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cle Bank

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6/11/16 (03:01) from 129.206.196.147' of 129.206.196.147' Article Number : 493
Delete Modify 김수용 Access : 5407 , Lines : 336
『파우스트』에 나타난 악(惡)의 본성





                  『파우스트』에 나타난 악(惡)의 본성


김수용 (연세대)

                                     

1


괴테(Goethe)의 『파우스트 Faust』에 대해서 새로운 논문을 쓴다는 것은 현재의 연구 현황으로 보아서 거의 절망적인 작업이다. 그럴 것이 『파우스트』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괴테의 생존시에, 그것도 작품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불붙은 이 작품에 대한 논의는 그후 끊임없이 지속되고 확대되어 지금은 그 윤곽조차 파악하기가 불가능한 엄청난 괴물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괴테의 탄생 250주년이 되는 금년에도 세계 각처에서 무수한 논문과 책이 이 “위대한 인류의 유산”에 대해서 집필될 것이고, 연구의 현황을 헤아리는 작업은 더욱 더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것이다.1)  


그러나 지금까지의 『파우스트』연구에서 확인되는 하나의 특기할 만한 사항은 대부분의 연구가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주인공인 파우스트(Faust)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하여 그의 상대역인 메피스토펠레스(Mephistopheles), 근원적 진리 인식의 불가능성에 대해 절망한 학자 파우스트를 연구실에서 이끌어 내어 삶의 다양한 현실로 안내해 주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동반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그를 악(惡)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끊임없이 노력한 악마 메피스토는 상대적으로 연구자들의 큰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연출가들과 배우들이 이 악마에게 보인 큰 관심과는 아주 대조를 이루고 있다.2)


메피스토가 학문적 관심의 중심 권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은 이 악마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정형화되고 고착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메피스토에 대한 연구는 종교학적, 신학적, 그리고 심리학적 분석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 결과로서 메피스토는 마니교(Manichäismus)적 관점에서 선(善)에 대치되는 하나의 독립적인 원칙으로서의 악의 대변자로서 파우스트와 대등한 상대역으로 해석되거나,3) 아니면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기본적으로는 선의 한 부분이나 특별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신의 도구로서 이해되거나,4) 아니면 근대 심리학적 분석에서 파우스트의 또 다른 자아 (Alter ego)로서 파우스트의 의식, 또는 무의식의 한 부분이 투영된 존재로서 파악된다.5) 철학자 헤겔은 메피스토를 “순수한 부정의 형상화”로,6) 그리고 게오르크 루카치는 “악의 원칙의 벌거벗은 형상화”로 규정하고 있다.7) 그러나 순수한 부정이 무엇이며, 이것이 왜 악의 카테고리에 속해야 하는지, 또는 메피스토라는 존재를 통해 형상화된 악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악은, 기독교 문명권의 학자들에게는, 자세한 설명이 없어도 그 자체로서 자명한 것으로 생각되는 듯 하다.


위의 연구 성향과는 달리 이 논문은 메피스토의 악의 본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려고 한다.8) 이러한 접근은 우선 ‘악’을 모든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의 보편적이며 근원적인 원칙으로 파악하지 않고, 매 시대마다 그 성격과 현상을 달리하는 시대적 산물로 파악함을 전제로 한다. 즉 모든 시대마다 악에 대해 논의했고, 악의 존재를 인정해 왔지만, 이들이 악이라고 규정한 것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상이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악의 개념에 대한 한 연구서에서 슈미트-비게만(Wilhelm Schmidt-Biggemann)은 악이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역사는 “‘무엇이 언제 악으로 불렸는가’의 역사”라고 강조한 바 있다.9)


이러한 역사적 고찰에 있어서 괴테의 작품 『파우스트』의 소재를 이루고 있는 파우스트 전설, 즉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먹은 파우스트 박사의 전설이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이 시대는 중세이래 계속되어 온 기독교적 신본(神本)주의 규범이 새로운 인본(人本)주의적 사상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신의 보편적 권위에서 풀려난 개개의 인간은 자신만의 새로운 형이상학적 안식처를 찾아야 했다. 파우스트 박사의 전설 역시 이러한 새로운 추구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괴테가 파우스트의 집필을 시작한 때가 18세기 후반, 다시 말하면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이 그 정점에 달한 시기라는 사실도 메피스토적 악의 본성을 역사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에 타당성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그럴 것이 계몽주의는 특유의 비판 철학적 회의와 불신 및 부정을 통해서 기존하는 모든 권위, 무엇보다도 교회의 권위를 사실상 해체해 버린, 유럽 정신사 및 사회사에서 전무후무한 혁명을 성취했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하여 강조될 사항은 메피스토가 자신의 본성을 부정(否定 Negation)으로 단정하고 있으며, 또 불신, 회의, 아이러니, 풍자가 그의 존재의 양식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메피스토의 본성에는 많은 계몽주의적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메피스토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유럽의 계몽주의를 대표하고 있다는 사실이 파우스트 연구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기도 하다.10) 그러나 왜 계몽주의적 특성이 악의 본성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필자가 아는 한 아직은 체계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 계몽은 악마의 저주일까?


메피스토적 악의 본성을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와의 연관하에서 고찰하려는 본 연구 논문은 메피스토라는 인물에 계몽주의 사상의 대두로 인해 야기된 당시의 시대적 위기 현상이 결정화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명제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하면 괴테가 메피스토라는 악마의 형상화를 통해서 전무후무한 하나의 문학적 “위기의 현상학”을 제시하고 있다는 가설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문의 결론 부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2


파우스트가 메피스토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우주의 근원적 질서에 대한 인식의 불가능성을 깨닫고 절망에 빠진, 이른바 학자 비극이 그 정점에 달한 때 이었다. 개의 모양을 하고 파우스트의 서재에 들어온 악마는 그의 존재의 본성을 묻는 파우스트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는 항시 부정하는 정신이오!

  그런데 그건 정당한 일이지요, 그럴 것이 생겨나는 일체의 것은

  의당 멸망하는 가치밖에 가지지 못했으니 말이지요.

