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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8/09/17 (21:11) from 122.46.159.2' of 122.46.159.2' Article Number :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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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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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욱, 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江南大學校, 『論文集』, 第37輯, 2001
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최 상 욱*1)
차 례
1) 들어가는 말
2) 현대사회에서 신학과 철학의 위치에 대하여
3) 학문의 보편성과 특수성
4) 그리스신과 기독교신의 차이와 동일성
5) 인간론과 기독교 인간론에 대하여
6) 그리스 악론과 기독교 악론에 대하여
7) 변신론에 대하여
8) 신학과 철학의 미래적 전망
9) 맺는말
1) 들어 가는 말
본 논문의 목적은, 신학과 철학이라는 두 학문이 어떠한 차이점과 어떠한 유사성을 지니
는가를 밝힘으로써, 두 학문 간에 벌어지는 근거없는 오해와 비난을 어느정도 해소하고, 차
후적으로 두 학문이 서로에게 어떠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모색하는데 놓여 있다.
이를 위해 우선 신학과 철학에 대한 비교가 요청되는데, 이때 우리의 관심은 신학과 철학
에 대한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그 근원으로 소급해 되돌아 감으로써, 신학과 철학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이해를 가질 수 있기를 추구하려는 것이다.
* 제1대학 신학부
- 1 -
2 江南大學校, 『論文集』, 第37輯
2) 현대 사회에서 신학과 철학의 위치에 대하여
현대에 들어 - 특히 우리사회에서 - 우리는 심각할 정도로 정신 과학의 위기에 대하여 그
심각성을 피부로 느낄수 있다. 신학과 철학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현대
의 이러한 조류 속에서는 거의 비슷하게 푸대접을 받는 것 같다. 바야흐로 신학과 철학은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따라서 우리는 여기
서 질문해야만 한다. 도대체 현대란 무엇이고, 신학과 철학의 본질은 무엇이며, 역사적으로
어떠한 도전을 받아 왔는지 질문해야만 한다.
얼마전까지 우리 사회에도 현대-탈현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이 두 입장은 물론 서로
대립되는 성격을 띠고 있다. 현대를 긍정적으로 주장하는 입장에 의하면, 현대의 부정적인
측면은 비판을 통해 또 다시 긍정적으로 극복,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탈현대를 주장하
는 입장은 현대의 부정적인 측면 자체와 현대는 분리될 수 없기에, 이러한 부정적인 것의
극복은 현대 자체에 대한 극복으로부터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
하고 그 두 입장은 현대를 우선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현대의 부정적인 면은 무엇인가?
우선 현대 비판은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계몽주의는 원래 정치
적, 경제적, 문화적, 형이상학적의 제 요인으로부터 발생된 것으로서, 검증되지 않은 모든 진
리 체계를 이성의 자율성을 통해, 그것들의 진위 여부를 가려보자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1)
그리고 당시 대두한 시민계급과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자율성을 위한 자기 주장 등은 자연
스럽게 구 질서로부터의 해방이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을 가장 잘 대표하는 표현
으로서, 우리는 자유, 평등, 박애를 들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열림을 기대하던 당시
시민계급에게 계몽주의적 세계관, 역사관은 곧 발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을 주장
하던 당시 시민계급은, 해방을 단지 자신들의 계급보다 더 높은 계급에 대한 것으로 한정시
켰을 뿐, 자신들보다 낮은 계급에 대하여는 또 다른 권위로서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는 이율
배반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성의 자율성과 시민계급의 정치적, 경제
적, 문화적 해방을 추구했던 계몽주의는 또 다른 형태의 비이성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
1) I. Kant,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aerung? Kants Werke, Akademie-Ausgabe, Band VIII
(Berlin, 1912),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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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최상욱 3
고2), 바로 이 점이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성의 도구화는 둘째 기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
학과 기술은 곧바로 경제적, 정치적 이익과 연관되어, 한 사회가 추구해야 할 필수적인 목적
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의 추구를 뒷받침했던 형이상학적 근거는, 이제 이성
을 통해, 인간이 자율적이고, 주체적으로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변하게 된다3). 따
라서 기술은 곧바로 세계와 환경에 대한 침략과 지배로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러한 지배에
의 의지가 계몽주의적인 도구적 이성과 기술을 추구했던 국가들에 의해 제국주의적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의 절대화는 또 다른 이데올로
기적 신화로서, 이제 인간과 자연, 세계는 모두 특정 주체들에 의해 지배, 사육, 정돈, 계산
될 수 있다고 주장되는 것이다.
세째로, 기술에 의한 특정한 주체의 공격성은, 타자와 자연, 세계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하기 위하여 정신의 왜소화와 물화를 추구하는데, 이것은 문화사업과 언론을 통해서 교
묘히 행하여지는 것이다. 즉 대중조작을 통해 개개인으로 하여금 질문을 망각하게 만들며,
적당한 - 그렇지만 평균적인 -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각각의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자유
롭다고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며, 이로써 정신의 물화는 극대화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사
회는 효과적으로 관리되고, 그 안에서 관리되는 개인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느끼면서 살아
가게 되는 것이다.4) 그런데 이제 정신이 물화되었기에, 각각의 개인을 계속 효과적으로 통
제하려면, 그들의 관심을 비정신적인 것, 즉 물질로 집중시켜야 하고, 이것은 자본주의적인
욕망의 극대화(새로운 상품을 위하여)와 충족(소비), 새로운 욕망의 창조라는 순환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세가지가 현대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의 주 내용을 이룬다.
바야흐로 현대는 물질과 그것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의 시대, 즉 프롬의 표현을 빌면 소유
의 시대이다5). 이러한 특징이 현대라고 한다면, 왜 현대사회에서 신학과 철학이 도외시되고
있는지 어렵지 않고 추론할수 있다. 말하자면 그 이유는 신학과 철학은 그 본질에 있어 물
질의 학문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초월을 주장하는 학문, 즉 소유의 학문이 아니라, 존재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기독교 성서나 고대 철학에서부터 이미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신학과 철학이 이렇게 존재를 주장했던 것은, 이미 그때부터, 아니 더 정확히 말하
2) M. Horkheimer/ Th. Adorno, Dialektik der Aufklaerung, Fischer, Frankfurt 1988, 45쪽 이하)
3) 마르틴 하이데거, 세계상의 시대, 최 상욱 역, 서광사, 86쪽 이하
4) M. Horkheimer/ Th. Adorno, 위의 책, 45쪽 이하
5) 참조.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최혁순 역,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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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江南大學校, 『論文集』, 第37輯
면, 인간에겐 기본적으로 소유에의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신학과 철학이
현대사회에서 더 경시되는 것은, 현대는 바야흐로 소유를 부추기고, 장려하고, 거기에 모든
가치를 부여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학과 철학뿐 아니라, 순수 학문 자체가 왜 현대사회에서 경시되는지,
그 이유를 현대-탈현대 논쟁에서 나타난 학문(지식) 자체에 대한 상이한 입장을, 현대 사회
와 비교해 살펴보기로 한다.
