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cle Bank

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6/07/17 (08:48) from 84.173.72.185' of 84.173.72.185' Article Number : 475
Delete Modify 김정수 Access : 7823 , Lines : 366
밀러의 극작품 『시련』에 나타난 마녀사냥의 집단적 광기


밀러의 극작품 『시련』에 나타난 마녀사냥의 집단적 광기

金   正   洙*1)

Ⅰ.

2 외대어문논집 제15집

밀러의 극작품 『시련』에 나타난 마녀사냥의 집단적 광기  17




 아더 밀러(Arthur Miller)는 미국 New York의 브루클린(Brooklyn)에서 태어나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아버지의 회사가 망하자 여러 가지의 직업을 전전하며 일하는 동안 하류층의 인생에 대하여 깊은 공감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모두 나의 아들들 『(All My Sons), 1949년 『세일즈맨의 죽음』(Death of a Salesman), 1953년 『시련』(The Crucible), 1955년 『두 월요일의 기억』(A Memory of Two Mondays), 1956년 『다리에서 본 조망』( A View from the Bridge)등 다섯 작품이 발표되자 밀러는 1953년에 작고한 유진 오닐(Eugene O'Neill)에 이어 테네시 윌리암즈(Tennessee Williams)와 함께 미국 연극계의 최대의 문제 작가로 등장했다. 그 후에도 1964년 『몰락 이후』(After the Fall)와 『비쉬에서 일어난 사건』(Incident at Vichy),그리고 1968년 『대가』(The Price)를 발표하여 극작가로서의 대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주요 작품은 전부 1차, 2차 세계대전 사이 미국 연극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사실주의 극 전통의 일부로 비록 직접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1930년대와 1940년대 초 방황과 비판의 극, 클리포드 오데츠(Clifford Odets)의 극렬 좌익 극, 릴리언 헬먼(Lillian Hellman)의 윤리적이며 매우 잘 짜여진 멜로드라마, 또 넓게 뿌리박고 있던 헨릭 입센(Henrik Ibsen)적 극정신은 밀러가 물려받은 중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밀러의 생애 중 초기 사회의식, 미국 문화의 병폐에 대한 인식, 또한 그러한 병폐는 근본적으로 도덕적 약점에 기인한다는 그의 믿음이 그를 첫째로는 사회 극작가, 둘째는 도덕가로 만들어 주고 있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함께 한 개인의 약점이 사회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믿고 있던 그가 행동의 심리적 원인을 모색하기 시작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시련』은 미국 메사추세츠(Massachusetts)주 세일럼(Salem) 마을에서 일어난 마녀 처형 사건을 밀러가 4막으로 극화한 작품으로서 반미활동을 벌인 자들을 색출하려는 맥카시즘(McCarthyism)선풍과 관련된 밀러 자신의 경험을 엮은 극이다. 밀러는 한 인터뷰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많이 투입시킨 것으로 자기만이 알고 있는 숨겨진 심층이 많다고 하면서 이 『시련』을 쓰게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I was drawn to write The Crucible not merely as a response to McCarthyism. It is not any more an attempt to cure witch hunts than Salesman is a plea for the improvement of conditions for traveling men, All My Sons a plea for better inspection of airplane parts, or A View from the Bridge an attack upon the Immigration Bureau. The Crucible is, internally, Salesman's blood brother. It is examining the questions I was absorbed with before--the conflict between a man's raw deeds and his conception of himself.1)



 극한 상황에 처한 자아와 행동 사이의 갈등을 그리려 했음에도 세일럼 사회나 맥카시즘 지배하의 미국 사회뿐만 아니라 인간의 결단을 강요하는 모든 비이성적 사회 조건이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맥카시즘의 횡포뿐만 아니라 양심을 헌 신짝처럼 내버리는 현대 미국인들의 모습에서 공포와 분노를 느꼈던 밀러는 전횡적인 정치세력이나 오도된 여론 혹은 일부 광신적인 종교집단이 나약한 소시민을 어떻게 전락시키는 가를 무대에 올려 보려했던 것이다.

 1954년 미국무성은 『시련』의 벨기에의 수도 부르셀(Brussel) 공연에 참석하려던 밀러의 여권을 공산주의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발급을 취소하였다. 그는 공산주의 운동에 자신이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끝내 부인했지만, 1955년 New York시 소년 국에 의하여 청탁 받았던 소년 범죄에 관한 영화대본도 똑같은 이유로 취소되었다. 그래서 1956년 드디어 그는 미국 하원의 반미활동 조사위원회(The 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던 중 공산당원이었던 자신의 친구 이름을 알려 주는 것을 거부한 이유로 국회 모독 죄로 고발되어 1957년 유죄판결을 받고, 500불의 벌금과 집행유예 30일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밀러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상고를 한 결과 1958년 연방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적이 있다.

 1953년 New York에서 『시련』이 처음 공연되었을 때 이 작품은 1692년 미국 메서츄세츠주 세일럼에서 있었던 마녀재판과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전반 미국의 죠세프 맥카시(Joseph McCarthy) 상원의원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반미활동 조사 및 심문과 어떤 역사적 평행성이 있는 것을 관객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New York 브로드웨이(Broadway)에서의 첫 공연은 18개월 이상 장기 공연된 『세일즈맨의 죽음』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었던 6개월간의 공연으로 그쳤지만, 1958년 오프 브로드웨이(Off-Broadway)에서 재연되었을 때에는 100회 이상의 장기 공연을 기록했다

 『모두 나의 아들들』과 『세일즈맨의 죽음』이 기업윤리, 시대착오적 인생관, 전쟁폭리 등을 소재로 한 사회 문제극으로서 물질적 성공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 때문에 주인공들이 패배 또는 죽음에 이르는 비극이라면, 『시련』은 명예 또는 도덕적 갈등 때문에 주인공이 마침내는 처형 대에 오르게 되는 순교자의 비극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 사실과 허구성을 능숙하게 배합한 이 작품은 정치적 비유 극이요, 역사적 그리고 사회적 비판 극으로 그 의미가 당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극2)이기도 하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맥카시 상원의원의 활동은 정부관리, 정치인, 군인, 문화계 인사, 대학교수 등 지성인들에게 극심한 심리적 압력과 고통을 주어 미국과 전 세계에 대하여 그는 자유의 숭고한 가치와 민주적 질서를 위협하는 상징이 되었다. 밀러는 세일럼의 재판관들의 권위에 반대하는 자들을 재판의 위엄을 파괴하는 무리로 낙인찍어 교수형에 처한 똑같은 사회적 위기를 맥카시 의원에 반대하는 모든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치는 악랄한 횡포 속에서 재발견하여 사회적 불신의 공포와 그 파괴력의 동시성을 이 『시련』의 주제로 삼아 이 두 가지 역사적 사건에 눈감을 수 없는 극작가의 양심을 과감하게 표현하였다. 맥카시즘의 암운이 걷힌 후에도 계속 이 작품이 세계적으로 절찬을 받으면서 공연되고 있는 이유는 『시련』이 사회극인 이상 특정한 어떤 시대의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초 시간성 때문인데, 그것은 결국 이 작품이 인간 악(惡)이라는 주제의 보편성과 영원성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괴이하고 무서운 사건들 중의 하나인 이 마녀재판은 1692년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19명의 여자와 남자가 희생되고, 150명이 투옥되나 Boston 재판이 증거 불충분이라는 판결을 내려서 그들은 석방되었다. 이 과정에서 9세에서 20세까지의 소녀들과 젊은 여인들이 기절하고 소리치며 그들의 희생이 될 사람들을 호명했다3) 한다.

 밀러가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는 『시련』은 1950년대 초 극단적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집단적 권력 앞에서 희생된 개인의 양심과 인권을 청교도 사회의 마녀사냥을 통해 고발하고 있다. '열에 의한 물체의 정화,' '혹독한 시련'이란 뜻의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왜곡된 종교적 광기에서 출발하여 세일럼 주민 개인의 이해관계와 얽힌 사적 복수심의 광기로까지 발전한 마녀재판에서 희생된 주인공 죤 프락터(John Proctor)의 투쟁과 고통을 묘사하여 그를 정화된 자아로 소개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밀러는 미국인들이 쉽사리 잊을 수 없는 세일럼의 마녀재판의 소재를 교묘하게 현대사회의 긴장감 속에 되살려 상상적 공포심에 있어서의 광기(hysteria)와 이데올로기를 불러 일으켜 숨막히는 광신적 세계 앞에서 현대 지성인의 무력함을 표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의 목적은 이 마녀사냥의 원인이 된 집단적 광기(mass hysteria)의 전개과정을 텍스트 및 텍스트의 시대적 배경과 연결하여 분석하는 하는 것이다.

