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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2/15 (02:06)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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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성서 읽기의 한 방법으로서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
한국적 성서 읽기의 한 방법으로서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

(Intertextual Interpretation)의 가능성





양 권 석※





내가 성경만 먹고 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유교 경전도 불교 경전도 먹는다. 살림이 구차하니까 제대로 먹지 못해서 여기 저기에서 빌어먹고 있다. 그래서 희랍의 것이나 인도의 것이나 다 먹고 다니는데 그렇게 했다고 해서 내 맷감량(飽和量)으로 소화가 안 되는 것도 아니어서내 건강이 상한 적이 거의 없다.

― 유영모, 어록 129쪽, 1957년




1. 글 머리에


신학을 상황화하고, 토착화하는 것, 그래서 신학이란 보편적인 용어가 아니라, 한국, 한국문화 또는 한국민중과 같은 지리적, 정치적, 문화적 한정사를 갖는 신학을 말해야 한다는 것은 신학 그 자체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한국신학을 찾기 위한 신학 방법론적 노력은 한국에서 신학하는 이들을 위한 필수적이면서도 일차적인 과제이다. 탈근대와 지구화를 운위하는 이 시대에, 한 지역의 정치 문화적 맥락에 관심을 갖는 신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구화(Globalization)는 곧 지구적 지역화(Glocalization)이다. 다시 말해 한 지역의 문화와 민중들의 가슴에 가장 깊이 맞닿아 있는 신학이야말로, 지구화하는 신학 환경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신학이라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탈근대는 서구적 근대가 지금까지 누려왔던 지구적 보편성의 신화의 종언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서구신학이 자신들의 신학의 지역성(locality)과 상황성(contextuality)을 극명하게 자인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에 서구신학이 누렸던 부당한 보편성의 자리를 빼앗아 가져 보겠다는 유사 보편성의 신학이 아니고, 지역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지구적인 과제들의 해결에 책임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참된 지역신학이다.

한국신학 또는 한국신학 방법을 내오기 위한 노력은 한국 땅에서 200년 넘게 전개되어 온 기독교 역사와 함께 계속되어 왔다고 본다. 특별히 1960년대 이후의 신학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과 그리고 1970년대의 독특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조건에서 탄생한 민중신학은 진정한 한국신학을 수립하기 위한 가장 구체화된 노력들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신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성서 해석 또는 성서 읽기에 있어서 한국적 성서 해석 또는 읽기의 방법론을 구체화하려는 노력은 사실상 아직도 그 빛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이미 서구신학 내에서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역사비평적 성서 해석에 대한 비판작업 역시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면서, 나는 여기서 한국적 성서 해석의 한 방법론으로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한국적 성서 해석학(Korean Biblical Hermeneutics), 또는 한국적 성서 해석(또는 읽기)의 방법론(a distinctive Korean method of Biblical interpretation)이라는 것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성서나 다른 경전들을 읽고 진리 체험에 도달하는 한 독특한 과정이 있다는 전제 위에서 가능한 무엇이다. 그러므로 한국적 성서 해석의 방법론을 내오기 위해서는 한국인들이 주체적으로 성서를 읽어 왔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깊은 해석학적 반성과, 한국의 종교문화사 안에서 수행되어 온 경전 해석의 전통들에 대한 깊은 반성이 일차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나 이 글은 직접적으로 해석의 역사적 경험들에 대해 반성하고 검토하는 작업이기 보다는 이미 학계에서 이루어진 작업들을 간접적으로 고려하면서 시도되는 시론적 성격임을 미리 밝혀둔다.

첫째로, 지금 학계에 통용되고 있는 상호 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라는 말과 이 글이 제안하고자 하는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이라는 것이 갖는 구별되는 측면과 공유하는 측면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후기 구조주의 이후의 문학 비평 안에서 사용되는 상호 텍스트성에 대해서 짧게 논의할 것이다. 둘째로는 한국과 유사한 다양한 경전들과 해석학적 전통을 가진 아시아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는 광범위한 의미에서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의 범주에 포괄될 수 있는 아시아 성서 해석학(Asian Hermeneutics)의 논의들을 검토할 것이다. 셋째로, 한국에서 이루어진 성서 해석의 역사적 경험 중에서 가장 주체적인 성서 읽기 경험의 예로서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미치기 이전의 17~18세기 조선 실학자들의 성서 읽기 경험과 1970년대 독특한 사회정치적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민중신학의 성서 읽기의 상호 텍스트적 성격을 밝혀 볼 것이다. 끝으로 아시아 성서 해석학과 한국적 성서 읽기의 경험을 상호 텍스트성과 관련하여 비교 검토하고, 비판적으로 관련시켜 봄으로써 한국적 성서 읽기의 방법론으로서 상호 텍스트적 성서 읽기의 방법을 구체화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문제들을 검토해 볼 것이다.




2. 문학 비평에 있어서 상호 텍스트성


문학 비평에 있어서 상호 텍스트성(intertextuality)라는 말은 후기 구조주의 이래 발전된 텍스트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한 이해를 나타낸다. 실존주의적 휴머니즘의 기초를 제공해 왔던 자율적 자아(an autonomous self)나 자주적 주체(a sovereign subject)와 같은 개념들이 후기 구조주의적 또는 해체주의적 비평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비판되어졌던 것처럼, 텍스트의 개념 역시 안정적(stable)이고, 자기 정체적(self-identical)이고 그리고 항구적인 대상으로서 파악되던 과거의 이해로부터 벗어나, 이제 텍스트는 의미의 그물망 안에 있는 한 교차지(a place of intersection in a network of signification)로 이해된다.1) 상호 텍스트성이라는 말을 최초로 제안했던, 쥴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이렇게 말한다.


한 주어진 텍스트 공간 안에서, 다른 텍스트들로부터 취해진 여러 가지 발화들이 상호 교차하고 그리고 상호 중립화한다.(in the space of a given text, several utterances, taken from other texts, intersect and neutralise one another).2)


모든 텍스트는 인용들의 모자이크로 구성되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의 흡입이거나 변형이다.(any text is constructed as a mosaic of quotations: any text is absorption and transformation of another.)3)


다시 말해 한 텍스트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다.4) 문장을 이루는 모든 음절과 단어와 발화는 모두 다 선행하는 다양한 것들을 반복하거나 뒤섞고 있는 것이다.5) 모든 텍스트는 그 스스로 한 문화적 텍스트로서 무한한 다른 텍스트들의 메아리를 울려주고 있는 것이다.6) 안토니 디셀톤(Anthony C. Thiselton)은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러한 상호 텍스트성에 대한 이해를 매우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다.


모든 텍스트는 선행하는 텍스트들의 다시 쓰기로 그리고 그 선행하는 텍스트들에 대한 반응으로 간주될 수 있다. 롤란드 바스(Rolland Barthes)와 쥴리아 크리스테바의 텍스트 이론에 의하면, 모든 텍스트는 하나의 모자이크를 만드는 것처럼, 다른 텍스트들을 부수고 변형한다. 데리디안적 용어로 말하면, 한 텍스트란 <흔적들>의 그물망이다.7)

그러므로 한 텍스트는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텍스트들과 매우 복잡하고도 유동적인 관계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텍스트들은 저자를 통해서 들어오는 텍스트들은 물론이요, 독자를 통해서 들어오는 텍스트들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한 텍스트는 롤란드 바스가 보았던 것처럼 짜여진 한 직물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텍스트들로 구성되는 한 관계의 그물망 안에 있는 한 특정한 교차지이다. 이미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 관계의 그물망은 결코 안정적일 수 없고, 항상 변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항상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관계의 그물망 안에 있는 한 교차지로서 텍스트는 결코 확정될 수 없고, 자증적일 수도 없다. 항상적으로 변화하는 그물망 안에서 그 텍스트 역시 항상적으로 변화한다. 조금 더 쉽게 표현하자면, 저자와 독자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텍스트들의 관계, 그래서 무한대로 가능한 그 관계로 구성되는 그물망 안에 텍스트가 위치됨으로서 텍스트 그 자체가 항상 변화하며, 그래서 텍스트는 언제나 새로운 모습으로 그 자신을 드러낸다. 안토니 디셀톤에 의하면, 텍스트들이란 끝없이 운동하는 과정들이다. 어떤 최종적인 의미도 그 텍스트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호 텍스트성의 끝없이 변화하는 그물망에 의해서 다시 의심에 붙여질 수밖에 없고, 텍스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 체계 안에 놓여지게 된다. 간단히 말해 한 텍스트는 하나의 의미만을 소유하고 있는 한 대상이 더 이상 될 수 없다. 텍스트는 독자들의 참여와 응답을 요청하는 언어적 그물망이다.

