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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6 (07:10) from 84.173.190.39' of 84.173.190.39' Article Number :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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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성 지위에 대한 주요 해석들에 대한 역사비판적 검토




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15, 98. 12




인과성 원리의 지위에 대한 주요 인식론적 해석들에 대한 역사비판적 검토*


문 장 수 외 2인**


<국문요약>


우리가 연구하고자 하는 본래의 과제는 양자역학에 있어서 비국소적 인과성의 철학적 함의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 20년 동안 우리 학계에 발표된 인과성에 관한 논문 및 연구서를 전부 합쳐도 5편을 넘지 않는 것 같다. 서구의 철학사와 과학사 안에서 인과성 문제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하면, 인과성 문제에 대한 우리 학계의 연구는 너무나 빈약한 실정이다. 인과성 문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의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문제와 관련된 주요 용어들의 번역도 아직 정립된 것 같지 않다. 따라서, 양자 역학에서의 비국소적 인과성이라는 새로운 국면의 철학적 함의를 해석하기 이전에, 예비적 연구로서, 먼저 인식론사에서 원인, 결과, 인과관계 그리고 인과성 원리 등의 의미 내지는 지위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우리는 인과성 원리의 지위에 대한 주요한 다섯 가지의 입장,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실재론적 패러다임, 데까르트의 합리론적 기계론의 패러다임, 흄의 현상론적 패러다임, 칸트의 선험주의적 패러다임 그리고 영미의 언어분석적 패러다임 등에 있어서 인과성의 개념 및 인과성 원리의 지위를 차례로 개괄했다.

전체 논의를 종합해 보면, 인식론적 패러다임들에 따라 다소 의미론적 뉘앙스를 달리하지만, '인과관계' 또는 '인과성 원리'는 적어도 다섯 가지의 상호 함축적인 의미 내지는 문제를 내포한다 : 변화 또는 힘, 영혼, 시간적 질서, 필연성, 보편성.

인과성에 관한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정립할 수 있겠다. 우선 첫 째로, 이러한 인식론적 변이들의 구분과 관계하여, 일차적으로 분명한 것은,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대립에서 보듯이, 어떤 입장이 타당하다고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 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과성에 관한 패러다임들의 전개는 인과성 개념의 진화, 즉 실재론적 방향에서 구성주의의 방향으로의 진화를 분명히 보여준다. 즉 변화, 힘, 영혼 등의 관념과 결부되어 있는 인과성 개념은 점진적으로 순수 수학적 차원의 방정식에 고유한 동등성 개념으로서의 인과성 개념으로 대체 되었다. 말하자면, 원인과 수단은 방정식의 전항과 후항의 관계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분명한 것은 인과성 원리의 지위에 대하여 논하는 모든 논의자들은 자기의 논의의 소재를 각자의 개인적인 지각적 소여 또는 다양한 의식 내용의 분석에서 구하거나, 혹은 학적 연구 성과들, 특히 외적 세계들의 질서에 대한 물리학적 설명의 셰마들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사실 흄의 인과성의 분석은 우리의 지각적 인상들인 한에서의 원인들의 가장 기본적 형태들의 분석이었고, 칸트의 인과성 분석도 지각적 계기적 연결과 특히 뉴턴 물리학적 설명 셰마의 분석에서 구성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과성 원리의 지위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후천적인 해결을 위해, 발생학적 접근의 의미를 강조할 수 있겠다. 네 째로, 인과성 원리의 지위는 인식론적 패러다임들의 구분의 결정적 근거이다라는 것이다. 인식론적 패러다임들의 구분에 근거하여, 인과성 원리의 지위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인과성 원리의 지위의 차이들 때문에 인식론사의 다양한 해석적 패러다임들이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인식론적 패러다임이 보다 적절한가의 문제는 인과성 원리의 진정한 지위가 무엇인가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런데 위에서 분석했듯이, 인과성 개념은 시간, 공간, 수, 변화, 힘, 필연성 등의 다양한 부대 관념을 함축하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은 대단히 포괄적인 연구를 요청한다. 그리고 다섯 째로 지금까지 제시된 대부분의 인식론적 패러다임들은 인과적 필연성과 논리적 필연성을 제대로 구분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을 다른 지면, 즉 「발생학적 인식론의 관점에서 조명된 인과성 원리의 지위」에서 시도하고자 한다.



1. 예비적 고찰


서구의 철학사와 과학사 안에서 인과성 문제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하면, 인과성 문제에 대한 우리 학계의 연구는 너무나 빈약한 것 같다. 인과성 문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의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문제와 관련된 주요 용어들의 번역도 아직 정립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기존의 일반적인 통용을 무시하는 것도 혼란을 야기할 수 있겠기 때문에, 이하에서 우리는 '인과작용'과 '인과관계'를 교환적으로, 말하자면, 거의 동의어로 사용할 것이다.

