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cle Bank

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6/02/14 (10:46) from 129.206.196.86' of 129.206.196.86' Article Number : 457
Delete Modify 김미영 Access : 7071 , Lines : 135
회의주의와 감각현상




회의주의와 감각현상

김 미 영*시립인천대학교

요 약 문
고대철학에서 회의주의는 문제해결을 위해 전제되는 방법이다. 퓌론적 회의주의는 헬레니즘철학의 다른 학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을 철학의 목적으로 삼는다. 이와 반대로 근대철학에서 회의주의는 사물인식을 위해 극복되어야 할 문제로 여겨진다. 근대철학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회의주의는 일상적 지성을 철학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누구나 자연적 본성에 맞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을 마련하려는 목적을 설정한다는 점에서 고대의 퓌론적 회의주의와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새로운 회의주의는 직접적 인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동시대의 철학자 헤겔에 의해 독단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평가가 옳지 않다는 것이 보여진다. 주관적인 의미에서 현상을 받아들이는 퓌론적 회의주의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새로운 회의주의가 직접적 인식을 인정하는 것이 회의주의의 원칙과 모순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보여진다. 또한 이와 같은 직접성은 헤겔이 주장하는 처음의 단순한 직접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인식의 일반성과 총체성이 개념의 역사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주요어 : 퓌론주의, 후기아카데미, 새로운 회의주의, 독단주의, 감각현상, 직접성, 총체성



들어가는 말

헤겔은 절대적 부정이 진정한 의미의 회의주의이자 참된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모든 지식에 대해 판단중지에 머무는 고대의 퓌론적 회의주의가 근대의 ‘새로운 회의주의’에 대해 우월하다는 것이다. 근대의 ‘새로운 회의주의’란 에네지뎀 슐체의 회의주의를 일컫는다. 슐체는 철학적 체계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철저히 의심하지만, 일상적 지식에는 회의를 적용하지 않고, 누구나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직접적 인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직접적 인식을 받아들이는 슐체의 입장을 독단주의이며, 그의 회의적 입장과도 모순적이라고 비판한다.
절대적 부정은 후기아카데미에서 주장된 회의주의로서 자신까지도 부정하는 자기모순의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이에 비해 퓌론주의는 진리가 인식될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퓌론주의가 고대에서 이론적 일관성을 갖춘 회의주의로서 평가받는 것은 이와 같은 회의적 방법의 차이에 근거한다. 그렇지만 이 차이는 단순히 인식의 최후근거를 찾으려는 동일한 목적을 위한 전략의 차이가 아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기모순이라는 결함을 갖는 회의의 방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후기아카데미가 자기모순의 문제를 감수하면서도 사물의 인식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최후근거설정이라는 인식론적 문제로부터 회의적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인식론적 문제설정은 근대철학의 특징으로서 여기에서 회의주의는 사물인식을 위해 극복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와 반대로 고대철학에서 회의주의는 문제해결을 위해 전제되는 방법이다. 퓌론적 회의주의는 헬레니즘철학의 다른 학파들과 마찬가지로 행복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을 철학의 목적으로 삼는다. 이 목적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회의의 방법을 택한 것이 퓌론적 회의주의를 다른 학파로부터 구분하는 점이다. 퓌론적 회의주의자들은 행복이 영혼의 평온에서 얻어진다고 보고, 삶에 대한 모든 이론적 접근을 거부하는 회의의 방법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헤겔은 슐체의 회의주의를 경험주의나 일상적 실재론과 동일시하지만, 회의주의를 통해 추구되는 바를 고려한다면 슐체의 철학은 퓌론주의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슐체의 회의주의의 주된 목적도 삶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슐체가 주장하는 직접적 인식은 슐체를 경험주의 철학자로 분류하는 일반적 해석과는 달리 경험주의의 감각인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슐체는 직접적 인식을 주장하여 흄의 회의주의에 이르게 하는 근대철학의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칸트가 극복하지 못한 한계를 넘어섰고, 이로써 독일관념론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헤겔은 슐체의 철학에서 회의주의와 직접적 인식이 동시에 주장되는 것은 모순이라고 주장한다. 퓌론적 회의주의도 판단중지상태에서 일상적 삶을 영위할 바탕이 마련되어야 하므로 현상적 지식을 받아들이지만, 헤겔은 여기에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주관적 현상이란 의미만을 갖는 것이므로 독단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적 현상이 무엇인지도 분명하지 않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객관적 판단없이 주관적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지도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회의주의로 불리는 학파들이 회의적 방법과 지향하는 목표에 있어서 전혀 다르거나 혹은 유사성 속에서도 차별성을 갖는 점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그 차별성은 특히 감각현상에 대한 주장들에서 분명히 드러나므로 감각현상에 대한 회의주의의 입장들이 고찰될 것이다. 나아가 근대경험론과 같은 입장으로 이해된 근대의 새로운 회의주의에 대한 헤겔의 비판이 타당한지를 고찰하여, 관념론이 근대경험론을 극복하는 유효한 길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1. 고대 회의주의에서 감각현상

