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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7/12/22 (21:12) from 78.51.72.98' of 78.51.72.98' Article Number : 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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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희망 속에 있는 산 자와 죽은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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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희망 속에 있는 산 자와 죽은 자들
곽미숙(성공회대)

I. 문제제기
서구 개신교 신학의 전통에서 하나님은 마태복음 22장 32절에 근거하여 죽은 자의 주가 아닌 산 자의 주로 강조되어져 왔다. 이와 함께 죽음은 20세기초 특히 “전적 죽음설” (Ganztod-Theorie)을 주장하는 변증법적 신학자들에 의해 무(Nichtigkeit)로의 전락이며, 하나님과 죽은 자 사이의 “무관계성”(Verh?ltnislosigkeit)으로까지 극단적으로 이해되었다: 칼 바르트(Karl Barth)에 의하면, 인간은 육체와 함께 영혼도 전적으로 죽음으로써, 죽음은 “존재로부터 비존재로의 전이과정”이다. 변증법적 신학에 영향을 받은 에버하르트 융엘(Eberhard J?ngel)에 따르면, “죽음은 삶이 그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연결들을 파괴하고, 모든 관계들을 단절시키며”, 특히 “한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마지막”이다.
전적 죽음설을 주장하는 이들에게서 죽음은 무관계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고 증거할 수 없는, 곧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배제된 자들로 간주되었다. 또한 죽음의 세계는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대립하여, 결국 하나님의 통치영역에서 제외된 곳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연결하는 모든 표상들은 주로 동양의 이방종교로부터 유래하는 잘못된 사상으로 낙인되어졌다. 죽음의 권세를 극복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신앙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죽음의 세계, 죽은 자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결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 개신교 신학계에서 죽음과 관련된 모든 개념들에 대한 기피현상은 최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발표되기 이전까지도 정도의 차이를 달리할 뿐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 개신교는 죽음에 대해 배타적이고 죽은 자들을 하나님과 살아있는 자들로부터 격리시키는 이러한 서구 개신교 신학의 전통 위에 세워졌으며, 그 결과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자들과 지속적인 유대를 맺는다고 믿는 샤머니즘을 필두로 한 한국의 종교, 문화적 전통과 오랜 세월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다. 더욱이 한국 개신교는 역사상 마치 국교와도 같이 신봉되던 조상제사를 거부함으로 인해 모진 핍박을 감내하였는데, 연이어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면서 수차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대성에 대해 극도의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에 오랜 기간 조상제사와 관련된 모든 문제들은 도외시되었고, 이것이 급기야는 교인들의 교회이탈과 사회와의 괴리현상을 보다 심화시키게 되자, 결국 한국 개신교는 이에 대한 골육지책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추모예배”라는 대안을 마련하게 된다. 추모예배는 조상제사가 야기하는 제반 폐해와 역기능을 극복하고, 그의 순기능을 진작시키는 면에서 그 타당성과 존립근거를 높이 평가할만하다. 그러나 추모예배는 현 시점에서 죽은 자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회상하는 가운데 산 자들의 세계에 통합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조상제사의 영구적인 폐지로 가는 과도기에 마련된 임시 방편책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므로 추모예배를 통해 한국 개신교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극복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경향은 살아있는 자들이 죽음을 삶의 현실에서 배제하고 죽은 자들을 망각하는 오늘날의 시대사조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였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보다 많은 능률과 생산, 소비, 쾌락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현대사회에서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최악의 요소로 간주되는 죽음은 점차 빠른 속도로 배제되고 있다. 유능한 사람이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부각되는 능력위주의 사회에서 이미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죽은 자들은 점점 더 망각의 세계로 내몰림을 당하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에 더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죽은 자들을 회상하는 것과 그들이 생전에 경험했던 행복과 불행, 다시 회복시킬 수 없는 그들의 권리와 고난을 되뇌이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여 죽은 자들을 자신들의 의식과 삶의 영역으로부터 밀어내고 있다. 이리하여 역사상 불의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수많은 사람들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그러나 죽음을 배제하고 죽은 자들을 몰아내는 이 병리적인 현상은 현대인들을 비인간적이고 무책임한 존재로 만듦으로써, 종국적으로 인간의 삶의 영역과 삶 자체에 불행한 결과들을 초래하게 된다. 