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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7 (15:47) from 203.252.23.203' of 203.252.23.203' Article Number : 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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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넨베르크의 인간 본성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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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넨베르크의 인간 본성론 연구(A Study on Human Nature in W. Pannenberg)

김영선(신학과, 조직신학) Kim, Young-Seon
(Systematic Theology, Dept. of Theology)


I. 들어가는 말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현대의 모든 신학 논쟁은 인간학에서 그 논거를 찾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현대철학의 신 관념(神觀念) 발전에 영향을 입고 있다고 하였다. 현대철학은 신을 인간 주체성의 전제조건으로 보고 세계로부터가 아닌 인간으로부터 신을 생각하게 되었다. 현대신학이 인간중심주의로 관심을 집중하는 이유는 철학의 영향만이 아니라 기독교신학 자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첫째로 신학이 인간에 관심을 집중하는 경향은 이미 하나님의 사람됨(the incarnation of God)에 대한 초기 기독교 신앙에서, 둘째로 기독교신학 자체가 인간 구원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프로테스탄트의 신학 경향은 전반적으로 인간중심주의로 기울었다. 기독교뿐 아니라 현대 무신론으로 야기된 모든 신앙논쟁이 인간학이란 바탕 위에서 자신의 타당성을 증명하려 했다. 판넨베르크는 타당성이 없는 나 혼자만의 진리는 진리로 인정될 수 없다고 보고, 현대 기독교 신학이 보편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인간학의 바탕 위에 그 토대를 확립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바르트의 신학이 합리적 논거 대신에 신의 계시로부터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극단적인 신학적 주관주의로 흘렀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학이 현실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신학적 진술의 보편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한 바탕이 된다고 보고 현대상황에서 신학적 쟁점은 인간학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현대 인간학은 인간의 고유성을 하나님으로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세계 안에서 인간의 지위, 특히 고등동물의 존재양식과 비교 고찰함으로써 규정된다. 이것은 인간을 우주의 질서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근대 인간학에서도 인간과 동물을 비교 연구할 경우 인간의 고유한 성품을 불멸의 영혼이라는 개념에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물적 육체와 결합된 정신적 영혼을 가지고 설명하는 인간의 특수한 위치에 대한 의미부여는 19세기에 와서 점점 문제시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육체와 영혼을 나누는 이원론(二元論)을 극복하고 인간 고유성을 그 육체성에서 이해하고자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 방식의 선구자로 헤르더(J.C. Herder)와 니체(F. Nietzsche)를 들 수 있다. 이런 연구방식은 미국의 행동주의와 생물학적(동물심리학적) 행동 연구로부터 시작되었는데 막스 쉘러(Max Scheler)를 창시자로 해서 헬무트 플래스너(Helmuth Plessner)와 그후 특히 아놀드 겔렌(Arnold Gehlen)에 의해 발전되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인간의 본질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게 상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신학은 물론 철학, 심리학, 사회학, 생물학 등 여러 학문들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제안을 제시하고 있다. 신학이 인간론의 출처를 성서에서 찾는 것과 같이 여타 학문들도 저마다 인간의 삶의 경험과 현실 속에서 그 출처를 찾는다.
전통적 신학은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였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죄인의 존재가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전통신학의 인간 이해는 절대적이어서 이들과 상이(相異)한 진술의 타학문(생물학, 사회학 심리학 등)의 인간 이해를 수용하지 않는다.
반면에 현대신학은 타학문의 인간 이해를 거부하기보다는 오히려 수용하여 인간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을 새롭게 이해하고 보완하기도 하였다. 현대신학의 이런 경향은 신학적 진술의 보편 타당성의 확보와 타학문으로부터 신학의 고립을 피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신학의 고유 대상은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인간학적 관심에 의해 대치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이 보편 타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인간학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고 판넨베르크는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그자신의 보편사 신학(普遍史 神學)에 충실하면서 인간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시도해 나간다. 신학이 독선적인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학에 대한 고려를 게을리할 수 없다는 것이 판넨베르크의 기본 입장이다.
전통적 교의신학적 인간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과 '죄인'이라는 두 가지 중심 주제를 취급한다. 교의신학적 인간론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전제하고 인간론을 전개한다. 그러나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로 전제하고 인간론을 시작할 때 이런 식의 인간학은 하나님의 실재를 전제로 하고 있어서 인간학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는 논의의 가능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판넨베르크는 지적하면서 전통적 교의신학적 인간론(traditional dogmatic anthroplogy)과 구별하여 자신의 인간론을 기초신학적 인간학(fundamental-theological anthropology)이라 하였다. 이 기초신학적 인간론은 "교의신학적 기정 사실과 전제조건으로부터 토론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생리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혹은 사회학에 의해서 탐구된 인간 현상에로 정향(定向)함으로써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연관 아래 제 학문분야의 업적들에 문제를 제기하는" 인간론이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생리학은 인간을 유형으로만 다룰 뿐, 개인적 특수성을 보지 못하고,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특별히 다루는 사회학마저도 인간 현실의 구체적 모습을 다루지 못하며, 심리학도 사회학과 같은 처지에 있으나, 역사학은 인간의 구체적 삶 전체와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이들의 연대활동을 다룬다. 역사학이 인간의 구체적 삶 전체에 접근하는 반면, 다른 학문분야들은 인간 현실의 일부분만을 문제삼는다. 그렇다고 역사학이 여타의 인간학 제 분야에 토대가 된다고 판넨베르크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의미하는 바는 역사학이 다른 모든 학문분야를 그의 부분적 견해로 수용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그의 보편사 신학(普遍史 神學)의 신념에 따라 역사학을 그의 인간론 논의를 위한 중심적 방법론으로 채택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가 역사학을 중심으로 한다해서 역사학 이외의 다른 학문 이를테면 생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생물학이 인간학 연구의 기본이 된다고 보고 생물학적 인간이해를 통한 행동과학적 인간 이해를 시도하고, 이런 시도는 심리학적. 사회학적 인간 이해로 전개되어서 그가 주장하는 보편사 신학의 지평을 따라 다양한 학문들이 제공해 주는 연구 결과들을 근거로 해서 인간의 본질을 세계 개방성(openness to the world)과 자기 중심성(self-centrality)의 개념을 통하여 규명해 나간다. 먼저 판넨베르크의 인간론의 신학적 방법론이 되는 보편사 신학의 윤곽을 살펴보고자 한다.

