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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이론과 메타이론의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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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이론과 메타이론의 패러다임 : Roger Sperry




 
 
   




믿음, 이론과 메타이론의 패러다임



과학사상6호(1993년-가을) : Roger Sperry, 범양사 출판부, Page 181~197



신경과학에서의 이원론

이론인가 혹은 메타이론인가

인과적 결정론의 변형된 개념
 창발적 인과관계와 바이오피드백은 같지 않다

전체적인 평가

장점과 약점의 조화 : 실용적인 반성




(주석 : 현재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명예교수 겸 대학평의회 이사로 재직중, 위의 논문은 원래 Zygon : Journal of Religion and Science, Vol. 27, No. 3 (September, 1992) 에 발표된 것이다)

과학과 양립하여 존재하는 믿음에 관하여, 최근 《자이건 Zygon》지에 재개된 나의 논문 (Sperry, 1991a) 에 대한 제임스 존스의 분석적인 논평 (27/2, 1992.6) 을 읽은 후 나의 첫 번째 느낌은 내가 잘못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잘못 해석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예전의 대립적인 철학들을 융합한 나의 이단적인 '정신주의적' 입장을 오해하지 않도록 적절하게 기술하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60 년대 중반 《대안적인 정신주의 입장 An Alternative Position》(Sperry, 1965) 에로 전환한 이래 (내가 계속 지지해온) 새로운 정신적 혹은 '거시적 정신 (macromental)' 의 관점은 대부분 잘못된 이해 (Natsoulas, 1987 : Ripley, 1984) 로 인하여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현재로서 나의 주제와 일반적 접근은 상세한 철학적 정의나 인식론적 구분에 기여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여러 가지 오해들만 낳고 있는 듯하다.

요약 : 과학에서 정신상태를 다룸에 있어서 최근의 전향과 인과적 결정론의 변형된 개념 속에서의 그 전향의 근거에 대한 나의 설명은, 그리고 이것은 과학과 양립하는 믿음과 가치를 위한 길을 연다는 나의 주장은 이미 인지된 단점과 '내적 불완전선' 에 대한 해답으로서 여기에서 재확인하는 것이다. 논쟁의 초점들은 주된 주제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재검토되었다. 심층적인 정신적 요구들에 대한 내적인 논거의 단점이 인정되었고, 실험적인 개선을 위한 조치들이 검토되었다.


내가 보기에 존스의 주요 비판은 이상의 범주에 속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거기에 포함된 문제거리와 취지는 어떤 가능한 혼란과 잘못된 이해들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것이다. 어쨋든 나는 존스 박사의 관심, 특히 상당히 적극적인 평가에 감사하며, 더불어 개선된 접근방식을 제시해준 것에 감사한다.

신경과학에서의 이원론
상술한 대로 행동주의에서 새로운 정신주의 패러다임으로의 나의 전환은 일반적으로 이원론으로의 전환이라고 잘못 이해되어왔다 (Bindra, 1970 ; Bunge, 1980 ; Ripley, 1984 ; Sperry, 1981 을 보라). 존스는 처음부터 나를 다른 신경과학자들-오랜 연구과정 끝에 처음의 환원주의자로서의 접근을 단념하고 '확실한 이원론자가 된' -과 동일하게 취급함으로써 이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존스는, 비록 역사적으로 볼 때 이원론자나 일원론자를 환원주의의 옹호 여부로 구분한다할지라도 여기에서는 환원주의와 이원론을 아주 느슨하게 대조하고 있는 듯하다. 선도적인 전문가들은 이러한 복잡성을 간파하고 정확한 해석을 내려줄지도 모르지만, 많은 다른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존스의 예비적인 설명에 의해서 잘못된 생각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카를 래쉴리는 환원주의적 접근방식을 버리지도 않았고 이원론으로 돌아서지도 않았다. 기억의 흔적 (engram) 은 국부적이지 않고 확산되어 있다는 그의 기본입장을 바꾼 발견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래쉴리는 '반복되는 파동간섭 패턴 (reduplicated wave interference pattern)' 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상당히 환원주위적 일원론자 계열에 속하는 것이었고 오늘날의 뇌 기능 홀로그램 (hologram) 모델의 1940년대 선구였다.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서는 존스의 기본설명에 의해 잘못 전달된 생각들을 지적하는 것이 당면한 문제다. 에를 들면, 존스가 후에 경도된 탁월한 신경생리학자인 존 에클스는 신경학을 공부한 '후에 (또는 신경과학을 공부한 경과로)' 이원론으로 전환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어떠한 과학적 발견들에 의해서 전환한 것도 아니다. 에클스는 이미 18 세 무렵에 아주 다른, 비과학적 이유로 인해서 강한 확신을 갖고 있던 이원론자였다. 에클스는 50 대 초반에 마음은 신경 자극 전도부 연결내의 미시적 사건들 (microevents) 에 의해 뇌에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했지만 (Eccles, 1953), 결코 다음 수십 년간 이 개념을 밀고나가지는 않았다 (Eccles, 1966). 1970년대에 시작된 에클스의 이원론을 위한 더욱 강렬한 주장은 과학적 발견에 의해 직접적으로 촉진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내가 '60년대 중반에 그쪽으로 돌아선 정신-뇌 관계와 동일한 정신주의 논리의 발견에 의해 촉진되었다. '창발적 상호 작용론 (emergent interactionism)' 은 '심리물리적 상호 작용론 (psychophysical interactionism)' (Popper & Eccles, 1977,373) 이 되었고 그의 오랜 이원론적 입장에 새로운 힘을 부여하는 다른 생각들과 결합되었다.