Ⅱ.

 1692년 봄, 메사츄세츠주 세일럼에 있는 목사 사뮤엘 패리스(Samuel Parris)의 집 침실에서 그의 딸 베티(Betty)가 원인 모를 병을 앓고 있다. 애비게일(Abigail)의 인도를 받은 동네 소녀들이 하녀 티튜바(Tituba)와 함께 밤중에 몰래 빠져나가 숲 속에서 춤을 추면서 악령을 불러들이는 장면이 패리스 목사에게 발각디어, 베티는 그 충격 때문에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 때 마술이 마을에 퍼져 있다는 소문이 떠돈다. 세일럼에서는 지금 이웃끼리 토지 소유권 다툼이 한창이다. 패리스 목사는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을 위해 헤일(Hale) 목사의 자문을 청한다. 앤 푸트남(Ann Putnam)은 여덟 번의 출산을 했지만, 모두 사산아였다. 그래서 그 원인을 규명하는데 혈안이 되고 있다. 프락터 집의 하녀로 있는 메어리 워렌(Mary Warren)을 찾으로 온 프락터는 그 곳에서 애비게일을 만나는데 그녀는 그에 대한 사랑을 여전히 프락터에게 호소한다. 프락터가 아내에게 애비게일과의 간통 사실을 고백한 일이 있는데 이 이유 때문에 애비게일은 프락터의 집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애비게일은 죤 프락터에게 소녀들이 숲 속에서 뛰고 놀았던 사실을 알려준다.

 헤일 목사가 도착하여 마술의 존재여부에 대한 엄격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티튜바를 불러들인다. 티튜바는 벌이 무서운 나머지 마술에 종사했음을 고백한다. 애비게일도 그녀에게 마술의 혐의가 돌아 올 것을 짐작하여 마술을 시인하면서 마을에 있는 몇 사람을 마녀로 지목하자, 다른 소녀들도 이에 합세한다.

 2막은 8일 후, 프락터의 집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죤 프락터는 하녀 워렌이 자기 명령을 어기고 법정에 매일 출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법정은 마술을 고백하지 않으면, 모두 교수형에 처한다는 강경책을 쓴다. 아내 에리자베스 프락터(Elizabeth Proctor)는 죤 프락터에게 법정에 출두하여 애비게일의 거짓을 폭로할 것을 종용하지만, 죤 프락터는 애비게일과의 간통사건 때문에 주저한다. 프락터에게 의당 해야되는 양심적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요청하는 에리자베스의 최초의 행위가 된다. 기진맥진하여 겁에 질린 워렌이 법정에서 돌아온다. 법정은 교수형의 선고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워렌은 엘리자베스에게 법정에서 앉아 있을 동안에 만든 인형을 준다. 헤일 목사가 프락터에게 온다. 레베카 너어스(Rebecca Nurse)를 포함한 다른 여러 마녀들의 이름에 엘리자베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헤일 목사는 프락터의 불성실한 예배당 참여와 패리스 목사에 대한 농부들의 반감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다. 법정의 관리들이 엘리자베스를 체포하러 프락터의 집에 몰려왔을 때도 헤일 목사는 그 집에 있었다. 에비게일의 고발로 배에 바늘이 찔린 워렌이 주었던 인형을 마녀의 증거품으로 압수한다. 프락터는 아내의 체포에 항거하지만 헤일 목사가 그를 말리면서 재판의 공정성을 역설한다. 프락터는 워렌과 함께 법정에 가서 애비게일이 인형에 바늘을 찔러 놓았다는 사실을 재판관에게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장면으로서 2막이 끝난다.

 3막은 법정 장면이 된다. 프락터는 워렌을 데리고 증언하러 법정에 출두한다. 워렌은 재판관에게 소녀들이 거짓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프락터도 또한 엘리자베스, 레베카, 그리고 나머지 피의자들의 결백성에 관하여 마을 사람들이 서명한 진정서를 휴대하고 왔다. 평소에 프락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패리스 목사는 프락터가 법정을 전복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부지사 댄포스(Danforth)는 엘리자베스가 임신 중이니 앞으로 일년 동안은 처형될 가망이 없다는 것을 프락터에게 일러 주지만, 프락터는 그의 아내 만을 구제하는 것으로 멈출 수 없음을 공언한다. 헤일 목사도 의심을 품게 되어 차츰 프락터를 옹호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고집불통이다.

 다른 소녀들이 법정에 출두하여 워렌이 마술을 쓰고 있다고 우긴다. 애비게일의 흉계를 깨뜨리기 위하여 프락터는 애비게일과의 간통 사실을 시인한다. 댄포스는 엘리자베스를 출두시켜 간통 사실의 진위를 캐 묻는다. 남편이 이미 증언한 사실을 모르고, 오로지 남편 프락터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그녀는 거짓말을 한다. 워렌은 계속 소녀들을 비난할 경우에 자기 신변이 위태로워질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워렌은 프락터가 악마의 사도인 것을 주장한다. 프락터가 그녀에게 마술을 걸었다는 것이다. 법정이 마녀를 가장한 소녀들의 증언을 수락하자, "신은 죽었다"라고 호언하면서 법정을 비난한다.

 4막은 계절이 가을이다. 부패와 죽음의 계절인 것이다. 패리스 목사는 죄책감에 미친 듯 불안하다. 애비게일은 그의 돈을 훔치고 달아난다. 세일럼 마을 전체가 불안과 혼돈으로 들석댄다. 패리스 목사는 댄포스에게 레베카 너어스와 죤 프락터에게 마술을 고백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댄포스에게 그가 결백한 것을 설득하는 힘이 없다. 댄포스는 엘리자베스와 헤일 목사로 하여금 죤 프락터를 면회하도록 허락한다. 처형 시간인 해 뜰 무렵까지 죄의 고백을 받아내면 프락터를 용서해 준다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끝내 설득하지 못하지만, 댄포스는 프락터가 다른 마술쟁이의 이름을 대지 않아도 좋으니 죄의 고백만 하라는 조건으로 프락터는 고백서에 서명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서명을 한 후 그는 그 고백서를 넘겨줄 생각을 않는다. 댄포스는 그 고백서를 공개하겠다고 주장한다. 프락터는 그의 목숨으로 가문의 불명예와 치욕을 교환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 서류를 찢어버린다. 레베카 너어스와 함께 그는 형장으로 끌려가 처형된다.

 1막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죤 프락터는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마술에 관한 한 그는 될수록 그 사건에서 초연해지려는 태도이다. 사회 속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인 것을 역설하려는 작가 밀러의 입장은 프락터가 이 사건에 필연적으로 휘말려 들도록 그 동인(動因)을 2막에서 아내 엘리자베스가 마녀로 지목되어 체포되는 상황을 설정하므로써 마련한다. 한편 애비게일과의 간통 사건을 삽입시키므로써 극적 긴장감과 클라이맥스(climax)의 조성을 준비하고 있다. 3막에 이르러 그는 될수록 애비게일과의 간통 사실을 숨기면서 법적 절차에 의해서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워렌의 법정 출두 권고와 진정서의 준비는 그것을 말해 준다. 아직도 직접적인 개입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엘리자베스의 임신을 이유로 한 댄포스의 형 집행유예의 제안은 이 일이 자기 아내 한 사람의 일 만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차츰 사회적 행위에 자신을 맡기려는 전환이 가능해진다. 메어리 워렌의 증언이 엉뚱한 방향으로 진전되자, 비로소 그는 전적으로 이 일에 자신을 투입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발견한다. 애비게일과의 간통 사실을 폭로하는 용기의 대가는 자기자신이 마술쟁이로 몰려 투옥되는 비극적 결과였다. 4막에 이르러 연명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한 법과 권위에 대하여 끝까지 부정하고 항거한 죤 프락터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순응한 탓으로 처형을 당하지만 개인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승리의 투쟁이었기에 그는 현대적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시련』이 『세일즈맨의 죽음』 보다는 예슬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하나 비극성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 『모두 나의 아들들』이나 『세일즈맨의 죽음』에 나타나는 주인공들은 사회가 자신들에게 강요하는 인간상을 수용하고 그것에 맞추어 살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환상에 빠진 채 죽어 가지만, 『시련』의 주인공 죤 프락터는 처음에는 사회적 문제로부터 중립을 지키고 초연해지려고 하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와 양심의 소리에 응답하여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한다. 여기에 인간정신의 고귀함을 통한 인류의 낙관적인 미래가 시사된다.

