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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0/20 (22:44)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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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철학 - 레비나스의 고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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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3회 목요철학세미나
제목 : 고통의 철학 - 레비나스의 고통론
연사 : 강영안(서강대 철학과)
일시 : 1999년 9월 30일 오후 5시






1. 고통의 문제
아픔과 고통은 도처에 존재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불안과 슬픔, 고통과 비애가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 존재의 근본 구조가 고통으로 얽혀 있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통은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내재해 있다. 그렇다면 삶 자체가 온통 고통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베이커 주교의 말대로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한 얘기는 어느 정도 왜곡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고통보다 쾌락이, 슬픔보다 기쁨이 우리 삶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지속적인 즐거움과 기쁨은 아니라도 적어도 고통과 슬픔의 부재를 우리는 더 많이 경험한다. 먹을 양식이 있고 마실 물이 있고 고된 일이 끝난 뒤 찾아오는 휴식과 여가, 잠으로 인한 만족감이 있다. 우리에겐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이 있다. 사랑, 우정, 가족애, 자녀들이 보여준 성취에서 맛보는 흥분과 자랑스런 마음, 이와 같은 기쁨이 우리의 삶에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베이커는 이렇게 묻는다. "사랑은 제쳐두고 미움만을, 아름다움은 제쳐두고 추한 것만을, 기쁨은 제쳐두고 비참만을 계산에 넣겠는가?" 나는 베이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아름다움, 기쁨을 우리는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 계산에 넣어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단히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고통이 존재하는 현실이다. 먹을 음식이 없어 고통 겪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실 물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잠 잘 곳이 없어 떠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자리를 잃고 시름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 잠이 부족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정 문제로 고민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 우리 주변에는 마음의 아픔이나 상처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고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다. 고통을 제거하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은 정부나 종교 기관이 맡아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고통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며 현실 가운데서도 가장 현실적인 현실이다.
고통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아마도 가장 원시적이고 직접적인 반응은 외침과 신음일 것이다. 외침은 자기 표현이면서도 구조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터주길 바란다. 싯다르타의 말씀처럼 독화살에 맞은 사람을 두고 예컨대 이 사람이 정말 화살을 맞았는가, 뭘로 그것을 아는가, 등등의 이론적 논의는 무의미하다. 화살을 뽑을 방책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실천적 행동이 언제나 선행한다. 하지만 고통과 아픔에 대한 반응은 실천적인 처방과 개입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론 과학과 기술적 혁신이 고통을 제거하는 일에 크게 기여했다. 도구와 기계가 고문 도구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해서 고통이 많이 감소되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사회 조직, 법,  문학, 종교도 인간의 고통에 대한 처방과 치유, 또는 예방책으로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문학과 종교 가운데는 희랍 비극, 유대교, 그리스도교, 불교가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가장 심원한 사상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들 전통은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의 고통을 해석할 수 있는 틀과 방법을 제공해 주었다. 이 모든 것이 똑같이 모두 효과가 있었는가 하는 것은 물론 전혀 딴 문제이다.
고통받는 인간에게 철학은 어떤 기여를 하였는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공자나 맹자, 노자나 장자는 고통을 어떻게 보았는가? 동아시아 전통은 일단 제외해 두더라도 우리가 지금까지 크게 영향받아온 서양의 주류 철학은 사실은 고통의 문제에 크게 관심을 쏟지 않았다. 철학이 만일 고통에 '완전히' 무관심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물론 과장일 것이다. 왜냐하면 후기 헬레니즘 철학은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의 정념과 고통(pathos)에 관심을 두었고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 예컨대 스토아 철학자들이나 에피큐로스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철학은 그들에게 이론적 활동이기 보다는 오히려 실천학, 곧 '삶의 기술'(techne biou)로 이해되었다.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은 인간의 고통을 진단하고 정확한 추론과 논리적 엄밀성을 통해서 인간의 행복을 실현해 주는 수단으로 수용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서양 주류 철학에서도 고통이 완전히 무시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통은 언제나 악의 문제와 더불어 변신론(theodicy, 神正論)의 테두리에서 말하자면 하나의 논리적 문제로 취급되었다. 변신론은 죄없는 자의 고통과 악의 실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보여주고자 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노력이었다. 변신론의 맥락에서는 인간의 고통이 실제로 절실한 현실적 문제로 취급되기보다는 신적 섭리와 계획의 한 부분으로 '설명되어' 버렸다. 고통에 대한 감수성보다는 합리적, 이성적 관심이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근대 변신론을 대표하는 라이프니츠와 헤겔도 서양의 이러한 이성 중심적 전통에 서 있고 이 전통을 더욱 더 강화하였다.   
