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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6 (20:48) from 84.173.85.208' of 84.173.85.208' Article Number : 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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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해명한다





뇌 과학--스티븐 로즈 인터뷰

No 1951 Socialist Worker(영국) 2005년 5월 14일

뇌 과학


마음을 해명한다


스티븐 로즈(Steven Rose) 교수는 45년 동안 뇌를 연구해 왔다. 그가 자신의 최신작 《21세기의 뇌 The 21st Century Brain》와 관련해 바이런 스와미(Viren Swami)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뇌에 관한 새로운 책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가?


이 주제에 관한 책은 이미 엄청나게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뇌를 다루는 일련의 기술이 발달하는 방식이 나는 무척 걱정스럽다. 나는, 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사용되는 신경 이미지 구현 기술이나 정신 활성 약물 사용례의 일부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다. 차라리 나는 늦기 전에 빨리 이들 문제에 대해 공공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더불어서 나는, 뇌를 연구하는 신경과학의 위력, 다시 말해 의식과 같은 것들을 설명하고 매우 복잡한 사회적 과정을 분자와 세포 수준의 속성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동료 연구자들 일부의 과대 선전도 격파하고 싶었다.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발견해 낸 것과, 신경과학이 마음과 뇌에 관해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요약하고 있다. 사회적·정치적·역사적 이해가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과 대립하는 의미에서 말이다.



당신은 우리가 바야흐로 신경과학의 혁명기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우리가 신경학 기술의 혁명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수준에서, 다시 말해 유전학을 이용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이미지 구현 기술이 제공한 뇌 관찰 수단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기술이 탄생했다. 이것들은 자체로 엄청나게 흥미진진하지만 잠재적 곤란도 일부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디펜스 어드밴스 리서치 프로젝트 에이전시(Defence Advance Research Project Agency)는 현재 뇌의 사고 과정을 들여다보려고 시도하는 신경 이미지 구현 기술에 자금을 대기 시작했다. 궁극적으로 사고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미국에서는 뇌 지문 채취(brain fingerprinting)라고 하는 기술이 특허를 받았다. 그 회사의 웹사이트에 따르면, 누군가가 테러리스트 양성소에 갔다 왔는지를 확인하는 데 이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헛소리이다. 그러나 기술이 틀렸다는 사실이 그 기술이 사용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미 사람들은 새로운 정신 화학 물질의 발전상에 익숙하다. 나는 재학중인 아동에게 리탈린(Ritalin) 같은 약물을 처방하는 현실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이 약물 처방 건수는 1990년 한 해 약 2000건에서 몇 년 전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한 해에 15만 건으로 대폭 늘었다.


리탈린을 처방받는 아이들은 주의력이 결핍된 과민성 행동 장애(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이 질병은 애정이 결핍되어 있거나 붕괴된 가정의 계급 구성원인 아이들에게서 나타난다고 한다. 아이들이 이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분명히 뇌에 무언가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고, 이 문제를 리탈린을 사용해 해결할 수 있다는 가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문제를 야기하는 사회적 논점을 다루지 않고 사람의 뇌를 바꾸려고 하는 이런 시도가 신경과학 기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신경과학의 현 단계를 설명해 달라.


신경과학은 과학에서 가장 열띤 분야 중의 하나다. 매년 약 3만 명의 신경과학자들이 미국 신경과학자 연차 총회를 통해 모인다. 신경과학은 대규모로 팽창하는 학문 분야로, 수억 달러가 투입되고 있다.


당연히 엄청난 양의 자료가 축적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온갖 정보를 통합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조리가 서는 이론을 결여하고 있다. 우리는 유전자 수준에서 알아낸 지식과 시스템 수준에서 파악한 지식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맥락에서 뇌를 이해해야 한다는 특정한 전통이 구 소련에서 극적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1920년대와 1930년대로 스탄린주의가 폭압 정치를 시작하기 전이었다.


레프 비고츠키(Lev Vygotsky), 표트르 아노킨(Pyotr Anokhin) 같은 사람들의 개척자적 관념은 오늘날 완전히 실종되었다. 마치 우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간섭성 체계를 다루고 있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음과 같은 우스꽝스런 대조 관념들, 곧 본성과 양육(nature/nurture), 마음과 뇌(mind/brain), 뇌와 인체(brain/body)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수많은 동양의 전통과 마륵스주의 전통에서 더 명확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전통들은 결과보다는 과정에 주목한다. 반면, 서구의 과학 전통은 주로 분자나 세포 같은 것들에 집착한다. 그러나 생명의 독특함은 동력학(dynamics)이다. 우리의 뇌 처리 과정이나 신체와 관련해서 고정적 안정성을 갖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만약 여러분이 몇 주 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을 보게 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그를 인식할 것이다. 그 사이에 그의 몸을 이루는 모든 분자가 수억 번 바뀌고, 와해되고, 재합성되었겠지만 말이다.