 참다운 비극이 모든 인간을 대표할 수 있는 보편적 인물의 고통과 몰락을 통해서 전 시대를 통한 일반적인 진리를 말해 주는 것이라면 『시련』은 그것이 가진 보편성으로 인하여 진정한 비극에 접근한 극이라 할 수 있겠다. 로버트 와르쇼(Robert Warshow)도 "It is quite true, nevertheless, that the play [The Crucible] is, at least in one sense, of universal significance."4)라고 말하여 이 작품이 많은 결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의 요건 중의 하나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음을 장점으로 간주하고 있다.

 사실 밀러에게는 『시련』이 과도기적 극작품으로 이전 작품들의 주제였던 사회고발과 개인적 좌절의 갈등을 넘어서 후기 작품들의 내적 성찰로 들어가기 전, 죄에 대한 의식세계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작가의식의 발전에 대하여 밀러 자신이 직접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In The Crucible, however, there was an attempt to move beyond the discovery and unveiling of the hero's guilt, a guilt that kills the personality. I had grown increasingly conscious of this theme in my past work and aware too that it was on longer enough for me to build a play, as it were, upon the revelation of guilt, and to rely solely upon a fate which exacts payment from the culpable man. Now guilt appeared to me no longer the bedrock beneath which the probe could not penetrate.5)



 밀러는 개인의 존엄성을 말살하려고 하는 자들의 죄과를 폭로하는 것이 『시련』의 목표였으며, 따라서 잘못된 가치관으로 죄를 짓고 그 대가로 죽어야 하는 운명을 묘사한 데서 발전하여 그 죄를 깨닫고 죄를 밝혀내는 내용으로 주제가 승화된 것이다.

 세일럼은 전체 인간사회를 대표하는 작은 세계이다. 밀러는 이 작품에서 사회 구성원의 편견과 이기심은 사회 정의의 실현을 저해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특히 법과 사회 정의의 실현이라는 미명 하에 진실을 왜곡시키고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회제도의 모순과 집행관들의 유해성을 강력하게 고발하고 있다. 프락터가 법정의 신뢰성을 뒤엎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가 무죄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증거만을 중시하며 진실을 은폐해 버리는 댄포스 부지사와 호손(Hawthorne) 판사의 태도에서 그러한 부조리를 찾아볼 수 있다. 사회 질서와 개인의 자유는 상호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균형이 깨어지면 사회와 개인 모두의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객관적인 선과 악이 없고 양심밖에 다른 규범이 없을 때, 인간은 스스로 가치 기준을 만들어 그에 따라 살며 모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 『시련』은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광신적인 열정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양심과 자기인식이 필요하며 순수한 선(善)만으로는 왜곡된 사회 현실에 대처해 나가는데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자기인식과 책임의식이 결여된 인간은 저지르지 않은 죄를 고백함으로써 양심을 타인의 손에 넘겨주게 되기 때문이다. 프락터는 세일럼의 재판관들에게 용납될 수 없는 자결성의 원리를 확인하기 위하여 생을 포기한다. 그의 고백은 타락한 법정을 지속시키는 대의명분을 주며 사회의 부조리를 조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부정한 사회조직에 죽음으로 맞서는 프락터의 도덕적 용기는 혼탁한 세계 내에서 사회정의와 진리 실현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련』이 처음으로 공연된 후 Time지는 이 작품을 매카시 의원의 공산주의자 색출에 대한 공격으로 평가했으나 약 20년이 지난 후에는 링컨 센터(Lincoln Centre)의 비비안 버몬트(Vivian Beaument) 극장  무대에 오른 극들 중에서 『시련』의 재공연이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고 극찬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When first produced in 1953, it [The Crucible] was lauded as an attack on the communist with hunts of Joe McCarthy. We can see in retrospect that the play was interpreted in too narrow a political sense. It deals with the universally recurring question of the tyranny of the state, of a economic or military power, of religion or the moment's public opinion.6)



 최근에 이르러서는 『시련』이 지니는 역사적인 사건과의 유사성을 추적하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적 가치 자체를 정당하게 평가하고자 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어서 이 극이야말로 밀러의 비극개념이 가장 강력하게 표현되었다는 비평이 지배적이다. 참다운 비극이 모든 인간을 대표할 수 있는 보편적 인물의 고통과 몰락을 통해서 전 시대를 통한 일반적인 진리를 말해 주는 것이라면 이 『시련』은 그것이 가지는 보편성으로 인하여 진정한 비극에 접근한 극이라 할 수가 있겠다.

Ⅲ.

 세일럼의 마녀 소동은 감정이 억압된 사회에서 돌출구로 시작된 한 놀이가 확대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세일럼의 목사인 패리스(Paris)는 어느 날 밤 숲 속에서 자신의 딸 베티(Betty)와 질녀 애비게일(Abigail)은 마을 소녀들이 그 중 한 명은 벌거벗은 상태에서 이상한 의식의 춤을 추며, 자신의 하녀인 티튜바(Tituba)가 불 위로 팔을 흔들고 고함치는 것을 목격한다. 패리스가 숲에서 뛰쳐나오며 소녀들을 저지할 때 베티와 루스(Ruth)는 정신을 잃고 며칠간 깨어나지 못하게 된다. 패리스가 딸의 이름 모를 병에 대하여 애비게일을 추궁하나 그녀는 단순한 놀이로서 춤을 추었을 뿐이고 베티는 마술에 걸린 것이 아니라 패리스가 숲 덤불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 기절한 것이며, 티튜바는 바바도스(Barbados)의 노래를 불렀을 뿐 자신들은 그 외의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패리스는 소녀들의 행동을 악마적 영혼과의 불경스러운 내통으로 판단한 후 악마학의 권위자인 헤일(Hale) 목사를 부르지만 패리스는 악마적 영혼의 실체보다도 그의 딸이 마법에 걸렸다는 것이 알려질 때 자신의 명성이 떨어질 것을 더 두려워한다.

 악마는 치밀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고유한 지식이 필요한 것에 대해 전문가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는 헤일 목사는 오히려 악마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집요하게 이 사건에 몰입한다. 악마의 필요성은 어떤 특정한 교파나 교회 국가가 인간을 굴복시키기 위해 어느 시대에서나 되풀이되어서 고안되어 사용된 무기였고 오히려 조화로운 우주관을 갖기 위해서 악마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해석의 오류를 낳는다. 이러한 신권정치는 신에게 번제를 드리기 위한 제물이 동물은 물론 인간이어도 무방하다는 폭력을 감추고 있는 것이다. 헤일 목사는 자신의 마녀사냥이 가져올 이러한 파괴적 폭력의 결과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모든 권위를 성서와 학문에 대한 자기 도취적 광기에 의존하고 악마의 존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사건을 확대시켜 마을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간다. 교묘한 신학적 교리를 이용하며 마녀를 알아내기 위해 애쓰는 헤일 목사의 열정에 찬 모습은 악마 퇴치자가 아니라 오히려 악마 숭배자라는 느낌이 들게 할 정도이다.

 여기서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퓨리터니즘(Puritanism)을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청교도들은 구 세계인 유럽에서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종교적 자유와 생활의 안정을 찾아 신대륙인 미국으로 이주해 온 집단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칼하게도 영국과 기타 지역에서 받던 고통스러운 박해를 피해서 온 그들이 미국에 와서는 그들 자신들이 이웃을 종교의 이름으로 박해를 가하는 입장이 되었다. 청교도들은 그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종파들의 생활방식이 옳지않다는 독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 교회의 선한 신도가 아니면 그들의 사회에 어떤 인간도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독선적인 생활의식의 집단이다. 퓨리터니즘에 속하지 않는 인간들은 모두 광야에 추방되곤 했다.

 퓨리터니즘의 교의 가운데 한 가지로 선민원리가 있다. 인간은 신에 의해서 선택되어 지고, 선택되어진 선민 즉 교도만이 신에 의하여 구제될 수 있다는 원리이다. 선민이 되는데 있어서는 인간은 무력하다. 왜냐하면 선민들은 신에 의하여 미리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기 자신이 선민인지 아닌 지의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서 덕성을 쌓고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꾸준히 함으로써 선민이 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선민이 되면 그는 악을 저지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선민이 된 이상 그는 비록 악행을 하더라도 영원히 구제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이론도 성립될 수 있다.