그러므로 텍스트 또는 텍스트성에 대한 한 새로운 이해로서 상호 텍스트성은 다른 어떤 독자응답이론들보다도 더욱 의미 생산에 있어서 독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후기 구조주의 비평가들이 텍스트를 비유해서 사용하는 용어들, 예를 들자면, network, web, tissue, woven fabric 과 같은 용어들이 암시하는 것은, 텍스트와 독자는 분리된 것이 더 이상 아니고 하나라는 것이다. 롤란드 바스에 의하면, 이 텍스트에 대한 새로운 이해 안에서, 텍스트와 독자, 읽기와 쓰기는 단일한 의미 실천(a single signifying practice) 속으로 결합한다.8) 다시 말해 독자가 텍스트를 구성한다. 독자로부터 독립된 텍스트, 그리고 의미의 수동적 수납자로서 독자란 불가능한 가정이다. 독자는 그들 자신들의 문화적, 종교적, 이념적 텍스트들을 가지고 한 텍스트와 대화적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의미를 생산하게 된다. 상호 텍스트성이란 이 상호 텍스트적 대화의 과정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독자들에 의해서 개입되는 텍스트들이 무한정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이 상호 텍스트적 과정의 결과 또한 무한한 가능성 앞에 열려 있다. 근본적으로 상호 텍스트적 읽기는 이미 정해진 한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독자와 텍스트 사이에서 이루어진 대화적 과정을 통한 의미의 생산과정이다. 그래서 읽기는 해석학적 대화의 과정이며, 독자와 텍스트의 삶의 경험이 서로를 해석하는 상호 해석의 과정이다. 이 대화의 과정 안에서 독자와 텍스트는 동시적으로 읽혀지고 해석되고 변화된다. 그러나 인도의 성서학자 소아레스 프라부(Soares Prabhu)에 의하면, 이러한 상호 대화적 해석이라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서 독자의 삶의 경험은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고 본다. 다시 말해 독자의 삶의 경험은 이 상호 텍스트적 대화를 시작하는 곳이며, 하나의 해석학적 순환이 텍스트와 삶을 관련시키는 곳이다.9) 이렇게 독자의 삶과 그 경험이 해석의 출발점이 되고, 해석의 활력적인 과정이 일어나는 장이 된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면, 이 상호 텍스트적 읽기는 독자가 진정으로 해석의 주체가 되고, 텍스트가 진정으로 독자를 위한 텍스트가 될 수 있게 하는 읽기의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호 텍스트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서구에 있어서 성서 해석에 이미 많은 영향을 주어 왔다.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상호 텍스트적 관계 속에 관련되는 텍스트들은 저자를 통해서 들어오는 텍스트들과 독자를 통해서 들어오는 두 가지 종류의 텍스트들을 가정할 수 있다. 성서 텍스트의 상호 텍스트성에 대한 연구 역시 이 두 가지 관련되는 텍스트들에 대해서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문학비평을 적용하는 최근의 연구들이 독자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텍스트들에 대해서 새로운 관심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상호 텍스트성을 성서 텍스트에 적용할 때, 전통적인 서구 성서신학은 저자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텍스트들에 관심을 가져 왔다. 가령 성서 내에서 성서의 책들간의 상호 텍스트적 관련성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앞선 텍스트들을 재사용(re-use)하거나, 재맥락화(re-contextualize)하거나, 재해석(re-interpret)하거나, 변형(transform)하는 방식들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성서 텍스트들의 문화간 관계(cross-cultural relationship)를 보다 강조하면서 성서 텍스트들의 형성에 관련된 다른 종교 텍스트들이나 아니면 경전 이외의 텍스트들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들이 또 다른 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필연적으로 지역적인 경계를 갖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 있어서 성서 텍스트의 상호 텍스트성에 대한 관심은 상호 텍스트성의 두 번째 측면, 즉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관계에 보다 강조점이 주어진다. 다시 말해 독자를 통해서 관련되어지는 텍스트들에 보다 관심을 갖는다. 이것은 텍스트의 상호 텍스트적 이해가 가져다 줄 수 있다고 판단되는 독자를 의미 생산의 창조적 주체로 만들어 주는 측면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아시아인들이 수동적 의미의 수납자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성서 읽기의 주체가 되고, 성서를 하나의 이방적 텍스트로가 아니라, 참다운 아시아인들을 위한 성서로, 텍스트로 전유하게 되는 측면에 일차적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다. 아시아에 있어서 성서 해석의 탈근대적 해방을 부르짖고 있는 소아레스 프라부는, 하나의 안정된 대상으로서 텍스트를 상정하고, 그것에 대한 객관적 의미를 상정하는 역사비평적 해석학이라는 근대적 해석학의 전제로부터의 탈출을 주장하고 있다.10) 다시 말해 아시아인들이 해석의 주체로서,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로서 자기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객관적 의미를 추구하는 역사비평학이 아니라, 아시아적인 읽기의 방법 또는 전략을 수립하는 문제가 일차적 과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아레스 프라부는 성서 텍스트의 상호 텍스트적 이해는 의미의 생산과정에 있어서 아시아인들의 전이해의 창조적 역할을 가장 올바르게 정당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전이해란 독자를 통해서 상호 텍스트적 과정에 관련되는 텍스트들을 말하는 것이다.




3. 아시아에서 등장하는 성서의 상호 텍스트적 해석


비록 서구의 문학비평으로부터 이론화된 텍스트에 대한 상호 텍스트적 이해가 아시아인들의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을 위해서 간접적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을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시아에 있어서 성서를 포함한 경전들의 상호 텍스트적 해석이라는 것은 서구와는 전혀 다른 출발점을 가질 뿐만 아니라, 보다 오랜 역사적 전통마저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현재 아시아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성서의 상호 텍스트적 해석의 출발점은 서구 문학비평의 그것과는 다르다. 서구 문학비평에 있어서 출발점은 저자에 대한 신화, 텍스트의 구조적 문학적 완결성에 대한 신화, 그래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에 대한 모던적 신화로부터 텍스트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데 일차적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에 있어서 성서 텍스트의 상호 텍스트적 이해에 대한 관심은 일차적으로 아시아의 종교문화적 텍스트적 맥락의 독특함에 기인하며, 그 독특한 종교문화적 텍스트적 맥락에서 기독교 성서를 자신들의 성서로서 전유하려는 해석학적 선교적 노력에 일차적 출발점을 마련한다. 다양한 문화와 언어들, 다양한 종교들, 다양한 경전들, 그리고 다양한 경전 해석의 전통들이 공존하는 아시아에서 아시아인들은 어떻게 성서를 자신들의 책으로 전유하며, 그 안에서 진리 체험에 이르고, 그리고 어떻게 참다운 아시아 교회를 건설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선교적 관심에 그 출발점을 둔다는 것이다. 알로이시우스 피어리스(Aloysius Pieris)가 말했던 아시아에 있는 서구의 지교회가 아닌 진정한 아시아 교회로의 비젼, 송천성(C.S. Song)이 말했던 아시아인들의 경험 속으로의 신학적 전이, 그리고 서남동이 민중으로부터 발견하는 두 이야기 또는 두 전통의 합류에 대한 증언과 같은, 아시아 신학자들의 선교적 해석학적 노력이 바로 아시아에 있어서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을 가능하게 했던 직접적인 동인이다. 이미 아시아에 있어서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은, 비록 상호 텍스트적 해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을 지라도 상당히 구체화되는 과정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마르타(S.J. Samartha)의 관계적 해석학(relational hermeneutics), 곽필란(Kwok Pui Lan)의 대화적 상상력(diological imagination), 여 기오킁(Yeo Khiok Khung)의 교감적 읽기(interpathetic reading), 아치리(Archie C.C. Lee)의 텍스트간 해석(cross-textual hermeneutics), 수기르타라자(R.S. Sugirtharajah)의 다종교적 해석학(multi- faith hermeneutics) 등등이 진정한 아시아적 성서 해석의 방법을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이론적 결과물로 떠오르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시아에서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이 문제가 되는 구체적인 상황은 다인종적이고, 다언어적이고 그리고 다문화적이며, 다종교적, 다경전적 사회로서 아시아이다. 각각의 종교들은 그 자체의 성서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그 자체의 해석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경전들과 그 경전들의 해석의 전통들은 수천 년 동안 아시아인들을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이끌어 왔던 것들이다. 이러한 다종교적 다경전적 상황 속에서 신학함의 올바른 길을 구하는 아시아 신학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은 아시아인들은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경전적 전통들과 관련성 속에서 성서를 읽고 해석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문제이다. 사실상 이러한 질문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식민지 시대의 가장 배타적인 신학들조차도 다경전적, 다종교적 아시아 상황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소위 말하는 식민지 후기(Post-Colonial), 그리고 선교사 후기(Post-missionary) 시대에 있어서 그 질문의 내용과 그리고 그 질문이 상정하는 아시아의 경전들과의 대화의 질은 전적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고 있다. 식민지 시대의 배타적 기독교 선교 신학의 실패를 기억하면서, 오늘의 아시아 신학자들은 아시아의 다종교적, 다경전적 특징을 갖는 독특한 해석학적 맥락에서 어떻게 성서를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성서가 어떻게 아시아의 다종교적 다경전적 맥락 안에서 아시아 사회를 위해서 그 자신의 독특한 역할을 발견하고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아시아인들을 위한 경전들 중의 하나로서 제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전체적으로 보아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시아적인 성서 해석 방법이 고안되고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사마르타에 의하면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해석학적 논의는, 아시아의 다종교적, 다경전적 맥락을 고려할 겨를도 없이, 성서무오성에 대한 근본주의적 주장과 역사비평학 사이의 아무런 소득없는 논쟁에 의해서 지배되어 왔다. 그래서 아시아에 있어서 해석학은 아시아의 경전들에 대항해서 성서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하나의 대항적 해석학(an over-against hermeneutics)이 되어 왔다.11) 이제 아시아 해석학은 이러한 대항적 해석학으로부터 관계적 해석학(a relational hermeneutics)12)으로 바뀌어져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초점을 기독교 내의 또는 기독교간의 해석의 문제로부터 종교간의 문제로 이동시켜야 할 것이며, 나아가 단일 경전적 맥락(a single scriptural context)으로부터 다경전적 맥락(a multi-scriptural context)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13) 증인들의 두 전통과, 두 전통 또는 두 이야기의 합류를 제창하였던 서남동처럼, 곽필란은 아시아 기독교인들은 성서적 이야기와 아시아인들로서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라는 두 이야기들의 상속자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성서 해석의 과제는 이 두 이야기를 상호 대화의 과정 속으로 가져오는 문제라고 주장한다.14) 계속해서, 그녀는 아시아에서 성서 해석은 우리 자신의 전통과 성서의 전통 사이의 상호교역(a two-way traffic)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15) 여기서 상호교역이란 동료 아시아인들의 신앙과 경전들을 더 이상 선교적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고 진리를 찾는 순례의 과정에서 만나는 대화의 상대들로 보자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16) 그녀가 러시아 문학비평가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을 차용하면서 말하는 대화적 상상력(dialogical imagination)이란 바로 이 상호 교역의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상상력이며, 그 상호 교역을 통한 가장 창조적인 해석학적 한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17) 이와 같이 아시아에서 전개되는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의 시도들은 단순히 성서의 텍스트들을 아시아의 경전적 텍스트들과 관련시킨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은 그러한 상호 텍스트적 관련 또는 관계의 질이다. 다시 말해 성서와 아시아의 경전적 텍스트들이 해석의 과정에 참여하여, 서로 관련되는 관계의 질이, 지금까지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이원적 구분의 도식에 기초한 토착화(inculturation)나 상황화(contextualization)와 같은 이름들로 전개된 아시아 신학의 시도들로부터 명백히 구분되는 특징을 갖는다는 데 있다.

