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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7/11/19 (08:15) from 85.181.182.59' of 85.181.182.59' Article Number : 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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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믿음을 창조하신다'라는 명제에 동의합니까?


민중신학적 실천에 관한 심포지엄 (1)

'하나님은 믿음을 창조하신다'라는 명제에 동의합니까?
-마르틴 루터, 죤 칼빈 그리고 에큐메니칼 신학이해에 따른 칭의론-

게어하르트 자우터(Gerhard Sauter)(독일 Bonn 대학 교수 / Dr. Dr. h.c)


몇 년 전 제 아내는 신체장애아동을 위한 초등학교에서 종교과목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종교란,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시피, 독일의 공립학교에서는 정규과목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6살에서 12살 사이의 연령층으로 구성된 이 아이들은 지금까지 어떠한 종교적인 교육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그들 가족이 교회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특수 상황에 갇혀있는 상태라서 가족이 단지 문서상으로 교회에 등록되어 있다는 이유에 근거해서 자신들이 그 교회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걸을 수 없었고 정상적인 대화도 불가능했습니다. 그들이 머물고 있는 인근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주일예배에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또래 아이들과 더불어서 종교적인 견해를 나누거나 혹은 비판적인 입장을 표현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아이들로 이루어진 학급에서 나의 아내는 종교를 가르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간의 교육기간이 지난 후 그들 대부분은 처음으로 자신들이 개신교도라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독일의 종교교육은 가족이 속한 교회와의 관계에 따라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카톨릭 교사에 의해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의 첫 번째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저 아이들은 어찌해서 카톨릭이고, 우리들은 왜 개신교인가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진정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매우 간단하게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단지 주일예배나, 여러 가지 종교행위,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적인 삶에만 제한되지 않은 설명을 통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듣는 제 아내는 딱하게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금방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확신하건대 이런 상황에서는 저 역시 아내를 적절하게 지원해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한 아이가 손을 높이 들고 말했습니다. "카톨릭 교도는 홀수 날에 태어났고 개신교도는 짝수 날에 태어났습니다." 설득력 있는 대답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아이의 대답은 모든 종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자기 중심적인 신념을 아주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옳고 너희들은 틀리다. 너희들은 너희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들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식 말입니다.
왜 우리는 개신교도라고 불려지는 것입니까? 왜 다른 사람들은 카톨릭이라고 불려집니까? 개신교와 카톨릭과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교회가 다르고, 문화적 전통이나,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지금까지 계속되는 종교적 관습이 다르다는 것은 단지 이차적인 사실일 뿐입니다. 본질적인 어떤 요인으로 인해서 카톨릭교도가 되고 또 개신교도가 되는 것입니까? 제가 가르치고 있는 본 대학 내 개신교 학생들이 이 질문에 대해 깊이 있는 대답을 발견하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통 개신교적 자기 이해 안에서 교육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학생들은 기꺼이 마르틴 루터나 혹은 죤 칼빈, 혹은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이름을 언급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종교적인 영웅들을 상기시키는 것은 카톨릭에서 교황과 그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교의적인 차이를 언급한다면 보다 더 실속 있는 대답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칭의론 말입니다. 왜냐하면 칭의론은 역사적으로 로마 교황청과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 나타난 교회 [개신교] 사이에서 오랜 역사에 걸쳐 계속적인 논쟁점이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개신교는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고 (어떤 사람들은 이에 덧붙여서 그들 자신의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봅니다), 카톨릭은 그들의 훌륭한 공적이 동반된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믿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인간의 사악한 기질은 영세를 받음으로써 바뀌어졌기 때문에, 카톨릭 사람들은 그들이 구원을 얻는데 무엇인가 이바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의를 행하는 노력에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는 것에 따라서 그리고 사제들의 도덕적 영적 충고를 따르는 여하에 따라서 구원을 얻게 된다고 봅니다. 이와는 반대로 개신교도들은 오직 하나님을 믿음으로써만 얻게되는 의를 발견한 다음에는 의롭게 되기 위한 노력을 무시하기 때문에 종종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 같습니다. 개신교도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어서 오직 양심의 지배를 받을 뿐 기타 다른 권위로부터는 독립해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도 독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자기 스스로에 대한 낮은 평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인으로 말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약점과 투쟁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조화되지 않는 무엇을 단계적으로 극복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일을 한다고 해서 의의 진보가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바로 이점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또 믿고 있는 점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이렇다면 얼마나 끔찍한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정당하지 않습니다. 첫째는 교회의 가르침들과 도덕적 결과들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지극히 피상적입니다. 만일 우리가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생각은 자유주의적인 태도와 보수주의적인 태도 사이에 있는 현저한 차이를 훨씬 더 분명하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의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교파의 유산들, 특히 독립적인 도덕적 자아와 그 책임성을 요구하는 전통을 대체하기도 합니다. 다른 한편, 주요 교단이외의 교파들은 일종의 도덕의식으로 중독 되어 있습니다. 이 도덕의식은 또한 카톨릭 교단에 의해 계발된, 예컨대 성윤리와 안락사 문제에 있어서 나타나는 엄격한 지침들과 유사합니다.
