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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와 사건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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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와 사건의 신학
A Study on Gilles Deleuze and ‘Theology of Event’



_심광섭



사유해야 할 우리 시대에 가장 깊게 사유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아직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마틴 하이데거


기독교의 심장은 무엇인가?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 ‘핵심’, 혹은 ‘실체’란 무엇인가라고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흔히 사용돼 온 이러한 개념들은 이제 어떤 추상적이고 생명이 없는 것 같은 말로 들린다. 이러한 개념들은 온갖 주변, 외피, 술어들을 천하게 여겨 제거한 홀로 고고하며 고독하게 빛날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생명력이 없는 다이아몬드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장은 홀로 뛸 수 없다. 심장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심장은 관계 속에서만 살아있다. 심장이란 생명적 은유로서 무엇인가 살아있고 고동치며, 역동적이며 추진력 있는 생명의 원천을 의미한다.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의 심장의 박동소리를 느끼며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기독교의 심장은 뛰고, 역동적이며 살리는 심장인가, 아니면 서서히 멎어가는 심장인가?
기독교의 심장은 기독교 신앙에 내재된 진리의 힘을 통해 드러난다.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보다 역동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근원적인 방법은 없을까? 나는 그 방법에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옛 판[버전]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실체의 존재론’ 혹은 ‘주체의 존재론’으로써 표현한 방법이며, 둘째는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판, 곧 새 판[버전]으로서 ‘관계의 존재론’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사건의 존재론’을 통해 표현된 기독교 신앙의 진리이다. 이 글은 실체 중심의 사고와 관계중심의 사고를 서술하고, 하이데거에 이어 질 들뢰즈에 의하여 활짝 전개된 사건의 사고에 힘입어 사건의 존재론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고 해석하며 전유하는 ‘사건의 신학’을 선보일 것이다. 우리는 사건의 사고와 사건의 언어를 통해 표현된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서 노쇠해가는 기독교의 심장을 살려내고, 그 박동소리를 더욱 생동적으로 듣고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I. 질 들뢰즈와 사건의 철학

1, 실체 중심의 사고와 관계 중심의 사고
서양의 사유방식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극점으로 첨예하게 나뉘어져 있다. 하나의 극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인식방식으로서 실체철학과 실체 중심적 사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표[실체, 분량, 성질, 관계, 장소, 시간, 위치, 상태, 능동, 수동]가 말해주듯이, 여기서 관계는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이와 다른 사고방식이 관계의 사고, 사건의 사고이다.
첫째 사고 유형은 본질(ous?a)과 관련된다. 본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표에서 첫 번째로 등장한다. 우시아 없이는 존재자가 존재할 수 없다. 이 본질은 실체(substantia)라고도 말할 수 있는바. 실체로서의 존재는 다른 것과 관련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만 관계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존재는 자명하며 자족적이며 자기 완결적이다. ‘관계’라는 범주가 중간쯤 위치하고 있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관계가 중요하지 않은 술어인 이유는, 관계는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서 이 관계의 존재는 존재자의 존재에 피상적으로만 부여되기 때문이다.
존재는 로고스와 관계한다. 로고스적 언어는 규정적 사유다. 로고스의 특정한 형태 안에서 존재가 파악되는데, 그것이 horismos, 곧 규정[definitio]이다. 규정은 존재자가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러므로 ousia는 모든 술어의 일차적 주어이며 모든 술어의 담지체로서 후에 생각하는 주체인 인간과 마주서는 객관(Objekt)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양 사상사 전체에 영향을 주는 형이상학을 발전시킨다. 형이상학은 존재자 전체를 객관으로 다루는 학문이며, 거기서 최고의 존재자를 다루는 학문이 된다. 형이상학은 존재일반을 다루는 존재론이며 최고의 존재자를 다루는 신학으로서 객관적이며 확실하게 정초할 수 있는 학문체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에서 지각과 지각된 것, 사유와 사유된 것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은 자연적으로 뒤로 밀리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중심적 사유는 중세의 가장 대표적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하여 계승된다. 그는 ousia를 substantia로 보게 됨으로써 실체를 모든 존재방식과 언어방식의 제1의 그리고 지도적인 존재 방식으로 삼는다. 실체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in sich steht), 자기를 통해서 존재하는 것(ens per se subsistere)이다. ‘Sistere’는 ‘세우다’, ‘어떤 것을 섬의 상태로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때 타동사 ‘세우다’가 자동사 ‘서다/서있다’로 된다. 그러므로 ‘Subsistere’란 ‘아래에서 위로 세우다’, ‘터를 잡고 확고하게 서다’, ‘터로부터 위를 향하여 서다’라는 뜻이 된다. 존재자란 터를 밟고 위를 향해 서는 것이다. 이제 존재자는 확고하게 터를 밟고 위를 향해 서 있는 것, 곧 ‘sub-stantia’이다. 실체는 존재자의 순수한 자기동일성을 말한다.
이러한 실체 중심적 사고는 근대 사상가 데카르트(Descartes)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에게 본질(ousia)은 substantia 혹은 res이다. 그에게 로고스의 역할은 사물을 확신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학문이다. 학문의 중심에는 생각하는 실체인 주체가 들어서며, 이로써 근대의 주체형이상학의 시대가 열린다. 이 사유의 특징은 생각하는 실체(res cogitans)인 주체와 생각된 대상(res extensa)인 객체 상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두 존재자 사이의 연결 정도로서 그 의미가 고려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자아는 타인의 정신과 몸으로부터 고립된 <보이지 않는 인간>의 전형이다. 이것의 특징은 탈육체화된 자아중심이며 시각/이론중심이다.
칸트(Kant)에게도 실체는 모든 실재, 모든 사물, 모든 현존재의 핵심이다. 그러나 칸트는 지식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설정하여 가능한 경험의 대상과 경험할 수 없는 물자체를 구분한다. 물자체는 생각될 수는 있지만 인식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물자체는 이념(관념)이다. 그러므로 물자체는 그 자체(Ding an sich)로서 존재하나 우리를 위한 존재가 아니다(nicht f?r uns). 칸트는 실체를 양분하여, 한편으로 우리와 관계하는 실체와, 다른 한편 그자체로 존재하는 실체를 나눈다. 우리와 관계하는 실체, 다시 말해 현상은 지각과 개념을 통해 인식된다. 그러나 개념과 규칙의 객관적 타당성을 물자체에서도, 단순한 현상이나 지각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사유의 선험성을 요청하게 되며, 이 사유의 선험성은 모든 가능한 경험의 필연적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칸트에게 학문이란 객관적 확실성, 보편적이며 필연적 인식, 개념과 규칙에 따라서 진행된다. 지식의 객관성과 확실성은 사물자체나 우연한 현상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 능력의 선험적 근거로부터 얻어진다. 따라서 형이상학의 대상이 사라지고 형이상학의 방법, 곧 객관적이며 확실한 지식의 근거를 찾는 형식적 방법만이 학문이 된다.
