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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에 있어서 율법의 제3용법


루터에 있어서 율법의 제3용법

손규태


목 차

I . 문제와 과제
1. 루터신학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의 중요성
2. 율법과 복음의 문제성
3. 논문의 과제
4. 연구방법 및 전개
Ⅱ. 율법의 제3용법(tertius usus legis)-복음 안에서 율법의 기능
l. 율법의 용법
2. 율법의 제2용법(usus theologicus)
2. 인간의 율법성과 하느님의 율법
3. 율법과 인간의 의인(義認)
Ⅲ. 현대신학에 율법의 제3용법에 대한 논의
l. 제3용법의 개념에 대하여
2. 부정적 해석 - 율법과 복음의 대립성에서
3. 긍정적 해서 - 율법과 복음의 통일성에서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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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자명 성공회신학교  
학술지명 성공회대학논총  
권 1991  
호 5  
출판일 1991.   







루터에 있어서 율법의 제3용법


Tertius usus Legis bei Luther


손규태
(Sohn, Kyoo-Tae)
성공회신학교 신학과 조교수
2-069-9101-01
pp.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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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 문제와 과제
1. 루터신학에 있어서 율법과 복음의 중요성
종교개혁의 아버지인 루터 (Martin Luther)의 중요성과 의의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할 신학자나 역사가는 없을 것이다. 그는 종교개혁의 탁월한 영웅일 뿐만 아니라 서구역사에 사상적 근간을 이루는 인물로서 그의 신학적 가르침이나 개인의 자유와 책임성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은 교회나 사회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했던 것이다. 복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종교의 개혁을 요청했고 여기에 수반하는 새로운 인간이해는 새로운 인간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따라서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를 찾아 우리의 확고한 신앙의 근거를 찾으려 할 때 우리는 늘 안내자를 필요로 한다. 특히 현대와 같이 모든 기존질서들이 위협을 당하고 부정되는 시대에는 언제나 확고한 정신적 신앙적 안내자가 요청된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루터에게서 신학하는 일(Theologisierung)의 기준을 찾고 이 기준을 통해서 현대의 교회 및 세계에 대하여 몇가지 기준이 되는 이해를 얻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 루터를 이해하고 그의 사상의 근저에 도달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몇가지 난점에 직면하게 된다. 첫째는 현실적인 문제로서 언어의 장벽이다. 방대한 봐이마르 전집 (Weimar Ausgabe)을 읽기 위해서는 독일어와 라틴어의 장벽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는 이론적인 문제로서 루터는 칼빈과는 달리 조직신학자가 아니어서 그의 사상의 중추 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우리 손에 남겨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들은 대부분 조직신학적인 의도가 아니라 역사적인 '생의 정황'에서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기록된 글들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과 밀접히 관련된 기독교인의 자유, 교회의 바빌론 포로, 기독교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등도 그의 신학과 사상을 조직적으로 천명한 글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루터교회 안에서 교리적인 기준으로 간주하고 있는 아욱스부르그 신앙고백서만 하더라도 루터 자신의 손으로 기록되지 않고 그의 동료인 멜랑톤(Melanchton)에 의해서 쓰여졌다. 루터 자신이 기록한 신조에 대한 몇편의 논문들과 두 개의 교리문답서들도 루터 자신의 신학의 제한된 범위만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러면 루터는 전혀 비조직적이며 교리나 신학에는 무관심했을까? 아니다. 루터를 종교개혁의 설교자로, 칼빈을 조직신학자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러한 견해는 두 사람을 다 적절히 평가했다고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칼빈은 조직신학자 못지 않게 설교자였고 루터는 조직신학적 저서를 남기지 않았으나 그의 저서들은 그 방법과 내용에 있어서 조직적이며 교리적이다.

그러면 루터의 사상과 신학의 핵심에 도달하는 첩경은 어떤 것일까? 필자는 그의 신학의 내용에 들어가기 보다는 그의 신학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 및 '율법의 제3용법'을 이해함으로써 그의 사상의 중추를 찾아 보고자 한다.

루터는 '아욱스부르그 총회에 모인 성직자들에게 행한 권면' 1) 에서 참된 교회가 취급해야 할 32개의 논제들을 언급하는 자리에서 제일 먼저 "율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을 제시한다. 그리고 루터는 "복음에 이어 죽어가는 자를 다루는 법"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루터는 창세기, 로마서, 갈라디아서등 주석들과 "선행에 대한 설교" 및 반율법주의자들과의 논쟁 등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규명을 그의 신학적 안 내자로 삼고 있다.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을 적절히 구별하는 법을 아는자는 누구나 하느님께 감사하고 자신이 참 신학자임을 알아야 한다. " 2) 그는 또 "누구든지 이 기술을 아는 사람은 신학자라 불리울 자격이 있다" 3) 고 했다. 그는 또 그의 설교에서 모든 것은 이 양자의 구별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래서 바울로는 기독교에서 이 둘, 율법과 복음이 명백히 구별되어 혼돈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혼돈이 생길 때 이 두 개 가운데 하나 혹은 두개 다 잃게 된다는 것이다. 교황치하에서는 율법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복음과 함께 복음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율법을 이해한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율법 아래 있는 신앙만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4)

루터는 종교개혁 당시 그리스도를 새로운 율법의 수여자로 간주하여 복음을 율법화 하는 스콜라주의와 율법의 전적인 폐지를 주장하여 율법을 복음화 하려는 열광주의자들(Schwarmer) 사이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복음의 순수성을 찾으려 했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이 두 개의 전선에 대항하여 투쟁했고 이러한 위험은 종교개혁 당시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교회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사이의 신앙고백의 차이, 전통적 형태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의인론의 타당성, 사회정치적 영역에서의 교회의 책임성의 위치 및 두 왕국 개념(Zwei Reichelehre)을 이해하는 척도가 된다. 5) 그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선교의 특수성, 신앙, 실존, 선교, 신학, 인간이해 및 교육 등이 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따라서 규정된다. 6) 핸들러 (K.Haendler)는 이 양자의 관계가 루터 신학의 모든 제목들을 꿰뚫고 있다고 한다. 7) 골비쳐 (Helmut Gollwitcher)는 루터가 성서에서 복음을 새롭게 찾아낼 때 결정적인 한 걸음을 내딛게 한 것은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는 방법을 터득한 데 있다고 했다. 8) 즉 성서이해의 기본 척도를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밝히는 데서 규정되는 것이다. 만(U.Mann)도 율법과 복음이 종교개혁의 기독교 이해의 중심이며 기본척도이며 신학적 사상의 근거라고 했다. 9) 킨더 (E.Kinder)도 율법과 복음은 신학의 부수적인 문제가 아니라 "전체 신학의 개념들을 규정하고 개개 문제들의 기준과 방향들을 제공하는 보편적 주제다" 10) 라고 했다. '율법과 복음의 대립관계'(Gegensatz)는 종교개혁신학의 기본명제였다. 은총을 통한 의인,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등의 교리는 이 기본명제 위에 세워져 있다. 종교개혁 적인 해석학도 이 명제에 근거를 두고 있다." 11)

이상에서 언급한 개념들을 고려해 볼 때 루터 신학의 모든 개념들은 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 이해되며 이 개념을 이해하는 성격에 따라 다른 모든 신학적 제목들의 개념이 규정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 특히 '율법의 제3용법'을 루터의 글들을 검토해 봄으로써 규명하자는 것이다.

2. 율법과 복음의 문제성
역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 당시나 정통주의 시대에는 루터교회에서나 개혁교회에서나 율법과 복음의 교리가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루터가 칼스타트와 우상타파자들에 대항하여 자유의 이름으로 율법성을 비나한 일은 있으나 12) 이 사건도 율법과 복음의 동등한 관계에서가 아니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문제삼는 데서 생긴 것이다. 13) 당시 쯔빙글리와의 논쟁에서도 루터는 주로 성만찬의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다. 루터는 또 안티노미안들과의 수차례의 논쟁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그의 신학적 입장의 기본명제 가운데 하나로 선택하여 순수한 기독교의 교리를 보존하는 유용한 형식으로 채택했을 때도 쯔빙글리와 칼빈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논쟁의 재료로 삼지 않았다. 14) 당시의 루터교인들과 개혁교인들 사이의 결정적 차이점은 성만찬에 관한 견해와 거기에 수반되는 기독론의 문제였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 양진영 사이의 논쟁의 숫자가 확대되는데 17세기는 예정론이 그 선두를 달린다. 율법과 복음의 문제는 이 논쟁들의 변두리에 머물거나 부수적으로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15)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종파간의 날카로운 대립은 사라졌다. 루터파나 개혁교인들은 이 시대는 대체로 복음을 율법적으로 이해하여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관계에 별로 관심하지 않았다. 16) 플랑크(J.C. Planck)같은 이는 율법과 복음의 교리에서 구별을 고려에 넣지 않았고 동시에 이 교리에 대한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에 의하면 16세기 안티노미안과의 논쟁은 순전히 말장난에 불과하며 본질적인 면에서는 루터와 아그리콜라 사이의 차이점은 없다는 것이다. 17)

개혁교회와 루터교회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는데 있어서 율법과 복음에 대한 견해를 그 척도로 삼은 이는 슈넥켄부르그(Matthias Schneckenburger)였다. 18) 그에 의하면 이 양 진영이 다양하게 생각하는 주관적 구원의식(Subjektives Heilsbewusstsein)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루터파교회에서는 죄의 고백과 동시에 곧이어 직접적인 구속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루터교인들은 의로워진 자로서 신자에게는 율법이 지배하지 못하며 옛 사람들에게만 유효하다고 생각하나 개혁교인들은 율법은 신자에게도 강제하고 요구하는 힘으로써 인정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 자체를 계명의 형식(Form des Gebotes)에서 선포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개혁교회와 루터교회 차이가 명백하다.

19세기에 와서도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19세기초 새로 등장한 고백루터교회에서 개혁교회와의 연합이 깨어지면서 이 문제는 일단락 되었다. 그후 하르낙은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그리스도 안의 세계와 그리스도 밖의 세계를 구별하는 데 적용하여 하느님이 이 두 세계에 대하여 각기 다른 관계를 갖는다고 했다. 19) 여기에 반하여 리츨은 이러한 이차원적 구별을 지양하여 하느님의 본성은 무제약적인 사 랑이라고 정의하여 하르낙이 진노의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 그리스도 안의 세계와 그리스도 밖의 세계로 구별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20) 그리고 하르낙은 좀 다르게 율법과 복음의 철저한 구별을 실천신학적면에서 시도한 발터 (C.F.W. Walther)는 특이하다. 21)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루터교회가 율법과 복음의 관계로 개혁교회와의 대립이 계속되는 동안 개혁교회측에 대해서는 율법성(Gesetzlichkeit)이 비난되었고 루터교 진영에서는 순수한 복음의 유지가 요청되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율법과 복음의 긴장에 대한 계속적인 유지가 특별히 루터교적 원칙이 되지는 않았다. 22) 칼 홀(Karl Holl)의 숨으시는 하느님과 계시하시는 하느님 사이의 긴장관계에 대한 새로운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서도 영향을 주어 새로운 변증법적 신학이 싹트게 되었다. 23)

그런데 율법과 복음의 관계문제는 개혁교회 전통에 서 있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복음과 율법'(Evangelium und Gesetz)이란 논문을 출판함으로써 새로운 문제로 등장한다. 24) 그는 고전적 칼빈주의를 재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칼빈적 전통 자체에 비판적으로 대립하는 새롭고 본질적인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그의 논점은 전통적인 논점들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 이상의 의의를 준다. 25) 오늘날 루터교 진영에서는 복음과 율법이 하나라고 하는 바르트적 이해를 부정하는 측에서도 어떻게 이 이해를 새롭게 건설적으로 해석하느냐 하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율법을 자연질서 특히 나치의 국가질서(Nationalsozialistische Staatsordnung)와 일치시킨 예로서 1934년 바르멘 신학선언에 대한 안스바하 협의 (Ansbacher Ratschlag zur der Barmer theololgischen Erklarung)와 같은 것은 전후에는 거기에 서명했던 사람들 가운데 누구에 의해서도 긍정되지 않았다. 엘러트(Werner Elert)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후에 출판된 '은총과 비은총 사이에서' (Zwischen Gnade und Ungnade)에서 국가질서의 악마화의 가능성을 지적했으며 루터교 진영에서도 최근에는 법 (Rechte)의 근거와 자연법과 그리스도의 법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서는 복음의 내용으로부터 완전한 고립은 허용될 수 없으며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는 루터에게 호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했다. 26) 이는 루터의 두 나라 개념에도 적용된다.

