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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9 (04:06) from 84.173.128.119' of 84.173.128.119' Article Number :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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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존재-신-학 비판
하이데거는 무신론자였는가? :
           하이데거의 존재-신-학 비판 - 이유택 (계명대)
              War M. Heidegger ein Atheist? : Heideggers Kritik an der Onto-Theo-Logie


1. 싸르트르가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의 계보를 무신론과 유신론으로 나누면서 야스퍼스와 마르셀은 유신론 진영에, 자기 자신과 하이데거는 무신론 진영에 귀속시켰음은 철학사의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싸르트르의 이러한 분류는 과연 타당한가? 하이데거는 싸르트르의 주장대로 무신론자였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필자의 답변은 유감스럽게도 ‘아니오’이다.

2. 하이데거는 신의 존재 여부 문제에 관한 한, 일종의 판단중지를 행했다. 신학적 판단중지 상태에 있던 하이데거를 우리는 단순한 무신론자로 해석할 수 없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신학적 판단중지는 무신론적 오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기 방어로 해석되어야 한다.

3. “인간의 본질은 세계-내-존재에 근거한다는 명제는 인간이 신학적-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차안적 존재인지 아니면 피안적 존재인지에 대한 아무런 결정도 내리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실존론적 규정과 함께 ‘신의 현존’ 혹은 신의 ‘비-존재’는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신들의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존재의 진리에 대한 관계로부터 인간의 본질을 해석하는 것이 무신론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급할 뿐만 아니라, 아예 잘못된 것이다.”

4. 하이데거가 신의 존재와 영원한 진리에 대한 독단적 주장을 철학 안에 남아 있는 “기독교 신학의 잔재” 로 보면서 철학으로부터 신학적 요소를 제거하고자 노력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하이데거가 존재물음과 신에 대한 물음을 혼동하지 말라고 수차 경고했으며, 자기의 철학을 유사신학으로 해석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거리를 두려 애썼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무신론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의 문제에 대한 전적인 무관심 속에서 신의 신성에 대한 아무런 물음도 던지지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면, 하이데거는 이러한 의미의 무신론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5. 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신에 대한 관심의 역설적 표출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신의 문제와 신학에 대해서 하이데거는 현대의 어떤 다른 철학자보다도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인간학적 오해 및 실존주의적 오해와 더불어 자기의 철학에 대한 가장 위험한 오해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했던 것은 신학적 오해, 즉 자기의 철학을 신학의 아류로 보는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사람들이 자기가 말하는 ‘존재’와 ‘신’을 혼동하는 것을 우려해 마지 않았다.

6. “‘존재’  그것은 신이 아니며, 세계근거도 아니다.” “존재는 어떤 존재자보다도 멀다. 그러나 또한 어떤 존재자보다도  바위건, 동물이건, 예술 작품이건, 기계건, 천사 혹은 신이건  인간과 가까운 곳에 있다.” “철학은 신의 존재에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무관심할 뿐이다.”

7. 하이데거는 신의 존재 혹은 비존재에 대해 섣불리 말하고 판단하려 들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신이라는 존재자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존재적(ontisch) 물음을 던지고자 하지 않는다. 하이데거는 신(Gott)에서 신성(Gottheit)으로, 신성에서 거룩함(das Heilige)으로, 거룩함에서 존재의 진리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할 뿐이다. 존재의 근원을 향한 이러한 철저한 소급을 통해 하이데거는 무신론과 유신론의 피안에 서고자 한다.

8. 롯츠(J. B. Lotz)에 의하면 하이데거는 무신론과 유신론 사이의 경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경계인>이다. 그의 해석에 의하면 하이데거의 명제 (“‘존재’  그것은 신이 아니며, 세계근거도 아니다.”) 안에는 그가 무신론자라는 주장을 가능케 하는 어떤 단초도 담겨 있지 않다. 이 명제를 무신론에 대한 옹호로 이해하는 것은 하이데거의 참된 의도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할 뿐이다. 롯츠는 하이데거가 이 명제를 통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그 앞에 놓인 명제에서 찾아 낸다. “그러나 존재 - 존재는 무엇인가? 존재는 존재 자신이다. 이 점을 경험하고 말하는 것을 미래의 사유는 배워야 한다.”

