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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10/24 (22:32)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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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적 식별의 투쟁 - 폴 리꾀르의 현상학적 해석학

변증법적 식별의 투쟁

폴 리꾀르의 현상학적 해석학

                                

송명수








 1..여는 글



 최근의 현대 철학적 흐름을 조망해 볼 때, 전통적 독일 사변철학의 경직성이 잠시 수그러들고, 새로운 풍미를 지닌 불란서 철학이 세계를 자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란서 철학이란 대개 '포스트 모더니즘'이란 이름으로 대별되는 후기 구조주의의 문명비판적 사상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행과 사조 안에서도 전통적 반성철학의 맥을 이어 철학의 옛 개념을 쇄신하고, 현대철학의 핵심개념들과 대결하며 철학의 문제사 전체를 하나의 해석학적 철학 안에 통합하려는 진지한 시도가 있다. 불란서 철학자 폴 리꾀르는 그의 전 철학적 생애를 통해 현상학, 실존주의, 구조주의, 기호학, 분석철학, 심층심리학, 비판이론, 성서비판, 철학적 해석학을 집대성하여 그의 현상학적 해석학 안에 균형잡힌 모습으로 통합하고 있다. 그렇다면 철학의 미래적 흐름을 제대로 전망해보기 위해서는 리꾀르와의 의미있는 만남이 꼭 필요하리라고 진단된다. 그런데 리꾀르와의 초대면에서 제일 먼저 제기되는 질문은 이렇게도 차분하면서 정열적이고, 복잡하면서도 조화되어있고, 다양하면서도 일관성을 유지하는 특이한 철학을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일관성있게 추적해 나갈 것인가라는 연구 방법상의 문제이다.

 리꾀르를 올바로 해석해 내기 위해서는 리꾀르라는 개성적 실존에 의해 공론화된 다양한 텍스트들 속에서 하나의 일관된 텍스트-세계를 구조적으로 파악해내야 한다.  그리하여 내 나름대로 해석된 텍스트 의미와 그 준거 사이의 관계들이 단지 나만의 자기이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한계 내에서는 리꾀르 자신의 자기이해와 일관성있는 상응관계를 수립해내야 한다. 그런데 리꾀르의 철학적 여정이 워낙 다양하고 다층적이므로 한, 두 권의 저서를 통하여 그의 전모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의 오딧세이적 여정 안에는 그 흐름의 고비마다 나름대로의 내적인 필연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각 저서들은 제 각기 부분을 이루며 상호 연결된 채로 어떤 열려진 전체를 향하여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리꾀르의 주요 저서들을 선별적으로 일독하며 그 안에서 발견되는 일관성만을 소묘하여 그 전체적 골조의 윤곽을 드러내고자 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폴 리꾀르의 주요 저서들을 징검다리처럼 밟아 나가며 방법론적으로, 혹은 형상적으로 그 내적 구조를 일관성있게 재구성하는 것을 지향한다. 해석자의 현 사고지평이 리꾀르의 전체 사고지평을 포용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므로 애초에 심도있는 분석은 피하고, 단지 리꾀르 자신의 문제 제기가 스스로 전개되어 나가는 응답사의 방향만 함께 따라나감으로써 그의 현상학적 해석학이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모색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본 연구의 성격은 단지 리꾀르와의 초대면에 한정되는 것이며, 그 이후의 친숙화 과정, 즉 사귐과 대화의 단계는 적어도 여기서는 단지 기대로만 남게 된다.



 과연 리꾀르는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모색하였는가? 현상학적 해석학의 전체 기획을 제시하는 '실존과 해석학'이란 소논문에 의하면, 폴 리꾀르의 필생의 과업은 '현상학적 방법에 해석학의 문제를 이식하여 해석학을 통해 현상학을 혁신하므로써 실존이란 개념에 납득할만한 의미를 제공하는 것'1)이다. 이 짧은 요약문 안에 리꾀르의 철학을 촉구한 근원적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1)과연  기존의 현상학에서 혁신을 요구하는 난점은 무엇이며, 현상학이 해석학을 요구하게 되는 기점은 어디인가? 또한 역으로 볼 때, 2)해석학의 문제란 무엇이며 해석학의 어느 지점에서 현상학이 요구되는가? 그리고 3)현상학적 해석학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이며 어느 영역에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4)현상학적 해석학이 제시하는 실존의 해석학적 분석과 그것의 존재론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기본적인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하여 우리는 리꾀르의 50여년에 걸친 철학적 저술과 논술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참조하여 정리하고, 가능하다면 지나치게 광범위해진 그의 관심사를 본 연구의 작은 서술 공간 안에 통합하여 체계화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제를 성취하기 위하여 우선, 우리는 제1부에서 현상학적 방법을 간략히 살펴본 뒤, 현상학의 한계에 대해 리꾀르가 제기하는 비판을 검토하여 '현상학적 해석학'이 탄생하게 된 필연적인 맥락을 이해하고, 제2부에서는 '의지의 현상학'의 방법론적 기획을 통해 현상학이 해석학을 요구하는 기점을 노출시키고 현상학과 해석학의 상응관계를 살펴보겠다. 그리고 나서 제3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악의 상징'에서부터 프로이드와 마르크스, 비판이론과 구조주의에 이르는 해석의 갈등 속에 현상학적 해석학의 전개상황을 추적하여 해석학의 문제들을 구명하며, 제4부에서는 텍스트 해석학과 은유의 해석을 통해 리꾀르의 현상학적 해석학의 추후 전개를 구명해 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제5부에서는 최근의 저서인 '자기 자신을 남같이'를 통해 텍스트로서의 자아 해석을 분석해보고 차후의 존재론적 전망을 고려해 보겠다. 이러한 작업의 결산이 결론부분에서 리꾀르의 현상학적 해석학의 체계에 대한 기본골격을 일관성있게 제시하고 그의 철학적 입장을 객관적으로 정위하여 기본적인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





                                   제1부 현상학의 한계





 폴 리꾀르는 가브리엘 마르셀이나 야스퍼스와 같은 실존주의의 영향 아래서 철학을 시작했지만 그의 지속적이고 일관된 철학적 방법은 역시 현상학을 꼽아야 할 것이다. 초기작품에서부터 최근의 저서에 이르기까지 현상학적 방법은 리꾀르의 사고 안에 철저하게 육화되어 있다. 따라서 현상학적 방법은 리꾀르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필수관문이다. 그러므로 리꾀르의 현상학적 해석학을 내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현상학적 방법을 좀 더 심도있게 알아봄으로써 현상학적 해석학의 설계도를 그려내는 것이 앞으로의 이해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 초기의 리꾀르는 훗설 현상학의 번역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훗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초창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현상학적 해석학'의 '현상학적'이란 표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석학과 연결되는지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훗설 현상학의 방법론적 절차를 알아본 뒤, 현상학적 방법에 대한 리꾀르의 비판을 검토하여 '현상학적 해석학'의 내적 연관관계를 밝혀 보고자 한다.



 2.. 현상학적 방법의 개관과 그 비판



  1917년 프라이브르크 대학에서 수행된 현상학 강의록2)에 나타난 훗설의 '순수현상학의 방법론'에 의하면, 현상학적 방법이란 의식대상, 의식주체, 의식작용의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밝혀 철학적 문제들의 원초적인 근거를 정립하기 위한 근원학의 방법론이다. 우리는 여기서 훗설의 방법을 개관할 것이다. 우선 훗설이 말하는 현상학의 '현상'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2.1. 현상학적 현상의 3중적 의미



 모든 의식대상은 이념적인 진리체계3)와 상관되어 있으며, 동시에 이 대상과 진리를 의식주체에게 현시시키는 가능한 인식과정의 이념적 체계4)와 상관되어 있다. 의식과정의 최초의 단계는 대상을 본래의 모습으로 직관하는 체험작용이다. 체험작용이란 자연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5)하여 그것에게 실재성을 부여하는 의식이다. 있는 그대로라는 의식은 '몸소' 거기에 있음에 대한 의식이다. 이것을 역으로 보면, 대상이란 의식주체에게 '현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이란 1)의식주체의 직관적 의식에 거주하며 자신의 실재성을 가치평가케 하는 근거내용을 의미한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다양한 직관에 의해 구성되는 연속된 의식의 흐름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과정도 위와 유사하다. 대상의 다양한 측면이 연속적으로 지각되어도 직관하는 의식은 다양한 표상들 안에서 동일한 대상을 직관한다. 여기서 '현상'이란 개념은 2)통일성이 현존하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표상양태6)로 재정의된다. 복합형상작용과 그 준거의 일관성, 조합작용, 개념화작용, 이론화작용과 같은 보다 상위의 인식과정 안에서도 단일한 의식과정이 한 조합의 구성원으로서의 대상들을 단일한 종합적 대상성을 구성하는 동일한 의식의 통일성에로 조합시킨다. 이런 방식으로 '현상'이란 개념은 보다 심화되고 확장된다.

 대상을 종합하여 형상화하는 의식은 다양한 구성원을 포함하는 인식작용들을 통해 발생하며, 이렇게하여 형성된 의식의 보다 고등한 통일성은 내재적으로 구성된 현상들을 통해 발생한다. 이리하여 최종적으로 '현상'이란 개념은 3)무엇인가를 의식하는 변화하는 양상들이라고 정의된다. 결국 최초의, 그리고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의 현상이란 지각을 통해 감각적으로 주어지는 실재의 한정된 영역에 대한 지시이다. 인식작용이 진행됨에 따라 이 개념은 모든 종류의 감각적으로 의도된 의미체나 객관화된 것을 포함하게 되고, 마침내 준거적이며 연결적인 의식적 종합을 통해 의식에 주어진 종합적 대상성의 영역을 포함하게 된다. 그러므로 '현상'이란 사물이 의식에 주어지는 모든 양태7)를 포함하는 것이다. 감정작용이나 의지작용이나 모든 문화적 대상들의 범주가 의식작용의 참여를 통해 체험되고 이해되고 있는 그대로 객관화될 수 있다.      



 2.2. 자연적 태도와 현상학적 태도



 현상학의 탐구대상이 되는 '현상'이란 의식 내 변화하는 양태들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의 결정양식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지각의 방식, 기억의 방식, 상상의 방식, 표상의 방식, 상징의 방식 등을 탐구한다. 지향작용 안에서 지향대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지향작용은 지향대상을 현상적으로 어떻게 소유하는지를 탐구함으로써 현상학은 보편타당성을 지닌 이론을 정립하려 한다. 이렇게하여 내적으로 직관적인 반성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지향작용, 즉 지각, 기억, 사고, 평가,의지, 행위 등의 본성이 드러나게 된다. 그렇다면 현상이란 대상과 구별되는 것이다.

 자연적 대상은 의식의 외부에 있는 것이고 의식은 그들을 객관화하여 현실성을 부여한다. 이런 인식과정에서 의식은 자신의 현상을 외적 대상의 나타남으로 봄으로써 외적 대상에 외부성을 주게 된다. 그런데 내적 반성에 주어진 현상의 체험은 명증적이지만 외적 체험을 통해 체험된 자연적 대상은 추후의 체험을 통해 환상적임을 드러낼 수 있다. 그렇다면 외적 대상보다 내적 현상이 더 신빙성8)있는 자료로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태도의 변화를 통하여 초월적 체험을 내적 체험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자연적 태도를 취할 때, 우리는 자연의 과정을 체험하고 그에 주목하여 관찰하고 묘사하고 개념화한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할 때 우리의 의식 안에서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내재적 구성물을 간직한 다중형상의 의식과정이 펼쳐진다. 그런데 자연적 태도를 취하는 인간은 이러한 내적 의식현상을 알지 못한다. 그는 체험하고 지시하고 조합하면서도 이런 지향작용을 주목하지 않고 대상만 의식한다. 그러나 그는 자연적 관심촛점을 되돌이켜 현상학적 반성에 주목할 수 있다. 그리하여 지속적인 의식의 흐름을 그의 관찰, 기술, 이론의 주제로 만들 수 있다. 이러한 태도를 현상학적 태도9)라고 한다.



 2.3. 현상학적 환원



 현상학의 순수 의식에 도달하려면 의식의 반성에서 모든 유형의 외적 체험과, 대상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정립작용을 배제시켜 순수반성10)을 획득해야 한다. 이렇게 의식초월적으로 정립된 존재를 배제하면 의식은 자기 자신의 구성물만 가진 순수의식으로 환원된다. 주제적으로 정립된 것은 오직 순수반성에 주어진 그대로의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계기만 간직하는 의식소여뿐이다.

 현상학적 환원은 모든 대상적 현실성의 간섭을 배제함으로써 현상학적 의식장을 철저히 정화하여 순수하게 간직하는 방법이다. 자연적 태도를 통해 시간-공간적 객체성의 세계인 자연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어져 자연과학이나 실천활동을 위한 장을 형성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의 현실성에 대한 신념을 밀어내는 우리의 행동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신념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그 신념이 정립하는 것을 진리로서 수락하지 않을 뿐이다. 검토가 진행되는 동안 진리는 질문 안에 남아 있으며, 나중에 두고 봐야할, 여전히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남는다. 의식 외부적 현실성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순수의식의 영역을 확보하여 반성을 순수하게 수행하려는 것뿐이다. 외부적 세계는 괄호에 넣어진 것이고 의식에 대한 그 힘을 상실한 것이다.

 일단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하면, 우리는 그 자체에 있어 절대적으로 주어진 세계의 현상들의 총체를 갖게 된다. 이제 우리는 순수반성 안에서 충만화하는 직관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연구하게 된다. 현상학적 탐구는 의식과정에서 도출될 수 있는 현상들의 '무엇'과 '어떻게'만을 연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것의 현실성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의식의 관점에서 현상학적으로 검토된다. 의식이 그 순수 내재성에서 체계적으로 검토되려면, 충전히 자기의식적인 현상학적 환원이 요구된다.



 2.4. 본질직관

 

 위에서 보았듯이 '현상학적 환원'이란 의식을 순수하게 하는 방법론적 절차일 뿐이다. 이제 순수하게 된 의식 내 현상들의 '무엇'과 '어떻게'는 본질직관과 순수반성을 통해 드러난다. 그렇다면 본질직관은 과연 어떻게 수행되는 것인가? 현상학적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훗설의 '이념들'11) 제1절의 설명에 근거하여 본질직관의 절차를 연구해 보아야 하겠다.  



 현상학적 환원을 거쳐 순수해진 선험적 자아12)는 사유작용의 지향적 대상에 대해 의심하고, 이해하고 확신하고 부정하고 의지하고 거부하고 상상하고 느끼는 사유작용을 수행한다. 선험적 자아의 사유대상은 더 이상 우연적인 자연 사물이 아니라 그것의 상관체인 본질적 필연성, 즉 Eidos이다. 그것은 변화하는 보편성의 정도에 따라 본질성을 획득하며 그 순수한 형태에 있어 자신의 고유한 존재양식을 갖는다.

 한 자연사물의 본질적 파생태는 일반적 시간결정과 일반적 지속, 형태, 질료성을 가지고 있는 질료적 사물 일반으로 파악된다. 같은 사태가 다른 자연 사물에도 일어나므로 결국 개별사물의 범주적 영역에서부터 본질적 존재의 광범위한 일반성에 도달하게 된다. 순수의식내의 본질13)이란 사물의 하성(what)이 아니라 개념, 이념(idea)이다. 이념이란 본질적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본질직관이란 이념의 본질적 가능성을 그 원초적 형상에서 적절하게 직관하는 것이다. 그런데 직관된 본질은 범주의 관점에서 보면 일면적인 것이다. 그러나 한 범주의 문맥연관 안에서 연속된 본질들은 그 범주의 다양한 측면을 구성하며 범주적 구성의 일관성 안에서 부적절한 직관내용을 배제한다. 선험적 자아는 체험과 기억의 자료들을 상상 속에서 자유변경해 봄으로써 순전히 상상적인 질서에서의 본질을 직관할 수 있다. 자유변경14)은 일부 구성요소를 제거하거나 대체해 봄으로써 구성요소의 필연성, 가능성, 불가능성을 결정하는 종합적 인식을 가능케 한다. 이렇게하여 여러 본질들 사이의 본질관계에 대한 범주적 직관을 달성할 수 있다.



 2.5. 현상학의 선험성



 이제 순수 현상학이 경험적 학문이 아닌 선험적 학문임이 드러났다. 순수 현상학은 이념적 가능성과, 순수 가능성의 본질에만 적합한 순수법칙만 다루는 학문이다. 공간 안의 가능적 대상이 있는 그대로 의식에게 제시되게 하는 순수 현상은 그것의 직관을 위해 작용하는 모든 인식작용을 결합시키는 어떤 선험적이고 필연적인 형상체계를 갖는다. 그러므로 공간적인 한 사물의 이념은 그것에 상응하는 현상학적 형상의 유형에 맞게 직관되도록 짜여진 법칙을 그 사물에 대한 가능적 의식에게 선험적으로 처방15)해준다. 객관성의 모든 주요 범주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일이 발생한다. 이러한 선험성은 수학이나 기하학의 순수성과 유사하다. 공간적 실재가 수학적 법칙에 의존하는 것과 유사하게 모든 의식이 본질적 법칙에 의존한다면, 이러한 본질적 법칙들은 인간의 의식적 삶의 사실을 검토하는데 있어 가장 결실이 풍부한 의미심장성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 다소 길게 요약된 훗설의 현상학은 그 자체로 연구되어야할 훌륭한 철학분과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준다. 브렌타노의 제자인 훗설은 가능한 한 본질과 존재, 가능성과 현실성을 엄밀하게 구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우선적인 과제는 순수의식을 확보하는 것이었기에 존재를 내몰기 위해 존재의 현실성을 신념의 한 양상이라 보았다. 신념은 의식의 지향작용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기에 현상학의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신념의 한 양상으로서의 존재가 괄호에서 풀려 주관성의 구성력에 흡수되어가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차라리 존재를 그대로 외부의 존재자에게 현존시키면서 존재자의 본질과 그 본질법칙을 재구성하는 주관을 대립시켜 존재와 본질을 대화적 일치에서 성립시키는 인식론과 존재와 본질의 실체적 일치를 파악하는 존재론을 겨냥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훗설이 실천적인 삶의 차원에서 자연적 태도를 인정한다는 것은 실재론적 입장의 정당성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이 실재론적 입장이 자기 비판적이려면 일단 자연적 태도를 유보함으로써 반성의 영역에서 현상학적 태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다시 판단의 영역에서 자연적 태도와 현상학적 태도를 통합함으로써 비판실재론적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여기는 훗설의 현상학을 비판하는 자리가 아니라 현상학과 리꾀르의 현상학적 해석학의 관계를 살펴보는 자리이므로 우리는 아래에서 리꾀르의 현상학 비판을 살펴보고 리꾀르의 현상학 수용방식을 알아 보기로 하겠다.



 2.6. 리꾀르의 현상학 비판



 리꾀르는 현상학의 방법을 존중하면서도 "훗설적 관념론에는 반대"16)한다. 훗설은 궁극적인 학문을 정초하고자 하였으나 해석학의 입장에서 볼 때 무전제한 출발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는 자신이 궁극적 근거라고 주장할 때 이미 그가 맞서 있는 세계와 함께 소속되어 있다. 존재의 세계는 반성을 선행하는 것이다. 훗설은 원본적인 직관을 최고의 근거작용으로 보았지만 이해는 언제나 선이해구조를 지니고 있고 직관된 것은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직관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해의 예-구조와 해석의 '로서'구조라는 이중의 조건아래 작용해야 한다. 직관은 예-구조에 의해 기획된 지평 안에서 보는 것이며 해석은 질문과 응답 안에서 화자들이 그들의 대화를 구성하는 공문맥적 가치를 간주관적으로 결정하는 과정이다. 해석은 역사적 과정 안에 있으며 해석자는 해석과정의 시작이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있다. 그렇다면 단번에 해석을 완결시킬 수 있는 완전한 직관이란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더구나 현상학적 자아도 경험적 자기 인식의 왜곡을 모면할 수는 없다. 결국 주체성이란 궁극적 근원도 아니고 자기 안에 무류성을 지닌 존재도 아니다. 주체는 자연의 객관성과 간주관성에 입각한 역사적 공동체의 객관성을 발견해야 한다. 오직 역사적 공동체에 의한 대화의 해석학만이 선이해에 의한 귀속과 이념비판을 위한 거리를 함께 매개할 수 있다.



 리꾀르의 훗설비판은 해석학적 관점에서 취해진다. 현상학에 대한 해석학적 비판은 이미 하이데거에 의해 실천적으로 수행된 것이며 가다머에 의해 반성적으로 철저화된 것이다. 즉 초월적 자아는 이미 역사적 자아이며 지속적인 역사과정 속의 해석학적 순환 안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이때, 리꾀르는 관념론에 의한 주체의 직접적 자기정립을 부정하면서 객관성의 확보와 반성에 의한 직접성의 매개를 요구하게 되는데, 여기서 두 가지 객관성을 언급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즉 자연의 객관성과 간주관적 객관성이다. 자연의 객관성은 관찰가능한 보편적 본성에 의거하여 성립되나, 간주관적 객관성은 대화와 공감을 통해 달성된다. 따라서 자연과학은 관찰, 가설, 검증이란 경험적 방법론을 사용하나, 인문과학의 방법론은 해석학이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이러한 간주관적 객관성이 어떻게 성립하는 것인가의 문제이다. 훗설과 에디뜨 슈타인에게 있어 공감(empathy)의 연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현상학적 응답의 시도이다. 그런데 리꾀르는 이미 해석학적 지평으로 이전하고 있으므로 역사 해석에 있어서의 간주관적 객관성은 언어학을 통해 획득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정을 뒤에 가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리꾀르에서는 거기에 덧붙여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비판이론의 소격화 개념이 함께 고려된다. 그것은 참된 진리의 추구가 역사에 대한 귀속에서 획득되느냐, 아니면 비판적 거리의 유지에 의해 얻어지느냐의 문제이다. 리꾀르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변증법적으로 승화된 현상학적 해석학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과연 현상학적 해석학이란 어떻게 전개되는 것인가가 우리의 추후 연구문제로 대두된다.



 3.. 현상학과 해석학의 연관구조



 현상학적 해석학의 당위성을 위한 리꾀르의 대전제는 다음과 같다. "훗설의 관념론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현상학은 해석학의 피할 수 없는 전제로 남아있으며, 동시에 현상학은 자아의 체험에 대한 해석에서 자기 자신을 구성하지 않고는 자신의 구성계획을 완수할 수 없다."17) 그렇다면 해석학의 현상학적 전제란 무엇이며, 현상학의 해석학적 전제란 무엇인가?  



 3.1. 해석학의 현상학적 전제



 우선, 해석학은 은폐된 존재의 의미를 해석하고자 하는데 존재의 의미는 현상학18)을 통해 드러난다. 해석학은 그 언어적 해석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의미의 일반이론19)을 요청한다. 체험은 표현가능성이며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이 된다. 체험을 언어화하기 위해선 직관이 필요하며 결국 잠정적인 현상학적 태도가 요청되는 것이다. '논리연구'에 따르면 의식은 자기 자신을 향해 있기 이전에 자신의 외부에서 의미를 향해 있다. 이렇게해서 관념론적 환원 없이도 의식과 지향성의 의미, 본질직관이 가능하다.

 둘째로, 현상학적 판단중지, 즉 의미를 향한 의식의 지향작용은 이미 귀속되어 있는 삶의 체험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이다. 현상학은 우리가 체험을 표현하고자 할 때 시작한다. 그러므로 판단중지와 의미지향은 밀접하게 연관된다. 판단중지20)는 가상공간 안에서 사물을 언어로 변환시키고 언어를 다른 표현으로 바꿔가며 단지 작용적이었던 지향성을 주제화하여 의미를 의미로서 드러낸다. 해석학은 현상학적으로 드러난 의미를 역사의 영역으로 옮겨 과거의 기록 속에 나타난 역사적 연관관계를 해석한다. 그러므로 비판적 해석을 위해 역사적 체험에 거리를 취함21)은 역사적 전통과 체험의 사태에 충실하기 위한 현상학적 판단중지에 소속된다.

 셋째로, 해석학은 언어를 통해 매개된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지만, 현상학은 언어 이전의 그 체험구조를 분석한다. 해석학에서 텍스트에 귀속하면서 텍스트에서부터 거리를 취하는 이중 운동은 언어 자체의 사태에로 되돌아간다. 사태에 대해 표현하는 언어작용은 언어 이전의 지향대상의 양태와 그 신념양상과 가능성, 현실성에 대한 노에마분석에 의거한다.

 마지막으로, 훗설 자신이 현상의 선술어적 분석에서 시간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체험 자체의 역사성에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였다. 현상학의 생활세계로의 진입은 곧바로 해석학과 만나게 된다. 현상학적 생활세계는 삶의 체험의 의미잉여, 의미연관을 드러내도록 구성되었다. 이 의미세계로부터 비로소 객관적이고  설명적인 자연적 태도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현상학이 또한 해석학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결국 리꾀르에 의하면, 언어를 통해 이해를 추구하는 해석학은 체험과 언어 사이의 직관을 다루고 있는 의미의 일반이론으로서의 현상학을 요구하며,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통하여 외부의 사물이 의미를 담지하는 언어로 변환될 수 있고, 이런 변환을 통해 비로소 역사라는 의미시간이 형성되고 해석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사태와 언어를 매개하며 해석학의 내적 윤활유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상학이 의미의 일반이론으로 작용한다면, 언어학에서의 의미론과의 관계설정은 어떻게 되는지가 의문이다.22) 아뭏든 일단은 현상학이 체험과 언어 사이의 본질직관을 수행함으로써 해석학을 매개한다고 이해하자.



 3.2. 현상학의 해석학적 전제



 현상학은 현상학의 연구성과를 해석학에 넘겨주지만 그 자신은 또한 해석학의 해명과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논리연구'에서 이미 훗설 자신에 의해 암묵적으로 실행되고 있다.