두 번째, 이것은 첫 번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인데, 뿌리 깊은 교의적인 차이점들이 너무 단순화되어 있습니다. 간단하고 또 쉽게 말하자면, 서구교회의 분열은 교황이 권위를 행사하는 것에로 소급합니다. 신앙자유에 대한 논쟁(indulgence controversy), 고백의 내적 파괴 그리고 은혜론은 단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일부일 뿐입니다. 그것들이 분열의 징후는 될지 몰라도 그 원인은 아닌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참된 교회"를 찾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뿌리를 둔 신실한 교회를 말입니다. 그는 교회당국에 성사, 특히 고해제도를 집행하는데 있어서 변화가 나타나게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질문은 '이유들이 성서에 충실한가?'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이유들은 참된 기독교 소망을 설명하고 있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황과 16세기에 살았던 그의 참모들은 이러한 질문을 교회질서와 동시에 교회와 국가 사이의 미묘한 균형관계를 어지럽히는 시도로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단호하게 다루어야만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로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후 루터가 제시한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메시지는 중부유럽에서 많은 동조세력을 이끌어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황청은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에 대한 선을 분명하게 그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루터는 파문되었고 이런 방식으로 말 그대로 프로테스탄트들[저항자]은 카톨릭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루터를 따르는 사람들과 개혁교회들은 교회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트리엔트공의회(Concilium Tridentinum, 1545-63)의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1547년에 선언된 칭의에 대한 공의회의 결정에 따르면, 칭의는 은혜에 의해서 죄인들이 변형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은혜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행하는, 교회의 성도들을 구원하시는 행위와 협력할 수 있게 만드는 사건이 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종교개혁의 가르침, 즉 "죄인들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즉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 이 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죄인들에게 나누어졌다"라는 가르침에 대해 유죄판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은 결국, 칭의론을 두고 서로 논의가 벌어졌을 때 서로를 비교하거나 또는 분쟁을 해결하는 여러 가지 시도가 있었을 때마다 진행된 쌍방의 대화를 단절시키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주요한 이유는 칭의라는 것이 단지 논쟁되는 이론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카톨릭 측의 해석은 -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표준이 되었을 때 -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인간들이 점진적으로 변질된다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은혜는 일종의 초자연적인 원인에 해당되는 것으로,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하고 또 이 삶은 하나님과 인간의 행위의 연합을 해명해 주는 것입니다. 새롭게된 인간의 의지를 가능하게 하는 영향력은 어느 정도는 교황과 성직자들의 영적인 힘에 의해서 대리되었습니다. 이들은 일상적인 삶의 문제에 있어서 조언을 주고 또 면죄를 승인해주어 교회에 대해 순종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인간에 대한 신학적 표상 (기독교 인간학), 신과 인간 행위를 결합하는 다소 억지적인 개념 그리고 교회와 교회의 권위에 대한 구조 등 이 모두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들은 개혁교회들에 의해서 거부되었습니다. 루터는 시편 51편에 대한 묵상에서 신학의 주제를 정의했습니다.

