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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1/28 (16:34)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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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칭성과 쌍방적 상호성: 하버마스와 레비나스

             비대칭성과 쌍방적 상호성: 하버마스와 레비나스

            옮긴이: 한신대 대학원 신학과 김성호(기독교윤리)

이 번역논문의 출처는 다음과 같다: Robert Gibbs, 'Asymmetry and Mutuality-Habermas and Levinas', in: Philosophy & Social Criticism, vol.23(6), pp.51-63, 1997. 각주는 생략합니다.  

레비나스 사상에는 정의(justice)에 대한 요구와 타인에 대한 책임감(responsibility) 사이에 긴장이 있다. 레비나스의 후기저작에서 정의가 덜 중요한 주제이지만, 정의에 대한 관심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 문제는 얼핏보면 얼굴(the face) 혹은 타인에 대한 근접성(nearness)에서 나타나는 책임감의 윤리가 무한하고(infinite) 비대칭적(asymmetric)이라는 것이다. 나의 타인에 대한 책임감은 비대칭적이며 또한 대립되는 무한한 책임감에 의해 비대칭적이다. 그러나 정의는 어떤 공동체에 관심한다, 그러므로 정의는 다질적(disparate) 책임감을 조율하는 사회관을 필요로 한다.
본래적인 책임감이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한다면, 정의는 상호적 관계를 필요로 한다. 나는 여기에서 호혜적(reciprocal) 상호성과 쌍방적(mutual) 상호성을 구별할 것이다. 쌍방적 상호성에 입각한 관계는 양 관계가 조정적이고 공동행위를 하는 관계이며, 반면에 호혜적 상호성에 입각한 관계는 실제로 양자의 관계로서, 한편은 다른 한편을 조건부로 하지만, 동등한 관계이다. 호혜적 상호성의 예로는 '네가 나의 등을 긁어주면 나는 너의 등을 긁어주겠다'를 들수 있겠다. 우선 윤리는, '네가 무슨 일을 하든 나는 너를 돕겠다'처럼, 비대칭적 관계와 연관돼 있다. 두번째로 윤리는, '우리가 학교를 하나 만들자'처럼, 쌍방적 상호 관계와 연관돼 있다. 이 논문이 제기하는 바는, 레비나스가 그토록 강조하는 윤리의 비대칭적 계기가 과연 상호적 계기와 연관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레비나스의 윤리가, 호혜적 상호행위에 제한되지 않고 쌍방적 행위를 포괄할 때, 사회적 행위이론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하는 점이다.
대담하게 말하자면, 합리적인 비교점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이론가들보다 하버마스는 쌍방적 상호성을 필요로하는 사회행위이론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비나스와 하버마스는 서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사실 그 두사람은 서로에 대해 인식하지 않는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의 글쓰기와 사유 방식은 완전히 제멋대로인 것 같다. 하버마스는 기호학적으로 변형된 사회학에 입각하여 의식과 현상학을 연구하는 것을 거부한다. 레비나스는 현상학적 담론을 초월하지만,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망라한 다른 어떤 부류의 사회이론에 정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내가 이 두 사상가를 연결시킨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회의를 극복해야 한다. 즉 하버마스와 레비나스를 연결시키는 작업이 다분히 자의적이고, 먼저 그들은 서로에 대해 어떻게 언급할 수 있는가 하는 보다 강압적인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질문제기에 주의하면서 그리고 방금 제기된 질문, 그러니까 그들은 서로에 대해 어떻게 언급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도 주의함으로써, 우리는 의사소통의 진정하고도 중심된 한 양상, 즉 기호학, 특히 화용론 연구를 고찰할 수 있다. 하버마스와 레비나스는 사람들이 기호를 어떻게 사용하고, 사실 기호사용(화용론)이 지니는 윤리적 차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의 화용론은 어떤 선생이 나를 가르치는 방식, 어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발언이 내가 과거에 가지고 있는 생각을 초월하는 방식을 규정하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는 말함(the saying)은 말해진 말(the said)과는 다르다는 명백히 기호학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레비나스가 말함의 특징들을 강조하는 것은 하버마스가 이상적 발화상황(the ideal speech situation)을 강조하는 것과 상응하는 것이다. 양자는 공히 타인에게 말함이 윤리적 책임감을 수행하는 방식에 관심한다. 발화수행은 하버마스와 레비나스의 관계를 조율하는 매개일 뿐만 아니라, 윤리가 발생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나는 이 논문에서 남의 얘기를 듣고 말함에 대한 레비나스의 해석에 있어서의 비대칭성과 의사소통행위에 대한 하버마스의 해석에 있어서의 쌍방적 상호성 양자를 탐구하려고 한다. 그리고나서, 더 나아가 합리화(reasoning)와 정의(justice)에 대한 레비나스의 요구주장을 하버마스의 사회적 수행으로서의 합리화에 대한 설명을 통해 해석하면서 고찰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하버마스가 상호의사소통행위에서의 비대칭적 계기를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역할맡기를 통한 사회 행위의 모델화를 살펴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드(Mead)의 상징적 상호행위에 대한 설명은, 타인의 역할을 맡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리고 그런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의식을 획득하는 방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하버마스와 레비나스, 그리고 미드는 함께 모일 수 있는 수렴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윤리적 지향(나의 레비나스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한)을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모아진다는 것이다.

