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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1/28 (19:34)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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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다원주의 속에서의 열린 종교
제1회 : 문화 다원주의 속에서의 열린 종교

일시 : 1998년 05월 28일 (목요일) 17:00-19:30
발표 : 송천은 총장

1. 이끄는 말
2. 신앙 수행상에서 현대종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 종교다원주의에 있어서의 문제



1. 이끄는 말

종교의 진리관에 대한 신뢰의 감소, 그에 따른 종교의 역할에 대한 신뢰의 감소가 과거에 비하면 구미 선진국에서 적어도 양적으로는 일반적인 사상경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지식의 발전에 따른 의식구조의 변화가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꽁트가 인지가 어두웠던 고대에는 신화 종교의 전성시대, 인지가 더 발달된 시대는 철학의 전성시대, 인지가 더욱 발전된 현대에는 실증적인 근거가 중시되는 과학의 시대로서 과학의 시대야말로 가장 인지가 진화된 시대라고 보았는데 꽁트적 사상경향에는 현대에 상당한 변화가 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아직도 그러한 사상경향은 유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측면도 있다. 지성의 면에서는 특히 그렇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근본주의적 사고나 굳어버린 편견이 지성적 신앙인을 실망시키기도 한다. 나이스빗트 같은 미래학자는 미래에 종교의 르네상스 시대가 올 수도 있음을 예고하기도 하였으나 21세기의 종교가 더욱 이상적 사회공헌적인 되려면 종교가 어떤 측면에서건 더욱 지성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여하튼 종교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중의 중요한 부분은 인간의 정당한 이성적 발달을 저해하고 미신에 빠지게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세속화도 빼놓을 수는 없다. 현대에도 종교가 기능상으로는 사회공헌을 할 수 있는 분야가 확고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가 열린 종교의 성격을 가졌거나 그런 입장을 지향할 때에는 종교의 미래는 더욱 밝은 것이 된다. 제 2 바티칸 공의회의 열린종교로의 지향성이 그러한 인식을 불러일으키는데 크게 공헌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종교가 과거의 닫힌 모습을 청산하고 열린 모습을 취한다는 것은 진리적인 길에 가까이 하는 것이지 결코 정통에의 모반이나 변절이 아니다. 따라서 열린 모습의 종교가 되는 것은 발전과 성숙의 길일지언정 수치의 길이 될 수가 없다. 화이트헤드가 말했듯이 종교의 정당한 자기수정은 과학과 마찬가지로 발전의 길이다. 제2 바티칸 공의회에서와 같이 행동원리에 있어서도 열린종교로의 발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다원주의적 종교사상과 관련된 것이 그 하나다.