감각현상에 대해 고대의 회의주의자들은 같은 관점을 갖지 않았다. 고대의 회의학파로는 기원전 3세기경에 화가였던 퓌론과 그 제자들이 설립한 퓌론주의와 같은 시기에 플라톤이 설립한 아카데미에서 활동한 후기 아카데미주의가 있다. 퓌론적 회의주의는 감각현상을 인식주관의 의지작용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관적 현상으로서 파악한다. 그래서 이 감각현상은 그들의 회의의 결과인 판단중지상태에서의 행위기준으로 받아들여지는 만큼, 퓌론주의에서 가장 믿을 만한 지식이다. 반면에 후기 아카데미의 회의주의에서 감각현상은 언듯 갖게 되는 표상으로서 가장 신뢰도가 떨어지는 지식으로 여겨진다. 헤겔은 이 두 회의주의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절대적 회의주의로 파악하지만, 퓌론주의와 후기아카데미에는 ‘회의주의’로 불린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우선 회의의 방법이 다르다. 퓌론주의는 동일한 설득력을 갖는 대립명제들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회의주의를 주장한다. 다시 말해 퓌론주의는 그것이 감각현상이건 이성현상이건 모든 명제에 대해 같은 설득력을 갖는 대립명제를 제시하여, 진리탐구의 시도가 판단중지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같은 탑이 먼 곳에서는 둥글게 나타나는 감각현상에 대해 가까운 곳에서는 네모난 것으로 보이는 감각현상을 대립시키거나, “신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대해 “신의 섭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대립시키거나, “눈이 희다”는 감각현상에 대해 “눈은 물이 얼은 것이고, 물은 어두우므로 눈도 또한 어둡다”라는 생각을 대립시킨다. 이와 같이 모든 주장에 대해 그것과 같은 정도의 설득력을 갖는 대립적인 주장을 제시하는 것이 퓌론적 회의주의의 방법이다. 아카데미의 회의주의도 대립명제들을 제시하는 회의의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대립명제들이 같은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으로 구분된다. 진리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거짓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항상 있으므로 진리는 절대로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이 아카데미적 회의주의의 주장이다. 섹스투스는 아카데미의 절대적 회의주의를 퓌론적 회의의 원리로부터 구분한다. 아카데미에서는 진리가 절대로 인식될 수 없다고 주장되지만, 퓌론적 회의주의는 진리가 인식될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회의주의자는 그의 공식들을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설정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거짓이다’라는 공식이나 ‘아무 것도 참이 아니다’와 같은 공식은 다른 것들과 함께 자신마저도 거짓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퓌론주의는 진리가 절대로 인식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대신에, 모든 명제에 대해 대립명제를 제시하여, 진리탐구의 시도가 판단중지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퓌론적 회의주의는 진리와 거짓의 구분을 아예 불가능한 것으로 보고 모든 주장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는 것과 달리 아카데미적 회의주의는 진리와 거짓을 구분가능한 것으로 전제한 후 오류가능성을 증명함으로써 그 구분가능성을 다시 부정한다. 이로써 퓌론적 회의주의가 가장 일관성있고 정밀한 회의주의로 평가받는 반면에 아카데미는 결국 자신의 회의주의를 부정해야 하는 부정적 독단주의의 모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회의의 방법이 다른 만큼 감각현상에 대해서도 퓌론주의와 아카데미는 다른 입장에 선다. 오류가능성에 대한 증명을 회의의 방법으로 삼는 아카데미는 감각현상을 가장 믿을 수 없는 지식으로 여긴다. 예를 들어 밧줄이 길게 늘어져 있는 어두운 집안으로 급히 들어선 사람이 밧줄을 뱀의 모습으로 착각하는 것 같이, 감각현상은 이와 같은 착각을 가장 빈번히 일으키므로 가장 믿을 수 없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이 좀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것이 밧줄임을 알아채게 되는데, 이와 같이 자세히 살펴보고 갖는 지식이 보다 더 믿을 만한 지식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은 여전히 감각현상에 대한 지식이다. 아카데미주의가 가장 믿을 만한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성에 의해 검토된 지식이다. 감각현상에 대한 지식이 이미 기억하고 있던 앎의 내용과 대립적일 때 아카데미주의는 기억을 더 믿을 만한 지식으로 여긴다. 이와 같이 언듯 가진 감각적 지식에 비해 자세히 살펴보고 가진 지식이, 이것에 비해 지성에 의해 인정된 지식이 보다 더 믿을 만한 지식이란 것이 아카데미의 입장이다.
그렇다면 아카데미에서 지성이 진리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지성에 의해 인정된 지식이 보다 더 믿을 만하다는 것으로 진리에 가깝다는 의미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지식을 그렇지 않은 지식으로부터 구분하는 기준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곧 진리를 판별하는 인식기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뱀의 모습으로 본 것이 착각이라는 말은 곧 이 지식이 거짓임을 판별할 수 있다는 말이 되고, 이것은 사물의 참된 모습이 절대로 인식될 수 없다는 아카데미주의의 극단적 회의주의와 양립할 수 없게 된다.
아카데미주의가 개별적 감각지식보다는 지성에 의해 인정되는 지식을 보다 더 믿을 만한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퓌론적 회의주의자들은 진리와 거짓을 구분하지 않는다. 같은 탑이 둥글게 나타나기도 하고 네모나게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실제로 둥근지 네모난지에 대해 우리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설득력을 갖는 현상들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없는 판단중지의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퓌론적 회의주의는 판단중지의 상태에서 행위할 수 있는 지침을 제시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현상을 특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섹스투스는 현상을 감각표상이란 의미에서 받아들인다고 밝히고 있다. 감각표상은 우리에게 강제적으로 다가오는 수동적 표상이므로 의심할 수 없는 표상이란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체험과 일치하는 표상 안에서 비자의적으로 동의하도록 유도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현상이다.