즉 죽음을 배제하고 죽은 자들에게 무관심한 인간은 단지 눈에 보이는 것, 물질적인 것에만 얽매인 채, 어린아이와 장애인, 병자, 노인 그리고 신음하는 자연의 피조물들에게도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인간으로 될 수 있다. 이러한 인간들로 구성된 사회는 폭력과 고난과 죽음이 횡행하나, 아무도 이에 대해 책임감을 못 느끼는 무감각한 사회, 비정하고 냉혹한 사회, 비인간적인 사회로 쉽게 발전한다. 위르건 몰트만(J?rgen Moltmann)은 죽은 자들이 당한 불의와 억울함을 살아있는 자들이 보상하지 않고 망각하는 한, 현재의 행복과 보다 나은 인류의 미래를 향한 사회적인 진보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이러한 문제 상황에 직면하여 본고는 먼저 죽은 자들이 삶과 죽음의 주이신 하나님과 참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지, 또한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침범하실 수 없는 영역이 과연 있을 수 있는지를 문제로 제기하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관계의 영원성과 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서의 죽음의 세계에 대해 주로 구약을 중심으로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죽음의 세계에 내버려두지 않고 부활시키시는 하나님은 단지 산 자만의 주가 아니라, 오히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주(롬 14:9)이심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본고는 지금까지 개신교 신학계에서 비성서적으로 간주되어 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연대성 내지 관계성”을 제언하며, 이를 통해 장차 도래할 죽은 자들의 부활과 궁극적 구원에 대한 희망을 구체적으로 키워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II. 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서의 죽음의 세계
성서에서 죽은 자들은 구약의 희랍어 번역인 70인역에서 “하데스”(?δη?)로 번역되는 스올(????)에 거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스올은 어원학적으로 어디서 유래하는지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단어를 “황폐하다”(?de sein)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유추한다. 이에 상응하여 스올은 특히 불모지나 황무지로 이해된다. 구약성서에서도 죽음의 세계를 대변하는 스올은 주로 어둡고 황폐한 나라로 기술된다(욥 10:21f.; 17:13; 시 88:12). 어떤 구절들에서는 스올이 모든 산 자들이 언젠가 모이게 될 죽은 자들의 집(욥 30:23)으로, 또는 죽은 자들이 곤고와 쇠사슬에 묶여 있는 감옥(시 107:10-16; 116:3)으로, 망각의 땅(시 88:12)으로 그리고 극도의 침묵이 지배하는 곳(시 94:17; 115:17)으로 묘사되고 있다.
스올에 대한 구약의 이러한 부정적인 표상들에 근거하여 게르트 슈낙(Gerd Schnack)은 스올에서는 삶과 야웨 하나님에 대한 기쁨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곳에서는 외견상 어떠한 활동적이고 생산적이며 진취적인 행위도 없어 보인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b). 또한 스올에서 죽은 자들은 다시는 빛을 볼 수 없으며(시 49:19), 복과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다(욥 7:7). 뿐만 아니라 죽음은 인간을 산 자들의 세계로부터 최종적으로 갈라놓아, 스올로 내려간 죽은 자들은 다시는 삶의 세계로 회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 사이에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깊은 수렁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욥 7:9-10).
죽은 자들이 겪는 가장 비통한 일은, 죽은 자들이 죽음의 세계에서 더 이상 야웨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스올에서는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에 대한 선포와 찬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시88:10-12). 이에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 왕은 죽은 자들을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을 더 이상 증거할 수 없는 자로 규정하며 살아있는 자들과 철저히 대립시킨다: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사 38:18-19a).
이와 같이 구약에서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가 엄격히 구별되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많은 신학자들에게 하나님의 통치영역에서 제외된 곳으로 인식되었다. 기젤라 키틀(Gisela Kittel)은 한편으로 기존의 신학자들의 견해에 의거하여 죽음의 세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죽음의 세계는 ... 하나님과 대립하여 존재한다. 이 세계는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성과 근본적으로 부합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스올은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아닌 ‘황무지’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키틀은 참으로 인간이 스올에서 삶과 죽음의 주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지, 피조물을 구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침범하실 수 없는 영역이 과연 있을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문제로 제기한다. 그러면서 그는 구약의 신앙과 사고체계가 형성된 주요과정들을 추적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다음의 사실들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1. 하나님과 맺은 인간의 연합은 인간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소멸을 통해서도 결코 깨어지지 않고, 오히려 이를 넘어 존속하며, 2.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 본래 스올에게 속했던 것들을 장악하심으로써, 죽음의 세계도 결국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될 것이다.