  그러니 차라리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오.

  그래서 당신들이 죄니

  파괴니, 요컨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의 본래의 요소이지요. (V. 1338ff.)11)


위의 인용문에서 메피스토는 “죄”와 “파괴”를 그의 악이 가진 두개의 본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악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절대적 부정과, 그리고 이 부정으로부터 연유되는 절대적인 절멸(絶滅)에의 의지이다. 그는 “생성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가치를 철저하게 부정한다. 메피스토적 부정은 따라서 모든 존재에 대한 근원적 부정이며, 그가 말하는 “파괴”는 “존재의 박탈”을12)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부정과 파괴를 “죄”로 규정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그럴 것이 일체의 생성되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원론적인 물리적 법칙에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다시없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멸의 필연성에 대한 무지가 존재의 파괴를 죄라고 부르는 원인이라는 것이 메피스토의 항변이다. 그렇다면 악은 물리적 법칙의 또 다른 표현, 즉 이 법칙의 숨김없는 형상화일까?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의 죽음 직후 그와의 긴 여정을 되돌아보며 다시 한번 존재와 무, 생성과 소멸이라는 양극적 이원론에서 부정과 파괴라는 자신의 존재의 본성을 규정하고 정당화한다.  


  지나갔다고! 어리석은 말이로다.

  지나간 것과 순수한 무라는 것은 완전히 같은 것이다.

  이 영원한 창조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창조된 것은 모두 허무 속으로 끌려가기 마련인데!

  “자 이제 지나갔다”니, 거기에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아예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데도 무엇이 있는 것처럼 돌고 있으니.

  나는 그 대신 저 영원한 공허를 좋아한다. (V. 11595ff.)


말하자면 메피스토는 창조의 유일한 의미를 창조 그 자체의 지양(止揚 Aufhebung)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위의 예문의 “순수한 무”, “허무 속으로” 또는 “영원한 공허” 등등의 단어들은 메스스토적 부정의 궁극적 결말이 바닥 없는 허무주의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13) 그가 창조의 역사를 덧없음의 전시장으로 이해하기에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소멸을 지향한다”(V. 11550)라는 확신은 이 악마에게는 우주의 가장 근원적인 원칙이다.  


악마의 이 같은 허무와 소멸의 필연성에 대한 절대적 확신 및 이 확신에 근거한 존재의 파괴라는 ‘악’의 정당화를 소피스트적 궤변이라고 일축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럴 것이 모든 존재의 무상함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메피스토적 존재의 부정은 모든 세상사의 덧없음을 강조한 솔로몬의 설교나 불교 사상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상함을 자신의 존재의 원칙으로 삼은 메피스토는 왜 ‘악마’로서, 그리고 그의 부정과 파괴의 행위는 무슨 까닭으로 ‘악’의 형상화로서 이해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혹시 그의 부정이 물질적 존재의 부정을 넘어서는 또 다른 차원의 부정일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물음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메피스토는 오로지 존재의 물리적 무상함 때문에 존재의 부정에 이른 것일까, 아니면 그의 부정은 이 존재의 형태와 수준과 질, 그리고 아마도 그 총체적 의미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는 좀더 본질적인 부정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말이다.


악마 메피스토가 파우스트의 영혼을 걸고 신에게 내기를 제안한 “천상의 서곡”은 이 비극의 형이상학적 구조를 결정지은 곳으로서 작품 전체를 통해 가장 유명하고 또 논란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막이 오르면서 라파엘, 가브리엘, 미하엘의 3명의 대 천사는 장엄한 어조로 천상, 지구, 그리고 대 자연으로 현현된 신의 창조를 찬양한다. 그들의 찬양은 “비록 아무도 당신의 깊은 근본을 캐지는 못하지만,/ 당신의 드높은 업적은/ 그 첫날처럼 장엄합니다”(V. 268ff.)라는 후렴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이 후렴을 뒤집어 해석해 보면 이 대천사들 조차 창조의 장려함을 노래하고 있으나 창조의 근원적인 의미의 인식에는 이르지 못했음이 드러난다. 이 근원적 의미는 신만이 알 수 있는 마지막 진리임이 간접적으로 암시되는 것이다. 위의 예문에서 특기해야 될 사항은 “당신”으로 표현된 신과 창조가 동일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신의 깊은 근본을 캔다”는 것은 창조의 마지막 의미를 인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서 등장한 메피스토는 신의 창조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그에게 창조는 “창조주의 실패작”14)일 따름이다. 그가 특히 의문시한 피조물은 인간이었다. 그는 이 실패작 인간의 실패의 근본 원인을 인간 본성의 이중성에서 찾는다:


 내가 보는 거라곤 오로지 인간들이 고통받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지상의 작은 신은 항시 같은 꼬락서니입니다.

 그 첫날과 마찬가지로 기이하기 짝이 없지요.

 당신께서 이들에게 하늘의 빛의 허상을 주시지 않았던들

 이자들은 좀 더 잘 살수 있을 겁니다.

 이들은 이 허상을 이성이라 부르고 이것을 다른 어떤 짐승보다

 더 짐승같이 사는데 만 이용하고 있습니다.(V. 280ff.)


