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cle Bank

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7/06/25 (09:07) from 84.173.192.36' of 84.173.192.36' Article Number : 519
Delete Modify 리오타르 Access : 5925 , Lines : 63
신체없이 사유가 지속할 수 있는가?




◎ 발행호수:008
◎ Volume:1995년 겨울


[특집] 신체없이 사유가 지속할 수 있는가?   


신체 없이 사유가 지속하는가?*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남성

철학자 여러분은 해답이 없는 질문들, 철학이라는 이름에 걸맞으려면 해답이 없어야 하는 질문들을 제기한다. 여러분에 따르면 해결된 질문들이란 기술(技術)적 문제들일 뿐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기술적 문제들이 철학적 질문들로 오해를 받은 것이다. 여러분은 대답이 완전히 불가능해 보이는 다른 질문들로 방향을 돌린다. 오성(悟性)에 의한 정복 시도는 어떤 것이든 반드시 거스르는 질문들 말이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여러분은 첫번째 질문들이 해결되면 그건 그 질문들이 잘못 정식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러분은 기술적 과학이 해결했다고 믿는 문제들이란 사실상 부적절하게 다루어졌을 뿐이며 그 질문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제대로 정식화되어야 한다고 계속 간주하는 특권을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여러분에게 해결책들이란 환상들일 뿐이고, 존재(being)에 걸맞은 완전함이나 그와 같은 것을 지니지 못하는 실패들일 뿐이다. 참을성 만세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회의를 영원히 지속하려 한다. 하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의 우유부단 때문에 독자들을 다 없애버리게 되어도 놀라지는 마시라.
하지만 이런 일들은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이에 태양이 늙어가고 있다. 태양은 45억년 후에 폭발할 것이다. 태양은 예상 수명의 반 지점을 약간 넘어선 상태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여든 살이라고 놓고 보면 40대 초반에 접어든 셈이다. 태양의 죽음과 함께 여러분의 풀 수 없는 질문들도 끝장나게 될 것이다. 그 질문들은 끝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완벽하게 정식화된 상태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이제 그런 질문들을 제기할 장소와 이 일을 수행할 근거 둘 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에 대해 여러분은 무엇이든 순수하고 단순한 끝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끝은 한계이며, 한계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 한계의 양쪽에 동시에 서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나버린 것 또는 유한한 것이 끝난 것으로 사유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유 속에서 영속화되어야 한다. 자 이 말은 사유에 속하는 한계에 대해서는 옳다. 그러나 태양의 죽음 이후에는 자신의 죽음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릴 사유란 없게 될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유일하게 심각한 문제이다. 이와 비교해보면 다른 모든 문제는 사소하게 보인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해결을 연기하는 에너지를 도출하고 있는 이 무한한 비축물이 죽어 없어지게 되면, 다시 말해서 추구로서의 사유가 태양과 함께 사멸하고 나면 전쟁들, 갈등들, 정치적 긴장, 여론의 변동, 철학 논쟁들, 심지어는 정념들과 같은 모든 것도 이미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어쩌면 죽음이란 말은 적절한 낱말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앞으로 오고야 말 불가피한 폭발, 여러분의 지적 작업들 안에서 언제나 잊혀지고 있는 그 폭발은 어떤 면에서는 그 작업들을 사후적으로 만들기 위해--그것들을 헛되게 하기 위해--사전에 오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나는 여러분이 자신의 저작들에서 지워 없애 버린 것, 즉 물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몇 번이고 끝없이 창조되고, 파괴되고, 재창조되는 에너지의 배열로 간주되는 물질 말이다. 그것도 미립자 및/혹은 우주적 규모로 말이다. 나는 낯익고 믿음직한 지상 세계나, 혹은 자신의 대상들에 대한 사유의 믿음직한 초월적 내재성--눈이 가시적인 것, 또는 자신의 위치해 있는데(situs)서 습관적인(habitus) 것을 초월하는 방식과 유사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45억년이 지나면 여러분의 현상학과 여러분의 유토피아 정치는 종말을 맞게 될 것이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종을 치거나 그 종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정열적이고 끝없는 질문 제기가 지상적 생명(earthly life)의 은밀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정신의 생명'에 언제나 의거하고 있었음을 이해한다 한들 이미 때가 늦을 것이다. 그 생명은 인간적이므로 정신적이며, 지상적이므로 인간적인 생명 형태요, 생명체 중의 생명체인 지구로부터 온다. 사유는 아주 정교하지만 분명히 지상적인 존재에 대한 육체적, 감각적, 감정적, 인식적 경험으로부터 그 지평과 정향, 그것이 지닌 한계 없는 한계, 끝없는 끝을 빌어 오며, 자신도 지상적 존재에서 나온다.