1). 롯츠에 의하면 이 명제 안에는 공허한 동어반복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이 명제를 통해 하이데거는 존재의 독특한 특징을 그려내고 있다. 이 명제를 통해 하이데거가 그려내고자 했던 존재의 독특한 특징은 바로 “존재는 다른 것에 의해서는 이해될 수 없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만], 자기 자신 안에서[만] 밝혀질 수 있다”는 것, 즉 존재는 그것을 통해 다른 것들이 비로소 이해 가능하게 되는 “자명(自明)한 것”(das Selbst-verständliche)이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2). 존재는 존재자와는 달리 이처럼 ‘자명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 이해되고 경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을 그 자체로서가 아닌, 어떤 다른 것에 의해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에, 또한 존재는 그 어떤 다른 존재자보다 가까운 곳에 있음(das Nächste)에도 불구하고, 존재자에 사로잡혀 가장 멀리 있다고 여기기에, 미래의 사유는 바로 존재야말로 어떤 다른 존재자보다도 자명하고 가까운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강조가 필요했었다.

3).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그가 신의 현존 여부에 대해 명확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한, 좁은 의미에서의 유신론자도 무신론자도 아니다. 하이데거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경계 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경계인’일 뿐이다. 즉 하이데거가 신 혹은 신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존재의 진리를 사유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와 신의 동일시를 거부하는 한, “존재의 진리 안에서 전개된 [하이데거의] 사유는 유신론적인 모습도 무신론적인 모습도 그려 내고 있지 않다“.


9. 하이데거를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경계인으로 보는 로츠와 달리, 오트(Heinrich Ott)는 하이데거(특히 후기 하이데거)의 사유 안에서 세속화된 기독교 신학자의 모습을 찾아 낸다. 하이데거는 무신론자가 아니며, 무신론과 유신론 사이의 경계인도 아니다. 하이데거를 무신론자로 간주하는 것은 그의 철학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오해는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로서 규정할 때 하이데거가 가지고 있었던 실존론적 의도를 실존주의적으로 오해하는 데서 비롯된다. 즉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개방성, ‘세계’를 존재자의 영역으로 착각함으로써, 마치 하이데거가 세계 밖의 초월자와의 어떤 가능한 관계 맺음도 거부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된다.

1). 하이데거가 신의 현존 여부에 대한 물음과 관련하여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이러한 유보적 태도로부터 그가 무신론자라는 사실이 도출될 수는 없다. 하이데거에 의해 거부된 신은 자기 원인으로서의 신, 즉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된 신이었을 뿐이다. “자기 원인으로서의 신은 형이상학의 신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형이상학과 아울러 형이상학의 신까지도 넘어서려 한다는 사실은 그가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2). 신의 현존에 대한 물음과 관련하여 하이데거가 보여주는 유보적 태도는 신 혹은 신 문제에 대한 소극적 무관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을 ‘새롭게’ 경험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의 적극적 요구의 결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이데거의 유보적 태도 안에는, 전통 철학은 물론 전통 신학마저도 신을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이해해 왔다는 나름대로의 진단 아래, 미래의 신은 본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신학적’ 주장이 담겨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는 세속화된 기독교로서 해석 가능하다.

3).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현사실적 상황을 분석한다. 하이데거의 사유는 [인간과 신의] 만남을 사유한다는 의미에서의 현사실적 만남에서 나온다. 하이데거는 ‘신’이라는 개념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 [인간과] 신의 만남의 실질적 계기를 특징적으로 드러 낸다. 따라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사유 안에서 ‘세속화된 기독교’에 대해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0. 싸르트르처럼 하이데거를 단순한 무신론자로 규정하는 것은 하이데거의 철학 안에 담겨 있는 커다란 메시지 가운데 하나를 놓치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물론 하이데거가 무신론자로 분류될 수 없다는 사실이 곧장 그를 유신론자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가 젊은 날의 뜨거운 신앙을 포기해야만 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의 상실과 더불어 신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신학은 오히려 그의 철학함의 근저에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다면 철학공부에 앞서 신학공부를 할만큼 신학과 가까웠던 하이데거에게 신학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하이데거에게 철학과 신학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11. 하이데거에게 철학은 존재 사유를 의미하며 존재사유로서의 철학은 신학이 아니다. 신학의 대상은 신이 아니라, 신앙이다. 존재사유로서의 철학은 신에 대한 사유도 아니고, 신에 대한 믿음도 아니다. 만일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가 신으로 이해되거나, 그의 존재사유가 신학과 동일시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의 철학에 대한 가장 큰 오해이자 폭력일 것이다.