메피스토가 그리고 있는 인간의 모습은 완전한 도덕성이 구현된 신성과, 그리고 이러한 도덕성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동물적 본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분열되고 모순된 존재이다. 인간에게 이성의 희미한 빛(즉 하늘의 빛의 허상)이 주어졌기에, 그의 본성에는 완전한 신성을 향한 갈구가 있게 마련이며, 이러한 갈구는 인간이 동물적 상태에서 아무런 사유의 짐이나 고통 없이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어느 의미로는 행복한 낙원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하늘의 빛이 실체가 아니고 허상이기에, 다시 말하면 불완전하고 미약하기 짝이 없는 이성이기에, 그의 신성에 대한 갈구는 동물적 욕구 충족의 본능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 본능과 항시 갈등 관계에 있기 마련이다. 완전한 도덕성과 철저한 야수성, 이 양자 사이에서의 방황이야말로 인간의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이 메피스토의 진단인 바, 악마의 이러한 진단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럴 것이 파우스트가 “아, 내 가슴에는 두개의 영혼이 살고 있어, / 하나는 또 다른 하나로부터 떨어져 나오려 한다. / 하나는 거친 육욕에 빠져서,/ 거머리 같은 조직으로 현세에 집착하고,/ 다른 영혼은 이 진세로부터 힘차게 솟구쳐 나와/ 고귀한 선인의 영역으로 들어서려 한다.”(V. 1112ff.)고 한탄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인간의 보편적 이중성에 대한 고통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피조물 인간의 이러한 ‘근원적’ 결점이 개선되지 않는 한, 신의 창조는 실패작일 수밖에 없고, 이 세계는 메피스토에게는 “늘 그러듯이, 형편없이 조악하기만 할뿐이다”.(V. 296)  


신과 메피스토 모두에게 이러한 방황하고 모순된 인간의 상징적 존재가 바로 파우스트이다. 그가 악마의 말대로 “하늘로부터는 가장 아름다운 별들을,/ 그리고 세상으로부터는 모든 지고의 쾌락을 요구하며,/ 모든 가까운 것과 모든 먼 것이/ 그의 깊이 들끓고 있는 가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V. 304ff.)것은 파우스트의 내면에 인간의 이중성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이성은 그에게 그때마다의 한계를 뛰어넘어 신성을 획득할 것을 요구하는 데 반하여 그의 야수성은 그를 동물적 존재에 얽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가 본성적으로 ‘불안정’한 것은 그가 이 두 개의 상극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해야 하기 때문이다.15) 메피스토는 파우스트의 이러한 상황을 “바보”의 “미친 짓”으로 규정하지만(V. 301, 303), 신은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린다:


 비록 그가 지금은 혼란 속에서 나를 섬기고 있으나,

 나는 그를 곧 밝음으로 인도하리라.

 나무가 푸르러 지면 정원사는 아는 법,

 꽃과 열매가 앞으로 올 계절을 장식하리라는 것을.(V. 308ff.)


악마와 신의 이런 상이한 견해는 메피스토가 철저하게 현재의 상황을 근거로 하여 판단하는 반면, 신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같이 고려하고 있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어느 정도 드러났듯이 신은 창조의 현재적 상황에 대한 메피스토의 비판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신 역시 지금의 상황, 특히 인간의 현 상태가 완전한 것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묵시적으로 동의한다. 그러기에 신은 파우스트에 대한 언급 중, 그가 “지금은 혼란 속에서” 신을 섬기고 있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러나 신은 파우스트를 ‘미래’에 “밝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표시한다. 지금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불완전함은 앞으로 완전함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조된 세계의 전반적인 상태, 특히 인간의 현 상황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신과 악마간의 근원적 차이는 악마의 시선이 현재의 실재 상황에 고착되어 있는 반면에 신의 시선은 ‘미래’로 향하여 있고, 그래서 ‘가능성’과 ‘발전’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의 이러한 미래 지향과 발전 지향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신과 그로 표상 되는 창조가 메피스토가 판단한 것보다 훨씬 더 다층적이고 의미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신의 판단에 따르면 창조는 완전한 것도, 그리고 완결된 것도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무한한 형성의 과정에 있는 것이다. 즉 신성(神性)은 완전성이 아니라 미래로의 발전의 가능성에 내재하는 것이다. ‘천상의 서곡’에서 신이 거듭 거듭 강조하여 자신을 “영원히 살아서 생동하는 형성”(V. 346)16)과 동일시하고 있음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창조는 끝없는 형성의 과정을 통하여 완전한 창조를 지향하며, 인간은 영원한 발전의 과정을 통하여 신성을 획득하여야 한다. 신의 이러한 창조의 이해는 작가인 괴테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 1829년의 한 대담에서 괴테는 “신성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동하는 것에서 활동한다. 신성은 형성되는 것, 그리고 변형되는 것에 존재하는 것이지 이미 형성되어진 것, 그래서 굳어져 버린 것에 있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바 있다.17)


창조를 ‘영원한 형성’의 관점으로 보면 파우스트로 상징되는 인간의 끝없는 불만족 역시 악마의 견해와는 달리 전혀 다른 의미를 얻게 된다. 즉 이것은 ‘바보’의 ‘미친 짓’이 아니라 불완전한 창조를 완전한 창조로 발전시켜 가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창조적 행위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불만족은 만족을 지향하는 행동의 동기를 이루는 것이다. 이성과 본능적 욕구, 절대적 도덕성과 절대적 감각성, 신성과 동물적 본성 사이에서의 인간의 방황, 고통, 갈등은 미래를 향한 형성과 변형의 행위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 형성이 무한한 과정이기에 인간은 그 어떤 도달된 것, 그 어떤 성취된 것에도 만족하거나, 안주해서는 안 된다. 그는 매번 도달한 한계를 끝없이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파우스트처럼 “하늘로부터는 가장 아름다운 별들을,/ 그리고 세상으로부터는 모든 지고의 쾌락을 요구하며,/ 모든 가까운 것과 모든 먼 것이/ 그의 깊이 들끓고 있는 가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존재는 신의 창조를 완성해 가는 상징적인 대리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를 인간의 언어로 옮긴다면 인간은 끝없는 형성과 변형의 행위를 통해서만 역사를 발전의 과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로 귀착된다. 인간의 영원한 불만족, 이 불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한 끝없는 행위는 세계의 역사가 생성과 소멸의 영원한 반복이 아니라 ‘발전’과 ‘과정’이라는 두개의 카테고리를 연결시키는 긍정적인 복합 개념이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18)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Hegel)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절대적으로 철학적인 비극 (die absolut philosophische Tragödie)”으로 규정한바 있다.19)   