현상으로써 우리는 사실상 감각표상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표상은, 느낌과 비자의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성립하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거에 놓여 있는 대상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나타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퓌론주의는 현상을 주관적 의식체험이란 의미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서 받아들이면서도 현상의 이면에 있는 사물 자체에 대해서는 말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대상이 나타나는대로 사실상 있는지에 대해서 의심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꿀이 단 맛을 낸다는 것을 퓌론주의는 인정한다. 그러나 현상적 의미에서 달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뿐 실재의 사물 자체가 단 것인지에 대해 말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퓌론적 회의주의는 주관적 현상을 더 이상 설명될 수 없는 수동적 경험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판단중지의 상태에 머물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주관적 현상에 따라 행위하는 것은 사물 자체에 대하여 객관적 판단을 중지하더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감각표상을 주관적 현상으로 채택하는 것이 퓌론적 회의의 원칙과 양립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제기된다. 다시 말해 퓌론주의에 따라 감각표상이 수동적 체험이므로 의심할 여지없는 표상이라면, 이것은 이 감각표상에 대해서는 대립적 표상이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 되고, 그렇다면 모든 주장에 대해 대립적 주장이 가능하다는 회의주의와 양립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의 원칙을 충실히 고수한다면, 퓌론주의는 감각현상에 대해서도 대립적 현상, 예를 들어 이성적 현상을 같은 증명력을 갖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눈이 희다는 감각현상만을 현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눈은 물이 얼은 것이므로 검다는 이성적 현상을 같은 정도의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회의주의자도 행위하기 위해서는 판단할 수밖에 없다. 주관적 현상을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도 판단중지의 상태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같은 정도의 설득력을 갖고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 중에서 어떤 현상에 따를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판단이 요구되므로, 회의주의자도 행위하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결정하여 선택해야 한다.
이와 같은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퓌론주의는 행위하지 않고 판단중지의 상태에 머물 수도 없다. 퓌론주의는 사물에 대한 참된 인식을 얻으려는 문제에서 출발하여 회의주의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회의의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퓌론주의는 개인이 행복에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려는, 헬레니즘철학의 공통적인 목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이것을 회의적 방법으로 실현하려는 점에서 다른 학파들과 구분된다. 회의적 방법을 통해 일상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종류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냄으로써 개개인들이 독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고, 이로써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려는 것이 퓌론주의의 철학적 목적이다. 따라서 퓌론주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회의의 결과는 독단을 드러낸 후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롭고 불안한 상태가 아니라, 바다와 같이 고요한 마음의 평정상태이다. 그런데 행위지침이 없는 판단중지의 상태에서는 누구도 마음의 평정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 누구나 항상 행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의의 결과는 결국 회의의 목적과 양립할 수 없게 된다.
아카데미의 회의주의는 사물의 인식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함으로써 부정적 독단주의의 모순을 피하지 못했다. 반면에 퓌론적 회의주의는 그 원칙에 기술되었듯이 사물이 인식될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회의의 원칙을 자신에게도 적용시키게 되었고, 그래서 독단적 회의주의의 문제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행위의 지침을 결정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퓌론주의는 감각현상을 진리기준으로 받아들이는 독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 퓌론적 회의주의는 새로운 회의주의와 다를 바 없다.


