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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학은 인간본성에 관하여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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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과학은 인간본성에 관하여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가 : james W. Jones




 
 
   










신경과학은 인간본성에 관하여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가

-로저 스페리에 대한 답변-



과학사상6호(1993년-가을) : 제임스 존스 (James W. Jones), 범양사 출판부, Page 162~180



로저 스페리의 비전

중요한 실험들

 바이오피드백과 자기조절

 펜필드

 콘후버와 리벳

체계모델은 의식에 관한 충분한 설명인가?
불완전성의 세 가지 유형

 괴델의 불완전성

 실험적 불완전성

 이론적 불완전성

스페리의 계획이 함축하는 것




(주석 : 심리학, 종교학 분야의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러트커스 대학교 종교학과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위 논문은 Zyon : Journal of Religion and Science, vol.27 no.2 (June, 1992) 에 발표된 것이다.)

최근 <자이건 Zygon> 지에 개재된 중요한 논문에서 로저 스페리 (1991) 는, 초기에는 정신-뇌 관계 (mind-brain relationship) 의 환원주의적 이해를 받아들였다가 는중에는 자신들의 과학의 발견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루로 그것을 거부한 다른 신경과학자들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카를 래쉴리 (Karl Lashley) 는 개별적인 기억의 고유한 위치를 찾기에 일생을 바쳤으나, 그것을 발견하는데는 실패하여 기억은 전 피질계 (the entire cortical system) 의 속성이라고 결론지었다 (1950). 찰스 셰링턴 (Charles Sherrington) 경, 와일더 펜필드 (Wilder Penfield) 와 존 에클스 (John Eccles) 경은 환원주의적 패러다임으로 신경학 (neurology) 을 연구한 후에 이원론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스페리는 "이제 나는 인간 영혼을 포함한 우주 내의 모든 것은 완전히 물리적인 것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는, 즉 과학은 의식 있는 정신적 혹은 영혼의 힘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과학의 지배적 교설과 고학이 전통적으로 지지하던 진리 유형을 거부하는 모든 계열을 옹호하게 되었다" (1992, 238) 라고 쓰고 있다.

요약 : <자이건> 지에 게재된  최근의 논문에서 로저 스페리는 중추신경계내에서의 창발적인 인과원리 (principle of emergent caution) 에 기초하여 과학과 종교의 통합 (unification) 을 논증을 펴고 있다 (1991. 6.). 최근의 몇몇 실험과 함께 스페리의 주장을 예시한 후에, 나는 그의 결론이 그의 논증과 현대의 신경과학의 성과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통합된 접근 방식 대신에 인간본성에 대한 엄격한 신경과학적 설명 속에 내재하는 불완전성에 서해서 요구되었던 종교와 과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다원론적인 접근방식을 시시하고자 한다.


로저 스페리의 비전
스페리가 말하는 정신적인 힘들 ('마음, 정신, 믿음, 가치') 은 뇌에서 진화해온 신경학적 조직의 상부단계로부터 발생하는데 "그 정신적 임들은 뇌 전체의 인지적 단계에서 전체적 (holistic), 즉 '기능주의자 (functionalist)' 의 기반 위에서 상호 작용하는 .......... 환원 할 수 없는 창발적속성들 (emergent properties) 의 형태로 뇌 과정의 상위 단계 (인지적 단계) 에서 뇌 활동의 인과적 연쇄로 나타난다" (1991, 243) 는 것이다.

이것은 유기적 구성체들이 그것들의 개별적인 요소들이 갖지 못한 속성들을 발달시키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의 문장은 단어들로 이루어지고 단어들은 문자들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문장은 문자들의 느슨한 집합 이상의 것이다. 하나의 문장은 일정한 유기적 체계와 독자를 필요로 한다. 또한 구조를 지배하고 해독하고 그리고 문장을 번역하는 규칙은 개별 문자들을 위한 규칙으로 환원될 수 없다. 열역학에서 온도에 관한 진술은 정보의 손실 없이 분자운동에 관한 진술로 결코 번역될 수 없다. 분자들의 집단은 온도를 나타낼 수 있지만 각 개별 분자들은 그럴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조직으로서 뇌는 개별적인 뉴런들의 속성 이상의 속성들을 나타낸다.

뇌는 신경해부학과 생리학의 매커니즘 이외의 어떤 부가적인 요소들을 요구하지 않고도 이것을 할 수 있다. 펜필드나 에클스 같은 동료들이 이원론을 받아들인 반면에 스페리는 "비신체화된 (unembodied) 마음이나 영혼같은 이원론적 초자연적 믿음들을" 거부한다. (1992, 242). 요소들의 집합적 행동은 떨어져 있는 부분들보다 오히려 요소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서 지배될 수 있다. 총체의 행동이 그체계로부터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모든 사건을 위한 단일한 직접적인 원인을 발견할 필요를 없애고, 어떤 비물리적 힘을 조직의 행동 이유로 가정할 필요를 제거한다. 의식의 실재 (reality) 와 선택 (대뇌 하드웨어에서는 발견될 수 없었기 때문에 초기 환원주의가 환상이라고 취급한 현상) 에 관해서는 펜필드와 에클스에 동의하면서도, 스페리는 인간은 생물학과 과학의 창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스페리는 비물리적 영역보다는 오히려 신경조직으로부터  생기는 속성들 속에서 의식의 실재와 선택을 찾아낸다. 왜냐하면 정신-뇌 조직은 "전체로서 그 자신의 신기한 창발적 속성들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1991, 246).