그러나 인간의 현 상황은 메피스토가 강조하고 신도 인정했듯이, 매우 불완전하며 모순에 차 있다. 그러기에 그의 행동은 완전할 수 없고, 필연적으로 잘못을 수반하게 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V. 317)라는 신의 말은 이러한 상관관계의 이름이다. 그러나 “방황”이나 길 잃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창조는 완성되지 못하고 역사는 발전의 과정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실이 인간의 행동과 방황에 근원적 의미를 부여하며, 또 인간의 속죄와 구원의 가능성도 궁극적으로는 이 사실에서 기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끝없는 갈구와 이에 따른 행동은 “미친 짓”은 결코 아니다. 그럴 것이 이 행동은, 그것이 비록 불완전하고 잘못된 것일 수 있어도, 창조를 완성시키고, 역사를 발전의 과정으로 만들어 가는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또 인간 행위의 소산으로서의 업적은 흔적 없이 소멸되는 무상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발전이자 진보이며, 완성으로 향하는 영원한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단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와 업적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태어남과 죽음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라, 가치와 의미를 창출해 내는 창조자로서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메피스토적 니힐리즘, 즉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소멸을 지향하며, 생성과 소멸의 무의미한 반복이 세계의 근본 법칙이라는 허무주의가 극복됨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논의된 “천상의 서곡”에서의 신과 악마의 대립되는 세계 해석을 살펴보면 기독교의 신학과는 다른 아주 독특한 선, 악의 개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이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되기에, 행동은 올바르고 그른 차원을 떠나서 그 자체로서 ‘선’을 향한 인간의 의지의 표현이다. 파우스트가 성서의 번역에 있어서 그리스어인 logos를 “말”, “의미”, “힘”, “행위”로 차례로 번역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20) 즉 진리인 “말”은 궁극적으로는 “행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에서는 행동의 부정, 즉 비행동, 신의 표현으로는 “절대적 휴식”(V. 341)은 선의 부정으로 나타나게 된다. 신은 따라서 인간이 선을 지향하게끔, 다시 말해 행동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신은 바로 이 역할을 악마인 메피스토에게 내맡기고 있다:


  인간의 활동력은 너무나 쉽게 느슨해져,

  금방 절대적 휴식을 좋아하곤 하지

  그래서 나는 인간에게 기꺼이 저 녀석을 붙여 준다.

  그는 자극하고 일깨우면서 악마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V. 340ff.)


위의 예문은 ‘창조’ - ‘행동’ - ‘악’ 사이의 연관관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메피스토는, 비록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신의 세계 경영에 있어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메피스트로 대변되는 악은 절대 악, 또는 선과 대등한 독립된 대립 원칙으로서의 악이 아니라, 선의 한 부분임이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메피스토적 부정의 논리가 현실에서 많은 긍정적 역할도 수행할 수 있음에 대한 시사이기도 하다. 악 그 자체, 또는 칸트 적인 의미의 “극악(極惡 das radikal Böse)”에 대한 괴테의 거부감은 그의 청년기에 이미 뚜렷한 것이었다. “쉐익스피어의 날에”라는 연설문에서 괴테는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단지 선의 다른 면일 따름이다, 필연적으로 선의 존재에 속하며, 그럼으로써 전체에 귀속되는 다른 면 말이다”(HA12, 227) 라고 강조한 바 있다. 메피스토의 “나는 항시 악을 원하나, 항시 선을 행하는 힘의 한 부분”이라는 조롱 조의 반어적 자기 규정은 이 관점에서 보면 더 큰 원칙에 의해서 인도되는 창조의 과정에서, 메피스토의 의도와는 반대로, 진실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3


지금까지 설명된 대로 아직은 미완성인 창조의 현 상황, 즉 현세의 부정적인 현실을 종결 상황으로서 고착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발전이라는 진행 과정으로 이입시키기 위해서는 인간의 행동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 행동은 지금과 이곳의 현실에서, 말하자면 이 지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신의 말대로 악마의 역할이 나태해지기 쉬운 인간을 행동하도록 자극하는데 있다면, 악마의 영역 역시 이 지상이 되어야 한다. 악마는 인간을 지옥으로 끌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삶의 현장으로 유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신은 악마에게 이 지상에서 파우스트를 유혹할 완전한 자유를 인정한다: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한,

  그대에게 그런 짓을 금지하지 않으리라.(V. 315f.)


따라서 이 지상에서의 삶은 신, 파우스트, 그리고 메피스토의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영역이다. 신에게는 그의 창조를 완성시켜 줄 인간의 행동의 장소이며, 파우스트에게는 “지고의 존재를 향하여 항시 노력하는” 곳이며(V. 4685), 악마에게는 인간의 행동이 완성을 향한 진행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소멸해 버릴 결과만을 반복 생산하는 무의미한 행위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할 장소이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소멸을 확신하고 지향하는 바로 그 허무주의자 메피스토가 삶으로부터 고립되어 사색에만 몰두한 학자 파우스트를 무엇보다도 우선하여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행동하는 인간으로 변화시키려 하는 아이러니컬한 시도를 하는 것이다,21) 다음과 같은 유혹의 언

어를 구사하면서:  


  소중한 친구여, 이론이란 모두 회색 빛이라네

  그러나 삶의 황금 나무는 녹색이지. (V. 2038f.)

 

메피스토의 부정의 정신이 오로지 현실적인 것에만 고정되고 집착되어 있는 그의 시선에 근거하고 있음은 앞에서 이미 밝힌바 있다. 그의 철저한 현실주의(리얼리즘)가 미래의 완성을 믿고 지향하는 신의 모든 이상주의적 관점과 부정적인 대치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두개의 세계 해석이 아주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삶의 영역이 바로 황금과 남녀간의 성적인 사랑이다. 그럴 것이 이 두 영역은 인간의 가장 지고하고 도덕적인 품성이 그의 가장 비천하고 동물적인 욕구와 불가분의 관계로 얽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22) 신의 관점에서 본다면 재물 욕과 성욕이 인간의 가장 큰 욕구이기 때문에 황금과 섹스는 악마로 하여금 인간을 행동으로 자극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으로 판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이 두 욕구에 내재하는 비천함과 야수성을 그의 또 다른 본성인 도덕적 능력과 신성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창조, 즉 세계의 역사는 발전의 과정으로서 미래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얻을 수 있고, 이 과정에서의 인간의 행동은 의미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메피스토의 입장에서는 이 두 욕구에 내재하는 비천함이 신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함으로써 창조의 의미를 부정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파괴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토마스 만(Thomas Mann)은 메피스토의 본령이 “인간의 가장 비천한 것과 얽혀 있는 인간의 가장 지고한 것을 이 비천한 것이 삼켜 버리게 하는데 있다“ 라고 규정한다.23)


그럼 메피스토는 무엇을 수단으로 하여 이 비천함의 승리를 시도할까?