이를 반증하듯, 구약에는 죽음의 비통함과 죽은 자들이 스올에서 겪는 처참한 처지를 통탄하는 탄식시편과 병행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관계의 영원성과 하나님의 죽음의 세계로의 진입을 확신하는 신앙고백들이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우선 시편 73편의 저자는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26절)고 노래하면서 하나님과 맺은 관계가 영속적임을 확신한다. 육체의 생명력이 소진되고 영혼이 스러질지라도, 이 시편 저자의 요동하는 마음이 쉼을 얻을 수 있는 반석과 분깃, 곧 삶의 근본적인 토대가 되시는 하나님과 맺은 인간의 삶의 관계(Lebensgemeinschaft)는 어떠한 경우에도 죽음에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삶과 죽음의 마지막 한계를 극복하는데, 이는 이 관계가 육체와 영혼의 소멸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요한 아우어(Johann Auer)와 요셉 랏칭어(Josepf Ratzinger)는 하나님과 맺은 인간의 관계가 “죽음보다 더 실재적”이기 때문에, 이를 “진정한 현실”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 이 관계는 인간을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의 기쁨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과 하늘나라의 보화보다 더 값지다. 이 관계 속에서 죽은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에 의해 붙드신바 되고 보존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관계가 인간의 모든 세대와 한계를 초월하여 영속하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는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공간으로 존재하지 않고, 결국 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 통합되어진다. 이에 시편 139편의 저자는 죽음의 세계의 중심에 진입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암시한다: “내가 ...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8절; 참조 암 9:2). 호세아 선지자도 스올로부터의 속량과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구속에 대해 말한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13:14).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영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 어느 곳에서나, 심지어 스올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영과 손길과 빛으로 인간에게 향하신다.
구약에서 죽음의 세계가 삶의 세계와 구별된다 하여, 죽음의 세계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그의 통치영역에서 제외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유일한 창조주시라면, 죽음의 세계가 독자적인 통치자를 가진 곳으로 생각되어질 수 없다. 하나님은 죽음의 세계를 그 어떠한 신적인 존재나 세력에게 양도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과 나란히 군림하는 신적인 존재를 인내할 수 없는 배타적인 하나님,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에 하르트뭍 게제(Hartmut Gese)는 “죽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가 해당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어떤 저승의 신들에게 사로잡힌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야웨 하나님께 속한다”고 역설한다. “음부, 곧 스올도 야웨 하나님께 속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통치영역이 어떠한 경우에도 죽음의 세계의 경계선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통치와 그의 나라에는 어떠한 한계도 설정돼 있지 않으며, 죽음과 음부의 한계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스올의 존재와 세력은 하나님의 권능과 신실하심과 병행하여 나란히 존립할 수 없다. 오히려 이것들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점령당하게 되며, 하나님의 통치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셨다는 신약의 증언은, 죽음의 세계도 하나님의 통치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Totenwelt)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 3:19),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4:6a). 아우어와 랏칭어는 이 구절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자신이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심으로써,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영원히 망각된 곳으로 여겨졌던 공간을 하나님이 임재하는 공간으로 만드신 것으로 해석한다. 이제 죽음의 세계는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진,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닿지 않는 흑암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영역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신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그들에게 내린 그의 구원하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죽은 자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이다. 이를 통해 이미 죽은 자들도 믿음에 이를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III. 산 자와 죽은 자의 주이신 하나님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죽음을 초월하여 인간과 영속적인 관계를 맺으시며, 죽음의 세계도 자신의 통치영역으로 삼는다. 이러한 인식에서 이제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죽음의 세계에 방치하지 않고, 부활시키는 분으로 이해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은 “희망의 역사”를 그 본질로 가짐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죽음 이후에 도래할 내세의 삶을 희망하지 않고, 도리어 죽음 이전의 현세적 삶에서 이루어질 희망들만을 주목하였다. 그러다가 이방민족의 굴욕적이고 잔인한 통치 아래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장래 희망이 여지없이 끊어질 무렵,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죽음 가운데 내버려두지 않고, 그들의 이미 썩어 없어진 육신을 창조적인 권능으로 새롭고 완전하게 회복시킨다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들이 등장하게 된다.