20 세기 철학자들 가운데도 고통의 문제를 깊이 생각한 철학자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엠마누엘 레비나스(1906-1995)는 이 점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저서들이 온통 고통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통의 문제는 그의 모든 논의에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필립 네모가 "어떻게 사유가 시작되는가?" 하고 질문했을 때 레비나스는 "이별이나 폭력적 장면,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간의 단조로움에 대한 의식, 이와 같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처나 망설임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한다. 이것은 고통이 바로 사유의 시작임을, 특히 레비나스적 사유의 시작임을 암시해 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고통의 철학에서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점은 변신론의 종말 이후에도 신과 도덕성의 이념을 여전히 유지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생각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 점에서 칸트와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1) 변신론의 정당성을 문제삼으면서  (2) 오직 도덕적 악만을 수용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 한계 안에서 악의 문제를 다루며 (3) 윤리적 맥락에서 고통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4) 그러면서도 여전히 신의 이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칸트 보다 더 철저하게, 더 드러내 놓고 변신론의 종말을 말한다. 변신론의 종말은 어떤 논리로 논박되었거나 또는 인간 이성의 법정에서 비합리적으로 판정 받았기 때문에 초래된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가, 그 가운데서 특히  아우슈비츠와 같은 20세기의 사건들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변신론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변신론의 몰락으로 야기된 것은 (적어도 서양 전통 안에서는) 인간의 고통에 이제 어떠한 의미, 어떠한 유용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물음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고통이란 '결국에는' 좀 더 나은 선을 이룩하는 데 매우 유용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이론이 변신론이었고 이것이 무너지자 이제는 고통의 의미, 고통의 유용성 자체가 또다시 문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이렇게 못박는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고, 쓸모 없는 경험이다. 고통 속에는 어떠한 내재적 합목적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성을 통해서 고통을 해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그는 생각한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사람이 고통없이 진정한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다른 맥락에서는 또다시 강하게 역설한다.  고통은 주체의 주체성에 핵심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주체를 '상처받을 가능성'으로, '외상에 열려있음'으로, '타자에 대한 노출'로, 타자에 대한 '대리자'로, 타자를 위한 '볼모'로 서술하는 자리에서 레비나스는 그러한 주체의 모습을 고통받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주체는 타인에 대해 열려 있고 타인을 위해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통은 말하자면 주체성의 핵심이다. 고통이 만일 그 자체로 전혀 의미 없는 것이고 쓸모 없는 것이라면 이러한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쓸모 없는 고통이 '마침내', '결국에는' 쓸모 있게 되는 것인가?    
'탈인격화', '고독', '자신에게 매어 있음', '피로', '아픔', '비탄', '질병', '늙어감', '죽음', 이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고통은 레비나스 철학의 독창성을 처음으로 보여준 작품인 『도피에 관해서』(De l' vasion, 1935)라는 글에서부터 『존재에서 존재자로』(De l'existence   l'existant; 1947), 『시간과 타자』(Le temps et l'autre, 1947), 『전체성과 무한』(Totalit  et infini, 1961) 그리고 그의 두 번째 대작으로 알려진 『존재와 다른 것 또는 존재 사건을 넘어서』(Autrement qu'etre ou au del  de l'essence, 1974)에 이르기까지 줄곧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논의를 좀 편하게 시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레비나스의 「쓸모 없는 고통」(1982)이란 작은 논문을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논문은 그렇게 체계적은 아니지만 어떤 글보다도 레비나스의 고통에 대한 사상을 분명히 표현해줄 뿐만 아니라 고통의 현상학과 해석학 그리고 일종의 '고통의 윤리학'이라 부를 수 있는 사고 과정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레비나스는 먼저 고통의 경험을 서술한다. 고통도 다른 모든 생생한 경험과 마찬가지로 의식에 '주어져' 있다. 의식에 주어진 현상을 레비나스는 현상학적으로 그려내고 이를 통해 고통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런 뒤 레비나스는 고통의 유용성에 관해 논의한다. 이것은 '고통의 해석학'이라 부를 수 있는 과제이다. 고통이 지닌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합목적성과 유용성이 여기서 토의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레비나스는 변신론을 거론한다. 끝으로 레비나스는 일종의 고통의 윤리를 제안한다. 하지만 이것은 예컨대 에피큐로스주의자나 스토아주의자들의 제안과는 전혀 다른 윤리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자기에 대한 관심(souci de soi)은 여기서 거부되고 그 대신 고통받는 타인에 대한, 대가없는 책임과 사랑이 강조된다.


2. 고통은 쓸모 없는 것인가?
우선 "고통은 그 현상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라는 레비나스의 논제에서 시작해 보자. 이 논제 자체는 그렇게 색다르거나 엉뚱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씨.에스. 루이스와 머코리같은 사람들도 같은 논제를 수용한다. 고통은 그 자체 전혀 좋은 것이 아닐 뿐더러 전혀 가치가 없다고 이들도 생각한다. 만일 가치가 있다면 '몰가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통은 그 현상에 있어서도, 그렇게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고통은, 예컨대 의학계에서는 그렇게 신빙할만한 객관적 자료로 이용되지 않지만 일상 생활 속에서는 매우 유용한 성격을 띠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신체는 어떤 이상이 있을 때, 뭔가 잘못되고 있을 때 고통은 그것을 알려주는 경보음과 같은 역할을 한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 가운데는 40만 명에 한 명 꼴로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자율신경 장애증 (dysautonomia)이 있다고 한다. 이런 아이들은 넘어지거나 불에 데여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결국에는 생존이 불가능하게 된다. 반면 신체의 고통은 더 큰 상해를 막아주고 생존을 가능케 해 준다. 그래서 해롤드 쿠쉬너는 고통은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치르는 대가라고까지 주장한다.     
