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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6/02/05 (10:04) from 129.206.197.132' of 129.206.197.132' Article Number : 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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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역사철학의 개념에 관한 테제들> 주해




벤야민의 <역사철학의 개념에 관한 테제들> 주해


<역사철학의 개념에 관한 테제들>(이하 <테제들>로 생략함)*은 벤야민이 죽은 해인 1940년에 쓰여진 에세이다. 한 사상가가 말년에 쓴 저술이 그의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으로 <테제들>은 그의 사유의 집약으로 간주되고 있고, 그런만큼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이기도 하다. 흔히 벤야민은 신학적 요소와 정치학적 요소가 병존하는 사상가이고 시기에 따라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거니와, <테제들>은 이 둘이 결합된 에세이라 할 수 있다.


<테제들>은 18개의 테제와 A, B 두 개의 부기로 이루어진 짤막한 에세이다. 이 에세이에서는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유대교의 신비주의)의 연관, 역사를 탐색하는 방법, 다른 역사관에 대한 비판, 역사적 유물론자의 과제 등이 천명되고 있다. 그 서술은 굉장히 축약적이고, 사용되는 개념들은 이전의 그의 에세이들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독립적인 에세이라기 보다는 그의 전 저작들을 하나의 작품이라 보고 이 에세이는 마지막 결론부분에 해당한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는 이 <테제들>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시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테제들>의 각 부분들에 대한 주해로 들어가기로 하자.




1.
테제 1의 주제는 <테제들>이 쓰여진 목표 또는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장기 자동기계가 있었"는데 그 기계는 "언제나 이기게끔 만들어졌었다." 그런데 이 기계가 이길 수 있는 까닭은 "장기의 명수인... 난쟁이가... 인형의 손놀림을 조종"하기 때문이다. 이 우화에서 장기 자동기계는 "소위 역사적 유물론"이고 난장이는 "신학", 즉 유대교의 메시아주의이다. 그러니까 역사적 유물론은 이 "신학을 자기의 것으로 이용한다면, 누구하고도 한판 승부를 벌일 수가 있는 것이다." 벤야민은 여기서 역사적 유물론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유대교의 메시아주의를 전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유물론과 메시아주의가 결합되어야만 함을 논증하는 것이 <테제들>의 주제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러한 전유가 이루어질 것인가 -- 이것이 <테제들>의 나머지 부분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역사적 유물론'은 이른바 '정통 Marx주의'에 의해 이해되는 그것과는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메시아주의에 있어서 핵심적인 개념은 '구원'이다. 그러면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 -- 이것이 테제 2에서 전개된다. 로쩨가 규정한 인간 심성의 두가지 특징은, 첫째, 개별적 사물들에 대한 숱한 이기심이요, 두번째로는 현재는 미래로 펼쳐진다는 선망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이 특징을 다시 말해보면 "우리들이 품고 있는 행복의 이미지라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현재적 삶의 진행과정을 한때 규정하였던 과거의 시간에 의해 채색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은 미래가 아닌 과거를 향하고 있으며,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함께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추구하는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거가 가진 "메시아적 힘"을 포착하지 않으면 안된다.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의 결합은 구체적으로는 역사적 유물론자가 메시아적 힘을 포착함으로써 성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더 구체적으로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은 어떤 방법으로 찾아야 할 것인가?


3.
사건의 중요함과 사소함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낱낱히 기록하는 연대기 기록자가 있고, 만약 그 연대기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면 우리는 "목록"을 찾아내는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과거가 완벽하게 기록될 수 있는 것은 인류가 구원되고 난 연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과거를 알아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렇다고 해서 연대기를 얻을 수도 없다. 연대기는 구원이 이루어진 다음의 일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슨 수로 그 목록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4.
연대기는 구원이 이루어진 다음에나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과거를 알 수 있는 방법을 전혀 갖지 못하는가? 그렇지 않다. 테제 2에서 벤야민은 "현재적 삶의 진행과정"이 "과거의 시간에 의해 채색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를 알 수 있는 실마리는 바로 "현재적 삶의 진행과정"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테제 4는 "조야하고 물질적인 것들"과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을 말하면서 후자는 전자를 둘러싼 "싸움"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상하고 정신적인 것들"을 탐색함으로써 "조야하고 물질적인 것들"을 파악해 낼 수 있다. 과거 또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탐구해낼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역사적 유물론자는 모름지기 모든 변화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이러한 사소한 변화에 정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현재적 삶을 구성하고 있는 사소한 것들을 살펴봄으로써 그것을 채색하고 있는 과거의 시간을 포착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벤야민이 말하고 있는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상관관계는 관념어들의 지각적 기원이라고 하는 그의 논지와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다. 그는 Vernunft(이성)이라는 관념어가 vernehmen(듣다, 지각하다)라고 하는 직접적 지각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음을 밝히면서 관념어와 지각어의 상관관계가 토대와 상부구조의 상관관계와 대응할 수 있음을 말한 바 있다.



