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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4 (11:27) from 129.206.196.86' of 129.206.196.86' Article Number : 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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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와 현상의 관계 - 대승기신론과 물리학



관찰자와 현상의 관계 - 대승기신론과 물리학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소광섭



차 례


1. 서론


2. 물리학에서 관찰자

(2.1) 고전물리학

(2.2) 상대성 이론

(2.3) 양자역학

(2.4) 상대론적 양자물리(양자장론)


3. 기신론에서 관찰자와 현상

(3.1) 현상의 실재성에 관한 관점

(3.2) 기신론


4. 토의












1. 서론


관찰자와 현상의 관계는 물리학의 발달과 더불어 점점 더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어 왔다. 절대적 실재로서의 자연현상과 그것의 객관적 관찰과 법칙의 발견이 가능하다고 보는 소박하고 상식적인 자연관은 고전물리학에서는 큰 문제가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상대론의 출현은 절대적 실재로서의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인 시공간으로 대치시킴과 함께 관찰자와 관찰수단(빛)을 자연관 구성의 중심적 위치로 올려 놓았다. 이어 나온 양자역학은 오직 관찰될 수 있는 물리량(가관측량)만이 물리이론에 들어와야 하며 그것들만이 자연현상의 전부라고 보는 조작주의(operationalism)적 자연관을 낳았다. 불확적성 원리에 의하면 관찰자의 관측행위가 관측대상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므로, 자연을 관찰하는 인간이 자연현상에 참여하게 되며, 따라서 인간을 떠난 자연 그 자체란 말이, 적어도 인식론적 측면에서는,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양자역학의 해석에 따른 여러 가지 논쟁들은 아직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으며, 주관과 객관의 분리 불가능성이나, 인간의 의식에 영향받는 자연현상의 가능성까지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양자물리의 해석을 지나치게 확장한 것이란 비난을 받기도 한다. 사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코펜하겐 학파의 확률 해석을 받아들일 뿐이며, 원자 현상이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받는다거나, 또는 원자현상과 관찰자가 분리될 수 없다는 등의 주장은 지나치다고 본다.


물리학 이론구성에서 관찰자의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해져 왔으며, 특히 양자물리의 출현이후 인식론적 논의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상으로서 자연현상의 실재와 객관적 관찰자로서 인식주체의 존재, 그리고 주체와 객체의 분리된 상황은 비교적 확고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물리학적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불교의 중관ㅗ유식철학을 종합했다고 하는「대승 기신론」의 유심론적 자연관은 인식주체와 객체의 분리 및 인식대상의 존재를 일종의 환영으로 본다. 다음의 인용은「기신론」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진술이다.

"是故三界虛僞 唯心所作 離心 則無六塵境界 此義 云何

以一切法 皆從心起 妄念而生 一切分別 卽分別自心

心不見心 無相可得 當知世間一切境界 皆依衆生無明妄心

而得住持 是故一切法 如鏡中像 無體可得 唯心虛妄 以心生

則種種法生 心滅 則種種法滅故"

"그러므로 일체의 欲望과 事物과 觀念, 한 마디로 우리가 생각을 품을 수 있는 대상[三界]은 虛僞이며 오직 마음의 造作이다. 마음을 떠나면 感覺과 思考의 對象[육진경계]이 없어진다. 이 말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즉, 모든 사물과 현상은 마음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며 상념에 의하여 생겨난다. 모든 분별은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대상이 없는 것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상계의 모든 대상은 우리의 무명과 그로 인한 헛된 마음으로 말미암아 인식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므로 일체의 사물과 현상은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 그것은 실체가 없이 오직 마음으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허망하다. 즉, 마음이 생김에 온갖 사물과 현상이 생기며, 마음이 없어짐에 온갖 사물과 현상이 없어진다."


기신론에 의하면 일체의 인식대상은 실은 인식주체의 마음이 지어낸 거짓으로, 거울의 상과 같이 실재가 아닌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약 인식주체가 지어낸 것이 자연현상이라면 궁극적 자연법칙을 찾는 일은 인식주체를 관하는 데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바깥으로 향하던 관찰의 눈을 자신에게로 돌려야 한다. 이는 현재의 과학적 탐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이지만 현재의 외부 탐사적 과학활동은 제한된 범위에서만 성립되며 궁극적으로는 한계에 부딪칠 것임을 시사한다고는 볼 수 있을 것이다.

특수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결합인 양자장론은 매우 한정된 경우이지만, 인식주체에 의해서 규정되는 자연현상의 일단을 보여준다. 즉 관찰자의 변환대칭성의 집합이 입자들이 갖는 특성의 일부를 완전히 규정한다. 입자들을 관찰하기 이전에 관찰자의 변환만 알면 입자의 어떤 특성들은 이미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신론적 자연관에 가까워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물리학의 발달과정을 보면 물리학적 자연관은 조금씩 기신론적 세계관에 접근해 왔다고 볼 수도 있다. 미래의 과학이 이 추세를 더욱 확고히 할것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기신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일 경우 자연과학의 탐구방향은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 것인가를 상정해보는 것이 생산적일 수도 있겠다.









2. 물리학에서의 관찰자


(2.1) 고전 역학

뉴턴에 의해서 확립된 고전역학 체계에서는 자연현상은 인간의 존재나 관찰 여부에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이다(실재성). 인간의 감정이나 정신 또는 주관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들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운행한다(객관성). 이 법칙은 무한히 정밀한 측정을 통해서 찾아낼 수 있다. 즉 자연현상은 얼마든지 정밀하게 관찰 또는 측정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간의 관찰행위는 자연현상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영향을 미칠 경우에는 그 효과를 계산하여 처리할 수 있다(관찰과 현상의 독립성). 이것은 관찰자와 현상이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 독립적으로 행동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주ㅗ객 분리성).

