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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6 (19:05) from 211.212.69.10' of 211.212.69.10' Article Number : 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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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뱅의 생애와 그가 남긴 유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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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주님께 바칩니다.”
: 칼뱅의 생애와 그가 남긴 유산들


박경수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역사신학)


I. 칼뱅의 생애

올해 7월 10일은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이 태어난 지 정확하게 500년이 되는 그의 생일이다. 칼뱅은 중세 로마가톨릭의 폐해를 비판하면서 교회의 개혁을 주창했던 프랑스 출신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로, 그의 개혁사상은 오늘날 유럽에서는 개혁교회 전통으로, 미국과 한국에서는 장로교회 전통으로 계승되고 있다. 그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고국인 프랑스와 사역지인 제네바를 위시한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기념행사들을 치르고 있다. 한국에서도 칼뱅 탄생 500주년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그의 사상을 돌아보고 그가 남긴 유산들을 계승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네바에 도착하기까지(1509-1536)

칼뱅은 프랑스 북부의 작은 마을 누아용(Noyon)에서 1509년 7월 10일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성당 참사회 일원으로 교회재정을 관리하는 일을 했고, 어머니는 경건한 여인이었지만 칼뱅이 어릴 때 죽었다. 칼뱅은 14살이 되던 1523년에 파리의 마르슈 대학에 입학하여 라틴문법과 수사학을 배우다가 얼마 후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1528년 초에 오를레앙 대학으로 가서 레스투알에게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1529년 여름에는 부르주 대학으로 옮겨서 알치아티에게서 법학과 인문학을 배웠다.
칼뱅이 언제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로 회심했는지, 또 그의 회심이 갑작스러운 것이었는지 점진적인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대체로 1533년 전후에 회심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 만일 1533년 11월 1일 만성절에 파리 대학 신임총장 니콜라스 콥이 연설한 종교개혁적인 성격의 연설문 작성에 칼뱅이 관여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그때 이미 프로테스탄트 사상으로 회심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칼뱅은 파리를 떠나 피신해야만 했었다. 그 후 파리에서는 1534년 10월에 가톨릭의 미사를 비방하는 플래카드가 시내 사방에 나붙는 일이 발생해 프로테스탄트는 한층 더 박해를 받게 되었다.
칼뱅은 바젤에 머물면서 프랑스의 박해받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변호하고자 유명한 󰡔기독교강요󰡕를 집필하기 시작해 1536년 3월 출판하였다. 당시 칼뱅은 스트라스부르로 가던 중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전쟁으로 인해 길이 막히자 우회하기 위해 제네바에 들렀다. 그때 제네바는 막 가톨릭 신앙을 떠나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받아들였던 차였다. 당시 그곳에서 종교개혁 운동을 펼치고 있던 기욤 파렐은 󰡔기독교강요󰡕의 저자가 제네바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밤중에 찾아가 칼뱅에게 제네바의 종교개혁 운동에 동참해 줄 것을 강권하였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완강하게 거부하던 칼뱅은 파렐이 하나님의 저주를 들먹이면서 압박하자 결국 운명의 도시인 제네바의 사역자가 되기로 마음을 정한다.

제네바 1차 사역(1536-1538)

칼뱅은 제네바의 생피에르(St. Pierre) 교회에서 성서를 가르치는 교사로 시작하여, 얼마 후에는 목회자로 사역하였다. 칼뱅과 제네바의 목회자들은 제네바 교회의 개혁을 위해 󰡔신앙고백과 규율󰡕과 󰡔요리문답󰡕을 작성하였고, 이 문서들은 1537년 1월 16일 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이에 따라 제네바의 모든 거주민들은 신앙고백서에 서명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제네바의 토착세력들은 외부에서 온 목회자들이 주도하는 개혁운동에 강한 불만을 표출하면서 신앙고백서 자체를 거부하였다. 여기에 정치적인 문제까지 더해졌다. 제네바가 가톨릭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던 베른이 제네바의 과격한 개혁을 반대하면서, 제네바 교회가 이미 폐지한 축일, 세례반, 성찬식에서의 무교병 사용 등의 관습을 복원하라고 요구해 온 것이다. 정치적인 빚을 지고 있던 제네바 의회는 베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1538년 2월 선거에서 토착세력들이 승리함에 따라 칼뱅을 비롯한 목회자들의 입지는 좁아지게 되었다.
칼뱅과 파렐은 개혁을 위해서는 복음에 합당하지 않게 생활하는 사람들과 신앙고백에 서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성찬을 베풀 수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제네바 의회는 1538년 부활절 성찬식을 베른의 의식에 따라 거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4월 21일 부활절에 목회자들이 개혁을 요구하는 강력한 설교를 하고 성찬을 베풀지 않자, 의회는 바로 다음 날인 4월 22일 칼뱅과 파렐을 면직시키고 3일 안에 제네바를 떠날 것을 명하였다.