반면에 'Causality'는 'The principle of causality'라는 구절인 한에서 사용된다. 이 원리는 "모든 결정된 현상은 어떤 결정된 원인을 갖는다", 즉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라는 관념을 함축한다. 즉 문제의 원리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성을 함축하는 한 추상 명제이다. 말하자면, 'Causality'는 추상성 아래에서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성을 지시하듯이, 이를 '인과성'으로 번역함이 적절할 것 같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Cause'(원인), 'Causation'(인과작용 또는 인과관계), 'Causality'(인과성)을 각각 구분적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양자 역학에서의 비국소적 인과성이라는 새로운 국면의 철학적 함의를 해석하기 이전에, 먼저 인식론사에서 원인, 결과, 인과관계 그리고 인과성 원리 등의 의미 내지는 지위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이에 우리는 이하에서 인과성 원리의 지위에 대한 주요한 다섯 가지의 입장,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실재론적 패러다임, 데까르트의 합리론적 기계론의 패러다임, 흄의 현상론적 패러다임, 칸트의 선험주의적 패러다임 그리고 영미의 언어분석적 패러다임 등에 있어서 인과성의 개념 및 인과성 원리의 지위를 역사비판적를 역사-비판적으로 재구성할 때 잘 지적해 주듯이, 과학자들의 모든 학설이 실증적인 실험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즉, 갈리레이가 물체의 자유낙하 속도는 물체의 무게에 상관없이 똑 같다는 것을 정당화할 때, 또는 아인쉬타인이 그의 동료 연구자들과 소위 E-P-R 역설을 제안할 때, 그들이 의존한 것은 구체적인 실증적 실험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에 의한 실험, 소위 <사고 실험>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문제의 실험으로부터 어떠한 연역적 체계를 구성했는가를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문제의 실험에 예비적으로 접근할 때, 활용한 셰마 또는 형식적 모델들과 그것들의 인식론적 본성들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 또는 셰마들을 착안하게 한 선행하는 상황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또는 이 문제가 그 이후에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으로 개괄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다섯 가지의 패러다임과 관계된 인과성의 의미 내지는 지위를 단순히 소개하는 데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의 궁극적인 연구의 목표는 오늘날 양자철학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논쟁들 중의 하나인 비국소적 인과성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하의 연구는 이러한 우리의 연구를 보다 근본적으로 풍부하게 하기 위한 한 분과연구이다. 그런데, 모든 연구가 다 그렇듯이, 우리는 일련의 결론적 방향을 갖고 있다. 때문에 이 예비적 내지는 분과적 연구에서도 우리의 일관된 해석의 관점을 지면이 허락하는 한에서 노출시킬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전체 연구는 인과성 개념의 정신발생, 사회발생 그리고 인식론적 해석들의 역사적 변형들이라는 세 가지 차원의 연구를 종합하여, 최종적으로 인과성에 대한 구성주의적 구조주의의 해석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세 번째 문제, 즉 인과성 원리의 지위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들만을 분석하고자 한다. 동시에 특히 이 논문에서는 인과성 개념을 둘러싼 근본적인 문제를 정립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의 명료화는 이미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실재론적 패러다임과 4 원인


인과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설명한다'는 것은 결국 '원인'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있어서, 원인 관념의 중요성은 자기 스승인 플라톤의 학적 체계의 토대인 수학적 사유에 대한 평가절하에서 유래한다.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수학적 사유들은 오직 사물들의 양적 양상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양상들은 사물들의 본질 혹은 형상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에 속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또한 이러한 수적 개념들은 추상화의 산물이라고 그는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적 개념들이, 플라톤이 생각하듯이, 그것들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이상적 관념들이라고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진리는 플라톤, 갈릴레이, 데까르트 등이 생각하듯이, 수학적 사유에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 자체에 고유한 근원을 찾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진리는 물리학적 설명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무엇보다도 일차적인 실재는 자연이다. 우리 인간까지 포함해서 존재하는 것은 자연 속에 있다. 자연은 물질적이면서 운동에 종속하는 대상들의 전체이다. 이렇게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로 자연 실재론적 패러다임 안에서 인과성 원리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네 원인, 즉 질료인(cause matérielle), 동작인(cause efficiente), 목적인(cause finale) 그리고 형상인(cause formelle)을 말한다. 잘 알고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네 원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어떤 조각 동상의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질료인이란 청동을 의미하며, 동작인은 그 조각상을 만드는 조각가의 행동 또는 일을 의미하며, 목적인은 그 조각상을 만들려고 하는 조각가의 어떤 의도, 목적 내지는 그 조각상이 가지게 될 가치를 지시하며, 형상인은 완성된 조각상 그 자체를 지시한다. 사실, 문제의 동상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청동이라는 재료, 조각가의 노동, 동상의 가치나 의미 그리고 그 동상의 기하학적 형태 등이 요구될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있어서, 형상인(본질)과 목적인은 결국 동일한 일자이다. 모든 질료는 형상을 향하여 나아간다. 이런 관점에서 형상은 단순한 발생학적 형태일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물질들이 실현시키려고 하는 목적이다. 이에 비해, 질료인과 형상인은 서로 대비된다. 이러한 대비를 구성하는 것은 운동인이다. 즉 운동인은 목적인과 형상인을 결합시킴으로써, 형상을 단순한 질료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게 한다. 결국 물리학의 목적론적 특성은 형상인과 목적인의 이러한 동화에 근거할 것이다.

이러한 조각상의 완성을 시간적 질서에서 분석한다면, 우선 재료가 준비되고 다음에 이 재료에 변형을 가하는 노동이 첨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질료인과 운동인이 형상 그 자체보다 선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리적 차원, 즉 단순히 시간적 생성의 차원이 아니라, 문제의 동상이 탄생하게 된 보다 근원적인 이유의 관점에서 볼 때, 조각가가 문제의 동상을 만들겠다는 의도나 목적이 선행되어야 하며, 조각가의 정신의 이러한 의도나 지향성이 발생된 것은 문제의 형상 그 자체의 존재 당위성일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인과 목적인이 질료인과 동작인보다 더 근원적인 것이고,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형상인의 우선성이 질료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형상의 실현은 이러저러한 질료적 조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톱은 철로 만들어야 하지 양모로 만들 수는 없다. 톱을 만들기 위해 철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충분적이지는 않다. 톱의 정의는 톱의 형상이지, 철 자체는 아니다. 말하자면, 질료인은 필연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따라서 결국, 어떤 개체의 정의를 구성하는 것은 형상이다. 그런데, 질료인과 형상인이 아무리 이처럼 대비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양자를 엄격히 분리시킬 수는 없다. 톱의 정의를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형상은 사실은 톱의 그 뾰족뾰족한 형태, 말하자면, 톱의 기능과 관계된 기하학적 형태이다. 흙으로 동일한 형태를 만들 수는 있지만, 이 경우엔 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질료란 차원도 어떠한 개념적 적용도 허용하지 않는 최초의 비결정적 물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양모, 흙, 철 등의 질료는 이미 모종의 기능적 형태론적 적용의 범위를 한정하고 있다. 즉 형상은 질료를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존립한다. 그리고 사실 질료와 형상은 상대적인 것이다. 형상으로 간주되는 모종의 차원이 있을 때, 이 차원보다 하위의 단계는 이 문제의 차원에 대해 질료로 간주되지만, 반대로 보다 상위의 차원에 대해서는 문제의 그 차원 자체 질료로 간주된다. 그러나 원인의 원인을 무한적으로 추적할 수는 없다. 더 이상 어떠한 원인에도 의존하지 않는 부동의 원동자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종합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 개념은 복합적이다. 즉 그것은 질료, 운동, 목적 그리고 형상 등을 함축한다. 그런데, 이러한 네 관념들은 서로 연관적인 개념들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적 관념이다. 그리고 이 목적 관념은 바로 '영혼' 관념을 함축한다. 팔을 들 때, 일반적으로 우리가 먼저 팔을 들겠다고 '사유'(의도)한 후에 팔을 들 수 있듯이, 생명적 유기체의 활동의 원리는 '정신'이다. 그리고 내가 팔을 들겠다는 의도를 가졌다면, 아무런 목적 의식 없이 그러한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결국 일체의 의도, 목적, 가치 등의 담지자는 정신이다. 결국은 식물의 성장을 통제하는 것이 식물혼이라면, 동물들의 모든 활동을 지배하는 것은 동물혼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도 마찬가지로 정신적 가치나 목적에 지배된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 관념은 생물학적 추리 및 인간의 도구사용적 맥락에서 유추된 개념이다. 원인은 목적이다. 목적은 혼의 문제이다. 그러나 혼은 자연 자체를 떠나서 초월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신체의 종말과 함께 혼도 소멸한다. 혼 그 자체 신체의 실현이다. 결국, 자연의 변화의 원인, 운동의 원리, 생명의 원리, 혼, 형상은 서로 교환적인 개념들이다.