열린종교로 변신함은 현대종교로 재탄생함을 말하는 것이다. 종교는 1. 남의 종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 2. 타종교와의 평화적 노력 3. 사회적 구제나 문제 해결에 대한 상호협력 4. 윤리적 협력 5. 배움과 보충을 하는 열린종교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예에서 열린종교의 길을 반대하는 근본주의자들은 혼합주의의 위험과 모험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대화를 추구하여야 하겠는가? 라고 묻기도 한다. 이에 대해 레오날드 보브신부의 답이 열린종교의 방향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된다. "기독교의 미래는 새로운 혼합주의를 형성하는 그 능력에 달려 있다. ....희랍 로마 게르만 문화에 유래하는 현재의 문화적 표현은 과거의 영광에 속하는 것이다." 어떻게 본질을 크게 손상하지 않으면서 발전적으로 새로운 문화와 지혜를 흡수하고 만남으로서 더욱 힘있고 영향력있는 종교가 될 것인가 하는 것도 열린종교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독일 신학자 판넨베르크는 기독교와 타종교의 관계에 대해 그들은 상호 역사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혼합주의적 동화작용의 최대의 예를 기독교가 제공한다. 기독교는 단지 희랍철학과 결합할 뿐 아니라 지중해 세계와 종교전체를 상속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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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앙 수행상에서 현대종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1. 다원주의종교관의 대두
인류의 정신적 평화와 구제의 양식이 되는 종교가 어떻게 하면 더욱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형태로 인류에게 봉사할 수 있을까? 종교는 절대성이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 목표는 신성한 것이나 인류를 잘못된 투쟁으로 치닫게 하는 경우가 많고 또 편견을 유발시켜 인류의 진로를 부정당하게 인도하지 경우도 적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는 인격을 원만하게 성장시키는데 방해가 되는 부정적인 사상을 넣어주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종교로 인한 전쟁이 인도와 스리랑카 북아일랜드 중동 등지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종교는 인류의 도덕 정신사에 많은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지만 역사적 지역적 문화적인 편견과 어두운 유산을 청산하지 못하여 그것이 인류의 정신계의 문제, 평화의 문제에 장애가 되고 있다. 종교 다원주의는 세계화되고 문명화된 세계를 살아갈 인류가 종교의 전통적인 구제방법론을 더욱 세련된 형태 문명된 형태로 바꾸려는 현대적 접근의 하나이다. 1893년 9월 11일부터 27일까지 세계 최초의 세계종교의회 (The World's Parliament of Religion) 가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되었을 때 그 때 머리인사를 담당했던 성직자 미노트 쎄비지씨는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나는 기독교가 하늘이 보낸 진실한 종교요 다른 종교는 거짓된 종교라고 배웠다. 다른 종교는 기독교보다 덜 발달된 종교이거나 또는 단순히 빈약한 종교에 그친게 아니라 거짓된 종교였다. 밀톤의 실낙원에서는 타락한 천사들이 모든 이방종교들을 만들었고 그들은 신에 속하던 존경을 앞에서 가로채 받아 버리거나 가능한 한 많이 파멸시킬 것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그때문에 역사상에는 처절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따랐고 그것은 종교적 공포와 증오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 축복받은 컬럼버스 기념의 해에 은혜받은 시카고의 도시에서 인류의 전도에 한 전환점을 만드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기독교의 대표 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큰 종교들의 대표들이 평화로운 회의를 위하여 함께 만났다. 전에도 가끔 에큐메니칼한 것으로 자신들을 호칭하는 기독교 세계의 총회가 있기는 했으나 이번의 회의야말로 지금까지 가져보지 못한 최초의 진실한 에큐메니칼한 종교회의이다."

이러한 종교적 편견은 종교적 성자가 아닌 포교 또는 선교역사상에서 부가적으로 추가된 지역적 문화적 편견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다원주의자 죤 힠의 입장을 근간으로 해서 다원주의와 현대종교의 문제를 보려고 한다. 힠은 말한다. 종교와 여러종교들에 대한 개념을 연구함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종교생활을 이해하는 방법을 알리는데 있어 이 한 세대안에 가장 큰 변화를 준 사람은 켄트웰 스미쓰이다. 켄트웰 스미쓰 이전의 견해에 따르면 불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등 역사적 실체나 단체가 존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 종교들은 종교적 생활에 독자적 형태를 취할 수 있는 신념의 틀, 혹은 타종교나 세속의 세계로부터 구별되는 두터운 신념의 벽에 둘러싸여 있다.

그 종교들은 독창적인 신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립적인 사회적 종교적 실체로 나타난다. 따라서 신도들은 배타적인 무리의 성격을 띄게 된다. 또 그들이 제시하는 인류구제에 대한 진리관도 배타적인 성격을 가지며 복수적이다. 일반으로 각각의 종교단체는 자기의 구제의 길만이 진리이고 유일하고 영원한 길이라고 믿고 있다. 자기들 신조의 영적 우월성과 그 신조에 사는 도덕적 우월성과를 과시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그 결과로서 종교간의 상호이해와 대화는 성립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면 어떤 종교가 참된 종교인가?

