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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윤리사상

칼 바르트의 윤리사상(Karl Barth' Ethics)


주제어  [칼바르트] [윤리]
자료출처  손규태 (성공회대학논총, Vol.- No.9, [1996])  성경본문   
내용 Ⅰ. 들어가는 말



칼 바르트의 신학사상 특히 그의 윤리사상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역사적 정치적 전환점들을 찾아 보자면 우선 1919년 독일제국의 종말과 그 다음으로는 1933년의 히틀러의 집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선 1919년의 독일제국의 붕괴를 가져왔던 혁명이 가진 신학사적 의미를 살펴보자. 1918년은 독일역사에서 그 동안의 전제군주체제를 청산하고 공화정이 시작된 해이다. 이러한 독일에서의 공화정의 시작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대단히 늦은 것이었다. 교회사적으로는 이와 관련해서 종교개혁 이후에 최초로 독일의 지방교회들이 헌법적 기초에 의해서 재편성된 해이다. 그 동안 독일의 개신교들은 영주들의 정치적 지배하에 있어서 자신들의 독자적 기초를 마련하지 못했었다. 또 1919년은 바르트의 로마서 2판이 출간된 해로서 그 동안의 독일의 신학적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던 시민적 민족국가와 그것의 세속적 문화와 왜곡된 타협들을 지속해 오던 자유주의적 신학을 청산하고 마침내 계시신학에 기초한 변증법적 신학이 등장하게 된 해이다. 이때도 자유주의 신학은 세속적 역사연구에서 지배적인 견해와 자신을 일치시켰고 독일제국의 종말을 가져온 1919년을 자유민주주의적 다원주의의 탄생기간으로 간주해서 쾌거를 올렸었다.


1) 한편으로는 정치적 세력으로부터 교회의 독자성이 확보되었었고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영역에서는 그 동안의 전제군주적 통치에서부터 자유민주주의적 기초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가져온 특징들을 우리는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는 1919년을 둘러싼 독일에서의 삶의 전 영역에서의 급격한 변화들이다. 예술에서는 강력한 표현주의적 경향들이 나타났고, 음악에서는 현대음악이 등장한다. 철학의 영역에서는 생철학 이후의 실존주의 등장으로 삶의 전 영역을 사로잡은 근대성에로의 변혁이 일어났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들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낙관적 사고를 가지게 했었다. 둘째 1919년은 당시의 미국의 외교적 고립주의가 끝나고 또한 러시아의 사회주의적 혁명의 성공으로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보다 넓은 시각과 안목을 갖도록 했었다. 자유주의라고 하는 하나의 강력한 축과 사회주의라고 하는 또하나의 강력한 축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두개의 강력한 역사적 축의 운동이 가져다 준 긴장들은 당시의 상황을 단순한 도덕적 고찰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 있던 독일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가 엄청난 민족의식의 성장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독일에서의 민족의식은 수세기 동안 지속되어왔던 민족국가에 의존할 수도 없었고 현대적 사회로의 발전에 상응하는 계몽적이고 자유주의적 전통에 뿌리를 박지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급속한 산업화와 더불어 급진적 종교비판이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를 지배했다. 이와 궤를 같이한 사회적 변혁들은 엄청난 속도의 세속화과정을 가져왔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한편으로는 일종의 대리종교로 작용했고 다른 한편 보수적 진영에서는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서 발생하는 회의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막는다는 이름 하에 왕관과 제단의 보호동맹이 성립되기도 했다.


2) 이렇게 제1차세계대전의 패배는 독일 안에서 불가피하게 국민들 사이에서 민족주의적 비분, 이데올로기적 양극화, 깊은 정신적 실의와 사회적 곤궁을 낳았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정신적 삶의 전 영역에서의 새로운 것에 대한 강력한 열망과 창조성으로 불타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두개의 급진적 운동이 싹트게 된다. 첫째는 러시아의 사회주의적 10월 혁명의 영감을 받은 새롭고 이상적 사회질서에 대한 희망에서 생겨난 종교적 사회주의가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중심에서 활약했던 이는 파울 틸릭(Paul Tillich) 같은 신학자였다. 그는 역사 내에서 동터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카이로스라고 하는 역사철학적 개념을 통해서 자신의 종교사회주의적 사상을 전개했었다.