II. 보편사 신학

계몽주의와 함께 일어났던 역사 비평학적 방법은 성서와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밝혀내면서, 성서의 구절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역사 비평 이후의 모든 신학은 역사적 사고를 염두에 두어야만 했으며, 역사적 사고와 양립될 수 없는 신학은 그 보편성을 확보하기가 어렵게되었다. 신학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신학이 여타 학문들로부터 배척되거나 고립되는 것을 지양하고, 신학을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지평으로 이끌어 내는 것을 신학적 과제로 삼았던 판넨베르크는 역사를 기독교 신앙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으로 설정하면서 기독교 진리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려면 역사 전체와 관련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미래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고리로 보편사(普遍史)를 제안한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는 과거의 지평과 현재의 지평을 미래의 지평과 연결함으로써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 즉 미래로 개방되어 있는 역사 전체의 구도 속에서 인간과 세계와 하나님에 대한 현실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따라서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미래는 모든 것을 결정하는 힘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결정하는 힘인 미래는 보편성을 담지하는 힘이기도 하다. 판넨베르크는 이 논문의 주제인 인간론은 물론 계시와 하나님의 문제도 역사의 지평을 통해서 해석하고자 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역사는 과거나 현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의해서 그 의미가 완전히 드러난다. 따라서 역사를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는 미래에 의해서만(역사의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그 의미가 알려진다. 그러므로 역사의 과정 중에 있는 현재에는 계시를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오직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계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판넨베르크는 한편으로 계시가 역사를 통해서 역사의 종말에 완전히 이해된다고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 역사의 성취 또는 끝(종말)이 이미 예수의 부활사건 안에서 예기되고 선취되었다고 본다. 즉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종말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역사의 종말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지만 판넨베르크는 역사의 종말의 선취로서 해석되는 예수의 부활 사건은 역사적 사건임을 이성적으로 차분히 논한다. 그는 이 사건의 증명을 위하여 예수의 빈무덤 사건과 예수의 부활 후의 출현 사건 그리고 예수의 부활 전의 주장을 근거로 내세운다. 그리고 종말에는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는 유대인의 묵시사상을 소개하면서 예수의 부활 사건은 종말의 예기이며 종말의 선취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통하여 종말을 선취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종말에 완전히 이해될 하나님의 계시는 종말을 의미하는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모두 밝혀지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판넨베르크의 주장은 그의 보편사 신학에 의해서 촉발되고 발전된 것으로 신학의 보편적 타당성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러한 보편사 신학은 전통적 신학의 흐름에 크게 역행하는 것이다. 전통적 신학(루터, 칼빈, 바르트 등)에서는 하나님과 계시의 인식은 이성이 아닌 신앙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은 신앙이 아닌 이성이 계시 인식을 위하여 전면에 나선다. 판넨베르크는 신앙은 그 근거에 대한 이성적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신이거나 맹신이 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신앙의 순수성을 위해서라도 신앙의 근거에 대한 이성의 지지가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판넨베르크는 신앙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지지가 없는 신앙의 위험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계시는 신앙적 특성만이 아니라 이성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이러한 인식은 계시가 역사와 관련을 맺듯이 이성 또한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의 눈을 뜨게 한다. 역사를 통해 나타나는 계시는 역사적 이성(판넨베르크의 이성에 대한 독특한 이해)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 역사적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여 신학의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의 사유구조는 계시와 이성 그리고 역사의 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III. 세계개방성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의 특별한 위치를 묻는 질문을 포함한다.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된 형이상학은 인간의 특별한 위치를 우주의 질서 속에서 찾았다. 여기서 인간은 세계 속에서 이해되었으며, 세계 속의 소우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위치를 세계 속에서 찾는 이러한 이해는 오늘날 불가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을 세계 속에 가두어 두지 않고 오히려 자연의 지배를 통해 세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본질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세계로부터 주어질 수 없게 되었고 인간 자신에게로 되돌려졌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판넨베르크는 세계로부터가 아닌 인간 자신으로부터 인간을 이해하려는 방식인 '세계 개방성'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한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고 그를 짐승으로부터 구별하는 인간의 구별형식을 표현해주는 것이 '세계 개방성'이라고 보았다.

1. 동물과 인간

제일 먼저 판넨베르크는 동물과의 비교 속에서 인간이 세계 개방적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판넨베르크는 먼저 인간과 짐승의 차이를 말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주변 세계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를 넘어서 자신을 개방하는 반면에 짐승은 고정된 일정한 주변 세계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 주변의 특이한 표지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판넨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진디기의 예를 들어서 이를 설명한다.

진드기는 시각, 후각, 열감의 세 감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진드기는 그의 피부에 있는 시각으로 나뭇가지에 붙어 기어다닌다. 후각과 열감으로는 나무 가지 아래 숨어 있는 온혈(溫血) 짐승을 알아낸다. 이것을 신호로 진드기는 가지에서 아래로 떨어져서 그 짐승의 피를 빨아먹는다.

진디기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짐승은 자신의 삶을 위해서 자신의 감각기관들을 특수화하고 특수한 표지들에 대하여 그것들이 본능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반응은 모든 짐승들에게 공통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들의 경우, 인간의 생물학적인 기관에 얽매이지 않고 그가 선택한, 그리고 그것 대신에 다른 것을 대치할 수 있어서, 그의 주변 세계에 한정되지 않는다. 하이데거(Heidegger)의 생각과 같이, 사물들은 인간에게 결코 원래부터 익숙한 것이 아니어서 인간은 사물들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사물들의 희귀성과 특수성에 대해 이른바 숨막히는 관심을 경주하는 점에서 특유하게 인간적이며 짐승과 다르다.