 청교도들에게는 악마가 추상적인 형태와 개념이 아니라 살아서 맹렬히 움직이는 인류의 적인 것이다. 악마들은 마을 밖에서 혹은 숲 속에서 도사리고 있으면서 인간을 유혹하여 악마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청교도들은 한때 신에 봉사하는 천사였던 악마가 신을 배반한 까닭으로 신의 버림을 받자, 악마는 신의 계획을 파괴할 목적으로 신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을 가해 온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18  외대어문논집 제15집

 청교도의 또 한가지 교의는 신권정치의 인정이다. 청교도들은 교회에 의해 완전히 지배되는 정체를 믿었다. 교회의 일원이 아니면 선거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공동사회 속에서 어떤 직책을 맡지도 못했다. 따라서 목사의 지위는 통치자에 가까운 권위를 갖는다. 청교도들은 악에 대해서 지극히 가혹한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악마로부터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 열심히 예배당에 다녀야 하고 청교도의 교의를 배워야 한다. 일단 성서의 가르침을 잊고 악을 행하면, 먼저 그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해야 하며 참회해야 한다. 고백을 하면 용서를 받을 수 있지만, 숨기면 구제를 받을 수 없고, 교수형으로 처형되는 가능성도 생긴다. 따라서 교수형을 면하기 위한 허위 고백은 이 경우 중요한 문제점으로 제기될 수 있다. 또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최악의 죄목 가운데 한 가지는 간통죄가 된다. 쾌락은 악마의 자극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 청교도들은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기 마련이어서, 여인들은 화려한 옷을 입지도 못하고 어린이들은 유쾌하게 놀지도 못한다. 춤을 추는 일은 어린이들에게도 최대의 금물로 지목된다.

 17세기와 18세기의 전반에 걸쳐서 마술쟁이에 대한 확신이 유럽과 미국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 시기에 수천 명의 인간들이 마술쟁이로 낙인이 찍혀 교수형으로 처형된 기록이 남아 있다. 성서의 내용을 그대로 신봉하는 청교도들은 마술쟁이의 존재를 그대로 믿고 그 색출에 온갖 힘을 기울였다. 악마의 기능은 인간들을 죄악으로 유인하여 십계명에 불복하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그들은 믿었기 때문이었다. 청교도들은 악마가 전력을 기울여 청교도들의 안식처인 신세계를 파괴하려 한다는 미신을 가졌던 것이다. New England 주변은 그 당시에 원시림이었고 황량한 벌판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인디언들을 비롯한 이교도들이 우글대고 있었기 때문에 악마의 본거지로서는 손색이 없었다고 청교도들은 믿었기 때문이다.

 퓨리터니즘의 중심지였던 메서츄세츠 주의 세일럼이 악마들의 공격 중심지가 되리라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하등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세일럼에 근접하고 있는 많은 마술쟁이들을 악마는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마술쟁이의 실재성 여부에 대해서는 그리고 그 발견 방법에 대해서는 청교도들도 속수무책이었다. 마술쟁이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일단 사람의 마음에 자리를 잡아도 그 당사자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단 마에 들리면, 그 사람은 순진하고 결백한 사람을 마술쟁이로 고발하여 사람들을 괴롭히고 급기야는 신의 세계에 혼란을 초래시킨다는 것을 그들은 믿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술쟁이는 그의 죄를 고백하면 용서를 받고 자유인이 될 수가 있었다.

 1692년 이전에 벌써 세일럼 마을은 패리스 목사의 선출을 둘러싸고 분쟁이 생겼다. 절대 다수의 신임을 얻지 못한 채, 패리스 목사는 당선되었다. 그래서 분쟁의 불씨는 날이 갈수록 확대되어 갔다. 그 동안 신 개척지에서의 토지 분쟁이나 낯선 토착 지에 적응 안된 어린아이들의 죽음 등 크고 작은 불행으로 삶의 고통을 느껴온 세일럼 주민들은 분노의 화살을 소녀들과 내통하는 악마적 영혼에게 돌리고 어른들의 꾸중이 두려운 소녀들은 마술에 걸린 양 연극을 하게 되며 불행하게도 이는 사실인 것처럼 인정된다.

 마녀 사건의 발단이 된 소녀들의 숲 속에서의 춤과 의식은 초창기 청교도 문화와 남성 권위적 가부장제가 지배하는 세일럼 마을의 분위기에서는 명백한 파괴 행위이며 위험스러운 것이다. 욕망을 부자연스러운 것이라 이름짓는 청교도적 신권주의(theocracy) 문화는 소녀들의 단순한 놀이를 역겹고 범죄적이라 비난하며 그들을 이단자로 몰게 된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 하에서 이단적 행동을 한 여성은 신비로운 힘을 지닌 비합리적인 존재의 마녀로 해석되고 그들은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하는 두려운 대상이 되고 만다. 이 외에도 미지의 것으로서의 여성적 본능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는데 오토 와이닝거(Otto Weininger)에 의하면 그 심층의 두려움은 유혹적인 파멸의 심연, 무의식의 공포와 같은 것이다. 이 경우에 여성이 지은 죄란 여성들이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상상한 남성들의 소망에 따라 주지 못했었다7)는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소녀들이 한 밤중에 숲 속에서 한 의식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1692년 당시 마녀심판 기록에 의하면 두 명의 소녀가 미래의 남편의 직업을 알아내기 위해 달걀과 유리로 된 일종의 유희이자 실험을 시작하고 광기에 빠진 것으로 되어 있다. 달걀과 유리는 영국에서 민속 점을 보는 도구로 사용되었는데 달걀의 흰자위를 유리에 부어서 그 흰자위를 들여다보고는 마치 점쟁이들이 투명한 공을 들여다보듯 이 일종의 비젼(vision)을 보는 것이었다. 실제로 점을 보는 능력이 있었던 티튜바는 이 실험을 도운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8) 『시련』에서는 이러한 영국적 풍속 대신에 밀러의 언급은 없지만 부두(Voodoo)교의 춤과 의식을 흉내내는 소녀들의 유희장면으로 각색되어 있다. 티튜바가 불 위로 몸을 흔들며 중얼거리고 끓는 솥에 살아 있는 개구리를 넣으며 닭의 피를 소녀들에게 마시게 한 행동은 서인도 제도의 다신교인 부두교의 의식의 일종이다. 티튜바는 40대 중반의 흑인 하녀로서 패리스 목사가 목사 되기 전, 상인 노릇을 했던 바바도스에서 데려온 노예였다.

 미개척지의 정착을 위해서 엄한 규율과 통제가 필요했고 세일럼 마을 외부에 대한 정보가 빈약했던 주 정부의 신학적 권위자들은 이러한 이교도적 행동을 통일과 질서를 방해하고 도덕적 권위에 저항하는 혼란스러운 마녀의 힘으로 여기고 여성 능력의 위험을 감지하여 근거 없는 마녀들을 만들어 내었다. 경쟁적으로 뻗어 나가는 신 개척지들의 토양에서 마녀는 폭풍과 질병을 야기 시키며, 곡물을 훼손시키고 자손의 번성을 단절시키는 사나운 자연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캐로린 머천트(Carolyn Merchant)는『자연의 죽음: 여성, 생태학, 그리고 과학적 혁명』(The Death of Nature: Women, Ecology,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에서 뉴턴(Newton)적 세계관이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을 당시에 유럽과 New England 지방에서 소위 '마녀의 광기'가 발전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마녀는 과학적 합리성의 범위를 초월하는 신비로운 힘을 지닌 비합리적인 여성이었고 합리주의자들이 두려워하고 정복하고자 하는 다른 주변 세계를 상징하고 있었다.9)

 뉴턴과 데카르트(Descartes)식의 합리주의와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적 과학적 질서가 중시되던 중세 후기 세계관에서는 합리적인 세계를 남성의 영역으로 전제하고, 비합리적인 영역은 자연 혹은 여성의 영역으로서 그 세계는 남성의 세계 안에서 유지되어야 하고 만일 그것이 정상에서 벗어나면 정복되어야 한다는 가정을 한다. 남성은 여성을 우발적이고 유한한 자연의 존재로 볼 수 있으며 이것 때문에 여성을 증오하고 두려워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악한 타자로서의 '암컷'이나 마녀로서의 여성이라는 다양한 상투어가 생겨나고 '마녀공포'(witch scare)의 배경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는 남성이나 남성다움은 긍정적인 것 혹은 규범적인 것으로 세워지고 여성이나 여성다움은 부정적이고 비 규범적인 타자(the Other)로 간주된다.10) 즉 남성은 주체(the subject)이고 절대적인 존재(the absolute)인 반면 여성은 본질적인 존재와 대립되는 우연한 존재, 비본질적인 존재로서 유동성 있는 통제의 대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 개척자들의 집단 마을인 세일럼에서 그 동안 인종적 편견에 의한 야만적 대상으로 억압받아 왔던 신분의 티튜바가 제일 먼저 고발당하고 그녀에 의해 마녀 소동이 확대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백인 가정의 늙은 흑인 식모라는 신분으로 인해 가부장제 하의 백인 여성들과는 다른 이중의 억압을 겪어온 티튜바는 세일럼에서도 제일 먼저 조종되어야 하는 주변적인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그 최초의 공격을 한 대상이 다름이 아닌 함께 의식을 행한 백인 소녀들이라는 점은 흑인 여성이 당해야 하는 이중적 억압을 말해준다. 헤일 목사는 소녀들이 책임 회피를 위해 제일 먼저 지목한 티튜바에게 악마와 내통한다는 의심을 갖고 신학적 교리를 이용하여 자백을 강요한다.