고통과 불쾌에 대한 칸트의 논의도 이와 같은 논의의 연장 선 위에 있다. 삶이란 칸트에 따르면 촉진(쾌락)과 저지(고통) 사이의 상호 대립적인 힘 사이의 상호 작용이다.  고통이 먼저 있고 그 뒤 쾌락이 있다. 고통 없는 지속적 쾌락은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고 만다. 선행된 고통이 있어야 비로소 쾌락을 쾌락으로 느낄 수 있다. 약간의 생명력의 촉진과 저지가 교차할 때 건강 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 고통은 이렇게 쾌락과 쾌락 사이에 개입하여 건강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로 보인다. 그러므로 칸트는 고통을 활동의 '박차'(der Stachel)라고 부르고 이를 통해 인간은 진보할 수 있다고 본다. 칸트적 관점에서 볼 때 고통은 합목적적 성격을 띠고 있다. 고통에는 '생물학적 합목적성'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레비나스는 완전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고통에는 생물학적 합목적성 외에도 문화적 기능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레비나스는 지적한다. 인간의 문화적 성취와 탁월한 업적은 어느 하나도 고통 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다. 학문이나 예술 심지어 정치 제도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개인과 집단이 인류 역사상에서 치렀던 고통은 어떤 무엇으로도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고통 없이는 인간 역사와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좋은 것들은 하나도 가능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전도서 1장 18절)라는 말처럼 고통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성과 정신적 극치의 대가"로 보인다. "고통은 또한 개인의 성품을 단련시킨다"고 그는 말한다. 고통은 사람을 강퍅하고 냉소적으로 만들 수 있지만 때로는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고 동정적이며 타인에 대해 겸손하고 열린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미국 철학자 월터스토프는 아들을 잃은 뒤, 아들의 죽음을 통곡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고통의 골짜기에는 절망과 쓰라림이 양조(釀造)된다. 그러나 또한 품격도 제조된다. 고통의 골짜기는 영혼을 빚어내는 계곡이다."

고통이 지닌 합목적적, 합리적 기능 가운데 가장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처벌, 감시, 훈련, 교육 이 모든 것은 고통을 야기시킨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고통의 원인들은 '사회' 또는 '국가'라는 '집단적 신체의 건강'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고통의 이러한 '사회적 유용성'은 '권력의 교육적 기능'과 '정치적 목적론'에 봉사한다. 그런데 이 정치적 목적론이란 레비나스에 따르면 "생존의 가치 위에, 사회와 개인의 존재 유지 위에, 절대 절명의 최고 목적으로서의 이들의 성공적인 건강 위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고통이 지닌 이 모든 종류의 '유용성'들 즉 '생물학적 합목적성', '사회적 유용성', '정치적 목적론'에 대해서 레비나스가 취하고 있는 태도이다. 레비나스는 한편으로는 이 유용성들을 통채로 거부하지는 않는다. 신체에 이상이 있을 때는 경고 신호가 있어야 하고 건강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스트레스가 있어야 한다. 고통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과학과 예술, 학문과 종교에서 어떠한 성취도 이룰 수 없다. 감시와 처벌이라는 고통이 수반되지 않고서는 사회 체제가 유지될 수도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레비나스는 이러한 유용성을 통해서 고통을 합리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이러한 정당화는 고통 자체가 지닌 애매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유용성 또는 목적성에 대한 논의는 근본적으로 기술적 합리성의 이념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 합리성은 본질적으로 도구적이고 목적론적이다. 모든 것의 가치는 그것의 목적론에 의해 평가된다. 목적론은 어떤 것의 가치를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쓰일 수 있는 데서 찾는다. 예컨대 건강 증진이나 강한 성격 훈련, 하나님의 영광, 민족적 자존심 또는 종족의 우월성 같은 것이 그러한 목적으로 설정될 수 있다. 기술적, 도구적, 목적론적 관점에서 볼 때 고통이란 이 세계 안에 주어져 있는 것, 따라서 존재 질서 안에서 파악하고 이해해야 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고통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 없다. 레비나스가 볼 때 이것은 고통의 현상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존재 질서 안에서의 질서 유지를 위해(그것이 한 개인의 신체 건강을 위한 것이든 사회 신체의 건강을 위한 것이든 간에) 고통을 정당화하는 것을 뛰어넘어 고통의 현상 자체를 그려냄으로써 고통이 지닌 애매한 얼굴과 맞닥뜨리고자 시도한다.


3. 고통의 현상학
그러면 고통은 어떤 종류의 경험인가? 고통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종합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다른 경험과 마찬가지로 고통도 우리의 의식 속에 주어진 하나의 소여(un donn e)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소여와는 달리 초월적 통각, 즉 '나는 생각한다'는 종합 작용에 의해 하나의 통일성으로 종합할 수 없는 현상이다. 고통을 생각해 보고자 할 수 있고 상상해보고자 할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고, 고통을 심적 내용으로 담아내는 우리의 감성만은 고통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자 하지 않는다. 감성은 고통을 종합 가능한 '질료'로서 조차도 환영하지 않는다. 고통의 감각 작용이 양적인 의미에서 너무 많거나 너무 지나치기 때문이 아니라 질적 의미에서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너무나 일상적 궤도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고통은 '너무 많음', '너무 지나침', 또는 '벗어남'(un exc s) 따라서 외재적인 것,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 낯선 것으로서 '수용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고통은 수용할 수 없는 것이고 수용할 수 없는 것 자체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통은 범주상의 애매성을 띠고 있다. 한편으로 고통은 '성질'이다. 고통도 다른 감각 내용과 마찬가지로 감각 작용이고 감각 작용으로 내용이 주어진다. 고통은 감각 작용이되, 그러나 칸트적 종합이 불가능한 감각 작용이다. 다시 말해 고통은 하나의 의미 전체로 통합이 될 수 없다. 고통은 다른 한편으로는 '양태' 즉 하나의 존재 방식이다. 즉 의식 안에 수용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방식 그 자체가 고통이다. 그러므로 고통은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이면서 감성을 통해 주어져 있고 감성을 통해 주어지면서도 견딜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범주적으로 애매한 현상이다.
