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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9/02/17 (01:48) from 211.178.25.50' of 211.178.25.50' Article Number : 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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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과학과 영성



떼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은 사계절 신학자이다. 그는 과학자(고생물학자)이며 신학자이자, 종교 사상가이며 신비주의자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부터 최근 신학자에 이르는 자연 신학의 역사를 일별할 때, 자연과학, 철학, 신학을 넘나들고 아우르면서, 정열의 검투사와 같이 우주의 진화로부터 파악된 하느님을 인식하려는 인물은 샤르댕 밖에 없다. 나는 이 글에서 샤르댕의 과학과 신학/종교의 통합의 방법과 성과를 다루고, 이것이 그의 우주-그리스도 신비주의적 영성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려고 한다.


1. 진화의 하느님을 찾아서

어린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샤르댕의 삶에는 신앙과 물질, 신학과 과학의 종합을 예고하는 흔적이 많다. 그의 어린 시절은 독실한 가톨릭 신앙(예수회)의 분위기에 젖은 가정에서 자라면서 딱딱한 돌이나 금속 조각을 수집하고 좋아했다. 그 이유는 절대적이며 영구하고 영원하며 동시에 만질 수 있고 구체적인 어떤 것에 대한 집착때문이었다. 금속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녹슬은 금속을 발견하고 울었다고 한다. 그는 영국과 이집트와 파리에서, 철학, 신학, 자연과학을 공부하였고, 무엇보다 유럽전쟁(1차대전)시 참호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하느님과 진화의 하느님 사이의 내적 연관성이 홀연히 떠오르면서, 아시아 특히 중국에서의 지질학과 고생물학 탐사와 연구를 통해 이 통찰을 심화할 수 있었다. 중국 경험은 그에게 대지의 광활함과 인구의 어마어마함의 경험을 안겨 주었다. 전후에 쓴 여러 글과 아프리카의 마지막 여행에서 '진화의 하느님'을 확정할 수 있었다.

이미 샤르댕이 초기에 쓴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글들의 제목과 핵심 문장에서 '진화의 하느님'이라는 주제를 연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음을 추적할 수 있다. '지구를 통해 하느님과 연합하는 길이 존재한다'['우주적 생명'(1916)]. '우주의 전 표층과 깊이에는 첫째날 우리를 찰흙으로 빚어만든 하느님의 행위가 실제로 존재한다'['신비적 영역'(1917)]. 또 테야르는 '주님! 나는 신비한 성체(聖體)의 영향으로 경배드리기에 합당한 당신의 몸과 피가 된 우주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사제'(1918]라고 기도한다. '세계의 역사 전체는 실현된 성육신에서부터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그리스도를 통해 앞으로 나아간 우주의 정보의 역사이다'['그리스도의 형상'(1918). '보편적 그리스도에 관하여'(1920)에서 샤르댕은 일종의 정의를 내린다:

'나는 그리스도를 우주적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전 우주의 유기적 중심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는 유기적 중심으로서, 궁극적으로 물리적이고 자연적 발전은 그리스도에 의존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는 지구와 인간의 중심일뿐 아니라 모든 별, 성운, 안드로메나, 천사 등, 인간이 원근에서 물리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모든 실재의 중심이 된다. 그럼으로 다음의 결론에 이른다. '그리스도의 인도력과 꼴지움이 인간 노동의 모든 단계마다 영향을 주고, 물질적인 결정론과 우주적 진화에도 영향을 준다. 우주의 낮은 운동을 우리는 전통적으로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주의 낮은 운동은 실제로 우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관여때문이며, 그리스도는 모적성과 초자연적 생의 실재에 이르기까지 관통하여 계시다. 삼라만상은 모두 물리적으로 그리스도화 되었으며(christifiziert), 그것은 더욱 더 그리스도화 될 것이다. '범그리스도주의'(Pan-Christismus)는 위(僞)범신론이 아니다'('나의 우주'(1924).

