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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8/01/07 (10:25) from 85.181.182.162' of 85.181.182.162' Article Number :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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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5.17




5.17 직전

전두환 육군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법에 의하여 겸직이 금지된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취임한 1980년 4월 14일부터 내가 낀 '김대중(金大中)내란음모' 사건자들이 중정 지하실에 불법으로 끌려간 5월 17일까지를 나는 5.17직전으로 이름한다. 이 5.17직전에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알기 위하여 내 일기를 간추려 옮기기로 한다. 여기서 간추린다는 말은 4월 14일 일기가 보여주는 것 같이 하루하루가 바빴고, 하루의 일기가 적어도 200자 원고지 3·4매는 되는 분량인데, 그것을 약 1매 이내로 줄여보겠다는 뜻이다. 날짜 뒤 괄호 안에 쓴 글은 90년 1월호『신동아』별책부록으로 나온「80년대 민족·민주운동」일지에서 따온 것이다.

나는 좀 오래 전부터 아침에 화장실에서 하루 전의 일기를 한 장 한 장씩 써서 기관원에게 빼앗기지 않게 독 속에 숨겨뒀었다. 물론 내란음모취조 때나 재판 때 내란음모가 아닌 비폭력적이며 평화적인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것을 일기를 제시함으로 밝힐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실을 밝히는 재판이 아닌 정치재판인 것을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는 것을 좀 드러내 보도록 하자.


4. 14. 월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中情부장서리에 취임)

08:00 문익환 예춘호 김종완과 서울호텔 11층서 만나다
09:00 문익환 예춘호와 서울구치소에 가서 수감중인 양순직 박종태 양관수 임채정 박종렬 백기완 등을 만나다. 생각보다 건강들 하다.
12:00 New York에서 온 김정순이 참석한 진여(음식점 이름)에서의 조직검토모임.
참석자: 한완상 박세경 김병걸 심재권 고은 예춘호
14:00 예춘호와 제일교회 박형규 방문 *
17:00 동교동에서 이희호와 이야기 **
18:00 쎄실에서 서남동 백낙청 리영희와 저녁식사 ***

* 내 말「해위(윤보선 아호)가 이런 말하고 문익환이 저런 말하고 이 말들을 조정하는 일만을 재야가 할 수는 없다. 재야는 재야의 할 일만을 해야 하는데…」

** 카라일의『영웅수배론』과 감상협의『기독교민주주의…』를 이 여사에게 빌려드리다. 한완상이 신당에 들어갈 인물로 자신의 이름을 뺀 7인이 추천된 것을 안다. 문동환 이우정 서남동 이문영 한정일 장을병 김용준 등의 이름이.

*** 학원문제 성명서는 마침 현직교수가 활성화하고 있으니 복직교수들은 침묵하자. 그러니까 無爲가 철학이다. 후광(김대중 씨의 아호가 後廣이다.)의 전법도 무위여야 한다. 자신이 하면 남이 안 하기 때문이다. 신당을 서둘러도 안되고 명단을 내면 더욱 안 된다. 명단에 없는 사람은 안심하고 밖에 있을 것이 아닌가. 손정석 건은 서남동이 총장을 만나기로 한다.

서울대에서 학생들이 최규하를 규탄하는 벽보를 내다. 최규하의 망언/전두환의 중정부장서리 반대/ 신현학의 망언 등을 파헤친 글이다. 저쪽(전두환)은 마음껏 못난 짓을 하고 있는데…


4. 16. 수
명상의 집에서 안병직 서남동과 함께 기상한다. 현직교수인 안병직이 와서 기쁘다.
15:30 수유리 아카데미에서 후광이 한승헌 서남동 고은 이문영에게 민주제도연구소 이사 명단작성을 의논하다. 이 모임에서 신당 신중론을 문익환 서남동 김병걸이 편다.


4. 17. 목
중앙대와 총회신학교 두 곳에서 맡은 강연으로 국민연합 상임중앙위원회의에 안 간다. 학교강의는 데모로 휴강이다. 유진오는 라디오에서 후광이 신당 만들면 안 된다고 단언한다. 나는 두 곳 강연에서 후광의 민주정통성을 강조해 민주개국론을 말한다. 다만 다음과 같은 조건이 있다고. 1. 재야가 업적을 낼 것, 2. 계엄령이 풀릴 것, 3. 신민당이 정풍(당의 개혁)을 못하는 경우 그리고 4. 후광이 거산(김영삼씨의 호가 巨山이다)보다 인기가 좋을 것 등.


4. 18. 금
(서울평화시장 노사분규 11일만에 극적 타결 후 청계 피복노조「8백만 노동자에게 보내는 메세지」발표)

동교동에서 후광 예춘호 김종완 정대철 이문영 등이 만나다. 예춘호 말이 문익환 한완상이 흔들리고 있다고 한다. 김기수와「민주제도연구소」를 방문한다. 후광이 신당 않는다고 석간에 발표한다.

13:50-17:00 충북대에서 강연.


4. 19. 토
13:00-14:45 부산대에서 거산계 학생들의 방해가 있었는데도 약 1,500명에게「4·19와 부활」강연.
비행장에 배웅 나온 학생이 내 신앙을 묻는다.「혼자 있을 때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이 있을 때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답한다. 저녁을 집에서 고대 법대교수 11명들에게 대접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4. 20. 일
14:30 갈릴리 교회에서「회개도 감옥도 아닌 길」을 설교한다.
회개의 기준은 평범한 사람이 아닌 것을 회개하는 것이다. 非日常性이 판치는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양심 있는 자가 감옥에 안 갈 뿐만 아니라 악에게 승리해야 한다. 일상성의 반대는 비일상성인데, 비일상성은 독재에 대한 승리를 통하여 일상성으로 돌아간다. 이런 전제로 승리하는 체제를 말한다.


4. 21. 월
(舍北사태 발생, 강원도 사북광업소 광부 7백여명 어용노조에 반발 농성중, 경찰과 충돌)

10:00 5가(기독교빌딩을 지칭함)에 가서 도쿄대학에서 온 초청장을 복사 한다.
12:00 한강(음식점 이름)에서 김종순 한완상과 식사한다. 김종순 말이 여 름에 한완상을 미국에 청하자고 한다. 서울에 와서 인권운동의 주line이 박형규 김관석이 아닌 것을 확인했다고.
14:00-15:30 반공연맹에서 소양교육 받다. 가든호텔에서 후광 연설을 한완상 예춘호 조세형 이문영이 돕는다.


4. 22. 화
07:00 문익환 계훈제를 pick up해서 고은 집에 간다. 예춘호가 와 있다. 국민회의 사무국에 이현배 심재권 장기표 등을 임명한다. 사무실을 계훈제가 소개하기로 한다. 성명서를 계훈제가 함세웅과 의논하기로 한다.
내 집에서 저녁에 기독교민주동지회가 모인다. 박형규, 김관석, 이우정, 조남기, 이경배, 이해동, 서남동, 이문영. KSCF 총무 등 출석한다. 총무 서기 산업선교쪽 김용복, 한완상 등 불참, 5월1일에 복직교수환영조찬기도회 열기로 한다.