2. 새로운 회의주의

헤겔은 퓌론적 회의주의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근거하여 에네지뎀 슐체의 새로운 회의주의가 감각적 지식의 확실성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퓌론적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나 독단주의에 빠진다고 주장한다. 퓌론적 회의주의는 “주어진 것, 사실, 유한한 것을 고수하고, 그것을 명확, 확실, 영원한 것으로 떠받드는 일상적 인간오성을 겨냥한” 반면 새로운 회의주의는 “의식의 사실”이라는 유한성의 영역에 머무름으로써 회의주의의 가장 고귀한 측면인 일상적 의식의 독단주의에 대한 대립이 없고, 오히려 일상적 의식은 여기에서 무한한 사실들의 총체와 함께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과 진리를 의식의 사실에 두는 이와 같은 조야함은 그 이전의 회의주의도 물질주의도, 심지어 일상적 인간오성도, 그가 전적으로 동물적이지 않다면, 주장하지 않았다. 이런 주장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철학에 속하지 않은 것이다.
진정한 회의주의는 “일상적 의식의 독단주의를 겨냥하여, 일상적 의식이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 있는 유한성”의 모든 영역에 대해 그 진리성을 총체적으로 부정해야 한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주관적 현상이란 의미에서만 현상을 인정하는 고대의 회의주의가 새로운 회의주의에 비해 우월하다고 본다. 새로운 회의주의는 현상의 뒤에 있는 사물의 존재를 주장하여 일상적 의식의 독단주의에 그대로 머문다는 것이다. 또한 헤겔은 새로운 회의주의가 모순적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회의주의는 개념과 사물의 동일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면서 동시에 사물의 존재를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개념과 사물간의 절대적 동일성이 불가능하다면 사물의 존재에 대해 확실히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슐체씨는 우리가 일상적 삶에서 이 동일성을 전제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일상적 삶에서 전제된 것이란 말은 그것이 일상적 의식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새로운 형이상학은 이 동일성의 가능성을 근거지우려 한다; 그러나 새로운 철학이 일상적 삶에 전제된 동일성의 가능성을 근거지우려고 찾는 그 곳에는 아무런 참된 말이 없다. 왜냐하면 새로운 철학은 그 전제된 동일성을 진술하고 인식할 뿐, 다른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원문강조)