 우선, 직관에게 사태지시를 부여하는 작용 안에서 이미 일종의 해명 내지 해석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표상은 지적 직관에 항상 수반되지만 표상 자체가 지성을 작용시키지는 못한다. 표상 안에 의미가 떠다니고 있을 때 그 의미는 항상 어떤 문맥이 설정되어야만 고정되어 현실화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사태자체가 어떤 문맥환경 안에서 재지시되어야 한다. 그래서 지시작용23)과 의미작용이 상호작용을 일으켜야 사태의 의미가 현실적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바로 해석학적 상황이며 직관을 위해 이미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태에 대한 일종의 해석이 주어지고 이것이 '직관에 의해 해명된다'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지평의 해명기능을 통하여 해석학은 선험적 현상학에게 객관적, 간주관적 세계를 드러낸다. 선험적 자아는 객관적 존재의 세계의 모든 의미와 그 존재 타당성을 스스로에게서부터 도출해낸다. 그러나 자아도취한 선험적 자아가 다른 자아를 만날 때, 선험적 자아의 개세적 기개는 강한 도전을 받게 된다. 다른 자아는 선험적 자아에게서 도출될 수 없는 다른 의미세계를 가지고 있다. 양자의 지평이 전체적으로 해석되어야 공동의 자연과 공동의 문화세계가 구성될 수 있다. 해석은 구성의 현상학과 기술의 현상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여기서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지 마음대로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해석은 타자에게도 자리를 내주어야할  의미의 잉여를 드러낸다. 해석된 내용은 일반적이고 지평적으로 미리 예기된 지평이다. 이렇게 무한히 개방된 의미지평은 직관이 수행되는 장소이고 조건이다. 여기서 현상학은 해석학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현상학이 해석학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현상학적 분석이 이미 언제나 언어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선이해지평 위에서 수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하이데거적 '배시'는 현상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의 문맥을 선구성함으로써 현상학이 해석학적 지평 위에서 작용한다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더우기, 보다 심각한 문제는 선험적 구성의 현상학적 자아가 자신의 실존적 체험과 행동의 순환관계 안에서 다른 주관을 만나게 된다는 데 있다. 여기서 구성적 현상학은 대화적 해석학에 의해 자기 자신을 한계지으며, 자신이 구성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고, 앞으로도 무한히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는 간주관적 객관성의 무한한 의미지평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현상학은 무한히 개방되어 있는 역사라는 의미지평 안에서 자신의 선이해지평을 가지고 의미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해석학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앞의 논의를 종합하면, 현상학과 해석학의 상호 순환적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자아는 이미 언제나 자연적, 그리고 간주관적 세계 안에 존재하며 체험을 통해 외부세계로부터 현상을 제공받게 되는데, 이 때 현상을 주목하는 자아의 '배시'는 역사라는 의미지평 안에서 자신의 선이해지평을 가지고 의미를 구성함으로써 문장 형태의 언어를 발생시킨다. 이렇게하여 얻어진 담론으로서의 텍스트는 간주관적 대화나 준거사태와의 대조를 통해 해석된다. 해석된 의미는 융합을 통해 선이해지평 안으로 수용되며 전체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킴으로써 반성적인 자기이해에로 귀환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일단 '현상학적 해석학'의 기본구도를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학적 기본구도가 과연 리꾀르의 문제사 안에서 어떻게 정리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제2부 현상학적 해석학의 성립





 현상학비판을 통해 우리는 리꾀르가 무엇 때문에 해석학적 문제를 현상학적 방법에 이식하려 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현상학은 선이해구조와 역사적 세계지평의 문제에서 해석학을 필요로 한다. 반면에 해석학은 귀속과 소격화라는 해석학적 중심문제를 현상학적 판단중지 안에서 해결할 수 있고, 언어적 해석 이전에 체험구조의 선언어적 분석과 직관에 따른 의미의 일반이론을 현상학에서 얻어낼 수 있다. 나아가 현상학의 생활세계는 해석학의 역사세계와 직결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선 세계를 체험하고 이해할 때, 나의 의식 안에서 무엇이 발생하는 지를 알기 위해 반성적으로 현상학을 사용한다. 현상학적 분석을 통해 의미가 언표되면 이제는 해석학적 상황이 발생한다. 해석학은 나의 초기의 이해가 이미 어떤 선이해에 근거해 있다는 것을 드러내며, 이 선이해지평 안에서 현상학이 수행되어 의미를 얻어냈다는 것을 깨닿는다. 그리고 나의 선이해는 세계의 역사적 전통 안에서 구성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역사적 텍스트와의 대화, 즉 해석과정에 들어간다. 텍스트의 해석에서는 구조주의, 비판이론, 심층심리, 언어학, 상징이론, 대화구조, 역사 자체의 해석이라는 해석학적 문제에 직면한다. 이러한 해석의 문제는 텍스트의 사태를 드러내는 현상학적 분석에 의해 규명된다.

 이렇게 해서 현상학적 해석학은 부분과 전체의 순환 안에서 진리의 획득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서 진리에로 나아간다는 것은 동시에 존재에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히 리꾀르의 최종목적은 현상학적 해석학을 통한 존재에로의 진입이다. 앞서 언급한 '실존과 해석학'이란 소논문에서 리꾀르는 존재의 이해가 해석학적 순환 안에 있는 한, 이해와 분리된 존재론이나 통합적인 존재론의 구성은 불가능하고, 단지 이해의 방법론 안에 비주제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이해의 존재론만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하는 것은 추후의 연구진행에 따라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아무튼 여기서는 현상학적 해석학의 설계상의 윤곽을 확보하였다. 우리는 제2부에서 이러한 현상학적 해석학의 설계가 실제로 어떻게 축조되어 나가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4.. '의지의 현상학'



 '의지의 현상학'은 리꾀르의 필생의 작업을 결정짓는 하나의 철학적 기획이다. 그 제1부는 리꾀르의 학위논문으로 유명한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이다. 제2부는 현상학에서 해석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다루게 되는데, 제1책 '가류적 인간'과 제2책 '악의 상징'으로 출간되었으며, 제3부 '의지의 시학'은 현상학적 연구를 넘어서 해석학을 거쳐 존재론으로 진입해야 하므로 오랫동안 출간이 지연되고 있다. 우리는 '의지의 현상학'에서 현상학과 해석학 사이의 방법론적 절차만 간략하게 검토하여 '현상학적 해석학'의 문제사적 맥락을 정위할 것이다.



 4.1. '의지의 현상학'의 현상학적 방법



 훗설은 지각, 상상, 기억, 기호, 신념, 판단, 표현과 같은 의식의 여러 지향작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을 수행했다. 리꾀르는 훗설의 이러한 분석을 그 관념론적 해석을 배제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면 이제 현상학은 정감과 의지와 같은 실천적인 지향작용에서도 동일한 분석이 가능한가를 검증해보아야 한다. 훗설의 현상학 일반에 대한 평가를 담은 '훗설'24)이라는 분석책자의 말미에서 리꾀르는 그의 현상학적 해석학의 최초의 대작이 되는 '의지의 현상학'에 대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의지의 현상학은 "정감적이고 의지적인 주체의 과정"에 대한 반성적 차원에서의 지향성분석이다. 여기서 지향작용의 구성은 정감적이고 의지적인 지향의 상관자인 세계, 타자, 나의 신체에 대한 현상을 다루어야 한다. 이러한 상관자들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은 의지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비의지적인 것에 대한 기술을 포함한다. 의지의 현상학은 의지의 실천적인 삶을 주어진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 "현상학은 분석 이전에 기술(묘사)이다." 의지, 행동, 동기, 상황 등에 대한 정확한 묘사 없이 곧바로 "실존적 기투"로 들어가는 것은 의지라는 중첩된 지향성의 여러 계기들을 놓치게 된다.25) 이들은 다양한 의식적 지향과정들의 모든 측면을 두루 반성하는 "노에마적 반성"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 흐르는 의식 안에서 각 지향작용들은 적확하게 지적되어야 한다. 기술적 현상학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을 정확하게 명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하는 의식의 다양성에 대한 식별과 명명은 방법론적 계획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의지의 지향성분석에 의해 의지작용의 가능성의 영역이 드러나면 이제 의지의 전체 운동, 그 행위와 실제 작용을 두루 고려하는 전 영역을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의식내 순수 지향성 분석은 세계내 실존적 종합으로 전환하며, 현상학은 해석학과 연계되어 의식의 전체 삶을 해석해내야 한다. 현상학적 기술의 결과로 드러난 의지작용은 비의지적인 연관자들인 세계, 타자, 신체를 드러낸다. 의지의 현상은 이들 비의지적인 것을  의식내 표상으로만 환원할 수는 없게 한다. "의지작용은 실천적인 가능성을 개방하고, 의지의 비결정적인 영역에로 침투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타자들과 실재 자체의 저항을 드러냄으로써 세계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는 방법을 제공한다."26)

 실천적 의지작용 속의 세계는 주체의 객관화작용에 의해 의미를 부여받는 것 이상을 가지고 있다. 비의지적인 것은 실천적 영역의 실존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의식내의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의 이원적 갈등은 분석을 초월적 환원으로 들어갈 수 없게 하고 오히려 실천세계의 실존적 종합으로 나가게 한다. 의식은 신체와 결합되어 비의지적인 삶과 행동의 세계에로 나아간다. 의지행위를 통해 자아는 자기자신을 결정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자아가 자기 자유선택행위의 지평인 세계에 대해 어떤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기 때문에 의지행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의지적인 선택과 비의지적인 상황 사이의 단일한 의지함이란 구조 안에서 실존운동의 애매성이 드러난다. 더욱이 고통의 체험은 내가 나 자신과 분열되어 있다라는 실존적인 오류(뭔가 잘못됐어!)를 드러낸다. 의지와 비의지와의 실존-변증법적 대결은 의식과 신체로 결합되어 있는 나의 육화가 본질적으로 틈새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격적 통합은 결정과 동기, 행동과 가능성, 동의와 상황 사이에서 유동한다. "인간의 자유란 의존적인 독립성이며 수용적인 창의성이다."27)

  기술에 이은 구성의 영역에서의 초월적 현상학은 다시 존재론의 영역으로 진입한다. 초월적 현상학은 스스로의 존재론적 근거를 지니지 못한 자아가 자기자신에 의해 자기자신을 의지하는 현상에 대한 분석이었다. 그런데 존재론적 현상학은 의지의 현상영역에서 실존의 존재론적 결핍상태를 드러낸다. 인간의 실존은 속박이란 양상으로 구속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의 열정-그 수동적 의미로서의 견뎌냄-을 지닌 존재이다. 열정의 속박상태에 대한 지향적 분석은 열정이 허영의 능력이란 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허영의 능력으로서의 열정의 지향적 대상은 무, 비존재, 결여이다. 신화는 이러한 비존재를 악마라고 부른다. 결국, 열정에서 드러나는 죄악감의 체험은 인간의 유한성을 나타낸다. 인간은 결단하고 행동하고 동의할 수 있는 능력이지만 그의 능력은 무화시키는 비존재의 침입을 받고 있다. "자아의 허영은 자기 실존의 심층부에 너울과 같은 흠집을 남겨 놓았다."28)

 

 4.2. '의지의 현상학'의 해석학적 방법



 하이데거 이후의 실존 현상학이 비판적 반성 없이 곧바로 세계로 나아간 것과는 달리, 리꾀르는 의지라는 복합적 지향성을 세밀히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나 기획 자체가 허무와 오류에 물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제 의지의 분석은 현상학에서 해석학에로 전환함으로써 신비로서의 인간 육화를 그 실존적인 차원에서 해석해내야 한다. 잘못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현상학적 반성이었다면, 잘못의 현실에 대한 연구는 죄의 고백에 대한 해석학적 반성에 의해 달성된다. 고백의 언어는 상징언어이다. 상징에 대한 해석학적 논구는 바로 언어의 기원을 근원적으로 파고들어가는 치열한 철학적 작업이다. 물론 상징에 관한 생각도 이미 언어를 전제하는 선이해의 지평 위에 있다. 상징 해석학은 전제 없는 출발점을 찾지 않고 고백의 언어사건에서 드러나는 출발점을 찾는다. 상징은 이미 말의 세계에 존재한다. 즉 상징은 이미 해석된 것이며 해석학의 올바른 대상에 속한다. 그러나 이미 해석되어 있는 원시적 상징의미는 탈신화화라는 비판적 해석과정을 거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으로 구별되는 해체과정을 거친다. 이런 해체작업 안에서 오히려 비판을 견녀내는 상징의 원초적 의미가 드러난다. 여기서 비판은 신뢰와의 긴장관계 안에 있다. 상징해석학의 해석학적 순환구도는 다음과 같다: "믿어야 안다. 그러나 알아야 믿을 수 있다, ....,해석자는 자기가 묻고 있는 의미의 세계 속에 이미 살고 있지 않으면 본문이 말하는 것을 알 수 없다."29) 이해는 질문에서 따라나오며 질문은 이미 선이해 속의 전제를 가지기 때문이다. 해석은 삶이 지시하는 의미사태와 사고를 일치시키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결국 비판적 해석작업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믿음양식이다. 해석학적 순환 안에서 해석의 전이해가 주제화되면서 상징 속에 간직된 거룩함이 그 원초적 양식에서 내게 드러나고 나와 교제할 수 있다.

 상징에서 의미를 형성해내는 창조적 해석작업은 현대의 정신에게 계몽주의적 현대성을 넘어 새로운 차원에서 거룩함과 교제하는 길을 마련해주는 구원의 작업이다. 여기서 믿음의 해석학은 해방적인 기능까지도 드러낸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단지 선이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포기하며 받아들이는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비판적으로 주제화된 상징의미가 내 삶에 은총에 둘러싸인 일관성을 주는 것을 확신하는 능동적 태도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계기는 상징에서부터 의미를 형성하는 선험적 연역작업이다.  선험적 연역은 그 개념이 어떤 객관적 영역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 개념을 정당화한다. 가령 악의 상징은 인간 자유의 노예적 현실영역을 드러냄으로써 악의 의미를 정당화한다. "결국 상징이 드러내는 것은 삶의 지평인 존재의 한 가운데 현존하는 인간의 상황이다."30)

 철학이, 인간의 사고가 언어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면 철학은 무전제한 출발점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해석학의 과제는 "그 전제를 분명히하고, 그것을 자기의 믿음으로 제시하고, 믿음을 확신으로 정립하고 다시 그 확신을 이해시키는 것이다."31) 철학은 상징의 역사적 우연성에서 출발하여 그 전제를 타당한 선에서 정리하고 자신의 접근방식의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를 찾는 지속적인 해석의 과정 속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2)

 

 4.3. 포스트 모던 시대의 신뢰의 해석학



 의지의 현상학은 정감적이고 의지적인 주체를 관찰하고 기술한다. 여기서 의지적인 주체는 비의지적인 것, 즉 세계, 타자, 신체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세계, 타자, 신체는 내 의식영역 안에서의 단순한 현상일 수는 없다. 비의지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현상 이상의 아픔과 고통을 동반하는 의미의 잉여를 지닌다. 비의지적인 것은 의지적인 자아를 좌절시킨다. 의지의 좌절은 실존의 존재론적 결핍, 즉 악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현상학은 생활세계의 해석학으로 나아가 실존적인 종합을 꾀하게 된다. 여기에서야 비로소 의지는 자신의 가능성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현실성, 자기 오류의 현실을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의지의 해석학은 현상학적으로 드러난 악의 가능성이 실존적 차원에서 체험되어 고백된 상징적 언어를 해석한다. 상징언어는 이미 전이해되어 있는 의미세계 안에서 고백된 것이며, 해석학은 선험적 연역을 통해 상징언어가 간직하는 의미세계의 객관적 의미영역을 드러내고, 탈신화화를 통하여 그 의미영역의 실존적 의의를 밝힘으로써, 전이해를 주제화하여 존재의 신비를 체험한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소박한 신뢰의 태도를 지니고 전승된 신화적 상징의 세계로 뛰어들어 그 안에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전이해를 객관적으로 주제화하고, 이렇게 확보된 합리적 의미영역 안에서 상징을 해석함으로써 비판적으로 고양된 신뢰의 태도를 얻게 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현상학적 해석학'은 올바른 의미에서의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불릴 수 있다. 참다운 후기 현대성은 바로 비판적으로 정화된 믿음을 통하여 은총의 현실과 합리적인 교제를 유지하며 구원을 지향하는 '현상학적 해석학'을 통해 성취된다. 리꾀르의 '현상학적 해석학'은 창조와 종말을 양축으로 하여 무한히 개방된 해석의 지평을 펼쳐내는 신뢰의 해석학이다. 우리는 포스트 모던 시대의 참된 인간성을 추구하는 신뢰의 해석학을 '악의 상징'을 통해 보다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5.. 악의 상징 : 상징의 해석학



 리꾀르의 '악의 상징'은 두 얼굴을 가진 명저이다. 그것은 실존적 글읽기에 의하면 신학적 은총론으로 제시될 수도 있지만, 철학적 글읽기에 따르면 이해의 현상학이 반성의 해석학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된다. 불행히도 우리의 관심사는 철학적 글읽기이므로 여기서는 '악의 상징'의 풍부한 상징계기들을 투명하게 투시하여 단지 그 해석학적인 상관관계들만을 고려하고자 한다.



 5.1.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앞에서 살펴본 '의지의 현상학'은 인간의 실존을 그 가능성의 차원에서만 고찰했다. 현상학은 현상의 의미에 대한 이해, 그 이상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꾀르의 철학적 자아는 단지 가능적 학문의 영역에만 머물 수 없다. 철학은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하며, 리꾀르의 철학적 양심에서 보면, "철학은 첫발을 내디디며 일관성을 서약했다. 그 서약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33)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능성이 현실성으로 발생하는 그 모든 과정을 이해하고자 나아간다. 그것은 현상학에서 해석학으로의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기 위하여 순수 현상학에서 현상학적 해석학으로 전환하는 것은 그의 전생애에 걸친 끝없는 철학적 도전의 시작일 뿐이다.

 가능성에서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과정에 대한 탐구는 역사적 체험을 간직한 말의 내적 기원으로 파고들어가는 작업이다. 그것은 철학적 사변에서 그 사변의 기원이 되는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그 신화의 상징 속에 간직된 거룩함의 체험에까지 치열하게 소급해 들어가는 추체험이다. 거룩하고 두려운 원초적인 체험에 자신을 내어맡김은 믿음의 태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합리적인 현대인에게 이런 소박한 신뢰의 태도가 가능할 것인가? 이 질문은 철학적 일관성을 지니는 신뢰의 해석학의 가능성에 대한 시험이며 '악의 상징'은 이 시험에 대한 도전적 응답이다. 우리는 아래에서 '악의 상징'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과연 신뢰의 해석학이 성공적으로 제시되었는가를 검토할 것이다.



 5.2. '악의 상징'에 관한 해석



 잘못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이 실제로 잘못을 범했다면, 그리고 그가 실존적인 내적 갈등을 겪고 이를 고백으로 울부짖었다면, 우리는 상상과 공감을 통해 그의 고백을 내적으로 되풀이해 봄으로써 고백이란 현상을 이해해 보아야 한다. 이 때, 고백은 현상이면서도 그 스스로가 언어를 통하여 사건화되는 현상학적 해석학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고백현상은 먼저 기술되어 분석됨으로써 고백사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언어의 상징성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렇게 노출된 상징은 해석을 요구한다. 상징의 해석은 언어의 근저에까지 파고드는 해석학적 투철성에 의해 달성된다.

 가령 우리가 상상과 공감34)을 통해 나무 밑에 숨은 아담이 되어 "두려워서 숨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때,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아이구구구!'라는 무너져 내리는 막막함을 언어화하여 자신의 실존을 객관화함으로써, '이건 내 탓이야, ......난 죄를 졌구나, ......아, 난 이제 불결한 인간이야.'라는 의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내적 의식은 이미 문명화한 현대인의 사고순서를 보여준다. 오히려 탓의 인정 뒤엔 죄의식이 전제되어 있고 죄의식 뒤엔 부정(흠)탄 의식이 숨어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원초적인 것이 '흠'에 대한 자각인데 이것은 자아 외부의 물질적인 더러움을 뜻하는 것으로 종교적 금기와 연관되어 비로소 두려움의 상징적 대상이 된다. 이런 외적인 악인 흠이 하느님과의 실존적 대면 앞에서 실존적인 '죄악감'으로 내면화된다. 죄란 인격관계의 훼손이다. '탓'이란 죄악감에 사로잡혔던 즉자적 자아가 이제 대자적 자아로 의식되면서 악의 문제가 내면화되고 개인화된 것이다. 탓이 개인화됨으로써 율법에 따른 공적주의가 인류 일반의 죄의식과 대립된다. 그러나 율법은 무한한 완전을 요구함으로써 인간을 악의 노예상태에 위치시킨다. 자신에게서 소외35)된 인간은 "미래에서 현재로, 바깥에서 안으로, 초월에서 내재로"36) 선사되는 하느님의 무죄판결을 믿음으로써 비로소 의롭게 되고 자유롭게 해방된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악의 체험은 신화 속의 상징 언어를 통해 매개된다. 신화는 인간의 현실을 창조와 종말의 사이에 위치시키고 그 안에서 거룩한 신성에 참여하는 인간현실의 원형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신화는 신화로서 대해져야만 원초상징의 새로운 의미의 차원이 열리는 것이다. 원초상징은 존재 전체의 초월적 체험에 직면한 자아의식의 발현기능이다. 가장 원초적인 상징은 언어 이전의 상징화된 우주적 실재들이다. 상징화된 우주는 존재의 신비체험을 한 자아가 이 체험을 외화시킨 최초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우주 사물에 근거한 1차적 지향성 안에는 영적 사태를 지시하는 2차적 지향성이 담겨있다. 낙원의 뱀이라는 상징은 우주 사물로서의 뱀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영적인 실재로서 악의 실재성을 지시한다. 여기서 상징해석의 유비성37)이 성립한다. 아담의 뱀에 대한 관계는 죄인의 악에 대한 관계와 비례하는 것이다.

 우주 사물을 통한 존재체험은 기억 속의 표상으로 간직되어 꿈을 통해 영적인 대상이 되고, 다시 시적 언어를 통해 인간화된다. 시적 상징은 인간의 자아의식이 마침내 언어로 터져나오는 기점이다. 이렇게 상징화된 시적 언어를 통해 신화가 구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일관된 구조는 "나는 세상을 표현하면서 나를 표현한다"38)라는 해석학적 구조이다.

 이 일관된 구조는 신화에서 멈추지 않는다. "상징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39) 상징에 대한 이해가 철학의 출발점이 된다. 해석학은 상징을 해석함으로써 자기표현에서 자기이해에 도달하고자 한다. 믿음의 해석학은 자신의 전이해 속에 간직된 원초적 생명의 역동성을 신화의 체험 안에서 되살리면서도, 이 체험을 통해 방법론적 믿음이 진정한 확신으로 변화하게 한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신화를 신화로서 의식하면서도, 탈신화화를 통해 상징의 의미가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지적인 정직성을 가지고 성스러운 존재와 교제할 수 있다.



 5.3. 평가



 '악의 상징'은 상징작용의 해석학적 구조를 드러낸다. 존재론적 세계에서 존재 자체가 체험될 때, 인간은 일단 이 걷잡을 수 없는 체험을 외부적 사물에 투사하여 외화한다. 이러한 전이가 바로 내면적 객관화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의미의 잉여가 투사된 사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기호로서 작용한다. 그러나 의미의 잉여는 인간의 의식 안에 객관화되지 않은 채 떠다니고 있으므로, 그것은 무의식적 꿈이나 몰아적 환상 안에서 투사된 사물의 표상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것이 바로 내면화의 계기이다. 표상의 1차적 의미와 2차적 의미잉여 사이의 긴장은 2차적 의미분절을 요구한다. 여기서 시적인 존재의 세계가 열린다. 시적인 언어를 통하여 상징은 신화를 낳는 것이다. 일단 상징이 시학적 문맥 속에서 언어화되면, 의미잉여는 시적인 언어를 뚷고 의식에로 침습한다. 이리하여 의미잉여는 상상력과 공감 속에서 존재론적 세계를 개시하며, 이렇게 추체험된 존재론적 세계는 다시 반성을 통해 해석되고, 존재론적 세계'로서' 파악됨으로써 존재 자체에 열린 신뢰의 태도를 낳게 한다. 이 때, 교조적 신뢰를 의심하는 반성적 해석은 심층심리분석, 탈신화화, 선험적 연역, 존재론적 해석 등의 비판적 분석을 통하여 객관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에 따라 해석된 존재론적 세계는 자신의 객관적 현실영역을 확보하게 되고, 따라서 신뢰라는 자기이해는 비판적 객관성을 확보한 합리적 신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세계는 그 자체의 모호성을 지닌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꿈의 언어들은 의식을 체계적으로 왜곡하는 무의식의 충동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하고,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회적 이데올로기는 언어를 체계적으로 왜곡하는 생산구조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하며, 하이데거나 리꾀르에 의하면 시적 언어는 존재 자체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상징세계의 존재론적 기원은 보다 명확히 해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리꾀르의 해명을 주목할 것이다.

 



                              제3부 현상학적 해석학의 우회로





 '악의 상징'에서 리꾀르는 선이해 내지 전통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는 자신의 해석학적 근본입장을 밝혔다. 해석학은 언어에서 출발하므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언어의 전제를 신뢰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입장 위에서 해석학은 두 가지 과제를 갖는다. 해석학은 언어의 출발점이 되는 상징, 꿈, 은유의 문제를 해명해야 하며, 동시에 신뢰에서 출발한 자신의 선이해를 어디까지 비판적으로 교정해 나갈 수 있는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결국 신뢰의 해석학은 역사문화적으로 전승된 자신의 전이해를 받아들이고, 상징의 분석을 통해 자신의 전이해 속에 갈무리되어 있는 원초적 존재체험을 현대에 되살리면서도, 프로이드, 마르크스, 비판이론이나 구조주의와 같은 대립적 해석학과의 대결을 수행함으로써 해석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기나긴 우회로를 통해 비로소 철학적으로 일관성있는 자기이해에 도달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리꾀르의 해석학적 통합과정을 지속적으로 추구해갈 것이다.



6.. 프로이드 해석학의 승화



 리꾀르에 있어 프로이드는 꿈과 무의식에 관한 상징해석의 대가일뿐 아니라 신뢰의 해석학에 대를 형성하는 의심의 해석학자라는 점에서 반드시 직면하고 넘어가야 하는 걸림돌이 된다. 리꾀르는 프로이드를 헤겔과 마주 서게 함으로써 이 힘든 갈등을 승화하고 넘어가게 된다. 우리는 아래에서 프로이드에 대한 리꾀르의 해석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검토할 것이다.



