준다고 본다. 그러한 타자들은 은폐된 자아로서 바로 우리 자신에 대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러한 타자들과 우리를 나누는 경계란 결국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정하기 위한 상상의 울타리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와 다른 타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바로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21) 이렇게 본다면 사이버 펑크를 포함한 SF 문학과 영화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더욱 신화적인 셈이다. 그것은 가상의 미래에 등장할 수많은 인간 외적 타자들-컴퓨터, 로봇, 안드로이드, 복제 인간, 귀엽거나 흉측한 외계 존재 등-에 관한 이야기이며, 이를 통해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열어준다. 이 점에서 사이버 펑크는 인간이 창조하고 향유해 온 신화적 이야기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기반 위에서 창조된 전혀 새로운 종류의 신화적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이 사이버 펑크 장르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의 도입부에서 열린 사이버트로닉스사 간부회의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오 직 인간을 위한 로봇을, 사랑할 줄 아는 로봇을 만들겠다는 하비 박사의 신념에 찬 설명에도 불구하고, 한 여자 간부가 뜻밖의 이의를 제기한다. (그녀는 흑인이다. 흑인이면서 여성인 사람. 어쩌면 그녀의 통찰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주변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바이센테니얼>에서 앤드류의 마지막 재판에서 그의 인간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판사도 흑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문제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 수 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연 우리가 그 로봇을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 이 영화는 물론 사이버 펑크 장르 전체에서 이보다 더 명쾌한 통찰이 또 있을까! 비록 아직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래도 십분 인정하여 인간에 거의 근접하거나 거의 동일한 존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치자.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가 그런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에 과연 우리가 우리 자신과 다른 낯설고 새로운 존재들을 만나 그들을 우리 삶 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여기서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통해 인간 존재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이며 그러한 특성이 발생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묻는 사이버 펑크 영화는 이 물음을 한 걸음 더 멀리 밀고 나아간다. 그것은 곧 우리들 자신에게 조차도 인간다움의 핵심이란 결국 낯선 타자와의 예기치 않은 만남을 통해 자신을 수정하며 끝없이 변모해 가는 지속적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과정 중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과정의 궤적과 방향은 그것이 현실화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 가능성의 일부가 현실화된 이후라야만 그 궤적과 방향이 이러저러한 것이었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사이버 펑크 장르는 상상의 힘을 통해 그 궤적과 방향의 무수한 가지들 중 일부를 미리 그려내 보여준다. 따라서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아직 열리지 않은 미래를 가로지르는 시간 속에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열어준다. 이것이 사이버 펑크 장르의 숨겨진 또 다른 즐거움이다.