뛰어난 신경외과의자 또한 존스가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의 저작과 설명에 의존하고 있는 펜필드도 마찬가지로 '그 (펜필드) 의 발견의 결과로서' (Jones, 1992, 191) 이원론으로 돌아섰다고 잘못 묘사되고 있다. 80 대의 펜필드는 자신의 최종 저서 (Penfield, 1975) 의 말미에서 인간 자신의 이원론적 관점 ( 혹은 적어도 '두가지 요소' ) 을 옹호하는 개인적 경향을 표현할 생각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전신 - 뇌 쟁점에 있어서 과학적 발견은 아직 결정적이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다음 " 두가지 가설 : (a) 인간 존재는 하나의 인본적인 요소로 이루어져있다. (b) 인간존재는 두 개의 기본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 (114)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현재의 증거에 근거해서는 가능치 않다고 설명하면서, 과학적 발견들은 두가지 가설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남겨둔다고 하였다. 오히려 그는 "자기 스스로 개인적인 가정 (믿음, 종교) 을 채택하여 과학으로부터 최종 언질을 기다리지 말고 삶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가치가 있다" (115) 고 쓰고 있다.

펜필드의 저서에서는 여러 번 그의 활력적인 연구과정을 통해서 줄곧 정신과 뇌는 하나이며 동일하다는 가정을 견지해왔다는 것을 독자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내 평생 과학자로서 연구해 오면서 나는 최상 (뇌) 의 중심 활동들과 정신 상태들은 하나이며 동일하고, 혹은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들이라는...... 하나의 요소 (one element) 가설에 의거해왔다고 다시금 말하고 싶다 " (Penfield, 1975,114) .

후에 펜필드는 '두가지 요소 (two element)' 관전으로 전환시킨 것은 어떤 '발견들 (finding)' 이 아니고 오히려 그의 개인적 추론과 몇가지 알려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에 관한 반성들이 었다 ; 에를 들면 '정신이 사라질 (the mind vanishes)' 때 (뇌손상의 경우, 머리의 충격 후에, 간질발작하는 동안, 혹은 아주 자연스러운 깊은 잠 속에 발생하는 것에 관하여 앞서와 같은 시간 동안에 정신이 계속 현존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펜필드는 정신은 (일시적으로 잠잠한) 최상의 뇌 중심과 달라야 한다고 추론하였다. 펜필드는 기억들은 의식하는 정신에 유용한 형태로 " 컴퓨터처럼 ...... 자료를 저장하는 " (82) 뇌 자체에 위치하기 때문에 정신이 그 자신의 기억을 갖는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또한 그는 정신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서 '준독립적 요소 (a semi - independent element )' (82) 라고 이탤릭체를 사용하고, 더 나아가 "나는 '비물질적 행위 (immaterial agency)' 라는 관용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103) 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펜필드는 정신은 뇌와 떨어진 독립적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관점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 정신은 뇌 내부의 어떤 메커니즘의 활동에 부착된다 " (85) 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두가지 요소' 의 주장의 대부분은 현재의 새로운 정신주위 이론-창발적인 주관적 요인은 생리학적 요소와 '다르고 그 이상 (그러나 분리할 수 없는)' 이라는 것을 마찬가지로 인정하는-에 적용될 수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고 해석될 수 있었다. 펜필드가 두가지 요소 관점으로의 전환을 나타냈을 때, 새로운 정신주위 설명은 이미 행동과학에서 우세하게 작용하는 주요 이론으로서 저작 속에 널리 확산되었다.