지구의 소멸과 함께 사유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 소멸을 절대 사유되지 않도록 남겨 놓은 채 말이다. 없어지는 것은 지평 그 자체이며 그 지평의 소멸과 함께 여러분의 내재성 속의 초월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만약, 한계로서의 죽음이 실제로 잡히지 않고 벗어나며 유예되는 것이고 그 결과로 사유가 애초부터 다루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이 죽음은 결국 우리 정신의 삶일 뿐이다. 그러나 태양의 죽음은 정신의 삶으로서의 죽음이기 때문에 정신의 죽음이다. 아무 것도 살아남지 않으면 승화도 연기(延期)도 없다. 이 절멸(絶滅)은 여러분이 '우리의' 죽음이라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그것, 즉 생각하는 살아 있는 생물들의 운명의 일부인 죽음과는 완전히 다르다. 모든 경우의 절멸은 지나치게 주관적이다. 그것은 물질 조건의 변화, 즉 에너지가 취하는 형태의 변화를 뜻한다. 이러한 변화는 폭발 이후의 세계에 대한 여러분의 예상을 무화시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정치적인 공상과학소설은 핵전쟁 이후 차갑게 사막화된 인간 세계를 그리곤 한다. 그러나 태양의 폭발은 인간의 전쟁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태양의 폭발 이후에는 탈인간화된 황폐한 인간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생존자가 살아 남아, 남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고 쓰는 그러한 세계는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서 탈인간화는 여전히 인간―죽었지만 여전히 인지가능한―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조건에서 따져보자면 죽었지만 사유상에서는 여전히 지양될 수 있는 인간 개념이 여기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양 폭발 이후에는 어떠한 인간적인 것도, 어떠한 생명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고, 그것을 증언할 만한 지능과 감각을 갖춘 지구인도 물론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과 그들의 지구의 지평이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훗설(Husserl)이 '원지반'(Ur-Erde)이라고 불렀던 이 지반이 열과 물질로 이루어진 먼지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고 가정해 보자. 물질로서의 지구는 그 조건의 변화―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이루어진 물질과 에너지의 변화, 지구의 변형을 지배하는 법칙의 변화―에 종속되기 때문에 결코 기원적(originary)이 아니다. 지반(Erde)이란 물질/에너지의 배열이다. 이러한 배열은 일시적인 것으로 기껏해야 수백억년 지속될 수 있을 뿐이다. 달과 세월을 같이할 정도랄까. 우주 차원으로 보면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태양, 지구, 그리고 우리의 사유는 에너지의 경련 상태, 기존질서의 한 순간, 우주의 먼 한 구석의 물질 표면에 떠오른 미소에 지나지 않는다. 무신앙인인 여러분이야말로 신앙인들이다. 여러분은 그 미소를 지나치리 만큼 믿고, 사물과 사유의 공모를 믿으며, 모든 사물의 유목적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그 먼 한 구석의 안정된 질서 관계의 희생물로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자연이라고 불리는 것, 정신과 물질의 일치에 의해 유혹당하고 속게 될 것이다. 클로델(Claudel)은 이를 공생성(co-naissance, 共生成)이라고 불렀고, 메를로-퐁티는 시각과 지평의 교차 대구법, 정신이 떠다니고 있는 유동체라고 말했다. 태양의 폭발, 아니 단지 태양이 폭발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여러분은 이러한 행복한 도취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를 보라. 여러분은 그 사건을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본질보다도 앞서 '벌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려 들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태양의 폭발이야말로 아무런 유산(遺産)도 남겨 놓지 않는 본질 그 자체라는 점을 여러분은 인정할 것이다. 에피큐로스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지만, 실상 이 말은 이러한 죽음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에 적용되어야 할 말이다. 그 말은 "나는 죽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죽음이 현존하면 나는 그렇지 못하고, 내가 현존하면 죽음이 부재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인간의 죽음은 인간 정신의 삶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태양의 죽음은 죽음과 사유간의 돌이킬 수 없는 배타적인 분리를 의미한다. 그러한 죽음이 있은 이후에 사유란 있을 수 없다. 이는 어떠한 잔여도 남기지 않는 완벽한 부정이다. 이를 이해할 어떠한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히 순수한 사건이다. 재앙이다. 우리에게 익숙하고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모든 사건들과 재앙들은 단지 창백한 환영(幻影)의 모습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제 이 사건은 불가피하다. 그러니 여러분이 전혀 거기에 개의치 않고, 정신의 삶, 지구적 현상성 속에 남아 있기로 할 수도 있다. 에피큐로스처럼 여러분은 "여기에 그 사건이 없으니,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는 인간과 자연의 공모라는 안락한 장소에서 계속 철학을 할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전히 "우리 뒤에 노아의 대홍수가 온다"는 음울한 생각을 가질 것이다. 물질의 대홍수말이다. 여러분은 우리의 사유와 서구 문명의 고전적 혹은 근대적인 사유 사이에는 중요한 분기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이란 없으며, 단지 {달랑베르의 꿈}(D'Alembert's Dream) 속의 물질 괴물만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에 나오는 코라(ch ra)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자명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한때는 우리가 자연과 대화할 수 있다고들 했다. 그러나 물질은 우리에게 질문을 하지도 않고, 어떠한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물질은 그저 우리를 무시할 따름이다. 물질은 모든 물체를 만들었던 방식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만들었다. 그 방식은 바로 우연과, 물질의 법칙이었다.