2, 인간과 세계 개방성

왓슨(J. B. Watson) 이후에 심리학은 의식의 개념을 포기하고 인간의 행동에 관심을 돌렸다. 왓슨은 행동을 자극에 대한 일종의 반사로서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하려 하였다. 여기에서 발전된 행동주의는 인간의 행동을 자극과 반응의 도식에 의해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동일한 자극에 대해서 상이한 반응이 나타났을 때, 이러한 도식은 수용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인간의 구체적인 행동은 이런 도식적 반응에 의해서 이해될 수 없었다. 행동주의의 문제는 반응은 자극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유기체의 독특한 내적 행동 도식에 의존한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 점이다. 로렌츠(Konrad Lorenz)에 의하면 종(種)의 다양한 반응과 행동은 경험 이전에 주어지는 타고난 내적 행동 도식에 의해 나타난다고 한다. 촘스키(Noan Chomsky)도 인간의 행동은 경험 이전에 선험적 혹은 초월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인간의 독특한 구조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았다. 판넨베르크는 이런 경험 과학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하여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의 선험적 행동 구조'의 개념을 포착한다. 이러한 구조는 위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인간과 동물과의 비교 속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동물은 생존과 삶에 있어서 타고난 자신의 행동 도식(동물의 환경 및 주변세계)에 따라 제한을 받지만 인간은 환경(본능적 삶)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이러한 특징을 '세계 개방성'이란 개념으로 표현하였다.
철학적 인간학에서도 인간의 특별한 자리를 동물적 삶의 영역이 아니라 세계 개방성이나 외심성(exocentricity)의 개념에서 찾는다. 인간을 정신적 존재로 파악하는 쉘러(Max Scheler)도 인간의 특별한 경향을 세계 개방성에서 찾는다. 쉘러는 인간의 정신은 자연적 진화로는 설명할 수 없고 긍극적 존재 근거에게로 돌려질 때 설명될 수 있다고 보고, 인간의 정신의 기원에 대한 대답을 위해서는 하나님 개념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플래스너(Helmuth Plessner)는 1928년에 출간된 그의 저서 『유기체의 단계와 인간』(Die Stufen des Organischen und der Mensch)에서 쉘러의 '정신' 개념 대신에 인간성에 있어서 외심적 입장(exocentric position)을 제시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의 표현의 중심을 자신 안 뿐만 아니라 자신밖에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플래스너가 사용하는 외심성의 개념은 "자의식의 또다른 이름이며 정신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플래스너 말하는 인간이 자신의 외심적 중심을 가지고 있는 그 밖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겔렌(Arnold Gehlen)은 쉘러의 '정신' 개념을 피하는 대신에 '세계 개방성'의 개념을 수용한다. 쉘러가 인간의 행동에서 충동이나 본능을 억제하는 것으로 정신의 개념을 도입한 반면에 겔렌은 인간의 실존 그 자체의 독특한 구조(불완전한 존재)로서 다루었다. 쉘러는 정신에 의한 억제하는 힘을 제시한 반면에 겔렌은 본능과 지각 사이의 간격을 제시하였다. 겔렌은 동물은 지각이 본능을 방출하는데 직접 기여하지만 인간은 지각이 본능적 관심에 제한되지 않고 사물들에 관심을 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쉘러가 말하는 정신의 개념을 피할 수 있었다. 인간을 생물학적 틀에서 볼 때 동물과 비교하여 인간은 신체적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겔렌은 이것을 인간의 불완전한 특성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 불완전성을 극복하려는 것이 인간의 과제인데 그것은 언어와 문화였다. 언어와 문화는 행동의 결과이다. 행동과 언어와 문화, 그리고 기술을 통해서 인간은 생물학적 결함을 극복한다. 겔렌에게 있어서 행동은 쉘러의 정신을 대체한다. 쉘러가 정신의 존재를 하나님 개념에로 돌린 반면에 불완전한 존재로서 인간의 특성을 파악하였던 겔렌은 종교와 신을 인간의 행동의 산물로서 생각했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무제한적 세계 개방성 속에서 인간을 파악하는 겔렌에 대해서 플래스너는 인간은 갓난 아이의 반사적 행동에서 보듯이 타고난 행동도식을 가지고 있어서 불충분한 개방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타고난 행동적 도식에 갇혀있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러한 행동도식을 변형하거나 초월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제한이 없다고 보아 플래스너의 비판 보다는 겔렌의 무제한적 세계 개방성을 지지한다. 따라서 판넨베르크는 쉘러나 겔렌에 의하여 언급된 인간의 세계 개방성을 어떤 주어진 상태의 특성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기실현'의 방향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세계 개방성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본성은 '역사의 결과'에 의해서 간파되어진다. 왜냐하면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인간만이 인간의 특별한 본성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형상