펜필드의 발견들은 '중요한 (crucial)' 것이지만 신경과학적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는 존스는, 펜필드의 활력적인 연구과정 동안 줄곧 그와 그의 동료들 (혹은 그 당시의 대부분 신경과학자들) 은 결코 이 발견들의 어떤 것도 이원론적 해석을 요구하거나 더욱이 옹호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신경과학에서 역시 '중요한다' 고 선택된 리벳과 콘후버의 실험을 승인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론인가 혹은 메타이론인가
이러한 비판의 접근방식은 대체로 집단적으로 기본적인 오해를 나타내는 다른 길로 잘못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경화학만 가지고서도 인간본성에 관한 완전한 설명"을 할 수 있다거나, 과학과 종교의 '통합 (unification)' 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나의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과학의 새로운 관점은 인과적 결정론의 변형된 개념, 즉 전 자연을 통하여 '정신적 (mental)' 인과관계뿐만 아니라 비환원적 '거시적 (macro)' 인과관계를 제공해주는 그런 것 위에서 형성되어야 하며, 그리하여 인간성으로부터의 기여분을 배제하지 않는 실재 (reality) 에 관한 수정된 과학적 관점을 열어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전에 상호 양립할 수 없는 설명적 구조 (Jones, 1965) 의 사용에 의하여 분리된 과학의 세계와 인간성의 세계는 이제 양립하고 깨질 수 없는 인식론적 연속 속에서 결합된다.

또한 나는 제목이나 그 어디에서도 과학 위에 기초한다거나 (based on) 과학내에 기초하는 (based in) 것 같은 용어의 사용을 의도적으로 피했고, 그 대신 과학과 일치하는 (consistante with) 이라는 구용구를 사용했다. 나는 비과학적 자료로부터의 사실들과 인식도 이 연속의 일부로서 자격을 갖는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앞의 용어를 사용했다 (검증된 사실과 역사의 교훈 등과 더불어 추상적 추론들과 다른 마음 속의 것들을 포함하고, 물론 그것들이 과학과 상충하지 않음을 제시하면서). 나는 새로운 거시적 정신적 관점을 '통합 (unifying)' 이라는 말로 기술하였지만, 그것에 해당되는 것은 과거의 철학적인 이분법과 또 다른 역설적이고 대척적인 이분법이었다. 나는 이러한 설명으로서 하나면서 동일한 것으로서의 종교와 과학의 '통합' 을 제시하고자 의미한 것은 아니다.

앞서와 같은 잘못들은 부분적으로는 쟁점에 관한 잘못된 이해를 반영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들로부터 더욱 명백하다 : 새로운 관점은 (1) "현재의 신경과학적 성과들은 이전의 물리과학이 지나간 환원적 유물론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방법들을" (Jones, 1992, 190) 예시한다. (2) "신경과학의 기초 위에" (190) 유래된다.; 또는 (3) "현대의 연구에 토대를" (190) 갖는다. 사실상 이 중 어느것도 내가 기술한 패러다임 전환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비판의 많은 부분을 무용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오해를 나타낸다.

인과적 결정론의 변형된 개념
나의 설명에서 문제되는 것들, 즉 물리주위 대 정신주의, 환원주의 대 전체주의, 이원론 대 일원론, 창발 (emergence) 등은 신경과학적 발견이나 다른 과학적 발견에만 의거하지는 않는다. 훨씬 오래 전에, 신경과학 혹은 기타 과학이 존재한 이래로 해답은 제시되어왔다. 의식을 이전의 비인과적으로 기능하는 역할에서 인과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새로운 기능적 역할로 변화 시키기 때문에, 상술한 바 있는 행동주의에서 정신주의에로의 나의 전환은 정신 상태의 개념과 취급에 있어서 정반대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것은 새로운 과학적 성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과적 결정론의 새로운 모델의 발견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비록 이 개념상의 해명이 분리된 뇌 / 분리된 정신 (split-brain / split-mind) 의 성과에 의해서 촉진되어왔다고 하더라도, 그 변화의 기초적인 주요소는 인과적 설명에 관한 새로운 개념이었다.

행동주의자-유물론자 시대의 전통적인 상향적 미시적 결정론 (microde-terminism) 은 새로운 정신주의 혹은 '거시적 정신 (macro-mental)' 모델로 대치되었는데, 거기에서 고전적 상향적 미시적 결정론은 비환원적이고 창발적이며, 하향적이고 부수적인 조절로 보충되었다. 새로운 정신주의 교설은 의식에 관한 신경과학적 이론이 아니라, 전진적인 메타이론 (metatheory) 이며 세계관 패러다임이다 (Hein, 1969 ; Kuhn, 1970 ; Reese & Overton, 1972). 이러한 중요한 구분을 간과하고 있는 점은 존스가 쓴 그 논문의 제목, 서론, 그리고 '중요한 실험들 (Crucial Experiments)' 이라는 장에서 훨씬 명백히 나타난다.