이상의 일반적 가정외에 고전물리의 구체적 이론에 적용되는 큰 가정으로는 자연현상은 시간, 공간, 물질이라는 세 종류의 상호독립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각각은 객관적 실재이다(구성요소 : 시간, 공간, 물질). 이들의 행동은 뉴턴 방정식과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해 결정되며 현재의 상태로부터 미래의 모든 상태가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결정론). 그러므로 지금의 상태를 정확이 측정한다면 미래의 일어날 상황을 모두 예측할 수 있다(예측가능성-실험적 검증 가능성).

관찰자와 관찰행위는 고전역학 이론체계에서 아무런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 이미 존재하는 자연현상과 그 법칙을 찾아내는 발견자의 일을 하고 있을 뿐 이론 자체의 구성에서 하는 역할이 없다. 이러한 상황은 물리학의 발달과 더불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먼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고찰에서, 다음으로 물질의 상태에 대한 연구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2.2) 상대성 이론

(A) 특수 상대성 이론

상대성 이론은 특수와 일반의 두 체계가 있는바 이의 구분은 관찰자의 운동이 특수한 경우로 한정되어 있는가(즉 등속 운동하는 관찰계) 아니면 일반적인 경우(즉 가속도가 있는 관찰계) 인가로 되어 있다. 이 구분의 도입에서 보듯이 '관찰자의 운동'이 상대론에서 기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말해 상대성 이론은, 고전역학과는 달리, 이론체계의 정립에서부터 관찰자의 역할이 명시적으로 들어온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하여 먼저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의 관찰자를 고려해보겠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두가지 원리에 바탕하고 있다. 하나는 관찰자에 따라 물리현상이 달리 보이지만 법칙은 동일하다는 것(상대성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관찰수단인 빛의 특성이 물리법칙의 성립에서 핵심역할을 한다는 것(광속일정의 원리)이다. 여기서 볼수 있듯이 특수상대성 이론은 '관찰자와 관찰수단(빛)'이 물리법칙 수립의 중심적 존재로 명시된 이론이다.


'상대성 원리'란 정확히 기술하면 "등속운동을 하는 모든 기준계(frame of reference)에서 물리법칙은 동일하다"이다. 여기서 기준계는 관찰자로 바꿔 놓아도 좋다. 이 원리는(상대성 이론이 아니고 원리임에 주의할 것) 갈릴레오 때부터 이미 알려진 것으로 뉴턴 역학도 이 원리를 만족시키며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주 조용히 매끄럽게 달리는 차에서 눈을 감고 있으면 자신이 정지해 있는지 달리는지 알 수 없는 것은 이 원리로 설명된다.

물리법칙이 동일하다는 것은 '물리현상은 달리 보일지라도'란 말을 함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바람이 없는날 수직으로 내려오는 빗방울을 달리는 차에서 보면 옆으로 비스듬이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상에 서있는 사람이나 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나 빗방울의 운동은 동일한 뉴턴 방정식으로 기술할 수 있다. 그래서 법칙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상대성 원리를 달리 표현해보면 '관찰자 운동의 상대성'이라 하겠다. 지상에 정지하고 있는 사람과 차를 타고 등속운동 하는 사람 중 누가 운동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운동이란 어떤 기준에 대한 상대적인 것이며, 기준없이 혼자서 하는 운동이란 없다는 것이다.(절대운동의 부정)

특수상대성 이론은 등속운동을 하는 관찰자가 여럿일 때 이들 관찰자 각각이 보는 자연현상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말해주는 이론이다. 두 관찰자가 서로 등속운동을 하는 상황에서 물체의 운동, 빛, 시간, 공간 등을 관찰하면 이들이 겉보기에 달리 보일터이지만 기본법칙은 같아야 한다.(상대성 원리) 특히 중요한 것은 빛인데 빛의 속력은 관찰자의 속력에 관계없이 일정하다.(광속일정의 원리) 이점은 우리의 일상경험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현상인바, 아인시타인이 이 사실과 그 중요성을 처음 발견하였다.

광속이 유한하면서 관찰자의 운동에 관계없이 일정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시간과 공간은 관찰자에따라 달라진다. 그 이유는 공간상의 거리와 두 사건간의 시간은 그 정의가 근원적으로 빛을 통한 관측에 의하기 때문이다.(공간과 시간의 측정에 바탕한 정의 operational definition) 달리 말하면 빛이 기본적인 현상이고, 시간과 공간은 이차적인 개념이 되는 셈이다.

빛이 시간공간 보다도 더 앞서는 개념이란 것은 '관찰수단이 물리이론의 정립에서 핵심적 역할을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광속일정의 원리에서 처음 제기된 것이지만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서 더욱 명확하게 되었다.



(B) 일반상대성 이론

관찰자가 가속 운동을 할 때에는 특수상대성 원리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가속도 운동을 하는 관찰자는 눈을 감고 있어도 힘을 느끼기 때문에 마치 절대운동(다른 비교대상이 필요없음)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인시타인은 여기에서 중력과 가속도의 동등성을 도입하여 상대성 원리 및 이론의 일반화에 성공했다.