4. 23. 수
7:30 동교동에서 민주제도연구소의 입회원서를 예춘호, 문익환, 한승헌, 김종완, 박세경, 김병걸, 서남동 등에게 받아오게 하다.
16:00 가든호텔에서 후광 연설연습을 듣다. 송원영 조세형 한승헌 이문영 등 참석. 송원영 참석이 특이. 나는 후광이 재야의 중심임을 강조할 것을 말한다.
동원 탄광난동 표면화. 한미국방장관회의 무기연기. 과도정부가 약하다.


4. 24. 목
(서울지역 14개 대학교수 361명,「학원사태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대학의 민주화가 시급하다고 강조)

16:00 가든호텔에서 장을병, 송원영, 빅영록, 김상현 등과 모의기자회견을 한다.
18:00 기장선교교육원 월례모임


4. 25. 금
박찬기가 거산을 재야가 헐지 말랜다. 김성식이 교수로 있으려면 후광과 가까이 하지 말랜다. 김용준은 서남동이 신학자인데 오늘 밤 관훈클럽 토론회에 방청을 가면 웃긴다고 말한다. 이렇게 모두가 후광을 기피하고 있다. 밤에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후광이 악의에 찬 기자들의 질문 앞에 선 것을 본다. 한완상 김승훈 서남동 장을병 박영록 박용길 김병걸 고은 이태영 예춘호 등 참석. 문익환 박형규 불참.


4. 26. 토
오랜만에 식구들과 느티나무 밑에 앉아도 있고 집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저녁식탁에서 시편 23편이 인생의 과정인데 우리의 경우 5절을 모색하는 단계로 말한다.「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지난 주일 갈릴리교회 설교에서 비일상성의 반대가 승리라는 개념을 나는 끈질기게 찾고 있는 것이다.


4. 27. 일
15:00-17:00 대전YMCA 3층 약 60명 앞에서 유영소 목사 민중교회 주관 강연「잔치의 신학」을 말한다. 어제 저녁에 식구들에게 한 말을 이은 설교이다. 강사료를 안 받는다.


4. 28. 월
중앙정보부의 배종철 직원이 내가 도쿄대에 가는 것이 불허라고 한다. 6시 세종문화회관에서 김상협「지성과 이성」출판기념회에 간다. 유진오를 만난다.「신문에서 자주 봤지」가 그분 말이다. 3·1사건 때는 병이라고 증언을 안 나온 사람이 여기서는 멀쩡히 서서「김상협 총장은 학교에만 머물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출옥한 한 학생이「반동들이 얼마나 모였는가를 보러 왔어요」라고 말한다.


4. 29. 화
(동국제강 부산공장 종업원 1천 여명,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농성중 출동한 경찰과 투석전)

11:30 Plaza에서 중정제3국장이 나에게 도쿄대 방문목적을 묻는다.
12:00 Plaza 21층에서 이한빈 경제부총리가 네 명의 경제관료와 더불어 나에게 복지정책에 관하여 묻는다.
16:00 강원룡이 장충동 사무실에서 나에게 하는 말이 후광이 거산보고 대통령직과 당수 중 택일하게 한 후 거산을 밀어주자고 한다. 누군가 강박사에게 와서 부탁한 것도 같다.


4. 30. 수
7:30 문익환 댁에서 중앙상임위 모임. 참석자: 문익환 고은 계훈제 김승훈 이문영 국장 3명. 후광 김녹영(통일당수대리)이 제의한「범야권전선」을 의논한다.「비록 국민연합은 비정당이지만 민주화를 위하여 정당과 협력을 하자」를 결의한다.
10:00 이를 해위(윤보선 씨의 아호는 海韋이다)에게 7명 중 고은만 빼고가서 보고하니 반대다. 이유는「국민연합은 순수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12:00 고대 교수회의에 불참하다. 계훈제가 빠지고 후광 댁 방문.「해위와 의 관계를 말할 위치가 아니다. 결정을 연기하자」가 후광의 답이다.
16:00 계훈제 문익환과 함석헌 방문.「문제별로 정당과 협의하는 것이 좋 다」고. 이때에 함옹이 한 말씀.「어차피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후광은 초조해하면 안 된다. 서남동이 왜 관훈클럽에 갔는가를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가 함선생님 말씀이다.


5. 1. 목
(계엄사령부 전국지휘관 회의는 사북사태, 학원사태 논의 후 국가안보적 차원에서 단호한 조치를 결의)

08:00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기독민주동지회 첫 모임을 복직교수환영으로 56명이 모인다. 조남기 사회, 박형규 설교.
동교동에서 문익환 이우정 한완상 이문영 김병걸 김승훈 고은 예춘호 박세경 김동완 세 국장들이 모여서 민주제도연구소를 발족한다. 이사장에 예춘호, 소장에 이문영, 국민연합에서 3의장을 고문으로 모시기로 한다. 5월 5일 12시에 필동에서 비당권파 신민당과 만나기로 한다.


5. 2 금
(서울대, 13일까지 민주화투쟁기간으로 정하고, 충남대생 3천여명은 계엄령 철폐를 요구, 최초로 가두시위)

08:00 고은 집에서 국민연합상임중앙위원회 개최. 3의장을 고문으로 모시 는 규약을 예춘호 계훈제 장기표가 손질하기로 한다. 학원문제 성명서를 계훈제 예춘호가 초안잡기로 한다.
16:00 NCC 인권위 재편한다. 위원장 조남기, 부위원장 조승혁 이문영, 서 기 이대용, 회계 김상근, 감사 구세군? 오충일.
19:00 경향에서 오재식을 맞기 위한 안재웅씨 모임. 참석자 김찬국 김용 준 조요한.
석간에 해위는 국민연합이 후광을 따르는 것을 반대한다고. 오늘 만 이천명 서울대생이 계엄령 해제를 요구해 데모하다. 서울대가 학생운동의 리더이다. 조요한은 화제를 학원으로 돌린다. 복직해서나 정당에서 감투쓰지 말자고 말한다. 김찬국은 모임을 끝내고 나오는 길에서 김동길 수필이 들어있는『주부생활』을 구입하러 책가게에 들어간다. 김찬국은 김동길 누님에게 해직교수들이 편지 보내는 것을 반대했던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A(실명을 숨긴다)는 1988.12.12성명 때 자신의 아들이 의무관 시험 본다고 불참했고, B는 서명 받으러 간 한완상보고「내 이름을 빌려줄 수도 있는데…」해 아니꼬와서 그냥 나왔었다. 이 사람은 좀 있다가 남북적십자회담 고문이 되었다.


5. 3. 토
김상협을 치켜세운 4. 28일의 유진오의 발언, 후광을 비난하는 어제의 해위의 발언, 그리고 복직된 자리에 연연하는 어제의 모습이 나를 우울케한다. 언젠가 후광이 국민연합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한 문익환도 걸리고, 후광이 고은과 소근거리는 것이 싫었다는 某시인의 생각, 안병무의 문익환에 대한 불만 등이 주마등같이 내 머리를 스친다.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았는데 나는 내 일이 있다는 격이다.