정신-뇌 문제에 대한 접근법들은 오랜 동안 아주 다른 두 가지 문제 유형에 집중되어왔다. (1) 어떤 종류의 신경과정이나 생물물리적 과정에 의해 의식하는 경험이 생겨나는가. 그리고 (2) 의식하는 경험은 (일단 생성되고 그것이 무엇이든) 인과적인가 아니면 비인과적인가. 말하자면 주관적 경험의 내용과 성질들은 그 자체로서 (per se) 두뇌과정에서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내 논문이 언급하는 것은 처음의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윤곽이 그려진 '중요한' 발견의 여러 유형과 혼합될 필요가 있지만 결코 수세기에 걸친 인과성 문제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의식은 아마도 물리적 뇌나 외부세계에서 인과적 영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과학과 철학에서의 오래 된 가정 ('마음은 물질을 움직이지 못한다') 은 이것이 에너지 보존법칙의 위반을 포함하여 다른 논증된 물리학의 법칙과 원리에 상충될 것이라는데 근거했다. 게다가 과학의 인과적 생명체계에는 의식하는 정신적 힘이나 영혼의 힘을 끼워 넣을 필요나 장소가 없다는 것이 실제 일상생활에서 점점 더 명백해지는 것으로 보여왔다. 오랫동안의 물리주의로부터 우리의 새로운 정신주의로의 패러다임 전환 속에서 바뀐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정신주의 해답은 과학적 발견이 아니라 인과적 설명을 위한 변형된 논리에 기초를 둔다. 인과적 결정론의 어떤 형태들은 주관적 성질들이 뇌 기능에 있어서 에너지 보존 법칙을 침해하거나 물리학의 관련 원리들을 위반하지 않고 인과적 역할을 하도록 어용한다고 생각된다.

이 새로운 모델에서는 이미 신경과학에서 다루어진 신경세포 단계나 혹은 다른 단계에서의 미시적 인과관계의 연쇄는 고스란히 보존된다. 그리하여 이 영역에서는 상충되는 바가 전혀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하부단계의 상호 작용들은 연쇄적 사유나 이미 신경과학내에서 이해되거나 포함되어야 하는 본성 같은 인지과정의 보다 상부단계 조직 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에 의해 조절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뇌 과정의 의식 단계들은 비판적인 전체적 (holistic) 형태의 역학을 보여주기 위한 기능을 포함하는, 적절한 방법의 발달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된다. (Sperry, 1969) . 갈등과 반감 또는 타도는 미시적 결정론은 그 자체로 완전하고 (complete) 정확한 인과적 설명을 제공한다는 앞에 언급한 가정에 집중되어 있다.



창발적 인과관계와 바이오피드백은 같지 않다
나의 제안이 '창발적 인과원리' (Jones, 1992, 191) 에 기초한다고 정확히 기술되긴 하였지만, 바이오피드백의 전통적인 예들이 실례로 취해지면서 창발적 인과원리는 아주 잘못 이해되고 있다. 피드백 원리는 아주 오래 되었고, 환원주의 / 전체주의 쟁점을 수정할 수 있는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그리고 전통적인 미시적 결정론의 접근에 대해 어떤 변화도 요구하지 않았다. 피드백이 양 방향 교호적 (double-way reciprocal) 조절의 한 유형과 유사하지만, 그 특징인 인과성의 형태는 아주 다르다. 창발적 인과관계는 우선 단계간 (interlevel) 결정론이고, 동시에 (concomitant) 상향과 하향으로 발생하는 결정론이다. 한편 피드백 조절은 양쪽 방향에서 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잇달아 일어나는 단일 단계 (one-level) 의 인과 형태라는 전형적인 특징을 띤다.

피드백 시스템내의 통일체들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 안에 창발적 인과관계를 포함해야 하지만 그 예로서 피드백 개념을 이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든 것들, 즉 연필, 나무, 그리고 이 가설에 의하면 도처에 편재하는 창발적 인과 원리의 다른 예, 하지만 특별한 예라고 취해지는 정신 상태를 포함하여 창발적 거시적 속성들을 갖는 모든 통일체들이 그 예들이다. 《자이건》지의 내 논문 (또한 1991b 를 보라) 에서 언급된 것들은 단순히 물리적 예들을 보여주고 설명한다. 즉, 구르는 바퀴, 유기체 (헤엄치고, 날고, 달리는 과정의), 유체 흐름 속의 소용돌이, 파동의 활동,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속에 박혀 있는 분자의 조절, 카를 포퍼가 동의하듯이 (Popper & Eccles, 1977, 209) 그 원리는 명백해 보인다.

사물들은 원자론적으로 밑에서 위로 완전히 설명된다는 미시적 결정론의 관점에 반대하여, 우리는 창발적인 (거시적이고 정신적인) 속성들이 실재하며 비환원적이고 인과적으로 상호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그 자신의 단계 (own level) 에서 상호 작용할 뿐 아니라 미시적 요소들과 상향적인 원자론적인 인과성에 대하여 하향적으로 부수하는 조절을 한다. "하나의 분자는 여러 면에서 그 내부의 원자들과 전자들의 지배자다. 분자나 전자들은 화학적 상호 작용에 있어서 온전한 (whole) 분자의 전체적인 배열 특성에 의하여 잡아당겨지고 삥 둘러쳐진다" (Sperry, 1964, 20). 그리고 뇌에서, "뇌세포조차도 ......그것들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할 때 말할 것을 많이 갖고 있지 않다. ...... 그날의 자극 명령들은 더 높은 명령으로부터 온다. .....만일 우리가 뇌 내부의 명령의 연쇄 속에서 위로 계속 올라간다면, 우리는 가장 꼭대기에서 전체에 걸친 조직적 힘을 발견하고, 정신 상태와 연관되는 여러 형태의 대뇌 흥분의 역학적인 특성들을 발견한다" (Sperry, 1965, 789 ~ 80).

