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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8/09/23 (18:39) from 122.46.159.2' of 122.46.159.2' Article Number : 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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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지식의 근원으로서의 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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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지식의 근원으로서의 유비

                     황덕형(서울신학대학교)

                   
I


     융엘(E.Jüngel)은 하나님에 대하여 묻는 인간의 근원적 가능성을 인간이 갖고 있는 인간학적 사실, 즉 인간의 존재가 언제나 묻는 자라는 그 인간학적 근거에서 찾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물음의 시원을 오히려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발견하고자 한다. 물론 이미 하나님을 말하고 있다는 그 사실은 이미 하나님을 어떤 기존의 대상으로 갖었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일어나야 할 사건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자이심을 의미한다. 우리의 사유와 믿음의 대상으로서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심을 통하여 우리는 더 깊이 있는 현실 속으로 끌려들어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은 이 사건과 더불어서 하나님에 의하여 물음을 받는 자라는 새로운 조명을 얻게 되는 것을 배운다. 하나님이 말을 걸어 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먼저 듣는 자인 것이다. E,Jü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Tübingen, 1977, 334쪽이하

       그리고 우리는 융엘과 함께 여기에서 한가지 질문에 대하여 두 가지 상이한 태도가 결정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자연신학으로부터 배운바 하나님은 우리의 사변의 최후의 결과라는 보통 아래로부터의 인식의 가능성의 태도이다. 즉 인간이 묻는 자로서 그는 인간이 가진 모든 것들을 통하여 의미의 근원을 묻고 있으며 이 세상의 비밀에 속한 그 상이한 대상들에 대한 답변이 결국은 하나님이 된다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양하고 상이한 이 세계의 비밀들과 연관해서 알 수 있다는 태도를 갖게된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이 자연신학과는 전혀 다른 출발점이 주어져 있다. 즉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가능성에서 시작하는 여행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한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계시의 하나님지식이 바로 이것이다. 이 양자는 어떤 관계인가? 서로 배타적인 관계인가? 아니면 양자의 언어는 서로 다른 언어체계에 속한 차이일 뿐인가?
      이 물음에 성급하게 대답하기 이전에 우리에게 하나님이 알려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을 인식 할 필요가 있다. 아래로부터 시작하여 이 세계의 초월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 세계의 비밀로서 하나님을 진술하게 되는 것이나 우리에게 전혀 낯설었던 가능성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이 우리가운데 성취되어 그 낯설었던 우리의 변경으로부터 새롭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나 모두 인간의 극한의 한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렇다면 이 극한의 한계는 어디에 존재하며 그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이 극한의 장소가 다른 곳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사이”의 지평임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 궁극적 사이의 구체적인 지평은 어디인가? 그 구체적인 “사이”의 지평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앞에서 제시한 그 두 가지 상이한 하나님 인식의 출발점들은 이 지평에 대한 각각의 평가에서 갈리고 거기에서부터 서로 다른 말을 다른 관점에서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신 인식의 구체적인 근원에 대한 인간의 탐구는 언제나 이 궁극적 사이의 성격을 서로 다르게 평가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판단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혹시 판단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면 이 궁극적인 사이의 지평에서 우리는 어떤 언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극한의 자리에서 우리는 과연 일반적인 상식과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 극한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 다시 일상적인 세계의 역사 안으로 하나님을 말할 수 있게 될 것인가?

                                     
                                       II


   이 궁극적 사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이미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이 사이의 언어로서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가능성은 바로 “유비”의 가능성이다. 유비는 그 철학적 근원에서부터 물론 이 세계내의 현상에 대한 언어로서 사용된 것이 사실이다. W. Kluxen, Art.: Analogie, in: Historisches Wörterbuch der Philosophie, Bd .I, 211쪽이하 유비(analogia)라는 개념은 둘 이상의 서로 독립적인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내지 그 유사성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원리 내지 존재적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생각된 것이다. 다양한 것들 사이에서 동일한 것 혹은 유사성의 사태를 추구하는 것은 단순하게 비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유사성과 유사성에 근거한 이해의 배후의 지평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문제이고 인식론이고 또한 존재론적이다. 서구 철학사적으로 볼 때 수학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정설이다. pytagoras가 대수적이며 기하학적 수학을 발전시키면서 그 원리를 통하여 우주의 존재 생성의 원리를 보려고 했던 것이다. 대수적인 관계이건 기하학적 관계이건 간에 이 유비라는 사태에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것은 그 관계를 형성하는 중간적 매개(Mitte: μεσον)의 원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중간적 매개의 활동과 그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근원적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를 갖는 셈이다.  특별히 유비현상과 연관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신 플라톤주의에서부터 이 유비가 우주적이며 존재적이고 구성적인 요소로서 확실하게 더욱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플라톤의 글 속에서 이 유비를 우주적 존재의 근거로 보았지만 전반적인 철학적 세계에서 유비의 힘이 존재론적으로 인식론적으로 방법론적 차원에 이른 것은 다름 아니라 plotin의 철학에서부터 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역사적으로 유비의 철학은 이미 신학적 사태와 깊이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유비라는 현상에 대한 관심이 신학자들 사이에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는 이유도 이 단어가 가진 철학적 함축성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Eberhard Jüngel, Zum Ursprung der Analogie bei Parmenides und Heraklit, in; Entsprechungen: Gott-Wahrheit-Mensch, München ,1986, 53쪽
서구의 철학은 이 개념를 통하여 세계의 근원과 그 현상에 대한 통일적 인식에 이르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세계의 근원이 신으로 사유되는 한에 있어서 이 유비라는 단어에는 앞에서 지적한 하나의 가능성, 곧 이 세계의 근거와 세계의 비밀을 끝까지 사유하여 그 근거와 비밀을 신과 동일시하거나 일치시키고자 하는 운동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유비의 언어현상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다는 보다 포괄적인 신 인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면에서 상징론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다양한 새로운 형태의 언어 철학적 그리고 종교철학적 주제와 연관되어 설명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유비를 각별하게 신학적 지식의 근원으로서 다시 생각하고자 하는 이유는 신과 인간사이의 궁극적인 사이의 지평을 열어놓은 채로 우리에게 하나님 인식의 새로운 가능성을 우리의 세계 속에서 언어화한 가능성이 또한 여기 이 개념을 통하여 가능했기 때문이다. 유비 안에서 우리는 신학이 신학 본래의 대상을 신학적으로 온전하게 말할 수 있는 그 본래적인 가능성을 확인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유비라는 언어현상에서 “신학적 진술의 근원적 가능성”을 다른 여타 철학적 가능성과 구분되는 특별한 관점을 얻을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현대적 관점에서 레비나스와 하이데거 그리고 리꾀르의 비유적 언어의 신학적 함축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지만 이런 모든 현상과는 달리 구체적으로 유비에서는 신학적 지식의 바로 그 근원이 스스로 언어화하여 언어가운데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개념 안에 두 가지 형태의 가장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상이한 물음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 자체가 각별한 일이 아닐수 없다. 그렇다면 유비라는 언어 현상 안에서 가능해 진 이 두질문의 차이와 구분점은 어떻게 인식하여야 하는가? 어떻게 해서 한 개념이 그토록 상이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게 되었는가? 그것이 그 개념이 가지고 있는 자체의 능력 때문인가? 아니면 그 개념을 통하여 대상화되는 그 개념의 대상의 능력으로 인한 것인가? 우리는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부터 각기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유비 이해가 가능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철학적 유비론의 이해와 신학적 유비론의 이해는 어떻게 서로 각각에게 구분될 수 있는가?
   먼저 유비라는 사유의 구조가 개신교도인 바르트에게서 그토록 중요하게 쓰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제자인 오트는 일찌기 유비란 사상은 이미 두개의 비교대상을 두고 그것들의 상호 비교를 위해서 또 다른 제 삼의 입각점을 세우고 그곳에서부터 객관적으로 그 비교대상이 갖는 공통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적 구조를 가진 언어체계라고 비난하였다. 유비를 신학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거부한 셈이다. 그 대신 그는 오히려 하이데거식으로 이해된 “개방성”으로서의 존재의 사건을 신학적 계시이해를 위해서 사용할 것을 제시한 바 있다. Heinrich Ott, Denken und Sein, 사유와 존재, 김광식 역, 서울:연세대학교, 1985, 156쪽이하
전통이 보여주는 것처럼 유비란 철저하게 스콜라 철학이 가지고 온 형이상학적 구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바르트는 자신의 신 인식론의 기초를 이 유비라는 형식 위에 세우게 되었을까?  더욱이 그는 초기 자신의 신학을 변증법의 역동성을 통하여 말하려고 할 만큼이나 현재적인 사건성을 중시하고 키에르케고르로부터 이어받은 실존적인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의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식의 부정성(Negativiät Gottes Erkenntnis)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을 말할 수 없는 자로 여기고 있었고 그런 가운데 혹시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여기 나의 신앙의 실존가운데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실존적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길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실존적인 방법에 위존 하였던 그가 초기의 변증법적 구조에서 유비적 구조에로 넘어가게 된 결정적인 연구는 그의 안셀름 신앙연구서 K.Barth, Anselm: Fides quaerens intellectum, W.Robertson역, Virginia, 1958, 이러한 바르트에 입장에 대하여 두가지 상이한 태도를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먼저 바르트의 해석과 비슷하거나 부분적인 차이(이를 테면 바르트는 전적으로 계시신학자로서 안셀름 이해한 반면 안셀름이 요청한 신학이 계시적 신학임을 인정한 경우)를 가지고 안셀름의 철학이 그의 신학적 바탕과 신앙적 사태를 벗어나서 이해할수 없다고 하는 설이다 이에 대표적으로는 Karl Zimmermann, Anselm von canterbury, Der ontologische Gottesbeweis und das Problem der metaphysischen Erkenntnis, in: Die Metaphysik im Mittelalter, Miscellanea Mediaevalia BdII, Berlin, 1963, 184쪽이하. 반면에 바르트에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면서 그의 해석은 ‘신앙주의’로 격하시켜서 안셀름의 이해가 오로지 철학적 이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경우이다. 이때 필연적으로는 안셀름의 논증에서 실수와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이미 앞에서 논의한 Kurt Flasch의, Kann Gottes Nicht-Sein gedacht werden? 안의 서문적 논문  
이다. 바르트는 대화록(proslogion)에서 안셀름이 이성에 의해서 신 존재를 증명하였다는 일반적인 이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안셀름이 한 일은 일반적인 의미의 증명(probare)이 아니라 이해(intelligere)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르트는 하나님 인식과 연관된 이해의 과정을 신앙과 긴밀한 연관 속에서 보고자 하였다. 이로써 바르트는 신앙의 본성은 그 자체 안에서 지성을 추구하는 이성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바르트가 보기에 이러한 계시 신학적 요소는 안셀름 자신의 서언적 기도 안에서 분명하여 진다.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에 따른 신앙의 사실가운데서 신 인식은 이해되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Anselm, Proslogion, 1장: 많은 기도중에 그는 말하기를 “오 주여 이제 들어주소서, 우리를 밝혀주옵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인간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것이며 그가 계시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는 결국에서는 나는 믿기위해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해 믿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내가 믿지 않는다면 나는 이해할수 없기 때문이다(Nam et hoc credo, quia nisi credidero, non intelligam)".

