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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10/09/12 (18:20) from 121.129.0.73' of 121.129.0.73' Article Number :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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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상대성원리



사고의 상대성원리

 

장 회 익

 

 

1.

  내가 재미있게 읽은 시 하나는 미국 작가 에드거 앨런 포우가 쓴 ‘아나벨 리’이다.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이렇다.




여러, 여러 해 전/ 바닷가를 끼고 있는 한 왕국에/ 아나벨 리라 불리는 한 소녀가 살았지./ 이 소녀는 나를 사랑하고 내게 사랑을 받는 일 외에는/ 아무 다른 생각도 없이 살았어.



우리의 절반만큼도 행복하지 못했던 하늘의 천사들은/ 그 소녀와 나를 시기한 나머지/ 바로 그거야 (바닷가를 끼고 있는 그 왕국의 모든 이들이 알다시피) 그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어/ 어느 날 밤 구름 속에서 세찬 바람을 불어내 내 아나벨 리의 몸을 싸늘하게 식히고는 데려가 버렸어.

             ⋯

 

  하늘의 천사들이 자기들에 비해 절반도 행복하지 못했다는 표현도 재미있지만, 천사들이 나와 내 애인을 시기한 나머지 내 애인을 빼앗아 가버렸다는 착상이 정말 기발하다.

  그런데 나는 칠팔년 전 당시 미국의 대통령 조지 부시의 입에서 이것과 똑 같은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9.11 사건을 저지른 것은 테러범들이 미국이 잘 사는 것을 보고 시기한 나머지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조지 부시의 상상력이 에드거 앨런 포우의 시적 상상력을 뛰어넘는다고 해야 할까?

  이와 함께 그는 곧 무제약적인 보복을 시작했다. 그는 곧바로 멀쩡한 나라 두 곳을 초토화시켰는데, 그 중 하나는 이 테러범들과 아무 관련도 없는 나라였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추정하는 바와 같이 그 이면에는 석유 이권에 대한 야욕이 있었고 자기들 힘이 무서운 것을 과시해 감히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해놓겠다는 요량도 있었겠지만, 그런 큰 힘을 지닌 나라가 한 일 치고는 치졸하기가 이를 데 없다. 결국 그 경솔함은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그 두 나라에는 물론이고 자신들에게도 끔찍한 희생자들을 내었고 천문학적인 경제적 손실도 가져왔지만, 아직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이 일로 미국의 국제적 위신은 추락할 대로 추락했고, 인류의 역사 위에도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남게 되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딱한 일이다.

  사실 그는 이러한 보복을 시작하기 전에 9.11이라고 하는 엄청난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를 좀 더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왜 멀쩡한 사람들이, 그리고 보아하니 머리도 꽤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목숨도 분명히 없어질 것을 알면서 이런 일을 저질렀겠는가? 아무리 남 잘 사는 것이 배 아프다 하더라도 도대체 그것 하나만으로 한 두 명도 아니고 수십 혹은 수백 명이 모여 하로 이틀도 아닌 장기간의 모의와 준비를 거쳐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른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는 것인가? 적어도 한 나라의 통수권자라면 이 정도의 생각은 해보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했더라면 간단한 몇 가지 사실은 곧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들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부당하게 희생을 당하다 못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하는 극한에 이르지 않고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러니까 그 어딘가에 쌓이고 쌓여있던 분노가 어떤 특별한 경로를 통해 폭발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그 분노의 원천도 곧 확인할 수가 있다. 멀쩡하게 평화롭게 사는 남의 땅에 이천 년, 삼천 년 전에 쓰인, 그 역사적 사실조차 지극히 불분명한 책 한 권 달랑 들고 들어가 이것이 내 땅이니 내놔라 한다면 그 누구 저항하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여기에 저항한다고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살상해오기를 반세기가 넘었으니 그 분노가 어디로 갔겠는가?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부시와 그 정책 주관자들이 이러한 생각에 도달한 흔적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이 이 간단한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는지 혹은 파악하고도 짐짓 이를 묵살했는지, 이들은 마치도 커다란 전쟁이라도 발생했다는 듯이 소란을 떨었다. 최첨단 군사장비에 몇 천 어쩌면 몇 만기의 핵무기까지 갖춘 이 군사 대국과 대처하는 상대는 과연 누구인가? 숨어서 활동하는 몇 백 명 혹은 몇 천 명의 맨주먹을 쥔 게릴라 전사들이 아닌가? 이들이 가진 진정한 무기란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들이 입었다고 생각하는 피해에 보복하겠다는 증오의 심정이 아닌가? 이런 최첨단의 군사력과 이런 증오의 심정 사이에도 과연 전쟁이 가능한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와 그 정책 주관자들은 이 가상의 적들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동정을 보일 여지가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나라들부터 쳐부수기 시작했다. 그 결과 9.11 사건 자체를 통해 희생된 인원수보다 수 십 혹은 수 백 배에 해당하는 살상을 일으켰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미움을 자초했고 해결의 실마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그리고 전 세계를 한 거번에라도 궤멸시킬 역량을 지닌 국가의 지도자들이,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국민들이, 이러한 지경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2.