5. 4. 일
조간『샘터』광고에 법정이 사람이 산다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는데 있다고. 그런데 왜 법정은 70년대에 안 거슬러 올라갔는가? 말하기는 쉽다는 것인가? 이상국이 와서 하는 말이 고급공무원과 군인들은 반김대중이라고 말한다. 공덕귀(남편이 삐딱해서인가? 내각제가 되면 대통령을 원해서인가?) 이우정(오늘 출국) 안병무 문익환(병결) 문동환(출국)이 갈릴리 교회에 불참이다. 3.1사건 제2심 재판 때에 교도소 버스 안에서 A가 날보고 왜 그렇게 심하게 법관에게 대들었냐고 나무랬던 생각이 난다. B는 잔치에의 초대에 응해야 한다고 방금 설교했는데, 나에게는 내일 낮 12시 필동 모임에 꼭 가야하는가를 묻는다. 나는 내 결점을 못 보며, 요 며칠 사이에 우리는 허덕허덕 숨이 차며 힘들어하고 있다.


5. 5. 월
11:00 한강, 함신부관에서 중앙상임회의. 전일에 결정한 3의장 고문추대 규약 통과. 정치단체와의 연대는 상정하지 않고(왜냐하면 함신부와 계훈제가 정치화를 반대해서) 시국선언만 내기로 한다. 문익환은 함신부를 용하다고 칭찬한다. 자신은 12시 회의에 안가겠다고 하더니 참석한다.
12:00 후광 처남댁에서 재야와 신민당 비당권파의 합동회의. 참석자: 후 광 서남동 고은 문익환 한완상 이문영 예춘호 송원영 이용희 조세형 박영목 정대철 천某, 최某, 한건수 등이다.
각 측이 금주 내에 시국선언을 내고, 후광은 모레회의에서 민주화촉진회를 발족해달라고 부탁, 문익환은 11시 회의결과에 따라 시국선언 후 따로 모이라고. 후광은 화를 내고 불안해한다. 왜냐하면 후광이 재야와 협의 없이 국민연합을 중심으로 민주화촉진을 하였다고 이미 말했기 때문이다. 또한 회의의 협의 없이 기자에게 동교동 저녁모임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일을 저지르고는 고흥문을 만나서는 신민당을 base로 해서 하자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
저녁에 한완상 집에서 자신의 형이 거산과 연결된 것 같아 불안하덴다. 부인이 정치하지 말라해서 며칠 전에 부인과 싸웠덴다.
21:00 동교동에 들러 예춘호 김동완 김대중 이문영 회동.


5. 6. 화
07:00 김승훈신부관에서 중앙상위. 함세웅 예춘호 계훈제 문익환 김승훈 이문영(고은 결석)「민주화촉진 국민선언」초안 작성. 점심을 5가 지하에서 도미지리 나올 때까지 다음을 한다.
* 문익환 계훈제가 이경배에게 연락해 5가에 방을 얻고
* 집회신고 낼 것을 내가 제의해→문익환이 글을 써서→계훈제가 동대문서에→집회불허→서명만 받아서 성명서를 내·외신에 돌릴 것을 결정.
15:00 계훈제 예춘호 이문영이 백범연구소에 모여서 함석헌 방문해 서명받다.
17:00 예춘호 계훈제 이문영 문익환 김승훈 함세웅 이현배 심재권 등 해위를 방문해 함세웅의 지혜로 해위의 서명을 받다.
18:00 이현배를 뺀 전원이 동교동에 가 후광의 서명을 한다. 저녁식사.
쎄실에서 서남동 서명
22:20 예춘호 문익환 이문영이 한완상 댁에 가서 서명 받다.
문익환 이문영이 김관석에게 가 서명을 거절당함. 안병무는 시간이 없을뿐더러 병이 있는 그를 다시 옥고를 치르게 하지 말자고 서명 받기를 포기하다.


5. 7. 수
오늘 성명서「민주화촉진국민선언」을 발표하기에 앞서 신변정리를 한다. 도장을 현아 엄마에게 맡기고 감옥에 넣을 책 20여권을 고른다. 이렇게 감옥가는 것을 불사하고 내는 선언의 요점은 일곱 가지인데, 요약하면 민주주의하자는 것이다. 1. 계엄령 해제 2. 신현학 총리의 사퇴 3. 전두환의 공직사퇴 4. 민주인사들의 복직 5. 언론·방송에 대한 각성촉구 6. 유정회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해체 7. 정부개헌심의위원회의 해체 등이 이 일곱 개의 요구들이다.
07:00 동대문성당에서 고은 이태영 김종완 김윤식 김병걸이 와 계셔서 서명(단 이태영은 김종완이 받아옴)
08:20 중앙상임위원이 5가 현관에서 기자들 약 20명과 만나다. 발표할 장 소가 없어서 서명한 성명서를 뿌린다.
10:00 해위댁에 가서 성명서 발표를 보고하다. 딴 행동을 못하시게.(문익 환 김승훈 고은 계훈제 이문영)
16:00 고려대 구내에 대자보로 국민연합성명서가 나와 있다. 성명서를 보 고 있던 어느 학생 말이 국민연합을 민주화운동의 총본부로 결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석간에는 단 한 줄도 안 난다. 재야가 단결하는 것을 정권이 싫어해서인데, 중앙석간에 꽤 큰 백지부분이 나와있는데 짐작컨대 성명서 기사일 것이다. 서명자는 22명이다. 이중 5.17사건으로 카톨릭인사 5명은 아예 기소가 안되고, 나머지 16명 중 내란음모자 5명, 계엄령 위반 5명 그리고 불구속이 6명이다.


5. 8. 목
(외대교수일동,「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입장」발표)

9:30 함석헌 사모님 추도식에 참석(한승헌 안병무 서명 받음)
11:00-13:00 문익환이 한강성당에서 오태순 김택암 정덕필 서명을 받음
13:00 충정로 선교교육원에서 원본을 복사하고 송건호 문익환 서남동 이문영이 점심
14:00 대법원 판사에 아카데미 사건 진정서를 내기 위하여 대법원 방문 (서남동 변형윤 조남기 박경서 김승환 이경배 등)
15:30 쎄실에서 예춘호 문익환 심재권 이문영이 만남
16:00 서울구치소에 있는 백기완 서경석을 예춘호 문익환 이문영이 방문.

정부가 못난 짓을 해서 정부가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다. 예를 들어 나를 중정이 일본에 못 가게 한 대신 어제 같은 성명서가 나왔다. 어제 집회허가를 안 해주니까 이 점을 함세웅이 언급해 해위가 정부에 대해 화를 내고 서명을 했다. 어제 성명서 일부를 김상엽 고대총장에게 주면서 개헌심위의 부위원장을 사임하라고 한 것도 작은 득이다. 아카데미사건으로 진정서를 오늘 대법원에 낸 것도 하나의 득이다.