12. (기독교적) 신학은 신이라는 ‘존재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으로서, ‘존재’에 대한 학문(존재론)인 철학과는 전적으로 다르다.(GA 9, S. 49) 존재적(ontisch)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원칙적으로 철학보다는 (...) 화학과 수학에 더 가깝다.”(GA 9, 48f.) 신학은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실증적(positiv)이다. 신학의 대상, 즉 신학이라는 학문에 미리 주어져 있는 것(Positum)은 신이 아니며, 역사와 제도, 문화, 종파 등으로 이루어진, 기독교라는 이름의 특정 종교도 아니다. 신학의 대상은 기독교를 기독교답게 하는 것, 즉 기독성(Christlichkeit)이다. 기독교의 기독교다움 내지 본질이 신앙의 형태로 나타난다면, 결국 신학의 대상은 신앙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기독교적 신앙의 본질을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13. 하이데거에게 신앙은 거듭남을 의미한다. 인간의 한 실존방식으로서 기독교적 신앙은 단적으로 말해서 “십자가에 매달린 신,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이 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린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고, 성경은 이 사건을 증거하고 보고하는 것이지만, 이 사건에 대한 인식은 오직 “신앙 안에서만” 가능하다.(GA 9, S. 52) 이처럼 오직 신앙을 통해, 신앙에게만 주어지고 보여지는(Offenbarung)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전파(Mitteilung)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각 개인의 참여를 통해서 나누어진다. 이러한 참여(Teil-nehmen)와 나눔(Teil-haben)은 오직 신앙을 통해서만, 신앙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어떤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지식 전달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믿고, 그 사건에 참여하여, 그 진리를 나눠 가짐으로써 자기의 존재 전체를 “신 앞에 세울”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GA 9, 53) 신 앞에 자기의 존재 전체를 세우게 된 사람, 즉 신앙인은 신의 부름을 받고, 그 앞에 무릎 꿇은 자로 거듭나게 된다. 하이데거에게 신앙은 이러한 의미의 거듭남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신앙은 거듭남이다.”(Glauben = Wiedergeburt, GA 9, S. 53/ 63)

14. 신학은 이러한 신앙에 대한 학문적 탐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거듭남, 즉 신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앙을 갖기 이전의 실존 방식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신앙 안에서 전(前)기독교적 실존은 실존적-존재적으로 극복된다.”(GA 9, S. 63) 신학의 뿌리는 바로 이러한 거듭남으로서의 신앙 안에 놓여 있으며, 신학적 탐구의 대상 역시 신앙 자체, 즉 앞에서 말한 기독성(기독교의 기독교다움 내지 본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신학은 신앙의 학문이다.”(GA, 9, S. 55) “신학은 신앙 안에서 드러나는 것, 신앙이 신앙하는 바로 그것에 대한 학문이다.”(GA 9, S. 55)

15. 신학은 신앙의(신앙에 대한) 학문이라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주장에는 전통 신학의 자기 이해에 대한 거부가 담겨 있다. 전통적으로 신학(Theo-logie)은 신에 대한 학문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하이데거의 생각에 따르면 신은 결코 신학의 대상일 수 없다. “그러나 신은, 마치 동물이 동물학의 대상이듯, 신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신학은 신에 대한 사변적 인식이 아니다.”(GA 9, S. 59) 신학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 대상으로 하는 학문도 아니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신학이 아니라, 종교철학의 탐구 대상이다. 인간의 종교적 체험 역시 신학의 대상일 수 없다. 인간의 종교적 체험을 탐구하여 그 근저에서 신을 찾아 내려는 학문은 신학이 아니라 종교심리학일 뿐이다. 신학의 대상은 신이 아니라, 신앙이며, 신앙 이외의 다른 토대를 가지지 않는다. 모든 신학적 인식의 정당성은 “신앙 자체에 근거하고 있으며, 신앙에서 비롯되어 신앙으로 되돌아갈” 뿐이다.(GA 9, S. 61)