고통 속에서는 우리는 우리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고통받는 순간 우리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없고 우리 자신이 뭘 해보려고 움직일 수도 없다. 이것이 레비나스가 제시한 고통의 두 번째 특성이다.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는 것이고, 살고자 하는 의지는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그리고 있는 고통 가운데는 이러한 미래, 계획, 요컨대 내 자신의 능동적 활동이 존재하지 않는 경험이다. 고통은 순수하게 '당하는 것', 어떠한 도피처도 없이 '굴복 당하는 것'(patir), 굴복 그 자체에 굴복하는 것이다. 고통은 레비나스가 좋아하는 표현을 쓰자면,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이다. 수용성은 예컨대 칸트의 경우에서 보듯이 자발성(능동성)의 다른 한 측면, 즉 수용하고 환영하는 활동이다. 수용성 안에서는 어떤 것이 감각 작용의 질료로서 수용된다. 칸트가 1비판서에서 말하고 있는 감성, 즉 수용성으로서의 감성은 이미 주체의 활동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의 감성은 수용성으로서의 감성보다 더 깊은 아무런 방어나 보호없이 상처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에서의 감성이다. 감성 속에서 경험하는 고통은 '르 말'(le mal), 즉 '악'이고 동시에 '상해'이다. 말초 신경계의 상처나 악성 종양으로 고통받는 사람의 고통은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준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논의를 거쳐 "고통의 악, 곧 고통의 상해는 부조리의 폭발이고 가장 심원한 부조리의 표현"이라고 결론짓는다. 고통의 '본질'은 만일 고통에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부조리, 무의미, 반의미, 또는 반이성이다. 고통은 의미 없고, 쓸모 없는 것,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것'(pour rien)이다. 물론 우리는 '아픔'과 '고통', 영어로는 'pain'과 'suffering'을 구별할 수 있다. 또는 신체적 고통과 도덕적 고통, 나아가 사회적 고통을 구별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고통에 대한 레비나스의 논의는 (지금까지 논의에서 그는 주로 신체적 고통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다루었다) 고통 일반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즉 고통은 의미(sens)의 문제이고, 현상으로서의 고통 그 자체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이성적, 합리적 논의를 통해서도 고통이 지닌 애매성의 성격을 벗겨낼 수가 없다.

         
4. 변신론과 고통
고통은 그럼에도 의미 있을 수 있는가? 물음을 바꾸어 다시 묻자면, 고통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칸트 이전에 만일 우리가 살고 있다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이론적 틀로서 우리는 쉽게 변신론을 최선의 후보로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전통적 의미에서의 변신론은 이제 더 이상 최선의 선택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변신론이 유럽 지성사에서 해 온 역할을 레비나스가 결코 과소 평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하느님의 결백성을 증명하는 일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도덕을 건져내는 일에서, 그리고 고통을 견뎌낼 수 있게 하는 데서 변신론은 과연 성공했던가? 이러한 물음은 정당하다. 그러나 변신론이 유럽의 사유 체계에 들어오면서 '시대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해내었다는 사실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이다. 변신론은 그에 따르면 유럽 지성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원죄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나 유대인들의 유배와 디아스포라에 관한 이해, 계몽 시대의 이신론 그리고 심지어는 무신론적인 진보주의, 이 모두가 레비나스에 따르면 변신론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변신론은 유럽인들의 자의식의 한 구성분자가 되었다. 유럽의 도덕성과 종교성은 대체로 변신론에 기초하였다고 레비나스는 보았다.
우리는 앞에서 고통이 의미 있을 수 있는 몇 가지 가능성으로 생물학적 합목적성, 도덕적 문화적 필연성, 사회적 유용성과 정치적 목적론 등을 언급하였다. 레비나스는 바로 이러한 맥락, 즉 도구적 또는 목적론적 사유의 맥락 속에서 변신론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전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변신론의 문제는 그와 유사한 목적론인 '형이상학적 목적론'을 기본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목적론에 따르면 (1)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에 따라 설정된 초월적 목표가 있고 (2) 자연과 역사는 비록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그 목표(선)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며 (3) 따라서 고통과 아픔에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자연과 역사 속에 존재하는 고통은 궁극적 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들이다. 고통은 이처럼 쉽게 설명되거나 정당화될 수 있고 때로는 반드시 겪어야 할 것으로 적극적으로 추천되기도 한다. 형이상학적 목적론은 그래서 나의 작은 고통은 마침내는 큰 선을 위해서 기여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왜 변신론이 문제가 되는가? 변신론은 (1) 하느님은 전능하다. (2) 그의 선하심은 무한하다. (3) 악은 존재한다는 세 명제 가운데 앞의 두 명제와 세 번째 명제가 모순 없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이론이다. 변신론은 논리적 추론 과정을 통해 하느님은 악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변신론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위의 세 명제로 표현되는 '내용'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변호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고, 셋째는 그것을 수행하는 논리적 '수단'이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은 예컨대 존재, 무, 제 1원인, 목적성, 무한성, 유한성 등과 같은 존재론적 용어들이 의미 있게 작동되는 틀 안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변신론은 리꾀르의 말처럼 '존재신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분석철학자들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변신론의 논리적 형식을 문제삼지 않는다. 변신론의 내용이 논리적으로 정합적인가, 합리적으로 수용 가능한가 하는 것을 그는 따지지 않는다. 변신론에 대한 그의 논변은 (만일 논변이라 부를 수 있다면) 논리와 합리성의 원천인 인간 이성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는 칸트와 구별된다.   