샤르댕은 진화론이 계시한 새로운 그리스도상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1933년에 쓴 '그리스도론과 진화'에서 '진화론으로 인하여 우리 종교가 우주적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어느정도 확실히 우주적 그리스도를 꽃피우게 된다면, 진화가 우리 하느님을 유지시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반대로 더욱 참되게 우주적 그리스도는 진화의 이념을 보존하기 위하여 적시에 등장한다고 말해야 한다'. 1942년 '진화자 그리스도'에서는 공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전문 신학자들을 향하여 '그리스도는 진화자이거나 이는 속죄 개념을 논리적으로 풀어 전개한 것'으로 보며, 새로운 십자가의 신학은 '성장과 동시에 속죄의 표징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십자가이며, 이 십자가는 미래에 세계가 자신을 못밖을 수 있는 유일한 십자가이다'. 1945년에 쓴 '기독교와 진화'에서는 진화를 계시의 발판으로 본다. '현대 우주론은 사변적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우주발생(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심리발생과 정신의 발생)의 형태를 받아들인다. 우주발생의 정점은 인격화된 인격성이다. 어떤 버팀목, 어떤 강화력, 어떤 각성의 힘이 우주적 종합을 이루는 물리적 극의 발견을 계시의 직관으로 보지 못하는자 누구인가? 다시 한번 9적어도 자연적 측면에 따라) 신앙의 우주적 그리스도를 과학의 오메가점과 일치할 수 없겠는가?' 역사적 그리스도와 우주적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하여 샤르댕은 '속죄자 그리스도를 일반적으로 확장하면 참된 그리스도-진화자가 되며(세계가 질어진 죄의 무게를 발전을 향한 길 위에 짊어지고 가는 그리스도), 역사적 그리스도가 보편적-자연적 그리스도에로 지향되며, 궁극적으로 우주발생이 그리스도 발생과 일치한다는 생각이 예수의 인간적 현실을 초인간적인 것에게서 소멸시키고 우주적인 것 안에서 흩뿌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진화의 근본 법칙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주의 그리스도가 궁극적으로 세계의 정상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오메가에서 우주의 운동이 멈춘다면, 반대로 그리스도-오메가는 구체적인 씨앗인 나사렛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경험적으로 우리의 경험을 위하여 정합성을 제공하는 것이다'. 1953년 샤르댕이 세상을 떠나기 2년전 '진화의 하느님'에서 그는 지난 50년 동안 이 현상의 명증성이 그를 재촉해 왔다고 진술한다. '나는 인간의 지평 위로 부상하는, 부정할 수 없는 그러나 여전히 잘못 인식했던 우리가 진화의 하느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샤르댕은 2년 동안 이 주제에 사로잡혔다. 사망하기 한달 전 1955년 3월 쓴 글 '기독교적인 것'에서 샤르댕은 기독교적인 것과 진화적인 것 사이의 만남을 내파적(implosiv) 만남으로 이해한다. 샤르댕에 의하면 우주는 위에서, 앞으로 중심화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중심화의 중심이다. 정신의 탄생은 그리스도의 탄생이며 이는 그리스도교적 현상이다. 샤르댕의 죽음 후에 그의 책상 위에서 예수의 사진이 발견되었다. 그 사진 앞면과 뒷면에는 예수의 마음과 함께 드리는 연도(litany)가 기록되어 있다(별지 참조). 앞면: 진화의 하느님. 그리스도적인 것, 초-그리스도, 예수: 세계의 마음/심장, 진화의 본질. 뒷면은 이렇게 끝난다: 지고의 보편적 에너지의 초점, 우주적 우주 탄생의 영역의 중심, 예수의 마음, 진화의 마음, 내 마음을 당신과 연합합니다.

2. 진화의 근본 법칙.