그렇기는 하지만 창발적 정신 상태는 전통적으로 가정되듯이 신경요소들의 속성과 조직적 상호 관계에 의해 교호적으로 경정된다 (Sperry, 1969). 따라서 그것은 동시에 발생하는, 교호적인 양 방향의 조절행위다. 그러나 하향 인과관계는 부분들에 의한 전체의 내적 상향 결정론의 인과관계와 아주 다른 성질 [덮어싸고 (enveloping) , 에워싸는 (eoncompassing) 것]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떤 충돌도 나타내지 않는다. 이것은 마찬가지로 동일체 자체로서 작용하는 부분들에 적용되고 모든 동일체의 계층적 구조 전만의 부분들의 부분들에도 적용된다.

창발적 정신 인과관계의 정확한 의미에 관한 혼란은 정신적 상상치료와 그 증명으로서 제시되는 정신치료 효과에서 더 잘 입증된다. 정신치료 현상과 그와 연관된 정신조절 (mind-control) 현상이 있다는 것은 오랫동안 인정되어왔다. 그러나 1970 년대 이전에는 이 현상들은 부수현상론이나 심신동일론 같은 그 당시 유행하던 뇌-정신문제 해결과 양립하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서 그것들은 행동주의자 - 유물론자 교설에 효과적인 위협을 이루지 못했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주관적 경험의 내용들이 의식적인 경험의 인과적 설명을 위해 불가결하거나'제거될 수 없다고' 보이는 점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하향적 조절과 함께 창발적 상호 작용은 이것을 위해 우리가 취한 하나의 용인된 개념이다.

컴퓨터 칩내의 요소들이 여러 가지 소프트 프로그램에 의하여 각각의 연속과 시간 패턴으로 어느 정도 작용된다 하더라도, 뇌의 신경세포의 자극패턴은 연속적 사고와 같은 정신적 활동의 계획과 연관되고, 계획에 의존하고, 계획에 의해 조절된다. 우리는 사고의 연쇄 속에 포함되는 신경세포적 활동이 생리학과 생화학의 법치에 의해 철저히 조절된다고 가정한다. 동시에, 더욱 두드러진 프로그램 특징들은 인지 단계에서 정신적 사변성에 의해 조절된다. 거기에는 논의의 여러 가지 견해가 포함되지만 이것 이외에 두 가지 다른 인과적 조절 유형들이 뇌 사건의 과정을 결정하는데 동시에 작용된다.

이것이 수향되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메커니즘의 본성에 대한 단서들은 다음의 생각을 얻게한다. 즉,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일종의 세포모임 (cell-assembly) 역학의 창발적 (정신적, 인지적) 속성의 형태는 전체적 혹은 '기능주의적 (functionalist)' 기초 위에서 다른 인지적 창발적 속성들과 상호 작용한다. (Sperry, 1952) 는 것이다. 정신과정의 법칙적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계속되는 뇌 과정의 전반적인 기능적 효과라고 여겨지는데 그것들은 각각 뇌 활동의 변화하는 상호 관계에서 전체로서 상호 작용하는 정신적 창발물 (emergent) 을 갖는다. 신경세포의 미시적 사건이나 다른 미시적 사건에서 하부 단계의 인과성은 방해받거나 간섭받지 않고, 단지 다 넓은 정합적인 역학 속으로 취해지고 포괄된다 (수반된다) .

자연은 전체에 걸친 창발적 속성들과 법칙들은 그 요소들의 속성 내지 법칙들과 아주 다르고 새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고, 종종 놀랄 만큼 예측 불가능하고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주 단순한 경우에서조차 아직도 '이론의 다리 (theoretical bridge)' (Jones, 1992, 196) 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창발적이고 정신적인 속성들이 이제 그것들의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생리학에 의해서 생각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부분적으로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창발적 패턴을 이루고 속성들을 형성하는 요소들의 집단적인 공간화와 시간화가 그 자체로서 인과적 복합체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는 아직 이 시간화와 공간화 '형식' 요소들을 위한 적합한 과학이나 법칙들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관적 경험의 성질들이 뇌 과정의 역학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비합리적인 가정이 아니다.