                                  Ⅰ
1.
레비나스의 책임감에 대한 설명은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감이 지니는 비대칭성에 그 초점이 있다. 레비나스가 자신의 담론의 관용어로서 현상학적 어휘를 사용할 때, 그는 <<전체성과 무한Totalit  et Infini>>(1961), 그리고 <<존재와는 다른것, 또는 존재 사건 저편Autrement qu' tre ou au-del  de l'essence>>(1974) 이라는 책에서, 기호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내가 타인의 말에 어떻게 경청하고 대답/반응하는지를 주목하는 데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책임감의 비대칭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즉 청자로서의 나의 책임감이, 내가 말할 때 나의 청자에 대해 기대하는 책임감과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타인에 비해 '보다 큰'(greater) 책임을 지고 있다. 더욱이 레비나스가 말하고자하는 진정한 주장은 내가 먼저 청자로서 그리고나서 말함으로써 내가 반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임감은 타인의 기호에 먼저 경청함으로써 조건지워지는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다. 먼저 나는 경청해야 한다.

2
나는 타인의 말에 경청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타인이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왜냐하면 내가 타인을 만날 때, 나는 그녀가(타인이) 나의 지성에 포착되기를 회피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말함이라는 새로움은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열려지게 하며, 내가 타인의 말에 주목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의 말에 경청하고 배운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단지 수집하면서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강한 의미에서 말이다. 나는 가르침을 받고, 도전받으며, 명령받는다. 레비나스의 얼굴 및 교사의 역할에 대한 설명은 타인이 나에게 자신의 세계를 보여주고 규정내리며, 뿐만 아니라 자신을 규정/재규정짓는 권위를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내가 좀처럼 타인을 알 수 없다는 불가지적(elusive) 성질은 세계와 교사를 가르치는 타인 속에서 권위를 산출한다. 그러므로 듣는다는 것은 타인의 권위에 경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에 그런 권위에 대한 호혜적 조건은 없다. 나는 타인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다, 공동인간 또는 언어학적 본성으로부터 파생된 권위도 없다. 타인이 나의 말에 경청하든 안하든, 나는 타인의 말에 경청할 필요가 있다.

3
그러나 나 또한 말할 수 있다. 나는 응답하면서 말한다. 그러나 응답한다는 것은 나의 반응에 도전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타인의 권위를 여전히 인정한다는 것이다. 나의 말함에 대한 레비나스의 설명은, 특히 <<존재와는 다른것,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서, 말함에 앞서는 그 바로 열림, 즉 타인으로부터 배우고자하는 그 열림이 어떻게 열려지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가 타인의 발화를 하나의 가르침으로서, 세계에 대한 하나의 표상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명령으로서 경청할 때, 나는 명령하고 가르치고자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나의 대화자에게 나에게 다시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도록 해야 한다. 말함은 어떤 자료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나조차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말함은 바로 하나의 이용할 수 있음의 몸짓(a gesture of availability)이다. 말함은 내 자신을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거나, 내 자신을 보다 선(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며, 말함은 내가 경청할 때 생기는 이용할 수 있음을 타인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의 화자의 입장에 대한 윤리적 설명은 나의 권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책임감에 초점이 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대화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수행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방식을 발견한다. 듣는 것은 타인에게 나를 개방한다는 것이다. 말함은 내 자신을 타인에게 건네주면서 개방성을 증언한다.