근대의 형이상학에서 근대의 다양한 실증학문이 탄생한다. 대표자들은 꽁트, 포퍼, 카르납 등이며, 이들에게서 과학적 작업의 형식과 객관적 탐구의 형식이 논의된다. 이제 철학 자체는 객관적 학문이 된다. 20세기 초에 분석 논리, 언어 분석, 구조주의, 분석철학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들에게서 주체는 철저히 사라진다. 비트겐슈타인은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감각과 실재의 일치 혹은 비일치 속에 진리 혹은 거짓이 들어있다. 구조주의는 “나는 생각한다(ich denke)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생각한다(es denkt)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유 유형 속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말할 수 있다면, 하느님은 객관적으로, 그 자체로서 존재하시는 분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적 사유가 당연한 것이고 그의 범주표에 나타난 순서 배열이 자명한 것인가? 순서를 거꾸로 하면 혼란이 오는가, 아니면 실재의 참 모습이 드러날 수도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왜 본질/실체가 맨 처음인가? 본질이란 그리스적인 의미에서 무엇인가? 과연 본질은 존재자의 존재성(die Seiendheit des Seienden)인가? 이러한 의혹은 관계적 사유를 전개시키는 선험적 현상학, 실존적 현상학, 해석학적 현상학, 해체론적 현상학에서 점진적으로 전개 발전된다. 이들은 현실성(실재)을 실체중심적 사고와는 다르게 근본적으로 서술한다.
관계론적 사고는 에드문트 후설(E. Husserl)에게서 출현한다. 그는 실체와 그것과 관계된 개념이 자명하지 않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철학에서 이루어진 모든 개념적인 형식과 모든 객관적인 것에 대한 판단중지(Epoche)를 내린다. 그는 관계, 즉 사유와 사유된 것의 관계, 지각과 지각된 것의 관계, 체험과 체험된 것 사이의 관계를 사유한다. 그는 이것을 순수 현상학의 이념에서 noesis(사유행위)와 noema(생각된 사태)의 관계로 표현한다. 이 근원적 관계 속에서 모든 이해의 형식과 범주와 세계 및 인간 이해가 재조정된다. 관계가 모든 이해 형식의 기초, 인간 세계 안에서 이해된 것의 형식의 기초다. 후설 이전에는 개념화된 실체로부터 관계를 이해했다면 후설 이후에는 역으로 관계로부터 실체를 이해한다. 태초에 관계의 사건이 있다.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은 마르틴 하이데거(M. Heidegger)의 기초존재론 속에서 인간을 현존재(Da-sein)로서의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로 이해하고, 후기에 존재를 사건으로 이해하면서 극점에 달한다. 한편 유대인 출신 프란츠 로젠츠바이크(F. Rosenzweig)는 실재의 기초를 언어로 보면서, 언어 사건은 처음부터 관계의 사건이며 언어적 사유는 관계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또한 마틴 부버(M. Buber)는 “나의 나는 너 안에서 발생한다.” 타자와의 만남의 사건에서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이 된다는 관계의 존재론을 전개한다. 레비나스(E. Levinas)는 존재론을 넘어 ‘존재와 다른 타자 혹은 본질을 넘은 타자’를 말한다. 알프레드 화이트헤드(A. Whitehead) 또한 근대철학에서 “개체적 실체들 사이의 관계들은 형이상학적으로 성가신 것들이었으며. 그것들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충분히 현실적인 것은 존속하는 개체들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존속하는 개체들이 아니라 순간적인 사건들이다: ‘현실적인 계기들’(actual occaisons), 경험의 계기들(occasions of experiences)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이러한 관계의 사유는 질 들뢰즈의 사건의 사유에서 더욱 역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2. 질 들뢰즈의 사건의 철학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18~1995.11.4)는 가타리, 푸코, 데리다, 리오타르, 레비나스 등과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그러나 후기구조주의 사조에 속한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사상가이다. 20세기의 중요한 형이상학자로서, 하이데거가 독일어권을 대표하고 화이트헤드가 영어권을 대표한다면 들뢰즈는 프랑스어권을 대표하는 인물일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화두가 ‘존재’이고 화이트헤드는 ‘과정’이라면 들뢰즈의 화두는 ‘사건’이다. 들뢰즈는 사건의 철학자이고 사건을 철학적 사고의 대상으로 삼은 사상가이다. 그는 “내가 삶 전체에 걸쳐 끝없이 사유한 것은 다름 아닌 사건이었다.” 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왜 사건에 대한 철학적 사고가 중요한가? 들뢰즈는 니체와 하이데거를 잇는 전형적인 반플라톤적 사상가이다. 들뢰즈는 플라톤 이원론의 참 의미를 질료와 형상의 이원론이 아니라 보다 “심층적이고 보다 비밀스러운 이분법,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사물들 자체 내에 깃들여 있는 이분법”이라고 말하면서, 이 이분법은 “형상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과 비켜가는 것 사이의 이분법”이요,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이 아니라 복사본들과 시뮬라크르들의 구분”이라고 새롭게 해석한다. 플라톤과 비교하여 들뢰즈의 사건의 철학이 갖는 의의를 다음의 예를 통하여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형상중심의 사상가인 플라톤이 야구장에 갔다고 한다면 그는 거기서 무엇을 볼까? 야구장에는 공, 야구 글러브, 방망이, 야구 선수와 관중 그리고 심판이 있다. 그리고 플라톤은 여기서 그것들 각각의 형상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운동장에는 공이나 방망이나 선수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있다. 글러브에 공이 들어가는 것, 타자가 공을 쳐서 공이 날아가는 것, 선수들이 뛰는 것 등등의 운동이 있다. 그런데 플라톤에게 이 운동은 형상의 그림자, 아니 그림자조차도 되지 못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 곧 판타스마이다. 즉 플라톤에게 운동은 이차적인 존재도 되지 못하는 허깨비, 환각, 곧 시뮬라크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왜 운동장에 가는가? 공이나 방망이나 사람을 보러 가는가? 공이나 방망이를 보러가는 것이 아니라 방망이가 공을 치는 것, 선수들이 뛰는 것을 보러 간다. 요컨대, 운동장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보러가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에서 출발하는 서양의 주류 철학은 사건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사물이나 실체, 성질 같은 것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사건은 그것이 발생하는 순간에만 존재하고, 곧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전통 철학에서 사건이란 아주 덧없는 것, 가치 없는 것, 따라서 무의미한 것이었다. 서양 철학의 주류는 기본적으로 무상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적인 것을 찾았다. 바로 그런 이유로 서양 철학자들이 줄기차게 물어왔던 유일한 대상은 곧 변하지 않는 존재자의 실체에 대한 물음이다. 그러나 존재는 변화와 생성이며, 생명은 변화하는 사건의 지속과 우연한 창발로 구성된다.
