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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8/01/07 (10:41) from 85.181.182.162' of 85.181.182.162' Article Number : 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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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의 고난만이 희망이다


약자의 고난만이 희망이다

김동환 (중앙대 행정학과)





1. 강자의 사상과 약자의 생활

사상보다 어려운 것이 생활이다. 위대한 사상을 논하기는 쉬워도 이웃의 가난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기가 어렵다. 사상보다 깊은 것이 생활이다. 사상은 소수의 엘리트들이 구축한 인공물에 불과하지만, 생활은 평범한 사람들이 생을 바쳐서 형성한 자연이자 역사이기 때문이다. 사상은 가고 생활은 남는다.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도 사라지고 그 이념도 시들해지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은 어제와 동일하게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이어진다.

어느덧 내 책상 위에서 현란한 언어와 복잡한 개념의 유희를 뽐내는 책들은 사라지고, 약한 자들의 생활을 기록한 책 한 권만이 남아 있다. 약하되 끝까지 약하고, 결국은 죽음으로 그 약함을 증명한 자들의 생활을 기록한 책, 성경 책 한 권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강자가 되기를 소망한다. 어려운 경쟁을 이겨내고 소수에게만 허용된 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만이 훌륭한 학생으로 대접받는다. 큰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가들만이 선한 기업가, 시대를 이끌어갈 리더로 인정받는다. 어느덧 우리 사회는 니체가 주장했던 것 이상으로 “권력에의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강자는 선이고, 약자는 악”이라는 사상, “강자와 약자를 효율적으로 판별하는 경쟁 시스템이 최고의 정의”라는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사상은 강자를 흠모하지만, 생활은 약자를 사랑한다. 강자를 흠모하는 소수의 천재들이 만들어낸 사상이 약자들을 지배하는 이념적 도구로 활용될 때, 생활 속의 약자들에 대한 사랑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희생을 선택하였다. 이것이 저항의 역사였다. 강자가 강자에게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강자에게 저항하는 것이었으며, 생활이 사상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순교의 역사였다. 저항의 결국, 곧 죽음으로 약자의 생활을 끝까지 지켜내는 것이었다. 순교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생활의 끝이 아니라, 생활의 가장 극렬한 한 단면일 뿐이었다.

사상과 생활. 사상과 종교. 강자와 약자. 이 두 가지 지향점은 사회과학자인 나에게 근원적인 질문들을 제기하곤 했다. 과연 두 지향점은 조화될 수 없는가? 나의 생계 수단이자 직업인 사회과학과 나의 신앙인 기독교가 조화될 수 있는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강조하고 독려하는 학교 교수로써의 나의 직업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과 희생을 기도하는 신앙이 조화될 수 있는가? 아니 본질적으로 나 자신은 강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약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지난 날 두 지향점 사이에서 방향을 정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에 내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곤 했다. 이제 사상보다는 생활이 중요하며, 강자를 흠모하기 보다는 약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점이 점점 더 명료해 진다. 그것은 사상으로부터의 변화가 아니라 생활에서의 변화였다. 1년간의 안식년을 전후하여 겪었던 생활 속의 경험들이었다. 이들 경험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니체의 사상과는 반대로 “탈권력에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2. 약자를 혐오하는 사회

안식년에 들어가기 전에 집필을 마치려고 했던 책이 있었다. 제자이자 동료인 김헌식과 함께 쓴 “촛불@광장 사회의 변화 메커니즘”이라는 원고였다. 월드컵과 붉은 악마의 응원, 노사모와 대통령 선거,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집회,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국회의원 선거 등 2002년 이후 우리 사회에 불어 닥친 변화를 한 마디로 “광장에 모인 촛불”로 상징할 수 있다는 점, 이러한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짧은 시간에 발생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창출한 근원적인 메커니즘은 “약자에 대한 지지를 증폭시키는 선순환”이라는 점을 논의한 원고였다.

이 원고를 집필하는데 모 대기업 연구소로부터 500만원을 지원받았다. 원고 출판 역시 이 연구소에서 담당해 주기로 했다. 우리들은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서 토론하고 수시로 전화를 걸어 논의해 가면서 신나게 원고를 써 내려 갔다. 학회에서 논문으로 발표하면서, 우리 원고의 약점을 발견하고서 부랴부랴 원고를 보완하기도 했다. 이윽고 연구소에 최종 원고를 제출하고서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제가 있으니 급히 연구소로 와 달라는 것이었다. 김헌식과 함께 담당자를 만나 보았다. 담당자의 이야기인 즉, 외부 심사 교수들은 우리 원고에 대해 좋다고 이야기했지만, 상급자가 우리 원고를 그대로 통과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상급자를 만나 보았다.