하느님이 진화 속에서 계시하시며, 이 계시가 미래의 하느님 상과 미래의 종교 이해에 큰 영향을 준다는 테야르의 확신이 매우 인상적으로 보일는지 모르지만, 어떤 진화의 원칙에 의거하여 이러한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지, 그 정당성이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테야르는 우선 근대과학적 세계관 및 자연관이 객관적 세계, 균일한 세계, 수량화된 세계, 요컨대 質이 박탈된 세계. 엄격한 기계적 인과론의 지배를 받는 세계임을 비판한다. '지난 세기에 탄생된 물리학은 고정성(fixity)과 기하학(geometry)이라는 두 가지 사인 아래에서 가능했다. 물리학은 초창기에 세상을 수학으로 설명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세상을 닫힌 평형상태 속에 있는 고정된 원소들의 조직으로 보았다'. 그러나 자연의 현상에 대한 지식, 미소세계에 있어서의 양자성, 거대세계에 있어서의 상대성을 알고 난 결과 자연의 역사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보통 화학 원소들은 안전성과 그 수명이 무한하다. 그런데 방사성 물체가 발견되면서 그러한 환상이 깨졌다. 우리 인간 편에서 보자면 산과 천체는 고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대한 '지속'의 흐름에서 볼 때 지각은 우리 발 밑에서 끊임없이 바뀌고 하늘은 우리를 별들의 회오리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 전까지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 다루었다. 그것은 근대의 학문관이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고 이어 역사와 자연의 분리하여,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을 분리한 탓이다. 정신과학은 인간을 연구한다. 인간을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즉 영혼, 의식 및 정신이라고 이해한다. 반면 자연과학은 도구적인 사고라는 수단을 빌어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는 물질적인 세계를 연구한다. 자연과학은 인식하는 주체를 인식되는 객체와 날카롭게 구별하는데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은 두 개의 半圓으로서 하나를 이룬다. 인간도 하나의 자연존재이다. '지금까지 믿어온 것과 달리 사람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에서 생겨났고, 자연의 법칙들 밑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과학은 정신과학의 전제조건이다. '인간은 생명의 일부다. 특히 생명의 가장 특징적인, 가장 첨단적인, 그리고 가장 생기에 찬 부분이다'. 인간이 역사적인 존재인 이유는 자연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자연자체가 역사적이다. 그러나 자연에도 스스로의 역사가 일어나지만 자연은 역사를 경험으로 얻지 못한다. 자연은 역사이나 역사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스스로가 역사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만이 의식과 경험을 통해 역사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인간의 특징은 인간의 역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역사에 관하여 그 무엇인가를 파악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기의 역사에 대하여 파악한 '그 무엇'이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상대성이론, 정신분석학과 더불어 우리 시대의 '큰 이론'(Mega-Theorie)에 속한다. 19세기에 진화론은 생물학과 인간학에 인식론적 혁명을 야기하였다. 20세기에 이 혁명의 파장은 생물학을 넘어 우주론/천체물리학과 행동과학 및 지식론(Th.S.Kuhn)에 이르기까지 확산되고 있다. 철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화론과 화해한 분위기이다. 그러나 샤르댕에게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과 가설 이상이다. '진화란 하나의 이론, 하나의 세계, 하나의 가설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모든 이론, 모든 가설, 모든 세계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요 사실을 밝히는 빛이며 모든 선이 거기에서 나오는 만곡/곡선이다'. 샤르댕은 이 명제를 몇 개의 근본 법칙으로 입증해 나간다.

가) 중심화의 법칙: 첫째 근본 법칙은 중심화(Centreism)의 법칙이다. 이것은 만물이 중심을 향해 나아가고 수렴하는 실재 구조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만물은 궁극적으로 물질적, 정신적, 영적인 차원이 하나로 통합되는 전체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전체성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진행과정에 있으며, 중심화의 힘이 모든 만물의 영역에 두루 미친다. 이 과정의 궁극적 목표는 완전한 통일에 다다르는 것이다. 우주만물의 통합, 이것은 샤르댕에게 사변적 형이상학이 아니라 실재론적인 연합의 초물리학이다.  샤르댕에 따르면 우주의 기체/기본 물질은 어지러울 정도로 그 수가 많고, 어지러울 정도로 작으면서 끊임없이 더 작은 것을 향해 분해되지만, ''서로 모여 하나를 이룬다. ...  무언가가 그것들을 엮고 묶어준다. ... 원자들이 모이고 결합되어 하나의 물질이 되는 것은 신비다'. 이 하나됨은 획일성이 아니라 부분이 완전하고 유기적인 전체에 참여하는 통일성임은 물론이다. '전체는 그 구성요소의 합께 그 이상이다'. 전체는 부분의 총합 그 이상이며,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다. 생명은 물질의 종합이지만 거대한 복잡성의 효과를 띄고 나타난, 물질 이상의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다. 따라서 생명은 지상 물질의 우발적 이상 현상이 아며 물질과 생명이 명백하게 나뉘는 것도 아니다. '생물학은 방대한 복잡성의 물리학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