 소녀들의 배신과 헤일 목사의 위협에 혼란 된 의식을 갖게 된 티튜바는 이 아이들에게 마술을 걸고 있는 악마를 보았다고 광기 어린 행동으로 말하며 헤일 목사는 티튜바를 하느님이 보내주신 선택된 도구라고 치켜세우며 마녀 고발을 유도한다. 공포와 광기에 휩싸이게 된 그녀는 자신이 악마의 사주를 받았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을 억압해 왔던 사람들이 악마와 함께 있었음을 고발한다. 처음에 자신들의 행동은 단순한 놀이였다고 주장한 애비게일도 티튜바의 기이한 행동과 헤일 목사의 반응에 자극을 받고 자신도 고발할 것이 있다고 하며 적대감을 가졌던 구디 오스번(Goody Osburn)과 브리지트 비숍(Bridget Bishop)이 악마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소리를 지른다. 결국 소녀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이해 받지 못하고 마녀로 몰릴 위기에 처해지자 집단적으로 세일럼의 신학적 권위를 역이용하여 거짓 광기의 연극을 하게 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 소녀들의 기이한 행동과 고발의 효과는 그들에게 억눌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기회가 된다. 즉 마녀 재판은 그들의 복수심을 정당화하는 수단과 욕망의 표출대상이 되고 만 것인데, 죠지 진 나단(Goerge Jean Nathan)은 소녀들의 히스테리를 그들이 상상해 왔던 마녀의 모습을 재현해 보고자 하는 욕망의 반복적 충동11)으로 풀이한다. 산드라 길버트(Sandra Gilbert)와 수잔 거버(Susan Guber)에 의하면 가부장적 사회는 실제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여성들을 병들게 한다고 관찰하여 자주 나타나는 질병으로 광장공포증, 건망증, 식욕부진, 실어증, 병적 게갈증, 히스테리아 그리고 일반적인 광기등을 열거하고 있다.12)

 루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는 여성의 광기적 행동은 여성이 남성 가부장제로부터 배제된 결과라고 말하며 가부장제가 여성에게 가하는 권위적 억압에 사로잡혀 여성은 조용히 침묵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중얼거림을 하고, '작은 남자'(a lesser man)들로서 그녀의 욕망을 나타낸다고 풀이한다. 후자에 있어 남성을 모방하는 여성은 이리가레이에 의하면 히스테리의 형태이다.13) 소녀들의 집단적 광기는 세일럼의 신학적 권위를 모방하는 것이며 강요된 고백에 대한 왜곡된 저항의 형태이기도 하다. 폐쇄적 청교도 문화와 보수적 남성주의 문화가 복합적으로 원인이 된 광기는 마치 핵의 연쇄반응과 같은 엄청난 위력으로 퍼져 세일럼 주민들은 마녀사냥의 흥분에 빠지게 된다. 고발당한 사람에 의해 다른 사람의 이름이 지명되고 심문은 또 다른 고발로 이어지며 강요된 고백을 하게 된다. 이 고백은 왜곡된 종교적 참여로 합쳐지고 공포에 찬 광기로 변하는 것이다. 세일럼 주민들에게 마녀사냥은 오랫동안 품어온 이웃에 대한 증오심을 공공연히 나타낼 수 있는 기회였고 박애를 중시하는 성경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웃을 마녀라고 모함한 다음 그의 땅을 싼값에 손에 넣어도 완벽한 정당행위라고 생각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불행한 자들이 행복한 자들에 대해서 품고 있는 의혹과 질시가 일반적인 보복 행위로 폭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집단적 광기의 횡포 속에서 주인공 프락터는 애비게일의 보복심에 찬 광기에서 희생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상당히 직선적이고 지각 있는 농부인 프락터는 전통적 관점에서 볼 때 영웅적이고 영향력 있는 지도자라기 보다 분명 보통 사람이다. 그는 결코 영웅적 행동에 탐닉하려고 하지도 않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주의깊고 신중하게 거짓 자백까지도 고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척 잘못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자백서에 서명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이라는 완벽한 자존에의 길을 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세일럼이라는 사회는 프락터로 하여금 그 사회가 지닌 특수한 이미지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만 그는 완강한 거부를 통해 스스로 자유를 얻는다. 따라서 윌리 로먼(Willy Loman)처럼 혼란 되어 있는 인물을 비극적 주인공으로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사람들도 이 강인하고 책임감 있는 프락터를 적어도 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내와 세 아이를 가진 그는 청교도 정신이 강한 세일럼에서 하녀로 일했던 애비게일과 간통을 저지른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는 아직도 열정을 갖고 자신을 사랑하는 애비게일에게 그들의 관계는 허위이고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하며 그녀를 '창녀'로 몰아 붙인다. 프락터는 성적으로 성숙한 애비게일의 열정에 대한 두려움과 그녀의 욕망에 대응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의해 그녀를 무질서한 창녀와 같은 존재 혹은 비열한 행위를 저지르고 처벌받아야만 하는 탐욕스러운 유혹자로 모욕함으로써 그녀로 하여금 복수에 찬 광기를 일으키게 만든다. 애비게일은 프락터의 아내를 마녀로 지목하는 연극을 꾸미고 마침내 아내를 구하기 위해 프락터는 그녀와의 불륜을 실토함으로써 애비게일의 복수 극을 증명하려 하지만 남편을 구하기 위한 아내 엘리자베스(Elizabeth)의 거짓말로 오히려 프락터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결국 그는 위증죄와 하녀 메어리(Mary)에게 마술을 건 혐의로 투옥되고 고백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교수형을 당하게 된다.

 프락터와 애비게일의 관계는 밀러가 프락터라는 비극적 인물을 창조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이지만 헨리 포프킨(Henry Popkin), 마설 에매(Marcel Ayme'), 제프리 메이슨(Jeffre D. Mason)같은 비평가들은 애비게일을 광기로 몰아간 이유가 부분적으로 프락터에게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프락터의 성격적 결함은 그녀와의 부정이 아니라 자만심으로 보고 있다.14) 즉 공적인 시련의 측면에서 볼 때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위해 거짓 고백과 서명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정직성과 영웅심은 인정된다 하더라도, 애비게일과의 개인적인 난관에서 나타난 사적인 도덕성의 문제는 애매 모호하게 남는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드 모쓰(Leonard Moss)는 그의 논문 『한 사회극』(A Social Play) 속에서 작품 『시련』은 "작가의 주제가 집단적 히스테리(His subject was mass hysteria.)15)임을 밝히고 있는데 사리 분별이 있는 인물들, 즉 댄포스, 헤일 목사, 호손(Hawthorne) 판사 등이 공공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미명 하에 중대한 악행을 수행하는 과오를 이 작품은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청교도의 신앙에 철저히 몸을 맡기고 있는 인물들이다. 퓨리터니즘에의 광적인 헌신이 악마를 제거한다는 본래의 원리에서 이탈하여 결과적으로 악마의 사도로 전락하고 만 사실에 대하여 밀러는 프락터를 통하여 냉엄한 항의를 제기하고 있다.

 사건 초기 마녀사냥을 주도했던 헤일 목사는 점차 애비게일과 세일럼 마을 주민들의 이기적인 광기를 발견하고 재판의 부당성과 모순성을 지적하는 변화된 인식을 갖게 된다. 자신이 마녀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살려주고 끝까지 부인하는 사람은 처형하는 불합리한 재판장 댄포스의 비리를 보고 오히려 그는 마녀로 고발당한 자에게 살아 남기 위해서 거짓 고백을 하라고까지 권유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녀심판의 터무니없음을 깨닫고 광기를 잠재우려는 헤일과는 달리, 댄포스는 자신의 주장과 권위를 관철하기 위해서 결코 원칙이나 주장을 바꾸지 않는 권력의 광기를 보여주는데, 이는 밀러가 암시하고자 하는 미국 하원 반미활동 조사위원회의 횡포와 유사한 것이다.16)

Ⅳ.