3) 이러한 종교사회주의적 운동은 잘 알려진 대로 스위스의 경건한 신학자였던 불룸하르트 부자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4) 둘째는 반자유주의적이고 엄격히 초자연적 계시에 근거한 변증법적 신학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론에서 좀더 상세하게 논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또 하나의 정치적 전환점은 1933년 나치정권 등장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정치적 전환점을 신학사적 관점에서 살펴보자. 역사적으로 볼 때 1933년의 나치정권의 등장을 다각적 의미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카톨릭 교회와는 달리 많은 개신교인들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비스마르크의 제국통일을 독일에서의 개신교의 최초의 정치적 형성으로 받아들였었다. 이 통일된 제국은 "독일 민족의 거룩한 개신교적 제국"(Das heilige evangelische Reich deutscher Nation)으로서까지 과찬되었었다.


5) 그러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한 황제제국의 붕괴는 개신교인들에게는 일종의 정치적 고향의 상실과 같은 것이었다. 새로 세워진 봐이마르 공화국은 그들에게는 뭔가 낯선 것이었다. 다수의 정당들의 등장과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쟁들에 대해서 그들은 몸을 도사렸었다. 여전히 군주제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다수의 민족적 보수주의적 개신교도들은 봐이마르 공화국의 망령을 벗어던지고 민족주의적 애국심에 호소하는 히틀러의 약속에 맹목적으로 따라나선다. 이러한 개신교의 상은 신학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1930년대 초 대부분의 대학들에서 개신교 신학부들은 무반성적인 민족적 보수주의자들에 의해서 점령하고 있었다.


6) 마틴 라데(Martin Rade)나 루돌르 오토(Rudolf Otto)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대학 안에서 소수에 불과 했고 사회민주주의나 종교사회주의적 입장을 가진 신학자들은 더욱 발붙칠 곳을 찾지 못했었다. 이들은 1933년 히틀러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대학에서 완전히 제거되었다.


7) 유대인 출신의 신학자들이나 사회당원인 신학자들은 거의 전멸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적 신학"의 대변자들은 위대한 역사적 전망에서 민족적 혁명을 외쳤다. "교회의 독일적 시간"이 동터왔다고 외쳤다.


8)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1933년대를 기점으로 해서 세개의 신학자들의 집단들이 보다 선명한 신학적 입장들을 가지고 등장한다. 첫째는 "독일적 그리스도인들"(Deutschen Christen)로서 이들은 히틀러와 그 추종세력들의 강력한 지원을 얻어서 교회의 중요한 직책들을 독점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프로이센 지방의 교회이다. 히틀러는 프로이센 지방교회를 선두로 해서 지방교회를 통합해서 제국교회(Reichskirche)를 세우고 자기의 부하인 뮐러를 제국교회의 주교로서 선출함으로써 개신교를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을 거둔다. 둘째 집단은 이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에 반기를 든 고백교회이다. 바로 이 프로이센 지방교회에서 자신들의 헌법체계와 회원권을 가진 "고백교회"(die Bekennende Kirche)가 탄생하는데 이들은 국가와의 공공연한 갈등도 불사했었다.


9) 그리고 마지막 집단은 상대적인 교회의 독자성을 견지하려고 했던 이른바 "흠집 없는" 교회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히틀러 정부에 협력하지도 저항하지도 않은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들이다. 이들 세개의 집단들의 운동방향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 숭배였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상호 배타적이면서도 서로 밀접한 상호 연관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초자연적 계시에 근거한 변증법적 신학자들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는 바르트는 1910년대 초반에는 정치적으로 종교적 사회주의 진영에 소속되었었다. 그러나 같은 변증법적 신학 진영에 속한 고가르텐 같은 이는 민족적 보수진영에 속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 모든 운동들은 "새로운" 운동들의 담지자들을 자처했었다.