나) 내면화의 법칙: 우주 물질의 중심화가 인간에게서 최고점에 도달한 이유는 인간이 의식, 반성의식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테야르에 의하면 의식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 다 들어 있다. 테야르는 물질의 '안'과 '밖'을 나누어, 물리화학자들은 지금까지 사물의 '바깥'만을 보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의식이 사람에게서 나타난다고 해서 가장 높은 형태의 생명에만 있다는 것은 한갓 선입관에 불과하다. 과학은 우주형성 문제에서 의식의 문제를 빼버렸지만, 그것은 우주로 뻗어 있고 공간과 시간으로 무한히 연장된다. 그럼으로 의식의 단계가 있다. 우주의 모든 입자에는 의식이 있다. 원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의식의 정도를 실험하고 측정할 수 없다고 의식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영혼과 물질의 분리는 있을 수 없다. 신은 각 영혼 안에서 전 세계를 사랑하시는 것이며, 각 영혼이 우주를 요약하는 그만큼 부분적으로 전 세계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의식이 복잡성의 증가에 따라 새로운 질의 실재가 발생한다: 미립자 -원자 - 분자 - 고분자 - 금강석  - 단백질 - 세포 - 유기체. 미립자로부터 바이러스와 생명체를 지나 인간에게서 의식이 최고조로 나타나는 현상을 '복잡성과 의식의 법칙'으로 명명한다.  물리학의 결정론을 무한히 작은 수로 설명하고 측량할 수 없는 공간의 만곡을 중력으로 설명하듯이 중심화의 결과인 복잡성은 자유의 현상을 설명한다.

다) 개별화의 법칙: 중심화는 구성요소의 획일화, 균질화, 혼합, 혹은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n보다 높은 차원에 있는 n+1은 n을 소멸시키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n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비약한다. 생명체의 진화는 연속된 과정을 넘어선, 새 질서(새것)의 시작, 전혀 새로운 것을 드러낸다. 이것이 조직된 복잡성인데 복잡성의 매 단계에서 관찰된 현상들은 그보다 낮은 수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 온도는 양자론이 지배하는 개별원자의 수준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설탕의 단 맛은 설탕을 구성하는 탄소, 수소, 산소 원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생명의 창발적 특성(emergent, C.D.Broad)이다. 샤르댕은 창발적 특징을 생명체의 숫자, 크기, 시간을 들어 설명한다. 유기체는 그의 통일성을 꽃피우게 한 복잡성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유기체가 복잡성을 산출한다. 이것은 보편적 경험의 사실이다. '세계는 거대한 하나의 '개체발생(ontogenese)'으로서, 그 과정에서 각 영혼의 발전은 현실 세계를 기초로 하고 그 도움으로 되는 것이며, 우주라는 오케스트라의 한 화음을 이룰 뿐이다'.

라) 인격화의 법칙: 인격화의 법칙은 우주물질이 중심화와 내면화를 넘어 극명하게 드러낸 모습을 인간에게서 찾는다. 인격은 중심과 구분되는 다른 사람, 개인이 아니라, 가장 깊이 자기 자신에게 도달한 자이다. 그러므로 인격은 인간에게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인격적인 것이 계속 발전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완성이다. 샤르댕의 말, '사람은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멋지게, 사람은 거대한 생물학적 종합을 따라 위로 올라가는 화살이다'에서 인격화의 법칙이 노리는 목표가 예감된다. 그 목표는 초인격(the hyper-personal), 곧 우주의 인격화에 있다. 인격화된 우주란, 수많은 개체들이 상처를 입지 않고 망가자지 않으면서 이룩된 하나이다.

마) 사랑의 법칙: 테야르에게 사랑이란 기쁨과 고통 등, 한갓 감성차원만이 아니라 굉장한 자연의 힘이며 진화의 뜻이다. 사랑은 하나가 되고자 하는 본능, 우주적 사랑이다. 우주 차원의 사랑이란 우주의 압력으로 개체를 전체로 몰아가는 열정이다.

바) 비가역성의 법칙: 테야르에 의하면 시공간에 사는 여러 무리들은 그들을 묶어주고 최고에 달하게 해주는 어떤 점에 이르기 마련이다. 이 점을 샤르댕은 '오메가 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메가 점은 일련의 과정의 마지막이지만, 그 과정 '밖'이다. 그 이유는 분자는 원자의 합 이상이며, 세포는 분자들의 합 이상이고, 사회는 개인들의 합 이상이며, 수학은 계산과 정리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주의 종합으로서의 오메가 점은 일련의 우주과정 '밖'에 있다 할 것이다. 테야를는 오메가 점의 특성으로 자율, 현재성, 불가역성, 초월을 언급한다. 오메가 점의 자율이란 엔트로피의 증가로 우주가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방사 에너지가 탄젠트 에너지를 새롭게함으로써 힘의 붕괴로부터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가령, 사람의 죽음이 동물의 죽음과 판연히 다른 것은 동물의 죽음은 방사가 탄젠트에 완전히 먹히지만, 사람은 거기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엔트로치를 넘어 오메가를 향해간다. 오메가의 현실성이란 새로운 실재, 새로운 존재론적 현실재의 창발적 출현을 의미한다. 오메가의 비가역성이란 모든 실재의 출현의 유일회성을 의미하며, 초월이란 오메가가 신간과 공간을 모으지만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다는 뜻이다. 분자가 모여 세포를 이룰 때 세포에는 분자를 초월하는 무엇이 있듯이, 오메가는 오메가 이전의 집합물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이 있다. 전체는 부분의 합 이상이며, 부분의 합을 초월하는 무엇이 있다.