전체적인 평가
이 비판 외에 잘못된 생각들은 '체계' 모델 (196) 로서의 거대정신적 이론에 대한 언급 (Sperry, 1991b 를 보라) 과 그 이론은 "의식은 뉴런들의 체계다" (195) 라는 정신-뇌 동일성의 관점에 의거한다는 가정을 포함한다. 나는 처음부터 의식경험에 있어서 창발적이고 주관적인 정신 요인은 의식경험의 심리학적 요인들의 요소와 '다르고 그 이상' 이라는 점을 강조해왔고, 양자 사이의 차이는 창발적 속성과 그 속성의 하부구조 사이의 차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Sperry, 1969, 1975, 175). 의식하는 속성은 그 하부구조와 분리할 수 없지만 그것과 동일하지는 않다. 그리고 동일한 의식의 결과는 아마도 전후관게의 역학 속에서 변화되는 여러 하부구조와 함께 얻어질지도 모른다 (Sperry, 1952)

그 외의 여러 가지 더 미묘하게 남아 있는 문제들이 역사적인 배경을 띤 혼란과 같이 일반독자들을 잘못 있을 수도 있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제기된 철학적 쟁점들 중 몇가지는 물론 끊임없이 논증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존스의 전반적인 관심에 대한 대답의 요점은 여러 근본적이고 중요한 오해들로 인하여 그 결과로서 생기는 논증들이 들어맞지 않게 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되새겨보자면, 존스의 주장이 의식에 관한 철학에 있어서 여러 개인적 견해들-예를 들면, 에클스, 펜핀드, 호프스태터와 대넷, 네이글, 로빈슨 등등-을 인용함으로써 철저히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와는 반대로 내가 지지하는 입장은 정신과 행동을 전공하는 분야에 대하여 최근의 공동적인 대부분의 판단을 고려해볼 때 행동과학의 전 분야에서 용인되고 있는 정신주의 교설의 기본내용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철학뿐만 아니라 약 20 년 이상을 지속하고 성장해온 과학의 증거가 있는 역사적 발전에 기초한 것이다 (Baars, 1986 ; Gardner, 1985 ; Sperry, 1987) .

더 나아가 기초적인 새롭고 중요한 개념, 즉 인과적 설명을 위한 변형된 패러다임은 그러는 도중에 철학 (Bung e, 1977 ; Grene, 1988 ; Rottschaefer, 1991) 과 인식론 일반을 포함한 다른 분과에서 부가적인 연구 분야를 획득해왔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행동과학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에 있어서 중요한 혁명으로 향하고 있다는 강한 징후를 띠고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답변은 아직은 의식이나 전체적인 정신-물질의 쟁점에 있는 것은 확실히 아니다. 그리고 어떤 가정된 답변에 기초한 논증의 타당성에 관한 존스의 의문은 정당하다. 하지만 동시에 의식의 본성은 그렇다치고, 펜필드 (1975) 가 지적하였고 나 역시 그러한 (Sperry, 1965) 의식에 관한 우리의 가정은, 우리는 과학이 최종의 답변을 제시할 것을 기다릴 수 없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우리의 행동에 불가결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다. 현재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최선의 답변은 모든 여러 각도에서 평가를 내리는 전문가들의 공동판단에 기초한 거시적 정신 모델 (macromental model) 이라고 여겨진다.

논문 마지막 장에서 존스는 모든 인간의 이론화와 어떤 추론된 제안 (혹시 '내적 불완전성' 에 관한 존스 자신의 추론도 포함하는가?) 에도 적용된다고 말해지는 '내적 불완전성' 의 세가지 형태를 기술하고 있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형식에 따르는 추론된 논리학은 그것에 의존하여 출발하는 모든 가정들을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인간의 추론과 이론화가 처음의 옳은 가정에 기초한다면 그것들을 아주 확실하게 하지만, 반면에 위에서와 같이 추론이 잘못된 가정 위에서 출발한다면 당연히 잘못된 결론이 따라나오게 된다. 나자신의 경우는 출발하는 가정들이 통합적인 정신-뇌 실재 세계의 공진화 (coevolution) 속에서 확실한 토대가 되는 출처를 조사할 수 있도록 가정된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용어로 고안되었다.

다른 밀접한 연관된 불완전성의 형식은 정신-뇌 조직은 논리적으로 (역설적으로) 정신-뇌 조직의 정신-뇌 조직에 관한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함축한다는 것이 포함된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그러나 이 추론은 같은 종 (species) 이나 다른종의 다른 의식하는 정신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Sperry, 1965, 83). 이것과 그리고 "모든 이론들은 여러 면에서 불완전하다" 라는 내용은 아인슈타인, 다윈, 그 외 다른 사람들의 이론에 적용되지만, 실용적인 문제를 향해 맞추어진 구도에서 보자면 그것들은 인과적 상호 관계의 실재 세계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과학의 실질적인 발전을 방해해왔던 것 같지도 않다.