그것은 학문 자체에 대한 평가의 문제인데, 크게 보아 현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학문의
성격을 고대 학문부터 이어져 온 전통에 따라 정초하려 한다. 반면 탈현대를 주장하는 사람
들은 이에 대하여 전적으로 새로운 학문의 형태를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더 이
상 학문이 - 그들에겐 이미 지식이상의 의미를 지닐수 없다 - 선, 정의, 진리, 해방들의, 거
대한 담론, 즉 메타 이야기들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지식은 개
인적인 수양이나, 사회적인 윤리와 일치하지 않으며, 따라서 지식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만 팔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 이제 학문은 경제논리에 따라 그
존재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잘 팔리는 한, 그것은 한 사회에서 힘 -경제적, 정
치적, 문화적 -을 지니게 되며, 따라서 지식은 권력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며, 이런 한
에 있어 지식은 그 자체 안에 진리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유효성과 능률성에 따
라 외부적으로 그 진리성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점은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도 불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경제논리 현상과 부응한다.
이제 지식이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잘 팔릴까? 무엇에 유용한가?에 집중되며, 이런 한 지식
은 전통적인 윤리성과, 참/거짓에의 규범성을 상실한, 탈윤리적, 가치 중립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을 상실, 혹은 스스로 거부했기에, 이제 지식은 사회전체,
인간 개인 전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러한 지식을 필요로 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부
분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고, 따라서 이제 지식은 하나의 상품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상품인 한, 지식은 최소의 투자를 통해 최대한의 이익을 산출하여야 하는 메카니즘
을 선호하게 되고 - 예를들어 인터넷 - , 그 지식의 소비자들은 지식을 자신의 존재의미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한, 이제 필요한 것은 주어진 지식(정
보)을 어떻게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상품으로 만드는가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을 위해 더 이상 선생과 학생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식은 모두에게 주
6)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 모던적 조건, 이현복 역, 서광사,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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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최상욱 5
어져 있고, 이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지식들을 재료로 하는 언어놀이를 통한 새로운 상품의
창출이기 때문이며, 이때 지식의 놀이 규칙도 더 이상 윤리적 규범성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필요로 하는 공급자/수요자 사이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이미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현상이며, 탈현대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즉 그들은 학문이 이러한 식으로 변해야 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일단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으며, 미래적인 추세를 생각할 때 우리가 받아
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것이 갖는 유용성만큼이나 부정적인 문제점
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문제점이란 이러한 학문 안에는 단 한 가지의 전제와 경향만이 존
재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물질이라는 점이다. 즉 학문은 물질의 학문, 말하자면 정보가
되어야 하며, 정보로 족하다는 주장이다.
반면 전통적으로 철학과 신학은 인간에 있어서 물질(육체) 외에 또다른 초월적 세계가 존
재함을 강하게 주장해 왔음을 알수 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했을 때, 그가 부정했던 요소들을 살펴보면, 쾌락(우리는 욕망이라고 표현했음), 재
산(경제논리), 명예(힘, 권력)등이다7). 그런데 이런 요소들은 바로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지
선의 행복 아닌가? 경제논리에 의한 욕망의 극대화와 그것의 성취, 그리고 경제력을 바탕
으로 한 권력, 이것은 탈현대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논리이고, 현대 사회의 목적과 다르지 않
다. 그리고 아마 이러한 요소는 고대부터 이미 인간에게 가장 유혹적이고, 따라서 가지고 싶
은 요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학문은 이것을 버려야 할 것으로 부정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이것만이 인간존재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며, 이러한 물질 세계야말로, 생성
하고 소멸하는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진정한 의미의
학문을, 현상적인 것, 실증적,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는 Doxa와 구분하여, Episteme라고 불렀
다. 즉 에피스테메로서 학문은, 물질적 현상 배후에 존재하는 본질 자체를 추구하는 학문인
것이며, 이것은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최초로 인간의 육체외에
영혼이 존재함을 주장했고, 그것을 증명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그의 저서 “파이돈”은 철저하
게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도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 따라서 인간의 진정한 존재의미는
영혼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책이다. 물론 탈현대주의자들은 이것이야말로 검증되지
않은 메타 이야기라고 비판할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당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영혼을 주장한 배경에는, 당시 소크라테스를 죽였던 그리스 사회가 가졌던 구체적인 위험성
7) 참조,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최명관 역, 서광사, 제 3권 6장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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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江南大學校, 『論文集』, 第37輯
을 간파했기 때문이며, 그 위험성이란 바로 욕망, 경제, 힘, 권력을 주장했던 소피스트들과
그것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한 군중들이 지녔던 소유의 학문에 기인한다는 통찰이 놓여 있었
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 나타나는 탈현대주의자들의 논리를 알고 싶으면, 곧바로
소피스트들을 살펴보면 되며, 현대 사회의 탈현대주의적 학문의 본질은, 플라톤에 따르면 소
피스틱인 것이다.
이런 점은 기독교 성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성서에 의하면 인간의 타락은 “먹음직하
고 보기에 탐스러운 나무열매”(창 3:6)와 연관되어 있다. 먹음직하다는 것은, 인간의 물질적
욕망을 의미하며, 보암직하다는 것은, 말씀의 들음과 대조되는 물질문명을 의미하고, 탐스럽
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소유를 의미한다. 이뿐 아니라, 모세 이야기에서도 황야와, 거기에서
의 소유하지 않는 의, 식, 주에 대하여, 그리고 노동과 더불어 휴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점은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물질문명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닐수 있는가에 대한 염려
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리고 예언자들의 선포는 모두 물질에 대한 거부로 나타난다. 뿐만 아
니라, 예수의 유혹 장면과 그가 행한 산상설교, 종말 사상은 전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맞춰져
있음을 알수 있다.
그렇다면 왜 현대사회에서 철학과 신학이 경시되고 있는지 알수 있을 것이다. 즉 탈현대
주의적 현대사회는 학문의 본질을 물질에서 찾고 있는데 반해, 신학과 철학은 정신에서 찾
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현재주의적 학문 입장에서 보면 신학과 철학은 무용한, 즉 별로
물질적 도움을 줄수 없는 학문인 것이며, 그 때문에 도외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의 문제점은, 신학과 철학이, 플라톤과 성서의 인물들이 근거도 없이 소피스틱과 우상의 세
계를 공격한 것이 아니란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들의 비판은 단지 머리속에서
나온 추상적 사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시 아테네 사회, 당시 유대사회라는 구체적 현실
에서 나온 것이며, 물질에의 욕망이야말로 더 큰 위험성으로 끝나리란 확신에서 비롯된 것
임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왜 현대 사회에서 신학과 철학의 위치가 무력한지, 그러나 또한 그럼에
도 불구하고 왜 필요한지 살펴 보았다. 이제는 이 두 학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핌으로써,
그 동일성과 차이성이 무엇인지 밝히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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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최상욱 7
3) 학문의 보편성과 특수성
신학과 철학은 동히 물질보다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는 동일성 외에 아주 다른 상이성을
포함하는데, 그러한 차이는 신학과 철학의 토양, 즉 히브리적 자연과 희랍적 자연에도 기인
한다.8) 어떤 한 학문은, 그것이 어떠한 자연에 연관되는가에 따라, 즉 척박한 자연인지, 비
옥한 자연인지, 그곳에 인간이 정착하여 사는지, 혹은 때에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적 삶인지,
맑은 기후인지, 흐린 기후인지, 추운 지방인지, 더운 지방인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고, 전개된다. 이 점은 히브리정신과 그리스 정신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두 정신을 비교
할 때 발견할수 있는 것은, 히브리 정신은 강하게 귀의 메타퍼를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그
리스 정신은 눈의 메타퍼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들의 자연조건에 따른 정신
의 전개과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메타퍼란 무엇인가?