현대 철학자 헤르터(J. G. Herder)도 겔렌처럼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특성을 "간격과 결핍(gaps and wants)"으로 보았다. 헤르더는 이 결핍을 고도로 발달한 인간 두뇌, 혹은 이성으로 보았다. 겔렌은 인간의 행동(언어와 문화)을 결핍된 인간의 자기 향상의 원천으로서 이해한 반면에 헤르더는 인간의 자기 향상의 원천으로서 이성과 자유를 전제하였다. 그리고 헤르더는 동물에게 있어서 본능인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았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목표이자 목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이미 윤곽의 형태로 현존하고 있어서 인간의 삶에 방향을 제시한다.
판넨베르크는 전통적으로 신학에서 말해오는 하나님의 형상과 헤르더가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구분한다. 헤르더는 원래 인간은 완전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에 부정적인 반면, 전통적 신학에서는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 속에서 창조되었으나 타락에 의해서 완전성을 상실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중세 스콜라주의에서는 본래적 의는 원죄로 인해서 상실되었으나 인간 본성에 속해 있는 형상은 타락의 결과에도 계속해서 남아있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주의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유사성을 구분하면서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유사성과 형상을 동시에 상실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주의 입장과 카톨릭 입장에 차이가 있는데, 종교개혁에서는 타락으로 인해 인간 본성 그 자체가 부패했다고 보았으나 카톨릭에서는 형상은 남아 있다고 보았다. 이런 차이는 하나님의 형상의 완전 상실을 주장하는 바르트와 부분상실을 주장하는 에밀 브루너 사이의 논쟁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이런 상이한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신학적 전통은 인간이 시초에 완전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판넨베르크는 원래적 상태의 인간의 완전성을 가정하는 것은 초역사적이며 신화적일 뿐만 아니라 성서적 전통과도 모순된다고 말한다. 성서는 인간성의 성취의 지평으로 역사와 미래의 지평에 더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간의 본질은 오직 미래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운명으로 파악된다.
헤르더도 하나님의 형상은 아직 완료되지 않은 인간성을 묘사하고 있다. 헤르더의 하나님 형상의 개념은 본질적인 인간 실현의 목표로서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능력은 자기 초월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 초월은 현대 철학적 인간학에서 인간의 특별한 성격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세계 개방성과 마찬가지로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판넨베르크는 헤르더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생물학적 상황의 묘사를 통해서 중재되지 않고 바깥에서 인간학적 자료 속에 유입시킨 섭리의 사상에 의해서 중재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판넨베르크는 헤르더에게서 만족하지 못한 것을 쉘러와 플래스너에게서 찾아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쉘러에 대하여 판넨베르크가 아쉬워하는 것은 신적 실재와의 교류를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으로 보면서 정신의 개념을 도입하여 그 정신의 기원을 초월적인 것에서 찾았다는 것이다. 플래스너도 세계 개방적인 인간의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서 외심성의 개념을 취하였으나 신적 실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이 개념을 도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이 개념을 확장하여 인간 삶의 외심적 구조는 세계의 사물에 제한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개방성으로 이해하였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은 모든 경험, 주어진 상황을 넘어서 세계까지도 넘어서 자신을 계속 열고 있는 존재로 보았다. 즉 인간은 세계 개방적 존재로서 철두철미 개방성에 뛰어들도록 명령된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넘어서 "인간의 무제한한 지향을 표현하는 태도를 위해서 언어는 신(神)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있다. 신이라는 말은 그것이 인간의 무제한한 의지됨의 대상을 뜻할 경우에만 의미있게 사용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말은 내용없는 단어가 될 것이다."


4. 무제한적인 의존(신뢰)을 희구하는 존재

동물은 그 주변의 상황에 제한을 받지만 인간은 주변의 조건들에 제한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서 그 무엇인가에 의존한다. "신뢰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신뢰의 행위에서 사람은 스스로 그가 신뢰하는 자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인간은 의존하는 대상에 의지할 때에 자신을 포기한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신뢰는 다른 사람들과 접촉에서 비로소 철저히 요구된다.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상대자가 사람으로서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개방성, 즉 자신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창조적 기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인간됨의 개방성에서 의미하고 있는 것은 오직 무조건적인 신뢰의 행위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최후의 무조건적인 신뢰는 신을 가질 때에 나타난다.
신뢰는 어떤 것이든 그것이 붙들 수 있는 어떤 대상을 필요로 한다. 무한한 신은 내가 파악할 수 있도록 유한한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나의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종교들은 언제나 무한한 신을 유한한 상징들에 의해 파악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인간의 무제한한 의지는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세계 개방성의 핵심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한하게 의지하고 있는 대상을 전제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는 자기 자신을 실현시킬 수 없고, 자신의 운명을 성취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러한 의존이 인간으로 하여금 모든 제한적 세계를 넘어서게 한다고 보았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이 제한적 세계를 넘어서 외심적으로 계속해서 나아갈 때, 인간은 세계에서 인간의 삶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타자와의 관계를 맺는다고 말한다. 철저하게 세계를 넘어서도록 하는 인간의 외심적 구조에서 판넨베르크는 신적 실재를 본다. 그래서 인간의 신뢰의 문제는 인간이 종교성에 참여하게 한다.
미지의 대상에 대한 인간의 무제한한 의지(依支)는 지금 우리에게 다소 막연한 표현인 세계 개방성의 핵심으로 드러났다. 이것으로 인간은 알든 모르든 그의 삶의 수행에 의해 무한하게 의지하고 있는 어떤 대상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 그러나 인간이 무제한 의지하고 있는 그 대상이 본래 누구 혹은 무엇인지에 관해 아직 아무 것도 결정지어진 바 없다.
그러면 신뢰의 대상은 어떻게 경험되는가? 판넨베르크는 인간은 신뢰의 대상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면서 그 대상을 인격적으로 만난다고 보았다. 그 대상은 오직 인격적인 신으로서 생각될 수 있고, 우리의 무조건적인 신뢰의 행동 위에서만 경험될 수 있다. 인간의 세계 개방성과 대상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의 관련 속에서 판넨베르크가 파악한 진리는 인간의 인간다움의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와 필수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예수의 역사에서 예수가 제시한 신은 무한한 者로서, 그러나 유한한 것의 폐기로서뿐 아니라 그의 무한한 성취로서 나타났다고 보았다. 따라서 예수의 역사에 의해, 인간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참 인간이 될 수 있게 하고 세계의 모든 상황을 넘어선 무제한한 개방 중에서 인간이 될 수 있게 하는 신뢰가 일어나는 것은 예수의 역사 특히 예수의 부활 사건이다.