그러나 새로운 회의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 슐체는 개념과 사물 간의 동일성에 대해 철저히 의심하지만 우리의 의식이 사물과 일치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식과 사물의 일치가능성은 슐체에게 있어서 자신의 회의주의를 부정적 독단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는 회의의 본질적 요소이다. 그러나 슐체는 의식과 사물의 동일성을 위해 개념과 사물의 동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물의 존재를 개념의 매개없이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념과 사물의 일치를 부정하는 것이 외부사물의 존재에 대한 직접적 인식에 따르는 것과 모순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회의주의에 있어서 직접적 인식은 일상적 삶에서 행동의 기초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것은 퓌론적 회의주의에 있어서 현상이 일상에서의 행위 근거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퓌론적 회의주의가 감각현상을 주관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새로운 회의주의에게 직접적 인식은 적어도 일상생활에서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의 삶에서 의식에 주어진 객관적 사물이 우리의 밖에, 우리와 함께 동시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거나 않거나가 우리의 의도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회의주의는 현실의 부정이나 일상에서의 혼동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 일상의 자연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일상의 삶에서 회의주의는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회의하는 철학자이기 전에 인간이고, 세상의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하기 전에 이미 세상 안에서 자연적 기질을 발휘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의주의는 독단을 드러냄으로써, 인간이 그 본성으로 돌아가는 데에 기여한다. 다시 말해서 회의주의는 인간을 그의 진정한 고향으로 이끌어서, 독단주의가 사라진 후에는, 모든 완전한 예술이 그렇듯이, 다시 자연으로 돌려 보낸다.
새로운 회의주의가 주장하는 이와 같은 목표는 퓌론주의와 같이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퓌론주의와 달리 새로운 회의주의는 일상적 의식이 반성없이 받아들이는 사물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회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적 의식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퓌론적 회의주의가 직면하는 딜레마를 피해가는 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퓌론적 회의주의는 모든 현상에 대해 판단을 중지하면서도 감각현상을 근거없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판단중지의 상태에서 감각현상을 받아들이는 모순을 택하지 않고 새로운 회의주의는 직접적 인식을 회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따라서 직접적 인식을 받아들이는 슐체의 회의주의가 주관적 현상이란 의미에서 감각현상을 받아들이는 퓌론주의에 비해 독단적이라고 볼 수 없다. 감각현상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고대와 새로운 회의주의는 모두 독단적이다. 그러나 이 두 회의주의가 받아들이는 감각현상은 헤겔이 부정하는 처음의 직접성으로서의 감각인상이란 의미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헤겔이 절대적 부정을 통해 발견하는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지식이다. 다만 이것은 헤겔이 주장하듯이 반드시 개념의 역사인 것은 아니다.


3. 총체성으로서의 직접성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지식의 풍요롭고 참된 모습이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감각적 지식은 “그 앞에 객관을 그 총체적 완전성 속에서 갖는” 것으로서 가장 풍요롭고 참된 진리로 보이지만, “사실상 그것 자체로서 가장 추상적이고 빈곤한 진리를 표현할” 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자와의 다양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매개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객관과의 매개없는 직접적 관계가 진리성을 보장할 것 같이 보이지만, 오히려 매개없는 관계가 추상적이고 빈곤한 이유를 헤겔은 차례대로 제시한다.
먼저 감각적 지식이 무한한 영역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착각에 대해 헤겔은 감각적 지식의 대상이 시공간이라는 개념틀에 의해 매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 같은 ‘지금’과 ‘여기’의 진리성조차도 매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지금은 밤이다”라는 답변을 가정했을 때, 낮에 그 진리성을 다시 들여다 본다면, 그것이 “썩어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낮과 밤이 무로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그 진리성을 보유하는 것은, 그것이 낮과 밤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고, 매개적일 수밖에 없음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감각적 지식의 진리성이 일반성일 수밖에 없고, 언어의 매개를 거부하는 감각적 지식은 진리성을 표현할 수 없다고 결론내린다. 그리고 같은 논리를 ‘여기’에도 적용한다. 그래서 감각적 확실성의 대상은 시공간의 개념틀에 의해 매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보여졌다.
그러나 그것은 주관적 자아의 인식에서 여전히 그 직접적인 진리성을 주장할 수 있다. 그것은 “이제 내가 보고 듣고 하는 것과 같은 직접성 속에 놓여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시공간에 의해 매개되어야 하는 ‘지금’과 ‘여기’는 주관적 자아의 인식을 통해 그 직접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지금은 낮이다” 혹은 “여기에 나무가 있다”는 인식은 “내가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여기에서 주관적 자아의 의식을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고, 타자의 의식과 대립시킴으로써 그 직접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 ‘이것’이기도 한 ‘자아’는 나무를 보면서 이 나무야말로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지금과 다른 또 ‘다른 자아’의 경우에는 집을 보면서 여기에 있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오히려 집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 한 편의 확신은 그러나 다른 또 하나의 확신 속에서 소멸되고 만다.