지금까지 여러 번 강조된 바와 같이 메피스토적 부정의 정신은 그의 철저한 현실주의에서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메피스토는 바로 이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본래적인 활동을 수행한다. 따라서 메피스토적 악의 본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이제는 이 악마의 현실주의가 가지는 여러 성격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성격들이 신의 미래지향적 이상주의와의 부정적 대치 관계에서 규명되어야 함은 자명한 일일 것이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 현실주의가 가지는 강한 반 사변적(反 思辨的) 성격이다. 미래에의 전망은 기본적으로 사변적이다. 그럴 것이 이것은 현실을 통한 구체적 실증의 뒷받침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피스토의 현실주의가 경험론적 및 물질주의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경험을 통한 그리고 물질적인 실증을 거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불신과 회의는 메피스토적 현실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오로지 물질적인 것의 한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초월이나, 아니면 실체적 현상들로부터 그 어떤 정신적인 이념을 도출해 내는 것은 따라서 이 악마에게는 거짓이자 위선적 사기 행위이다. 그러기에 이 악마는 오로지 물질적인 것, 오로지 현상적인 것 위에 존재할 수 있는 그 어떤 정신적 초월적 질서도 인정하지 않으며, 이러한 질서에 대한 열정이나 믿음에 대해 철저하게 반어적이며 풍자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메피스토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전형적 표본이며, 고조된 이념적 열광의 허상을 폭로하는데 최상의 정신 자세를 가진 존재이다. 모든 열광에 대해 그는 차가운 조소로, 모든 이른바 ‘진리’에 대해 그는 날카로운 비판으로 맞선다. 현대 철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 악마는 철저한 해체 주의자이다. 정신적 질서를 위한 규범으로서의 도덕률이 부정되는 것도 따라서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메피스토가 스스로를 “천재”(V. 3540)라고 추켜세운 것은 바로 이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럴 것이 천재는, 괴테 시대의 언어로는, 주어진 모든 규범과 질서를 거부하고 자아의 절대적인 자유를 고집하는 풀려난 주체를 칭하기 때문이다.24)


메피스트적 현실주의가 날카로운 비판과 아이러니, 이념과 열광의 허상과 모순을 뚫어 보는 깊은 안목, 그리고 번뜩이는 기지와 재치로 무장되어 있다 함은 이 현실주의가 하나의 독특한 ‘이성’(Ratio)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즉 현실적 합리주의가 악마적 본성의 기본 틀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합리주의가 현실적이기에 이것의 바탕이 되는 이성은 현실의 모든 현상들을 현실성의 한계 안에서 이해하고 분석하며 그들간의 관계를 규명하고 결론을 도출하는데 이용된다. 현실의 차원을 넘어서는 사변적 추론이나, 물질적 차원을 넘어서는 도덕적 요구 등은 이 합리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메피스토가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현실적으로 현명하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합리성의 결과이다.25)  


그러나 이 합리성은 모든 초월적 질서나 도덕적 제약, 또는 종교적 계율을 거부하기 때문에 오로지 ‘타산적(打算的)’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합리성’의 근간이 현실주의이기에 메피스토적 합리성은 철두철미하게 현실적 이해 타산의 형태를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 합리성은 필연적으로 현실적 이해관계 위주의 강한 유용론적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유용론적 이성이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능력을 가지지 못하기에 이 합리성은 자신이 추구하는 현실적 목적을 위한 최상의 수단을 계산해 내는데 전념할 뿐 이 목적이나 수단의 도덕적 가치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메피스토적 합리성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계산적 오성(kalkulierender Verstand)”26), 그리고 아도르노(Theodor Adorno)와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가 “목적 이성(Zweckrationalität)”27)이라고 부른 사유형태와 본질적 성격에서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악마적 합리성에서는 사유는 오로지 ‘도구’로서만 기능할 뿐이며,28) 이 합리성이 추구하는 목적은, 롤프 그리밍어(Rolf Grimminger)가 단언하듯, “진실이나 도덕의 그 어떤 가치와도 동질성을 지니지 않는다”. 이곳에서의 목적은 그것이 단지 ‘목적’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즉 일종의 “목적의 목적론 Teleologie des Zwecks”이 형성되는 것이다.29) 메피스토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이 목적 이성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힘이 있으면 권리도 있는 법,

  무엇을 했느냐고 묻지, 어떻게 했느냐고 묻지는 않는다. (V. 11184f.)


메피스토의 철저한 ‘실증적’ 현실주의가 극도의 ‘실용적’ 현실주의의 성격도 가지게 됨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악마가 어떠한 인간적 배려나 감정적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냉정한 계산가인 사실도 이러한 도구적 이성의 결과이다.