5.
역사적 유물론자는 "사소한 변화"를 눈여겨 보아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진정한 상은 휙 스쳐 지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과거의 진정한 상"은 구원의 매체인데, 이것이 "섬광"처럼 휙 스쳐 지나가 버린다면 도대체 이를 어떻게 붙잡을 수 있는가, 그러니까 "사소한 변화에 정통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벤야민이 주장하는 '연금술적 친화력'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다. 테제 5는, 전반부에서는 테제 4까지 전개된 과거에 관한 주장을 정리하면서 후반부에서는 역사주의라고 하는 과거파악 방법에 대한 비판을 도입한다. 따라서 테제 5의 전반부로 해서 벤야민의 핵심적인 주장은 모두 전개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유물론을 관통하는 역사의 이미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는 번역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아렌트가 편집한 영역본(Illumination)에 따르면 그 부분은 "역사주의의 역사적 관점에서 이 말은 역사적 유물론이 역사주의를 베어내는 정확한 지점을 표시해주고 있다"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고트프리트 켈러의 말은 역사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을 구별하는 표식이라는 것인데, 번역본을 따르면 그것은 역사적 유물론의 태도가 된다. 그의 말 <진리는 우리들로부터 달아나 버리지 않을 것이다>는 역사주의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고,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를 붙잡으려 하는 역사적 유물론자는 "현재에 의해 인식되지 못했던 모든 과거의 상은 언제든지 현재와 함께 영원히 사라져 버릴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주의자는 과거가 언제까지나 보존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반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거를 잡지못하면 그것은 곧 사라질 수도 있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이것이 바로 두입장을 구별하는 "정확한 지점"인 것이다.



6.
테제 6에서는 역사주의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과 그것이 역사적 유물론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이 구체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랑케식의 실증사관은 '과거가 도대체 어떠했는가'를 밝히는 것을 최고의 과제로 삼는다. 반면 역사적 유물론은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 예기치 않게 느닷없이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꼭 붙잡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실증주의적인 역사관에 입각하게 되면, 과거의 "은밀한 목록"을 간직한 "전통"이 "지배계급의 도구로 이용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전통에 기대어 현재를 정당화하려는 역사주의의 태도에 대항하여 "전통을 싸워서 빼앗으려는 시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암울하다. 역사주의자 또는 실증주의자들인 "이들 적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7.
테제 7은 역사주의의 과거 파악 방법이 가진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역사주의의 방법은 "감정이입"인데, 그들은 "승리자의 마음이 되어 보기 위해서" 그러한 감정이입을 행하며, 그런 까닭에 "승리자의 마음이 되어 본다는 것은 항상 그때마다의 지배자에게 유리하게 됨을 뜻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주의가 "전통"에 기대어 현재를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고, 역사를 승리자의 기록으로 만들어 버리는 문제점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의 과제는 명확하다. "결에 거슬러서 역사를 솔질하는 것"이다.



8.
벤야민은 역사주의의 역사관 비판에 이어서 진보적 역사관도 비판한다. 이 비판을 위해서 그는 먼저 진보라는 개념에 대한 성찰을 수행한다. 테제 8은 진보적 역사관에 대한 비판을 도입하는 부분이다. 그는 먼저 파시즘이라고 하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그에 따르면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반대자들이 진보라는 이름을 하나의 역사적 규범으로 삼아 이를 들고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파시즘과 진보진영 모두가 동일한 역사관을 기저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 체험하고 있는 일"이란, <테제들>이 쓰여진 1940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파시즘과 진보진영 모두가 동일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인데, 이런 일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20세기에 들어선 오늘에도 여전히 가능할 수 있다는 놀라움은 결코 철학적 놀라움이 아니다. 이러한 놀라움은, 그러한 놀라움을 생겨나게하는 역사관이 지탱될 수 없다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인식의 출발점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놀라움', 즉 '철학적 놀라움'이 참으로 철학적 놀라움이려면 그런 일이 여전히 가능할 수 있는 바탕에는 그런 일을 공통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역사관이 있음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파시즘과 진보진영 모두가, 뒤에 이어지는 테제들에서 명확해지듯이, '기술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은연중에 함축한다.