이와 같이 헤겔은 시공간이라는 개념틀이 전제되지 않은 절대적 시점이나 인식의 절대적 출발점으로서의 주관적 확실성이 불가능함을 보여줌으로써 감각적 지식의 풍요함과 참된 모습이 착각이고 매개되지 않은 직접적 인식이란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헤겔은 퓌론적 회의의 방법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 “지금은 밤이다”라는 감각현상에 대해 “지금은 낮이다”를, “이것은 나무이다”라는 감각현상에 대해 “이것은 집이다”를 대립시켜서 어떤 감각적 확실성도 진리성을 보유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헤겔도 절대적 회의주의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대립들 중에서 소멸되지 않고 남는 것을 통해 대립들을 지양한다. 그것은 감각적 확실성의 전체이다. 이것을 통해서 “그 이전에 발생한 모든 대립은 그것 자체로부터 지양된다”. 헤겔은 대립들을 지양한 후 다시 순수한 직접성을 받아들인다. 이 직접성은 곧 총체성이다. 따라서 순수한 직접성은 대립들을 넘어선다. 그것의 진리성은 주관과 객관간을 본질성과 비본질성으로 구분하는 것을 넘어서 아무것도 구분하지 않는 것으로서 그대로 머문다. 여기에서 ‘나’는 순수직관으로서 “지금은 낮이다”라는 직접적 관계에 확고히 머문다. 이것을 헤겔은 변증법적 전개과정으로 기술한다. ‘지금’이란 직접성의 진리성은 다른 ‘지금’의 진리성에 의해 지양되고, 이 진리성이 지양되면서 다시 처음의 직접성 ‘지금’으로 되돌아 간다. 그러나 이 직접성은 처음과 같은 직접성이 아니라, 곧 수많은 ‘지금’인, 참된 ‘지금’으로서의 직접성이란 것이다.
이와 같이 헤겔은 개별자에 대한 인식이 직접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직접적 인식의 내용이 특정한 개별대상에만 독특한 감각이 아니라 그 개별대상과 관련된 총체성이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의 개별적 사물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을 일반적인 것으로서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이 사물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 이 한 장의 종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곧 모든 개별적 종이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일반성을 말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순수한 직접성으로 여겨지는 인식에서조차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에 의해 매개되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매개란 일반자이지 주관적 표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헤겔은 개별적 의식의 사실이 그것 자체로서 확실성을 갖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의식이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의식의 사실”과 같은 근원적 상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여기’ 혹은 ‘이것’과 같이 일반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겔은 직접적 인식의 대상이 감각현상이 아닌 일반자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라고 주장한다. 감성적 확실성이 갖는 역사성을 망각하고 새로운 회의주의는 자연적 의식을 내세우면서 언제나 처음의 단계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은 새로운 회의주의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슐체가 받아들이는 직접적 인식이란 의식의 주관적 확실성에서 출발하는 것도 아니고, 감각인상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4. 회의주의와 직접적 인식