첫째로, 최근의 아시아의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이 과거의 토착화 신학 또는 상황화 신학의 접근들로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해석의 주체와 중심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이다. 곽필란은 이와 관련하여 '누가 성서를 해석하는 권위를 갖는가?' 라는 핵심적인 질문을 제기한다.18) 그녀의 설명을 따르면, 선교사 시대에 있어서 해석하는 권위는 전적으로 선교사들에게 있었고,19) 토착화신학의 시대에 있어서도 성서적 진리는 이미 서구에서 사전 포장이 완료되고, 그렇게 사전 포장된 성서적 진리가 아시아에 들어와 아시아적 스타일로 다시 꾸며져 왔다.20) 그래서 해석의 권위는 서구의 신학적 거장들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해석의 권위가 언제나 아시아 밖에 그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시아인들은 진리와 해석으로부터 소외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인들의 해석학적 잠재력과 능력이 전적으로 무시되어 왔던 역사인 것이다. 곽필란은 아시아에서 성서 해석이 중심과 주체에 관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날의 많은 아시아인들은 이와 같은 앞선 노력들의 타당성에 대해서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오늘의 아시아인들은 복음은 영원히 고정되어 있고 그래서 현재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정 위에서 어떻게 복음을 아시아 스타일로 드러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묻고 있는 것도 더 이상 아니다. 아시아인들에게 있어서 일차적 관심은 현재적 아시아인들의 삶의 실재 안에서 그리고 아시아인들의 일상의 투쟁 안에서 복음을 새롭게 식별해 보려는 것이다. 식민주의적인 서구 기독교를 아시아에 수용하려 하는 대신에 오늘의 아시아인들은 그들 신학의 과제를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재개념화(reconceptualization)하고 재형성(reformulation)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들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신념을 가지면서, 그들은 다른 종교들에 대항해서 기독교의 우월성을 더 이상 주장하려 하지 않으며, 신학함에 있어서 아시아의 풍부한 자원들을 사용하려 한다...21)


이미 우리가 보아 왔던 것처럼, 소아레스 프라부의 아시아에 있어서 성서 해석의 탈근대적 해방이란 지금까지 성서 해석으로부터 교묘하게 아시아인들을 소외시켜 온 근대적 성서 해석, 특별히 역사비평적 성서 해석에 대한 비판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아시아인들을 실질적인 해석의 주체로서, 아시아인들의 생존과 해방을 위한 투쟁의 자리를 해석의 명백한 중심으로서 복권시키려고 하는 시도이다. 그래서 최근의 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은 아시아 교회의 선교신학은 물론 성서 해석학의 흐름을 정반대 방향으로 역전시켜 놓으려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기르타라자의 설명에 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에 의하면 지금까지 아시아에 있어서 신학은 예수로 하여금 타밀어를 광동어를 그리고 한국말을 하도록 유도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지금 관심이 되는 것은 어떻게 한 타밀인, 중국인이 유비적 상황 속에서 응답하게 될 것인지를 볼 수 있는 방법론을 내어오는 것이라고 한다.22) 다시 말해 과제는 예수의 아시아화가 더 이상 아니다. 오히려 현재적 관심은 아시아인들이 그들의 삶의 고유한 경험으로부터 발견하고 선포하는 예수와 관련된다.

둘째로, 최근 아시아에 있어서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이 과거의 토착화나 상황화를 위한 시도들로부터 구별되는 특징은, 해석의 정치적 성격을 보다 첨예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아시아 해석자들의 토착화 신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은 토착화신학이 아시아 민중의 현재적 삶에서 출발하기보다는 서구 또는 서구신학에 대한 대항의식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토착화신학의 해석학적 기준·원칙·전제들은 현재적 아시아인들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낭만적으로 추상화된 문화와 신학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또한 토착화론자들이 아시아 민중을 억압해 왔던 상층 엘리트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합리화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의 아시아 성서 해석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보다 분명히 한다. 아시아에 있어서 다양한 종교들과 경전들의 공존은 그들에게 단순히 종교적인 실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아시아의 사회정치적 실재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해석적 노력은 아시아의 다원주의적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정치적 선택임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절대주의와 무책임한 지역주의, 그리고 배타적인 집단주의와 민족주의를 조장해 왔던 모든 종류의 일원론적 정체성 담론이야말로 아시아 민중의 억압의 근원이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사마르타는 자신의 관계적 해석학은 다원적 종교사회 속에서 한 종교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양육하려는 노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23) 곽필란의 말을 빌리자면, 성서 해석은 단순히 기독교 공동체 내부에 관련되는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다. 성서 해석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 실천 행동이다.24) 진실의 정치는 단순히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싸움이 아니다. 제3세계의 민중들은 성서가 어떤 형이상학적인 계시된 진리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일차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권위라는 것은 더 이상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믿음 뒤에 감추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백인 남성 성직자들에 의해서 정의된 교회의 전통에 의지하여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가난한 자들, 여성들, 그리고 다른 형태로 소외된 사람들은 성서가 진정으로 해방을 위한 지구적 투쟁을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25) 이처럼 아시아의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자들은 자신들의 해석이 정치적인 선택 안에서 그리고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 실현된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최근의 아시아 해석자들은 성서 또는 경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 토착화론자들, 또는 상황화론자들로부터 구별된다. 후기 구조주의적 문학비평이 텍스트 또는 텍스트성의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면, 아시아의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은 성서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에 엄청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종교간 대화의 관점으로부터 성서를 본다. 아시아의 다경전적 사회 속에서, 성서에 대한 이해는 단일 경전적 사회(a single scriptural society)에서 이해되는 성서에 대한 이해와 같을 수가 없다. 대표적으로 수기르타라자의 성서 이해는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주어져 온 기독교적 경전 이해를 적극적으로 상대화시키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무엇인가를 성서(scripture)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종교문화적 맥락에서 같은 내용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각각의 신앙공동체는 무엇이 성스러운 텍스트이며 책인가에 관한 각각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성스러운 텍스트에 대한 각각의 개념들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며, 그들 모두를 단일한 서구적 정의 속에 짜 맞추어 넣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26)

그러나 아시아에서의 기독교 성서 해석은 서구라는 단일 경전적 세계의 성서에 대한 정의에 의해서 지배되어 왔다. 닫혀진 정경(closed canon)이라는 교리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서구적, 단일 경전적 성서에 대한 정의는 성서 해석을 포함한 기독교적 해석학적 과정 안에 다른 경전들이 개입될 가능성을 애초서부터 봉쇄하는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27) 나아가, 이 단일 경전적 성서에 대한 정의는 아시아의 종교문화적 전통을 평가절하해 왔을 뿐만 아니라, 성서 해석의 주체로서 아시아인들의 정당한 역할을 결정적으로 가로막아 왔다. 다시 말해 이 단일 경전적 서구적 성서에 대한 정의는 아시아의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의 종교문화적 전통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성서로부터도 이중적으로 아시아인들을 소외시켜 왔다는 것이다. 결국 서구적 단일 경전적 성서에 대한 정의와, 정경화에 대한 교리적 이해는 아시아에 있어서 진리의 정치(the politics of truth)를 결정적으로 제약해 왔던 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심찬 깨달음으로부터 아시아 해석자들은 다경전적 사회인 아시아에서 성서에 대해서 새롭게 정의하고 개념화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다른 종교들을 향한 관용이 아니다.