아니면 여러분은 파국을 앞질러 걱정하고 바로 그 범주에 속하는 수단을 사용해서 파국을 막아보려고 할 수도 있다. 에너지 변환의 법칙에 속하는 수단을 통해서 말이다. 여러분은 태양의 질서와 여러분 자신 사유의 질서의 극단적인 절멸이라는 도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주 분명해진다. 그 일은 얼마간 진행되어온 일이기도 한데, 바로 파국이라는 물질 조건의 변화 이후에 사유가 물질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삶과 사유의 조건들을 모사(simulate)해 보는 일이다. 이러한 일, 오직 이러한 일이야말로 영양학, 정신생리학, 유전학, 조직합성부터 분자생물학, 천체물리학, 전자공학, 정보과학, 핵물리학에 이르는 오늘날의 기술과학 연구에서 관건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연구들이 직접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건강, 전쟁, 생산, 의사소통과 같은 것으로 보여도, 흔히 말하듯이 인간을 위해서 이러한 관심들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테크놀러지는 인간이 발명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인류학자들과 생물학자들도 인정하듯이, 가장 단순한 형태의 생명체인 적충류(滴蟲類)―수백 만년 전에 조수(潮水) 웅덩이 가장자리에서 광합성을 하던 조류(藻類)―조차도 이미 기술적 장치였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 체계는 그것에 유용한 정보를 걸러내는 한, 그러한 정보를 기억하고 가공하며, 행위의 조절 효과를 기반으로 추론하는 한, 요컨대 최소한 자신의 영속화를 보장하기 위해 환경에 개입하고 영향을 끼치는 한 테크놀러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도 이러한 유형의 사물과 본성이 다르지 않다. 인간의 정보 수용 장비는 다른 생명체와 비교해볼 때 그리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이 정보를 게걸스럽게 소화하는 이유가 인간이 다른 생명체들에 비해 더 분화되어 있으며 저장용량이 뛰어난 조절체계(약호(code)와 가공규칙)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은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한편으로 직접적인 환경에 덜 의지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자의적(의미론이나 통사론적으로)이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그러한 자료를 가공하는 방식 그 자체를 (원자료를 넘어) 고려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재귀적인'(recursive, 호프스태터(Hofstadter)의 용어) 상징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정보를 다시금 자신의 규칙에 따라 정보로 가공하는 방식에 대해 고려해볼 수도 있고, 정보를 가공하는 다른 방식들을 추론할 수도 있다. 요컨대 인간은 교직적(交織的, complex)일 뿐만 아니라 말하자면 재직적(再織的, replex) 생명조직이다. 인간은 그 자신을 (의학에서처럼) 매질(媒質)로, (목적지향적인 행위에서처럼) 기관(機關)으로, 혹은 (사유에서처럼―다시 말해서 사변적 사유나 미학에서처럼) 한 대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심지어 인간은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추출하여 논리학이나 수학에서처럼 가공 규칙들만을 고려해볼 수도 있다. 이러한 상징적 재귀성의 반대에 있는 극한은 (그 작동의 초월적 수준이 어떤 것이건 간에) 인간이 묶여 있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그 생존을 보장하는 조절을 유지해야 하는 필연성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주워섬기는 내재성 속의 초월의 근거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현재까지는 이러한 환경은 지구적인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한 사유조직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육체가 그곳에서 영속될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 이는 본질적인 초기능인 철학적 사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사실이다. 사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여러분은 숨쉬고, 먹고 등등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여전히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육체는 인간 사유라는 복잡한 기계 장치의 하드웨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육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저 복잡한 작동, 세제곱 또는 네제곱의 메타조절(meta-regulation), 여러분 철학자들이 애지중지해 마지 않는 절제된 탈조절은 불가능하다. 여러분의 끝없는 끝에 대한 철학, 죽음 없는 죽음에 대한 철학, 무한한 차이, 불확정적인 것에 대한 철학은 메타조절의 표현, 아마도 가장 두드러진 표현이다. 마치 메타조절이 자신을 어떤 초월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이는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해야 할 일은 이렇게 참조의 수준들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언어의 상징적이고 재귀적인 힘에서만 나온다는 것이다. 언어는 모든 생명체를 조절하고 그들로 하여금 단순한 기술적 총화를 뛰어넘어 그들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지금 있는 그리고 사라져 버리고 없는 것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형태의 '기억'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라고 불리는 물질적 총화가 매우 정교한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철학은 가능하다. 