새로운 회의주의가 주장하는 직접적 인식은 일상적 의식이 사물에 대해 갖는 생생한 인식이다. 일상적 의식이란 곧 역사적으로 형성된 의식이므로 일상적 의식이 파악하는 직접적 인식은 처음의 직접성이 아니라 역사적 인식이다. 그러나 이 직접적 인식에 주관적 표상이나 개념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직접적 인식에서 의식은 대상과 직접적 관계에 있고 표상이나 개념에 의해 매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슐체는 사물의 존재와 다양들의 결합에 관하여 성립하는 필연성으로써 직접적 인식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집을 볼 때, 보는 상태가 계속되는 한, 집을 보지 않을 수는 없다. 우리는 비록 우리가 집을 보는 그 자리에 사람, 나무 혹은 다른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그 자리에서 집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볼 수는 없다. 나아가 우리가 감각하는 동안에는 집에 속하는 부분들의 결합을 있는 그대로 두어야지, 거기에서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집의 지붕이 밑에 있고 집의 바닥이 위에 있다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 그렇지만 이것을 감각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슐체가 주장하는 직접성은 처음의 직접성이 아니다. 그는 대상과 주관의 처음의 만남에서 성립하는 감각인상의 확실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언제나 같은, 대상과의 만남을 주장한다. 둥근 것은 언제나 둥근 것으로 나타나고 해의 온기와 빛은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감각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직접성은 인식론적 의미에서 주장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회의주의란 원래 인식의 성질에 대해 새로운 사고방식을 … 성립시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회의주의적 입장과 상충되지 않는다. 직접적 인식의 근원은 오히려 설명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본성의 비밀”에 속한다는 것이다. 슐체의 주된 관심은 인간의 사유에 의해 변형되지 않은 인식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다. 그래서 직접적 인식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론적 증명이 아니라 그 가능성의 해명이다. 이 해명은 근대철학적 인식주관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성립한다. 주관적 자아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인식론적으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과 마찬가지의 위치에서 출발한다. 헤겔에서와 같이 슐체에게 있어서도 ‘나’는 ‘나무’나 ‘집’과 같이 일반자일 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자기의식에 대한 슐체의 설명에 분명히 드러난다.
자기의식이란 스스로를 의식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잠에서 깨어나면 저절로 자기의식을 하게 되고 깨어있는 동안에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결정에 의해 자기의식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반면에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개념은 나의 개별적 규정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비로소 형성된다. 왜냐하면 “이 사유는 사유되는 나에 대해, 모든 개념이 그것의 대상에 대해 있는 것과 같은 관련성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의 개념은, 사물에 대해 ‘둥근’이나 ‘연장된’과 같은 개념이 갖는 동일한 위치에 있을 뿐이어서, 이 개념들이 표현하는 사물 자체와 일치하지 않듯이, ‘나’라는 개념은 존재하는 나를 그대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식은 사고 이전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식과 동시에 발생하므로, 여기에는 ‘주관에 대한 의식’과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나에 대한 의식’이라는 구분이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구분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식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자기의식을 근거로 직접적 인식의 가능성이 해명된다. “자기의식과 함께 누구에게나 항상 공간 안에 존재하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의식도 또한 발생”하므로, 나의 의식과 존재가 일치하는 직접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상인식에 있어서도 “직관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와 직관되는 객관, 둘 다를 분리되지 않은 동일한 순간에 의식하므로” 직접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직접적 인식에 대한 이 해명은 그의 새로운 회의주의의 원칙에 그대로 머무른다. 자기의식을 통해 직접적 인식의 가능성을 설명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거기에 어떻게 도달하는지를 모른 채 그것을 가질”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슐체가 이해하는 직접적 인식은 주관적 의식의 확실성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같은 주관성을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도덕적 인식에서와 같이 외적 감각의 대상을 갖지 않고, 내적 지각으로부터 오는 인식도 확실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예를 들어 편안한 느낌이나 옳은 행동으로 여겨진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직접적 인식은 일반적 인간오성의 인식이다. 일반적 인간오성은 세계의 근원과 삶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 여기에는 모든 지식이 총체적으로 관련되어야 한다. 그 중에서 현존재의 고귀함에 기여하는 철학의 목적은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통해 비로소 실현된다. 형이상학은 사물을 “개별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파악하여 세계의 근원을 인식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의 과제는 반드시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 기반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슐체는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민족종교와 같은 종교적 믿음에 대한 탐구가 형이상학적 탐구의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여기에서는 사물이 학문적 탐구 이전에 이미 “그것의 총체성 안에서” 묘사되기 때문이다. 경험과학도 세계가 그 총체성 안에서 고찰되는 광범위한 형이상학적 탐구를 통해서만 그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절대적 부정이 진정한 의미의 철학이자 회의주의라고 주장하지만, 판단중지의 상태에서는 어느 누구도 어떤 식으로든 행위할 수 없다는 것이 퓌론적 회의주의의 문제에서 드러났다. 퓌론적 회의주의가 행위의 기준으로 삼는 감각현상에 대해서도 같은 설득력을 갖는 대립적 현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그들의 회의적 주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끝없는 회의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퓌론적 회의주의와 새로운 회의주의는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거나 자연적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감각현상과 직접적 인식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처음의 단순한 직접성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참 고 문 헌

