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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6/02/14 (10:30) from 129.206.196.86' of 129.206.196.86' Article Number :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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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인식론적 문제




기억의 인식론적 문제*


임일환**외대 철학

1. 서론

고래로부터 인식론의 주된 관심사항의 하나는 대체로 인간의 지각현상, 특히 시각을 통한 외부대상의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일이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대부분의 인식론 이론에서 기억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그런 주제 중의 하나였고 그런 의미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분야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이 주어진 순간에 의식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또 우리 인간이 시간 속에 살고 있는 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의 지식 혹은 정당한 믿음이란 것들이 기억의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이런 현상은 어느정도 역설적으로 보인다. 더구나 기억은 단순한 지각에 의한 경험적 지식 외에도 소위 선험적 지식의 영역에도 분명히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물론 1+2=3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이성적, 선험적 직관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19*37쯤 되면, 대부분의 사람은 칠판이나 연필같이 기억을 확장시키는 도구 없이 단지 직관만으로 이 간단한 수학명제의 답을 알아낼 수 없다. 한마디로 인간 지식의 전 영역에 기억은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나는 이 논문에서 기억에 관련된 모든 인식론적 문제를 제기하기보다는, 이런 맥락에서 기억, 특히 기억한 믿음의 내용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의외로 현대의 다양한 인식 정당성이론들과 깊은 관련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
이를 위해 논문은 다음과 같이 진행될 것이다: 2절에서는 기억에 관련된 기본적 개념 구분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왜 인식론에서 기억 믿음의 정당화가 문제시될 수 있는가 하는 사례로 에버릿과 피셔 (N. Everitt & A. Fisher)가 제기한 퍼즐을 소개한다. 3절에서는 이미 기존에 제기된 다양한 믿음에 대한 정당성이론들이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내적 수단이 있는가를 점검할 것이다. 기억에 대한 현대의 고전적인 이론은 노만 말콤(N. Malcolm)의 이론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간주된다. 따라서 일단 말콤이론의 대응책과 문제점 그리고 그것을 수정한 폴록(J Polock)의 이론을 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4절에서는 3절에서 도출된 결론을 근거로, 몇가지 중요한 인식론적 함축을 도출해 볼 것이다.


2. 지식 개념의 정의와 기억 믿음의 정당화의 문제

‘기억’, ‘인식’, ‘믿음’ 등과 같이 동사에 명사화한 말들은 전형적인 행위/내용의 애매성을 갖는다. ‘기억’도 문맥에 따라 기억함이라는 인간의 정신활동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고 때로 그것은 기억되어진 내용을 의미할 수도 있다. 물론 기억은 지각이나 추론능력처럼 또 단순히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 종류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와 관련되는 한가지 중요한 구분은 과거의 경험을 기억하는 것과 과거에 얻은 지식을 기억해내는 것과의 구분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아주 오래 전에 본 인상적인 영화의 장면에 대한 시각적 경험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 장면에서 나왔던 배우들의 얼굴, 조명 그리고 인물의 배치까지도. 심지어는 주연 배우가 했던 멋진 대사와 음색까지도 선명히 기억해 낼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불행히도 그 영화의 제목이 생각이 안날수도 있고, 그 배우의 이름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운이 좋으면, 어느 순간 그 배우의 이름이 험프리 보카트라는 과거의 지식이 떠올를 수도 있다. 이런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경험을 기억해는 것과 명제화할 수 있는 과거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통상 인식론 교과서에 구분하는 소위 ‘이벤트(event) 메모리’ 즉 사건의 기억과 사실(fact) 기억의 구분은 이 구분과 관련된다. 사건 기억은 인식주관이 과거에 경험했던 객관적 사건을 기억해내는 것을 말한다. 사건 기억의 내용은 자신이 직접 보았던 객관적 사건의 진행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지만, 때로 그것은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 경험의 내용일 수도 있다. 한편 사실기억은 과거 학습을 통해 알아냈던 어떤 사실이나 명제를 기억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지금 당신은 어제 당신의 친구와의 전화로 약속을 했던 사건을 기억해 낼수 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내일 나는 친구와 저녁식사를 할 것이다” 미래의 사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실상 기억에 의한 인식에 대한 가장 일상적인 오해의 하나는 기억능력에 의한 인식이 과거사실에만 국한될 것이라는 오해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을 통해 인식하는 지식의 내용은 단지 과거의 사실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7 곱하기 8이 56이라는 사실은 시제상 과거가 아니라 소위 ‘영원한’ 무시제적 사실이다. 나는 또한 ‘모든 포유동물은 항온동물이다’라는 일반적 명제를 기억해 낼 수 있다. 또한 ‘2006년에 월드컵이 개최될 것이다’라는 미래의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어떻게? 그것은 과거 다른 사람 증언을 통해 획득된 지식일수도 또 기타 다른정보매체를 통해 얻은 정보에 기초할 수도 있다. 우리가 미래의 사건을 경험하는 천리안과 같은 신통력을 지니지 않은 이상 모든 사건의 기억은 과거의 사건, 혹은 그것에 대한 경험의 기억이다. 그러나 사건의 기억이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로부터 그 기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사실도 과거여야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인식이 기본적으로 정당성있는 참인 믿음이라는 전통적 지식개념에서 ‘믿음’은 통상, 지금 인식 주관인 의식하고 있는 명제적 내용, 흔히 “발생적”(occurrent) 믿음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인식의 범위를 단지 발생적 믿음에 국한할 경우 우리의 인식의 범위는 극도로 제한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상적으로 인식론에서 ‘믿음’은 비발생적, 묵시적 믿음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그런데 이 묵시적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식주관이 현재 의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식주관이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 그 내용을 회복 확인할 수 있는 명제적 사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 인식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기억의 능력에 핵심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이런 기억에 관련된 기초적인 개념구분 그리고 인식 전반에 있어 기억믿음이 같는 중요성을 감안하고, 에버릿과 피셔가 최근의 책에서 제기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인식론적 문제를 살펴보자.