그런데 종교생활을 이렇듯 폐쇄적 대립적인 관계로 내몰고 그것이 참 종교생활인 것처럼 자의로 생각하는 것이 유일가능한 관점이라고 볼 수는 없다. 켄트웰 스미쓰는 이를 대치하는 비젼을 내놓고 있다.

스미쓰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종교개념이 역사상에 나타난 것은 유럽의 르네상스에 거슬려 올라 갈 수 있다고 본다. 다양한 종교적인 흐름이 구체화한 것은 그때라고 볼 수 있는데 기독교나 유태교 같은 굳은 형태로 나타난 것이 그때다. 전세계를 통하여 다른 역사적인 전통의 맥락 안에서 다양한 형태를 취하면서 역동적인 종교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 있는데 이것이 신앙이다.

이때 이 신앙이라는 의미는 궁극적 신적 실재에 대한 인격적 현재적 반응에 의해 구성된 정신적 상태 또는 실존적 조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 응답의 방식은 우리를 초월하는 것이요, 우리들 존재의 깊이에 있는 것으로 궁극적 신적 실재에 대한 인간존재의 변혁을 뜻한다. 이는 세계중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역동적인 종교적 의미를 가진 사건 혹은 그 과정으로서 이는 여러가지의 종교적 전통에 의해서 가능한 궁극자에 대한 여러가지 다른 이해방식 안에서 다른 형태를 취해 나타나는 것이다. 종교의 형태는 달라도 자기중심이 아닌 이러한 실재중심의 인격적 변혁은 같은 것으로서 이것이 종교의 참다운 본질이요 역동적인 의미를 가진 신앙이다. 신앙의 누적적 전통 이것이 켄트웰 스미쓰에 의해 밝혀진 새분야이다. 그들은 인류사상 독자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고 그 독자적인 흐름 중에서 많은 종교적 문화적 요소가 상호 작용하여 독자적인 형식을 생산하고 힌두교 불교 유교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절대로 정지적인 실체가 아니고, 항상 살아있는 운동체이다. 그것은 절대로 동질적인 것이 아니고 시간과 함께 내재적으로 고도로 다른 것으로 변하였다. 예컨대 석존시대의 불교와 북방전래의 대승으로서의 불교, 혹은 로마 팔래스친에 있어서의 기독교 운동과 유럽에 있어서의 기독교 운동에는 큰 차이가 있다. 또 일본의 선종과 진종, 혹은 미국의 침례교회와 북부 성공회의 사이에는 현재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불교라기 보다 불교적 전통, 기독교라기보다 기독교적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당하다.

이들 누적적 전통은 내적 외적 요소로 만들어지는 내용의 풍부한 복합체로서 신념체계, 생활양식, 성전(聖典)과 주해, 전례, 의식, 신화, 음악, 시가, 건축, 문자, 성전(聖傳), 성인(聖人)을 그 안에 감추고 있다. 이렇듯 전통은 어느 것이나 독자적인 역사와 에토스를 가진 종교문화를 만들어낸다. 예컨대 중국식, 인도식 중동식, 미국식, 유럽식이 있고, 또 그들은 고정되지 않고 상호 작용하며 발전해 가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이것이 종교의 진면목이다. 이러한 관점에 서서 다원주의를 이해하여야 한다. 그런데 한 종교가 다른 종교들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몇가지 형태로 구분되는데 그것이 이른 바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이다.


2-2.  

1) 배타주의 (Exclusivism) --- 구제나 해방은 특정종교 즉 자기종교에만 있고 다른 종교나 교회에는 없다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이다. 만일 구제가 "자기중심에서 신적인 실재중심에의 인간적 생활의 현실적 변혁의 뜻"으로 해석된다면 구제는 특정종교 전통에 국한될 수 없다. .  