3. 데까르트의 합리론적 기계론의 패러다임에 있어서

인과성 원리의 지위


먼저 데까르트적 합리론적 기계론에 있어서 인과성 원리의 지위에 대해서 말하자면, 데까르트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원인, 즉 질료인(cause maté- rielle), 목적인(cause finale), 형상인(cause formelle) 그리고 동작인(cause efficiente) 중에서 질료인과 목적인은 제거하고 형상인과 동작인만을 인과성 논의의 대상으로 취급하며, 나중에는 형상인과 동작인 양자를 동일한 일자, 즉 신으로 간주한다.

그렇게 하여, 데까르트는 오직 하나의 원인만 인정한다. 생명체까지 포함하는 일체의 물질은 자기 스스로 존립된 것이 아니라, 창조된 피조물이고, 나아가서 그 자체는 어떠한 원동력도 이러한 운동력의 근원으로 간주되는 영적 실체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질료인과 목적인은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사실 섭리 또는 진화 관념을 함축하는 이러한 질료인과 목적인 개념은 데까르트의 합리론적 기계론을 방해할 뿐이다.

이렇게 하여 데까르트는 형상인과 동작인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형상인은 각각의 개체들이 다른 개체로부터 구분되게 하는 개체성의 원리, 즉 불과 물을 구분케 하는 차이성의 원리, 불의 본질과 물의 본질의 구별의 원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형상인은 본질 개념과 연관된다. 반면에, 동작인(cause efficiente)이란 '실질적 원인'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으로, 어떤 개체의 발생, 실현, 포괄적으로 말해, 존재의 원인을 지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작인은 존재성에 관계된다. 어떤 사물의 존재는 누군가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들 때, 아무런 생각이나 관념도 없이 만들 수는 없다. 미리 정신적 도면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과와 배를 알지 못하고 사과와 배가 있다고 말할 수 없듯이, 대상들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그 대상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이렇게 하여, 데까르트는 본질이 존재에 선행한다고 본다. 신의 존재론적 증명이 잘 보여주듯이, 신의 존재성은 신의 본질에서 직접적으로 나오며, 나의 존재성의 확실성(코지토)은 나의 사유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회의, 나의 사유를 반성할 때, 이미 직관적으로 나의 존재를 이해한다. 마찬가지로 신이 미리 도면을 갖고 그 도면에 따라 세계를 창조한다면, 이는 신의 완전성 관념에 위반된다. 신에게 있어 사유와 존재, 의지와 행동이 구분될 수 없듯이, 그에게는 본질과 존재가 분리될 수 없다. 인식과 존재, 의지와 행동의 분리불가분성을 정초지우는 제 1 원리가 바로 데까르트에 있어서 순간성 개념이다. 이러한 순간성 개념은 결국 형상인과 운동인을 하나의 동일자로 간주할 수 있게 한다. 형상인이란, 오늘날 용어로 하자면, 사물들의 차별성의 원리로 간주할 수 있다면, 운동인이란 그 사물의 존재성의 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되어진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의미가 아니다. 어떤 사물과 다른 사물과의 차별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사물이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형상인과 운동인, 즉 차이성과 존재성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본질과 존재는 구별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사유가 동시에 우리의 존재이듯이, 본질이 곧 존재가 되고, 차이가 곧 현존이 되는 것을 보증하는 원리는 두 사태의 동시 순간성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이겠는가?