Ⅱ.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독일신학의 주역들



제1차 세계대전까지 독일에서의 신학적 논의는 릿츨학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는 무엇 보다도 성서주석과 교회사 서술들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성서적 전통의 역사적 연구와 함께 그것이 가진 신학의 종교사적 영역에 대한 연구라고 하는 일반적 경향을 포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역사적 상대성이라고 하는 문제가 중심적으로 다루어졌었다. 릿츨은 따라서 신앙공동체의 입장에서 출발하는데 거기서부터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의 사죄와 세계와 갖는 그의 종말목표를 통해서 제시한 가치들은 그리스도를 통한 역사적 계시 안에서 현실적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따라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도덕적 가치판단에서도 승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0) 릿츨은 당시의 종교사적 연구를 통해서 성서의 계시사건을 상대화시켰던 종교사학파및 이러한 방향을 더욱 철저화하려고 했던 인간한적 흐름에 대해서 쐐기를 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릿츨의 계시실증주의적 주장은 반세기 전부터 강력하게 주장되었던 포이엘바하의 논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즉 포이엘바하는 모든 종교적 진술은 사실상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진술 즉 "신학의 비밀은 인간학"이라고 주장했었다.


11) 이러한 포이엘바하에 의한 기독교의 전통적 계시 진리에 대한 강력한 해체요구가 릿츨로 하여금 새롭게 신학적 진술의 기초를 찾게 한 것이다. 사실상 당시의 역사적이고 비판적 신학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지 못했었다. 릿츨이 헤르만의 사상에 기초해서 시도한 가치판단이론은 사실상 기독교 진리의 확실성의 문제를 실천적 이성에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12) 여기서 이러한 신학의 방향은 도덕적 강조점을 강하게 견지하게 되었었다. 신학이 이렇게 도덕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19세기초 산업화 과정에서 사람들은 점차 기독교를 멀리했고 여기에 대응하는 방식으로서 각성운동이 일어났지만 전체적으로는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세계관적 관점에서 보거나 사회적 계층들의 성향으로 볼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서 보다 낳은 세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진보사상에 더욱 매어달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종교개혁 전통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의인론에 기초한 릿츨의 신학은 당시의 상황에서 별로 큰 반향을 얻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산업화를 통한 급속한 세속화 과정과 여기에 대응하는 각성운동 사이에서 칸트의 실천철학에 기초한 릿츨의 기독교의 윤리화는 이들 양편으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릿츨의 신학을 단순히 기독교의 도덕화로만 귀결지어서는 안된다. 사실상 당시의 신학적 과제는 세계내적 가치들과 초세상적 가치들의 차이들을 분명히 해명하고 이들 사이의 대립들을 이들을 능가하는 종교적 사상으로 밝혀내는 것이었다는 트뢸치의 주장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13) 당시 이러한 릿츨의 노력은 뭔가 "특별한 종교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이었지 단지 기독교를 도덕성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보여진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내면적 가능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경건주의(Pietismus)를 오히려 인간의 자기의인으로 거부하고 변증법적 신학자들보다 더욱 심오하게 신의 주체적 의인론을 통해서 당시의 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14) 이러한 릿츨의 신의 주권 하에서의 구원론에 대한 집중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가져온 구원은 종교적인 것(Religioesen)과 도덕적인 것(Sittlichen)에서 들어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사죄와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두개의 축에서 실현된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사죄를 통한 의인과 함께 그가 실현하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간의 참여가 그의 신학적 사고의 핵심이다. 따라서 릿츨의 윤리학은 그가 도덕적 의무들의 전개를 도덕적 실패를 거친 다음에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말하자면 신칸트적 심정윤리적 요소를 분명하게 루터적-경건주의적으로 규정된 기본개념 위에 두려했던 것이다.


15) 릿츨에 근거한 이러한 윤리적 이해의 주요 내용은 당시의 시민적 사회에서는 루터의 직업윤리적 이해로 변질되었지만 그러나 릿츨 주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틀 안에서 "제4계급"의 문제들에 대한 정의로운 해결책들도 모색했었다. 이러한 급진적 방향의 길예비자들은 스위스의 종교사회주의자들인 헤르만 쿠터(Hermann Kutter)와 레온하르트 라가즈(Leonhard Ragaz)등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뷔템베르그의 경건주의(크리스토프 불룸하르트 부자)와 릿츨학파의 신칸트주의의 결합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이해가 보다 본명하게 사회주의자들의 행동프로그람으로 등장한다.


16) 1919년 이후의 시기의 신학적 운동들을 일별해 보면 윤리적 문제에 대한 매우 상충되는 견해들이 드러난다. 우선 변증법적 신학은 당시의 자유주의적 신학의 부루좌적 틀을 반대하고 있다.