2) 포괄주의 (포용주의, Inclusivism) --- 특정 종교가 최종적 혹은 최고의 진리를 가지고 있고 다른 종교들은 그 최종적 진리에 이르는 부분적 혹은 과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배타주의와는 다르게 다른 종교와도 상당히 친화력을 가지고 만나는 종교의 형태이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의 가치를 상당부분 인정하기 때문이다. 구원 또는 구제에 대해서도 또는 사회적 공헌도에 대해서도 다른종교들의 역할을 상당부분 인정하는 입장이다. 다만 자기종교와 다른 종교와는 우열이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다른 종단이나 다른 교단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입장과는 상당히 다르므로 매우 현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이와 같은 입장을 가진 경우가 없지 않고 불교 힌두교 계통의 종교나 근래 기독교계 종교에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칼 라너의 익명의 기독교인이라는 표현이 그에 해당된다. 중국과 한국의 3교 회통론에는 포괄주의적 성격을 가진 것이 많이 있다. 포괄주의적이지만 다원주의적 성격을 더 띄고 있는 3교회통론의 경우도 지적할 수 있다.  

3) 다원주의 (Pluralism) 다원주의는 포괄주의가 향하는 것보다도 한층 전진한 사상이다. 모든 종교는 자아중심에서 실재중심으로의 인격적 존재의 변혁을 뜻하는 구원이나 해방의 길이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정당하게 인정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우열을 앞세우는 태도에서 벗어나 종교의 가치를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입장이다. 즉 모든 종교는 실재자나 구극자에 대한 여러가지의 인식과 개념, 또 그러한 것들에 실존적으로 응답하기 위한 여러 형태의 반응이므로 근본적으로 우열을 가지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본다. 종교는 상황에 따른 장단이 서로 다르고 또 항상 변화가능한 유기체이므로 우열의 판단만 너무 강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여러가지 다른 개념화, 여러가지 다른 종교적 경험의 형태, 신적인 것에 대한 여러가지 다른 인격적 사회적 응답의 형태를 동반하는 종교적 전통의 다양한 차이 등이 인식되어 또한 여기에 매력이 느껴지는 다원주의적 이론이 필요하게 된다. 다원주의적 이론에는 다양한 종교형태에도 불구하고 종교간에 어떤 궁극적 일치점을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 아베 마사오씨가 말한다. 종교다원주의 이론 중 세계종교의 근저에는 "공동본질"이나 "공동분모"가 있다고 동일성을 주장하는 긍정파(힠, 스미쓰, 파티카)와 그 동일성은 추상체라고 비판하며 본질주의를 부정하고 종교의 개별성과 특수성, 차이성을 주장하는 부정파(트뢸취, 죤 캅 등)가 있다고 본다. 그는 이 양극성의 긴장 너머에 있는 제 3의 입장 즉 "입장없는 입장"을 설정한다. 서구철학자나 신학자들 사이에서 주장되고 있는 긍정논리와 부정논리는 모두 공동본질의 유무를 주장하는 서구의 이원론적 분별의 산물로 보고 부정의 체험 즉 공의 체험을 통해서만 진정한 개방성(空)이 나타난다고 본다.
그리고 마사오씨는 동과 서의 세계종교의 만남의 문제를 다음의 세가지로 요약했다. 즉 1.유신론적 신과 절대무의 자각 2. 일치(unity)와 일자(oneness) 3.정의와 지혜라는 시각에서 동과 서의 세계종교는 상호보완되고 상호변혁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아베씨와 달리 WCC 사무국장으로 오랫동안 수고한 벵가로 신학자 스탠리 사마르타는 "한분 그리스트와 많은 종교들" 에서 포괄주의를 넘어선 다원주의에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사마르타는 인도의 베단타철학 특히 상카라의 아드바이타 철학에서 그리스트의 신과 인성의 신비를 쉽게 풀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의 다원주의는 이에서 나오고 있고 사마르타는 神중심 다원주의를 실천중심, 구원 해방 중심 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가촉천민과 해방주의자와 연계).