칸트는 그의 유명한 변신론의 실패에 관한 논문에서 변신론이 실패한 까닭을 세 가지로 들고 있다. 그 가운데 특히 물리적 악, 즉 신체적 고통과 질병, 그리고 죽음에 관하여 논할 때 칸트는 이것들이 순전히 '자연의 사실'(die Naturtatsache)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물리적 악은 인간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는 모두 경험하는 것이며 인간은 이것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책임질 수 있는 악은 도덕적 악 밖에 없다고 칸트는 보았다. 물리적 악이 왜 존재하는가 묻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칸트는 자연과학과 의학의 발전을 통해 물리적 악이 부분적으로는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전혀 문제없는 생각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 경험하는 신체적 고통과 질병은 과연 단지 자연의 사실이라고 보고 기술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인가? 이것들은 나의 또는 이웃의 도덕적 무책임 때문에 빚어질 수는 없는 것인가? 칸트에게서는 '누구의 고통인가, 누가 책임있는가?' 하는 물음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인간으로부터 고통을 제거해 주리라고 생각한 점에서 칸트는 매우 낙관적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아마도 우리의 당대인들이 칸트 보다 훨씬 더 낙관적일 것이다. 이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닌 것은 전염병이나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에 의해 유발되는 고통이 과거에 비해서는 훨씬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 의해 야기되는 고통조차도 줄어 들었다고 말할 수 없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대량 살상이 가능해졌고 20세기 역사는 그것을 역사적으로 실증해 준다. 그렇지만 변신론의 정당성을 부인할 때도 칸트는 이성에 대한 신뢰, 즉 그것의 추론 능력, 문제 해결과 법칙 수립 능력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심지어 악과 고통이 인간 역사와 사회 진보, 문화 진보에 기여한다고 믿었던 사람이 칸트였다. 왜냐하면 진보는 대립의 결과이며 따라서 이기심과 탐욕, 상호 경쟁심은 진보를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요소로 보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칸트와 달리 인간 이성의 신뢰 가능성 자체를 문제 삼는다.
20세기에 두 차례나 있었던 세계 전쟁, 히틀러주의와 스탈린주의, 히로시마, 수용소, 아우슈비츠와 캄보디아의 종족 살상, 이 모든 예들이 변신론과 변신론의 합리성을 논박하고 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죽음의 수용소에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았던가? 대량 살상을 자행했던 독일인들에게는 이성 능력이 전혀 결여되었던 것인가? 아우슈비츠 사건은 레비나스에게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 고통과 변신론 사이에는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우슈비츠가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고 있다고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만일 죽음의 수용소에 하느님이 부재했다면 악마가 수용소 안에 분명하게 현존하였다. 악마는 분명히 '이성적인' 존재, 즉 목표를 설정하고 계산하고 추론하고 목표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과 수단을 가진 자이다. 칸트는 인간 이성이나 감성은 그 자체로는 결코 악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악은 (인간에게서) 이성과 감성의 결합을 통해서, 그것도 올바른 도덕적 질서의 '전도'(顚倒)를 통해 발생하는 사건으로 보았다. 레비나스는 그러나 다르게 생각한다. 인간 이성은 악하며 심지어는 악마적임을 20세기의 경험은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독일과 동구, 캄보디아(최근 보스니아)에서 드러난 악과 그로 인한 고통은 매우 신중하게 계산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정치화된, 그래서 모든 윤리를 벗어난 이성"의 폭발을 어떠한 이성도 제한하지 않았다. 이성 홀로 만일 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악마적'이라고 칸트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레비나스는 변신론을 이론적으로 논박하고자 하지 않는다. 20세기 역사 자체가 변신론의 허위성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변신론의 종말은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단순한 '사실'이 되었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고통에 직면해서 변신론의 정당성을 보여주어야 할 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어떤 종류의 고통에 대해서도 이론적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고통의 현상학을 통해 보여준 것은, 고통이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할 뿐이며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어떤 정치 이데올로기도, 어떠한 형이상학적 목적론도 존재하는 고통과 악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끝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고통은 여전히 존재하고 인간의 잔혹성과 불의는 여전히 기세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만일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면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주어진 삶을 삶 그대로 수용하면서 때로는 기뻐하며, 때로는 슬퍼하며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고통의 문제는 앞에서 말한대로 결국에는 의미의 문제이고 이것은 삶의 의미와 직결되어 있는 물음이다. 만일 고통에 의미가 없다면 삶에 애당초 의미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물음을 좀 더 간결히 표현해보자면, 현상적으로 보아서는 전혀 의미 없는 고통이라 하더라도 모든 고통이 정말 전혀 무의미한 것인가? 고통은 고통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레비나스 자신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변신론의 종말 이후에 종교성과 인간의 선의 윤리가 여전히 유지할 수 있는 의미"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진리가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가? 신앙과 윤리에 관해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도 열려 있는가? 나는 레비나스 철학이 이러한 물음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5. 고통, 윤리, 주체성
레비나스는 고통과 하느님, 신앙과 윤리의 의미에 관해서 전혀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틀을 제안한다. 새로운 틀과 새로운 사유 방향을 표시해주는 것으로 레비나스는 (플라톤에게서 유래한) '존재를 넘어서'(epekeina tes ousias) 또는 '존재 저 편의 선'(le Bien au del  de l'etre)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윤리적인 것이 존재론적인 것보다 선행한다는 사실을 레비나스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는 심지어 윤리적인 것이 존재론적인 것의 근거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동일자'와 '타자', '전체성'과 '무한', '말해진 것'(le Dit)과 '말하는 것'(le Dire), '존재'와 '존재와 다른 것', 이 모든 구분은 윤리적인 것의 선행성 또는 윤리적인 것의 우위성을 말해준다. 윤리적인 것, 즉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은 레비나스에게는 모든 의미의 원천이다. 변신론이 무너진 뒤, 다시 말해 존재신학에 기초한 전통적 신앙이 무너진 뒤, 오직 윤리적인 것만이 삶과 신앙, 도덕적 선에 의미를 줄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의 고통의 현상학과 해석학은 고통의 윤리학으로 이어진다.