각 주

1 이상헌·이인식 외, "마음의 이론",『현대과학의 쟁점』(김영사, 2001), pp.93-108.
2 인공지능이 제기하는 철학적 문제에 관한 논의로는 다음 책을 참조할 것. 이초식,『인공지능의 철학』(고려대학교출판부, 1993).
3 James Trefil, Are We Unique? A scientist Explores the Unparalleled Intelligence of the Human Mind, John Wiley & Sons(1997); 제임스 트레필,『인간지능의 수수께끼』, 마 도경 옮김(현대미디어, 1999).
4 2001: A Space Odessey(1968, 미국), Arthur Clark 원작, Stanley Kubrick 감독 Keir Dullea Gary Lockwood, Douglas Rain 주연; <스페이스>와 관련된 인터넷 사이트는 매우 많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 가장 종합적인 사이트로 다음이 있다(http://www.palantir.net/2001).
5 Bicentennial Man(1999, 미국), Isaac Asimov 원작, Chris Columbus 감독, Robin Williams, Sam Neil, Wendy Crewson 주연.
6 A. I.(2001, 미국), Steven Spielberg 감독, Haley Joel Osment, Jude Law, William Hurt 주연; < A. I.> 공식 홈페이지에는 이 영화뿐 아니라 인공지능 분야에 대한 과학적 정보까지 폭넓게 담겨 있다(http://aimovie.warnerbros.com/).
7 정재승,『시네마 사이언스』(아카데미서적, 1998), p.92.
8 이정우,『기술과 운명 : 사이버펑크에서 철학으로』(한길사, 2001), p.7; 필자는 이 책에서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제기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되 너무 심각해지지는 않으면서 즐겁게 사유하는 인문학적 작업의 전형을 본다. 필자는 <스페이스>와 <바이센테니얼>을 분석하면서 이 책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9 Metropolis(1927, 독일), Fritz Lang 감독, Brigit Helm, Alfted Abel 주연.
10 Terminator 1984; Terminator 2: Judgment Day, 1991; Terminator 3: Rise of the Machine, 2003, James Cameron 감독, Arnold Schwarzenegger, Linda Hamilton 주연.
11 예를 들어 할과 인공지능 문제를 다룬 대표적인 책으로 다음이 있다. David G. Stork HAL’s Legacy: 2001’s Computer as Dream and Reality Cambridge, Mass: MIT Press, 1997.
12 이 점에서 이 영화는 미래 사회의 기계적 굉음이 난무하는 다른 사이버 펑크 장르 영화들과는 다르다. 그 독특성이 <나 홀로 집에>와 <미세스 다웃파이어> 그리고 <반지의 제왕>을 만든 감독의 것이라는 점에서 다소 상투화된 감이 없지는 않지만 어쨌든 인공지능 문제에 관한 사이버 펑크 영화의 목록에서 이 영화는 결코 누락시킬 수 없는 지위를 지닌다.
13 스필버그는 이 점을 누누이 매우 강조하면서 자신이 큐브릭의 후계자임을 자처한다. 물론 큐브릭은 큐브릭이고 스필버그는 스필버그일 뿐이라는 것이 많은 평론가들의 중론이다. 하지만 천진한 동화인 듯 하다가 엽기적인 파괴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하는 이 혼합적 장르의 영화가 헐리우드 특유의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기도 한다는 데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14 '거의'라고 한 것은 묘사음악이나 구체음악처럼 사물의 구체성 자체를 추구하는 음악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의 영역 전반에서 이러한 구체성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15 이 영화에는 동화적 요소와 엽기적 요소가 마구 뒤섞여 있다. 특히 데이빗이 또 다른 데이빗을 파괴하는/살해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아동용으로 분류되기 힘들게 만든다. 물론 이 영화에 섹스 로봇이 등장한다는 점도 이 영화의 연령 등급을 생각보다 높게 잡아야 하는 이유다.
16 조정옥, "우주에서 인간의 지위", 진교훈 편,『철학적 인간학』(경문사, 1997), pp.210-220.
17 리차드 랜돌프, "유전자, 신경세포, 그리고 돌고래 : 신학적 윤리와 과학의 대화",『우원사상논총』, 4집 (2000), pp.47-74.
18 Masahiro Mori, The Buddha in the Robot: A Robot Engineering's Thoughts on Science and Religion, Tokyo : Kosei Publishing Co., 1981(1991 6th ed.).
19 트레필, 앞의 책, pp.19-40, pp.327-353.
20 베르나르 베르베르,『뇌』, 이세울 옮김(열린책들, 2002).
21 Wendy Doniger, Other Peoples’ Myths : The Cave of Echo Chicago(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5), pp.1-3.