다원주의에 대해여 죤 웨스터오프는 다양하고 특징적인 공동체 사이에서 공통적인 목적을 위하여 조화적인 상호작용의 원리위에 세워진 사회질서라고 논하고 그 각각은 정체성(identity)과 개방성(openness)을 동시에 가지는 것으로서 미국의 교육역사를 괴롭혀 왔다고 말했다. 그는 믿기를 진정한 다원주의라는 것은 계속적인 위협에 의해 좌절된 유토피아적인 비젼이며 그것은 정체성과 개방성의 두가지를 함께 요청한다고 했다. 종교적인 세계에서의 개방성은 매우 드물게 존재했으며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일반으로 큰 관심을 가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정체성은 위협 속에서 추구되었다. 문제는 종교적인 집단이 진정한 다원주의가 되는 이들 두가지의 특징을 함께 할 수 있느냐 하는데 있다. 마르친 마티는 종교적 다원주의에 대하여 세가지로 정리하였다.(1). 현상적으로는 종교복수현상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뜻하고 (2)..정치적 결단 즉 사람들에게 시민적 평화를 허용하는 정책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넓은 의미에서 어떤 종교 또는 모든 종교집단이 그 사회의 어떤 일반적인 규범이나 표준을 지키는 한 모두 환영하는 정책이다. 특권을 부여받는 집단도 있을 수 없고, 시민적 평화를 지키는 사람에게 반하는 불리한 의무도 있을 수 없다. (3) 철학적으로는 신이나 기타 우주의 근원이 하나라는 일원론을 반대하고 다원론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세번째의 의미는 다원론에서 크게 문제삼지 않는 경향이라고 말하고 종교다원론의 의미는 많은 집단이 서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요점이라 한다.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판니카의 견해를 첨부하자면 다음과 같다.

"종교간의 대화는 상대방을 제압한다든지 서로 합의에 이르거나 어떤 우주적 보편적 종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이상은 자신의 언어로서 자기 고유의 통찰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서로간의 무지와 오해의 심연에 다리를 놓기 위한 의사소통에 있다. 어떤 사람은 서로 연합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나아가려는 목표가 어떤 획일적 일치라든가 인류의 다원적인 다양성을 하나의 종교나 제도, 이데올로기나 전통으로 환원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다원주의는 서로 아무런 관계도 맺고 있지 않은 병행주의와 단일적 통일 모두를 거부한다. 다원주의는 인간이 처해있는 상황이 현재적인 모습 그대로 인정되어야 하며 나아가 인간의 획일화된 상황이라는 이상을 위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와는 정반대로 다원주의는 사실적인 상황을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며 우리들은 인간실존의 현실적인 다양성 속에서 우리들의 참된 존재를 발견한다는 사실을 확증시켜 준다."

헌법상으로 국가종교가 사라진 근대국가에서는 정치적으로 대부분 이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종교 자체에서는 이러한 다원주의 종교개념이 상당한 난점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 주된 이유는 그것이 자체종교 신앙의 상대화와 약화를 초래하고 나아가서는 신앙해체의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종교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원주의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종교의 실체론적 일치에 매우 비중을 두는 입장을 검토해보자.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혹은 실재자(the Real)를 공통적인 것으로 보려고 하면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경우 또는 실천적 기능적 일치의 경우이다. 어떤 경우에도 다원주의는 일치주의 (Ecumenism)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