..나는 빛이 대략 초속 18만 6천 마일정도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따라서 참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믿음을 L이라고 부르자. 이 믿음에 대한 나의 정당성은 무엇인가? 나는 누가 L이 참이라고 말했는지 기억할 수없을 뿐만아니라 실은 그 사실을 누구한테 들었는지 아니면, 예컨대 책을 통해 읽었는지 조차 기억할 수 없다. 나아가 나는 L의 참을 입증할 수 있는 실험을 실제로 해본 적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물론 나의 믿음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에 답해 나는 L에 대한 나의 참 믿음을 (추가로) 획득할 수는 있다. 만일 내가 권위있는 교과서나 전문가의 자문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그 유명한 물리학자 스파노스 박사가 L의 진리성을 확증했다”는 식의 추가적 믿음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사실 이후의 추가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나의 인식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이런 방식의 생각이 옳다면, 정당성이란 그것이 훌륭한 정당성이든, 완전한 정당성이든, 파기될 수 없는 (indefeasible) 정당성이든 상관없이 지식에 본질적인 것일 수 없다.

표면적으로 보아 에버릿과 피셔의 사례는 인식적 정당성이 전통적인식론의 가정과는 달리 지식의 필요조건조차될 수 없다는 한가지 반대사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의 당혹감의 깊이는 보다 깊다. 먼저 위 사례에 나오듯 우리가 명백한 사실기억을 유지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그 사실기억을 어떤 상황에서 획득했는지, 또 그 때 어떤 믿음이나 경험과 같은 인지적인 근거에서 그 믿음을 획득하게되었는지는 전혀 기억을 할 수 없는 수많은 형태의 믿음들이 있다. 예컨대 우리 모두는 대부분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이 무엇이라는 것을 최초로 알게된 순간의 인식적 상황과 정당성의 근거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 구구단, 자신의 고향 자신의 부모의 이름등 대부분 성인의 가장 기본적인 믿음을 이루는 믿음들이 이러한 패턴에 부합된다.
결국 이 사례가 제시하는 딜렘마는 이것이다: 자신의 이름이나 고향, 부모의 이름조차 모른다고 말할 수 없는 이상 우리는, 주어진 사례는 명백한 지식의 한 사례로 간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에버릿과 피셔는 명백한 지식의 사례 중 우리가 그 믿음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받아들이는 부당한 믿음의 사례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정당성있는 참인 믿음이 지식이라는 철학적 지식개념의 분석은 잘못된 가정이다. 하지만 우리가 전통적 지식개념을 방어하기 위해 이처럼 망각에 기초한 사례들이 진정한 지식의 사례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 결과는 극단적인 형태의 회의주의를 초래한다. 따라서 대체로 전통적인 지식 개념의 분석이 옳다는 가정하에서 인식적 정당성이론을 구성하려는 거의 대부분의 현대 인식적 정당성이론은 극단적 회의주의를 선택하거나 아니면 정당성있는 참 믿음이 인식이라는 이론의 기본 전제를 파기해야만 한다.
내가 서론에서 언급했듯, 현대 인식론 중 정합론을 택하든, 토대론을 택하든, 아니면 최근에 유행되는 “신빙주의”(reliabilism) 이론을 택하든,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기억 믿음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남는 선택은 회의주의 아니면 이론적 전제자체의 파기 이외의 대안은 없어보인다.