 6.1.리꾀르의 철학적 식별과정 안에서의 '프로이드 해석학'의 위치



 언어의 근원을 드러내는 상징은 성스러운 우주실재, 무의식의 꿈, 신화의 시적 이야기를 통해 접근된다. '악의 상징'에서 신화적 상징분석을 통해 실천적 삶의 영역으로 연구촛점을 옮긴 현상학적 해석학은 이제 상징이 내면화되는 최초의 계기, 무의식과 꿈의 영역으로 관심을 전환한다. 여기서는 언어 이전의 원초적 체험을 간직하고 있는 무의식이 꿈의 표상들을 통하여 전개하는 이야기를 분석함으로써 비주제적 전이해의 역동성 자체에로 접근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꿈의 분석은 프로이드에 의해 창시된 심층심리학파에 의해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왔다. 그러나 그 분석기법이나 의미해석상의 갈등은 프로이드, 융, 아들러의 학파가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게 하였다. 여기서 신뢰의 해석학은 개성화에 의한 인격적 통합을 주장한 융의 분석심리학40)과 더욱 가까운 상응성을 갖는다. 그러나 리꾀르는 오히려 융이 아니라 프로이드를 그의 대화상대로 선택한다. 자신과 상이한 입장에 있는 상대자를 대화상대로 선택하는 리꾀르의 결단은 그의 해석학이 단지 수평적인 지평융합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해석의 갈등 안에 작용하고 있는 변증법적 계기를 명시함으로써 그의 해석학적 순환을 원순환에서 나선형적 순환41)으로 생동시키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래에서 무의식 상징의 언어화과정을 살펴보는 동시에 프로이드의 폭로의 해석학과 리꾀르의 신뢰의 해석학이 어떤 모습으로 융합되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6.2.꿈의 상징의 고유성



 프로이드와의 맞대면에서 리꾀르는 그가 다루는 것은 꿈이 아니라 언어적 텍스트임을 명시한다. 꿈 자체의 무의식적 충동작용은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깨어나서 분석되어 해석된, 본래적인 꿈의 언어적 텍스트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은 무의식의 꿈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꿈에 관한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이며, 꿈의 언어에 관한 독특한 암호해독의 의미론을 전개하는 작업이다.

 프로이드는 꿈을 인간 소망의 위장된 대체표현의 모델로 만듬으로써 꿈을 인간의 욕망과 언어 사이에 위치시킨다. 이 욕망의 의미론에 따르면 꿈의 언어 자체가 처음부터 왜곡된 것으로 드러난다. 은폐적인 언어는 이중의 의미를 지니며 상징성을 띠게 된다. 꿈의 언어가 이중의미를 지닌 상징이므로 그것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해석학적 장'으로 밝혀진다. 상징의 해석은 이중의 지향성에 의해 구성되는 다소 복잡한 지향구조를 지닌다. 상징의 이중성은 기표가 기의와 준거사태에 대해 갖는 기호학적 이중성과는 다르다. 상징의 이중성은 문자적 의미를 갖는 기호가 그 의미를 통하여 의미론적 문맥 안에서 다시 이차적 의미와 상응함으로써 성립한다. 종교현상학에서 상징 안의 의미간의 연관결합은 유비적 성격을 갖는다. 신화적 상징은 일차적 의미가 지향적으로 이차적 의미에로 동화되어 들어가는 운동이다. 이에 반해 꿈의 상징은 일차적 의미가 무의식 중에 이차적 의미를 이화시켜 차단하는 작용을 한다.42) 그렇다면 꿈의 해석은 상징의 유비적 해석이 아니라 의심의 기술을 통해 암호를 역으로 풀어나감으로써 감추어진 가면을 벗기는 작업이 된다. 결국 프로이드의 해석학은 의미를 복원하는 신뢰의 해석학에 대립극을 형성하며 신비를 탈신비화하여 환상을 폭로하는 해석학이다. 이 양극 사이의 진자운동이 본래적인 해석학의 운동이 되는 것이다.

 리꾀르는 프로이드의 해석학을 분석하기에 앞서, 꿈의 언어가 갖는 상징작용의 독특성을 해명하고 꿈의 상징 자체가 갖는 은폐성이 초래한 의심의 해석학을 '악의 상징'에서 정초된 자신의 신뢰의 해석학과 대립시켜 꿈의 상징에 고유한 의미론적 구조를 탐구하는 동시에 상징 일반의 전체적 구조를 보다 세분화하여 통합시키려고 기획한다. 이러한 기획하에 그는 우선 프로이드의 이론적 발전단계를 추적하며 그 전체상의 일관성 내지 모순성을 엄밀하게 분석하여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아래에서 리꾀르가 재구성한 프로이드의 이론체계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6.3.프로이드의 이론에 대한 분석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기본적으로 심리현상을 에너지법칙43)에 따라 충동들의 역학적 갈등 안에서 이론적으로 설명하면서도, 때로는 상징의 의미를 해독하는 해석학적 작업을 전개한다. 따라서 그의 이론체계 안에 기계론적 설명과 해석학적 이해가 대립된다. 프로이드의 입장에서 보면, 충동이란 쾌락과 고통의 체험을 수량적으로 환산하여 경제학적인 대차대조표의 수지균형을 맞춤으로써 긴장과 보상 사이의 역학적 운동을 하는 심리적 에너지의 자율적 체계인 것이다. 그런데 억압된 충동의 대리충족으로 나타나는 꿈의 표상들은 해석 내지 해독이 필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 때 충동의 충족은 의미의 영역에 속하지만, 충동의 억압은 역학의 영역에 속한다. 이 양자의 영역을 의식적으로 구별하면서 해석을 진행하여야 양자의 긴장 안에서 해석의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의미구성에 따른 이해와 체계에 따른 설명을 구별하며 독해해야 하는 것이다. 양자의 정합성은 독해의 말미에 가서 판가름나야만 한다.

 이제 직접 텍스트로 들어가서 꿈의 현상을 분석하여 해석해보면 결국 꿈이란 삼중의 퇴행현상인데, 형상적으로는 표상단계로 퇴행하는 것이고, 시간적으로는 유아기로 퇴행하는 것이며, 국부해부학적으론 충동과 쾌락이 결합된 곳으로 퇴행하는 것이다. 어떤 유형의 꿈이든지 일단 프로이드의 해석을 거치면 결국엔 좌절된 성적 충동의 삼중적 퇴행현상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프로이드는 의미의 이해를 충동의 경제적 설명에로 환원함으로써 해석학적 일관성을 상실한다.

  꿈과 신경증에 대한 경제적 설명은 유비를 통해 꿈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 문화 전반에 대한 비평으로 확장된다. 역사과정은 권위와 투쟁하는 충동의 역사로 해석된다. 문화란 성적 충동을 희생시킴으로써 그 보상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성 컴플렉스에서 초래된 거세공포와 오디프스 컴플렉스는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과 적응하게 되는 문화 창조의 동인이 된다. 종교는 이렇게 좌절된 충동의 보상으로 형성된다. 여기서 유아론적 관점의 무의식, 전의식, 의식의 해부학은 문화적 상황 안의 자아, 이드, 초자아의 해부학으로 변경된다. 특히 초자아와 더불어 사회적 가치, 윤리체계를 습득하는 사회적 과정이 발달하게 된다. 어린이의 초자아는 부모의 초자아를 모델로 하여 형성되어 전통과 가치관을 전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쾌락원리를 넘어서'(1920) 안에서 프로이드의 해석체계는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죽음을 향한 충동의 발견에서 현실의 원리가 쾌락의 원리와 병립하게 된다.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본능의 리비도는 신화적인 에로스로 재해석된다. 모든 생명의 목적이 죽음이라면, 죽음에 거슬러 싸우는 생명의 보존자 에로스는 생명 원리를 넘어서는 초월적 갈망을 지닌 것으로 밝혀진다. 죽음의 충동이 초자아로 성장함으로써 쾌락과 죽음은 동일선상에서 파악된다. 반면에 생명의 충동인 에로스는 모든 것을 보존하고 모든 것을 일치시키며 사랑 안에서 모든 것에 개방된다. 이제 에로스는 기계적 역학 체계를 넘어서 불멸의 자유라는 무한한 영역으로 나아간다. 에로스와 죽음의 갈등 안에서 현실의 원리가 새롭게 밝혀지며, 의미의 전 위계질서, 아난케를 드러낸다. 아난케란 무명의 현실이며 환멸의 상징이다. 그것은 자연의 현실과 우리의 환상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실존의 가혹성을 비감하게 받아들이는 지혜이다. 이러한 대립갈등을 통해 결국 정신분석은 에로스, 타나토스, 아난케의 신화적 철학으로 고양된다.

 결국 프로이드의 심리체계는 어떤 영원한 갈등상태 안에 놓여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심리가 갈등을 조정하는 항상성의 체계라면, 이 체계는 결국 갈등조정의 기능수행에 실패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역학적인 조정체계보다 더 강력한 어떤 갈망이 죽음이란 생명원리에 규제되지 않고 스스로의 영생을 위하여 치솟아 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프로이드의 체계 그 자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바로 이 갈등의 지점이 리꾀르에게 새로운 해석학적 상황을 열어준다.



 6.4.변증법적 책읽기의 필요성



 의심의 해석학은 철학적 분석 이전에 어떤 태도결정을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가 프로이드의 해석학에 참여하려면 의식 전체를 왜곡된 것으로 간주하는 선결단이 요구된다. 이렇게 의식 자체를 의심함으로써 해석의 대상이 되는 의미는 이제 의식의 의미가 아니라 의식적 표현 안에 감추어진  무의식의 의미가 된다. 이런 선판단을 통하여 프로이드의 이론은 꿈의 현실을 구성하는 틀이 된다. 처음부터 이론과 사실이 불가분리하게 얽혀들어가 서로를 함께 매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론이 사실을 해명하고 사실이 이론을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사실이 동시에 작용하여 비판적인 기점을 제거하는 동시에 자신은 다른 모든 이론을 마음대로 비판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프로이드의 해석학을 올바로 정위하기 위해서는 프로이드의 이론 안에서 이론적 틀을 넘어서는 사실의 역동성을 찾아내는 것이 없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의식과 무의식의 갈등을 물리적 역학체계와 경제적 상호의존체계라는 기계론적 틀 안에서 설명하면서도 꿈의 상징해석에서 이해와 해석의 작업을 수행한다. 이 상징해석이 문화와 종교에로 적용되면서 유아론적 의식은 죽음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고 마침내 생명과 죽음의 투쟁에 대한 해석은 초기의 기계론적 틀을 깨고 본래적 상징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죽음과 투쟁하는 에로스의 존재가 결국 모든 것을 퇴행적으로 설명하는 프로이드의 이론을 부수고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드의 해석학은 자체 내에서 해석의 갈등을 노정한다. 애당초의 선판단이 문제시되는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드의 해석학 자체 내에 비주제적으로 요동치는 갈등의 요인을 적극적으로 주제화하여 의심의 해석학을 이완시킬 필요성이 요청된다. 그러면 어떻게 이 대립요소를 주제화시킬 것인가? 이러한 난제에 직면하여 리꾀르는 아주 독창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프로이드의 폐쇄적 해석체계를 개방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변증법적 책읽기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증법적 책읽기란 과연 무엇인가?



 6.5.변증법적 책읽기의 방법



 변증법적 글읽기는 리꾀르의 아주 독창적이면서도 사태적절한 해석작업이다. 상징은 자체내에 의미의 잉여를 지니므로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그 중의 한 가지 극단적인 해석을 균형잡기 위해서는 반대극의 해석을 대립시킨 뒤, 양자를 "카드섞듯이"44) 서로에게 주입시켜 서로가 서로를 교정하고 보완함으로써 스스로 새로운 생명력에로 고양시키도록 하는 방법이 바로 변증법적 글읽기의 방법이다.

 우선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주체의 시원학(archeology)45)으로 정립된다. 무의식의 현실이란 사실은 환상을 깨고, 억압을 해체하며, 이기주의를 벗어나, 자기의식으로 진행하는 자아의 현실이다. 충동의 심리적 표현이란 이미 충동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의식은 절대적인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해독의 규칙에 의존해야만 자신의 근원으로 소급될 수 있으므로 해석상의 상대성을 지니며, 이 해독에는 분석자의 의식이 함께 참여해야 하므로 간주관적 상대성을 지니고, 이 이중의 상대성이 결국 분석자의 언어적 전이46)에 의존하므로 분석자의 판독이 최종적인 준거가 된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은 해석의 한 가지 가능성으로 정립할 뿐이다. 여기서는 의식의 결여가 전제되는데 분석이란 의식의 회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 이러한 의식의 회복은 과거적 소급을 통해 달성된다. 주체는 자신의 의식의 부적절성과 환상을 고백하고 유아기의 원초적 표상으로 퇴행함으로써 자신의 시원적 정체성을 되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주체의 시원학에 대립되는 주체의 종착학(teleology)을 찾아야 하는데, 리꾀르는 정신의 종극적 지향점을 향하여 숨가쁘게 질주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이러한 대립극의 해석학을 발견한다. 주체가 시원으로 돌아가 충동의 힘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 충동의 실존적 의미를 체화함으로써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자기의식은 정신을 통해 매개되는 것이다. 헤겔은 진보적 종합을 통해 의식의 최종점에 도달하고자 한다. 정신은 의식 안에서 유동하며 의식을 매개하여 진리에로 고양시킨다. 여기서 의식은 자신에게 소외된 형태로 출발하여 타자 안에서 자기를 인식함으로써 세계를 자신에게 가지고 돌아와 두 배로 풍요로워진 자아가 된다. 헤겔은 비주제적 갈망의 시원학에서 출발하여 정신의 최종목표를 주제적으로 추구하는데 비해, 프로이드는 무의식의 시원학을 주제화하면서도 그것을 의식화하는 과정에서 비주제적인 종착학을 노출시킨다. 이렇게 양자가 내재적으로 서로를 지시한다면, 두 개의 대립극은 본질적으로 서로 융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증법적 글읽기는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펴보자.



 6.6. 승화된 '의심의 해석학'



 정신분석은 그 자체로는 분석적으로 설명은 되나 이해되지는 않는다.47) 이해되기 위해선, 분석이론 안에 비주제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개념들을 주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분석상황 안에서 비주제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환자와 분석자 간의 인격적 관계이다. 이 간주관성은 변증법적 대화의 성격을 지닌다. 대화를 통해 분석과정은 본능적 충동의 만족으로부터 갈망의 인정으로 진행한다. 본능적 갈망은 대상의 획득에서 충족되지만 사랑의 갈망은 의미충만에서 충족된다. 이러한 갈망들의 상충에서 억압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결국 갈망의 원초적 구조는 애당초부터 변증법적 긴장 안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더우기 자아와 대립되는 타자로서의 외부적 권위는 타자적 자아(가령 부친)의 갈망으로 정립되며 초자아는 이 타자를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을 정립한다. 그래서 이드와 초자아와 세계에 대한 자아의 삼중적 의존관계는 결국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소외관계로 설정되며 해방적 지양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지양의 기점은 승화(sublimation)이다. 승화란 충동의 질적인 방향전환을 의미한다. 가령 성적인 충동이 예술활동으로 전환되거나, 다른 창조적 활동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러한 탈애욕적 승화는 오디프스 컴플렉스가 해체되어 리비도가 애욕에서 벗어나옴으로써 성적인 쾌감이 미학적으로 전이되어 창조적 활동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자아의 변화과정에서 유래한다.48) 일단 이렇게 승화작용을 통해 기계론적 역학체계의 틀을 부수고 나면 프로이드의 심리분석이란 퇴행을 통한 기원학일 뿐만이 아니라 승화를 통한 발전의 가능성도 자체 안에 비주제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일종의 상징해석임이 드러난다.



 6.7. 상징의 해석학



 변증법적 글읽기를 통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은 기원학과 종착학이 혼결되어있는 상징의 구체적 텍스트로 제시된다. 여기서 상징적인 의미는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무의식에 기원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보다 상위의 의미로 승화되는 변증법적 발전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변증법 안에서 자아는 스스로에게 소외되었다가 대립적으로 정립되어 변증법적 운동 안에 들어오고, 이 운동을 반성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해되는 것이다. 충동과 정신49)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승화는 상징적 기능 그 자체이다. 숨겨진 갈망의 비밀스런 의도가 꿈에 의해 왜곡하면 그것은 상징적인 표상이 되며 정신은 그것을 다른 차원으로 옮겨 그 상징적인 의미를 개방한다. 상징 자체에서 위장된 모습으로 솟아나오는 숨은 의미를 투사를 통해 예기함으로써 승화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충동의 근원이 감추어진 성욕이라면, "꿈에서 상징은 속기의 부호와 같이 영구히 고정된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상징은 직접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오랜 기간의 어려운 해독작업을 거칠 필요가 없다."50)

 그러나 사실은 꿈의 상징은 예술적이고 신화적인 전승 안에서 동일한 상징주의를 발견하며 결국 그것은 언어의 영역 안에 위치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언어의 영역 안에서 상징의 창조성은 다양한 단계를 가지고 있다. 꿈의 상징은 상징체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동화나 전설과 같이 단지 과거의 단편적 상징으로 남아있다. 다음 단계의 상징은 현재 사회 안에서 여전히 능동적으로 활동하며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한다. 구조주의 인류학은 이 단계의 상징을 연구한다. 최고의 단계에서 전망적인 상징은 과거의 상징에서 새로운 의미를 드러내는 창조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상징해석의 "참된 과제는 상징을 그의 창조적 계기에서 파악하는 것이다."51)

 상징의 이 삼단계는 소유욕, 권력욕, 가치욕구와 같은 갈망의 세 계기와 상응한다.52) 동시에 이 세 가지 갈망들은 각기 고유한 객관성에 상응한다. 소유욕은 대상의 희소성에서 격발된 감정으로 경제적 소외감과 함께 경제적 대상에 대한 반응이지 본래적인 리비도의 발현은 아니다. 소유욕은 사회 안에 경제적인 상징을 외화시킴으로써 자기 의식적인 주체성의 새로운 양상을 구성한다. 마찬가지로 권력욕은 지배와 복종관계를 구성하는 사회구조에서 격발된 감정으로, 사회적 기구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자기의식을 형성하고 정치적 소외감을 초래시킨다. 경제와 정치에 의해 구성된 자아는 문화 안에서 타인의 존경을 욕구하는 가치욕구를 갖게 된다. 여기에 상응하는 대상은 더 이상 사물이나 기구가 아니라 문화적 표현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욕구하는 바로 거기에서 자신으로부터 소외된다. 역사적 발전 안에서 충동과 객관성의 갈등은 삼중의 인간적 소외를 낳는다. 프로이드의 퇴행적 해석학은 이 소외로부터의 구원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상처받은 인간의 자존심은 분노를 낳는다. 소외를 의식하는 자기 의식은 그것의 비진리 앞에서 분노한다. 자기의식은 진리를 얻기 위해 투쟁을 시작한다.53) 진리의 투쟁을 통해 리비도의 역할은 그치고 자기의식의 역할이 능동화된다. 문화적 작품을 통하여 인간의 존엄성이 표현되고 요청된다. 그런데 이러한 '의지의 시학'을 통해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드러난다. 충동은 이미 과거의 거기에 존재하고 정신은 최종목표를 향하여 지시하지만, 그것들이 각기 지시하는 창조와 종말은 나의 '전적인 타자'이다. 나는 나의 기원과 목표를 반성적 사고 안에서 개념화할 수 있지만 이 전적인 타자는 여전히 전적인 타자로 남아 나에게 다가오고 덥쳐온다. "그것은 자신의 극단적인 타자성을 무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전적인 타자로서 현시한다."54) 그것의 근원은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그것의 현현은 우리의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새로운 해석학적 순환이 발생한다. "믿는 것은 부르심을 경청하는 것이지만, 그 부름을 듣기 위해선 메시지를 해석해야 한다."55) 이렇게 하여 시원학과 종착학의 변증법 안에서 전적인 타자가 식별되기 시작한다. 창조는 시원학의 지평이 되고 종말은 종착학의 지평이 된다. 악의 상징은 화해의 상징으로 승화되고 '보다 더'의 현존에 대한 감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희망과 신뢰를 낳는다.

 프로이드의 해석학은 공포에서 유래한 모든 신적인 우상을 파괴한다. 그러나 이렇게 우상파괴를 통해 얻어진 자기의식에게 충동 자체가 여전히 신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면, 이러한 에로스의 갈망이 사랑의 선포를 신앙하는 것이 불합리하지 않다. 하느님이 처벌의 하느님, 윤리적 하느님이 아니라, 욥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라면 에로스의 신화는 사랑의 신앙 안에서 실존적인 상징을 얻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사랑의 요동하는 상징을 추적하면서도 자신의 과학주의에 갖혀 현실의 의미를 외소화하고 퇴행적 해석학에 희생되고 만 것이다. 현실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는 의심의 해석학은 현실을 해방하는 상상력의 은총이 결여된 것이다.



 6.8.평가



 리꾀르의 '해석에 관하여'는 프로이드와의 진흙탕 싸움에서 빛나는 보석을 얻어낸 것과 같은, 모법적인 해석학 저서이다. 신뢰의 해석학은 의심의 대가마저 신뢰하며 들어가 그의 신뢰에 걸맞는 많은 철학적 통찰을 프로이드 안에서 끌어내면서도, 끝내는 자신의 우상이었던 쾌락의 충동마저도 죽음의 충동으로 의심한 이 의심의 대가 안에서 죽음을 넘어서려는 사랑의 충동을 발견함으로써 종국에는 의심의 족쇄를 떨치고 나오는데 성공한다. 더우기 신뢰의 해석학은 애초에 기대되었던 것처럼 의심의 해석학에 대한 대립극으로 반립되는데 그치고 만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증법적 글읽기를 통해 의심의 해석학과 과신의 해석학을 자체 내에 승화하며 새로운 종합을 이룬 위치에 이르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종합에 도달한 신뢰의 해석학은 자신의 해석학적 지평을 창조와 종말 사이의 긴장 안에 정위하여 상징의 본래적 기능을 최고도로 발휘할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을 보유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중심잡힌 객관적 철학이 '전적인 타자'의 부르심을 경청한다는 데서는 철학 자체가 당혹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학 내지 신앙은 철학의 경계내로 침입하지 않는 것이 근대철학 이후의 철학적 불문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리꾀르는 자신의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악의 상징'이 고백의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였듯이, 철학은 가능성만을 탐구하는 관념적인 사고의 작업이 아니라, 실재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하는 갈망의 추구이다. 신뢰의 해석학이 죽음을 넘어서려는 사랑의 무한한 갈망에 직면하여, 자신이 전적으로 사랑받았다는 또 다른 고백의 현실을 마주친다면, 그 고백을 해석의 텍스트로 삼아 그 고백 안에 간직된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철학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꾀르의 해석은 여기에서 멈춰선다. 신뢰의 해석학은 아직 존재론과 맞대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빨리 존재론과 직면하는 것이 얼마나 불리한 것인지는 프로이드의 경우에서 충분히 분석되었다. 결국, '전적인 타자'와의 마주침은 아직도 존재론과 신학의 길을 거쳐야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우선 존재론과 본격적으로 마주치기 위해서 신뢰의 해석학은 아직도 많은 우회로를 거쳐야만 한다. 해석의 갈등이 아직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꾀르의 철학적 희소가치는 그가 결코 서두름이 없이 자신 앞에 안개가 걷히듯이 드러나는 해석의 기로들을 또박또박 밟아나가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 징검다리의 다음 모서리는 과연 어느 곳일까?



 우리는 여기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리꾀르의 해석학적 식별의 길을 추적함에 있어 형식적으로 볼 때, 우리는 현상학에서 해석학으로 들어왔고, 다시 현상학적 해석학이 의심의 해석학과 맞서서 신뢰의 해석학으로 종합되는 과정을 보았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볼 때 우리는, 의지의 현상학에서 신화상징의 해석학을 거쳐 꿈의 상징에 관한 해석학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형식적인 방면을 추적하여 해석의 갈등이 지속되고 있는 다른 방면의 의심의 해석학들을 계속 추적할 것인가, 아니면 내용적인 일관성을 따라, 신화상징, 꿈의 상징을 거쳐 언어상징에 도달하는 상징의 해석학을 종합할 것인가하는 선택의 문제에 부딪힌다.

 해석학은 언제나 언어에 의해 표현되는 세계에 관한 이해의 해석이며 동시에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의 자기이해를 위한 해석이다. 언어는 해석학의 지평이자 본래적인 해석의 대상이다.56) 그러나 언어라는 전체지평을 제대로 조망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전히 숱한 해석의 갈등을 거쳐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상징의 해석학에 도달하기 위하여 해석의 갈등이라는 우회로를 거치고자 한다. 해석의 갈등을 거쳐 신뢰의 해석학의 해석학적 지평을 다층화하며 종합한 후에 본격적인 언어의 영역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해석의 갈등 상황을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고, 또 다른 의심의 대가 막스에서부터 출발하여 비판이론의 의심의 해석학과 맞대응한 뒤, 구조주의를 분석하면서 본래적인 언어의 영역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7.. 갈등의 해석학사



  리꾀르는 '해석학의 과제'57)라는 소논문에서 직접 해석학의 문제사와 대결하며 자신의 현상학적 해석학을 문제 해결의 방향으로 제시하였다. 여기서 그는 현대 해석학의 흐름이 일반 해석학과 기초해석학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본다. 슐라이어마허과 딜타이 계열의 일반 해석학은 사회과학의 인식방법론을 추구한데 비해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기초해석학은 인식행위 자체를 존재양식의 하나로 파악하여 해석학을 존재론의 틀 안에서 전개하였다는 것이다. 일반 해석학이란 역사적 세계에 관한 언어적 텍스트를 이해하여 해석하는 방법론적 해석학인데 비해, 기초해석학이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의미를 구성하는 인간의 실존구조를 분석하는 실존해석학이다. 리꾀르는 이 양자를 어느 한 쪽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래에서 딜타이, 하이데거, 가다머 등 해석학의 대가들의 기본 입장을 약술하고 그들에 대한 리꾀르의 평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7.1. 딜타이



 해석학은 본래 성서본문의 다의적 의미를 구명하는 성서주석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개신교 신학자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본격적인 학문의 한 분과58)로 성립하게 되었다. 해석의 가능성의 근거는 인간 본성의 동질성이다. 해석의 필연성은 인간 개개인의 역사적 이질성에서 유래한다. 보편적 해석학은 텍스트 안에 표출된 언어,59) 개성, 역사의 상호작용을 탐구한다. 여기서 해석은 문법적 해석과 심리적 해석의 상호보완에 의해 완결된다.60)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본문에 대한 문법적 해석은 한 문화 안에 공통된 담화의 성격을 결정한다. 반면에 저자와의 심정적 일치를 추구하는 심리학적 해석은 저자의 메시지에 일의적 의미를 결정한다.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은 딜타이를 통해 역사적 의미세계를 탐구하는 정신과학의 인식론적 방법론으로 확장된다.   