자리에 앉아 마자 상급자는 무슨 장황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우리 원고는 불순하다고 말한다.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더니, 사회를 전복시키려고 하는 글을 쓰는 철없는 짓을 왜 하느냐고 말한다. 숨이 막혀 온다. 그런 내용이 아니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그러면 원고를 어떻게 고치면 좋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때서야 그 분의 속생각이 드러난다. 원고에 있는 “약자(弱者)”라는 말을 없애라는 것이다. “약자”는 나쁜 말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밝은 부분도 많은데 왜 하필 “약자”를 말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순하고 철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이제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급자에게 말했다. “약자”는 나쁜 말이 아니라는 것, 성경에서 늘 말씀하고 계시는 단어라는 것, 예수님이 약자를 위해서 그리고 약자가 되어서 죽으셨다는 것, 아니 성경이 아니라 동양의 고전인 논어와 노자에서도 중요하게 말하는 단어라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 상급자는 “약자”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급자는 “약자”라는 단어를 중립적인 “소수자(minority)"라는 말로 바꾸라고 제안했다. “약자”라는 단어를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우리는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출판을 포기하고 돌아서 나오면서 우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거대한 높이의 콘크리트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걸어 나오면서 서점에 진열된 서적들을 보았다. 부자, 승자, 리더, 엘리트 등 진열된 서적들은 모두 강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강자와 약자는 일상  생활에서 누구나 사용하는 말이지만, 아직까지 사회과학에서는 무의미한 말, 비학문적인 말로 치부될 뿐이다. “권력에의 의지”가 일상화되어 “강자”를 찬양하고 “약자”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는 이 사회는 미쳐가는 것 같았다. 말년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다가 토리노 광장에서 졸도한 니체를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공허한 광장을 밝혔던 조그마한 촛불들은 불순한 저항 세력일 뿐이었다.

3. 강자와 약자를 가르지 않는 교회

“촛불@광장 사회의 변화 메커니즘”이라는 원고를 잘 아는 출판사에게 맡겨 놓고,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했다. 국내에서 박사 학위 공부를 한 나에게 미국은 친숙한 나라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미국의 우스터라는 조그마한 지방 도시에 떨어진 우리 가족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는지 알지 못했고, 최소한의 돈만 들고 간 우리 가족에게 미국에서의 생활은 어려움 그 자체였다.

어려운 처지에 있던 우리 가족을 도와 준 것은 Worcester Gospel Hall 이라는 조그마한 교회의 형제자매들이었다. 이 교회는 한국에서 홀 모임 또는 형제 교회로 알려져 있는 아주 작은 교회였다. 이태리 출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그 분들의 세 아들과 며느리들로 구성된 교회였다. 우리 가족은 일 년간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생활하면서 이웃 도시에 있는 홀 모임들을 방문하여 교제하곤 했다.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미국 홀 모임(assembly)에서의 경험을 책으로 출판했다. “주님을 사랑하는 형제들 - 미국에서의 모임 생활”이라는 작은 책이었다. 이 책을 읽은 몇몇 분들에게 격려를 받았다. 심지어는 한국과 일본에 홀 모임을 전파했던 캐나다의 형제님께서도 글을 읽고 멀리서 격려해 주셨다.

그런데 예의상 격려해 주는 분들도 있었다. 이런 분들의 공통점이 있다. 홀 모임은 다 좋은데, 성도들의 숫자가 너무 작아서 아쉽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제일 큰 홀 모임조차도 성도들이 100여명에 불과한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들은 근본적으로 권력을 지향하는 분이다. 이러한 분들에게 있어서 좋은 교회는 큰 교회, 헌금이 많은 교회, 날로 성장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홀 모임은 세상적인 권력을 거부한다. 우선 교회(church)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완전한 교회는 우주 전체에 걸쳐서 오직 하나만 존재할 뿐이며, 지역에 존재하는 교회들은 그저 모임(assembly)이라는 이름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권력을 거부하는 것이다.

홀 모임은 중앙 교단을 갖고 있지 않다. 영국과 캐나다, 미국 등지에 많은 모임들이 있지만, 그 어디에도 중앙 교단이나 회의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 교회(모임)들 간의 교제와 연락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교회는 사람들에 의한 또는 사람이 만든 조직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앙 교단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앙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훈련받아 지역 교회에 파견되는 목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홀 모임에서는 성직자-평신도의 계급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도들 간의 권력 편차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어떤 형제라도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고 설교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모든 형제들은 동등하다. 그 어느 형제도 교회로부터 가져가는 것이 없다. 물질적인 보수뿐만 아니라 직분을 빙자한 명예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권력을 지향하는 싹이 자랄 수 있는 웅덩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홀 모임이 무질서하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권력과 명령은 주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받은 말씀을 고지식하다 싶을 정도로 지키려고 한다.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성도들은 정장을 하고 모임에 나타나며, 자매들은 거의 화장을 하지 않는다. 성도들의 집을 방문해 보면, 텔레비전과 같은 오락 기구들은 거의 눈에 띠지 않는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서의 오락과 출세를 탐하지 않는다. 교회의 안과 밖에서 세상적인 권력 현상을 철저하게 배격하는 홀 모임에 성도들의 숫자가 작은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미국의 홀 모임에서 탈권력의 자연스러움을 보았다.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도와주거나 강자가 약자를 도와주는 모습이 아니었다. 높은 목사가 낮은 성도들을 축복해 주는 모습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애시 당초 없었다. 모든 형제들이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십자가 아래서 같은 피로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이 서로를 격려해 주고 성경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위로를 받는 그런 교회였다. 야고보 형제가 말한 바와 같이, 부자는 낮아짐을 자랑하고, 가난한 자는 높아짐을 자랑하는 그런 교회였다. 우리의 약함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형제자매들에게 있어서 약자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스러움이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4. 약자의 고난과 강자의 회개