우선 히브리 정신은 척박한 자연 조건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황야에서 눈은 중요한 기능
을 수행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황야란 말 그대로 다양한 형태들을 갖지 않으며, 기왕의 형태
라는 것도 생명력을 갖지 못한 형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러한 죽은 형태들 안에
서 무언가 살아 있는 현상은 대부분 움직임 안에서 가능하기 때문에, 귀의 메타퍼에서 중요
한 것은 형태, 즉 실체가 아니라, 운동성에 놓여 있는 것이며, 이러한 현상은 명사보다 동사
의 발달에서도 잘 나타난다. 따라서 히브리 정신에서 하나님의 말씀도, 행동과 구별되는 것
이 아니라, 이미 행동을 포함하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점을 창세기 1장 창조 설화에
서 잘 볼 수 있다. 즉 여기서 창조의 말씀은 이미 동사적인 창조의 행위를 뜻하고 있다. 그
리고 이것은 성령이란 의미가 바람에서 연유한 것으로도 잘 입증된다.
반면에 그리스 정신에서 중요한 것은 눈의 메타퍼로서, 이것의 정점은 태양에 놓여 있
다9). 우리는 여기서 아주 간단한 장면을 상상해 보자. 달빛조차 없는 아주 어두운 밤에 우
리는 아무것도 구분할수 없다. 그때 중요한 기능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청각, 촉각 등일
것이다. 그러나 태양빛이 서서히 비치면서 사물들이 어렴풋하게 형태를 드러내자마자, 우리
가 의지하는 감각 기관이 눈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빛과 더불어 다양한 형태
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을때, 그때 중요한 것은 바로 고유한 형태들을 구분하는 것이고, 이것
8) 참조. 토를라이프 보만,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허 혁 역, 분도 출판사.
9) 플라톤, 국가, 조우현 역, 508 a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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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江南大學校, 『論文集』, 第37輯
은 눈의 중요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 정신은 이미 플라톤부터 저 유명한 태양
의 비유를 통한 이데아(형태)의 강조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아는 더 이상
운동성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다양한 형태들을 구분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형태를
고정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 정신에서는 동사보다는 명사(실체)에 대한 강조
가 나타나며, 그 명사는 움직임을 포함하지 않기에, 불변적인 실체로서 주장되는 것이다. 따
라서 여기서는 변하기 쉬운 말보다는, 말 속에 들어있는 내용, 즉 의미에 더 강조점이 놓이
게 되며, 이러한 의미의 산출처이자, 저장소인 이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들은 비록 자연적 조건뿐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된 삶의 방식과도 연
관된다. 즉 유목인들의 경우, 그들에게 있어 생명은 끊임없는 움직임이고, 따라서 고정된 실
체야말로 생명에 대한 적인데 반해, 정착된 삶을 영위하는 민족의 경우 움직임은 곧 부족함
을 드러낼 뿐이며, 오히려 정착이 풍부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정된 상태에서
만들어진 다양함을 우리는 문명이라 한다면,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문명세계,
그리고 그와 연관된 눈의 세계에 대하여 얼마나 두려워 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요즈
음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비디오 세대, 혹은 컴퓨터 세대에게 - 왜 그렇게 눈이 중요하게
여겨지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 측면에서 히브리 정신이 왜 그렇게 형상을 우상이
라고 부정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황야에서 태양은 삶을 위해 별도움
을 주지 못하는데 반해 비옥한 자연환경에서 태양은 생명의 근거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황
야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을 상상해 보라. 그리고 이런 점은 아프리카에서 자란 까뮈가 이방
인에서 아랍인을 살해한 뫼르소의 입을 통해 그의 살해동기는 태양이 뜨거워서였다는 주장
에서도 떠 올려 볼 수 있다. 이런 점은 한 민족의 정신이, 그를 포함하는 자연환경과, 그로
부터 유래한 메타퍼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며, 히브리정신과 그리스 정신이
얼마나 상이하게 출발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유래로부터, 두 정신이 왜 그렇
게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는지도 알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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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최상욱 9
4) 그리스 신과 기독교 신의 차이와 동일성
현대 사회에서 사는 우리는, 이미 고등화된 종교에 이숙해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에
대하여 별다른 의심없이, 신은 전지 전능하고, 유일한 최고의 존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신 역시 - 신 자체는 영
원하고 전능하다할지라도 -, 더 정확히 말하면 신에 대한 이해 역시 자연과 사회조건에 의
존하고 있다는 점을 들수 있다. 가령 위의 예와 같이 척박한 자연 조건에서 신은 비옥한 자
연 조건에서의 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우선 척박한 자연 조건하에서 인간은
자연에 대하여 친근한 감정을 가질 수 없으며, 오히려 자연은 항상 인간을 위협하는 요소로
등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연은 인간의 생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의, 식, 주마
저도 흔쾌히 베풀지 않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이 신을 생각한
다면, 그 신은 당연히 자연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10) 그렇다면 이러한
신은 자연을 넘어설 뿐 아니라, 인간 마저도 철저하게 초월하는 신이어야 하며, 따라서 신과
인간의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으며, 만약 어떠한 관계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당연히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의 자발적인 은총에 힘입은 것이어야 한
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런 경우의 신의 형태는 히브리 정신에서 완성되었다.