이상 논의한 6개의 진화의 근본법칙을 함께 생각해 보면 우주가 하나의 방향을 갖고 발전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테야르는 이를 '정향진화'(orthogenesis)라고 칭한다. 정향진화는 샤르댕의 체계에 기본적인 개념. 변화는 전적으로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종과 계통의 모든 변화에는 목표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변화의 과정이 지향적이다. 방향감각을 산출하는 부분은 물질 안이다. 그래서 테야르는 '진화란 알고 보면 '얼'에너지 또는 '방사' 에너지의 끊임없는 증가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은 점점 복잡하고, 조직화되며, 의식화된다. 정향진화는 해석의 광범위한 범위라고 할 수 있다.

정향진화의 정점인 오메가 점에 하느님의 문제가 등장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진화의 추진력이며, 진화를 모으는 분이시고, 진화의 보증인이며, 진화의 몸이기 때문이다. 진화의 정점인 오메가 점은 '만물을 충만케하고'(엡1;23), 그이 안에서 만물이 성립하는 (골1:17) 죽고 또 부활한 그리스도이다. 창조는 오래 전에 이미 끝난 것이 아니다. 창조는 더욱 놀랍게 진행중이며, 세계의 가장 고양된 영역에서 진행중이다.

3. 진화의 오메가 점이신 우주적 그리스도

어떻게 진화가 하느님의 계시이며, 어떻게 진화가 특정한 한 하느님을 계시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발전을 가능케하며, 유지케하고 발전이 지향하는 절대적 중심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평적 의식의 사람에게 사실 테야르의 정향진화, 중심화의 진화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만일 그와같은 절대적 중심이 없다면, 인격성과 사랑을 향한 우주 발전의 방향이란 온갖 소립자로 구성된 우주의 모든 요소들의 의식적이고 목적지향적인 활동성이거나 혹은 '오직 우연만이 모든 혁신의 근원이며, 생물권에서 일어나는 모든 창조의 근원'(Jacques Monod)이 될 것이다. 그리고 비유기체의 단계에서의 목적 지향적 발전이나 정신의 단계에서의 목적 지향적 발전에는 많은 물음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테야르가 오메가 점이라고 말한 절대적 중심이 우주의 진화에 대하여 책임적인 답안이 될 수 있는가?

중심화의 법칙에 따르면 절대 중심은 통합 지향적인 우주의 출발점이자 목표점이다. 절대 중심의 추진력만이 아니라 방향이 세계물질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우주 물질에서 추진력과 방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 물질은 절대 중심의 산물이다. 절대 중심은 우주의 근원으로서 우주 물질에 앞서며 동시에 통합의 목표점으로서 우주 물질에게서 나온다. 절대 중심이 우주물질에 전달하는 방법은 긴밀한 내적 연합을 도모하는 집중화의 법칙과 획일화를 거부하는 개별화의 법칙으로써 으로써 암시되었다. 집중화와 개별화의 법칙에 따라 절대적 중심은 진화의 모든 중심의 중심으로서 현존한다.

내면화와 인격화의 법칙에 다르면 절대중심은 최고로 내면화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충만한 의식일 뿐 아니라 자기 밖에서 존재하는 가능한 모든 사물에 대한 의식이기도 하다. 이 법칙은 제한없는 자발성과 창조성과 자유를 유도한다.

개별화의 법칙에 따르면 절대 중심은 진화의 중심들에 현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화의 중심들과 철저하게 차이짓고 구분한다. 절대 중심과 개별적 중심들 사이의 통일성이 크면 클 수록 양자 사이의 상이성 또한 크며 각자의 자기존재됨과 자유도 크다 할 것이다.

사랑의 법칙에 따르면 절대중심은 인격 안에 있는 사랑이다. 인격 안에 있는 사랑이란 최소한의 필연성없이 충만한 자유함으로 사랑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한다. 인격 안에서의 사랑이란 자유 안에서의 사랑이요, 사랑 안에서의 자유이다. 이 사랑은 우주의 창조이며, 사랑을 자유롭게 거부하는 자에게 사랑하는 자를 놓아주는 행위와 속죄의 죽음에 이르는 사랑까지 포함된다.