 밀러는 이 작품에서 애비게일과 푸트남(Putnam)으로 대표되는 세속적인 욕심에서 유발되는 개인적인 범죄보다는 패리스 목사, 댄포스 부지사, 호돈 판사등으로 대표되는 권력층이 저지르는 제도적 범죄를 더욱 증오하고 폭로해야 할 악(惡)으로 인간적 양심에서 고발하고 있다. "Is the accuser always holy now?17)라는 항의와 "Is every defense an attack upon the court?"(292)라는 해일 목사의 항의를 "I cannot pardon these when twelve are already hanged for the same crime."(317)이라는 댄포스 부지사의 답변으로 묵살하는 데서 그의 성격의 한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프락터와 댄포스는 다음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반대의 입장에 서서 서로의 정당함을 주장한다.



DANFORTH: I judge nothing. Pause. He keeps watching Proctor, who tries to meet his gaze. I tell you straight, Mister--I have seen marvels in this court. I have seen people choked before my eyes by spirits; I have seen them stuck by pins and slashed by daggers. I have until this moment not the slightest reason to suspect that the children may be deceiving me. Do you understand my meaning?

PROCTOR; Excellency, does it not strike upon you that so many of these women have lived so long with such upright reputation, and--(290-91)



 댄포스 부지사는 마녀의 존재를 믿고 그 마녀들의 혼령에 의해서 사회가 위협을 받고 혼란에 빠져 있다고 여기며 이러한 혼란이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반면, 프락터는 마녀의 존재를 부인하면서 단지 인간들의 복수와 저주가 마을을 들끓게 함으로 이러한 혼란은 그 허위를 제거함으로써 만이 사라 질 수 있다고 믿는다. 죤 페레스(John H. Ferres)는 "Proctor rebels against the esssentially totalitarian view of society that Danforth and Hawthorne uphold.... Proctor represents the view of society held by enlightenment thinkers.18)라고 지적하면서 댄포스와 프락터 사이의 이와 같은 대립적 주장을 전체주의 사회관과 계몽주의 사회관의 싸움으로 보고 있다. 두 사람의 이러한 상반적인 개념은 모두 자신들의 일이 정당한 것이라는 믿음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두 개념이 대립했을 때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댄포스에게는 법정과 신정체제에 대한 공격이 곧 신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지만 반대로 프락터에게는 신정체제가 곧 신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신정체제는 신의 창조물인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호손 판사 역시 "a bitter, remorseless Salem judge"(286)라고 밀러가 설명하고 있듯이 댄포스와 같이 잔인한 악(惡)과 권위의 상징으로 마타 코리(Martha Corey)를 심문하는 다음의 장면에서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HAWTHONE'S VOICE: Now, Martha Corey, there is abundant evidence in our hands to show that you have given yourself to the reading of fortunes. Do you deny it?

MARTHA COREY'S VOICE: I am innocent to a witch. I know not what a witch is.

HAWTHONE'S VOICE: How do you know, then, that you are not a witch?

MARTHA COREY'S VOICE: If I were, I would know it.

HAWTHONE'S VOICE: Why do you hurt these children?

MARTHA COREY'S VOICE: I do not hurt them. I scorn it!(285)



 호손 판사는 마녀가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마타 코리에게 그렇다면 그대가 마녀가 아닌 것을 어떻게 아는가라는 식으로 답변할 수 없는 궤변적인 심문으로 자백을 강요하여 이것은 범죄사실을 찾아내기 위한 심문이 아니라 강압적인 재판에 불과하다

 작품 『시련』의 경우 어떤 특정한 형태의 사회와 역사적 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 그 심원성을 획득하고 있는 까닭이 사회적 요구에 응하여 자아를 깊숙이 그 사회 속으로 참여시키는 프락터의 성격 창조의 성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프락터는 계속해서 성격발전을 할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결단코 통속극에서 볼 수 있는 판에 박은 듯한 개성이 없는 전형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비극적 주인공이 흔히 가지고 있는 인물로 철두철미하게 그를 몰락시키는 원인이 된 자신의 인간적 결점과 그러한 자신에게 감당할 수 없는 힘으로 압도해 오는 사회의 위력을 잘 의식하고 있다. 결국 프락터의 전락과 파국은 관객에게도 무한한 공포와 전율, 그리고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 하고 자신을 직시할 줄 알면서도 스스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는 그에게서 관객은 더욱 큰 비극감을 느끼게 한다.

 성격발전이 현저한 'round character'로서 프락터를 등장시킨 것에 대하여 제럴드 윌즈(Gerald Weales)는 밀러가 주제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인물들을 희생시켰다19) 며 비판적이기도 하다. 반면에 에드워드 뮤레이(Edward Murray)는 적어도 『시련』의 등장인물들이 극의 행동과 주제에 관여하여 방해가 되지 않는다20) 고 반박하고 있다. 한편 필립 힐(Philip Hill)은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The characters are entirely adequate for the purposes for which Miller designed them, and no immutable law requires that every play depend upon charaterization for its success, but certainly there is some justice in suggesting that The Crucible exhibits only a moderate degree of character development.21)



 『시련』에서의 강력한 힘은 바로 이와 같은 성격의 발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최소한 밀러가 이 작품에서 의도했던 바를 나타내는데 있어 인물들이 적절했다는 것이다. 벤자민 넬슨(Benjamin Nelson)은 『세일즈맨의 죽음』에서의 주인공 윌리 로먼과 견주어 죤 프락터를 보다 비극적인 인물로 간주하면서 "It [Proctor's story] exhibits more clearly the possibity of high tragedy."22)라고 지적한다.

 비극에 대한 논의에서 사회의 부당함을 인식하고 이에 맞서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주인공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밀러의 견해로 볼 때 죤 프락터야 말로 작가 밀러가 생각하는 비극개념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다. 그는 간음으로 인한 죄의식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선량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일럼의 악(惡)에 도전하여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 보려고 항거하다가 목숨을 버린다. 밀러는 이러한 경우 부당한 사회의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비극적 결함으로 파악한다. 밀러는 비극적 결함을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존엄성에 대한 도전이나 자신의 정당한 신분에 대한 도전과 직면했을 때 수동적인 채로 그냥 있을 수 없다는 본연의 자세로 본다.23) 밀러의 이러한 비극개념에 충실한 프락터에게서 우리는 비극적 감정을 맛볼 수 있다.

 주인공 프락터가 처음에는 자신의 억울한 처지에 대하여 분개하지만 점차 자신의 고통이 세일럼 마을 전체의 좌와 관련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한때 '고백'하고 살아남을 결심을 한다. 그 이유는 그 자신에 내재한 죄를 인정하고 자신이 순교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녀 재판에서의 '고백'이란 마녀와의 교제를 고백하는 것으로서 죄의 회개를 의미하기 때문에 처형되는 것은 면하지만 17세기 청교도 사회에서는 개인의 고결성과 존엄성의 완전한 상실을 의미했다. 더구나 고백할 때 마녀와 교제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타인의 생명과 고결성마저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프락터는 자신의 이름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고백서를 찢고 죽기로 결심한다.

 프락터는 그의 사회가 그에게 강요하는 율법을 거부하면서 죽음을 택한 인물이기에 우리들의 사회의식에 깊은 충격을 준다. 그는 적어도 특정한 사회를 초월한 보다 큰 인류의 책무를 짊어지고 있다. 인류의 시련에 인간은 외면할 수 없다는 밀러의 극작가로서의 신념이 프락터라는 인물 속에 구체화된 것이다. 교수형으로 처형되기에 앞서 프락터는 많은 깨달음을 얻고, 혹은 갈등하고 혹은 체념하는 동안 비로소 진정한 자아인식에 이른다. 댄포스의 권고를 받아 아내 엘리자베스를 구하려는 생각만 한다면 그럴 수도 있었지만, 프란시스(Francis)와 자일즈(Giles)를 보는 순간 갈등에 사로잡힌다. 프락터의 자의식 속에는 이웃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이 담겨 있다.

 프락터는 진실한 이웃의 편에 서기로 결심하고 애비게일의 거짓된 마술을 고발한다. 그것이 비록 자기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결과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댄포스의 부당한 회유책에 응하기를 거절하며 그는 "I--I think I cannot [drop this charge]. These are my friends. Their wives are also accused--"(291-92)라고 말한다. 법원의 뜻에 반대 입장을 택하는 자는 마귀의 제자로 여겨지기 때문에 프락터는 즉시 체포되고 사형선고를 받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세일럼의 재판제도가 얼마나 불의하고 악(惡)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되며, 그들에게 심판받아 처형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미약함과 무기력함도 인식하게 된다.