5. 9. 금
(전국금속노련산하 조합원 1천여명, 금속노련 80년도 정기대의원총회장 점거)

6:00 지식인선언준비위원회를 충정로 선교교육원에서 모인다. 변형윤 김철수 리영희 유인호 이호재 현영학 장을병 홍성우 김용준 이호철 김병걸 등 포함 15명 참석. 문동환은 미국에 갔고 백낙청은 연구실을 지키겠다고 하고 성내운은 피신중이다. 이 회의를 서남동과 내가 잘 가동해서 재야에 붙여야 할텐데….


5. 10 토
(정부, 제헌공청회를 취소, 최규하 대통령, 사우디·쿠웨이트를 공식 방문하기 위해 중동향발. 전국 23개 대학 총학생회장이 비폭력 교내시위 원칙을 발표. 동국대 교수 198명 민주화와 학원자유화를 요구해 시국선언문 발표.)

09:00 동교동에서 후광이 예춘호 문익환·이문영과 스케쥴을 의논하다. 국민연합이「촉진운동」을 해달라, 동학제에 오라 등을 제의.
12:30 YWCA 조남기 아들 결혼식에서 김용복 이재정 김상근으로부터 지식인선언에 서명받음. 문익환은 동학제에 안 가는 것을 확인. 나 혼자만이라도 갈까를 묻는다.「그런 곳에 가면 해위와의 관계가 어려워진다」가 그의 말이다. YWCA에서 만난 김관석 부인은 후광이 경주에서 제복입은 것을 비난한다. 김관석은 5월7일 서명을 거절하면서 사건이 일어나면 조정하는 일을 하겠다고 문익환과 나에게 말했는데 이런 고루한 생각으로 남편을 잘 도울까?
14:00 정동회관에서 김병걸 딸 결혼. 고은이 동학제에 안 간단다. 결혼식 에 온 이희호 여사가 실망한다.
16:00 문익환 계훈제 이문영 심재권이 해위댁 방문. YWCA 사건지지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 건으로. 우리가 갔는데 거산이 와있다. 그의 말에 영향받은 듯 해위가「학생들 중에 공산주의자는 없을까요? 학생들이 더 심하게 안나왔으면 좋겠는데…」라고 말한다. 아무도 동학제에 안 간다. 저녁에 나는 고대 이종범 교수댁에 간다. 총장내외와 법대교수들이랑. 이렇게 나는 동학제라는 잔치에는 안 가고 동료교수네 잔치에 간다.


5. 11. 일
쉬고 싶고 지쳤다. 어제 잔치에 못간 좌절감이 크다. 6인 설교자중 문익환과 나만 갈릴리 교회에 참석하다. 저녁뉴스에 후광이 재야와 협의해서 거산에게 입당권유 하겠단다.


5. 12. 월
15:30-01:00 북악스카이파크 호텔서 재야 15명이 모인다. 안병무 박세경 문익환 한승헌 이문영 계훈제 등이 정당에는 안 들어가겠단다. 한 박사 모친 작고하다.


5. 13. 화
(고려대 교수 236명, 교수협의회 발족. 연세대생 주축의 시내 6개대학 2500여명의 학생이 광화문에서「계엄철폐」를 외치며 야간시위)

한완상 모친 상가댁에서 09:00, 13:00-16:00, 20:00-23:00 재야사람들이 만나다.


5. 14. 수
(전국 27개 대학 총학생회장단 가두시위 결의)

07:00 국민연합 중앙상임위회의. 참석자: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계훈제 조성우 장기표 김영남. 3개 행동강령을 결의함. ① 리본을 단다 ② 군대불복종운동 ③ 20일 장충동집회. 성명서 초안을 NCC인권위에서 타이프 치다.
12:00 김승훈신부관에서 함세웅이 행동강령에 반대한다. 과격한 책임을 이쪽이 지게된다고.
14:00 시립대 강연약속을 데모로 못 지킨다. 집에서 쉰다. 전화가 문익환 으로부터 와 나간다.
5가에서 사회안정법공청회에 참석. 리영희 문익환이 신민당 공격.
끝나고 사모아에서 함세웅案을 검토. 차라리 내지 말자고. 왜냐하면 북한이야기하는 것이 불필요해서이다.
22:30 예춘호, 계훈제, 문익환과 함께 광화문에 가 데모학생들을 본다. 대 규모 데모이며 가두진출의 둘째 날이다. 예춘호 말「A는 안되겠구만. 윤보선 지지해. 그래서 전에 서명을 안 했어. 고은은 이 때문에 화가 났어.」걱정이다.


5. 15. 목
(서울시내 30개 대학 7만여명, 도심서 밤늦게까지 시위)

8:30 함신부관에서 문익환 예춘호 계훈제 이문영 김승훈 함세웅(장기표 심재권)이 두 개 안을 합친다.
11:00 해위댁 방문(문익환 예춘호 계훈제 이문영). 행동을 시작하는 시한 을 안 넣기로 한다. 점심 후 동교동 방문. 서남동 이해동이 이미 와 있다. 후광이 행동강령 2,3을 부드럽게 고친다. 군이 무력사용하지 말 것을 종용하되, 시청 앞 집회도 말 것. 행동일도 늦출 것 등이다. 내일 9시에 동교동에 거산이 와 민주화를 위해 후광과 협력다짐을 한덴다.
17:00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함석헌 방문 서명
20:00시까지 문익환 예춘호와 데모구경. 서울역 앞에서 남대문, 옛 명지대 앞길, 중앙일보, MBC를 걷다. 남대문 길이 학생과 시민으로 메워져 있다. 남대문 옆에서 페퍼백자동차가 불타고 있다. 군인트럭이 남쪽으로 질주해간다. 문익환의 손을 잡고 뛴다. 곳곳에서 숨이 막힐 정도로 가스에 시달린다.
20:00-22:00 셋이서 저녁. 문 목사 말이「이 박사가 맥주 마시는 것이 처음이다.」라고 한다. 나는 전두환의 양동작전에 말려든 대학생 데모가 불안했고, 내 몸은 몹시 지쳐있었다.
밤에 동교동서 전화. 내일 9시에 예 의원과 배석해 달라고.


5. 16. 금
(최대통령 일정 앞당겨 귀국. 전국총학생회장단 가두·교내시위 일단 중단키로)

09:00 후광·거산의 6개항에 걸친 공동결정에 배석한다. 재야 이문영 예춘호, 신민당 박일 박권흠
16:00 수산대 약 350명 앞에서 강연. 7:30 영락교회 청년·학생회에서 강 연.
23:00 침대차로 귀경.





5. 17. 토
(전국 55개대 학생 대표 95명, 회의토의 도중 대다수 연행됨)

이날 일기는 비어있다. 새벽에 서울역에 닿았을 것이며, 그날 생각이 안난다. 생각이 난다해도 생각을 여기에 쓸 수도 없다. 5.17 일기는 5.18 아침에 써야 했기에 5.17날 일기는 없다. 다만 한 마디를 쓸 수 있다. 나는 5.18 0시를 기해 발표된 비상계엄 확대, 정치활동 중지, 대학휴교령 직전인 5.17 밤 11시경에 내 집에서 중정직원 세 명에 의해 끌려간다.