나의 죄를 내가 압니다. 나의 죄는 여전히 내 앞에 있습니다. 당신에 대해서, 오직 당신에 대해서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보시기에 사악한 것을 행했습니다. 당신은 심판의 말씀을 하시면서 의로우십니다. 당신의 판결에는 비난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옵소서, 내가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씻어주소서, 내가 눈보다도 더 희게될 것입니다. ... 나의 죄를 당신의 얼굴로부터 숨겨주옵소서, 나의 부정으로부터 말갛게 씻어주옵소서 .. 오 하나님, 내 안에 정한 마음을 만드소서, 그리고 내 안에 새롭고 올바른 영을 심어주소서.

루터는 이 시편을 회개기도의 전형으로서, 죄인의 고백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백으로서 해석했습니다. "신학 특유의 주제는 인간입니다. 죄를 짓고 저주를 받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입니다. 죄로 가득한 인간을 판단하시고 또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루터에 따르면, 신학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 말해야만 합니다. 인간들을 거룩함과 의와 생명의 나라 안으로 옮겨 놓음으로써 인간의 총체적인 실존을 다시 만들어 놓으시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약속, 다시 말해서 그와 연합하여 이루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씀하심으로써 믿음과 소망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공동체로 옮겨놓음으로써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을 창조하십니다. 이러한 창조적인 행위는 우리 생애 안의 일정한 시점에 결코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적인 자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가 고집스런 우리 자아로부터 벗어나 '되돌아 옴'으로써 매 순간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되돌아와서 세례를 받으라고, 다시 말해서 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받아들이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되돌아온다는 것은 결코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앞을 향해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사역에 대한 증인입니다. 인간들은 과거에 하나님의 살아 계신 뜻에 대해 거역했던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분리되었습니다. 이제 은혜의 복음대로 말하자면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게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구원하시는 판단에 있어서 옳다고 인정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고 행동하고, 소망하고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심판을 고려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었습니다. 무한한 용서, 그리고 세례 속에서 효력을 발생하는 용서의 현실, 성찬과 사죄의 선언 등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한 구성요소라고 말입니다.
칭의와 관련해서 나타나는 교의적인 차이는 그러므로 교회의 분열을 유발한 것이 아니라 교회 삶의 중요한 차이를 반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오직 칭의론에 대해서만 이루어지는 이해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 자체로는 과거보다 더 나은 오늘을 약속해주지 못합니다. 이해란 오직 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자기 해명을 고려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는"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를 위임한 그것에 충실한가? 어떻게 이러한 충만한 믿음을 오해의 여지없이, 단순히 또하나의 다른 빈 껍데기로서 진술되거나 표현되지 않고 확신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들을 고려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교회의 대표자들이 솔직한 마음으로, 혹은 앞서 제시한 질문들을 무시하려고 노력함으로써, 혹은 스스로를 분리한 후 그러한 분열에 대한 신학적인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서로와 대화하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한 예가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대신에 서로에 대해서 열린 마음으로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합니다. 서로에 대해서 열고 서로에게서 배우고 또 얼마나 더 많이 만나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최소공배수를 발견하는 전략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칭의에 대한 상호이해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장애물이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칭의론에 대한 대화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아무런 핵심도 없이 진행되도록 만드는 그런 장애입니다. 이 장애로 인해서 칭의론이 단지 특별히 중세시대에 나타난 자기 중심적인 종교성에 대한 경건한 관심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게 됩니다. 400년 전 이전에는 하나님과 그의 마지막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때의 사람들은 하나님 오른편에 서있게 되기를 간절히 열망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그때는 널찍한 병실에 있어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죽어 가는 사람들, 그들은 언제나 마지막 심판이 그려진 벽화를 바라보면서 "구원을 원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원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틴 루터는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종 "나는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고심했다고 전해진 것입니다. 그는 결국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퍼져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구원하셨다. 나는 내가 무엇을 했든 또 무엇을 하지 않았든 그것에 대해 심판을 받는데 있어서 전혀 두렵지 않게 되었다. 나는 이미 안전하다!" 라는 대답이 그것입니다. 또한 루터는 "나는 어떻게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대부분의 동시대인들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대답은 매우 잘 수용되었고 또 더욱더 많은 사람들, 성직자, 법률가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해지는 이 이야기는 종교개혁의 성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종교개혁은 단지 집단적인 정신이상 증세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인 성공담은 단순히 꾸민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루터 자신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사람을 오도할 뿐인 질문들 가운데 하나로 그가 인용한 것일 뿐입니다. 이 질문은 사람들을 단조롭게 만들고 또 고되게만 할뿐이었습니다. "거룩한 세례에 대하여"라는 1534년에 쓰여진 한 설교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15년 동안 신실한 한 수도승이었습니다. 내 생명을 구원하는 목적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와 자비를 베풀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등을 말하는 교회의 모든 지침들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이 지침들을 따르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세례의 효력을 받게될 것이라는 약속에서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하늘로부터 주신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동할 기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루터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신 출발점으로부터 점진적으로 이르게 되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행위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고 칭의를 통해서 그가 사역하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서 열려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구원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성령의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시고 또 우리 삶의 참 중심이 되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소 특이하게 다음과 같이 진술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19-20). 믿음은 "나"의 위치가 그리스도의 현재에 놓여있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루터 스스로가 제기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 반대로 그는 "우리가 이 질문을 제기할 때 우리는 어디에 서있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우리를 직면하게 함으로써 이 질문을 수정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믿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가 올바로 이 질문을 제기할 수 있고 또 기꺼이 그럴 마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그 대답을 찾고 우리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합니다.