이 창발적 속성들 가운데 첫 번째는 의식의 능동적인 행위로서, 그것은 "신경 자극 (neuronal firing) 의 패턴을 인과적으로 계획해야 한다" (1991, 244). 따라서 주관성 (subjectivity) 은 "결코 두뇌 활동의 단순히 무력한 부수 현상 (epiphenomenon) 이 아니다. 주관성은 그 자신의 타고난 권리상 강력한 추진력이 된다" (1991, 239). 의식은 더 이상 일차적인 물리적 과정의 결과로 단순히 취급될 수 없다. 주관적 상태는 물질 세계에 의해서 영향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인과적 동인 (causal agents) 이 되었다. "비인과적 관점으로부터 인과적 관점으로의 의식의 전환은 주관적 인식 (subjective awareness) 이 물리적 세계와는 실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고려에 넣고 생각해야 한다고 (표명하고 있다)" (1992, 239). 의식하는 행위는 신경계 (neuronal organization) 에서 생겨나고 그 다음 신경계에 대한 지배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창발적 힘은 인과성의 새로 고안된 모델을 필요로 한다. 즉 "계층적 조절 (hierarchic control) 의 '교호적 (reciprocal)' 혹은 '이중 결정론적 (double determinate)' 형태로 전통적인 상향적 인과관계 (bottom-up causation) 와 하향적 인과관계 (top-down causation) 를 결합한다" (1991, 243). 이러한 상호 결정론에서, 의식적 선택들은 "그것들을 성립시키는 신경세포의 활동에 대한 하향적 조절과 동시에 발생하고 수반하는 형태 (concomitant supervenient form) 를 띤다" (1992, 243).

앞서 양립할 수 없다고 보인 것은 이제 호호 인과성('하향' 과 '상향') 이라는 모델로서 조화되고, 물리적 과학의 발견들과 더불어 의식의 주관적 실재를 한곳에 모은다. "새로운 전체적인 창발적 하향추론은 과학의 경험적원리를 위반하지 않고 재래의 미시적 연쇄 인과관계의 논리를 우회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확실한 방법을 제시한다" (1991, 244).

새로 고안된 이과관계 모델은 이간본성 (human nature) 에 관한 비전을 동반하는데, 스페리에 의하면 그것은 앞서의 종교적 이론들과 고학적인 이론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들을 결합하고 있다.

비인과적 지위로부터 인과적 지위에로의 정신 특성들 (mental qualities) 의 변화는 기존의 유물론자 / 행동주의자라는 신념에 기본적인 수정을 요구했다. 뇌기능은 더 이상 화학이나 분자생물학에 의해서 완전히 성명될 수 있다고 생각 될 수 없었다. 또한 상부조직망의 속성들은 환원될 수 없는 조절동인 (control agents) 으로서 포함되어야 한다. 마음과 정신을 배제하는 대신, 이 관점은 통합적이고 제거할 수 없는 기능적인 동인-물론 비신체화되고 자유로이 흘러다니거나 혹은 에테르성의 형태가 아니라 사의단계 (upper-level) 뇌 과정의 전체적속성-으로서 모든 풍부한 주관적 특성들을 보유한다. 오랫동안 금지되어온 주관적인 상태와 성질들은 진화의 최고 성과로서 전면-말하자면 운전석으로-에 나타났다. (1991, 244.)

새로운 과학적 패러다임을 분명히 하는 외에 스페리는 가치와 믿음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향 인과성' 의 존재는, 즉 "뇌의 주관적인 가치-믿음 조직은 무엇보다 인간문화를 형성하는 강력한 내적 힘" 이라는 곳을 의미한다 (1991, 238), 무엇인가를 선택하라! 그리고 그 선택들이 이루어지는 가치와 믿음을 선택하라. 그의 논문 대부분은 과학으로부터 유래되고 우리가 직면하는 중요한 결정에 적용될 수 있는 새롭고 '전체적인' 윤리를 주장하는 논의로 가득 차 있다.

스페리가 자신의 논문에서 중점을 둔 윤리학은 여기에서는 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스페리의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측면에 집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결론들은 대부분 자신의 논증과 현대 신경과학의 발견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스페리는 종교와 과학간의 역사적인 분쟁을 극복하고, 인간본성과 우주에 있어서 인간본성의 위치에대해 완전한 설명을 제시하고자 하는 거대한 비전을 제안하고 있다. 창발적인 인간관계는 '과거의 양립할 수 없는 객관 대 주관의 구조도 기존의 철학적 이분법 (dichotomies) 으로부터 벗어나는 통합적이며 중간적인 입장 안에서 화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낡은 이분법의 대립적 특징들-정신과 물체, 사실과 가치, 주관과 객관, 자유와 결정론-은 단일하고 일관적인 종합적 세계관 내에서 모순되지 않고 조화된다 " (1991, 242).

스페리는 현대 신경과학의 성과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 이전의 물리적 과학의 환원적 유물론을 넘어서도록 재촉하는 여러 방법들을 명쾌하면서도 강력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스페리는 단지 신경과학의 기초만으로 통일된 비전을 제시했거나 혹은 제시할 수 있는가?