5. 17
나는 열 일곱 번째 강제연행에 당황하지 않았다. 다행히 나를 데리러 온 중정직원 담당이 나에게 선하게 대했다. 이층 서재에 그 부하직원 두 명이 올라가 갖고 갈 증거라도 뒤지고 있는 사이에, 담당은 나에게 뭐 감출 것이 있으면 감추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나는 윗저고리를 입으면서 안 주머니에 있는 수첩을 오히려 꺼내지 않았다. 취조할 때에 나는 드러내지 못할 것이 없는 당당한 일을 했으니까 일정이 적혀있는 수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내 큰 딸 현아는 중정직원에게 차 대접을 했고, 내 마음을 가라앉히라고 음악「사계」의 음반을 틀었다. 작은 딸 선아가 연행되어 가는 자동차 뒤의 번호판 사진을 찍느라고 후레쉬 터트리는 빛을 나는 끌려가는 자동차 안에서 감지했다.

그러나 나는 빛이 없는 어두운 데로 갔다. 남산에 있는 중정 지하에 여러 층이 있는 것 같았다. 그중 한 층, 약 3평쯤 되는 취조실이 쭉 연이어져 있었다. 거의 끝에 있는 방이 내 방이었다. 55일간을 갇혀 있었는데, 담당이 나에게 심하게 대하지 않았다. 나는 이놈들이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더듬어야 했다. 육군형무소에 옮겨지기 직전엔 감시원이 없고 내 방이 비어 있었다. 고려대 졸업생이라는 사람이 들어와서「광주에서 사람이 많이 죽어서 사형 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에게 직접 전해준 정보였다. 그러나 55일간 나에게 정보를 주는 이가 없었다. 다만 여름이라 방문을 열고 있어서 복도에서 취조관들이 서로가 말하는 것도 들었고, 내 양 옆 방에서 한승헌과 이해동을 툭하면 두들기는 소리를 들었고, 멀리서 비명소리도 들었다.
복도나 방안을 살펴서 동료들의 표정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누가 잡혀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화장실 갔을 때 김동길을 만났는데, 아마 그로부터 광주에서 사람 많이 죽인 것을 들었던 것 같다.

실컷 두들겨 팬 사람들이 세 그룹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내 양 옆 방에 있는 이해동·한승헌 두 분이다. 이해동 조사관이 그 건너편 한완상 취조실에 가서 한완상 조사관 보고「나는 애국심까지는 몰라도 애향심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승헌 이해동이 호남 사람이니까 대구사람인 전두환이 겸직을 법으로 금지한 중정부장의 대리를 하면서까지 우리를 잡아들인 의도가 알만하였다.

다른 하나는 정치인들이 호되게 매맞은 것을 알았다.「이택돈이 때렸다고 몸이 어떻게 그렇게 튀어 올라오지?」「별거 아니던데」라고 자기네끼리 오가는 말을 들었다. 아마 예춘호가 되게 맞았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끝으로 하나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이 호되게 다뤄진 것을 나는 알았다. 서남동이 취조 받는 방이 바로 화장실 앞방이었는데, 서남동이 나를 보고도 못 본체 할뿐 아니라 눈알이 죽은 사람의 눈같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서남동을 공산주의자로 몰고 있는 것을 직감했다.

이 사람들이 후광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았다. 하루는 조사관이 중정부장대리의 훈시가 있어서 나갔다 와서는 날보고 부장대리가 역사를 만드는 방향으로 일하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그러니까 후광을 죽이라는 것이 방향인 것이다. 나는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이놈들이 후광을 죽이더라도 운동이 되도록 죽이게 해야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단순히 전라도 사람으로 죽이게 만들 수가 없고, 정치욕으로 환장한 사람으로 사건을 조작케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공산주의자로 조작하게 할 수도 없으며, 다만 재야사람으로 죽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국내는 어두운 세상임을 직감했다. 다만 재야사람이라야 국제적인 연대가 가능하고, 국제적 관심만이 솔제니친의 말과 같이, 악한 체제 밑에서 박해받는 사람을 살려낼 수도 있다고 믿었다.

내 조사관이 북한 노동신문 5 개년 분을 대상으로 해서 쓴 내 박사논문을 갖고서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나를 공산주의로 모는 조사를 안 한다는 것을 감지했다. 어차피 내 연구는 5개년을 두 시기로 나누어서 비교한 것인데 후기가 전기보다 나빠졌기 때문에 나를 북한 고무찬양으로 몰 수 도 없는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권위형 통치의 원형을 찾는 글로서 원래는 노동신문이 아니라 서울신문을 갖고서 쓰려던 것이었다. 나는 내 논문의 모델에 따라서 그후 서울신문을 분석해「권력과 지성」이라는 글을 썼고, 이 제목으로 나는 고대총학생회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진보적 학자 리영희 교수를 복도에서 봤었는데 안 보이는 것을 알았다.

나는 취조관이 하도 안 때려서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만일에 죄가 없다고 나가라고 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 점을 안심했다. 왜냐하면 4월 14일에 불법으로 전두환이 중정부장 대리가 된 이유가 바로 우리를 잡기 위해서이며, 내가 도쿄대학에 다녀오도록 여권 내주기를 이한빈 부총리에게 부탁했는데도 부결된 것도 다 미리부터 나를 포함시키려는 각본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멀리서 매맞아 소리지르는 비명을 계속 들었다. 학생들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한승헌 이해동은 매를 맞았다. 재야가 내란음모했다고 조작해 올라옴을 감지했다. 나는 취조관의 약이 오르게 일부러 깐죽거렸다.

내 조사관이 자리를 비웠다. 그 사이에 한 사람 때리는 사람이 들어와「네가 말이 많다면서…」하면서 무조건 침대 각목으로 나를 아무데고 닿는대로 때렸다. 나는 비명을 안 질렀다. 몸에 짝 붙는 바지에 비단 셔츠에 금목걸이를 했고 수제구두를 신은 얼굴이 좀 길고 검은 사람인데 후에 나와서 들으니 서남동도 담당조사관이 안 때리고 이 사람이 때렸댄다. 이 사람은 나를 한 한시간이고 때린 후에 아무 말 않고 나갔다. 또 때리러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때리는 것은 그것으로 끝냈다.

한참 있다가 조사관이 들어왔다. 내 손도장을 찍게 하고 조작한 허위사실은 5월 12일 밤 스카이파크 호텔에서 각목을 준비해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모의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 밤 모임은 단 한 사람도 앞으로 정치하겠다는 재야가 없는 것을 확인한 회의였음을 말했다.「왜 다들 그랬다는데 당신만 아니라고 해?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군」이라고 조사관이 말했다. 또 맞을까봐 겁이 났다. 긴 옥신각신 끝에 묵시적 동의를 나타내는 어휘를 그가 골랐고, 이 글에 나는 손도장을 찍었다.