이러한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기본적인 특징은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를 따르면서 대부분의 논자들이 하나의 발생학적 개념으로서 소문자 scripture라는 말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드러난다.28) 그러나 이러한 발생학적 접근들조차도 사실은 아시아의 광범위한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경전들을 범주화하는 데는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29) 그러나 어떤 경우이건 간에 다경전적 사회 속에 있는 한 경전으로서 성서를 보려고 한다는 점에서 공통적 지향을 갖는다. 여기서는 아시아 해석자들의 성서 또는 경전에 대한 이해의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로, 이들이 이해하는 성서는 고정된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매우 유동적인 개념이다.30) 한 텍스트가 경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사람들이 그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또 사람들이 그 텍스트와의 관계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경전의 지위는 사회정치적 환경의 변화와 그 공동체의 변혁에 따라서 시간을 두고 변화한다.31) 다시 말해 성서의 의미와 지위는 상황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경전으로서 성서의 지위와 의미 역시 경전들이 갖는 이 관계적 특성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신학함에 있어서 성서의 기능과 역할은 이미 정해진 무엇이 아니라 특정한 해석학적 맥락 안에서 끊임없이 재정의되어야 할 무엇이다.

둘째로, 하나의 경전에 대해서만 궁극적인 권위를 부여하려는 주장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곽필란에 의하면, 성서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이 공존하는 아시아 상황에서, 한권의 책 안에 진리가 그대로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서구적 진리 개념은 대부분의 아시아인들과 아시아 종교들에게는 매우 낯선 개념이다.32) 아시아에서는 모든 경전들이 성스럽다는 것은 인정된다 할지라도, 그 성스러움이 곧 진리의 완결성(completness), 폐쇄성(closedness)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든 성스러운 경전들 역시 완전을 향해서 열린 불완전성이다. 그러므로 실상 아시아 특별히 동북 아시아에 있어서 진리를 향한 추구가 오직 하나의 경전만을 해석에만 얽매여야 한다는 것 역시 낯선 주장이다. 서두에서 인용한 유영모가 그러했던 것처럼, 곽필란에 의하면, 중국인들 역시 세상에는 다양한 가르침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경전 이상에서 가르침과 그들의 삶을 위한 안내를 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실상 다양한 전통들이 만나는 가운데, 그 가운데서 창조적 전유의 과정이 일어나는 가운데서 새로운 사상들과 전통들이 만들어져 왔다는 것이다.33)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경계를 넘어서서 경전들을 만나는 과정은 실상 아시아 문화의 발전을 가능하게 해 온 창조적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불교와 유교가 그리고 불교와 도교가 각각의 경계를 넘어서서 서로 만나는 상호 텍스트적 만남의 과정을 통해서 종교문화적 발전의 역사를 전개 시켜 왔으며, 한국에서도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의 탄생은 실학자들이 자신들의 경전의 경계를 넘어서서 성서를 포함한 기독교 문서들을 읽는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전과 성서에 대한 이해에 기초할 때, 앞에서 말했듯이 성서 해석은 단지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것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기독교 공동체를 넘어서 전체 공동체를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수기르타라자는 아시아에서 성서 해석은 아시아의 다른 경전적 텍스트에 민감한 것이어야만 하고, 단지 기독교 청중만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대로 다른 종교의 형제 자매들을 또한 겨냥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계속해서 그는 기독교 성서의 해석자들은 그들의 문학적 결과물이 반드시 배타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만이 아니라 보다 넓은 청중에게 미치는 것이라는 것을 반드시 의식해야만 한다.34) 그러므로 성서 해석자를 위한 과제는 다신앙적 사회에 속한 일원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발견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른 신앙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과, 또 그들이 가진 영적인 직관들을 고려하면서 어떻게 성서 텍스트들을 해석할 것인가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35) 결국 다경전적 사회 속에서 성서의 해석은 성서 그 자체만을 위한 해석이 되어서도 안 되고, 성서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한 공동체만을 위한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성서의 해석은 원하든 원하지 않은 다른 종교와 경전들에 대한 판단과 결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 해석이 다양한 경전들과, 그들 해석의 전통들과, 그 전통들을 통해서 발전시켜 온 통찰력과 직관들을 고려하면서,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창조적 대화의 과정.―.곧 상호 텍스트적 해석의 과정.―.속에 뛰어들 때, 성서는 이 다경전적 사회 속에서 독특한 한 의미를 지닌 텍스트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다경전적 사회 속에서는 경전을 한계짓는 경계는 그렇게 엄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들은 지적한다.36) 한 종교 공동체 내부에서조차도 경전의 경계는 그렇게 엄격한 것이 아니다. 한 종교 공동체 내에서도 다양한 집단들의 이해에 따라 각각의 집단들이 최고의 권위를 두는 책들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경전은 완성된 책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열린 미완성의 무엇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으로 이들은 보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생각들은 아직 구체적으로 정경의 권위와 범위를 문제삼는 단계로 옮아가고 있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생각들은 기독교 경전의 정경성과, 정경화의 역사를 아시아의 다경전적 관점으로부터 철저하게 재고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비록 아직은 시작하는 단계에 있지만, 아시아의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들은 성서 해석을 위한 아시아적 이론을 생산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방향을 시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들의 중요성은 그들이 성서의 텍스트들을 다른 경전들이나 텍스트들과 단순히 관련시킨다는 사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보다 중요한 점은 이들이 성서의 텍스트들을 다른 텍스트들과 관련시키는 그 관계의 질, 또는 대화적 시각에 있어서 과거의 토착화론자 또는 상황화론자들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 해석자들은 아시아 종교문화적 전통의 유산을 물려받은 자들로서 자의식은 물론이요, 아시아의 전통들과 성서의 진정한 해석자로서 자신들의 주체적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해석학적 중심과 출발점 역시 낭만화된 문화가 아니라 아시아 인들의 생존과 해방을 위한 현재적 투쟁 속에 두고 있다.




4. 한국에서의 상호 텍스트적 성서 읽기의 경험들


한국의 기독교 역사 안에서 일어났던 상호 텍스트적 성서 읽기의 역사적 경험을 총체적으로 반성해 보기에는 이 공간이 너무 좁다. 적어도 필자의 얕은 생각으로는 한국적 성서 읽기의 경험에 대한 총체적 반성은 한국신학을 위해서 아직도 연구자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처녀지처럼 보인다. 이런 현실을 생각해 볼 때, 한국적 성서 읽기의 역사적 경험을 여기서 종합하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이다. 일단 그 모든 것들을 과제로 남겨 두면서, 여기서는 다만 두 가지 뚜렷한 사례를 그것도 충분한 비판적 논의를 생략한 채 지적해 보기로 한다.

첫째로, 18세기 조선 실학자들의 기독교 문서를 포함한 성서 읽기의 과정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이루어진 가장 분명한 상호 텍스트적 성서 읽기의 한 예라고 본다. 특별히 남인 성호학파에 속하는 조선 실학자들은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영향력이나, 어떤 외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조선 유학(성리학)과 조선 왕국을 되살리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경계를 넘어서 성서를 포함한 서학 문서들을 읽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한국 교회사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상호 텍스트적 경전 읽기의 과정은 성호학파 내에서 신서파와 공서파라는 성호 좌우파로 갈라져 치열한 논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논쟁의 결과 신서파를 통해서 한국 땅에서 최초로 가장 주체적인 기독교 신학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신학의 바탕 위에서 최초로 한국인들에 의한 한국인들의 교회가 탄생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이 교회와 이 교회를 가능하게 하였던 광암 이벽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의 신학은 이후에 천주교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단적 신학과 교회로 간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정부의 보수적 유학자들에 의해서 매국적 집단으로 그리고 망국적 사교로 배척당하게 된다. 그리고 박해 기간 속에서 이들 대부분 가장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천주교에 의해서는 배교자로, 조선 정부에 의해서는 매국노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광암 이벽의 성교요지는 이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조선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의 신학의 결정판이다. 여기서 성교요지의 문학적 특징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성교요지 안에서 성서와 유교 경전들 사이의 상호 텍스트적 읽기와 쓰기가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개 그 책을 3부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론이다.37) 제1부는 구약과 신약에 걸쳐서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기독교 성서의 요약이다. 그리고 제2부는 유교 경전의 가르침들이며, 제3부는 성서의 시편이나, 유교의 시경에 버금가는 우주와 자연을 노래하는 시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 글은 예수를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그리고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올바른 도를 가르치는 분으로 묘사함으로써, 당시 조선 왕조의 위기 속에 수기와 치인의 새로운 법도를 전하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있다.