그러나 또, 이 인간 언어라는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의 조건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이제 그 하드웨어는 태양의 폭발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고, 철학적 사유(다른 모든 사유는 물론)는 모두 불타 없어져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기술과학의 문제는 바로 어떻게 이러한 소프트웨어에 지상의 삶의 조건과는 독립되어 있는 하드웨어를 제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육체 없는 사유를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인간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존재하는 사유를 어떻게 가능하게 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태양의 폭발을 인지하는 것, 태양의 죽음을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모든 죽음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면 반드시 치러야 할 대가이다. 육체 없는 사유는 그것이 태양이건 지상의 것이건 상관없이 모든 육체들의 죽음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러한 육체와 분리할 수 없는 사유의 죽음을 생각할 때 반드시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여기서 '육체 없다'는 것은 정확하게 이 말은 인간의 육체라고 알려져 있는 살아있는 복잡한 지상적 유기체가 없다는 말이다. 하드웨어가 없다는 말은 분명 아니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해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최소한 오늘날 인간의 두뇌만큼이나 복잡한 (혹은 이중으로 복잡한) 소프트웨어를 지상의 조건이 아닌 곳에서 '양육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제조하는 일이다. 이는 명백히 지표면에서 태양에너지를 사용하여 생화학적 요소들을 합성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양분'을 공급하는 '육체'를 찾아내는 일이다. 혹은 이러한 합성을 지구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할 수 있도록 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두 경우 다 이는 우리의 소프트웨어나 거기에 상응하는 것을 양육할 수 있는 하드웨어, 우주 어디서건 구할 수 있는 에너지원을 이용하여 그 소프트웨어를 유지하고 지속시키는 하드웨어를 제조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나같은 문외한에게도 핵물리학, 전자공학, 포토닉스, 정보과학 등이 힘을 합쳐, 물리적일 뿐아니라 육체적인 능력을 갖추고,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들을 우주의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형태들에서 '추출'(선별하고, 가공하고 분배한다는 의미)하는 기술적인 대상들을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것은 분명하게 보인다.
하드웨어에 대해서는 그만 해두자. 소프트웨어에 대해 말하자면 그런 기계들은 무엇을 갖추어야 하느냐 하면---아니 이건 인공지능 분야의 연구, 그리고 그러한 연구를 둘러싼 쟁점의 주제이다. 철학자, 작가, 예술가 여러분들은 오늘날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업적을 형편없는 것이라고 쉽사리 무시하려 든다. 물론 사실이다. 사유기계 혹은 모니크 리나르(Monique Linard)의 용어로 '재현'기계는 평범한 인간의 두뇌, 심지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두뇌와 비교해 보아서도 낫다고 할 수 없다.
그러한 컴퓨터에 내장되는 프로그램들은 초보적이고 정보과학, 인공지능,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 진보가 기대된다고 반론을 펼 수도 있다. 그런 기대는 가능하다. 그러나 핵심적인 반론은 바로 이들 지능의 원리 자체와 관련해서 나온다. 여기서 반론은 허버트 L. 드레퓌스(Herbert L. Dreyfus)가 요약 정리한 바 있다.  이들 '육체없는 사유' 기관들에 대한 우리의 불만은 이들이 이항대립적인 논리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러셀(Russell)과 화이트헤드(Whitehead)의 수학적 논리, 투링(Turing)의 기계, 맥컬로흐(McCulloch)와 피츠(Pitts)의 신경세포 모델, 비너(Wiener)와 폰 뉴만(von Neumann)의 인공두뇌학, 불리언(Boolian)의 대수학, 샤논(Shannon)의 정보과학 모두는 바로 이러한 이항대립적인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드레퓌스가 주장하듯이 인간은 이항대립적인 양식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유는 정보 단위(비트)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가정의 배치를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사유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규약이나 가독성의 원칙에 따르자면 결코 선택될 수 있지 않을 것 같은 부적확하고 모호한 데이터도 받아들인다. 그것은 부수 효과와 상황의 주변적 양상들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군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떠한 측면도 무시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유는 끊임없이 데이터의 목록을 만들지 않고서도, 그리고 일련의 시행착오를 통해 추구하는 목적의 견지에서 데이터가 중요한 것인가 아닌가를 검증하지 않고서도 데이터의 중요성을 구별할 수 있다. 훗설이 보여주었듯이 사유는 '지평'을 자각하고, 사유에 직관적 배치를 제공하고 '바로 그 앞에' 정향성과 기대, 그리고 '틀'(frame, 민스키(Minsky)의 용어)을 열어주는 일종의 대상이며 비개념적인 모노그램을, '노에마'(noema)를 지향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틀, 혹은 셰마라고 할 수 있는 것 안에서 사유는 '선택'에 의해, 다시 말해서 어떤 데이터는 버리고 필요로 하는 데이터는 다시 조합하면서, 그러면서도 미리 무엇이 선택에 적합한지를 규정하는 기존의 규준들은 사용하지 않은 채,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향해 움직여 간다. 이러한 그림은 칸트가 반성적 판단이라고 불렀던 사유 과정에 대한 기술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반성적 판단이란 데이터를 규정하는 규칙에 의해 인도받는 것이 아니라 '반성적으로' 얻어진 결과를 기반으로 해서 이후에 그러한 규칙들을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사유양식을 말한다.