특히 오늘날 많은 문제를 제기해 주는 것은 율법과 복음에서의 율법의 제3용법 (tertius usus legis)의 문제다. 엘러트는 1538년 안티노미안 제2차 논쟁의 마지막에 루터가 제3용법의 개념을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1535년의 멜랑톤의 LOCI로부터 부가된 것이라고 못밖고 있다. 27) 그는 율법의 어떠한 용법도 루터에게서는 신자를 위해서 적극적인 기준으로서 간주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은 화해할 수 없는 대립(Unversohnliche Gegenuber)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아스무센(Helmut Asmussen), 에벨링 (Gehard Ebeling), 브링 (R. Bring), 킨더(E. Kinder) 등을 들 수 있다.

다른 한편 외스트(J. Joest)는 루터에게 제3용법의 용어나 명백한 개념을 사용지 않았으나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고려해 볼 때 기독교인에게도 율법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았음을 고혀할 때 이 개념이 있었다는 것이다. 28) 긍정하는 이들은 칼 바르트, 부른너, 발터 등이다.

율법과 복음의 통일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은 이 제3용법을 긍정하며 이 양자간의 가장 고차적인 관계를 거기에서 보려고 하는 반면에 율법과 복음의 대립적 성격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제3용법을 부정하며 이 관계를 변증법적 관계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3. 논문의 과제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서 적어도 다음 몇가지 과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첫째는 위에서도 언급한대로 루터의 신학방법론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의 방법론을 이해하는 것은 종교개혁 및 현대신학의 기초를 파악하는 열쇠가 된다. 둘째는 의인론에 대한 루터의 이해를 바로 파악해 보자는 것이다. 이 의인론은 루터의 인간이해와 직결되는데 율법과 복음은 인간, 신앙안에 혹은 이전에 선 인간을 고려치 않고서는 논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연과 은총, 자유와 은총, 결단 등이 논의될 것이다. 셋째는 윤리학에 대한 루터의 사상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국가와 교회,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관계 및 사회문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등을 문제삼게 될 것이다.

이를 종합적으로 표현한다면 루터사상의 실제적인 적용 그 자체 보다는 오히려 기거로부터 현대의 복잡한 사회에서 교회의 방향을 가름하는 어떤 기준을 얻어 보려는 것이다. 특히 율법의 제3용법의 이해를 통하여 기독교 메시지를 바르게 파악하는 척도를 찾아 보려고 의도한다.

4. 연구방법 및 전개
위에서 언급한대로 루터의 글들은 생의 정황을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과 관계되기 때문에 연구방법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리가 역사적 문서들을 통해 한 인물의 사상을 연구하려 할 때 일방통행이란 기대할 수 없다. 루터연구사를 보면 대체로 다음 세가지 연구방법을 따른 것을 보게 된다. 첫째는 역사적 연구방법이다. 이 방법은 흔히 사용되는 것으로서 한 인물의 일정한 사상이 언제 (Wann) 등장하여 어떻게 (Wie) 발전되어 갔는 가를 살피는 것이다. 둘째는 조직적 연구방법이다. 이 방법은 단지 한 인물의 사상이 무엇 (Was)을 말하고 있는 가를 문제삼는다. 여기서는 그 사상의 발생시기나 역사적 변동 등은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나 조직적 연구방법도 실은 내용(Was)만을 문제삼지 않으며 그 이유(Warum)도 문제삼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적 연구방법과 조직적 연구방법은 상호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이다. 29) 그래서 프렌트(R. Prenter)는 "루터신학의 조직적 연구방법은 항상 교회사가들을 위한 간접적 의의를 갖는다" 30) 라고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어느 한가지 방법을 통해서 루터를 연구할 수는 없다. 뢰프겐(D. Loefgen)도 루터의 창조론을 연구하는 데서 루터연구의 두 가지 방법이 지니는 극단적인 경향을 피하기 위해서는 조직적 구성은 역사적 검토를 거친 자료들에 의해서 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31) 따라서 대체로 오늘날의 루터연구는 이 두가지 방법을 종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순수하게 연대기적으로 루터의 진술의 기원과 발전과정을 캐는 역사적 연구방법이란 결국 무수한 자료속에서 서로 뒤얽힌 모순들을 발견하고 끝날 것이며 저작의 시기나 발생과정을 고려치 않은 조직적 연구방법은 그 신빙성에서 심한 약점을 지닌다.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방법을 종합 보완하는 방법으로 주석적인 방법이 사용된다. 이 방법은 역사적 연구방법과 조직적 연구방법에서 발견되는 상호 모순되는 문제들을 본문의 철저한 검토를 거쳐서 해결해 나가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매우 유용한 방법의 하나로 널리 이용될 전망이다.

본 논문에서는 역사적 연구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석의적인 방법의 도움을 받아 조직적 방법으로 전개해 나가려고 한다. 역사적 방법에 의한 율법과 복음의 개념에 대한 발생 및 발전과정을 검토하는 것도 유익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32) 그러나 본 논문은 조직적 연구방법을 택함으로써 연대적 제한을 넘어서 손에 얻을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을 조직적으로 석의적으로 검토하여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밝히려 한다.

전개에 있어서는 제1장에서는 논문의 문제 및 과제 그리고 방법을 다루고 제2장에서는 율법의 두 가지 용법 즉 제1용법 (usus politicus)과 제2용법 (usus theologicus)의 문제를 밝힘으로써 제3용법의 서론으로 삼고자 한다. 이어서 율법의 제3용법의 가능성을 검토하는데 우선 율법과 율법성의 문제에서 루터의 율법이해의 본질적인 면을 검토한다. 그리고 율법과 인간관계에서 루터의 유명한 명제인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명제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의인과 성화의 문제가 논의된다.

제3장에서는 제3용법에 대한 현대신학자들의 의견을 검토한 후에 결론에서는 필자의 견해 및 제기된 과제에 대한 원칙적인 의견을 진술함으로써 논문을 마감한다.

Ⅱ. 율법의 제3용법(tertius usus legis)-복음 안에서 율법의 기능
l. 율법의 용법
(1) 율법의 제1용법(primus usus legis, usus poeiticus, usus civilis)

루터에 의하면 "율법은 두가지 용법을 위해서 주어졌다. 첫째는 야만적이고 사악한 자들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이런 뜻에서 율법을 지키는 자는 그것을 지킴으로 살리라고 한 말은 정치적 진술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사람들이 외적으로 그리고 시민생활의 영역에 있어서 통치자에게 복종한다면 그는 형벌과 죽음을 면할 것이다. 국민의 통차자는 이런 이들에게 형벌을 가하거나 처형할 권리가 없고 안심하고 살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야만적인 자들을 위해 타당한 율법의 시민적 용법이다. 33)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의 두 가지 용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범법자를 억제하기 위하여... 시민법 (civil law)을 제정했다. 따라서 모든 율법은 죄를 억제하기 위해서 주어졌다... 그러므로 율법의 첫째되는 이해와 사용은 사악한 자를 억제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마귀가 온 세상을 다스리며 사람들을 온갖 부끄러운 일로 이끌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통치자, 부모, 교사, 법률, 쇠고랑 등 모든 시민질서들을 제정했다." 34)

세상의 삶을 형성하고 질서를 세우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율법의 적극적인 필요성을 가리켜 율법의 제1용법, 시민적 용법 혹은 정치적 용법이라고 한다. 이런 뜻에서 세상 질서를 위한 율법의 기능 및 직무는 명백하다. 악과 죄에 붙잡힌 세상에서 범죄와 파괴를 방지하고 공적 평화를 유지하며 젊은 이를 가르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될 수 있도록 외적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율법의 제1용법의 목적이다. 이 율법 은 신자나 불신자를 가릴것 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된다.

이 제1용법은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모든 행위들을 억제하기 위해서 창조와 더불어 주어졌다. 여기에서 제1용법은 정치적 권위와 밀접하게 관계된다. 빙그렌은 이것을 율법의 일반적 기능(Ordinary Function)이라고 부른다. 35) 이 지상의 정치적 권위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루터는 그 정치적 권위를 기능에 따라 국정(Political economy)과 가정(domestic economy)으로 구별하고 세번째의 승려제 (Hierachie)를 영적인 권위라 하여 교회의 영역에 귀속시킨다. 36) 국정은 왕으로부터 병사에 이르기까지 창조의 질서를 유지하는 이들로 구성된다. 이 통치에 의해서 악이 억제된다. 이 질서와 나란이 가정이나 질서가 존재하는데 부친은 어린이를 규율있게 가르치고 잘못을 시정한다. 37)

소위 이런 외적인 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자리에 있든지 율법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복음에 관심을 둘 시간이 적다. 루터에 의하면 이 제1용법에 충실함으로써 인간들은 그들의 직무(Vocation)를 완수한다. 38) 그러므로 율법과 칼은 상호 예속하며 율법과 소명은 또한 상호 예속함으로써 소명은 율법의 왕국에 속한다. 39)

그리고 루터는 율법과 관련하여 제1용법 즉 정치적 권위에 속하는 집단과 영적 권위에 속하는 집단의 사람들을 나누는 경우가 있다. 불신자는 정치적 권위에 속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권위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인은 율법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복음 안에서 의인론을 강조한 표현이며 실제로는 그리스도인도 율법의 제1용법에서 초월한 것은 아니다. 프렌트(Prenter)는 외적 계율과 도덕적 생활은 율법의 제1용법에서 주장하는 시민적 의이며 그것은 사람 앞에서(Coram hominibus) 타당성을 지니나 하느님 앞에서(Coram Deo)는 타당성을 지니지 못한다. 40) 이 문제는 율법의 제2용법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2. 율법의 제2용법(usus theologicus)
"율법의 다른 용법은 신학적 용법 혹은 영적 용법으로 죄를 증가시키는 데 기여한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의 일차적 목적이다. 이것을 통해서 양심에서 죄가 증가하고 많아진다. 따라서 율법의 참된 기능과 중요하고 적절한 용법은 인간에게 그의 죄, 맹목성, 비참, 사악성, 무지, 하느님에 대한 증오와 기만, 죽음, 지옥, 심판 및 하느님의 진로를 받기에 가장 적합함을 보여준다." 41) 루터는 율법의 본래적 기능을 제2용법에서 보고 그것을 복음과 관련하며 다루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제1용법의 율법아래 있으나 율법의 본래적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이 율법을 적절하고 바르게 실천하는데 장애가 되는 죄를 들어내기 위하여 하느님이 봉사의 법(legis ministrium)을 주었다. 42) 제2용법은 루터에 의하면 인간의 자기이해를 위해서 주어진 기능이다. 그래서 루터는 제2용법이 율법의 본래적이고 참된 기능이라고 했다. 43) 예수는 이것을 산상설교에서 지적하고 있다. 거기서 예수의 율법해석은 정점을 이룬다. 즉 하느님의 율법은 순수한 마음, 완전한 복종, 전적인 경외와 사랑을 요구한다. 44) 그러나 죄된 인간은 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즉 율법은 의를 요구하나 그를 의에 이르도록 도울 수는 없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의 죄를 들어내고 그것을 증가시키며 45) 인간을 고발하고 하느님의 진노, 심판, 영원한 죽음에로 몰아간다. 46)

알트하우스는 이것을 율법의 능력 (Macht)이라고 부른다. 47) 루터에 의하면 모든 인간들은 이 힘을 알고 있으나 그 힘을 예측하지 못한다고 한다. 48) 따라서 율법의 설교를 필요로 한다. 이 율법설교는 인간들이 이 혼미성에서 깨고 율법의 능력을 감지하며 죄를 깨닫고 하느님의 진노를 체험하며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 일에 기여한다. 49) 이상에서 언급한 것이 율법의 제2용법의 목적이다.

루터에 의하면 하느님의 사랑의 표현인 이 율법이 이제는 인간에 대한 진노의 수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전에는 인간들이 즐거워 하던 율법이 이제는 몸서리쳐지는 것이 되었다. 50) 이와같이 인간의 죄를 들어내고 하느님의 진노, 심판, 지옥을 보여주는 율법을 의인의 수단으로 삼으려 할 때 그것은 오해되고 오용된다. 이것은 제2용법의 목표나 직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의인에는 반대로 작용한다. 이상이 율법의 제2용법의 직무다.