그러나 메피스토적 현실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은 철저한 에고이즘 내지는 자아 중심적 사고이다. 그가 어떤 종교적 믿음이나 형이상학적 진리도 부정하기에, 즉 제 멋대로들 흩어져 있는 무수한 현상들을 하나의 전체로 묶어 주며, 그 중심에 서서 구심점 노릇을 할 수 있는 그 어떤 초월적 질서도 인정하지 않기에,30) 그는 모든 것의 중심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이 에고이즘은 모든 정신적 가치를 부정하고, 모든 도덕적 이념적 질서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 극한적인 현실주의의 마지막 결론인 것이다. 악마가 모든 것을 자신의 위주로 생각하며, 같이 살아가는 다른 존재에 대해 아무런 정신적 연대감도 가질 수 없는 것은 이 절대적 에고이즘의 필연적 결과이다. 동정심이나 연민, 또는 사랑의 감정 등은 메피스토의 영역이 아니다. 그의 의식에는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오로지 자신의 자아에게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악마의 에고이즘을 직감적으로 감지한 것은 바로 그레첸이었다:


  그 자가 무엇에도 동정심을 가지지 않았음은 보면 알지요;

  그의 이마에 쓰여 있어요,

  그가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고요. (V. 3488ff.)


파우스트를 사랑하며 그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그레첸이, 즉 타인에 대한 사랑에 스스로의 자아를 매몰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바로 그 그레첸이 악마의 에고이스트적 본성을 더할 수 없이 날카롭게 꿰뚫어 본 것은, 그것도 이성적-논리적 분석이 아니라 자신의 직감을 통해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에고이즘과 사랑, 오성과 감정은 서로 상극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극한적 에고이즘이 인간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심각한 위협임은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메피스토적 에고이즘은 사회적, 공동체적 이념에 대해 파괴자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적 이념의 파괴는 물론 카오스로부터 창조된 질서의 세계를 다시금 카오스로 되돌리는 해체 작업을 의미할 것이다. 바로 이 질서의 파괴와 카오스의 복원이 메피스토가 자신의 본성으로 밝힌 “파괴”의 구체적 실체임은 자명한 일이다.31)



                                      4


앞에서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메피스토가 황금과 남녀간 사랑의 두 영역에서 인간 행동의 모든 이상주의적, 정신적 의미를 파괴하려 한다면, 그는 이제까지 설명된 자신의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황금은, “모든 것으로 변할 수 있는”(V. 5782) 이 금속은, 오로지 인간의 추악한 탐욕의 대상으로 전락하거나 이것을 탐하는 사람들을 서로 싸우고 죽게 하는 불행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아니면 황금은 순박한 여인들을 유혹하여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도구 노릇을 해야 한다. 메피스토가 파우스트의 명으로 그레첸을 유혹하기 위해 보석 선물을 마련한 것은 이에 대한 하나의 전형적 실례이다. 아니면 황금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개개 구성원의 이기적 탐욕심을 자극하여 이 공동체를 해체 위기로 몰아넣어야 한다. 메피스토에의해 고안된 지폐, 이 실질 가치가 없는 허상의 황금이 일깨운 이기적 재물 욕은 한 제국의 기틀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들어 놓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금은 사람들이 소유하려는 욕심을 극복할 수만 있으면, 엄청난 긍정적인 역할도 할 수 있다. 작품 제 2부에서 이 지고의 금속은, “수레를 모는 소년 Knabe Wagenlenker”과 “오이포리온 Euphorion”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고의 정신적 힘과 사랑의 힘”을 대변한다.32) 물론 이들이 황금을 소유하는 부가 아니라 ‘낭비하는’ 재화로 생각하기 때문이다.33) 파우스트가 마지막으로 추진한 사업, 바닷가에 둑을 쌓아 쓸모 없는 개펄을 개간하여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의 기반으로 만들려는 시도 역시 황금의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상징적 실례이다. 부는 창조적 행위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남녀간의 사랑 역시 황금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의 가장 고귀한 형태로 승화될 수도 있고, 가장 동물적인 욕구 충족의 행위로 전락할 수도 있다. 사실 남녀간의 사랑은 가장 근원적인 창조 행위이다. 그럴 것이 이 사랑을 통하여 생명이 잉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녀간의 성적 교섭은 신에 의한 인간 창조를 지상에서 대신하는 지고의 성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또한 사랑은, 동물적 소유욕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상대방에 대한 헌신과 자아 희생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남을 위한 자신의 희생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강한 동물적 본성인 에고이즘을 억제하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이상적인 공동체 구성의 근본이기도 하다. 그레첸이, 이 평범하고 순박하며 단순한 시골 처녀가 그녀가 겪어야 하는 모든 고통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에 대해 아무런 원망이나 분노도 느끼지 않으며, 그를 절실하게 원하면서도 자기 곁에 붙잡아 두려는 모든 욕구를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적, 영적 사랑이 가져다준 위대한 도덕적 능력이었다. 그러기에 두 사람은 진정한 사랑의 순간에는 영혼과 영혼이 교감하는 합일 체를 이룰 수 있었다.34) 비록 이러한 모든 행위가 악마 메피스토에 의해 끊임없이 조롱되고 회화화 되었지만. 그럴 것이 이 현실적, 물질론적, 실용주의적 합리주의자에게는 남녀간의 사랑은 섹스 행위가 전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동물적 욕구 충족을 넘어서는 여하한 애정이나 헌신적 배려는 그에게는 거짓이자 위선이었다. 메피스토가 파우스트를 “초감각적인 감각적 구애자”(V. 3534)라고 조롱하는 것은 파우스트가 아무리 진정한 정신적 사랑을 하는 체 해도 결국은 그레첸의 육체에 대한 욕구로 결말이 나리라는 확신에서이었다. “당신에게 때로는/ 당신 자신을 속이는 즐거움을 허락하리다”(V. 3297f.)라는 그의 말은 파우스트의 고상한 척 하는 사랑이 동물적 성욕에 대한 거짓 포장일 뿐이라는 메피스토적 폭로이다.


모든 정신적 요소가 배제된 오로지 육체적인 욕구의 충족, 이러한 동물적 섹스행위가 근원적인 창조 행위로서의 이성간의 사랑이 될 수 없음은 발푸르기스의 밤에 브로켄산의 정상에 모여 악마들과 광란적인 성의 축제를 벌리는 마녀들의 고백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들의 전도된 성행위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 그야말로 반짝반짝하게 몸을 씻었지만

 어린애는 영영 밸 수 없다오.(V. 3988f.)