17) 이들은 계시신학적이지만 역사적 정향에 집착하고 있는 릿츨의 명제를 뛰어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의 초자연적 이해를 견지하려 했었다. 이들의 근대적 진리의식의 철저화는 엄격하게 성서적이고 종교개혁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가능했는데 이들은 인간들의 말과 엄격하게 구별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적 복종을 그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학적 방향은 윤리학에 있어서도 모든 삶의 구체적 결단을 어떤 이성적 매개법정이라고 하는 길을 거치지 않고 직접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행동에서 논거를  고 있다. 이러한 계시중심적 사고와 대립하는 일련의 루터파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의 대변자들은 정통루터파 신학자들 즉 알트하우스(Paul Althaus)와 베르너 엘르터(Werner Elert)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루터파의 두왕국론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의 분명한 구별(Unterscheidung) - 단절(Separation)이 아니다 - 에 기초해서 세상에서의 윤리적 결단을 어떤 예언자적 영감이나 직접적 신앙고백의 사안으로 삼지 않고 이성적 성찰의 사안으로 간주했다.


18) 엘러트 같은 정통루터파 신학자는 자신의 윤리학을 크게 "율법하에서의 에토스"(Ethos unter dem Gesetz)와 "복음 하에서의 에토스"(Ethos unter dem Evangelium)로 대별하고 있다. 그는 "율법하에서의 에토스"에서는 자연적 질서들로서 가족, 결혼, 민족 국가와 법질서, 경제질서및 직업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 질서들은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이성적 성찰의 사안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19)여기에서 이러한 자연적 질서들이 뭔가 하나님의 은총의 질서와 혼합되는 것을 피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루터파 신학에서의 "율법과 복음"의 도식을 통해서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20)사실상 이러한 과제는 자연적 역사적 세계구조들 안에서 수행되는 것으로서 이 세계는 여전이 죄악에서 속량받지 못하고 있지만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Schoepfungsordnung)로서 체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성적이고 윤리적 인식이 신앙에 봉사하고 있지만 이러한 신앙에 대한 봉사는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수행된다는 것이다.




Ⅲ. 칼 바르트의 윤리사상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강력하게 그리스도의 계시에 윤리학의 기초를 둔 사람은 칼 바르트였다. 그는 우선 자신의 윤리신학적 출발점을 자신과 밀접한 연관을 가졌던 두개의 운동과 단절하는 데서 찾고 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인 헤르만(Wilhelm Herrmann)이 1914년 93명의 지식인 선언을 통해서 전쟁을 지지하는 것에 참여하는 것에 반대함으로써 그와 노선을 달리하고 있다.


21)당시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함께 위에서 언급한 루터파 신학자들도 민족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었다. 그는 다른 한편 전쟁에 동의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 동안 동정심을 가지고 참여했던 "종교사회주의"와도 거리를 두었다.


22) 바르트는 1911년 사핀벨에서 목회를 할 당시만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한 사회주의자로 간주했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처참한 현실을 목도하고 노동법 개정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했었다.그러나 종교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함으로써 그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23) 특히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레닌이 구시대의 청산을 내세우면서 무자비한 살상과 숙청을 감행하자 종교적 사회주의에 대해서 라가즈와 함께 깊은 회의를 가지게 되었었다. 입장은 1919년에 있은 탐바하 강연(Tambacher Vortrag)을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24) 이러한 바르트의 계시중심적 개념은 1922년에 출간된 로마서 2판을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계시중심적 개념은 같은 해에 출간된 "현대에 있어서 윤리의 문제"라는 글에서서도 선명하게 해명되었다.


25) 바르트는 이 글에서 아직도 이상적 사회를 추구하고 있던 종교사회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26) 그런 점에서 그는 종교사회주의자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는 라가즈를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이상적 사회가 단순히 심정적인 것으로 위장되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세계내적 혹은 역사내적 성격을 분명히 주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1911년대 이후로부터 가지고 있던 종교사회주의적 이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상에서의 이러한 이상사회의 완전한 실현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상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즉 인간의 죄가 그것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사실상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위기는 이상적 사회의 건설에 대한 요구와 죄로 인해서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인간의 딜렘마를 표현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와 인간의 죄성 사이의 위기 즉 심판 앞에 서 있고 이것이 곧 변증법적 신학이 해결해야 할 과제로 등장한다. 따라서 바르트는 방법론적으로 기독교 윤리학의 출발점을 엘러터의 율법적 에토스나 알트하우스의 창조의 질서와 같은 "자연적" 에토스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입장은 후에 와서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더욱 발전되어간다. 다시 말하자면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이성에 기초를 두고 있는 자연적 윤리는 용납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 에토스는 단지 인간의 독단성(Eigenmaechtigkeit)과 죄의 표현일 뿐이다.