    그렇다면 그 책은 어떻게 그 일을 수행하는가? 이 책에서 바르트는 비로서 신학함의 본래성이 드러나는 사유구조와 언어를 찾게 되었다고 말하게 된다. 즉 이해되어야 할 그 대상에 적합한 언어구조와 사유구조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은 신자와 비신자가 함께 공유하게 될 단 하나의 하나님 이해의 근거를 찾는 것으로 성취된다. 이 단 하나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이다. 신앙이 있는 자나 신앙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자들이나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공통된 가능성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여기에서 비로서 초기의 그의 사상을 완전히 바꾸게 될 계시의 객관성을 발견한다. 지금까지 하나님 인식의 조건을 실존적 언어등 인간의 경험에 의존하던 그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이다. 안셀름의 신 존재증명이라고 불리 우는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무엇”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이해는 사실은 이성적 규명이 아니라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K.Barth, Fides quarens intellectum, 81쪽
. 신앙의 이해는 비록 신앙 안에서 시작되지만 그 인간들의 신앙은 그 신앙의 진술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이성에 대하여 철저하게 독립적이며 객관적이다. 하나님 인식은 인간들의 주관적인 조건이나 그 구조 혹은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을법한 어떤 성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객관적 계시의 사건은 그 객관적 존재의 이성성과 필연성을 갖고 있다. 먼저 안셀름은 많은 곳에서 이성성(ratio)이란 단어를 사용 할 때는 주로 5격으로 사용하였다: 이는 그가 벌이는 신학적 탐구의 목적이나 혹은 신학적 탐구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어떤 탐구의 도구적 기능이나 혹은 그 탐구의 결과로서 알려지는 이성적 목적을 의미하기도 하는 말이다. 이성은 물론 인간의 특질로서 안셀름에게도 개념을 형성하고 경험을 나누고 이해하며 판단을 내리게 되는 일차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K.Barth, Fides quaerens intellectum, 45쪽이하
하지만 바르트가 보기에 결정적인 것은 이 이성을 그 이성의 대상과 상관없이 인간의 주관적 능력으로 쓴 것은 단 한 곳뿐이다. 즉 그는 이성성은 주로 그 인식의 대상과 연관되어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신앙의 이성성이나 그리고 어떤 질문에 대한 이성의 확실성을 추구 할 때에는 한결같이 그 이성의 대상과 연관하여 이성성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신앙의 대상으로 주어진 그 계시의 존재는 자신의 존재적 필연성과 이해 가능성을 갖는다. 그리고 이 존재적 필연성과 이해가능성에 우리의 주관적인 사유의 필연성과 이해가능성이 상응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식이란 그 대상에 적합한 그 대상에 독특한 이성성과 그 근거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주관과 객관적 구조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철저하게 그 대상이 주관적인 나의 의식과 이해 안에 자신의 활동을 통하여 유사적 상응의 관계를 설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안셀름의 신 존재 증명을 신앙의 사태 안에서 이해함으로서 신 존재 증명 전체가 새로운 계시 신학적 특성을 갖게 된다. 이 계시 신학적 특성에서 안셀름을 이해한다는 것은 존재 형이상학적 접근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의 근원에 대한 새로운 시도가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지금까지의 주관주의적 방식의 신앙의 이해와 신 인식의 방법을 버리게 된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바르트의 방법을 주관주의적 언어이해로 무장된 현대적 사상의 부류로 보는 것은 일단의 오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반틸의 바르트 비판이 그렇게 정초되어 있음을 보게된다. 그에 의하면 바르트는 주관주의적 사상가로서 하나님의 행동주의라는 얼핏 보면 인간과 상관 없는 객관적인 방식으로 신인식에 접근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인간중심의 사유방식을 더 극단화한 신학자로 이해되는 것이다. 참고 Cornelius Vantil, 신 현대주의, 바르트와 부루너 신학의 평가, 김해연 역, 성광문화사, 1990, 하지만 이에 대하여 우리는 동시에 같은 학교에서 함께 있었던 벌 카우어의 반틸비판도 함께 고려해 보아야 한다. 참고: G.C.Berkouwer, 칼 바르트의 신학, 조동진역, 서울, 도서출판 별, 1962
진정으로 그가 유비적 사고구조를 채용함으로서 소위 현대주의자들과 차이가 나는 것은 다름아니라 이 객관 주의적 사고구조였다. 바로 같은 이유에서 그는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들과는 같은 길을 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 우리의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이 알려 지는 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는가가 문제였던 것이다.  