글 첫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상처 입은 사람이 즉각적으로 할 수 있는 반응은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의 외침이나 신음은 고통에 대한 반응이면서 동시에 자기 표현과 타인의 관심에 대한 호소이기도 하다. 외침, 신음, 한숨은 그러므로 사건을 묘사하는, 오스틴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서술적(locutionary) 행위라기 보다 타인의 즉각적인 행동을 호소하는 행위 유발적(perlocutionary)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레비나스는 고통에는 이중적 얼굴이 있음을 포착해낸다. 고통은 한편으로는 극도의 수동성, 무력, 포기, 그리고 극도의 고독의 상황이다. 고통은 '자신에 매여 있음', '자신의 존재로부터 분리의 불가능성', '존재의 면제 불가능성 자체', '도피의 불가능성'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무의 불가능성'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통은 수용할 수 없는 것, 통합 불가능한 것, 이해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닌 것, 낯선 것과의 접촉이며 절대적 외재성, 절대적 타자성의 존재를 예고해 주는 순간이다. 고통은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나에게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수용 불가능성 가운데 타자성의 열림이 가능하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한탄, 외침, 신음, 한숨이 있는 곳에 타자로부터의 도움에 대한 요청, 곧 그의 타자성이, 그의 외재성이 구원을 약속하는 타자로부터의 도움에 대한 근원적인 요청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고통은 신음과 한탄 속에서, 수용 불가능성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열어준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타자와의 관계의 열림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 그 자체 실현된 현실은 아니다. 그래서 이 '열림'을 레비나스는 '절반의 열림'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완전한 열림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받는 사람의 호소에 대한 반응, 요청에 대한 응답이 있어야 한다. 가진 것이 없는 자,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 또는 이방인 요컨대 고통받는 사람의 호소에 응답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책임을 진다는 것, 그의 짐을 대신 들어준다는 것을 뜻한다. 타인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져 준다는 것, 이것을 레비나스는 순수한 의미에서 '윤리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윤리적인 것 또는 윤리적이 된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과 고난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레비나스는 고통은 고통 가운데서 인간 상호 간의 윤리적 전망을 열어줄 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위해 "내가 받는 정당한 고통"은 무의미한 고통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엿보인다. 나는 이것이 우리의 "고통을 의미 있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레비나스의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레비나스의 답변은 "변신론의 몰락 이후, 여전히 신앙과 도덕이 의미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물음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오해의 여지를 없애자. 레비나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고통은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생물학적 관점이나 또는 신학적 관점이 고통을 의미 있게 할 수 없듯이, 윤리적 관점도 고통을 의미 있게 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고통과 관련해서 레비나스는 '변신론' 대신 윤리를 변호하는 일종의 '변윤론'(辯倫論)을 펼치는 것에 불과하다. 그의 주장은 "고통은 인간 상호간의 윤리적 전망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고통은 윤리적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여러 주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윤리적 관점, 바로 이것이 고통에 의해서 열린다는 말이다. 고통에 관심을 둘 때, 고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의 신음과 한탄에 귀기울일 때, 바로 그 때 삶에 대한 윤리적 전망이 열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레비나스가 우리에게 주고자 한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관심이 먼저 우선이고 그 외 다른 요소는 예컨대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이나 행복 또는 공동체의 보존과 같은 것은 윤리에 대해 부차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레비나스가 '얼굴의 현현'에 그렇게 강조를 둔 까닭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얼굴은 왕이나 독재자 또는 부자의 얼굴이 아니라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의 얼굴, 즉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이다. 고통 중에 있는 이 얼굴과의 만남이 없는 한 타인에 대한 관심 없이, 타인과 교류하면서, 아무 문제없이 우리는 살 수 있다. 삶의 이러한 차원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즉 세계 안에서 우리가 거주하는 방식이다. 타인의 얼굴과 접할 때, 그에게 귀기울일 때, 그 때 윤리가 경제적 삶에 침입하게 된다. "윤리는 보는 것이다(l'ethique est une optique)." 만일 윤리가 보는 것이라면 뭘 보는 것인가? 하늘에 있는 별과 내 속에 있는 도덕 법칙인가? 이 '봄'을 나는 기득권이 없는 사람들의 고통받는 얼굴을 레비나스가 염두에 두었다고 생각한다. 윤리는 봄이고 동시에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위대한 윤리적 체계들이, 예컨대 근대 윤리 전통을 대변하는 공리주의와 칸트의 윤리학이 '타인의 고통'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레비나스의 두 번째 논제도 첫 번째 것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도발적이다. 고통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위한 고통이라면 의미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와 관련해서 레비나스는 "타인에게 있는 고통"과 "나에게 있는 고통"의 근본적인 차이를 역설한다. 근본적 차이, 즉 나와 타인 사이의 근본적 비대칭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해서 상호 관계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타자에게 있는 고통은 '눈감아 줄 수 없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반응을 요청한다. 이것은 내가(타자가 아닌) 처한, 피할 수 없는 윤리적 상황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레비나스는 "나는 타자에 사로 잡혀 있다", "나는 타자를 위해 핍박받는다", "나는 타인의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또는 "상처와 불법에 노출된 가운데, 책임에 적합한 감정 가운데, 내 자신은 대치할 수 없는 자로, 타인들에게 헌신된 자로, 물러날 수도 없이, 따라서 그 자신을 바치고 고통받고 [타인에게] 주기 위해서 육신을 입은 자로, [그것을 위해] 부름 받았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여기서 '줌'과 '바침'은 어떤 정신적 행위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행위임을 레비나스는 강조한다. 줌과 바침은 오직 '살과 몸이 있는 존재'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것은[줌과 바침]은 마음의 선물이 아니라 자신의 입에 든 빵, 입에 가득한 빵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열어줌이되, 자신의 지갑을 열어주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집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줌과 바침, 그리고 고통의 이념은 레비나스의 '대리'(la substitution) 이념에서 절정에 이른다.