  사실 조지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하며 엄청난 소동을 부렸지만, 최근 어느 양심적인 미국인이 밝힌 바처럼, ‘테러’라는 말 자체가 극히 일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늘의 미국 정부와 미국의 주류언론은 1770년대에 미국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들이 당시 영국에 동정적이었던 일부 주민들과 주변의 무고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가했던 테러 행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태 국가인 이스라엘을 세우는 과정에서 무장 시온주의자들이 영국 관헌들과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에 가했던 무자비한 테러 행위에 대해서도 눈을 감고 있다. 실제로 당시 테러단체를 이끌고 있던 메나헴 베긴은 이후 리쿠드 당을 조직하고 이스라엘의 수상 지위에까지 올라갔고, 그 후 리쿠드 당을 이끌었고 역시 수상까지 지낸 이작 샤미르 또한 자타가 공인하는 테러범이다. 그러니까 지금 미국이 말하는 ‘테러’를 기준으로 하자면 미국과 이스라엘이야말로 테러에 의해 건국된 테러 공화국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나간 먼 옛날의 일만이 아니다. 미국은 1973년 합법적인 칠레 정부를 쿠데타로 전복하고 (남미의 몇몇 독재자들과 합세하여) 국제 테러 조직인 ‘콘도 작전(Operation Condor)’까지 이끌고 있던 칠레의 피노체를 뒤에서 사주해 왔다. 이 테러 조직은 심지어 미국의 수도 워싱턴 거리에서까지 거침없는 테러 활동을 해 왔지만 미국은 이를 방관했다. 1976년 피노체는 쿠바 망명 테러범들을 동원해 칠레의 전 외무장관을 자동차 폭탄 테러로 살해했고, 당시 아버지 부시가 책임자로 있던 미국 CIA는 이 사건을 즉시 덮어버렸다. 그 외에도 중남미에서 자행된 수많은 테러 행위들 가운데 미국의 적극적 지원을 받거나 간접적으로 옹호된 사건들이 셀 수조차 없이 많았지만 이들은 대부분 미국의 주류 언론에는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 어쩌다가 용감한 기자가 나서서 이를 발설하거나 어떤 방식으로 기사화하는 날이면 거의 대부분 그 기자는 가혹한 보복을 받아 기자로서의 생애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최근에 발생한 이스라엘의 가자 지역 침공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이른바 테러에 대한 이러한 이중기준 적용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 쪽에서는 최신 살상무기를 활용하여 수 백 명, 수 천 명을 한꺼번에 살상해도 이것은 자기 방어를 위한 정당한 행위이며, 이에 대항해 산발적인 박격포 몇 개를 발사하면 이것은 테러 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해 미국은 아직도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으며, 미국의 위세에 눌린 전 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고 있으면서 그 어떤 효과적인 제재도 취하지 못하는 나약함을 보이고 있다.

 

3.