마지막의 중요한 비판에서, 존스는 결론부분에 있는 나의 몇몇 진술들을 논의한다. 그는 우리의 궁극의 믿음들은 현대 주류 과학의 그물에 걸러진 것 이상의 것에 기초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내 생각에 이 점은 확실히 잘 지적한 것이지만 나는 더 이상 동의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정신적 텔레파시, 모든 신비주의 ...... 그리고 주류 과학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배제된다" 는 나의 진술은 물론 내가 이전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많은 것들이 배제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이 부분은 원고에 나중에 덧붙여진 것으로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야 했다. 예를 들면, '~안에 받아들여지니 않은 (not accepted in)' 대신에 '~에 의하여 모순되는 것 (anything contradicted by)' 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 각각의 입장은 실제에 있어서는 겉보기보다 더 많은 공통된 부분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존스가 자기는 "종교는 과학과 직접 모순되는 명제를 믿을 수 있거나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고 표현할 때 (200) 더욱 그러하다.

장점과 약점의 조화 : 실용적인 반성
상술한 과학과 일치하는 믿음의 체계는 예를 들면 진실성, 문화적 편견 없이 폐쇄적이지 않은 보편성 (Toynbee & Ikeda, 1976), 그리고 본질적으로 지구를 살리고 세계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잠재력과 같은 명백한 장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생물 중심의 윤리 도덕적 규범과 함께 동식물의 분포 지역에 지구상의 선취권을 부여하고, 지구상의 존재를 위한 최고의 계획에 걸맞는 기준을 제시한다. 오늘날의 악화되는 환경 위기와 점증하는 생존의 위기를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생물권의 지속적인 특성을 유지하고 고양하기 위해 행동할 가치를 증진시키고 사화적인 가치 우선권의 재편성에 의해서 오늘날의 지구사의 어려움으로부터 빠져나올 방법에 대하여 개념적으로 정의된 해결을 설명한다. 후자는 필수적인 중요한 단계로서 널리 인정되었다 (예를들면 Berry, 1988 : Brown, 1981 : Sperry, 1972 : White, 1967). 일단 이렇게 추진하는 새로운 가치와 사회적인 정신자세가 자리잡는다면 그 나머지것들은 자연히 뒤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과학과 일치하는 믿음의 체계는 이미 받아들인 것을 수월하게 단념하려 하는 명백한 결점을 갖는다. 이것은 전지전능하고 고귀한 목표를 갖고서 지배하고, 궁극의 도덕적 정의 (justice) 를 결정하고 또다른 존재 영역에서 영원하고 의식적인 내세를 약속하고-혹은 이 세계 내에서의 계속되는 재생 (reincarnation) 을 약속하는, 전능하고 인격적이고 돌보는 하나님 (Deity) 을 갖는 전통적 신앙에 의해 충족되는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요구들을 만족시킴에 관련하여 나타난다. 특히 뇌사에 따른 의식 경험의 지속은 현대의 정신-뇌의 신경과학과, 의식을 살아서 기능하는 뇌와 뗄 수 없는 역동적 속성이라고 보는 현재의 의식에 대한 개념에 의해 명확히 배제되는 것 같다.

이것과 그리고 이것에 연관된 문제들 (Sperry, 1983) 에 관한 앞서의 간략한 논의에서 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한 존재와 의미에 관한 개선되고 좀더 현명하고 세련된 해석이 오성의 높은 단계를 통하여, 계속되는 내세를 바라는 자연적인 인간의 욕망을 해소시키는 데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른 고찰들 중에서 과학의 새로운 관점은 베토벤,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다윈, 아인슈타인 등의 최고의 것들이 아직도 우리와 함께 있다는 점에서, 의식하는 자아의 최상의 단계가 뇌사 이후에도 보존되도록 한다. 그리고 같은 원리가 여러 관점과 방식으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또한 여러 가지의 다른 정서적, 정신적인 요구와 삶의 의미의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있어서의 역할이 우주와 창조된 인류를 조절하는 창조적인 우주의 힘의 현재적인 재해석을 통하여 대부분 보존되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 본성을 포함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의 실재적 구도 내에서 진화하는 자연에 의하여 이 힘들을 개관할 때) 부모, 가족, 선도자 그리고 현실적인 사화문화적 요인들의 창조적 역할에 대하여 새롭고 강력한 중요성을 두는 것이 한 예다. 그런 요인들은 모두 새로운 해석에 의해서뿐 아니라, 사회를 지탱하는 제도적인 개혁과 다른 조화된 사회적 개혁에 의해서도 강화될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다 높은 의미의 정신적 느낌은 직접적인 가시적 현전 혹에서 더 가까운 신성에 대한 믿음으로 더 강렬해지기까지 한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한에서 하늘에 가장 가까운 것은 우주 (out space) 의 격렬하고 황량한 무한한 공간 (immensities) 속의 그 어딘가의 너머에 있지 않다 (Friedman, 1991). 천체물리학과 우주론의 발전은 관찰하려는 장소가 지구상의 바로 여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점점 더 가리켜주는 것 같다. 우리의 지구가 얼마나 초월적이고 거룩한가 하는 것은 이제 우리들과 앞으로의 세대들의 생각에 달려있다. 상술한 관점에서, 최상의 의미는 영원히 혹은 적어도 장기간에 걸친 발전적 관점으로 계속 관찰될 수 있다. 이것들은 또한 무한한 유토피아적 가능성들-예를 들면 엄청난 속도로 대기권 밖으로의 여행이라든가, 노화과정의 조절이라든가, 컴퓨터로 질이 향상된 경험의 높은 차원, 그 외에 아직 꿈꾸어보지 못한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무한한 발달 - 을 허락하는 개방적인 미래를 포함해야 한다. 초기 재사들에 있어서 우리가 오늘날 갖고 있는 존재의 종류에 대한 개념이 있을 수 없었듯이, 우리는 또한 앞으로 있을 지 모를 존재의 차원에 관한 어떠한 이해도 가질 수 없다. 현재로서 보다 높은 의미의 개인적 만족과 감각은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창조적인 우주적 모험의 직접적인 일부가 됨으로써 그리고 그에 대해 공헌함으로써 발견될지도 모른다.