규정적 사유에 반대되는 반성적 사유에 대해 기술한다고 해서 그 반성적 사유가 (훗설이나 드레퓌스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지각 경험에 빚지고 있다는 점이 감춰지지는 않는다. 사유의 장은 시각의 장(혹은 청각의 장)이 존재하는 방식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정신은 눈이 보이는 것의 장 안에서 자신을 정향(正向)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정향시킨다. 프랑스에서 이러한 비유는 이미 예를 들어 월론(Wollon)의 저작에서는 물론, 메를로-퐁티의 연구에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비유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비유가 비본질적이 아니라 본질적이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그 절차 속에서 이 비유는 사유가 지각 경험과 유사하다는 점을 기술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 비유는 사유가 비유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이 아니라 비유적으로만 진행된다는 점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형의 절차들에서 나오는 사유들―'…와 마찬가지로 …이다' 혹은 '…이 …와 같다면 …이다' 또 '마치 p가 q이듯이, r도 s이다' 등―이 '…라면 …이다'나 'p는 p가 아닌 것이 아니다'와 같은 디지탈적인 유형의 절차와 비교해서 우위에 서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절차들이 육체의 경험, 감각과 지각의 시공간적 연속 속에서 '실제적' 혹은 현상학적인 육체의 경험을 구성하며 역설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인공지능을 제조하고 프로그램화하는 데 있어서 육체를 모델로 삼는 것이 적절하다. 인공지능을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으로 한정지으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러한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사유와 육체를 분리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육체가 사유에 필요불가결한 하드웨어, 다시 말해 사유의 존재에 대한 물질적 필요조건 때문이기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바로 각자가 (감각적, 상징적) 환경과 맺고 있는 관계라는 측면에서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두 경우 모두에 있어 유비적이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한때 힐러리 푸트남(Hilary Putnam)이 제시했던) 지식의 '분리가능성'의 원리, 푸트남이 이를 통해 인공지능을 창조하려는 시도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바로 그 지식의 '분리가능성' 가설을 지지하지 않을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지반이 마련되었다.

여성

자 이제 우리 철학자들은 어느 정도 만족하였다. 적어도 우리의 근심의 일부는 완화되었다. 지각의 장은 한계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들은 항상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시각의 대상은 우리의 눈에 한 면을 제시하지만, 항상, 보이지 않는 다른 면들이 있기 마련이다. 직접적이고 초점을 맞춘 시각은 항상 시각이 도달할 수 없는, 그러나 부재하는 것은 아닌 구부러진 영역에 둘러싸여 있게 된다. 이러한 이접성(離接性)은 늘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물론 나는 가장 단순한 시각만으로도 작동할 수 있는 기억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인 시각은 바로 한 순간 전에 다른 각도에서 본 시각도 보존한다. 또 곧 보게 될 것도 예견한다. 이러한 종합은 대상에 대한 확인, 그러나 결코 완전하지는 않은 확인을 낳으며, 그 종합은 그 이후의 시각이 항상 뒤흔들고 혼란을 불러일으키게 될 종합이다. 이러한 경험에서 눈은 실제로 항상 어떠한 인지를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정신이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대상에 대해 완벽한 기술을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물론 제시의 장은 매번 완전히 독특하기 때문에, 그리고 시각이 실제로 볼 때에도 일단 대상이 '확인'되고 나면 더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기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서는 한 대상을 완벽하게 인지했다고 말할 수 없다. 지각적 '인지'는 완전한 기술에 대한 논리적 요구를 결코 충족시키지 못한다.