미국에서의 모임 생활을 통하여 강자가 약자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강자와 약자를 구분하는 잣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근원적인 치료라는 점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강자와 약자의 구분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리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으며, 사회 제도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강자의 지위에 익숙해져 있어서, 자기 자신이 약자를 억압하는 강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도 있다. 안식년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자로 행세해 왔던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2006년 11월 어느 날 아내가 갑상선 암 판정을 받았다. 아내는 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하였고 나는 별 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 채 병상을 지키고만 있었다. 병상에서 성경을 읽던 아내가 내게 물어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왜 내게 병을 주어 수술 받게 하실까?” 그리고 아내는 스스로 대답한다. 자기가 나쁘게 행동했기 때문이란다. 미국에 머무를 때, 쇼핑 점에서 물건을 사면서 찢어진 20달러를 슬며시 지불했던 일, 그리고 우리 가족만을 생각하고 교회의 형제자매들과 이웃 주민들에게 잘 대해 주지 못했다는 점을 말한다.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아내가 말한 잘못보다도 훨씬 더 큰 잘못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예 돈을 아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취미 생활을 위해서 함부로 돈을 쓰고 다녔다. 더군다나 나는 가족에게조차 잘 대해주지 못했다. 친구들과의 약속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집에 오는 소포를 받아달라는 아내의 부탁에는 공연히 화를 냈다.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병을 준 것이 잘못된 행동 때문이라면, 그것은 약자인 아내 때문이 아니라 강자인 나 때문이었다.

수술받기 전날 저녁이었다. 진료실에 다녀오면서, 아내는 마지막으로 물을 마시고 싶다고 했다. 저녁 12시 부터 금식이기 때문이었다. 아내에게 복도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 병실에 컵을 가지러 갔다. 컵을 가지고 오면서 링거 바늘을 꽂은 채 복도에 서 있는 아내를 보았다. 환자복을 입은 아내는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언뜻 예수님을 보았다. 능욕과 채찍질을 당하고 자기 옷이 아닌 붉은 옷을 입고 빌라도의 법정에 끌려가는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요한복음 19장 5절>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나의 잘못을 짊어지고 고난을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고 황급히 아내를 지나쳐 정수기에 다가가서 컵에 물을 받았다. 눈물이 멈출 때까지 오래도록 물을 받았다. 그리고 그 물을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사실 그 물은 내 눈물이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가장 약한 자가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보다 약한 자는 없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은 가장 약한 자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강자였다. 강자인 내가 약자인 아내의 병과 고통을 가져온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또한 마찬가지로 약자의 고난은 강자의 회개를 가져온다. 그러기에 약자의 고난은 의미있는 것이다.

5. 약자 되기를 두려워 말자

최근에 겪은 몇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약자의 소중함에 대해서, 탈권력을 지향하는 질서에 대해서, 그리고 나 스스로 강자로서 회개해야 할 자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머리로 안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몸으로 알았다. 회개한 강자로써 이제 이불도 개고 집안 청소도 곧잘 한다.

이러한 나의 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최근 진행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변화는 위기라기보다는 축복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 계속 집권할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약자가 되기를 두려워 말아야 한다. 오히려 강자로 남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강한 만큼 죄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며, 약한 만큼 위로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에의 의지”로 물들어 미쳐만 가는 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약자가 강자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는 데에 있지 않다.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강자를 억압하는 것도, 신자유주의를 외치면서 강자의 횡포를 정당화시키는 것도 니체의 광기로부터 우리 사회를 지켜줄 수 없다.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생활과 역사보다 우선하는 것은 약자들의 애통함에 귀를 막음이요, 소수 엘리트의 허언을 미래의 비젼이라고 외치는 사상누각이다. 약자를 약자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며, 탈권력을 지향하는 토양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자된 자들의 회개가 필요한 시점이다.

오직 약자의 고난만이 우리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 약자가 고난 받을 때에, 강자들이 회개할 것이며, 그 회개의 눈물이 각 사람에게는 생명수로 변하고 사회 전체에는 정의의 강물이 되어 흐를 것이다. 그러니 약자 되기를 두려워 말자. 약자의 고난만이 희망이다.





씨알의 소리 2007년 1/2월호  38-47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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