중요한 실험들
이 논문에서 스페리는 그의 입장을 진술하였으나 최근 연구에서 자기 입장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의식과 뇌 사이의 관계에 직접 연관되는 세 가지 연구 분야를 간단히 논하고싶다. 이 주제에 관한 어떤 논의도 모종의 방법으로 그것들을 혼합해야 한다.

바이오피드백과 자기조절
바이오피드백 (biofeedback) 과 자기조절 (self-regulation) 에 관한 문헌을 개관하면 사람들은 정신의 이미지를 형성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한 의식적인 조절을 발달시킴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 자신의 뇌파조절에 의한 중추신경계의 기능 ; 심장박동과 호흡률을 변화시킴에 의한 말초신경계의 기능 ; 통증 중추를 지배함으로써 의식 경험을 조정하기 ; 예를들어 백혈구의 층을 높이거나 낮추는 생리학적인 기능  (Basmajian, 1980 ; Green & Green, 1977).

신체-특히 뇌-가 정신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머리를 한 대 치면 확실히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정신이 신체를 조절한다는 것 또한 똑같이 참이다. 그런데 어떻게 순수하게 내적인 정신의 활동이-정신 속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것처럼-뇌 기능이나 생리학적 활동에 맏은 생리학적인 과정과 구조적인 유사성을 갖지 않는다; 나는 어느 젊은이에게 자기 정신을 지침판 (dials) 과 스위치가 있는 우주선의 조정실이라고 상상하고, 통증에 연결된 지침판을 스스로 내리는 자신을 그려보면서 팔의 통증을 조절하도록 하는 것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바이오피드백 결과들은 그것에 의하여 신체가 정신을 조절하는 만큼 정신이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스페리의 '창발적 인과원리' (1991, 245) 를 예증한다; 순수한 정신의 활동에 의해서-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 같은-개인은 뇌 생리학과 말초 생리학을 조절할 수 있다 (정신적 상상의 효용에 관한 임상보고서의 알기 쉬운 개관을 위해서는 Jaffe, 1980 과 Green, 1984 를 보라).

펜필드
뇌에 대한 초기 연구가이며 지도 작성자인 신경외과의 펜필드는 광범위한 전기자극실험을 통해 환자는 앞선 경험을 되새길 수 있지만 그것을 꼭 기억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그는 전기자극은 환자의 팔을 움직이게 할 수 있지만, 그의 뇌가 전극에 접촉되고 있는동안 수술대 위에서 완전히 의식이 있던 환자는 팔을 들어올리고 나서 "당신이 팔을 들어올렸다. 나는 올리지 않았다" 고 보고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그 사람은 팔의 운동을 인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을 원치 않았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일부분은 시계 밖에 (outside watching)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펜필드는 노력하였지만 전기자극이 자기인식 (self-awareness) 이라는 이 경험을 생산하는 어떤 장소도 발견할 수 없었다 ; 어떤 국부적인 전기 접촉도 의지, 선택 혹은 자기반성등의 감각 (sensation) 으로 귀착될 수 없었다. 그런 경험들은 뇌에 속박될지도 모르는데, 만일 그렇다면 그것들은 뇌를 활동시킴으로써 직접적으로 접근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신-뇌 조직은 그 안에 직접적 활동 (팔을 움직임), 활동에 대한 인식 (팔을 움직인다는 것을 아는 것), 또한 그 인식을 인식함 (이것은 나의 활동이 아니라 너의 활동이다) 이 있는 바의 계층적 방식으로 조직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두 가지는 뉴런 활동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펜필드의 발견들은 세 번째 것은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제안한다.

《마음의 신비 The mystery of the Mind》(1975) 라는 책에서 펜필드는 이결과들을 재삼 숙고했다. 그는 뇌로의 정신의 환원을 주장하면서 신경학에서 그의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발견의 결과로서 펜필드는 개인은 두 가지 요소-물리적 뇌와 비물리적 자기인식적 정신-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작업을 끝냈다. 둘 사이의 관계는 컴퓨터와 프로그래머 사이와 비슷하다. 프로그래머는 단지 컴퓨터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지만, 그는 그 기계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정신과 뇌에도 마찬가지다.

콘후버와 리벳
펜필드의 전기자극에 관한 초기 계획안은 확장되어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들을 이끌어냈다. 콘후버 (Kornhuber, H. H.) 는 뇌파 (E. E. G.) 에 연결돼있는 주체로 하여금 인위적이고 임의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였다. 모든 외부 자극은 사라졌다. 뇌파는 손가락이 움직이기 전에 발생하는 뇌에서의 전기활동의 점차적인 상승을 나타냈다. 콘후버는 이것을 '준비전위 (readiness potential)' 라고 불렀다. 이 '준비전위' 는 뇌 전반에 걸쳐 발달하기 시작하고 손가락이 움직이기 전에 운동피질 (motor cortex) 상에서 점차로 강화된다. 이 산재한 준비전위에 대하여 명백히 감지할 수 있는 선행자는-비록 더 나은 도구가 그 중의 하나를 발견한다 해도-없다. 현재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단순한 행동에 대해서조차 단일한 뉴런의 '원인 (causes)' 이 없다. 하지만 오히려 전 뇌는 그 행동에 앞서 그 자신을 움직이기 (mobilize) 시작한다. 그 움직임을 '유발 (causes) 하는 것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 (콘후버의 연구는 포퍼와 에클리스의 논문에서 논평되었다, 1977).