황금과 성의 극한적인 악마화는 사탄의 다음과 같은 ‘산상 교훈’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사탄 (오른편을 향하여)


 장려하고 위대한

 두 가지 물건이 있다

 번쩍이는 황금과

 여인들의 음부이다

 하나는 마련해 주고

 다른 하나는 삼키니

 둘을 같이 얻은 자는

 복을 받은 것이다.35)


 (왼편을 향하여)

 너희에게는 고귀한 광채의

 두 가지 물건이 있다.

 번쩍이는 황금과

 번들거리는 꼬리36)가 그것이다

 그러니 너희들 여자들은

 황금을 즐거워하고

 그 황금보다 더

 꼬리를 칭송하거라.37)


부와 남녀간의 사랑은 이곳에서 완전히 물화 되었다. 정신적인 고귀함과 인간적인 품위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근원적 창조의 행위와(성행위)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황금의 긍정적 가능성)은 오로지 탐욕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분명해진 것처럼 메피스토의 부정과 파괴는 인간의 행동 그 자체를 향한 것은 아니다. 그가 부정하려는 것은 인간의 행동이 미래의 그 어떤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관점이며, 그가 파괴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몇 차례 강조된 바와 같이 메피스토에게는 인간의 행동은 결국은 소멸되는 쓸모 없는 것들을 반복하여 생산하는 무의미한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행동의 지속으로서의 인간의 삶과 존재 그 자체도 무의미한 것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불완전한 존재, 빛과 암흑, 또는 신성과 동물적 본능 사이의 모순된 본성, 그러기에 이 양극 사이에서 방황하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비극적 필연성을 내포한 삶, 그리고 이 같은 삶의 과정에서 고통을 감내 해야 하는 존재, 이러한 인간의 총체적 상황에서 미래의 가능성과 희망을 부정한다면 인간의 삶과 세계의 존속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철학자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인간의 비극은 그가 이 세상에서 겪어야 할 고통 때문이 아니라 이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 회의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는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고통을 당해야 하나? 하는 절실한 질문에 답이 없다는 사실이다. (---)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 고통의 의미가 분명하다면, 즉 고통의 목적이 드러난다면, 그는 고통을 바라고 심지어는 추구할 것이다.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 없음이 인류 위에 내려진 저주였다.38)


메피스토는 바로 이 고통의 의미를, 즉 삶의 의미를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의문시되고 해체되어야 하며, 인간의 모든 행동으로부터는 그 내적 가치가 박탈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삶은 영원한 의미 없는 반복이 되어야 하며 세계의 역사 또한 발전이 아니라 끝없는 순환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악마적 의도의 마지막 결론은 극한적 허무주의와 의미 없는 존재에 대한 절망일 것이다. 그리고 절망은, 실존철학자 키르 케고르(Sören Kierkegaard)에 의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이 비극은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뿐,/ (---)/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V. 12104ff.) 라는 신비의 합창으로 막을 내린다.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라는 말은 모든 현상적인 것, 소멸되는 것은 또 다른 실체, 더 높은 차원의 실체의 비유일 뿐, 그 실체는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39) 그러나 메피스토에게는 또 다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각할

수 없고, 인지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현상 뒤편의 실체는 그에게는 환상이고 거짓일 뿐이다.  


파우스트가 죽음 직전에 본 미래의 모습, “자유로운 땅에 자유로운 사람들과 함께”(V. 11580) 살아갈 미래의 유토피아적 공동체에 대한 환상적 체험의 순간은 파우스트에게는 삶의 의미가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지고의 순간”(V. 11586)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역시 메피스토에게는 무의미한 “공허한 순간”(V. 11589)일 따름이다. 그럴 것이 이 극한적 현실주의자에게는 모든 미래의 유토피아적 비전은 실현되지 않은 이상적 상태의 묘사이며, 따라서 착각이자 한낱 환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해서 이 악마에게는 속아서 어머니를 독살하고, 오빠를 죽게 했으며, 태어난 아이를 절망적 상황에서 살해한 그레첸의 법에 따른 처형은 처형 이외의 그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심판 받았소”(V. 4611)라는 악마의 말에 이은 위로부터의 목소리, “그녀는 구원받았노라”(V. 4612) 라는 하늘로부터의 음성을 그가 들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모든 존재는 소멸되고 그 끝은 허무라는 절망과 부정의 철학만이 이 악마에게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5


본 연구 논문의 서두에서 필자는 메피스토가 대변하는 악이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에 의해 야기된 당시의 위기의식과의 연관하에서 고찰될 수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메피스토의 본질적 성격들이 어느 정도 규명되었기에  이제는 양자 사이에 어떠한 구체적인 관계가 성립될 수 있는지? 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18세가 유럽의 계몽주의는 삶의 모든 분야에서 “급격하고 위험한 변화들”40)을 초래했다. 왜냐하면 계몽주의의 비판철학은 사람들에게 자율적으로 사유할 것과 주어진 모든 사회적 규범 및 사유의 틀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율적으로 사유하는 개인의 해방은, 루시엥 골드만(Lucien Goldmann)에 따르면 “인간의 사유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하며 결정적인 전환”을 가져왔다.41) 그럴 것이 스스로 사고하려는 의지, 오로지 자신의 이성에만 의거하여 주어진 모든 규범과 다르게 사고하려는 의지는 기본적으로 모든 정신적, 종교적 후견(後見 Vormundschaft)의 거부를 의미하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기존하는 모든 ‘진리’들, 그리고 이들 기성 진리들의 배후에 있는 사회적 규범 및 제도들과의 충돌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어 왔던 것들, 이들은 이제 비판적이며 회의적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율적으로 사유하고 판단하는 주체의 엄격한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더 이상 ‘진리’로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 생각하라는 요구는 그때까지 결코 있어 본적이 없는 “지적 공격성”을 내포하고 있었다.42) 계몽주의의 가장 혁명적 성향이 바로 이 자율적 사유의 요구에서 기원한다고 단정해도 이는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특히 절대주의 국가와 기독교 교회에 대한 비판적 의문시는 엄청난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럴 것이 이 같은 비판적 검증으로 인해 비록 낡았으나 하나의 전체로서 기능 하던, 그리고 그 안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동질적 삶이 가능했던 세계의 두 축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칼 마르크스(Karl Marx)도 봉건주의의 와해를 통합적이며 유기적인 형태의 공동체적 삶의 붕괴로서, 즉 “부르주아지 사회의 이기적 정신을 묶어 놓았던 끈이 떨쳐져 버린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43)