간단히 말하면, 데까르트는 자연과학이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인과성 법칙의 의미를 거부하면서 흄과 칸트에 훨씬 앞서 그것을 내적 관념의 결과로 생각했다. 자연과학이 통상 말하는 인과성 법칙의 의미는 인식 주관의 인식 방식과는 상관없이, 자연은 시간적 흐름에 종속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시간이 흐르므로 해서 모든 화학적 반응이 발생하며, 생명체들의 탄생, 성장, 죽음의 주기가 초래된다. 따라서 그 자체 외적 실재로 간주되는 시간은 우주의 운동과 변화의 제 1 원리로 고려된다. A의 상태에서 B의 상태에로의 변화를 야기하는 원리가 시간이다. 따라서 결국 인과성 원리는 시간성 원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운동, 변화, 진화 관념은 시간 관념의 내포이듯이, 이들은 또한 인과성 관념의 내포이다. 그러나 운동이란 단순히 인식 주관의 관점의 문제라고 간주하는 데까르트는 더 이상 진화 관념을 함축하는 인과성 개념을 물리적 세계에 적용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물리적 과정을 원인과 결과의 방식으로 연결하지만, 그것은 오직 우리의 실용적 도구적 인습적 사용일 뿐, 결코 자연 자체의 실제가 아니라고 데까르트는 말한다. 예를 들면, 현재 지금 여기에 있는 광선은 바로 그 직전의 광선의 결과라고 우리는 생각하며, 이 후자는 다시 그 직전의 광선의 결과로, 그렇게 하여 결국 태양이 현재의 이 광선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빛을 알기 전에 먼저 태양을 알지 못한다. 오늘날은 빛의 속도를 측정하기까지 하지만, 모든 관성 좌표계에 빛의 속도는 항상 일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 시사하듯이, 빛에 있어서 시간적 선후를 계산할 수 있는가? 말하자면, 태양과 빛은 동시적인 것이고, 이 양자를 구분하면서 시간적 지연을 그 사이에 부가한 자는 인식 주관 그 자신이 아닌가? 보다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세계는 단일 연속체인데, 여기에 분할과 관계를 준 인식 주관의 조작 때문에 운동, 정지, 흐름, 지속 등의 관념이 구성되었듯이, 물리적 세계 안에 시간성과 인과성을 구성한 장본인은 대상과 대상 사이에 필연성의 관계를 매김으로써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려는 인식 주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까르트는 "원인은 이성이다"(causa sive ratio)라고 말한다. 물리학적 현상들의 출현의 원인, 즉 동작인, 존재인, 실재인은 이성인, 형상인, 본성인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표현을 오늘날의 과학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물리학적 원인은 논리학적 근거이다'고 할 수 있겠다. 즉 데까르트는 인과적 필연성과 논리적 필연성을 동일시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데까르트에게 고유한 한 새로운 종류의 인과성을 본다. 그에 따르면, 원인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결과를 알기 전에는 주어질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원인은 결과와 동시동연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과에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그러한 원인이란 없다. 뿐만 아니라, 원인이라는 의미가 그 결과의 필연적 조건을 의미한다면, 결과와 조금이라도 구분되는 그런 원인은 원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결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원인 안에 있어야 한다. 원인은 결과에 결코 선행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과성 관념은 시간성 관념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결국 데까르트에게 있어서, 실질적인 원인은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더 이상 어떠한 존재자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존재하는 존재, 즉 신이다. 신을 제외한 다른 일체의 것은 신의 창조에 의해 존재한다. 현재의 현상은 이것에 직접적으로 선행하는 현상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그 순간에서의 신의 창조이다. 소위 여기서 신의 연속적 창조 이론이 유래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까르트는 자연의 연속적 보존 내지는 동일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러한 보존과 동일성을 보증하는 것은 신이라는 것이다. 즉 그가 유일의 실질적 원인은 신이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물리학적 영역에서 인과성 원리의 유용성을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의 인과적 계승질서와 논리 수학적 구조의 질서 사이의 완전 일치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들은 데까르트의 후계자들, 특히 말브랑쉬의 눈에는 아직도 미흡한 것으로 보였다. 즉 데까르트의 체계 내에서는 자연의 인과성이 여전히 실재론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심지어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까지 함축하는 것으로 고려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여, 데까르트적 인과성을 다시 두 가지 종류로 확고하게 구분한다. 즉 '실질적 원인'(cause efficace)과 '기회론적 원인'(cause occasionnelle)이다. 유일하게 실질적인 원인은 신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 속에서 일상적으로 사유하는 인과적 연결들은 신이 자기의 행동을 드러내는 '기회들'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계의 두 대상들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 연결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계의 대상들 사이에 모종의 연결이 가능한 것은 자연적 대상들 자체가 그러한 필연적 연결의 가능성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신이 바로 그 순간에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계의 인과관계는 실질적인 신의 효력(행동)에 자연법의 '형식'을 주게 하는 조건 내지는 기회일 뿐이다. 달리 말하면, 푸른 소나무를 보자마자 우리가 푸른 소나무를 인식한다면, 이는 푸른 소나무 자체가 이러한 인식을 갖게 한 실질적인 원인은 아니다. 그 푸른 소나무는 그러한 인식을 갖게 하는 기회로서의 원인이고, 이러한 인식의 실질적인 원인은 바로 그 때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한 신의 효력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적 인과성을 말브랑쉬는 '기회적 원인'이라 한다. 따라서 데까르트에서 말브랑쉬로 이어지는 '우인론' 혹은 '기회원인론'은 자연적 대상들 사이의 실재론적 인과성을 부정했을 뿐이지, 인과성 원리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의 '기회원인론'은 자연적 대상들 사이의 모든 관계는 신에 의해 미리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을 귀결시켰다.



4. 흄의 현상론적 패러다임에 있어서 인과성 원리의 지위


그러나 흄이 보기에는 데까르주의자들의 이러한 조치들은 아직도 미흡했다. 사실, 데까르트주의자들은 자연 실재론적 인과성 원리를 어느 정도 와해시켰지만, 인과성 관계 그 자체를 완전히 해체시킨 것은 아니었다. 즉 데까르트주의자들은, 아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 의하여 자연적 대상들 자체가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 원인을 신에게로 이양시켰을 뿐이다. 즉 데까르트주의자들은 인과관계의 적용방식을 대상들 상호간의 관계에서 신과 피조물의 관계로 대체했을 뿐, 인과 관계성 내지는 그러한 법칙을 문제삼거나 해체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흄은 이제 이러한 인과관계 그 자체를 완전히 해체하려고 한다. 즉 흄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재론적 인과성 개념도 데까르트적인 초월론적 인과성 개념도 동시에 해체하려고 한다.

흄은 우선 인과적 추론이 분석적 논리에 근거한 것인지 경험적 직관에 의존한 것인지를 문제삼으면서, 인과적 추론은 분석적 명제가 아니라는 것을 본다. 즉 인과적 추론을 구성하는 명제는 일자의 관념에서 다른 일자의 관념이 필연적으로 연역되는 그러한 a priori한 함축관계는 아니다. 그렇다면, 인과적 추론은 경험적 직관 혹은, 흄의 용어로 말하면, 경험적 '인상'에 의존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는 필연적 인과관계에 대응될 수 있는 경험적 인상들이 어떠한 것들인가를 조사한다. 즉 그는 원인 또는 결과로 명명되는 경험적 지각 내용들을 조사한다. 예를 들면, 자연 과학이 보다 발달하기 이전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번갯불과 뇌성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번갯불을 뇌성의 원인, 뇌성을 번갯불의 결과로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은 번개와 뇌성은 동시에 발생했지만, 빛의 속력이 소리의 속력보다 빠른 사실에서 번개가 치고 나면, 천둥소리가 뒤따르지 번개가 천둥의 원인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필연적인 인과관계라고 하는 것은 만사가 이런 식이다라고 흄은 결론 내린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과관계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그것은 두 사건 사이의 '공간적 인접성 관계'와 '시간적 선후관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에 인접해 있는 사건이 오직 하나 뿐인 것은 아니다. 공간적으로 아무리 인접한 두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 사이에 무한한 사건들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짧은 순간적 시간 간격 사이에도 그 사이에 또 다른 무한한 시간적 틈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과적 추론 또는 인과관계의 필연성은 경험적 인상들 혹은 지각들 자체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사실 인과적 관계에는 미래의 예측이 함축되어 있는데, 어떠한 인상도 이러한 미래적 예측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