부활에 대한 첫 번째 비전(Vision)은 바벨론 포로시기 에스겔 선지자에 의해 완전히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로서 주어진 마른 뼈 환상(37:1-14)이다. 이 환상에서 모든 생명의 원천이 되신 창조주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와 동일한 과정으로 죽은 자들의 뼈들에게 육신을 입히고, 생기(Lebensodem)를 불어넣으심으로써, 모든 것이 마지막으로 보여지는 암흑의 시점에 다시금 새로운 시작을 도모하신다. 이 마른 뼈 환상은 정치적인 패망 이후에 새로운 이스라엘의 재건에 대한 환상일 수 있다. 그러나 게제는 이 환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장차 죽은 자들에게 실제로 행하실 일들, 곧 무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무덤 속에서 일어날(12절) 것을 예시한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를 본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신앙고백은 이사야 26장 19절로, 이는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의 지배체제에 무력하게 넘어간 후기 포로기 당시 신실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소망 속에서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나며,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에 속한 자들은 죽음 이후에 부활하게 된다고 증언한다. 또한 여름에 이슬이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푸르른 식물을 내게 하듯이, 하나님의 빛난 이슬은 땅으로 하여금 죽음의 나라에 깃들어 있는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들을 소멸케 한다는 것이다. 한스 큉(Hans K?ng)이 지적하듯이, 이 이사야의 신앙고백은 마치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처럼 이스라엘 민족의 정치적 재건에 대한 예언과 더불어 장차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하나님의 권능을 예시하는 말씀으로 해석될 수 있다.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신앙고백은 그리스 셀류시스 왕가의 극악무도한 압제자 안티오쿠스 IV세 에피파네스(Antiocus IV. Epiphanes)의 잔혹한 박해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종교적, 정치적 희망이 사라지고, 극단적인 염세주의와 허무주의가 횡행할 때, 다니엘에 의해 이루어진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이 구절은 특히 의로운 자들이 고난을 당하는 반면, 불의한 자들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모순된 상황,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실함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형장에 끌려가는 순교자들이 온갖 고초를 당하고, 이들을 박해하는 압제자들이 득세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화급하게 제기된 문제, 곧 하나님의 의에 대한 문제(신정론)에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믿음을 지킨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들과 이들을 핍박한 불의한 자들은 모두 현세에서 행한 자신들의 행위에 책임지기 위해 부활하는데, 전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는 반면, 후자는 영원한 고통으로 부활함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증명된다는 것이다.
비록 외경에 수록되었으나,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가장 구체적이고 확신에 가득 찬 네 번째 신앙고백은 마카베오 하 7장이다. 안티오쿠스 IV세 에피파네스의 박해 아래 한 어머니와 일곱 형제가 순교하는 이야기가 이 장의 주축을 이루는데, 여기서 죽은 자들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의 율법을 충성스럽게 지키기 위해 죽는 의로운 자들을 결코 멸망하도록 방치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시키신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함에 기초한다: “너희들은 지금 너희들 자신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사람이 출생할 때에 그 모양을 만들어 주시고 만물을 형성하신 창조주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23절). 또한 마카베오 하 7장에서는 부활의 육체성(Leiblichkeit)이 강조된다: 태초에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사지가 처참하게 잘리운 채 순교한 의로운 자들에게 그의 창조적인 권능으로 다시금 새롭고 완전한 육신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이 손발을 하나님의 율법을 위해서 내던진다. 그러므로 나는 이 손발을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받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11절; 참고 28절).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들을 죽음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새롭고 완전한 육신으로 다시 부활시키신다는 구약의 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인류의 역사 안에서 결정적으로 성취된다.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둘째 아담 그리스도는 모든 죽은 자들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시며, 그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권세가 극복되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을 죽은 자들과 영속적인 관계를 맺으시며, 죽음의 세계도 그의 통치영역으로 삼으시는 하나님, 곧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주로 입증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통치는 살아있는 자들의 삶의 공간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공간도 포괄하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산 자는 물론 죽은 자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9).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결단코 무(Nichtigkeit)나 혹은 무관계성(Verh?ltnislosigkeit)에로 전락시키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 인도한다. 이 세상과 하늘의 그 어떠한 것, 심지어 죽음조차도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면(롬 8:35-39),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현존 속에서 안연히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로마서 14장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고백한다. 살아있는 자들은 물론 죽은 자들도 “주의 것”이라면, 그리스도와의 교통은 살아있는 자들만이 아니라, 죽은 자들도 포괄한다. 파울 알트하우스(Paul Althaus)도 죽음이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교통,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에로 인도한다고 역설한다.