이렇게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 손도장을 찍은 후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다. 매맞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생각만을 했다. 후광이 나 때문에 죽는다는 것보다는 내가 죽을지 모른다는 내 생각만을. 아까 쓴 대로 누가 나에게 광주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어서 사형 당하지는 않겠다고 한 말도 들었다. 육군 형무소에 옮겨진 후 면회 온 집사람으로부터 계엄령위반자는 서울구치소에 보내졌고 육군형무소에는 소위 내란음모자만 보내진 것을 알았다. 한승헌 이해동 한완상이 서울구치소에 있는 것을 들었다. 육군형무소에는 학생들과 재야만이니까 학생들을 55일간 실껏 때려서 내란음모를 조작해 어른들 보고 시인케 했던 것이다. 집사람 말이「여기 온 몇 사람은 죽인데요」라는 말도 들었다.

우선 내 마음에 아무 자랑이 없었다. 찬송가 중에서 부를만한 노래가 없었다. 찬송가에 나오는 십자가를 지겠다는 가사를 노래할 기운이 안 나는 나임을 알았다. 점차로 내가 남을, 후광을 죽게 한 것을 인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면회소에 갔다가 구내에 서 있는 큰 은수원 사시나무를 보고서, 이 큰 나무도 나무를 심어서 자라게 한 것이 아니라 종자를 심어서 그 종자가 땅 속에서 썩어서 나무가 움터 나왔다고 생각하니 좀 마음이 편해지는 듯 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사람에게 면회소에서 이런 말도 나눴다. 나는 이런 저런 자괴를 그후 쭉 지금까지 하고 있다. 2000년 7월 어느 날, 대통령이 된 후광이 사건자들 내외를 모두 청와대에 부른 적이 있다. 이 때에 집사람이 내 남편은 죄 없는 선생님을 매맞게 하고 손도장 찍은 것을 늘 부끄러워하고 있다고 여러 사람 앞에서 말했다.

재판 첫날 나는 재판관을 향해서 손을 들었다. 재판관이 멋도 모르고 내 발언을 허용했다.「재판 일정을 정하는데 관계가 되어서 말하겠습니다」로 말을 시작했다. 재판관이 내 발언을 제지하지 않았다.「조사 받을 때 내 양쪽 방에 한승헌 이해동이 있었는데」하고 내 말을 끊었다. 말의 제지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 뒷말을 다음과 같이 쏟아 부었다.「이 분들은 저와는 달리 무지하게 고문을 당해 몸 사정이 나쁘니 재판을 천천히 하십시오」가 내 말이었다. 뒤에 앉아 있던 외신이 이를 받아서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임을 보도했다. 내신은 죽어있었다. 나는 후광을 죽도록 손도장을 찍어준 약한 사람이지만 재판정에서 나는 다행히 담대했다. 이 점을 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알고 감사한다. 날보고 재판관이 앞으로 정치하겠느냐고 물었다.「정치를 하고 안 하고는 국민의 고유권리이며 사적인 것인데 왜 묻습니까? 내가 정치를 않는다고 말하면 군인들이 들어서서 정치하려고 묻습니까?」라고 별들 앞에서 말했다. 나는 참 다행이었다. 어떤 계엄령 위반 정치가는 이제는 집에 가서 아이들이나 돌보겠다고 까지 말했는데….

검사의 심문과 변호사의 반대심문 중 나는 내 말만을 하지 않고 이때에 후광은 어떠어떠했다고 말했다. 후광을 김 선생님이라고 칭했다. 재판관이 날보고「피고를 존칭으로 언급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김대중 선생을-여전히 김대중 선생으로 나는 말했다- 특별히 존경하는 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 분에게만 깔고 앉을 방석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며 재판관을 놀렸다. 형무소를 향하는 버스 안에서 후광은「이 박사, 나는 다리가 아파서 담요를 받고 있는데 그렇게 말해 이것마저 빼앗기면 어떻게 해요?」라고 말했다. 나는「그렇게 되면 내놓으라고 말하죠」가 내 말이었다. 이 말을 후광이 대통령 된 후 두 번이나 나에게 말했으니 내가 한 말임이 틀림없다.

나는 무기형 선고에서 20년 선고로 줄었다. 그런데 후광은 사형이 선고되었다. 교도관이 입회하는 면회에서 집사람에게 국제적 연대가 어찌되었는가를 물을 수가 없었다. 암호가 은연중에 발달했다. 예를 들어「홍걸이네와 옥자네 결혼이 안 될 것 같다」고 말하면「후광문제로 전두환과 일본간의 관계가 나빠지고 있다」는 식으로. 전두환이 레이건 대통령의 첫 국빈으로 미국에 간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후 마음을 놓았다. 후광이 드디어 무기로 감형되었다.

나는 김해교도소에 있었는데 내가 석방되는 것을 이런 식으로 미리 알았다. 나를 지키러 들어온 한 교도관에게 나는「일본 놈들이 나쁜 놈이죠」라고 말했다. 후광문제로 한일관계가 나빠지니까 전두환 정부가 반일운동을 부추기는 것을 교도소 라디오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천안의 독립기념관도 이 운동의 일환으로 생겨난 부산물이었다. 구내방송을 통해 재소자들로부터 독립기념관 세우는데 5백원씩을 각출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도관에게 또 다시「일본 놈들이 나쁜 놈들이죠」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교도관 말이「나쁜 것을 일본 놈들이 알기는 아는 모양입니다. 특사가 온뎁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듣자마자 감방 안에 내 짐을 정리했다. 교도관이 왜 그러냐고 묻는다.「나도 나갈 날이 있지 않겠어요」가 내 말이었다. 이 교도관이 나를 내보내면서 내 예견을 놀라워했다.


5. 17과 오늘

오늘을 규정짓고 오늘을 잉태한 종자가 5.17 직전이나 5.17 어디에 있었으며, 오늘을 바로잡는 교훈 역시 어디에 있었는가를 더듬는 차례이다. 적어도 다음 세 가지의 실로 짜여진 직물이 오늘이라는 직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첫 번째는 후광이라는 실이다. 후광은 정당성 없는 정권에 의하여 박해받은 유일한 정치가였다. 재야 중에서도 후광이 유일하게 이끌었고,「김대중(金大中)내란음모사건」에서 비록 고문에 의한 것이라고는 하나 동지라는 사람들이 그가 내란을 했다고 손도장을 찍었을 때에 그는 더욱 애처로운 희생양이었다. 그가 박해받았다는 사실 하나가 바로 그가 재야의 구심점이어야 한다는 당위였다.

그러나 박해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당위의 근거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실천은, 즉 행동하는 양심은 이론을 만들며 실용성 자체이기도 했다. 후광은 재야시절에 유난히도 비폭력투쟁을 역설했다. 이점에서 간디를 존경해마지않았던 함석헌과 국민연합의 공동의장을 함께 했을 것이다. 후광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대안을 지닌 반대자였다. 후광이 낸 대안은-이 대안이 잉태되어 오늘의 후광의 업적을 만들게 된 대안은-뭐니뭐니해도 1970년대에 후광이 집필한『대중경제론』과 남북공존론의 두 가지였다.

『대중경제론』을 더욱 다듬어 그는 미국 망명시 하바드대학 출판부에서 한 권의 교과서를 만들기도 하였다.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함께 이룩하자는 이 이론을 역대정권이 경청하지 않아 IMF 경제위기를 맞는 비극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런 이론을 지닌 후광이었기에 IMF 경제위기를 극복해냈다고 생각한다.