"각자에 의해 [책임 있는 자로] 고발당함 가운데, 각자에 대한 책임은 대리의 지점에까지 나아간다. 주체는 하나의 볼모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을 대신할 수 있을 때, 타인의 고통을 대신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타인을 위한 볼모가 되어 줄 때, 그 때 비로소 이 세계 안에서는 연민과 동정과 자비와 가까움이 있을 수 있다. "타인을 위한 볼모", 이것이 타인과의 연대성을 위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체성, 즉 주체의 주체됨은 타인을 대리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구성된다. 타인의 수용,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짐이 주체성의 핵심이라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수브옉툼(sub-jectum), 즉 주체는 타인의 고통과 잘못을 짊어짐으로써 이 세계를 아래에서 떠받치고 지탱한다. 다시 말해 존재의 고통과 잔인성을 대신 속죄하고 짊어지는 존재가 곧 '주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리적 고통은 무의미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타자를 위한 것"이 곧 의미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대리적 고통이 '언제나', '한결같이' 의미를 산출해 내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동시에 경고해 준다. 대리적 고통도 '쓸모 없는 것',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것', '무의미한 것'(pour rien)일 수 있다는 것이다.


6. 비판적 논의
이제 레비나스의 입장이 담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토의해 보자. 세 가지 문제가 내 생각으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윤리는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윤리적 삶은 레비나스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그는 고통을 심지어 주체성의 핵심으로 자리 매겼다. 그러므로 고통과 주체성을 "수용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 또는 "상처 입을 가능성"으로 거듭해서 묘사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레비나스는 타인을 위해 고통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곧 주체의 주체성을 구성한다고 본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레비나스를 칸트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칸트도 이미 윤리적 삶에는 불쾌(Unlust)와 아픔(Schmerz), 그리고 고통(Leiden)이 수반된다고 보았다. 윤리적 삶이란 칸트에 따르면 '자기애'와 '법칙에 대한 존경'이라는 두 동기들(Triebfedern) 사이의 대립과 갈등의 자리이다. 하지만 '도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행위는 오직 법칙에 대한 존경에 따른 행위밖에 없다. 이러한 행위는 도덕법칙을 수용함으로써 자기애의 억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고 자기애의 억제는 필연적으로 고통을 초래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한 인격의 존엄성"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행위 주체가 올바르게 행위 했을 때 그로 인해 그는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유지할 수 있다. 고통은 도덕적 자율성과 강인성의 표시라고 칸트는 보고 있다. 고통은 이렇게 볼 때 도덕 주체가 이성적이기 때문에 치르는 고통이다. 만일 도덕 주체가 도덕 법칙을 존경하지 않고 단지 감성적 요구에 따라 행위 했더라면 이와 같은 고통은 수반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데는 레비나스도 동의한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받는 고통이냐 하는 점에서는 칸트와 구별된다. 고통은 법칙에 대한 존경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의 호소와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레비나스는 보고 있다. 여기에서는 감성적 수용과 귀기울임, 그리고 그에 따른 구체적 행동이 중요하다. 고통받는 타인의 호소에 대한 응답이 없다면 그곳에서는 '윤리적'이라 부를 수 있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는다. 부름은 나의 자율적이고 능동적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타율적이다.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윤리, 즉 '책  임'으로서의윤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타율적인 윤리이다. 그러나 칸트와 레비나스는 '성화된 삶'(Heiligkeit; Saintet )을 윤리적 삶의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없지 않다. '거룩함'을 칸트는 도덕적 완전성으로 보았다면 레비나스는 '나보다 타자를 앞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본 것을 제외한다면 두 철학자는 다같이 '거룩함' 또는 '성화된 삶'이 우리의 도덕적 진보를 가져오는 것이고 고통이 여기에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생각하였다. 공리주의자나 행복 윤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입장에 대해 비판적일 수 있으나 고통 없이는 윤리적 삶이 실현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칸트와 레비나스가 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주변의 도덕적 불감증은 기꺼이 고통받고자 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닌가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 없이 과연 윤리가 가능한가?  