칼빈(Johann Calvin, 1509-1564)의 칭의에 대한 개념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로마서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 강요』(Institutio religionis christianae, 1536) 첫판에서는 칭의론에 대해 특별한 지면을 할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루터의 경우를 따라서 칭의론은 다른 맥락 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1539년에 나온 제 2 판에서 그는 따로 한 장을 분리해서 칭의론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중생"이라는 주제에 부속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순서는 마지막 판(1559)까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을 명료하게 밝히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영의 현존을 매개로 해서 의가 전달된다는 논리를 가지고 그것을 연장시켰습니다. 그밖에 트리엔트 공의회가 내놓은 칭의론을 신인협력설에로 퇴보한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칼빈은 루터에 대한 자신의 이해, 그리고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과 그리스 교부들에 의한 영향("성화"에 관련해서)을 결합시켰습니다.
칼빈은 칭의, 중생, 회개 그리고 성화의 신학적 관계를 설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형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칭의론은 마치 최초의 울음소리와도 같이 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직적인 배열을 가지고 칼빈은 신학 그리고 개혁주의 신앙의 모습을 구체화시켰습니다. 칭의론 뒤에 예정론을 위치시켜 놓음으로써 칼빈은 칭의 사건은 선택을 분명하게 만들어 주는 것임을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성화는 칭의와 결합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성령을 통해 칭의를 받은 사람들의 거듭남이 갖는 종말론적인 성격을 표현합니다. 칼빈은 믿음의 연약함을 루터보다 더 강하게 강조했습니다. 믿음이 행위가 될 수도 있고 또 성화를 얻는데 협력할 수도 있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신인협력설(Bernhard of Clairvaux에 소급하는), 특별히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이라는 생각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연합에서 칭의와 성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양자의 통일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 없이 다른 것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칭의론은 올바른 행위에 대한 의무를 극소화시킴으로써 값싼 은혜로 전락시켰다고 주장하는 반 종교개혁의 비판에 대한 대답에서 칼빈의 구상은 선한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구원은 성취될 수 없고 그것은 단지 마지막 심판에서 판단될 것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다루시되 개인이 성화를 향해 성장하는 그런 방식으로 하십니다. 믿음의 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경험됩니다. 이러한 생각을 제시하기 위해 칼빈은 경건치 못한 사람들에 대한 칭의 그리고 신앙인들의 칭의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신앙인들의 행위는 나중에 한편으로는 판단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의 결실"로 인정될 것입니다. 칼빈은 그것이 어떠한 종류라 할지라도 행위에 의해 획득되는 의를 피하려 했지만, 그러나 의를 입증해 보이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윤리적인 원칙을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판단인 칭의사건의 본질인 '명시해 보일 수 없음'을 드러내 보이려는 위험에 노출되었습니다.
칼빈은 중생과 칭의가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칭의는 일종의 조건인양 중생에 뒤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은 명시해 보일 수 없는 칭의의 한 측면(the side)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기독교인의 삶의 시작을 묻는 질문에 대답하고 또 누구도 칭의에 대해서 침묵해야만 한다는 사실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해줍니다.