** 켄트웰 스미쓰(Cantwell Smith) -- 종교를 신조적 중추와 조직으로서의 피부를 가진 방대한 살아있는 유기체(Vast living organism)라 본다. 다양한 종교의 한계와 갈등은 이질적인 문화집단 사이에서 통신수단이 발달되지 않은 역사적 시기에 성립된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와 같은 통신의 통합을 이룬 시대에 있어서는 그러한 문화적 역사적 한계를 넘어서는 종교적 사고가 가능하다. 또 그러한 한계를 넘는데 적합한 상황으로 현대는 가고 있다고 스미쓰는 지적한다. 스미쓰는 인류의 종교적인 삶을 역동적인 연속체로 본다. 연속체의 내부에서 큰 힘, 작은 힘, 새로운 힘을 가지는 영역이 끄는 힘, 배척하는 힘, 흡수, 저항, 보완 등의 복합적인 관계를 나타내면서 어떤 중대한 변동에 의하여 확립되어 가는 것이다. 이런 속에서 위대한 창조적인 종교가 출현하기도 하고 이 계기에 의해서 종교적인 전통이 구별되기도 한다. 그러나 원초적인 종교적 사건이나 관념으로부터 신앙고백의 지주와 제도적인 조직과를 가지는 거대한 살아있는 유기체의 의미로서의 종교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일관성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스미쓰는 문명에 대하여 진리인가 거짓인가의 물음을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역동적인 연속체, 유기체로서의 종교를 참이냐 거짓이냐의 단순한 물음으로 해결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스미쓰는 학자들이 중국의 3교개념과 일본의 양부신도(兩部神道---불교적인 神道는 불교승려들의 神祇觀에 선 것으로 그 대표적인 것은 즉 天台神道와 眞言(밀교)神道가 있다. <兩部習合神道>, 전자는 신들이나 만물의 본체에 근본적 불타<서가여래>를 세우고 후자는 존재의 두요소인 금강계 태장계를 통합하는 우주적 본체 대일여래를 가지고 신들의 본원으로 하고 있다--종교학사전, 동경대, 429쪽 ). 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한다면 종교다원주의의 이해가 크게 증진되리라고 보았다. 스미쓰는 종래의 기독교 신학의 개념을 넘어서서 비교종교까지를 수용하는 세계신학(A World theology)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다. (Toward world theology -- faith and comparative history of religion by Wilfred Cantwell Smith)
** 죤 힠(John Hick) -- 외관상의 차이와 달리 종교의 본질적 차이는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대화를 통해서 종교는 만날 수 있다. . 죤 힠에 의하면 종교의 우주는 기독교 중심도 그리스도 중심도 아니고(christocentric) "신적 실재"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the eternal one을 중심으로 한 theocentric theology) 모든 종교는 "신"(부득이 부친 이름이요 불교의 다르마까지 포함한다. )이라는 태양과 관계하는 다양한 양식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햇빛을 반사하고 있다.({신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에서) 힠에 의하면 위대한 종교들은 동일한 궁극적 실체에 대한 인류의 다양한 반응이며 종교간에 다름이 있는 것은 궁극적 실체를 경험하는 인간의 의식이 각기 다른 역사적 문화적 전통속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힠의 종교다원주의 신학, 지구적 신학(Global theology) 이요 종래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기독교를 변화시키고 있는 에큐메니즘의 정신은 범 지구적 에큐메니즘(ecumenism)이 되어 종교간의 관계는 한 종교의 종파들과 같은 위치가 될 것이며 하나의 신령한 실체에 대한 공동의 믿음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힠은 믿고 있다. 힠은 다원주의가 가지는 상대주의를 막기 위해 종교간에 우열의 차이가 있음은 부인하지 않고 개별적 종교현상에 대해서는 종교를 평가할 수도 있다고 보나 고등종교 전체의 복합적인 현상을 쉽게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 라마 크리슈나 -- 나는 모든 종교를 실천했다.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나는 인도 의 여러종파의 길을 걸었다. ...모든 종교는 다른 길을 통하여 같은 신에게 향한다는 것을 알았다....모든 사람이 종교의 이름으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본다....얼마나 웃기는 일이냐? ...실제는 하나이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각자는 동일한 실재를 찾고 있다. 다만 기후와 기질과 이름이 다를 뿐이다.