3. 기억 믿음의 정당화와 인식적 정당성 이론.

널리 알려져있듯, 20세기의 인식론자들 중 ‘기억’의 믿음의 정당화문제에 대한 고전적인 이론은 노만 말콤의 이론에서 출발한다. 말콤은 명시적으로 “사실 기억” (factual memory)에 관 정의가 일단 다음과 같이 간력한 정의를 통해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M) 인식주관 B가 시점 t 이래로 (from t) p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df. 1) B가 현재 p를 안다 2) 시점 t에 P를 알았다 3) 그가 시점 t에 p를 알지 못했다면, 그는 현재 p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정의는 기억이라는 인간의 능력이 본질적으로 과거지식의 “보존”(retention)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간명한 말콤의 이론을 표현한다. 말콤이 말하듯 “기억은 지식의 보존이다. 두가지 종류의 지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인식이 존재한다. 기억 속의 현재 지식은 과거의 지식과 동일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물론 말콤의 이 이론은 지식 개념에 대한 분석, 특히 어떻게 기억을 통한 믿음이 정당화되는가를 분석하고 있지는 않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말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이 p를 기억할 때, 그는 p라는 사실을 확신하기 위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답은 그가 과거에 가졌었던 것과 똑같은 근거를 갖는다는 것이다. B가 만일 그의 친구 로빈슨이 그 해에 아팠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는 과거에 그가 아팠음을 알고있었다. 그의 과거지식은 지각에 의존할 수도 있고.. 증언에 의존할 수도 있으며.. 추론에 의존할 수도 있다. 로빈슨이 아프다는 B의 현재의 지식은, 그것이 단지 기억이라면, [과거 지식과] 동일한 근거를 갖는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어떤이가 p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는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었고, 현재 p를 기억하고 있지만, 자신의 근거가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는 p를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현재 가지고 있는가? 나는 이 문제를 길게 논의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그가 과거에 가졌던 것과 똑같은 근거를 현재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만일 그 사람이 어떤 것을 믿는데 대한 아무런 근거도 제시할 수 없는 몇몇 경우, 그는 지금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근거를 무엇이었던가를 망각한 특수한 경우에는 이런 결론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는 p라고 확신할 아무런 근거도 현재 가지고 있지 않다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 없는 것은, 그가 과거에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망각이라는] 가정상 그는 과거에 이미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에버릿과 피셔가 제기한 정당성 근거의 망각의 사례를 말콤은 어떻게 처리하는가? 정의 (M)에 의해 기억에 의한 현재의 지식은 과거의 지식은 함축한다. 그런데 지식은 정당성있는 참인 믿음이므로 현재 기억 믿음의 정당성은 과거 믿음의 정당성을 함축한다. 말콤의 트릭은 믿음의 정당성의 근거 Q가 있다고 할 때, 인식의 필요조건은 Q가 단지 성립하면 충분하지 주관이 그 Q자체의 내용을 기억한다거나, 주어진 시점에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던가, 나아가 Q가 믿음 p를 정당화시켜준다는 식의 부가적 인식적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콤의 모든 기억 믿음의 정당성은 궁극적으로 원래의 믿음의 정당성의 근거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토대론의 구조에 부합한다. 단지 그 궁극적 정당성의 근거를 인식적 주관이 의식하거나, 기억을 통해 떠올여야 한다는 부가적 조건이 없다는 점에서 전통적 내부주의적 토대론과 구별된다. 말콤이 지적하듯, 망각의 사례에 의한 반론은 정당성의 근거들의 존재자체를 부인하는 사례는 아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이처럼 주어진 믿음의 정당성 조건 Q가 어떤 방식으로든 인식주관이 필요에 의해 항상 파악할 수 있는 무엇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현대 정당성이론의 이른바 “내부주의/외부주의”의 논쟁을 판가름하는 분수령이다. 