뉴런 인과관계에 대한 의문은 벤저민 리벳 (Benjamin Libet) 의 연구에 의해 전기자극을 받는다면 주체는 신체의 반대편에 있는 손에서 통증을 느낀다고 보고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뇌에 대한 단일하고 갑작스런 자극은 느껴지는 감각 (felt sensation) 을 낳지 않는다. 주체가 감각 (뇌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손에서 느껴지는) 을 느끼기 위해서는 뇌에 0.5 초간의 자극이 필요하다; 전기활동 역치 아래에서는 전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Libet, 1967).

그러나 손가락의 피부가 자극받으면 한 번의 아주 약한 자극으로도 의식적 감각을 만든다. 다양한 연쇄의 피부와 피질에 대한 자극을 포함하는 일련의 정교한 실험에서, 리벳은 피부에 가해진 단일 전기충격은 의식경험을 위해 필요한 역치를 넘어서기에 충분한 전기활동을 생산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의식적 감각은 있다는 것을 확립했다. 또한 피질자극은 감각이 있기전 0.5초의 지체가 필요하다. 하지만 피부자극은 즉각적 반응을 나타낸다.

뉴런활동과 의식 사이의 단순한 원인-결과 관계가 문제다. 인과성은 시간성 (temporality) 을 필요로한다. 그러나 여기에 요청된 '원안
(충분한 뉴런 활동)' 이전에 '결과 (의식적 인식)' 의 발생이 있다. 리벳은 충분한 피질 활동의 개시와 함께 뇌는 자극 순간의 0.5초 후에 감각을 사출한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그런 결과들을 초래하는 신경 매커니즘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리벳의 연구는 피질자극은 말초신경자극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뉴런의 결과와 실험 결과를 초래한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그래서 비교가 가증하고 시간과 연속 (sequence) 에 대한 주체의 보고는 합리적으로 믿을 만하다. 하지만 비록 그것들이 종종 신경생리학적 연구에 도입될지라도 (Libet에 의해 논평된다, 1981) 이 가정들은 도전을 면치 못한다 (Churchland, 1981).

리벳의 시간적 전이이론 (theory of temporal displacement) 은 어떻게 신경계로부터의 입력이 의식경험으로 전환되는가라는 더 폭넓은 문제의 일부다 ( Libet 자신의 제안, 1981). 예를들면 시각 과정의 영역에서 일련의 따로 떨어져 있는 정지된 그림들은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그림으로 변환되고, 뉴런의 평평한 배열은 3 차원적 시각이미지로 전환된다. 이 과정과 연결된 여러 중추들이 현재 자세히 그려지는 동안 그에 의해 신경자극이 의식경험으로 되는 실제 과정은 이해되지 않는다.

명백히 이 세 가지 성과들은 모든 사고나 정신 행위의 직접적 원인으로서 특별한 신경 사건 (event) 을 발견하고, 사고에 관한 진술들을 완전히 신경활동에 관한 진술로 번역하고자 했던 초기의 환원주위 ('상향') 에 대한 스페리의 거부를 뒷받침한다 (Maranto, 1984). 그들은 또 이원론의 입장과 양립하고, 에클스, 포퍼, 펜필드 그리고 이 입장의 다른 옹호자들이 지적하고자 하는 사실과 양립한다. 에클스는 리벳 (그리고 콘후버) 의 결론은 이원론적 입장과 자극들을 직접 인식하게 되는 반자율적인 (semi-autonomous) 정신의 존재를 뒷받침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에클스는 현재 신경학 연구에서 어떤 결함이 발견되더라도 설명할 수 있는 '해결책 (deus ex machina)' 으로서 '정신' 에 호소한다 (이원론을 주장하는 Eccles의 논증에 대한 비판은 Dennett의 논문에서 발견된다, 1979).

다니엘 데넷 (Daniel Dennett) 과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 Douglas Hofstadter) 는 정신-뇌는 통합체계 (unified system) 라는 스페리와 의견을 같이 한다 (1981). 그들은 또한 '상호 결정론' 과 '하향 / 상향 인과성' 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1981, 197). 호프스태터와 데넷에 있어서 이해의 기본 단위는 관념 (idea) 이나 신경 (neurons) 이 아니라 체계의 상태 (states of a system) 다. 사고, 느낌, 이미지들은 신경자극과 똑같은 체계의 부분들이고 신경전이체 (neurotransmitter) 의 운동도 그 일부분이다. 어떤 부분도 직선적인 방식으로 다른 부분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은 통합된 과정의 부분으로서 함께 발생한다. 체계의 상태는 변화하고, 뉴런은 자극되고, 이미지가 생기고, 행동이 발생한다. 이것은 어떤 연쇄 속에서 인과적으로 연결된 서너 개의 분리된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한 문의 (reference) 에 서너개의 다른 틀 (frame) 을 통해 보인 정확히 똑같은 현상들이다. 따라서 인과성이라는 귀찮은 문제와 신간적 연속이라는 부수적인 문제도 간단히 제거된다.