마륵스주의자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한 말, 곧 자연의 과정은 단순한 공간에서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변화한다는 명제를 여러분은 책에서도 보았을 것이다. 이 말은 사고 과정뿐만 아니라 종으로서의 인간 진화는 물론이고 특정한 개인의 변화에도 적용된다.


나는 최근에 의식에 관한 책을 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의식이 단일한 실재인 것 마냥 이해하고 있었다. 의식인 전 역사에 걸쳐 언제나 동일한 실재이며, 사람들은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과 관련해 상이한 관념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날의 의식이 빅토리아 시대 영국, 플라톤의 그리스, 고대 이집트의 의식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싶다. 의식은 사회적 맥락에서 부상한다. 그것은 역사와 사회와 문화와 기술에 의해서 틀 지워지고 변형된다. 우리가 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국 철학자들이 끊임없이 제기하는 협소한 환원주의의 문제들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우리는 선사 시대도 살펴보아야 한다. 뇌를 진화적 맥락 속에 위치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내 책의 많은 부분이 뇌의 출현과 행위 능력에 관한 것이다. 이것들이 인간의 뇌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구체적 개인의 발달 양상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갓난아이는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인간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총체적 의미에서 더 광범위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수반해야 한다. 생후 처음 몇 년 동안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어린이가 성장하고 발달하면서 뇌에 그 과정이 반영된다.



당신 책에 소개된 발달 체계 이론(developmental systems theory)을 설명해 달라.


자율적 형성(autopoiesis)이라고도 불리는 이 이론의 개념은 유기체가 스스로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유기체는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수동적 상호작용의 결과물이 아니다.


본성과 양육(nature/nurture) 또는 유전자와 환경(gene/environment)으로 제출되는 그럴싸한 이분법이 드러내는 문제점 중의 하나는 그런 틀들이 우리가 발달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사실이다. 발달은 사전에 유전자 안에 프로그램된 일부 코드가 발현되는 게 아니다. 발달은 자신이 속한 환경을 바꾸고 그 맥락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유기체가 발휘하는 능동적인 역할이다. 그 과정에서 유기체는 자신의 미래를 창조한다.


내 전작 《생명선 Lifelines》에서 나는 이런 관념들을 요약하는 일련의 모토를 제출하며 책을 마무리한 바 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직접 선택한 환경에서가 아닐지라도 우리의 미래를 창조한다.” 그것이 발달 체계 이론의 요체이다.


뇌와 관련해서 이 이론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개념적으로 볼 때는 난자와 정자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갓난아이가 태어날 때에는 뇌에 1000억 개의 신경 세포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세포들은 약 100조 개의 신경 결합을 형성한다.


그리고 내가 “특이성(specificity)”과 “가소성(plasticity)”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서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갓난아이가 태어나서 볼 수 있으려면 뇌의 신경 회로를 가설할 수 있어야만 한다. 눈이 뇌의 시각야(visual cortex) 등과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기가 자라면서 눈의 망막도 성장하고 뇌도 성장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이한 속도로 성장하므로 사람들은 둘 사이의 연결 회로를 끊임없이 부수고 새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특이성”이다. 특이성은 환경적 변화와 맞서 싸워야만 한다.


이와 함께 우리가 우리가 보고 인식하는 방법은 우리가 발달하는 맥락에 의해 형성된다. 눈과 뇌 사이의 연결은 환경에 의해 수정될 수 있다. 그것이 “가소성”이다. 사람들은 언제라도 이 두 가지를 가져야만 한다.



당신은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와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같은 다른 신경과학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도킨스에 대해 관대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부시를 불쾌한 석유 미치광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과학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그가 진화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극도의 다윈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복제자들, 곧 우리의 유전자들과 그 유전자를 담고 있는 유기체들 사이에 단절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진화 과정을 다루는 데서 곤경에 처한다.