스트라스부르 사역(1538-1541)

제네바를 떠나 얼마간 바젤에서 머물던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의 초청으로 1538년 9월 초에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거기서 칼뱅은 프랑스 피난민들이 모인 교회의 목회자로 일하면서, 스트라스부르 아카데미에서 신약성서를 가르치는 책임도 맡았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던 이 시기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회고한다. 1540년에는 부처의 중매로 이들레트 드 뷔르(Idelette de Bure)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지만, 안타깝게도 이들레트는 1549년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면서 󰡔기독교강요󰡕 개정판(1539)과 󰡔로마서주석󰡕(1540)을 내놓았고, 성만찬에 관해 격한 대립을 보이고 있던 루터주의자들과 츠빙글리주의자들을 중재하는 󰡔성만찬에 관한 소논문󰡕(1541)을 발표하였으며, 제네바 시민들을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의도로 로마 추기경 사돌레토가 보낸 편지를 반박하는 탁월한 답변서를 쓰기도 하였다. 이처럼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목사, 교수, 저술가, 중재자로서의 바쁜 일상을 보내었다.
칼뱅이 스트라스부르에 머문 지 3년 만에 제네바 교회가 다시 그를 청하였고, 이때 칼뱅은 제네바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백번이고 십자가를 지는 편이 더 낫다면서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파렐과 부처를 비롯한 동료들이 제네바 교회를 위해서 칼뱅이 꼭 필요하다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또 다시 강권하자, 결국 칼뱅은 자신의 뜻을 꺾고 제네바 행을 결심하면서 파렐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만일 나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제네바로 돌아오라는 당신의 요구만은 정말 거절하고 싶지만,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님을 돌이켜 생각하여 주님께 제물로 바치듯 내 마음을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 드립니다.” 그리하여 마음을 바치는 손이 있는 그림이 칼뱅의 문장(紋章)이 되었다.

제네바 2차 사역(1541-1564)

제네바가 개혁교회의 요람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541년부터 1555년까지 적어도 14년 동안 칼뱅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과 같은 험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칼뱅을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제지를 받으면서도 모든 난관을 뚫고 칼뱅은 󰡔교회법령󰡕을 마련하여 예배의식과 교회의 제반 관습들을 개혁하고, 목회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치리기구인 컨시스토리(Consistory)를 만들어 도덕을 바로세우고, 신학적 논쟁들을 통해 올바른 사상을 수립하고, 제네바아카데미를 통해 교육을 개혁하고, 종합구빈원과 프랑스기금을 통해 사회복지를 실천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제네바를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도시로 만들어 나갔다. 그 결과 1556년 제네바를 방문했던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John Knox)는 제네바를 보고 “사도 시대 이후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의 학교”라며 감탄하였다.
칼뱅은 1564년 5월 27일 숨을 거둘 때까지 제네바의 목회자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지도자로, 교육자로, 신학자로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감당하였다. 칼뱅이 끼친 영향은 단지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구 사회 전체에 걸친 광범위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 바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칼뱅의 󰡔기독교강요󰡕 맨 마지막에 있는 문장, “하나님을 찬양하라”(Laus Deo)는 그의 사상의 원천이자 삶의 목표였다. 칼뱅은 죽었지만 아직도 그의 사상과 정신은 온 세계 곳곳에 살아 있다.