그런 시각의 관점으로 인한 궁극적 폐해는, 그러나 꼭 정통기독교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거대한 세계 사멸로 인하여 그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따라서 어렵게 얻은 창조적 진보의 지복천년 (miliennnia) 은 세상에서 잊혀지고 우주의 무의미로 사라질 것이다. 이것을 피하는 것이 우리시대의 최우선적인 과제다 : 도덕적으로 지성적으로 그리고 모든 다른 방법으로 (Kaufman, 1985 : Starr, 1984). 이 필연적인 긴요성은 궁극적인 세계관과 가치-믿음 체계의 모든 현대의 평가에 걸맞는 전후 관계의 틀을 짜는 것이다. 고차의 자질(high-quality) 을 지탱하는 생존은 그것에 의해 살고 지배되는 엄격히 개정된 사회적인 가치 우월성을 요구할 것이고, 이미 주장되었듯이 가치-믿음 체계는 상술한 방향을 따라 그러한 변화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의 승인을 가속화하는 것은 인간이 자질 있는 생존과 우주적인 소멸사이의 구분을 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당연히 따라 나오게 된다.

확립된 종교에 의해 전달되는 생생한 정서적 충족은 개념적인 교리 자체로부터뿐 아니라 상당 부분이 부수하는 더 현실적인 (tangible) 것, 즉 개인적이고 사회적으로 연루된 것과 더불어, 연합예배, 음악, 성서, 찬송가, 기도, 건축물 등등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쌓아가는 이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것 (this-world surround) 에 의해서 전달된다. 새로운 믿음 체계를 위해 그러한 버팀이 되는 환경 (supportive surround) 을 획득하는 과정은 오늘날 신중한 방법으로-오래된 친밀한 찬송가와 기도문을 해석하고, 새로운 것들을 작곡하는 등의 단순한 것에서 시작하여-상당히 촉진될 수 있다.

임신중절 합법화 반대 (pro-life) 대 임신중절 합법화 지지 (pro-choice) , 개발지지 (pro-development) 대 환경보존 (pro-environment) 들 간의 어렴풋이 나타나는 대결들과 그리고 당면한 인간의 요구가 다음 세대의 요구와 생존할 수 있는 생태계에 점점 불리하게 작용해야 했던, 과거에는 직면하지 못했던 여러 쟁점들이 옳고 그른 궁극적인 지침 속에서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다가올 이런 어려운 선택들은 환경보존지역, 멸종위기에 있는 품종, 그리고 다른 원대한 환경주의자들의 가치를 지지하며 직업, 생활양식, 앞서의 특별한 산물, 수지 맞는 개발이득 등을 포함한 개인적 희생을 의미 할 것이다. 만일 새로운 우선권이 신성 (the scared) 의 변화된 의미에서 지지된다고 보이면, 이러한 선택들은 좀 더 쉽고, 효과적이고 급속히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인구 증가의 내적인 계기와 그 부작용을 고려할 때, 시간이라는 요인은 실로 열렬한 종교적인 열망과 정열의 힘에 의해서만 제때에 성취될 수 있는 필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물려받은 것과 질에 있어서 동일하도 정당하게 가치가 있는 환경을 물려주기에는 이미 되돌릴 어떤 지점도 지나가버린 것 같다. 어쨌든 우리가 바라보는 논리는 단순하고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 가치, 생활양식, 목적들 그리고 기타의 것에 있어서 필요한 개선이 더 빨리 나타날수록, 우리가 다가올 세대에게 넘겨줄 생태계의 남아있는 자질들은 좀 나아질 것이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세대에서 보는 축적된 의미의 지복천년을 우리 자신이 잃지 않으면서 좀더 나은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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