남북공존론을 후광이 펴게 된 심층적 동기를 나는 아직도 그에게 물은 적이 없다. 다만 내가 짐작하기로는 박해받는 정치가로서 특히 지역차별을 내세웠던 정권에 의하여 고통을 겪으면서 나라 안에서는 동서가 화합해야 하고, 한반도 내에서는 남북이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점에서 어머니의 사랑은 어린아이를 잉태해 출산하는 어머니의 고통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상기케한다.

두 번째는 어두운 색의 실인데, 이 실의 이름은 약한 정부라는 실이다. 이 실은 박정희 사후 너무나 늦게 찾아온 민주화였지만 그것도 결국은 그를 박해했던 주역과 공동으로 정권을 수립하여 간신히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약한 정부라는 실이다.

돌이켜 볼 때에, 지난 세기 말, 많은 구체제들이 무너지고 여러 나라들 안에 경쟁적 정당이 집권했다. 바웬사의 폴란드, 하벨의 체코, 옐친의 러시아, 만델라의 남아공 등이 이런 나라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박정희 이후 쿠데타한 전두환 정권이 들어왔고, 전두환을 이어 노태우 장군이, 노태우를 이어서는 노태우에게 항복하고 들어간 김영삼이 들어선 다음에서야 오늘이라는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박정희 사후 18년만의 일이다.

왜 이렇게 늦었고 왜 정부가 약한가? 정부는 국민이 만드는 것이기에 약한 정부를 만든 책임을 한 두 사람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오늘도 이 약한 정부라는 실의 현존을 보여주는 한 예를, 정치 1번지라는 서울시 종로구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해인 2000년 4월 총선에서 나를 바로 5.17사건으로 기소했던 육군대위 검사가 당당하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나라가 내 나라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5.17 직전과 5.17 경험이 이런 약체정부를 어떻게 잉태했었는가를 다음 몇 가지로 검출해 보고자 한다.

1. 80년 4월 14일에 해위는 그를 찾은 박영숙(안병무 부인), 이종옥(이해동 부인), 김석중(내 집사람)에게 어느 미국서 온 사람의 말이라 하며 두 사람 중 한 사람-그러니까 후광을 두고 하는 말-은 사상이 나쁘니까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5월 16일 양 김씨의 공동선언의 기초작업에 후광 측으로 참가했던 나는 거산이 전두환의 중정부장서리 겸직을 사임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꺼려한 것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해위는 전두환이 정권을 잡자마자 곧 변절했다. 그는 우리가 교도소에 있을 때에 그를 방문한 이해동 부인과 내 집사람 앞에서 텔레비젼에 비치는 전두환의 얼굴을 가르키면서「사람이 밉지는 않게 생겼죠」라고 말했다.

2. 정치가들의 생각이 이 정도인데, 정치가들에게 비판적이어야 하는 언론인은 이러한 정치가들보다 더욱 고루한 것을 확인한 곳이 바로 4월 25일의 관훈클럽 토론장이었다. 나는 이 토론 참석 이후 왜 십계명에 증거 없이 이웃을 비방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독재 체제 밑에서 시달렸던 유대인들이 바로 이 터무니없는 비방에 시달렸을 것이 자명하다. 후광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고 이것만으로 안되니까 전라도 사람으로 매도했던 것이다.

3. 학계는 어떠했나? 기자를 길러내는 대학의 총장이나 총장을 지낸 사람들은 어떠했나? 자기 밑의 학장을 시켜 나의 복직조건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저울질했던 고대총장은 피 흘린 정권의 초대총리가 되었다. 이 총장이 학계에만 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예언한 유진오 헌법학자는 피 흘린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이 되었다. 뭔가 이 두 사람이 이상하다고 내 마음에 걸려서 내 일기에 적었더니 과연 내가 교도소에 있는 동안 각각 제 길로 가고들 말았다.

4. 초강경 정권, 그 중에서도 정치군인들이 이렇게 여러 가지로 깨어있지 못한 국민을 향해서 구체적으로는 대학생을 향해서 5.17직전에 한 일이 무엇이었나? 학생데모를 학생 자발적으로 한 것처럼, 대학마다 교문을 활짝 열게 하고 대거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한 양동작전을 한 것이 전두환의 군부였다. 학생들이 데모를 자제할 자세가 있었고, 특히 5월 16일에 전국총학생회장단이 가두·교내시위를 일단 중단하기로 하였지만, 대학마다 이상하게도 교문이 아예 열려져 있었다. 5.16은 금요일이었고, 주말만 지나면 개회하기로 된 국회에서는 계엄령 해제가 의결될 전망이 있었던 때에 오히려 과격한 시위가 생겼던 것을 우리는 의심과 걱정의 마음으로 바라보았었다.

5. 한편, 늦게 서야 오늘을 맞이한 우리 쪽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단결을 못해서였다. 국민연합의 세 의장 중 해위는 같은 의장 중 한 사람인 후광이 아니라 정권의 박해대상도 아닌 거산과 손잡고 뒤틀어댔다. 80년 3.1절을 기해서 국민연합이 성명을 냈을 때에도 해위는 성명서에도 없는 말, 양 김씨를 조정하겠다는 엉뚱한 말을 했다.「거산을 민주화 운동을 하도록 종용하겠습니다.」가 아니라, 거산을 높이고 양 김씨의 분열을 도모하는 과도정권의 페이스에 해위는 장단을 맞췄다.

김정순 장로의 염려와 같이 김관석 박형규는 소극적이었다. 이들은 NCC를 못 떠나는 듯 했다. 문익환은 후광에게 힘을 실어주기보다는 뭔지 독자노선이 있었다. 한번은 신문조간에 예춘호가 후광의 비서실장이고 내가 연구실장이라고 보도된 것을 보고 문익환은 나에게로 와 후광을 떠나라고 말했다. 「저놈들이 후광을 박해하는데 어떻게 떠납니까? 박해받은 자를 버리고 무슨 재야가 있고, 순수한 재야가 무엇 때문에 필요합니까?」라며 나는 단호했다. 문익환은 출옥 후 선민주가 아니라 선통일 노선으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큰 사람 문익환은 자신이 홀로 그의 말에 책임을 지는 선통일론자였다. 그는 혼자서 거듭 옥고를 치렀다. 5월 12일 회의에서 보듯 정치하겠다는 재야는 나를 포함해 한 사람도 없었다. 5월 10일 토요일에 나는 동학제라는「잔치」에 가자고 친구들을 불러댔으나 아무도 응하지 않았고, 나는 지치고 피곤해서 그 다음날 일요일에 집에서 누웠다. 그렇게 분주하게 다니던 내가. 그러나 나는 이 재야의 정치기피증을 오늘에서야 이해한다. 그것은 재야운동까지 한 사람들을 담아내는 민주제도가 후술하듯 제시되지 않는데 어떻게 정치를 한다고 나설 수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봉사하는 것이 정치이지, 한 자리하는 것이 정치이기에는 우리는 순수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어쨌든 이 툭하면 갈갈이 찢기는 운동체를 어떻게 하나로 만들까를 고심했다. 이러한 내 고심을 후광이 아는 듯했다. 날보고 후광이「이 박사를 사람들이 좋아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없었고 시간도 없어서 그날이, 5.17이 벼락같이 우리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6. 후광은 82년 12월 23일부터 85년 2월 8일까지 미국에 망명 중이었다. 후광이 한국에 없는 2년 2개월 동안 거산이 움직였다. 후광 망명의 약 5개월 후 어느 날 거산이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이때에 재야는 회의를 거듭해 동조단식을 해도 안 잡혀갈 정도의 인물로 함석헌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을 정해 동조단식을 했다. 우리는 단식에 들어가자마자 곧 잡혀는 갔지만 그날 밤으로 풀려났으니까 재야회의의 예측이 맞았다. 이렇게 재야는 거산을 도왔다. 그러나 단식투쟁의 성공을 거산은 자신의 세력기반 구축의 기회로 삼았다. 거산이 수 차례 나를 만나 자신을 도와달라 했다. 나는 후광을 앞세워 함께 하는 데에만 참여할 것을 말해 거산의 청을 거절했다.