 딜타이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생동하는 생61)의 현실에 대해 피상적이라고 본다. 칸트의 주관은 비인격적이고 논리적인 순수 이성이었으나, 풍요로운 삶의 사실 자체는 결코 논리적으로 해명되지 않고 오직 이해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 때 이해란 감성적으로 주어진 삶의 표출이 정신적 삶 안에서 인식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 문자적 삶의 표현을 통해 저자의 삶에 대해 친숙한 이해를 얻어내는 기술론을 해석학이라 한다. 자연과학은 측정가능한 경험법칙을 설명하고, 정신과학은 삶의 객관화인 역사적 지식을 이해한다. 이제 이해가 정신과학을 정초한다면, 해석학은 정신과학의 방법론이 된다. 이해는 전체로부터 시작되나 전체는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개별적인 것은 그것의 환경, 그것을 포함한 삶의 구조 연관에 대한 지식에 의해 해석된다. 이렇게 귀납적으로 얻어진 개별적인 것들은 비교를 통해 객관화됨으로써 다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얻어진 전체는 다시 개별적인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이행한다. 이런 순환을 통해 정신적 삶은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있는 구조화된 전체 안에 고정시킨다. 해석학은 객관화된 표현을 통해 구조화된 전체를 재생산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이해가 저자에 대한 감정이입에 의해 성립된다고 보았지만 딜타이는 저자의 의도는 해석을 통해 재생산되는 것으로 본다. 해석학 안에서 인간은 이해라는 우회로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 자기 자신도 언제나 표현과 작품을 통해 해석되어야만 비로소 자신에게 인식되기 때문이다. 정신적 생명은 역사를 통해 자기 자신을 문화세계로 객관화하며, 인간은 역사를 통해 과거의 의미를 현재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보편적 역사는 해석학의 장이다.



 딜타이는 이해의 해석학적 순환을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역사를 통한 정신적 삶의 객관적 전승체가 정신과학의 주제인 한, 정신과학의 방법론은 인식론적으로 정초된 이해의 해석학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객관화된 정신적 삶의 원저자에 대한 심리적 이해를 요구함으로써 슐라이어마허와 마찬가지로 생명의 철학과 의미의 철학 간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리꾀르는 이 점에서 딜타이를 비판한다. 일단 생명의 표현이 객관화된 이상 저자의 심리에로 자신의 심리를 전이한다는 심리적 접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미 객관화된 정신의 표현은 담화적 성격을 상실하고 자율적 존재가 된다. 따라서 텍스트를 저자에게 소급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드러낸 텍스트의 의미와 그 의미세계의 문맥에로 해석의 관심을 돌려 객관적인 매개를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해석학의 태도라고 주장한다.62)

 텍스트의 해석으로부터 저자의 의도에 대한 고려를 배제하려는 리꾀르의 태도는 차선의 방책인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아직 생존해 있어 여전히 직접적인 담화의 가능성이 남아있고, 또 저자의 지속적인 저술작업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한, 텍스트의 의미와 그 의미세계를 배타적으로 텍스트 안에만 한정시키는 것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고 본다. 또한 글읽기가 일종의 대화적 상황을 형성할 때, 우리는 단지 텍스트와만 대화하는 것인가? 저자의 개성은 텍스트를 통해 우리에게 공감적으로 호소해오지 않는가? 우리가 글을 읽고 어떤 저자에게 애정을 갖게 될 때, 텍스트 안에 담겨진 인격성은 과연 저자에게까지 소급될 수는 없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리꾀르의 텍스트 해석학을 논구하는 자리에서 보다 상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7.2. 하이데거



  해석학은 딜타이를 통해 이해의 기술론으로부터 정신과학 일반의 인식방법론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제 하이데거를 통해 해석학은 정신과학의 방법론으로부터 학문 일반의 가능성의 근거로의 심화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심화의 근거는 이해의 본질에 대한 보다 심오한 파악에 근거한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실존분석에 따르면 이해는 인식의 과정 속의 한 작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양식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신이 피투된 현상황에 세계 전체의 유의의성63)을 기투하여 선이해를 지닌다. 체험된 것은 선이해를 통해 현존재의 의미세계의 문맥 안에 정초되어 비주제적이었던 기투 안의 의미가 주제화된다. 이런 해석학적 순환과정을 거쳐 이해는 자기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선이해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므로 이해의 해석학적 순환은 그 자체가 현존재의 존재양식인 것이다. 이해는 세계성에 대한 예지와 용재자를 겨냥하는 예시, 그리고 용재자의 용재성을 파악하는 예파라는 예-구조를 지니고 있다. 해석은 심정성 안에 개시된 예지, 예시, 예파에 따라 용재자를 무엇'으로서' 파악한다. 이러한 근원적 '으로서'구조 안에서 주관과 객관은 근원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생은 있는 그대로 원본적으로 체험된다. 이러한 근원적 차원의 이해가 모든 학문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언어가 등장하면서 용재자는 전재자로 변양될 위험성을 갖게 된다.64) 생동하는 생의 통일이 언어에 의해 고정되면서 객관화의 가능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이해의 이러한 원초적 통일을 잃고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어 존재자가 전재적으로 현시되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반면에 정신과학은 해석학을 통하여 현존재의 역사적 실존을 그 원초적 통일성 안에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방법 자체 내에 존재에로의 길이 열려있다고 확신하였다. 훗설의 주관적 해석에서 독립된 현상학 자신이 이러한 존재론적 탐구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상은 존재로서 파악되고 학은 해석학으로 파악된다. 그리하여 현상학은 존재의 해석학으로 탈바꿈한다. 현상의 단초에 존재가 드러남으로써 주관과 객관은 원초적인 통일성 안에서 체험되며 주관과 객관의 분리65)는 비본래적 인식이었던 것이 드러난다. 그러나 현상학 속의 존재체험은 해석학 안에서 다시 언어에 갇히게 된다. 그렇다면 존재를 추구하는 해석학은 언어를 돌파해야만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언어를 따라 전진하다가 다시 체험으로 퇴행하는 것 같다. 따라서 침묵 속의 직관이 해석하며 말하는 것보다 우위에 서게 된다. 그는 무엇을 듣는가? 그는 웃고 답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하이데거의 존재사유는 황홀경 속의 신비철학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갖는다.



 그러나 철학의 본질이 해석학적 반성인 한, 이제 신비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대두된다. 존재론적 신비체험은 시적 상상력을 통해 상징으로 언어화된다. 따라서 존재를 겨냥하는 해석학은 상징의 해석학, 은유의 해석학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문맥 안에서 리꾀르의 현상학적 해석학이 등장한다. 하이데거는 현상학에 의해 존재를 확보한 뒤, 이렇게 증시된 존재론을 해석학을 통해 진술하고 전달하려 하였으나, 리꾀르는 오히려 해석학을 통해 존재에 도달하려 한다. 이러한 우회로의 진행은 현상학을 본래의 의도대로 의미가능성의 세계에 한정하려는 방법론적인 고려에 기인한다. 현상학을 통해 존재체험의 가능성의 조건이 논구된 뒤에야 실재의 현실을 해석할 수 있다는 인식론적 고려에서 존재론은 추후로 연기된다. 그렇다면 리꾀르에 있어 현상학적 해석학이란 존재이해를 겨냥한 전술적인 우회로에 불과하다. 가능성에서 언어를 거쳐 현실성으로 나아가려는 리꾀르의 전체 구도는 해석학의 문제사라는 전체 문맥을 고려할 때 보다 충실하게 이해된다.

  딜타이와 비교해 볼 때, 하이데거는 이해를 인식의 문맥에서 존재론의 문맥으로 이동시켰다. 해석학은 텍스트의 표현을 다루는 이해의 기술학이 아니라 현존재가 자기 가능성을 실존시키는 과정으로 심화된다. 이제 해석학적 순환은 주관이 객관을 인식하며 동시에 객관이 주관을 결정하는 악순환이 아니라 현존재의 비주제적 선이해와 주제적 해석간의 명료화 과정이 된다. 하이데거에 의하여 일단 해석학적 순환의 문제는 해명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존재론적 해석학은 해석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였는가?  리꾀르는 하이데거가 인식론의 문제를 맞대면하지 않고 존재론의 차원으로 넘어감으로써 해석학의 문제를 오히려 전보다 더 심화시켰다고 한다. "하이데거에 의해 해명되지 않은 문제는 기초적 해석학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우리가 비판적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가인 것이다."66) 텍스트를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의 문제, 역사적 정신과학의 정초문제, 대립적 해석들 간의 갈등에 대한 조정문제 등이 하이데거의 해석학 안에서는 제기조차 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역사적 지식을 존재론적 이해에 종속시키면서도 "이 원초적 이해로부터 어떻게 역사적 이해가 도출되는지에 대해 아무런 방법도 보여주지 않는다."67) 존재론적 해석학은 이러한 문제로의 귀환을 불가능하게 한다.

 리꾀르가 하이데거와 같이 존재론적 전회를 감행하지 않고 현상학적 해석학을 통해 존재를 겨냥한 우회로를 선택한 것은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이 노출하는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이다. 리꾀르는 기본적으로 하이데거의 노선, 즉 이해의 존재론을 구성하는 것에 찬성한다. 그러나 이해의 존재론은 해석의 인식론을 거쳐야만 자기자신에게 귀환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언어를 끝까지 돌파하여 존재에 도달하려는 리꾀르의 우회의 길이 과연 어디까지 돌파해 나갈 것인가는 상당히 흥미를 끄는 부분이다. 과연 현상학적 해석학이란 우회로는 어디에서 완결되며, 과연 언제 가서야 이해의 존재론이 전개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우리는 해석학의 문제사에서 리꾀르의 문제노선과 직결되는 가다머의 해석학을 살펴보겠다.



 7.3. 가다머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해석학은 가다머에 의해 영향사적 해석학68)으로 철저화된다. 객관성의 문제에서 해방된 해석학은 이제 이해의 역사성을 근원적인 통일성 안에서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선이해를 경험적으로 해석하여 선이해 자체의 교정을 가능케 했다. 선이해는 텍스트를 만나 텍스트의 전체 의미를 예기하며 기투하고 다시 텍스트의 사실에 의해 교정되고 재교정되는 해석학적 순환을 거친다. 이 때 텍스트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 간의 융합을 통해 적절한 기획을 산출하는 것이 이해의 과제이다. 그런데 이해란 유한성과 역사성으로 구성된 인간실존의 근본운동이다. 그렇다면 현존재의 포괄적인 텍스트는 전체 역사이고 현존재의 선이해는 역사적 전승의 권위에 따라 영향받은 유한한 선입관이 된다.69) 영향사적 해석학은 역사와 해석자 사이의 역사적 간격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생동하는 전통과 통일성을 이루어야 한다. 이 통일성은  전승에 의해 질문받고 있는 유한한 해석자가 자신이 처한 해석학적 현상황을 올바로 의식하고 그 전승에 개방된 질문의 지평을 형성함으로써 획득된다. 이렇게 스스로를 역사적인 상황에 몰입시키고 역사적 지평을 재구성하려는 담화적인 태도만이 참된 이해를 얻을 수 있다. 영향사적 해석학이 담화적인 태도를 얻을 때, 과거의 역사지평은 생동하는 타자가 되어 해석자의 현재지평과  만나게 되고 상호관계 안에서 서로 융합되어 이해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해사건 안에서 이해는 과거 전통에 귀속되는 동시에 현재 상황에 적용되는 이중 운동을 한다. 그러므로 "이해란 언제나 본래 매개되면서 그 자체로 존립하는 지평들 간의 융합의 과정이다."70)     



 하이데거에 대한 가다머의 해석학적 특징은 전통이란 개념을 심화시킴으로써 선이해를 경험적으로 파악했다는데 있다. 여기서부터 해석자의 지평은 텍스트의 지평과 대립하게 되며 그것이 아무리 융합을 통해 근접해진다고 해도 역시 근원적인 분리는 유지된다. 그렇다면 현존재와 세계와의 통일성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사건적인 것이 된다. 물론 이 때의 역사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공동존재 일반의 선이해를 구성하는 과거의 전승이며 해석자의 지평도 객관에 대립된 주관이 아니라 개인적 현존재의 선이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해의 차원에서 거리의 존재는 주관과 객관 관계와 유사한 어떤 것을 시사한다. 결국 가다머에 있어 주관과 객관의 통일은 담화적 상황 안에서 사건적으로만 발생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무엇이 역사적 거리를 매개하는가? 거리를 매개하며 융합을 발생시키는 것은 저자나 독자가 아니라 양자가 언어를 통하여 공귀속되어 있는 전승 자체, 즉 텍스트의 사태 자체이다. 이렇게하여 현상학적 현상은 해석학적 담화의 사건 안으로 옮겨진다.

 리꾀르는 일반적으로 가다머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비판이론의 비판71)을 받아들이면서 가다머보다는 좀 더 조심스러운 우회로를 선택한다. 가다머는 역사적 인식의 융합을 지향하는데 하버마스는 역사적 인식의 비판적 거리를 지향한다. 여기서 전통의 양면성이 드러난다. 전통은 우리가 언제나 이미 귀속해 있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자신 안에 내포된 지배 이데올로기를 우리에게 은폐한다. 이 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리꾀르는 귀속과 거리 사이의 변증법을 전개하는 텍스트의 해석학을 제시한다.



 8.. 이념의 해석학



 우리는 리꾀르의 텍스트 해석학에 올바른 문맥 안에 도달하기 위하여 먼저 비판이론의 해석학적 입장과 그들의 근원이 되는 또 다른 의심의 대가, 마르크스의 해석학을 보다 심도있게 검토해 볼 것이다. 마르크스의 해석학은 프로이드의 해석학과 연결되어 비판이론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학, 구조주의와 해체주의에 강력하게 침투되어 있으므로 따로 장을 나누어 구명되어야 하겠다.



 8.1. 의심의 해석학: 마르크스



 해석학은 모든 형식의 의미를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한다. 이 때 인간적인 모든 의미는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 형성된다. 여기서 의심의 해석학자들은 언어 자체의 체계적 은폐성향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의 지층은 서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프로이드는 의식의 언어를 의심하고 무의식의 충동을 신뢰하였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된 언어를 의심하고 '과학'에 의해 구성된 언어를 신뢰하였다. 니체는 언어 전체를 의심한다고 선언하나 아마도 영감적으로 과장된 자신의 언어는 신뢰하는 것같다. 형식적으로 볼 때, 이들 세 의심의 대가들은 동일한 태도를 지닌다. 타인의 입장은 환상적이고 자신의 입장은 해방적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를 다루면서 리꾀르는 이러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이념적인 것은 결코 자기 자신의 입장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타인의 입장이며 언제나 그들의 이데올로기이다."72)

 결국 의심의 대가들은 타인들의 입장은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이지만 자신의 입장만은 현실적이라고 유토피아적인 주장을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들은 이데올로기과 유토피아의 대립축에 의한 해석학에 의지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해석학을 처음으로 명시화한 것은 마르크스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도 자신의  유토피아적 입장은 은폐되어 있다. 리꾀르는 마르크스에 의한 이데올로기의 분석과정을 추적하면서 그 안에 비주제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유토피아적 입장을 주제화하여 마르크스의 해석학적 입장의 전모를 노출시킨다. 어떤 해석학적 입장이든지 그의 전체적인 지평이 파악되면 무해하고 유익한 것이 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아래에서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분석을 약술한 뒤, 리꾀르의 재구성에 따라 그의 해석학적 입장을 검토해보기로 한다.



 8.1.1. 청년 마르크스 이론의 분석



   마르크스에 있어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사진의 음화와 같은 전도된 영상을 뜻한다는 점에서 물리학에서부터 은유적으로 도입된 용어이다. 가령 포이에르바하73)의 분석에 따르면, 종교는 인간들이 신과 인간의 주어와 술어를 바꾸어 씀으로써 모든 것을 현실에 대해 역표상시킨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이 때,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현실생활과 유리된 관념의 이데아가 스스로의 자율성을 천명하고 있는 전도된 모습을 표현해 준다. 결국 일반화하자면 헤겔 좌파에 있어 이데올로기란 현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사회적인 고안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마르크스에게 있어 현실이란 개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문제의 관건이 된다.

 청년기의 마르크스에게 있어 현실이란 사회내의 인간들이 매일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투쟁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그런데 종교나 관념론은 노동으로 구성된 인간의 현실을 신이나 관념으로 해석한다. 여기에 이데올로기74)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실천의 물질성이 개념의 이념성을 선행한다는 원리가 유물론 체계를 구성하게 된다. 유물론 체계는 이데올로기적 관념론 체계를 거꾸로 뒤집는데서 성립한다. 이렇게 해서 성립된 유물론 체계가 후기 마르크스에 있어서 진정한 학문체계로 제시되고, 이제 이데올로기는 학문으로서의 유물론 체계에 대립한 비과학적 환상체계로 재정립된다. 본래 실천행위에 대립되었던 관념론적 이해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이제 학문적 이해체계에 대립한 비학문적 이해체계로 제시되는 것이다. 즉 해석과 실천의 본래적 대립이 두 가지 상반된 해석들 간의 학문적 대립으로 발전한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 해석학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본래적 대립상태인 해석과 실천의 관계를 연구해야 한다. 즉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의 형성과정을 추적하여 그 이해지평을 드러내는 것이 연구의 관건이 된다. 그래서 리꾀르의 마르크스 연구는 '독일 이데올로기'까지의 초기 마르크스 텍스트에 한정된다.

 앞서 보았듯이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종교비판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동일한 논법을 인간의 관념적 이해에 적용시켜 비판을 철저화 시킨다. 비판을 통해 개념의 추상적 세계는 그 환상적 모습을 벗고 인간의 구체적 현실로 환원된다. 이 때 인간의 구체적 현실이란 실제로 살아 행동하는 인간의 실천세계이다. 이 세계는 노동자에 대한 보호감찰과 고문을 통해 기존 이득계층이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세계이다. 인간의 관념적 세계는 이 세계의 비인간적 현상을 유지시키는 기득권층의 고안물이다. 그러므로 현실세계를 냉정하게 분석하여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폭로시키는 의식화가 진행하면 인간의 소외가 극복되고 모든 이가 해방되는 공산사회가 달성된다는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 이론은 생산력의 역사적 발전구도를 따라 인간의 노동, 노동의 분화, 사유재산권의 형성, 이데올로기의 통제, 인간의 소외, 소외의 계급적 의식화, 혁명의 실천, 공산주의의 해방이라는 순서로 진행된다.

 해방의 반전은 현실에 대한 의식의 일깨움을 통해 시작된다. 인간은 자신이 개념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소외와 해방은 헤겔이나 포이에르바하에서와 같이 인간의 의식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인간, 그의 전인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이 행동하는 인간이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소외와 해방은 관념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노동에서 객관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이데올로기로 포장된 관념의 세계는 적나라하게 현실적인 노동의 구조로 환원된다. 역사의 발전이 자본주의 체제에 접어들자 보편적으로 제도화된 사유재산권의 인정은 인간노동의 생산물을 자본가의 수익으로 이전시키는 착취구조를 낳는다. 그 결과 전체 인간은 노동자 계급과 자본자 계급이라는 두 계급으로 분리된다. 더우기 애초의 모든 자본은 노동의 소산이었는데 이제 자본이 스스로의 자율성을 가지고 인간 노동자를 고용도 하고 해고도 시킨다. 자본의 통치가 노동 안에 내재화된 생산과정의 이러한 모순이 종국에 가서는 인간 본질의 상실을 초래한다. 이리하여 노동구조에 의한 삼중의 소외가 발생하는데, 인간은 자신의 산물인 생산품에서 소외되고, 자신의 생산활동 자체에서 소외되어 결국 자기 인간성 자체의 소외를 겪게 된다. 더우기 계급의 갈등은 인간에 의한 인간소외까지 낳는다. 역으로 이러한 소외구조가 사유재산권의 근거가 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인간성 상실의 악순환 고리를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인간성 회복을 위한 본질적인 투쟁은 계급간의 투쟁이 아니라 괴물화된 자본에 대한 전체 인간의 투쟁임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은 공자왈하는 관념의 논쟁이 아니라 행동하는 인간의 구체적 실천을 통한 역사적 투쟁이어야만 한다.

 사유재산권의 형성은 근대 산업사회의 노동분화를 통하여 자연적으로 이루어졌다. 노동의 분화가 인간을 분열시켜 소외의 역사를 형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외의 극복도 자연적인 역사의 성숙과정을 거쳐야만 이루어질 것이다. 역사과정을 통해 소외의 형상이 성숙해야만 그 본질이 인간들에게 의식화되어 이론적으로 정립되고 실천적으로 극복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그 극에 도달하여 모든 이가 소외되면 모든 이가 소외의 극복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에는 사유재산권을 폐기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사회가 성취되리라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달성되어야만 인간은 자신의 총체성을 되찾고 전 인류의 본질적인 연대감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8.1.2. 열린 글읽기



 위에서 요약된 전기 마르크스의 입장은 일종의 예언적 문명비판으로 제시된다. 공산주의는 역사의 자연스러운 발전과정에 따른 미래상이고, 과학적 공산주의자는 울분에 찬 혁명투사가 아니라 예지적인 예언자로 등장한다. 예언자75)로서 그는 역사에서 초연한 위치에 서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이러한 초역사적 관점 안에서 리꾀르는 유토피아적 자세를 간파해낸다. 마르크스는 역사과정의 최종산물인 인간해방을 전제로 해서 현실을 분석하고 이론을 정립했다. 기투된 미래가 전제로 역투사된 것이다. 더우기 해방된 것은 물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본질적 총체성, 그의 총체적인 모든 방면의 실현된 본질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총체성의 유토피아이다."76) 자본이 철폐되면 분화된 노동이 다시 통합되며 이렇게 통합된 노동에 의해 인간의 총체성이 회복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식 유토피아의 각본이다. 결국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소외가 지양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극단적인 인간주의이며 더 나아가 일종의 인신주의이다.

  마르크스에 있어 궁극적인 현실은 물질적 조건과 현실적 인간이다. 여기서 궁극적 토대의 문제가 제기된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적인 인간 마저도 그의 물질적 조건으로 환원하여 과학적 유물론에 근거한 이론체계를 형성했다. 물질적 조건은 인간의 구조를 구성한다. 생산력과 생산양식에 의해 계급구조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적 조건은 인간 역사의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이제 사적 유물론은 인간의 실천적 삶을 투시하는 기본적 해독법이 된다. 여기서 초기의 실천적인 인간은 물질 안으로 흡수된다. 본래 살아있는 인간의 실천과 대립하였던 이데올로기는 이제 과학적 유물론과 대립쌍을 이루게 되고, 결국은 거짓된 해석과 진실한 해석 사이의 교조적 대립을 형성한다.

 그러나 리꾀르는 마르크스의 텍스트 안에서 다른 방식의 해석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궁극적인 현실이 물질적 조건과 현실적인 인간이라면, 문제는 물질적 조건이 인간을 흡수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물질적 조건 안에 보전되는 최후의 현실인가하는 문제이다. 마르크스 자신이 물질적 상황과 행동하는 인간의 상호관계를 인정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물질적 조건 안으로 완전히 환원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양자의 관계는 순환적이다. 생산구조가 역사의 주체이고, 계급이 역사의 이차적 주체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 계급 안의 각 개인의 체험과 갈등을 통해 생산구조의 모순이 의식화될 때만 객관적 현실이 된다. 결국 자율성을 지닌 계급이란 환상에 불과하다. 노동의 분화에 의한 계급의 형성 안에서 진정한 희생자는 개인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독일 이데올로기'이후의 마르크스가 모든 관념론적 용어를 유물론적 용어로 전환시켰지만, 그 안에서 실제로 작용하는 것은 개개의 인간들이 겪고있는 구체적인 소외와 갈등인 것이다. 여기서 리꾀르는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개방하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읽기를 촉구한다.77)

 유물론이 모든 사회적 권위를 물질에로 환원시키는 인과론적 입장이라면, 역으로 이데올로기를 사회적 통합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합법화로 해석하는 사회학적 입장78)도 존재한다. 후자의 입장은 구조의 틀을 목적론적인 동기화의 관점에서 본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란 사회의 문화체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으로서의 기능을 행사한다. 인간의 노동과 실천행위는 언어에 의해 해석되고 의미를 부여받음으로써 재동기화된다. 여기서 언어적 해석, 즉 이데올로기는 은유적 상징기능을 행사함으로써 합법적 권위를 활성화시키고 사회를 통합한다는 것이다. 결국 종합적으로 볼 때, 이데올로기는 합법화의 기능을 수행할 때는 사회적 통합성을 유지하고, 왜곡의 기능을 수행할 때는 유토피아적 비판을 불러일으키며, 역사적 과정 안에서 유동하는 은유적 상상력인 것이다.



 8.1.3. 평가



 리꾀르에 있어 마르크스는 상징의 사회문화적 측면을 드러내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79) 그러므로 리꾀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수용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살아서 행동하는 인간을 계급이란 이름으로 물질화하는 것을 거절하고, 사회 내에서 인간행동의 동기를 조직하고 유발하는 이데올로기의 건전한 측면을 인정한다. 사실 이데올로기란 양가적 가치를 지닌 사회적 상징80)이다. 그것은 올바로 기능할 때 공공선으로 작용하고, 집단이기주의적으로 기능할 때, 공공악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민주국가의 시민의식이 제대로 작용할 때 그것은 비판적인 조절하에 통합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재화는 유한하되 욕망은 무한하다'는 경제원리에 의해 적나라하게 표출되는 모순적 인간상황에 기인한다. 인간은 물질적 인과성과 동기화된 목적론 안에서 변증법적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의 승화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기투쟁과 자기극복으로, 그리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다 인간적인 문화환경을 조성함으로써 단계적으로 달성된다. 그 어떤 유토피아적 사회도 그것이 인간들의 사회인 한, 욕망의 무한성과 재화의 유한성에서 초래되는 기본적인 사회적 갈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다. 유한한 물질적 재화가 인간욕망의 대상이 되는 한, 인간욕망의 무한성은 충족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욕망의 대상이 되는 재화는 그 자신의 물질성을 넘어서는 의미의 잉여를 받게 된다. 물질들은 상징화됨으로써 욕망의 적합한 대상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인간의 욕망을 단순화시킨데서 발생한다. 인간의 욕망은 생존을 위해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소비를 욕구하지만, 일단 물질적 욕구가 충족되면, 인간의 욕망은 진리, 진선, 진미와 같은 다양한 차원의 가치를 지향하게 되며, 결국 어떤 초월적 무한성을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욕망의 다단계적인 자기발현은 그에 상응하는 외적 상징을 요구한다. 아마도 상징은 언어보다 더 넓은 지평 안에서 작용하는 것 같다. 상징은 물질적 존재에서부터 기호와 언어, 예술을 거쳐 순수 망아적 분위기에까지 폭넓게 추상화되어 나가며, 인간욕망의 초월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상징은 욕망과 지성, 그리고 존재 자체를 매개하여 의미충만을 발생시킨다.

 여기서 인간은 욕망과 상징과 지성과 행동을 통해 존재와 상호교응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무한한 욕망은 물질에 대해 의미잉여를 낳고, 의미잉여는 지성을 통해 물질에 상응해 축소판단되며, 축소판단된 현실에 대한 의미잉여가 의지를 자극하여 생산적인 행동을 낳는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존재론은 인간의 욕망과 지성, 그리고 존재 그 자체의 초월성 내지 무한성을 정당화하여야만 하며 그럼으로써 신화 내지 신학을 향해 열려져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해석학은 상징을 통하여 욕망과 지성과 존재를 매개하고, 존재론은 지성을 통하여 욕망과 상징과 존재를 매개하고, 신학은 존재를 통하여 욕망과 상징과 지성을 매개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실존은 욕망을 통하여 상징을 지성에 내면화시키고, 내면화된 지성을 존재에 동화시키고, 행동을 존재에 순응시킴으로써 자기욕망의 순수하고 무한한 갈증을 존재 자체의 초월적 의미충만 안에서 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리꾀르의 철학적 반성이 욕망과 상징과 지성과 존재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를 계속 주시해보고자 한다.