  그렇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일들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 것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왜 이렇게 중요한 일들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흔히 자신의 생각은 자기 스스로 해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아직 사유 능력이 미숙한 유년기를 거치게 되는데, 이때의 우리 사고는 거의 전적으로 부모와 초기 교육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다가 사춘기를 맞이하면서 자신과 그리고 주변에 통용되고 있는 생각들에 대해 한번 쯤 비판적 자세를 가져보기도 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사고에 대한 의식적인 그리고 적극적인 검토로 이어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대개는 약간의 반항이나 지적 방황을 거쳐 결국 그 사회를 주도하는 통상적 사유 속에 매몰되고 만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렇게 형성된 생각이 마치도 자기 고유의 것인 양 여기게 되며, 이후 이렇게 형성된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은 사회의 주된 사유의 흐름에 얹혀가는 셈인데, 사회의 이 주된 사유라는 것이 그리 공정한 것이라 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당연히 정치와 경제 그리고 교육과 언론을 관장하는 이른바 사회의 지도층이 주도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이미 기득권층으로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입장에 안주하게 되며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에 대해서는 되도록 눈을 감게 된다. 그렇기에 예를 들어 빈부격차의 문제에 대해서는 빈자의 입장이 반영되기가 어려우며, 남녀불평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여성의 입장이 반영되기가 어렵다. 국가나 민족 사이에 있어서도 약소국가나 약한 민족의 처지는 항상 뒤로 처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러한 점들이 사회의 주된 사고의 패턴 속에서 아예 고착되어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심지어 피해를 보는 계층의 사람들이 오히려 이를 당연시하며 앞장서서 개혁에 반대하는 경향조차 나타나게 된다. 문제를 예리하게 간파한 일부 선각자들이 이러한 불공정성에 저항하여 개혁을 시도하더라도 이를 파악할만한 의식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피해 당사자들이 오히려 이를 막아서는 일에 이용되는 일이 적지 않다.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개혁에 적극적으로 반대해온 사람들이 남자들보다는 오히려 여자들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 이를 잘 말해준다. 내 주변에 있었던 일로, 내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의기투합하여 내 누이동생의 중학교 진학을 저지하려 했던 일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런지, 나 자신에게도 어느 틈에 여자들은 남자보다 교육을 적게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고가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기득권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지더라도 어느 틈엔가 ‘현실적’이라고 하는 핑계로 이를 수용해버리게 되고, 피해자들은 너무 일찍 체념하여 이에 대한 의식 가능성조차 상실하고 마는 것이다.