5.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의 존재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본질을 '하나님의 형상' 과 '무제한적 신뢰'의 개념 이외에도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고자 한다. 먼저 희망은 죽음을 넘어서는 미래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의 세계 개방성을 지시한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에 의해서 표현되는 세계 개방성과 인간의 운명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별개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이 미래적 목표로서 주어진 인간의 운명을 지시하듯이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도 세계 개방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운명을 지시한다.
판넨베르크는 자신의 죽음을 아는 것이 인간의 일에 속하는 것과 같이 죽음을 넘어서 바라는 것도 인간의 일에 속한다고 본다. 인간의 세계 개방적 목표는 세계를 넘어서 신이라는 대상을 생각하게 하는 것과 같이 그것은 죽음을 넘어선 삶도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자신의 목표의 추구에서 한없이 의지하는 신은 죽음을 넘어선 그의 목표의 성취를 위해서도 보장이 되어준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의 목표인 세계 개방성에서 죽음을 넘어서는 생을 생각하지 않고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이 죽음 후의 생을 뜻하는가? 판넨베르크는 죽음을 넘어서는 삶의 기대에 대하여 영의 불멸에 관한 헬라 철학의 가르침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기독교의 희망의 가르침에 대하여 논한다.
먼저 헬라 철학의 불사성(不死性)에 관한 사상은 몸과 영을 구별하면서 영(靈)은 죽지 않고 계속 살아 남는다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은 그의 대화록 "파에도"(Phaedo 78 b ff)에서 영의 불멸성을 주장했는데, 그에 의하면 영의 본질은 인간의 인식 정신이며, 인간이 그의 정신적 인식에 의해 물체들의 영원한 원형(原形)들에 참여하면 그의 영은 썩지 않는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영은 정신적인 것으로서 물체들처럼 결합될 수 없고 따라서 그 성분들에 다시 용해될 수도 없다.
플라톤식의 영의 불멸성에 대하여 판넨베르크는 본질적으로 육체와 구별되고 독립적으로 육체에 대립하는 특수한 어떤 영역도 없다면 영의 불멸에 관한 사상은 그 토대를 상실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육체에 대해 독립적인 실제라는 '영'만을 지닌 인간, 즉 육이 없이 영만을 지닌, 그리고 영이 없이 육만을 지닌 인간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불멸성에 대한 물음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다.
판넨베르크는 죽음을 넘어서 희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은 자들의 부활은 인간의 단순한 동경 이상의 것이다. 인간의 부활 희망은 성서적 신사상과 일치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희망에 이르는 길을 예수의 부활에서 발견한다. 즉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은 인간들로 하여금 참인간의 목표를 파악하게 해준다.
지금까지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세계 개방성의 뿌리들을 성서적 사유에서 취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판넨베르크의 인간학은 인간의 본성 속에는 동물과 구별되는 특성이 있으며, 외심적 구조와 세계 개방성 속에서 모든 제한적인 것을 넘어서는 인간의 특성을 파악하는 현대 철학적 인간학을 수용하면서, 인간의 세계 개방성은 미지의 대상에 대한 신뢰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더욱 잘 이해되어 질 수 있다고 보았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삶의 구조 속에 들어있는 세계 개방적 특성은 인간의 운명을 잘 드러내 주는 것으로 보면서, 인간의 운명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과 연결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연합하려는 인간의 성향이라고 이해하였다. 따라서 판넨베르크 인간학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세계 개방성에 의해서 인간학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에게 성취되었다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으로 주어져 있어서 미래적인 성취를 내다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II. 자기 중심성(self-centrality)

1. 인간의 고집과 소외

이제까지 우리는 인간의 본성인 세계 개방성은 본질적으로 신 개방성을 의미하고 있으며, 인간은 세계 개방성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아 완성에 이르는 도상에 있는 존재임을 말하였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본성을 세계 개방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기 중심성 혹은 자기 폐쇄성으로 해명하고자 한다. 인간은 세계 개방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자아 완성의 길을 가끔 중단하게 되는데 이는 인간의 자기 중심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간은 세계를 넘어서 신을 향해 부단히 움직인다. 그러나 때로는 인간을 신을 묻는 것을 잊는다. 인간이 신을 망각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의 안일에서 오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중심성에서 온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면서 살지 못한다. 그리고 자기자신을 주장하고 관철시키려고 노력한다. 생의 모든 풍요함을 자신을 위해 추구한다. 인간의 "자아에는 자신의 목적들과 관념들, 습성들을 고수하려는 경향성이 들어있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는 세계 개방성과 자기 중심성의 이중성이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신이 대하고 있는 현실 전체와 그 근원에 대하여 자신을 개방하는 반면에 자신을 폐쇄시키는 이중적인 경험을 한다. 이 같은 경험이 실존하는 인간의 모습이며 인간 현존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판넨베르크는 "모든 인간의 삶은 자기 중심성과 세계 개방성 사이의 긴장 안에서 수행된다"고 하였다.
판넨베르크는 개방성과 중심성 사이의 긴장 해소는 인간의 자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긴장의 해소의 근거를 인간의 자아 밖에 마련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인간이 세계를 향하여 자신을 확대시키고 자아 실현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할지라도 그 긴장을 인간 편에서는 해결할 수가 없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인간의 자아 완성과 이중성의 극복 그리고 현실 세계의 통일성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노력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 될 때, 하나님은 인간의 자아 중심성과 개방성 사이의 충돌의 극복을 보장한다.
인간은 스스로 신의 진리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그 삶은 우선 세계 개방성과 자아 사이의 충돌에서 머문다. 이때 인간은 쉽게 그의 하나님 신뢰를 자기 신뢰로 대치시키고 자기 자신을 신에 대해 자신을 닫아버리는 자기 고집에 사로잡히게 된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자신을 자신 안에 가두는 자기 고집, 하나님 신뢰를 자기 신뢰로 대치시키는 자기 고집이 인간의 죄가 된다.
하나님에 대하여 자기를 개방하지 않고 자기 중심에 사로잡히는 이 자기 고집의 상태를 죄로 보는 판넨베르크의 이해는 어거스틴의 사상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두 가지 본성을 "amor Dei"(하나님에로의 사랑)와 "amor sui"(자기에로의 사랑)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amor Dei는 하나님에로의 사랑을 위하여 자기 자신마저도 경멸할 수 있는 사랑이며, amor sui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까지도 경멸하는 사랑의 형태이다. 이와 같은 amor Dei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amor sui는 죄라고 표현될 수 있는 자기 고집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자기 고집을 죄로 보는 판넨베르크는 자기 고집 그 자체를 죄라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를 이용하여 자아를 주장하고 관철시키는 것도 죄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자기 고집이 죄가 되는 것은 "자아가 자신을 고집하고 더 높은 생의 통일성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무한한 목표를 방해하는 한, 죄가 되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자기 고집적인 폐쇄성을 죄의 본질로 간주하고, 죄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자신과 세속적 소유물 안에 갇혀 있는 자아성을 죄의 핵심으로, 그리고 죄의 현상양식인 탐욕을 촉진시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한편 신에 대해 책임적인 경외와 감사를 거부하는 불신앙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탐욕으로 나타난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자기 고집성을 인간 스스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하는 힘은 인간 외부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자아를 넘어서 우리를 우리의 목표의 도상에로 이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모든 현세적인 것을 넘어서 늘 새로이 무한한 하나님에게 마지막 신뢰를 두면서, 자신의 삶의 섭리를 하나님께 맡긴다. 이런 인간의 행동을 통하여 인간은 자기 고집이라는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희망할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판넨베르크는 '자기 고집'과 같이 인간 자신을 '소외'(고립)시키는 것도 죄라고 보았다. 판넨베르크는 아담의 죄는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떠난 것에서 찾는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죄를 인간이 그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구별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정의한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구별에 대한 거부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구분을 하게 하였고 이것은 죄를 형성하게 하였고 또한 죽음을 불러들였다.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망에서 자신을 하나님과 구별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였다.
인간의 참된 존재는 침투당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 'ego', 즉 고립되어진 개인적인 원자가 아니라, 자유하고 개방된 존재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역사의 모든 그물의 한 부분이며 특별하게는 전체로서의 인류의 한 부분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든 인류와 미래의 창조자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판넨베르크는 인간을 그 자신의 진정한 중심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테카르트 학파와 칸트 학파의 모델을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인간은 그자신의 존재와 다른 사람과 하나님과의 내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자신의 정체를 형성해 나간다. 따라서 친구와 이웃 사회와 국가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는 인간의 중심성 혹은 폐쇄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자기 고립을 죄의 본질로 간주하고, 이 자기 고립도 자기 고집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에 있다고 보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사랑으로 인하여 자기를 세계에 대하여 개방하지 못한다. 이 자기소외의 죄 또한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소외와 개방의 갈등의 해소는 인간 편에서는 불가능하고 단지 인간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하나님은 인간의 소외라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2. 인간의 시간성과 영원성