들뢰즈의 ‘사건의 존내론’은 세계를 명사와 형용사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사 중심으로 본다. 세계는 물체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물체들의 효과들, 곧 사건의 의미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물체는 원인이다. 그러나 무엇의 원인인가? 그들은 자신들과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진 것[=효과들]의 원인이다. 이 효과들은 물체들이 아니다. 적절하게 말한다면 ‘비물체적인 것들’이다. 이들은 물리적 성질들이 아니라 논리학적인 또는 변증법적인[언어를 통해서만 실존하는] 빈위들(attributes)이다. 이들은 사물들이나 사태들이 아니라 사건들이다. 우리는 이들이 실존한다고(existent)는 말할 수 없으며, 차라리 존속한다/내속한다고(subsistent ou insistent) 말해야 한다. 이들은 사물이라기보다는 실존하지 않는 어떤 것이며, 따라서 존재함의 최소치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들에 관련된다.” 명사와 형용사 중심으로 본 세계는 해와 달과 별들, 나무와 꽃 그리고 사물들의 색깔이나 속성, 사람들의 얼굴 모습 등일 것이다. 명사적 세계보기가 사물의 실체를 규명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형용사적 세계보기는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실상 지구가 도는 것이요, 꽃이 피어나고 지는 것이요, 나무가 자라는 것이며, 사람들이 서로 만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세계를 명사나 형용사 중심이 아니라 동사 중심으로 보는 것이며, 동사 중심으로 세계를 생각할 때 세계는 사건들의 총체가 된다. 세계는 ‘thing’의 연결고리가 아니라 ‘thing’과는 다른 비물체적인 ‘event’이다. 들뢰즈의 실재는 미학적 실재이다. 이 실재는 존재론적 대상을 지시하거나 주체인 나를 드러내거나 개념을 표기하지 않는다. 다시 들뢰즈를 인용하면, “칼이 살을 벨 때 칼이 만들어 내는 것은 새로운 성질이 아니라 새로운 부대물이다. 즉, 베어진다는 부대물이다. 부대물은 어떤 실질적 성질[물체적인 것들 중 하나]도 아니다. .... 반대로 그것은 언제나 동사에 의해 표현된다. 즉, 그것은 존재[물체 또는 사태/성질]가 아니라 존재 방식[사건/부대물]이다. ... 이 존재 방식은 말하자면 존재의 극한, 표면에서 등장하며, 그 존재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 우리가 ‘커지다’, ‘작아지다’, ‘붉어지다’, ‘푸르러지다’, ‘나뉘다’, ‘자르다’ 등등으로 의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들은 사물들의 상태가 아니며 심층에서의 혼합물도 아니다. 이들은 혼합물들로부터 유래하는 [물체의] 표면에서의 비물체적인 사건들이다.” 들뢰즈의 실재는 표현의 차원, 곧 의미의 단계를 규정하는 순수사건이다. 그러므로 의미의 실재, 순수사건, 표현 등은 사실을 지시하거나(존재론적 언어), 주체를 지시하거나(주체의 언어), 진리 조건을(개념의 언어) 지시하지 않는다.
들뢰즈?가타리는 ??천개의 고원??, ‘제8장: 1874년.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서 사건의 철학을 소설에 응용하고 있다. 두 저자는 단편소설과 콩트에 대한 정의를 통해 사건의 사유를 전개하는바, 단편소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묻고 서술하며, 단편소설과 반대로 콩트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묻는다[천:367]. 여기서 일어남(일어났음과 일어날 것임)이 ‘사물(v�’이나 ‘사실(v�’과도 다르고 ‘사고(v2)’와도 다른 ‘사건(v件)’이다. 사고란 사물의 상태가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유효화(effectuation)한 것이며, 사실(fait)에 관한 범주이다. 반면 사건이란 어떤 사물의 상태나 사실을 다른 상태나 사실에 연관짓는, 그런 한에서 ‘관념적’ 성격이 개입된 범주이다. 사고와 사건이 다른 것은 사건에는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사건은 계열화를 통해 의미가 부여된다. 계열화란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과 특정한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건은 사건화하는 선, 상이한 사물들을 연결하고 상이한 신체들을 연결하는 계열화의 선을 통해 정의된다. 사건은 사건화를 통해 정의된다고 말할 수 있는바, 계열화란 바로 사건화의 선이 그어지는 양상, 둘 이상의 사실 내지 사물이 접속함으로써 사물들 사이에 특정한 의미, 곧 “표면효과”(물질의 의미)를 야기하는 이웃관계를 형성한다.
사건을 중심한 들뢰즈의 사고는 신학도들에게 결정적으로 새로운 통찰을 준다. 왜 우리는 성서를 읽는가? 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나갔던가?(눅7:24) 왜 우리는 교회에 가는가? 우리는 성서에서 사물에 대한 고정된 지식을 얻으려고 성서를 읽는 것이 아니다. 성서 안에는 한 새로운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역사, 하느님의 말씀의 사건이 있고, 그것을 만나러 성서를 읽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나간 이유는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나간 것도 아니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나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를 보러 나간 것도 아니요, 예언자, 아니 예언자보다 더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보러 나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나가는 이유도 교회의 웅장한 건물이나 사람들을 보러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체험하러 가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고 핵심적인 낱말이 ‘사건’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II. 사건의 신학

1. 신학에 대한 새로운 정의
20세기 몇몇 중요한 신학자들은 신학의 과제를 기독교 신앙의 해석으로 본다. 여기에는 기독교 신앙을 현재화하려는 신학적 의도가 깊게 깔려있다. 폴 틸리히는 신학을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대한 방법론적 설명과 해석으로 정의한다. 기독교 신학은 교회를 통해 물려받은 신앙의 내용을 단지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하여 설명하고 해석해야 한다. 틸리히는 오늘에 타당한 설명과 해석을 위해 ‘상관관계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 다른 신학자인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신학의 과제를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수행된 해명으로 정의한다. 그도 신학의 대상을 기독교 신앙으로 보고 있다. 그가 신앙을 체계적으로 해명하기 위하여 해석학을 사용하고 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다원주의 시대에 신학의 언어를 교회적 언어로 남겨놓지 않고 공적 담론의 장으로 끌어내어 학문적으로 정립하려는 데이비드 트레이시의 경우는 좀더 복잡하다. 그에게 신학은 기독교 전통에 대한 해석과 당대의 상황에 대한 해석 사이에 “상호 비판적인 상관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시도이다. 신학의 대상은 기독교 신앙이며 이것을 방법론적으로 해석하는 과제가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신학의 대상은 기독교 전통과 당대의 상황이다. 기독교 전통과 당대의 인간상황을 비평적으로 해석하는 사이에 인간의 공동 경험의 구조가 밝혀지고 원칙적인 가치들, 인식론적 주장들, 실존론적 믿음 등, 둘 사이에 가능한 근본적 화해 관계가 수립된다.
그러나 틸리히나 에벨링처럼 신학의 대상을 기독교 신앙으로 삼든 아니면 트레이시처럼 공동 경험의 구조로 삼든, 기독교 신앙은 객관적 신앙의 내용(fides quae)이나 주관적 신앙의 행위(fides qua), 혹은 양자의 종합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구원사건에서 발생하며 거기에 기초해야 한다.
칼 라너와 함께 20세기 가톨릭 신학 사상에 크게 기여한 베른하르트 벨테의 신학 이해에서 강조점이 옮겨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벨테는 신학을 삼중적으로 이해한다. 신학은 우선 예수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구원소식에 관한 학문이며, 둘째 신앙의 학문이며, 셋째 하느님의 계시와 인간의 신앙이 함께 발견되는 장소인 교회에 관한 학문이다. 신앙의 내용이 한낱 객관적인 성서나 교회의 정식화된 교리가 아니라 예수 안에 표현된 하느님의 구원소식, 구원사건이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하느님, 더 정확히 말해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행위임을 성서의 메시지는 일관되게 증언한다. 해방신학자 끄로아또(J.S. Croatto)는 이 점을 더욱 첨예하게 적시하는 바, 하느님의 구원사건이 신학의 출발점이고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학의 대상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지속적이고도 새로운 하느님의 구원사건을 표현한 신앙이론으로 형성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구원사건을 신학의 핵심 주제로 삼은 신학은 민중신학이다. 서진한은 안병무가 예수사건을 민중사건으로 보는 입장에 착안하여 민중신학을 “민중의 고난과 저항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구원(해방) 사건을 체험하고 그것을 증언하며, 동시에 거기에 투신할 것을 요구했던 신학”으로 서술한다. 민중신학에서 성서의 의미론적 축은 하느님의 자유와 해방의 사건이며, 자유와 해방을 향한 민중의 고난과 저항의 현장에서 하느님의 구원사건이 상응하고 표현된다.