인과적 추론은 분석적 논리, 즉 관념들 상호 간의 논리적 함축관계에도 근거한 것이 아니고, 경험의 외관적 혹은 은폐적인 인상들에도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이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가 ? 이는 제 3의 인식활동관계라고 명명할 수 있는 그러한 인식 활동에 의존한다고 흄은 말한다. 이러한 제 3의 인식 활동을 흄은 '일관성적 연합작용'(constant conjunction)이라 명명한다. 여기서 일관성의 차원은 경험적 반복을 의미한다면, 연합은 주관의 구성적 결합을 지시한다. 사실, 인과적 추론은 인접적인 계승적인 문제의 대상들이 그러한 인접성과 계승성을 일관성 있게 반복할 때에만 오직 그때에만 정립된다. 그러나 어떠한 대상들 사이의 계승이나 인접도 엄밀하게 동일하거나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대상들 사이의 계승 관계란 바로 지금 현재 문제시된 그 지각이나 인상에 한정될 뿐, 엄밀한 의미에서 지금의 현인상과 동일한 인상은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두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란 주관의 자의적인 결합일 뿐이다. 즉 이러한 결합은 분석적 연역적 결합이 아니라, 경험적 구성적 결합이다.

간단히 말하면, 흄에 있어서, 인과성 원리란 연합원리로 환원되고, 이때의 연합원리란 단순한 '습관원리'로 다시 환원된다. 이렇게 하여, 인과적 추론은 필연적 관계가 아니라, 인습적, 편리적, 습관적 상상력의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하여, 원인의 관념에 결부되어 있던 '변화', '힘', '새로움의 생성', '필연성', '시간적 선행성', '정향적인 방향성', '결정론' 등의 모든 관념들을 해체해 버린다. 필연적 인과성 관념의 이러한 해체의 극단화는 곧 모든 종류의 형이상학의 해체일 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과학의 해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연과학이 제한된 현상이나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을 해명하는 것이라면, 형이상학 혹은 철학은 그러한 원인들의 원인, 즉 제 1 원인을 해명하려고 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이기 하지만,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는 어느 정도 경험적 인상들의 반복에 의존한다는 차원에서 다소 덜 허구적이라면, 전체성의 요구에 의하여 경험적 지각들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형이상학적 원인들은 그만큼 더 많이 허구적일 것이다.



5. 칸트의 선험주의적 구성주의의 패러다임에 있어서

인과성 원리의 지위


흄이 칸트로 하여금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도록 했다면, 그것은 바로 전자가 후자에게 인과성의 관계는, 라이프니처가 생각한 것처럼, 단순한 '연역관계'가 아니라, '종합관계'라는 것을 일깨워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새로운 과학적 국면을 만났다. 그것은 당시에 비약적 도약을 보인 뉴턴 물리학이다. 뉴턴은 자신의 물리학이 구축한 a priori한 명제들을 "자연물리의 수학적 원리"라 명명했다. 흄적 경험론의 패러다임으로서는 이러한 뉴턴 체계의 필연성과 보편성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직관했다. 그렇게 하여, 순수 물리학의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는 선천적 a priori 종합판단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했다. 즉 물리적 대상 일반이 처음부터 주관의 a priori한 형식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시 주어진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따라서 칸트의 입장에서 인과성의 지위에 대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겠다. 우리가 '모든 현상은 원인을 갖는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판단을 수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종합적인 판단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일반인은 누구나 '모든 현상은 원인을 갖는다' 혹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차원에서, 인과성 원리 그 자체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며, 동시에 '현상' 개념은 '원인' 개념을 필연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차원에서, 즉 '현상' 개념에서 '원인' 개념을 분석적으로 도출시킬 수 없다는 차원에서, 이 원리는 종합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모든 사람들은 '바로 지금 여기는 이것에 직접적으로 선행하는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아는가 ? 칸트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 인간은 모두 시간이라는 감성의 선천적인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과성의 원리가 문제가 될 때, 우리가 의존하거나 관계하는 것은 현상의 단순한 본성 자체가 아니라, 시간성 안에서의 현상의 존재 양식인데, 이러한 시간은 이미 처음부터 주관의 감성적 직관형식이기 때문이다. 즉 시간은 공간과 함께, 외적 실재가 아니라, 외적 혹은 내적 대상 일반 혹은 현상 일반을 가능케 하는 주관의 a priori한 감성형식이다. 즉 일체의 현상은 우리의 감성형식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데, 이 때 문제가 되는 감성형식 내지는 틀이 시간과 공간 형식이다. 선천적 감성 형식으로서의 시간은 다시 세 가지 양태를 갖는다. 즉 '지속성', '계승성', '동시성'이다. 인과성 원리는 두 번째 양상, 즉 시간의 계승성에 의존한다. 즉 인과성 원리는 시간의 계승성의 양상을 다시 표현한 것이다 : "모든 변화들은 원인과 결과의 연결에 따라서 일어난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과 이러한 인식의 토대 내지는 근거, 칸트 식으로 말하면, 물자체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은 이미 감성의 선천적 직관형식인 시간에 의해 질서 지워지고 구성된 결과로서의 현상만을 인식한다. 즉 우리는 현상을 시간적 계승 질서 안에서만 인식한다. 따라서 현상의 객관적 관계를 보증하는 것은 흄이 설명하는 외적 단편적인 경험도 아니며, 현상의 토대로 상정된 물자체도 아니라, 바로 이러한 감성의 시간적 형식, 즉 인과적 관계성 그 자체이다. 따라서 인과성 원리는 외적인 단편적인 인상들을 토대로 하여 주관이 습관적으로 연결한 단순한 임의적, 편리적, 인습적 '연합'이 아니라, 감성의 시간적 형식을 준수하면서 대상들 또는 인식들을 '관계'시키는 오성작용, 칸트 식으로 말하면, 소위 오성의 12 범주들 중의 하나이다. 인과성 원리는 경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경험은 지각들의 필연적인 연결의 표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인과성 법칙 없이는 어떠한 필연적 인식도 불가능하다. 어떤 인식이 필연적이고 보편적인 것은 이미 인간 일반의 보편적인 인식 형식인 시간성과 이것의 오성작용으로의 연장인 인과성 원리라는 절대적인 구조에 의해 조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구성한 결과로서의 경험을 마치 우리로부터 독립적인 외적 객관적 실재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착각을 유발하는 것은 사실, 인식 내용은 경험적인 것인데 반해, 그러한 인식을 가능케 한 형식 내지는 범주는 선험적 차원의 것으로 경험적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험내용 중심주의의 사유 때문에, 시간 혹은 시간적 질서가 경험들의 연합에 의해 후천적으로 구성되는 '개념'인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지만, 인식내용으로서의 다양한 시간적 혹은 인과적 양태들 배후에는 절대적이고 사전적 조건으로 간주되어야 할 감성의 '순수 시간 형식'과 오성의 관계 범주인 '인과성'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따라서 시간성은 공간성과 함께 경험의 가능성의 일차적 조건이라면, 인과성은 시간적 형식을 준수하면서 서로 이질적인 두 현상 내지는 사건을 연결하는, 즉 판단을 내리는 오성의 한 작용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인과적 판단을 '선천적인 종합 판단'이라 한다. 이러한 인과적 판단의 구체적 내용들은 당연히 경험적 내용이지만, 이러한 인과관계를 가능케 하는 근본 원리, 즉 인과성 원리는 경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험적 원리라는 것을 칸트는 강조한다. 물리학적 인식은 한편에서 그의 대상 일반이 이미 감성의 선천적 직관형식인 시간에 의해 주어진다는 차원에서 선천적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인과적 연결이라는 것, 즉 상호 함축적 관계를 갖지 않는 두 대상 사이의 결합이라는 차원에서 종합적이다.