예를들어 콘후버가 '준비전위' 에서 관찰하고 있는 것은 손가락을 움직이는 '결정 (decision)' 의 신경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운동영역에서 전기활동의 상승과 손가락을 흔들려는  '결정' 사이를 포함하는 체계전환의 상태 (the state of the system shifting) 다. 전환하는 전체계의 배열과는 달리 개별 뉴런이나 뇌 전체에서 준비전위의 상승을 야기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은 없다. 신경자극을 애기하는 신경자극의 가설적 무한후퇴는 없다. 이 모델은 또한 '정신이나' 뇌를 독립적인 변인 (variable) 으로 생각할 필요성을 없애 버린다. 뇌 손상은 정신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고 기술될 수 있고 정신의 이미지는 뇌파 조절로 성명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단일체계 (single system) 의 교호적 상호 작용의 예들이다.

이 모델의 중요한 쟁점은 펜필드가 설명하는 일종의 자기인식이다. 데넷이나 호프스태터는 이 정보 과정 단계를 단순한 피드백을 능가하는 '하이퍼루푸 (hyperloop)' 라고 부른다. (1981,191 ~ 201). 피드백은교호적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온도조절장치는 미리 정해진 온도보다 높아지거나 낮아지면 스위치가 차단되기 때문에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가열기관이나 냉각기관은 온도가 미리 정해진 온도로 돌아왔을 때라야 활동한다. 온도조절장치는 피드백의 한 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인식의 한 예라고는 누구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건물의 가열-냉각 메커니즘의 행동을 지배한다. 그래서 기본적인 온도의 인식을 나타내지만 그 다음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건물의 외부와 결합하여 온도조절장치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날씨나 계절에 의존하여 그 자체의 설비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이것이 결정적인 물음인데-더 복잡한 피드백 루프는 자기인식의 상태가 될 수 있거나 또는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단순한 피드백에서 의식으로의 획기적인 비약을 필요로 하는가?

가장 복잡한 온도조절장치라 하더라도 단지 간단한 피드백만을 수반한다. 더 복잡한 예는 카메라에 연결된 컴퓨터이고 음성 신디사이저 (synthesizer) 가 연결된 컴퓨터일 것이다. 컴퓨터는 그 자체를 가리킬 때 "나는 나 자신을 알고 있다" 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인식과 유사한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컴퓨터-카메라-소리-모듈 (module) 은 자신을 감각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감각하고 있음을 인식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그 자신의 팔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내팔이 움직이는 것을 본다" 라고 말하지만, 누가 혹은 무엇이 그 운동을 야기하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펜필드의 환자 한 사람과 같을 것이다. 호프스태터와 대넷의 용어에서 인식 (awareness) 은 피드백 루프뿐 아니라 '하이퍼루프' 도 포함하는데, 하이퍼루프에 의해서 피드백은 피드백 주위에 부여되고, 그래서 그들은 컴퓨터나 카메라가 의식의 적합한 모델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한다 (1981, 261). 그러나 스페리처럼 그들도 이 하이퍼루프가 뇌 체계의 창발적 으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점에 대한 논의는 다음에 계속될 것이다.

체계모델은 의식에 관한 충분한 설명인가?
어떤 것을 체계의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A1이 체계 A의 속성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조건은 : (1) A1 은 A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2) A1 은 A 와 공통적인 무엇을 갖는다. 아마도 이것은 단어들과 문자들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설명해 주는 말일 것이다 : 하나의 단어는 흔히 글씨로 쓰인 언어적인 형태다. 혹은 하나의 세포와 그것의 화학물질 사이의 관계가 그러하다. 즉, 하나의 세포는 화학물질의 체계이고 세포는 화학물질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관계를 이루는 세포와 화학 물질들은 원자들과 분자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모든 비유에 유사한 실체 (entities) 로 이루어진 체계들이 포함된다 [단어들, 세포들, 음표들 등. Hofstadter의 유명한 '앤트푸그 (antfugue)' 의 개미 콜로니조차 단지 개미들로 이루어져 있다 ( Hofstadter & Bennett 1981 : 140 ~ 191)].

그러나 만일 의식이 뉴런들의 체계라고 말한다면 곧바로 문제점에 부딪치게 된다.

1. 의식은 뇌와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은 그러한 모델을 논증하여야 할 것들 중의 하나다. 이러한 믿음을 가정하면서 시작하는 논증은 단순히 순환적이 되거나 그것은 이미 인정되었다고 결정짓는 것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델의 논리를 계속 탐구해 나가기 위해서 의식은 뇌와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 하지만 이 모델이 주장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의식이 뇌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논증하는 이 모델을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2.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 두 번째 가정은 정신의 체계모델은 그 자체 심각한 논리적 어려움을 갖고 있는 '동일성 이론 (identity theory)'-정신과 뇌는 동일하다는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점에서 사고와 뉴런이 동일하다고 말해질 수 있는가? 사실 그런점은 없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자.

a) 뉴런과 물리적실체 같은 중추신경계의 다른 요소들은 항상 시간 공간의 범주내에서 기술된다. 사고들은 아마도 시적 표현 ( poetic licence) 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질량, 에너지, 계수, 혹은 넓이 등의 용어로 결코 기술되지 않는다.