IV. 부활의 희망 속에 있는 산 자와 죽은 자들
구약의 전통에서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직접적인 교통은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되어, 이들 사이에 교통을 꾀하려는 시도들은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는 것으로 판정되고, 하나님 자신에 의해 매우 엄격하게 금지된다: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 18:11-12; 참고 레 19:31; 20:6,27). 이러한 구약의 전통은 당시 영혼 불멸설을 신봉하고 죽은 자들을 숭배하던 근동 이방민족의 관습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구약의 전통에 따라 개신교는 예나 지금이나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연대성 내지 관계성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해 극도의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리하여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엡 4:12)이 살아있는 자들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의 장들에서 제시한 사실들에 근거하여 죽은 자들도 살아있는 자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며, 그의 친교에 동참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 근거들을 우리는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죽음은 인간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며, 하나님과 인간이 죽음을 초월하여 영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2.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 이를 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 만드시고,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셨다. 3. 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산 자의 주이실 뿐만 아니라, 죽은 자의 주이심을 확증하셨다.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자들과 함께 시공을 초월하여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연대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구성원으로서 “그리스도의 친교” 안에 있으며, 이를 통해 서로 연대 내지 관계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성서는 그리스도가 복음과 성례전 가운데 임재할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과의 교통, 특히 형제자매들 중에 가장 작은 자들과의 교통 속에도 임재한다고 말한다(마 25:31- 46). 몰트만에 의하면, 이 사람들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그리스도의 교통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스도의 교통 속에서 그는 가장 작은 자들은 물론 죽은 자들에게도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죽은 자들과 더 깊은 교통 속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인식은 라틴 아메리카의 기초 공동체들이 드리는 예배에 잘 나타난다. 이들 공동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자들의 성례전에 동참한다는 확고한 믿음 속에서 죽은 자들과 실종된 자들 그리고 순교자들의 이름을 예배시간에 부를 때마다, 온 회중이 “현존하소서!”(Presente!)라고 화답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연대성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은 자들의 보편적 부활 사이의 “중간시간”(Zwischenzeit)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부활과 궁극적 구원에 대한 희망을 구체적으로 키워나갈 수 있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로부터 이미 부활하였으나, 우리는 아직 부활하지 못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죄와 사망의 세력을 깨뜨렸으나, 죽음은 아직도 이 세계 안에 존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되었지만,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세계 속에서 살고 죽으며, 영광스러운 궁극적 구원, 곧 새로운 피조물과 영원한 생명을 동경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품안에 거하고 있지만, 아직 최종적 구원의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과 더불어 그들 공동의 구원을 희망하는데, 바로 이 공동의 희망이 그리스도의 교통 속에서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결합하는 구심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의 연대성은 “희망의 공동체성”(Hoffnungsgemeinschaft)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고백함으로써, 죽은 자들과 교통을 유지하고, 회상 가운데서 그들과의 연대성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갈 수 있다. 이들의 회상 속에서 죽은 자들은 살아있는 자들과 언제나 함께 현존하며,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향하는 공동의 여정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의 공동체성(Gemeinschaft)은 부활의 희망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연대성과 관련하여 본고는 개신교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비성서적으로 간주하여 경원시하는 죽은 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성서는 어느 곳에서도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말하지 않지만, 또 어느 곳에서도 죽은 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이 죄가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서는 도처에서 믿는 자들에게 서로 함께 그리고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롬 15:30; 엡 6:18f.; 골 1:3; 딤전 2:1f. 등). 죽은 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에 반기를 제기한 장본인으로 알려진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유족들이 그들의 슬픔과 사랑하는 죽은 가족의 사후운명에 대한 근심을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일을 죄가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 사실상 죽은 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이에 그는 “신앙고백서”(Bekenntnis der Artikel des Glaubens, 152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서는 이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랑하는 하나님, ... 그들을 도와주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자발적으로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은 죄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죽은 자들의 사후운명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시행했던 각종 허황된 미사들과 면죄부를 위시한 지나친 헌금의 폐해를 경고해, 이를 “마귀의 대목장”(Teufels Jahrmarkt)이라고 혹독히 비난한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후 루터 교회의 교리들을 정리한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Apo- logie des Augsburger Bekenntnisses)은 죽은 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던 고대교회의 관습 자체를 폐지하고자 하지 않고, 다만 “죽은 자들을 위해 성만찬을 베푸는 것”을 거부한다.  