비유에 대한 모든 진지한 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데이터가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각인-표면으로 이전되는 양식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경험, 이러한 비선명성, 이 불확실성, 이 인지될 수 있는 것의 끝없음에 대한 믿음이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는 구절들의 장 속에 잠겨, 윤곽 묘사를 통해서 전진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듬어 찾고 있지만, 그것이 멈출 때, 그것은 잠시(평생이 될 수도 있는 잠시 동안) 그 탐사를 중지하고 있을 뿐이며, 그 멈춰선 글쓰기 너머에는 끝없는 낱말들, 구절들, 의미들이 잠재된 상태로, 미결의 상태로 처음과 마찬가지로 '말해야 할 것'이 많은 상태로 남아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진정한 '비유'가 되려면 (넓은 의미에서) 눈이 시각장 안에 있고, 글쓰기가 언어 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유기계, 혹은 재현기계가 그 자신의 데이터 속에 존재해야만 한다. 이러한 기계들이 시각 혹은 글쓰기의 결과를 잘 모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문제는 (매력적으로 적절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인공지능에 '육체를 부여하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태양 폭발 이후에 살아남을 사유가 이미 이전에 있던 보잘것없는 이항대립의 유령 이상이 되기를 원한다면, 지구가 파괴되기 전에 지구에서부터 멀리 실어 날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자연적'이며 인공적인 육체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우리는 진정으로 기술과학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지반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한 '프로그램'이 성취가능할지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최소한 기존의 프로그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험에 대한 프로그램을 주장하는 것이 일관성 있는 행동이지 않은가? 마치 화가의 시각이나 글쓰기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프로그램은 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시도를 해보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있다. 결국 이는 여러분에게 절박한 문제이다. 문제는 여러분의 기계들에게 일상언어를 이해시키는 일이다. 여러분은 특히 터미널/사용자 인터페이스 영역에서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 인터페이스에서 여러분의 인공지능과 소위 '자연'언어에서 만들어지고, 그 안에 빠져있는 지나치리만큼 소박한 종류의 지능의 접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나를 괴롭히는 다른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게 정말 다른 문제일까? 사유와 고통이 겹쳐진다. 글쓰기 행위에서의 낱말들과 구절들, 회화나 작곡에서 그것이 만들어질 때(이는 여러분이 말한 것이다) 잠재된 뉘앙스나 음질들 모두는 잠시 동안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 보이곤, 곧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린다. 종이나 캔버스 위에 각인되어 있는 경우라도, 그들은 우리가 '의미하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시 의도했던 바보다 오래되어 의미의 가능성, 다시 말해서 다른 낱말, 구절들, 의미의 음영, 색조들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통해 그들은 장을, '세계'를, 여러분이 말하는 '멋진' 인간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 세계는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아주 먼 지평선의 불투명성과 같다. 여러분이 데이터를 선별(select)하고 표를 만드는 것을 기술하면서 사유를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진실을 침묵시키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데이터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질 수 있는 것이고, 선별은 선택(choice)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쓰기나 회화와 마찬가지로 사유는 주어질 수 있는 것을 여러분에게 다가오도록 만드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지난 해 지겐(Siegen)에 모여 토론했을 때, 우리는 일본 사무라이-예술가가 서예를 하거나 연기자가 연기를 할 때 정신과 육체가 획득해야 하는 일종의 무심(無心)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무심이란 아비투스(habitus)와 관련된 일상적인 정신적 의도의 중지하는 것, 혹은 육체의 배열(정비나 조절)을 말한다. 글렌(Glenn)과 안드레아스(Andreas)가 말하듯이(여러분은 내가 도겐(D gen), 디드로(Diderot), 그리고 클라이스트(Kleist)의 도움으로 이들에 쉽사리 동조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중지를 대가로 붓은 '올바른' 형태를 만나고, 목소리와 연극적 몸짓은 '올바른' 어조와 외양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고, 선별적이고, 동일시적인 행위와 정반대되는 이러한 무심, 이러한 텅빔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약간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한다. 나는 클라이스트처럼 은총(붓, 음조, 음량의 은총)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나로서는 이는 주제넘은 일 같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은총은 불러내고 환기시켜야 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은총이 내리기 위해서는 육체와 정신이 어떠한 부담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고통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소유했던 것의 향유는 이제 없다.
여기서 다시금, 여러분도 주목하시겠지만 육체적 경험의 필요성이 부각되는데, 일종의 무심의 경지를, 다시 말해 정신의 사유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텅비움을 이해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육체적 고통의 모범적인 사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로크(Locke)가 말했던, 그리고 데카르트가 (헛되이) 지식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던 백지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러한 출발은 역설적으로 언제나 다시 출발하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유라고 부르는 것에서 정신은 '지향'되는 것이 아니라 중지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정신에 규칙을 부여할 수 없다. 여러분은 그저 정신에 받아들이라고 가르칠 따름이다. 여러분은 방해받지 않고 지반을 청소할 수 없다. 단지 주어진 것과 다름없는 그 지반의 경계 영역이 스스로의 윤곽을 이해하고 수정할 수 있도록 약간의 청소를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작업의 예는 프로이트의 Durchabeitung 속의 mutatis mutandis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예에서 우리는, 내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사유라는 노동의 고통과 대가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종류의 사유는 일련의 규칙들에 맞추어 상징들을 조합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심지어 조합 행위가 규칙을 찾고 기다리며 사유와 깊은 관련을 맺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사유의 고통은 자신의 진정한 자리 대신에 정신 속에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 외부에서 오는 징후가 아니다. 우유부단하려고 결심하고, 인내하려고 결심하고, 원치 않기를 원하고, 정확히 말해서 의미화되어야만 하는 자리에 의미를 생산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사유 자신이다. 이것은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의무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행동이다. 아마 그 의무는 채무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지금은 아직 존재하지 않은 낱말, 구, 색조가 생겨날 수 있는 양식일 것이다. 그래서 사유의 고통은 시간의 고통, 무엇이 일어나는가 하는 고통이다. 요컨대, 여러분의 사유기계, 여러분의 재현기계도 고통을 겪을까? 그들이 단지 기억에 불과하다면 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여러분은 최소한 사유기계나 재현기계가 내가 이미 기술했던 대로 주어진 것, 주어질 수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인 '데이터'와 역설적인 관계를 '이룰' 수 있는 한 별로 문제될 일은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믿을 수 없는 명제이다.