마음 및 뇌와 관련해 얘기하자면, 도킨스는 자신의 저서 《이기적인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오직 우리만이 우리의 이기적인 복제자들의 압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스티븐 핑커도 비슷한 말을 한다. “만약 나의 유전자가 나의 행동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유전자는 입 닥치고 찌그러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물론자도 아니고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할 수도 없다. 이기적인 복제자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 “우리”는 누구이며, 나의 유전자들에게 입 닥치고 꺼지라고 얘기할 수 있는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이런 결정론적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를 통제하는 다른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보다 나는 차라리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우리의 능력이 우리의 생활사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가 우리의 유전자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허용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유전자이다.


내가 비판하고 싶은 다른 사람들은, 뇌가 그저 복잡한 컴퓨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인지 심리학자들이다. 그들은 사고, 의지, 작인(作因) 등 높은 수준의 언어 개념을 포기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것들을 “민간의 심리학(folk psychology)”이라며 배격한다. 그러나 나는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게 아니라 의미를 처리한다고 주장하겠다.



당신은 마음과 뇌 사이의 구별을 어떻게 보는가?


나는, 뇌라고 불리는 것과 마음이라고 불리는 것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전제로 한 대답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당신이 질문을 하는 계기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마음의 언어와 뇌의 언어가 동일한 과정을 해명하는 두 가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방 안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을 경우 영국인들은 그것을 “캣(cat)”이라고 부르고, 이탈리아인들은 “가토(gatto)”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때 여러분은 “캣”과 “가토” 사이의 관계가 무엇이냐고 묻지는 않는다. 여러분은 동일한 대상을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책에서 논급하는 다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사고 실험에 근거하고 있다. “뇌시경(cerebroscope)”이라고 하는 장치를 갖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기구는 특정 시간에 모든 뇌 세포의 상태와 결합을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이제 시나리오를 가정해 보자. 예를 들어,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다. 버스가 온다. 나는 길쪽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그리고 그게 내가 타려던 버스가 아님을 알아차린다. 나의 뇌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시각야에서는 시각 이미지가 처리되고, 버스 소리에 대한 청각 이미지가 존재하며, 내가 타고자 하는 버스에 대한 나의 기억과 함께 그 버스가 내가 타려던 버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있다.


뇌시경은 여러분이 나의 머리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과정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뇌시경을 들여다보는 누군가가 그 순간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뇌가 연결되는 방식은 근본에 있어 역사적이다. 그 기계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려면 내가 수태되었던 그 순간으로 시간을 역추적해서 뇌를 살펴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 기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결과가 사태의 전개와 과정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상이한 뇌 상태가 상이한 행동들과 모순 없이 양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의 책은 신경-산업 복합체(neuro-industrial complex)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은 이것이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는가?


신경과학 연구 활동에 대한 엄청난 자금 지원은 제약 산업이나 특별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는 정부 기금에서 나온다. 이런 목표들 가운데 일부는 현재 사회적 통제와 관련이 있다. 다수의 마케팅 회사들도 신경과학이 그들의 광고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몇 년 전에 나는 실생활 상황에서의 기억을 연구하고 싶었다. 나는, 사람들이 수퍼마켓에서 물건을 구매할 때 그들의 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실험을 고안해 냈다. 우리는 실제 수퍼마켓에서 피실험자를 선택하고 그들에게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물건을 구매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실험으로 인해 나에게는 지금 마케팅 회의 및 광고 대행사에서 신경과학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요구가 쇄도하고 있다.


코카-콜라와 BMW는 모두 연구소를 설치하고 사람들이 펩시(Pepsi)보다는 코크(Coke)를 살 때, 또 구매자들이 BMW를 살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조사하고 있다.


경제학자들 역시 자신들이 “신경경제학(neuroeconomics)”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시장의 조건에서 뇌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잡지 《이코노미스트 Economist》가 진화 심리학에 큰 관심을 표명했던 몇 년 전에 그들은 그 학문이 사람들의 시장 선택을 설명해 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했다.



기술에 엄청난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기술은 일부 나쁜 과학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모두가 진정한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마비되어 속아 넘어가는 소설 《멋진 신세계 A Brave New World》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정확한 비유다. 《멋진 신세계》에서 작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소마(Soma)라는 약물을 창조해 낸다. 소마는 섹스만큼이나 좋다. 그가 사용하는 반복구는 이런 내용이다. “사랑하는 이여, 내게 약을 먹일 때까지 나를 안아주세요. 사랑은 소마만큼이나 좋은 것.”