기독교 신학이 하느님의 구원사건을 사유하고자 할 때 전통적 형이상학적 범주인 “실체”(Substance)와 “존재”(Being)의 범주는 타당하지 않다. 현대 인문학은 관계론, 혹은 관계의 존재론을 기본 실재관으로 삼고 있다. 현대 과학에서조차 절대적 객관성과 확실성, 결정론과 실체의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실체가 아니라 관계성, 관계와 과정이 강조되고 있다. 하느님의 구원사건은 실체의 범주가 아니라 관계의 범주, 존재의 범주가 아니라 생의 범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존재의 의미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초월적 실체가 아니라, 자신을 열어 소통하는 사랑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출신 정교회 신학자 지지울라스가 강조하여 말하는바와 같이 “하느님의 존재는 인격적 관계성과 인격적 사랑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 존재는 생(삶)을 의미하고 삶은 교제를 의미한다”.
성서적 하느님은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사랑, 곧 사랑의 사건이다. 사랑은 이론적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이다. 하느님의 현실성은 하느님이 인간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셔서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관계’는 형식적으로 서로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은 두 실체 사이에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일차적으로 관계 안에 있다. 최초로 주어진 것은 하느님 혹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인간, 인간과의 관계 안에 있는 하느님, 즉 하나의 사건, 구원사건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흔히 생각하듯 인간의 심리 현상으로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고 실존하는 인간과 자기 자신 밖에 있는 것 사이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인간과 관계된 모든 현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하느님의 자기관계성을 말하는 신학과 하느님의 타자 관계성을 말하는 구원론은 분리될 수 없는 서로 화목한 한 쌍이다. 그러므로 모든 주제를 성찰하는 신학의 방향은 처음부터 형이상학적이 아니라 구원론적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서양철학, 특히 형이상학적 존재론은 “존재자란 무엇인가?”(아리스토텔레스), “왜 존재이며 오히려 무가 아닌가?”(라이프니츠) 등의 물음으로 시작된다. 형이상학적 존재물음으로 주도되는 모든 사유는 관계가 절단된 본성과 본질을 구하게 되며, 선을 긋고 자투리를 자르며 연결 고리를 끊어 틀, 테두리, 체계의 지배를 고안하기 때문에 결국 그것들에게 갇히고 종속된다. 그러나 성서를 읽을 때 독자를 사로잡는 물음은 성서의 도입물음은 형이상학적 존재물음이 아니라 생의 현실[실재]에 대한 의미물음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가인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9),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창16:8),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8:29) 등의 구원론적 의미물음이다. 성서는 하느님의 행동,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관심을 두고 있지, 그리스 철학에서처럼 하느님의 존재와 본질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성서는 하느님을 그의 역사( [v)로서, 그의 능력으로서, 그의 위대한 구원 행위로서 이해한다. 창조에 관한 성서의 진술이 제1원인에 대한 가르침을 유발시켰던 것은 중세 철학의 영향아래에서였다. 성서의 하느님은 최고존재(summum ens)인 그런 존재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찰의 질문 방식은 “존재자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생활 세계적으로 무엇이 발생하는가?”, “무엇이 일어나는가?”이다. 생의 현실성은 객관적 세계도 아니며 신성의 거울로 여기는 세계도 아닌 “사건”이다. 사건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교제의 사건이다. 사건은 창조적 계기이다.
신학의 모든 주제는 기독론적-구원론적 관련성 속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져야 하며 일반적으로 논리적-존재론적으로 취급될 때 신학은 항상 사변적 곤경에 떨어진다. “이론의 나무는 회색이고 생의 나무는 초록이다”[괴테]. 신학으로 가는 길은 일반적 형이상학적 존재론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구체적 구원, 자유, 해방, 새로운 �삶)의 현실성, 곧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의 사건으로 가는 길이다.

2. 성서와 계시사건
앞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단편소설의 의미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를 묻고 서술하는 것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를 적용하여 말한다면 성서는 하느님의 구원/해방 사건을 기록하고 표현한 단편소설의 모음집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 J. 헤셸에 의하면, 예언자 의식의 근본과 중심은 자기가 하느님에게서 영감을 받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며 하느님에 의하여 백성에게 보내심을 받았다는 확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경험을 확신의 근거로 보는데 예언자만은 유독 그의 경험의 근거를 확신의 근거로 삼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는 것이다.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타당성과 특이성은 그의 경험의 순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원, 곧 영감을 받았다는 의식에 있다. 그런데 헤셸에 의하면, 이 영감은 하나의 경험 이상으로서, 예언의 본질적인 형식은 객관적인 사건이다. 계시는 이 객관적인 사건으로서 우리 자신의 경험이라는 범주를 넘어선다. 예언은 과정이 아니라 사건인데, 과정이 비교적 영속하는 틀을 좇아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데 반해 사건은 정한 때 없이 돌발한다. 과정은 계속되고 안정되어 있으며 획일적일 수 있지만 사건은 우연히 간간히 터진다. 과정은 전형이 있지만 사건은 특이하다. 과정은 법을 따르고 사건은 전례를 남긴다. 이것이 사건의 우연성이며 특이성이고 창조성이다. 따라서 “계속되는 계시”라는 말은 “네모난 원”과 동일한 말이다. 영감은 모든 시대에 계속되는 과정이 아니라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바예히(vayehi), 즉 “그것이 발생했다”는 말은 예언자의 영감을 서술하는 데 사용되는 말이다.
따라서 예언자들에게 하느님은 사람이 간절히 열망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찾아뵐 수 있는 분이거나 단번에 모두에게 쓸모 있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의 임재의 형식에는 부재도 포함된다.

앞으로 가 보아도 계시지 않고
뒤를 돌아보아도 보이지 않는구나.
왼쪽으로 가서 찾아도 눈에 뜨이지 아니하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려도 보이지 않는구나.
―욥23:8~9; 호5:6, 미3:4, 사8:17 참조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항상 발생하지 않는 하나의 놀라움이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녘에서 동녘으로 돌아다니며
야훼의 말씀을 찾아도 들을 수 없는 세상이다
―암8:11~12.

헤셸에 따르면, 예언자의 경험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거나 항상 들려오는 음성을 듣는 것도 아니며, 마음에 영속적으로 주어진 것이거나 우연히 부딪치는 발견도 아니다. 그렇다고 주어진 어떤 것, 영원한 관념, 미쉬팟, 정의, 법 따위도 아니며 역동하는 어떤 것, 부여하는 행위이다. 영원한 말씀이 아니라 발언된 말, 말씀 속에서 흘러넘치는 정념(Pathos)이다. 그의 경험은 지속되는 상황을 인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발생하는 행위를 인식하는 것, 곧 하느님의 사건의 인식, 사건의 사고이다.