4.
레비나스는 모든 대화에서 정말 가능한 계기들을 격리시키면서 이 두 입장, 즉 화자와 청자의 윤리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가 말할 때 분명 타인이 지니는 권위 때문에, 나는 낯설은 심지어 비우호적인 어떤 것이라도 경청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내가 나의 전언에 기대하거나 간청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말함은 상대방에 대한 나의 상처받을 수 있음(vulnerability)을 나타내고 있다. 해석 너머의 권위는 모든 말함과 청취에서 작동되고,  미묘하게 변형된 글쓰기와 읽기에서 작동된다. 왜냐하면 레비나스의 윤리는 기호를 사용하는 화용론에서 이런 비대칭적 책임감으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Ⅱ

1.
하버마스 사상에 있어 정의(justice)는 논증 속에서 해결된다는 방식, 즉 사람들이 의사소통함으로써 공동견해(합의)에 도달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어떤 상황이 그리고 어떤 해석규칙이 정의가 요구하는 지식 형성을 촉진시키는지를 탐색한다. 하버마스의 이론에 따르면, 도덕적 관점은 상황과 해석규칙이라는 권위 속에 보호된 다양한 목소리에 의해 산출된다. 정의를 필요로하는 지식은 상호성의 테두리 내에서 사회적으로 구조화돼 있다. 그런 지식은 정의의 원리 자체가 합의에 의해 공동체 속에서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 합의가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하버마스에게 있어 의제는 대개 상황들과 무엇을 해야할 지를 하나의 사회로서 규정하는 것을 망라한다. 그런 합의의 목적은 직관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전제한다. 즉 합의의 목적은 이런 가정(합의의 목적이라는)을 명확히할 필요가 없고, 또한 그 가정을 처음부터 합리화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는 타인과 도덕적 논증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도덕적 논증은 언제나 내가 제공하는 해석을 받아들이도록 타인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비판과 논거, 상호해석과 재해석을 교환하는 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 비강제적인 일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매번 그런 일치가 성취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일치의 정의는 목표로 지향한 합의 가능성에 달려있다. 하버마스의 주장은 이런 희망이 없다면 그 누구도 책임적인 방식으로 타인과 열정적으로 조율하려는 대화 속으로 진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2

대화는 공유된 권위에 따라 진행된다. 조율은 단지 대화의 결과가 아니다. 조율은 대화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다. 각 사람은 타인이 찬성하리라 기대하면서, 그러나 타인의 반대에 기꺼이 경청하면서 그 주장을 정당화할 준비가 된 주장을 제공한다. 의사소통은 이런 상호성을 필요로한다. 즉 각 사람은 타인이 동의하거나 반대할 자격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규범적 주장은 수행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 실천의 중심에는 누군가에게 의문의 여지가 없는 권위를 허락하는 것에 대한 거부가 존재한다. 하버마스는 쌍방적 상호성과 호혜적 상호성이라는 두 용어(독일어와 거의 등치되는 말은 호혜적이라는 뜻의 Gegenseitig와 상호영향을 미치는 쌍방적이라는 뜻의 Wechselwirkend)를 그렇게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내가 나의 진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는 전략적인 언어사용/행위 유발적 언어사용(perlocutionary)과 내가 말할 때(말함에 있어) 행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의사소통적 사용/발화수반적 행위(illocutionary)를 분명 구별한다.(C 384/285) 내가 믿기에 이런 구별은 협력적 대화는 강제적이지 않으며, 또다른 목적에 대한 수단이 아니라는 방식을 강조하게끔 도와줄 것이다. 권위를 공유하고자 하는 의지, 타인에게 주장을 제출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그 주장들을 상호 정당화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의지는 하나의 윤리적 책임감이다. 윤리적 책임감을 강조하는 화용론은 이런 상호교환을 쌍방적인 것으로 동일시할 것이다. 우리가 상호조율하기 위해 우리의 단어들을 사용하고, 다른 한편으로, 단지 타인을  높이기위해 어떤 주장을 양보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균형은 유일하게 호혜적인 것이다. 나는 타인들과 그 어떤 것도 공유하지 않지만, 나 또한 나의 기회를 가지기 위해서만 그들로 하여금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