II. 칼뱅의 󰡔기독교강요󰡕

Johann Wilhelm Baum, August Eduard Cunitz, 그리고 Eduard Reuss는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라는 제목으로 칼뱅저작들을 묶어 내었는데, 59권으로 이루어져 있다(1863-1900). 이것을 󰡔칼뱅전집󰡕(Calvini Opera)이라고 부르는데, 대부분의 학문적인 저작들에서 이 책은 CO라는 약어로 명명된다. 그런데 이것은 멜란히톤이나 츠빙글리의 저작들까지 담고 있는 󰡔종교개혁총서󰡕(Corpus Reformatorum)의 29-87권에 해당하기 때문에, 칼뱅의 저작들은 때때로 약어 CR로 불리기도 한다(CR 29는 CO 1에 해당한다). 또한 Peter Barth, Wilhelm Niesel, 그리고 Dora Scheuner는 5권으로 된 󰡔칼뱅저작선󰡕(Johannis Calvini Opera Selecta, Munich, 1926-52)를 선보였는데, 통상 OS로 인용된다. 최근에는 미간행 칼뱅의 설교 원고가 󰡔칼뱅전집보충󰡕(Supplementa Calviniana)이라는 명칭으로 편집되어 출간되고 있는데, 현재 1, 2, 5 ,6, 7권이 나왔고 모두 출판되면 670편의 설교가 기존의 󰡔칼뱅전집󰡕에 추가될 것이다.

󰡔기독교강요󰡕(1536)

1533년 말 혹은 1534년 초에 칼뱅은 상당 기간 동안 샤를 데스페빌이라는 가명으로 남부 프랑스에서 클레의 목회자이자 앙굴렘 대성당의 참사회 의원이었던 루이 뒤 티예의 집에서 머물렀다. 거기서 칼뱅은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뒤 티예의 이례적으로 넓은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더욱 깊은 연구와 󰡔기독교강요󰡕 초판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칼뱅은 1535년에 초판을 완성하였다. 초판은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1535년 8월 23일자 편지로 시작하고 있다. 편지에서 칼뱅은 󰡔기독교강요󰡕를 통해 사람들이 얼마간의 지식이라도 갖출 수 있도록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제공하려 한다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칼뱅이 󰡔기독교강요󰡕를 쓴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가르쳐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보다 쉽게 접근하고 또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말씀 안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기독교강요󰡕는 성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지침서가 되고자 하는 소박한 목적을 가진 책이었다. 따라서 칼뱅이 󰡔기독교강요󰡕에서 의도한 것은 하나의 거대한 신학적 체계를 세우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성서의 의미를 밝히려는 것이었다.
칼뱅은 또한 프랑스에 있는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위해 󰡔기독교강요󰡕가 왕에게 신앙고백적인 변호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프랑스에서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재세례파 반역자들과 동일시되어 심하게 박해를 받고 있었다. 전통적인 가톨릭인들(Johannes Cochlaeus, Robert Ceneau)과 기독교 인문주의자들(Guillaume Budé, Cardinal Sadoleto)도 비슷하게 그들의 저작들에서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재세례파 선동가들과 동일시하였다. 칼뱅은 󰡔기독교강요󰡕로써 왕에게 종교개혁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의 동기에 대해 알리고자 하였다. 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칼뱅은 재세례파에게서 스스로 거리를 두면서,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들에게 가해진 비난들에 대해 논박하고 있다.
󰡔기독교강요󰡕 라틴어 초판은(CO 1:1-252; OS 1:11-283) 1536년 3월 바젤에서 플라터(Thomas Platter)와 라시우스(Balthasar Lasius)에 의해 출판되었다. 전체 제목은 “모든 경건의 개요와 구원의 교리를 아는 데 필요한 기독교의 가르침: 경건에 열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읽힐 만한 가치가 있는 최근의 저서”였다. 이처럼 긴 제목은 당시에 매우 흔했는데, 그렇게 하는 의도는 제목이 책을 분명하게 설명해서 호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기독교강요󰡕의 제목은 이 책이 전체적인 경건의 개요를 제공하고, 구원의 교리에 관해 꼭 알아야 하는 모든 것들을 기술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제목은 또한 새로 출판된 이 책이 경건을 이루고자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꼭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칼뱅은 거룩한 교리의 전체 총합은 두 부분,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함으로써 󰡔기독교강요󰡕를 시작하고 있다. 칼뱅은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고안해 낸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고 말한다. 1536년 10월 13일 오를레앙에 있던 프랑수아 다니엘에게 보낸 편지에서, 칼뱅은 󰡔기독교강요󰡕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려는 계획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프랑스어 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칼뱅이 󰡔기독교강요󰡕를 집필했을 때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자료들은 무엇이었을까? 형식면에서 󰡔기독교강요󰡕는 요리문답과 유사하다. 책의 구성에 있어서, 특히 처음 네 장의 순서에 있어서 칼뱅은 루터의 1529년 󰡔소요리문답󰡕을 따르고 있다. 이 장들에서 중세시대의 관례대로 칼뱅 또한 율법, 사도신경, 주기도문, 그리고 성례(세례와 성만찬)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책의 변증적인 성격은 다음 두 개의 장, 즉 남아 있는 다섯 개의 (잘못된) 성례들에 관한 장과,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와 국가, 영적인 그리고 세속적인 정부에 대한 기독교적 가르침에 관한 장에서 알 수 있다.
우리는 󰡔기독교강요󰡕의 형식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서도 루터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다. 칼뱅은 1520년에 루터가 쓴 가장 중요한 저작들(예를 들어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주는 글󰡕이나 󰡔교회의 바벨론 포로󰡕)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다른 저작들도 이용하였다. 또 칼뱅은 멜란히톤, 부처, 츠빙글리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강요󰡕(1539, 1541)