우리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세계 개방성과 자기 중심성 사이의 긴장으로 특징지어 보았다. 그리고 자아가 세계 개방성과 대립되는 자기 중심성은 자신의 인간적 목표와 신에 대해서 폐쇄적이어서 죄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인간이 세계를 넘어 하나님의 신뢰로 정향(定向)하는 세계 개방성과 인간의 고집과 소외 등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 자기 중심성과의 긴장은 영원에 대한 인간의 시간성의 대립으로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시간은 공간과 함께 인간의 기본 형식으로서, 하나님의 영원성과는 달리, 유한하고 창조되고 변화하는 개별적인 존재자와 사물들을 통해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고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비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시간으로 이해된다.
시간은 단지 시간적인 사건들에 의해서만 현재와 과거, 미래가 있을 수 있을 뿐이다. 오직 시간의 흐름에서 줄을 이어가는 사물들과 실체들, 사건들 중의 하나에 의해서만 시간은 과거와 미래로 나누어진다. 시간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은 앞의 것이 뒤의 것에 확고히 연결되어 흐르는 시간의 비반복성(非反復性)의 결과이다.
판넨베르크는 시간 진행의 비반복성을 보면서 인간은 시간을 자신의 현재와 관련하여 이해하고 경험한다. 그래서 시간의 방향들-과거, 현재, 미래-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화한다. 실제로 "무엇이 현재, 과거, 미래에 해당하는가는 그 어느 시간에 사는 사람에게 달려있다...그리고 오늘 현재인 것이 내일에는 지나간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시간의 방향들도 관찰자에 따라서 상대적이다." 따라서 인간이 처해있는 현재는 시간의 상태를 결정짓는 중심점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지나간 것을, 과거로 다가올 것을 미래로 파악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와 같은 시간 경험의 중심점으로서의 인간은 시간의 진행 과정중의 한 위치에 한정되어 "인간의 시간성은 神 및 풍요한 창조 현실에 대한 자기 폐쇄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인간의 자기 폐쇄적 시간성은 영원한 현재 안에서 극복되고 지향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시간의 흐름의 외부에서 보면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별은 사라진다. 사건들의 연속만은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현재에서 단지 한꺼번에 보여지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생은 시간에 다리를 놓아주는 현재에서 수행된다. 우리가 아직 이용하고 있는 것, 우리가 아직 결단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재에 해당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바꿀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서 과거에 속하고, 우리가 아직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은 미래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현재뿐이다. 따라서 "시간의 진리는 모든 사건이 영원한 현재에서 화합하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시간의 진리로 표현되는 영원한 현재를 하나님의 시간으로 이해한다. 이때 영원은 어떤 전혀 다른 것으로서 시간에 대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영원은 시간의 흐름에 숨어 있는 시간의 진리이다. 영원한 현재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관한 직관은 오직 시간의 흐름밖에 있는 자리로부터만 가능하다. 이런 자리는 유한한 존재에게 결코 도달되지 않는다. 오직 신만이 시간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자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원은 신의 시간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 모든 시간에 현재(現在)한다는 것을 뜻한다. 신의 행동, 그의 능력은 모든 지나간 것에도 미래적인 것에도 현재적인 것에도 미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 철학에서처럼, 영원한 현재로 표현되는 영원성은 시간성에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인 제한이 없는 상태, 즉 하나님의 무시간적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에게 시간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 혹은 영원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판넨베르크는 영원성은 어떤 전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시간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 속에 숨어 있는 시간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현재하는 모든 시간의 주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참된 영원성은 모든 시간을 다 배제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시간을 자기 밑에 거느리고 있는 그런 영원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판넨베르크는 이 시간성 안에 사는 인간은 신의 영원성에 참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있음을 본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인간은 그의 세계 개방성의 본질에 의하여 현실을 가능한 한 영원한 현재의 관점으로부터 찾는데 있다. 창조자의 대리인으로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인간의 목표에는 영원성에 참여하려는 목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신의 영원한 현재인 영원성에 참여하려는 인간의 목표는 인간의 자기 폐쇄적인 시간성에 의하여 거듭 좌절된다. 인간 시간 경험의 자기 폐쇄성은 "죄의 징후"로 나타나게 된다.
자기 중심적 시간 경험은 세계 개방의 냉철한 지성을 삼켜버려서 우리가 과거적인 것을 추모하면서 현재를 소홀히 하고 미래에 올 것을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과거의 것을 잊고 단지 자아의 눈길로 미래를 설계하는데 급급할 때 우리의 시간 및 공간 경험의 자기 중심성은 우리의 세계관계의 폐쇄, 편파성(偏頗性)의 근원이 되고 죄의 징후로 나타난다.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시간 경험의 자기 폐쇄성에 의한 영원성의 참여에 대한 좌절은 인간에게 있어서 "심판"이라고 보았다. 만약 인간이 세계 개방적 목표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자아 중심성에도 머물러 있게되면 신의 심판 앞에서 멸망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판넨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단순히 무(無)로 화(化)하지 않고 그의 무한한 목표, 건전한 전(全) 삶을 향한 그의 목표에 직면하여 파멸된다. 신과 자신의 목표에서 벗어난 존재는 영원히 고통스러운 존재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자기폐쇄성에도 불구하고 그 심판을 탈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와의 결합하는 것이다. 예수와의 결합은 심판을 통과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한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부활은 세계 개방성을 통하여 영원한 삶을 체험하고,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것을 의미하고, 심판은 인간 삶의 영원한 전체성이 인간 자신의 무한한 목표에 대한 자기 폐쇄성에 의하여 파멸되는 것을 의미한다.
"지상 현존의 깊은 영원성을 우리가 체험한다는 것은 죽음 후의 사건으로서의 부활과 심판을 의미한다." 여기서 영원을 체험하는 의미로서의 "심판은 시간을 통해 편력(編曆)하며 사는 동안에 세계 안에 은폐되어 있다." 종말에서 일어나는 우리 생의 통일은 죽음 후에 비로소 죽은 자들의 부활과 함께 우리 삶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 개방성에 의하여 부활한 예수와 결합된 자들은 심판을 통과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지금까지 논의한 세계 개방성 및 자기 중심성과 연관하여 판넨베르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면서 부활하신 예수와의 결합이야말로 참인간을 구현하는 길임을 보여준다
인간은 그의 초월적인 목표에 맞추어 살아가면서 모든 지상적인 것을 넘어서 거듭 무한한 신에게 최후의 신뢰를 두고 그의 행과 불행을 감사함으로 겸손히 신으로부터 받아들인다. 그는 신에 대한 신뢰에서 명랑하게 세계를 이용하고 그의 이웃들과 사랑으로 화합하고 그가 행하는 모든 것으로 기쁨을 드러낼 것이다. 이러한 행동에서 자아는 파괴될 수는 없을 것이다...그러나...이런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것은 삶이 우리 손에 달려있는 한 우리는 우리 자아에 의해 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예수의 죽음과 화합되어 그들의 자아 고수성이 이미 끝났다는 확신뿐 아니라 죽은 자들로부터의 그의 부활의 정신을 원천으로 새로운 삶에 도달했다는 확신에서 지금 여기에 살고있는 자들"이다.