27)여기서는 윤리적 내용의 인간적 도식화들이 모두 문제가 된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에 의한 인간의 성화를 서술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28)이렇게 볼 때 오직 하나님만이 윤리적 행위의 주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자연적 요소들은 여기서는 전적으로 배제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의인과는 달리 성화라고 하는 것의 주체는 인간이라고 할 때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계약 및 성화 사이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이러한 성화는 하나님의 선택을 통한 계약관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역사적 현실인데 이 그리스도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며 동시에 선택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29)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명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에 대한 복종은 신앙을 통한 그것의 승인에서 가능하게 된다.


30)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복종의 삶이 곧 윤리적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 규정되어 있다.


31)여기에서 바르트는 인간의 행위의 모든 기준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삶이라고 하는 개혁교 전통에 확고하게 서 있다. 여기에서 인간의 복종은 신앙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나 하나님에 의해서 요구된 인간의 자유한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32) 이렇게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 자신의 행동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와 인간의 자유한 결단의 행위 사이에는 밀접한 변증볍적 관계가 상립되는 것이다(고전 10,31). 하나님의 은총의 배타성과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복종하는 변증법적 명제는 바르트의 복음과 율법(Evangelium und Gesetz)라고 하는 도식 즉 하나님의 허락과 요구라고 하는 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33)바르트에 의하면 율법은 단지 복음의 형식일 뿐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또 다른 형식일 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루터파들이 이해하고 있는 "율법과 복음"의 도식에서와 같이 긴장적 혹은 변증법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으로 통칭되는 하나님의 계명은 근본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유의 허락이며 보증이다.


34)따라서 신앙도 율법의 엄격한 요구의 대상이 아니다. 복종은 따라서 은총에 상응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르트의 윤리학을 규정하는 기본전제이다. 여기에서 바르트가 구약성서의 율법을 하나님의 선한 선물로서 이해하게 된 것이다(시편 199편). 그는 여기서도 칼빈과 같이 윤리학의 기초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감사에 두는데 이 경우 중요한 것은 율법의 주요기능 가운데 하나인 율법의 제3용법(tertius usus legis)이 그것의 논거를 이루고 있다.


35)율법의 제3용법은 사실상 멜랑톤이나 칼빈에게서는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된 사람들의 잘못에 대한 형벌의 위협이 아니라 "권면"(paraneis)으로서 이해된다. 사실상 바르트가 "복음과 율법"이라는 도식을 통해서 친절하고 선한 율법이야 말로 마지막 말이라 주장한 것은 그의 독특한 창작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이러한 신자에 대한 권면적 기능만을 남기고 불신자들에 대한 형벌적 기능(율법의 제2용법)을 간과는 것은 바르트의 신학이 갖는 변증법적 성격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면 바르트에게 있어서 기독교 윤리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계명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계명은 결단코 무시간적이며 보편적 명제가 아니고 언제나 구체적이다.


36)그것의 구체성은 역사적으로 실현되었던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인격안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과 율법의 계시를 드러내는 성서의 대상이며 또한 교회에서 설교를 통해서 말해지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다.


37)창조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의 유일한 준거가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10계명이야 말로 윤리적 기초며, 틀이고 프로그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산상설교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어떻게 과거의 구체적 성서적 가르침이 오늘날과 같은 전혀 다른 상황에 적응성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바르트는 분명한 입장을 취한다. 즉 성서의 텍스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환경으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성서의 역사성에서 출발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은총의 계약의 역사를 통해서 성서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바르트는 바로 강화되어 나타난 역사적 상, "하나님의 계명의 원리적 역사성"이라고 했다.


38)다른 말로 하자면 원래적인 것에서 뛰어난 내용이나 사건을 말한다. 시간 안에서 하나님의 현재성이라고 하는 두번째 구속사적 의미가 바로 이러한 역사성의 개념에 종속된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일정한 장소에서 말해진 것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하나님의 계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오늘날의 사람에게 타당하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씀이 우리 시대의 형편에서 이해되는 하나님의 게명이 되는 데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이 기초가 된다. "너는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금 나의 은총으로부터 살도록 허락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라."