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중력과 같은 '힘'의 개념은 사라지고 '시공간의 휘어짐'이란 기하학적 개념으로 대치된다. 이 이론 이전에는 시공간과 물질의 존재는 서로 독립적인 것이었으나, 아인시타인에 의하여 시공간 자체가 물질에 의하여 휘어지고 펴지는 동력학적 작용을 하게 되었고, 시공간과 물질이 함께 하나의 연결된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일반상대성 이론의 출현으로 비로소 별과 은하 등 천체의 생성과 진화 그리고 우주의 진화 등을 수학방정식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우주전체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관찰자의 일반적 운동에 대한 상대성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찰자가 자연이해의 핵심적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시공간이 평평한지 또는 휘어져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관찰에 의해서이며, 이른 위한 구체적 관찰방법은 빛을 사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빛의 진행하는 경로'를 '직선'으로 정의하게 되며 따라서 빛은 시공간의 기하학적 성질을 규정하는 핵심적 역할을 한다. 이런점에서 관찰수단으로서의 빛이 시공간에 앞서는 기본 요소란 점을 다시한번 상기시킨다.


(2.3) 양자역학

관찰의 문제가 물리학에서 심각한 논의주제로 된 것은 하이젠버그의 '불확정성 원리'로부터라고 하겠다. 고전물리에서는 어떤 입자의 상태를 그 입자의 위치와 속도(또는 운동량)로써 규정하는데, 위치와 속도를 관측에 의해 알아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물론 실제 측정 상황에서는 눈금의 부정확 함이나 외적 교란 등으로 무한히 정밀하게 측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상적인 측정을 못할 근본적 이유 같은 것은 없다. 실험상의 오차는 기술적인 문제로 얼마든지 줄여나갈 수 있는 것이다. 또 관찰하는 행위가 입자에 영향을 미칠 경우에도 이를 거의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줄이거나, 이론적 계산에 의하여 소거할 수 있다.

불확정성 원리는 고전역학의 이러한 이상적 관찰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한 입자의 상태 즉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히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두 개의 량(위치와 운동량)은 그 관측오차의 곱이 최소값(플랑크 상수) 이하로는 줄일 수 없다." 이는 입자의 상태를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간에 정확이 알아낼 수 없다는 뜻이다. 곧 관측의 한계를 의미한다. 어느 한계이상 정확히 관측할 수 없는 이유는 관측행위가 입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원천적으로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는 오직 확률적인 계산만 가능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관측 대상인 입자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이라는 이중성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으므로 결국 알 수 없다는 것을 잘못 해석하면 입자 자체는 위치와 속도를 정확히 갖고 있는데(실재론적 견해) 다만 인간이 알 수 없을 뿐이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확정성 원리와 양자역학이 말하는 바는 이것이 아니다. 입자가 위치와 속도를 어느 한 값을 가져야만 하며 가질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생각은 일상적 경험에서 얻은 사고방식이다. 이를 타당성이 검증되지 않은채 미시세계에 적용하는 것이 잘못이다. 입자에 정확한 위치와 속도 값을 지정하여 그것의 시간적 추이를 궤적으로 그려나가는 것은 큰 물체들을 다룰 때 유용했던 것인데, 이러한 궤적의 개념이 미시세계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상을 파악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다시 말해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알고 있는데 부족한 인간이라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함수로써의 위치와 속도란 것 즉 입자의 궤도는 애시당초 없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의 머리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일 뿐이다.

처음부터 없으므로 미시세계의 상태를 기술하는데는 위치와 속도를 시간 함수로서 쓰는 것이 불가능하다. 원자나 전자의 상태를 기술하는 것은 매우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파동함수(또는 확률진폭함수)"를 쓰게 된다. 이를 쓰면 입자의 위치나 속도는 이차적 량으로써 계산을 통해 알게되며, 다만 확률로써만 주어질 뿐이기 때문에 그 값에 불확실성이 필연적으로 따르고, 이 불확실성의 정도는 하이젠버그의 원리가 말하는 대로이다.

보어와 하이젠버그를 중심으로 하는 코펜하겐 학파의 양자역학 해석은 "관측이 가능한 량만으로 물리적 세계관이 구성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예를들면 입자의 궤적은 정확이 관측될 수 없으며, 따라서 양자역학의 세계관에서는 궤적이란 개념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궤적이 정의된다는 것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이 순간순간 알려져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서 불가능 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점은 입자의 위치나 또는 운동량의 각각은 따라따로 측정하는 일이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양자역학에서 위치나 운동량은 중요한 개념으로 남아있으며, 단지 둘의 정보를 동시에 필요로 하는 궤적 등의 개념은 없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양자역학의 수식체계와 측정실험체계에 있어서는 관측가능한 량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 결국 우리가 관찰(또는 인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가 자연관 구성의 기본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점은 고전물리학적 관점과 크게 다르다. 고전물리에서는 관찰 가능성 여부와 관계없이 자연현상은 객관적 실재로 존재하며, 이론이나 실험은 이것을 최대한 정확히 기술함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러나 코펜하겐 학파에서는 관찰과 무관한 독립적 실재를 전제할 것이 아니라, 관찰행위로 파악될 수 있는 것만으로 자연관이 구성되어야 한다고 본다.(좀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관찰가능한 것만으로 현상이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연관은 인간의 관찰행위와 대상인 자연의 결합작품이며, 따라서 '관찰'은 물리이론의 기본적 구성요소가 된다. 이는 칸트의 현상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사물 자체를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것 즉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이 현상이며, 인간은 자연자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현상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는 주장과 상통한다.