비록 충분한 문학적 분석과 비판작업이 곁들여지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일단 알려진 사실들로 부터 우리는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우선 조선실학자들이 보여준 자발성의 측면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경전적 경계를 넘어서서 성서와 서학문서를 읽고자 노력했고, 그것들을 자신들의 기존하는 경전 해석의 전통과 깊이 관련시켜 보려고 했으며, 이 과정에서 최초의 가장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한국 기독교 신학과, 기독교 공동체가 탄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들의 신학과 성서 해석학을 한국신학과 한국적 성서 해석학의 원형적 전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성서 해석학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이 유교와 기독교의 경전들을 상호 텍스트적 또는 상호 경전적으로 만나게 하고 대화시키고, 또 비판적으로 관련시켰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 텍스트적 과정을 통해서 최초의 한국 기독교 신학과 한국 기독교 공동체는 탄생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히 오늘 우리들이 수행해야 할 성서 읽기의 방향에 대해서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한국적 성서 읽기의 상호 텍스트적 성격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한 사례는 민중신학의 경우라고 본다. 전반적으로 볼 때, 민중신학의 성서 읽기, 특별히 민중신학 내에서 활동했던 성서학자들의 성서 읽기는 역사비평학의 범주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물론 내가 여기서 말하는 역사비평학은 양식비평, 편집비평, 그리고 그 연장선 상에 있는 사회학적 성서비평, 유물론적 성서비평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안병무의 말대로 우리가 서구의 학문 영역에 강제로 편입되어 있기에 이러한 해석방법으로부터 탈피하지 못하는 것이지,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질문을 갖는다면 그 방법도 당연히 달라져야 할 것이다.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병무의 성서 해석을 포함한 민중신학의 성서 해석이 서구적 해석 방법론을 가장 탁월하게 상황적으로 활용했던 예로서 서구에서 평가되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주인의 도구를 그 주인을 잡기 위해서 사용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앞에서 말했던 대로 민중신학이 남겨 놓은 해석학적 과제는 차라리 안병무가 어렴풋이 시사했듯이 역사비평적 성서 해석의 범위를 넘어서서 우리가 진실로 주체적인 창조적인 신학을 할 때 가능한 그 방법론을 내오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본다.

나는 민중신학 안에서 가장 주체적이고 창조적 성서 해석 방법론의 가능성은 차라리 전문 성서학자들이 아닌 사람들에게서 온다고 본다. 특별히 서남동과 김지하가 주목된다. 서남동의 합류모델은, 성서의 민중전통과 한국역사의 민중전통이라는 두 개의 전거를 제안한다. 오늘 현재의 민중 또는 민중운동은 두 전통의 합류로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남동에게 있어서 이 합류의 해석학적 과정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텍스트적으로 말하면, 여기서 상정되는 두 개의 텍스트로서 전통들이 오늘 민중운동, 하느님의 선교를 해석하는 데 어떻게 상호 작용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구체적이지 않다. 그리고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볼 때는 비록 다른 전통에서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내용을 갖는 두 종류의 텍스트들을 병렬적으로 관련시키는 수준 이상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김지하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검토된 흔적이 보인다. 서남동도 그의 성령론적 해석과, 합류의 예로서 장일담 메모를 들었듯이,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를 판소리 형식을 빌려 전개하려고 했다는 이 작품 안에서는 성서뿐만 아니라, 동학과 증산교로 대표되는 한국 민중종교의 텍스트들, 그리고 파울로 프레이리와 프란쯔 파농으로 대표되는 제3세계 민중해방운동의 텍스트들이 광범위하게 상호 교차하면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해방에 대해서, 그리고 성찬(밥)에 대해서, 참으로 창조적인 한국적 해석을 제안하고 있다. 김지하의 말을 빌리자면, 이것은 후천개벽적 성서 해석이거나, 상생적 성서 해석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39) 김지하의 논리로부터 그의 경전 이해를 추론할 때 그 이해의 독특한 측면은 성서를 포함한 모든 경전은 그 자체로 선천의 상극적 세계 속에서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해석되어 왔다는 것이며, 신약이 구약 안에 예비되어 있는 것처럼, 이 상극적 선천의 세계 속에서 이어져 온 경전들 안에 후천을 향한 희망과 씨앗이 담겨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후천의 상생세계를 위해서 하나의 경전이 아니라 다양한 경전들을 교차시키는 가운데 후천의 눈으로 읽혀지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김지하에 있어서는 그 해석의 출발점이나, 중심, 그 지향점이 보다 분명한 해석학적 설명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천의 경전들 속에 담겨진 후천을 위한 희망과 씨앗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과정의 진술은 여전히 부족하다. 다만 그 과정은 민중의 눈, 곧 후천의 눈에 맡겨져 있는 것인데, 실제로 그 후천의 눈이 어떻게 선천 세계의 경전들을 관련시켜야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 비판적 분석적 노력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어쨋든 서남동의 합류도, 김지하의 상생도, 모두 다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리고 이것이 민중신학을 가장 한국적 신학일 수 있게 하는 창조적 측면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이 상호 텍스트적 관계를 이론적으로 충분히 구체화하지는 못한 채 우리에게 남겨 주었고, 이것을 풀어나가야 할 과제를 이 시대의 신학은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5. 한국적 경험과 아시아적 경험의 비판적 대화


이렇게 거칠게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의 두 가지 한국적 예를 소개하면서, 아시아 성서 해석의 지평에서 이루어진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의 이론들과 몇 가지 비판적 대화를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아시아 해석자들에게 나타나는 한 특징은 아시아에서 성서 읽기는 어떻게 하든 그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성서가 아시아에 오게 된 것부터가 인위적이거나 강제적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도 또한 인위적인 전략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있다고 보인다.40)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이 아시아인들이 자발적으로 성서를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학자들의 자발적인 성서 읽기와 그것으로부터 결과된 자발적 한국 기독교 공동체의 탄생은 아시아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며, 이 경계를 넘어서서 성서를 포함한 다른 경전들과 텍스트들을 향하여 자발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이미 곽필란이나 유영모를 인용해 설명하였던 것처럼 아시아 특별히 동북아시아에 있어서는 한 사람이 진리를 향한 순례의 과정을 단지 하나의 또는 한 종교의 경전을 통해서만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낯선 생각이다. 자신들의 경계를 가로질러서 다른 경전들과 텍스트를 읽는 경계 넘어 읽기(boundary-crossing reading)는 아시아와 한국이라는 다경전적 사회 속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서부터 알려진 읽기의 한 패턴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아시아적인 경계 넘어 읽기 또는 상호 텍스트적 읽기를 통해서 다른 문화와 종교들과 그들의 해석의 전통들과 자발적으로 만나 왔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의 종교문화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켜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 또는 아시아인들의 성서 읽기가 언제나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당한 가정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아시아인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성서 읽기가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경계 넘어 읽기 또는 상호 텍스트적 읽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동북아시아의 문화사 속에 이러한 경계 넘어 읽기 또는 상호 텍스트적 읽기의 예들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시아와 기독교의 만남의 역사에 있어서만도 일본의 난학, 중국의 서학, 그리고 조선에서의 서학논쟁과 자발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탄생을 생각해 볼 때, 아시아의 기독교 성서에 대한 가장 자발적인 접근은 바로 이 경계 넘어 읽기 또는 상호 텍스트적 성서 읽기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고 여겨진다. 17세기부터 동북아에서 일어났던 서학에 관한 대 논쟁은 결코 단지 식민지적 기독교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켜 버릴 수 없는 중요성을 갖는다. 유럽 선교사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아시아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위대한 동서 문명의 논쟁은 아시아인들의 해석학적 능력과 잠재력이 최대한 발휘되었던 한 사건으로 보여진다. 중국과 조선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의 경계를 넘어서서 다른 종교와 문화의 텍스트들을 만나기 위한 모험을 감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가장 자발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기독교 텍스트들을 해석하고 전유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자신들의 경전들을 새롭게 해석하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처한 문명적 해석학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 넘어 읽기 또는 상호 텍스트적 해석이라는 해석학적 과정들을 통해서 진정한 아시아 교회, 진정한 아시아 기독교와 성서가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암시하는 수많은 표징들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된다. 비록 결과적으로 선교사들에 의해서, 그리고 조선의 수구적 유학자들에 의해서 부인당하고 거절당하고 말았지만, 최초의 조선 기독교와 그것의 자발적 형성은 참된 한국교회 또는 아시아 교회를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한국적·아시아적 성서 읽기의 방법론에 대해서 참으로 중요한 시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선 실학자들의 자발적인 성서 읽기와, 그것으로부터 결과된 자발적 기독교 형성의 역사는 지금까지 식민주의적 역사 읽기와 쓰기에 의해서 정당하게 평가되어 오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도 제도권의 선교신학자들에 의해서 17세기 이후 중국에서의 예수회의 선교는 실패한 케이스의 한 전형이며, 기독교 복음에 대한 토착 중국인들의 완전한 오해로 결과했던 선교로 평가된다. 뿐만 아니다. 좁은 생각을 가진 토착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 아시아의 역사가들에 의해서는 서학을 창조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인물들을 순진한 이상주의자이거나 심하면 매국적 집단으로 폄하해 왔던 것이다. 이 양쪽 입장은 아시아인들에게 공히 인식론적 폭력을 가해 왔다고 생각된다. 가야타리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이 말하듯이 식민주의의 진수에 해당하는 제스추어는 피식민지 주체들을 주체로서의 지위를 말살하고, 그들에게 제국이 자기 스스로를 강화하기 위한 타자로서 자리를 지키도록 요구하는 그 인식론적 폭력에 대해서 눈감도록 한다는 것이다.41) 이러한 인식론적 폭력은 읽기와 해석과 실천의 진정한 주체로서 우리 자신의 자리를 말살해 버릴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가진 경계 넘어 읽기 또는 상호 텍스트적 읽기의 능력을 근본적으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제국이 자기 정체를 강화하기 위해서 사용할 타자의 자리를 지키도록 강요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여기서 경계 넘어 읽기 또는 상호 텍스트적 읽기를 한국적 성서 읽기의 한 양식으로서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방법론적 고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제국이 자기 정체를 강화하기 위한 타자로서 우리를 자리매김해 주었던 우리 자신을 이제 우리 자신들로부터 밀어내면서, 우리 스스로를 읽기와 해석과 실천의 진정한 주체로서 재선언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식민지 후기 시대에 계속되는 탈식민지적 해방의 노력이며, 나아가 한국과 아시아에 있어서 성서 해석학의 탈식민화를 선언하는 것이다.