나아가 주어진 믿음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서는 조건 Q가 주어진 믿음을 정당화 시킨다는 또다른 인식적 믿음 반드시 필요한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전통적 토대론자와 정합론자를 분류하는 지표이다. 결국 우리는 흥미롭게도 말콤의 해결책에서 토대론과 일종의 최근에 유행하는 외부주의의 결합이 한가지 에버릿과 피셔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말콤의 분석은 한 두 가지 결정적인 문제점을 내포한다. 먼저 말콤의 기억지식의 분석 (M)은 현재의 기억 믿음의 정당성의 필요조건은 적어도 원초적 믿음의 정당성 조건의 성립자체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말콤의 이론에 따르면, ‘거짓’ 기억이나 ‘잘못된’ 기억을 용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과거의 꿈 속에서 혹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사건을 실제로 경험한 듯이 기억해내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기억은 절대적으로 100% 오류 불가능한 인식능력은 아니다. 지각이 그렇듯 기억도 때로 우리를 속인다. 이런 논점을 가장 극명하게 지적한 사람은 아마도 러셀일 것이다. 러셀의 유명한 ‘5분전 우주탄생’의 가설에 의하면, 기억함은 항상 현재의 정신상태이므로 우리가 가진 거의 모든 기억믿음이 거짓일 논리적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이 논점을 극명하게 이해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가상 사례를 검토하는 것일 것이다: 지금 이순간 당신과 물리적으로 완벽하게 동일한 당신의 복제인간이 탄생했다고 가정하자. 이 복제인간은 수반의 가정상 지금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도 똑같은 내용의 믿음들을 ‘기억하는듯한’ 그런 경험을 할 것이다. 물론 가정상 당신의 기억과는 달리 그의 믿음을 정당화 시켜주는 원초적 믿음의 정당성의 근거는 과거에 성립한 사실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방금 전에 존재하기 시작했으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의 믿음의 많은 부분이 최소한 당신의 믿음과 마찬가지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행히도 말콤의 이론에 따르면 이런 인식적 정당성은 개념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런데 극단적 회의론자는 바로 이런 사례를 이용해서 우리의 기억 믿음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정당화되는가를 문제를 적어도 합리적으로 제기할 수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내 생각으로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한가지 인식론적 논점은 말콤의 기억 믿음의 정당화이론이 가지고 있는 이론의 문제점이 정확히 현대의 외부주의 이론의 문제점과 일치한다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즉 에버릿과 피셔의 문제제기를 극복하기 위해 말콤은 외부주의적 전략을 택하지만, 그 외부주의적 전략은 여전히 현대의 외부주의에 대한 널리 알려진 반론에 직면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앞 절에서 에버릿과 피셔가 제기한 문제의 양날은 전통적 지식분석 보존하면서 극단적 회의주의 회피 양자를 어떻게 도모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라고 지적한바 있다. 말콤의 이론은 정당성있는 참인 믿음이란 전통적 개념을 보호하지만, 극단적 회의주의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말콤은 (M)을 통해 러셀식의 극단적 회의주의가 발생할 논리적 근거 자체를 말살한다. 이런 의미에서 말콤의 이론은 일종의 재정의(redefinitionist)의 오류의 한 사례이다. 왜냐하면 말콤의 이론이 함축하듯 기억이 필연적으로 오류불가능한 능력이라면 회의주의는 정의상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폴록이나 마이클 휴우머(Michael Humer)가 지적하는 또다른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말콤의 이론에 따르면 현재의 기억 믿음의 정당성은 과거의 믿음의 정당성과 동일한 것이다. 현재의 믿음과 과거의 믿음은 단지 시간적 차이만 다를 뿐이다. 말콤은 말한다.

한가지 명백한 것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아무리 잘 기억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현재의 지식은 그의 과거의 지식 보다 우월한(superior) 것일 수 없다. P라는 현재의 지식은 그것이 기억일 경우 과거의 지식 p 보다 확실한 것일 수 없다. 이런 사실은 기억이 인식의 원천일 수 없다는 한가지 명백한 의미를 제공한다.