헤셸에 따르면, 예언행위는 철저한 자아의 떠남, 자아의 해체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예언자는 사람이 말씀을 받기 위하여 ‘자아’를 떠나야 한다는 식으로, 의식의 포기가 영감을 가져다준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예언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오는 것, 무아경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것이요, 영감은 인간과 영감을 주는 자, 곧 초월자에게도 일어난다. 무아경은 심리적 과정이요 예언은 초월자의 행위 속에 그 기원을 둔다. 예언자의 경험은 신성한 사건, 즉 야훼의 원탁회의에 참석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봄’은 경험의 한 부분이며 결정적인 것은 예언자의 참여이다. 또한 예언자가 말하는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엄청나게 놀라운 사건이다. 그 사건이 예언자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은 가장 사소한 것이며, 그가 말하는 것은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사건이다.(욜4:16)
성서해석학에서 본문(Text)와 정황(Context), 곧 독자의 읽는 객관적 자료로서의 본문과 독자가 사는 주체적 삶의 자리로서의 정황이라는 주객의 관계를 넘어, 주객 이전의 근원적이며, 이런 의미에서 객관적인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성서해석학에 포함시켜 생각한 이는 구성신학자 피터 하지슨이다. 그는 텍스트와 컨텍스트 뿐만 아니라 선텍스트(pre-text)를 말한다. 여기서 그는 선텍스트를 ‘근원적 경험’이라는 말로 표현하나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건’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에를 들어 설명하길, 출애굽의 신학적 의미는 그것의 원초적인 역사적 지시대상에 있거나 혹은 출애굽기 3~14장의 문학적 구조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컨텍스트 속에서 무엇인가를 불러일으키는 신적인 계시의 경험, 곧 하느님의 구원사건 속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선텍스트의 존재론적 위상은 직접적으로 경험될 수 없는 것으로서 텍스트를 통해 언어로 표현됨으로써 존재한다.
일찍이 본회퍼는 인간 주체가 절대화되는 위험을 루터 이후 목격하면서 하느님이든 다른 인간 존재이든 타자를 타자로서 인식할 수 있는 공정한 인식론을 마련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루터는 죄인인 인간을 ‘자기 자신만을 향한 마음(cor curvum in se)’으로 표현했는데, 이는 하느님의 계시나 이웃과의 만남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자기중심적 인간을 말한다. 본회퍼는 ??행위와 존재??에서 하느님이든 타자이든 지식의 대상을 거머쥐고 마음대로 부려먹는 지자(
��인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는 신적이고 인간적인 대안적 공동체에 대한 비전을 재구성할 수 있는 신학적 인식론 혹은 지식의 철학을 제시한다. 본회퍼는 참된 선험철학과 참된 존재론 사이, 곧 사유의 활동력과 사유하는 주체와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초월적인 어떤 것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이 연구서의 핵심 주제는 “행위인 신앙과 존재인 계시가 어떻게 서로 관계하는가?”(28)에 답하는 것이다. 행위는 선험철학적 주제이며 계시는 존재론적 주제이다. 그러나 계시는 행위와 존재에 알맞게 해석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존재와 하느님의 존재를 파악하는 인간의 정신적 행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달리 말해, 계시 안에 있는 하느님의 존재는 신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어떻게 인간 존재가 하느님의 계시의 빛 아래에 설 수 있는가? 본회퍼는 하느님의 계시가 우선적으로 행위의 개념으로 해석되어져야 하며, 계시가 성서나 교리로 언어화 될 경우 계시에 존재론적 성격이 부여된다. 교회는 계시의 행위적 성격과 존재의 성격이 통일되는 장소이다. 계시에서의 행위 우선적인 해석은 오늘날 사건의 신학으로 연결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하느님은 계시하신다’ 라는 말은 ‘하느님은 계시 속에, 곧 계시사건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존재는 정태적인 하느님의 본질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존재는 ‘행위 속의 존재’(being-in-act)로 이해된다. 하느님의 계시사건은 인간이 경험하고 인식하지 못할 때에도 존재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계시사건은 객관적이다. 그러나 계시사건이란 그 자체 동일적인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운동과 생성과 변화와 자유와 해방을 야기하는 사건으로서 이 세계 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존재는 사건이다. 하느님의 존재는 계시사건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에 사건이야말로 본질의 차원이고, 이 사건이 우주와 자연과 역사와 인간 안에서 현실화되는 것이 우리가 사는 믿음의 세계이다.

3. 사랑의 사건인 하느님
철학자들의 하느님, 곧 형이상학의 하느님은 그리스의 아낭케(ananke)와 비슷하다. 그는 인간에게 알려지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다.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그러나 세상은 잊어버린다.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하느님에 대한 관념은 하느님이 이 세계의 메커니즘을 처음으로 시동 건 ‘제1원인(causa prima)’. ‘자체원인(causa sui)’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최고 존재(the Supreme Being)로서 가장 완벽한 존재(ens realissimum)이다. 플라톤은 가치-존재론(axio-ontology)의 입장에서 선이라는 이데아가 하느님이 된다. 플라톤의 선은 “그것을 지닌 존재가 언제나 그리고 모든 점에서 가장 완벽하게 충족하며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플라톤에게 선은 가장 많이 존재하는 존재, 가장 완벽한 존재, 곧 신이다. 그러므로 이 존재(신)는 영원불멸하는 존재요 최상의 행복을 누리는 존재로서 근심걱정의 부재, 곧 태연자약한 상태(ataraxia)에서 세상과 거리를 멀리 두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가장 완벽한 존재는 피동/수동일 수 없고 항상 능동/행동의 존재이다. 제1원인으로서의 신은 자기 자신에 의하여 움직여진 어떤 것에 의하여 영향을 받거나 혹은 당하지 않는 존재이다. 신의 존엄성에 비추어 신의 피동성은 있을 수없는 바, 신의 정념은 부인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은 행동의 원리이며 물질로서의 물질은 피동의 원리(pathetikon)이다. 당하는 것(to suffer), 즉 움직여지는 것이 물질의 특성이지 신의 특성은 아니다. 스토아파 역시 신격에서 행동의 원리를 보고 물질에서 피동의 원리를 보았다. 필로는 성서가 하느님과 다른 모든 존재와의 동일성을 부인하는 것은 하느님의 형체 없음뿐만 아니라 전혀 아무런 감정도 없음을 암시한다고 했다. 이러한 하느님관은 서양철학사와 신학사를 통해 줄곧 감정에 대한 경멸로 이어지면서 냉정을 강조하는 신관, 윤리관을 낳는다.
반면 헤셸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며 인간에게 알려지고 인간에게 관심이 있는 하느님이다. 예언자의 하느님은 정념(pathos)의 하느님이다. 그의 신학은 정념의 신학이다. 정념은 선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돌봄, 곧 자비와 사랑을 의미한다. 정념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인 passio와 함께 pati 즉 당하다(새 suffer)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어떤 일이 인간에게 일어나는 상태 혹은 상황을 뜻한다.
서양철학의 존재론은 이미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완벽한 형태로 자리잡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존재와 비존재의 양자택일성을 날카롭게 강조하면서, 존재는 비존재가 존재할 수 없음으로써 존재하며, 그것은 인식될 수도 없고 말로 표현될 수도 없다고 가르쳤다. 존재(on)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으며 완전하고 움직이지도 않고 무궁하다. 그것은 있은 적도 없고 있을 것도 아니며, 지금 있다. 단 한번에, 계속되는 있음으로.”(Diels의 단편, 8번)
플라톤의 이데아도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처럼 변함이 없고 영원하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참 존재는 변하거나 움직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신은 어떤 가능성도 혼합되어 있지 않은 순수행위(actus purus)이다. 어떤 식으로든 변한다는 것은 가능성 안에 갇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의 변할 수 없음은 자명하고, 따라서 열정이란 변하는 것이므로 신의 참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 토마스에게 행위는 존재를 뒤 따른다(Agere sequitur esse).