3.
그러나 만일 하버마스가 호혜적 상호성을 거부한다면, 비대칭성 또한 거부할 것이다. 사실 호혜적 상호성이라는 용어 자체가 불의(injustice)의 꼬리표이다. 하버마스는 분명 권위가 갖는 불평등한 점들, 즉 지배자가 말하는 것은 노동자가 말하는 것보다 더 신뢰가 있다는 것 따위를 고려하고 있다.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위계획을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오히려 그에게 혹은 나에게 혹은 우리들에게 명령하는 어떤 사람에게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비대칭은 표(table)로부터의 배제로서 나타나거나, 혹은 주변적으로 좀 나은 꽤 조심성있는 준비도 없이 제공하는 초대장으로 나타난다. 하버마스는 때때로 도덕적으로 의무의 요청을 초월하는(superogatory) 희생 가능성, 즉 아마도 누군가가 누군가를 위해 고통당할 것이라는 것을 정말 허용한다. 그러나 그는 희생의 지표적(indexical)이고 화용적(pragmatic) 결과에는 주목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게 혹은 어떤 이에게 요구하지 않으면서 정의(justice)가 조정되는 대화외부에 서있다. 하버마스가 만일 레비나스의 저작을 읽었다면 듣고 응답하는 과잉책임감(excessive responsibility)은 정의의 요구와 긴장관계에 있지 않을까하고 우리는 생각한다. 화용론에 규범적인 것은 화자와 청자 입장의 지표성(indexicality)이 아니라, 오히려 권위를 공유하는 협력과 상호 질의에 응답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사실 우리가 사회의 다양한 화자로부터 비대칭적 책임감으로 부르는 언어 차원을 추출하여 규정할 수 있을까?

                                      Ⅲ

1. 그러면 이제 우리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자: 레비나스의 윤리는 사회적 행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가? 만일 사회윤리가 고유하게 협력적 대화에 대한 것이라면 얼굴과 얼굴이 마주대하는 관계(face-to-face), 즉 타인과 근접하도록 이끄는 것은 사회이론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가? 이에 답하는 일단계는 레비나스 자신이 두 사람에서 세 사람으로의 전환을 필요로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제삼자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는데, 이 개념은 마르셀(Marcel)로부터 로이스(Royce)와 퍼어스(Peirce)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제삼자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관심은 정의에 대한 요구이다. 내가 타자들에게 갖는 비대칭적 책임감은 다른 타자들에 대한 책임감을 배제하지 않는다. 사실 레비나스는 한 사람의 타인의 얼굴에서, 모든 타인들이 나와 대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 사람의 타인에 매여있고, 수많은 타인들에게 매여있고, 나의 대화자가 매여있는 타인들에 내가 매여있기 때문에, 나는 윤리적으로 이런 책임감들을 조화시킨다고 여길 책임이 있는 것이다. 정의는 조화시키라는 요구이며, 책임감의 발란스를 재조율하라는 요구이다(AE 199/157). 레비나스를 따라서, 나는 분명히 내가 타인에게 갖는 책임감, 그리고 사실 타인들이 다른 타인들에게 갖는 책임감을 고려하고 평가한다. 그 결과는 하버마스의 사유, 즉 합리화(reasoning)의 규범적 차원은 정의에 대한 요구로서 나타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다.

2.
더욱이, 이런 합리화에는 기호적 측면이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호들은 일반적이다. 각 기호는 그 상황의 특수성에서 파생된다. 이런 일반성은 타자들이 똑같은 기호들을 해석하도록 허용하고, 한 공동체가 정의의 원칙들에 일치하도록 허용한다. 레비나스의 기호, 즉 '말해진 것'이라 부르는 기호의 일반성에 대한 해석은 그것이 단지 폭력과 동화의 위험성을 띠는 것은 아니다. 그 일반성은 또한 정의이기도 하다. 기호론은 청자와 화자의 입장이 갖는 비대칭성의 화용론을 필요로 할뿐만 아니라, 그것은 일종의 기호론이기도 하다. 다양한 해석자들에게 있어 안정된 의미를 획득하는 단어의 힘은 여러 사람에 대한 여러 책임감의 협력에 본질적이다. 레비나스가 사회적 매커니즘(이상적 발화상황 등)을 발전시키지 않을 때, 그는 기호들을 제공하는 제공뿐만 아니라, 기호들을 제공하는 기호는 윤리적 해석을 필요로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말해진 것은 정의를 위해 윤리적이 되고, 아니면 오히려 말해진 것은 정의에 대한 요구에 의해 발생된다.