8.2. 리꾀르의 작업에 대한 중간분석



 우리는 이제 '프로이드'와 '마르크스'에 대한 리꾀르의 텍스트 해석방식을 통해 리꾀르의 현상학적 해석학의 구체적 방식을 그 형상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에서 정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우선 방법론의 형상적 측면을 고려해 보자. 우선 눈에 띠는 것은, 리꾀르는 당대의 해석가들에 대한 반대해석을 제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해석학은 논쟁적이 아니라 대화적이다. 대화적인 해석학이란 미리 결정된 자신의 입장을 다른 해석자의 입장에 반립시키는 이중독백의 논쟁술이 아니다. 대화적인 해석학이란 우선, 상대방의 고민의 가치를 신뢰하면서, 그의 논지를 그의 문맥 안에서 합리적으로 파악하고자 노력한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동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텍스트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그 상호연관성을 파악할 때, 자칫하면 상대방의 입장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리꾀르는 변증법적 책읽기를 제안한다. 텍스트의 문맥을 간파한 뒤, 상대방의 입장과 반대입장에 서는 다른 해석자를 불러들여 대립축을 형성케 함으로써 하나의 완결된 해석의 스펙트럼을 구성하는 것이다. 프로이드에 대해서는 헤겔이 반대축을 형성했고,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베버와 게렛쯔가 반대축을 형성했다. 이렇게 하여 의심극과 신뢰극 사이에서 본래의 대화 상대방을 재검토함으로써 그의 논지 안에 대립극에 상응하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가를 판가름해본다.

 만일 대립극에 상응하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면, 그의 텍스트는 폐쇄된 것임이 밝혀지며, 이 때 해석의 유일한 기준은 텍스트가 지시하는 준거사태가 된다. 그리고 만일 이 준거사태가 이미 상대방의 이론체계에 의해서 이론화된 실재라면, 이때는 더 이상의 해석의 여지는 없는 것이고, 다만 어떤 선판단에 대한 긍정이냐, 부정이냐만이 문제시된다. 이러한 것이 닫힌 텍스트의 특성이다. 그러나 만일 해당 텍스트 자체가 자신의 대립극에 상응하는 해석의 여지를 자체 안에 간직하고 있음이 밝혀진다면, 그 텍스트는 자신의 대립극에 대해 개방된 것이며, 그렇다면 변증법적 해석을 통해 지양, 고양, 승화되어 새로운 종합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새로운 종합이 가능해질 때, 상대방의 텍스트에 간직된 모든 의미심장한 해석들이 그 종합 안에 간직되면서도, 이제는 전혀 새로운 지평과 관점 안에서 새롭게 정위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신뢰에 근거한 리꾀르의 현상학적 해석학이 정립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상적 절차를 염두에 두고, 이제 내용적인 발전과정을 고려해보자. 훗설의 현상학을 의지의 측면에 적용한 '의지의 현상학'은 의지작용의 기술과정에서 비의지적인 것에 직면하였다. 이때 의지작용과 비의지적인 것의 상호작용에서 리꾀르는 인간실존의 근원적인 균열, 즉 악의 가능성을 목도하였다. 실존이란 현실적인 것이므로 '악'은 가능성에서뿐이 아니라 현실성에 있어서도 분석이 되어야 했다. 이렇게 하여 기술적인 현상학은 '고백'이라는 실제적 말의 사건으로 나아가야 했고, 결국 말의 사건을 해석하는 해석학과 연결되어야 했다. 이렇게 형성된 현상학적 해석학은 악의 현실을 분석하면서 그 신화적 상징성 안에서 언어의 문제와 직면하였다. 상징적 언어의 분석에 나선 리꾀르는 신화적 상징, 꿈의 상징, 문화의 상징이라는 상징영역을 섭렵하며, 상징을 낳는 창조적 상상력의 은유와 유비성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과정은 단선적인 진로를 거치지 않고, 도중에서 점차 세분화되며 정신분석학, 마르크스 주의, 비판이론, 구조주의와의 갈등을 겪게 된다. 리꾀르는 변증법적 글읽기를 통해 이들 해석학파와 대결함으로써 이들의 입장을 자신 안에 창조적으로 재수용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살펴보았으며, 이제부터는 비판이론과 구조주의를 살펴봄으로써 일단 해석의 갈등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본격적으로 다시 상징, 은유, 유비의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비판이론은 8장인 이념의 해석학의 말미를 이룬다. 비판이론과의 해석학적 갈등은 이미 수용된 열린 마르크스의 지평 안에서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튀세의 해석학은 9장인 구조주의에서 다루고자 한다. 그렇다면, 알튀세는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단지 방법론적인 측면만 고려하게 된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알튀세야말로 이념의 해석학에 위치해야 하겠지만,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리꾀르의 현상학적 해석학의 방법론적 성장과정을 일별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는 편의상의 분류를 하게 된 것이다.



 8.3. 해석인가, 비판인가? : 하버마스



 리꾀르에 있어 하버마스의 해석학적 입장은 마르크스의 해석학을 첨예화한 것이며 동시에 가다머의 해석학과 대립쌍을 이룸으로써 소속과 소격화의 갈등을 드러내는 모델이 된다. 리꾀르는 여기서 소박한 신뢰의 소속과 비판적 의심의 소격화 간의 원추운동을 변증법적 매개를 통해 나선형적 운동으로 전환함으로써 역사성과 객관성을 함께 갖춘 해석학의 정립을 꾀한다. 우리는 우선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의 유산을 어떤 문맥 속에서 상속받았으며 어떤 방향으로 정향하려는가를 살펴보고 나서, 그가 해석학의 흐름 속에 제기한 갈등의 진상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8.3.1. 유토피아적 비판이론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칸트 이래의 비판전승과 연결시켜 대상의 종합을 가능케 하는 실재의 원리를 재구성한다. 칸트의 초월적 자아는 선천적 의식의 12범주에 의해 대상의 종합을 수행한다. 이에 반해, 이미 본 바와 같이 마르크스의 실재원리는 노동이다. 대상의 종합을 수행하는 것은 초월적 자아가 아니라 실천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객관적 행위 체계가 사회적 삶의 가능적 재생산의 실제적 조건인 동시에 체험 대상의 가능적 객관성의 초월적 조건이다."81) 그렇다면, 인간의식 대상의 종합은 노동에 의해 초래된 주인과 노예의 관계성 안에서 종합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맥의 변동을 통해 유물론적 인식론은 인식비판의 기능을 행사하게 된다.

 여기서 실재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는 실천하는 인간의 관심에 따라 구별된다. 가령 기술적 통제와 조작은 자연과학의 관심사이고, 의사소통은 역사적, 해석적 과학의 관심사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비판적 사회과학의 관심사는 인간의 해방이다. 비판적 사회과학은 역사를 노동력과 연관시켜 고찰함으로써 관념적 역사파악의 이면에 작용하고 있는 현실적인 역사를 투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마르크스가 노동을 도구적 행위와 동일시함으로써 노동과 구별되는 자기비판적 계기를 놓쳐버렸다고 비판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오직 노동에 의해 실재를 종합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바로 이런 언명을 통해 노동과는 구별되는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의 실제 수행을 주제화함으로써 마르크스 이론의 비판적 계기를 노출시키고자 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생산이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이 때 생산관계란 인간에게 자신의 노동을 인식하게끔 해주는 상징적 상호작용과 문화적 전통의 구조틀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는 생산력이 아니라 생산관계의 수준에서 개입하는 것이다."82)  이데올로기 비판은 이제 생산관계의 영역에서 작용해야 하므로 하버마스는 실천이란 개념을 도구적 행동과 상징적 상호행위의 구조를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시킨다. 이리하여 인간의 노동은 단지 도구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언제나 전통과 상징적 상호행위의 틀 안에서 작용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이제 전통과 상징적 상호행위에 대한 실재론적 인식비판이 된다. 전통과 상징적 상호행위라는 구조틀 안에 체계적 왜곡이 끼어들 때, 실천은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지닌 채로 수행되기에 인간의 실천행위 자체가 왜곡되고 소외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행동을 해석하고 규제하는 왜곡된 사회적 구조이다. 그것은 노예와 주인의 관계구조틀이다. 그러나 노예와 주인의 관계는 권력투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호인정을 추구한다. 따라서 계급투쟁이 문제가 아니라 투쟁을 극복하여 인간 간의 상호인정을 달성하는 것이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최종목적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란 담론적 관계를 왜곡하는 억압적 체계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 억압적 체계가 모든 인간의 실천을 위한 준거틀로서 이미 작용하고 있으므로,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 결국 문제는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주제화하여 폭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 비판과 심층심리분석과의 상응성이 드러난다. 양자는 공히 무의식적 억압의 해소를 통해 자기인정을 획득하고자 한다. 억압의 이해는 인과론적 설명을 통해 의식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상호인정에까지 도달하지 않는한 억압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심리분석 상황에서는 이러한 상호인정이 심리적 전이의 해소과정인 의사소통을 통해 달성된다. 그런데 비판이론에는 이러한 전이의 상황이 결핍되어 있다. 비판이론도 의사소통의 체계적 왜곡을 인과론적 설명을 통해 이해하고자 한다. 사회적 노동체제가 관심을 규제하는 제도적 구조틀에 의해 체계적으로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급구조가 존재하는 한, 억압의 이해만으론 인간성을 회복할 수 없다. 결국 비판이론은 담론상황을 규제하는 현행 사회체제의 근본적인 혁신을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리꾀르의 비판에 의하면, 상호인정을 달성하는 심리분석의 치유적 방법과는 달리, 비판이론에서는 상호인정의 현실적 계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분석은 비판과 치유를 동시에 제공하지만, 비판이론은 단지 비판만을 제공한다. 비판이론에 의해 치유된 이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이라는 이념은 성취되지 않는 환상으로 남아있다.

 여기서 비판이론은 자신의 유토피아적 입장을 드러낸다. 상호인정을 통한 인간해방의 실제적 계기가 없는 비판이론은 이상적인 담론상황이라는 환상으로 도피한다. 그러나 모든 담론은 이미 각자의 인간관과 존재론을 전제하고 있다. 전통적이고 상징적인 상호행위에서 자유로운 담론상황이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이데올로기에 대한 모든 언급은 유토피아(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환상의 장소)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에서 이러한 유토피아는 노동의 분화상태를 넘어선 통합된 전체 인간존재라는 환상을 낳았고 하버마스에서 이러한 유토피아는 이상적 담론상황이라는 환상을 낳았다.

 유토피아는 자신의 복합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비판적 자기반성에 의해 형성되며, 모든 비판과 분석과 복원이 지향하는 목적론적 방향성을 지닌다. 이러한 목적론적 방향성은 무역사적이고 초월적인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초월적인 요소로서 그것은 행동의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일단 유토피아적 입장이 역사적으로 표방되면, 그것은 나름대로의 역사적 문화전통을 가지게 된다. 계몽주의에서 하버마스에 이르는 역사적 전통이 그것의 한 예이다. 유토피아적 입장은 인간의 노동과 언어라는 조건성을 넘어서는 초월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환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입증불가능하고 실현불가능한 환멸이 아니라 이성적인 희망으로 작용한다. 이성적인 희망으로서 유토피아는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경계선상에 위치하며 인간적 관심사의 전체 스펙트럼을 개방한다. 그것은 인간성의 실현을 위한 영원한 과제인 것이다.



 8.3.2. 소속과 소격화의 변증법



 리꾀르는 인간소외를 낳는 사회 전반의 제도와 체제에 대한 마르크스 주의의 비판이 유토피아적 입장에서 발생한 것이며, 이러한 초역사적 비판의 입장은 전통에서 거리를 띠우는 비판적 이성의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렇게 전통과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소격화는 전통에 귀속하는 철학적 해석학과 대립극을 이루는 비판적 해석학을 성립시킨다. 우리는 아래에서 현대 해석학사에서 열띤 논의를 불러일으켰던 가다머와 하버마스 간의 해석학 논쟁을 리꾀르는 어떤 입장에서 포섭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가다머의 입장에 따르면, 전통에 대한 귀속이란 학문을 위한 어떤 특수한 태도가 아니라, 역사와 언어를 통해 전승된 선이해가 인간의 존재론적 실존범주라는 점에서 그 어떤 누구도 완전히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없는 선험적인 조건이 된다. 그래서 이미 언제나 전통에 귀속되어 있는 선판단을 주제화함으로써 인문과학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다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판단의 존재론적 형식과 그것의 역사적 내용을 구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이데거 이후의 해석학은 선이해의 존재론적 작용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리와 환상이 문제시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선이해의 존재론적 형식이 아니라 선판단의 역사적 내용물인 것이다.

 하버마스는 가다머가 선이해구조를 선판단 내용과 구별하지 않음으로써 전통과 권위를 복권시키는 반면 비판적 이성의 힘을 격하시켰다고 비판한다. 가다머가 전승의 존재방식인 보편적 언어를 통하여 전통의 객관화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본 데 비하여 하버마스는 언어 자체가 사회화과정의 와중에 지배와 사회적 권력의 매개로 작용한다고 반박한다. 일상언어의 의사소통을 통해 영향사적 지평융합을 성취하려는 가다머의 시도는 언어의 내면에 깃든 사회적 폭력성에 무비판적이므로 결국 전통적 권위의 억압적 구조에 맹목적으로 귀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해석학적 이해는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을 이해할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한다고 본다. 이 한계상황을 구제하기 위해 하버마스는 심층심리분석에 상응하는 메타해석학을 주창한다. 그런데 전통적 권위의 지배에서 벗어난 위치에서 전개되는 메타해석학은 필연적으로 유토피아적인 담론상황을 전제해야만 한다. 이해가 역사적인 한, 역사적으로 전승되는 억압구조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어떤 초역사적인 관점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초역사적으로 상정된 이상적인 담론상황에서는 무제한적이고, 자유로운 토론이 보장된다. 그 안에서 비판적 이성을 지닌 냉철한 대화참여자들이 서로 문답을 통해 서로의 진술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서로의 논지를 해석하고 정당화해가며 선입견을 제거함으로써 상호적인 일치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이상적인 담화상황이 모든 실천적 논의 안에 현실적으로 기투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호주관적으로 타당한 가치판단을 설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비판적 이성의 힘이라는 것이다.



 가다머와 하버마스의 해석학을 평가함에 있어 리꾀르는 여느 때와 같이 일방적인 비판을 자제하고 단지 이해를 추구하는 해석학의 전체기획 안에서 각자가 차지하는 자리와 의의를 밝히고자 한다. 우선 하버마스와 가다머의 견해차이는 각자가 전승받은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이 점에서 양자는 영향사적 전승 안에 소속한다. 또한 양자는 공히 역사적 상황 속의 피투와 선이해의 기투를 인정한다. 다만 가다머는 기투의 내용이 피투된 상황에서 형성된다고 보았고, 하버마스는 기투의 이성적인 능력은 피투된 상황을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소격화하는 객관성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래서 가다머는 지평융합에 의한 부분적인 이해의 교정만을 인정하고, 하버마스는 지평자체의 체계적인 왜곡을 비판하는 것이다.

 리꾀르는 하이데거식의 이해 가능성의 조건으로만 환원하는 존재론적 해석학은 비판이론을 수용할 수 없다고 본다. 하이데거도 시간성의 분석을 통해 역사로 나와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선입관을 비판하는 일종의 비판이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그의 존재에 대한 집착은 인식비판적 해석학을 전개할 여지를 주지 않았으며, 따라서 인문과학의 정초로서의 일반해석학에로의 길은 닫히게 된다. 가다머는 현존재의 시간성으로부터 이해의 해석학적 순환을 끌고 나옴으로써 선판단이라는 역사적 이해지평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가다머가 선판단에 근거해야 하는 한, 그는 소격화를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격화란 객관적인 태도로서 인문과학의 성립을 위해선 필수적인 방법론이다. 여기서 리꾀르는 해석학의 핵심적 과제는 소속과 소격화 사이의 변증법적 매개라고 주장한다.

 성서주석학에서 보듯이, 해석학이란 본래 텍스트의 해석인데, 텍스트란 일단 문서화되는 순간, 저자의 의도나 문화적 상황, 본래적 독자층과 거리를 띠우며 자율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텍스트는 해석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며, 그렇다면 소격화는 텍스트의 매개 안에 하나의 계기로서 포함된다. 이 소격화는 가다머에서와 같이 역사적 거리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하버마스에서와 같이 심층해석학에만 속하는 것도 아니다. 소격화는 텍스트의 심층 의미론과 같은 구조주의 분석을 통해 선이해 자체 내에 공시적으로 존재하는 구조를 객관화시킬 수도 있다. 또한 텍스트 해석은 실재세계의 준거를 지시하기 위해 매개된 의미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반성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소격화는 텍스트에서 자기이해로 귀환하기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다. 이와같이 소격화는 텍스트 해석을 위한 해석학의 정당한 계기로 작용한다.

 한편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이 관심의 삼중 구분에 근거하는 한, 그것은 관찰가능한 경험적 학문도 아니고, 심리학과 같은 분과적 이론도 아니며 단지 실존범주일 뿐이다. 관심의 분석은 일종의 해석이며 결국 해석학에 속하는 것이다. 또 해방의 관심은 의사소통 능력이 왜곡되어있는 역사적-해석학적 과학과 구별된다고 하는데, 그 해방이라고 제시된 무제한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이란 여전히 문화적 전승의 창조적 재해석이 아닌가? 심층해석학도 결국은 해석학인 것이다. 가다머는 낭만주의적 회상의 전통에서 기존의 합의를 인정하고, 하버마스는 계몽주의적 해방의 전통에서 미래의 자유를 기대하지만 결국 양자는 전통의 흐름 안에서 의사소통하고 있다.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은 해석학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과거적 전통존중의 축과 대립축을 이루며 해석의 스펙트럼을 구성하고 있는 미래적 해방추구의 해석학인 것이다. 결국 앞에서도 여러 번 보아왔듯이 원인론적 설명이나 과거적 선이해에 귀속하는 입장은 창조라는 초역사적 기원축에 대응하고, 목적론적 기투나 유토피아적 해방의 관심은 종말이라는 초역사적 최종축에 대응하여 해석의 전체지평 안에 정초된다. 이 대립축 사이에서 소속과 소격화의 원추운동은 해석학의 본래적 변증법인 것이다.



 9.. 구조주의와 해석학



 해석의 갈등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리꾀르는 현상학적 해석학을 전개해오면서 참으로 다양한 철학적 사조를 자신의 학문영역 안에 품어간다. 그러나 이들 계기를 크게 나누면 결국은 분석과 반성으로 대별된다. 의식의 내적 분석은 현상학을 통해 수행되고, 무의식의 분석은 심층심리를 통해 수행되며, 사회적 억압구조의 분석은 마르크스를 통하여, 의사소통의 분석은 하버마스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 제 학문은 분석의 수행을 위해 제각기의 전제를 가지고 있고, 그 전제가 반성을 통해 체계적으로 설명되면서 의미의 과잉을 낳는 것을 보여주었다. 리꾀르의 해석학은 각자의 입장에 대립축을 반립시킴으로써 의미의 균형을 회복하며 나선형적인 발전구도를 보여왔다. 이제 리꾀르는 또 하나의 엄밀한 분석학문, 즉 구조주의와의 맞대결을 시도한다. 우리는 이제 리꾀르의 변증법적 승화의 방법론을 익히 알고 있으므로 비교적 어렵지 않게 리꾀르의 논지를 추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9.1. 구조주의 언어학



 소쉬르는 언어를 구조주의적으로 보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사회적 체계인 언어(langue)와 개인적인 말(parole)을 구별하여 언어를 단위간의 형식적 관계로 분석하여 체계적인 상호연관성을 성립시켰다. 그는 언어적 기호를 이해가능한 표시로 정의하여 사물과의 연관성을 단절시키고 음성표시와 표시된 의미 사이의 관계를 자의적83)인 것으로 보았다. 이리하여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말과 체계로서의 언어가 분리된다. 언어는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체계인데, 말은 지금 여기 발생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말의 사건성을 도외시하고도 언어의 불변적 체계를 객관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전체로서의 언어와 부분으로서의 기호는 그 상호관계 안에서 체계적인 구조를 드러낸다. 언어적 기호 안에서 기표와 기의는 자의적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체로서의 언어로부터 역사와 무관한 공시적 연구84)를 통하여 초역사적인 무의식적 언어구조를 도출해낼 수 있다. 언어는 기표와 기의가 서로를 결정하는 형식적 기호체계이다. 이 양자 간의 결정관계가 기호체계의 내적 구조를 구성한다. 그런데 기표와 기의 간의 관계는 상호공존하는 공시적인 관계이다. 이 때 공시성이란 동시적 요소들 간의 관계를 말한다. 그래서 말이란 역사적 사건은 오직 공시적인 언어체계 안에서 실현될 때만 의미를 갖게 된다. 사건의 의미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불변적 언어체계는 초역사적 객관성 안에서 탐구될 수 있다. 이리하여 구조주의라는 하나의 객관적인 방법론이 탄생한다.

 삐아제의 정의에 따르면, 구조란 자기충족적이고 자율적인 변형체계의 전체성을 의미한다.85) 즉 하나의 구조 안에서 각 요소들 간의 관계는 전체와의 연관하에서만 파악되고, 변형의 가역성(가령 1+1=2; 2-1=1)이 성립되는, 즉 치환가능한 자율통제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의 특성은 우선 수학과 논리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물리학과 생물학, 형태심리학이나 언어학, 사회과학에서도 자율통제적인 변형의 체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인문과학에서 발견되는 구조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무의식의 구조를 드러내준다. 그것은 원시적 심성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구조라고 볼 수 있다.

 리꾀르는 구조주의 방법론이 자신이 아는 가장 엄밀한 학문체계86)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에 관한 총체적인 해석을 추구하는 리꾀르는 구조주의를 역사의 맥락과 연관시키고자 한다. 언어의 초역사적 구조란 결국 말이란 역사적 사건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벤베니스트는 언어체계 안에서의 기호의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언어자료(code)를 다루는 기호학과 담화의 기초단위인 문장내 기호의 사용과정에서 파생된 언어자료(message)를 다루는 의미론을 구분한다. 언어체계는 무시간적이나 담화의 순간은 사건적이다. 이 담화의 순간에 언어는 화자와 실재에 관해 언급한다. 여기서 리꾀르는 담론의 의미창조성과 의사소통성이 기호체계의 폐쇄성을 개방시키고 세계와 상호주관이 활동하는 현실세계를 발견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언어란 본질적으로 정태적인 소산이 아니라 창조적인 능산이다.



 9.2. 구조주의 인류학



 레비-스트라스는 언어학에서 전개된 구조주의적 사고를 인류학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그는 언어구조를 현상의 무의식적 하부구조로 전위시키고 그것이 문화적 행위의 무의식적 지층을 간직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소쉬르의 언어학은 원시사회의 구조해석에 대한 모델로 작용한다. 가령 친족체계는 아버지에는 아들이란 대응쌍이, 남편에는 아내라는 대응쌍이 상응하며, 각 대응쌍의 상호관계에 의해 요소들의 정체성이 형성되므로, 친족체계란 공시적 구조분석에 의해 연구된다. 이러한 친족체계의 기본구조는 사회 내의 인간관계를 구조화하고, 결혼법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게 해준다. 궁극에 가서는 친족체계는 몇 가지 단순 원리에 의거하여 사회 전체의 조직화된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발견되는 공시적 구조들-사회적 갈등을 피하기 위한 규율의 원리, 상호성의 원리, 결합의 원리-이 바로 원시적 사고의 전형적 특성이며 원시사회의 토템사상은 그 좋은 실례라는 것이다. 야만적 심성은 전혀 별개의 의미질서를 유비적으로 상응시켜 상징화하는데, 가령 토템사상의 경우, 먹이사슬의 구조는 삶과 죽음의 사슬구조와 동일시되어 동물과 인간, 인간과 신의 동일시 현상을 보여준다. 신화적 상징은 경험적 차원에서는 화해시킬 수 없는 대립적 질서를 무의식적 논리의 구조적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고도로 체계화된 규칙의 변양태라는 것이다.

 이런 연구의 결과, 그는 사회인류학적인 실재는 무의식적 과정 안에 숨겨져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지층을 탐색하는 지질학자와 같이, 숨겨진 의미의 보편적 지층을 찾아내기 위해 사회적 무의식 구조87)를 발굴해낸다. 친족체계에서 보듯이 사회적 무의식의 구조는 시간이 멈추어 있는 논리적 구조이다. 인간의 본성에 깃든 무의식적 집단논리가 언어와 사회의 심층에서 작용한다. 이 때, 이항적 대립 안에서 순환하는 낱말들은 사회 내에서 순환하는 요소들과 동일한 위치에 있다. 결국 사회인류학적 하부구조는 언어학적 하부구조와 유비적으로 상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적 언어의 공시적 체계가 존재하고, 이에 상응하여 통시적으로 작용하는 신화적 말이 세계 도처의 신화적 내용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비적으로 사유하는 야만적 심성은 원형적으로 작용하는 인간정신의 무의식적 논리구조이며 현대인도 이러한 심성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라스에 대한 리꾀르의 비판은 다소 통렬하다. 리꾀르는 인류학의 연구에 엄밀한 공시적 분석방법이 성립할 수 있는가를 회의한다. 가령 레비-스트라스의 친족체계분석은 표상의 임의적 체계에 불과하며 담론의 의사소통 안에서 발생하는 창조적 의미발생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가령 예술이나 종교에서 아버지란 단지 아들에 상응하는 지시체가 아니라 다양하고 심오한 함축성을 지닌다. 따라서 인류학의 연구는 통시적 차원도 함께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분석에 일반화시킨 토템사상은 다양한 신화유형들 중에서 가장 구조주의와 잘 들어맞는 것이다. 그러나 셈족이나, 원시그리스, 인도유럽계통의 신화유형은 역사적, 사건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가령 히브리의 신화전승은 역사적 사건의 전승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구조주의의 해석은 본래적 의미의 한 부분만을 파악하기에 상징적 기호의 풍요성을 드러낼 수는 없다는 한계성을 가진다.88)

 

 9.3. 구조주의 맑시즘 : 알튀세



 구조주의 방법론은 언어학과 인류학의 영역을 넘어 사회학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그와 동시에 통시성과 공시성의 마찰은 점강되어 간다. 과학적 맑시즘을 표방하는 알튀세는 구조주의 방법론을 적용하여 후기 마르크스 사상의 과학적 객관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아래에서 사회과학의 역사성을 해체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을 살펴보고, 알튀세의 구조주의적 측면을 잘 드러내주는 '다원결정(overdetermination)'이론을 개관한 뒤, 리꾀르의 구조주의 비판을 일별해보고자 한다.