물론 율법이 하느님 자신의 말씀이며 그의 뜻임에는 틀림이 없다. 즉 그것은 영적이며 하느님에게서 유래했고 "그의 손가락으로 기록했다." 루터는 안티노미안들과의 논쟁에서 율법의 영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율법 안에서 성령의 역사는 아버지로부터 그리스도가 보낸 영과는 구별된다. 51) 따라서 루터의 성령론은 이중적이다. 율법과 복음으로서의 하느님의 말씀의 이중성과 관련해서 성령은 그것이 율법의 창조자인 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과는 구별된다. 그리스도는 그 본질상 하느님이나 성령은 그리스도안에서 계시된 것에서 온다. 52)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율법을 통해서 혹은 복음을 통해서 각각 다르게 역사한다. 율법을 통해서 역사할 때 성령은 공포와 죽음으로 양심을 불붙게 하며 복음을 통해서 역사할 때 성령은 위로하고 거룩하게 하고 생명을 준다. 양심의 공포 그 자체가 율법의 목표는 아니며 복음으로 인도하는 준비가 제2용법의 목표다. 루터에 의하면 은총은 양심의 공포 이전에는 은총일 수가 없다. 여기에서 루터는 안티노미안들과 대비를 이룬다. 양심에서 불안과 공포가 체험된 후에야 비로소 바른 질서, 즉 사죄가 따른다. 53) 따라서 율법은 복음을 잘 알아 보게 하는 하느님의 예비적인 활동(strange work)이다. 이 율법의 제2용법은 복음에 이르게 하는 성령의 역사다. 54) 이렇게 하여 율법에서 복음에로 나아가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55) 왓슨은 이것이 인간의 죄성의 깊이와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마음의 내적 반역을 보여주는 것이며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자기 의와 지기신뢰를 깨뜨리는 하느님의 햄머(Hammer)이며 은혜로의 길을 예비하는 봉사자며 교사라는 것이다. 56)

이 율법의 제2용법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직무다. 제1용법은 세상질서들에 의해서도 선포되나 제2용법은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 선포된다. 여기에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직무의 차이가 들어난다. 율법이 하느님의 참된 뜻이라고 할 때 그것을 통해서 인간의 실존을 밝히는 것이 교회의 직무가 된다?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 곁에는 언제나 복음이 서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치료하기 위해서 상처를 내고 살리기 위해서 죽 이기 때문이다." 57) 여기서 율법과 복음은 상호 밀접하게 대립하며 각기 다른 직무를 가졌음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대립하는 직무는 상호 저항관계(Widereinander)뿐만 아니라 친화관계(Aufeinander)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에벨링은 "루터의 율법의 두가지 용법 즉 시민적 용법과 신학적 용법 사이의 구별은 상호 분리되어 발전한 이론이 아니라 복음의 참된 이해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58) 고 보고 세 가지의 가능한 오해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제1용법은 외적인 질서유지를 위해 야만적인 사람들만을 강제하는 데 적용되며 제2용법은 좀더 고차적이고 예민한 층의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하여 사람들 사이의 계층을 나누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고 죄인으로서 그는 율법의 두 가지 용법 아래 동시에 서 있다.

둘째는 율법 자체가 속된 것과 그것을 초월하는 종교적인 법으로 구성되어 이중적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이다. 사실 이것은 하나이며 동일한 법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인간들과 관계한다.

셋째는 율법의 두 가지 용법이 상호 평행선을 이루어 무관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물론 제1용법은 설교를 통하여 실행되지 않고 기독교 선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제1용법의 참된 이해는 오직 복음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다. 즉 신앙만이 세속적인 칭의를 하느님 앞에서의 자기칭의의 어리석은 노력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 따라서 사회에서 인간을 위한 신앙의 가치는 건전하고 합리적인 정치적 이해와 행위 를 위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구체적인 목적까지 확대된다.

루터는 율법의 제1용법에서 인간의 외적 죄와 싸우며 외적 평화와 외적 생을 보존하며 제2용법에서 인간의 내적 파멸을 들어내고 인간을 시련과 죽음에로 몰아넣는다고 했다. 59) 뢰프그렌은 이 두 개의 용법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세상의 직무수행에서 전혀 제외되지 않기 때문이다. 60)

프렌트는 계약의 요구(Covernant Demand)가 모든 율법의 근거라고 보아 이것이 예언자들에 의해서 극단화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계약의 내용은 은총이며 선택이다. 이 선택의 궁극적 근거가 하느님의 창조의 사업에까지 소급한다. 61) 그에 의하면 하느님의 계약의 요구는 시민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용어들로 많은 규례를 통하여 구체화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계약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모세법의 모든 시민적 계명(Civil Commandment)에서 구체화 된다. 말하자면 계약의 요구는 무조건적 요구와 상세한 구체성의 근거 (Woher)가 된다는 것이다. 62)

프렌트는 제2용법을 하느님의 무조건적 요구로부터 해석한다. 즉 이것이 우리 죄의식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제가 다 지켰습니다. 아직도 제게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마태 19:20) - 제1용법 - 에 대하여 "하느님이여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루가 18:13) - 제2용법 - 로 대답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제1용법과 제2용법은 밀접하게 관계되며 프렌트는 이것을 변증법적 관계라고 했다.

우리는 이제까지 율법의 제1용법과 제2용법의 내용, 목적, 기능 및 양자 사이의 관계를 살핌으로서 제3용법에 대한 검토의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개념규정을 통하여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갖는 성격을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이 양자의 구별을 통해서 대립적인 성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폈다. 이 양자를 구별해서 도식화하면 "율법은 인간을 하느님과 대립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안에 서게 하며 복음은 인간의 존재를 하느님 안에 받아들인다" 63) 고 한 외스터의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루터에 의하면 율법에서 인간은 하느님과 적대자가 되며 복음에서 하느님은 인간과 화해한다. 율법은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 앞에서 응답하게 하며 복음은 하느님 스스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응답한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율법으로서 이해해 온 것은 즉 복음과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율법은 하느님의 참된 율법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서 왜곡된 율법성인가? 말하자면 인간을 능동적 자기의인으로 몰아가고 강제하며 스스로 서게 하는 것이 율법의 본래적 임무인가? 루터가 율법과 복음을 대립시킬 때 이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대립인가? 혹은 인간과 인간의 대립인가? 참된 율법은 복음과 대립하는가? 혹은 일치하는가? 율법성 (Gesetzlichkeit)만이 복음과 대립하는가?

2. 인간의 율법성과 하느님의 율법
우리는 여기서 율법의 본질 및 율법성을 밝힘으로써 율법과 복음의 통일적 성격과 대립적 성격을 밝히고자 한다. 루터에 의하면 율법은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이해되기 때문에 인간의 율법성의 문제를 밝히는 데서만 율법의 본래적 성격 및 복음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율법과 율법성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서 율법과 복음간의 통일성 및 대립 성이 밝혀지고 거기에 따라 제3용법의 문제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1) 율법과 복음의 대립이 아니라 율법성과 복음의 대립

바르트는 율법과 복음의 내적 통일성(innere Einheit)을 강조하여 이 양자 사이의 대립을 하느님 안에서의 내적인 변증법(innergoettliche Dialektik)의 평면에서 인간적-율법적 오류(Menschlch-gesetzlicher Irrtum)의 평면으로 옮겨 놓아서 루터의 대립관계를 이해하였다. 바르트에 따르면 그리스도, 성령, 은총 안에서만 모세도 율법도 우리에게 말하며 64) 또 "계명은 선물이며 은총은 선택이다. 계명이 비합법적으로 약속을 벗어버릴 때 율법은 무익한 교사로서 끼어든 것이다." 65) 볼프(O, Wolff)는 바르트적 관점에서 루터를 이해하여 구속론에서 '순차적 도식주의' 66) (Sukzessive Schematismus)를 주장하여 악마적 폭군의 험악한 성격을 갖고 그러나 사랑의 준엄성은 아니고 참 하느님의 위험을 지시하는 이 율법, 도덕적 신개념의 소산이기도 한 이 율법은 물론 복음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대립하며 계시적인 면에서 완전하고 원초적인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67) 그에 의하면 율법의 요구에 의해 인간이 파괴되면 복음에 의해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율법과 복음으로부터 두 개의 각기 다른 그러나 순차적인 하느님의 말씀의 행위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복음은 구원의 의지와 일치하며 율법이 파괴하는 것을 생명으로 일깨우 기 때문에 이 둘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적이다. 따라서 신자에게 있어서 계명의 구속적 요구인 제3용법은 종교개혁적 관점에서 볼 때 율법의 본래적이고 고유한 직무라는 것이다.

한편 이봔트(H. Iwand)는 바르트의 기본 입장에 동의하면서도 그것을 율법성의 차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의 내적 변증법에서 율법과 복음의 대응관계가 문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의견에 의하면 율법과 복음은 철두철미 하느님의 말씀이며 이 양자의 대립은 율법을 통해 의에 이르려고 하는 데서만 생긴다는 것이다. 즉 율법과 율법성의 구별을 통해서 대립의 차원을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으로 옮겨 놓았다. 68)

(2) 율법과 율법성의 대립이 아니라 율법과 복음의 대립

이와는 달리 아스무센(H. Asmussen)은 이 양자는 본래 날카롭게 대립하며 그것이 이들의 본래적 관계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 자신이 율법을 통해서 성취를 요구하며 실패했을 때 복수하고 또 하느님 자신이 이 복음 가운데서 이 율법을 폐기한다는 것이다. 69) 여기에서 새로 제기되는 문제는 루터가 복음이 율법의 마지막이라고 했을 때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인가 인간으로부터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율법의 파되자인가 아니면 율법성의 파괴자인가? 율법이 약속과 은사를 목표로 한다면 복음 후의 율법의 대상은 누구인가? "너는 해야한다는 곧 너는 해도 좋다인가?" 제3용법은 율법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율법과 복음의 중심문제가 아닌가?

그러면 이 문제에 관해서 루터에게 돌아가 보자. 외스터에 의하면 루터는 철저히 율법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율법에 관해서만 말했다는 것이다. 70) 루터에 의하면 하느님은 강제의 장본인이며 율법은 위협자요 강제자이다. 하느님은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능동적 성취를 요구하는 것이다. 71) 율법과 복음의 루터적 대립관계가 인간의 도덕적 율법성 사이의 대립에서 이해할 때 그 가치가 경감되며 사실상 참다운 율법은 복음과 일치한다는 주장은 어느 면에서는 불가능하다. 72) 왜냐하면 루터는 이 양자의 대립관계를 인간의 자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원 즉 하느님의 말씀 자체에서 이해했기 때문이다. 73) 그에 의하면 은총이 아닌 것은 율법 즉 시민법, 의식법, 도덕법 혹은 십계명이다. 74)

루터는 복음과 관련하여 율법의 본래적 직무와 성격을 바꾸어 조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율법이 율법성이 되었다는 관점에서 복음과 참된 율법 사이의 통일성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거나 노예적인 방식으로 성취한 것을 의미한다." 75) 강제성을 가진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은 자발적 행위를 원한다. 루터에 의하면 하느님은 복종을 요구하며 동시에 자유를 허락한다. 자유 없이 율법을 강제로 성취하려는 자는 그것을 성취할 수 없다. 76)

하느님은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성취를 요구하나 그것은 성취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를 목표로 한다. 루터에 의하면 능동적 성취를 원하는 자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77) 외스터에 따르면 루터에 있어서 본래적 의지는 행위로부터 존재에로의 종합적 운동(Synthetische Bewegung)이 아니라 존재에서 행위 즉 완성에서부터 넘쳐 나오는 활동(Wirkung)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에게는 율법의 강제성이나 성취의 요구는 오직 부정적 관점에서만 볼 수 없으며 거기에서 하느님의 율법과 인간의 율법성 사이의 구별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루터는 부정적 관점에서도 언제나 모세의 법, 요구하는 율법을 말하기 때문이다. 78)

그러면 루터는 왜 이 율법과 복음을 그 대립적 성격에서 이해하려 했는가? 루터는 이 양자의 대립에서 본래적인 직무가 수행된다고 보았다. "율법은 너희가 빚진 것, 부족한 것을 지적하고 그리스도는 너희가 행해야 할 것을 행하고 소유해야 할 것을 준다." 79) 즉 율법은 인간을 실망시킴으로써 은총을 구하게 한다는 것이다. 율법의 요구 자체는 율법 안에서는 목표지만 복음에서는 표식(Sign)이다. 루터에 의하면 율법은 복음과 대립함으로써 그것에 봉사자가 된다. 80) "따라서 신학에서 율법의 주된 목적은 인간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게 하는 것이다. 즉 인간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며 그것을 인식함으로 겸손하고 두려워 하게 만들어 은총과 축복을 동경하게 하는 것이다." 81) 따라서 율법의 직무는 인간을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성, 위가 아니라 아래, 위안이 아니라 저주로 몰아넣는 데서 그 직무를 수행한다. 율법은 자유를 위해 억압하고 수동적 의를 위해 능동적 의를 요구한다.