이 시작은 하나님의 사역에 달려있습니다. 그것은 순수존재이지만 신앙인이 생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회고할 수 있는 성장의 시작으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제는 현재의 에큐메니칼한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이 분야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및 소망과 관련된 기본 질문을 검증하는 과정을 피하는 가운데 다소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의견이 일치 되어왔습니다. 이러한 동의에 따르면 하나님의 칭의를 선언하는 것은 오늘날 더 이상 이해될 수 없다고 합니다. 칭의론은 시대에 뒤진 것이고 아주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1963년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개최된 세계 루터교 연맹 모임에서 제시된 메시지에 해당됩니다. 이 모임은 세계에 있는 모든 루터교의 대표자들이 참석하는 자리로서 카톨릭 교회의 공의회와도 비교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임에서 사람들은 칭의의 의미가 오늘날에 보다 잘 이해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한 의견이 제출되었는데, 칭의론은 낡은 신학의 일 부분이고 이미 오래 전에 새로운 경향의 질문들로 대체되었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칭의에 대해선 어떠한 의견의 일치도 가능하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를 향해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특별한 것을 전혀 말하지도 않고 또 오늘날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에 관해서, 다시 말해서 믿음에 대한 엄청난 도전과 관련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을 도와 보다 더 풍성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헬싱키 모임에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을 했습니다:

현대인들은 '나는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더 이상 제기하지 않는다. 현대인들의 질문은 더욱 철저하고 또 더욱 기본적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은 신 그 자체에 대해서 묻고 있다.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라고 말이다. 현대인은 하나님의 분노로 인해서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없다고 하는 인상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다, 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의 무의미함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다. 현대인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묻지 않고 하나님이 진정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묻는다

여기서 칭의 사건의 잠재력은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의 조건과 환경 아래에서 요구되는 도덕적 삶에 대한 도전으로 환원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종교적 요소들은 과거에 비해 훨씬 가치가 상실되었습니다.
오늘날에 그것들은 종교적인 골동품을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에 속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 회의에서는 소위 '오늘날'라는 말이 강조되었습니다만, 사실 오늘날 우리는 심지어 종교 안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해야만 합니다.
이제 칭의의 본질과 최근에 이루어지는 그것의 해체현상에 대해서 언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들, 즉 여러분과 저 자신에게 오늘날 기독교인이라는 매우 기본적인 질문에 대해 우리 스스로의 이해를 확인해볼 것을 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에 대하여"(On Being a Christian)는 매우 잘 알려진 스위스 카톨릭 신학자 큉(Hans K ng, 1928-)의 책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는 독일의 튀빙엔 대학 에큐메니칼 신학교수로 재임하다가 지금은 은퇴했습니다. 1957년 그는 약간 도발적인 연구 결과를 책으로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에 따른 칭의론 개념을 트리엔트 공의회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놀랍게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1974년에 그는 『기독교인이라는 것』(Being a Christian)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장하기를, 우리는 오늘날의 기본문제들에 충실한 또 다른 에큐메니칼한 의견일치를 찾아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큉의 이해는 헬싱키 모임의 시각과 매우 유사합니다.
큉(K ng)은 16세기의 평균 기독교인과 현대인들을 비교했습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더 이상 '기독교 칭의'가 아닌 '사회정의'에 관해 담론를 전개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진술들 도식적으로 제시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보일 것이다. 즉, 과거에 '내가 어떻게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우주적이고 영적인 고뇌 속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 질문은 더 이상 우주적이지 않고 단지 실존적인 고뇌 속에서 제기된다.
즉, '나의 삶은 어떻게 의미를 발견할 것인가?' 과거에 이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사면해주고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심판주로서 간주되었다. 오늘날에 그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또 세계와 역사에 대한 책임으로 부르는 동반자로 보여지고 있다.
과거에 그것은 개인적인 칭의에 대한 질문이었고 순수하게 개인적인 의미에서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었다. 오늘날에 그것은 구원의 사회적 차원에 대한 질문이고 우리 동료들에 대한 전면적인 돌봄에 대한 질문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사후의 구원과 하나님과의 평화에 관심을 가졌다. 오늘날에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적인 조건과 구조의 혁신이나 개혁에 관심을 기울인다.