실로 존재로서의 존재를 다루는 서양의 존재론은 존재야말로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신론에게는 하나의 난제이다. 성서의 물음은 존재물음이 아니라 존재의 신비에 대한 물음, 존재의 의미물음이다. 존재론이 존재로서의 존재를 묻는다면 성서, 곧 기독교 신학은 창조로서의 존재, 즉 신성한 행위로서의 존재를 묻는다. 철학에서는 존재가 궁극자며, 그것을 최고 존재로 표현했으나 기독교 신학에서는 하느님이 궁극자이며, 이분은 최고의 모험자이며 최고의 창조자이다. 따라서 이 하느님은 존재를 행위에서 떨어뜨려놓고 보지 않는다. 성서에서 있음은 곧 모험과 창조로서의 행함이다. 하느님은 범주표에 나오는 최고 존재로서의 실재가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범주표에 내속(insist)하며 활동하는 분이다.
전통적 존재론과 성서적 실재관을 결합하려고 시도했던 틸리히는 하느님을 존재론을 사용하여 가장 탁월하고 심도 있게 전개한 인물이다. 그에게 하느님은 존재자체이다. 그러나 그는 ‘존재의 힘(power of being)’이란 표현을 더 좋아한다. 여기서 그는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전통을 따르기보다는 스피노자(Spinoza: 1632~77)와 니체(Nietzsche: 1844~1900)를 따르고 있다. 존재의 힘, 존재의 용기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이다. 또한 틸리히에게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인간이 존재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자연적인 자기 긍정의 상징이다. 그것은 생의 역동적인 자기긍정을 지칭한다. 여기에 성서적 하느님 경험을 드러내기 위하여 틸리히가 전통적 존재론을 수정하는 시도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헤셸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행동하시는 하느님, 강한 행위의 하느님임을 주장한다. “성서는 그분이 어떻게 존재하시느냐를 말하지 않고 어떻게 행동하시느냐를 말한다. 성서는 그분의 정념의 행위를, 역사 속에서 행위하시는 행위를 말하고 있다. 하느님은 ‘참 존재’로서가 아니라 ‘항상 행동하는 분(semper agens)’으로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기본 범주가 부동성이 아니라 행동이다. 역사 사건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절대 초월이 아니라 운동, 자연 창조, 역사 안에서 행위함이 최고 존재의 속성이다”.
하느님이라는 말의 어원학을 고찰한 결과 인도-유럽어족의 “~부르다” 혹은 “~간청하다”를 의미하는 ‘hau-’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느님”은 고난과 번민, 해방과 희열의 외침인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을 정의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사건 속에서 명명한다. 폰 라트에 따르면, 야훼에 관한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들은 신의 이름을 역사 행위에 관한 진술과 결부시켰다. 폴 리꾀르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히브리 성서는 하느님을 그 이름과 그 이름이 명명되는 사건을 통해 확인한다. 구약에서 하느님이 자기소개를 하는 핵심적 성서 본문을 보면 하느님의 이름과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동시에 서술된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출3:14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출20:2
하느님은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이다
―롬4:24

구약 해방의 서사에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하느님은 신약에서는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이다. 하느님이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 하느님은 여기서도 일상적인 역사의 수레바퀴를 초월하는 근본적 사건을 통하여 명명된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모두, 하느님이 말씀 속에 나타나고 개념으로 꼴지워지기 전에 역사의 사건, 서사적 사건, 설명된 이야기 속에서 명명된 다는 사실은 신학 언어의 향방을 말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구원사건을 기록한 말은 대개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와 신화는 한 연대기나 과학적,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의 초월성을 열어주며 더 깊은 비전을 통하여 공동체적 상상력을 키운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하느님을 존재론적 본질 규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시간적,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불러냄으로써 보편적 선교의 책임을 이행하고 있다.
헤셸은 신학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신학이 가변적인 철학이나 과학에서 범주를 빌려오는 대신, 심층 신학의 통찰에서 얻는 신학 고유의 범주들을 가지고 학문에 힘쓰는 일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하다. 철학이 궁극적으로 여기는 것을 신학에서도 궁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 신학의 궁극적 주제는 객관화할 수 없는 것, 그가 개념화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도 신학을 수행함에서 형이상학에 기대지 말고 형이상학으로부터 탈피할 것을 신학자들에게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라 다음과 같이 주문한 바 있다: “하느님은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만드신 것이 아닌가?”(고전1:20) “기독교 신학은 어느 날 사도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철학의 개념 또한 미련한 것으로 여기려고 작정할 것인가?”. 우리는 하느님을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형이상학]를 초과(excess)하는 신비로서, 하느님을 지향하는 인간의 개념이나 이미지를 초과하는 사랑의 선물(gift)로서 생각해야 한다. 하지슨에 따르면, 하느님은 하느님과 하느님이-아닌-것 사이의 동일성, 하느님과 세계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인 것이다. 하느님은 그 존재가 생성 속에 있는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이-아닌-것은 그 무화시키는 무로부터 구원받을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하느님은 어떤 계시의 대상이 아니라 계시의 주체, 곧 계시의 사건(event)이며, 그 사건의 의미는 사랑이다.
하느님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존재와 존재론을 완전히 해체하고 ‘사랑’으로만 말하려고 하는 사상가는 프랑스 출신의 장-룩 마리옹(Jean-Luc Marion: 1946~ )이다. 마리옹에게 하느님의 최고의 이름은 형이상학적 술어인 ‘존재’나 ‘본질’의 개념이 아니라 신학적인 찬양 말인 ‘사랑’과 ‘선’이다. 유한한 피조물은 일차적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존재에 앞서(before Being)’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하여만 하느님의 선은 존재 자체의 존재를 포함한 만물에게 자신을 준다. 마리옹에게 기독교 신앙의 하느님은 자신을 관대하고 무제약적으로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으로서, 이 하느님은 합리적으로 증명되거나 개념적으로 파악될 수 없고 관상과 기도의 행위 속에서, 예전적 삶 속에서 받아들여지는 분이다. 따라서 그는 하느님에 대한 온갖 개념적 표현들[데카르트의 자체원인,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 헤겔의 절대적 주체성, 니체의 권력에로의 의지, 하이데거의 현존재]을 우상이라고 비판한다. 하느님이 정의상 정의할 수 없고 본질상 본질을 넘어선다면 개념적 작업을 통한 하느님에 대한 긍정과 부정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리옹은 신비주의 신학자 디오니시우스(Dionysius)를 따라 하느님의 이름짓기를 거부한다(de-nomination). 하느님은 술어적 언어(logos), 곧 명사로써 말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오직 동사를 통하여 찬양할(humnein) 수 있는 분이다. 찬양적 언어는 긍정과 부정, 명명(naming)과 비명(un-naming)을 넘어선 탈명(de-naming)이라는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술어적 명사나 형용사에서 찬양언어로의 변화는 이론적 언어에서 화행(_�적 언어에로, 형이상학적 언어에서 예전적 언어에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하느님은 기호작용의 과정의 과정, 곧 말하는 과정(saying) 속에서만 존재를 넘어선 하느님이지 말되어진 것(the said)이 될 때 하느님은 존재론의 틀 속에 곧 갇힌다는 것이다.