최초의 자발적 조선 기독교 공동체의 탄생을 가져 왔던 조선 실학자들의 성서 읽기는 진정으로 한국인에 의한 한국교회,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 교회를 지향하는 한국신학과 아시아 신학을 위하여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자들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우리의 민중들의 해석학적 능력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도록 요구한다는 측면이다. 우리의 해석학적 능력에 대해서 신뢰한다는 것, 다시 말해 한국인들, 아시아인들을 진정한 인식의 주체로서 안다는 것, 그것은 회고적으로 과거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풍부한 경전적 그리고 경전 해석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현재 자신들의 생존과 해방을 위해서 투쟁하면서, 새로운 문화의 창조를 위해서 자신들을 헌신하는 한국 또는 아시아 민중들의 인식적 해석학적 능력에 대한 신뢰이다. 그들이 성서를 읽고 해석하며 실천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고유한 방법으로 진리 체험에 이르고, 이 과정 안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끊임없이 새롭게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한국적 또는 아시아적 해석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들의 투쟁안에 그 자신을 귀속시켜야 한다. 한국과 아시아 민중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곧 해석을 위한 투쟁이고, 자기 해방을 위한 해석학적 과정이다. 이 과정 안에서 성서는 가장 올바르게 한국인들과 아시아인들의 성서로 전유될 수 있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비로소 진정한 한국교회 또는 아시아 교회를 탄생하게 하는 진정한 한국 또는 아시아 신학의 수립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알로이시우스 피어리스(Aloysius Pieris)가 아시아의 가난과 종교 속으로의 아시아 기독교의 세례를 말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42) 또 송천성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함의하는 해석학적 의미일 것이다. 아시아에 있어서 신학적 재건을 위한 기본적 갈망은 기독교 신학에 단순히 아시아적 색체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신학에 동양적 향수를 뿌리려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억압과 가난과 두려움과 절망으로부터 몸과 영혼의 해방을 갈구하면서, 인간됨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투쟁하는 여성들과 남성들과 아이들의 가슴에 가 닿을 수 있어야만 한다.43) 해석학적 인식론적 탈식민화, 곧 우리 민중들의 해석학적 인식론적 능력에 대한 신뢰, 그리고 그들의 해방 투쟁 속으로의 해석학적 중심의 이동, 그리고 그들의 해방 투쟁 속에서 일어나는 다경전적, 상호 텍스트적 해석학적 과정 속에 성서와 성서 해석자들의 참여,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한국신학과 아시아 신학, 그리고 그들의 교회를 위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할 해석학적 전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아시아와 한국의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의 경험에 대해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경계를 넘어 다른 종교의 텍스트들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기본 동력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마르타에 의하면 경계 넘어 읽기 또는 상호 텍스트적 읽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자를 넘어서는 성령의 자유함이다.44) 뿐만 아니라 서남동 역시 민중의 해석을 성령론적 방법(pneumatological method)이라 불렀다.45) 다시 말해, 민중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에 의해서 민중은 교리와 정경의 경계를 넘어서서 성서를 읽고 해석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성서 이야기와 한국민중 전통 안에 있는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연결시킨다. 그래서 그 민중들의 해석은 성서 텍스트들의 새로운 의미를 위한 가능성이다. 이러한 성령에 대한 이해로부터 말한다면 자신들이 처한 사회 정치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학자들의 노력 속에 성령이 함께 하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성령은 위기 안에서 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투쟁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영이다. 사회정치적인 위기는 지금까지 그들의 해석을 지배해 왔던 해석의 전제와 원칙들이 근본적으로 의심에 붙여지는 하나의 해석학적 위기다. 이러한 해석학적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성령은 불러 일으켜 자신들의 경계를 넘어 나아가게 한다. 다시 말해 위기 속에서 성령은 진리를 향한 사람들의 순례를 끊임없이 지켜 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새로운 해석학적 모험 속으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실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경전의 경계를 넘어서 성서를 읽게 했던 것은, 자신들이 처한 사회 정치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면서 진리의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한, 새로운 해석을 위한 그들 스스로의 투쟁이었다. 여기서 새로운 해석을 위한 투쟁은 자신들의 경전을 재해석하기 위한 투쟁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경전을 향하여 모험을 가능하게 하고, 그 새로운 경전을 통해 해석의 새로운 방향과 새로운 의미들을 찾을 수 있게 하는 무엇이다.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은 그들 안에 쌓인 한으로 인해서 그들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왔었다. 물론 이것을 민중이 자신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종교나 문화나 정치 위에 있다거나, 그것으로 분리되어 살아간다고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판단된다. 차라리 민중의 초월성은 해석학적으로 말하면, 민중이 그들의 독특한 소외성, 주변성, 또는 그들이 겪는 고통으로 인해서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비판적 해석학적 거리(hermeneutical distance)를 말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은 이 해석학적 거리가 곧 초월하는 힘을 말하고, 동시에 경계 넘어 읽기와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무엇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민중은 성서를 읽되, 통상적인 해석의 기준과 원칙들을 초월해서 읽을 수 있고, 또 통상적인 경전들에 대한 구분의 원칙의 넘어서서 다른 종교의 경전들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경계를 넘어 설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동력은, 인위적인 방법론적 강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삶과 투쟁 한 복판에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아시아의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이 실로 해방 중심적인 한 방법론이 되고자 한다면, 이 경계 넘어서기의 동기와 동력이 비교 종교학적 지적 열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인들의 해방 투쟁 그 자체 안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설명해야 한다. 이 점에서, 민중신학이 특별한 강점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민중신학은 경계를 넘어서 상호 텍스트적 읽기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민중 자신들 안에, 곧 민중의 해방 투쟁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민중은 그들의 한으로 인하여 한 종교나 문화가 자신들의 제도화된 권력을 만들어 온 경계들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민중신학의 입장이다. 서남동의 합류에 대한 증언도, 그리고 김지하의 상생적 해석이라는 것도 결국은 민중이 갖는 경계 넘어서기의 해석학적 동력(Minjungs boundary- crossing hermeneutical dynamics)에 대한 증언이다. 한국 민중은 성서적 민중전통에 의해서만 자신을 표현하지 않는다. 민중은 한 경전의 경계들 안에 갖히기를 거부한다. 이것이 유영모에게서 보는 것과 같이 민중이 가진 자기 해방을 위한 집요함이요, 해방하는 진리를 향한 강고한 의지이다. 민중은 자신들의 해방을 위해서, 여기 저기서 기꺼이 진리를 구걸한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서남동의 합류는 한국 민중이 성서를 읽고 예수를 만나는 사건에 대한 증언이며, 동시에 자신의 땅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아 온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한국 민중의 해방 전통 속으로 다시 합류하는 사건에 대한 증언이다. 민중해방운동의 자리는 한국 민중들이 그들의 경계를 넘어서 성서를 향해서 나아가게 하는 자리이며, 동시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교권적 경전적 경계를 넘어서 한국 민중의 전통들과 경전들과 텍스트들 속으로 나아가게 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한국 민중신학자들이 볼 수 있었던 무엇은 제도화된 교회의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민중의 외침을 하느님으로 부르심으로 알 때, 다시 말해, 해석의 중심을 명백히 민중 안에 두게 될 때, 성서와 관련하여 민중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석학적 사건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민중 사건 안에서 본 것은 성서가 민중의 텍스트들과 상호 텍스트적 해석의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민중의 성서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이다. 결국 민중 안에서 일어나는 상호텍스트적 해석의 과정을 보면서,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성서가 진실로 한국인의 성서로 전유되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이 민중의 해방 투쟁 안에, 성서 해석의 새로운 방법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고, 그 안에 경계 넘어서 읽기의, 상호 텍스트적 해석의 기본적 동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6. 나가는 말


결국 이 글이 한국적 성서 읽기의 한 방법으로 상호 텍스트적 성서 읽기의 방법을 구체화하기 보다는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안내의 역할 이상을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오히려 수많은 해석학적 질문과 과제들을 증폭시켜 놓고 말았다. 이런 한계들을 인정하고, 던져진 과제들을 뒤로 미루면서 한국적 성서 읽기의 한 방법으로 상호 텍스트적 읽기를 제안하려할 때, 고려해야 할 두 가지 문제를 더 짚어보고, 분단체제라는 현재의 한국의 해석학적 위기와 관련하여 이 방법의 필요성을 강조해 보고자 한다.