반면 비옥한 자연환경을 가진 민족의 경우, 자연은 인간과 대립되고, 위협하는 존재가 아
니라, 항상 인간에게 선물을 베푸는 친근한 자연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신이 등장할 때, 그 신은 굳이 자연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존재일 이유를 갖지 않는 것이
다. 단지 신은 이제 자연 중 일부이고, 자연 중 가장 인간과 친숙하거나, 도움을 주는 존재
로 나타나게 되며, 이런 이유에서 신들 중 최고의 신이 등장한다 하더라도, 그 최고의 신은
다른 신들에 대한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우위성을 갖지는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신과
인간의 관계 역시 전적인 단절이 아니라, 항상 유대관계를 맺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다. 이런 신의 형태는 그리스 정신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히브리 정신의 경우 신이 초자연적 형태를 띠기에, 그 신은 자연적인 형상을 갖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 신이 인간과 무한히 단절되어 있기에, 그 신에 이르기 위해 인간적 이
성은 무의미해 지는 것이고, 오히려 신의 말씀을 듣고 복종하는 것, 즉 믿음이 요청되는 것
10) 참조 창세기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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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江南大學校, 『論文集』, 第37輯
이다. 반면 그리스 정신의 경우 신은 유일신이 아니라, 다신론적 경향을 띠게 되고, 그 신이
자연과의 연관성 안에 있는 한, 그 신들은 자연적 형상을 우상이라고 비판할 필요성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신은 인간적 이성을 통해 이해될수 있기에, 그 신을 위해 신앙보다
는, 이성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 두 신의 형식 중 어느것이 특별히 우월하다고 쉽게 단정지어서는 않된다. 왜냐
하면, 신이 초자연적인 최고의 유일신이 될 수록, 그 신은 전지 전능해 지지만, 다른 한편,
그 신은 초이성적인 경향, 즉 신비화, 추상화되는 경향을 띨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점이다.
반면에 자연적인 신은 어떻게 보면 인간적인 형태와 특성을 띠며, 따라서 신같지 않은 신으
로 - 특히 전능한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 여겨질수도 있고, 특정한 지역에
제한된 신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이러한 신은 인간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상
황에서 만나게 된다는 점을 들수 있다.
물론 히브리적 신이 꼭 전자의 특징만을 띠고, 그리스적 신이 꼭 후자만의 특징을 띤다고
단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자연 조건 외에 인간이 수행하는 여러 정신적 조건과 역
사적 조건이 존재하며, 신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인간적 조건과 병행하여 전개되고 있기 때
문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자연적 조건외에 역사적, 정신적 조건을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히브리 정신의 경우, 신이 초자연적 성격을 띤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히브리 민족이
살았던 자연조건이 그랬을 뿐 아니라, 그런 자연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한 인간의 삶의 방식
역시 정착보다는 이동에 더 큰 비중을 두었기에, 초자연적인 히브리적 신은, 인간과의 관계
를 맺는 방식으로 자연적인 성격보다는 역사적인 성격을 더 많이 띠게 된다. 이것은 초자연
적인 신의 딜레마이고도 한데, 그 신이 초자연적이라면 인간과 자연적인 관계를 맺을수 없
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그 신이 “살아 있는 신”이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
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이러한 딜레마는 신이 인간과 “역사”를 통해 관계를 맺는다는 방
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역사는 비록 자연적 인간이 만드는 구체적, 실증적 사실이
기도 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사건은 자연을 넘어서는, 그리고 자연적 인간도 넘어서는 초월
적 사건으로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자연적 사건으로서 역사는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사
건을 통해서만 나타나지만, 그 역사의 의미는 구체적이고 자연적인 사건을 넘어서는 곳에서
만나질 수 있는 것으로서, 인간은 구체적인 현실의 역사 속에서 살지만, 역사를 뛰어 넘는
역사의 의미를 통해 인간은 또 다른 역사를 향해 갈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초자연적 신은 인간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점은 초자연적 신이 역사의 의미를 통해 변화된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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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최상욱 11
나게 된다는 사실, 즉 신의 의미 역시 변하고, 확대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이것은 성서에
서 드러난 신의 의미의 변화에서도 볼수 있다. 우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은 자연적 신
이 아니라, 이미 부족장들의 삶, 즉 부족의 역사를 이끄는 신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부족이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종족 번식와 땅에 국한 된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모세에
오면 종족과 땅외에 출애굽을 위해, 미래적 약속을 보증하고, 그것을 실현시키는데 함께하
는, 즉 역사의 길을 인도하는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이 역사의 성취를 위해 전쟁의 신의
모습을 띤다. 그러나 가나안 진입과 더불어, 신은 이제 물질적 풍부함까지도 보증하는 신으
로 확대된다. 이것은 바알사제들과 벌린 싸움에서 드러나듯이, 역사뿐 아니라, 비와 같은 자
연적 조건까지도 보증하는 신으로 확대됨으로써, 가나안 문명에 대결할수 있는 근거를 마련
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부강과 더불어 그 국가의 존재근거를 천지창조
까지 확대하는 작업이 나타나는데, 이를 통해 히브리의 신은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했고, 천
지를 창조한 신으로 확대된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에 신은, 사회의 부정의와 물질
문명에 경도된 타락상을 고발하고, 심판하는 모습으로 나타남으로써, 종말론적인 신, 즉 세
상의 끝까지 주관하고, 세상을 완성시키는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 국가
들의 멸망과 더불어, 위로하는 신, 그리고 멸망속에서도 스스로를 드러내는 신, 즉 고난받는
신의 모습으로 확대됨으로써, 구원에 대한 새로운 길을 여는 신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
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스스로 낮춰진 신(Kenosis Dei)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신
의 역사는 사랑을 통한 구원의 성취란 형태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면, 왜 신학자들이 성서는 신의 구원사를 증거한다고 하는지 알수
있다. 즉 신은 이제 인간의 역사를 통해, 그 역사의 흥망성쇠를 통해 드러나는 갖가지 다양
한 인간 역사의 수수께끼를, 역사와 더불어, 그러나 역사를 초월하면서 해결하는 신인 것이
며, 따라서 신은 작은 부족의 신으로부터 온 우주와 온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고 완성시키는
절대적인 신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신의 모습
을 절대적인 것으로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역사를 통해 발
전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신의 확대를 위해 수 많은 갈등과 투쟁이 있었으며, 왜 우리 신은
다른 신과 같지 못할까? 라는 - 예를 들면 왜 부강한 국가를 보증하지 못하는가? 왜 물질적
풍요함을 주지 못하는가? 왜 우리민족은 고난받아야 하는가? 이때 신은 왜 구름을 타고 천
사의 군대를 동원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가? 등 - 질문과 그 해결을 위한 노력들이 포함
되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히브리적 신은 자연에 국한되지 않
는 역사의 신이고, 그 역사는 인류전체로 확대됨으로써, 지금의 전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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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江南大學校, 『論文集』, 第37輯
있게 된 것이다.