9.
진보의 개념은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테제 9이다. 테제 9는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를 진보 개념에 대한 설명의 매개로 사용하고 있다. 이 그림에서 벤야민은 일반으로 거리 산보자의 경험을 본다고 알려져 왔다. <보들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관해서>에서 거리 산보자의 목적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이러한 군중에게 어떤 영혼을 부여해 주는 일이 거리 산보자의 가장 독특한 목적이다. 그의 대중과의 만남은 그가 지칠줄 모르게 이야기하고 있는 체험이다. 이러한 환상들이 반영된 형태들은 보들레르의 작품의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테제 9에서 "천사는 머물러 있고 싶어하고... 산산히 부서진 것을 모아서는 이를 다시 결합시키고 싶어한다." 다시 말해서 천사는 현재에 머물러 과거의 은밀한 목록을 재생시키려 한다. 그러므로 천사는 역사적 유물론자의 상징이다. "그러나 천국으로부터는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가 등을 돌리고 있는 미래쪽을 향하여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다. 천사는 현재에 머물러 있고 싶어서 미래에는 등을 돌리고 있으며, 과거를 보고 있는데, 폭풍은 천사를 미래로 떠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래에는 구원이 없는데도 진보는 그곳으로 천사를 떠밀고 있는 것이다.



10.
테제 10은 진보적 역사관의 기본적인 양상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들은 "진보에 대한 고집스러운 믿음과 대중기반에 대한 신뢰,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정치적 기구에 대한 노예 같은 맹종과 동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유물론자는 이러한 것들이 "실제로는 동일한 내용의 세가지 양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 유물론의 역사관을 고수한다는 것은 높은 대가를 치르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어지는 테제들은 진보적 역사관에 입각한 자들이 역사 속에서 보여준 오류들을 제시하게 된다.



11.
"사회민주주의에 깊이 자리잡은 타협주의는... 사회민주주의가 겪는 파국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된다. 이러한 타협주의, 또는 현실낙관론은 여러 계기에서 드러나는데 그 하나는 "시대의 물결을 타고 나아간다는 생각", 즉 역사자 우리 편이라고 하는 낙관론이라 할 수 있거니와 이것은 "독일의 노동계급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타협주의는 "노동을 부와 문화의 원천이라고 정의"한 고타강령비판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통제(정복)의 진보"만을 생각하고 있으며 달리 말하면 "파시즘에서 마주치게 될 기술주의적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보적 역사관과 파시즘은 "기술주의"라고 하는 태도를 공유하고 있으며, 바로 그것이 파시즘에 맞선 진보진영의 한계인 것이다.



12.
테제 11에서 밝혀진 사회민주주의의 과오는 기술주의적 특징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에 근거함으로써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에 다가올 미래 세대의 구원자의 역할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는 "노동계급으로부터 그들이 지닌 가장 큰 힘의 원천인 심줄을 잘라"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노동자는 미래 세대의 구원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자가 가진 "증오와 희생정신"은 현재가 미래로 펼쳐진다는 선망(테제 2)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짓밟히고 억눌린 선조들의 이미지에 의해 자라고 북돋아지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의 힘은 선조(과거)로부터 전해지는 것이다.



13.
테제 11과 테제 12는 사회민주주의가 역사적 계기 속에서 행한 잘못을 제시하였다. 그러면 그들이 가진 진보적 역사관은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전개되는 것이 테제 13이다. 테제 13에서 벤야민은 그의 독특한 시간관을 전개하기 앞서, 진보적 역사관의 시간관을 규정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생각한 진보는 첫째, "인류 자체의 진보"요, 둘째, "아직도 완결되지 않은 진보"이며, 세째로, "끊임없이 발전하는 진보(직선 내지 나선형을 그으면서 자동적으로 나아가는 진보)"이다. 그런데 이러한 측면들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관통하는 역사적 발전과정이라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Benjamn이 생각하는 시간은 어떠한 것인가?