3.
그러나 정의에 대한 이런 요구 자체는 제일차적 계기, 즉 한사람의 타인에 대한 비대칭적 책임감에 의존하고, 또한 그것의 결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윤리적 계기가 앞서고, 그 다음에 정의의 계기이다. 이것이 갖는 함의는 무척 의미심장하다. (1) 우리는 자기이익에 근거하여 정의를 협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다양한 책임감의 복잡성 때문에 우리는 정의를 협상한다. 따라서 사회는 연대성(solidarity)과 형제애(fraternity)에서 발생하지, 각기 자신의 善(도덕적 선 혹은 다른 선)을 추구하는 독립된 개인들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AE 202/159). 윤리는 우리 모두를 묶어주며, 하나의 협력을 필요로한다. (2)정의는 윤리를 이기지 못한다. 정의의 규범들은 항상 어떤 한사람을 대신하여, 다른 한사람을 비판하는데 노출되어 있다. 의미들을 조율한다는 것이 단어를 해석하는 권위가 공유된다는 것을 뜻한다면, 어떤 사람이 어떤 일치된 의미를 방해하고 도전할 가능성은 분명 보호될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정의를 대표하는 입장에 있는 '나', 즉 '심판자'의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심판은 공동체를 표상/대표하지만, 또한 재판관 앞에 있는 사람/인격의 철저한 권위를 기꺼이 인정해야만 한다. (3) 따라서 사회는 올바른 제도들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제도화된 상처받을 수 있음을 필요로한다. 레비나스는 복잡하고 엄격한 정치사상가가 아니라, 자유국가를 옹호하는데, 그 이유는 자유국가들이 궁극적인 도덕적 가치를 회피하기 보다는, 비판적 목소리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즉 언론/발화의 자유, 출판의 자유 말이다. 레비나스에 있어, 이런 자유들의 정당화는 정의에 대한 윤리적 명령이라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데 있다.

                                   Ⅳ
1.
만일 레비나스가 정의와 쌍방적 상호성을 필요로한다면, 하버마스는 비대칭성을 필요로 하는가? 아니면 보다 적절하게 말해서,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 의사소통공동체에 앞서는 길은 있는가? 이런 앞섬의 사유는 분명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하버마스는 규범적으로 개체화와 사회화는 과정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사소통공동체는 개인들이 대화에 참여하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말하고자 하는 개인들만이 진정한 합의(consensus)를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사하게, 그런 대화에 참석한 자만이 충분히 개체화될 수가 있다. 논증과 협력적 대화의 공통표에 의해 만들어진 타인과의 관계는 한 인격으로 하여금 우리가 청자와 화자의 입장을 명명했던 언어수행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분명하게 이런 앞섬을 부인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마자, 우리는 어떤 개인을 필요로 할 것이다. 수직적으로 협력, 발전하는 양자는 이상적 발화상황을 위한 이상적 참여자에 대한 요구을 극소화시키는 것은 아니다.이 논문의 다음 부분에서 나는 개체화와 사회화에 대한 미드(Mead)의 주장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하버마스는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개인들을 생산하는 이론적 매커니즘을 제공하기 위해 미드를 끌어들이고 있다.