반면 그리스의 신의 경우는 아주 다르다. 일단 그리스 정신의 경우, 자연 현상을 적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지만, 그들의 삶 가운데서 종종 나타나는 자연의 위협적이고, 불가사이한
모습을 어떤 식으로든 질서 안으로 끌어 들이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호머
의 경우 오딧세우스가 항해 도중 폭풍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을 그리스 정신은, 왜
그때 그 폭풍이 불었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지만, 그 해답을 초자연적 신으로부터 구하려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서를 벗어나는 폭풍을 질서 안으로 끌어 들임으로써 해결하는 것
이다. 즉 호머는 그 이유를 포세이돈이 화가 났기 때문이란 식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때 포
세이돈은 히브리적 신과 같이 초자연적이고 절대 진리의 신인 것이 아니라, 단지 폭풍이란
위협적인 자연의 “알 수 없는 힘”을, “이름”, 즉 “알 수 있는 힘”으로 질서화하는 노력에 불
과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 정신의 경우 대부분의 신들은 인간 외적인 자연의 위협적인
힘을 의인화한 존재라는 특징을 지닌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느꼈던 자연에 대한 공포라든
지 당황스러움을 신으로 부름으로써, 그 공포의 알수 없는 위협을 알수 있는 힘으로 전환시
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데메테르라는 땅의 신, 바다의 신, 하늘의 신 등을 통해 잘 나
타난다.
이외에 그들을 당황스러움으로 몰아넣은 또 다른 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외적인 자연의
힘이 아니라, 인간 내적인 힘, 그렇지만 스스로 잘 통제할 수 없는, 어떤 광기와 같은 힘을
들수 있는데, 이러한 것 역시 그들은 신으로 부름으로써 그 “알 수 없음”으로부터 해방되려
고 했다. 즉 아프로디테(사랑), 아레스(전쟁), 음악(아폴로), 퓨리스(죄의식)등이 그 예이다. 이
두 경우를 보면서 히브리 정신과 달리 그리스 정신이 파악한 신들은, 초자연적인 신이 아니
라, 단지 위협적인 자연을, 의인화를 통해 알 수 있는, 편안한, 질서적인 자연으로 전환시키
려 한 노력임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삶을 통해 인상적인 힘들, 사건들을 신이라고 불렀기
에, - 예를 들어 X는 신이다라고. 이때 X는 어떤 것이라도 가능하며, 따라서 신 역시 다양
할수 있는 것이다 - 유일신을 주장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히브리 정신은
이러한 도식이야말로,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이기에, 역사를 통해 만나지는 수
많은 당혹스러운 사건들과 힘들을 신의 술어의 확대를 통해 - 예를 들면 신은 X이다. 이때
X는 어떤 것이라도 가능하지만, 신은 단 하나의 유일한 실체이어야하는 것이다 -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11) 그런데 이 두 정신에 드러난 신이 현대에 이르러서 그리스 신들은 죽은 신
11) 신을 주어로, 혹은 술어로 볼 것인지에 대하여는, 특히 플로틴과 포이에르바하를 통해 그 차이
와 한계를 잘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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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최상욱 13
으로, 히브리적 신은 아직도 기독교를 통해 살아있는 신으로 남게 된데는, 그리스적 신이 자
연적 신, 즉 공간적 신이었으며, 따라서 그 신들은 그리스라는 공간, 더 정확히 올림푸스라
는 공간 안에서만 살아 있을수 있었던데 반해, 히브리적 신은 인간 역사를 통해 함께하는
신이기에 - 공간을 넘는 시간의 신으로서 - 시간이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살아 있을 수 있
었던 것이다.
이러한 두 입장을 비교하는 것은, 단적으로 이것이 더 옳다라는 배타적인 태도보다, 좀더
여유있는 정신을 갖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 정신을 옹호했던 니체의 시
니칼한 말을 통해 신에 대한 비교를 마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신들이 죽은 이유
는, 어느날 히브리 신이 나타나서, 자신만이 신이라고 주장하였을 때, 그 말이 너무 웃겨서
다들 죽었다는 얘기다. 이렇게 다른 신들이 죽자, 혼자 남은 히브리 신은 할수 없이 어울리
지 않는 인간을 사랑하였고, 그 사랑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어울
리지 않음에 대한 연민으로 죽었다는 얘기다. 이 말을 통해 니체는 그리스적 명랑성과 히브
리적 처연함을 표현하려 했을까?
5) 그리스 인간론과 기독교 인간론에 대하여
히브리 정신과 그리스 정신이 보는 인간관은, 두 정신 모두 인간이 유한한 존재, 불완전한
존재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인간이 바로 유한한고 불완
전하기 때문에 무한과 완전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뜻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무한과 완전을 추구하는 방식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선 인간에 대한
두 정신의 공통점을 살펴 보자.
우선 두 정신은 모두 인간이 신적인 존재와 같이 자기 완성적이지도 않고, 또한 동물과
같이 갇힌 세계에서 자족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라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유독 인간
은 두 개의 세계를 가진 동물로서, 그에게 있어 세계는 하나의 과제로서 주어져 있는 것이
며, 인간의 존재의미는 바로 이러한 과제를 풀어 가는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세계 사
이에서 인간은 방황하고, 불안해 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바로 유한한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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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江南大學校, 『論文集』, 第37輯
과 같은 성격을 띨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이러한 형벌적 과제는 인간을 신적 존재나 동물
과 구분하는, 인간의 긍지도 될 수 있다. 즉 인간은 자신의 동물성을 극복하면서 신적인 존
재를 추구하는 자이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존재의 닫혀진 안락함을 부정하는 존재로서 신적
인 존재를 추구하지만, 그러한 추구는 항상 인간의 동물적 존재성에 의해 제한되고 방해되
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그리스와 히브리 정신 모두에게서 잘 나타나는데, 우선 프로메테우스 설
화는 인간이 신적 존재를 추구하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로 인한 인간의 형벌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히브리 정신의 경우 인간의 타락 성화에서 신과 같아지
려는 인간의 유혹과 그로인한 인간의 타락에서 잘 나타나며, 바벨탑 설화에서는, 인간이 자
신들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 하늘까지 탑을 쌓으려는 의지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우려와 심
판을 담고 있다. 이 두 설화는 인간이 추구하려는 의지와, 동시에 그 한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같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고통의 원인이나 그 해결책에 있어서는 전혀 다
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우선 그리스 정신의 경우, 인간은 신과 구분되는 존재이지만, 전적으로 다른 존재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신들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연이란 연속성 안에 있으며 - 신도 자연적 존
재로서, 신들은 인간과 같이 모이라(운명)의 지배를 받는다. 이 점은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단지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인간 세상에 뛰어들어 도움을 주
거나 훼방하는 존재인 것이다. 가령 포세이돈과 아테네는 인간과 다른 신들이지만, 그들은
오딧세우스를 사이에 두고, 한편은 방해하는 신으로, 다른 한편은 도움을 주는 신으로서, 인
간을 중심으로 하여 대결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때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일방적이고, 내면적
인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적이고 외면적인 것이다. 즉 인간은 징조를 통해 신의 뜻을 알수
있으며, 신의 뜻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바뀌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폴로가 그리스 함대에
전염병을 보냈을 때, 아가멤논은 맛있는 양고기와 흠없는 깨끗한 염소로 아폴로를 달랠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리스 정신에서 특이한 점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강조를 들수 있다. 즉 인간은 신에게 단지 복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신들에 대하여 이성으로서 대항하려는 모습을 볼수 있다. 가령 정확하게 신들에 대한 이야
기는 아니지만, 오딧세우스가 사이렌의 유혹을 받는 장면에서12), 오딧세우스는 사이렌의 유
혹을 즐김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이렌의 소리를 듣는 것은 곧 죽
12) 참조. M. Horkheimer/ Th. Adorno, 위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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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최상욱 15
음을 의미하기에, 이를 막기 위해 오딧세우스는 선원들에게 자신을 배의 기둥에 묶을 것을
명령한다. 이것은 인간에겐 거부된 유혹, 즉 유혹의 성취가 곧 죽음인 그러한 유혹에 대한
인간의 도전의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다른 한편 그러한 유혹을 즐기면서도 동시에 죽지 않
기 위한 절묘한 이성의 계략이 소개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 정신의 경우, 인간이 자신
에게 주어진 이중적 결핍성을 해결하는 방식은 바로 이성인 것이다. 이 점은 외눈의 괴물에
잡혀 죽음직전에 놓인 오딧세우스가 자신의 이름이 ‘우데이스’, 즉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즉 이름을 숨김으로써 위험에서 모면하는 장면을 볼수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
정신에서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며, 이성을 통해 인간은 신들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프로메
테우스 신화가 보여주는 것도 바로 인간의 결백함과 신에 대한 인간의 분노로서, 바로 이러
한 그리스적 인간을 우리는 영웅이라 칭한다. 즉 그들에게 인간의 본질은 바로 영웅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복종이 아니라, 끝없는 인간의 자기 주장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인 인
간이 자신의 몫, 즉 자신의 모이라인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넘지 못할 때, 이런 상태를 비극
이라 부르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 정신에서 인간의 본질은 자신의 운명에 대항하는 영
웅과 그가 갖는 한계 안에서의 좌절인 비극으로 특징지워질수 있다.