요약하면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 원리를 통하여 관측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수식적으로 명료하게 제시한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학파의 해석에 의하면 관측가능한 량만으로 이론이 구성되며, 우리의 자연관이란 결국 인간의 관찰과 인식대상의 결합된 결과이다. 관찰을 떠난 순수한 자연 그 자체란 물리학의 대상이 아니다.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는 다양한 이견들이 있으나, 여기서는 보통의 물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할 만한 정도의 내용만 다루었다.


(라) 상대론적 양자물리(양자장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은 서로 독립적인 기원과 원리를 가지고 출발했다. 그러나 자연현상은 하나이기 때문에 이 둘이 하나의 이론으로 결합 또는 통일이 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27년 쉬뢰딩거가 유명한 그의 방정식을 구성할 당시 처음에 상대성 양자방정식을 만들었으나 그것이 분광 실험데이터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비상대론적인 방정식을 만들어 시도한 결과 실험사실을 잘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큰 업적이 되었었다. 그후 1931년에 디락이 비로소 특수상대론적 양자방정식(디락방정식)을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디락방정식의 출현으로 쉬뢰딩거가 처음 시도했던 상대성 양자방정식이 왜 원자의 분광데이타 설명에 실패했으며, 어떤 경우에 올바른 방정식으로 쓰일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디락 방정식으로부터 새롭게 알게된 사실로는 물질에 대응하여 반물질이 있다는 것(예를 들면 전자의 짝으로 양전자가 존재함)과, 물질에는 두가지 종류(페르미입자와 보제입자)가 있다는 점(전자는 페르미입자인데, 쉬뢰딩거가 처음 만든 방정식은 보제입자에만 적용됨)이 중요한 사실이다.

또 하나 철학적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어떤 입자이든 개체 하나로서 홀러 떼어내어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개체 하나를 따로 분리할 수 없는 이유는 개체는 정적(static)인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고 동적인 상호작용을 끊임없이 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전자라는 입자 하나가 있는 경우를 상상해보면 전자가 가만히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광량자를 만들어 방사하고 흡수하는 작용을 계속 행하며, 이 광량자들에서 다시 다른 전자와 양전자들이 순간적으로 태어났다가 소멸하는 등 상호작용의 소용돌이가 엄청나게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생성 소멸의 소용돌이는 미세한 세계로 갈수록 더 요란해진다. 따라서 전자 하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미세하게 보지 않고 대략적으로 평균해서 볼 때 대체적으로 하나의 전자가 있는 것처럼 어림해 볼 수 있는 것일 뿐이고, 그 존재의 심연을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무한히 많은 다른 존재들과의 역동적 작용의 그물망 속에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특수상대론과 양자물리의 결합은 입자 하나가 혼자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고, 무한히 많은 입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필수적으로 다루게 된다. 무한히 많은 입자들의 상호작용을 다루는 일은 양자역학이라는 기존의 수학체계로는 되지 않는다. 물리학자들은 이를 다루는 수학체계를 양자장론(Quantum Field Theory) 이라고 하며, 현대물리학적 이론의 정화라고 할 수 있다.

개체를 다룰 수 없고 필연적으로 무한히 많은 존재의 계를 다뤄야만 하는데, 이에 관련된 테크니칼한 문제로 수학적 계산에 무한대의 량이 나와 계산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수가 있다. 특수상대론적 양자장론에서는 이 문제는 어느정도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일반상대론과 양자의 결합을 시도하면 계산이 무의미해져서 아직껏 해결을 못보았다. 그래서 상대론과 양자론의 완전한 통일은 현대물리학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다시 특수상대론적 양자물리인 양자장론으로 돌아가서 관찰자와 관련된 측면을 고려해보자. 양자장론에서 다루는 기본적인 입자를 소립자라 부르는데 이들 입자들에는 전자, 양성자, 중성자 및 광량자, 중간자 등 수없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소립자들이 나타날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렇게 수많은 입자들이 발견됨에 따라 이들을 특성에 따라 분류하고 상호작용의 규칙을 찾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었다. 1960년대부터 이에 관한 큰 진전이 이루어져 대체로 1980년대에는 미진하긴 하나 어느정도 완성된 수준에 이르렀다.

소립자와 그들간의 상호작용의 분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개념은 '변환의 대칭성(symmetry of transformation)'이다. 대칭성이론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예를 들면 사람의 모습은 대체로 좌우 대칭이다. 왼쪽과 오른쪽을 바꾸는 '변환'을 해도 그 모양이 꼭 같은 물체는 좌우변환 대칭성이 있다고 말한다. 원은 회전을 시켜도 똑같은 모양으로 있기 때문에 회전대칭이 있다. 소립자들의 경우에 입자들 내부변환에 대한 대칭성도 있고, 외부 관찰자와의 관계가 변환될 때도 대칭성이 있는데, 내부변환은 수학적인 측면이 너무 어려우므로 이를 생략하고 외부 변환대칭성만을 다루어 보겠다.

소립자의 중요한 특성중 하나가 '스핀(spin)'으로 억지로 설명을 한다면 제돌이(自轉)의 량이라 하겠다. 전자, 양성자 등은 스핀이 1/2이고, 빛은 1, 중간자는 0 등 특정한 값을 갖으며, 이 값은 소립자의 분류나 상호작용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스핀이란 물리량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이 바로 대칭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회전대칭성이다.