비가역성의 법칙에 따르면 절대중심은 유일한 절대자이며, 무제약자이며, 파괴불가능한자이며, 원생명체이며, 삼라만상의 근원이며, 모든 종교, 모든 철학, 모든 신비주의 경건한 자들의 하느님이다. 만일 오메가점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성을 피할 수 없다면, 앞서 현존할 수도 없으며, 무자비한 엔트로피를 피할 수 없으며, 비가역성에 대한 희망을 기초할 수도 없다. 하느님의 존재를 자연에 내재한 설계의 증거에 의해 유추되거나 뒷받침될 수 있으며 과학은 우리로 하여금 설계의 증거를 깨닫게 한다는 주장함으로써 신학과 과학의 화해와 통합을 평생의 과제로 삼은 테야르에게 진화의 근본법칙으로부터 추론한 절대중심을, 그 단어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사태의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바울과 요한이 진술한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생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테야르가 어느 날 이렇게 자문자답한다. '어떤 이가 어느 날 다음 두 至福 중 어느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우주에게 중심을 주어 구원키 위해서 신의 숭고한 통일성을 취할 것인가? 아니면 신을 경험하고 신에 접촉한 광대한 구체적 우주를 취할 것인가?'. 그는 달콤한 알쏭달쏭으로 답하는 것 같다. '일체는 나에게 전부이고, 또, 전부는 나에게 무이다. 모든 것이 나에게 신이고, 또, 모든 것이 나에게 티끌이다.' 오메가 점은 테야르의 질문 '지중해 세계 정도의 규모로 상상되고 사랑받은 복음의 그리스도가 놀랄만큼 커진 우리 우주를 포괄하고, 또 집약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메가점, 절대중심, 신의나라란 무엇인가? 성 바울과 성 요한이 밝힌바와 같이 '그것은 만물의 양적 충만과 질적 완성이다. 그것은 신비적 충만(pleroma)인 바, 거기서 실질적 유일자와 피조적 다수는 아무 혼란없이 전체 안에서 再合하는 것이다'.

신학적 진술은 종교적 공동체의 신앙을 해명하는 것만이냐, 아니면 궁극적 실재를 비롯한 실재 일반에 대한 이성적이고 책임적인 담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신학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로만 제한될 수 없다. 테야르 신학은 무제약적 실재이며 만물을 충만으로 채우는 하느님과 모든 시공의 우주와의 관계와 관련됨을 테야르는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여! 나의 형님이 되어 주지만 마시고, 나의 신이 되어주소서! 이제는, 당신을 보편적 인력과 반발력의 원리로서 세계의 정점에 올려놓는 놀라운 선택력에 힘입어, 당신은 내가 숭배하기 위해 도처에서 찾았던 거대하고 살아있는 힘으로서 내게 다가옵니다'.