그런데 그리스 정신이 이렇게 인간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경우 신들은 초자
연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적 존재였다는 점에서 유래한다. 그렇기에 인간은 신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며, 그 방식으로서 이성은 가장 효과적이고 긍정적인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
럼에도 인간은 신적 존재가 아니기에, 그의 운명은 결국 비극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것이
다. 그럼에도 인간이 진정한 인간이기 위해서는 운명을 무릅쓰는 영웅성과 그로 인한 위대
한 몰락, 즉 비극을 감행할 때 가능한 것이다.
반면에 히브리 정신에서 인간의 위치는 전혀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 신은 인간과는 전적
으로 다른 초자연적 존재이기에, 여기서 신은 모이라까지 지배하는 신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히브리 정신의 경우 초자연적 신뿐 아니라,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귀의 메타퍼를 통해 파악했
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이제, 신의 말씀에 대한 들음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다. 따라서 여기서 이성은 들음을 방해하는 요소로 파악된다. 왜냐하면 들음은 들음 자체로
족한 것인데, 이때 이성의 역할은 과연 들음이 정당한가? 이 들음은 누구의 소리인가? 등의
끝없는 회의로 이어질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락 설화에서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난 후,
하나님이 인간의 지식, 즉 이성에 대하여 염려하는 대목이 나오며, 바벨탑 설화에서나, 노아
홍수 설화에서도 인간의 생각(이성)을 강하게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 여기
서 이성을 통한 인간의 생각과 행위는 신적 존재에 대항하는 교만으로 판정되고 있다.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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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히브리 정신에서는 그리스 정신의 경우와 같은 영웅은 등장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러한
영웅은 곧 교만한 자로서 파악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 정신에서의 인간의 본질이 비극적 운명과, 이에 맞서는 영웅적 인간인
데 반해, 히브리 정신에서 인간의 본질은 인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과의 관계속에서
신의 말씀을 듣고(Hoeren) 순종하는데(Gehoeren) 있는 것이며, 이것의 여부에 따라 죄인인 인
간/구원받은 인간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6) 그리스 악론과 기독교 악론에 대하여
히브리정신과 그리스 정신에서 악에 대한 문제 역시 상이한 점을 띤다. 그런데 이러한
상이점은 우선 위에 말한 자연적 조건과 연관되어 있다. 히브리 정신의 경우 척박한 자연은,
초자연적 신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났음을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초자연적인 신 외에도 히
브리인들은 척박하고, 따라서 위협적인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만 했다. 이때 위협적인 자연은
비록 초자연적인 신과 동등하지는 않지만,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이며, 이런 한에서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존재로 여겨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점이 히브리 정신에서 나타나는 악의 이
중적 모습이다. 즉 한편으로 악은 실재하고, 항상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서, 어떤 의미에서
인간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존재와 같은 성격을 띠지만, 다른 한편 그럼에도 악은 초자연
적 신과는 구분되는, 즉 신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이중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다.
반면 그리스 정신에서 악은 처음부터 큰 주제를 형성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리스 정신
에서 신은 자연적 신이며, 자연은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라기 보다, 오히려 인간에게 풍성
한 선물을 제공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 정신의 경우 악은 자연적 선
물의 부족, 즉 결핍으로 파악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신을 최고의 존재로 여긴
반면, 악은 존재의 결핍이라고 파악했던 것이다. 이 점은 이미 파르메니데스에게서도 잘 나
타난다. 즉 그에 의하면 이 우주만물은 단 한가지 측면, 즉 존재의 측면만을 가질 뿐, 비존
재적인 요소는, 사실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러한 비존재에도 이름을 붙이는 오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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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최상욱 17
통해, 인간 인식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에 의하면 빛과 어두움의
경우, 단지 존재하는 것은 빛일 뿐, 어두움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어두움은 철저한 빛의 결핍일 뿐이며, 따라서 무에 불과한 것인데, 단지 인간이 무지하게 무
와 같은 어두움에도 이름을 붙였기에 인식구조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악의 경
우도 마찬가지로, 악은 실제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단지 인식 안에서 파악되는 현상
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플라톤과 그 이후의 철학자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
고 있다. 예를 들면 플로틴의 경우, 존재하는 것은, 충만한 존재인 일자 뿐이며, 일자로부터
유출된 모든 것들은, 일자로부터 멀어질수록 존재성을 덜 갖는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
서 일자가 유출한 마지막 것인 물질은, 그 본질상, 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악
은 설 자리가 없다.