16. 하이데거는 신앙은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신학은 철학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이 신학의 성립을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인 한, “신앙은 철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GA 9, S. 61) 그러나 신앙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철학을 필요로 한다. 신학도 일종의 학문인 한 개념의 검증에 대한 요구 아래 서 있으며, 철학을 통한 학문성 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신앙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 철학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도움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일 뿐이다. 철학의 이러한 보조적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수정’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존재론[철학]의 (...) 기능은 [신학의] 관리(지도, Direktion)가 아니라, ‘조언’일 뿐이다. 즉 수정(Korrektion)에 불과하다.”(GA 9, S. 65)

17. 신학의 과제는 철학에 의해 규정될 수 없다. 신학은 철학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서로 다른 학문으로서 신학과 철학은 제 갈 길을 가야한다. 철학과 신학은 흔히 생각하듯 이성의 학문과 계시(신앙)의 학문으로서 서로 반목과 대립을 일삼는, 어떤 소통도 불가능한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아니다. 그러나 철학과 신학이 아무런 문제도 없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철학과 신학의 뿌리 및 이념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 철학’(christliche Theologie)이라는 말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철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쇠’(hölzernes Eisen) 그 자체이다.”(GA 9, S. 66)

18. 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아니,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은 곧 신학 비판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보기에 전통 형이상학과 신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둘이 아니고 하나였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그 자체 신학이다. (...) 존재론은 동시에, 그리고 반드시 신학이다.” 형이상학과 신학의 이러한 내밀한 결합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철학은 존재론으로서 동시에 참된 존재자에 대한 신학(Theologie)이다. 신에 대한 학문(Theiologie)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존재자 자체에 대한 학문은 그 자체 존재-신학적(onto-theologisch)이다.”

19. 철학과 신학의 결합은 외견상 신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듯 보이는 근대 형이상학에 이르기까지 굳건히 유지되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근대 형이상학은 여전히 “신학의 시녀”로 남아 있다.(NII, S. 320) 근대 형이상학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헤겔은 물론이려니와, 심지어 니체의 형이상학마저도, 비록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기는 했지만, 그 안에는 신학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다.(NII, S. 348) 하이데거에게 형이상학은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으로 “존재-신-학(Onto-Theo-Logie)”(ID, S. 45)이다. 서양의 형이상학과 신학이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사실은, 그리스의 형이상학이 나중에 기독교 신학에 의해 유입되었다거나, 단지 형이상학의 태동기를 장식했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신학적’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헬레니즘과 그 이후의 모든 신학이 ‘형이상학적’이었다는 것, 즉 형이상학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음을 의미한다. 신학이 형이상학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신학이 로고스(logos) 중심의 사유에 길들어졌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신학 비판은 그것의 이성 중심적 성격을 겨냥하고 이루어진다.