6. 현대 영미 인식론에서 인과성 원리의 지위


인과성 개념에 대한 현대 인식론의 경향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면, 한편에서는 영미의 언어분석주의 내지는 다양한 종류의 환원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유럽의 다양한 구조주의의 인식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조주의 인식론은 이 논문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미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현재의 요약 정리는 우리의 고유한 입장인 구성주의적 구조주의 인식론에 있어서의 인과성 개념을 정당화하기 위한 예비적 연구이다. 인과성에 관한 구성주의적 테마는 다른 지면에서 논구하고자 한다.

영미 인식론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들은 그들의 인식론적 대부인 흄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는 흄적 사유를 보다 극단화하든지 아니면, 흄적인 기본 논리를 인정하면서 흄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환원주의에 대해서 말하자면, 세 가지 종류의 주요한 환원을 본다. '자연법'(laws of nature), '일관성 있는 계열'(invariable sequence), '귀납적 일반화'(inductive generalization) 등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개념들 중 어떤 것도 엄밀한 필연성을 보증하지는 못하며, 그렇게 하려고 일종의 제한들을 주면, 필연적으로 순환성 오류를 범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이러한 환원주의자들 대부분 나중에는 인과성 원리를 언어적 인습의 문제로 귀결시키고 만다.

첫 번째로 인과성을 '자연법'에로 환원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자연법은 필연적인 것으로 고려하듯이, 따라서 인과적 연결도 필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발생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원리로서의 자연법은 두 사건의 필연적인 연결성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자연법 개념은 인과성 원리를 함축한다. 따라서 인과성 개념을 자연법 개념에 환원시키는 것은 동의반복, 즉 단순한 순환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밀, 맥타가(Mctaggart), 럿셀 등이 주장하듯이, 자연법 그 자체 불변적인 규칙이 아니라, 사실적 차원에서 발생한 개별적 사건들에 주어진 '진술상'의 불변성이다. 즉 자연법의 일관성 혹은 불변성은 언어에 의해 보증된 것일 뿐, 사실의 영역에서 자기 동일성은 없다. 동일성은 언어적 동일성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인 유명론 내지는 인습주의를 본다.

그러나 인과적 연결이 단순한 인습적 명칭일 뿐이라는 입장은 지지하기 어렵다. 명칭인 것은 사실이지만, 경험적 소여를 분명 갖는다. 그렇다면, 인과적 연결의 소여는 어떤 것인가 ? 여기서 두 번째 대안, '일관성 있는 계열'로서의 인과성 개념이 나온다. 그런데, A 사건과 B 사건 사이에 연계성으로서의 인과성은 오직 이 사건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A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B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필연성의 의미를 확보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유사'의 범위를 어떻게 정할 수 있는가 ? 사실 '유사성' 개념은 너무 느슨하며, 럿셀이 분석하듯이, 엄밀하게 A와 유사한 것은 A 자신뿐이다. 다시 말하면, 너무 느슨할 수 있는 '유사성' 개념을 보다 긴밀하게 하기 위해, 유사성의 조건들을 제한하면, 필연적으로 A는 A이다라는 동의반복에로 귀결된다. 즉 인과성 원리는 '어떤 적절한 관점에서 있어서 유사한 변화들 뒤에는 항상 어떤 적절한 관점에 있어서 유사한 다른 변화들이 뒤따른다'는 것을 지시한다고 하자. 이 원리가 필연적인 것이 되려면, 문제의 '적절한 관점'은 필연적으로 'A에 확실하게 유사한 사건과 B에 확실하게 유사한 사건을 인과적으로 연결시키는 관점'이어야 한다. 결국 A와 동일한 사건, B와 동일한 사건이 문제된다. 그러나 자연계엔 동일한 것은 없다.

인과성을 자연의 질서 자체로 간주하는 것도 거부하고, 그것을 칸트처럼 주관의 선험적 범주라고 간주하는 것도 거부하고, 그렇다고 단순한 언어적 인습적 구조로 간주하기도 거부하는 일련의 사람들은 이제 세 번째로 인과성 원리를 '귀납적 일반화'로 간주하고자 한다. 사실, 흄, 밀, 럿셀 등도 물리학적인 필연성, 충분성, 불가능성 등에 관한 진술 내지는 명제는 단순한 경험적 일반화, 즉 귀납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들의 입장은 인과성 원리는 경험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인과적 경험을 토대로 한 예측은 부정확하고 필연적일 수 없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점에서 아직 경험과 구조의 상호 침투를 놓치고 있다.