                                     III
 

   그렇다면 이러한 신앙적인 사건을 통하여 파악된 신학적 유비의 인식 속에서 그것의 대상으로부터 획득된 언어와 사유방식은 어떤 특징을 갖게 되는가? 이때 획득된 언어와 사유구조는 주관주의적 해석학과는 다른 언어적 특성을 가지게 된다. 동시에 같은 유비를 다루는 소위 존재 유비론 자들과의 견해와도 완전히 다른 언어적 특성을 가지게 된다. 바르트의 유비적 계시 이해에 따른 이해방식은 삼위일체적 신 인식 E.Juengel, Gottes Sein ist im Werden, Tuebingen, 1967, 72쪽
의 특성 속에서 찾아지는 것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의 대상성을 기초로 하는 언어방식이다. 이 하나님의 대상성을 기초로 한 언어방식이 단순히 객관주의적이며 형이상학적이지 않을 수 있는 특별한 가능성은 어디에서 오고 그것은 무엇인가? 비록 바르트의 신학적 언어가 역설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이 신앙의 유비에서 찾아지는 언어는 단순히 주관주의적 실존체험과는 다른 것이다. 거기에는 현재적인 나의 언어를 통하여 제 삼자가 인정되는 그런 삼자성의 구조가 가능하다. 즉 하나님의 직접적이지만 동시에 간접적인 삼자적 방식의 임재가 이 언어들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사태적 해명으로서 E Levinas, Die Spur des Anderen, in: Die Spur des Anderen,  W.N.Krewani역, München, 1983, 230쪽이하.  동시에 이 삼자성에 대한 언어철학적 해명으로서 근접성에 기초한 같은 저자의 다음글을 볼 것 E.Levinas, Otherweise than Being or Beyond Essence, Alponso Lingis역, The Hague, 1981, 35쪽이하, 45쪽이하
이러한 구체적인 바르트 신학의 언어적 특성은 그의 교회교의학의 언어 구조의 삼중적 층을 확인함으로써도 다시 구체화할 수 있다. E.Juengel, Die Moeglichkeit theologischer Anthropologie auf dem Grunde der Analogie. Eine Untersuchung zum Analogieverstaendnis Karl Barths, in: Barth-Studien, 1982, Gerd Mohn, 210-232쪽. 융엘이 바르트의 유비 이해에서 보여주고 있는 구조적 계기들은 아래에서 보여줄 바르트의 언어 구조와 유사한 관계가 현시 된다.
특별히 그가 실존주의적 색채로 물들었다고 생각하였던 기독교 교의학에서 벗어나 새롭게 교의학을 하나님의 말씀론에 새롭게 기초짓기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의 교회교의학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전제를 ”실존인가? 아니면 말씀인가?“ Karl. Barth, KD. I/1. Vorwort S. VIII.
라는 양자택일의 방식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순수하게 말씀의 기초위에서 이 유비적 언어이해와 연관된 작업을 구체적으로 시행하게 된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바르트는 결단코 자신의 한 사유 모델를 절대화 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삼중적 구조란 어떤 개체 인간의 독립적 사유 구조 라기 보다는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 찾아지는 신앙의 자기 해명의 구조이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서에서 제시되는 하나님의 행동에 의거한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사유구조(biblische Denkform) KD IV/3 102 참고: Wolfhart Schlichting, Biblische Denkform in der Dogmatik, Zuerich, 1971 Schlichting이 여기에서 서술하였듯이 기타 모든 철학적 혹은 시대사적 다른 원인에 의하여 바르트 신학의 근원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르트가 스스로 고백하였듯이 그의 신학은 성서적 진실을 다시 한번 여기에서 진술되도록 하는 것이다. 참고: K.Barth, Parergon, 1928-1938, in: EvTh, 1948/9, 272쪽 많은 곳에서 바르트는 자신이 점차로 철학적 인간학적 모든 영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자 한다고 말한다.
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적 언어들이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보았을때 언어를 의미론적으로 규정짓는 전통적인 서구 신학의 길과는 다른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말씀론에서 바르트 신학의 해석학적 열쇠를 찾으려는 노력이 특별한성과가 없다는 Ford의 견해가 암시하는바  D.F. Ford, Barth Interpretation of the Bible, in: Karl Barth의 신학방법론,  S.W. Sykes 편, 이형기 역, 서울, 1986.
대로 신학의 방법론적 고찰에 속하는 말씀론에서 오히려 활용론적 언어 특성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언어의 활용론적 특성은 바르트의 신학언어가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언어의 불연속 성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사건으로서의 직접성을 통하여 의미가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주장되는 언어와 실재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의 연구를 참조할 것. C. M. Morris의 연구는 거의 이 부분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아펠의 연구를 볼 것, K.O.Apel, Sprache und Wahrheit in der gegenwaetigen Situation der Philosophie. Zur Semiotik von Ch. Morris, in: Transformation der Philosophie Bd.1. 이외에도 William G. Hardy, Language Thought, and Experience: A Tapestry of the Dimensions of Meaning, Baltimore, 1978. 133쪽이하; 언어의 전통적 의미론적 해석에 대한 한계와 연관하여 E.Tugendhat, Die sprachanalytische Kritik der Ontologie, in: Das Problem der Sprache, H.G.Gadamer, Heidelberg, 1966, 484-494. 이 연구가 보여주는 대로 전통적 형이상학의 존재가 갖는 보편적인 차원의 가능성을 “부정”속에서 찾은 것은 의미론적인 언어 이해의 한계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언어의 보편성에서 존재의 보편성을 강조한 것이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신학적 언어들이 그 자체의 능력으로 신적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활용을 통한 사건적 시간속에서 계시적 사건으로 이해가 발생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런의미에서 사건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의 직접성은 활용론적 직접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임으로 ”활용“으로서의 그 말이란  하나님의 말씀 사건이란 특별한 사건의 실현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지시/지시체라는 인간 지성의 지향 속에서의 대상을 찾는 해석학적 관심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오히려 이 활용론적 관심은 그 말의 참된 주체를 찾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라는 그 진술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사건을 암시하게 된다. 내가 무엇을 지칭하기 때문에 그 말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향적 사고를 넘어서 그 진술에서 사건화 되고 있는 계시의 현실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먼저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의 삼중적 형태의 첫 번째 대상으로서 “선포된 말씀” 을 새로운 신학적 진술의 가능성으로 삼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선포된 말씀이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현실 앞에 인간이 서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인간의 주관적 조건속에서 형태를 갖는 언어가 아니라 이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문제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현실에 인간이 노출되어 있지만 결코 인간이 그 말의 중심적 현상으로 등장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 논의의 중심적 과제였다. 그렇기에 이 선포된 말씀과 연관해서 바르트가 제기하고 있는 물음은 그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형태로서 발설되어진 인간의 말의 참된 주체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 인 것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이 활용적 특성가운데 주어진 선포된 말씀에 대한 이해에서도 신학적 언어의 실재론을 발견한다 K.Barth, KD I/1, 95쪽
. 인간의 말의 주체를 인간의 이해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 찾지만 그 언어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한 인간의 말들이 실재로 그 주체로서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한, 그 인간의 선포된 말은 실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부여한 위임(Auftrag)이라고 이해하는 것이요 여기 부족하지만 주어진 인간의 선포의 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대상(Gegenstand des Wortes Gottes)이요 또 그 언어적 성육신에서 일어나는 계시의 현재화의 판단 기준(Das Urteil)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두번째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기록된 말씀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기록된 말씀은 바르트에 의하면 성령의 조명이 삶의 과정에서 구체적 실현된 증거인 것이다. 그렇기에 신학의 중대한 기초가 바로 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서라고 한다. 이 기록된 말씀은 이미 “선포된 말씀”의 공동체인 교회의 기초이며 그 근거는 다름아니라 살아있는 그 말씀의 연속성이다. 진정한 사도적 전승이 교회 안에서 성서의 증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K.Barth, KD I/1, 107쪽
초기 바르트의 계시 이해에 있어서의 변증법적 필연성을 인간의 자기 의식에 대한 비판적 사용과 연관시켰고 그것은 절대적 부정의 길(Via negativa)처럼 보였던 것과 비교해 보면 그가 얼마나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는지 알게 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스스로를 신앙의 기준으로 만든다고 그렇게 기술하고 있다. 바르트는 성서 안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고 말하고 있는 구체적 인간의 말을 발견한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서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성서가 비록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지만 계시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성서가 계시의 말씀을 전하는 인간의 말이라는 그 어떤 철학적 이유를 선험적 동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바르트는 자연신학적 동기를 비판하면서 성서의 근거에서만 신학을 해야 하는 그 어떤 선험적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대신 거기에는 사실적 이유만이 있을 따름인 것이다. K.Barth, KDI/1, 112쪽이하
성서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전해진다면 그리고 그 성서에서 그 어떤 표준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여기 현재 하나님의 말씀의 한 현재화로써 그 성서가 우리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는 사실적 이유에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우리가 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제 이 하나님의 말씀의 본을 따라서 우리가 신학 한다는 것은 이 말씀의 해석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그럼으로 어떤 창조적인 자신의 활동 안에서 신 인식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모든 인간의 언어로서의 해석과 석의는 이 역사적 중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와중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차별과 동시화의 과정이란 그 어떤 해석학적 공동성의 발견이 아니라 차별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자기 반복이다. 이 하나님의 자기 반복 속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서게 되는 것이다. 신앙 안에서의 인간의 언어는 이런 의미에서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관계되어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진술들은 먼저 "증언"의 성격 여기에서 제시한 증언의 성격은 이를테면 설(J.Searle)이 언어의 기초단위를 언어-행위로 봄으로서 언어의 이해를 언어의 실제적인 활용의 사건 속에서 보고자 한 것과 비교될 수 있다. 참고: J.R. Searle, Speech Acts,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Langua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9,  
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분명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우리의 신학적 언어가 바르트의 유비적 구조에 의하면 참다운 언어로 등장하게 되는 근원을 내포하면서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활용적 언어로서의 신학적 언어의 특징은 우리 인간의 신앙의 언어가 실제로는 하나님 말씀에 의하여 가능해진 것이라는 통찰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서와 선포는 언제나 하나님에 의하여 사건으로 일어나는 계시를 증언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서의 계시에 대한 중언은 바르트의 원 말을 그대로 옮기면 “in eine bestiommte Richtung ueber sich selbst hinaus und auf ein Anderen hinweisen (어떤 일정한 방향성으로 자신을 넘어 타자를 가르치고 있는 것)" 이다. KD I/1. 114쪽
바르트는 성서나 설교의 형태로서 주어져 있는 언어들이 이 타자에 대한 정당한 관계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말하고 있다. 이 정당한 관계를 바르트는 다시 성취(Vollzug)로서 활용적 언어사건의 특성으로 이해하고 이를 “성취된 시간(Erfuellte Zeit)이요 동시에 시간의 성취(die Fuellung der Zeit) KD I/1. 122쪽이하
”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르트가 강조하고 있는 이 시간은 도데체 어떤 시간인가? 여기서 바르트는 계시 이해에 있어 선험적(apriori)으로 사유하지 않고 후험적(aposteriori)으로 추상적(in abstracto)이지 않고 사실적(in factu)으로 사유한다는 것을 기억할때(Ubi et quando visum est Deo!) K.Barth, KD I/1, 120쪽이하
이러한 성취의 언어(je und je als Vollzug der Gotteserkenntnis)로서 주어진 인식은 연속적 시간성의 차원에서는 이해 할 수 없는 비연속성의 우연성을 강조하게 된다. 시간에 대한 바르트의 보다 포괄적인 논의를 위해서 다음을 참조할 것. KD II/1. 685쪽 이하; III/1. 73 이하 ; III/2. 556 이하  특별히 개별적 연구로서. 일반적이며 개괄적으로 R.H.Robert, Barths Doctrine of Time, in: Karl Barth. Studies of his Theological Method, Oxford, 1979. 88/146쪽 ; 계시의 시간이 갖는 실천적인 이념비판적인 관점과 연관해서 Dieter Clausert, Theologischer Zeitbegriff und politisches Zeitbewusstsein in Karl Barths Dogmatik, Muechen, 1982; 특별히 시간의 해석학적 역할과 상관하여서 Friedrich Seven, Die Ewigkeit Gottes und die Zeitlichkeit des Menschen, Goettingen, 1979.
신앙의 유비라는 사건속에서 획득된 언어가운데 우리가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그러나 주어져 있는 인간의 언어의 근거로서의 계시의 언어가 주어져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순간의 가능성으로서 Barth, KD I/1. S. 11. "Was der rechte Inhalt solcher Rede von Gott ist oder nicht ist, das ist in dem Lichte, in das wir hier gerueckt sind, an sich in einem Nu und in der hoechsten Vollkommenheit und Gewissheit klar."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지라도 그 신학적 언어는 과연 자기의 언어 속에서 계시의 의미로서 다가오는 존재론적 불가해체성인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존재를 이 언어들은 지적할 수 있게 된다. 이 언어가운데서 바르트의 표현대로 나와 하나님의 만남은 주인과 종의 만남으로서 일어나는 것이며 용서와 화해의 만남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학의 언어는 자신의 언어가 자신 스스로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른 배후의 절대자에 의하여 가능한 것임을 스스로 자신의 존재 속에서 증언하게 된다. 즉 이 언어는 자신을 말하면서 하나님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드리게 되는 겸손의 삼자성의 지칭을 가능하게 한다.