이런 이유외에, 두 정신간에 악에 대한 입장이 상이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 정신의 경
우 굳이 악이 문제시될 때, 그들은 바로 인간의 인식에서 악의 근원을 보았다는 점이다. 즉
악이란 플라톤 식으로 표현하면, 현상 배후에 있는 진정한 존재, 즉 이데아를 인식하지 못하
는 것이 바로 악의 근원인 것이다. 따라서 악의 문제는 인간의 인식과 비인식, 진정한 이데
아의 인식인가, 혹은 현상에 얽매인 인식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반면에 히브리 정신의 경우 악의 등장은 인간의 인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인 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선악과에 대한 설화의 경우, 악이 인류 사이에 등장
하는 것은, 비록 악의 존재가 이미 있다하더라도 - 위에서 말했듯이 악의 이중적인 모습으
로서 -, 인간의 열망하는 의지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와 더불어 악은
죄로서 인간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죄는 지적인 무지
도 아니며, 윤리적인 잘못도 아니고, 오히려 신 앞에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
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은, 죄는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윤리적인 것도 아니고, 인식의 문제도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반항에의 의지일 뿐
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죄는 이해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원치 않는데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죄는 신 앞에서만 가능한 것인데, 그 이유는, 신만이 악으로부터 자유
로울수 있는 초자연적 존재이고, 인간은 위협적인 자연(악)에 노출되어 있는 자연적 존재이
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신과 다른 자연적 존재인 한, 인간은 이미 항상 악의 세력 안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신 앞에서 인간은 이미, 그리고 항상 죄인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입장은 서로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그리스 정신의 경우, 현
실적으로 존재하는 악한 세력에 대하여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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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 정신에서 인간은 악한 인간, 즉 죄인이란 멍에를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기서 인간
은, 그가 인간인 한, 단지 유한한 인간일 뿐이다.
반면 히브리 정신의 경우, 현존하는 악한 세력을 설명하기는 수월하다. 그러나 그 악과 신
의 관계를 이야기하려면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난다. 악을 신과 구분되는 또 다른 존재라고
말할수도 없고, 신보다 못한 존재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또한 인간은, 그가 인간인 한, 이미
그리고 항상 죄인인 것이다. 따라서 악의 문제는 변신론의 문제로 이어진다.
7) 변신론에 대하여
일단 그리스 정신의 경우 변신론에 대한 문제는 큰 어려움을 갖지 않는다. 우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단 하나의 유일신을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악이라는 것에 대하여 특
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기에, 세상의 싸움은 선한 신과 악의 거대한 대결이라는 구도를 갖지
않는다. 이곳엔 다양한 신들이 존재하고, 인간을 통하여 갈등과 투쟁을 하지만, 전적으로 선
한 신과 악의 구별은 없고, 단지 신들간의 투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신들 역시 그들의 권
한을 넘어섰을 때, 응징하는 모이라가 있지만, 모이라는 선 악의 피안에 있을 뿐이다. 따라
서 그리스 정신의 경우 변신론이 불가능한 첫째 이유는, 여기엔 다수의 신들이 존재하며, 그
신들의 투쟁은 선악의 피안에 놓여 있는 특징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선 선/악의 투쟁
이 아니라, 단지 인간을 통한 신들의 투쟁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변신론이 불가능한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 정신의 인간론에서 찾아볼수 있다. 변
신론이 가능하려면, 우선 선한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에 빠져드는 의인에
대한 표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리스 정신의 경우, 신과 인간의 관계는 유일한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을 인간의 편으로 회유할수도 있고, 또 다른 신의 힘을
빌릴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때 인간의 모습은 단 하나의 신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
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운명을 - 예를 들어 고난이 그 사람의 운명이라면 - 극복하려는
데 있기에, 이때 그 고난의 책임은, 의인을 고난에 빠뜨린 신의 뜻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단
지 그 고난에 빠지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간 자체에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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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최상욱 19
신의 경우, 고난의 책임은 신이 아니라, 인간에 있으며,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의 모습에 따
라, 그 인간은 범인이나 혹은 영웅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에선 세상의 악을 위해
굳이 신이 내려오고, 책임을 져야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단지 이러한 상황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스스로 드러내고 실현시킨다는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러나 히브리 정신의 경우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이곳에선 선한 단 하나의 신이
주장되고 있다. 그럼에도 동시에 세계를 지배하는 악의 힘 역시 어떠한 방식으로든 존재한
다는 사실을 부정할수 없다. 절대적인 유일 신, 그리고 그가 창조한 아름다운 세계, 그런데
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악의 힘. 바로 이것의 히브리 정신이 내포한 변신론의 주 요인이다.
그러하면 이것은 어떻게 해결될수 있을까? 이것은 신학 내부에서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 딜
레마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해결하려는 방식으로 신학이 종종 의지하는 것은, 바로 신의 죽
음과 신의 낮아짐이란 역설을 통해서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의 그리스 정신이 보기
엔 - 사도 바울이 잘 지적했듯이 - 어리석어 보인다. 그러나 역설이 이해되기 위해서는 바로
역설 안으로 들어설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히브리 정신은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렇게 역설
을, 인식을 통해 회의하지 않고 역설 자체에 몸을 맡기는 것의 본질이 곧 신앙인 것이다. 그
런데 변신론을 해결하는 신학의 방식이 이처럼 역설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한 이유는,
바로 히브리 정신의 경우 신은 단 하나의 신이며, 유일하게 선하고, 유일하게 진리인 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들간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가끔 등장하지만, 그 부분에서도 다른 신
은 무와 같은 것, 우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미 판정내리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신들간의
전쟁은 불가능하며, 단지 인간을 통한 신과 악과의 투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신
은 초자연적 신이며, 악은 인간의 힘을 능가하지만 그럼에도 자연적인 힘이어야 하기에, 신
이 주관하는 역사는 결국 신의 승리의 역사로 전개될 수 밖에 없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갖는다. 따라서 이 경우 인간의 역사에 나타나는 악의 힘은, 단지 신의 구
원사에 내재한 한 “계기”로서만 그 의미를 지닐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 나타나는 역사
의 불합리하고 억울한 일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궁극적 존재를 위한
“한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마지막 때(종말론) 이러한 현상은 궁극적 존재에 의해, 그
것이 얼마나 비존재적이고 무상한 것임이 드러날 것이란 주장이다. 따라서 의인의 고난은
히브리 정신의 경우, 어떤 의미에서는 슬픔이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의 구원사
에 동참하는 영광이고 기쁨인 것이다 - 순교자의 예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라.
따라서 히브리 정신의 경우 변신론을 위한 해결책은 첫째로 인간의 자기부정과 역설이란
점을 통해 이뤄진다. 그럼에도 이로써 악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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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江南大學校, 『論文集』, 第37輯
악의 해결은 각각의 개별적 인간의 자기부정으로서 완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
러한 고난의 순간이 비록 신의 구원사의 한 계기에 불과하지만, 그 고난의 순간이 실제로
악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고, 이런 한에 있어 신의 구원사가 완성되려면, 이러한 순간에서도
신이 전적으로 부재해서는 않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고난에 신이 어떤 식으로
든 참여해야만 한다면, 이것은 이제 신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낮아지는 역설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즉 신은 자신의 초자연적인 위치에서부터, 인간을 능가하는 자연적 악을 극복하
기 위해, 스스로 자연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주장이다. 이렇게 히브
리 정신의 경우 변신론의 해결은 신 스스로가 자신을 부정하는 사건 - 예수 그리스도를 통
한 성육신과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부활 -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
한 이중의 역설을 통해 히브리 정신은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8) 신학과 철학의 미래적 전망
우리는 위에서 신학과 철학의 차이점에 대하여 알아 보았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
하고 이 두 학문 사이에는 유사점도 많다. 신학은 신의 학문이자 동시에 신에 대한 학문이
며, 이와 마찬가지로 철학 역시 최고의 근거에 대한 질문으로서,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러한
철학적 질문의 특징을 존재-신-론이라고 불렀다. 이 두 학문은 바로 최고의 근거에 대한 질
문을 그 특징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최고 근거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유래했는
지 살펴 보기로 한다.