20. 결국 하이데거의 신학 비판은 신의 형이상학적 이해에 대한 비판이다. 서양 형이상학은 로고스, 즉 이성을 진리에로 접근해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받아 들였다. 이성적 사유를 근간으로 하는 모든 형이상학은 존재자를 그것의 궁극적인 존재근거(ratio essendi)의 관점에서 캐묻는 학문, 즉 최종근거에 관한 학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에 토대를 둔 형이상학이 찾아낸 존재자 일반의 최종 근거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플라톤이 최고선(to agathon)으로 규정했던 최고의 이데아였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지점에서 형이상학의 신학화의 단초를 찾아 낸다. 존재자 일반의 원인과 근거로 이해된 최고의 이데아가 존재자 가운데 가장 큰 실재성을 획득하게 됨으로써 형이상학의 신학화를 위한 첫걸음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21. “초감성적인 것의 영역에서 최고 존재자는 모든 이데아 중의 이데아로서 모든 존재자의 존립과 현상의 원인이다. 이 ‘이데아’는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의 원인이기에 ‘선’이라고 불리는 ‘이데아’이기도 하다. 이 최고, 최초의 원인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토 테이온(신적인 것)이라 불렀다. 존재를 이데아로 해석하게 되면서부터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사유는 형이상학적으로 되었고, 형이상학은 신학적으로 되었다. 여기서 신학은 존재자의 ‘원인’을 신으로 해석하고, 존재를 이 원인으로, 즉 존재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에서 비롯되는 그러한 원인으로 옮겨놓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원인은 존재자 가운데 가장 존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22. 여기서 우리는 형이상학적 신학이 그 이후 신의 신성(神性) 규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다수의 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신학에게 신은 무엇보다 존재자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존재자, 즉 최고의 존재자(summum ens)를 의미한다. 최고의 존재자로서의 신은 모든 다른 존재자에 비해 가장 큰 실재성을 가진다. (인용문대로 표현하자면 신은 “존재자 가운데 가장 존재적인 것”이다.) 즉 신은 최고의 존재자인 동시에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ens realissimum)이다. 최고 존재자로서 가장 큰 실재성을 가진 신은 또한 가장 높은 가치를 가진 존재자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의 생각에 의하면 이처럼 최고의 가치를 가진 최고 선(summum bonum)으로서의 신은 기독교적 신 이해에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기독교 신학에서도 신은 최고 선으로서의 최고 존재자(summum ent qua summum bonum), 즉 최고 가치로서 규정되기에 이른다.”

23. 형이상학적 신은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이다. 말하자면 존재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신이 가지는 가장 큰 특징은 신을 모든 존재자의 최종 근거인 동시에 최초의 원인(제1원인, causa prima)으로 규정하는 데에서 가장 두드러져 나타난다. 신은 다른 모든 존재자의 원인, 즉 창조자이긴 하지만, 어떤 다른 것에서도 비롯되지 않는 자, 즉 자기 자신이 존재의 유일한 원인인 존재자이다. 신은 이런 의미에서 자기원인(causa sui)이라 불린다. “(...) 근거 자체는 그것에 의해 근거 지워진 것 쪽에서 자기에 알맞은 정초를 필요로 한다. 즉 근거 자체는 가장 근원적인 것에 의한 유인(誘因)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자기원인으로서의 원인이다. 이것이야말로 철학이 신에게 제대로 붙여 준 이름이다.”

24. 형이상학이 신이라는 이름 아래 이해한 것은 사실상 근거율(Der Satz vom Grund)의 적용을 통해 만들어진 신, 이른바 ‘철학의 신’에 불과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 즉 자기 원인으로서 이해된 신은 그 어떤 것도 원인 없는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율의 타당성을 보장해 준다. 제1원인으로서의 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을 때, 근거율의 타당성은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의 신’은 어디까지나 인간 이성의 산물일 뿐,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신은 아니다. “이러한 [철학의] 신에게 인간은 기도하거나 제물을 바칠 수 없다. 자기원인 앞에서 인간은 두려움에 떨며 무릎 꿇거나, 이러한 신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출 수는 없다.”