이제 회전대칭성과 관찰자의 관계를 살펴보겠다. 회전대칭성이란 어떤 물리계를 관찰하는 관찰자들의 자세(좌표계)가 여러 가지로 상호 회전된 상태에 있더라도 모두 동등함을 말한다. 즉 A란 관찰자와 B란 관찰자가 서로 90°돌아선 상태에서 어떤 입자를 관찰할 경우 두 관찰자에 보이는 모양이 다를지라도 근본적으로는 동등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은 3차원이기 때문에 관찰자의 회전변환도 3가지 독립된 방법이 있을 수 있으며, 이들은 군이론(group theory)이란 수학적 방법으로 다루게 된다. 이 회전대칭성의 군이론에 의하면 자연에 나타날 수 있는 스핀의 량은 0, 1/2, 1, 3/2, ㅗㅗㅗ 등으로 특정한 값만이 허용된다. 실제로 지금까지 관측된 소립자들의 스핀은 이들 뿐임이 확인되었다.

자연에 어떤 소립자가 나타날 수 있는냐가, 스핀량에 관한 제한된 범위이지만, 관찰자(좌표계)가 갖는 회전변환의 대칭성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는 것은 의미 심장하다. 관찰자가 단순히 수동적인 보는자가 아니라, 대상의 성격을 규정하고 만들어내는 능동적 창조라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관찰자가 어떤 변환을 할 수 있느냐가 자연계에 무엇이 나타날 수 있는가를 규정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회전변환만을 고려했으나, 이것을 더 확장하면 특수상대성 이론을 주는 로렌쯔 변환(회전변환에다가 서로 등속운동하는 변환을 추가함)까지 고려하면 물질입자에 대응하는 반물질 입자가 있어야 한다는 이론적 계산이 나온다. 실제로 각 소립자에 대응하는 반입자들의 관측 및 실험적 생성이 이론의 안내하에 이루어졌었다.

이 밖에도 평행이동변환과 시간상의 변환 등은 상응하는 물리계의 특성을 지정한다. 현대 물리학에서 변환과 대칭성은 소립자의 분류와 상호작용 규명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점은 관찰자가 취하는 기준계의 변환(예:이동, 회전, 속력 등)이 관찰대상의 성격을 규정한다는 점이다. 대상의 상태가 미리 정해져 있는데 관찰자는 단지 그것을 알아낼 뿐이라는 고전적 관념과는 크게 다른 상황이라 하겠다. 대상의 가능한 상태가 관찰계의 변환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점을 더욱 일반화하여 "모든 대상은 관찰자에 의하여 이미 그 성격이 결정되어 있다"라고 확대할 수 있다면 "대상을 보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보는 것과 다름없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철저히 안다면 모든 대상에 대하여 다 알게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다룰 기신론의 자연관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다.

물론 현대물리를 이렇게까지 확대 해석할 수는 없다. 관찰계의 변환으로 규정되는 물리적 특성(스핀, 반입자의 존재 등)은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질문은 자연현상의 어느 부분까지가 관찰계의 변환으로 규정되어지며, 결정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왜 그런가이다. 이점은 물리학자와 자연철학자들이 함께 생각해볼 만한 문제라고 본다.

3. 기신론에서 관찰자와 현상


(3.1) 현상의 실재성에 관한 관점

「대승 기신론 강의」를 쓴 오고산(吳嗋山)은 그의 해제에서 우주만유의 실상을 보는 네가지 관점을 들고 있다 : 사법계관(事法界觀), 이법계관(理法界觀), 이사무애법계관(理事無楝法界觀), 사사무애법계관(事事無楝法界觀).

"사법계관은 우주만상의 객관적 존재하에서 우리의 신심은 오온의 가화합으로 무아이며, 오온(五蘊)은 실유(實有)이고 삼세(三世)를 긍하여 상존한다고 본다. 이는 소승유부(小乘有部)의 설이다.

이법계관에서는 아(我)는 물론 오온(五蘊)도 실재가 아니라고 본다. 우주는 초절무상(超絶無相)하여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고 보며, 오직 진여(眞如)의 이(理)가 있는 것으로 본다.

대승기신론의 관점은 '이사무애법계관'인데 이(理)는 우주만유의 실체요 사(事)는 일체의 현상계를 나타낸다. 이와 사는 융통무애하여 현상계의 모든 사상은 우주의 실체본성인 이에 의하여 성립되는 것이요, 본체계의 무형한 이체(理體)는 사상에 의하여 현현되는 것으로, 둘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현상 즉 본체요 본체 즉 현상이며, 차별 즉 평등이요 평등 즉 차별이다.

'사사무애법계관'에서 사사(事事)는 '이사무애법계'중의 이(理)를 사(事)에 전탈(全奪)한 것으로 현상계의 사사물물의 차별 그대로가 피차상입(彼此相入)하고 상호융통하여 무장무애(無障無楝)한 것을 말한다."

필자는 오고산이 들고 있는 이상의 네가지 관점을 그 내용의 타당성이나 분류의 적합성에 대한 고찰이 없이 단순 인용했을 뿐이다. 인용목적은 대승기신론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반적인 위치를 파악하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소승유부의 설이라는 '사법계관'은 고전물리학적 자연관과 합치함을 볼 수 있다. 또 인간을 물질의 일시적 모임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도 근대과학의 유물론적 인간관과 다르지 않다. 여기서 인용된 '소승의 관점'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이른바 '소승'의 관점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대승'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냈음직한 가상적 견해를 비교의 편의상 인용해 봤을 뿐이다.