b) 나는 뇌에 있는 뉴런에 관하여-뉴런의 수, 밀도, 체계나 발달 등-단언을 내릴지도 모르고, 또한 실수할지도 모른다. 철학자들이 수세기동안 지적해왔듯이 내가 마음속에 사지고 있는 관념 (ideas) 이나  감각 (sensations) 에 관해서는 잘못을 범할 수 없다. 만일 내가 발에 통증을 느낀다고 말한다면 설사 발이 없다 하더라도 나는 그 감각을 느끼는데 있어서 실수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하도 명백해서 의식의 체계모델이 의존하는 동일성 이론에 치명타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을 제외하고 그것을 반복하는 것은 약간 어리석은 일이다. 사고와 뉴런이 같은 범주내에서 기술될 수 없고 같은 설명논리에 지배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과연 어떤 점에서 동일할 수 있는가? 그리고 만일 사고와 뉴런이 적어도 기본적으로 유사하지 않다면 어떤 점에서 사고는 뉴런체계의 속성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가? 하나의 단어는 문자들의 체계로서 이해될 수 있고 하나의 세포는 화학물질의 체계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는 확실히 그렇지 않다 (체계모델이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동일성 이론에 대해 종종 인용되는 비판은 Nagel, 1974 에 있고, 그것에 반대하는 중요 논증이 또한 Robinson, 1982 에서 검토되고, 확장된 비판이 Watkins, 1982 와 Poulten, 1973 에서 이루어진다).

확실히 말하자면, 사고는 사물이 아니다. 철학자들이 수세기동안 지적해온 것처럼 빨강을 보는 감각 (the sensation seeing red) 은 파랑, 간상체, 수상체, 혹은 신경과정에 관한 진술들로 환원되거나 번역되지 않는다 (Robinson, 1976). 물리학이나 신경학의 어떤 기술도 빨강의 경험 (the experience of redness) 으로 이끌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동일한 체계가 물리적인 요소와 비물리적인 요소로 구성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원론에 비해서 체계모델이 주장하는 장점은 그것이 어떻게 정신과 뇌, 정신과 물질이 상호 작용하는지를 설명할 때 곤란한 점을 제거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의식을 체계의 속성이라고 새로 이름 붙이는 것은 사고와 뇌라는 두 가지 다른 것들이 어떻게 단일한 시스템의 측면들일 수 있느냐를 명확히 해결하지 않고서는 설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위의 체계모델은 그것의 경쟁자보다 단순하다고 생각되지만, 만일 대부분 설명- 신경상태에서 의식상태로의 전환에 대한-을 요구하는 그 과정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어떤 점에서 이 단순성이 장점인가는 명확하지 않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 모델의 주창자들이 아무리 바라더라도 의식을 체계의 창발적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뇌와 사고 사이의 이론적 다리를 놓을 필요 (이원론 역시 그래야 하는) 를 제거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3.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이 모델의 장점 중의 하나는 아마도 뇌와 정신에 대한 앞서의 설명에 붙어다니며 괴롭히던 시간적 연쇄 (temporal sequence) 와 인과관계의 문제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Hofstadter와 Dennett은 이 모델을 옹호하면서 이 점을 반복했다. 1981,193 ~ 220 을 보라). 그러나 시간성과 인과성이라는 쟁점은 그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펜필드의 연구에 기초한 다음의 사유실험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아마도 실제로는 가능치 않지만 쉽게 정신 속에 그려볼 수는 있다.

당신이 뇌를 드러낸 채 수술대 위에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리고 일련의 카메라와 스크린에 의해서 당신 자신의 뇌 기능을 관찰할 수 있다고 당신은 방구석에 있는 빨간색을 알아차리게 되고 동시에 빨강을 보는 (seeing red) 시각경험을 표상하는 신경방전 (neuronal discharge) 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당신은 시각피질에서의 뉴런활동이 빨강을 보는 경험에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동시에 앞서의 후두골 활동 (occipital activity) 과 빨강의 경험간의 연결의 이끌어냄을 표상하는 신경방전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고 나서-혹은 동시에-당신은 앞선 신경활동이 빨강의 경험에 곤한 결론을 끌어냄을 표상한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신경상관자를 본다. 그리고 물론 그 결론의 신경상관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그 연결 과정의 어디에서 그것을 보는 신경상관자를 보는가?

왜 이것이 이렇게 혼란스러운가? 왜냐하면 당신의 뇌가 경험을 기록하는 것을 본다는 경험을 단신의 뇌가 기록한다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그것도 무한히. 당신은 새로운 생각을 할 때 뇌 배열이 변화하는 것을 보고 있다는 인식에 부수하는 무엇을 보는가? 당신은 당신의 인식의 인식에 부수하는 어떤 신경활동을 보는가?

자신의 뇌를 관찰하는 연쇄 과정을 다음과 같이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때 C. S.는 피질상태 (cortical stste) 를, C. E.는 의식 경험 (concious experience) 을 나타낸다.

C. S.1> C. E.1 (나는 나의 뇌를 본다)

[ C. S.1> C. E.1 (나는 나의 뇌를 본다) ]> [C. S.2> C. E.2 (나는 내가 나의 뇌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

{ [ C. S.1> C. E.1 (나는 나의 뇌를 본다) ]> [C. S.2> C. E.2 (나는 내가 나의 뇌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 { C.S.3> C. E.3 (나는 내가 나의 뇌와 나의 뇌에 대한 그 인식의 연관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

