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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理學에 있어서 계사(Copula)의 문제



論理學에 있어서 계사(Copula)의 문제


유제기 서울대 철학




Ⅰ.序論


흔히 思惟의 形式的 規則에 대한 學問으로 통하는 論理學은 끊임없이 발전하여, 마침내 現代에 이르러서는 數理論理學이라는 새로운 論理學이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數理論理學은 Aristoteles 以來의 傳統的 論理學보다 더 正確性과 嚴密性을 가지며, 그것이 다루지 못하는 關係論理도 다룰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전통적 論理學을 포섭할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과연 論理學은 Aristoteles 이래 발전을 해왔으며, 數理論理學은 정말로 혁신적 論理學인가?

論理學(Logik)이라는 말은 희랍어 logike, 더 정확히 말하면 logike episteme에 語源을 두고 있다. 강단 論理學으로서 論理學이 성립한것은 플라톤의 아카데미 초대 학원장인 Speusippos의 후계자인 Xenokrates에서 이다. 회의주의자 Sextus Empiricus에 의하면 Xenokrates가 철학을 倫理學, 自然學, 論理學으로 나누었다 한다. 이러한 구분의 싹은 이미 Platon에게 볼 수 있다. 윤리학(ethike)이 ethos를, 자연학(physike)이 physis를 주제로 삼는데 비해 論理學(logike)은 logos를 주제로 삼는다. 이러한 철학의 분류는 페리파토스 학파를 거쳐 스토아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로도스섬의 Andronikos가 당시 스토아 철학의 철학 분류에 입각하여 Aristoteles의 일련의 저작을 meta ta physika로 명명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논리학의 주제인 logos는 命題, 文章, 判斷, 思惟 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論理學은 で思惟에 대한 學問と으로서 규정할 수 있다. 그런데 思惟는 항상 で어떤 것에 대한 思惟と(Denken über etwas)이므로 思惟의 對象과 관련시켜볼 때 思惟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論理學은 素材的 論理學(materiale Logik)이 된다. 現實的인 모든 思惟의 對象인 存在者는 각각 다른 영역에 속하므로, 그 存在者에 대한 思惟的 규정 즉 觀念形成도 다르게 된다. 아울러 이런 思惟에 대한 學的 探究도 달라 倫理學的 思惟의 論理學, 數學的 思惟의 論理學, 歷史學的 思惟의 論理學, 神學的 思惟의 論理學 등이 成立할 수 있게 된다. 이것들이 소재적 論理學에 속하게 된다. 이에 대해 自然, 空間, 歷史 와 같은 특정한 영역과 무관하게, で일반적으로 …에 대한 思惟と(das Denken über… im Allgemeinen)를 주제로 하는 論理學은 一般論理學(allgemeine Logik)이다. 여기서는 특정한 對象領域이 문제가 되지 않고 對象의 形式이 문제가 되므로, 一般論理學은 形式論理學(formale Logik)이라 할 수 있다. 一般論理學은 또한 思惟일반을 內的으로 可能하게 하는 것, 즉 思惟로서의 모든 思惟가 충족시켜야 하는 法則性을 다룬다. 그러므로 一般論理學은 思惟의 形式的 規則에 대한 學問(Wissenschaft von den formalen Regeln des Denkens)이라 할 수 있다.

Leibniz에 연원을 두고 Frege를 거치면서 Russell, Whitehead등에 이르러 개발된 數理論理學은 논리의 정확성과 엄밀성을 위해 論理學에 수학을 적용시킨 것이다. 여기서 로고스는 철저하게 形式化, 數學化되어, 로고스는 계산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결코 數理論理學이 이룩한 눈부신 업적을 否定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로고스라는 사태 그 자체이다. 數理論理學은 로고스라는 현상앞에 완전히 눈을 감고 있다.

마찬가지로 소재적 論理學이나 一般論理學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로고스의 근원적 의미는 은폐된 채로 있다. 論理學에서 로고스는 思惟나 命題, 또는 文章을 의미하며 로고스의 근원적, 1차적 의미는 忘却되고 있다. 論理學은 로고스의 근원적 의미를 암암리 단지 전제를 하고 論理學的 작업을 수행할 뿐이다. 論理學의 기본적 토대인 로고스의 근원적 의미가 망각된 채로 있는한, 論理學은 제자리 걸음을 할 뿐이다. 論理學의 歷史는 단적으로 말하면 로고스 忘却의 歷史라 할 수 있다.

論理學에서 진리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다. 로고스와 진리(aletheia)는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있는데, 로고스가 명제의 의미를 갖게 되므로 진리가 나타나는 곳은 명제가 된다. ぢ진리의 で장소と는 명제(판단)이다.っ 진리가 명제안에서만 다뤄져야 되는지, 아니면 명제가 오히려 진리에 의존하는지는 앞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論理學에서 진리는 で知性과 事物의 一致と(adaequatio intellectus et rei)가 되어, 진리인 aletheia의 근원적 의미가 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論理學의 歷史는 진리망각의 歷史라 규정지을 수 있다.

存在論의 중심적 문제인 存在는 論理學에서 で이다と(ist)의 문제로서 다루어진다. 존재론에서 存在는 本質(essentia, quidditas, Wassein, Wesen)과 實存(existentia, Existenz, Wirklichkeit, Dasein)이라는 두 存在方式을 갖는다. 또한 存在는 ontos on의 경우처럼 참(Wahrheit)의 의미를 갖는다. で그 칠판은 검다と(Die Tafel ist schwarz)라는 말에서 이다(ist)를 강조하여 말하면, で그 칠판은 참말로 검다と(Die Tafel ist in Wahrheit schwarz)를 의미하게 된다. 여기서 강조된 >ist<는 참(Wahrsein)을 의미한다. 이처럼 일상어에서도 >ist  <는 참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論理學에서 S는 P이다(S ist P)라는 명제에서 이다(ist)는 주어S와 술어P를 結合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で이다と는 繫辭(Copula)라는 명칭을 갖게 된다. 繫辭로서의 存在는 이제 無差別性을 갖게 된다. 더우기 Quine은 ぢ存在는 變數의 값이다っ라고 말하여, 存在의 근원적 의미를 망각하고 存在를 함수에 유폐시켜놓았다. 論理學의 歷史는 또한 存在忘却의 歷史라 할 수 있다.

古代存在論의 문제전개의 추이에 따라, 繫辭로서 存在가 論理學에서 다루어지게 되므로 存在는 존재론에서 分離되었다. 그래서 存在의 중심적인 문제가 論理學으로 옮겨 가게된다. 그것의 대표적인 例를 Kant와 Hegel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Hegel은 존재론을 論理學으로 解消시켜 버렸다. 그러나 存在의 문제는 論理學에서 다시 존재론으로 復歸할 때, 올바르게 천착할 수 있다.

本稿에서는 論理學의 근본적인 세요소인 命題, 眞理, 그리고 繫辭의 문제를 繫辭를 中心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무차별적인 繫辭가 Aristoteles, Hobbes, J.S.M-ill 등에서 存在의 어떤 地平에서 밝혀질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 繫辭문제를 基礎存在論(Fundamentalontologie)에 의해 근거지우고자 한다. 아울러 論理學에서 망각되고 있는 진리와 명제의 근본적 의미를 基礎存在論의 視野에서 드러낼 것이다.

ぢ참다운 詩라고 하는 것은 잠을 깨우는 기능이다っ (La vraie poésie est une fonction d'éveil)라고 한 Bachelard의 말처럼,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의 진정한 역할이란 망각의 잠을 깨우는 데 있다. 우리는 基礎存在論에 의해 論理學에 있어서 存在의 망각, 진리의 망각 그리고 로고스의 망각의 잠을 깨우고 論理學을 근거지워 주고자 한다.