김윤성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강사








"인공지능과 영혼:2001 Space Odyssey에서 A.I.까지"(김윤성)에 대한 논평


이찬수

--------------------------------------------------------------------------------

본 논문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가, 그러한 인간적 특성은 어디서 오는가 하는 물음을 기계의 인간화를 다룬 영화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 <바이센테니얼맨>, 를 중시하면서 전개해나간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그리고 대단히 죄송하게도, 시간적인 이유 등등으로 예전에 보았던 를 제외한 두 편의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다. 따라서 영화의 내용과 관련한 논의는 가능한 배제하고서, 그저 논문을 읽고 난 뒤 드는 의문점, 아쉬운 점 등만 몇 가지 적어보고자 한다.
Ⅰ. 인간다움의 '본질'과 인간으로의 '과정'
본 논문에 의하면, 이들 영화에서는 공통적으로 상황의 변화와 이에 따른 판단을 거쳐 점차 자의식을 획득함으로써 '인간으로 되어가는' 기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다움이란 이미 주어져있는 본질이 아닌, 변화의 과정 속에 있다는 것과, 기계적 법칙, 달리 표현하면 합리성의 영역 바깥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평자도 이러한 접근에 대해 한편으로는 동의한다. 그렇지만 물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화의 '과정'이 가능하려면 어찌되었든 그 과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근거 위에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오해가 없다면, 인간다움의 본질이라는 것에 대한 논의도 필요할 듯 싶다.
Ⅱ. 창발적 도약의 근거는?
1) 이와 관련하여 본 논문은 의식의 창발적 도약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사용한다. 기계적 법칙 또는 '합리성'의 영역에 있어야 할 기계에 창발적 도약이 일어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창발성이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정의가 대표적일 듯 싶다: "창발성은 물질적 토대에 뿌리박고 있지만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새로운 도약의 지점을 가리킨다. 따라서 창발성에 대한 성찰은 이원론과 유물론을 넘어서는 일원론적이고 전체론적인 사유를 가능케 한다. " 그러나 "물질적 토대에 뿌리박고 있지만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새로운 도약"이라는 표현은 논리적, 과학적 불철저성의 반영 아닌가? 현대판 신존재증명과 같은 종교철학적, 신학 적인 발상이 아닌 다음에야, 의식이 물질적 토대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도리어 유물론적 사유를 철저하게 수행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아무리 '도약'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것은 원칙적으로 기계적 법칙 안에 있는 일이어야 하고, 그렇다면 본 논문이 강조하고 있는 합리성의 영역 '밖'이 아닌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논평자가 보건대, 기계를 인간의 연장으로 보고 인간적, 기계적 연기성(緣起性)에서 불성(佛性)을 본다는 마사히로 모리의 입장이 차라리 솔직한 견해처럼 느껴진다. 트레필이라면 그것을 반대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도약'이라는 말로 포장해버리는 것은 논리적 비약처럼 느껴지며, 도리어 인간다움의 '본질'을 긍정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한다.
2) 아울러 논문의 전반부에서는 '기계'가 인간다움을 충분히 구현하는 과정 속에 있다는 식으로 말하던 논문의 전반부와는 달리, 영혼을 논하는 후반부에서는 가령 "뇌는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는 트레필의 말을 인용한다든지, "다양한 종류의 지는 중에 인간만의 고유한 지능은 여전히 남을 것"과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 이것은 모순 아닌가. 인간의 고유한 그 무엇, 즉 본질이 있다는 말인가, 아닌가?
Ⅲ. 작은 질문 몇 가지
1) '할'이 썼던 트릭과 거짓말이 인간 존재의 불합리성 자체로부터 기인한다거나 할이 명령을 ‘위반'함으로씨 인간적 존재로 더 다가가게 되었다고 할 때,그 위반,트릭, 거짓말은 도리어 고도의 합리성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2) 죽을 수 있음, 죽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만의 속성인가? 코끼리도 자살한다하고, 새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동물은 물론 자신의 몸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어주는 짐승이나 곤충-가령 어떤 사마귀는 수컷이 암놈과 교미를 한 뒤 암컷에게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어준다-있지 않은가?
3) 논평자가 일종의 SF 영화를 보면서 궁금해하는 것은 본 논문에서와 같은 인간다움에 대한 의미 내지는 분석이 아니라, 그러한 과학적 상상은 정말 현실이 될 수 있을까, 기계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단순하면서도 유치한 '과학기술적' 가능성 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더욱 철저하게 인간에 대한 유물론적 이해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이버 펑크 계열 영화들은 기계의 인간화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어갈 수도 있을 일종의 가능성이 인간을 암울하게 만든다는 것을 폭로함으로써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만일 영화 감독이나 제작자들이 인간을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하려는 의도에서 만든 작품들이라면, 굳이 기계에서 인간다움이라는 것을 이끌어내려는 작업이 굳이 필요할까 싶다. 인간다움과 관련한 이야기는 철학, 종교 관련 책에서 그동안 수도 없이 해왔는데
Ⅳ. 아쉬운 점
영화는 흔한 말로 종합예술이다. 그런데 본 논문에서는 영화적 상상력을 문학적 혹은 철학적 분석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나리오 내지는 스토리에 중점을 두다 보니, 입체적 영화가 평면적 종이 위로 축소된 느낌이 든다. 영 화를 문자화하고, 특히 위 세 영화를 통해 감독이 전하는 인간다움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 역시 긴요하고 중요한 작업이지만, 종이 위의 문자에서 영화가 다시 종합적으로 읽혀질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본 논문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일이겠으나, 스크린, 음악적 느낌, 각종 셋팅, 배우들의 연기 등등이 반영될 수 있다면 좋았겠다.

--------------------------------------------------------------------------------

이찬수
강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