Engstler, A., "Hegels Kritik am Skeptizismus Gottlob Ernst Schulzes," in: Skeptizismus und spekulatives Denken in der Philosophie Hegels, hrsg. v. H. F. Fulda u. R.-P. Horstmann, Stuttgart 1996
Hegel, G. W. F., "Verhaeltnis des Skeptizismus zur Philosophie. Darstellung seiner verschiedenen Modifikationen und Vergleichung des neuesten mit dem alten," Werke 2; Jenaer Schriften 1801-1807, Suhrkamp-Taschen- buch Wissenschaft, Frankfurt 1986
, Werke 3; Phaenomenologie des Geistes, Suhrkamp Taschenbuch Wissenschaft, Frankfurt 1986
, Vorlesungen ueber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II, Theorie Werk- ausgabe, Suhrkamp Verlag, Frankfurt 1971
Hossenfelder, M., "Umgang mit Alternativen in der Skepsis," in: Ethik und Sozialwissenschaften, Heft 4, 1994
Pippin, R., Hegel's Idealism, Cambridge 1989
Richter, R., Der Skeptizismus in der Philosophie und seine Ueberwindung, Bd. 1, Leipzig 1904
Schulze, G. E., "Die Hauptmomente der skeptischen Denkart ueber die menschliche Erkenntnis", in: Neues Museum der Philosophie und Literatur. Hrsg. v. Bouterwek, F., Bd. 3, Hf. 2, Leipzig 1805
, Aenesidemus oder ueber die Fundamente der von dem Herrn Prof. Reinhold in Jena gelieferten Elementar-Philosophie, 1792
, Enzyklopae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Goettingen 1824
, Kritik der theoretischen Philosophie. Bd.2, Hamburg 1801
, Ueber die menschliche Erkenntnis, Goettingen 1832
, Psychische Anthropologie, Goettingen 1816
Sextus Empiricus, Grundriss der pyrrhonischen Skepsis, I, uebers. v. Hossen- felder, M., Frankfurt a. M. 1985
Wild, Ch., Philosophische Skepsis, Hain 1980

Zusammenfassung

Skeptizismus und Sinnliches Phaenomen

― Kim, Mi-Young ―

Der Skeptizismus wurde akzeptiert in der alten Philosophie als eine Methode zur Loesung der Probleme. Der pyrrhonische Skeptizismus setzte sich den Zweck der Philosophie, den Weg zum Glueck zu zeigen, wie es bei den anderen philosophischen Schulen des Hellenismus war. Demgegenueber wurde der Skeptizismus in der modernen Philosophie als ein Problem betrachtet, das fuer die Erkenntnis der Dinge zu ueberwinden war. Der neue Skeptizismus hat denselben Zweck der pyrrhonischen, indem er den gemeinen Menschenverstand von der philosophischen Ideologie freimacht, so dass es moeglich macht, fuer alle das ihrem natuerlichen Wesen angemessene Leben zu fuehren. Der neue Skeptizismus wurde aber kritisiert als ein Dogmatismus von dem zeitgenoessischen Philosoph Hegel, weil er die unmittelbare Erkenntnis der Dinge als gewiss annimmt. In dieser Artikel wird gezeigt, dass diese Kritik ungerecht ist. Es wird gezeigt, dass die pyrrhonische Annahme des Phaenomen problematisch ist, und dass der neue Skeptizismus trotz der Annahme der unmittelbaren Erkenntnis der Dinge sich nicht in Widerspruch geraet. Es wird noch vorgebracht, dass diese Unmittelbarkeit nicht die einfache Unmittelbarkeit bedeutet, welche Hegel meint. Die Allgemeinheit und Totalitaet der Erkenntnis soll nicht unbedingt durch eine Geschichte der Begriffe erklaert werden.

※ Schlagwörter : Pyrrhonismus, Neue Akademie, Neue Skeptizismus, Dogmatismus, Sinnliches Phaenomen, Unmittelbarkeit, Totalitaet.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