루터에 의하면 율법은 인간을 하느님과 대립시킴으로써 복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면 이 대립하는 것은 율법인가 혹은 율법성인가? 외스터에 의하면 이 율법은 때로는 율법성이며 때로는 하느님의 참된 율법으로 이해된다. 82) 즉 하느님의 율법에 대립하여 인간의 존재이해(Seinsverstndnis)를 도우며 인간과 대립하여 복음을 돕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율법에 반대하여 복음을 돕는 것을 말한다. "율법은 복음이 하느님의 존재에로 인간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인간을 하느님과 대립시켜 자기의 존재 위에 세운다." 83) 이 "위하여"(damit)를 오해하는 데서 율법 자체가 목적이 될 때 율법성의 위험이 나타난다. 그리고 율법의 제한된 직무가 복음에 의해서 그 직무를 수행하고 하느님의 참된 율법이 되는 것은 복음과 대립하는 데서만 가능하다. 율법의 직무가 율법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늘 복음이 그 곁에 서 있어야 한다. 루터에게는 사실 이 율법성이라는 위험은 복음의 율법화를 말한다.

루터가 복음에서 율법이 끝났다고 할 때 이 말은 외적인 면과 내적인면에서 이해된다. 외적인 면에서 복음이 선포되면 율법이 복음의 봉사자로서 그 직무가 끝나는 것이다. 내적인 면에서 복음이 양심을 지배할 때 율법의 종의 직무는 끝나고 만다. 본래의 직무(opus proprium)에서 비본래의 직무(opus alienum)가 끝나는 것이다. 하느님이 살리면 율법은 더 이상 죽이지 않는다.

율법은 복음까지, 복음을 향하여 그 타당성을 가지며 복음의 배후, 그것을 초월해서까지 타당성을 갖지 않는다. 복음과 반대로 율법은 그 본래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이런 의미에서 루터가 율법이 복음에 극단적으로 대립시킨 것을 율법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참된 율법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루터는 하느님의 요구하는 하느님의 율법은 성취의 가능성이 아니라 불가능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참 율법이요 그것을 성취했다고 할 때 율법성이 생긴다. 요구하는 율법은 인간의 오해로 인한 율법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참된 율법이다. 루터에게서 율법성은 율법의 복음화를 뜻하는 것이다.

3. 율법과 인간의 의인(義認)
(1) 복음 안에서 율법의 필요성

우리는 지금까지 율법과 복음의 대립적 성격이 이들 양자간의 본래적인 관계임을 밝히고 이 대립을 통해서 율법이 복음에 봉사한다는 것을 살펴 봤다. 이제는 율법이 그리스도인에게도 필요하다고 할 때 그 이유와 그 율법의 성격 및 기능을 의인론을 중심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루터의 율법과 복음이 그리스도인 안에서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가 들어나게 될 것이다.

루터가 율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끝난다고 할 때 그것은 이론적으로는 명백하나 인간과의 관계에서 고찰 할 때 새로운 해석을 불가피 하게 한다. 즉 그것은 의인을 필요로 하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해명되지 않을 수 없다. 루터가 안티노미안들과의 논쟁에서 그리스도인에게도 율법이 필요하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가? 율법이 복음 안에서 가지는 직무는 어떤 것인가? 루터에 의하면 다음 몇가지 점에서 복음 안에서 율법의 직무를 말하고 있다. "옛 사람은 우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새 사람을 입지 않으면 성령이나 은혜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의 삶에서는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84) "왜냐하면 무엇 보다도 우리는 아직도 순수하게 의로워지지 못했고 죄가 삶 가운데서 우리의 육신에 붙어 있기 때문이다." 85) "기독교인이란 죄가 없고 죄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의 죄를 그에게 전가하지 않는 사람이다" 86) "내가 말해온 바와 같이 이 두 개가 기독교인의 의를 완성한다. 첫째는 마음 속에 있는 신앙 즉 하느님께서 허락한 선물이며 이는 형식상으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둘째는 하느님께서 세상 죄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고 내가 믿는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내 안에 존속하는 죄를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육신 가운데 사는 한 내 안에는 명백히 죄가 존재한다." 87) "이 세상 하늘 아래에는 죄와 악이 거하며 경건한 자에게도 죄가 있다." 88) "성령을 통해서 신앙에 의하여 소망과 동경 가운데 의인을 기다린다. 즉 우리는 의로워졌다. 그러나 아직도 의로워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의는 소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는 실제로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있다." 89)

그래서 복음 안에서의 율법의 마지막은 시간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변증법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양자는 동시적이며 동일한 대상에게 설교되어야 한다. 여기서 기독교인은 율법과 복음 아래 동시에 서 있다고 하는 역설이 나오게 된다. 루터는 이 역설을 갈라디아서 2장8절을 강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그러면 왜 십계명과 복음과 사도들의 많은 권고들이 성취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까? 왜 우리는 매일 이것들이 지시하는 것을 행하라고 권고합니까? 이미 언급했듯이 대답은 이러합니다. 즉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는 죄인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의인임으로 동시에 죄인입니다.(Simul ergo iustus, simul peccator). 누가 이 모순되는 견해를 해결하겠습니까?" 90) 루터는 이 모순을 다음과 같은 말로 해결하고 있다. "결국 계명들은 그것들이 부가하는 일을 행함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의롭게 된 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이 육신으로 하여금 불순하게 되고 굴레를 벗고 신앙의 영이 기수(旗手)를 떨쳐버리지 못하도록 세상 생활에서 육신을 못박고 우리를 지도하는 방법을 알게 하기 위하며 필요하다. 기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말을 위해서 굴레가 필요하다." 91)

여기에서 율법의 남은 직무(bleibendes Amt)가 명백히 드러난다. 율법의 성취 또는 끝이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이며 신자들에게는 소망 가운데 신앙하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율법의 완성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건이며 신자에게 있어서는 신앙을 통한 소망의 사건이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신자 자신의 현실성이 아니라 그가 믿는 그리스도의 현실성이다. 따라서 우리가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다" (Simul iustus et peccator)라는 도식의 비밀을 밝힘으로써 신자와 율법과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2)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

루터에 의하면 신자의 생이란 상태가 아니라 과정으로서 이해된다. 즉 소유가 아니라 소망으로서 이해된다는 말이다. 루터는 신앙인의 생활을 성령과 육신의 투쟁(로마 8:5-14, 갈라 5:16-25)으로 보고 의인과 갱신의 교리를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 도식으로 해명했다. 92) 즉 의롭게 된 자, 복음 안에서 새로운 삶을 소유한 자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 그는 자기 안에서 죄인이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이다. 그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인으로 간주되는 사죄를 통하여 의인이며 자신의 인간적인 존재에서 죄인이다. 하느님의 엄한 심판의 관점에서 보면 죄인이고 자비의 관점에서 보면 의인이다. "그리스도 밖에, 나 안에서는 죄인이며 내 밖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의인이다." 93)

루터는 로마서 강해에서 "의롭게 된 성도들은 동시에 죄인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을 돕고 전가된 의를 믿기 때문에 의인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완성하지 못하고 죄된 욕망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죄인이다. 그들은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와 같다. 즉 그들은 실제로 병에 걸려 있으나 소망 중에 치유되어 간다는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건강하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들은 치유되고 있으며 건강해질 것이다" 94)라고 했다. 루터가 말하는 치유란 개선(Improvement)이 아니라 개혁(Reform)이다. 거기에서 새로운 삶의 형식으로서 신앙을 말하게 된다. 신앙은 세례로부터 부활에 이르는 투쟁의 과정이다. 이 새로운 생, 기독교적 생이란 질량이나 획득이 아니라 과정이다. 신앙의인이란 획득된 의(iustitia propria)가 아니라 주어진 의(iustitia aliena)) 즉 능동적 의 (iustitia activa)가 아니라 수동적 의 (iustitia passiva)다. 따라서 루터에 의하면 의인이란 선물이다. 그러므로 루터에 있어서 성화란 부정적 의미에서 자기부정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95)

그러면 이 동시성(Simul)은 두 개의 현실, 죄인과 의인의 역설적 대립 충돌에서 이해되는 것일까 아니면 두 개의 상호제약적 부분들의 공존관계(Beieinader)에서 이해될까? 아니면 부분적으로 죄인이고 부분적으로 죄인이고 부분적으로 의인인가?

루터는 '전적 의인' (totus iustus) - '전적 죄인' (totus peccator)의 방식으로 말하는가 하면 '부분적 의인' (partim iustus) - '부분적 죄인'(partim peccator)의 도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 두 개의 개념을 설명함으로써 이 '동시성'의 의미를 파악하고 그와 관련하여 율법과 신자의 관계를 이해해 보자.

a) totus iustus - totus peccator

루터에 의하면 totus iustus-totus peccator를 simul iustus=simul pecccator와 동의어로 본다. 여기서 simul은 상호대립하여 제한하는 두 개의 요소의 동일한 비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상호 배타적인 전체의 투쟁적 성격을 말한다. 여기서 simul은 완전한 의인도 완전한 죄인도 아닌 혼합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 죄인에 대립하는 전적 의인을 말한다. 96) 죄인으로서 인간은 한 계명 때로는 몇개의 계명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전체 계명에 대하여 범죄한다. "육신에 의하면 우리는 모든 계명에 대하여 범죄하고 있다." 97) 여기서도 계명도 죄의 수도 늘 하나로 간주된다. 외스트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반은 자유하고, 반은 억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노예인 동시에 자유인이며 '준성자'(Semitsanctus)가 아니라 '죽는 자'(mortus)면서 동시에 '산자'(vivus)며 혼합이 아니라 갈라진 대립투쟁이다. 98) 루터는 이것을 논리적으로 해명하지 않고 인간실존을 고려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루터는 이 두 개의 영역을 철저히 구별하였다. 그는 전적 의인과 전적 죄인을 전혀 다른 존재의 평면에서 고찰했던 것이다. 99)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와 성만찬을 받을 때 그는 눈과 같이 희다.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즉 자기 안에 있을 때 악마와 같이 천하며 완전한 죄인이다. 100) 루터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라는 도식을 이 현세와 도래하는 세계 즉 역사와 종말론과 대립시킨다. 즉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세계의 인간이다. 이 세상 사람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는 것은 새로운 새계의 전제가 된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갖는 신앙은 종말론적 사건이며 이 사건은 이 세계의 '전적 죄인'을 넘어서는 비약이다. 따라서 루터의 simul iustus et peccator는 두 개의 전체적 현실의 대립관계이다.