39) 복음과 율법의 일치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세상에서의 삶과의 관계의 통일성을 낳는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은 그 삶에서 어떤 이중적 존재로 남게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르트의 "정치적 예배"(혹은 하나님 봉사)의 문제 혹은 영적인 문제와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르트가 분명하게 루터의 이왕국론과 거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신앙과 정치적 행동의 통일성에 관한 문제를 그의 유명한 두권의 책들 "의인과 법"(Rechtfertigung und Rechte)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와 시민들의 공동체"(Christengemeinde und Buergergemeinde)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는 루터와 같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하나님의 두개의 검들(통치수단들)이 갖는 긴장에 찬 상으로 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공통의 중심점을 돌고 있는 조화로운 두개의 원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의 교회화나 그 반대가 시도되는 것은 아니다. 외적인 것들에 관한한 교회는 모든 것을 전적으로 국가에게 맡긴다. 왜냐하면 국가도 동일한 한 하나님의 통치 하래 있기 때문이다.


40)다만 교회는 국가를 지원하되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복종하기 보다는 하나님에게 복종하도록 한다. 따라서 국가에 대한 교회의 관계는 비판적 지원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도 교회로 하여금 복음의 선포를 위한 권리들(Rechte)이 확보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국가는 하나님 나라와의 유비에 따라 규정된다는 점에서 거기에 대한 "유비능력"(Gleichnisfaehigkeit)과 유비필요성(Gleichnisbeduerftig-keit)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를 바르트는 윤리적 예증들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서 권리를 주장하는 의인은 국가가 인간의 권리를 돌보아야 하는 것과 상응하다는 것이다.


41)또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유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평등성은 인간의 정치적 자유와 평등에 상응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의 은사들의 다양성은 정치적 권력분립과도 상응하다는 것이다. 물론 바르트는 이렇게 해서 (자유)민주주의를 기독교적 국가형식으로 규정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기본명제들은 독제국가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 신앙은 민주주의와는 특별한 친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42) 바르트는 이러한 유비구조를 통해서 그의 교회 교의학 III/4에서 삶의 전반적인 영역들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들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비의 원리는 그의 창조론에 기초하고 있다. 바르트에 의하면 창조는 계약의 외적 근거며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라는 것이다.


43) 이러한 유비구조는 남녀간의 관계에서나 가족의 관계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 혹은 부모들과 자녀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분명한 상위존재로서 규정지어진다.


44)물론 상위자는 하나님의 대변자들로서의 책임성을 수반하고 있다. 같은 유비구조는 노동에서도 적용된다. 노동이란 바르트에 의하면 창조주에 대한 피조적 존재의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긍정이다.


45)말하자면 노동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인간들이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의 인간화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는 당시 노동을 통해서 인간이 소외되던 시대에 매우 중요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이러한 노동세계의 인간화는 직업개념을 돈벌이를 위한 노동의 개념을 뛰어넘어서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46)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소명개념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바르트의 노동의 인간화 개념은 바르트의 초기사상, 즉 종교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하던 시절의 면모를 였보게 한다. 또 법의 은총적 성격은 생명에 대한 경외라고 하는 관점에서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법은 형벌적 성격을 뛰어 넘어서 복음적 내용을 내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에(요한 3,16) 인간의 생명은 보호되어야 한다.


47)여기에서 도출되는 결론은 자명적으로 사형은 폐지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정치적 권위에 대해서 저항하지 않으면 않된다.48)사형은 생명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참회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기도 하다. Ⅳ. 결론 바르트의 신학에 있어서 윤리학은 교의학의 중심적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1920년대만 해도 윤리학을 성화를 이루어 가눈데 필요한 하나의 보조적 학문으로서 취급했었다. 이러한 바르트의 입장은 우연도 아니고 전통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하나의 프로그람이었다.