2.
정의에 대한 요구를 수행하는 합리적 논증에 참여할 수 있는 개인은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버마스가 사용하는 이론은 역할맡기(role-taking)의 하나이다. 각 참여자는 합리적 논증을 형성하기 위해 분명 타인들의 역할을 떠맡을 수 있다. 하버마스는 내가 말할 때 나의 발화가 고양시키는 주장들을 분명 기꺼이 내가 회복시킬 것이라는 전제를 검토함으로써 자신을 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런 주장들을 세가지로 구분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발화가 어떤 주장을 회복시키는 전제를 만들어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말한다는 것은 나의 책임감을 노출시켜 내가 말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 대화에서는 나의 전제가 명명되지 않는다. 나는 그 주장들을 회복할 필요가 없다. 말함은 어떤 것을 말하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대화는 오직 내가 나의 발화를 정당화시킬 의지가 분명히 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3.
나는 이런 의미에서 나와 말하는 타인들의 역할을 떠맡는 방법을 배운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반대할 수가 있고, 또한 그들이 내가 말하는 것을 의문시할 권위가 있다는 것을 배운다. 사실, 타자는 내가 무엇인가 말하고 행할 것을 기대하면서 나하고 만나며, 또한 그런 기대는 나의 반응에 의해 분명 채워질 수 있다. 내가 응답하는 방식을 찾기 이전에, 나는 타인의 관점을 먼저 취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타인이 기대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하며, 사실  타자가 나에게 말을 건낼 때 나에게 제기하는 주장들을 형성하는 방법을 나는 배운다. 나는 타인의 관점을 내재화하고, 그런 관점을 가지고 그런 관점에 동반되는 책임감을 내재화시킨다. 타인이 어떤 것을 언급할 때, 타인의 관점을 취한다는 것은 타인이 언급한 것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어떤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반응들이 그 주장을 하는 '나'에 매여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내가 또다른 타인의 '나'관점을 이어받을 때조차도 말이다.(C/2 115/74-5) 그러나 역할맡기는 또다른 중요한 뒤틀림을 가지고 있다. 즉 이런 의미에서 내가 사회화되는 것은, 내가 누군가가 말할 것을 기대하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대주장을 할 것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내가 사회화되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 속에서 말한다는 것은 타인이 반대하는 주장을 내가 정당화해야만 하거나, 아니면 그 주장을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을 정당화해야만 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반대와 응답의 내재화는 나로 하여금 합리적임을 허용하고, 합리적 개인을 창조한다. 나를 향한 타인의 태도에 내가 반응하도록 틀지워주는 것은 내가 타인의 역할을 떠맡고, 또한 나의 응답이 나의 응답에 대한 타인의 반응을 고대하고 조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 참여자들은 이런 역할들을 끝까지 수행함으로써 생각한다, 그러나 각기의 역할 속에서 참여자들은 그 개인이 제기하는 주장을 회복하는 것을 책임진다. 합리적 논증은 각 타인의 논증에 응답할 수 있는 개인들을 필요로하며, 그래서 합리적 논증은 쌍방적으로 상호행위적 공동체와 관련하여 그들 자신의 주장들을 틀지워준다.