칼뱅은 제네바에서 추방되고 나서 라틴어 󰡔기독교강요󰡕 제2판을 쓸 기회를 갖게 되었다. 1539년 8월 1일에 그는 새로운 판의 서문을 작성했으며, 제2판은 초판보다 3배나 많은 분량으로 스트라스부르에서 출판되었다. 많은 사본들이 로마 가톨릭 영토 내에 배포되어야 했기 때문에 칼뱅의 필명인 알쿠이누스(Alcuinus)라는 이름으로 인쇄되었다. 제2판은 학생들로 하여금 성서적 교리의 중요한 요점들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해주는 교리적 안내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책은 이제 전반적으로 초판을 보충하기 위해 내용을 확대했기 때문에 17장으로 구성되었다. 특별히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관계에 관한 장, 유아세례에 관한 항목, 교회에 관해 쓰고 있는 것들로 미루어 볼 때, 칼뱅이 스트라스부르에서 재세례파와 상당한 접촉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칼뱅은 그 도시의 시민이 되기 위해 재단사 길드에 가입했었는데, 그 조합의 많은 사람들이 재세례파에 속해 있었다. 󰡔기독교강요󰡕 제2판에서는 1536년에 이미 로마서주석을 출간했던 부처의 영향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칼뱅은 라틴어를 읽지 못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1539년 판 󰡔기독교강요󰡕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번역판은 칼뱅이 제네바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541년 출판되었다. 당시 라틴어판과 프랑스어판 모두 프랑스에서 정죄를 받았으며, 파리의회는 누구라도 󰡔기독교강요󰡕를 소지하고 있으면 보고해야 한다는 명령을 담은 칙령을 1542년 7월 1일 발포하였다. 최근 프린스턴 신학교의 엘시 맥키가 1541년 프랑스어 판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기독교강요󰡕(1543, 1545)

새로운 󰡔기독교강요󰡕 라틴어판이 1543년에 나왔다. 4개의 장들이 덧붙여져 전체가 21개의 장이 되었다. 새로운 󰡔기독교강요󰡕에서는 수도원 생활에 관한 장이 포함되었고, 사도신경에 대한 논의가 네 개의 장으로 확장되었고, 사도신경의 교회에 대한 조항이 보다 상세하게 취급되었으며, 직책들의 신학적 기초에 대한 광범위한 항목도 포함되었다. 이 책의 프랑스어 번역판도 1545년 제네바에서 출간되었다.

󰡔기독교강요󰡕(1550, 1551)

1550년 봄에 라틴어 󰡔기독교강요󰡕 제4판이 제네바에서 나왔다. 1550년 판은 이전에 비해 부피 면에서 더 두꺼워졌다. 다른 것들과 함께 양심에 관한 설명이 추가되었다. 칼뱅은 또한 숫자를 매긴 단락들로 자료를 정리해서 각 장별로 나누었다. 이 책의 프랑스어 번역판이 1551년 선을 보였다. 1551년의 번역판은 1550년 라틴어판에 몇 가지를 보충하였는데, 특히 육체적인 부활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1549년 칼뱅과 소키누스(Laelius Socinus)의 서신교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보충자료는 결국 1559년 라틴어판에 포함되었다.