{ [ C. S.1> C. E.1 (나는 나의 뇌를 본다) ]> [C. S.2> C. E.2 (나는 내가 나의 뇌를 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 { C.S.3> C. E.3 (나는 내가 나의 뇌와 나의 뇌에 대한 그 인식의 연관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 C. S.4> C. E.4 (나는 내가 나의 뇌를 보고 있다는 것과, 나의 뇌에 대한 그 인식의 연관을 보고 있다는 것과, 나의 뇌에 대한 나의 뇌가 그 인식을 본다는 연관을 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요점은 이것이 호프스태터와 데넷이 제안하는 방식으로 체계의 상태에 호소함으로써 가설적으로 멈출지도 모를 원인의 무한퇴행 (infinite regress) 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단계가 그 이전의 것을 (혹은 그것을) 에워싸는 (encompasses) 무한퇴행 (혹은 전진) 이다. 일련의 일직선상의 원인들은 체계의 연속적 배열처럼 재구성함으로써 멈춰질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층들 중 하나가 신경활동의 전환하는 배열들에 대한 인식을 표상하고, 다른 계층이 전환하는 배열에 대한 인식에 대한 인식을 표상할 때 신경활동의 전환하는 직선상의 배열 위에 있는 일련의 점증하는 (가설적으로 무한한) 계층들을 상세히 그려보는 것을 상상하기란 더 어렵다. 그 체계의 상태를 관찰함에 부수하는 체계의 상태는 무엇인가?

사실 체계모델들을 피질상태와 의식경험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를 제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특히 문제되는 의식경험이 그 피질상태의 그 의식경험에 수반하는 피질상태에 관한 것일 때 그러하다. 호프스태터와 대넷은 의식의 모든 역설과 복잡성에 대해 충분한 관심을 가진 대가다. 그러나 그들의 '기술 (description)' 이 어떻게 '설명 (explanation)' 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지 명확하지 않고, 어느 정도까지 '복잡성 ( complexity)' (호프스태터와 데넷) 이나 '창발적 인과관계' (스페리) 의 호소가 뉴런의 본성에 의식의 본성을 더 명백히 연결하는 이론이 없이 의식을 설명하는 데까지 갈 수 있는가도 명백하지 않다.

이것은 신경과학에 기초하여 인간본성에 관한 통일적 설명을 창조하려는 스페리의 시도를 어디에 남겨두는가?

불완전성의 세 가지 유형
스페리의 작업은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불완전해보인다.

괴델의 불완전성
우리의 인식의 인식에 대한 가능한 신경학을 포함하는 사유실험은 이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을 밝혀준다. 인간 의식의 본질적인 것은 의식에 대한 의식적 설명을 가능케 하는 (스페리처럼) 자기반성 (self-reflexiveness) 이다. 수학자이며 철학자인 괴델 (Gödel) 은 추론적인 복잡성의 형식적 체계는 그 모든 가정들과 주장들을 확인할 수 없고, 요구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런 점에서 '불완전하다' 고 논증했다. 그의 연구는 그 체계 자체에 속하는형식적 체계내의 요구를  포함했다. 그래서 자기반성이라는 문제에서의 그 (him) 를 포함하고, 자기반성을 포함하는 어떤 설명에도 내적 불완정성이 있다는 결론으로 그를 이끌어간다. 그 뇌 상태를 관찰하는데 수반하는 뇌 상태의 관찰에 관한 나의 사유실험을 도표로 나타낼 때, 나는 의식에 관한 모든 기술에 있어서 가능한 불가능성을 제시하면서 일종의 괴델 문장 한 세트를 만들었다. (Findlay, 1952).

의식의 문제에 대해서 괴델 정리를 적용하는 데는 논쟁의 역사가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루카스 (Lucas, J.) 의 논문, 즉 괴델의 정리는 일관적인 유물론적 심리철학을 불가능하게 하고 (괴델 자신이 가졌을 법한 입장), 대부분태만에 의해서 일종의 이원론을 지지한다는 주장에 집중되어 있다 (Hofstadter와 Dennett, 1981, 특히 276 ~ 283에서 Lucas의 논쟁과 비판에 관한 논의를 찾아볼 수 있다) . 루카스와 유사한 대부분의 근거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나의 논의는 꼭 이원론을 지지하기 위하여 계획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단지 불완전성을 위한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이긴 하지만 유사한 결론이 (의식에 대한 모든 결론은 불완전하다) 맥긴 (mcGinn, 1989) 과 로빈슨 (Robinson, 1976) 에게서 발견된다.

실험적 불완전성
현대 신경과학은 뇌 기능의 연구에서 불완전성의 영역을 드러냈다. 예를들어 자기인식에 접근하거나 자기인식의 위치를 찾아내는데 있어서 펜필드의 실패와 신경활동의 의식경험에로의 전환에 대한 리벳의 관심들이 있다. 이것들은 더 진보한 연구에 의해서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또한 연구중인 주제에서 내재적인 불완전성을 반영한다.

신경과학에는 하나의 역설이 있다 : 전신-뇌을 연구하는 일차 도구는 정신-뇌다. 그것이 신경과학을, 말하자면 물리학이나 화학을 구별되게 하는 것일까? 아마도 물리학이 전자를 연구하는 전자로 이루어지고, 화학이 화학물질을 연구하는 화학물질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하지만 신경과학이 뇌를 연구하는 뇌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의식의 연구는 결코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뇌를 연구하기 위해서 뇌를 사용하고, 인식과정의 범주를 연구하기 위해서 인식과정의 범주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uncertainty principle)' 에서 실험적 현상은 아원자적 영역에 관한 우리의 인식에 한계를 부여한다는 '파동함수의 붕괴 (collapse of the wave funtion)' 에 관한 물라학의 논의에 비견될 수 있다. 슈뢰딩거 (Schrödinger), 위그너 (Wigner), 진스(jeans) 와 다른 물리학자들은 '불확정성의 원리' 는 물리적 세계에 환한 우리의 인식에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줄 뿐 아니라, 양자역학의 실험에서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온 인식의 환원할 수 없는 본성도 시사한다 (이와같은 쟁점은 Jones, 1984 와 Morowitz, 1981 에서 논의된다). 마찬가지로 의식에 관한 현대의 신경과학적의식에 있어서 어느정도의 결함은 더 나은 연구에 의해서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나머지는 이 영역에서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한계를 반영할지도 모른다.