49) 여기서 도출되는 결과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바르트가 그리스도론을 원리로 사용하고 있는 서로 대립되는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일반적 명제들은 거기에서 도출된다는 점이다. 사실상 윤리학이 그리스도론을 기초로 할 경우 제기되는 물음은 일반 윤리적 규범들이 직면하게 되는 역사적 상대성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윤리적 규범들의 역사적 상대성의 문제들을 "유비적 구조"를 통해서 해결하는 놀라운 신학적 도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론중심적 윤리학은 물론 서구와 같은 기독교적 전통과 거기에 기초한 규범들이 지배해온 세계에서는 통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기독교적 전통이 일천한 제3세계의 윤리학 형성에는 적지 않은 문제들을 제기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이러한 명제들이 기독론에 거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신앙고백적이고 예언자적 성격"을 갖는다. 여기에서 윤리학은 강한 양자택일적 특성을 드러낸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바르트의 초기의 생각과 삶을 지배했던 종교사회주의적 동력의 흔적들이 그것이다. 사실상 세계의 기독교화를 목표로 했던 종교사회주의는 다분히 예언자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이와 함께 교회투쟁을 통한 결단의 상황, 다시 말하자면 신앙고백적 상황이 또한 바르트의 윤리학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었다. 나치정권에 대해서는 바르트는 처음부터 거부 외에 다른 선택이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신앙고백적 상황의 기초는 역시 그리스도 사건이었다. 여기서 바르트의 윤리학에 있어서는 초지일관 어떤 내적 갈등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바르트의 윤리사상은 전후에 등장한 신앙고백의 윤리학(Beklenntnisethik)의 기초가 되었고 이것은 그후 개신교 좌파들의 방향을 잡아주는 거점이 되기도 했다.