인간은 그 시초부터 지금의 인간과 같은 인식구조와 형태, 소질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뿐
만 아니라 동물과 비교해 인간은 그 자체로 볼 때 불완전한 능력을 부여받았을 뿐이다. 그
러나 이러한 불완전성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환경의 변화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 즉 세계에 대한 개방성을 발달시키게 된 계기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불완전성은 자신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유발시켰으며,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대답
하여 가는 과정이 바로 인간의 역사라고 볼수 있다. 이때 인간이 질문을 한다는 사실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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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철학에 대한 해석학적 고찰; 최상욱 21
선 인간의 불완전성과 세계 개방성에 유래하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인간을 압도하는 힘이
- 그것을 우린 성스러움이라고 부를수도 있다 - 인간에 의해 경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비
록 그것이 자연적인 것들, 즉 힘센 동물이나, 천지 현상등일수도 있고, 죽은 조상일수도 있
고, 아니면 알수 없는 신비적 힘이라고 볼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그러한 것들에서
자신보다 우월한 어떤 힘을 느꼈다는 것이고, 이러한 힘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질문하게
한 결정적 요소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인간은 대답을 해 나가고, 그 동
안 인식의 발달과 더불어, 그 대답 중 많은 것은 현대에 이르러 무의미한 것으로 부정되기
도 하고, 혹은 아직도 유효한 것으로 살아남아 있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종교발생 원인을
살펴보면, 인간이 알수 없는 거대한 힘을 어떻게 이해해 왔는가를 알수 있는데, 그 특징은
점차 인간의 질문 대상, 즉 최고의 근거가 구체적, 실증적 형태로부터 개념적, 사변적 형태
로 발전되어 왔다는 점이다. 그리스 정신의 경우도, 의인화된 올림푸스의 신들로부터, 자연
철학자에 이르면 하나의 근거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데, 이때 그 근거는 물, 불, 공기, 흙
등으로 주장되고 있으며, 이것이 플라톤에 이르러 최고의 이데아로 주장됨을 알수 있다. 이
점은 부족장의 신으로부터 모세의 유일신, 왕조사가와 예언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
난 히브리 정신에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정신은 모두 일정한 발전 과정을 지
니고 있다는 점이다.
즉 두 정신의 근원은, 맨 처음 인간이 - 인간 세계는 동물과 달리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과제로 주어진 것이다 -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리고 이러한 표현들은 일정한 혈족, 부족들을 중심으로 공동의 가치로서 받아들여지게 되고,
이로써 그 가치들은 하나의 객관성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족의 후손들은 이러한
객관성 안에서 양육되면서, 그러한 객관적 가치를 자신들의 주관적 가치로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들 후손들의 경우, 선대의 가치들을 습득함으로써, 그 선대의
가치가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치들은 선대의 경우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선택된 가치중 하나였던 것인데, 이제 가치의 객관화와 주관화 과정을 통
해, 그 가치는 절대적 가치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 이 절대적 가치는
그 구성원들을 철저하게 규정하는 사회적 노모스로서 나타나게 되고, 이러한 노모스의 세계
는 코스모스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바로 사회와 자
기 자신에 대한 부정이며, 동시에 코스모스적 우주 전체에 대한 부정, 그리고 그 공동체 최
고의 근거, 즉 신들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모스적 가치도 역사의 흐
름에 따라 점차 사회의 요구를 수용할수 없을 때, 새로운 가치에 의해 보충 확대, 혹은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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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정의 가치는 절대적 가치로 정당성을 인정
받게 되고, 후세까지 전승되게 되는 것이다.
신학과 철학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인 세계 형성의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서,
단지 신학과 철학이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은, 역사의 과정에 개입된 자연 조건과
그 구성원들의 성향에 의해 달라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로서, 만약 소크라테스가 히브리
정신권에서 태어났다면, 그는 후세에 의해 종교지도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볼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신학과 철학 모두 동일하게, 인간의 최고 근거에 대한 질문과 대답의 변
증법적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고, 인간으로 하여금 질문하게 한 알수 없는 힘에 대하여 신
학은 신학적 방식으로, 철학은 철학적 방식으로 대답하였다는 차이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학과 철학은, 인간이 경험한 알수 없는 힘이라는 동일한 근거
에 대한 동일한 질문이며, 단지 대답의 방식에 있어서 차이를 지니는 것이다. 즉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동일한 질문에 대하여, 구체적 상황에 놓여 있는 인간들이 특수한 방식으
로 대답한 것이 바로 히브리 정신과 그리스 정신, 즉 신학과 철학이란 형태로 오늘날 우리
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학문의 미래적 과제도 분명해 질수 있다. 즉 역사의 변화 과정을 통해 신
학과 철학의 엄격한 구분이 필요했던 시기가 지나, 세계가 구체적 제한성보다 보편성을 더
많이 요구하게 될 때, 이 두 학문은, 그것들의 시작이 알수 없는 힘에 대한 인간의 동일한
질문에서 비롯되었듯이, 이제는 미래적으로 다가오는 알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동일한 질문으
로서 받아들여 질수도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물론 그 대답의 동일성까지 요구하는 것
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리한 일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다만 그 질문의 동일함까지도 부정
함으로써, 배타적 영역을 주장하는 것은 역사의 변화에 대하여 눈을 감는 행위라고 볼수 있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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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맺는 말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우리는 차이성과 동일성의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살
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이러한 두 경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이르렀
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인식의 관성은 항상 옛 것에 매달리게 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가 이야기되고, 탈현대가 주장되는 이 시점에서, 자신
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정체성을 폐쇄성과 혼동해서는 안되리
란 점도 분명하다. 따라서 이 두 정신의 차이점과 동일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두 학문은 자
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더욱 굳건히 하면서도, 타 학문에 대한 개방성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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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江南大學校, 『論文集』, 第37輯
참고 문헌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최 명관 역, 서광사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최 혁순 역, 범우사
마르틴 하이데거, 세계상의 시대, 최 상욱 역, 서광사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적 조건, 이 현복 역, 서광사
토를라이프 보만,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허 혁 역, 분도출판사
M.Horkheimer/Th. Adorno, Dialektik der Aufklaerung, Fischer, Frankfurt, 1988
I. Kant,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aerung?, Kants Werke, Akademie-Ausgabe, Band III, Berlin
1912
Platon, "Phaidon", "Politeia", Saemtliche Werke 3, ueber. v. F. Schleiermacher, Rowohlt,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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