 9.3.1. 마르크스 안에서의 '인식론적 단절'



 인식론적 단절이란 바슐라르와 깡낄렘의 과학사 연구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기본적으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변화'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즉 그것은 한 분야에 관한 이해지평 자체가 근본적인 시각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지평으로 이동 내지 상승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쿤의 패러다임 변화는 변증법적인 지양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어서, 기존의 이해지평 안에 무질서하게 산재했던 올바른 통찰들이 새로운 패러다임 안에서 이제 비로소 일관성있는 질서 아래 정열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반해 불란서 과학사의 인식론적 단절 개념은 오히려 단절된 것, 변화된 것, 새로운 것을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단절을 통해 계기적이었던 역사가 분절되게 되며 구조주의의 공시적 분석방법에 적합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구조주의 방법론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시적으로 연구하여 그 인과관계를 계기적인 연속성에서 탐구하지 않고, 각 시대의 서로 상이한 지층들을 공시적으로 연구하여 하나의 단일한 전체구조를 계열화시키려 한다. 과학적 막스주의의 관점에서 구조주의 방법론을 도입한다면, 마르크스 사상의 역사적 연속성은 다양한 지층들로 단절되고 엄밀한 과학이 아닌 다른 지층들은 이데올로기적 입장으로 계열화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 자신이나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도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중층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이 알튀세의 입장이다.

 가령 '독일이데올로기'이전의 청년 마르크스는 관념론의 영향하에서 인간중심적 인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자아의 상상 속에서나 주체인 것이지 사실은 경제법칙의 무의식적 규칙들의 다원결정에서 파생된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는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몰주체적인 경제구조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를 인간중심적으로 파악할 때, 인간의 자유라는 환상 안에 작용하는 자본주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후기 마르크스는 이러한 약점을 파악하고 인식론적 단절을 수행하여 '자본론'에서 과학적 마르크스 주의를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9.3.2. 사회구조의 다원결정설



 결국 알튀세의 마르크스는 선동적 혁명가가 아니라 과학적 이론가이다. 그렇다면 이제 과학89), 즉 변증법적 유물론과 이데올로기가 구별된다. 알튀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란 선과학적 표상체계와 그 논리이다. 즉 과학적 검토를 거치지 않은 모든 표상체계가 이제 이데올로기로 파악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외한 모든 이론이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 철학, 예술, 법률, 제도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환상을 통하여 사회를 생명체로서 살게하는 기능을 수행해왔다. 자아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자기 중심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모든 가상 속에 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이요 철학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과학적 이론 일반이면서 동시에 현실적 실천양식 일반이 된다는 것이다. 후기 마르크스로 하여금 청년기의 관념론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인식론적 단절을 수행하고 '자본론'의 과학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한 것은 '잉여가치'의 개념이었다. 잉여가치설90)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상품가치는 생산에 투입된 노동력에 비례한다. 그런데 노동자의 노동가치와 시장의 상품가치 사이의 차액이 자본가의 잉여가치가 되는 것이다. 잉여가치 분석에 의해 착취의 본질이 과학적으로 드러남으로써 비로소 객관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제 비판적 과학이론으로 파악된 '자본론'을 구조주의적으로 다시 읽기 위하여 알튀세는 '다원결정'의 이론을 제시한다. 인간과 사회의 관계는 이미 언제나 주어진 구조화된 복합적 통일성을 갖는다. 그것은 마치 고층빌딩과 같이 복합적이고 상이하다. 그래서 모든 모순은 헤겔과 같이 개념적으로 반립되었다가 개념을 통해 일괄적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모순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상황은 기층에서부터 상층까지 상호연결된 구조화된 복합적 통일성 안에서 스스로의 다원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하부의 모순이 상부의 모순과 역동적으로 환치되며 압축적으로 융합될 때, 그 응축된 융합력의 폭발적인 힘이 사회적 혁명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사회 내 다층적 실천양식 간의 모순이 내부-외부적 혹은, 하부-상부적으로 다층누적되어 결국 하층민의 분노를 촉발시켜 혁명을 발생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다원적 모순의 지배적 구조는 바로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경제구조이므로 민중의 혁명은 필연적으로 공산주의 혁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9.3.3. 비판



 리꾀르는 해방의 관심이 배제된 과학적 막시즘이 정말로 검증가능한 과학일 수 있는가를 회의한다. 막시즘은 비판적 학문이란 입장에서는 과학일 수 있겠지만, 실증주의적도 아니고 비판적도 아닌 과학91)이란 개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마르크스 내에서 극단적인 인식론적 단절을 보는 것은 마르크스의 독해에 해를 끼친다고 본다. 앞의 청년 마르크스에서 보았듯이 마르크스의 철학적 태도변화는 관념론적 의식으로부터 실천하는 현실적 인간으로의 변화이지, 인간이 구조 안에 사상된 과학에로의 변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 존재, 그의 갈등, 그의 노동은 현실이지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후기 마르크스에까지 일관되게 해방의 관심을 촉발한 유인자라는 것이다. 또한 알튀세는 그의 구조주의적 분석에서 건물이란 은유를 지나치게 실재화함으로써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간의 역동적 상호관계를 동결시켰다는 것이다. 리꾀르의 일관된 입장은 상부구조의 상징적 상상력이 이러한 은유를 낳는 창조적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결국 억압적 은유에 대해 대항적 은유를 제시함으로써 행동을 유발시키는 상부구조적 시도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의 규명은 그것의 독특한 양상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이 먼저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 단지 체제의 재생산에 있어 그들의 역할만 지적하며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92)

 리꾀르는 임금의 문제를 잉여가치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계약의 문제로 보고자 한다. 계약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며, 현행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착취의 여지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법적인 행위이며, 따라서 착취로만 설명되지 않는 정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분석은 동기화의 준거틀 안에서 왜곡적 기능과 구성적 기능을 연결시켜 파악해야만 균형잡힌 안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실재를 지적하는 것만으론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상징적 행동이론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93)



 9.4. 구조주의에 대한 해석학적 수용



 구조주의란 이미 구성되어 완결된, 죽은 체계를 대상으로 하여 그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대립적 요소들을 설정한 뒤, 각 요소들의 대립쌍으로 연결된 관계들을 하나의 조합체계로 만들어내는 방법론이다. 기호학은 구조주의에 대해 모범적인 모델이 된다. 소쉬르는 담론을 구성하는 행동, 작용, 과정을 무시함으로써 이렇게 완결된 분석모형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조주의 분석이 끝나면, 이제 언어와 말 사이의 관계를 탐구해야 한다. 이것은 문장을 연구하는 의미론을 통해 이루어진다. 언어라는 정태적 위계체계는 자유롭게 말함이라는 행동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대화의 주고 받음을 통해 언어는 역사 안에 들어와 사건이 된다. 기표를 통해 청종되는 말-사건은 기의를 통해 실재적인 준거를 지향한다. 여기서 말-사건은 실재적 세계와 관계한다. 결국 말-사건을 통한 언어체험은 언어가 고정된 연구대상이 아니라 세계와 의미를 매개하는 개방성이란 것을 드러내준다. 언어에 대한 올바른 사유지평은 언어와 말이 서로 상통하는 통일성의 지평인 것이다. 생명 없이 응고된 체계에서부터 사건으로 터져나오는 담화의 순간 언어는 "체계라기보다 과정"94)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이다.

 마찬가지 해석이 레비-스트로스나 알튀세에게도 행해질 수 있다. 인류학의 차원에서든 사회과학의 차원에서든 그 자체로만 분석할 때는 고정되어 있는 듯이 보이던 구조들이 실재 세계 안에서 작용하자마자 그것은 늘 보다 새롭고 예측불가능한 의미사건에 개방되는 것이다. 철학은 그것이 엄밀하기 위해선 객관성이란 우회로를 거쳐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이기 위해선 귀납법의 과다일반화를 넘어 행동, 과정, 작용이 진행되고 있는 역사세계로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양자의 관계를 심오하게 반성하는 숙고를 통해서만 철학의 사유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품위를 가지고 소요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구조주의가 구체적 현실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해석학의 반성적 매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제4부 : 텍스트와 은유





 우리는 지금까지 현상학적 해석학이 신화적 상징에서 출발하여 프로이드, 마르크스, 철학적 해석학, 비판이론, 구조주의와 맞대결하는 해석의 갈등을 목격해왔다. 그것은 길고도 험난한 우회로였지만 그만큼 수확도 컸다고 자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갈등이 상호오해의 시정과 상호이해의 균형잡기 과정이었다면, 결국 해석학은 무엇을 향하여 이러한 오딧세이적 방황을 지속하는 것일까? 리꾀르의 초기 기획에 따르면 그것은 '의지의 시학'을 향한 장도였다. 그러나 먼 길을 걸어오는 동안 전망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이제 해석학은 텍스트 해석학을 통해 인문과학 일반의 방법론적 정초를 다지는 동시에, 상징과 은유작용의 함축적 의미를 주제화함으로써 인간의 이해과정 일반에 대한 균형잡힌 자기이해를 획득하고, 인간의 실존에 대한 존재론적 해명을 시도하여, 인간실존의 존재론적 차원에서부터 신앙의 정당화와 은총속의 상징현실을 규명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제4부에서 기나긴 해석의 우회로의 반환점을 형성하는 은유의 이론을 살펴보고, 그의 텍스트 해석학을 검토해볼 것이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리꾀르의 작업이 만족스럽다면, 우리는 제5부에서 그의 존재론에 대해 전망해볼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10.. 살아있는 은유



 '언어에 있어서 의미창조의 다중원리 연구'라는 부제를 달고있는 '살아있는 은유'는 의미 가능성으로서의 언어가 은유를 통해 존재의 현실성에로 살아나오는 과정을 연구한다. 여기서 '살아있는'이란 표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의 현실(actus)에 대한 리꾀르의 재해석이다. 이런 의미에서 은유의 문제는 고전 수사학에서 의미론과 문장론을 거쳐 해석학에 도달하며 마침내 은유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의 유비'와 본격적인 대결을 하게 된다. 우리는 12장에서는 일단 수사학에서 의미론으로, 그리고 의미론에서 해석학으로 넘어가는 은유의 과정만을 검토하고, 의미창조의 문제가 직면하게 되는 존재론과의 연관관계는 제5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10.1.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전 3권으로 구성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논쟁술과 문체론, 그리고 작문론을 포함한다. 수사학이란 웅변적 연설을 통해 대중에게 의도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무기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소피스트의 전략적 변증술과는 달리 철학과 연결된 변증이론이다. 수사학은 매끄러운 언술과 진리에의 증언이 병행하여 발전하며 전체 역사과정을 구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 철학이 수사학의 남용을 규제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연설에 적절한 논증의 형식은 필연성(그래야만 함)이라기 보다  개연성(그럴 듯 함)이다. 그러므로 설득을 지향하는 수사학은 개연성에 대한 논리적 추론을 연구해야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생략 삼단논법(enthymeme)은 제일원리가 아니라 대중에게 적절한 개연적 원리에서부터 결론을 연역하는 방법이다. 이 때 사용되는 용어는 일상용어나 은유와 같은 가장 보편적인 단어들이어야 한다. 시학의 정의에 따르면 은유란 한 의미가 다른 이름을 차용한 의미의 대체이며 어디로부터 어디로라는 운동성을 지닌다. "의미의 전이는 종으로부터 유로, 유에서부터 종으로, 유에서부터 유로, 그리고 결국은 유비(비례)에 의하여 수행된다."95) 은유는 이미 설정된 종과 유의 질서 안에서 종속, 연결, 관계의 비례성이나 동일성과 같은 관계법칙을 따라 발생한다. 그러므로 은유 안에선 의미전환을 담고있는 관계쌍을 고려해야 하며, 이렇게 유와 종의 관계를 파악해나가면, 논리질서를 혼란시키며 스스로 자기 의미를 규명해나가는 범주적 전환문제가 결국은 모든 범주를 구성하는 개념적 위계질서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천부적인 통찰을 가진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인데 왜냐하면 "좋은 은유는 상이성 속에서 유사성을 직관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96)

 리꾀르에 의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 분석은 단어에 중점을 둠으로써 은유의 분류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은유는 기능적으로 볼 때 언어들, 문장들, 담론들 사이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꾀르는 은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를 현대 해석학에 적용하기 위해 '자연의 모방'이란 미학적 정의를 해석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자연이란 어떤 고정된 주어짐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이란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방이란 활동성의 상태에 있는 사물을 살아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결국 은유란 언표를 통해 사태를 직시하게 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존재 자체와 직면하게 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은유적 모방을 통하여 세계내 존재의 지평 자체인 현실태로서의 현실(real as act)을 드러낸다. 이제 은유는 살아있는 은유로 이해되는 것이다.



 10.2. 의미론에서의 은유



 은유의 수사학은 단어를 준거단위로 했었다. 그러나 이제 의미론에서는 문장이 의미의 최소단위가 되는데 은유는 문장의 틀로 작용한다. 문장론에서 은유란 어떤 것에게 다른 비관습적인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그 본래의 이름을 숨기는 표현법이다. 여기서 의미의 연관관계는 문장 안에서 의미전환을 함축하는 공문맥을 드러낸다. 문장의 연구는 은유적 단어의 발생을 드러내준다. 따라서 은유의 연구는 단어에서 문장수준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수사학에서 의미론으로 이전하기 전에 먼저 현대 구조주의 언어학과 의미론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10.2.1. 기호학에서 의미론으로



 현대의 언어학은 소쉬르에 의해 창시된 구조주의 연구방법의 문맥 하에서 기호론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언어의 기본적인 단위는 기호이지만 담화의 기본적인 단위는 문장이다. 단어는 음성적 단위로 쪼개져 기호학적 수준을 갖게되지만 다시 의미단위로서 다른 의미와 연결되어 고차원의 단위를 이루는 이중성을 지닌다. 문장의 의미는 단어적 의미의 집합과는 다른 전체의미를 드러낸다. 따라서 문장의 형식으로 실현된 담화 안에서 비로소 언어는 개방되고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의 연구는 구조주의의 폐쇄체계 안에서 연구될 수는 없다. 의미의 창조는 문장 단위의 문맥 안에서 현실과의 연관을 통해 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의미연구는 기호학에서 의미론으로 넘어가야 한다. 우리는 아래에서 기호학과 의미론의 근본적인 차이를 살펴보고 의미론에로의 이전의 당위성을 살펴보겠다.

 기호학에서 기호는 표현하는 것이고 의미는 표현된 것이다. 그렇다면 기호단위 안에서의 의미는 정의될 수 없고 단지 존재여부만 판단될 수 있다. 기호는 단지 서로서로 구별될 뿐이며 이 구별만이 기호의 유일한 의미이다. 반면에 의미론의 대상이 되는 담화는 의미가 이해되는 언어사건이다. 언어체계란 단지 가상적으로 실재할 뿐이지만 언어는 화자가 그것을 현실화시킬 때만 실재로 존재하게 된다. 의미가 담화의 주어진 단위에 상응하여 도입되기 때문이다. 말함을 통해 이제 담화내용의 동가물로서 의미가 존재하게 된다. 소쉬르의 말대로 표현된 것으로서의 의미(기의)는 언어체계 내의 단순구별로서 표현하는 기호의 상대물이지만, 지향과 지향된 것은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표현된 의미는 기호학적 질서에 속하지만 지향은 의미론에 속한다.

 또한 언표의 진실성 문제에 대해 단어의 차원에선 해답이 없다. 옳고 그름은 단지 담화에만 속한다. 개별 단어는 단지 명명되어 특화되며 그 자체로 보편화될 수 있다. 기호는 발생적이며 개념적이다. 그러나 담화에서 언어는 상황을 고려하게 되며 특수한 적용을 받게 된다. 그 자체로는 보편화기능만을 지니던 술어는 상황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문장은 언제나 구체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며 모든 동사는 특정한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이 전체로서의 문장은 의미와 준거적 사태를 지닌다. 담화는 언표행위로서 그 특정내용을 지니지만 그 언표의 의도는 질문, 기도, 명령과 같은 담화형식에서 드러난다. 한편 담화적 문장 안에서만 말해진 의미와 표현되는 대상(준거사태)이 구별된다. 준거는 표현됨으로써가 아니라 의도됨으로써 언어의 외부로 나아갈 수 있다. 기호로는 언어적 실재에만 도달하지만, 문장을 통해서는 언어 밖의 사물과 연관된다. 문장의 의도된 의미는 담화상황에 대한 준거와 화자의 태도를 함축한다. 언어는 지향적이며 자기 외부의 것을 겨냥한다. 화자의 준거는 실재의 준거와 구별된다. 한편 화자가 실재에 관해 언표하는 한, 그 문장은 동시에 그 화자에 관해 언표하고 있다. 의사소통의 상황 안에서 담론은 실재에 대한 의미를 전달할 뿐 아니라 화자의 자기이해를 드러냄으로써 간주관적인 관계성을 드러낸다. 결국 의미론은 언어사건을 통해 역사적 현실로 나옴으로써 의미발생의 사건적 성격을 개방하는 것이다.



 10.2.2. 의미론에서의 은유



 담화의 문맥 자체는 질문과 대답으로 연결되는 보다 넓은 문맥 안에 위치한다. 단어는 그 자체론 사물도 이데아도 아니며 단지 문맥 안의 언표되지 않은 풍요성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의미의 일관성이란 언제나 오로지 문맥의 일관성이다. 그러기에 한 단어는 자신의 문맥에 따라 하나 이상의 사물을 표시할 수 있다. 이 때 단어가 지시하는 언표되지 않은 부분은 서로 다른 문맥에 속해 있을 수 있다. 문장은 살아있는 유기체적 성격을 지닌다. 그래서 문장내 각 단어는 서로 서로 영향을 받으며 전체 언어에 대한 관계 안에 정립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단어는 담론문맥 안에서의 의미의 담지자로 이해되게 되는데 이 의미의 정확한 규명은 단어의 명사(기표)와 그 지시의미(기의)에 상응하는 연상체들의 장들간의 상호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의 일상언어들은 각 단어의 이름이 갖는 연상체들과 그 지시의미가 갖는 연상체들이 비교적 고정화되어 있어 그 최종의미의 명확한 규정이 쉽고 빠르게 되는 반면, 은유는 발화자에 의한 개인적이고 의도적인, 창조적 의미변화의 사건이므로 청취자는 자신의 연상지평을 창의적으로 확대 심화시켜야만 그 의미를 간취할 수 있다. 은유는 다발적인 직관들을 제시함으로써 기존의 연상지평에 추가적이고 축적적인 새 의미들을 제공한다. 결국 단어들은 이미 여러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면서 그 이상의 의미들을 소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이러한 의미의 창조는 표현이 터져나오는 발화의 순간, 언어의 의미체계와 명사체계에 간섭이 개입하는 것이다. 사고는 유사성에 의거한 연상에 의해 발화된 다른 단어를 통해 숨어있는 첫 번째 의미를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론과 심리학의 결합은 은유와 환유를 착각하는 것이다. 은유는 환유와 같이 연상의 연속성에 의해 유사성을 얻기는 하지만, 그것은 모든 명사 수준에서 은유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술어의 수준에서 은유되는 것이다. 즉 은유는 언제나 '이다'와 연결된다. 비유법의 심리적 해석은 결국 연상계열 안에서의 일종의 대체이론인데 '이다'와 연결된 은유는 연상계열 자체를 새로운 구조틀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문장은유는 의미가 변화하는 단어에 집중하면서도 그 단어의 의미변화는 의미의 긴장을 겪고 있는 전체적 표현을 그 구조틀로 갖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는 단어에만 집중했고, 심리학적 문장론은 연상계열의 장에만 집중했지만, 은유의 본래적 처소는 문장내의 서술어이다. 결국 "은유는 명사와 술어 간의 논쟁의 결실이며, 언어 안에서의 은유의 위치는 단어들과 문장들 사이"97)라는 것이다.



 10.2.3. 은유의 변증법



 은유를 유발하는 유사성이 연상계열 내의 대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미론적 혁신에 의한 서술작용 속의 동일성과 차이성 사이의 긴장의 소산이라면 이제 은유의 의미는 동일성과 차이성 사이의 변증법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

 앞에서 은유는 어떤 개념을 다른, 보다 잘 알려진 개념의 기호를 통해 표현하는 것으로 정의했었다. 여기서 은유는 일종의 감각적 아이콘(유사 기호)을 사용하는 상상력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은유는 이제 문법적 분석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시적 상상력의 모습을 드러낸다. 시적 언어는 원래의 의미에 새로운 감각들을 연결시켜 일종의 가상 현실 안에서 새로운 대상을 체험하게 한다. 시읽기란 자연적 현실을 중지시키고 능동적으로 텍스트에 개방되어 하나의 새로운 현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시어는 이미지를 불러내어 시흥을 자아낸다. 이 때 시적 감흥은 시어가 제시하는 이미지를 시어의 숨은 의미'로서 보는'데에서 발생한다.  '라고 보는 것'은 반은 사고작용이고 반은 체험인 직관적 관계성이다. 시어를 통해 이미지들이 막무가내로 발생하는데 직관적 사고는 이 이미지들을 숨겨진 의미와 연결짓는다. 이미지들의 충만성이 의미에 빛을 드리운다.

 이렇게 x가 y가 아닌 줄 알면서도 x를 y로 보는 데에서 동일성과 차이성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이 드러난다. '라고 보는 것' 안에서 긴장과 결합이 동시에 발생한다. 은유를 통해 의미는 자신의 영역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초월한다. 은유는 의미론의 한계선 상에 위치한다. 시적 이미지는 우리 언어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우리 자신의 존재를 그 깊은 심층에서부터 표출시킨다. 이렇게 첨예한 긴장을 창조적으로 통합하면서 은유는 그 스스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10.3. 은유와 준거(reference)



 문장이 담화행위로 넘어가면서, 우리는 은유의 의미만 고려했던 의미론적 입장에서 은유적 문장의 준거를 다루는 해석학적 입장으로 넘어간다. 이제 의미는 담화의 내적 조직이 되고 준거는 언어외적 실재를 지시하는 능력이 된다. 준거적 지시를 통해 은유는 언어의 창조적 능력을 보존하면서 자기규명적 기능을 수행한다. 우리는 은유가 어떤 양식의 현실세계를 지시하는 지 살펴보기로 하자.



 10.3.1. 은유의 준거세계



 의미론은 문장 내에서의 의미와 그 형상만을 다루지만, 이 문장이 현실세계 안의 담화사건으로 파악되자마자 문장내 의미는 자신의 준거로서의 언어외적 실재세계를 지시한다. 담화 안에서의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선 문장의 기호와 그 의미와 그것이 지시하는 준거 사이의 상호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텍스트의 의미에 관한 올바른 해석은 의미로부터 그 준거로 나아가는 우리의 진리를 향한 갈망에 의해 촉발된다. 현실세계에서의 담화란 그 자체가 하나의 생산작업이며 자신의 작업세계 안에서의 노동의 결실이다. 해석학이란 텍스트의 생산구조에서 그것의 작업세계로 진행하는 올바른 규칙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한 작품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 텍스트의 배열, 장르, 문체가 지시하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적 담화는 외부세계의 준거를 지시한다. 그러나 문학적 담화는 일단 외부세계를 정지시켜 놓고, 자신에 고유한 문학적 세계를 개방시킨 뒤 그 안의 상상적 준거를 지시한다. 이 때, 은유는 외부세계의 정지된 준거와 상상세계의 현출된 준거 사이의 관계를 지적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제 은유의 해석을 통해 일차 수준의 준거가 정지됨으로써 은유적 세계의 이차 수준의 준거가 해방되는 것이다.

 시적 담화의 상상적인 세계 안에서 실재 준거의 정지는 가상의 준거양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일차적 세계의 정지를 통해 시는 시적 감흥에 젖어있는 우리 실존의 새로운 존재가능성에 상응하는 새로운 상상세계를 개시한다. 이 때 은유에서 드러나는 1차 의미와 2차 의미 간의 유사성은 그 준거로서의 1차 세계와 2차세계의 유사성에 상응한다. 따라서 은유는 의미의 창조이자 세계의 재창조이다. 은유 안에서 2차적 의미와 2차적 세계 사이의 인식론적 연결은 시적 감흥을 통해 수행된다. 예술의 진실성은 이러한 상징의 적절성에 의해 규정된다. 이리하여 완전한 오류와 문자적 진리 사이에 은유적 진리가 성립하게 된다. 은유적 진리는 술어를 전이에 의하여 다른 어떤 것에 적용하게 한다. 은유를 통해 일상적인 준거작용이 정지되면, 자기발견적 가상의 창조가 진행되어 문자적 의미의 한계선을 넘나들며 실재를 재묘사하게 되고, 마침내 상상적 실재가 언어로 스며들어와 표현과 창조를 통합함으로써 은유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10.3.2. 은유적 진리



 앞서의 모든 논의를 결론적으로 볼 때, 결국 시적 은유란 허구가 실재를 재묘사하는 수사학적 과정이다. 그런데 이 때 허구는 단지 허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흥에 의해 유발된 어떤 실재적인 지향을 지닌다. 따라서 은유적 진리는 내적 긴장을 내포하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있다'라는 계사 안에 간직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한다. 문자적으로 볼 때, '이다'는 실재가 실제로 그렇게 있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그러나 은유적 '이다'는 '꼭 그렇지는 않지만'이란 의미를 함축한다. 그래서 은유는 '이다'와 '아니다'의 긴장 속에 존재한다. 결국 은유적 '이다'는 '아니다'와 '비슷하게 있다'를 함께 의미한다. 그렇다면 은유에는 긴장에 찬 은유적 진리가 존재한다. 이러한 은유적 진리는 시적 체험 안에서 언어가 자신을 털고 초월 나가는 탈자적 순간에 발생한다. 그것은 언어의 일의성을 벗어나 초월과 내재의 긴장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성에 즉흥적으로 참여하는 시적 직관의 진리이다.