50) 이러한 바르트의 신앙고백적 윤리학의 입장은 그후 민족적 입장을 가진 보수주의적 질서신학(Ordnungstheologie)의 출현에 제동을 거는 방패가 되기도 했다.51)이러한 바르트의 입장이 전후 독일 - 특히 루터파 안에서 - 의 신학계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포스트 모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고려할 때 바르트 신학에서의 유비구조는 중대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특히 우리의 변화된 삶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남성과 여성의 관계의 문제가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문제와 같이 유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남성을 하나님의 대변자로 보고 여성을 그가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 보는 바르트이 입장은 결국 유비의 구조가 도달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귀결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칫 루터의 질서윤리로의 복귀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마저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가 그리스도론에 기초한 윤리를 말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사업이라고 하는 틀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서 남녀문제에 관한 유비의 틀은 하나님과 그 백성이라는 도식 보다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라는 도식에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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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Friedrich Wilhelm Graf, Konsvervatives Kulturluthertm. Ein theologiegeschi- chtlicher Prospekt, in: ZThK 85/1988, s. 31-35.
     2) Helmuth Plessner, Die verspaetete Nation, Frankfurt. 1982, s, 7ff.
     3) Paul Tilich, Kairos I und Kairos II, GW 6, Stuttgart 1963,s.9-28; 22-28.
     4) M. 부에스(손규태역), 예언자적 사회주의, 신학연구소 참조.
     5) Woffgang Huber, Konflikt und Konsens - Studien zur Ethik der Verantwor- tung, 1990 Chr. Kaiser, s. 70에서 중인.
     6) Wolfgang Huber, ibid., s. 70.
     7) 마틴 라데는 봐이마르 공화국에서 얻었던 공직에서 추방당하고 Friedrich Sigmund-Schlz, Karl Ludwig Schmidt는 스위스로 망명하였고 틸릭과 같은 종교사회주의자는 미국으로 이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8) Paul Althaus, Die deutsche Stunde der Kirche, Goettingen, 1933/
     9) 독일의 고백교회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바르멘 신학선언 60주년을 맞으며", 기독교 사상, 1994년 6월호, 145-156면을 참조하라.
     10) Albrecht Ritschl,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und Versoehnung Bd. III, Bonn, 1889, s. 214ff. 260.
     11) Ludwig Feuerbach, Das Wesen des Christentums, Berlin 1956, 서문참조.
     12) Wilhelm Hermann, Die Religion im Verhaeltnis zum Welterkennen und zur Sittlichkeit. Eine Grundlegung des systematischen Theologie, s. 428-447; 이러한 맥락에서 하르탁(Adolf von Harnack)은 그의 책 "Das Wesen des Christentums"에서 "종교는 도덕의 영혼이며 도덕은 종교의 신체"((die Religion die Seele der Moral und die Moral den Koerper der Religion)라고 했다.
     13) Ernst Troeltsch, Was heisst "Wesen des Christentums"? GS. II, s.445. 당시 "기독교의 본질"을 묻는 신학자들이 "산상설교"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14) Albrecht Ritschl, Geschichte des Pietismus 참조.
     15) Dietz Lange, Ethik in evangelischer Perspektive, Vandenhoeck, 1992, s. 3
     16) 부에스(손규태역), 예언자적 사회주의 참조.
     17) 이러한 변증법적 신학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Karl Barth 외에도 Emil Brunner, Rudolf Bultmann, Friedrich Gogarten등을 들 수 있다. 사실상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전환점을 마련해 준 이들은 Erich Schaeder(Theozentrische Theologie), Rudolf Otto(Das Heilige) 그리고 Karl Holl등을 들 수 있다.
     18) Paul Althaus, Theologie Martin Luthers,, 1972, Guetersloh, s. 218- 238; Werner Elert, Das Lutherische Ethos, 1949, s. 111-187
     19) Werner Elert, ibid., s. 111-177.
     20) Paul Althaus, ibid., s. 218 - 237; "율법과 복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율법의 제3용법", 성공회논총 7호를 참조할 것.
     21) Wilfried Harle, Der Aufruf der 93 Intelleutuellen und Karl Barths Bruch mit der liberalen Theologie, in:ZThK 72/ 1975, s 207-224.
     22) Eberhard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Muenchen, 1986, S. 82ff.; 이 문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Ulrich Dannemann, Theologie und Politik im Denken Karl Barths, 1977 Kaiser, s. 49-54.
     23) K. Barth, Anfaenge der dialektischen Theologie Bd, 1: Muenchen 1962, s. 5.
     24) Eberhard Busch, Karl Barths Lebenslauf, s. 122ff.
     25) K. Barth, Das Problem der Ethik in der Gegenwart, in: ders., Das Wort Gottes und die Theologie. Ges. Vortraege, Muenchen 1924, s 125ff.
     26) ibid., s. 139.
     27) Karl Barth, Kirchliche Dogmatik(KD), II/2, s. 574.
     28) K. Barth, ibid., s. 564.
     29) ibid., s. 598.
     30) Karl Barth, KD IV/1, s. 857.
     31) Karl Barth, KD II/2, s. 566ff.
     32) K. Barth, KD II/2. s.607.
     33) K. Barth, Evangelium und Gesetz, Wege der Forschung II.까몽; 필자의 논문, 루터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 성공회논총, 참조; 바르트는 루터교 전통에 서 있는 대부분의 루터파학자들과 같이 "율법과 복음"의 도식을 통한 이들 사이의 변증법적 역할을 문제삼지 않고 율법이전의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함으로써 "복음과 율법"이라는 도식을 취하고 있다. 이것은 율법의 자연신학적 영역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그의 신학을 복음으로부터 춥발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Gehard Ebeling,, Luther,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1964 Fortress Press, pp. 110-140을 참조할 것.
     34) K. Barth, KD II/2, 646.
     35) 필자의 논문, "루터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 참조. 루터는 사실상 율법의 제1용법(정치적 용법)과 제2용법(신학적 용법)만을 알고 있었으며 제3용법은 멜랑톤등에서 등장한다. 율법의 제2용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깨달아 복음에 이르게 하는 기능으로서 일단 복음에 이른 신자들에게서는 더이상 제2용법이 사용되지 않고 제3용법 즉 권면의 기능이 사용된다는 것이 켈랑톤이나 칼빈의 견해이다.
Johannes Calvin, 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 1559, Hrg., Barth und Nielsel, Bd. 2, L.II c. VIII section 2참조.
     36) K. Barth, KD I/2, s 737ff.
     37) K. Barth, KD I/1 112.
     38) K. Barth, KD II/2, s. 762.
     39) K. Barth, KD II/2, s. 652; III/4, 11ff.
     40) K. Barth, Christengemeinde und Buergergemeinde, 1970, s. 57ff. 41) ibid., s. 68.
     42) ibid., s. 75f.
     43) Karl Barth, KD III/1, s. 103ff.
     44) K. Barth, KD. III/4, s. 189-202; 279ff.
     45) ibid., s. 593ff.
     46) ibid., s. 687ff.
     47) ibid., s 384ff.
     48) ibid., s. 499ff.
     49) Dietz Lange, Ethik in evangelischer Perspektive, s. 39.
     50) Dietz Lange, ibid., s. 40. 51) Karl Barth, KD III/4, s.515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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