4. 진화의 하느님에 대한 논의

진화론적 우주에서 보편적이며 우주적 그리스도를 찾으려는 테야르의 시도는 많은 과학자들에게 낮설고 이해가 안되는 일이며 따라서 반대와 거부에 부딛친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분자 생물학자 쟈크 모노(Jacques Monod)는 테야르의 시도를 '생물학적 철학'이라고 칭하면서, 그의 시도는 지적인 예리함과 명료함이 부족하다고 비평했다. 그러나 테야르의 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생물학자들도 있으며, 몇 가지 낡은 문제점을 제외하고 테야르의 근본 취지를 인정하려는 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테야르의 시도는 신학적 혹은 철학적 문제이지 자연과학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테야르는 그동안 과학과 종교 사이에 건널 수 없을 것으로 생가되어 온 강을 건너고 다른 사람들도 편리하게 왕래할 수 있는 가교를 지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신학자들도 평균적으로 우주의 진화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읽으려는 신학자는 드물다. 가톨릭 신학자로서는 테야르의 친구이자 연구가인 앙리 드 루박(Henri de Lubac)을 제외하고, 칼 라너(Karl Rahner)가 암시적으로 그리스도론에서 테야르를 언급할 뿐이다. '우리는 테야르 이래 유행이 되어 있는 이론은 피하고 싶다. 우리가 이 결론에 가까워졌다고 하면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니고, 의도적으로 피할 필요는 없다. 우리로서는 여기서 진화론적 세계관으로부터 현안이 된 문제를 다루는 신학자라면 누구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만을 다루고자 한다.' 테야르에 대한 라너의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이야기 방식은 그에 대한 독일 가톨릭 신학자들의 머뭇거리는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누구라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점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창조'란 '하느님이 세계가 되는 과정에서의 한 부분적 계기로 생각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실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긴 하지만 세계와 물질이 된 로고스에서 당신 자신을 표시하시는 것이다. 창조와 성육신을 마치 두 개의 완전한 별개의 것으로, 서로 동시에 존재하는 하느님의 '밖으로 향한' 행위처럼 하느님이 품은 분리된 두 개의 동기에서 초래하는 것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런 것이 아니라 창조와 성육신은 설령 내적으로 개별화된 것이라도, 이 실재 세계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하나의 자기 소외와 자기 표명의 과정에서 나타난 두 개의 계기이며, 두 개의 국면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이해는 그리스도교 신학사에서 아주 예로부터 '그리스도 중심주의'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즉, 하느님의 창조적 말씀은 세계를 창조함에 있어, 이 세계를 처음부터 당신 자신이 되어야 할 물질성(소재)으로서, 또는 당신 자신의 물질성을 둘러싼 세계로서 만드시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하느님이 성육신 없이도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즉 물질의 자기초월이 은총과 성육신에서의 궁극적인 정점에 달하지 않고 끝난다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본질적 자기 초월은 모두, 설령 초월하는 것이 운동에 본래 갖추어진 목표이기는 했어도, 더 저차의 단계에서는 얘기할 수도 요구할 수도 없고, 다만 은총에 의해서 주어지는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라너는 이 문장들에서 테야르의 진화의 하느님과 진화의 오에가점으로서의 보편적-우주적 그리스도 사상을 받아들인 듯 보인다.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을 연결하는 과제는 21세기 신학의 프로그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개신교 신학자 유르겐 몰트만의 경우도 동일하다. 그는 메시야적 차원의 그리스도론에서 한 장을 생태적 위기에 답변하는 그리스도론으로서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으로 쓰고 있다. '자연 세계의 치명적인 생태학적 재난을 차츰 의식하게 됨으로써 '역사'라고 하는 근대의 패러다임이 지닌 한계가 인식되고 있으며고대 우주적 그리스도론과 그것의 물질적 구원론의 지혜를 다시 질문하게 된다'. 몰트만은 테야르의 '진화자 그리스도'와 라너의 진화의 '자기 초월'의 문제와 논쟁 끝에 자신의 고유한 착상을 전개한다. 그는 두 사람 공히 진화의 모호성과 희생을 명료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구원자 그리스도 없는 진화자 그리스도는 잔인하고 감정 없는 도태자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양면성을 가진 진화와 함께 생각되어야 한다면, 그는 진화의 구원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테야르에 대한 몰트만의 비판은 그의 생애와 작품을 면밀하게 검토할 경우 유지하기 어려운 원칙적이고 인습적인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몰트만의 다음의 주장이 테야르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류의 진화의 여러 가지 과정들은 그리스도께서 희생자들 가운데에 희생물로서 인식될 때에만 창조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와 긍정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십자가에 달린자(Christus crucifixus)로서의 그리스도와 진화자 그리스도(Christus evolutor)는 테야르에게 양자택일이 아니라, 하나이며 동일한 분이다. 진화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진화의 목표는 우주적 부활절이다.

5. 우주적 진화론자 그리스도의 영성

하느님에게 접근하는 방식인 영성을 생(삶)에 대한 태도이라고 할 때, 각 시대마다 특색/이미지/동기부여를 갖는다: 그리스도의 재림, 순교자의 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 선교적 열정 등이다. 오늘날은 세계에 그리스도인은 과학 기술적이고 인문주의적인 노력으로 결성되는 세계를 통해 하느님에게 이르기를 원한다. 테야르는 '내 생애의 주요 관심사는 세계 안에서 보다 편리하게 하느님을 발견하는 일반적인 시도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관심사는 물질과 세속 세계의 중요성을 발견함으로써 실현된다.