V. 인간의 마지막 운명

I. 역사로서의 인간

판넨베르크는 "인간은 그의 본질상 역사적"(Man is by nature historical)인 존재라고 본다. 그가 이렇게 보는 이유는 "인간은 누구나 계속되는 사건 계열에서, 자신의 결단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매우 특수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내는 우연한 사건들의 연관성 있는 연속에서 살고"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은 그의 생활 역사(경로)에 의해 인간의 특수한 개성과 인간의 그때마다의 구체적 현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이었는가를 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간의 생활 경로는 결코 그의 타고난 성품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 개방성에서 의식 중에 혹은 무의식 중에 찾고 있는 신에 의한 섭리들의 연속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인간의 생활 역사에 노출되어 있고 인간의 생활역사는 다시 신에게 개방하는데 근거를 두고(Man's historicity is based on his inherent openness to God) 있다고 볼 수 있다.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은 세계 전과정을 역사로 파악한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의 정체성과 함께 모든 사물의 본질은 세계 전과정의 역사가 끝날 때 구체화되어진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역사의 끝이 도래하기 전에 인간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왜냐하면 판넨베르크 신학에 따라, 예수의 부활 사건이 세계 전과정의 역사의 종말의 선취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계시로 이해되면서, 예수에 대한 자세에 따라 모든 개인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마지막 운명은 이스라엘 신과 나사렛 예수 안에서의 그의 계시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 사건에 의하여 역사의 종말이 선취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인간의 운명은 통일적 형태를 얻는다. 물론 이를 통해 인간의 개체 운명들이 모두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모든 사람들의 통일적 목표에 관련됨으로서 조정된다. 그러므로 각 개인이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이 통일성에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된다.

