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cle Bank

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7/11/19 (08:12) from 85.181.182.59' of 85.181.182.59' Article Number : 538
Delete Modify 순더마이어 Access : 5287 , Lines : 34
민중신학의 미래를 생각한다


해외 신학자가 본 민중신학

민중신학의 미래를 생각한다*

테오 준더마이어(Theo Sundermeier)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


세계적으로 해방신학은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인하여 위기에 직면해 있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그렇다. 물론 모든 분야가 다 이러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에 새로운 방향모색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새로운 방향모색은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으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지금까지 가난과 고난은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착취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러한 차원에서 극복되어야 하고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가난과 고난은 어느 시대에나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가난과 고난을 사회-정치적인 관점에서만 분석할 것이 아니라, 욥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난과 고난의 신학적인 의미도 찾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학문적 흐름에 보조를 맞추어서, 다른 인문학의 분야들에서처럼 신학에서도 아름다움(Sch nheit), 육체성(K rperlichkeit), 감성(Sinnlichkeit) 등

* 이 글은 Theo Sundermeier, Gedanken zur Zukunft der Minjung Theologie를 완역한 것이다. 옮긴 이 : 양화자 목사(한신대 박사과정).

몸의 중요성에 대하여 주목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이 해방신 학에서 어떠한 가치와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해방신학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엄격한 의미에서“해방신학”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며,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이 두 신학 상호간에 차이가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중신학은 맑스주의적-사회주의적 사회분석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며 그 방법을 추종하지도 않는다. 민중신학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경험의 상황에서 탄생하여, 수난을 당하면서 신학작업을 한 결과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신학은 국외자들의 눈에는 해방신학의 일종으로 보여졌고, 또 보여지고 있으며, 라틴 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아시아적 변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그 사회분석의 도구와 이상적 지향점, 즉 사회주의적 사회질서를 잃었다. 그 결과 새로운 방향설정이 요청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중신학도 새로운 방향설정이 요청되고 있다. 왜냐하면 민중신학이 저항해 왔던 대상들, 즉 억압하고 착취하며 비민주적인 독재정권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과거 민중운동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지금은 대통령이 되었으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회가 있다. 물론 완전히 이상적인 상태에 아직 도달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은 동아시아를 주도해 가는 경제적 발전을 이루고 있다. 과거에 활발하게 표출되던 저항의지는 이제 많이 약화되었다. 물론 합법적인 시위들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새 정부는 학살행위를 자행하지는 않는다. 새 정부는 자청하여 북한을 향하여 문을 열었고 성공적으로 다리를 놓았다.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어렵게 이루어 낸 경제발전을,“금송아지를 돌며 춤을 춤으로써" 망쳐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높은 임금을 주는 일자리에만 집착하거나, 출세만을 추구하고, 점점 더 사치 지향적이 되고, 신문에서 정치 기사를 읽기보다는 주가의 등락을 표시하는 면만을 읽는 주주들이 되어 가는 사실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과거에 민중신학은 노동자들의 정의확보를 위하여 투쟁한 사실을 기억하고 그 전통을 계속 이어 가야 할 것이다.
한국의 상황에 대한 이상의 나의 진술이 너무 단편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밖에서 본 분석이 한국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피상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민중신학의 새로운 방향에 대한 견해를 한국 밖에서 피력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민중신학은 분명한 한국적 관점을 계속 가져야 하고, 분명한 색깔을 보여 줘야 하며, 상황에 민감해야 하고, 한국적으로 사고를 해야 한다. 민중신학이 한국의 문제들에 대하여 보다 더 타당한 해답을 제시하면 할 수록, 민중신학의 영향력은 세계적으로 더욱 널리 퍼질 것이다. 위대한 신학자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루터의 신학은 참회하는 의자에서 탄생했다. 루터신학의 탄생 자리가 이 보다 더 좁고 더 작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루터는 참회의 문제를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신학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이 가톨릭의 신학과 가톨릭 교회의 신경을 거슬렸던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를 위하여 글을 썼는데, 이것이 그 당시의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안병무의 감방경험이 그의 새로운 신학의 탄생 계기가 되었다. 그러기에 안병무의 신학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본회퍼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감방에서 편지들을 썼는데, 바로 이 편지들이 한 세대의 모든 신학자들로 하여금 신학적으로 새롭게 방향을 잡아가도록 영감을 주었다.