Ⅱ. 本論


1. 傳統 論理學에서 繫辭


(1) Aristoteles

1) 밝히는 로고스 (logos apophantikos)

Aristoteles는 [解釋論]Ⅳ장 17a1 에서 logos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ぢ모든 로고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っ 로고스가 意味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人間의 理解와 관계를 맺개 된다. 로고스는 理解可能性, 즉 人間相互間의 의사전달, 요구, 願望, 질문, 설명 등의 地平을 形成하며 또한 人間들에게 이해하도록 시킨다.

Aristoteles에 의하면, 야수의 울부짖음은 말(名詞, ono  ma)이 될 수 없다. 야수의 울부짖음 같은 非分節的인 소리(agrammatoi psophoi)로 야수는 자기들끼리 의사소통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의미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단지 음성(phone)에 불과하다. 그렇기때문에 야수는 애당초 어떤 것을 이해하거나 의미하지도 못한다. 人間의 로고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어떤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또 의미할 수도 있다. 로고스는 일차적으로 음성으로 부터 이해될 수 없고 의미로 부터 이해되야 하며 그러는 한에서만 로고스는 음성일 수 있다. 로고스는 의미를 가진 음성(phone semantike)이다.

밝히는 로고스가 로고스에 속하는 한 그것도 의미를 가지고 있다. ぢ모든 로고스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모든 로고스가 다 밝히는 로고스는 아니다.っ밝히는 로고스는 명제, 문장 등으로 번역되나, 그것의 기능은 存在者를 存在하는 그대로 밝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로고스가 밝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ぢ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것을 본질로 가지고 있는 로고스만이 밝힐 수 있다.っ

밝히지 않는 로고스의 예로는 祈願을 들 수 있다. 기원의 경우에서는 그것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다. 願望, 命令, 물음등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로고스를 탐구하는 것은 修辭學이나 詩學의 영역에 속한다. 이에 대해 밝히는 로고스를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 解釋論이다.


2) 참(aletheuein)과 거짓(pseudesthai)

Heidegger는 logos를 규정하는 참(aletheuein)과 거짓(pseudesthai)의 의미를 더 깊이 파고 든다. 中間態로 pseudesthai는 で스스로를 기만하다と で그 자체로 기만적 이다と를 의미한다. で기만하다と라는 말은 어떤 것을 그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기만함은 기만되는 것과 관계해볼 때 감춤(Verdecken)이다. 이에 대해 참(aletheuein)은 의미상 a-letheuein 즉 숨김으로부터 벗어남이기 때문에 감춤에 대한 발견을 의미한다.

감출 수 있거나 발견할 수 있는 로고스가 밝히는 로고스이다. 그러므로 감추는 로고스도 밝힐 수 있다. 만약 감추는 로고스가 본질상 그렇치 못하다면, 그것은 기만적인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을 속이려고 한다면, 나는 그에게 어떤 것을 밝히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상대편도 내가 말하는 것을 무언가를 밝히려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럴 때에만, 나는 어떤 것에 대해 그를 속일 수 있을 것이다.


3) 結合(synthesis)와 分離(diairesis)

그렇다면 이러한 로고스의 본질의 근거는 무엇인가? 즉 로고스가 發見(aletheue-in)일 수 있고 아니면 감춤(pseudesthai)일 수 있는 이러한 가능성을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ぢ감춤과 발견이 가능한 경우에, 이미 存在者들의 統一과 같은 思惟되는 것들의 結合이 存在한다.っ 위에서 보듯이, 結合(synthesis)은 발견(참)과 감춤(거짓)의 가능성의 근거이다. 이런 結合및 통일을 형성하는 것은 思惟 내지 정신 (noesis,nous)이다. ぢ통일(hen)을 형성하는 것은 모든 경우에 思惟이다.っ

로고스는 감춤(거짓)과 발견(참)에 의해 규정되고 감춤과 발견의 근거는 思惟 내지 정신이다. 그러므로 로고스의 근거는 思惟 내지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감춤(거짓)의 경우 結合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ぢ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흰 것이 희지않다고 속이기 위해 말을 한다면, 그는 이미 희지 않음을 흰 것과 結合해야 한다.っ 따라서 ぢ감춤(거짓)도 항상 結合에 근거하고 있다.っ

Aristoteles는 結合(synthesis)을 分離(diairesis)와 나누어 생각하지 않는다. ぢ이런 모든 것들(synthesis 下에서 드러내었던 모든 것들)을 分離라고 부를 수 있다.っ 그러므로 모든 結合은 分離이며, 마찬가지로 모든 分離는 結合이다. 그러므로 밝히는 로고스의 발견과 숨김은 結合과 分離에 근거하고 있다. Aristoteles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ぢ감춤(거짓)과 발견(진리)은 結合과 分離가 일어나는 경우에만 존재한다.っ 그런데 結合과 分離는 思惟의 작용이다. 結合과 分離는 Aristoteles의 로고스 이론을 해석하는 데 아주 중요하며, Heidegger는 結合과 分離를 で으로서 구조と(>Als
Aristoteles는 밝히는 로고스를 그것의 근본적인 작용과 관련하여 で밝힘と이라 부른다. Heidegger에 의하면, 밝힘은 存在者를 存在者로서, 즉 그것이 그때 그때 바로 무엇이고 어떠한 바로서 보이게 함(Sehenlassen des Seienden als Seienden, als das, was es und wie es je gerade ist)이다. 여기서 存在者는 hyparchon 즉 Heidegger의 용어로는 手前者(Vorhandenes)이다. 手前者의 手前性(Vorhandenheit)은 지속적인 現前性(ständige Anwesenheit)이다. 희랍에서는 存在者의 存在를 で지속적인 現前性と으로 이해했으며 그것은 ousia 즉 parousia이다. 그리고 現存前은 現在와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古代의 존재론에서 存在는 현재라는 시간의 지평에서 해석될 수 있다. ぢ存在는 現前性(Abwesenheit)이다. 진리는 >>現在(Gegenwart)<<를 의미한다. 現前은 現在로 부터 이해된다. 현재는 시간의 양태이다.っ

이러한 성격을 갖는 で밝힘と(apophansis)은 명제로 번역되어 그것의 근원적 의미는 사라지게 되었다. 마침내 數理論理學에서는 밝힘은 철저하게 形式化, 數學化되어, 計算의 對象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밝힘은 手前者에 대한 밝힘이므로, Aristoteles 이후의 論理學은 手前者에 대한 論理學이며, ぢ그것은 手前者의 존재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っ

단순한 밝힘 ( haple apophansis , 단순명제 ) 은 肯定 ( kataphasis ) 과 否定(apophasis)의 두 형식을 갖는다. 肯定은 ぢ어떤 것에 관해 어떤 것을 밝힘っ(apophansis tinos kata tinos)이며 이에 대해 否定은 ぢ어떤 것으로 부터 어떤 것을 밝힘っ(apophansis tinos apo tinos)이다.