대승기신론의 관점으로 인용된 '이사무애법계관'에서는 현상계의 실체성을 일체 부인하는 '이법계관'을 넘어서 유일실재인 이(理)와 현상인 사(事)가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만 가지고는 현대물리학적 세계관과의 비교가 어렵다 하겠다. 그래서 다음절에서 논의



하려는 것은 이러한 현상의 실재성 여부보다는 인식론적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불교사상의 측면에서는 유식(唯識)철학적 기신론의 해석이 관심의 초점이며, 물리학의 관찰자와 현상의 관계에 비교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3.2) 기신론

「기신론」에서 관찰자와 현상의 관계를 고찰하기 전에 먼저 전체적인 구조를 간단하게 일별하겠다.「기신론」의 본문은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인연분(因緣分) : 논서의 동기와 목적을 기술함 ② 입의분(立義分) : 논서의 초록 또는 주제를 제시함 ③ 해석분(解釋分) : 주제의 해설로 본 논서의 주요 이론을 제시함 ④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 수행과 신앙의 실천적 측면을 논함 ⑤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 : 수행과 신앙을 권유함. 이 중에 우리가 관심을 두고 논의할 부분은 이론을 다루는 '해석분'이다.

「기신론」은 철학적 측면에서 '유심론(唯心論)'이라 하겠는데, 이 '해석분'에서 마음과 현상 그리고 인식자의 관계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이를 요약하여 일부만을 도식적으로 나타내보면 일심(一心) 이문(二門)으로 되며,

+- 心眞如門

一心 = | +- 覺

+- 心生滅門 = +- 心生滅 +- 不覺

+- 生滅因緣

과 같은 구성이다. 이 분류도식을 요즘의 용어로 바꿔놓는다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유일실재 (하나님) = +-본질적 측면(noumena)

(唯一實在) +-현상적 측면(phenomena) =+-현상과 본질의 '인식론' +-여실한 인식

| +- 전도된 인식

+- 현상의 원인과 외적 조건

(cause and mechanism)

이러한 개념적 대치는「기신론」의 본의를 왜곡시킬 수가 있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이 방면의 전문가에게는 불필요한 사족이 되겠으나,「기신론」을 읽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일심(一心), 심진여(心眞如), 심생멸(心生滅), 인연(因緣)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글자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느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제시해본 것이다. 예를 들어「기신론」의 일심(一心)은 어떤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유일실재 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한 해석이 될 것이다.

관찰자와 현상의 관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기신론을 볼 경우 '관찰'이라는 개념이 직접 논의되는 내용은 없고 그 대신 '인식'의 심리학적 논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인식과 관찰은 상호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현상의 인식에 관련하여 물리학적 관심사와의 관계를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신론의 유심사상을 명백히 드러낸 진술인

"삼계허위 유심소작 이심 즉 무육진경계"(三界虛僞 唯心所作 離心 則無六塵境界)

에서 볼 수 있듯이 기신론에서는 모든 인식의 대상(육진경계)은 마음의 지은 바로서 허구에 불과하며 실재가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관찰대상의 실재를 전제하고 있는 고전물리학적 자연관과 크게 다름은 물론, 관찰자의 영향과 역할을 중요시하는 양자물리나 상대성 이론에서도 수용하기 힘든 강한 주장이라 하겠다. 그리고 주의할 점은 '유심소작'에서의 '심'이 개인의 주관적 감정이나 지적 사고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유일실재인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위 진술을 의인적 표현을 쓰면 "이 세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만든 것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으며 현상으로 보이는 것들은 실재가 아닌 환영이다"라고 할 수 있겟는데, 이렇게 고쳐쓰고 보면 철학적이 아닌 종교적 진술로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물리학적 유물론과 대비는 되지만 반드시 정반대의 진술인지는 간단히 말할 수 없다고 본다.

일체가 오직 (하나님) 마음의 지어낸 바라면 개개인으로 나타나는 인식주체와 삼라만상으로 벌여있는 대상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변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기신론의 해명이 물리학적 세계관과 연관되는 기본적 내용이 된다.

심생멸문의 불각(不覺)에서

"復次依不覺故 生三種相 與彼不覺 相應不離

云何爲三 一者無明業相 以依不覺故 心動

設名爲業 覺則不動 動則有苦 果不離因故

二者能見相 以依動故 能見 不動則無見

三者境界相 以依能見故 境界妄現 離見則無境界"

"'깨닫지 못함'[不覺]은 세가지 樣相으로 나타난다.(물론, 不覺의 이 세 樣相은 不覺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첫째는 '無明의 發動'[無明業相, 業相]이다. 이것은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동요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마음의 동요를 '業'이라고 부른다. 깨달은 상태는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상태이며, 마음의 동요는 '괴로움'[苦]을 가져 온다. '괴로움'이라는 結果는 '無明'이라는 原因과 떨어질 수 없다. 둘째는 '認識主體의 成立'[能見相, 見相]이다. 마음이 동요함으로 말미암아 인식의 주체가 생기며, 마음의 동요가 없으면 인식의 주체도 없다. 셋째는 '認識 對象의 成立'[境界相 , 現相]이다. 인식의 주체가 생김으로 말미암아 인식의 대상이 나타나며, 인식의 주체가 없으면 인식의 대상도 없다."