6-1. 독자의 자리


무엇보다 먼저 상호 텍스트적 해석에 관련되어지는 해석학적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보다 분명히 설명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 독자들, 성서, 그리고 한국적 텍스트들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가정할 수 있다. 한국 독자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여기에 아시아적인 독자에 대한 이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보여진다. 청중에 대한 한 가지 이해는 청중을 명백히 자기 정체를 갖는 경전적 공동체적 경계 안에 있다고 보는 경우이다. 그 청중은 한 경전적 종교의 구성원이고, 그 종교에 의해서 공동체의 정체와 통일성이 유지되는 한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그래서 종교적 정체성과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이 구별되지 않고 일체화된다. 이러한 독자들이 수행하는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속한 종교적 공동체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 질 수 있거나, 아니면, 각기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상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종교들이나 공동체들이나 경전들과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를 수행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문제가 된다. 대개 아시아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이 갖는 독자들에 대한 이해가 여기에 속하고, 그와 같은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독자 이해는 종교적, 공동체적 정체성을 깨뜨리지 않고, 각각의 종교와 그들의 경전들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장점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독자 이해는 제도화된 경전적 종교적 경계를 넘어서 있는 영역, 또는 그러한 경계들 사이에 감추어진 영역들을 고려하고 설명하는 데는 약점을 갖는다. 불의라든가 억압이라든가 고통이라는 것은, 한 특정한 집단이나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나거나, 아니면 그러한 독립적 공동체들 사이의 갈등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많은 경우 그러한 경계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경계들 사이, 또는 간극의 영역들, 아마도 이 영역을 민중 해방운동이 일어나는 진정한 자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독자에 대한 위와 같은 이해가 갖는 문제점은 현재 아시아의 교회와 종교들을 무조건적으로 합리화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아시아에 있는 그리스도교회의 식민지적 성격에 대한 치열한 비판이 전개되어 왔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현재 제도화된 아시아의 교회들은 과연 올바른 아시아적 정체성을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던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서구 교회의 지교회로서 아시아 교회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교회로부터 부여받는 정체성이라는 것은 비판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 종교, 또는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명확한 정체 의식을 가진 독자를 고려한다는 것은 아시아와 같은 종교적 상황 속에서는 안전하기보다는 오히려 위험한 태도일 수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다른 한편, 독자들에 대한 또 하나의 이해는, 독자들을 종교 공동체들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기존의 공동체들의 경계를 활력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주체들로 보는 입장이다. 예를 들자면, 민중신학의 민중은 기존의 제도적 종교 공동체들에 의해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때로 그들은 그들 자신이 속한 종교 공동체마저도 초월한다. 뿐만 아니라, 민중신학이 보기에 이들은 제도적 종교 공동체의 경계에 묶여 있는 예수와 진리를 해방하는 역할마저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들의 상호 텍스트적 읽기는 기성의 종교적, 경전적 경계 또는 전제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통제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제도화된 종교의 경전적 전제들에 도전하기 위해서 그들의 경전 읽기를 활용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상호 텍스트적 경전 읽기는 한 종교나 그 종교의 경전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종교와 경전들로부터 구별되는 특징을 축소시키거나 무시할 위험성과,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깨뜨릴 위험성이 있다고 보여질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은 절반의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독자를 이렇게 경계들 사이의 간극에 있는 주체들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이 비판을 결코 쉽게 수긍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한 종교, 또는 한 경전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내는 올바른 방법이 무엇이냐를 문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경전 또는 종교의 독특한 성격은 기존 종교의 정경적, 교리적 이해를 무조건적으로 인정한 채, 비교 종교학적으로 추론 될 수 있는 것인가? 오히려 그 독특한 성격, 진정한 정체성은 기존의 종교적 공동체들이 만들고 있는 경계들 사이에서 투쟁하고 있는 독자들의 경험을 통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드러나게 되는 것 아닌가?

예를 들자면, 실학자들의 성서 읽기는 이미 경전화된 유교(성리학)와 기존의 기독교 신학에 대해서 도전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들의 상호 텍스트적 읽기는 유교를 근본적으로 재해석하는 결과를 가져 왔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교회와 신학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교회와 신학을 창출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그러므로 경계들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출발하는 상호 텍스트적 해석학적 과정이 필연적으로 한 종교나 성서의 독특한 성격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할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단순화다. 이렇게 독자를 경계들 사이의 간극에 위치한 독자를 상정하는 것은 유영모나 곽필란에게서 보았던 것처럼, 동북아시아의 종교문화적 맥락에서 창조적 읽기를 수행했던 역사적 독자의 모습에 훨씬 가깝다고 생각된다. 비록 보다 충분한 역사적 검토가 필요한 일이겠으나, 동북아의 사회문화적 위기 상황 속에서 출현하였던 대부분의 폭발적 상호 텍스트적 해석운동들은 종교들의 간극에서 출발하여 그 종교들의 경계에 도전하는 경로를 밟아갔다고 여겨진다. 이들이 수행하는 상호 텍스트적 과정은 단순한 종합의 과정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실학자들의 상호 텍스트적 과정에서, 두 개의 종교와 경전들이 만난다. 이것은 동시에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유교경전과 기독교 성서의 재해석과정이었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유학은 유학대로,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진정한 한국적 유학으로 진정한 한국적 기독교로 재탄생하였던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극단적 수구적 유학과, 극단적 반기독교주의라는 부정적 결과물도 나오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종교들 사이의 간극에 있는 독자에 대한 이해가 가져 올 수 있는 조야한 혼합주의의 가능성에 대해서 경계할 필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기존의 종교적 경계들에 대한 도전이 새로운 세계를 위한 각각의 종교들과 경전들이 가진 창조적 가능성을 극대화 하려는 노력이 아니고, 한 세계로부터 격리된 비의적 종교공동체를 만들려고 하는 것일 때, 그러한 조야한 혼합주의의 위험은 여전히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그 두 개의 독자 이해는 두 개의 다른 종교적 지정학적 맥락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된다. 비록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일이지만, 위험을 무릎쓰고 단순화한다면, 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서남 아시아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 아시아의 종교문화 현상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한 종교와 그 구성원들의 삶의 공동체가 맺는 관계는 양자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가령 서남 아시아에서는 종교적 정체와 공동체적 정체 사이에 사실상 거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면, 동북아에서 그렇게 일원적이지 않다고 보여진다. 그런 점에서 다종교적, 다경전적 사회라는 아시아적 특징을 공히 적용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종교들과, 경전들과, 공동체가 맺는 관계는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독자와 성서와 아시아 경전들 사이에 작용하는 상호 텍스트적 해석학적 과정 역시 달리 설명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6-2. 하나의 장애요인


둘째로, 한국에서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을 장애하는 한 요인에 대해서 검토해 보려고 한다. 비록 해석의 방법으로 구체화 이론화하는 작업을 충분히 거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충분한 역사적 선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성서 텍스트들을 한국의 종교문화적 텍스트들과 직접 관련시키려는 시도는 서구적 해석 방법에 의해서 훈련받은 소위 성서학자들에 의해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아마도 가장 좋은 예가 안병무의 경우라 생각된다. 안병무는 서남동의 합류의 방법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자신의 해석이 민중의 삶과 투쟁으로 출발한다는 점을 명백히 하면서도, 반드시 성서를 직접적으로 민중의 이야기나 다른 민중 종교적 텍스트들과 연결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한다.46) 다른 말로 하면 이미 민중의 이야기, 민중의 역사적 경험은 해석자인 자신 안에 들어와 질문이 되어 있고, 그 질문으로부터 성서를 읽고 해석하기 때문에 굳이 그 질문을 구성하는 이야기나 텍스트를 언급해야 할 필요성을 못느낀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은 여기가 서구 해석학적 전통에서 이식되어 와서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전이해(preunderstanding)라는 해석학적 개념에 대해서 강력한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곳이다. 안병무와 한국의 성서학자들에게 있어서 민중 이야기와 한국의 종교적 텍스트들은 전이해를 구성하는 요소들로서 그들의 해석학적 실천 속에서는 반드시 명시적으로 인용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무엇이다. 그런데 과연, 서구 해석학에서 말하는 전이해라는 개념은, 상호 텍스트적 해석에 독자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텍스트와 구별없이 사용될 수 있는 것인가? 특별히 단일경전적이지 않고, 다경전적이며, 단일화할 수 있는 해석학적 전통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학적 전통들이 각축하는 이 아시아와 한국에서 과연 서구적 전이해의 개념이 그런 모든 경전들과 해석의 전통들을 포괄하여 사용될 수 있는 것인가? 서구 문학비평 안에서, 이론적으로 상호 텍스트적 과정에서 독자를 통해서 이 해석의 과정에 들어오는 텍스트(상호 텍스트: Intertext)는 곧 전이해와 같은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없지 않다.47) 그러나 아시아 또는 한국을 다 경전적 상황(a multi-scriptural context)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해석학적 함의를 갖는다. 단일 경전 사회에서 이 전이해라는 것이 암시적(allusive)이고 함축적(implicit)이라 해도 별 문제가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독자를 통해서 들어오는 다양한 텍스트들을 명시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경전적 사회, 그 곳에서 경전들과 해석학적 전통들과 공동체들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런 공동체 안에서는, 텍스트들 사이의 관련성은 곧 공동체들 사이의 정치적 문화적 관련성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관련되는 텍스트들은 보다 명시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명시성은 곧 하나의 경전 또는 하나의 해석학적 전통에 의한 지배를 배제하면서, 창조적 대화의 과정을 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6-3. 현재의 해석학적 위기와 상호 텍스트적 읽기