b) partim iustus-partim peccator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주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모든 죄가 사해지며 그들에게 의가 전가된다"고 말함으로써 의를 인간 안에서 찾지 않고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101) 그는 곧이어 하느님의 의와 거룩함을 믿고 거기에 매어달리며 그를 믿으면 의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루터는 우리가 신앙에서 받는 것을 '첫 영'(primitas spiritus)이지 '열 번째 영'(decimas spiritus)이 아니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신앙은 시작이며 전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율법의 완성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는 자는 성령을 받으므로 율법을 완성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신자가 된다. 따라서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의 행위의 근거를 두고 행하는 자가 아니라 이미 신앙을 통해서 그런 사람이 된 후에 행하는 자가 된 것이다." 102) "왜냐하면 기독교의 의인은 두 가지로 성립되기 때문이다. 즉 마음 속의 신앙과 하느님의 전가(imputation)이다. 신앙은 실은 형식적 의인(formal righteousness)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신앙 후에도 육신에는 죄의 잔재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서 신앙의 희생이 시작되었으나 그것은 오직 죽음에서만 완성되었다. 따라서 의인의 제2부분이 첨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데 '하느님의 전가'(divine imputation)이다... 따라서 의인은 실제로 신앙을 통해서 시작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 그러나 신앙은 약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전가'없이는 불완전하다. 따라서 신앙이 의인을 시작하나 '전가'가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것을 완성한다. 103) 루터에 의하면 전가의인(imputierte Gerechtigkeit)은 어느 정도까지 신앙에서 시작한 자기의 현실적 의인의 보완을 필요로 한다. 루터에게서 전가의인과 자기의 현실적 의(eigene reale Gerechtigkeit) 사이의 통일관계가 성립되나 여기서는 이 양자 사이의 보완관계가 성립된다. 첫째 성령을 통하여 신앙에 의해서 우리서 우리는 의인에의 소망 즉 때가 오면 분명히 나타날 의인의 소망(Hope for righteousness)을 기다린다. 둘째, "성령을 통해서 신앙에 의해서 우리는 소망과 기대속에 의인을 기다린다." 즉 우리의 의인은 소망 가운데 있기 때문에 아직 우리는 의로워지지 않았다... 우리는 신앙에 의해서 의로워지기 시작했다. 그 신앙으로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았다. 우리의 육신의 죽음(mortificatio)이 시작된 것이다." 104) 그것은 불완전하다 : 그것은 부분적 의인이다. 남아 있는 죄가 아직도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이것은 부분적 죄인이다." (obedientia legis, sed imperfecta : partim iustus. peccati reliquiae nondum plane mortificatae : partim peccator). 105)

여기서 루터는 simul의 개념을 "전체냐 무냐"(Alles oder Nichts) 의 관점에서 이해할 뿐만 아니라 '다소'(Mehr oder Weniger)의 관점에서도 이해했다.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기독교인의 생이란 시련과 분투와 투쟁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106) 여기서 simul은 "성령에 의해 행하라. 즉 앞으로 나아가고 보다 영적이 되라" 107) 라는 말에서 부분적 의인의 면모를 명백하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루터의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 도식을 통하여 의인의 전체적 면과 부분적 면 그리고 죄인의 전체적 면과 부분적 면을 살펴 보았다. 우리는 여기서 전체적 면을 의인론과 관련하여 좀더 깊이 이해하고 부분적 면을 성화론과 관련하여 좀 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인에게서 율법의 기능을 살펴보자.

(3) 의인과 성화

루터에 의하면 기독교적 의인이란 신앙과 하느님의 전가(imputation)로 성립된다. 107) 그에 의하면 신앙은 형식적 의인이며 이것은 하느님의 전가에 의해 완성된다. 신앙은 시작이며 전가는 완성이다. 따라서 이 둘은 처음과 마지막이며 상호보충적이다. 108) 이 신앙의인은 성령을 통하여 완성을 기다리는 과정이며 루터는 이 과정을 성화라고 했다. 여기에서 부분적 의인-부분적 죄인의 변증법적 관계가 성립된다. 알트하우스에 의하면 "의의 존재와 죄의 존재 사이의 상호 모순되는 동시성(Zugleich)은 이 생에서는 지양되지 않고 죽음까지 계속되며 이것은 고정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간의 충만한 운동(Vollige Bewegung)이다." 109)

경험적 관점에서 볼 때 의인이며 동시에?죄인이라는 표현은 전체적 면보다는 부분적 면에서 이해하기 쉽다. 루터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생에서 의인-죄인 관계는 매일매일 하느님의 전적 은총에 의한 죽음과 생의 심판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110) 이것이 죄인-의인 관계의 전체적 측면이다. 다른 한편 하느님에게 자기를 맡김으로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과정은 의인-죄인 관계의 부분적 측면이다. 나는 전자를 의인, 후자를 성화라고 부르고 싶다. 알트하우스는 전자를 전체성(Totalitat) 후자는 특수성(Partikularitat)라고 했다. 111) 전자는 생의 수직에서 후자는 생의 수평에서 이해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계속적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은 완성존재(Gewordensein)가 아니 라 과정존재(Werdensein)이다. 112)

루터는 이 과정을 윤리적 고양이나 인간의 가능성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이해했다. 그런 의미에서 의인-죄인의 전체적 측면은 긍정적으로 이해되나 부분적 측면은 부정적 의미에서만 말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성화는 루터에 있어서는 자기부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이 동시성은 무엇을 뜻하는가? 의인의 전체적 면과 성화의 부분적 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Simul과 율법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루터에 의하면 성화란 자기자신을 전적으로 성스럽지 못한 존재로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113) 그것은 성화의 주체 즉 하느님 만이 거룩한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만일 너희 양심이 너를 괴롭히며, 죄인인 그대가 의로워지기를 구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 무엇을 할까 또 어디로 갈까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살피려는가? 아니다. 반대로 주님의 이름, 하느님의 의롭고 귀하고 거룩함을 회상하라." 114) 루터는 죄인으로부터 의인이 되는 것을 어떤 과정이나 단계들(Schritte)로 보지 않았다. 그에 의하면 신앙 중에 있는 자는 이미 목표에 서 있고 의로워졌기 때문이다. 죄인으로부터 의인이 되는 것은 무에서 완성,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는 완전한 전환이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심이고 완전하고 확고한 이다." 115) 이러한 의미에서 죄인-의인의 동시성은 전체적 측면에서 이해된다. 이 전환이란 목표를 향한 상승운동이 아니라 이 운동은 처음과 끝, 출발과 목표, 무와 완성이 동일한 과정에 속해 있다. 기독교인의 삶의 운동이란 알파와 오메가 즉 전체로서 이해된다. 외스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116)

이상에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Simul의 전체성을 살핌으로 루터의 의인론을 이해해 보려고 했다.

다른 한편 루터는 죄인-의인의 도식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아서 기독교인의 생가운데는 적은 것으로부터 큰 것에로의 운동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고 했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생은 정지상태, 휴식상태라고 생각지 말라. 그렇지 않다. 그것은 악에서 의, 불명료성으로부터 명료성으로, 덕에서 덕으로의 이전이요 전진이다. 그러므로 도정에 있지 않은 자를 기독교인으로 생각지 말라." 117) 즉 기독교인의 생이란 생태가 아니라 진보다. "우리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소유하며 발효하기 시작했다는 시실이 위로가 되나 이 죄의 육신이 깨어지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할 때 완전히 발효될 것이다." 118) 외스트에 의하면 의인과 성화에 대한 루터의 일련의 진술들은 언제나 반복되는 파라독스를 통해서 성격지워진다. 그래서 신앙에 의한 전환 즉 의인 안에 기독교인의 생의 과정 즉 성화를 포함시킨다. 119)

과정이 전환 가운데 포함되며 전환이 과정 가운데 포함되지 않는다. 루터는 육신에 관한한 우리가 성령을 받은 후에도 죄인이기 때문에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 생 가운데서 가능한 죄를 피한다고 생각했다. 120) "모든 성도들은 육신과 성령의 이러한 투쟁을 체험했다. 우리도 체험하고 있다. 육신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특별히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 121) 루터는 이러한 기독교인의 투쟁을 진보와 성장으로 이해했다.

루터는 신앙을 증가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 행동이 필요하다고 보아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따라서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의 행실에 근거해서 행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서 행위자가 된 후에 행한다. 따라서 모세는 참된 행위자, 신앙의 사람을 요구한다. 그것은 마치 바울로가 참되게 행하지 않는 자 즉 신앙의 사람이 되지 못한 자를 책망하는 것과 같다." 122) 루터는 선행에 대한 설교에서도 행위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신앙을 가장 중요한 행위라고 규정했다. 123) 루터는 이 행위를 성령의 역사로서 이해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가운데 살고 말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 모든 것을 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했다. 124) 우리는 여기서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생 가운데서 진보 즉 성화를 성령의 역사로 보아 권장하는 것을 알게 된다. 외스트는 그리스도인의 생 가운데서 진보를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표시하고 있다. 125)

우리는 이제까지 기독교인의 생에 있어서 Simul의 부분적 성격을 살핌으로써 루터의 성화론을 이해했다.

(4)성화와 의인과 율법

기독교인의 의인이 두 가지 즉 신앙과 전가에 있어서 가능하다고 할 때 신앙은 자신과는 무관한 구속사건의 실체에 대한 단순한 확증만은 아니다. 이 구속사건이란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사건이다. 루터는 신앙의인의 본질을 자기가 그리스도를 붙잡고 또 그리스도에 의해서 붙잡히는 데서 성립된다고 했다. 126) 하느님은 인간에게 신앙을 선사함으로 의롭게 한다. 따라서 신앙은 하느님의 일이며 선물이다. 그리스도는 신앙을 통해서만 내 것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신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신앙 자체에 그리스도가 현재한다." 127) 따라서 의인은 오직 신앙의 행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경험적 의인에서 우리는 행위 즉 하느님께 즐겨 복종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물론 이 복종의 근거는 신앙이며 또 그것은 신앙의 표식이기도 하다. 128) 신앙 안에 행위의 진정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행위는 신앙을 위한 인식근거가 된다. 복종, 죄에 대한 투쟁, 선행, 사랑 등이 우리의 신앙이 참되고 우리가 구원에 있음을 확인케 한다. 129)

그러므로 루터에게는 의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하느님의 전가로 이루어지며, 성화는 의인과 동시에 생겨나는 자기부정의 사건이다. 성화는 철저히 성령의 활동으로서만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성화란 언제나 의인의 사건과 동시적이긴 하나 의인의 전제가 되지는 않는다.

전적 의인에 대비하는 전적 죄인의 관계는 하느님의 영역 즉 전가에서만 이해되고 부분적 죄인에 대비되는 부분적 의인은 인간의 영역 즉 신앙 -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긴 하지만 - 에서 부정적으로 이해된다. 신앙은 언제나 결단, 복종, 자기부정 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터는 신앙의인을 형식적 의인이라고 했다.

이제 본 장에서 제기된 문제로 돌아가서 기독교인에게 율법이 필요한 이유와 그 성격 및 기능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자.

우선 루터는 율법과 율법성의 문제를 인간과의 관계규정에서 설명할 때 요구하고 심판하는 율법은 인간에게서 율법성이 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본질이다. 이 신자에게 있어서의 율법의 필요성은 우리가 육신에 거하는 한 언제나 존재한다. 왜냐하면 신자도 죄와 대항해서 투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육신과 죄와 원수가 전적 죄인이기에 율법이 존속이유가 명백하게 들어난다. 기독교인에게는 그가 전적 죄인이기에 율법이 필요하며 또 부분적으로도 죄인이기에 동일한 율법이 필요하다. 전적 의나 부분적 의 때문에 율법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동일한 율법이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인 기독교인을 향하여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율법에서 자유하다고 하는 것은 율법의 무효화가 아니라 복음 안에서 그 요구를 자발적으로 수행하도록 함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율법은 기독교인들에게도 언제나 동일한 율법, 요구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모세의 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세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를 목표로 모세가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에게서 떠날 때 우리는 곧 모세 아래 있게 된다. 복음에서 떠날 때 우리는 곧 복음과는 대립함으로 거기에 봉사하는 율법의 억압 아래 있게 된다. 따라서 이 율법은 언제나 불변하는 하느님의 동일한 뜻이다.

따라서 이 율법의 기능은 어떤 변화된, 약화된 요구나 훈계가 아니라 동일한 요구자로서 행동한다. 루터에게서 전적 의인-전적 죄인을 말할 때 이는 철저하게 인간의 불가능성을 제시하여 율법의 계속적 동일한 기능 - 즉 인간을 고통에로 몰아넣어 복음을 찾게 하는 기능을 한다. 루터가 부분적 의인-부분적 죄인을 말할 때 이는 철저하게 인간의 불가능성으로 인한 자기부정의 기능 - 율법 아래서 자기를 부정하고 그리스도를 찾게하는 - 을 하게 한다.

따라서 이 Simul은 율법과 복음의 동시성의 표식이다.