다음으로, 인과성 개념에 대한 일상언어분석학자들, 즉 하트(H. L. Hart), 호노르(A. M. Honore), 에이어(A. J. Ayer), 콜린우드(R. G. Collingwood) 등의 관점을 요약한다면, 약간의 개인차들은 있지만, 이들은, 한편으로, 인과적 필연성은 논리적 필연성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흄의 주장을 인정한다. 인과적인 연결의 예들의 분석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원인으로 고려된 어떤 현상 혹은 사건이 필연적으로 결과로 간주될 현상 혹은 사건을 함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들은, 흄이 생각했듯이, 이러한 인과적 연결을 단순히 상상력인 연합 내지는 인습으로 간주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고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밀에 의해 분석된 원인의 수다성과 결과의 수다성 개념을 받아들인다. 사실 사람의 죽음의 원인은 다양할 수 있고, 반대로 열은 다양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인과적 연결이 필연적 연결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과적 연결이 완전히 허구나 상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과적 연결은 무엇인가 ? 이들은 먼저 '원인'이라는 이 용어는 모든 사건들 또는 현상들에 항상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것이라고 간주되는 그러나 '통제 가능한' 사건을 만날 때 활용하는 용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들은 인과성 개념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사건의 '조건' 개념과 교환적으로 사용되는 그러한 개념이라고 진단한다. 즉 '원인'이란 우리의 일상언어에서 다음과 같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A는 B의 원인이다'라고 말할 때, 이때 A는 B의 필요조건을 의미하거나 충분조건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필요충분조건을 의미하는 식으로 느슨하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느슨한 사용을 보다 엄밀화 하기 위해 인과성 개념을 오직 필요충분조건만을 지시하는 것으로 제한할 경우, 원인과 결과의 질서가 뒤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적 질서 관념을 다시 끄집어 와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A가 B의 원인이다'라는 형식의 진술은 'A는, 모든 가능적인 발생들 중에서, B의 발생을 위해 시간적으로 B에 선행하는 필요충분조건 내지는 조건들의 집합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힘', '변화', '수단' 등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에 의존함이 없이, 인과성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일상언어분석적 정의도 '시간성'의 개념에 의존하는 한,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원인은 왜 결과에 선행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사용이다'라고 답함으로서 충분한가? 다시 말하면, 원인은 결과에 선행한다는 것은 단순한 언어적 사용 내지는 인습에 기인할 뿐, 사물들의 질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가?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건에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모든 사건들을 문제의 사건의 원인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왜 원인이 미래로만 작용하고 과거에로 작용한다고는 하지 않는가? 이런 것들도 단순한 언어적 인습의 문제일 뿐인가?

간단히 말하면, 다양한 환원주의자들도 일상언어분석학자들도 물리학적 인과적 구조와 논리 수학적 구조의 근본적인 차이가 어디에서부터 발생하는가를 보지 못하고 있다.


7.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인식론적 패러다임들에 따라 다소 의미론적 뉘앙스를 달리하지만, '인과관계' 또는 '인과성 원리'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상호 함축적인 의미 내지는 문제를 내포한다. 첫째로 인과성 개념은 '변화' 관념을 함축한다. "B는 A의 결과이다" 혹은 "B의 원인은 A이다"라고 말할 때, A에서 B에로의 변화를 함축한다. 그런데 이 때, 개입하는 변화의 지위에 대하여, 두 가지의 상반된 해석이 있다. 즉 이 변화는 전혀 새로운 실체를 탄생시키는 변화인가, 아니면 동일한 실체 내에서의 단순한 성질상의 변화인가? 종교적 내지 신학적 성향으로 편향되어 있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실체에로의 변형은 물론이고 극단적으로는 완전 무에서 모종의 원인에 의해 새로운 실체의 생성이 가능하기라도 하듯이 주장한다면,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완전 무에서 새로운 실체를 탄생시킬 수 있는 그러한 변화로서의 원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인과성 개념은 '힘'의 관념을 함축한다. 두 사건 또는 두 현상 A와 B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A에서 B에로의 변화를 고려할 경우엔, 그러한 변화를 야기시킨 모종의 '힘', 즉 '변화력' 관념을 동시에 소유한다. 즉 A와 B 사이에는 단순한 이미지 상의 교환이나 대체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미지의 대체에는 모종의 '힘'이 작용한다고 믿는다. 세 번째로 인과성은 '필연적 연결'의 관념을 함축한다. A는 반드시 B를 야기시킨다. A에서 C나 D는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국면을 두고 '인과성의 획일성'이라 명명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필연화의 방향'의 결정에 의거하여 '예측 가능성'의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 네 번째로 인과성은 '결과에 대한 원인의 선행성'을 함축한다. 즉 원인은 시간적으로 반드시 결과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 번째의 주요 문제는 인과성의 보편성 문제이다. "결과는 반드시 원인을 갖는다"라는 이 원리는 모든 영역에 다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과성의 보편성이란 인과성 원리 그 자체를 지시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인과성의 보편성'이라는 표현법과 '인과성의 원리' 라는 표현법은 상호 교환적이다.

이처럼 인과성 개념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때문에 인과성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들 또한 대단히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논구를 토대로 하여, 인과성 원리의 지위에 대하여 세 가지의 큰 흐름을 구분할 수 있겠다. 우선 첫 번째 모델은 고대 물활론적 자연실재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학 및 오늘날 극단적인 물리주의의 사유 모델에 고유한 입장이다. 이 입장은 인과성을 자연에 내재해 있는 고유한 경향성 내지는 자연 자체의 법칙과 동일시하려고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의 원인 관념은 변화, 힘, 또는 이러한 힘 개념의 실체화에 의한 영혼 등의 관념을 함축한다. 그리고 두 번째 입장은 흄의 현상론적 모델과 이의 연장인 꽁트의 실증주의 및 오늘날 다양한 유명론적 패러다임에 고유한 인과성 개념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인과성은 시간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인접해 있는 두 사건을 우리의 정신이 습관적으로 단순히 연합하는 데서 구성된다. 즉 인과적 연결은 어떠한 필연성도 갖지 못한다. 따라서 과학의 고유한 과제는 현상들의 단순한 기술이지 인과적 설명이 아니다. 현상발생의 본질적 양상을 획득하려는 일체의 인과적 탐구는 환상을 야기시키며, 따라서 비과학적 허구, 즉 형이상학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 입장에서는 인과성은 단순한 환상이거나 기껏해야 하나의 명칭일 뿐이다. 그리고 세 번째 입장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의 패러다임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인과성 원리는 인간 오성의 선험적 구조, 소위 보편적 필연적 인식의 선험적 '범주'이다. 즉 우리에게 인과적 필연성이 가능한 것은 감성적 직관의 내적 형식인 시간의 비가역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한편에서는 인과성은 자연의 질서 자체라고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주관의 선험적 구조라고 하고, 또 다른 극단적인 회의론자들 또는 유명론자들은 그것은 일종의 습관적인 환상 내지는 단순한 명칭일 뿐이라고 한다.