이 인용에서 볼수 있듯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출현은 전도된 인식(不覺)에 기원하고 있다. 원래 실재는 하나님마음(一心)뿐인데 온갖 현상이 거짓되이 나타나 보이는 것은 잘못된 인식때문이며, 이를 상세히 보면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즉 무명(無明)에 의해서 마음에 움직임이 일어나 업(業)이 구성된다. 이를 기신론에서는 비유적으로 바다<心>에 바람<無明>이 불어 파도<業>가 이는 것으로 표현한다. 업상(業相)은 인식자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은 체계(system) 자체라고 볼 수 있겠다.

다음 단계는 인식의 주체가 성립하는 것이다. 마음의 움직임에 바탕하여 능견상(能見相)이 생기는데, 이의 해석은 인식주체의 성립이지만,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보는' 주체의 상인바 '관찰자'의 성립과 통한다 하겠다.

세 번째 단계가 특히 흥미있는 것으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인식주체에 바탕하는 것이며 인식주체가 없다면 현상도 없다는 것이다. 관찰대상이 있으므로 관찰할 수 있다고 보는 상식적 견해와 달리, 관찰자가 있음으로 해서(以依 能見故) 대상이 나타난다(境界妄現)고 주장한다. 이는 시공간과 물질의 존재에 대한 버클리의 주장과 상통하지만, 무명업상과 능견상의 전제는 버클리의 체계에는 없는 점이다.

여기서 나눈 3단계는 시간적 전후의 단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공간까지도 인식주체가 만들어내는 현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칸트의「순수이성비판」에서 다룬 인식주체의 직관형식처럼 선험적 틀로서의 시공간도 기신론의 세 번째 단계와 상치되지는 않는다.

기신론의 "인식주체에 바탕하여 현상이 나타난다"는 진술은 고전물리의 자연관의 입장에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주장으로 보인다. 고전적 상대성이론이나 보어와 하이젠버그의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서도 대상으로서의 자연의 존재는 먼저 전제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극단적 견해로 보인다. 그러나 관찰자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이론의 구성에서 명시적으로 중심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고전물리학보다는 덜 대립적이라 하겠다.

양자장론(=특수상대론적 양자물리)의 경우에는 관찰자의 위치와 자세의 변환등이 갖는 변환대칭성이 관찰대상의 중요한 물리적 특성(에너지, 운동량, 스핀 등)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대상에 대한 관찰자의 우선성'은 기신론의 주장과 유사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관찰자의 변환대칭성이 대상계의 물리적 성질을 일부만 규정하고 모두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기신론의 주장이 완전히 구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물리학이 발전한다면 기신론이 제시하는 방향으로 더욱 근접해질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라 생각된다.

기신론을 중관(中觀)ㅗ유식(唯識)사상의 발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유식의 입장에서 인식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논하고 있는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復次生滅因緣者 所謂衆生依心 意意識轉故 此義云何

以依阿黎耶識 說有無明

不覺而起 能見 能現 能取境界 起念相續故 說爲意

此意 復有五種名 云何爲五 一者名爲業識 謂無明力 不覺心動故

二者名爲轉識 依於動心 能見相故

三者名爲現識 所謂能現 一切境界 猶如明鏡 現於色像 現識亦爾

隨其五塵 對至卽現 無有前後 以一切時 任運而起 常在前故

(이하 4 지식, 5 상속식 생략) "

現象界의 모든 變化는 衆生의 마음 속에서 '意志'[意]와 '思考'[意識]가 발생, 발달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이것은 곧 阿黎耶識이 無明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意志'[意]라는 것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발생하여 認識의 主體와 對象을 성립시키며 대상에 대한 認識과 執着등 想念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心理作用을 가리킨다. 이 '意志'에는 그것을 가리키는 측면에 따라 다섯 가지 이름이 있다. 첫째는 '無明을 發動시키는 '意志'[業識]이다. 이것은 '意志'가 無明의 作用에 의하여 '깨닫지 못한 마음'[不覺心]을 일으키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는 '認識 主體를 성립시키는 意志'[轉識]이다. 이것은 '意志'가 '깨닫지 못한 마음'의 태동에 의하여 認識의 主體를 성립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는 '認識 對象을 성립시키는 意志'[現識]이다. 이것은 '意志'가 認識의 對象인 모든 사물과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면에서의 '意志'의 작용은 비유컨대 거울이 사물 앞에서 그것을 비추어 내는 것과 같다. '意志'는 五官의 對象[五塵]을 대면하면 즉각적으로 그것을 비추어 낸다. '意志'는 언제 어느 때든지 적절한 條件만 갖추어지면 반드시 발동하며, 그 결과로 인식의 대상은 언제나 五官 앞에 나타나 있다.


앞의 인용에서 쓰인 업상(業相), 능견상(能見相), 경계상(境界相) 등 상(相)의 개념을 업식(業識), 전식(轉識), 현식(現識)으로 식(識)이란 개념으로 대치했을 뿐 기본 구조는 같다. 이 식들은 중생이 갖고 있는 심리적 주체의식의 분화과정이라 하視다. 우리가 대상이라고 인지하는 것들이 현식(現識)에 의하여 나타내진것(能現一切境界)이며,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이 실상이 아니듯 자연의 대상들이란 현식에 비친 환영에 불과하다. 그리고 시간적 전후도 실상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업식, 전식, 현식이 분화되어 나오는 기체(基體)로서 '아려야식'을 상정하고 있는 바, 이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 이전이며, 유일실재인 진여(眞如)와 대상을 지어내고 그것을 인식하는 무명(無明)의 결합된 근본 식(識)이라 보겠다. 물리학에서 추구하는 자연의 궁극적 원리는 기신론에 의하면 '아려야식'의 원리에서 나올 것이다.