그 칠판은 검다라는 긍정(kataphasis)의 경우에 칠판이라는 存在者에 검게 있음을 부여하여 칠판이라는 存在者를 밝히기 때문에, Heidegger는 kataphasis를 ぢ부여적 밝힘っ(zuweisendes, zusagendes Aufweisen)이라 부른다. 이러한 부여적 밝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검게 있음이 칠판이라는 存在者와 먼저 結合되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또한 分離에 근거하고 있다. 이 경우, 分離는 뒤에서 다뤄질 것이다. 이에 대해 그 칠판은 검지 않다라는 否定(apophasis)의 경우에 칠판이라는 存在者로부터 검게 있음을 박탈하기 때문에, 그것은 ぢ박탈적(제거적) 밝힘っ(wegweisendes absprechendes Aufweisen)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아님(nicht) 속에서 검게 있음이 칠판이라는 存在者로부터 分離되어 있기 때문에, 박탈적(제거적) 밝힘에서는 分離만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ぢ分離하고 박탈하는 >>아님<<(Nicht)은 文章을 部分들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命題계기로서 검게 있음이 칠판과 관계되고 그것과 結合될 때만 가능하다.っ 그러므로 박탈적(제거적) 밝힘인 부정(apophasis)의 근거는 結合과 分離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전개한 논의를 요약해보자. Aristoteles는 로고스자체로 부터 시작하여 그것의 본질을 意味(semantikos)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로고스를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음성(pone semantikos)으로서 규정하였다. 로고스의 일부인 밝히는 로고스(logos apophantikos)를 발견(참, aletheuein)과 감춤(거짓, pseudesthai)에 의해 규정하였다. 밝히는 로고스의 두 형식은 부여적 밝힘(kataphasis,부정)과 박탈적(제거적) 밝힘(apophasis, 긍정)이며, 그것들은 긍정과 부정이기에 앞서 밝히는 기능(apophansis)을 가졌다. 그것들은 또한 발견(참)의 가능성과 감춤(거짓)의 가능성 속에 서있다. 이 발견(참)과 감춤(거짓)은 結合(synthesis)에 근거하고 있으며 結合은 동시에 分離(diairesis)이다. 발견(참)과 감춤(거짓)은 밝히는 로고스의 근거이므로, 結合과 分離는 밝히는 로고스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結合과 分離의 작용을 하는 것은 思惟(nous)이다. 그러므로 결국 밝히는 로고스는 思惟에 의해서 규정받는다. 이것을 다음과 같은 도표로 제시할 수 있다.


로고스

의미를 가진음성(phone semantikos)

밝히는 로고스(logos apophantikos)

| |

부여적 밝힘(kataphasis,부정) 박탈적(제거적) 밝힘(apophasis,긍정)

| |

+-----------+-----------+

|

발견(참, aletheuein) --- 감춤(거짓, pseudesthai)

|

|

結合(synthesis)-+ 思惟작용--思惟

分離(diairesis)-+ (noein) (nous)


이제까지 우리는 로고스의 구조에 대해 살펴 보았다. 밝히는 로고스(logos apophantikos) 즉 밝힘(apophansis)은 앞서 보았듯이 存在者를 存在者로서 보이게 함(apophainesthai) 즉 存在者를 그것이 무엇인 바로서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바(Was es und wie es ist)로서 보이게 함이다. 그러므로 밝힘은 存在者를 그것의 무엇임(Wassein)과 어떠함(Wiesein)에서, 즉 그것의 存在(Sein)에서 밝히는 것이다. 여기서 밝힘은 存在와 관계를 맺게되며, 그것이 명제로 번역될 때, 存在는 繫辭 ist로서 명제안에 나타나게 된다.


4) 繫辭

Aristoteles에게 밝힘의 대상이 되는 存在者는 hyparchon 즉 手前者(Vorhandenes)이다. 희랍사람들은 存在者를 이렇게 이해했으며 그것의 存在, 즉 手前性(Vorhandenheit)은 지속적인 現前性(ständige Anwesenheit, ousia, parousia)이다. 그리고 지속적인 現前性은 시간상 현재의 지평에서 해석될 수 있음은 앞에서 보았다. Aristoteles는 存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ぢ만일 存在가 단지 그 자체로 말해진다면, 存在와 非存在는 事物(사태)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存在는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고 어떤 結合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結合은 結合되는 것없이 생각될 수 없다.っ

Aristoteles의 存在에 대한 테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해석해보자. Aristoteles는 먼저 存在에 대해 否定的으로 말하고 있다. 存在(einai)나 非存在(me einai)는 거기에 어떤 것을 덧붙이지 않고 그 자체적으로 사용한다면, 즉 名辭처럼 사용한다면, 사태나 사물(pragma)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存在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는 사물도 아니며 사물적 속성도 아니며 손앞에 있는것도 아니다. Kant는 이런 맥락에서 ぢ存在는 實質的 述語가 아니다っ(Sein ist kein reales Prädikat)라고 말했다. 여기서 real은 res 즉 사물, 사태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存在는 手前者를 의미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또한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다. Aristoteles는 이번에는 存在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을 한다. 그는 여기서 で의미하다と(semainein)를 사용하지 않고 で함축하다と(prossemainein)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存在는 어떤 것을 명명하는 것처럼 獨立的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で어떤 結合と(synthesis tina)을 함축한다. 그런데 그 結合은 思惟 속에서 結合되는 것들 없이 생각될 수 없다. Kant도 마찬가지로 存在에 대해 적극적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存在는 結合槪念이다.

Aristoteles의 存在에 대한 테제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예를들어 설명해보자. で그 칠판은 검다と라는 명제에서 주어 で칠판と과 술어 で검은と은 手前者(Vorhandenes)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각각 검은 것으로서의 칠판사물과 그것에서 手前하고 있는 검음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ist 로서의 存在는 手前者가 아니라, 思惟 속에 (en dianoia) 있다. ist는 結合으로서, 思惟 속에서 사유되는 것들의 結合이다. Aristoteles는 또한 存在는 ぢ思惟의 結合속에 있으며, 思惟의 상태っ 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 存在는 Platon의 이데아처럼 思惟 밖에 있는 것 (exo on)도 아니며 그 자체로 獨立的으로 있는 것(choriston)도 아니다. 그렇다면 存在는 主觀的인가? 여기서 말하는 思惟(dianoia)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런 문제는 뒤에서 다룰 것이다. 그것은 基礎存在論의 地平에서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Aristoteles는 ist로서의 存在를 で사물 속에と(en pragmasin)가 아니라 で思惟 속에と(en dianoia) 있는 것으로서 파악하였다. 이런 생각은 Kant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 그는 存在를 實質的 술어가 아니라 で한갓 定立と(bloß Position)으로서 규정하였다. Aristoteles의 로고스속의 結合에 따라 Kant는 ist를 주어와 술어와의 논리적 관계(respectus logicus)로 보았다. 그런데 Kant는 이런 논리적 관계를 더 캐물어가 그것의 근거를 で나는 생각한다と(Ich denke) 즉 超越的 統覺(transzendentale Apperzeption)으로 보았다. ist로서의 存在는 主觀에 의한 어떤 것의 定立, 더정확히 말하면 정립하는 主觀속에서 어떤 것의 정립성을 의미한다. 主觀의 定立作用은 綜合, 統一作用에 의해 규정을 받는다. 이런 作用을 하는 것이 초월적 통각이다.

Aristoteles가 파악한 結合으로서의 繫辭개념은 Kant 뿐만 아니라 서구의 論理學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2) Hobbes

Hobbes의 繫辭와 명제에 대한 이론은 Aristoteles와 스콜라 철학의 전통의 영향을 받고 있다. 또한 그의 論理學에 대한 견해는 唯名論으로서의 명제로 부터, 더 엄밀히 말하면 名詞로 부터 출발하는 理論으로 論理學的 問題들에 접근한다. 그러므로 唯名論에서는 命題와 관련되는 모든 문제들, 예컨대 眞理와 繫辭의 문제들은 단어연관에 의존하고 있다. Hobbes는 繫辭에 대한 탐구를 명제와 관련하여 그의 [論理學]에서 다루고 있다. ist는 でS는 P이다と(S ist P)라는 명제의 단순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ist 에 대한 설명은 명제에 의존하게 된다.


1) 命題(Propositio)

Hobbes는 Aristoteles의 로고스 分類에 의거하여 말을 요구들, 약속들, 願望들 命令들, 한탄들로 나눈다. 이런 말의 형식들은 감정상태의 표지라고 규정했지만 그는 그것의 구조에 있어 더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또한 말의 한 형식인 명제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定義하였다.