끝으로 한국의 사회정치적 맥락의 복잡성은 경계 넘어 읽기와 상호 텍스트적 읽기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사회학자들에 의해서 분단 체제로 말해지는 오늘날의 해석학적 위기는 한국 민중들의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분단의 극복은 남한사회 내의 다양한 사회적 종교적 집단들 사이의 화해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정치적 문화적 체제를 갖고 있는 두 개의 국가와 그들이 기초로 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화해시키는 문제를 포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배타적 교단주의적 경쟁 속에서 힘을 소진하고 있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성서의 상호 텍스트적 해석은 기독교간, 집단간, 종교간, 그리고 국가간 갈등의 화해와 창조적 지양을 목표로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분단 체제라는 한국적 상황을 나는 다중의 갈등과 다양한 텍스트들의 공존으로 특징지워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 문화적, 종교적, 지역적, 계층적, 성적 갈등이 남북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간 갈등과 공존하고 있다. 단일한 모순의 원리에 의해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다축적인(multi-axial, or junctural) 이해가 요구되는 복잡한 질문들을 내포한 현실이다. 그리고 다양한 종교적 문화적 텍스트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두 개의 전적으로 다른 이데올로기적 텍스트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 사이의 배타적 대결은 남과 북 양쪽에 있어서 지배 체제를 위한 절대적으로 필요한 해석학적 수단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대결, 곧 이데올로기적 텍스트들 사이의 적대적 관계는 종교적 텍스트들의 해석을 또한 강제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런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 대결은 종교적으로 문화적으로도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적 상호 텍스트적 해석의 지평은 종교문화적 텍스트들 뿐만 아니라, 양 진영의 이데올로기적 텍스트들을 또한 포함한다. 서구에서 냉전의 종식과 함께 기독교와 맑시즘의 대화는 세계신학의 지평에서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서는 그것은 아직도 필연적이고도 실질적인 요구라고 생각된다. 이미 대화가 필요없을 정도로 세가 기울어 버린 이 상황에서 오히려 대화는 더욱 절실히 요청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굴복시켜야 할 상대가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할 상대이기에. 한국에서의 성서 해석은 이렇게 다양한 텍스트들의 존재 복잡한 대화의 과정의 필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가 없다. 상호 텍스트적 성서 해석은 이 다양한 텍스트들과의 복잡한 대화의 과정 속에 진지하게 참여하기 위한 한 노력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본다. 이 상호 텍스트적 과정 속에서 성서는 분단을 넘어서서 새로운 사회와 인간을 향한 한국인들의 진지한 노력과 다시 만나야 하고, 그러한 세계를 내오기 위해서 다른 텍스트들과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상호과정에 참여함으로서, 성서는 분단체제의 극복과 통일 시대를 위한 진정한 한국인의 성서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며, 새로운 교회와 신학을 건설을 위한 진정한 기초가 되어야 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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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1998년 6월 22일에 열렸던 제3시대 그리스도교 연구소 월례포럼 때 발표된 양권석 박사의 글을 전재한 것이다. 저자는 영국에서 성서해석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성공회 신부이며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 "The Bible and Culture Collective, Poststructuralist Criticism, in The Bible and Cultural Collective", in George Aichele … [et al.], eds., The Postmodern Bible (New Haven: Yale Univ. Press, 1995), p.130.

2) Julia Kristeva, "The Bounded Text," in Desire in Language (Oxford: Basil Blackwell, 1984), p.36.

3) Julia Kristeva, "Word, Dialogue and Novel," in Desire in Language, p.66.

4) Jeanine Parisier Plottel, "Introduction, in Jeanine Parisier Plottel," ed., Intertextuality : New Perspectives in Criticism (New York: New York Literary Forum, 1978), p. xv.

5) Ibid., p. xv.

6) Ibid., p. xv.

7) Anthony C. Thiselton, New Horizons in Hermeneutics (London: Harper Collins Publisher, 1992), p.504.

8) Roland Barthes, From Work to Text, p.168.

9) George M. Soares Prabhu, "Two Mission Commands", Biblical Interpretation 2/3 (1994), p.267.

10) George M. Soares Prabhu, "The Historical Critical Method: Reflections on its Relevance for the Study of the Gospels in India Today," in M. Amaladoss, G. Gispert-Sauch and T.K Jhon, eds., Theologizing in India (Bangalore: Theological Publications in India, 1981), pp.314~367.

11) S. J. Samartha, "Religion, Language and Reality: Toward a Relational Hermeneutics," in Biblical Interpretation, Vol.2, No.3 (1994), pp.340·343.

12) Ibid., p.343.

13) Ibid., p.340.

14) Kwok Pui-lan, Discovering the Bible in the Non-Biblical Context, p.12.

15) Ibid., p.12.

16) Ibid., p.12.

17) Ibid., p.36.

18) Ibid., p.9.

19) Ibid., p.10.

20) Ibid., p.57.

21) Ibid., pp.57~58.

22) Ibid., p.254.

23) S.J. Samartha, "Religion, Language and Reality: Toward a Relational Hermeneutics," p.342.

24) Kwok Pui-lan, Discovering the Bible in Non-Biblical World, p.8.

25) Ibid., p.12.

26) R. S. Sugirtharajah, Introduction, and Some Thoughts on Asian Biblical Hermeneutics, p.257.

27) S. J. Samartha, "Religion, Language and Reality: Toward a Relational Hermeneutics," p.344.

28) Wilfred Cantwell Smith, What is Scripture? A Comparative Approach (Minneapolis: Fortress, 1993), p.6.

29) Kwok Pui-lan, Discovering the Bible in the Non-Biblical World, p.21.

30) Ibid., p.22.

31) Ibid., p.22.

32) Ibid., p.23.

33) Kwok Pui-lan, Discovering the Bible in the Non-Biblical World, p.22. .

34) R.S. Sugirtharajah, "Inter-faith Hermeneutics: An Example and Some Implications," in R. S. Sugirtharajah ed., Voices From the Margin (London: SPCK, 1991), p.353.

35) Ibid., p.353.

36) Ibid., p.22.

37) 이성배, {유교와 그리스도교: 이벽의 한국적 신학의 원리} (분도 출판사, 1985); 김옥희, {한국 천주교 사상사 1: 광암 이벽의 서학사상 연구} (도서출판 순교의 맥, 1990). 김옥희는 유교적 본문들을 무리하게 성서 본문과 연결시키려 하면서 2부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있지만 타당성이 없다고 생각된다.

38)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한국 신학연구소, 1988), p.65.

39) 김지하, {밥} (분도 출판사, 1984), p.148

40) George M. Soares Prabhu, "Two Mission Commands : An Interpretation of Matthew 28:16-20" in the light of a Buddhist Text, p.270. 여기서 프라부는 이렇게 말한다. 힌두교도가 베다를 읽는 것이나, 불교도들이 팔리 경전을 읽는 것과는 달리, 아시아인들의 성서 읽기는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세심한 전략으로서, 일정 정도 강요된 것이거나 아니면 어떤 인위적인 시행이거나, 성질에 맞지 않는 읽기가 되거나, 아니면 교회의 정통주의나 학문적 지역주의에 대한 하나의 도전일 수밖에 없다.

41) Gayatri Chakravorty Spivak, In Other Worlds: Essays in Cultural Politics (New York: Methuen, 1987), p.209.

42) Aloysius Pieris, An Asian Theology of Liberation (New York: Orbis Books, 1988), pp.45~50.

43) C.S. Song, Third-Eye Theology (New York: Orbis Books, 1991), p.9.

44) S.J. Samartha, "Religion, Language and Reality: Toward a Relational Hermeneutics," p.344.

45)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p.78.

46) 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 p.72.

47) 다음의 글을 보라. Jonathan Culler, The Pursuit of Signs, Semiotics, Literature, Deconstruction (London: Routledge, 1981), pp.101~105.; Anthony C. Thiselton, New Horizons in Hermeneutics, pp.495~499·497.


http://minjung.peacenet.or.kr/mook/5ho/yk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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