Ⅲ. 현대신학에 율법의 제3용법에 대한 논의
l. 제3용법의 개념에 대하여
우리는 위에서 신자에게 있어서도 율법과 복음은 동시에 설교되어야 한다는 점을 살펴왔다. 본 장에서는 현대신학자들의 입장을 통하여 이 동시성의 문제 즉 율법의 제3용법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율법과 복음 사이의 대립관계와 공존관계를 명백히 구별하는 것 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따라서 루터는 이것을 '참 신학자의 시금석'이라고 했다. 130) 슈라이 (H. H. Schrey) 131) 는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제3용법의 개념은 복음의 영역 안에서의 율법의 적극적이고 권고적 역할(Parahetisches Forwirken)이며 또 신앙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 항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취할 수 있고 성취해야 할 생의 지시(Anweisung)를 주는 것이다. 132) 이 제3용법의 특수성은 죄인이 아니라 의로워진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지시다. 그러면 루터가 안티노미안들과의 논쟁에서 신자들도 율법 아래 있다고 강조할 때 그는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는가? 그는 제3용법을 생각했는가 혹은 그가 신학에서 율법의 본래적 용법이라고 한 제2용법을 생각했는가? 이 문제를 루터해석자들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2. 부정적 해석 - 율법과 복음의 대립성에서
루터가 제3용법을 알지 못했고 그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주로 율법과 복음의 극단적 대립을 주장하는 일련의 학자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Werner Elert, Hans Asmussen, Gehard Ebeling, Rudolf Bring, Eduard Kinder, Helmut Thielicke 등이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엘러트는 "율법이 말하면 복음이 침묵하고 복음이 말하면 율법이 벙어리가 되어야 한다" 133) 고 말하고 루터가 말한대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밤과 낮'의 차이와 같다고 했다. 엄격한 의미에서 복음 안에서 율법의 존족이란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스무센도 복음을 율법의 다른 측면으로 보려는 모든 시도는 언제나 성서의 메시지를 감소(Verkurzung)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134) 루터에게서는 제3용법의 가능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에벨링도 1522년 루터가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율법의 제3용법' (dreyer ley brauch des gesetzes)이란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것을 1525년에 부스(Bucer)가 라틴어로 번역할 때 "율법의 3중 용법" (triplex usus legis)라고 한 것은 후에 말하는 제3용법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제3용법의 기원을 멜랑톤과 칼빈주의자들에게서 보고 있다. 따라서 이는 루터 신학에서는 이질적 요소라고 규정하고 실제 루터는 제3용법을 알지 못했고 이 점에서 듭난 자를 위해서도 '교육적 사용' (usus didacticus)이 율법의 가장 본래적 직무라고 본 칼빈과 엄격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136)

베르게(W. Berge)는 율법과 복음의 극단적 대립을 강조하는 그룹들은 율법을 하느님의 심판자(Judikator)로 보기 때문에 복음 안에서는 어떠한 직무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137) 부링은 제3용법의 문제를 의인의 교리에서 구별되는 성화의 교리가 존재하는가를 문제삼은 데서 출발한다고 보아서 역사적으로 이 제3용법의 교리는 루터가 아니라 멜랑톤에게 기원이 있다고 본다. 138) 그에 의하면 안티노미안들과의 논쟁에서도 루터는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링에 의하면 루터의 회심과 갱신의 교리는 단 한번에 확고하게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계속되는 시련의 극복이다. 멜랑톤에 의하면 회심과 갱신은 변화를 낳고 거기에 따라 생은 두 개의 국면 즉 회심 이전과 이후의 시기로 구별된다. 루터와 멜랑톤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결국 제3용법이란 인정될 수 없다. 부링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을 위한 율법의 본질적인 의미는 그들이 일반인들과 구별되는 데 있지 않고 그들과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란 율법의 요구를 초월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루터가 성령의 열매 혹은 기독교인의 선행에 대해서 말할 때 인간이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소유하고 여기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며 더 나아가서 율법의 요구 이상을 행한다는 것이다. 부링은 제3용법을 부정할 때 의인론의 관점에서 그 타당성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슈라이가 "루터의 관점은 기독교인이 율법에 던져져 있다기 보 다는 오히려 참된 신자는 결정적으로 율법 아래 있다."는 견해가 오히려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특별히 율법과 복음의 대립을 강조하여 철저하게 제3용법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율법을 심판자로 보아 140) 율법을 완전한 율법(Lex impleta)이 아니라 불완전한 율법(Lex non impleta)으로서 정죄하고 고소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141) 율법은 중성적인 내용(indifferrenter Inhalt)이 아니라 인간에게 계속해서 도전해 오는 힘이다. 142) 즉 "율법은 인간의 전 실존을 잠재우고 억압하며 어둡게 하는 강제수단이다." 143) 엘러트에 의하면 하느님의 심판으로서 율법의 개념은 두 가지를 전제한다. "인간에 내려지는 하느님의 심판은 이중적이다. 율법에서 심판은 유죄판결이며 복음의 성취라는 조건 아래서만 은총을 약속한다. 여기서 율법과 복음의 근원적 차이가 들어난다. 즉 율법은 그것을 성취한 의인들에게 은총을 약속하며 복음은 성취하지 못한 죄인들에게 은총을 약속한다." 145) 율법은 인간에 대한 부정 (Nein)이며 동시에 죽음을 야기시키고 복음은 인간에 대한 긍 정 (Ja)이며 생으로 일깨운다. 엘러트가 인간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길의 목표는 율법이냐 복음이냐다. 양자가 아니다. 이 둘은 죽음과 생과 같이 대립적익다." 146) 라고 할 때 그것은 루터의 율법 이해에 있어서 의인론과 관련된 생의 전체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율법의 심판적 성격은 하느님의 계시의 이중성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즉 율법에서 하느님의 진노가 들어나고 복음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난다. 요구하고 심판하는 의지와 선사하고 북돋아 주는 의지의 이중성이다. 147) 여기서눼? 계시의 이중성이 논의되기 때문에 신인식의 인격성이 문제가 된다. 틸리케는 그러나 '율법에서 복음으로'(Legis zum Evangelii)라는 글에서 율법과 복음의 루터적 견해가 드러난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이 둘의 극단적 대립에서 루터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148)

3. 긍정적 해서 - 율법과 복음의 통일성에서
다른 한편 칼 바르트를 위시하여 개혁교 전통에 서 있는 학자들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통일성에서 보려고 한다(예로서 E. Brunner, H. Soe, Helmut Gollwitzer, W. Joest). 바르트에 따르면 한 하느님의 말씀이 "내용에 따르면 복음이고 그 형식이나 형태에 의하면 율법이다" 149) 라고 하며 궁극적으로 이 양자 사이의 구별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율법은 그 내용은 은총으로 하고 있는 복음의 필수적 형식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150) 바르트는 극단적으로 "율법은 곧 복음 그 자체다" 151) 라고 까지 말한다. 이 하느님의 요구의 의지는 은총의 의지와 동일하며 그것은 선택에서 명백해진다는 것이다. 152) 룬너는 이것을 주시는 자로서 하느님의 의지 즉 죄인들에 대한 사랑의 의지라고 한다. 153) 그에 의하면 율법과 복음의 상호 불가분리성은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의지"며 동시에 우리로부터의 그의 의지하고 했다. 154)

쇠(Soe)도 율법은 복음 안에 묻혀 있고 하느님의 의지와 명령에 따라 모든 관계에서 복음에 의존하며 따라서 '복음의 일부'라고 한다. 155) 여기서는 심판자로서의 의지인 율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심판은 하느님의 은총에 내포됨으로써 심판의 성격이 약화된다.

하느님의 은총의 계시로부터 이탈 된 율법, 성화, 진노의 계시를 다루는 데서 바르트는 루터와는 구별되고 "이 점에서 우리는 루터를 따르지 않는다" 156) 고 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느님의 계시는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복음, 기쁜 소식, 하느님의 은총의 말씀이고 행위이다." 157) 틸리케는 이 점에서 바르트가 칼빈의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개념의 통일성을 따르며 여기서 이 양자 사이의 긴장관계는 사라지고 보충관계만 남게 된다고 했다. 158)

이렇게 볼 때 바르트는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처음부터 통일성에 관찰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제3용법이 불가피하게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에게는 루터적 제1,2용법은 모두 '복음과 율법'의 관계 즉 통일성에서 취급되고 있다. 부룬너도 율법의 세 가지 기능 즉 규율(Zucht), 회개 안내(Fuhrung)의 기능을 말하고 제3용법인 안내의 기능을 시민적 기능 (Ordnungsfunktion)과 같이 사랑으로부터 이해했다. 그 이유는 제3용법은 사랑의 계명과 더불어 상립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안내적 기능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지시'와 같은 것이라고 하며 신자들에게서 변화된 것(Veranderung)을 주장한다. 159) 외스트도 그와 유사하게 제3용법은 "복음 안에서의 율법의 적극적이고 권고적인 역할"(Positive, parainetische Fortwirkung des Gesetzes)이라고 하여 신앙 안에 둔다. 160) 베르게가 지적한대로 이 점에서 제3용법릉 인간의 주체존재(Subjektsein)와 밀접히 관계되며 이것은 율법과 복음의 일치성을 주장하는 데서만 가능하다. 161) 말하자면 모든 인간의 행위를 언제나 엄밀한 의미에서 요구와 과제로서의 약속과 선물에서 규정하고 '당위'(Du-Sollst)를 허락(Du-darfst)으로 보아서 참된 율법은 복음이라는 주장에서만 그 정당성이 성립된다. 이렇게 볼 때 제3용법은 율법의 교리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본래적 요점이라는 주장이 성립된다. 162)

알트하우스는 제3용법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율법의 제3용법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생에서 성서적 계명과 지시의 용법에 대해서는 말한다" 163) 고 하며 그것을 긍정하는 듯한 시사를 하고 있다.

그러면 루터 자신은 제3용법이란 용어를 실제로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 개념을 알고 있었는가? 혹은 전혀 알지 못했는가?

에벨링과 엘러트는 루터가 이 개념을 알지 못했고 사용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외스트는 루터에게서 제3용법은 직물에서의 씨줄의 역할을 하는 경향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한다. 164) 외스트는 루터에게서는 "구원의 필요성에 짐지우는 명령이나 복종이 존재한다. 그렇다. 진정한 명령과 복종이 존속한다" 165) 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의 깊은 파라독스에 직면하는데 인간의 구원문제에 관한한 당위는 부정되며 그 반대인 경우에는 모든 면에 있어서 당위는 궁극적 타당성과 진지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의인론에 있어서는 제3용법은 아무런 전제가 되지 못하고 다만 윤리적 측면에서만 고려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이 제3용법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규정하는 척도이다. 루터신학에서는 대립 안에서 통일이 동시적이고 역설적으로 말해질 수 있다. 통일 안에서의 대립이 아니다. 따라서 루터에게서 실제로 제3용법의 문제를 놓고 양자택일을 하기란 곤란하다. 그래서 제3용법의 문제는 때로는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명백하게 밝히지 못하고 오히려 복잡하게 만들 소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루터의 입장에서 제3용법을 긍정하려 할 때 의인론을 간과하고 기독교 케리그마에서 필요한 대립과 긴장을 오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위험성이 있다." 166) 사실상 이러한 기독교적 안티노미에 다리를 놓는 사명을 때로는 제3용법이 수행했다는 것이다. 167) 이런 의미에서 루터가 문제성으로 가득찬 율법의 교리를 스콜라주의적 도식에 고착된 율법의 용어를 그대로 남겨두는 위험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에벨링은 주장한다. 168)

한편 외스트는 제3용법이란 개념 대신에 "구원의 조건에 따른 율법으로서의 율법의 용법 혹은 복음적 용법"(usus legalis als lex sub conditione solutis und usus evangelicus)을 제안한다. 즉 이 용법이야말로 기독교인에게도 타당하다는 것이다. 169)

그러나 문제는 율법의 본래적 용법은 무엇이며 이 용법의 주체는 누구인가? 율법을 만드는 자로서 하느님인가 혹은 율법과 만나는 인간인가? 에벨링은 개신교 신학에서 이 점이 명백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주체성의 문제는 하느님과 인간의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존재지평'에서 대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70) 그러므로 이 율법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종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율법은 언제나 인간과의 관계규정 즉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인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경험적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과 복음에 대한 통일과 대립의 모순되는 동시성, 속죄론과 윤리의 역설적 대립, 의인과 성화의 상호 역설적 관계, 율법으로서 요구되는 업적들과 복음으로서 허락되고 약속이라는 이중성, 이 모든 것은 이 권고의 말씀이다. 171)

그래서 외스트는 복음 안에서의 율법의 존재근거를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는 교리에서 논하고 '동시성' (Simul)의 전체적 측면에서 제2용법을 그리고 동시성의 부분적 측면에서 제3용법을 보려고 했다. 그에 의하 면 전자에서 율법은 요구자요 후자에서는 안내자이다. 172)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루터는 멸망을 말하는 고발자인 계명 뿐만 아니라 훈계적 계명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들에게 율법을 이룰 수 없음을 인식시키는 계명 뿐만 아니라 직접적 성취를 요구하는 계명도 알고 있었다..... 신앙은 무에서 전부로의 전환(Transit)일 뿐만 아니라 보다 적은 것에서 큰 것에로의 진보(Progress)이기도 하다. 율법은 전환에로의 권유일 뿐만 아니라 진보에로의 안내이기도 하다. 율법은 걸음걸이를 가프치며 걸어갈 방향을 지시한다." 173) 그래서 그는 율법의 훈계적 직무(parakletische Amt)가 루터의 근본적 사상이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브링의 입장과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한편에서는 세속적 상태와 궁극적 상태가 직결되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 양자 사이에 구체적이고 지속적 변화가 생긴다.