  일단 상황이 이렇게 굳어지고 나면 여기서 벗어나기란 대단히 어려워진다.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이 사고의 바탕 그리고 판단의 기준 자체가 이미 이러한 방식으로 고착되어버리기 때문에 좀처럼 이를 넘어설 방법이 없다. 인간의 사고는 일종의 ‘자기 완결성’을 지니고 있어서, 설혹 외부에서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더라도 기존의 이러한 기준에 따라 취사선택되기 때문에 제한적인 영향밖에 행사하지 못한다. 한 마디로 인간의 사고는 본질적으로 자기 한계에 의해 닫혀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걱정스러운 점은 자신의 이러한 한계가 바로 그 당사자의 눈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당사자 자신으로서는 항상 자신이 이미 모든 것을 보고 있다는 착각에 잠겨있게 된다. 그의 눈에 안 보이는 것은 그 눈의 한계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없기에 안 보인다는 생각에 이르는 것이다. 9.11 이후 미국 정책 담당자들의 눈에 자기들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떠오르지 않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이러한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4.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은 정말로 없는 것일까? 나는 두 가지가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 하나는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깨고 나오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어쩌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깨우침’이라는 것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방식의 문제점은 어떤 특정의 지적 접근방법을 마련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설혹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성취하리라는 보장도 얻을 길이 없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자신의 사고에 대해 ‘상대성원리’를 철저히 적용해보는 일이다. 이것 역시 쉽지는 않지만, 구체적 절차를 따라 누구나 의도적으로 시도해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방법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이라고 하는 놀라운 새 물리학 이론을 얻어내는 데에 활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종종 ‘상대성원리’와 ‘상대성이론’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여기서 ‘상대성원리’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때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이를 파악한 내용은 표면적으로는 서로 달리보이지만, 이를 (서로의 다른 처지를 감안한) 일정한 비교의 틀에 맞추어보면 결국은 서로 같다.”고 하는 하나의 보편적 원리를 말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제안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이 현재 생각하고 있는 사고의 내용이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알아보기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해 이러한 상대성원리를 적용해 검토해나가자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할 경우, 어느 시점에서 현재 내가 지니고 있는 사고의 한계점에 부딪침을 깨닫게 되고, 이를 통해 다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상대성원리의 이러한 적용은 물리학 영역에서 이미 그 효용성이 입증된 것이지만, 이는 바단 물리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 일반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내가 여기서 제안하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상대성원리를 적용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 위해 먼저 물리학에서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것의 적용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그 첫 단계는 ‘좌표변환’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일이다. 사물을 가장 객관적으로 서술해나간다고 하는 물리학에서조차도 모든 관측은 관측자의 처지에 따라 마련된 기준 ‘좌표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하나의 대상을 놓고 관측을 하더라도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두 관측자는 그 관측내용을 각자가 지정한 자신의 좌표계를 기준으로 해서만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이 관측이 객관적인 것이기 위해서는 이 두 관측자의 관측내용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좌표계를 통해 나타난 두 관측 결과가 서로 일치하는 것임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여기에 우리는 두 좌표계 사이의 관계를 활용하여, 한 관측자의 관측 값이 다른 관측자의 관측으로는 어떠한 값에 해당하는가를 알아보는 이른바 ‘좌표변환’을 수행하게 된다. 이는 간단히 말해 두 언어 사이의 바른 번역을 통해 한 언어로 표현된 말이 다른 언어로는 무엇에 해당하는가를 살피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성원리를 적용하는 첫 단계이다. 바른 좌표변환을 수행할 때 그 두 관측결과는 서로 일치하는 것임을 확인하자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굳이 상대성원리를 들먹이지 않고도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다. 상대성원리가 말해주는 정말로 중요한 점은 그 다음 즉 두 번째 단계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새롭게 요구하는 것은, 이 두 관측자가 활용하는 자연법칙의 ‘형태’는 이들 각각이 사용하는 좌표계에 무관하게 동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일단 자연법칙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이를 어느 좌표계를 기준으로 적용하던 그 결과는 항상 동일하게 나와야 한다는 내용이 된다. 이러한 요청은 다음과 같은 매우 중대한 사실을 함축한다.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자연법칙이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이 작업은 상대성원리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결과가 되고 이는 다시 우리가 안다고 생각한 이 자연법칙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그도 아니면 우리가 활용한 좌표변환의 방식에 잘못이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좌표변환 과정에서 우리가 활용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발견하고, 그간 시간과 공간 개념에 대해 우리가 갇혀있던 폐쇄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이들이 실은 4차원의 구조를 가진다고 하는 혁명적인 발견에 이르게 된다. 이후 모든 자연의 법칙들을 4차원 시간-공간 개념을 바탕으로 재 서술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종래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새로운 사실들을 알아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태어났고 이것이 바로 상대성이론이 지니는 핵심적 내용이다. 아인슈타인의 이 작업이 말해주는 바는 자연의 서술 과정에 상대성원리를 철저히 적용시켜봄으로써 기존의 사고 체계가 지닌 한계를 발견하고, 여기에 다시 상대성원리가 만족되도록 이론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는 새 사고의 영역이 개척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정을 우리의 사고 일반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당연히 적용될 수 있으며 이러한 적용이야말로 우리의 폐쇄된 사고의 영역을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된다. 이제 하나의 사례로서 위에 언급한 문제에 이를 적용해 보자. 먼저 좌표변환의 단계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는 서로의 처지를 바꾸어놓아 보자는 이른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과정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제 단순히 ‘우리’라는 이유 때문에 ‘너희’와는 달라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자세를 벗어나 우리가 ‘너희’의 자리에 서보고 너희가 ‘우리’의 자리에 서서 우리가 보는 내용이 과연 동일한가를 확인하자는 것이다. 이는 곧 같은 9.11 사건을 놓고, 미국사람들이 보는 관점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보는 관점을 서로 처지를 바꾸어 이해해 보자는 것에 해당한다. 여기서 우리가 ‘좌표변환’을 제대로 했다면, 이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자세 뿐 아니라 상대방의 자세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미국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 사건을 보고 자신들이 분개하고 있는 것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또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자신들이 환호하고 있는 것뿐 아니라 미국 사람들이 분개하고 있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미국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세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가 바로 팔레스타인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자기는 환호를 했을 것이라는 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말하며, 반대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의 자세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가 미국 사람이었더라도 자기는 미국 사람들처럼 분노했을 것임을 자연스럽게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과연 이들은 과연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가?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미국 사람들이 굳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자세를 이해한다면, 이는 오직 이들이 본질적으로 악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이를 보고 환호했다고 하는 방식의 이해일 것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이들이 응당 받을 벌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화만 내뿜고 있는 악한 존재들이라고 하는 방식일 것이다. 결국 이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해 악마의 너울을 씌워놓아야만 상대방의 태도를 이해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는 서로 호환되는 좌표변환의 방식이 아님을 의미한다. 즉 서로가 상대방의 관점을 자기의 관점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들의 상황 이해 방식이 상대성원리에 위배되고 있음을 알게 되며, 이는 다시 이들의 사고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과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성원리를 적용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즉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한 단계 높임으로써 결국은 상대성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새로운 차원의 사고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면서도 이들의 관점이 곧 내 관점과 본질적으로 다를 수 없다고 하는 메타적 이해의 수준에 도달하게 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들이 선악의 관점에서 상황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와 함께 이처럼 선악의 관점에서 상황을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하는 사실 또한 인정하는 복합적 이해의 관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선악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협소함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동시에 이들이 선악의 관점에서 사물을 이해할 수밖에 없게 된 경위 또한 이해해야 하는 지적 과제를 끌어안게 된다. 이러한 사고야말로 선악의 관점에 매여 있던 기존 사고의 틀을 크게 벗어나는 것이며 사람들이 이러한 사고의 틀에 매이게 되는 연유마저 밝혀내는 또 한 단계의 지적 도약을 의미하게 된다. 즉 나 자신이 그들의 자리에 놓였더라면 나 또한 그러한 개념에 매몰되어 그러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으리라는 데까지 나아가 다시 상대성원리를 성립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상대방은 나 자신과 함께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편협한 사고로부터 함께 구제받아야 할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우리가 상대성원리를 철저하게 적용시켜봄으로써 이 때 발생하는 문제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기존의 내 사고가 지녔던 한계상황을 성찰하여 새로운 사고를 열어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매우 강력한 자기초월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내가 생각하는 사물 이해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상대성원리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되면, 이는 곧 나 자신이 자기 사고의 한계 상황에 갇혀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반성하자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역지사지의 관점을 취해보자는 자세를 넘어서 이를 통해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얻어내는 계기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단지 이것을 성실하게 그리고 제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누구나 아무 선입감 없이 접근할 수 있는 물리학에서 조차 상대성원리를 제대로 적용하기 위해 아인슈타인과 같은 지성이 요구되었음을 감안할 때, 정말로 주관과 이해관계에 치우치기 쉬운 사회현상에 대해 상대성원리를 제대로 적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 될 것인가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를 말해왔지만 정작 이를 통해 이런 큰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며 또 물리학의 경우 놀라운 성과를 거두어내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을 준다.