                                IV


   그렇다면 먼저 철학적 유비 이해에 근거를 둔 하나님인식의 가능성은 어떻게 구체화 할 수 있는가? 카톨릭의 신학자 쇤겐 G.Söhngen, Wesen und Akt in der scholastischen Lehre von der Participatio und analogia entis, in; Studium Generale 8, 1955, 649-662쪽
은 일찌기 바르트와 프리츠바라사이의 존재 유비에 대한 관계를 언어방식의 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만큼 존재 유비와 신앙 유비라는 둘 사이의 차이는 전통적인 스콜라 철학의 유산으로 여겨지는 유비라는 언어방식과 유비 외 다른 모든 언어방식에 비교에 본다면 사실 미미하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사실 바르트가 신앙 유비라고 주장한 것이 소위 존재 유비라고 불리운 그 신 인식의 기원과 다른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바르트가 주장한 신앙의 유비로서의 신 인식방식은 존재 유비의 동적 성격과 존재 형이상학적 물음이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 성격을 고려해보면 크게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태적으로 존재유비의 대상과 신앙유비의 대상이 같은 것이므로 그 대상을 기술하는 언어체계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양자가 동일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비록 프르츠바라 자신에 의하여 제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 유비의 관점이 갖는 신학적 근거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잠시 철학적 역사를 통하여 확인하였듯이 유비라는 개념의 역사가  철학과 신학 공히 이 세계와 연관된 어떤 형식의 명제를 말하고자 할 때 언제나 문제로 삼아야 할 세계 근거의 원초적인 계시현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철학적으로 논증하려는 존재 유비 이해는 신학적으로는 창조론적 전제를 가지고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철학적인 어떤 형이상학적 전제는 따라서 신학적으로 창조론의 틀 속에서 용해될 수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이 형이상학적 과제는 자연의 본래적 존재의 근거로 다시 추적해 들어가는 것(das dahinter-gehehn in die Hintergründe der Seins-Eigentümlichkeit der Physis)이며 그것은 존재 자신이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근거와 목표 그리고 의미를 묻는 것이다. E. Przywara, Analogia Entis, 23쪽
이 형이상학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곧바로 그 형이상학이 질문의 대상(das Zu fragende)내에서 발견하고 있는 두 가지 성향의 상이한 사태해명의 방법들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인식론적 질문(그 존재에 대하여 묻고 있는 의식의 활동성에 연관된 관념론적 질문)이며 두 번째로 존재적 질문(나의 이 형이상학에 대한 질문 자체를 존재의 생기에 의한 질문으로 이해하게 되는 존재론적 지평)이다. 프리츠바라는 이 두가지 성향이 서로 완전하게 얽혀있어서 나누어지지 않고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존재유비에 대한 그의 질문에서 우리는 단순히 인식론적 과제만이 아니라 이 세계가 갖고 있는 근원적 존재의 구조를 함께 보게 된다. 이것이 이제 신학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프리츠바라는 자신의 존재 유비  그의 유비이론에 대한 해명은 사실 전반적인 카톨릭교회의 존재유비의 근원적 특성을 해명하는 것과 거의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유비의 카톨릭교회의 전통을 다루면서 존재유비를 해명한 다음의 논문들도 참고할 것: Ludwig Berg, Die Analogielehre des heiligen Bonaventura, in: Studium Generale, (1955, 8집), 663-670; Fritz Leist, Analogia entis, in: Studium Generale, (1955, 8집), 671-678 쪽: 양자의 논문은 한결같이 Aristoteles가 유비를 만물속의 간(間)-범주적 유사성으로서 인정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같은 종이나 류 의 사물들안에서 하나의 본성의 관점에서만 주어져 있을 수 있으면서 그 하나의 본성을 향한 (im Hinblick auf eines und auf eine Physis: Aristoteles, Metaphysik Γ1003 a 33f) 다양한 만물들의 운동의 원인을 존재론적 파악하여 거기에서 유비의 현상을 근거 짓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존재 유비인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만물들의 개방성이 존재유비의 근거가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Fritz는 이것을 보다 더 현대적인 철학적 지평인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의 언어를 빌어서 설명하고자 하지만 przywara는 자신의 스콜라적 전통에서 존재유비의 역동적 초월성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를 어떻게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가? 그가 이 존재 유비의 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세 단계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그는 먼저 유비라는 단어와 존재라는 단어를 하나로 묶음으로써 단순히 정적으로 존재의 영역 안에서 찾아지는 어떤 질서만을 말하고자 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의 활동, 존재가 스스로 규정하고 스스로 질서를 추구해가는 그 자신의 동적 성격이 표현되었다고 말한다. E.przywara, Analogia Enits, 99쪽
그의 이러한 설명은 로고스를 대상으로 삼은 논리는 신적 지성의 모범에서 보여지는 것 같이 동일율적 연속성상에서 형성되었으며 E.Przywra, Aanlogia Entis, 101쪽, 즉 언어와 논리안에 그 언어와 논리의 대상이 담겨져 있다는 언어와 논리의 존재론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논리는 그 자신의 이상성에서 “Sich-hinweg-Täuschen in die göttliche Region”이라고 논술된다.
그런가 하면 변증법에서 나타나는 두가지 상반된 사태(즉 진리 그 자체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진리를 향해서 하나가 되려는 본성적 이중성) E.Przywara, Analogia Enits, 102-103쪽 변증법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에 kreatürlihcer Realismus로 불리고 있다.
를 해명하고자 하는 열망들이 유비론안에서 하나의 종합적 통합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E.Przywara, Analogia Enist, 104쪽이하. 그에게 있어서 유비란 이 논리와 변증법의 지양적 종합(헤겔적 의미, Aufhebung)인 것이다. 그래서 유비적 사유는 그에게 있어서 “distanzierter Gehorsam zum Logos, Alles-Durchwirken des Logos인 것이다.
현실적 측면에서 단순히 개념으로만 사유할 수 없으며 또한 단지 경험적 운동에 의하여 사유가 완성되지 못한다는 오랜 사유의 경험에서 프르츠바라는 배중율이라는 사유법칙을 통하여 이 존재론적이며 인식론적 사유의 특성이 완성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배중률이 가장 완벽하게 자신을 나타낸 곳이 바로 유비론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유비의 근원적 탐구에서 로고스와 변증법적 구조가 함께 연속적으로 내포되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프르츠바라는 analogie라는 그 개념 안에 이미 동일한 것의 자기 동일성의 확인만이 아닌 그 이후의 발전과 운동개념이 연속적으로 속해 있다고 보았고 이를 통하여 만물들을 그 자신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기 동일성의 확인이 목적이 아니라 자기 이외의 초월적 목적으로의 진행과 그 근거가 함께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프르츠바라는 이 단순한 사유의 규정속에 들어있는 심오한 생각들을 철학사적 대화를 통하여 이끌어 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이 유비적 사태가 모든 인식론적 그리고 존재적 상황의 가장 최초의 해명으로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유의 법칙만이 아닌 존재의 다양한 법칙들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에서 찾아지는 동일율에 대한 탐구와 헤라크레이토스가 모든 것들의 운동의 역동성에서 이해한 그 사유의 의미를 설명하고 그 한계를 정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파르메니데스가 그 마지막까지 보여준 동일성의 사유는 배중율을 동일율의 다른 표현으로만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실은 이 동일성의 완성은 오로지 신적 정신에서만 찾을수 있는 것이었고 이 동일성은 끊임없이 운동하는 진리를 향한 운동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반면에 헤라크리스토적인 역동성의 역설의 사유는 한 장소에서 신적 현실과 피조적 현실이 표현되는 역설의 의미를 형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 내적 역동성은 이제 자연히 신적 존재의 자기 동일성에로의 운동을 의미하게 된다. 이 두가지 사유의 법칙이 보다 완전한 하나의 종합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비이해에서 찾게 되는 것이다. E.Przywara, Analogia entis, 112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비와 이 절대운동과 절대 동일성의 중간을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보적 개념으로 이해된 유비는 어떤 사유의 구조를 갖고 있는가? 먼저 그것은 단순히 조용히 이 세계에서 객관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어떤 그 무엇이 아니다. 이것은 움직이며 동시에 자신을 이루어가는 운동이다. 이 유비적 상황은 모든 존재를 성취하고자 하는 역동성으로서의 모든 것의 가능성인 것이다(die stete Möglichekeit zu allem als Dynamik zu allem). E.Przywara, Analogia Entis, 113쪽
동시에 이렇게 이해된 유비적 존재 해명은 존재 안에서 구조적으로 찾아진 가능성과 현실성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유비적 존재로서 모든 존재자들은 그 자체 안에 이미 성취되어 있는 유한한 실재성을 살아서 움직이는 역동성의 근거로 삼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그 현실성은 이제 다시 또 다른 현실적 존재자의 가능성을 향한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사물 안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사이의 관계가 존재적 역동성으로 표시 될 때 유비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 내에 내주 하면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는 역동적 중간의 개념이다(Analogie ist immanent dynamisch zielgerichteter Mitte). E.Przywara, Analogia Entis, 116쪽
유비에서 이해되는 자기동일성의 세계는 그럼으로 프르츠바라에 의하면 피조적 상황에서 천상의 동일성을 이루고자 하는 운동이며 동시에 이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존재자들의 완전한 자기 형성의 동일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프르츠바라는 그럼으로 이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를 설명하고 있다. 즉 신으로서의 이 부동의 원동자는 사실 헤라크레토스적 운동과 파르메니데스적 존재설명의 종합적인 이념적 완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프리츠바라는 이 두번째 단계의 존재 유비의 의미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드러내놓은 피조물 안의 내적 역동성의 의미를 통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 설명은 자연히 신학적으로 더 깊은 통찰을 요청하게 되는바 유비란 이미 자기 안에서 연관된 존재이며 자기를 넘어서고자 하는 그 참여적 운동으로서 모든 존재적 성격에서 찾게되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와 자신을 규정하며 동일시시키고자 원하는 신적 있음의 자기 참여적 운동을 전제로 하게 되는 것이다(Die Analogie las teilnehmendes Über-hinaus-bezogen-sein 으로서 Analogie als teilgebendes Sich-von-oben-hinein-beziehen의 운동을 전제로 한다). E.Przywara, Analogia Entis, 119쪽
마지막으로 보다 더 신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게 될 초월론적 유비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연관시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점에서 그는 이 단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프리츠바라의 존재 유비가 가진 의미를 가장 극명한 형태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존재 유비를 통하여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이의 의미를 밝히고자 노력한 것이다. 프리츠바라는 이 궁극적 사이의 문제를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근본적 유비들, 즉 피조물내부로 되돌아가는 내재적 특성의 유비적 운동과 창조주와 피조물사이라는 근본적으로 초월적 유비적 특성,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그 유비들의 유비의 문제로서 파악하였다. E. Przywara, Analogia Entis, 124쪽