과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정당화해야만 했다. 오늘날에는 자신과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그의 삶을 정당화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이 진정 오늘날 우리들의 질문입니까?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난하고 공격하고 또 판단하는 잘못된 시도로 인해 혼돈상태에 빠진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질문입니까? 고통 중에 있고 나이가 들어 죽어 가는 가운데 '나는 지금 누구인가?' '나는 장차 무엇일 것이고 또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는 사람들의 질문입니까? 여러분들은 이 질문에 직면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함으로써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컨대 이일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칭의론이 "나는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고 그러므로 그것은 오늘날의 사람들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에 의해 대체되어야만 한다는 제안에 논의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만일 그것이 옳다면, 칭의론은 일종의 종교적인 찌꺼기여서 버려져야만 하고, 혹시 가능하다면 재활용되어 우리시대의 도전에 대해 대답하기 위한 힘으로 고취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재활용이 가능하지 않다면, 칭의론은 과거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확신들의 유물일 것이고 오늘날에는 종교문화의 박물관에 전시되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림은 비록 그것이 종종 개신교와 카톨릭 양측에 의해서 제기된다 할지라도 칭의론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에 해당됩니다. 혹자는 이러한 이미지가 많은 카톨릭 학자들과 개신교 학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의견일치를 나타내 보여준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칭의사건은 여하튼 지나갔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사이에 더 이상의 실재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도전을 가지고, 정의에 대한 외침 그리고 평화를 위한 노력을 가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해방과 구속의 힘을 힘차게 발산하면서 다시 시작합시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바로 이러한 점에 대해서 그의 논의를 전개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나는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세례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인식(Wahrnehmung)할 것을 설교했습니다. 혹은 보다 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정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루터의 진정한 질문은 "하나님은 참으로 누구이고 나는 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론이 법정적인(forensic) 개념을 갖게된 이유였습니다.
즉, 하나님과 인간은 한편은 심판하고 또 한편은 고발되는 법정적인 의미에서 서로 마주서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답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법정에서는 누구도 자기 자신을 입증해 보일 수 없고 또 서있을 다른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법정적인(forensic) 언어는 고발된 사람이 기소되었고 결코 피할 수 없는 도전에 직면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소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된 사람 사이로 나아갑니다. 과거에는 인간의 모습이 마땅히 되어야만 하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과 실재의 모습을 비교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 중간에 서심으로써 사람들은 이러한 조건들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서로를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본다면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멸망하는 위치에 서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인간은 그리스도의 위치에 서있게 됩니다. 죽으신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습니다. 과거에 하나님 앞에서 멸망당했던 사람은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멸망하는 자의 위치를 대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리스도의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칭의 사건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있을 새로운 위치를 받게됩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속죄의 의미를 요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하나님은 동시에 인간을 판단하면서 또한 인간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참 모습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누가 무엇을 하고 하지 않고에 대해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빠뜨리고 낭비한 것을 만회할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구별해내는 창조주는 생명과 죽음에 대해 판단을 내립니다. 피조물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과 생명을 파괴하는 죽음에 대한 심판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여전히 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버리심[죽음]과 또 그것으로부터 일어난 [부활한] 그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심판과 사망에 빠진 사람 사이에 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실 때 이제는 더 이상 죄인으로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 하나님은 그의 죽음을 구원으로 바꾸어 놓으시고, 그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는데 - 보시는 그곳에서 하나님은 의롭다 하시는 심판을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생명의 약속입니다. 생명의 약속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 필요한 확신을 사람들에게 줍니다.