󰡔기독교강요󰡕(1559, 1560)

1559년 8월 1일, 칼뱅은 󰡔기독교강요󰡕 최종판의 서문을 작성하였고, 이 책은 같은 해에 출판되었다. 그는 또한 1560년에 프랑스어 번역판도 출간하였다. 칼뱅은 서문에서 1558-59년 겨울에 중병에 걸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칼뱅은 이전에 낸 󰡔기독교강요󰡕들에 완전히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판을 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1559년의 최종판과 그 이전의 판들의 형식적인 차이는 놀라울 정도이다. 1559년 󰡔기독교강요󰡕는 4권 8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은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루고 있고, 제2권은 그리스도 안의 구속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루고 있는데, 이 지식은 먼저 율법 아래 있던 조상들에게 계시되었고 그 후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도 드러나게 되었다. 제3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과 거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유익들, 그리고 그에 따르는 효력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제4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교제 안으로 초대하고 그 안에서 우리를 보존하시는 외적인 수단들과 방편들에 대해 다루고 있다.
󰡔기독교강요󰡕 최종판의 내용은 이전 판의 내용을 넘어서서 다시 확장되었다. 이 점은 제목에서도 분명한데, 제목은 이 책이 권과 장들로 구분되었음을 말해줄 뿐 아니라, 자료가 많이 보강되어 거의 새로운 책이라 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해 주고 있다. 자료의 확장에 관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칼뱅이 다른 사람들과 나눈 교리적인 논쟁들의 영향을 간파할 수 있다. 루터주의자들, 특히 성만찬을 둘러싼 베스트팔과의 논쟁,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고 칭의에 관한 오지안더(Andreas Osiander)와의 논쟁, 그리고 그리스도의 공적과 죽은 자의 육체적 부활에 관한 소키누스와의 논쟁과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칼뱅은 또한 인간이 타락하여 죄를 범하게 된 것과 자유의지의 상실과 같은 특정주제들에 대한 자료도 증보하였다.

‘경건의 대전’, 󰡔기독교강요󰡕

존 맥닐은 칼뱅의 󰡔기독교강요󰡕를 “역사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꾼 책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 바 있다. 칼뱅의 전 생애는 이 책을 개정하고 확장하는 일에 바쳐졌다. 이런 󰡔기독교강요󰡕의 목적은 경건의 진작을 위한 책이었다. 󰡔기독교강요󰡕의 영어 번역자인 베틀즈(Ford Lewis Battles)는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칼뱅이 직업적인 신학자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영성이 깊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체계적인 사고를 하는 데 특별한 재능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신앙의 함의들을 기술하고자 하는 충동에 따라서 󰡔기독교강요󰡕를 썼다. 그는 자신의 󰡔기독교강요󰡕를 ‘신학의 대전’(summa theologiae)이 아니라 ‘경건의 대전’(summa pietatis)이라고 부른다. 칼뱅의 정신적 에너지의 비밀은 그의 경건에 있었다. 그의 경건의 산물이 그의 신학이었으며, 그의 신학에서 그의 경건은 충분히 표현되었다.” 칼뱅이 거대한 조직 신학 책을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경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기술하고자 하였음을 잘 지적해 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칼뱅의 의도는 󰡔기독교강요󰡕 초판(1536) 제목(“모든 경건의 개요와 구원의 교리를 아는 데 필요한 기독교의 가르침: 경건에 열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읽힐 만한 가치가 있는 최근의 저서”)에서도 우리는 분명히 칼뱅의 󰡔기독교강요󰡕가 신학이 아니라 경건의 진보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베틀즈는 그의 서문에서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헌터(A. Mitchell Hunter)의 글을 인용하고 있는데, 헌터에 따르면 “경건이야말로 칼뱅이라는 인물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핵심이다. 그는 하나님께 붙잡힌 영혼이었다. 그는 신학 그 자체를 공부하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가 신학에 헌신한 것은 그것이 신앙의 의미를 지지해 주는 뼈대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칼뱅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 경건이라는 단어가 180회 이상이나 나오는 데 대해서 하등 놀랄 이유가 없는 것이다.