결국 폴록이나 휴우머가 지적하듯, 말콤에게 있어 기억 믿음의 정당성의 정도는 결코 약화될 수 없고 이것은 지극히 반직관적인 주장이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우리의 기억은 “흐려”지고 따라서 우리는 여러 기억들을 상이한 정당성의 정도를 부여한다. 아마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기억과 믿음이 별개 상태일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어떤 계기로 선명히 떠오르는 사건 기억이나 경험 기억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내용이 현실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한마디로 모든 기억의 내용을 우리가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말콤의 이론에 따르면 이것은 불가능하다. 실상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말콤에게 있어 기억 믿음의 정당화 문제는 ‘정의상’ 발생할 수 없다. 주어진 현재 시점에서 지각, 증언, 추론은 정당성의 원천일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은 말콤에게 있어 본질적으로 보존기능 밖에는 없으므로 기억이 아닌 다른 인식의 원천에 대한 문제는 발생할 수 있어도 애초에 어떻게 기억 믿음이 정당화되는가 하는 문제는 발생할 수 없다. 결국 이것은 말콤의 해결책이 기억의 정당성 문제에 대한 일종의 환원주의적 해결책에 불과한 것을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애초에 우리가 제기한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보다 나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가? 흥미로운 한가지 아이디어는 말콤과 정반대되는 인식론적 경향을 취한다면 어떤 해결책이 나올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일 것이다. 즉 기억 믿음의 정당성의 조건 Q에 정합론적이며 내부주의적 입장을 취하면 과연 문제의 해결책이 제시될 수 있는가?
예컨대 나는 광속이 대략 초속 30만 킬로미터라는 사실을 선명히 기억한다. 그리고 원래의 퍼즐에서처럼 이 기억 믿음이 애초에 어떻게 정당화되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다. 자 이 기억 믿음은 정합론적이고 내부주의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정합론은 모든 믿음은 다른 믿음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주장이고 따라서 모든 믿음은 ‘합리적’ 추론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이론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정당화 논증을 예상할 수 있다.

〈C〉
1) 나는 현재 광속이 초속 30만 킬로 미터라는 것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2) 과거에 나는 선명한 기억에 의거한 믿음이 일반적으로 신뢰할 만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3) 따라서 광속은 초속 30만 킬로미터일 것이라는 나의 믿음은 참일 개연성이 높다.

이 정당화 논증의 핵심은 전제 2)이다. 그러나 이 논증의 문제점은 명백하다. 전제 2)는 예컨대 “나는 과거 초등학교 시절의 과학선생님으로부터 이 사실을 배웠다는 것을 기억한다”라는 식의 일상적 믿음과는 달리 기억이 일반적으로 높은 신뢰성을 갖는다는 인식적 믿음이다. 따라서 광속에 대한 기억믿음이란 개별적 믿음 왜 정당하고 신뢰성이 있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일반적으로 기억믿음이 신뢰성이 높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은 명백히 악순환적이다. 왜냐하면 그 일반적 신뢰성을 확인하자면, 다시 말해 왜 전제2)는 정당한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논증 와 같은 형식의 다른 개별믿음에 대한 정당화논증을 나열식으로 반복하는 수 밖에 없고, (물론 여기에는 전제(2)가 다시 반복될 것이며) 더구나 이런 나열식 논증의 반복은 또다시 기억을 통해 일반화되는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합론식 해결책은 악순환적 무한후퇴를 초래하므로 올바른 해결책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제 우리는 따라서 말콤이론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폴록과 크루즈가 제안한 이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폴록의 기억믿음의 정당성문제에 대한 이론을 이해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그가 “발생론적” (genetic) 논증이라고 부르는 정당화추론과 “역동적”(dynamic) 추론이라고 부르는 추론 방식을 대비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길고 복잡한 추론과정을 거쳐 보조결론 Pi에 도달하고 이를 토대로 결론 Pn에 도달했다고 가정하자. (2의 12제곱을 계산하는 과정이 한가지 사례가 될 수 있다) 이런 추론과정의 정당화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이 대비될 수 있다.