민중신학의 강점은 인간의 상황을 그들이 처한 사회적인 정황 및 고난의 상황과 관련시켜 집중적으로 탐구함과 동시에, 같은 방법으로 성경의 복음과 연결시켜 탐구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상황과 성경의 복음이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고 해석되게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상황은 완전히 새로운 각도에서 보여지게 되었고, 성경본문도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르게 읽히고 이해되었다. 이렇게 하여 양자는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는 정치적-사회적으로 변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 세계적으로 젊은이들은“높아지려고만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것을 경험해 보려는 욕구가 강하며, 쾌락추구에 몰입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일방적인 경제부흥과, 동서간의 긴장완화를 즐기고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의 지구화와 자연에 대한 전 지구적인 위협에 직면하여 놀라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민중신학자의 과제는 그들의 힘을 현실의 구체적인 것들에 집중하여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기독교 윤리는 이른 바 지구화에 의하여 야기되고 있는 경제적, 생태학적 문제들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한국이라는 지역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샤머니즘, 불교, 한국적 유교윤리 등과 필연적으로 대화하면서 공존할 수 밖에 없는 소수자로서의 한국교회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어떤 해답을 줄 수 있는가? 한국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이러한“혼합문화”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어떤 새로운 답변들이 나올 수 있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 본 성경의 많은 본문들은 지금까지 읽혀진 것과는 달리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민중신학이 잘못되기를 원치 않는 한, 민중신학은 가난한 자들의 관점 즉 바로 예수가 본 관점을 떠나면 안될 것이다.
민중신학은 안병무가 제기하긴 했지만 충분히 전개하지 못했던 문제, 즉“프뉴마”라는 개념에 대하여 아직까지 충분한 답변을 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안병무는 프뉴마를 "영"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기"(氣)라고 번역하였다. 이러한 번역의 가능성은 니케아신조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데, 니케아신조에서는 성령을 "생명을 주는 자"(Credo in Spiritum Sanctum, dominum vivificantem)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분사구조(vivificantem)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령은 언제 어디서나 생명을 주는 분으로서 계신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어떤 생명을 의미하는가? 영적 생명(그리스어 “z ”)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육체적 생명(그리스어 “bios”)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생명이해를 통하여 자연에 대한 이해와, 자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또한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와, 다른 종교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지게 되는가?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새로운 패러다임 즉 생명이해에 매우 중요한 패러다임을 발견했는데,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육체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해방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몸의 중요성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민중신학이 관심하고 다루어야 할 주제도 바로 이 주제 즉 몸의 중요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측면들 즉 경제적인 개선을 향한 인간의 욕구와, 현존하고 있는 고난의 문제 등 두 가지 측면이 서로 관련되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빛에서 몸의 중요성을 파악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새롭게 이해하되, 그 십자가의 의미를 부활의 아침 즉 예수의 몸의 부활의 빛에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해된 민중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어떠한 답변을 줄 수 있을까?
육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또한 미학적인 가치를 요구하게 된다. 민중신학은 예술, 극, 시, 그림, 건축 등의 발전에 어떤 자극을 주고 있는가? 민중운동은 시 부문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다양한 표현형태들을 사용한 민중그림들을 본 일이 있다. 이 그림들에는 불교 예술의 영향을 받은 민중적 시각이 새로운 표현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재 상황은 어떤지, 그리고 미래에는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다. 위대한 신학은 위대한 예술을 낳는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지금까지의 서양 예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알기로는 민중신학도 처음부터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점점 칼빈주의가 한국교회를 주도하는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칼빈주의는 항상 예술을 적대시하면서 그림들을 파괴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한국 교회는 미국 장로교의 영향이 강해서, 독자적인 예술전통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반하여 민중신학은 부분적이긴 하지만 새로운 대안을 내어놓지 않았던가? 이러한 시도는 존중되고 앞으로도 계속 유지되어야 하고 더욱 새롭게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병자들을 고쳐 주어라...”(눅 10:9)라고 명령했던 과제를 새롭게 평가하는 것 또한 육체의 중요성을 새롭게 평가하는 일에 속하게 될 것이다. 카리스마적인 교회들은 치유의 은사를 재발견하였다. 카리스마적인 교회들에서 이 치유의 은사는 기적적이며 엑스타시적인 성격을 띄고 있으며, 개개인의 신앙의 증빙자료로 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예수가 의도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예수에게서 치유는 하나님 나라 도래의 표징이며, 누가복음 10장 9절이 보여 준 바와 같이 치유는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표징이다. 왜 기성교회들은 이 과제를 서양 의학에 넘겨줘 버렸으며 종교적으로 중립인 학교 의학에 위임해 버렸는가? 치유의 은사는 카리스마이기는 하지만, 결코 신앙의 확증자료로 오용되면 안 된다. 민중은 치유를 열망한다. 왜 우리는 민중을 목자 없는 양처럼 이러한 상태에 방치하고 있단 말인가?
민중신학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에 했던 것처럼 민중신학은 이 시대의 표징을 올바로 인식하고, 이러한 표징들을 성경의 빛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변화를 위한 자극을 제공하는 등의 과제를 민중과 함께 수행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변혁을 원하신다. 스스로 변화하는 자만이 그 자신의 신실함을 유지할 수 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되며, 민중신학에도 해당된다.


http://www.minjungtheology.org/magazine/magazine_read.asp?fdMonthSeq=25&fdSeq=3








Backward Forward Post Reply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