ぢ명제는 結合된 두 명사로 이루어진 말이다. 그것에 의해 話者는 뒤의 명사[술어]는 앞의 명사[주어]가 지시하는 것과 같은 것에 대한 명사이며, 또는 같은 내용이지만 앞의 명사는 뒤의 명사에 포함되어 있음을 자기가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말은 Est라는 동사에 의해 두명사가 結合되고 있는 명제이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사람은 자기가 뒤의 명사 동물이 인간이라는 명사가 지시하는 것과 같은 것의 이름으로서 주장하고 있거나, 또는 앞의 명사 인간이 뒤의 명사 동물이 포함되고 있음을 나타낸다.っ

Hobbes는 여기서 주어와 술어를 두개의 명사(nomen)이며 명제(propositio)는 이러한 두 명사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즉 でS는 P이다と(S est P)라는 명제에서 주어 S는 앞명사(nomen prius)이고 술어 P는 뒷명사(nomen posterius)이며, est는 앞명사와 뒷명사를 結合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앞명사와 뒷명사는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고 있다.

Hobbes는 로고스의 근원적 의미를 단어의 연계로서 파악하였다. 그러나 繫辭 est만이 結合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다. Hobbes에 의하면, 동사의 어미변화 형태도 結合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繫辭의 진정한 기능은 무엇인가?


2) 繫辭(Copulatio)

ぢ그리고 結合되는 명사들[주어, 술어]은 동일한 하나의 사물(사태, res)에 대한 생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繫辭는 그런 명사들이 동일한 사물(사태)에 부여될 수 있는 근거(causa)에 대한 생각을 유발시킨다.っ 그러므로 繫辭는 Hobbes에게 있어 단순히 結合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結合의 근거를 알려준다.

Hobbes가 극단적인 唯名論의 입장에 서서 繫辭에 대한 이런 견해를 어떻게 해명하고 있는지 구체적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자. で물체는 운동을 한다と라는 명제에서 우리는 물체와 운동적이라는 두 명사로 지시된 동일한 사물(사태)를 생각한다. 우리는 두 명사를 따로 分離하여 동일한 사태(사물)를 생각할 수 있다. ぢ그러나, 정신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저 물체임 또는 저 운동적임이 무엇인지를 묻는다.っ

繫辭의 기능은 結合된 명사들에서 의도되고 있는 存在者가 무엇임이고, 명명된 사태에서 그것이 다른 사태들에 대해서 그렇게 명명되고 다르게 명명되지 않는 그런 차이를 알려주는 것이다. 繫辭는 두 명사들이 동일한 사태를 지시하게 하는 근거(causa), 즉 그 사태가 무엇임(Wassein), 즉 본질(essentia)을 알려 준다. Heidegger는 Hobbes의 繫辭의 본질적 기능을 다음과 같이 定義하고 있다. ぢ>ist<를 문장에서 언표함, 즉 繫辭를 생각함은 주어와 술어의 동일한 것에 대한 가능적이고 필연적인 동일한 관계성의 근거(Grund der möglichen und notwendigen identischen Bezogenheit von Subjekt und Prädikat auf dasselbe)를 생각함을 의미한다. >ist<속에서 생각 되는 것, 즉 근거는 본질(Wassein, realitas)이다. 따라서 >ist<는 명제 속에서 언명되는 사태(res)의 본질이거나 무엇임(quidditas)이다.っ


3) 구체명사와 추상명사

Hobbes는 繫辭의 기능과 관계하여 구체명사와 추상명사를 나누고 있다. ぢ그러나 구체명사는 실존한다(existere)고 생각되는 어떤 사태의 명사이다. 따라서 구체명사는 어떤 때는 기저에 놓여있는 것(suppositum)으로서, 어떤 때는 基體(subjectum)로서, 희랍사람들에 의해서는 ՝ποχειμενον로서 불리워진다.っ Hobbes는 구체명사의 예로서 物體, 운동적, 유사한 등을 들고 있다.

ぢ추상명사는 기저에 놓여 있는 사태(사물)에서 실존하고 있는 구체명사의 근거를 지시하는 것이다.っ 物體性,(esse corpus) 운동성,(esse mobile) 유사성(esse simile)등은 추상명사이다. ぢ추상명사들은 구체명사의 근거를 지시하나, 사태(사물) 그 자체를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っ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것을 물체라고 부를 수 있음은 그것의 원인인 延長性이나 物體性 때문이다.

명제에 있어서, 구체명사는 주어로서 앞에 놓이고 추상명사는 뒤에 놓인다. 추상명사는 본질을 표현하기 때문에 繫辭 est가 없으면 存在할 수 없다. 그러므로 ぢ추상명사는 繫辭에서 비롯된다.っ

Hobbes에게 있어 繫辭는 주어와 술어의 동일한 사태(사물)에 동일하게 관계맺음의 근거를 나타낸다. 이러한 근거를 나타냄으로써, 사물(사태)의 본질이 의도된다. 따라서 Hobbes에게 繫辭 est는 실존(Existenz)이나 현실성(Wirklichkeit)이 아니라 본질(Wesen)을 나타낸다.


4) 진리(Veritas)

명제에 속하고 있는 진리와 거짓을 Hobbes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ぢ두 명사[주어, 술어]가 동일한 사물(사태)에 대해 結合이 되는 그런 모든 명제는 참이나, 結合된 명사들이 서로 다른 사물(사태)를 지시할 때, 그 명제는 거짓이다.っ

Hobbes 에게 있어 명제의 진리는 명제의 요소들인 두 명사, 주어와 술어가 동일한 사물(사태)에 관계를 맺을 때 성립한다. Heidegger는 Hobbes가 繫辭와 진리를 동일한 수준에서 보았다고 한다. ぢHobbes는 繫辭를 진리와 같은 의미에서 定義하였다. >ist<는 繫辭로서 동시에 문장에서 진리의 표현이다.っ 그리고 Heidegger는 Hobbes의 이러한 진리관이 Aristoteles와 외견상 유사하다고 한다.

ぢ진리는 정말로 말(문장) 속에 있지, 사물(사태) 속에 있지 않다.っ(Veritas enim in dicto, non in re consistit.) 이 말은 Aristoteles가 진리에 대해 말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그에 의하면, 참(발견, aletheuein)은 사물 속에가 아니라 思惟 속에 있다. 이에 대해 Hobbes는 극단적인 唯名論의 견지에서 진리는 명제에 있다고 보았다.

Hobbes에게 있어 본래적 진리는 명제적 진리이다. 그러므로 여타의 진리는 명제적 진리에로 환원된다. ぢ참은 때때로 현상과 가상에 대해 대립하더라도, 그것은 명제의 진리에로 환원된다.っ

참기름, 진짜돈, 참된 인간의 경우에 で참된と은 で現實的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現實的이라는 의미에서의 で참된と은 일차적인 의미의 진리가 아니므로, 명제의 진리에로 환원된다. 한 사물이 참인 것은, 그것에 대한 명제가 참일 때만 이다. 그러므로 사태진리는 명제진리에 의존해서만 진리일 수 있다. Hobbes에게 진리는 사물의 상태가 아니라 명제의 상태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문제가 제기된다. 사태진리가 명제진리에 의해 진리가 확보되고, 그것이 명제의 진리에 환원된다면, 存在者에 대한 명제의 진리는 무엇에 근거하는가? 그것은 명제의 대상인 存在者가 가상이 아니라, 現實的인 것, 즉 참된 것이라는 데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순환관계가 성립함을 볼 수 있다. 사태의 진리는 명제의 진리에 의존하고 명제의 진리는 사태의 진리에 의존하게 된다. Heidegger는 이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ぢ여기서 存在者의 현실성과 이 現實的인 것에 대한 명제의 진리사이에 수수께끼같은 연관이 드러난다.っ

Hobbes는 唯名論적 입장에서 명제를 단어들의 연계로서 파악하였다. 그는 여기에만 머물지 않고 단어들의 연계를 사태(res)에 관계시키려 했다. Hobbes에게 繫辭 est는 주어로서의 앞명사와 술어로서의 뒷명사를 結合시켜주는 단순한 소리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est는 두명사들이 동일한 사태에 관계를 맺개하는 근거를 나타내준다. 그러므로 est는 명제의 대상인 사태의 본질을 의미한다. Hobbes는 진리를 명제진리에서 규정하였다. 즉 그는 사태진리를 일차적인 명제진리로 환원시켰다. 그러나, 명제진리는 사태진리에 의해 규정받지 않을 수 없다.