 

5.

  위에서 보았듯이 상대성원리는 진리를 찾아가는 매우 유용한 수단일 뿐 아니라 평화를 이루어나가기 위해서도 활용해야 할 매우 소중한 도구가 된다. 만일 부시가 9.11 사건 이후 전 세계를 향해 ‘우리 편 아니면 적의 편’이라고 편 가르기를 하기 전에 이 상대성원리를 한번 쯤 깊이 생각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작가 에드거 앨런 포우는 애인의 이유 없는 죽음을 상대성원리를 적용해 이해하려 했다. 천사와 자기 사이의 좌표변환이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애달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사랑이 너무도 애틋하여 자신이 설혹 천사의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보고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상대성원리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애틋한 사랑을 표현해낸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한편의 정경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설혹 상대성원리를 터무니없이 적용한 사례라 하더라도 누가 이 일을 탓하겠는가? 그러나 부시가 잘못 적용한 상대성원리는 이와 사뭇 다르다. 아랍인들이 잘 사는 미국인들이 부러워 자살 공격을 감행했다는 것은 소도 웃고 지나갈 말이지만, 이것을 마냥 웃음으로 넘길 수만은 없는 것이, 이로 인해 계산이 불가능한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성원리를 모르는 사람이, 적어도 상대성원리를 제대로 적용하려는 의지조차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엄청나게 큰 힘을 행사하게 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사례를 통해서도 똑똑히 볼 수가 있다.

 

 

 



장회익_ 물리학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전공인 물리학뿐만 아니라 과학이론의 구조와 성격, 생명문제, 동서학문의 비교연구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주요 저서로는 『과학과 메타과학』, 『삶과 온생명』, 『이분법을 넘어서-물리학자 장회학과 철학자 최종덕의 통합적 사유를 향한 대화』, 『공부도둑』,  『온생명과 환경, 공동체적 삶』 등이 있다.





* 이 글은 평화를 만드는 책『본질과 현상』 (2009년 봄, 발행인 현길언)에 발표된 것입니다.  재수록을 허락해주신 장회익 교수님과『본질과 현상』 측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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