(GA)
-->P1 -->P2 -->P3 ....... -->Pi-1 -->Pi --->Pi+1 --> .........-->Pn

(DA)
[나는 Pi_1을 기억하는듯한 경험을 한다]-->Pi-1 -->Pi

여기서 발생론적 논증이라고 불리는 정당화추론 과정은 Pn이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모든 상이한 명제로 이루어진 추론과정 전체를 내포한다. 인간의 숏텀 메모리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경험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결국 이런 과정은 실은 매우 비현실적이다. 한편 역동적 추론은 인간의 단기간의 기억능력이 극도로 제한되어있다는 경험적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모델이다. 폴록에 따르면 역동적 추론이 “칠판식”(blackboard) 발생론적 추론(GA)과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점은, 추론과 소결론에 이르는 몇 개의 명제들의 내용을 동시에 인식주관이 의식적으로 파악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주어진 시점에서 실제로 주관의 의식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유방식을 표상한다.
기억이 인식, 따라서 정당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부인하는 말콤과는 달리 폴록과 크루즈는 기억함 자체는 정당성의 한가지 원천임을 주장한다. 마치 우리가 붉은 사과를 보는듯한 경험을 한다는 사실자체가 “여기 붉은 사과가 있다”는 믿음의 정당성의 조건이듯, 특정 사건이나 사실자체가 기억이 난다는 사실자체가 기억된 내용에 비록 약하기는 하지만 일정 정도의 인식적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폴록의 이런 이론은 다음과 같은 기억 믿음의 정당성 원리로 요약된다.

(PC) ‘S가 P를 기억하는 듯하다’는 사실은 S가 P를 믿는 단초적(prima facie) 근거가 된다.

주지하듯 폴록의 단초적 정당성은 ‘궁극적’(ultima facie) 근거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전통적 데카르트식 ‘오류불가능한’ 정당성과는 달리 폴록의 정당성 조건은 ‘오류가능한’ ‘파기가능한’ (defeasible) 정당성이라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제 남은 과제는 폴록의 이러한 단초적 정당성 이론과 역동적 추론이라는 모델이 어떻게 에버릿과 피셔가 제기한 퍼즐을 해소시키는가를 살펴보는 일이다.
기억을 더듬으면, 애초의 퍼즐은 우리는 적어도 자신의 이름을 알지만,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믿게되는 최초의 상황이나 증거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도 하지못한다. 고로 망각의 사례는 지식이지만 ‘근거’없는 부당한 믿음이 존재한다는 퍼즐이었다. 폴록의 관점에서 보자면 퍼즐의 문제제시는 우리의 믿음의 정당성은 궁극적으로 모두 과거로 소급하는 “발생론적 논증”에 근거해야만 한다고 가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 이런 가정이 인간의 기억능력과 정당성개념에 무리한 가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려운 과정이 아니다. 첫째로 왜 기억믿음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 애초의 원초적 믿음에 출발하여 주어진 믿음에 이르는 전과정과 명제들을 유지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2의 제곱은 4, 고로 2의 3승은 8이다. 그런데 2의 3승은 8이므로 2의 4승은 16이다.. 이런 방식의 추론을 통해 2의 11승 2048이라는 간단한 선험적 지식을 얻었다고 가정하자. 매 단계에서 기억은 단지 바로 앞자리 계산의 값과 그값의 2배라는 간단한 계산을 반복하여 우리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자 나는 묻는다 2의 6승은? 2의 7승은? 또 8승은? 나는 종이와 칠판의 도움없이 이 간단한 산수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목할 것은 물론 우리는 2048이 도출된 전과정과 포함된 명제를 기억함이 없이도 전적으로 합리적인 믿음에 도달할 수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기억은 단지 2의 n승과 2의 n+1승 사이의 ‘전이’에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회피하기 위해 동시에 ‘역동적’으로 사용되면 충분한 것이다. 따라서 기억 믿음, 나아가 믿음 일반이 발생론적으로 궁극적인 정당화에 의존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에버릿과 피셔의 반대사례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단 기억 믿음의 정당성이 원초적 믿음 발생으로 소급할 필요가 없다는 논점을 이해하면 자신의 이름이나 부모의 모습같은 일상적 기억 믿음의 어떻게 정당화되고 유지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비교적 용이하다. 그 답은 이런 기억의 매듭이 끈임없이 ‘리프레쉬’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일이다. 뒤에서 누군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리고 당신의이름을 싸인할 때 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부딪히는 낯익은 얼굴들 이 모든 것들은 흐려져가는 기억의 ‘소생재’들이며 기억은 단지 그 매듭까지의 연결로 충분한 기능이다.
두 번째로 폴록의 이론의 갖는 장점은 말콤이나 단순 정합론적 정당화와는 달리 그 이론이 적어도 극단적 회의주의에 대해 선결 문제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콤의 정당성은 믿음의 궁극적 발생론적 논증의 전체구조에 의존하므로, 인식론적 수반의 사례, 즉 5분전에 탄생한 당신의 복제인간의 믿음의 대부분이 부당하다는 반직관적인 결과를 필연적으로 초래한다. 하지만 폴록이론은 현재의 당신과 심리적으로 동일한 의식과 믿음상태에 있는 당신의 복제인간의 믿음들이 최소한 ‘단초적’ 정당성을 가질 수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보다 설득력있는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얼핏보자면, 폴록의 이론은 전통적인 토대론에 가깝다고 여겨질 수있다. 즉 다른 믿음이 아닌 지각 경험이나, 기억경험 자체에 정당성 부여조건을 인정한다는 관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폴록의 이론은 흔히 피라미드 혹은 정삼각형의 토대라는 우리 믿음의 정당화구조라는 전형적인 토대론의 구조와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이론이다. 주어진 시점에 우리는 심리적으로 가용한 그리고 실제 얼마되지 않은 수효의 믿음들로부터 믿음 전체의 정당성을 이루어나간다.