                                     Ⅴ    

1.
이렇게 역할맡기를 내재화하고 동시에 사회화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조지 허버트 미드(George Herbert Mead)의 공헌이 상당히 크다. 그러나  규칙에 맞게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축적하는 것을 책임감으로 본 사람이 하버마스라면, 그런 책임감들이 얼마나 심오하게 비대칭적인 것인가를 인식한 사람은 바로 조지 허버트 미드이다. 놀랍게도, 미드의 역할맡기에 대한 설명은 레비나스의 말함(speaking)에 대한 해석과 유사하다. 미드에게 있어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으뜸단계는 기호를 똑같은 반작용으로 사용하는 사람에게서 기호가 발생할 때, 기호가 청중 가운데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미드는 자극에 대한 행동의 반응을 내재화하는 것을 벗어나서 발화를 구성하는 행동주의를 지지한다. 적절하게 제스처를 사용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그 제스처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고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제스처를 하는 사람은 당장 청자로서 반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호를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한 반응을 인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호 사용이 그 반응을 산출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기호사용자(제스처든 단어든)는 이제 그 기호가 타자를 기다리는 똑같은 의미를 저절로 발생하게 한다. 공유된 의미는 그 역할을 떠맡는 것에 내재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이후에는 그 의미를 공유하고 그 반응에 대한 준비를 공유한다. 자기 반성은 기호에 대한 내 자신의 응답속에서 발생하는 것을 고대하는 이 능력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2.
미드에게 있어서, 자기반성은 타인의 역할을 떠맡음으로써, 그리고 우리 자신이 기호에 의해 자극받을 수 있음을 깨닫는 데서 발생한다. 그러나 그런 공유된 의미는 나에게 반응을 요청하는 의미이다. 미드는 누군가가 타인에게 자리를 권하면서, 자기자리에 앉기 시작하는 것을 종종 사례로 제시한다. 역할을 떠맡는다는 것은 발화자가 자기자신인 동시에 타자가 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타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은 상징적 의미의 조건임을 의미한다.(SW 244) 레비나스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이 역할맡기에 대한 해석이 놀랍게도 레비나스의 대속(substitution)이라는 용어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그러나 이 충격과 놀라움은 우리가 타자가 된다는 것(역할맡기, 타자의 입장의 서는 것)이 단순히 호혜적 관점교환(reciprocal exchange of perspectives)이 아니라, 오히려 마치 내가 청자인 것처럼, 내 자신의 전언에 의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미드는 제임스의 개념을 변형시키면서, 명확하게 '나'(me)와 '나'(I)를 구별한다. '나'(me)는 '나'(I)에 앞서며, '나'(me)는 모든 담론의 수신자이며, 심지어 내 자신의 발화의 수신자(addressee)이다. 그 '나'(me)는 내가 반응하도록 요청하는 일련의 자극으로서의 세계를 경험한다. 대화속에서 나는 내가 그들의 역할을 떠맡는 한, 타자가 나에게 말하는 것에 의해, 그리고 내가 타자에게 말하는 것에 의해, 요청된 반응장치를 내 자신에게 말할 수 있다. 말하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나'(me)를 발전시키는 것이며, 타인들처럼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며, 내 자신이 응답할 수 있는 인식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 '나'(I)는 예기치않게 응답하는 자아self이며, 사실 이후에 '나'me로서의 표상을 통해서만 알려질 수 있는 행위agency의 미래이다). 그러나 '나'(me)의 우위성은 내 자신의 발화조차도, 내 자신의 세계지배가 역할맡기 속에서 나에 대한 고발(accusation)이 된다. 기호에 의해 반응하도록 부르짖는 존재의 비대칭성은 내가 또한 내 자신의 전언에 의해 요청될 때 사회화된다. 사실, 나는 내 자신에게 말을 건냄으로써, 다시 말해 내 자신이 내 자신에 의해 말건네지고 있음을 깨닫아 앎으로써, 내 자신을 '나'(me)로 만듦으로써만, 나는 말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하버마스는 이런 문제들에 솔직하게 주저한다.(한 텍스트에서 하버마스는 내 자신의 의사소통적 역할로부터 몰래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일부분 하버마스가 이상적 발화상황에서 원하는 평등은 화자의 평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드의 평등은 화자가 아니라 청자의 평등, 즉 응답에 부름받은, 심지어 그들자신에게 부름받은 사람들의 평등이다. 다른 한편으로, 레비나스는 책임감의 명령에 사로잡혀 있다. 계속되는 기소/고발에 대한 레비나스의 분석은 단순히 타자가 나에게 전하는 전언을 넘어서, 말함(speaking)을 증언과 하나의 자기고발(self-accusation)로 생각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기호, 심지어 내가 말하고 글을 쓰는 기호에 의해서 내가 부름받는 다는 레비나스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바로 불타오르는 책임감을 지시하고 있다. 우리가 책임감을 회피할 수 없다는 문제는 '왜 하필이면 나인가?'(Why me)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3
미드는 역할맡기를 보다 잘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개념을 제공해주고 있다. 즉 유희(play)와 게임(games)간의 구별. 아이는 발전되는 관계 속에서 먼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넴으로써 말하는 것을 배운다. 유희의 최초의 단계에서, 아이는 이야기속의 등장인물이 되고, 빠른 연속 속에서 다양한 역할들을 시도한다. 아이는 방에서 각 사람에게 역할을 명령하며, 그 역할을 수행하도록 각 사람에게 지시하지만, 그후 갑작스럽게 역할들을 명령할 수도 있다. 아이는 비교적 비체계적인 역할장치를 배우며, 각기의 새로운 역할을 가지고 발화를 위한 새로운 화용적 가능성을 배운다. 그러나 게임을 배우는 것은 조금은 매우 복잡하다, 어린 아이들에게 야구가 아직은 어렵듯이 말이다. 게임 가운데서, 각기의 역할은 타자의 역할들과 상호연관된다. 우리는 도식적인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일련의 행동장치를 가지고 있다. 볼이 떨어지면 단지 그에 해당하는 어떤 선수들만이 공쪽으로 달려들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사실 릴레이 경주나 더블플레이는 각 선수가 특정한 상황속에서 다른 선수들이  해야할 일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필요로 한다. 단지 역할조정만이 그 게임을 가능하게 만든다. 축구는 보다 단순한 역할장치를 필요로 한다(비록 그 전략은 그만큼 복잡하게 될 수 있지만). 그래서 어린이의 축구는 어린이의 야구보다 쉽게 행한다. 그러나 게임을 배우는 것은 각 선수의 상호행위적 반응들을 기대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즉 게임을 배우는 것은 공이 좌측운동장에 떨어질 때, 각기의 타자가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배우는 것이다. 미드에게 있어, 이와 같은 복잡한 상호행위를 통합하는 과정은 언어수행능력(linguistic competence)의 발전을 본딴 것이다. 여기에 하버마스가 칭송하는 개체화(individualization)와 사회화(socialization)의 연결이 존재한다. 어떤 도덕원리를 논증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상대방이 어떻게 반대하는지를 배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고-받음과 사회적 역학이 어떤 집단속에서 어떻게 해결되는 지를 배우는 것이다. 단지 사회적인 상호행위-하버마스가 정의를 규정내리는 바로 그 절차-를 내재화시킨 사람만이 적절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말할 수 있다.그러므로 우리는 대화상대자를 대속하는 방법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안에서 그 모든 대화적 상호행위를 담지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 참여자가 되는 것은 타자 사이의 모든 책임감의 네트워크를 통전시키는 것이다. 게임을 하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전체팀 플레이에 응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응답하고 책임지는 장치사이의 관계는 화자속에서 통전된다.