두 번째 문제는 대리적 고통에 관한 것이다. '대리적 고통'은 몇몇 위대한 종교 전통에서는 익숙하지만 철학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개념이었다. '주체'가 된다는 것, '주체'로서 선다는 것은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에 대해서, 타인을 대리해서 대신 짐을 질 뿐 아니라 심지어 타인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들 각자는 각 사람에 대해서 각 사람에 앞서 잘못이 있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잘못이 더 많다"(도스토옙스키)는 말을 원용해서 "우리는 모든 사람에 앞서,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고 나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책임이 더 많다"는 말을 레비나스는 반복해서 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는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의 메시아(그리스도)이념을 철학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유대교에 관한 한 저서에서 레비나스는  "메시아, 그것은 나이고, 내가 된다는 것, 그것은 곧 메시아가 된다는 것이다"(Le Messie, c'est moi, Etre moi, c'est etre Messie)라고 한다. 메시아는 "타인의 고통을 짊어진, 고통받는 의인"이다. "타인의 고통이 부과한 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 자신성(l'ips it )을 정의해 준다"는 말을 레비나스는 여기에 덧붙인다. 그리스도교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내가 된다는 것, 그것은 곧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존재 전환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대속적 고통은 단 한 순간, 결정적 한 순간 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나의 삶 전체가 대속적 고통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나는 그리스도처럼 정말 머리 둘 곳조차 없어야 하는가? 라르스 폰 트리어 감독의 『브레이킹 드 웨이브스』(Breaking the Waves)의 여주인공 베스처럼 거의 성도착이라 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남편을 위해 고통받아야 하는 것인가? 그녀를 치료했던 의사는 법정에서 그녀의 죽음은 정신 질환 때문이 아니라 '선함'(goodness; la bont ) 때문에 초래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고 진술하였다. 베스는 과연 레비나스적 주체의 사례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타인을 위한 '대리'를 하나의 보편적 규칙으로 레비나스가 제안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타인을 대신해서, 그를 위해서 고통받는다는 것은 자아가 바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주체의 주체됨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뜻깊은 모험이고 지극히 친밀하고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에 어떠한 일반적 예를 통해 제시되거나 건덕적인 담론으로 얘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만일 이것을 일반적 규칙으로 만들어 버릴 경우 대리적 고통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라고 레비나스는 역설한다. 이러한 지적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타인을 위한 고통이 시민 사회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레비나스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에 대한 무한 책임 대신 상호성이 시민 사회의 특징이다. 시민사회는 사람들과 더불어 주고 받는 것으로 레비나스의 말처럼, '거래'와 '대차대조표의 작성'에 의해 유지된다. 이러한 질서('존재의 질서' 또는 '도시[폴리스]')의 삶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이며 법에 의해서 유지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질서가 법과 경제, 정치의 논리로만 정말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의로움, 공정성, 사랑, 신뢰, 희생, 반대급부에 대한 고려 없이 거저 줌, 베풂, 이와 같은 것들이 있어야 존재 질서 자체가 유지될 수 있지 않는가? 존재 질서를 가능케 하는 요소들은 존재 질서 '안'에 속한 것이 아니라 '존재와 다른 것'으로 '존재 사건 저 쪽'에 있다는 것을 레비나스는 강하게 주장한다. 존재 질서 자체는 그에 따르면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conatus essendi)이 지배한다. 그러므로 '가까움', '대리', '타인의 고통을 짊어짐' 등과 같은 주제는 '도시[폴리스]'의 삶의 가능 조건으로서, 존재유지 노력과는 다른 자유롭고 빈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문제가 남아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인을 위한 나의 의로운 고통"은 의미 있을 수 있다. 뒤집어 보면 '나의' 고통 또는 '너의' 고통이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볼 때 사람들이 괴로워한 것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경험한 무의미한 고통이었다. 고통은 언제나 '나의' 고통 또는 '우리의' 고통이었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전통을 뒤집어 놓는다. 그의 관심은 내가 받는 고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받는 고통에 있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비나스의 관심은 타인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고통의 물음에 관련해서 관심의 축을 '나' 또는 '우리'로부터 '타인'으로 회전시킨 점에서 레비나스의 독창성이 있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이러한 관심 축의 전환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통받는 개인이 고통 중에서, 예컨대 아내나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가운데, 자신의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을 무시할 수가 없다. 각자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주관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이라고 하더라도 의미 발견의 과정은 개인의 삶에 대한 이해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는 것은 어떤 경우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차피 고통 자체가 아무리 집단적으로 당하는 고통이라 하더라도, 고통 자체로서는 언제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감성적'으로 와 닿은 것이 아닌가? 문화적, 상호 주관적 해석의 틀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할지라도 그것은 고통 그 자체의 경험에 비하면 역시 부차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통은 고통받는 사람의 품성을 매우 냉소적이고 폐쇄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매우 고상하고 개방적으로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고통과 씨름하는 사람은 결코 그로 인해서 완전히 절망하지는 않는 경우를 우리는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욥의 경우를 보라. 그의 고통은 타인을 위한 고통이 아니었다. 타인과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야말로 아무 이유도 없이, 무슨 목적도 없이, 무의미하게 받는 고통이었다. 만일 '타인'을 위한 것이었다면, 또는 '무엇'을 위한 고통이었다면 욥의 고통은 천상에서 내기를 한 하느님을 위한 것이었고 하느님이 그에게 둔 신뢰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고통은 결코 대속적 고통은 아니었다. 하지만 욥의 고통이 완전히 무의미한 고통이었다고 할 수 있는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드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도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5)라고 욥은 마침내 말하지 않는가?  이와 같은 예는 씨.에스.루이스나 월터스토프 또는 박완서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모든 예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고통을 쉽게 수용하지 않으면서, 참다운 신뢰와 믿음 가운데, '영원자'와 끝까지 싸운 사람은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도 결국에는 어떠한 의미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아무도 고통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손봉호 교수의 주장대로 "고통 당해 본 사람은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배우고 타인의 존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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