그런 보편적인 약물은 없다. 그러나 제약업계가 고안중인 것은 특별하게 조제된 다양한 약물들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일부는 알코올이나 담배처럼 합법적이다. 또 일부는 대마초처럼 불법이다. 일부는 처방되고 있고, 일부는 리탈린처럼 사람들에게 강제로 복용된다.


우리 모두가 프로잭(Prozac)을 복용하면 세상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좋은 것보다 더 좋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약물로 인해 일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폭력적으로 변한다는 증거도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실험실에서 개발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다른 약물도 존재한다. 우리는 알츠하이머병의 기억 능력 상실을 치료하기 위해 연구하고 있다. 이런 연구 활동의 결과로 준합법적인 약물이 다양하게 등장했다. 소위 인식 능력 강화제나 스마트 약물 같은 게 그런 것들로, 웹상에서 구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한 신경과학자가 정신문명 사회(psychocivilized society)라고 부른 것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는 긍정적인 의미로 이 용어를 사용했지만 나는 정말로 이 말이 불편하다. 그 말은 사회를 바꾸지 말고 머리를 바꿔서 세상에 적응시켜야 한다고 제안한다. 우리 모두가 마약이나 알코올 같은 약물에 포위되어 있다. 그러나 약물이 사회적 통제나 진정한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 되면 사태는 매우 위험해진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1세기의 주요 위기로 전 세계적인 우울증의 창궐을 꼽았다.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사람들이 그토록 침울해 하는가? 그리고 그 해결책이 특정한 종류의 약물을 섭취하는 것이면 되는가?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불행을 야기하는 사회의 질서를 살펴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연구 활동과 신기술의 일부는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될 수도 있다.


나는 뇌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려고 45년 동안 이런 기술들을 사용해 왔다. 나는 세계를 이해하고 과학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인간성의 일부라는 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합리주의자이며 계몽의 자식이다.


신경과학의 발전이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약물 사용에 반대하지 않는다. 잘못은 다른 데 있다. 치통을 앓고 있고 그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아스피린을 복용한다면 그것은 좋다. 그러나 치통의 원인이 뇌 속에 아스피린이 너무 적어서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틀리다. 이빨도 치료해야만 하는 것이다.


신경과학은 노년 사회의 주요 문제인 알츠하이머병의 고통을 경감해 주기 위한 치료법을 개발할 것이다. 파킨슨병을 다루고, 척추 부상을 치료하는 기술도 등장할 것이다. 따라서 압도적으로 악의적인 신경과학 산업이 세계를 지배하려고 하는 모습이 미래의 그림은 아닐 것이다.



뇌의 미래는 어떤가? 우리 모두의 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 것인가?


나는 무척 우울한 전망을 가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마륵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지성의 비관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를 피력한 바 있다. 내게는 비관주의가 우세하다. 그러나 요즘 낙관적이 되려고 애쓰고 있다.


왕립 천문대장인 내 친구 마틴 리스(Martin Rees)는 인간성이 다음 세기에 살아남을 가망성이 없다고 말한다. 나도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인 위험을 제기하는 환경적·인간적 문제들이 쌓이고 있다. 예전의 구호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였다. 나는 이제 그 구호가 “사회주의냐 인간성의 종말이냐”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 사회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낙관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전반적인 문제를 제쳐놓는다면 향후 몇 십 년에 걸쳐 신경학적 과정에 대한 이해와 치료 기술이 발전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나는 그 점은 낙관하고 있다. 알츠하이머병의 치명적인 결과를 지켜본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런 비극의 일부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술이 전적으로 이론에 의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뇌에 관해 좋은 이론을 갖고 있느냐의 여부에 상관없이 이런 발전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좀더 깊은 철학적 문제들에 관해 더 잘 이해하려면 서구 세계의 환원주의적 과학 전통을 뛰어넘어야 한다. 일부는 이런 방침에 따라 사고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신기술 및 신약 사용과 관련해 광범위한 윤리적 문제에도 직면할 것이다. 내가 책을 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런 새로운 발전상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해 더 광범위한 논쟁을 촉발하기 위해서였다.



☞ 스티븐 로즈의 신작 《21세기의 뇌 The 21st Century Brain》는 뇌 연구에서 비롯한 새로운 윤리적 문제들을 대중이 토론토록 하기 위해서 저술되었다. 한국어판 출간을 몇몇 출판사에 의뢰해 보려고 하는데, 요즘 출판사들은 도대체가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통 모르겠다.



★ 李在嬉 옮김/sumbolon@hanmail.net



http://sumbolon.egloos.com/132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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