    그럼으로 이제 우리가 여기에서 한가지 얻게된 가장 중요한 결과는 존재 유비가 유비들의 유비들에서 그 본래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한 존재 유비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영역은 바로 이 사이(das Zwischen)에 대한 탐구라는 점이다. 그 사이의 성격이 바로 신학적 유비의 성격을 드러내고 결정짓는다. 이를테면 융엘에 의하면 바르트의 유비가 다른 존재유비와 다른 점은 그 사이의 근원적 출처이다.이미 언급된 바 같이 여타 존재유비의 전통에서 볼 때 그 사이란 하나님과 이 세계사이를 지칭하는 사이인 반면 바르트에게는 그 사이란 오직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자신의 계시,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참고: E.Jüngel, Analogie, 220쪽; KD IV/1 222쪽, 토마스의 유비이해도 사실은 하나님과 이 세계사이의 이 궁극적 사이를 대상으로 한다: 참고. H.Lyttkens, The analogy between God and the World. An Investigation of its Background and Interpretation of its Use by Thomas of Aquino, Uppsala, 1953
프리츠바라는 이미 앞에서 이 사이의 과제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존재 유비의 과제로 보고 있으며 이것은 단순히 피조물과 피조물사이의 관계, 즉 사물의 형상성과 그 형상을 지향하는 동시에 또 그 형상으로부터 새롭게 출발하게 되는 사물의 동적 구조에 대한 내밀한 설명에서 그치지 않고 그 피조물들이 창조주와 연관해서 갖을수 있는 단절과 초월의 관계의 설명도 내포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럼으로 프리츠바라는 이 세계의 존재이해를 위하여 초월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 세계가 오히려 철저하게 내재적이어서 그 어떤 초월을 향하여 열려져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그렇게 이해되어서 내재적으로 폐쇄되어 있는 피조적 세계 안에서도 스스로 존재의 근거와 궁극적 목적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주어져 있는 이 현실세계가 갖고 있는 자발적인 자기초극(Übergang)을 하나의 일정한 체계(Zustand)로 변모시키는 자의적 처사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E. Przywara, Analogia Entis, 65쪽이하

   Przywara에 따르면 이 세계를 이해하는 사명을 가진 형이상학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형식적 원리는 “피조물 위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Gott über Geschöpf)” Przywara는 이러한 신학적 결론을 다시 철학사적으로 근거지으면서 이해하고자 한다: 특별히 그에 의하면 Platon이 제시한 철학의 정의는 본래적 지혜에 대한 사랑이며(Phaidon 278D) 여기서 그 본래적 지혜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그럼으로 철학의 활동은 다름아니라 전적으로 본래적 지혜이신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인간의 참여를 의미하며 Aristoteles에 따르면 이는 신비에의 접근(Met. I 2 982 B)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토마스는 신학을 최고의 지혜(maxime sapientia)이라고 규정할 수 있었다(67쪽이하).  
이다. 이 세계의 모든 존재의 비밀 그 한가운데, 그 중심부에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놓여있다. 이 관계는 먼저 창조주와 피조물사이의 구분과 차이를 명백하게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명백한 차이의 현실은 동시에 창조주와 피조물사이의 긍정적인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이 세계는 자체 안의 폐쇄적인 자족적인 세계로 이해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래서 피조물 위에 존재하는 그 하나님(Gott über Geschöpfe)의 형식은 철저하게 피조물가운데 계신 하나님(Gott in Geschöpfen)의 형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 초월적 존재이신 신적 초월 그 자체가 이미 우리의 피조물의 지평에서 절대적인 - 신적인 무엇(absolute Goettliches)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말한다. 프리츠바라가 물론 철학과 신학의 차이를 무시하고 둘 사이의 완전한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프리츠바라는 중세의 전형적인 은총론의 문장(Gratia non destruit, sed supponit et perficit naturam) 은총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이 문장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한 것으로서 이 문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스콜라 철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가름하게 된다: 카톨릭교회측에서, Etinne Gilson, Reason and Revelation in the middle Ages, New York, 1938; 개신교회측에서, Karl Barth, Anselm: Fides quaerens intellectum, Ian W Robertson역, Virginia, 1960
을 다음과 같이 변형시켜 이해한다: fides(theologia) non destruit, sed supponit et perficit rationem ( philosophiam). E.Przywara, Analogia Entis, 83쪽
그는 철학적 문제의식과 철학적인 주제들이 신학적인 과제와 신학적 방법의 빛 아래에서 새롭게 더 확장된 형태로, 일종의 완성의 형태로 본래적인 이해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토마스의 철학적 신학이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르츠바라나 토마스에게 있어서 철학과 신학의 구분과 차이는 단순히 강조점에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Przywara, Analogia Entis, 85쪽
이제 사물의 이해를 전제하고 이해의 과정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있는 신학적 작업은 당연히 신학적 형이상학(theologische Metaphysik)으로서 이 세계 안에 놓여있는 신적 존재와 피조적 존재의 얽힘과 상호연관성의 사이의 문제를 해명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 유비란 단순하게 형이상학의 과제만이 아니라 신적 존재에 대하여 말해야 하는 신학의 기본적인 방법론이 되게 되었으며 자명하고 명확한 것을 추구하는 철학적인 개념이해에서 보다 더 신적 신비(Mysterium)에 가까워 질 수 있는 폭을 가진 개념들에 대한 이해가 주어지게 되었다. 존재 유비가 표현하여야 할 근본적인 개념들은 신적 신비로부터 자라난 것이다. E.Przywara, Analogia Entis, 89쪽

   그렇다면 프르츠바라는 이를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가? 어떤 방식으로 어떤 통찰에 의하여 이 신학적 형이상학, 혹은 하나님과 피조물들 사이의 언어로서 유비를 구성하는가? 그는 이 세계의 존재자 들이 가진고 있는 그 존재로의 가능성의 성격을 해명함으로서 이 질문에 접근하고 있다: 이 세계의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potentialitaet)은 어디에 근거할 수 있는가? 그는 그 가능성들이 영원한 현실태인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 모든 존재자 들이 갖고 있는 가능성들은 신의 자유로부터 온 것이고 그렇기에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의 본질들은 근원적으로 피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존재 전체는 그 전체로서의 성격에서 볼 때 신으로부터 직접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모든 피조적 본질들은 신적 본질에 대한 모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토마스를 통해 주장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신에 의하여 제한될 수 밖에 없으며 E.Przywara, Analogia Entis, 125-128쪽
그 제한이 갖는 피조물의 존재자 들에 대한 의미는 이 세계가 무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영원한 현실태인 신적 존재에 연관을 맺게 해 주는 데에 있다. E.Przywara, Analogia Entis, 131쪽이하
이러한 존재에 대한 해명은 결국 존재 유비가 갖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이를 매개하기 위해서 갖을 수 있는 개방적 성격과 그 개방의 근원을 신적 존재로부터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그것은 이 세계내의 여하한 존재자들의 관계의 근거를 그것들의 속성들과 그 모든 존재자들이 공동으로 갖고 있는 특별한 한 속성의 형이상학적 본질에서 찾고 이를 다시 신적 초월자에게 적용함으로써 신과 피조물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는 속성들의 유비(analogia attributionis)를 이차적인 유비 현상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마스와 프리츠바라에 의하면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이 갖는 존재의 힘과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은 사실 그 존재자들과 완전히 다른 신적 존재의 힘에 의한 것이며 그 신적 존재의 힘의 상응 안에서 이 세계의 피조물들은 비유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세계와 신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최후의 근거는 신적 존재의 순수 현실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럼으로 프르츠바라에게는 실로 모든 세계의 존재자들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유비의 핵심은 바로 관계들의 유비(analogia proportionalitatis) E.Jüngel, Analogie, 376쪽. 속성들의 유비는 그 사태의 자체 이유상 관계들의 유비를 내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것이다.
안에 있다. 더욱 분명히 말해서 이 관계의 유비가 가능한 까닭은 신적 존재와 피조적 존재 사이의 전적 타자성에 근거하며 역설적으로 바로 이 타자성 이야말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의 근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으로 더 큰 비유사성 가운데 주어진 유사성이라는 유비의 원칙에 따라 이제 세계는 존재의 유비로서 (신적 존재의 순수 현실을 기초로 한 관계에 이해로서) 이해되어야만 하며 그렇게 될 때 이 세계에서 신의 지식의 근원으로서 존재유비는 존재의 유비에 의하여 확보되는 것이다. E.Przywara, Analogia Entis, 140-141쪽 이하
유비는 창조주와 그 피조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 사이의 해석에서 본래적 자리를 지키게 된다. 자신의 해석에 의하면 이러한 세계와 창조주 사이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구조의 상호 연관성 우리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 대로 프르츠바라가 형이상학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 등장시킨 meta-noetik, meta-ontik의 문제점들은 이전까지의 모든 형이상학적 지평에서 살펴 볼 수 있던 과제들을(현실태-잠재태등) 한꺼번에 묶는 역할을 하였다. 한 마디로 인간 자신의 자발적인 의식내의 사유 행위 안에 이미 초월을 향한 존재론적 지향을 가진 개념들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발적 사유행위안에 이미 초월적 존재자의 형식을 담고 있는 인식행위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초-인식론(meta-noetik)에 대한 통찰과 그 역으로 이미 그 존재적인 것 들에서 이 초-인식론적 개념들이 새롭게 얻어 진다고 말하는 바로 그 점이다. 이것이 철학과 신학의 경계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의 과제인 것이다.        
에 대한 통찰에서 얻어낸 유비라는 언어적 가능성은 바로 이 신의 초월적 현존에 두고 있다. 절대적 차이 속에 존재하는 이 창조주의 내재성은 모든 진리를 그 자체로서 완전한 영원한 것으로 주장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것들의 임시성(Vorläufigkeit)을 지적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또한 그것은 절대적 신적 영역에 대한 지칭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표현하게 하는 구체적인 언어는 어떤 로고스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철학적으로 유비를 통하여 얻어진 로고스는 바로 성서의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이 존재유비가 갖는 본래적인 질문이며 한계이고 난제인 것이다.  
        