기신론에 의하면 관찰의 대상인 자연현상의 본성규명은 관찰자 자신의 규명으로부터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관찰자 자신을 관찰할 때, 즉 주체와 객체가 동일할 때 주객 비분

리의 상황에 필연적으로 부딪칠 것이고, 또한 관찰행위가 관찰의 대상이 되며 관찰정보의 처리과정이 역시 관찰대상이 되므로 인식론과 물리학은 불가분의 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두뇌 또는 마음을 보고자 하는 일에 이를것이며 물리학과 심리학은 별개분야가 될 수 없을 것이다.



IV. 토의


관찰자와 현상의 관계를 물리학적 측면과 기신론의 입장에서 살펴보았다. 고전 물리학에서 최근의 양자장론에 이르기까지 발달단계에 따라 관찰자와 현상의 관계도 점점 더 미묘하게 변모되어 왔음을 보았다.

고전 물리학에서는 관찰자와 자연현상은 완전히 분리 독립된 실재이며, 관찰행위나 수단이 현상의 법칙을 찾아내는데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론의 구성에 있어서도 관찰은 특별한 역할을 맡지 않는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관찰자간의 상대적 운동관계와 관찰수단인 빛의 특성이 이론구성의 핵심적 요소가 된다. 자연현상의 객관적이고, 분리독립된 실재성은 여전히 인정되지만 관찰자와 관찰수단(빛)이 명시적으로 부각된 점이 중요하다. 양자역학에서는 불확정성 원리로 대표되는 '관찰행위가 관찰대상에 미치는 영향'이 미리 계산하여 제거할 수 없는 최소량이 있다는 점, 관찰이 가능한 물리량 만으로 자연법칙이 기술되어야 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따라서 관찰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자연현상이라는 고전물리학적 자연관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게 됐으며, 관찰자의 인식과정이 현상의 기술과 이론의 구성에 근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이 인정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연법칙과 실험의 객관성 및 관찰자와 대상의 분리 가능성을 부정하고 관찰자의 의식이 자연현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등의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나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에서 그러한 주장은 무리라고 보고 있다.

특수상대론과 양자역학의 결합인 양자장론에서는 관찰자의 좌표계와 변환 대칭성이 관찰대상들의 성질의 일부를 규정하는 상황이 있다. 즉 대상의 성질들이 정해져 있어서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에 의해서 그 성질들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비록 관찰대상의 모든 성질이 규정되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관찰자에 의해서 관찰대상이 규정된다는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전환이라 하겠다.

만약 모든 대상의 성질이 관찰자에 의해서 규정되어 진다면, 그리고 물리학이 그런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면, 자연을 알기 위하여 자신을 관찰하면 된다는 자기관찰(self-observation)의 문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대승기신론의 관점은 바로 이러한 가상적인 미래 물리학의 상황에서 의의를 갖게된다. 기신론에서는 현상은 인식주체의 망념(妄念)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므로 관찰이란 자기가 자기의 마음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기신론의 견해를 꿈에 비유하여 꿈속에서 사물을 관찰하는 관찰자들을 상정해보자. 이 경우 꿈속의 관찰자와 대상이 분리된 존재로서 관찰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관찰자든 대상이든 모두 꿈꾸는 자가 만들어내는 영상에 불과하며, 실재 또는 주체라 할 수 있는 것은 꿈꾸는 사람 하나 뿐이다. 기신론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느끼는 이 세계가 일심(一心)안에서 일어나는 허환일 따름이라고 본다. 따라서 관찰자와 현상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이 세계는 이 전체를 지어내는 일심안에서 모두 연결되고 제어된다.

그런데 이 일심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느끼는 세계의 분별상이 전혀 없는 것이다. 절대공적(空寂)인 일심에 무명(無明)의 바람이 불어 마음에 파도가 일어나고, 여기에 인식주관(能見)이 생기면 따라서 인식대상이 나타난다. 즉 우리가 객관적 대상이라고 느끼는 현상들이 주관(能見相)에 의하여 거짓되이 나타난다. 인식주관과 대상을 총망라한 모든 것의 생멸은 인식의 전도(不覺)에 의한 무명(無明) 망상(妄想)이라 하겠다.

기신론의 세계관은 현재의 물리학과는 매우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의 과거발달사를 보면 반드시 황당무계하다고 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궁극적 목표를 기신론적 세계관으로 잡고 물리학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 하나의 방향이 될 수 있겠다.



△ 참고문헌

(1) 이홍우 역주, 대승기신론, 경서원, 1991

(2) 임진부 저, 기신론의 세계, 창우사, 1993

(3) 오고산, 대승기신론 강의, 보현각, 1977

(4) 은정희 역주, 원효의 대승기신론 소ㅗ별기, 일지사, 1991

(5) 송찬우 역, 대승기신론 직해(厱山大師), 세계사, 1991

(6) 박태원 저, 대승기신론 사상연구(I), 민족사, 1994

(7) Yoshito S. Hakeda(trans.), The Awakening of Faith, Columbia Univ. Press, 1967


△ 색인

고전 물리학

고전 역학

관찰자

광속 일정의 원리

경계상

기신론

능견상

대승기신론

대칭성

무명

불확정성 원리



사법계관

사사무애 법覗관

상대성 원리

상대성 이론

소립자

심진여문

삼생멸문

아려야식

양자장론

업상

업식

이법계관

이사무애 법계관

일반상대성 이론

일심

전식

특수상대성 이론

현상

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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