 우리는 은유적 진리의 개념을 통해 마침내 존재론의 문턱에 도달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의 진행과정상 존재론적 문제를 고찰하기 이전에 먼저 텍스트 해석이론을 일별하여 정신과학의 인식론적 문제에 대한 리꾀르의 입장을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13장에서 텍스트 해석학을 다룬 뒤, 제5부에 가서야 존재론의 문제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11.. 텍스트 해석학



 리꾀르에게 있어 텍스트란 '살아있는 은유'에서는 '노동(작업)으로서의 담화의 생산'98)으로, '텍스트란 무엇인가'에서는 '문서화에 의해 고정된 담론'99)으로, 그리고 '텍스트의 모델'에서는 '인간행동의 의미,'100) 혹은 '의미있는 행위'로 정의된다. 이것은 다소 혼란스러운 정의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텍스트의 정의들을 상호연관시켜주는 핵심개념이 바로 담론이다. 담론으로서 '언어는 언표되거나 기록된다.'101) 그러므로 텍스트란 결국 의미를 담지한 채 청자나 독자나 관찰자에게 체험가능하도록 제시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글로 쓰여진 문서를 의미할 때에도 리꾀르에겐 보다 동사적인 행위를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아래에서 텍스트 해석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11.1. 말-사건에서 기록된 텍스트로



 정신과학의 인식론적 문제, 즉 이해와 설명의 해석학적 문제는 문서로 쓰여진 텍스트의 의미해석을 다룬다. 대화 수준의 담론은 말-사건으로 현재화되어 역사의 흐름을 타고 과거로 사라지지만, 일단 공론화된 의미는 서로의 의미세계 안에 융합되어 남는다. 의미의 지평융합 정도는 제시된 의미와 기존의 의미지평 간의 일관성, 그리고 그 의미와 외부세계의 준거와의 적합성에 따라 결정된다. 이제 대화 수준의 담론이 기록된 담론으로 결정화되면, 텍스트는 질문과 응답의 소통가능성을 상실함으로써 저자의 의도와 어느 정도 독립되어 스스로의 자율성과 완결성을 갖게 된다. 이제 해석은 텍스트가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와 그 준거에 준하여 수행된다. 이 때 텍스트의 의미는 텍스트의 구성, 장르, 문체와 같은 내적 구조에 의해 파악되며, 스스로의 제시양식에 따라 생활세계나 시적 세계와 같은 텍스트의 준거세계와 상응하게 된다. 따라서 해석의 작업은 의미의 해석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세계기획이 된다. 특히 리꾀르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시학의 분야에서 시적 상상력은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들에 상응하는 가능성의 세계를 기획한다. 여기서 일상세계는 뜬 구름과 같이 정지하고, 일상세계를 통하여 일상세계 너머에 있는 시적인 세계가 투명하게 개시된다. 현실세계가 정지하여 소격화의 공간이 열림으로써 창조적 상상과 공감에 의거한 유토피아적 상상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11.2. 텍스트의 이해와 설명



 딜타이에 의해 이원화된 이해와 설명의 난제는 텍스트 해석학 안에서 변증법적으로 통합될 수 있다. 딜타이가 이해와 설명을 이원화한 것은 역사과학의 이해와 자연과학의 설명이 각기 개인적 정신과 보편적 자연이란 상이한 준거체계에 상응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인문과학이 개인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이 때, 이해가 타인의 심리에 대한 직관적 이해라면, 인문과학이 요구하는 객관성은 획득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텍스트가 일단 기록되면, 이제 저자의 의도는 저자의 심리 안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완결되어 외화된 텍스트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제 이해는 저자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로부터의 소격화를 통해 텍스트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앞에서 텍스트는 기록을 통해 자율성과 완결성을 획득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텍스트의 자율성은 저자의 심리상태와 의도에서부터 어느 정도 독립된 객관성을 지니게 되며, 텍스트의 완결성은 작품을 구조적 전체로 다룰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이제 텍스트의 의미는 구조적 분석에 의해 객관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렇게 획득된 객관성은 자연과학의 인식론적 객관성과는 달리 언어 자체의 객관성에 의해 획득된 것이다. 따라서 인문과학의 설명은 자연과학의 설명과는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며, 인문과학에서의 이해와 설명의 문제는 정신과 자연의 차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언어와 말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기본적인 문제들이 갈래를 잡게 되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검토해온 리꾀르의 해석학의 전모를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인문과학의 객관성은 언어의 객관성에 근거한 구조적 분석에 의해 획득될 수 있고, 인문과학에 고유한 자기이해의 문제는 언어와 말-사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이해와 설명의 변증법적 통합에 의해 도달되는 것이다. 우선, 소박한 주관을 가진 독자는 자신의 전이해를 가지고 텍스트를 읽으면서 상상을 통해 텍스트를 구성한다. 다음으로, 객관성을 추구하는 비판적 주관은 텍스트를 준거사태나 독자에 연결시키지 않고 그 자체로 완결된 전체로서 봄으로써 텍스트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반성적 주관은 텍스트를 준거사태와 독자 자신의 존재론적 정신세계에 열결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추구하는 해석학을 전개한다. 이 때, 해석은 한편으론, 객관적 설명에 의해 매개되며 다른 한편으론, 설명을 재창조함으로써 독자의 자기이해를 심화시키고 반성을 일깨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자기이해는 자기가 형성해낸 문화적 기호들을 이해하는 우회로를 거쳐 자기자신에게 도달한다. 결국, "해석학적 반성-혹은 반성적 해석학-에서 자아의 구성은 의미의 구성과 동시적이다."102) 그리고 "해석자가 말하는 것은 텍스트에 언표된 것을 다시 현실화시키는 재언표"103)일 뿐이다.



  12.. 결론



 우리는 리꾀르와의 초대면을 기획하면서 기운차게 출발하여, 아주 힘겹게 수 많은 산들을 넘어왔으나 아직도 깊은 산 속 한 골짜기에 멍춰 서있는 형국이 되었다. 아직도 넘어야 할 산들은 눈 앞에 아득하고 뒤돌아보면, 걸어온 자취도 보이지 않는데 애당초의 과욕을 탓하며, 시간과 자료의 부족으로 제5부의 기획을 미완으로 남겨두고 여기서 일단 멈춰야 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작업을 되돌이켜 보며 리꾀르의 업적에 대한 중간평가를 시도해볼 것이다.



 12.1. 연구작업에 대한 평가



 우선 평가에 앞서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리꾀르의 초기 저작에 대한 소홀로 말미암아 리꾀르의 문제의식에 대한 판단착오가 있었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본 연구는 해석학의 영역 내에서 수행되었고, 애초에 리꾀르의 철학이 소위 '현상학적 해석학'이라는 틀 안에서 수행될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었기 때문에 '자유와 본성', '역사와 진리'와 같은 초기의 현상학적 저서들에 무관심했고, 따라서 그 안에 표명되어있는 관심사들을 제대로 섭렵하지 못했음을 고백해야 하겠다. 더우기 현상학적 해석학의 전단계를 이루는 '가유적 인간'은 불어판으로 구했기 때문에 시간에 비해 얻는 것이 적을 것이라고 보아 거의 읽기를 포기하였다. 이러한 초기의 시행착오가 리꾀르의 철학적 전모에 대한 통찰을 얻는데 심각한 장애가 되리라는 것은 아주 나중에야 생긴 의구심이다.

 '훗설'과 '악의 상징'에서 본격적인 리꾀르 읽기가 시작되었고, '프로이드'를 읽으면서 리꾀르에 흠뻑 심취하게 되어 '현상학적 해석학'이라는 기존의 선입관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놀라움과 경탄은 '해석의 갈등'과 '해석학과 사회과학'을 통해 일종의 신뢰로 변모하였으며,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이해와 해석에 대한 나 자신의 보수적 태도가 변화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지속된 집중적인 독서가 시간의 부족으로 인해 '살아있는 은유'를 대강 일독하게 되자 일단 여기서 리꾀르 읽기를 멈추어야 하게 되었다. 본 연구에서 절정단계를 장식할 '시간과 이야기'의 3부작을 구하지 못하였기에, 대충 훓어본 '타인과 같은 자기자신'은 문맥의 흐름이 단절된 데다가, 한국어와 불어의 언어적 차이로 인해 '자기', '자신', '자아', '같은' 등의 핵심용어의 해석이 본래의 연결성을 상실함을 느꼈기에 분석에서 아주 탈락하게 되었다. 그 결과 애초에 기획했던 제5부 '해석학에서 존재론으로'의 부분이 누락되게 되었다. 결국 리꾀르의 해석학적 전모에 대한 일관성있는 통찰을 제시하고자 했던 본 연구의 목적을 만족스럽게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쉬운대로 지금까지의 연구를 결산하여 리꾀르의 사상에 대한 중간평가를 시도해보기로 하겠다.

 

 12.2. 결론적 중간평가



 우선, 리꾀르의 해석학은 전이해, 해석, 자기이해라는 기존의 철학적 해석학의 구도와 크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이미 '악의 상징'에서부터 리꾀르는 비판적 신뢰의 태도를 강조한다. 기존의 소박한 신뢰의 해석학은 실존적 전이해나 역사적 선판단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여 현재의 역사적 거리를 축으로 삼아 해석을 수행하고 이로부터 자기이해로 귀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의심의 해석학은 다양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전이해 구조나 선판단 구조 속에 은폐되어 있던 무의식적 충동, 권력의지, 비인격적 지배구조 등을 노출시켰다. 그러므로 리꾀르는 신뢰의 태도가 정당화되기 위해선 일종의 과학적 분석을 통한 객관성이 획득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면서도 구조적 심층분석은 다시 의미의 차원에서 해석되어야 하고, 이어서 반성을 통해 자기이해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리꾀르의 해석학은 전이해, 전이해에 대한 구조적 심층분석, 텍스트의 의미해석, 현상학적 반성에 의해 매개된 자기이해의 수순을 밟는다.

 두번 째로, 리꾀르의 해석학은 반드시 '현상학적'으로 규정될 필요는 없다. '현상학적 해석학'은 리꾀르의 해석학의 한 가지 주도적인 경향일 뿐이다. 오히려 다른 철학자들의 텍스트에 대한 리꾀르의 해석방법은 변증법적, 혹은 통합적이라고 규정해야 할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훗설은 칸트에 의해 상호 교정되고, 프로이드는 헤겔에게, 마르크스는 베버에게, 가다머는 하버마스에게, 소쉬르는 벤베니스트에게 서로 대립된 후 그 양극단 사이의 긴장과 갈등 안에서 새로운 승화의 기점을 찾는다. 이 때, 리꾀르의 변증법은 개념의 변증법이나, 대화의 변증법이 아니라, 각 철학자 자신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준거사태에 의거하여 일면적인 양극의 해석을 승화하는, 존재론적 변증법이다.

 세번 째의 특징은 앞의 두 가지 분석을 종합하는데서 드러난다. 즉 리꾀르의 해석학은 '진리와 방법'을 동시에 추구하는 해석학이다. 리꾀르는 인문과학이 학문으로 성립하기 위하여서는 객관성이 요구되는 동시에 행동하는 주체에 대한 개인적 이해가 가능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은 바로 전이해, 객관적 분석, 텍스트 해석, 반성에 의한 자기이해에 의해 획득된다고 보았다. 동시에, 이러한 역사적 이해가 진리의 상대성을 가져온다고 보지도 않았다. 텍스트의 해석은 준거사태에 의거하여 실재론적인 경향을 갖게 되며, 심지어 은유의 해석마저도 은유적인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인문과학의 설명과 자연과학의 설명이 다른 차원의 객관성을 가진다고 봄으로써 그는 통합적 인식론의 문제를 일단 포기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인식론적인 해명이 지연되고 있는 한, 진리의 개념이 모호해지며, 따라서 존재론에로의 돌파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리꾀르는 '존재의 유비'와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서 일종의 존재론을 시도하는데, 비록 이때마다 리꾀르가 가능태와 현실태의 개념을 사용하여 형이상학을 재건해보려 하지만, 그의 인식론적 입장과 진리의 정의가 해명되지 않고 있기에 결국 국지적인 해명에 그치고 만다. 이 점에서는 최근에 그의 연구가 점차 집중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네번째로, 리꾀르 해석학의 주요 관심사는 상징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상징에 대한 그의 연구는 현상학적 의지가 비의지적인 것과 만나 자신의 가유성을 인식하고 일단 해석학적 현실세계로 나와서 자신의 탓을 고백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이미 리꾀르의 해석학이 지니고 있는 신학적 경향이 드러난다. 리꾀르는 언제나 사실적 준거사태에 의거하여 자신의 해석학적 지평을 설정하는데, 그의 최종적인 해석학적 지평은 창조와 종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해석학은 신뢰의 해석학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신학적 해석지평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론적 지평이 획득되어야 하고, 그 존재론적 지평이 계시에 의하여 새로운 빛 안에 승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아마도 리꾀르의 가장 큰 내면적 갈등이었을 것이다. 초기의 리꾀르는 계시의 빛 안에 승화되어있는 존재론적 지평을 시학의 상징적 세계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상징과 은유의 해석에 몰입하게 된다. 상징의 연구는 밑으로는 꿈의 상징으로 내려가고, 위로는 신화의 상징을 거쳐 신앙의 상징으로 나아간다. 동시에 앞으로는 시적인 은유로 나아가고, 뒤로는 전승된 문화의 권위적 상징을 더듬는다. 여기서 그는 창조적 상상력과 공감에 의해 개방되는 새로운 현실세계를 준거사태로 삼는다. 그러나 시적 세계가 일종의 현실성을 갖는다면, '존재'의 의미가 선행적으로 밝혀져야 하는데, 그는 아직도 존재론적 판단이론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신화의 세계, 형이상학의 세계, 신학의 세계는 아직 엄밀하게 구별되고 있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리꾀르의 철학은 단지 해석학의 영역에 국한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서두에서도 보았듯이 리꾀르의 문제의식은 '현상학적 방법에 해석학의 문제를 이식하여 해석학을 통해 현상학을 혁신하므로써 실존이란 개념에 납득할만한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현상학에서 해석학에로의 이행은 인간 실존의 전모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는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을 충실히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리꾀르의 철학적 여정이 진행됨에 따라 인간의 실존은 현상학과 해석학만으로 완전히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님이 드러나고 있다. 리꾀르는 일단 자신이 직면한 객관성의 문제, 반성의 문제를 해석학의 영역에 이입함으로써 해석학 자체의 개념을 통합적으로 확장시켜왔다. 그러나 초기의 현상학적 분석은 점차로 약해지고, 구조적 분석과 분석철학적 경향이 강세를 보인다. 또한 초기의 방법론적 해석학은 점차로 변증법적 반성으로 변화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한 쪽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혁신하고자하는 존재론적 경향과,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의지의 시학이 제시되기 시작하는 듯하다. 이러한 모든 노력이 결국은 철학적 해석학과 신학적 해석학 사이의 반성적 다리를 놓는 것을 지향하게 될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형이상학이라는 개방된 철학과 은총이라는 개방된 현실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12.3. 인식론적 보완과 총결산



 지금까지 더듬어본 리꾀르의 작업은 해석학 내에 함축된 다양한 분야의 다층적 구조를 현상한다. 우리는 본 연구의 마지막 절에서 리꾀르의 반세기에 걸친 작업을 능력이 미치는 한도 내에서 총정리하고 부분의 연결이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며 그 전모를 드러내고자 시도해 보겠다.



 우선 리꾀르의 해석학에 등장하는 주요 요소들을 나열해보면, 외부적 세계, 체험, 의미구성, 본질직관, 언어, 이해, 텍스트, 자기이해, 진리, 존재론적 세계로 구성된다. 여기서, 외부적 세계는 준거성을, 언어는 구조적 형식을 가짐으로써 각기 객관성을 지닌다. 주관적이면서 구성적인 부분은 체험, 의미구성, 본질직관, 즉 현상학적 부분이다. 외부세계는 체험을 통해 표상으로 전이되며, 표상은 현상학적 판단중지를 통해 순수 현상이 되고, 현상은 자유연상을 통해 본질직관된다. 이해는 본질직관에서 개념화를 통해 문장으로 언표되는 부분을 다루고, 해석은 문장과 세계와 언어의 상호관계 안에서 전이해를 주제화시키는 작업이다. 이해와 해석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반성은 자기이해를 가져오고, 준거사태와 이해된 의미 사이의 정합성은 판단에서 진리를 제시한다. 판단작용 자체에 대한 반성은 형이상학적 세계를 개시하고, 상징작용에 대한 반성은 시학적 세계를 개시한다.

 이제 리꾀르의 해석학이 다루어온 내용을 살펴보면, 의지와 비의지의 계기를 통해 드러난 세계, 타자, 신체, 신화적 상징의 문제와 무의식의 계기를 통해 드러난 꿈의 상징, 프로이드의 충동적 시원학(고고학), 헤겔의 정신적 종착학(목적론), 승화에 따른 상징의 3단계, 이데올로기 비판을 계기로 해서 드러난 인간의 소외현상과 이데올로기 자체의 합법적 상징기능, 하버마스에서 부각되는 소속과 소격화의 관계, 비판과 유토피아의 관계, 구조주의에서 드러난 언어와 담론의 관계, 은유의 연구에서 보여지는 문장수준의 은유, 존재의 유비, 은유적 세계의 문제와 텍스트 해석학에서 나타난 인문과학의 방법론과 텍스트 개념 자체의 확장 등의 문제들이 망라된다. 이러한 제 문제들을 다층적으로 정리해보기로 하자.

 우선 합리적 신뢰의 해석학을 표방하는 리꾀르의 해석학은 그 전체지평을 창조와 종말 사이에 위치시키며 그 안의 모든 영역을 현실태로서의 현실로 파악한다. 이 때, 현실태로서의 현실은 존재의 유비에 의하여 다층적인 구조를 망라하면서도, 여전히 각 차원에 상응하는 현실성을 지닌 유비적 현실이다. 현실의 다양한 층에 상응하여 다양한 양식의 담론이 정립된다. 가령 일상언어의 담론은 생활세계에 상응하고, 과학적 담론은 현전세계에 상응하며 존재론적 담론이나 시학적 담론은 존재론적 세계에 상응하고 구조주의나 꿈의 담론은 무의식의 세계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은유나 상징은 존재의 유비작용에 상응하여 각 층을 넘나드는 작용을 한다. 그리하여 다층적인 현실세계는 각 담론의 형식에 의해 제한되면서도, 은유와 상징을 통해 개방되고 연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지평의 구조가 파악되면, 리꾀르의 다양한 작업은 이러한 역동적 구조를 드러내는 다양한 예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선 크게 보아서 이해의 전체지평은 하부에 무의식의 세계, 중앙부에 역사적 생활세계, 상부의 존재론적 세계로 대별될 수 있다. 이 삼중의 세계는 각기 꿈, 사회구조, 시를 통하여 의식에 전달되는데 이는 각기 소유욕, 권력욕, 가치욕이라는 본능적 갈망에 상응한 상징의 승화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해지평의 폭은 창조와 종말에 의해 규정되어 있고, 이해지평의 깊이와 높이는 충동과 정신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하부에 위치한 무의식의 세계는 심층심리분석을 통해 해독될 수 있다. 그러나 해석된 무의식의 의미는 승화를 지향하는 정신에 의해 균형을 잡음으로써만 그 전체적 함축성을 드러낼 수 있다. 중앙부에 위치한 역사적 생활세계는 소속과 소격화의 진자운동을 통해 왜곡된 사회구조를 비판함과 동시에 합법적인 권력의 긍정적 기능에 소속될 수 있다. 여기서 구조주의와 현상학, 비판이론은 사회 안의 각 상징들의 기능을 노출시킴으로써 비판적인 신뢰를 매개하는 객관성을 확보해준다. 의미론에서 제공되는 담론의 개념은 역사적인 모든 행위를 텍스트로 해석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인문과학 일반의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역사적 생활세계에서 인간의 자기이해는 악과 소외라는 현실에 직면한다. 여기서 정신은 의지를 발휘하여 시학적인 상부세계로 나아간다. 이러한 존재론적 세계에서 비판적 신뢰의 해석학은 은총의 현실과 교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리꾀르는 그의 전 저작 생활을 통하여 꿈의 담론, 일상적인 담론, 과학적 담론, 철학적 담론, 시학적 담론, 신학적 담론을 구별하여왔다. 그에게 있어 해석학이란 상징과 은유를 통하여 이러한 다양한 담론양식을 통합하는 이해의 작업이다. 그는 해석학이란 영역 안에 인식론적인 제반 작용, 즉 체험, 의미, 언어, 분석, 이해, 반성, 결정, 행동의 제양식을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작업 안에 판단이라는 핵심작용에 대한 자기이해가 주제화되지 않고 있음으로 해서 부분적으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이 아직도 전체적으로는 일목요연해지지 못하고 있는 약점을 지니고 있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본 연구자가 리꾀르에 대한 선별적이고 일견적인 글읽기만을 수행한 상태인지라 결코 최종적인 평가가 될 수 없다. 다음 기회에 따로 시간을 내고 관심을 배가시켜 리꾀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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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aul Ricoeur,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s, 'Existence and Hermeneutics',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4, p.3 '본문 그대로의 인용문이 아니라 요약문 형식으로 제시되었음.'

2 Husserl - Shorter Works, ed. P.Mccormick, Notre Dame Press, 1981.

3 모든 의식대상이 이미 어떤 이념적인 진리체계와 상관되어 있다는 것은 해석학적 선이해지평의 작용을 비주제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여기서 이념적인 진리체계란 훗설의 '논리연구'에서 드러나듯이 이미 판단된 명제들이 논리학적 원리들에 의해 상호 일관성있는 문맥구조를 형성하고 있음을 말한다. 훗설은 이념적인 진리체계의 논리적 상관구조를 현상학적으로 연구함으로써 논리의 선험성을 밝히려 했었다.

4 인식과정의 이념적 체계를 현상학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훗설 현상학의 본래적 과제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을 위해선, 우선 의식과정 자체를 현상학적으로 주시함으로써 의식과정의 구조에 대한 통찰을 얻어내야 한다. 그 통찰의 결과로 얻어낸 것이 바로 현상학적 방법 그 자체이다.

5 훗설에게 있어 체험작용이란 단지 보고, 듣고, 느끼는 등의 순수 감각적인 작용이 아니라, 시각표상, 청각표상, 감정 등의 이미지에 대한 직관작용이다. 그런데 이때 이미지들은 의식에 의해 직관을 통해 실재성을 받는 것으로 해석됨으로써 의식내 '현상'으로 간주된다. 실재론은 이미지들을 감각적 이미지라고 명명함으로써 그 실재성의 원천을 외부적 세계에 두는데 비해 훗설은 이미지들이 직관되었다고 보아 그 실재성의 원천이 의식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감각과 지성을 매개하는 것이므로 감각적 실재성과 지성적 실재성을 유비적인 의미로 공함축하는 것인데, 훗설의 경우, 직관작용만 강조함으로써 판단과정에서도 다시 외부적 실재로 나가는 것이 힘들게 된다.

6 훗설은 여기서 스콜라 철학의 '통각작용'(common sense)을 지시한다. 그런데 칸트는 이러한 통각작용의 원천이 '나는 생각한다'라는 의식내 통일성의 원리라고 지적한 바 있다. 훗설은 여기서 통각작용의 연속적 계기에 주목함으로써 의식의 내적 시간성을 주제화한다. 다양한 이미지들의 흐름을 통각화하는 현상 안에는 지성의 비교분석작용과 종합작용이 수행되고 있다. 내적 시간성 안의 비교분석과 종합작용은 법주화와 세분화의 근거이며, 동시에 전체성으로서의 '사고하는 자아'를 전제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이해지평의 전체와 부분의 순환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7 의식의 통각작용을 고려할 때, 의식대상은 이제 하나의 범주화된 영역으로 파악되고, 현상은 오히려 이 영역을 드러내는 다양한 의식작용으로 파악된다. 이리하여 훗설의 '현상'개념은 감각적 이미지들로부터 이미지를 표상화해내는 의식작용으로 이행하게 된다. 이리하여 이제 현상학적 방법은 내적 구성의 원리로 파악된다.

8 훗설은 의식내 자기명증성을 판단척도로 하여 현상을 사물에 대해 우위성에 두는 가치판단을 시행한다. 이러한 가치판단의 가능성의 조건은 사물도 의식에 의해 현실성을 부여받는다는 전제이다. 현상이나 사물이 공히 의식에 의해 현실성을 부여받는다면, 명증성을 추구하는 철학은 의식내 현상을 보다 우월한 자료로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감각적 현실성과 의식내 현실성은 그 차원이 다르며 서로의 관계는 단지 유비적이라는 사실이다. 리꾀르는 '악의 고백'에서 현출되는 고통과 좌절의 현실은 의식 외부의 '비의지적인 것'의 실재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현상학은 의식내 현실성과 감각적 현실성을 구별하여야만, 외부세계와 공동주체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9 우리가 감각적 현실과 의식내 현실을 유비적으로 구별하며 이해할 때, 자연적 태도와 현상학적 태도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임을 알 수 있다. 사물에 촛점을 맞추는 태도나, 의식작용에 촛점을 맞추는 태도나 공히 지향성 구조에 귀속하는 동일한 태도이다. 단지 그 차이는 의식대상의 질적인 차이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성은 단지 자연적 태도와 현상학적 태도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꿈, 신화, 시학, 언어학, 상식, 수학, 자연과학, 인문과학, 형이상학에서 역시 서로 상이한 의식대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때 현상학적 태도는 주체성의 철학을 위하여 탁월한 우월성을 갖는다. 그리고 다른 모든 대상영역이 역시 의식내 구성과 반성을 거쳐 정립되는 것인한 영역적 비교우위를 갖는다. 그러나 '존재의 유비'를 고려하는 형이상학에 의해 보완되지 않는 한, 현상학적 태도는 주체성의 철학에 갖히고 말게 될 것이다.

10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반성은 표상으로의 복귀(redutio ad phantasma)와 자신에로의 복귀(redutio ad se)라는 두 가지 작업을 수행한다. 전자는 있는 그대로의 사태에 대한 준거적 검증작업이고 후자는 인식하는 사고의 자기점검 작업이다. 준거적 검증작업을 통하여 사고내용과 준거사태 사이의 적절성 여부가 판단되고, 사고의 자기점검 작업을 통해 판단된 진리가 자기 안에 적응됨으로써 자기이해에 도달하는 것이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헤겔은 후자의 작용만 강조했기에 독일 관념론의 전통은 순수반성만을 획득하려 하였고, 사태적 반성은 망각하게 된다. 훗설은 현상학적 반성에서 양자의 작업을 다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사태적 반성도 의식에 의해 현실성을 얻는다고 보았기에, 사태적 반성의 감각적 현실성이 주제화되지 못하고 있다.

11 Husserl, Ideas, translated by B. Gibson, Collier books, Newyork, 1962(1913).

12 선험적 자아란 선험적 의식대상의 상관자이다. 그러나 사실을 보자면, 경험적 의식대상의 형상적 추상에 의해 선험적 의식대상을 얻었다고 해도, 그 의식주체 자체가 선험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의식주체는 여전히 시간성 안에서 사고작용을 수행하는 동일한 사고주체이며, 단지 선험적 의식대상의 상관자로서 반성적으로 파악되는 재귀목적격 자아만을 선험적 자아라고 부를 수 있다.