명제를 단어들의 연계로 파악한 Hobbes의 唯名論은 결국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는 출발점으로 삼았던 唯名論의 범위내에 머물지 못하고 그것을 넘어서고 말았다. 이것이 모든 唯名論의 운명이라 할 수 있다.


(3) J.S.Mill

1) 명제와 繫辭

J.S.Mill은 명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定義하고 있다.ぢ명제는 술어가 주어에 긍정되거나, 부정되는 그런 말(discourse)의 한 부분이다. 술어와 주어는 한 명제를 구성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된다. 그러나 두 명사가 結合되고 있음을 단순히 보는 것으로 부터, 그것들이 술어와 주어라는 사실은, 즉 그것들중의 하나가 다른 것에 대해 긍정되거나 부정된다는 것이 의도되고 있음을 결론지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런 것이 의도라는 것을 나타내는 어떤 양식이나 형식이 필요하다.っ

J.S.Mill은 명제를 주어, 술어라는 두 명사들의 結合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그 結合이 서술이기 위해서는 어떤 기호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Mill의 출발점이 唯名論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술의 기호를 전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繫辭 is 이다.

그는 繫辭에 대한 개념이 혼란하기 때문에 論理學의 영역에 神秘主義가 만연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그는 繫辭의 본성과 기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J.S.Mill에 의하면, 繫辭 is가 서술의 단순한 기호를 넘어서 실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이 상정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で소크라테스는 定義롭다と라는 명제에서는 Socrates라는 주어에 定義로운이라는 성질이 긍정되고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가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is는 긍정에서 繫辭(copula)기능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실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で켄타우로스는 시인의 허구이다と라는 명제에서는 켄타우로스가 실존하고 있음이 포함되고 있지 않다. 켄타우로스는 現實的인 실존(real existence)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Mill은 is가 가지고 있는 애매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繫辭 is가 서술의 기호이고 동시에 실존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애매성을 갖게 된다. 이러한 繫辭 is의 두 의미를 結合할 때 철학은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다. 存在의 본성(to on, ousia, ens, entitas, essentia 등)에 대해 쓴 많은 책들은 이 점을 간과하여 사변으로 흘러버렸다고 그는 생각한다.

J.S.Mill의 문제의식의 발단에서 보면, 그는 단어의 연계로서 명제를 그것의 대상인 사물로 부터 分離하려고 하거나, 영국 경험론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명체를 순전히 주관 속에서 結合되는 표상들의 結合으로서 간주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판단이나 명제를 표상들의 結合이라든지 아니면 단순한 단어들의 結合으로서 파악하는데 반대한다.

ぢ물론 판단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든, 예를 들면, 황금은 노랗다라고 판단할 때 어떤 과정이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난다… 우리는 황금이라는 관념과 노란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두 관념이 우리의 마음에서 結合되어야 한다.っ Mill은 마음 속에서 관념들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思惟에 대한 경험주의적 해석을 하고 있다. ぢ그러나 우선 이것은 일어난 것의 오직 한 부분이라는 것이 명백하다.っ ぢ그러나 나의 믿음은 관념에 관계하지 않고 사물들에 관계한다. 내가 믿는 것은 외부의 사물인 황금과 인간의 기관들에 그 외부의 사물이 가한 인상에 관계하는 사실이다.っ 여기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is가 단순히 명사들의 結合의 기호거나 서술의 기호만이 아니라, 사태의 사실성 즉 사태의 手前性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is는 한편으로는 서술의 기호이고 또 한편으로는 실존을 의미한다.

Mill은 is의 이런 애매성을 제거하기 위해 명제를 본질적 명제(essential proposition)와 우연적 명제(accidental proposition)로 나눈다.


2) 본질적 명제와 우연적 명제

본질적 명제는 말의 의미에만 관계하므로 말에 의한 명제(verbal proposition)라 할 수 있고, 우연적 명제는 사태에 관계하므로 現實的 명제(real proposition)라 할 수 있다. Mill의 이러한 명제분류는 Kant의 영향을 받고 있다. Kant에 의하면, 분석판단은 우리에게 어떤 경험내용도 보태주는 것 없이, 술어개념이 주어개념을 설명, 해명하는 해명적 판단이다. 이에 대해 종합판단은 주어개념에 술어개념을 부가하는 경험적 판단으로서, 우리의 인식을 넓혀지는 확장적 판단이다. 그러므로 Mill의 본질적 명제는 분석판단에 해당하고 우연적 명제는 종합판단에 해당한다.

Mill 은 본질적 명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ぢ본질적인 명제는 순전히 말에 의한 명제이다. 본질명제는 특정한 명사하에서 어떤 사물에 관해, 그 명사에 의해 그것을 부른다는 사실에서 그것에 긍정되는 것만을 긍정하며, 따라서 어떤 정보도 주지 않거나, 또는 정보를 주더라도 사물에 관해서가 아니라 명사에 관계해서 주는 명제이다.っ 본질적 명제는 명사의 의미에 관계한다. 그러나 명사들의 의미는 자의적이기 때문에 말에 의한 명제는 엄밀히 말하면 참도 거짓도 아니다. Heidegger에 의하면, 여기서 명사들의 의미는 사물에서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언어관습과의 일치가 문제가 된다.

본질적 명제 내지 말에 의한 명제는 명사의 의미를 해명하므로 定義라 할 수 있다. ぢ定義의 가장 단순하고 가장 올바른 개념은 한 단어의 의미를 서술하는 명제이다. 그 의미란 日常的 通念(common acceptation)에서 그 단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 또는 話者나 著者가 의견교환의 특수한 목적을 위해 그것에 부가한 의미이다.っ

Mill에 있어 定義는 실질적 定義 (Realdefinition)가 아니라, 유명적 定義(Nominaldefinition) 또는 단어해명이다.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단어들은 定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定義는 그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유명사는 定義할 수가 없다.

ぢ모든 定義들은 명사들에 대한 것이며 오직 그것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약간의 定義들에 있어서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만이 의도되었다는 것이 명백하고 반면에 다른 定義들에 있어서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 외에 단어에 상응하는 사물이 실존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 의도된다. 이것이 어떤 주어진 경우에 함축되고 있는지 아닌지는 그 표현의 단순한 형식으로 부터는 알 수 없다.っ 여기서 唯名論의 단초가 깨어지고 있다. Mill은 단어의 연계를 넘어서 그 속에서 의미된 것의 연관에로 귀착하고 있다.

ぢで켄타우로스는 반인반마의 동물이다と와 で삼각형은 세변을 가진 직선 도형이다と는 형식상 아주 유사한 표현들이다. 前者에서는 名辭(term)에 상응하는 것이 실제로 실존한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지 않은 반면에, 후자에서는 그것이 실존한다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っ

Mill은 두 명제의 차이는 is대신 means(의미하다)를 대치시키면 명확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켄타우로스의 경우 is대신 means를 대치해도 意味는 不變하지만 삼각형의 경우는 의미가 변한다. 왜냐하면 삼각형의 경우 is에는 실존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means로 바뀌게 되면, 여기서 기하학의 진리를 도출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삼각형의 실존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公理上 어떻게 정초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で삼각형은 세변을 가진 직선도형이다と라는 삼각형의 定義는 완전히 구별될 수 있는 두 명제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で세직선에 의해 둘러 싸인 도형이 實在한다.と 이 명제는 실존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定義가 아니다. 실존과 관계된 명제이므로 참과 거짓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명제는 공준으로서, 일련의 推理의 基礎가 된다.