                                     Ⅵ

미드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대속수행(performing substitution)을 반복하는 사회화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밝혀보았다. 게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우리 자신의 기대와 행위 가운데서 타자들의 다양한 역할들을 조정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공개적인 대화에서의 논증과 주장은 그런 복잡한 조정에 상징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잠시 하버마스가 해석한 의사소통행위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타자에게 귀를 귀울여서 그들의 비판 그 자체에 응답하는 실천들이 나와 논쟁하는 타자들을 위해 내 자신을 대속하는 것을 내재화하는 것에 얼마나 의존할 것인가를 보게 된다.그러나 나는 그 이후에 계속적으로 또한 공동체와 그 공동체의 상호행위를 위해 대속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그 타인을 위한 대속으로서 응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혹은 레비나스가 볼모(hostage)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함께 공동으로 논증하는 것은 의사소통적 공동체를 위한 대속으로서 응답하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여기서 공헌하는 것은 쌍방적 상호성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다 풍요롭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며, 또한 정의가 사회적 상호작용의 실천을 어떻게 인도할 수 있는가를 보다 풍요롭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레비나스는 대속의 우위성과 비대칭적인 책임감을 고집하지만, 레비나스는 단지 올바를수 있는 실천들을 기획하고 분석할 수 있는 사회이론을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하버마스는 타인의 반대에 비폭력적이고 수용할 수 있는 하나의 이상(ideal)을 제공하고 있다. 어떤 곳에서 나는 여러 공동체들간의 관계에 대한 평형적 재정식화를 필요로한다는 것을 주장하곤 했지만, 한 공동체 안에서 정의의 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위해 하버마스는 우리를 레비나스보다는 더 많이 끌어들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레비나스와 하버마스에 대한 이런 연결점을 위한 기호적 함축들이 풍요롭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결론을 맺으려한다. 가르치는 교사와 대속에 대한 레비나스의 설명은 나의 기호와 타자의 기호 모두를 해석하는 데 있어 타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면, 반면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 이론의 설명은 사태의 상태와 행위목표를 규정하는데 있어 권위가 공유될 수 있는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레비나스는 권위의 화용론이 궁극적으로 비대칭적임을 보여준다. 즉 책임감은 타인이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버마스는 의미론이 화용론을 통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단어들이 사회적 의미들로 주어지는 방식은 의사소통적 공동체를 본딴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대속의 비대칭성에 의해 관통되는 대화의 쌍방적 상호성을 보듯이, 또한 우리는 기호작용(signifying)의 의미론적 양상이 얼마나 화용론에 의존하는지를 볼 수 있다. 더욱이, 화용론과의 그런 관계는 윤리적 책임감이 지식에 있어 담론의 기능을 관통한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하버마스와 레비나스는 앎/지식 그 자체(knowing itself)는 사회정의(social justice)에 대한 책임감에 의해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서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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