그러한 확신(certitudo) 그 스스로를 하나님 약속에 던져버립니다. 왜냐하면 약속된 미래 안에서 튼튼한 기초와 안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확신은 약속된 미래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확신은 모든 자기안전에 대한 느낌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합니다. 확신은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인식의 반대편인 자기포기(Self-renunciation) 안에서 명백해집니다. 행동하고 통찰력 있는 주체는 그 스스로가 하나님의 의에 집중되어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은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 그 적절한 때를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옛 인간의 죽음을 완성합니다. 인간들은 자기포기와 자기 자신에로의 죽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더 많이 자기 자신들과의 싸움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칭의론은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서 어떻게 연합되어지는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칭의론 안에서 보여주려 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계시는 첫 번째 계명 안에서 요구되었던 것을 성취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단순히 동의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 - 혹은 여러분들이 양해해 주신다면 저는 감히 하나님의 예지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보는데, 이는 우연한 일치와도 같습니다 - 헬싱키 모임과 병행해서 1960년 초에 열린 제 2차 바티칸공의회(Concilium Vaticanum)가 있었습니다. 공의회는 칭의론을 다루지 않았고, 오히려 참으로 하나의 보편교회만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다른 신앙 공동체가 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하나님의 계시와 그의 사역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고 진술함으로써 에큐메니칼 대화를 향한 길을 열었습니다.
제 2 차 바티칸공의회의 결과 중에 하나는 성경을 새롭게 듣게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20세기초에 유럽의 개신교에서 시작되었고 파시즘의 위협으로 인해서 양자는 서로 더욱 가깝게 움직여졌고 또 보다 분명하게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새롭게 듣게됨으로써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와 신학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전체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은 어떤 한 교회의 속성이 아닙니다. 여러 교의들은 신앙인들이 교회 안에서 행하는 말과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기 위하여 형성되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동의(Consensus)란 우선 종교적 신념들에 대한 이지적 판단의 결과로 나타나는 의견의 일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그의 행위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9). 동의란 그러므로 여러 가지 구상들 가운데 서로 겹쳐지는 부분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타협이 이루어지도록 강조될 것입니다.
세 번째, 동의는 칭의론을 이해함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결과는 이러한 동의는 진술되어져야 할뿐만 아니라, 오히려 참여하고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교회,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교회의 신실함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동시에 우리 자신 안에서, 우리의 도덕적이고 책임적인 자아 안에서 그리고 세속적인 이들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여러 도전들에 대한 충격 안에서 우리 질문에 대한 개혁이 있을 것입니다. 칭의가 증거하는 삶의 방식 그리고 물론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사건에 관한 증거를 주는 것을 허락하는 사고 방식에 관해 질문하는 것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측면들은 루터교 세계연맹(Lutheran World Federation)과 로마 카톨릭 교회 사이의 "칭의론에 대한 합동선언"(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의 특징을 형성해주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1997년 1월에 제안되었고 전세계 루터교 주교들에 의해서 격렬한 때로는, 특히 독일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가열된 토론 끝에 1998년에 받아들여졌습니다. 1999년 5월에는 약간의 짜증을 자아내는 보류 끝에 교황청에 의해서 추인되었습니다. 이 동의는 가까운 미래에 양측에 의해서 서명될 것입니다. 이것에 따르면 칭의는 삼위일체 하나님, 심판주이시자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역동적이고 결정적인 행위로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뜻에 거역하는 원수의 권세로부터 죄인을 해방시키고 동시에 의롭게된 사람을 그리스도와 결합시킨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연합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unio cum Christo)이라는 칼빈의 구상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칭의론은 무엇보다 교회의 신실한 행위에 대한 물음에 해당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무엇을 말하고 실행하고 또 범죄와 그것으로 인해서 의식적으로 범하는 실수로부터 회개할 때 교회가 무엇에 위임되어 있는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칭의론은 교회의 참 본질을 알아보는 시금석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우리는 참으로 교회입니까? 하나님이 말씀과 영을 통해서 생명으로 불러내신 교회입니까? 우리는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칭의의 참된 처방 안에 서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무엇에 따라서 말하고 행하는지 불분명합니까? 칭의론은 거듭해서 교회와 신학을 위해서 생산적인 근심을 창조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칭의선언에 관한 한 매우 현실주의적인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어느 날 점심식탁에서 이루어진 대화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칭의론에 대해서 설교한다면 사람들은 졸기도 하고 헛기침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화와 도덕적인 예를 들어 말한다면 그들은 조용히 앉아서 주목하고 또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저의 짤막한 이야기와 복음의 핵심과 칭의론을 설명하는 저의 노력에 대해서 귀를 기울여주신 것에 대해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http://www.minjungtheology.org/magazine/magazine_read.asp?fdMonthSeq=20&fdSeq=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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