만일 이러한 고통이 진정한 사유의 징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이미 사유된 것, 즉 각인된 것 안에서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우리가 어떤 것을 잠시 중지된 상태로 놓아두거나 그것을 다시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 이제껏 사유해 보지 못한 것이 나타날 수 있고 각인되어야 하는 것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용가능한 수많은 낱말들 속에서도 다른 낱말로 대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낱말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낱말들을 모으는 새로운 방식, 다시 말해 논리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구문, 우리가 책을 읽어 습득한 구성 등으로 우리에게 환기되는 발화와는 상관없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내가 모든 사유가 각인을 필요로 하고 각인과 연관되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놀랐다는 셉 검브레히트(Sepp Gumbrecht)에게 나는 우리는 이미 각인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사유한다고 말하고 싶다. 이를 문화라고 불러도 좋다. 우리가 사유한다면, 이는 이러한 충만한 세계 속에 무언가가 여전히 빠져 있고, 이러한 결핍 때문에 정신을 여백으로 만들어 사유되어야 할 것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차례가 되어 이미 각인된 것으로만 '나타날' 수 있다). 사유되지 않은 것은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사유된 것 속에서 안락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편을 받아들이는 사유는 또한, 간결하게 말한다면, 그러한 불편을 끝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모든 글쓰기(회화 등등)를 유지시키는 희망이다. 즉, 끝에 가서는 모든 게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말이다. 그러나 끝이란 없으므로, 이러한 희망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유되지 않은 것은 여러분의 기계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각인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있는 각인되지 않은 것은 기억들을 고통받게 만들어야 한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도대체 왜 사유를 시작하려 들겠는가? 우리는 그들의 기억이라는 부담에 고통받는 기계들이 필요하다(그러나 테크놀러지로 무장한 대도시에서 고통은 환영받는 말은 아니다. 특히 사유의 고통의 경우에는 말이다. 이것은 더 이상 웃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심지어 그런 것이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고, 그것이 전부이다. 지금은 공연(performance)은 아닐지라도 '유희'(play)가 유행인 세상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육체에는 성차(gender)가 있다. 성적 차이가 육체뿐아니라 정신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널리 수용되고 있는 명제이다. 물론 남성들이 여성성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 속에도 남성성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한 성이 다른 성에 대한 생각이라도 가질 수 있으며, 자신이 결여하고 있는 데서 오는 감정을 가질 수 있겠는가? 여기서 결여하고 있다는 의미는 오히려 다른 성에 대한 생각이 육체에, 정신에 깊숙이 현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치 자제심이 강한 경비원이 한 쪽 구석에, 여러분의 시각이 미치지 못하는, 그러나 어쨌든 그 지평 속에 현존하는 것처럼 말이다. 잡기 힘들고 포착하기 불가능하게 말이다. 다시금 우리는 내재성의 초월의 문제로 들어와 있다. 지금 사회에서 지배적인 성차의 통념은 이러한 간극을 극복하고, 이러한 초월을 전복하고, 이러한 무기력을 극복하려 든다. '파트너'로(쾌락의 배열에 따라) 가정된 사람들은 성적 차이 그 자체를 함께 즐기려는 목적으로 계약을 맺는다. 그 계약은 어느 쪽 한 편도 이러한 연합으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으며, 결핍(수행의 실패든 아니든에 상관없는) 혹은 탈초점화(defocalization), 통제와 초월이 결핍되는 최초의 징표가 나타나자마자 양측이 계약을 파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말이 너무 지나칠 수 있지만, 어쨌든 그러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때로 유행 때문에 '사랑'이 보통사람들 가운데로 되돌아가기도 하지만, 사랑은 무엇보다도 대단한 사람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고 부러워할 만한 예외로 선전되는 성관계로 존재한다. 나는 이러한 배열에서 기술-과학이 사유로 하여금 그것이 실어나르고 있는 차이를 무시하게끔 만드는 조건의 징표를 본다.