III. 칼뱅이 남긴 유산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 바로 칼뱅이다. 루터의 영향이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덴마크ㆍ노르웨이ㆍ스웨덴)에 국한되었고, 츠빙글리의 사상이 취리히와 스위스 몇몇 도시들에 영향을 미친 것에 반하여, 칼뱅의 사상은 제네바를 위시한 스위스 지역은 물론이고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폴란드 등의 유럽 전역으로 뻗어나가 뉴잉글랜드를 거쳐 한국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 오늘날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라고 불리는 전통은 대부분 칼뱅에게 의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영향력은 단지 신학과 교회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방대한 영역에까지 미쳤다. 칼뱅주의야말로 국제적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 사상의 완성자

시기적으로 보자면 칼뱅은 종교개혁 1세대였던 루터나 츠빙글리보다 한 세대 뒤에 활동한 2세대 종교개혁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칼뱅은 처음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시작한 루터나 츠빙글리보다 더 큰 틀에서 객관적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위상을 조망할 수 있었고, 앞선 선배들이 드러낸 약점들을 보완하고 종합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칼뱅이 넓은 안목으로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종합하려고 했다는 것은 다음의 몇 경우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첫째로, 칼뱅은 성만찬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던 루터주의자들과 츠빙글리주의자들을 중간에서 화해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칼뱅은 루터의 정(thesis)과 츠빙글리의 반(antithesis)을 조화시켜 하나의 합(synthesis)을 만들고자 하였다. 다시 말하면 칼뱅은 영적 임재설로써 루터의 육체적 임재설과 츠빙글리의 상징설을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성만찬에 관한 소논문󰡕과 󰡔취리히합의󰡕가 칼뱅의 이런 노력을 보여주는 결과물들이다. 둘째로,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너무 강조한 결과, 프로테스탄트는 사랑의 행함이나 거룩한 삶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믿음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고 가르친다는 온갖 오해와 억측이 생겨난 측면이 있는데, 칼뱅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더불어 거룩한 생활을 통한 성화를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결코 편향된 가르침이 아니라 균형 잡힌 사상임을 부각시켰다.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신학적으로 주장한 점, 신앙고백과 성만찬 참여와 더불어 거룩한 삶이 성도의 표지가 된다고 주장한 점, 그리고 󰡔기독교강요󰡕에서 칭의보다 성화를 먼저 다루고 있는 점 등은 칼뱅이 성화를 얼마나 강조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칼뱅을 ‘성화의 신학자’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셋째로, 루터가 개인의 구원에 관심을 둔 반면에, 칼뱅은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와 세상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면서 사회와 정치의 유기적인 구조들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가 2세대 종교개혁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신학적 종합이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칼뱅을 종교개혁 사상의 완성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신학자

칼뱅의 사상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돋보이는 것은 단연 교회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실상 루터나 츠빙글리 같은 1세대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의 교회론과 구별되는 프로테스탄트의 교회론을 만들어 낼 여유가 없었고 또 그럴 의지도 없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한 세대가 지나면서 이제 로마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분리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자,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위한 독자적인 교회론이 요청되었다. 이 필요성에 부응한 사람이 바로 칼뱅이다. 칼뱅의 주저인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교회론 부분이고, 우리는 여기서 그가 프로테스탄트 교회론을 확립한 신학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는 교회의 표지인 말씀과 성례에 대해서, 교회를 지탱하고 성도를 세우는 권징에 대해서, 목사ㆍ교사ㆍ장로ㆍ집사로 이루어지는 사중직제에 대해서, 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의지할 수 있는 표준들을 세워놓았다. 칼뱅의 평생의 관심은 ‘참된 교회’였다. 그는 무엇이 참된 교회이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붙들고 평생을 씨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칼뱅이 󰡔기독교강요󰡕 서문에서 “내가 교회에서 교사의 직책을 맡은 이후, 나는 교회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을 가진 적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데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교회를 사랑한 사람이었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칼뱅에게 있어서 참된 교회로 나아가기 위한 첫 단추는 예배의 회복이었다. 칼뱅은 사도행전 2장 42절의 말씀,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는 말씀 안에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는 것이요, 서로 교제한다는 것은 성도 간의 섬김과 세상을 향한 구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떡을 뗀다는 것은 성만찬이 거행된다는 것이며,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칼뱅은 말씀선포, 구제, 성만찬, 기도(찬양)가 예배의 네 요소라고 보았다.
예배에서의 찬양과 관련하여 그는 회중들이 함께 부르는 시편찬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는 신자들은 찬송을 부르지 않고 성직자들만 라틴어로 찬송을 불렀다. 하지만 칼뱅은 신자들이 모두 함께 자신들의 언어로 노래하는 회중찬양을 옹호하였다. 더욱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는 시편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편찬송을 선호하였다. 그리하여 1539년에 󰡔제네바시편찬송가󰡕를 처음으로 출간하였다. 여기에 18곡의 시편찬양이 수록되었는데, 그 중 6곡에 칼뱅 자신이 직접 가사를 붙일 만큼 이 일에 열정을 보였다. 󰡔제네바시편찬송가󰡕는 그 후에 계속 증보되어 1562년에는 시편 전체가 찬양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예배에서 찬양이 중요한 이유는 찬양이 성도들로 하여금 기도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묵상하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고, 영화롭게 하도록 그들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교회 최초의 신학교였던 제네바아카데미(1559년 설립)의 교육과정에는 수업이 있는 날이면 언제나 매일 1시간씩 시편을 노래하는 시간이 있었다. 이와 같이 예배시간에 시편을 찬양하는 것은 개혁교회가 세워진 곳이면 어디서나 특징적인 전통이 되었다. 한국장로교회의 최초 찬송가인 󰡔찬셩시󰡕(1895년)의 재판(1898년)에도 총 84곡 중에 시편찬송 14곡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찬송가에는 시편찬송이 대부분 제외되어 있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경건과 학문”을 강조했던 교육자