84년 5월에 민주화촉진협의회가 발족되었을 때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은 이 협의회가 양 김의 단합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대해 김상협을 후광쪽 대표로 지명했다. 거산의 단식 때 동조단식했던 보람도 없이 거산이 점점 벌어져 나가 드디어는 노태우 정당에 들어가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이 된 후는 동조단식한 5인 중 한 사람, 홍남순을 빼고는 다 남과 같이가 아니라 더 나아가 적과 같이 대했다.

함석헌옹이 돌아가시고 그의 기념사업회 허가를 내고자 했으나 불허당했다. 문익환은 오랜 시일을 옥중에 있었다. 청와대에서 YH사건자를 불렀을 때 거산은 고은과 나를 초청하지 않았다. 이와는 좀 다르게 후광은 집권 후 거산 때의 고위공직자들을 그대로 기용했다. 그러나 후광 때도 후술할 민주제도의 결핍 때문에 유진산 이전에 보았던 신익희 조병옥 장면 김도연 등 의 거물들이 합의해서 정치하는 '위인들의 정치'를 못 열었다.


마지막으로는 빛 바랜 색깔의 실인데, 민주제도가 결핍된 민주주의라는 실이다. 이 실은 민주제도가 있어야 제 빛을 내는 실이며, 제 색을 내는 이 실이 후광이라는 실과 또 약한 정부라는 실과 보합되면 합하여 멋진 직물이 되는 가장 요긴한 실이다. 정권교체를 한 정부가 구세력 사람들과 함께 일한 다는 것은 민주제도만 있다면 오히려 정권의 관용성을 보이는 것이기에 화사한 정치문화를 열게되는 일이다. 또한 민주제도의 틀 속에서는 함께 정치하는 사람들의 불법·부당도 단속할 수 있는 장점도 있게 된다.

이 경우 민주제도란 권력을 쥔, 그래서 권력남용을 할 수 있는 여당 내의 제도를 말하는 것인데, 여당이 당내민주주의와 행정부내 민주주의를 함을 그 내용으로 한다. 후광은 대선 전에 자신이 준비된 대통령임을 강조했고, 그 한 징표로 좋은 평가를 받은 국회의원 수가 자신의 당에 많다는 것을 말했었다. 그런데 막상 집권 후에는 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잘 활용하지 않았다. 당의 일을 당에게 맡기고 있지도 않아, 국회의원의 공천은 지역구내 당원들이 선출하고 있지도 않다. 금년 9월 UN회의에 참석하기 전 김 대통령이 3인 기자와 TV에 중계되는 회견을 했을 때, 정치는 국회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당의 정치는 여전히 선출이 아닌 총재가 임명한 최고위원의 관여를 못 벗고 있다. 행정부내에는 대통령과 청와대를 벗어난 자율성이 안 보인다. 장관들이 김대중 씨만큼 신명나게 일하며 대통령을 가르치는 장관이 보이지 않는다. 행정관료들은 일본의 관료정도만큼이라도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어야 할 터인데, 우리의 공무원은 아직도 먼 옛날의 '아전' 전통을 잇고 있는 듯 보인다.

나는 정권교체만 되면 민주주의가 저절로 되는 것으로 알았는데, 이것을 미리 미리 알고 대비하지 않았던 책임이 80년에 민주제도연구소장을 맡았던 나에게도 있다. 나아가 오늘의 민주제도 결핍증의 조짐이 5.17직전의 후광에게도 있었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위에 적은 5.17이전을 돌이켜 볼 때에 후광이 마치 자기가 부릴 아랫사람 찾듯이 재야사람들에게 정치하자고 열심이었던 것이 바로 이「수평적 정권교체 후 민주제도 결핍증」의 초기징후였다. 그 수많은 회동에서 후광은「새 나라의 민주제도에는 당내민주주의와 행정부내 민주주의가 있으니 함께 일합시다」라고 권하지를 않았다.

위와 같은 민주제도가 없으면 정치를 무엇을 갖고서 하게되나? 불공정한 측근을 갖고서 일하게 된다. 오늘날의 과제는 경상도 사람까지도 여당에 투표하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행여나 여당이 경상도 사람에게 돈으로 거래를 한다면 이것은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푼도 안주더라도 경상도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대통령 주변인물 아무를 찔러봐도 私가 안통하고 공정하다고 느낄 때에만 경상도 표가 여당에게 올 것이다.

예전 공화당 집권 때에 읽었던 누군가의 책 African Democracy가 생각난다. 맨발로 다니며 이도 안 닦고 다니는 문맹인 아프리카 사람들도 자기네 추장이 정직한지 돈을 먹었는지를 마치 개가 냄새맡듯이 잘 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IMF경제위기 초기 때의 민심, 서랍 속에 있는 1달러 짜리를 내다가 팔았던 민심이 없어졌다. 아이의 돌반지까지 가져다 줬던 서민들이 뭔가 이상한 냄새를 맡아 민심이 이반했다고 보아야 한다.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후광이 일산자택 한옥대문을 나서면서 했던 첫마디는「이제부터 나는 민주주의 하겠습니다」였다. 민주주의의 실이 밝은 빛으로 바뀌어 질 때에 비로소 공동으로 정치하는 타당사람도 올바른 길을 가게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광만이 내놓은 업적-IMF경제위기 극복과 남북공존-을 계속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실은 역대정권에서도, 오늘의 야당에서도, 그리고 나아가 같은 아시아권 정치문화인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귀한 실이다. 후광이라는 실, 공동정부라는 실,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실이 모두 살아 있어서 전체의 직물이 화려함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 5.17에서 죽을 뻔했던 우리들, 오늘이라는 직물을 짜는 職人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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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력 *

1927년 서울출생, 73-84년 민주화운동과정에서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해직. 민주구국선언 서명, YH사건, 김대중(金大中)내란음모사건 등으로 4년 10개월간 투옥. 현재 경기대 석좌교수.



in http://dhk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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