                                    VI


   지금까지 앞에서 살펴본 존재 유비의 관점은 비록 인간의 주관적 가능성의 영역과는 상관이 없는 객관적 언어세계와 존재의 신비 속에서 신의 인식의 근원을 찾았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주관주의적 오류를 벗어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언어의 근원은 여전히 인간의 의식과 인간의 인식과 철저하게 연관되어 있는 바 존재라는 로고스였다. 존재의 자명성을 전제로 하여 존재 유비의 사유는 우리에게 신 사유의 한 쟝르를 개척해 놓았던 것이다. 그 존재유비의 사유는 이미 주어져 있는 세계와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사유의 기원을 찾기에 안정적이고 확실한 인식의 기초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철학적으로 채색된 언어라는 점에서 그 존재 유비는 일반적 보편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또한 이 존재 유비의 사유가 매력적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철학적 개념속에서 신학적 함축성을 더해 가는 방향으로 사유를 진행시켜 우리가 획득한 그 신 인식이 사실은 인간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존재 유비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그 세계의 기원은 신에 대한 유비의 진술인 뿐이지 결코 하나님의 자신과 일치되는 그 자신의 본질파악이라고 볼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문제의 관건을 이룬다: 과연 존재 유비의 사상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한계를 인식하고 하나님 인식에 대한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할 것인가? 혹시 헤겔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G.WF.Hegel, Pänomenologie des Geistes, 임석진 역, 서울:지식산업사, 1991,933쪽이하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는 그런 우려는 없을까? 이 질문이 존재 유비의 모든 긍정적인 특징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되묻게 만드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바르트가 어떻게 이 유비라는 관점을 얻게 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와함께 존재 유비의 전통과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방식이 바르트의 신앙 유비라는 이름 하에서 주어져 있음을 보았다. 신앙의 유비라는 이름은 바르트가 자신의 신학적 인식론을 위의 존재 유비와 구분하기 위해서 논쟁적인 개념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즉 오로지 하나님 인식은 신앙 안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나 당연하게 보이는 신앙의 유비론이 어떻게 논쟁적이 될 수 있는가? 신앙에 의한 신 인식의 가능성을 논한 이 탐구가 어떻게 문제의 중심부에 서 있게 되었는가? 바르트가 이 존재 유비에서 이단과 적 그리스도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 것은 존재 유비의 사유가 하나님과 인간사이, 하나님과 세계사이의 관계를 흐리게 하여 하나님과 피조물의 사이를 혼동시키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K.Barth, KD I/1, 31쪽이하; 또한 바르트의 유비론 역시 그런 동일한 위험에 노출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이 H.vogel을 통하여 제출되었고 이를 융엘은 대답하고 있다. 즉 포겔에 의하면 이 관계유비가 존재론적 성격을 갖고 있고 그런 한에 있어서 계시의 역동적 사건의 유비적 특성이 이 세계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말하게 하는 단 하나의 근거라는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한다. 혹시 유비론은 모든 신앙의 언어가 가지는 그 변증법적 동시성(의인인 동시에 죄인)의 타자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계시성이라는 단선율만을 강조하게 되어 계시의 불연속성이 드러나지 못한 것이 아닐까? 무한한 타자인 절대자가 다시 이 세계 안에서 드러나게 되는 사건으로서의 개방성이 일방적으로 강조되어 그 타자와의 거리인식이 유비의 사실성안에 묻어 버려진 것이 되지 않았을까? 혹시 유비의 언어가 절대를 사칭한 상대성의 한 단면을 정당화 시켜주고 있지나 않았을까? 포겔은 바르트와 유사하게 그리스도론적 중심주의에서 시작된 것이어서 그 질문은 더욱 가치가 있다. H.Vogel이 보기에는 “바르트의 유비적 사유가 우리의 신앙안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종말론적 한계를 넘어선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즉 우리의 신앙의 인식은 언제나 유한한 것으로 한계적이어서 항상 종말론적 임시성을 자체 내에 내포하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유비적 신학의 논리에 의하여 이미 존재의 연관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참고: E.Jüngel, The Mystery of Substitution. A Dogmatic converstation with Heinrich Vogel, in:Thological Essays II,  J.B.Webster편, Edinburgh, 1990, 145-162,  
. 그렇기에 신앙의 유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구분을 확증하는 동시에 홀로 하나님이 모든 신 인식의 근원으로 드러내도록 해야 할 사명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앙 유비와 존재 유비의 논쟁에서 그 핵심을 이루는 것은 먼저 인식론적으로는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이 오로지 신앙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신앙의 사태를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며, 존재론적으로는 창조와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의 관점을 신앙안에서 설명할 때 그 신앙적 진술들은 이미 세계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서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는 신앙의 유비론이나 존재의 유비론 모두가 다 한 결같이 초월의 사상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즉 하나는 내재적이고 하나는 초월적이라는 말을 통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가 차이가 있다면 그 초월의 방식이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 가이다. 특별히 이러한 그의 주장은 폰 발타자르(H.U.v.Balthasar)가 그의 바르트 해석 안에서 바르트가 후기에 가면 갈수록 점차 존재 유비를 내포하게 된다는 그런 평가를 하면서 더 예리한 질문이 되었던 것이다. Hans Urs von Balthasar, Karl Barth: Dearstellung und Deutung seiner Theologie, Einsiedeln, 1976, 129, 175쪽이하
이와 반대로 또 한 사람의 바르트 해석가인 융엘은 바르트에게서 철저하게 존재 유비와는 구분되는 신학의 원리로서 신앙의 유비를 찾는다.  
    물론 우리는 바르트의 신앙의 유비는 크게 세가지 주제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신앙의 유비를 인식론적으로 정초한 신 인식과 연관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우리의 신 인식의 모든 가능성이 오로지 신앙이라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자기 계시 혹은 자기 수여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인간들의 언어가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적 전경에 의하여 구성된다는 것이다. K.Barth, KDI/1, 257쪽이하; KD II/1, 254쪽이하  
두 번째로 그의 신학적 사유의 범위가 창조로 전개될 때 이 신앙의 유비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게 된다. 특별히 융엘이 이점에서도 특별히 바르트의 관점을 놓치지 않고 있는데 그가 기독론이 바로 인간론의 기초 역할을 한다고 본 것은 철저하게 옳은 것이다. 소위 관계의 유비로 표현되는 그 단계에서 참된 인간성은 인간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 상응 속에서 찾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K.Barth, KD III/1, 220쪽이하; III/2, 80쪽이하, 160쪽이하
그런가 하면 마지막으로 이 계시의 주제들이 창조의 목표인 구속의 세계사로 확대되었을 때도 이 계시의 주제는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 K.Barth, KD III/3,57 쪽이하
그리고 최후로 하나님의 빛을 이 세계의 다양한 빛들과 연관시켜 이해 할 때도 결국 같은 사태를 말한다. K.Barth, KD IV/3, 169쪽이하
신앙적 사태 속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약의 완성은 창조된 세계의 본래적인 목적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다시 인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폭넓은 모든 신학적 주제들은 신앙과 더불어 주어진 하나님의 자기 계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기에 모든 것들은 신앙의 유비적 지식들인 것이다.
    E.Jüngel의 바르트 유비이해에 대한 분석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유익하다. 무엇보다도 그가 제기하는 설명이 바르트의 유비 구조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 Jüngel, Die Möglichkeit theologischer Anthropologie auf dem Grund der Analogie. Eine Untersuchung zum Analogieverständnis, in: Barth-Studien, Gerd Mohn, 1982, 210쪽이하 (이하 Analogie)먼저 융엘의 바르트 유비 해석을 통하여 전체 바르트의 유비론을 이해하는 것이 지면의 관계상 차선의 선택이다. 하지만 그의 바르트 해석은 대체로 올바른 것이라고 보여지며 그의 특성을 잘 드러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일반적으로 바르트 학자들의 대부분의 일치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 Christofer Frey, Die Theologie Karl Barth, Waltrop, 1994, 212쪽이하; 이와 달리 융엘의 유비 이해를 지나친 하이데거적 해석임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전통적인 존재 유비의 관점에서 바르트를 비판하고 그의 논적이었던 프리치바라의 유비를 개신교에서 받아들일 것을 추구한 논문, Eberhard Mechels, Analogie bei Erich Przywara und Karl Barth. Das Verhältnis von Offenbarungstheologie und Metaphysik, Neukirchen. 특히 42쪽이하: 그에 의하면 “예수라는 인간존재자의 존재가 모든 유비의 인식근거이고 존재근거”라는 융엘의 해석은 지나치게 하이데거적 이다. 이에 반해서 바르트는 사실 존재근거와 인식근거의 길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다루고 있다고 본다. ; 이밖에 카톨릭의 입장에서 바르트의 유비를 아주 폭넓게 해명하면서 존재의 유비와의 대화를 시도한 또 다른 노작, Hans Urs von Baltarsar, Karl Barth, 바르트의 유비의 신학을 위한 배경에 대한 일반적 이해를 위해서, 참고: 황덕형, 바르트의 유비의 신학, in: 호서신학, 제4집, 1997, 273/288쪽         
실제적인 의미에서 융엘은 유비가 사용된 철학적 배경과 신학적 전경사이에서 계시의 주제를 잃어버리지 않고 양자의 문제의식을 깊이 성찰하면서 우리에게 모범적인 해석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융엘은 바르트의 유비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깊이를 이 세상이 하나님과 연관하여 갖게되는 존재론적 질서와 그리고 그 존재론적 질서를 세워주며 가능하게 하는 기독론적 은총의 질서가 맺는 관계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즉 이 양자의 상호간의 근거설정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의 문제로까지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Eberhard Jungel, Die Mögleichkeit theologischer Anthropologie auf dem Grunde der Analogie. Eine Untersuchung zum Analogieverständnis Karl Barths, in: Barth-Studien, Gerd Mohn, 1982, 210-223, (이하는 Analogie로 표시), 특히 219쪽. 바르트가 틸리히 신학의 원형인 쉘링과 다른점은 여기에 있다. 바르트는 신으로부터의 이중적 근원을 찾는 것이 아니다. 쉘링에게 있어서 자연은 신속에 있으나 신과  구별되는 또하나의 이중성을 형성하지만 바르트는 그 이중성으로서 존재질서와 은총의 질서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둘사이의 질서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무한한 계시적 차이를 지킬뿐이다. 참고: F.W.G.Schelling, 인간적 자유의 본질, in: 19세기 독일 사회 철학(차인석 편), 서울, 1986. 120쪽이하
융엘에 의하면 양 질서사이의 관계의 문제는 결국에는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 속에서 이해 할 수 밖에 없으며 Eberhard Jüngel, Analogie, 220쪽
바르트의 유비 개념은 다름 아닌 이 계시사태를 이해하기 위한 신학적 개념인 것이다. Eberhard Jüngel, Analogie, 210쪽 참고: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개념의 발전은 바르트가 원숙하여지면 원숙하여 질수록 신학적 언어에 대한 근거문제를 더욱 깊숙히 그리스도론적으로 생각할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발전과 성숙과정에 대하여, 특별히 그가 교회교의학의 언어를 찾게된 유비적 발전에 대하여 E.Jüngel, Von der Dialektik zur Analogie, in: Barth-Studien, Gerd Mohn, 1982, 특별히 175쪽이하
그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존재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연관되어 있으며 융엘이 보여주는 데로 신학적으로 인간과 세계의 보편적 존재에 대하여 진술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근원이다. 이 유비의 근거는 기독론적으로 정초 되어 있으며 이 때 “이 세계에 도데체 무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근거 짓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정인 한 이 인간(그리스도)의 존재는 바로 하나님의 이 긍정 안에서 존립한다”라고 말하게 한다. Eberhard Jüngel, Analogie, 226쪽이하. 융엘은 특히 analogia entis를 둘로 구분한다. αναλογια του ειναι와 αναλογια του οντος이다. 이 양자의 구분을 통하여 융엘은 관계의 유비가 맺는 존재와의 질서는 철저하게 전자의 동사적 유비관계임을 강조한다. 유비의 일차적인 관계는 먼저 존재의 구성체(Konstitivum)이지 결코 구성물(Konstititum)은 아니다. 이는 단지 이차적인 연관관계에서 알려질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융엘의 바르트 유비론 이해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긍정으로 일어난 기독론적 계시의 존재론적 이해에 근거하여 있다. 이 세계의 질서를 하나님으로부터 밝힐 수 있는 단 하나의 매개는 다른 존재의 언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유비적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 유비의 지평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융엘은 먼저 바르트에게 있어서 어떻게 인간론이 기독론에 근거되어 있는가를 규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방법은 융엘자신의 학문적 노작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인 res-significata의 해석학에서는 “神”이란 이 단어의 특수한 용법을 다 들어낼수없고 그 대신 하나님이란 그 단어가 구체적으로 쓰이는 언어상의 (문법적, 문장론적인 이해를 전제로 한) 활용적인 상황에서 온전히 이해할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이라는 이 특수한 단어의 내용은 단순히 정의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Deus defineri nequit) 그 단어의 사유가능성 전체가 보다 더 철저하게 그 단어의 언어성 그 자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언어가 갖는 구체적인 자리는 다름아니라 예수의 “인간성”이다. 이런 전반적인 구조에서 유비가 갖는 의미는 융엘의 말로는 그 자신의 스승, 훅스의 견해을 쫓아 “언어사건”으로 이해할수 있게 된다. 참고: Eberhard Jü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Tübingen, 1977, 특별히 389쪽이하, 512쪽이하
융엘에 의하면 바르트가 인간론과 연관시켜서 행한 파격적인 일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 진술을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간에게 의존시킨 것이다. 예수에 대한 인식은 바르트에게는 이제 인간의 보편적 본질에 대한 인식에 선행한다. 이 한 인간과 보편적 인간존재의 실재적 관계와 그것을 해명하는 유비적 사유는 그 자체로 ‘유비적 사건’에서만 가능하다. 이는 한 특수한 인간 예수의 인간성이 인간존재의 보편적 인간성과 ‘사실적인’ 유사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건에서(인간 예수가 진실한 인간으로 우리 중에 한 사람이었으므로) 이는 결국 인간의 본질론적 해석을 반대하는 것이 된다. 인간의 본질은 이 하나님의 존재가 인간이 상응하는 관계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참고 KD III/1. 220쪽이하
이해되며 그리고 또 다시 이 설정된 유사성은 예수의 인성과 예수의 신성사이에 유사성의 ‘발생’의 관점에서 다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하나님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란 관점에서 그리고 육신없는 로고스는 그렇기에 상상의 산물로서 교의적 설명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이 사건으로서의 유비는 신학적 인간론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거로서 이미 신학적으로 이 유비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원 결의의 근거에 의하여 세워지고 있다.
 이는 이 유비적 사건의 존재성이 관계성의 현시임을 말하게 한다. 즉, 1. 예수의 인간성은 그가 자신의 동료인간을 위한 존재라는 데에서 성립한다. 또 한편 예수가 보여준 이 인간성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의 반복의 사건이다. 이는 예수가 자신의 인간성에서 신의 존재를 다시 반복하는 것에서 이뤄진 사건이며 예수의 인간성은 하나님을 위한 그의 존재와 동료인간을 위한 그의 존재사이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신을 위한 존재와 인간을 위한 존재사이의 상응이 바로 예수의 인간성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하게 한다. Eberhard Jüngel, Analogie, 214쪽
그럼으로 이 유비에서 드러난 예수의 존재는 처음부터 “신을 위한 존재”요 또한 “인간을 위한 존재” 사이의 관계의 존재인 것이다.  2.예수의 하나님 형상성에 실제적으로 모든 인간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는데 이는 예수가 ‘실제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을 위한 존재이며 인간들이 이 예수를 닮은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가지게 되는 유비란 바르트에게 있어서(융엘이 보기에) “사건”이며 사건으로서 사유된 “존재의 자기반복의 사건” Eberhard Jüngel, Analogie, 215쪽
이라고 할 수 있다. 보편적인 인간과 예수사이의 상응을 통하여 제기된 관계의 유비란 하나님의 존재의 사건으로 생각 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존재의 성취로서 사유된 유비는 예수의 역사적 사건 안에서 ‘인간과 인간사이의 만남’으로도 성취되었다. 이제 그 만남으로 성취된 역사성에서 유비는 구체적인 존재를 갖게된다. 그럼으로 단지 “관계적 존재로서만 이해 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관계 유비의 존재성인 것이다. 이 존재가 존재자 들과 아무런 차이 없이 유비 현상에서 이해된다면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된 것이다. 이를 혼동할 때 존재 유비와 신앙의 유비를 혼동하게 되는 것이다. Eberhard Jüngel, Analogie, 215쪽 이 밖에도 또하나의 질서의 유비관계를 융엘은 보고하고 있다. 영과 육, 창조주와 피조물, 교회와 그리스도 이 모든 유비의 관계는 창조와 연관된 질서의 유비가 은혜의 유비와 겹쳐지는 현상이다. 즉 영과 육이 하나의 연속된 공속성을 갖는다는 것이 자연에 속한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로 함께 속해있다는 것은 은혜라는 것이다. 핵심은 인간의 존재안에서 가능하여진 혹은 창조의 질서속에서 가능하여진 질서의 관계란 엄밀히 말하여서는 은혜라는 전혀 다른 질서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융엘은 지금까지 설명한 이 사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근원적 상응”, “근원적 유비성”이란 개념에 주목한다. 유비의 개념적 사태을 두 가지 지평을 통하여 이제 더 철저하게 밝혀야 하는데 융엘은 먼저 인간예수가 하나님의 반복이라는 선택론을 중심으로 유비의 기독론적 설정을 해명하고 있다. 선택론을 통해서야 비로서 “인간인 예수의 존재가 모든 유비들의 존재근거이며 동시에 인식근거이다”라고 말하게 되었었다. 두 번째로 인간학의 근거로서의 유비는 피조물 일반의 관점을 포함하고 있기에 창조와 계약의 관계를 통하여 다시금 존재론적 문제를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융엘은 바르트가 그의 창조론을 발전시켜나간 신학적 논리인 ‘창조와 계약사이의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의 차이’를 통해서 해명하고자 한다.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이고 “창조는 계약의 외적 근거”라는 두 질서는 융엘이 추구하는 존재론적 해명을 위해 긴요하다. 예수 안에서 인간존재가 타인과 공동존재로서 규정되었다는 규정은 사실은 인간은 하나님의 동반자로 규정받았다는 그 규정에 상응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창조(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의 가능하여진 관계)와 계약(하나님과 피조물사이를 가능하게 하는 관계)사이의 내적 질서를 의미해 주고있다. 창조는 계약에 의하여 가능하여진 그 계약을 위한 가능성이다. 내적 근거로서 계약은 외적근거인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동시에 이 내적 근거는 외적근거가 내적 근거를 위한 가능성으로 존재하게 한다. 창조는 가능하여진 가능성이고 계약은 가능하게 하는 가능성이다. ‘역사성은 존재의 구성으로 역사는 창조의 구성으로 이해하게 된다.’ 역사성의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의 시간성의 구조와 연관되어있다. 참고: M.Heidegger, Sein und Zeit, Tübingen, 1972, 372쪽 이하.  즉 역사성이란 역사안에 있는 성격이 아니라 존재가 갖는 시간성의 차원에서 배태되는 존재의 성격이다.
이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역사성의 이해가 가능하며 이 창조의 시간은 예수의 삶 속에 주어진 근원적인 은혜의 시간을 통하여 이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E.Jüngel, Analogie, 218쪽
시간 안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는 역사는 존재의 구성의 외적 근거이며 존재의 구성은 역사성의 내적 근거인 그리스도의 은총의 사건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내적 관계가 하나님이 맺는 외적관계의 근원이 되며 이 외적관계는 내적 관계로 말미암아 가능하여진 하나님의 유비적 창조사건인 것이다. 이 관계를 유비의 언어성에 대한 해명으로 볼 때 그 유비가 드러낸 언어는 그 언어가 내적으로 의미한바를 스스로 창조해 가면서 그 창조된 의미를 가리키는 특성에서 찾을수 있다. 참고: Eberhard jüngel, Gott als Geheimins der Welt, 11쪽이하. 더욱이 이 관점은 루터가 ‘efficatia signa gratiae'로서 받아들인 성례전적 인식과 상응하는 것이다.  비교: 바르트 신학에서의 이 특수한 활용론적 관점이 갖는 해석학적 의미에 대하여, 졸문, 바르트 신학과 해석학, in: 기독교 사상 (167.Jg),11월, 1997, 91-109쪽
이를 분석해 보면: 1) 인간론적 진술은 기독론적으로 근거되고 2) 인간학적 진술들이 존재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3) 또한 인간학적 진술은 기독론적 진술 위에서 존재론적 특성을 얻게 되며 4) 존재론적인 것과 기독론적인 것, 창조와 계약이라는 둘 사이의 근거지음의 관계는 관계의 유비로서 형성되어 있다. Eberhrad Jüngel, Analogie, 219쪽이하
하나님이 긍정하시는 그 긍정의 행동의 역사가운데서 관계들의 유비가 하나님과 세계의 존재의 계시로서 밝혀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피조물들의 창조주로의 존재적 참여는 둘 사이의 분리를 강조하더라도 만일 단지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신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존재의 유비를 의미한다. 즉 존재의 유비는 하나님과 피조물사이의 문제를 생각하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바르트에게 있어서 창조가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비밀 속으로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자신 안에 존재사이의 긍정의 관계와 하나님의 존재가 피조적 존재와 갖는 긍정의 관계사이의 유비를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무한한 긍정의 그 계시적 사역이 비밀의 근원이며 이 계시적 사역을 존재의 언어는 뒤쫓아 잡으려 해도 항상 늦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berhard Jüngel, Analogie, 222쪽; 참고. KD III/1, 436쪽