성적 차이가 존재론적 차이인지에 대해서는 나는 모른다.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나의 현상학적 기술은 여전히 별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성적 차이는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느끼는 육체와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무의식적인 육체, 혹은 육체로서의 무의식과도 연관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사유와, 심지어 비유적 사유와 동떨어져서 말이다. 이러한 차이는 ex hypothsi 우리의 통제 밖에 있다. 아마도(왜냐면 프로이트가 그의 유예된 행위에 대한 기술에서 보여주었듯이, 그것은 회상(recollection)의 형태로 '기억'되는 각인 없이 효과를 각인하기 때문에) 정반대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야말로 내가 이미 말했듯이 애초에 지각과 사유의 장을 기다림의, 그리고 모호한 말의 기능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차이들에 의해 지각과 인지의 고통은 보이는 대상의 통일과 완전한 규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으로 정의된다. 성차만 없다면 지각과 사유의 중립적인 시공간 경험, 이러한 불완전성에 대한 느낌이 결핍되어 불행으로 느껴지는 경험, 단순하고 순수한 인지적 미학을 생산하는 경험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러한 중립성에 성차의 차이는 포기의 고통을 부가시킨다. 왜냐하면 이러한 차이야말로 어떠한 시각과 사유도 포괄할 수 없는 장을, 즉 요구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소여된 것을 초월하는 능력, 내재성 속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은 실제로 인간 언어의 재귀성 속에서 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을 찾는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은 실제적인 힘이라기보다는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힘이란 바로 욕망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태양의 폭발 이후에 대비하여 준비하는 지성은 우주여행을 나설 때 그 힘을 함께 실어 날라야만 한다. 여러분의 사유기계들은 빛뿐아니라 봉합할 수 없는 성차의 차이에서도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잡성이라는 문제가 다시 돌출되어야 한다. 나는 지금 지구상에서 존재하고 있는 기술-과학의 발전, 지구가 생긴 이래로 진행되어 온 반엔트로피 혹은 복잡화 과정의 현재 형태는 물리 이론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러한 복잡화 과정의 동력도 아니고 그런 적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러한 반엔트로피(negentrophy)의 효과, 혹은 담지자, 그것을 계속 수행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도 나는 인정한다. 나는 여기 모두가 그 창조를 열망하는 육체 없는 지성이 다가오는 태양의 폭발에 상당하는 엔트로피의 파고(波高)에 의해 부과된 복잡화 과정의 도전에 맞서 싸울 수 있으리라는 점도 인정한다. 나는 이러한 지성의 우주로의 유배와 더불어 고도의 복잡성의 영역―반엔트로피의 중심―이 그 가장 현실로 다가올 수 있는 결과―카르노(Carnot)의 제2법칙이 예견하고 있는 동떨어진 체계라는 운명―를 피해나갈 수 있다고 동의한다. 왜냐하면 이 지성은 스스로를 지구-태양의 조건과 동떨어진 것으로 남아있도록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나는 이러한 기술-과학을 추동하는 현실을 알고 변형시키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우주의 환경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지성의 복잡성은 가장 정교한 논리 체계의 복잡성을 능가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것은 전혀 다른 사물의 유형이기 때문이다. 물질의 총화로서, 인간의 육체는 이러한 지성의 분리 가능성을 감추고, 그것의 유배를 방해하고, 따라서 그것의 생존조차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의 현상학적이고, 사멸할 운명을 가지고, 지각기관인 우리의 육체는 사유의 어떤 복잡성을 사유하기 위해서 유일하게 상정할 수 있는 비유체(analogon)이다.
사유는 비유를 마음껏 쓰게 만든다. 사유는 과학적 발견에서도 비유를 마음껏 사용한다. 물론 그것의 수행성이 패러다임으로 고정되기 '이전'에만 말이다. 반면 그 비유적 힘은 또한 되돌아와서, 지각하는 육체의 자발적인 비유의 장을 활성화시키고, 세잔느의 눈을, 드뷔시의 귀를 교육하여, 생존에, 심지어 문화적 생존에도 '무용한' 주어질 수 있는 것, 뉘앙스, 음조를 보고 듣도록 만든다.
그러나 유비적으로 그리고 상호적으로 육체와 정신에 속하면서 창조의 기술에서 육체와 정신이 서로 공유하는 그 유비적인 힘은 성차의 차이에 의해 육체에 각인된 돌이킬 수 없는 초월에 비교하자면 아무 것도 아니다. 계산뿐아니라 심지어 비유로도 이러한 차이에 의해 남아있는 것들을 일소할 수 없다. 이 차이는 사유가 끊임없이 지속되도록 하는 동시에 사유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사유는 현상학적 육체와 분리할 수 없다. 비록 성차화된 육체는 사유로부터 분리되어 사유를 시작할 수 있지만 말이다. 나는 이러한 차이에서 원시적인 폭발을 보려는 충동을 느낀다. 이 폭발이야말로 태양의 종말이라는 파국에 비견될 만한 사유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나 비유적으로만 그렇지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차이는 무한한 사유를 낳기 때문이다. 육체와 사유에 비밀스럽게 잠재되어 있는 사유를 말이다. 그 차이는 동일자만을 절멸시킨다. 여러분은 이러한 분리의 불가피성과 복잡성을 염두에 두고 태양 이후의 사유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탈출이라는 우주선의 조타수는 여전히 엔트로피가 될 것이다.

* 이 글은 Jean-Fran ois Lyotard, The Inhuman: Reflections on Time의 1장 "Can Thought go on wihtout a Body"(Polity Press, 1991)를 번역한 글이다.

번역 - 임상훈 (중앙대 영문학 강사)



                                         

http://moonkwa.jinbo.net/moonkwa/read.cgi?board=Journal_Content&x_number=1002590874&ryal=19&nnew=1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