이론적 불완전성
불완전성에 대한 쟁점은 신경과학의 쟁점만큼 과학에 대한 철학적 쟁점이다. 나는 어디에선가 (Jones, 1981) 어떤 과학적 이론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고 완전해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논리학적인 사실로서 주장했다. 어떤 것이 완전한 설명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신경과학 모델에 관한 비판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론은 여러면에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선택 (selectivity) 은 필연적으로 이론의 영역과 범위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회화의 비유를 들어보자 : 나는 물감의 화학적 성질에 관해 완전히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피카소의 <게르니카 (Guernica)>에 대한 완전한 설명인가? 명백히 그렇지 않다. 작품에 대한 여러 관점들이 그러한 논의에 언급되지 않았다. 각분야별 분석은 그 자신의 한계내에서 완전할지 모르지만 회화의 단지 일정 부분에만 해당된다 (유사한 것이 Jones, 1981의 논문에서 더 깊고 자세히 논의되었다).

스페리의 계획이 함축하는 것
스페리의 통일적인 '거시적 정신 패러다임 (macromental paradigm)' 에 대한 이러한 불완전성이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과학에 기초하여 개념적 통일을 시도하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현재의 경험적 연구 상황이 실재하는 것에 관한 그의 유일한 기준으로 되어 있다. 가치, 믿음, 도덕적 선택은 경험적으로 도출된 틀 속에 놓일 수가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재생 ·······정신의 텔레파시, 신비주의·······그리고 주도적 과학에서 여지지 않는 그러한 '새 시대 (new age)' 의 믿음은 배제된다" (1991, 255). 나는 '새 시대의 흐름' 을 방어하려는 생각도 없고, 혹은 종교는 과학과 직접 모순되는 명제들을 믿을 수 있다거나 믿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할 생각도 없다.

다른 한편 '경험적 검증 (empiric verification)' 은 실재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비전만을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은 과학이 세계를 계획 (envision) 하는 유일하게 타당한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한 요구는 결코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현재의 모든 (내 생각에는 미래에도) 신경학적 이론내에 상존하는 불완전성은-앞서 논의되었던 의미에서-의식에 대한 다양한 모델의 여지를 열어준다. 어떠한 신경학적 설명도 신학적인 설명을 방해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 (여기서는 함축하는 인식론적 다원론은 Jones, 1986 에서 유사한 쟁점에 관해 논의되고, 1981에서 지지된다).

비유적인 회화의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식과 인간본성에 관한 다양한 설명이 있을 수 있다. 각각은 그 자체내에서 상대적으로 완전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충분할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것도 완전하고 충분한 설명일 수 없다. 신경과학은 신경전달 기능이나 기억의 생화학 같은 인간의 삶의 측면들을 설명하는데 이상적으로 적용되지만, 의식, 목표, 선택의 전 영역을 논의하기에는 덜 적합할지도 모른다. '주류과학 (mainstream science)' 의 그물을 벗어나는 인간경험의 여러 국면들이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른다.

의식에 대한 종교적인 설명과 신경과학적 설명이 서로 겹쳐져 그려질 수 있거나 혹은 환원될 수 있거나 환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회화의 미학은 물감의 분자구조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는다 (여러 다른 미적인 그림이나 그리 미적이지 않은 회화들도 정확히 똑같은 물감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있다). 오히려 미적인 형식이 그 목적을 위하여 물감을 사용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영혼에 관한 어떤 신학도 인간 뇌의 신경구조 위에 도해 (mapping) 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우리가 인간 뇌와 분리된 인간영혼을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이지만 우리가 회화의 물감의 색깔과 분리된 회화의 조화를 경험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인간영혼에 관한 논의들이 인간의 뇌에 관한 기술들을 꼭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 스티븐 툴민 (Stephen Toulmin) 은 그와 다르게 주장하는 것은 '엄청난 논리적 실수' (Jones, 1989, 139 에서 인용) 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한다.

요약하자면 스페리는 유기체의 상부 단계에서 창발하는 진정 새로운 조직의 속성들에 기초한 이론이 종교적 관심사와 결합 (incorporate) 할지도 모르고, 암시적으로는 신학적이기까지 한 방법을 예시한다. 그러한 조직의 관점을 신학적으로 이용한 놀라운 예를 롤스톤 (Rolston, 1989) 의 논문에서 발견할 수 있고, 신학적 유추를 위한 성과 있는 자료로서 알맞은 현대 신경과학의 모델의 예는 애쉬부록 (Ashbrook, 1989a, 1989b) 의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종교는 더 이상 과학과 양립하지 못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제는 어떤 신학적인 주장들이 경험적인 검증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원적인 세계관을 바라는 경향은 인간의 모든 이론화에서, 특히 자기인식과 같은 역설적인 현상을 고려할 때 그 내재하는 불완전성을 모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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