전통과 제도의 와해는 모든 것으로부터 소외되고, 철저하게 고립되어 오로지 홀로서 존재해야 하며, 그 어떤 외부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개개인간의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왔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적 인간의 고립화가 궁극적으로는 심각한 사회적 혼란과 무정부적 상태를 초래하리라는 불안감으로 이어질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즉 교회와 국가의 후견으로부터의 자유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일면으로는 실존적 불안을, 그리고 타면으로는 “한 집단적 세계상의 파괴”44)라는 엄청난 역사적 현상과의 직접적인 맞닥뜨림을 가져온 것이다. 현대의 정신적 상황을 특징 지우는 위기의식의 근저에는 바로 이러한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와 공동체적 위기에 대한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페터 퓌츠(Peter Pütz)가 확인한 바와 같이, “아나키로의 전도”45)라는 위험성만을 내포한 것이 아니었다. 18세기의 계몽주의 운동은 그 전개 과정에서 오로지 타산적 고려에서 합리성을 찾는, 즉 이성을 단순한 “계산적 오성”으로 전락시키는 ‘유용론’이라는 또 다른 하나의 타락 현상을 보여주었다. 이 유용론적 합리성은 메피스토의 현실적 합리주의 분석에서 이미 “목적 이성”으로 규정된 사유의 형태와 동일한 것이다.


이미 설명된 바와 같이 이성이 목적 추구의 도구가 되어 자신을 “목적 이성”으로 전락시키면, 이 이성을 매개로 하는 사유는 인간적인 성격을 상실하고 기계화된다.  그럴 것이 이 목적 이성은 이루려 하는 목적에 대한, 그리고 취하려 하는 방법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능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이성에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가장 유용한 수단을 계산해 내는가? 하는 문제이지 이 목적이나 수단의 도덕적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유는 도덕적 의구심으로 인한 어떠한 망설임도, 그리고 인간적 가치 판단으로 인한 어떠한 내면적 갈등도 없이, 오로지 효율성의 원칙에 따라 기계처럼 굴러간다. 사유는 “저절로 진행되는 자동적 과정으로 물화(物化)”되는 것이다.46) 바로 이러한 변질된 계몽 운동의 도덕적 타락을 쉴러(Schiller)는 가장 심각한 시대의 악(惡)으로 간주하였다. 그의 미학편지(Ästhetische Briefe)에서 쉴러는 “유용성이 시대의 거대한 우상이며, 모든 힘들이 이 우상에 봉사해야 하고, 모든 재능이 이 우상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라고 한탄하고 있다.47)    


지금까지의 논의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는 바와 같이 계몽주의 운동으로 인해 야기된 괴테 시대의 위기 현상은 메피스토적 악의 구현 형태와 뚜렷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모든 이상적인 것, 모든 초월적인 것들의 실체에 대한 폭로와 파괴를 지향하는 메피스토적 아이러니와 회의는 그 본성에 있어서 계몽주의의 사유의 자율성이 내포하고 있는 “지적 공격성”과 맥을 같이 한다. 비판적 이성이 양자 모두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단 메피스토의 경우에는 이 “지적 공격성”이 현실주의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과격화되어 있을 뿐이다.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는 인간을 무지와 후견 및 폭력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드높은 목적을 내걸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전술된 바와 같이 “과격하고 위험한 변화들”이 초래되었으며, 이 변화들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앙시엥 레짐”이라는 낡은, 그러나 내적인 동질성을 가진 세계의 파괴는 단지 하나의 예에 불과 하다. 또 다른 수많은, 예상치 못한 부정적 현상들이 뒤를 따라 역사적으로 현실화되거나, 또는 급박한 장래의 위험성으로 감지되었다. 계몽운동의 이러한 부정적 현상들은, 무정부상태와 카오스에서 세계의 총체적인 체계화까지, 그리고 철저한 비판적 이성에서 극한적인 유용론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게, 때로는 서로간에 극단적인 상극의 형태들로 나타났다. 이 모든 계몽의 “부정적 변증법”은48) 괴테 시대 시인들의 의식의 기저를 형성했으며, 괴테는 그가 온 몸으로 체험한 이 시대의 위기적 현상들을 악마 메피스토 안에 형상화했다. 메피스토적 악의 현상은 그 시대의 역사적 위기의식의 결정체인 것이다.


역사상 얼마나 많은 끔찍한 행위들이 ‘미래’와 ‘이념’의 이름으로 행하여 졌고,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지를 고려해 보면, 쉴러의 말대로 “정치적 행복의 이상을 아나키의 모든 만행을 통해 추구하고, (미래의) 좀 더 좋은 법률을 위해 (현재의) 법률을 짓밟으며, 다음에 올 세대의 행복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금의 세대를 비참속에 내던져 놓고도 아무런 의구심도 갖지 않는” 끔찍한 행위들을 고려해 본다면,49) 모든 이념과 이상과 초월적인 것들에 대해 회의적이며 파괴적인 메피스토의 비판적 이성과 아이러니는 분명히 천사(天使 Engel)일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이 현대의 출발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새로운 복음(福音 Evangelium)이었다는 사실과, 그리고 바로 이 이성이 메피스토에게서 철저하게 전도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메피스토는 결국은 타락한 천사임에 틀림없다. 바로 이 관점에서 괴테가 형상화한 이 악마는 현대의 루시퍼(Luzifer)일 수 있을 것이다.



http://dsl.german.or.kr/cf99fall/txt/vort2.hwp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