** 간디 -- 모든 종교는 바다로 이르는 여러개의 강이다. -- 모든 종교는 한 나무의 여러개의 가지와 같다. -- 모든 종교는 평등하다. 그렇게 대하면 내주위에 끓는 전쟁이 없이 살 수 있다. -- 나는 타의 성인들의 말씀을 나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비판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똑같이 존경의 정신을 가지고 대하니 많은 도덕적 일치를 보았다. -- 모든 종교에 까려 있는 일치점을 보려고 하면 큰 표준이 있는데 그것은 진리와 비폭력이라는 것이다. -- 그 잣대로 보면 모든 종교는 비슷하다. 힌두교의 진수를 말한다면 그것은 비폭력을 통한 진리추구라고 말할 수 있다.

** 최치원의 난랑비서에 "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內含三敎, 接化群生,且如入卽, 孝於家, 出卽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

** 서산대사의 3가귀감에 "一物이 여기에 있다. 본래 소소영영하여 생멸이 없고 명상을 떠나 있다. 이것은 하나의 원(圓)으로 표현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각선사는 옛부처님이 나시기 전에 응연히 일원상(一圓相)의 진리가 있었음을 말한다. 그 경지는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하다. 3 교의 성인이 이 진리에 근거를 두고 성인이 되어 교화의 문을 열었다." 고 되어 있다.

** 미국인들의 가치관과 종교관을 조사하는 바르나보고서(Barna Report,1991)는 기독교인, 유태교인, 이슬람교인, 불교인 기타의 종교인들을 막론하고 기도를 올릴 때 그 부르는 명칭에 관계없이 기도의 응답자는 같은 것으로 보는가? 라는 설문에 대하여 성인남녀의 64%가 긍정적으로 답하고 있다. 그중 37%는 강하게 찬성하고 반대의 의견을 밝힌 경우는 27%이며 나머지 10%는 잘 모르겠다고 답하고 있다.(210쪽 참고) 거부감없는 공통명칭이 필요하지 않을까? 예 :우주신령님 (불성, 하느님, 알라, 태극,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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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교다원주의에 있어서의 문제  

우리는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다원주의 종교를 받아 드리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이 한국의 최근세 신종교들이 외친 우주적 세계적 개벽의 외침과 일련의 연관을 가지는 문명사적 새로운 전환기에 우리는 들어와 있다. 유엔과 유럽공동체 등의 출현, 종교연합협력 운동 등의 출현도 열린 시대의 증후를 나타내는 소식이다. 그러나 다원주의가 열린 종교성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지만 신앙생활, 수행실천력, 교화포교력(선교력)에서 동시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미래의 과제가 된다. 자기종교의 우수성에 대한 인식과 판단도 신앙 수행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요건이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포괄주의의 편견을 초월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른 종교에 대하여 과도히 편협한 비판을 앞세우지 않고 폭넓은 인식과 이해를 우선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종교에 대한 무조건적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일이 종교다원주의에 있어 필수는 아니다. 종교다원주의에 중요한 것은 종교가 진리적인 공통원리( 궁극적 실체) 또는 실천적 기능적 공통원리에서 서로 만나고 일치하면서 자기정체성을 살려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3가귀감의 3교 일치론에서 나타난 일원상의 궁극적 실체를 중심으로 3교의 특성을 세우는 일과 원불교가 일원상의 궁극적 실체를 중심으로 모든 종교를 이해하려는 일과 스미쓰가 궁극적 신적 실체를 근원으로 하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종교를 이해하려는 일과 힠이 역시 신적인 궁극자 중심으로 종교를 이해하여 자기종교인 기독교를 그러한 공통원리 실현의 특성화된 하나의 방편적 조직으로 인식하려는 입장은 일맥상통한 바가 있다. 자기종교의 방편이나 특성화는 부인할 것도 없고 부인되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항상 보다 높은 차원의 우주적 진리에 입각해서 우주적 정신으로 하지 않으면 결코 열린 종교가 될 수 없고 열린 세계를 만들어낼 수도 없다. 종교들까지를 연속적인 살아있는 유기체로 껴않는 정신은 미래 문명인 열린시대 개벽시대에 맞는 열린종교의 진정한 모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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