일찍이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의 하느님인 ‘자체존재(causa sui)’ 앞에서 인간은 “기도할 수도 없고 희생제물을 드릴 수도 없으며, 무릎을 꿇고 경배하거나 음악을 연주할 수도 없고 춤을 출 수도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존재-신론적 하느님은 철학의 본성, 곧 형이상학의 본성과 조화되는 곳에서 신성의 존재를 요구하고 그 철학 안에 이미 신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노래할 수 있고 그 앞에서 춤을 출 수 있는 하느님은 철학자, 곧 지식인의 허가를 받고 등장하거나 행위 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행위는 이렇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개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낼 것이다”(출3:7~8). 만물의 본질과 근거를 찾아 세계의 체계를 세우려는 형이상학(ta meta ta physica)이나 그 자신의 고유한 계획에 따라 펼쳐지는 논리학의 원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서도,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을 바다에 던지신 하느님을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찬송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 이른바 자연기적이 아니다(출15:20~21).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체험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계산 밖에서 창발적(emergent)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구원사건, 곧 사랑의 사건에서 비롯된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본질의 동일성에서 사건의 동일성으로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사역 및 죽음이 주는 의미를 해석한다. 초기 교회는 그 의미를 묵시문학적 존재이해의 지평에서 찾았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교부들의 신학이 지배적이 되면서 안디옥 학파의 신학 등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 주변화 되거나 사라지고, 이전 것과 전혀 다른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존재이해의 지평에서 표현된 그리스도론이 등장한다. 니케아공회의(325년)에서 칼케돈공회의(451년)에 이르는 그리스도론 논쟁사는 이를 잘 반영한다. 이 때 형성된 그리스도론은 그 후의 신앙과 신학을 지배적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매우 크다. 그 중요한 의미를 어떻게 현재화할 수 있을까?
니케아와 칼케돈공회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서와는 달리 그리스 철학의 개념으로써 설명한다. 니케아신조는 예수를 “성부와 동일본질(?μοο?σιο? τω πατρ?)”로써 설명하며, 칼케돈신조는 예수를 “신성에 있어서 똑같이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 똑같이 완전하시며, 참으로 하느님이시며 참으로 사람이시니,... 신성에 있어서 성부와 공동 실체적이고 인성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이 공동 실체적이시다(ομοουσιο? ημιν)”라고 고백한다. 이 신조를 구성한 사유와 언어는 신약성서의 사유와 언어, 그리고 오늘 우리의 사유와 언어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형이상학적 사유방식과 개념이 니케아와 칼케돈 신조의 “동일본질”의 정식에서 가장 확연하게 드러났음을 유념해야 한다.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은 대상을 지향하고 있고 존재자의 속성이 지니는 항존성을 묻는 사유방식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은 예수에게서 항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본성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형이상학적 사유는 예수의 항존적 본질(Wasein)과 존재의 성질(Seiendheit)을 묻는다. 그것은 구체적 인간 예수에게서 추상화된 인성과 신성으로 답변된다. 이렇게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은 구체적이고 생기(��하는 생의 세계의 사건을 간과하여, 결국 그것을 은폐하고 왜곡하며 오도한다. 고대 그리스도론은 생의 세계에서 일어난 예수의 살아있는 역사와 예수의 생의 사건에서 유리된 추상적인 ‘본질’(Usia) 개념을 동원하여 대답함으로써 인격적이며 생기하는 예수의 생의 사건은 관심의 영역으로부터 밖으로 밀려난다. 예수의 생의 사건은 신성의 영원성에 의하여 제거되고 삼켜진다. 성서적 전통인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자발적 활동성이 인간과 하느님의 본성으로써 개념화됨으로써 그들 사이에 그 어떤 자발적 교류와 협력도 불허하는 전혀 다른 존재로 만드는 그리스 형이상학의 무게에 짓눌린다. 성서의 그리스도적 사유의 사건성이 새로운 차원, 곧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변형되고 사건은 본질의 개념으로 대치된다. 예수 안의 신성과 인성은 신적 위격(prosopon/hypostasis) 안에 연합되어 “혼돈도 없고 변화도 없고, 분할도 없고 분리도 없을 뿐이지”(칼케돈) 서로 사귀거나 교제한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성서의 존재이해는 니케아-칼케돈 교부들의 존재이해와 시대 구분적으로 확연히 다르다. 물론 성서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어 니케아 시기의 존재이해에 잇닿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전체로 보면, 성서는 니케아 이후의 존재이해와는 전혀 다른 이해 원칙을 따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다름은 다른 서술을 통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존재 이해가 다른 것이다. 공관복음의 예수는 하느님나라를 설명하는 데 개념으로 고정시키거나 그 본질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이야기)과 행위를 통해 그때그때 마다 사건화 한다. 성서의 언어는 개념적이라기보다 주로 사건적이다. 예수의 “권위/능력”(εξουσια)(막1:22)은 그가 형이상학적인 “본질적 사유에서 탈(�”(εξ-ουσια)하여 역동적 관계를 맺을 때 드러났다. 예수의 사신은 하느님 나라의 가까움의 사건으로서, 이 사건은 일련의 구체적 가르침과 사건들로써 전해진다. 그러므로 성서에는 존재의 진술이 아니라 사건이 설명되고 선포된다. 예수에게 부여된 그리스도론적 존칭도 예수의 본질을 해명하기 위한 개념적 수단이 아니라, 예수에게서 일어난 것, 곧 예수의 삶과 죽음이 주는 구원의 의미를 올바르게 표현하려는 은유적 시도들로 보아야 한다. 가령, “하느님의 아들”(son of God)이란 성서의 은유적 명칭은 니케아 공의회가 고백한바와 같은 존재론적 성자(God the Son)를 입증하는 근거가 되는 말이 아니다. 이런 변화는 오직 그리스의 ‘존재 이해’의 지평에서 가능해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약성서의 찬양정식(롬1,3 이하; 10,9; 벧전3,18 이하)은 신앙이 무엇보다 “예수의 구원의 사건”, 즉 그의 말씀과 사역,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스도 사건은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사건이다. 예수의 삶과 그의 말씀, 사역 및 죽음 및 부활의 구원론적이고 새창조적 의미를 오늘의 생의 세계의 지평 위에서 되살릴 수 있는 해석학적 열쇠말은 형이상학적 개념이 아니라 “사건”(Erergnis)이다. “사건”이란 용어는 하이데거에서 출발하여 들뢰즈에게서 활짝 핀 용법이긴 하나, 그보다 더욱 구체적 전승을 성서는 보유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맥락에서 본회퍼는 사건의 개념을 존재에 대한 행위로 말한바 있다. 존재는 행위이며 행위는 곧 존재이다. 활동(행위)과 분리된 정지된 존재란 이 세상에 없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활동하는 존재다. 일체의 “있음(유)”는 활동하는 있음이지 정지된 유가 아니다. 다시 말해 일체의 유는 삶과 사건이다.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을 주도한 물음이 본질에 대한 물음이라면, 오늘의 신학을 주도하는 물음의 방식은 “무엇이 일어났으며 무엇이 아직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의 방식이다. 예수의 생의 사건, 삶과 죽음과 고양(L )의 길에서 아버지의 본성과 사건적으로 하나가 되고, 여기서 생의 세계의 구원을 위한 문이 열린다. 예수는 자신을 하느님과의 본질적 동일성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10,30)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하나됨은 그의 말씀과 행위를 통해, 그의 고난의 신비와 죽음의 복종을 통해, 그리고 그의 부활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하느님 앞에 세우는 데 있다. 예수는 항상 하느님과의 특출한 관계를 갖는다. 하느님에 대한 예수의 이 같은 관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강밀도의 친밀한 만남이 일어난다. 복음서는 근본적으로 예수의 하느님에 대한 본질적 동일성을 말하지 않으며 “예수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의 성취 안에서 나타나는 사건”에 관하여 말한다. 그러나 이 관계가 일방적인 예수의 인간성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인간 예수의 사건에서 하느님은 생의 세계의 구원자로서 자신을 명시한다. 하느님은 예수의 선택과 파견과 위임과 권능의 수여 속에서 자신을 현재화하며 예수는 이것들을 자신의 삶과 운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예수의 삶과 인격, 가르침과 행위,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나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에서 새롭게 사건이 된다. 예수와 하느님의 동일성은 본질의 동일성이나 실체의 동일성이 아니라 ‘사건의 통일성’이며 사건의 동일성‘이다.