둘째, で그리고 이 도형은 삼각형으로 명명된다.と 이 명제는 唯名論적 定義 또는 한 名辭의 사용과 적용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말의 해명이기 때문에, 엄밀히 얘기하면 참도 거짓도 아니다. 그리고 이 명제의 유일한 성격은 언어의 日常的 用法에 순응이나 비순응이다.

삼각형에 관한 명제에서 우리는 또한 現實的 명제와 말에 의한 명제의 특성을 보았다. 現實的 명제는 실질적 定義(real definition)와 관계를 맺는데, Mill은 실질적 定義를 定義라고 부를 수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定義는 말의 의미를 설명, 해명하는 것이므로, 그에게는 唯名的 定義(nominal definition)만이 定義로 인정된다. 그는 실질적 定義라는 용어 대신에 公準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공준은 事態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주장하며, 定義에서 말해지는 속성들의 結合을 소유하는 사물들의 現實的 가능적 실존을 긍정한다. 그리고 공준이 참이라면, 과학적 진리의 전구조를 세우기에 충분한 기초일 수 있다.

is가 means에 의해 대치될 수 있는 본질적 명제는 主語를 說明하는 명제이기 때문에 分析命題이며, 또한 사태에 관계를 맺지 않고 의미에만 관계를 맺기 때문에 말에 의한 명제이다. 여기서는 사태에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참과 거짓을 이야기할 수 없다. 말에의한 명제는 말을 설명하는 명제이므로 유명적 定義라 할 수 있다. ぢ定義는 언어사용에 대해서만 정보를 주는 단순히 동일적 명제이며, 이 명제에서는 사태들에 영향을 주는 어떤 결론도 이끌어 낼 수 없다.っ

본질적 명제는 우연적 명제로 부터 완전히 分離되어 存在하는가? 본질적 명제가 언어사용에 대해서만 정보를 준다고 했는데, 결국 언어사용이란 인간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어는 선천적으로 고정된 의미내용을 갖는 것이 아니라, 歷史性을 띠고 있다. 언어의 의미란 人間이 事態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변한다. 언어의 의미는 사태와 연관을 맺고 있다. 결국, Mill의 말에 의한 명제는 現實的 명제에 의존하게 된다. Heidegger는 언어의 의미와 사태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ぢ명사들 내지 그것들의 의미들은 변화하는 사태인식과 함께 변하고 명사들과 말들의 의미들은 특정한 의미계기의 우세에 따라서, 즉 명사에 의해 어떤방식으로든 이름 붙여지는 사태에 대한 특정한 視向의 우세에 따라, 그때 그때 변한다. 모든 의미들과 또한 외견상 단순한 말의 의미는 사태유래적이다. 모든 술어는 어떤 사태지식을 전제로 한다.っ

그러므로 現實的 명제는 말에 의한 명제를 끊임없이 풍부하게 변양시킨다. ぢ한 명사를 어떻게 定義하는 가는 상당히 어럽고 복잡한 탐구일 뿐만 아니라, 그 명사에 의해 지시되는 사물들의 본성에 천착하는 심사숙고를 포함한다.っ

결국 Mill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唯名論에 반하는 결론에 이르고 말았다. ぢ실재론(Realism)을 전복시킨 철학자들도 결코 실재론의 결론들을 제거할 수 없다.っ


이제까지 繫辭에 대해 논의한 것을 정리해보자

Aristoteles에게 繫辭는 독립적 의미를 갖지 못하고 어떤 結合(synthesis tina)을 함축하며(prossemainein), 그 結合은 동시에 分離(diairesis)이다. 그리고 그는 繫辭와 진리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Hobbes에서는 繫辭는 주어로서의 앞명사와 술어로서의 뒷명사를 結合가능하게 하는 근거로서 본질(Wassein, essentia, guidditas, realitas)이다.

이에 대해 J.S.Mill은 말에 의한 명제에서 繫辭 is는 で의미한다と(means)를 뜻한다. 동시에 그에게는 실존(existentia)의 의미에서 繫辭가 강조된다.

이런 繫辭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고찰한 繫辭에 대한 이론들은, 그것들이 일면적이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하다. 繫辭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파악은 繫辭이론들의 일면적 파악을 그러모아 조립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繫辭의 의미가 통일적이지 못하고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의 結合이라 볼 수 없다. 繫辭를 이렇게 여러가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의 밑바닥에는 존재이해가 놓여 있다. 의미상 무차별적인 繫辭에 대한 이런 파악들은 존재이해시 다양한 표현에 불과하다. 존재이해를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存在者는 현존재 (Dasein)이다. 이제 우리는 현존재의 실존적 분석론이 基礎存在論 (Fundamentalontologie)을 토대로 하여 繫辭문제를 조명해보고 기초지울 것이다. 따라서 繫辭로서의 存在와 맞물려 있는 명제의 로고스 그리고 진리도 基礎存在論의 빛아래 들어올 것이다. 論理學에서 망각되고 있는 存在, 진리, 로고스를 그 원점에서 파악하여 드러낼 것이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基礎存在論에 의한 論理學의 定礎가 될 것이다.



2. 基礎存在論에 의한 論理學의 定礎

繫辭로서 存在에 대한 물음은 이제까지 살펴본 이론들에 따르면 명제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명제인 로고스는 단어의 연계로서 파악되고 있다. 그렇다면 論理學에서 망각되고 있는 로고스의 근원적인 의미를 살펴보자.


(1) 명제와 で으로서 구조と(Als-struktur)

통속적 경험에서 로고스는 단지 외면적으로 파악되어 그것은 단어들의 연계를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단어들을 結合시키기 위해서는 자연히 繫辭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므로 繫辭의 난점과 혼란은 바로 로고스를 이처럼 외면적으로 파악한데 있다. 로고스를 단지 순수한 단어들의 연계로서만 한정시킬 때, 문제는 올바르게 진행될 수 없다. 그래서 Heidegger는 唯名論은 이론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고 한다.

단어들의 연계로서의 로고스는 또 다른 문제점을 야기시킨다. 명제가 結合을 필요로 하는 단어들의 연계라면, 그것들에 상응하는 표상들도 結合을 필요로 하게 된다. 명제는 외부에 있는 存在者에 대해 언명하므로, 외부에 있는 사물들과 대응을 하게 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ぢ어떻게 영혼 속의 표상연관이 외부의 사물들과 合致할 수 있을까?っ 이것을 철학에서 인식론상 객관성의 문제, 또는 진리의 문제라고 불리워진다.

Heidegger에 따르면, 희랍인들도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로고스를 단어의 연계로 파악했고 이런 단초는 論理學적 문제 설정의 전통에로 이행되었고 그 전통 속에서 오늘날 까지 克服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繫辭의 문제, 객관성의 문제, 진리의 문제는 로고스를 단어들의 연계로서 파악하기 때문에 생겼다.

명제는 항상 어떤 것에 대한 명제(Aussage über etwas)이기 때문에 存在者에 대한 관계를 맺는다. Platon도 로고스는 어떤것의 로고스(logos tinos)라 했다. 存在者가 명제의 對象(Worüber)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발견되어 있어야 한다. 즉 그것의 存在가 이해되어야 한다. 현존재만이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명제는 현존재의 존재얼개(Seinsverfassung)인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에 기초를 두고 있다. ぢ오직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실존하기 때문에, 그에게 그의 실존과 더불어 存在者가 顯示(enthüllt)되어 있어서, 이 현시된 것은 명제의 가능적 대상이 될 수 있다.っ 그러므로 명제는 基礎存在論에 의해서 정초될 수 있다.

그러면 명제의 근원적 의미를 밝혀보자.