14.
"역사는...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현재시간 Jetztzeit'에 의해 충만된 시간이다." 이것이 바로 벤야민의 시간관이다. 현재시간은 눈 앞에 펼쳐진 단순한 '현재 Gegenwart'가 아니다. 이는 "과거로 향해 내딛는 호랑이의 도약"이며, '희미한 메시아적 힘에 의해 충만된' 시간이다. 이 '현재시간'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서 역사적 시간에 생명을 넣고 역사의 진리가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순간적 시간이다. 이 시간이 바로 혁명의 시간이다. '현재시간'은 아우라(Aura) 개념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이 개념을 "아무리 가까이 있다고 느껴지더라도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이라 규정한 바 있다. 이 정의에서 핵심적인 것은 '일회적'이라는 단어이다. 이는 아우라가 시간적 개념임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으며, 이것이 <테제들>에서는 '현재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15.
"역사의 연속성", 즉 '동질적 시간'의 연속성을 폭파시키는 것이 "혁명적 계급"의 임무이다. 테제 15에서는 1848년 7월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을 제시하면서 이러한 '폭파'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6.
테제 16은 '현재시간' 개념을 전제로 하고, 역사주의와의 대비 속에서 역사적 유물론자의 과제를 천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역사주의가 과거의 영원한 이미지를 나타낸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일회적인 과거와의 유일무이한 경험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역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적 지속성을 폭파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남자"인 것이다.



17.
테제 17은 역사주의와 유물론적 역사서술의 차이를 설명한다. 역사주의 또는 "보편적 세계사"를 구축하고자 하는 시도는 "첨가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채우기 위해 사실의 더미를 모으는 데 급급하다." 반면에 유물론적 역사서술은 "하나의 구성원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데, "단자로서 마주 대하는 역사적 대상에만... 접근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단자'는 벤야민이 라이프니츠로부터 빌려온 개념이다. 이는 각각의 사물이 지니는 독자적 완성태이며 하나의 소우주이다. 그에 따르면 단자 속에는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의 표식, 달리 말해 억압된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회의 신호"가 들어 있다. 사실상 벤야민에 따르면 세계는 붕괴와 몰락을 향해간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역사(Naturgeschichte)이다. 바로 이 점, 붕괴와 몰락을 피할 수 없다는 데에 벤야민의 '멜랑콜리'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붕괴와 몰락의 과정속에서 나타나는 흔적이 바로 파편이다. 과거의 은밀한 목록도 이러한 파편에 속한다. 우리는 그러한 파편을 통찰함으로써 몰락한 과거를 섬광처럼 인식할 수 있을 것이요, 파편을 재구할 수 있다면 온전한 진리를 알 수도 있을 것이다. 파편에 대한 이와같은 관심이 벤야민을 유명한 수집가로서 알려지게 한 계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온전한 진리는 어떤 방식으로 파편 속에 "결정화" 되는가? "한 작품 속에 필생의 업적이, 필생의 업적 속에는 한 시대가, 그리고 한 시대 속에는 전체 역사의 진행과정이 보존되고 지양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파악되어진 것의 영양이 풍부한 열매는, 귀중하지만 맛이 없는 씨앗으로서의 시간을 그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 '지양 aufheben'은 헤겔적인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보존하고 고양시키고 폐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벤야민이 <테제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쓰고 있는 술어들, '섬광', '희미한 메시아적 힘', '휙 스쳐 지나 버리는'과 같은 것들이 극히 부분적인 것들이긴 하지만 전체를 통일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18.
테제 18은 테제 17에서 전개한 내용과 '현재시간'에 대한 부연설명이다. 부기 A는 역사주의와 '현재시간'에 근거한 역사관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으며, B는 유대인에 있어서의 시간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B에 따르면 유대인들에게는 미래를 연구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그것은 미래가 가진 마력적 힘을 박탈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미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기억을 통하여" 미래를 알아 내었다. 이는 과거 속에 구원이 있다고 하는 테제2의 논지와 무관하지 않다.


* 본문 인용은 반성완(편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에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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