예수가 그를 믿는 자에게 주는 새로운 생명을 요한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과 함께하는 생의 공동체로 표현한다(14:9~10.23, 16:26~27, 17:21~23).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와 사귐에 참여하는 모든 자들은 또한 서로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하나됨의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이것이 “서로 사랑하라”(15:12, 13:34)는 새로운 계명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 사랑은 봉사와 희생으로 증명되어야 한다(13:14, 15:13). 요한은 “하나됨”을 다양한 차원에서 서술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 뿐만이 아니라 이 하나됨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하나됨(공동체)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하나됨은 관념적이며 존재론적 동일성을 지향하지 않고 일과 봉사와 희생과 사랑의 사건을 통하여 완성된다. 예수의 삶 안에 일어난 신-인의 동일성은 “본질의 동일성”이나 예수 안에 신의 본성이 역사적으로 재현되는 과정으로 보는 “범재신론적 동일성”이 아니라, 생의 세계의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의 열정과 인간의 고난의 탄식 사이의 일치로 나타난 “사건의 동일성”이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니(e)rga/zetai) 나도 일한다(e)rga/zomai)”( (O path/r mou e(/wj a)/rti e)rga/zetai, ka)gw e)rga/zomai. 5:17). ‘일’ 속에서 예수는 하느님이 되고 하느님은 일을 통해서 예수와 인간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본질(ousia)의 일치가 아니라 일(ergon, 구원사건)하는 행위 속에서의 일치이다.
현대 신학계의 결론도 이와 같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형이상학적 명제가 아니다(셸클레). 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이해된 헬레니즘 본체론의 범주들 안에서의 일치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이해된 “활동의 일치”(그닐카), “행위의 일치”(무스너), “계시의 일치”다: “나(인간)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하느님)를 보는 것입니다”(요14:9). 쿠셸은 요한이 겨냥하는 일치는 온갖 형이상학적 사변신학에 반대하여, “신화적 사변도 아니고, 예수의 신성, 신적 본질 혹은 본성의 형이상학적 개념화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말하길, “요한은 선재하는 그리스도의 형이상학적 본질과 존재를 묻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육화 전 한 신적 본질 안에 결합되어 있었다는 두 신적 위격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그러한 표상 틀은 요한에게 낯설다. ‘신내재적 출산’이라는 표상 역시 낯설기는 마찬가지다.” 이 주장은 이상의 논의를 종합한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III. 탈존재론적 사건의 신학을 위하여

우리는 처음에 그리스도교의 심장인 신앙의 진리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물었다. 전통적 기독교 진리는 영원한 실체, 최고의 존재 혹은 터 잡고 앉은 주체적 존재의 사유와 존재의 언어로써 이해되고 해석되어 왔다. 전통적 존재론적 사유와 언어는 신앙의 진리를 무기력한 대상적 진리로 변질시킨다. 예수가 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예수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하느님나라의 사건이 오늘 여기에서 사건화됨으로써 현재화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특징들 중 하나는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교리적인 개념들과 문장들로 고정화하여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기독교는 현대인들에게 점점 설득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30년간 주류 교회가 감소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교회의 정체내지는 감소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 원인을 사회학적으로 연구하고, 이에 걸맞는 목회적이며 실천적인 대응과 처방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보다 근원적인 것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 이해를 위한 사고와 언어의 근본적인 전환, 곧 신학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마땅한 처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기독교의 진리, 보다 깊은 차원에서 이해된 기독교 전통은 설득력과 호소력을 갖고 기독교인들에게는 물론이고 비기독교인, 그리고 기독교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에게 의미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과제가 복음 진리에 대한 탈존재론적 사건의 해석학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건은 사물과 사물이 만나고 사물과 사람이 만나고 교접하는 접점, 혹은 표면에서 발생한다. 이 표면은 실재의 두 차원, 곧 세계와 하느님이 만나고 교접하는 장소이다. 이 접점을 통해 하느님이 만물을 관통하여 두루두루 비추고 활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경험한다. 전통적 기독교는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초월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했기 때문에 접촉할 수 있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플라토니즘의 강한 영향의 결과이기도 하다. 화이트헤드는 플라톤이 그의 만년에 세계의 신적 요소를 어떤 위압적이고 강제적인 작인으로 간주하지 않고 설득적인 작인으로 간주했다고 분석하면서 이 견해는 종교사상 가장 위대한 지적 발견의 하나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그것을 자신의 나머지 형이상학의 이론과 체계적으로 조정하지 못했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기독교의 힘은 플라톤이 이론적으로 예언했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위로 계시한 데에 있다고 보면서,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학파의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론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신과 세계의 관계를 말하게 되었고, 이로써 “기본적인 형이상학의 문제의 해결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논쟁을 통해서 형이상학적으로 새롭게 발견한 점은 플라톤의 종속적 파생설과 달리 신이 세계 안에 직접적으로 내재한다는 신의 내재설이며, 신의 내재를 최종적으로 주장하는 신의 내재설은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의 보다 나은 형이상학적 상상력의 소산이었다고 평가한다. 세계 안에서의 신의 내재, 신 안에서의 세계의 내재는 존재이신 하느님으로부터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관계맺음에서 사건으로 경험되는 하느님을 말하는 새로운 구조를 발견할 때 가능한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통찰대로, 카파도키아 교부들은 ousia와 hypostasis를 구분함으로써 본질주의의 희랍적 사유방식을 깨뜨리고 인격을 위주로 하는 사유의 방향전환을 제시한다. 본성이 아니라 인격내지 위격이야말로 궁극의 것이요, 최고의 것이라는 사유 방향의 전환이다. 그리스 출신 정교회 신학자 지지울라스(Zizioulas)는 hypostasis를 person과 동일시한 희랍 교부, 특히 카파도키아 교부들에게서 ousia 중심의 그리스 철학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며, 기독교의 헬라화가 아니라 반대로 헬레니즘의 기독교화가 자리잡은 것으로, 서양 철학사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한다. 형이상학사에서도 빛나는 이러한 기독교 신학의 정신적 유산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실체 존재론적인 혹은 주체 존재론적인 개념과 언어가 아니라 관계론적인, 더 나아가 사건의 사유와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우주와 생명 그리고 인간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사건을 사유하고 표현하는 데 크게 이바지 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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