13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본질이란 본래 형상(종차)과 그 질료적 원리(유)를 포함하는 사물의 하성을 의미한다. 그에 반해 현상학적 본질이란 단지 형상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이라기 보다는 플라톤의 이데아, 헤겔의 개념에 가깝다. 그런데 본질적 가능성으로서의 이념은 자신의 공동질료적 원리에 의해 한정되고 분절되어 하나의 범주 안에 머물게 된다. 여기서 범주와 다양한 형상 간에 하나의 해석학적 순환관계가 성립되어 부분과 전체가 서로를 규정하고 교정한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방법은 3가지 직관에 의해 형성되는데, 현상에 대한 체험적 직관, 형상에 대한 본질직관, 그리고 형상들 간의 관계에 대한 범주적 직관이 그것이다.

14 전통 형이상학의 추상은 표상에서 질료성을 제거함에 따라 보다 높은 형상성을 얻어내는 방법절차인데 비해, 현상학의 자유변형은 상상에 의해 형상의 한계영역을 구별하는 방법이다. 자유변형은 추상에 비해 보다 많은 표상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으나, 의식주체의 반성력에 따라 피상적인 심리적 연상에 그치고 말 수도 있다.

15 현상학은 체험에서 현상을 얻어내고, 현상에서 형상을 얻어내고, 형상에서 범주를 얻어내곤, 이 범주가 체험에서 현상에 부여된다는 논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논법은 칸트의 선험철학이나 무의식의 지층구조를 탐색하는 구조주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지를 일반화하는 것에는 준거사태가 저항한다. 객관성의 문제에 있어 범주적 선험성과 형이상학적 준거성은 양자가 공히 상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 반대입장이다. 이것이 관념론과 경험론의 인식론으로 대립된다. 비판적 실재론은 양자를 상응과 합치에서 설명하는데, 이때의 연결개념은 존재의 유비성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명확한 해명은 아직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앞으로의 연구가 요구되는 논점이다.

16 Ricoeur, Phenomenology and Hermeneutics, Hermeneutics and Human Sciences, 1981.

17 상게서, p. 114.

18 현상학은 체험, 현상, 본질직관, 범주적 직관에 의하여 의미를 분절하고 개념화하여 언어로 표명하는데까지 나아간다. 해석학은 이렇게 얻어진 의미 안에 간직된 예-구조를 해석을 통해 주제화함으로써 전이해지평에 대한 자기이해에로 나아간다. 여기에 준거사태에 대한 검증작용까지 첨가되면, 우리는 거의 완전한 판단이론을 구성할 수 있게 된다.

19 현상학과 구조주의적 기호학과 의미론 간의 명확한 구별이 필요하다. 현상학적 방법은 의식작용을 의식대상으로 삼은 지향성 분석에 의해 성립된다. 구조주의 기호학은 선험적인 언어구조를 의식대상으로 삼은 구조분석에 의해 성립된다. 따라서 현상학은 주로 의미구성을 탐구하고, 구조주의는 선험적 범주 구조를 탐구한다. 의미론은 명제단위의 담론에 대한 의미해석을 다루므로, 이미 해석학의 영역에 들어간다.

20 판단중지는 반성적 자아가 객관적 현실성에 방해받음 없이 주관적 현실성 안에서 의식작용만을 집중적으로 검토할 수 있게 하는 방법론적 절차로서 유효하고 유용하다. 그런데 그것은 사태적 필연성에서 요청되는 태도가 아니라, 단지 방법론적 효용성을 고려한 잠정적 태도로서만 유효하다.

21 역사로부터 거리를 취함이란 참여의 해석학에서도 객관적 주제화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인데, 하이데거는 이를 배시라고 부르고, 가다머는 이를 역사적 거리로 본다. 하버마스는 이를 소격화라 하는데 소격화란 개념에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의구심이 함축되어 있어 배시의 한 가지 특수한 양태로 평가될 수 있다. 즉 배시는 기술적 묘사인데 비해, 소격화는 가치판단된 개념인 것이다.

22 이 문제는 주석 19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23 여기서 리꾀르는 예기, 예시, 예파에 의한 배시구조를 의미분절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

24 Ricoeur, Husserl,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67, p.213-233.

25 '의지의 현상학'은 훗설적 기획의 충실한 후속작업이자, 자유결단을 강조하는 실존철학에 대한 비판적 검증이다.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는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가? 기투의지의 무한성이 상황의 유한성 안에서 불안, 좌절, 구토만 일으키는 것인가? 리꾀르의 신념의 해석학은 유한성과 무한성의 변증법적 대립이 현실 안에서 어떻게 승화되는가를 밝히려는 철학이다.

26 Ricoeur, Husserl, p.221.

27 상게서, p.228.

28 상게서, p.232.

29 리꾀르, 악의 상징, 양명수 역, 문학과 지성사, 1994(1960), p.325.

30 상게서, p.329.

31 상게서, p.330.

32 사고는 자신의 전이해를 신뢰한다. 그러나 이 신뢰가 맹목적이지 않으려면, 탈신화화나 선험적 연역과 같은 비판적 방법을 통해 자기 신뢰의 객관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비판적 신뢰가 바로 리꾀르의 신뢰의 해석학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33 폴 리꾀르, 악의 상징, 양명수 역, 문학과 지성사, 1994(1960), p.322

34 공감의 문제는 현상학의 비판에서 간주관성의 문제를 다루며 간략하게 살펴본 바 있다. 해석학에서 공감의 문제는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제기되었다. 앞으로 보게 될 것이지만, 리꾀르는 텍스트 해석학에서 저자의 의도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명확하게 거부하였다. 그런데 그는 시학적 텍스트에 대한 상상력과 공감을 이해의 수단으로 제시하고 있다. 공감과 동정의 문제는 시급하게 해명되어야할 철학적 핵심작용이다.

35 여기서 인간의 자기소외는 사회적 생산관계나 무의식의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간의 상호관계에서 실존범주적으로 제시된다. 인간소외가 실존적인 현상인 한, 그것은 무의식의 개성화나 생산관계의 변혁을 통해 지양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상태 자체의 승화에 의해서만 지양될 수 있다. 그러기에 리꾀르는 은총의 현실과 신뢰의 태도를 중시하는 것이다.

36 상게서, p.147

37 리꾀르는 상징과 은유의 유비성을 지적함으로써 존재의 유비를 통하여 시학적인 존재론의 세계를 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제가 바로 그의 '의지의 시학'의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38 상게서, p.26

39 상게서, p.322

40 프로이드는 체험되어 억압된 개인적 무의식만을 설정하지만, 융의 무의식은 개인적 무의식과 본능적 충동 외에도 집단적 무의식을 상정한다. 집단 무의식은 레비 스트로스의 '원시적 마음'이나 엘리아데의 '종교현상학'과 유사한 원초적 집단형상, 즉 원형이다. 그런데 융의 집단무의식은 아니마, 아니무스, 현자와 같은 스스로의 인격성을 지닌 자율적 생명원리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영적인 세계에 열려있는 무의식이다. 따라서 융의 체계 안에서는 무의식이 단지 억압된 그림자의 영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신화적이고 존재론적인 존재의 세계를 포함한다. 여기서 존재 자체는 의식 내부의 실재인지, 외부의 실재인지가 모호해진다. 이런 문제점이 있다 하더라도, 융은 개성화에 의해 양극으로 세분된 의식의 통합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리꾀르의 해석학과 가장 큰 유사성을 지닌다. '프로이드'에서 리꾀르는 융의 심리학이 영혼과 같이 정리되지 않은 개념을 사용하므로 자신은 프로이드를 더 선호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그는 융의 상징수법을 크게 오인한 것이다. 융의 개념들은 무의식적 실재를 지칭하므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상징적 개념이고 변형의 원형에 상응한 유동적 개념들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41 종래의 해석학적 순환은 부분과 전체의 원순환이었으므로 논리적 모순처럼 보이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리꾀르는 부분과 대립부분을 양극에 설정하고, 양극 사이의 긴장된 갈등을 승화함으로써 지평자체의 상승-지평 내의 융합이 아닌-을 발생시킨다. 여기서 전체 자체가 새롭게 조망됨으로써 부분과 고정된 전체의 원순환은 부분과 열려진 전체의 나선형적 순환으로 상승해 올라가는 것이다.

42 프로이드에 의하면 무의식적 충동은 초자아의 검열을 통해 억압된다고 한다. 여기서 무의식은 꿈을 통해 나름대로의 반란을 일으키지만 그 메시지는 이화작용을 통해 검열불가능한 암호가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신화적 상징은 존재체험에서 유래한 의미의 잉여분이 1차적 의미를 2차적 의미로 넘어가게끔 스스로 넘쳐난다. 여기서 유비에 근거한 동화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은 충동과 의미잉여라는 두 가지 계기를 가지며, 하나는 심층으로 내려가야 해독되고, 다른 하나는 목적론적으로 상승해야 파악된다. 그런데 충동과 의미잉여가 동일한 상징 안에서 작용하는 양극이라면 동화작용과 이화작용은 승화작용에 의해 지양되고 종합될 수 있는 것이다.

43 프로이드는 물리학적 에너지 불변의 법칙(제1법칙)과 엔트로피의 법칙(제2법칙)에 의거하여 심리적 에너지의 변환구조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이것은 물론 입증불가능한 가설-에너지 법칙 자체가 가설이다-이며, 심리학에 거시적 물리법칙과 경제법칙을 유비적으로 설정하여 대입한 것이다. 결국 프로이드의 원인론적 설명은 만일-그렇다면 형식의 가설에 근거한 것이며, 그 때의 만일들은 결코 입증될 수 없는 것이다.

44 이 표현은 리꾀르 자신의 표현이다. 두 묶음의 카드를 양손에 쥐고 아래로부터 손을 털어내 골고루 섞은 뒤 위로 약간 들어올려 완전히 하나로 퉁겨들어가는 모습을 연상해보자. 여기에 변증법적 글읽기에 대한 은유가 숨어있다.

45 여기서 Archeology는 고고학으로 해석해도 의미는 통하지만, 존재의 근거인 arche에다 logos를 부여하는 어원적 의미에서 시원학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대응하는 teleology는 목적론이 보다 매끄러운 해석이겠지만 시원학에 대비하여 종착학이라고 해석하는 억지를 부렸다. 시원학은 인과론적인 환원이란 함축의미를 지니고, 종착학이란 목적론적인 기투라는 함축의미를 지닌다. 이에 따라 과거와 미래, 심층과 상층, 원인과 결과라는 의미들을 함께 함축한다.

46 프로이드는 전이를 치유를 위해 필수적인 과정으로 보는데 비해 융은 전이가 없이도 치유가 가능하다고 본다. 아뭏든 양자의 경우에 공히 리꾀르가 중시하는 간주관적 대화와 상호인정과 자기이해라는 인격적 관계가 작용한다.

47 인식론적으로 설명은 이해를 전제한다. 이해된 형상은 종적으로 볼 때 원인을 제공하고, 가능성으로 볼 때 목적인을 제공한다. 여기서 리꾀르가 '이해되지 않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프로이드의 원인론적 설명이 충동의 형상적 파악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48 리꾀르는 승화의 작용을 상세하게 묘사하면서도 승화의 가능성의 조건을 명료하게 밝히지는 못하고 있다. 승화는 충동 자체의 단계적 변형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충동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본능적인 충동에서부터 간주관적 권력욕, 진리를 향한 지식욕, 선을 향한 가치욕, 그리고 존재 자체를 향한 초월욕 등의 단계적 변환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보인다.

49 각주 48의 논의에 근거하여 헤겔의 정신은 역사내 초월욕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렇게 정신을 충동의 변형으로 봄으로써 기원학과 종착학이 단일한 지평 내의 양극으로 설정될 수 있다.

50 Paul Ricoeur, Freud and Philosophy: An Essay on Interpretat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70(1965), P.499

51 상게서, p.505

52 과연 리꾀르는 상징의 단계를 충동원리로 설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충동은 단지 3단계로 구성되는 것만은 아니며, 시적 상징이 가치욕에 상응한다는 설명은 매우 의심스럽다. 가치란 선에 상응하며, 그것은 전통적으로 윤리적 영역에 속하는 개념이다. 의미의 창조는 역시 초월욕에 근거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키에르케가드에서 보듯이 가치욕의 좌절이 초월욕의 도약을 자극한다. 도덕심은 신앙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53 리꾀르는 소유욕, 권력욕, 가치욕이 모두 좌절하면서 진리욕이 의지를 자극하여 '의지의 시학'이 전개됨을 묘사한다. 이것은 상징의 삼단계가 욕구의 삼단계에 상응한다는 주장과 모순되면서 주석 52의 주장을 입증한다. 그러나 이러한 묘사는 아직도 진리욕과 초월욕에 대한 주제적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 듯이 보인다. 존재론적으로 볼 때, 진, 선, 미가 모두 초월적 범주인 것은 사실이나 초월욕은 진리 자체, 선 자체, 미 자체, 존재 자체를 욕구하는 충동이므로 진리욕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54 상게서, p.525

55 상게서, 525쪽

56 언어는 해석학의 지평이지, 이해지평 그 자체는 아니다. 이해지평은 존재 가능한 모든 것에게 열려있는 초월적 존재지평으로 여기서는 언표불가능한, 즉 분절불가능한 의미충만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언어 자체는 한 문화권 안에서 이미 분절되어 체계화된 의미단위의 기호 집합이므로 기호화된 텍스트를 다루는 해석학의 지평으로 작용한다.

57 Hermeneutics and the human sciences, 1981, Cambridge University Press

58 슐라이어마허 이전의 성서 주석학이나 문헌학적 해석학에서 해석의 문제는 텍스트의 이해가 난관에 부딪히는 특수 경우에 대한 해석방법과 규칙을 다루었다. 이에 대해 슐라이어마허는 모든 텍스트가 언어의 보편성에 의해 성립되었으므로 이해의 일반이론을 다루는 보편적 해석학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59 언어는 그 자체로는 보편적인 체계이지만, 작가의 정신 안에서 개별화되어 창조적으로 형성되는 역사성을 갖는다. 작가에 의해 개성화된 언어는 기존의 언어체계에 편입되고 축적되어 한 언어권 내의 공동체적 세계관으로 보편화된다.

60 작고한 강 돈구 교수의 '보편적 해석학의 기초로서의 언어와 사유'는 슐라이어마허의 심리적 해석이 저자와 독자의 직접적인 공감적 일치가 아니라 언어를 매개로 한 추체험의 결과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결국 심리적 해석도 텍스트 해석학의 영역 내에서 수행되는 것이다.

61 딜타이의 생의 개념은 그 안의 모든 부분이 유기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는 살아있는 전체이며 역사적으로 흘러가는 지속적인 삶을 의미한다.

62 거듭 지적되는 사항이지만, 리꾀르는 상징의 해석에 있어 '상상력과 공감'의 활용을 역설한 바 있다. 동시에 그는 비판적, 혹은 구조적 객관화를 통한 비판적 신뢰의 해석학을 주장한다. 공감과 객관화의 관계는 명확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이에 반해 슐라이어마허는 객관적 매개가 생생한 의미를 완전히 전달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배시가 분위기 안에서 전개됨을 보여주었다. 텍스트를 읽어나갈 때 형성되는 독자의 분위기는 공감적 예감을 통해 전이해의 문맥을 더듬어 배시의 방향을 열어준다. 그렇다면, 심리적 해석은 객관화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 아닌가?

63 기투로서의 전이해는 어디까지나 질문으로서의 존재지평이다. 그렇다면 기투로서의 유의의성은 단지 의미와 존재에 대한 갈망이며 감각이지 선지식은 아니다. 오직 존재자가 체험되고, 분위기안에 배시되고, 의미가 직관되어 개념화되고, 존재를 고려하며 반성되어 판단될 때, 우리는 존재에 대한 선지식을 갖게 된다. 즉 일단 해석학적 순환을 한바퀴 돌고 나서야 다음 번 기투에 존재에 대한 선판단을 갖게 되는 것이다.

64 하이데거는 용재적 이해를 전재적 이해보다 우위에 두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용재적 이해에도 '로서'구조가 작용함으로써 기초적인 객관화가 수행된다. 이것이 기호라는 매개를 통해 언어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재적 이해와 전재적 이해는 객관화의 정도 차이에 불과할 뿐이지 근원적인 차이는 아니다. 더우기 언어의 매개가 없으면 이해의 궁극적 목적인 반성적 자기이해는 획득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용재적 이해에서 전재적 이해로의 이행은 이해의 발전과정이다. 하이데거는 자기이해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도, 전재적 이해를 평가절하하는 모순을 지닌다.

65 주관과 객관의 분리는 지향성 구조 자체 안에서 의식작용의 활성화를 위한 양극으로 전제된다. 그것은 진리를 향한 판단작용 안에서 주체적으로 종합되며, 선을 향한 행동 안에서 객관적으로 종합됨으로써 인간의 인격적 자기실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전제이다. 즉 분리는 실재적이며, 그 종합도 실재적이고, 양자는 인격적 자기실현이란 통합과정의 실재적 계기들이다.

66 상게서, p.59.

67. Ricoeur, Conflict of Interpretations, p.10.

68 Gadamer, Wahrheit und Methode, Tubingen, 1972, p.250-360.

69 딜타이의 영향을 받은 가다머는 전체를 역사과정으로 설정한다. 그는 하이데거에게서 경험적 전이해의 개념을 도출하였으나, 이로 인해 선험적 존재지평이 망각되게 된 것이다. 이해의 전체지평이 역사로 한정될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진리의 상대주의를 초래한다. 오늘날 역사의식의 각성이 패러다임 변화, 인식론적 단절, 역사주의와 같은 상대주의로 나아갈 때 철학은 이해의 전체지평의 초월적 영역을 밝혀야만 한다.

70 Gadamer, Wahrheit und Methode, 1972, p.289.

71 Ricoeur, Hermeneutics and the human sciences, 1981.

72 Paul Ricoeur, Lectures on Ideology and Utopi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6, p.2

73 포이에르바하는 헤겔의 관념론은 감성적 직관은 없고 물질적 현실을 개념을 통해서만 본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종교나 철학의 무한자란 개념은 단지 감각적 소여의 신비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참된 신으로 제시되는 인간(homo homini deus est)이란 사실은 감각적 신체에 불과하다. 그의 무신론적 인간학은 유물론이란 개념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74 마르크스에게 있어 현실이란 생산관계 속에 노동하는 인간의 자기소외이며 이에 대한 사회구조적 환상체계가 이데올로기이고, 이에 대립한 비판과학이 역사적 유물론 체계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 이론의 핵심은 자기소외 의식과 해방의 갈망이 어떻게 유물론적일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자기소외라는 현실에 대한 가치판단과 해방에 대한 의지가 물질적인 양의 축적에 의해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그의 물질개념은 질적인 변화를 신비롭게 내포한 생명개념인가? 아뭏든 그의 물질개념은 과학적 원자주의보다는 고대 그리스의 물활적 생명개념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것은 자명한 전제가 아니라 새롭게 이해되어야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인 것이다.

75 예언자는 과거의 원체험을 상기시킴으로써 인간의 기대구조를 변화시켜 인간의 실존적 현실을 전환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마르크스도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언한다기 보다는 과거의 원시공동체의 체험을 상기시킴으로써 인간의 기대구조를 변화시켜 현재의 생산구조를 변혁시키려는 것이 본래의 의도였다. 이러한 비판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예언자(비판자)는 기존의 역사적 지평과는 상이한 가상의 지평을 설정하고 자신을 먼저 그 지평 안에 위치시켜야 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유토피아적 입장이다. 유토피아적 입장은 역사의 방향을 재정향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작용을 한다.

76 상게서, p.63

77 리꾀르의 마르크스 해석은 인간을 물질로 환원하는 것을 유보한 글읽기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후기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인간학은 전기 인간학과의 인식론적 단절을 수행한 것인가? 이것은 알튀세에서 다시 제기되는 문제이다.

78 리꾀르는 베버와 게렛쯔의 입장에 의존한다. 상게서, p.181-215, 254-268 참조.

79 프로이드는 문화가 성적 충동의 희생을 통한 보상으로 성립된다고 본 데 비해, 마르크스는 문화란 생산관계의 자율적 발전결과라고 본다. 리꾀르는 문화란 가치욕구의 실현에 의해 달성되며 이데올로기는 가치에 대한 동의에서 성립한다고 본다. 그는 문화를 희생과 소외에서 파악하기 보다는 희생과 소외를 승화하는 상징작용에 의해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다.

80 공공선으로서의 사회적 상징은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사회기구의 총체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그것은 사회구성원의 사회에 대한 신뢰에 상응하는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것이다. 사회적 상징이 건전하고 창조적일 때 그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집단 이기주의적으로 병들 때, 그 사회는 몰락하고 쇄퇴해간다. 그렇다면 결국 사회적 상징은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민감성, 지성, 합리성, 책임성, 정감성의 정도에 상응하며 상호순환하는 이념으로서의 사회적 전체를 구성한다.

81 Habermas, Knowledge and Human Interest, Boston, Beacon Press, 1971, p.28

82 Paul Ricoeur, Lectures on Ideology and Utopi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6, p.223.

83 음성의 일련의 조합양식과 그것이 나타내는 의미-여기서는 준거사태와 무관하게 음성기호의 상관자로서의 의미-사이의 관계는 자연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임의적인 것이며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관습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가령 한문의 문자기호는 본래 자연의 형상을 본 딴 것이고, 그렇다면, 본래 간략화된 그림인데 그 그림은 의미뿐만 아니라 지시체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음성기표와 기의에서도 가령 엄마, 마마, 마더, 메르, 무터 등 유사한 발음이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는가? 이에 대한 반론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현재의 음성체계는 자음과 모음이 문자로 정립된 후, 한정된 발음체계를 갖춤으로써 자의성을 증폭시켰다는 점에서 통시성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구조화되기 이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84 공시적 연구는 언어의 보편적인 규칙성을 연구하며, 통시적 연구는 언어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연구한다. 통시적 현상은 개별적이므로 체계의 변화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에 반해 가령 고대 불어에 대한 공시적 연구는 시대와 장소에 무관하게 여기 저기 산재해있는 각 고유 언어에 내재한 항구적인 원칙을 드러낼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공시적 연구는 통시적 연구를 위한 일반적 진리를 제시해준다.

85 장 삐아제, 구조주의의 이론, 김태수 역, 1990(1968), 서울, 인간사랑, p.20-21.

86 리꾀르는 구조주의를 학문체계라고 했지, 철학체계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구조주의를 인문과학의 객관성을 확보하는 인문과학적 방법론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역사적 개체로서의 부분과 초월적 지평으로서의 전체 사이의 순환문제로 인해 인문과학적 방법론의 완결은 해석학에 의해 수행되어야만 한다고 본다.

87 리꾀르는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무의식'이란 프로이드식의 억압된 충동이 아니라, 칸트적 의미에서의 선험성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레비 스트로스의 '무의식'이란 레비 브륄의 원시 심상(representations collectives)이나 융의 집단 무의식과 더 유사하다. 레비 브륄의 '원시 심상'은 주관과 객관이 통일되어 있는 유기적 단일체로서 주술적, 신화적, 제의적 상징을 만들어내는 공동체적 심상이다. 융의 집단무의식은 진화의 결과에 따른 선험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융은 이런 설명을 가설의 수준에서 제시한 바 있다-원형들이 스스로의 인격성도 갖는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적 폐쇄체계와는 명확히 다르다. 레비 스트로스의 '무의식'은 가능성의 조건이란 의미에서의 선험성이라기 보다는 인류의 본성을 지시하는 선천성을 의미하는 것 같다.

88 구조주의의 전제가 되는 기표와 기의 간의 자의성, 연구의 공시성, 구조의 폐쇄성과 선천성의 가설들은 하나 하나 엄밀하게 논구되어 입증되어야 한다. 아직까지 이들 전제는 추론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리하여 자의성과 자연성, 공시성과 통시성, 폐쇄성과 개방성, 선천성과 역사성 간의 영역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구대상 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있다. 구조주의 연구대상이 되는 대부분의 구조들(언어, 사회구조, 친족체계 등)은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 선천성과 그 소산인 문화의 역사성 간의 상호관계에서 파생한 2차적 선천성일 뿐이다.

89 하버마스는 실증적 자연과학, 이데올로기적 인문과학, 해방적 비판과학을 구별했다. 이에 비해 알튀제는 경제법칙의 무의식적 규칙들만이 객관적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모든 학문은 인간중심적 표상체계를 사용하므로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반-이데올로기적 이론의 약점이 드러난다. 남의 약점에 대한 비판이 곧바로 객관성을 확보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환상을 깼다고 해서 현실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환상은 집요하게 변형하며 새로운 상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참다운 비판은 비판을 하고 있는 자신의 반성작용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는데 있다. 객관성은 비판작용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자기비판과, 초연한 사태 직시에서 획득되는 것이다.

90 경제학적으로 볼 때, 상품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수요와 공급에 따른 시장가격이며, 이 시장가격에 대해 대체가능한 노동 및 노동의 질, 자본 및 투자, 기술혁신의 한계생산성이 계산되어 나온다. 이에 따라 생산성의 최적화를 도모하는 것이 경영이고, 이 때, 노동의 인간적 요소를 고려하는 부분이 노조 및 인사관리이다. 여기서 상품가치를 노동생산성으로만 결정하려는 잉여가치설은 비현실적인 시장모델에서 도출된, 적용불능한 가설이다.

91 알튀세의 과학개념은 마르크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구조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를 하나의 단일한 체계로 보고, 그 안에서 작용하는 무의식적 구조에 대한 지층탐사에서 도출된 것이다. 그런데 리꾀르는 구조주의가 과학임을 인정한 바 있다. 여기에는 모순이 존재하는가? 구조주의는 언어라는 기층탐사에서 시작되어 원시적 심성이라는 중층탐사로 나아가, 사회전반에 대한 다층탐사를 수행했다. 그런데 지층이 증가함에 따라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원리가 통시적 실증성에 의해 의심받게 된다. 공시적 무의식 구조와 통시적 문화 축적 사이에는 진화론적 결정원리 보다는 역동적 상호작용의 원리가 작용한다. 구조주의가 객관적인 과학이기 위해서는 공시성과 통시성 사이의 관계를 연구함으로써 역동적으로 열린 개방체계를 구성하여야 할 것이다. 리꾀르 자신이 바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간다. 다만 명확히 지적하지 않았을 뿐이다.

92 Ricoeur, Lectures on Ideology and Utopia, p. 154.

93 상게서, p. 157.

94 Ricoeur, The Conflict of Interpretations, 'Structure, Word, Event,' p.95.

95 Aristotle, The Basic works of Aristotle, ed. Richard Mckeon, New York, 1941, p.1476 (1457b 6-9)

96 상게서, p.1479, (1459a 5-8)

97 Ricoeur, The Rule of Metaphor, 1977(1975), Routledge and Kegan Paul, London, p.133.

98 상게서, p. 219.

99 Ricoeur, Hermeneutics and the human sciences, 'What is text?', p.145.

100 상게서, p. 208.

101 상게서, p.197.

102 상게서, p. 159.

103 상게서,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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