1) 물질의 중요성에 대하여: 그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성육신 사상에서 극복하고 있다. 서양의 과학과 철학이 물질에 대한 정의가 하나도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물질의 충만한 넘쳐흐름을 감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질이란 것은 만져 볼 수 있는, 감각적인, '자연적인'(신학적인 의미에서) 것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며, 이러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 에너지들, 피조물들의 총체가 될 것이다'. <<신의 나라>>는 세계는 하느님의 몸이라는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물질은 한편으로는 우리 삶의 짐이요 쇠사슬, 고통, 그리고 죄이자 협박이다.' 그러나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을 먹어 살릴 빵이 없다면, 정신을 취하게 할 美의 술이 없다면, 정신을 强壯시킬 지상의 투쟁이 없다면', 그런 정신을 생각할 수 있는가? '예수는 그 수난의 성육신으로 우리로 하여금 물질의 정신적 능력을 발견케 했다.' 물질은 우리가 오를 경사면을 만들고, 우리를 비행시켜주는 바람이기도 하다(101f.). '어떤 영혼도 물질을 통하여 일정한 도정을 완주하지 않고는 신에 다다르지 못한다'(103).

샤르댕은 우주의 영적 본성에 관하여 말한다. 그가 말하는 궁극적 실재는 물질적이라기 보다 영적(심리적, psychic)이다. 그러나 물질을 무시하는 그 어떤 입장과 다르다. 물질은 물리적 우주의 성분일 뿐 아니라 영성의 성분이다.

물질 찬가:


<<우주찬가>>에서

'거친 물질이여, 불모한 흙덩이여, 굳은 바위여, 폭력에만 굴하고, 양식을 얻기 원하면 노동을 강제하는 자여, 너는 축복을 받아라!
힘에 충만한 물질이여, 저항할 수 없는 진화여, 항상 출생하는 실재여, 모든 순간에 우리의 정신적 범주를 분쇄하면서 언제든지 더 먼 곳으로 진리를 추구할 것을 강제하는 자여, 축복을 받아라!

'혼들이 조화를 연주하는 샘(물질 영의 자궁), 새로운 예루살렘이 출생하는 투명한 결정이여, 나는 너를 찬양한다. 창조적인 힘을 갖고 있는 신의 나라, 영에 의해서 동요되는 대양, 수육한 말씀에 의해서 반죽되고 생명이 주어진 점토, 나는 너를 찬양한다'(전집 IV, 58-59)

2) 세속세계의 중요성에 대하여: 속세와 수도원의 생활에 구별이 없다. 테야르가, 신도가 되면 비인간화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던 원인 신자들이 인간성을 향상시키지 않고 그것을 비켜가거나 그 밖에서 머물기 때문이다. '카톨릭 신자가 우리와 함께 일을 할 때, 우리는 언제나 그가 진실성 없이 건방지게 일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는 일에 관심을 가진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내심 그는, 그의 종교를 따르는 그 까닭으로 해서 인간 노력을 믿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는 도망병과 가짜 동지를 만든다'. '신은 살아 계시고 성육신하시는 분으로, 우리로부터 멀리 손 닿을 수 없는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행동과 일 속에서 매 순간 우리를 기다린다. 그는 나의 펜, 나의 곡괭이, 나의 붓, 나의 바늘의 끝에 어떤 모습으로든지 존재한다. 내 마음, 나의 생각의 촉수에는 물론이고, 나의 깊은 의지가 지향하는 최후의 목표를 손에 넣는 일은, 나의 바쁜 거동, 몸짓, 득점을 마지막 善終때까지 밀어붙여서 된다.' 테야르의 초탈은 행동에 의한 초탈이다. 그리스도는 '물에 젖은 채 강에서 나오실 때, 그와 함께 세계를 들어올린다. 물에 잠김과 떠오름, 사물에의 참여와 승화, 소유와 포기, 건너감과 실려감, 이것이 물질을 구하기 위해 물질의 도전에 응답하는 이중적이고도 유일한 운동이다'. 그는 기독교 신비주의의 위대성을 '신의 현시'에서가 아니라 '세계에서의 신의 투영성'에서 발견한다. 하느님은 만물 위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 안에서, 만물을 통하여 사랑하신다.

테야르의 신비주의는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매우 지적인 신비주의만이 아니라 종교와 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신비주의이다. 그의 신비주의는 관조적이며 연합적인 것이 아니라 진보적으로 더욱 중심적인 경험의 연속에 가깝다. 신비주의에서 하느님의 지극한 경험은 단순성이 아니라 '종합하는 힘'(synthetic power)으로서의 경험이다. 그의 신비주의는 일치의 신비주의(mysticism od identification)가 아니라 통일의 신비주의(mysticism of unification)이다. 그의 신비주의는 전통적인 '하느님과의 연합'만도 아니고, '땅과의 연합'인 자연신비주의도 아니며, '땅을 통한 하느님과의 연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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