슐링크(Edmund Schlink)는 바르트의 경향을 따라서 복음에 근거한 권면을 문제삼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신약성서에서 이 권면은 복음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옛 계약과 관계를 깨고 이 권면은 복음에 속하기 때문에 제3용법이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174) 즉 그는 이 '권면'을 율범의 영역이 아니라 복음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서 신약성서적 모든 권면을 이 영역에 귀속시킨다.

Ⅳ. 맺음말
지금까지 율법과 복음의 관계 가운데 가장 논점이 되는 제3용법에 대해서 몇가지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루터는 율법의 제3용법을 알지 못했으며(W. Elert, G. Ebeling) 루터교 신앙고백서들까지도 현대적 의미에서 제3용법을 알지 못했다(R. Bring). 이 제3용법의 개념은 율법과 복음에 대한 루터적 이해와 일치하지 않으며 따라서 개신교 윤리에서는 논의될 수 없다 (W. Elert, H. Thielicke).

2) 간접적으로지만 제3용법은 종교개혁 신학의 중심이다. (K. Barth, E.Brunner, H.Gollwitzer, H.Soe) 그리고 이 제3용법을 약속(Verheissung)으로 이해한다(H. Iwand).

3) 루터 신학에서 이 두 개념을 완전히 부인하거나 긍정할 수 없다(W. Berge).

4) 제3용법을 부정하고 이것을 계명과 율법을 구분하여 원계시에서의 계명(Gebot)이 인간의 타락에서 율법(Gesetz)으로 되며 복음이 온 후에는 이 율법은 다시 계명이 되었다고 하여 계명을 제3용법으로 대치하는 입장이 있다 (P. Althaus). 175)

5) 루터에게서 직접 제3용법을 찾을 수 없으나 그의 신학에서 신약성서의 권면(Nt. liche Paranaise)으로 보아 '복음의 실천적 사용'(usus practicus evangelii)이나 그와 유사한 것으로 해하는 견해와 권유(Paraklese)로 보는 견해가 있다(E. Schlink).

특히 율법과 복음이 신자들을 위해서도 존속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역사성(Geschichtlichkeit)의 유지를 위해서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틸리케는 이 역사성은 심판에서 은총, 고뇌에서 위로, '자기자신 앞에서(Coram se ipse) '하느님 앞에' (Coram Deo)로, '고발자 하느님, (Deus Accusator)에서 '변호자 하느님' (Deus Defensor)에로의 운동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율법을 복음을 위해 목적론적 관계에서 이해한다면 실존의 비역사성의 위험이 따른 다는 것이다. 즉 목적론적 관점에서 율법을 이해하면 실존의 결단적 성격이 둔화되어 신비적으로 이해된 그리스도의 본질적 의인은 원료질의 자기발현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은 '상처와 가재'의 관계처럼 존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176)

루터가 율법과 복음의 긴장관계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제시의 역사성을 보장하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177) 사실 이 긴장관계가 약화되거나 해소되면 복음은 무시간적 원리, 어떤 사랑의 이념(Idee)이 되고 이는 결국 기독교적 낙관주의의 세계관이된다. 이것이 율법과 복음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이다.

슈만(F.K.Schumann)은 계시의 역사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율법과 복음은 대립해야 하는가를 묻고 제3용법의 합법성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신분에도 언제나 죄인이지만 제2용법(usus elenchticus)에서 율법이 필요하다는 방식으로 대답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제3용법의 문제는 기독교인이 제2용법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인에게 그가 신앙에서 의인인한(sofern er iustus in fide ist)하나의 새롭고 이제까지 불가능했고 들어보지 못했던 율법의 '사용'이 그러한 근거에서 가능한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신앙 안에 있는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율법의 확실성 즉 그리스도와 더불어 율법의 새로운 통일 안에 있다고 하는 데서 대답된다고 보았다. 178) 슈만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율법은 인간의 생을 얻게 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현재로서 본래적 의미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즉 율법의 당위성격이 그리스도 이전이나 후에도 유지된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신앙상태가 어떤 거룩한 자동기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의 존립 즉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하는 하느님의 뜻에서 의지의 보존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제3용법의 존속은 요한복음 15장9절의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율법이 복음에서 끝났다고 할 때 루터는 결코 율법의 변화나 자기중지가 아니며 그것은 인간과의 관계규정에서 즉 인간존재의 자기결단과 은총에서 이해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즉 율법을 통해서 인간이 자기중심으로부터 응답하는 데 실패하고 하느님의 존재중심에 들어가는 데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 루터는 율법의 자기중지는 시간적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과 은총의 사건에서 이해했다. 율법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변화에서 모든 것이 이해된다.

2) 루터는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라는 도식에서 - 그것이 전적(totus)이건 부분적(patrim)이건 - 죄인(peccator)을 위해서는 율법의 제2용법이 사용된다고 보았다.

3) "육신에 있는 한"이란 율법의 전제는 루터에게서는 제3용법이 아니라 율법의 변증법적 역할을 말한다.

4) 또 전가의 의(imputativa iustitiva)의 요청의 불가피성은 율법성(Gesetzlichkeit)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성이나 자비가 아니라 율법의 본래적 용법 (제2용법)의 본질적 요청 즉 은총이다. 181)

5) 신앙의인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그 완성을 이해한 루터의 견해는 신자들의 생에서도 죄와의 지속적 투쟁의 요청으로 이해했다. 182) 즉 율법의 존속은 원수에 대한 신호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183)

이상에서 본대로 루터는 결정적으로 율법의 변화란 인정치 않았으며 따라서 제3용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율법의 본래적 성격은 복음과 대립하는 데서 그 직무를 수행하며 기독교인 안에서 그 존속은 제3용법적 의미가 아니라 복음에서부터의 이탈의 경고로서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알트하우스의 계명-율법-계명의 도식은 루터에게서는 찾기 힘들다. 그리고 율법을 복음의 형식 혹은 율법은 복음이다 라는 바르트의 입장과도 구별된다. 184) 루터는 바르트식으로 기독론 중심으로 율법을 해석하지 않았으며 창조로부터 역사적으로 이해했다.

루터는 사도적 훈계같은 것은 율법의 영역에서 보지 않고 복음의 영역에서 이해했다. 따라서 루터에게서 율법의 권면적 성격을 찾기란 힘들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에게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통일적 관계가 아니라 변증법적 관계에서 이해된다. 그러므로 그는 변증법적 신학의 기반을 마련했고 신학이 새롭게 그에게서 배우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증법적 방법은 그의 의인론(simus-iustus et peccator)에도 적용된다. 신앙으로 의롭다 하는 전제에는 언제나 전가의인이 그 앞에 서 있다. 율법의 심각성을 전제하지 않는 은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율법 없이 복음이 선포될 때 그것은 '값싼 은혜'에 지나지 않는다. 율법 없는 복음의 선포는 결국 참된 복음의 설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란 동시성은 기독교인의 실존의 본성을 가장 잘 나타 내고 있다.

특히 교회의 일차적 사명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 할 때 설교는 언제나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신자에게는 복음 불신자에게는 율법이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은 모두에게 설교되어야 하는 것이다. 185) 교회가 교회되기 위한 운동으로서의 교회갱신의 문제는 율법의 복음화를 통해 유연한 사회참여나 사회동화 또는 복음을 율법화함으로써 세상을 하느님의 영역에서 제외되는 일반질서로 인정하여 타계주의의 일변도가 되는 데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극단주의는 시간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영원을 미워한다. 극단주의는 현실을 미워하고 타협주의는 말씀을 미워한다." 186) 이러한 본회퍼의 이해는 우리의 현실의 문제를 가장 적절히 말해주고 있다. 보수주의는 사회참여를 미워하고 진보주의는 타계주의를 미워한다. 보수주의는 역동성을 미워하고 진보주의는 치유행위를 미워한다.

이런 의미에서 근래 많이 논의되는 혁명신학 내지는 정치신학은 적어도 두 가지 위험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한편 율법을 복음화할 때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질서에 대해 무조건적 동의를 하게 될 위험이 생기거나 그 반대로 무정부적 타계주의의 위험이 따르기 쉽고 복음이 율법화되어 선포될 때 극단적 저향 운동 혹은 세상을 하느님의 지배영역 밖에 두는 위험이 따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과 복음은 구별되어 변증법적으로 설교되어야 한다. 치유하기 위해서 상처를 내고 은총을 목표로 심판을 말하며 부활을 향하여 십자가를 선포헤야 한다.

율법과 복음의 대립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할 때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어야 합니까?" (로마 6:1)라는 위험이 따르고 율법과 복음의 내적 변증법적 통일을 이해하지 못할 때 "율법을 행하는 자는 율법으로 살리라" (갈라 3:12) 187) 라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서론에서 말한데로 전자는 안티노미안들의 오류요 후자는 스콜라주의자들의 오류다.