명제는 밝히는 로고스(logos apophantikos)의 번역어이므로, 그것은 1차적으로 밝힘(apophansis)의 성격을 갖는다. 그것은 어떤 것을 그것 자체로 부터, 즉 그것이 그것 자체로 存在하는 그대로 보이게 하는 것(etwas von ihm selber her, apo, so wie es an ihm sich ist, sehen lassen, phainesthai)이다. 명제가 언명하고 있는 대상은 표상이 아니라, 存在者 자체이다. 밝힘이 명제의 1차적, 근원적 특성이기 때문에 명제의 나머지 특성들은 밝힘에 의해 규정받는다.

명제는 또한 서술(Prädikation)을 의미한다. 서술은 주어에 술어를 부가함이다. 그러나 이것을 완전히 외면적으로 받아들이면, Hobbes의 경우처럼 뒷말의 앞말에 대한 관계이거나, 또 그것을 말의 범위를 벗어나 받아들이게 된면, 한 표상의 다른 표상에 대한 관계이다. 서술은 명제의 근원적 특성인 밝힘으로 부터 규정을 받아야 한다.

で그 칠판은 검다と라는 명제를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명제의 일차적 특성인 밝힘에서는 칠판이라는 存在者는 그것의 용도(Wozu), 즉 글을 쓰기위한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것자체로 부터 드러난다. 이 경우 칠판은 검은 것으로서 드러나며, 아직 주어와 술어로 分離되기 이전의 미분화의 상태이다.

명제의 또한 특성인 서술에 있어서, 검은 것으로서의 칠판 즉 검은 칠판이 分離가 되어 규정되는 で칠판と에, 규정하는 で검은と이 부가되어 で그 칠판은 검다と라는 규정이 된다. 이 分離 속에는 동시에 結合이 작용하여 주어와 술어를 結合시키고 있다. ぢ分離 속에는 동시에 先與된 存在者가 그것의 스스로 드러난 규정들의 공속성의 통일성 속에서 명백하게 되었고, 밝혀졌다.っ 여기서 우리는 로고스를 근본적으로 규정지웠던 결합(synthesis)과 분리(diairesis)에 대한 Aristoteles의 생각을 볼 수 있다. ぢ명제, 즉 로고스의 이런 結合적이고 分離적인 작용은 그 자체로 밝히는 것이다.っ 명제의 일차적 특성인 밝힘에 서 주어와 술어의 미분화적 상태를, 서술로서의 명제는 주어와 술어를 통해서 밝히는 것이므로, 그것은 규정이라 할 수 있다.

명제는 또한 전달(Mitteilung)을 의미한다. で그 칠판은 검다と라는 명제, 즉 규정의 의미에서의 명제가 언표되었을 때, 그것은 전달된다. 그러나 전달은 서로 다른 주관들 사이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것들을 교환하듯이 한 주관으로 부터 다른 주관에로의 말이나 표상의 전달이 아니다.

여기서 전달은 또한 명제의 근원적인 성격인 밝힘에 의해 규정받아야 한다. ぢ그것은 규정의 방식으로 밝혀지는 것을 함께 보게함(Mitsehenlassen des in der Weise des Bestimmens Aufgezeigten)이다. 함께 보게함은 규정성 속에서 밝혀진 存在者를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っ 현재재는 공존재(Mitsein)이기 때문에, 전달(Mitteilung,함께 나눔)을 통해 다른 현존재와 함께, 규정에 의해 드러난 存在者에 대하여 동일한 근본적 관계에 서게 된다.

명제의 근본적 계기는 밝힘이며, 이것에 의해 나머지 두 계기가 규정되었다. 그래서 명제는 전달적, 규정적 밝힘(die mitteilende bestimmende Aufweisung)으로서 定義될 수 있다.

で그 백묵은 희다と라는 명제에서, 백묵이라는 存在者는 하얀 것으로서 드러난다. 이 명제는 백묵이라는 存在者는 하얀 것으로서 드러난다. 이 명제는 백묵이라는 存在者를 다른 것으로 부터가 아니라 백묵 자체로 부터 드러내었다. 즉 이 명제는 백묵을 세계전체와의 관련성없이 즉 글을 쓰는 것이라는 그것의 용도(Wozu)와 연관없이 백묵이라는 存在者에 시선을 고정하겨 하얀 것으로서 드러냈다.

그러나 백묵은 세계전체 즉 의미의 지평과 관련하여 쓰기 위한 도구로서 드러날 때, 일차적이고 근원적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백묵을 쓰기위한 것으로서 이해한다. 우리의 이해는 이처럼 으로서의 구조(Als-struktur)를 갖는다. 이해의 완성(Ausbildung)은 해석이기 때문에, 이러한 근원적 으로서를 で실존론적 해석학적 으로서と(das existenzial-hermeneutische Als)라고 부른다. 명제도 으로서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で밝히는 으로서と(das apophantische Als)이다.

우리는 存在者를 일차적으로는 배려적으로 만나는 도구로서 파악한다. 우리는 백묵을 하얀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쓰기위한 도구로 파악하며 그것과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存在者를 관찰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배시적(umsichtig)으로 파악하며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배시적 파악은 비주제적, 비대상적, 선술어적 성격을 갖는다. 存在者를 의미의 지평인 세계전체와 관련하여 이해할 때, 그것은 で해석학적 으로서と의 구조를 갖는다.

명제에서는 세계전체내지 用途를 무시하고 存在者 자체에만 촛점을 ꁹ출 때, 存在者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手前者(Vorhandenes)로서 파악된다. 백묵의 경우에, 백묵 그 자체에 시선을 고정하여, 백묵은 희다라고 말했을 때, 백묵이라는 手前者(Vorhandenes)는 희다라는 手前性(Vorhandenes)으로서 규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명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도구로서의 存在者가 토대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드런난 存在者를 바탕으로 해서, 명제에 의한 주제화가 수행이 될 수 있다. ぢ배시적 해석의 근원적 >으로서<가 手前性의 규정(Vorhandenheitsbestimmung)의 으로서로 수평화되는 것이 명제의 특징이다.っ 그러므로 で밝히는 으로서と는 で해석학적 으로서と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그것은 해석학적 으로서의 파생적, 수평적 양태이다.

Aristoteles가 로고스의 구조로 본 結合과 分離는 Heidegger에 따르면, 으로서(Als)의 구조와 연결된다. Heidegger는 結合과 分離의 통일을 で밝히는 으로서と(apophantisches Als)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で으로서と가 은폐되고, 그것이 해석학적 で으로서と에 근거하고 있음이 간과될 때, 로고스의 Aristoteles의 발단은 붕괴하고 외면적인 판단론이 되어버린다. 그러한 판단론에 따르면 판단은 표상들이나 개념들의 結合내지 分離(Trennen)이다. 여기서는 Aristoteles의 結合과 分離의 통일과 공속성이 해체되고 또한 밝히는 기능도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結合과 分離는 더욱 형식화, 외면화가 되어 그것들은 관계(Beziehen)가 된다. 그래서 數理論理學에서 판단은 등식의 체계로 해소되며 で계산と의 대상(Gegenstand eines >>Rechnens<<)으로 전락해버린다.


(2) 繫辭에 대한 존재론적 전제로서의 존재이해(Seinsverständnis)

ist는 명제 속에서 외면적으로 파악될 때, 그것은 다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보았다. 그것이 다의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의 의미는 で手前性と(Vorhandenheit)이기 때문에 무차별성을 갖게된다. 그러면 ist의 의미의 무차별성과 그것의 다의성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규정적, 전달적 밝힘으로서의 명제는 어떤 것에 대한 명제(Aussage über etwas)이기 때문에, 명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 存在者가 미리 드러나야 한다. 언명하는 사람은 언명하기에 앞서 이미 存在者를 그것의 存在에 있어 이해해야 한다. 즉 存在者의 存在方式을 이해해야 한다. 존재이해를 가지고 있는 存在者는 현존재뿐이다. 그러므로 存在者에 대한 존재이해는 현존재의 존재얼개인 세계내존재에 속한다.