1536년 제네바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칼뱅은 교육을 강조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기독교 신앙과 삶에서 대단히 근본적이고 핵심적이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완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칼뱅이 교사를 교회의 영속적인 직제 가운데 포함시키고 있는 데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교육을 중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칼뱅은 󰡔교회법령󰡕(1541)에서 이미 고등교육 기관의 필요성을 명백하게 표현했지만, 그 계획을 실제로 실현시키는 데는 무려 18년이나 걸렸다. 1559년 6월 5일 마침내 칼뱅이 목회하던 생피에르 교회에서 제네바아카데미가 공식적으로 개교하였다. 제네바아카데미는 종교개혁 사상, 특히 개혁교회 전통을 온 유럽으로 전파하는 요람이었다. 유럽 각 나라의 지도자들이 제네바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배운 개혁교회의 이상을 실현하였으며, 이를 통해 개혁교회 전통은 명실상부 국제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네바아카데미의 교육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인문학과 교양에 대한 강조였다. 아카데미의 교과과정에는 성서에 대한 교육과 더불어 수많은 고대 작가들의 작품들을 필두로 수사학과 자연과학과 같은 과목들이 포함되었다. 신학과 더불어 인문학과 교양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은 특별계시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제네바아카데미의 또 다른 특징은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교육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네바의 개혁자 칼뱅의 특징이기도 하다. 칼뱅은 지적인 호기심만을 충족시키려는 추상적이고 무익한 지식이 아니라, 인문주의에 기초한 유용하고 실천적인 지식을 추구하였다. 그는 교회를 살리고, 신자들에게 경건한 열망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지식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네바아카데미는 교회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교회와 신학교는 결코 분리된 기관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긴밀하게 연관된 하나님의 기관이었다.
제네바아카데미의 인문학과 교양학문에 대한 강조는 오늘의 신학교육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신학이 좁은 울타리에 갇힌 파편화된 학문이 아니라 보편성을 가진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일반 학문과의 교류가 필요하다. 목회자가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도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은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신학교육도 더욱 더 간학문적인(interdisciplinary) 방향으로 가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학교와 교회가 연결망을 형성하여 이론과 실천이 서로를 보완하고 수정해 갈 수 있도록 협력하고 노력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과제이다.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추구한 활동가

칼뱅의 개혁운동은 교회와 학교에 머물지 않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는 “민주정치에 근접하는 귀족정치”를 제안함으로써 민주주의로의 길을 예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널리 알려진 대로 베버(Max Weber)는 그의 “직업 소명설”과 “세상 안에서의 금욕주의” 사상이 근대 자본주의 정신 형성에 기여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비록 베버가 칼뱅의 사상과 칼뱅주의를 구별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한 측면이 있어 그의 주장을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일고 있지만, 칼뱅이 경제 문제에도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음이 베버의 주장을 계기로 분명하게 밝혀진 것만은 사실이다. 실제로 칼뱅은 이전까지 금기시 되던 이자 문제에 대해서도 유연하고 독창적인 입장을 보여,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닌 생산을 위한 대출의 경우에는 이자를 부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전에는 터부시되던 상업의 가치를 인정하였으며, 노동과 임금 문제에 대해서도 전향적인 의견을 개진하였다.
특히 칼뱅은 부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해 고통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부자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라고 위탁하신 것임을 알고 선한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다하라고 강력하게 설교하였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복지기관을 만들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복지사역을 벌이기도 하였다. 칼뱅은 제네바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사회복지 기관인 종합구빈원(General Hospital)에 대한 성서적 전거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봉사하던 구빈원장과 행정관들을 교회와 긴밀히 연결시키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또한 종합구빈원만으로는 복지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따로 프랑스기금(Bourse Française)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프랑스기금은 주로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망명을 온 피난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기구였다. 칼뱅은 프랑스기금의 형성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고, 그 자신이 정기적으로 기부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기금의 도움을 받을 것을 권하였다. 1554년 7월 1일에는 프랑스기금을 관리하는 집사들을 선출하기 위한 모임이 칼뱅의 집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칼뱅을 중심으로 한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면에서도 제네바에 진정한 혁명을 가져왔다.