이런 관점에서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변증법적 관계를 대립적 통일(gegensatzliche Einheit)이라고 부르고 싶다. 루터는 율법과 복음을 좌우에 날선 검으로 이해했는데 이는 마치 옷감의 날줄과 씨줄과의 관계와 비견할 수 있다. 사랑과 정의, 자유와 평등, 자연과 은총, 행위와 존재, 의인과 성화, 교회의 제도와 활동 등 매우 어려운 개념들은 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이해는 모든 기독교적 제목들의 해결(Loesung)이며 화해(Erlosu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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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Works of Martin Luther, Concordia Publishing House, Vol. IV. p.373
2) Weimar Ausgabe, 40 I s. 206-207; 40 T s. 267.485-487참조
3) WA. 40 1,5.525,527; 36, 5.9
4) WA. 36, 5.9-10
5) W. Joest, Geset3 unto Freiheit.-Das Problem des tertius usus levis beiLuther un? did nt. Liche Paraneise. Gottingen 1961 5.9.
6) Gehard Ebeling, Luther, Philadelphia, 1970 p.133
7) K. Haendler(Hrsg) , Gesetz unto Evangelium, in Wege der Forschung Bd. CXLll, Darmstadt s. Vlll.
8) Helmut Gollwitzer, Zur Einheit von Gesetz rind Evangelium :in Antwort. Festschrift fur Karl Barth, 1965 5.287
9)_Ulvich Mann, Gottes Nein unto Gottes Ja, in Grundriss rind rechte Mass der thelogischen Denkens, Hamburg 1956 5.16
10) E. Kinder, Gottes Gebote rind Gottes Gnade,, usw. 5. 10
11) 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ll,5.1524
12) WA.18 5.62ff.
13) G. Heintz, Luthers Predict von Gesetz und Evangelium 1978 Muenchen s.19f
14) R. C. Bchult3, Gesetz rind Evangelium in der Lutherischen Theologie des 19. Jahrhunderts, Berlin 1958 5. ll. , Werner Elert, Morphologie des Luthertums, 1952 1. 5, 31-78
15)G. Heint3, ihid., 5.20
16)ibid., 5.21.
17)ibid., 5.20; R.C.Schultze, ibid., 5.16; G.J. Flanck, Geschichte des protestantischen Lehrvegriffs Vol. 1 (1978) 5. 1-75
18) M. Schneckenburger, Vergleichende Darsteluung des Lutherischen u.reformatorischen Lehrbegriiffs.
19)A, 班arnaek, Luthers Theologie 1,5. 578-582. 그는 율법과 복음을 루터신학의 중심교리의 하나로 구속의 질서 안에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는 율법과 복음을 그 직무에 따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율법의 직무와 복음의 직무가 의인론에서 혼돈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율법과복음은 복음의 몬래적 직무와 비본래적 (fremde)직무에 따라 구별해야 한다는 츳이다. 말하자면 복음의 본래적 직무는 구원과 용서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율법의 직무도 행할수 있다. 그러나 율법은 오직 본래의 직무만을 수행한다.
20) Albrecht Ritschl,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endVersohung 1889 1. 5. 168; 여기서 리출은 하르낙의 율법과 복음의 엄격한 구별을부정하고 이 양자를 결합시킨다. C.1 Nitzsch나 F.C.Bauer가 그랬듯이 이 앙자에대한 루터의 교리를 부정하고 있는데 리출이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리출에 의하면 루터가 그의 신학을 언젠가 좨 수정했는데 특히 율법과 복음의 교리에서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점을 입증하기 위해 루터의 사상을 초기와 후기로 구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루터는 초기에는 회개, 의인, 신앙론을 명백히 하고 바르게 가르쳤으며 후기에는 멜랑톤의 율법과 복음의 교리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리출은 이점을 들어 복음이 참회와 화개를 일으킴으로 율법 이전에 복음이 선교되어야 하다고주장한다. 그리고 율법은 회개한 자들에게 설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1)C. F.W. Walther, Die recite Unterscheidung von Gesetz untoEvangelium(1897)에서 25개의 명제를 가지고 율법과 복음 사이의 구별을 취급하고있다. 이 책은 1929년 영역되어 나왔다.
22) G. Heintze, ibid., 5 .22
23) V. Loewenich. Die 7utherforschung in Deutschland seit derm fweitenWeltkrig, in'ThIZ jg. 81, 1956 5.705
24) Karl Barth,'Evangelium und Gesetz', in·Theologiseher Existen? heute32,Muenchen 1935; 이 글은 '복음주의 총서' (전경연, 박봉랑 편) 2권 85-119편에번 역 되 어 있다.
25) 7. Heintz, ibid., 5. 24
26) J. Heckel, lex Charitatis, 5. ll; Ernst Wolf, Der chrsitBiche Glaubeunto twas Recht, in: ZerkR jg. 4. 1955, 5, 225
27)WA. 39 I s. 485; Werner Elert, Zwischen Gnade unto Ungnade, 5. 162
28)W Joest, GesetB unto Freiheit, 5. 218
29)역'사적 연구방법은 조직적이고 통일적 연속성이 결여되는 약점을 지니나 일정한 사실을구체적으로 상세히 파헤칠 수 있으며 조직적 방법은 통일적 연속성을 가지나 지나친 조화의 시도는 실제로 상호 모순되는 것도 간과해 버릴 위험이 있다.
30) R. Fronter, Spiritus Creator - Luther's Concept of the Holy Spirit p.Xl. 이 책은 R.Ott,'Dei Anschauung von Heiligen Geistes bei Luther'(1898 Gottingen)에서 역사적 연구방법에 의한 모순을 지적하고 조직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31) D. Loefgen, Die Theologie der Schopfung bei Luther, 5.8
32) G.Heintze, ibid., 여기서는 역사적 방법을 사용하여 율법과 복음이 그의 설교에서어떻게 적용되었는 가를 검토하고 있다.
33) WA 40. 1 5. 429-431
34) WA 40. 1 5. 429-431
35) G. Wingren, Luther on Vocation, Philadelphia p. 60f
36) ibid., p. 61
37) WA 32. 5. 316-317
38) WA 40 1. 5. 210
39) WA 19. 5.629(Whether Soldiers Too Can be Saved 1926) ;Vgl., 40 I-429
40) R. Fronter, Creation and Redemption, Philadelphia 1966
41) WA 40 1. 5.479-480
42)D. Loefgren, Theologie der Schopfung bei Luther, 5. 272; val., WA 39 IB.401ff. 533ff.
43)WA 39 1, s.460
44)WA 39 1. s.387
45)WA 39 1. s.557ff
46)WA 39 1. s.383
47)Paul Althaus, Theologie Martin Luthers, 5.221
48)WA 31 1. s.345, 101ff
49)WA 8. s. 103 val., 39 I s.401
50)39 1. s. 365. "levis exactio esc illis, qui extra Christum stint, tristis,odiosa, impossibilis. "
51)WA 39 1.5.370, 391
52)WA 39 1.5.370
53)WA 40 1.5.224ff
54) G. Wingren, Luther on Vocatiom p.63
55)p. Althaus, ibid., 5.222
56) p. Watson, Let God be God, London 1958 p.155ff
57)WA 40 1. 5. 533ff
58)G. Ebeling sbid., p. 139ff.
59)WA 40 1.5. 607f
60)D. Loefgren ibid, , 5. 278f
61)R. Fronter, ibid., p.93-98
62) ibid., p. 100
63) W. Joest, Gesetz unto Freiheit, 5.37
64) K. Barth, Rechtfertigung u. Heiligung s.303
65)ibid., B. 216
66) p. Wolff, Gesetz und Evangelium s.136ff
67) ibid., 5. 102
68) H, Iwand, Jenseits von Gesetz rind Evangelium?
69) H Asmussen, Gesetz unto Evangelium s.384-405
70)W. Joest, ibid., 5.38
71)WA 24. 5.4; "Das gesetz gebeut unto foddert von unto was air thuensollen, isle allein auff under thuen gericht unto steht ym foddern, dennGott spricht lurch twas gesetz; dart throe, twas passe, dart wile ice von firhaben "
72)W Joest, ibid., 5.39
73)WA 8. 5.603
74) WTR 6. 5.6720
75)WA 2. 5. 578; "Esse sub lege esc eaR non implere auto serviliter impute"
76)WA LVI. 367
77)WA. 401, 5.399
78)W. Joest, ibid , 5.39
79)WA. ll, 500
80)WA. 19 1, 445
81)WA. 40 1, 506
82)Joest, ibid., 43
83)ibid., 5.4
84)WA..40 I,236
85)WA.40 I,373
86)WA.40 I,235
87)WA.40 I,367
88)WA.40 I,373
89)WA.40 II,23; WA., 50,643
90)WA. ll, 496f.
91)WA. ll, 487
92)WA, 56, 70; ll, 487
93)WA. 38, 205
94) M. Luther's Letcure on Romans,Philadelphia 1961, XV, 208
95) R. Fronter, Creation and Redmeption, p. 445
96)W. Joest, ibid., 5. 58ff.
97)WA. 40 1, 567
98)W. Joest, ibid., 5. 58
99)WA 39 1, 564.'totaliter iuste-revera totaliter peccator'val. WA. 39ll, 141 "in relationse tam sanctus quam angeus in qualitate plenuspeeca t?r"
100)WA. 40 ll, 407
101)WA. ll, 490
102)WA. 40 1, 408
103)WA. 40 1, 364
104)WA.40 II,24
105)WA.40 II,34
106)WA. II, 584
107)WA .II,584
108)WA.40 I,364
109) Paul Althaus, Theolgoe Martin Lugthers, 5.21
110)WA. 39 1, 95
111)WA. p. Althaus, ibid., 5. 213
112)WA. 39 1, 252. Vgl. WA.7, 337 Dies Leben isle nit tin Frommgjgkeitsondern ein Fromm-werden, nit Gesundheit, sondern tin Gesund-werden, nit ein Wesen, sondern twin Werden, nit tin Ruhe, sondern tinUebung.
113)WA. 40 1, 34
114)WA ll, 490
115)WA. 40 ll, 5.90
116)W. Joest, ibid., 5.62
117)WA. 2. 2, 5. 536
118)WA. 40 1,5. 538
119)W. Joest, ibid., 5.68
120)WA. 40 1, 5. 573
121)WA. 40 ll, 5.94
122)WA. 40 1, 5. 408; WA. 2, 5.564
123)WA. 6, 5. 217
124)WA. 2, 5. 564
125)W. Joest, ibid., 5.70
126)WA. 39 I B.456; Vgl., 40 1, 5. 228
127) p. Althaus, Theologie Luthers, 5.201
128)WA. 12, 5.239
129)WA. 10 111, 5.225; Vgl., WA. 39 1, 5.292ff. 348
130) WA. 401. 5. 429-431 W. Joest, Gesetz end Freiheit, 5.19.
131) H. H. Schrey,'Rechtfertigumg unto Geschichte'In: TheologischeRundschau 1956/57 5.207.
132) W, Joest, ibid., 5. 13
133) W. Elert, Zwischen Gnade rind Ungnade, 5.132
134) H. Asmussen. 7esetz und Evangelium s.20
135) G. Ebeling, Zur Lehre von Triplex risus levis, 5.235
136) W. joest, ibid., 5.72; Vgl., Melanchton, Loci(RC)CXXI, 406)untoLutherischen Bekenntinisschriften
137)W. Berge, Geset3 rind Evangelium in der neueren Theologie s. 8ff
138)H. H. Schrey, ibid., B.202
139) ibid.,
140)W. Elert, ibid., 5,134
141)G. Ebeling, ibid., 5.244
142)W. Elert, ibid., 5. 139;'Lex semper accusans.
143)ibld., 5. 160
144)W. Elert, Das christliche Ethos, 5.293
145)ibid., 5. 137
146)ibid. , 5. 137
147)H. Asmussen, ibid., 5.25; Vgl., E..Kinder, Gottes Gebote unto GottesGnade usw. 5.25
148)H. Thielicke, Theologische Ethik 1, 5.104
149)K. Barth, KD II/2, s.567;V미., Evangelium und Gesetz s.If
150) K. Barth, Evangelium... s,11.
151)K. Barth, KD II/2, s.619
152) ibid. ,
153)E. Brunner, Das Gebot und die Prdnung, s.102
154) ibid. , s.102
155)H. Soe, Christliche Ethik, s.59f
156)K. Barth, KD II/1 s.407
157) ibid. , s.392
158) H. Thielicke, ibid. , s.109
159)E. Brunner, ibid, , 5. 133ff.
160)E. Brunner, ibid., 5. 133ff
W. Joest, ibid., B. 13
161)W. Berge, ibid., 5.25
162)W. Joest, ibid., 5.38 Vgl., K. Barth, KD l1/2 5.624.636; E. Brunner,Das Gebot unto‥‥ 5. 133;'H. Soe, Christliche Ethik, 5.91. 119; PaulAlthaus, Gebot rind Gesetz, 5.28,37, 0, Wolff, Gesetz unto Evangeliumin: Ev. Theologie 1936 5.147
163)p. Althaus, ibid., 5.37
164)W. Joest, ibid., 5.71
165) VV. Joest, ibid. , s.35
166) R. Bring, Gesetz und Evangliurn und der dritte Gebrauch, s.62
167)`V. Elert, Das Christliche Ethos, s.398
168)G. Ebeling, Zur Lehre von triplex usus legis, s.242
169)VV.Joest,ibid.,s.200
170)G.Ebeling,ibid.,s.243
171)W. Joest, ibid., 5.193
172) ibid., 5.62ff. 71ff.
173) ibid., 5.78
174)E. Schlink,'Gesetz rind Paraklese', In Geset3 end Evanglium(Hrsg) .,von K. Haendler und B, Kinder, 5. 257
175) Kinder unto.. Gesetz rind Evangelium s. 201-237
176) H. Thielicke, Theologie der Anfechtung, 5.93
177) ibid., 5.80
178) H. H. Schrey, ibid., 5.205f.
179)안병무, '율법과 예수' , 現存 창간호 p. 19 4호 p. 22ff
180)WA. 40 I s. 45.233.235
181)WA. ibid., 5.357
182)ibid., 5.373; 40 ll, 5.24
183)WA. 39 1, 5.355
184)K. Barth, KD l1/2, 5.39
185) D. Bonhoeffer. Ethik, 1966 5.380; Vgl., G. Ebeling,'Die nichtreligioseInterpretation biblischer Begriffe', in ZtHkj 72. 1955 5. 342ff
186) D. Bonhueffer, ibid., 5.138ff
187)루가복음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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