명제는 存在者에 대한 밝힘이지만, 그것은 存在者에 대한 일차적인 顯示(Enthüllen)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명제는 현존재의, 存在者에 대한 존재이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제에 앞서, 存在者의 이해에서 잠재적으로 이미 存在者의 본질(esse essentiae)과 실존(esse existentiae)이 이해되고 있다. ist가 그것의 의미상 무차별적인 것은 存在者에 대한 일차적 이해에서 차별적 존재양상(der differente Seinsmodus)이 고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ぢ繫辭의 무차별성은 흠이 아니라, 모든 언표(Aussagen)의 이차적 성격을 특징짓는다.っ 그리고 단어들의 연계로서의 명제에 입각하여 ist의 문제에 접근한다면, ist의 다양성이나 무차별성은 파악될 수 없고 오직 결합어로서의 ist를 성격지을 뿐이다. 결국 繫辭의 다양성과 무차별성은 현존재의 존재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다.


(3) 眞理

Aristoteles는 이다(ist)와 진리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진리는 전통적 진리론에 따르면,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adaequatio intellectus et rei) 이다. 일치(adaequatio)대신 對應(correspondentia)이나 合致(convententia)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여기서 で一致と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어떻게 主觀的인 것이 客觀的인 것과 일치할 수가 있겠는가. 두 영역은 서로 다른 존재영역이므로, 일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불투명하다. Heidegger는 이런 진리론에 서지 않고, 진리의 희랍적인 표현인 aletheia를 해석함으로써 오히려 전통진리론을 기초지워주려 한다.

Heidegger는 aletheia의 근원적 의미를 드러내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aletheuein은 a 缺性(privativum)과 で숨기다と를 의미하는 lanthanein의 합성어로 어떤 것을 그것의 숨김으로부터 끌어내는 것, 드러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aletheuein을 Heidegger는 顯示(Enthüllen)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그는 手前者(Vorhandenes)의 현시를 발견(Entdecken)이라는 표현을 쓰고, 이에 대해 현존재(Dasein)의 현시를 開示(Erschließen, Aufschließen)라는 표현을 써서 각각 구별한다. 그런데 aletheia가 라틴어 veritas를 번역됨으로써 그것의 근원적인 의미가 가리워졌다. 전통철학은 이러한 근원적인 진리를 망각함으로써, 거기서는 진리망각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명제의 일차적 성격은 밝힘이며, 그것은 存在者를 그것자체에서 보여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밝힘은 현시라 할 수 있다. Platon도 명제, 즉 로고스의 기능을 deloun(드러나게 함)으로서 간주하였다. 그러나 명제에서의 현시(Enthüllen)는 手前者 (Vorhandenes) 에 대한 현시이므로, 위에서 규정한 바에 따라 발견 (Entdecken) 이라 할 수 있다. ぢ밝힘 (apophansis) 의 로고스의 진리는 apophaninesthai(보여지게 함)의 방식으로 aletheuein이다.っ Heidegger는 여기서 명제의 진리를 일치(adaequatio)가 아니라 발견으로서 해석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ぢ진리는 한 存在者(주관)이 다른 存在者(객관)에 동화(Angleichung)이라는 의미에서, 인식과 대상사이의 合致(Übereinstimmung)라는 구조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っ

Heidegger에게 있어 명제의 진리는 명제가 存在者가 그것자체에 있어 발견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리의 또 한 계기는 발견성(Entdecktheit) 이다. 存在者가 발견되어졌을 때, 그것은 또한 참이다. 진리는 발견(Entdecken)과 발견성(Entdecktheit)의 두 계기를 갖는다. 발견으로서 진리는 현존재의 存在方式이다. 그러므로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에서만 진리는 존재한다. 진리는 곧 현존재와 관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ぢ진리는 가장 근원적 의미에서 현존재의 근본 얼개에 속한다.っ

현존재의 기초얼개는 세계내존재이다. 현존재는 실존하면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고 셰게의 개시성과 더불어 자기자신도 개시된다. ぢ세계내부적 存在者의 발견성은 세계의 개시성에 근거하고 있다.っ 이 문장을 바꿔 말하면, 존재적 진리는 존재론적 진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존재론적 진리인 현존재의 개시성과 세계의 개시성에 의해, 論理學에서 문제가 되는 명제진리를 근거지우고자 하였다. 명제와 그것의 구조인 で밝히는 으로서と는 で해석학적 으로서と, 즉 현존재의 개시성인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명제진리의 뿌리는 이해하는 개시성에 있다.

그는 또한 명제가 진리의 장소라는 주장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부당하게 Aristoteles에 연유한다고들 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며, 또한 이 주장은 진리구조에 대한 오해이다.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서의 명제는 현존재의 개시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ぢ가장 근원적인 で진리と는 명제의 で장소と이며 명제가 참이거나 거짓(발견 또는 감춤)일 수 있는 것에 대한 가능성의 존재론적 조건이다.っ

Aristoteles는 로고스 즉 명제의 진리는 사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思惟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 Aristoteles의 테제를 외면적으로 받아 들이면, 진리는 사물들 속에 있지 않고, 즉 객관 속에 있지 않고 주관 속에 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진리는 의식내재적인 것이 된다. ぢ어떻게 의식내재적인 것이 대상에서의 외부의 초월적인 것에 관계를 맺고 있는가?っ 이 문제는 답이 주어질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Aristoteles의 테제를 基礎存在論에 입각하여 해석해보자, Heidegger는 진리의 두계기인 현시(Enthüllen)와 현시성(Enthülltheit)에 따라서 그것을 해석하고 있다.

먼저 이 테제의 부정적 부분부터 검토해보자, 그는 여기서 진리를 현시성으로 해석하여 문제를 접근하고 있다. 진리는 본질상 手前者(Vorhandenes)가 아니라, 실존한다. 그러므로 진리는 현존재의 存在方式이다. 진리에는 그것이 관계하는 것에 대한 현시성이 속하기 때문에 진리는 手前者는 아니지만, 명제가 관계하는 것의 현시성으로서, 手前性의 가능적 규정이다. ぢ진리는 手前者가 예를 들어 현시하는 명제에서 현시되는한 手前者의 존재의 규정이다.っ

Heidegger는 테제의 긍정적 부분에서는 진리를 현시로 간주하여 해석하고 있다. 思惟(dianoia)를 주관으로서 해석하면 위와 같은 난점에 빠지게 된다. Heidegger는 그것을 어떤 것에 대해 현시하는 밝힘으로서 해석하였다.

그래서, Heidegger에 의하면 Aristoteles의 테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ぢ진리는 현시로서, 현존재 속에 그것의 지향적 행위의 규정으로서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현시되는 것으로서의 存在者의 존재에 있어서 存在者, 즉 手前者의 규정이다.っ 따라서 진리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 있다. ぢ진리라는 현상은 현존재의 근본 구조인 그것의 초월과 관계있다.っ


Ⅲ. 結論


우리는 論理學에서 기본요소라 할 수 있는 명제, 진리, 그리고 繫辭를 繫辭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다뤘다. 論理學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Aristoteles가 이것들에 대해 정립했던 개념들조차, 論理學의 역사에서 왜곡되고 오해되었다. 論理學의 주제인 로고스의 개념은 그 근원적인 뜻은 망각되고 더욱 외면화, 형식화가 되어, 급기야는 그것은 계산의 대상으로 전락되었다. 論理學의 역사란 로고스망각, 존재망각, 진리망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로고스를 명제로 파악했고 그것을 단어들의 연계로서 규정을 했기 때문에 그것들을 結合시켜 주는 繫辭인 이다(ist)가 필요했다. 그리고 진리는 명제의 진리로서만 인정이 되었고 명제는 진리의 장소로 간주되었다. 명제, 진리, 繫辭, 이 삼자간에 밀접히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희랍철학에서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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