 또한 그들로부터 구차하게 생명을 구걸하여 연장하는 것은 오히려 그의 고귀한 이름에 욕을 돌리는 것임도 깨닫고 자존을 지키기 위해서는 잠시 흔들렸던 생각을 고쳐 허위 고백서에 서명할 수 없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마지막 결정을 내리기 전 프락터는 인간으로서의 갈등과 고뇌에 젖어 "God in Heaven, what is John Proctor?"... "I am John Proctor! You will not use my name! I have three children--how may I teach them to walk like men in the world, and I sold my friends?"(324)라고 외친다. 이 양심의 작은 소리는 양심과 결백을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자식들의 미래의 양심을 위하여 교수대에 설 것을 결심한다. 밀러는 작품 『시련』을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해 명백한 해답을 주고 있다. 그 해답은 맥카시즘으로 혼란에 빠진  미국 현대사회의 암흑을 해결하는 답변이 되기도 하고, 현대사회의 억압 속에서 행방불명이 된 개인적 자유의 쟁취를 위한 격려의 소리가 되기도 한다.

 프락터는 살아 남기 위해서 친구와 이웃을 팔 수는 없다. 프락터로서는 친구를 팔고 살아 남아서 자식들에게 떳떳이 세상을 살도록 가르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예를 지키고 인간의 고귀한 품성을 지키기 위해서 차라리 교수대의 죽음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차라리 내 영혼을 가져갈지언정 내 이름과 내 명예는 지켜야 하겠다며 다음과 같이 처절하게 외친다.



 Because it is my name! Because I cannot have another in my life! Because I lie and sign myself to lies! Because I am not worth the dust on the feet of them that hang! How may I live without my name? I have given you my soul; leave me my name! (328)



 이름은 자아를 밝혀주고 인간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며 사회 속에서의 개인의 위치를 결정해 준다. 그래서 프락터는 이름없이는 살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하나는 목숨을 유지하면서 가정적 평화를 누리는 길로 값진 죽음과 민중의 분노를 헛되이 하고 양심을 포기하며 부정한 악(惡)의 세력들을 정당화시켜 주는 길이다. 다른 하나의 길은 사회정의에 충실한 길로 순결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을 수 있지만 가정의 행복과 자신의 생명이 희생되어야 하는 파국에 직면한 길이다. 하지만 프락터는 끝내 후자의 길을 택한다.

 죽음을 앞에 두고 거짓 고백을 강요당할 때 그의 울부짖음은 자신의 정체(identity)를 되찾고 사회에서의 위치를 재확인하려는 몸부림이다. 양심보다는 생명의 귀중함을 깨닫고 프락터가 드디어 자백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댄포스, 호손 등은 몹시 기뻐하며 서명할 문서를 내놓지만 프락터는 서명을 거부한다. 그는 자백으로 족할 일이지 이름이 더럽혀 지도록 할 수는 없다고 댄포스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비통하게 절규한다.



PROCTOR: You came to save my soul, did you not? Here! I have confessed myself; it is enough!

DANFORTH: You have not con--

PROCTOR: I have confessed myself! Is there no good penitence but it be public? God does not need nailed upon the church! God sees my name; God knows how black my sins are! It is enough!

DANFORTH: Mr. Proctor--

PROCTOR: You will not use me! I am no Sarah Good or Tituba, I am John Proctor! You will not use me! It is no part of salvation that you should use me!(327)



 거짓 고백을 통해서 생명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죽음을 택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프락터로 하여금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자신의 아내 엘리자베스와의 관계이다. 이전에 애비게일과의 간음으로 인하여 부부간의 신의가 상실된 상태에 있는 개인이 사회적 양심문제와 싸워나가야 하는 어려움을 프락터는 죽음의 순간에 대면하고 있었다.

V.

 밀러는 『시련』에서 프락터의 이웃과 친구들이 지니고 있는 종교적 관념들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다. 그는 실존주의적 입장에서 인간은 누구나 그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그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서도 마땅히 책임져야 한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프락터의 이웃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확신하고 죽어 가지만 프락터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프락터는 그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지 종교적 교리를 위해 순교하는 것은 이니다. 아내인 엘리지베스도 그의 죽음이 그에게 영원한 곳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프락터 자신은 교수대로 향하면서 천국이나 신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결국 프락터 자신은 천국이나 신에 대한 신앙의 순결을 위해 교수대에 오른 순교자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자유 곧 양심의 자유와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권리의 수호를 위해 순절한, 자아인식과 사회의식이 투철한 한 인간성의 소유자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비극적 주인공의 환상으로부터 깨어나 자아의 회복과 확신을 얻는 과정을 통하여 독자나 관객에게 전달되는데 이러한 깨달음에 뒤따르는 재앙이야 말로 우리에게 비극적 감정을 일깨워주는 요소이다. 프락터는 마지막 순간 겁에 질려 그의 손에 매달려 우는 아내 엘리자베스를 "Give them no tear! Tears pleasure them! Show honor now, show a stony heart and sink them with it."(328)라고 달래며 눈물을 거두고 자존을 지켜주기를 당부한다. 프락터는 자신의 정당한 자아주장이 가족에 의해 의연히 계속될 새로운 삶에서 참된 사랑으로 결실하여 영속되게 해 줄 것을 믿고 갈망한다.

 프락터의 죽음은 강압적인 법에 저항하고 사회의 위선과 허위, 부패한 법 질서에 대항하여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한다. 프락터는 자신의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 임신한 아내와 자식들을 남겨 놓고 교수대로 향할 때 전형적인 현대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프락터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하여 Raymond Williams는 "Proctor in The Crucible, had died as an act of self-preservation: preservation of the truth of himself and of others, in opposition to the lies of the persecuting authority." 24) 라는 지적처럼 그의 죽음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여준다. 『모두 나의 아들들』의 주인공 죠 켈러(Joe Keller)와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 윌리 로먼의 죽음이 각각 비인간적이고도 냉혹한 사회와 잘못된 가치관 및 자신의 그릇된 꿈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죽음인 반면에 프락터의 죽음은 스스로 보다 더 가치있는 것을 위해 택한 당당한 승리의 죽음이다.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 개인의 도덕적 양심에 의한 자유의지에 큰 희망을 걸고 있는 점을 죤 프락터의 결단력 있는 행위를 통해서 작가 밀러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프락터가 무참히 파멸되어 가는 사회적 암흑의 깊은 수렁은 개인의 갸냘픈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숙명적 상황이어서, 그 상황과 운명에 타협하거나 체념하는 태도를 버리고 그 두꺼운 악몽의 벽과 철저하게 대결함으로써 그 상황과 운명을 초월해 보려는 의지와 용기 그리고 그런 행위의 가능성을 프락터를 통하여 보여 준 점이 바로 이 작품을 사회적 문제작으로 성공시킨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비극적 인간상들이 산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프락터에게 지나치게 그 비극성이 집중되어 있는 점과 이들 비극적 인간상들이 인간의 심리적 갈등의 측면에서 구축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 아직도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은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불신시대의 극심한 시련을 이겨내는 확실한 한 가지 처방을 배울 수 있고 현실에 밀착한 한 극작가의 준엄한 고발 정신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밀러는 이 『시련』을 통하여 미국인들에게 쉽사리 상기될 수 있는 세일럼의 마녀재판의 소재를 교묘하게 현대사회의 긴장감 속에 되살려 상상적 공포심에 있어서의 히스테리아와 이데오르기를 불러 일으켜 숨막히는 광신적 세계 앞에서 지성인의 무력함을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시련』에 나타난 광기의 씨앗은 가장 억압받는 자에서부터 억압을 가하는 권력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으로 심어져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세일럼의 마녀사냥은 가시적으로는 흑인 노예 티튜바를 비롯한 소녀들의 집단광기(mass hysteria)와 세일럼 주민들의 이기적 보복 전으로 전개되지만, 이러한 광기를 간접적으로 야기시키고 억울한 희생을 막지 못한 것은 마녀색출의 무모한 동기와 본질을 잃어간 권위적인 재판에도 있는 것이다. 진실과 허구를 규명하지 못한 채 신학적 교리와 정치적 이기심에 사로잡힌 주 정부 재판부의 경직된 권력의 광기는 역사상 가장 우매한 사건을 막지 못하고 확대시키고 만 것이다.

 프락터는 많은 고난과 고통스러운 회의를 거치고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깨닫게 되며 죽음으로서 진실을 수호했다. 죽음 바로 직전에 자신의 내부에 숨겨진 일말의 선(善)함을  발견하고 두려움 없이 교수대로 향하는 프락터의 당당한 모습에서 우리는 자아에 대한 확신에 찬 인간적 존엄성을 느끼게 된다. 결국 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인간은 타인이 일으킨 광기의 희생자가 되거나 타인을 광기로 몰아 넣을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시련』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마녀사냥의 함정을 예고하고 있다. 학문과 지식이 그 어느 때보다 분화되어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는 새로운 광기의 유형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세일럼의 마녀사냥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Bibliography

Beauvoir, Simone De. The Second Sex. trans. & ed. H.M. Parshley. New York:Alfred A.Knof, Inc., 1952.