      이러한 유비의 존재론적인 해명은 융엘에 의하면 오직 유비의 기독론적 근거지음에 의존하고 있다: 창조는 존재의 구성이며 역사란 창조의 구성을 의미하였는바 그 핵심적인 현상인 역사성이란 예수의 역사에서만, 창조의 시간은 모든 시간의 근원적 모범인 예수의 은혜의 역사 안에서 알려진다는 바르트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말한다. Eberhard Jüngel, Analogie, 219, 226쪽
지금까지 창조와 계약을 유비의 가능하여진 가능성, 가능하게 하는 가능성의 입장에서 다루어 왔다면 선택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와 이 이중적 가능성의 근거를 밝히게 된다. 사실 유비란 “사이의 학문”이다: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사이. 더 깊히 하나님의 존재사이. 그런데 이 유비에서 어떤 사이가 존재하는가? 이 사이란 다름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 킨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유일한 “사이”이시다. 그분만이 참된 말씀으로서 인간과 하나님사이의 사이에서 이 관계 유비의 가능성이다. 여기서 다시 융엘은 더 깊히 들어간다. 즉 이 유비의 근원이 하나님의 존재자신의 신비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관계들 사이의 유비적 연관성을 인간예수 존재와 신적인 내적 존재사이의 유사성에서 사실적이며 사상적인 근거를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예수자신은 신의 반복이라는 바르트의 견해를 신의 존재의 문제라고 본 것이다.74) Eberhard Jüngel, Analogie, 212; 참고. 융엘의 바르트 삼위일체론 해명인, Gottes Sein ist im Werden, Tübingen, 1954에서 이와같은 내용을 더 강조
융엘은 이 관계를 내재적 삼위일체의 사건에서 다시 한번 확정짓고자 한다. 융엘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기자신과 상응하시는 그 근거 위에서 인간존재를 규정하고 근거 짓는 관계와 하나님 자신 사이의  관계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다시 쇤겐의 해석 Eberhard Jüngel, Analogie, 225쪽이하   
                   어떤 관계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관계를 맺는다
하나님 안에서                     창조를 통하여                    인간실존속에서     
자신의 주체가                      하나님이                           남자가
 자신의              마치            인간에게         마치            여자에게
대상에게   