칼뱅 넘어서기

역사의 방향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런데 칼뱅은 서구 역사에 매우 깊은 흔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역사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사건을 일으킨 인물이다. 칼뱅이 서구 그리스도교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프로테스탄트 진영만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 학자까치도 인정하고 있다. 가톨릭 학자인 가녹지(Alexandre Ganoczy)는 자신의 저서 󰡔젊은 칼뱅󰡕(The Young Calvin)에서 “칼뱅은 음악 연주가나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비유될 수 없다. 연주가나 지휘자의 임무는 곡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데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칼뱅은 작곡가처럼 다양한 주제들을 빌려오고 그것들을 자신의 영적인 통찰에 따라 편곡하는 사람이다. 칼뱅은 루터, 멜란히톤, 츠빙글리, 부처의 주제들을 때로는 강하게 또 어떤 때는 부드럽게 울려 퍼지게 하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작품 안에서 연출한다.”고 평가하였다.
분명 16세기 제네바와 21세기 한국은 시간도 공간도 다르다. 따라서 과거의 칼뱅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칼뱅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가 남긴 소중한 유산들로부터 근본원리를 찾아내어 그것을 우리의 상황 가운데 적용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은 칼뱅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전혀 새로운 것들이고, 따라서 이 새로운 상황들을 복음의 원리로 해석하여 대안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칼뱅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교회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다. 바르트의 말처럼 “칼뱅을 제대로 진실하게 따른다면 따라야 할 길은 하나다. 칼뱅 그 자신에게 순종하지 말고 칼뱅이 주인으로 섬긴 그 분을 따르는 길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칼뱅을 계승하는 방법이다.




칼뱅 연대표


1509. 7. 10.  프랑스 북부 도시 누아용에서 출생
1521. 5. 19.  처음으로 성직록(聖職祿)을 받음
1523-27.     파리의 라 마르슈, 몽테규 대학에서 수학
1528-29.     오를레앙 대학에서 수학
1529-31.     부르주 대학에서 수학
1531-33.     파리와 오를레앙에서 인문학과 성서연구
1532. 4. 4.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출판
1533. 11. 1.  니콜라스 콥의 학장취임 연설에 연루됨
1534. 5. 4.   성직록을 포기함
1534. 10.     미사를 비방하는 내용의 플래카드 사건으로 인해 바젤로 피신
1536. 3.     『기독교강요』 초판 발행
1536-38.     제1차 제네바 사역
1538-41.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에서 프랑스 피난민들의 교회에서 목회
1539.        『기독교강요』 2판 발행, 『사돌레토의 편지에 대한 칼뱅의 답변』 출판
1540. 8. 6.   이들레트 드 뷔르와 결혼
1540.         첫 번째 주석인 『로마서 주석』 출판
1540-41.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에서 열린 회담들에 참석
1541.        『성만찬에 관한 소논문』 출판
1541-64.     제2차 제네바 사역
1541. 11.     제네바 의회가 칼뱅의 『교회법령』을 승인
1543.        『기독교강요』 3판 발행, 『교회개혁의 필요성』 출판
1544.        『재세례파를 반대하는 간략한 가르침』 출판
1545.        『스스로 신령파라 주장하는 리버틴 분파에 대한 반박』 출판
1549.         칼뱅의 아내 이들레트 드 뷔르 사망
1550.        『기독교강요』4판 발행
1551.         제롬 볼섹과 예정론 논쟁, 『취리히합의』 출판
1553.         미카엘 세르베투스 화형
1555-57.     베스트팔과 성만찬 논쟁
1559.        『기독교강요』최종판 발행, 제네바아카데미 설립
1564. 5. 27.  제네바에서 죽어 그곳에 묻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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