죽은 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는 죽은 자들이 살아있는 자들의 삶의 영역에서 점점 더 망각되고 배제되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 죽음의 장벽을 뛰어넘어 죽은 자들과의 지속적인 연대를 유지할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도라 생각된다. 죽은 자들을 위한 중보기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함께 교회 지체들과의 결속과 교통에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명백히 인식할 수 있다. 이리하여 우리가 언젠가 죽음 이후 하나님을 만날 때, 각기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중보기도를 통해 서로 결속된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로 만나게 될 것이다.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통해 우리는 장차 죽음 이후에 경험할 이 형제 자매들과의 만남을 현재의 삶 속에서 앞당겨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와의 교통은 살아있는 자들은 물론 죽은 자들도 포괄한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교통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개신교에서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기념예배를 드리는 것은 일종의 금기로 여겨진다. 이리하여 우리는 한국 개신교의 교회력에서 죽은 자들을 회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을 발견하기 어렵다. 설사 교회력에 죽은 자들을 회상하는 날이 제정돼 있다고 해도, 죽은 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교회는 거의 전무하다. 이는 유럽 개신교의 주일 예배순서에 주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을 위한 묵념의 시간이 있으며, 교회력에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 제정돼 있어, 이 날에 성도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것과는 상반된 현실이다. 심지어 교인들이 가정에서 사랑하는 죽은 가족을 위해 드리는 추모예배에서조차도 죽은 자들을 위한 중보기도는 해서는 안 될 행위로 간주되며, 중보기도의 대상은 철저히 살아있는 자들로 제한된다. 한국 개신교의 일부 목회자들은 추모예배가 조상제사와의 마찰을 잠정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미봉책일 뿐만 아니라, 조상제사의 연장이라 하여 결국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의 전통적인 조상제사와 혼동 내지 혼합될 수 있다는 노파심 때문에, 추모예배는 많은 교회들에서 적극적으로 권장되고 있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사회의 산업화, 도시화, 개인주의화와 더불어 점증하는 개인과 사회의 비인간화 현상을 직시할 때, 한국 개신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더 이상 망각하거나 배제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활의 희망 속에서 산 자들의 삶의 세계에 통합시킴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한국 개신교는 역사상 불의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수많은 우리 선열들도 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당한 불의와 억울함을 회상하는 가운데 보다 정의롭고 인간적인 세상을 이루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개신교는 추모예배를 보다 활성화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의 추모예배는 살아있는 자들의 공적(e v)이 연옥에 거하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카톨릭 교회의 신앙에 기반해선 결코 안 될 것이다. 또한 추모예배는 샤머니즘이 일반적으로 행하는 초혼(�G)과 유교의 조상제사가 빠진 지나친 형식주의의 폐해로부터도 엄격히 구별될 필요가 있다. 살아있는 개인과 사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계명을 청종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지, 죽은 자들이 아니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한국 개신교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들은 너희에게 ... 신접한 자와 무당에게 물어 보라고 한다. ... 산 자의 문제에 해답을 얻으려면, 죽은 자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들에게 대답하여라. 오직 주께서 가르치신 말씀만 듣고, 그 말씀에 관한 증언만 들으라고 하여라”(사 8:19-2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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