쇤겐이 설정한 가장위의 이 중립적인 어떤 관계가 스스로 관계를 맺는다는 통합적 요소에 대하여 융엘은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이 중립적 위치는 바르트의 계시적 사건으로서의 관계유비(analogia proprtionalis)를 다시 존재적 사건으로 변모시킨다는 것이다.
을 비판하면서 유비란 스스로 자신의 긍정 속에서 대상을 창조하는 능력의 말씀의 사건에 기인함을 강조한다. 그럼으로 이 신앙의 유비는 하나님과 인간, 창조주와 피조물사이의 관계를 구분하면서 동시에 우리가운데 기적처럼 존재하는 신 인식의 유일한 근거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 할 수 있는 언어인 것이다.



                                   VII


    유비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서 우리는 다시 신학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의 한계속에서 일어나는 언어의 획득사건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유비는 언어적 형성(Gestaltung)이라고 할 수 있다. 관계의 유비로서 그 시원에 이르게 되는 신앙의 유비가 신앙의 선택에 상응하는 하여 하나님의 비밀 속으로 파고 들어가도록 한 은총의 사건이라면 존재의 유비는 일반적인 철학적 보편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획득하려고 한 인간의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사실 바르트는 유비를 계시의 한 양태로 보고 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에로 이끌어 지는 것이다: fides quaerenes intellectum. 지성을 추구하는 신앙은 자신의 유비체를 통하여 인식되며 그런 면에서 융엘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비의 인식가능성은 유비 자체를 통하여 확보되며 더 나아가 “유비란 유비 자신의 인식가능성을 존재론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Die Analogie ist die ontologische Selbstermöglichung ihrer Erkennbarkeit.).” Eberhard Jungel, Analogie, 228쪽이하. 참고: 계시의 인식가능성은 다름아니라 하나님이 긍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 긍정이 발설된 데에 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이 계시의 현실을 알리심으로서 신앙의 유비가 가능해 진다. 즉 인식하는 가웅데 인식된 것이, 사유안에서 대상이 인간의 생각되고 말해지 인간의 말 한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의 상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so kommt es zur analogia fidei. zur Entsprechung des Erkannten im Erkennen, des Gegenstandes im Denken, des Wortes Gottes im gedachten und gesprochenen Menschenwort.”. 230쪽)
신앙의 유비는 이 verbum dei externum으로서 하나님의 긍정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사건인 것이다. 이 신앙의 언어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여 졌을 때에만 가능하여 진다. 고대 교부들의 “발설된 로고스”가 존재 유비의 시초로서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 인식의 근거처럼 사용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이제 거꾸로 하나님 아들의 로고스가 창조의 사건으로 현재에 개입해 오신 사건을 신앙의 유비에서 붙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서 발설된 그 창조적 말씀, 하나님의 긍정은 신앙의 언어인 유비의 언어를 창조한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창조적 개입의 사건을 우리는 우리의 언어적 현실과 오늘의 경험 속에서 무엇으로 증거할 수 있게 되는가? 우리가 현실속에서 유비를 증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속에서 자신의 의도로서 여전히 드러내면서 감추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말이며 그것은 철저한 삼자성의 방식으로 논의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신앙의 언어현상은 앞에서 설명한 바대로 실재를 나타내는 표식과 기호의 역할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학의 언어가 갖는 실재론은 다름아니라 그 개념이 발생함으로서 그 개념이 지칭하는 그 대상을 계시적 공간 속으로 불러들이는 새로운 역동성을 갖을 때 이해되는 것이다. 즉 창조의 실재는 창조의 언어를 통하여 그 창조된 자연을 불러오신 하나님에게로 그 자연을 다시 세우는 그런 역동성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나 본래의 하나님은 다시 그 가운데서 우리에게서 타자적 이심을 증거 하는 그런 삼자성의 방식이 바로 유비의 언어이다. 이 신학적 언어의 가능성이 이제 삼위 일체론적 계시의 사태 속에서 바르트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이 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이제 유비는 신앙적 사유의 계시적 독특성을 얻게된다: 유비를 통하여 우리는 계시를 구체적으로 인간의 한계 안에서 사유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berhard Jüngel, Gott als Geheimnis der Welt, 205쪽이하. 특별히 신학적 사유의 특징은 이제 어거스틴이 염려했던 바대로 하나님을 comprehendere(begreifen)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인간적 사유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하나님을 쫓아서 사유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신앙의 사유로서 신학은 1)대상에 의해서 규정된 사유이며 2)예수를 믿는 신앙의 자기 비판과 그 신앙의 자기전개로서 이뤄지고 3)성서적 사유를 중요시하며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을 음성을 듣지만 하나님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분(Scriptura sacra non est dei loquentis persona)으로 인식한다. 4)그러므로 이 신학적 사유는 철저하게 신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사유로서 계시중심적 사유가 되고 5)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는 사유이다. 이는 우리가 “내가 생각한다”라는 사유의 자발성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사유의 수동성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주체로 인정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을 사유하는 신학이란 우리의 이성으로 하나님에게 적응하는 사유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214쪽: Theologisches Denken hat vielmehr davon auszugehen, daß Gott - sich selbst - zu denken gibt. Denken heißt in der Theologie dann soviel wie: Gott mit dem Vermögen menschlicher Vernunft zu entsprechen versuchen. 6)하나님으로부터 사유하는 사유는 이 세계의 “mehr als Welt"라는 차원을 이 세계로부터 찾지 않고 오히려 이 세계를 새롭게 부르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인간성과 인간의 언어성에서 찾아나간다. 7)이는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고백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기대이며 8) 신학적 사유에서 인간 스스로는 신에 의한 대상으로 그리고 그런한에 있어서 사유된 대상이 보는 주체로서 인정된다. 인간적 주체는 이 사유의 이중적 정의를 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9) 하나님을 사유할수 있는 것은 단지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이는 보여준다: 신앙의 요청이 신학적 사유의 근원인 것이다. Glaube ist als ein ursprünglichstes Miteingenommensein von Gott das Widerfahrnis der Bestimmung des Menschen zur Selbstbestimmung und insofern dessen Befreiung vom Zwang zur Selbstbegründung(220). 신앙의 이런 한계안에서 이 신학적 사유는 인간의 자유를 의미한다. 10) 인간이 듣는 하나님의 말씀의 특성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증시하며 그 말씀은 본질은 ”Annährung durch Unterbrechung“이다. 11)신학의 길은 언제나 하나님의 존재를 사유(225)해야 하기에 결국 나그네의 신학일수밖에 없다. 12)결국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사유가능성의 자리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유비라는 개념은 이런 점에서 형이상학의 근거로서 생각되는 analogia entis와는 논쟁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존재 유비와 신앙의 유비는 서로 상반되는 사유의 방식에 대한 진술인 것이다. Eberhard Jungel, Ananlogie, 210쪽이하. 이에대한 카톨릭 교회의 반발은 존재유비의 틀속에서만 신앙의 유비가 가능하다는 것이고 그 반대로 개신교내부에서는 신앙의 유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하나님에 대한 성실하고 책임적인 언술을 할수없게 되 버렸다고 투덜된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존재 유비보다 신앙의 유비를 선택할 더 이상의 다른 선험적 이유는 없다. 단지 그것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성서안에서 주어져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 성서의 언어 안에서 신의 존재가 인간의 존재와 상응하게 되는 부름과 응답의 구조가 그려 질수 있고 보여지는 것이다.


http://theologia.co.kr/cgi-bin/spd/board.cgi?id=c3&action=view&gul=39&page=2&go_cn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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