Donovan, Josephine. Feminist Theory. New York: Frederic Ungar Publishing Co., 1985.

Hansen, Chadwick: "The Metamorphosis of Tituba." The New England Quarterly 47(March, 1974).

Ferres, John H. "Introduction." The Twentieth Century Interpretation of The Crucible: A Collection of Critical Essays. ed. John H. Ferres.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Inc., 1972.

Gilbert, Sandra M. & Susan Guber. The Madwoman in the Attic. New Haven &    London: Yale UP, 1979.

Hill, Philip G. "The Crucible: A Structural View." Modern Drama 10(December, 1967).

Irigaray, Luce. Sexual Textual Politics. London & New York: Methuen & Co., Ltd., 1985.

Kalem, T.E. "The Ethos of Courage." Time 99(May 15, 1972).

Kim, Jong-sun. Arthur Miller: Recognition of Self and Society. Keimyung UP, 1982.

Martin, Robert. "Arthur Miller's The Crucible: Background and Sources." Modern   Drama 20(September, 1977).

Miller, Arthur. "The Crucible." Arthur Miller's Collected Plays: Vol I. New York: The Viking Press, 1979.

            . "Tragedy and the Common Man." The Theater Essays of Arthur Miller. ed. Robert A. Martin. New York: The Viking Press, 1978.

Moss, Leonaed. "A Social Play." Twentieth Century Interpretation of The Crucible: A  Collection of Critical Essays. ed. John H. Ferres.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Inc., 1972.

Murray, Edward. " Structure, Character, and Theme in the Plays of Arthur Miller." diss. Univ. of Southern California, 1966.

Nathan, George Jean. The Theatre in Fifties. New York: Alfred A Knopf, 1953.

Nelson, Benjamin. Arthur Miller: Portrait of a Playwright. New York: Mckay Co., 1970.

Popkin, Henry. "Arthur Miller's The Crucible." College English 26(1965).

Schlueter, June and James K. Flanagan. Arthur Miller. Frederic Ungar Publishing Co., 1987.

Warshow, Robert. "The Liberal Conscience in The Crucible." Arthur Miller: A Collection of Critical Essays. ed. Robert W. Corrigan. 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Inc., 1969.

Weales, Gerald. "Arthur Miller: Man and His Image." The Crucible: Text and Criticism. ed. Gerald Weales. New York: Penguin Books, 1980.

Weininger, Otto. D.H. Lawrence and Feminism. Cambridge: Cambridge UP, 1984.

Williams, Raymond. Modern Tragedy. Stanford: Stanford UP, 1986.

Abstract

Mass Hysteria of Witchhunt in Arthur Miller's The Crucible

Kim, Jeong-soo



 In the early 1950's so-called McCarthyism created a stir in the political and social worlds. As an intellecrual, Arthur Miller stood at the forefront of opposition to McCarthyism, which ignored the basic rights of the people and was unsparing in creating great mistrust between friends and associates. His view on such are structuralized through The Crucible. The location of this play is the witchhunts and trials of Salem, Massachusetts in 1692, which left a great blemish on the history of America's colonial period.

 The main character of The Crucible is a 30 year-old independent farmer named John Proctor, a robust man typical of the frontier, having an incorruptible, and strongly independent personality. While he once committed adultery while Abigail worked as his maid, he now has become a completely decent and exemplary father. Throughout the witch-trials, he remains firm in his convictions, and in the end chooses death, leaving behind his pregnant wife and children. As a man that chooses death while rejecting the laws forced on him by society, Proctor deeply shocks the senses of our society. At the very least, he bears the responsibility for all mankind, thus surpassing his own specific society.

 Miller's conviction as a playwright that man cannot escape from the ordeals of mankind is embodied in the man named John Proctor. Having lived his life by betraying his friends, John Proctor cannot teach his family to live eqitably. So in order to maintain his own honor and to maintain the noble character of mankind, he chooses to suffer death on the gallows. John Proctor cannot find a reason to live when his integrity and identity are trampled down. He considers self-respect as being the most important principle of life.

 In the end, John Proctor realized his dignity as a man having indured much torment and painful skepticism, and through death he protects the truth. He discovers a touch of goodness hidden within himself just before his death, and we feel the human dignity which fills the conviction he has of himself as we watch the dignified face of John Proctor marching off to the gallows.

 The Crucible is set in the Puritanistic period of America during the latter 17th century, and although its contents are about  the religious witchtrials of the time, the play freshly portrays themes such as the greed, discord and enmity of men entangled in land and power and the love and jealousy between men and women which extend beyond the period. Thus the play has been extolled all over the world and continues to be performed, due to the fact that it fulfills the universality and eternal nature of theme of human evil, causing it exceed the limits of time.

 Even though The Crucible intends to portray the discord between people's selves and their actions in extreme situations, not only the society of Salem or American society ruled by McCarthyism, but also inhumane societal conditions in which the determination of humans is demanded can be the background for this play. Miller, who felt fear and rage not only at tyranny of McCarthyism but also at the faces of modern American people who throw away their conscience like old shoes, wished to portray on the stage how tyrannical political forces, the enlightened public or some fanatical religious groups can degrade the feeble common man.

* 서양어대학 영어학부 교수

1) Arthur Miller, "Introduction," to the Collected Plays(New York: The Viking Press, 1979), pp. 31-32.

2) Robert A. Martin, "Arthur Miller's The Crucible: Background and Sources," Modern Drama 20(September, 1977), p. 279.

3) June Schlueter and James K. Flanagan, Arthur Miller(New York: Frederic Ungar Publishing Co., 1987), pp. 72-73.

4) Robert Warshow, "The Liberal Conscience in The Crucible," Arthur Miller: A Collection of Critical Essays, ed., Robert W. Corrigan(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Inc., 1969), p.111.

5) Arthur Miller, op.cit., p.41.

6) T.E. Kalem, "The Ethos of Courage," Time 99(May 15, 1972): 19.

7) Otto Weininger, D.H. Lawrence and Feminism(Cambridge: Cambridge UP, 1984), p.84.

8) Chadwick Hansen, "The Metamorphosis of Tituba," The New England Quarterly 47(March, 1974): 3-12.

9) Josephine Donovan, Feminist Theory(New York: Frederic Ungar Publishing Co., 1985), p. 29.

10) Simone De Beauvoir, The Second Sex, trans.& ed., H.M. Parshley(New York: Alfred A. Knopf, Inc., 1952), pp. xiii-xvi.

11) George Jean Nathan, The Theatre in Fifties(New York: Alfred A. Knopf, 1953), p. 106.

12) Sandra M. Gilbert & Susan Guber, The Madwoman in the Attic(New Haven & London: Yale UP, 1979), p. 53.

13) Luce Irigaray, Sexual Textual Politics(London & New York: Methuen & Co., Ltd., 1985), p. 135.

14) Henry Popkin, "Arthur Miller's The Crucible," College English 26(1965), pp.144-45.

15) Leonard Moss, "A Social Play," Twentieth Century Interpretation of The Crucible: A Collection of Critical Essays, ed., John H. Ferres(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Inc., 1972), p. 37.

16) Jong-sun Kim, Arthur Miller: Recognition of Self and Society(Keimyung UP, 1982), pp. 81-82.

17) Arthur Miller, " The Crucible," Arthur Miller's Collected Plays: Vol. I(New York: The Viking Press, 1979), p. 281. 이후 text의 pagination은 인용문 뒤의 (   )속에 넣음.

18) John H. Ferres, "Introduction," The Twentieth Century Interpretation of The Crucible: A Collection of Critical Essays, ed., John H. Ferres(Englewood Cliffs, N.J.: Prentice-Hall, Inc., 1972), p. 10.

19) Gerald Weales, "Arthur Miller: Man and His Image," The Crucible: Text and Criticism, ed., Gerald Weales(New York: Penguin Books, 1980), p. 343.

20) Edward Murray, "Structure, Character, and Theme in the Plays of Arthur Miller," diss., Univ. of Southern California, 1966,  pp. 152-60.

21) Philip G. Hill, "The Crucible: A Structural View," Modern Drama 10(December, 1967): 313.

22) Benjamin Nelson, Arthur Miller: Portrait of a Playwright(New York: Mckay Co., 1970), p. 173.

23) Arthur Miller, "Tragedy and the Common Man," The Theater Essays of Arthur Miller, ed., Robert A. Martin(New York: The Viking Press, 1978), p. 4.

24) Raymond Williams, Modern Tragedy(Stanford: Stanford UP, 1986), p. 104.



http://home.pufs.ac.kr/~llip/these/15/A5.htm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