끝으로, 인과성에 관한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정립할 수 있겠다. 우선 첫 째로, 이러한 인식론적 변이들의 구분과 관계하여, 일차적으로 분명한 것은, 이러한 다양한 해석의 대립에서 보듯이, 어떤 입장이 타당하다고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 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과성에 과한 패러다임들의 전개는 인과성 개념의 진화, 즉 실재론적 방향에서 구성주의의 방향으로의 진화를 분명히 보여준다. 즉 변화, 힘, 영혼 등의 관념과 결부되어 있는 인과성 개념은 점진적으로 순수 수학적 차원의 방정식에 고유한 동등성 개념으로서의 인과성 개념으로 대체 되었다. 말하자면, 원인과 수단은 방정식의 전항과 후항의 관계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분명한 것은 인과성 원리의 지위에 대하여 논하는 모든 논의자들은 자기의 논의의 소재를 각자의 개인적인 지각적 소여 또는 다양한 의식 내용의 분석에서 구하거나, 혹은 학적 연구 성과들, 특히 외적 세계들의 질서에 대한 물리학적 설명의 셰마들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사실 흄의 인과성의 분석은 우리의 지각적 인상들인 한에서의 원인들의 가장 기본적 형태들의 분석이었고, 칸트의 인과성 분석도 지각적 계기적 연결과 특히 뉴턴 물리학적 설명 셰마의 분석에서 구성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과성 원리의 지위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후천적인 해결을 위해, 발생학적 접근의 의미를 강조할 수 있겠다. 네 째로, 인과성 원리의 지위는 인식론적 패러다임들의 구분의 결정적 근거라는 것이다. 인식론적 패러다임들의 구분에 근거하여, 인과성 원리의 지위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인과성 원리의 지위의 차이들 때문에 인식론사의 다양한 해석적 패러다임들이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인식론적 패러다임이 보다 적절한가의 문제는 인과성 원리의 진정한 지위가 무엇인가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런데 위에서 분석했듯이, 인과성 개념은 시간, 공간, 수, 변화, 힘, 필연성 등의 다양한 부대 관념을 함축하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은 대단히 포괄적인 연구를 요청한다. 그리고 다섯 째로 지금까지 제시된 대부분의 인식론적 패러다임들은 인과적 필연성과 논리적 필연성을 제대로 구분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문제들에 대한 보다 심호한 해결을 다른 지면, 즉 [발생학적 인식론의 관점에서 조명된 인과성 원리의 지위]에서 시도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연구는 발생학적 연구를 위한 토대마련으로 간주될 수 있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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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get, J., Traité de logique, Armand colin, Paris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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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ésumé]


L'étude histo-critique des importantes interprétations épistémologiques du statut du principe de causalité


Moun Jean-Sou, Choi Sang-Don, Jo Sang-Gyu(Kyungpuk Uni.)


Le but essentiel de cette thèse comme l'étude histo-critique des importantes interprétations épistémologiques du statut du principe de causalité est d'une part de manifester la nature de la causalité et ses problèmes essentiels et, d'autre part, de préformer le fondement valid pour l'étude de l'épistémologie génétique concernant ce problème, que nous allons développer dans l'autre essai.

Cette thèse analyse d'abord cinq interprétations épistémologiques sur l'idée de la causalité : la théorie des quatre causes par Aristote ; la causalité mécanique et la causalité conçue comme création, réservée à Dieu, par Descartes qui permet à Malebranche d'opposer de manière cohérente cause efficace et cause occasionnelle ; la causalité dans le pur phénoménalisme de Hume ; la causalité, chez Kant, comme catégorie de la relation ; la causalité dans la tradition nominaliste anglo-saxonne.

Mais par l'histoire des diverses interprétations, nous pouvons parler en conclusion que l'on ne peut pas a priori décider la nature de la causalité : se réduit-elle, comme le veut le positivisme, à un simple langage ou à une simple description des faits généraux, autrement dit à l'établissement de lois schématisant les constatations et rendant la prévision possible, ou bien fait-elle, comme la pensée mathématique, appel aux opérations elles-mêmes, mais dans le but de produire et d'expliquer le mode de production de phénomènes réels. Si c'est le cas, en quoi consiste alors la causalité? Faut-il y voir, avec Kant et sa postérité, une application de la déduction à l'expérience? En ce cas, quels sont la nature et le rôle de cette déduction ou de cette application? Mais on n'en peut pas facilement donner la réponse. Car l'idée de causalité comprend l'espace, le temps, la vitesse, la force, les notions de conservation, le hasard, etc.

Mais ces interprétations, qui débutent ou qui se manifestent assurément, à un certain niveau, par la construction des causes proprement dites, finissent par éliminer toute notion causale comme changement, force, psyché, au profit de notions simplement égales. Il y aurait cependant en ce cas évolution de la causalité, mais avec tendance à l'élimination de cette notion. L'examen préalable de l'évolution de la causalité ne présuppose donc aucune solution a priori à son égard, mais contribue au contraire à l'établissement d'une solution a posteriori et objective.

De ce point de vue, il est indispensable de partir de la psychogenè de l'idée de cause, car cette notion, quelles que soient les formes sous laquelles elle intervient en physique, est le modèle des notions de sens commun : aussi est-ce toujours sur le terrain de la pensée spontanée que les théoriciens de la causalité ont commencé par se placer avant de se prononcer sur la valeur de ce concept dans la connaissance physique elle-même. C'est en particulier par l'analyse des formes les plus élémentaires de causalité que l'on a toujours cherché à justifier l'origine empirique du rapport causal.


mots clefs : cause, effet, causation, principe de causalité, histo-cri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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