4. 결론과 과제

이상의 나의 논증이 대체로 옳은 방향이었다면, 에버릿과 피셔가 제기한 문제제기는 현대의 다양한 인식적 정당성이론들이 동일한 문제를 어떻게 상이한 방식으로 해결하는 보여주는 흥미로운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실제로 의식하고 ‘인식적 정당화‘에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의 수효가 평균 7개의 상이한 정보에 국한된다는 경험적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인다면, 실상 우리의 대부분의 인식은 직간접적으로 기억 믿음의 정당성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서론에서도 밝혔듯, 인간 인식 전체에 있어 기억 믿음의 정당성 문제가 차지하는 이런 현실적인 중요성에 비추어보자면, 현대 인식론에서 기억 믿음에 대한 이론적 연구가 희소하다는 것은 실상은 개인적으로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미 보았듯 말콤의 ’유지‘이론과 폴록의 ’역동적‘추론론이 그저 지난 50년간 이 문제에 대해 제기되어온 잠정적이론의 거의 전부를 이룬다. 특히 추론적 믿음의 정당화에 의존하는 정합론적 정당성이론가에 의해서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해 초보적인 이론조차 제기되어 본일이 없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거의 스캔들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어쨋든 나는 앞절에서 최소한 애초의 퍼즐은 대체로 폴록과 크루즈의 이론내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논증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나의 결론은 성급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휴우머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통해 폴록이론의 문제점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폴록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반직관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내가 P라는 사실을 선험적인 증명을 통해 배웠다고 가정하자. (이 증명은 매우 짧아서 증명내용 전체를 마음속에 둘 수있고 기억할 필요가 없었다고 가정하자) 따라서 나는 처음부터 P에 대한 믿음에 정당성이 있었다. 비록 짧은 증명이기는 하나 실수의 가능성 때문에 이 정당성이 완전하게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몇 초가 지나고, 더 나아가 이제 내가 P를 기억해 낼 수있다고 가정하자. 만일 내가 그 증명을 생각하면서 동시에 P를 기억한다면, 나는 P에 대한 하나는 추론적이고 하나는 토대론적인 그런 두 가지 정당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폴록이론에 따르면] 나의 정당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 강화되게된다.
여기 또다른 사례가 있다. 내가 애초에 (예컨대 자의적인 바램이나 유사한 비합리적인 과정을 통해) P라는 부당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그 다음날 내가 P를 기억하는 듯한 경험을 하기 때문에, 나의 믿음은 적절하게 정당화되었다는 것이다. 즉 시간의 흐름이 나의 비합리적인 믿음을 합리적인 것을 변형시킨 것이다.

이 두가지 사례는 폴록이론이 반직관적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론이다.
물론 이 반례가 성립한다면 폴록이론은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지면의 제약상 이 반례가 궁극적으로 성립하는지 여부의 문제는 다음의 연구과제로 미루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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