25.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신, 철학의 신을 거부한다.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된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은 이성의 논리적 추상을 통해 얻어진 ‘죽은 신’으로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신적인 신” 즉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신’이 아니다. 죽은 신 앞에서의 거짓 신앙, 거짓 신앙의 바탕 위에서 행해지는 거짓 신학보다는 ‘신-없는 사유’가 차라리 신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따라서 어쩌면 철학의 신, 즉 자기 원인으로서의 신을 포기해야 하는 신-없는 사유(das gott-lose Denken)야말로 신적인 신에게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 말은 존재-신학을 받아들이려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포기하고 행해지는] 신-없는 사유가 신적인 신을 향해 더 열려있다(freier)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26. 하이데거의 신학적 판단중지 내지 신학적 침묵은 신적인 신을 향한 동경의 역설적 표현이다. “기독교적 신앙의 신학이든 철학의 신학이든, 그것을 근원적 유래로부터 경험한 자라면, 오늘날의 사유 영역 안에서는 신에 관해 침묵하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의 존재-신학적 성격이 사유에게 의심스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이처럼 신에 대한 침묵을 권유하고는 있지만, 이로부터 그의 존재사유와 신은 무관하다거나 그 안에 아무런 신학적 의미도 함축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이 성급하게 제기될 수는 없다. 전통 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러한 거부 몸짓은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과 그것의 종말에 대한 담론이 철학의 새로운 시작을 지향하는 것처럼, 전통 신학에 대한 거리 두기 역시 신에 대해 새롭게 말하고 사유할 수 있는 또 다른 가능성의 모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7. 신은 가치와 무관하다. 하이데거는 철학의 신, 즉 형이상학적 사변을 통해 얻어진 존재신학적 신을 거부한다. 하이데거의 생각에 의하면 철학의 신, 자기원인으로서의 신은 신적인 신이 아니며, 설령 최고 가치라 할지라도 어떤 식으로든 가치와 결부되어 경험되는 신 역시 (적어도 하이데거의 눈에는) 신이 아니다. 신을 가치와 결부시켜 이해하는 것은 “신의 본질을 깎아 내리는 것”이요, “신성모독”이다. 신의 본질이 이처럼 부당하게 이해되고 급기야 죽음의 선고를 받기에 이른 것은 존재신학으로서의 형이상학 안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그 가능성은 이미 형이상학의 태동기부터 자체 내에 잉태되어 있었다. 신의 죽음은 존재망각과 허무주의를 근본 특징으로 하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의 필연적 귀결일 뿐이다.

28. 하이데거의 신학적 침묵은 신에 대해 새롭게 말할 수 있기 위한 방법적 침묵이다. 형이상학의 종말과 함께 신이 죽어버린 궁핍함 속에 있는 이 시대에 하이데거가 권하는 태도는 차라리 신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침묵은 존재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벗어나 신에 대해 새롭게 말할 수 있기 위한 ‘방법적’ 침묵에 불과하다. 하이데거의 주된 관심사는 단순한 신의 거부가 아니라, 신의 죽음 내지 신의 부재에 대한 경험을 발판으로 삼아 오히려 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 내지 신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하는 데에 놓여 있다.

29. 하이데거가 유신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를 단순히 묻고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하도록 강요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의 사유가 신의 문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나름대로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 속에서 그 신을 찾아 나섰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거부했던 것은 존재신학으로서의 형이상학에 의해 최고선과 최고가치, 자기원인 등으로 표상된 ‘철학의 신’, 바로 니체가 죽음을 선고했던 바로 그 신이었을 뿐, 결코 신의 존재 혹은 신성 자체는 아니었다.

30. 하이데거의 니체 인용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886년 니체가 했던 말을 너무 빨리 잊지 말도록 하자. ‘신의 거부 - 거부된 것은 원래 도덕적 신일 뿐이다.’ 니체의 이 말이 깊은 사유에게 의미하는 것은, 가치로서 생각된 신은, 설령 그것이 최고 가치라 할지라도, 결코 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신은 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신성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31. 하이데거는 신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그 앞에서의 복종을 몸소 실천하고 가르치는 유신론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단순한 무신론자로 규정하는 것은 더더욱 부당하다. “하이데거의 사유의 핵심이 신 문제와의 본질적 관계로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의 사유 안으로 깊이 진입해 들어 가면 갈수록, 그의 저작과 많이 접하게 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분명해진다” 는 투른헤어의 지적은 옳다.

32. 하이데거는 죽음에 임박하여 가톨릭식 장례 절차에 반대하지 않았다. 1976년 5월 26일 오전,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말은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사유(Denken)와 감사(Danken)가 (생전의 강조대로) 근원적으로 둘이 아니고 하나라면, 이러한 물음과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이데거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행한 감사는 누구 앞에서의, 무엇에 대한 감사였을까? 그것은 바로 그가 생전에 그토록 열심히 찾아 나섰던 ‘신적인 신’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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