2. 인간의 마지막 운명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안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예수는 완전한 인간성의 원형이라고 발견한다. 따라서 모든 개개의 인간 존재는 예수의 인간적 운명에 접근한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인간의 운명은 아직도 성취되지 못한 미래로서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인간으로서 인간이 되기 위하여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오심에 대한 오랜 투쟁은 종교 역사에 숨겨진 주제를 형성한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의 원형에 대한 논의를 위해 인간의 인격성(personality)을 들고 나온다. 판넨베르크는 6세기 초의 오스로고틱(Ostrogothic)왕 테오도릭(Theodoric)의 목사 보티우스(Boethius)가 인격을 "이성적인 본성의 개인적인 실체"라고 정의한 것을 인용하여 "개인적 존재는 한 인격일 뿐만 아니라 이성이 부여된 존재"라고 진술하였다. 이 진술은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는 희랍적 진술을 회상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희랍의 사고에서는 이성은 단순히 인간의 속성일 뿐만 아니라 신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사고되었다. 인간이 로고스를 붙잡으려는 능력은 그가 신에게 참여한다는 것을 표시해 주는 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희랍적 사고를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형상과 유사를 따라서 창조하였다는 구약성서의 진술과 오직 예수 안에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신약성서의 개념과 연결한다. 먼저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형상과 유사하게 창조하였다는 구약성서의 진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의 로고스를 수여했다는 측면에서 해석된다고 보고, 이와 같은 로고스는 예수에게 충분하게 완성적으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이것은 오직 예수에 의해서 인간의 마지막 운명이, 그의 진정한 인간성이 완전하게 인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약성서와 일치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며, 그는 처음부터 인간에 대한 신의 창조의 표준이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판넨베르크의 사고는 우리로 하여금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완성된 인간이 아니며, 인간은 그의 운명에 도달하기 위한 역사, 하나님과 함께 참되고 완전한 인간성의 실현을 위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역사의 목표는 이미 예수에게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한다.
판넨베르크에 의해서 제안된 인격에 대한 개념에 대한 재정의는 그의 인간론의 이해를 위해서 아주 중요하다. 판넨베르크는 인격을 '나'(I), '경험적인 자아'(ego)와 '자신'(self)의 통합적인 실체로 본다. 그리고 'ego'는 삶의 다양한 사건들을 경험하는 주관성으로, 'self'는 'ego'의 경험을 통합하는 객관적 실체로 간주하고, 통합하는 요소로 본다. 그에게 있어서 정체성(identity)은 오직 이 'self'를 통하여 주어진다. 따라서 'self'는 인격의 예기적인 표증이다. 판넨베르크 교리에 있어서, 인격은 'I'도 아니고 'self'도 아니다. 인격은 'I'의 현재 안에서 우리의 진정한 'self'를 통하여 각인되는 'self'의 현존인 것이다. 이 인격은 'I'의 현현을 넘어가는 신비, 아직 미완성된 전체로서의 신비와 관련되어 진다. 따라서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인격은 주관적인 'ego' 혹은 'I'를 위한 본체를 제공하는 객관적인 'self'로서 예기적으로 존재하는 미래적 실체(entitiy)로 이해되어진다.
미래적 실체로서의 인격은 양도할 수 없는 자유를 가진 존재로서 인간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분리될 수 없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자유는 개념적으로 분명히 설명할 수 없고 또한 전반적으로 현존하는 실존론적 실체로서 묘사될 수도 없다. 단직 이 자유는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현상학적으로 묘사될 수 있을 뿐이다. 판넨베르크에 있어서 인간은 과거로부터 정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와 존재는 인간의 삶에 대한 신의 선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격은 자아의 신비 안에 예기적으로 나타난 미래적 실체로서 아직 결정되어진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미래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인간은 그의 존재를 자유의 원천인 열려진 미래로부터 받는다.
마래적 실체로서의 인격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마지막 의미는 미래로부터 도착한다고 주장한다. 인격으로서의 인간의 정체는 항상 미래의 실체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지막 종말은 그 자신의 개인의 종말로부터 결정되어 진다. 개인의 본질적 미래는 전체로서의 인류의 본질적 미래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사고에서는 인간의 통일을 향한 운동이 있다. 이것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미래로부터 우연적으로 오게되는 것이다.
판넨베르크의 인간의 교리에 대한 장점은 통합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그의 존재를 미래로부터 갖는다. 인간은 그의 궁극적 의미를 위하여 미래로 되돌아 간다. 인간은 자유롭고, 유일하며 특수하다. 왜냐하면 그의 존재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부터 중개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의 자유와 특별성 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리고 그의 참된 존재를 인식하기 위하여 그의 삶을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인간은 종말에 의해서 결정되어지고, 종말에 의하여 그의 진정한 존재를 발견한다. 참으로 인간은 신으로부터 오게되며, 존재의 심연에서 이 신을 향하여 되돌아가고 있다.
판넨베르크에게 인간의 구조는 개방(미래를 향하여 열려있음)과 자아 관련성의 구조이다. 인간은 이론적, 존재론적으로 세계와 미래에 개방되어 있다. 인간은 이런 차원에서 남다르다. 그는 자유로운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존재를 받는다.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유에 의존되어 있다. 인간은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되도록 자신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에 자기 결정을 하여야 한다. 이것이 판넨베르크 인간학의 중심이다.
판넨베르크 인간학에서 분명히 제시되어지는 바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래의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 미래의 하나님 자신은 세계의 역사의 종말에서 자신을 결정적으로 계시하신다. 하나님 자신의 결정적 계시는 예수의 사역과 운명에서 완전히 계시되었기 때문에 미래의 하나님은 이미 현존하여 우리의 마지막 운명을 결정하신다. 이때야 비로소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 드러나게 된다.

VI. 나오는 말

신학은 시대 정신과 더불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신학이 이성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칸트는 '도덕'으로 헤겔은 '정신'으로 슐라이에르마허는 '직관과 감정'으로 신학을 해석하려는 경향을 지녔다. 그리고 더구나 신학 이외의 영역에서 발전된 인간학적 연구들은 신학을 완전히 인간학으로 간주해 버렸다. 이런 인간학적인 신학적 진술은 무신론적 입장을 위한 인간학적 근거를 제시해주는 모습으로 비치면서 무신론의 자리를 더욱 확대시키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런 인간 중심주의적 신학 경향이 바르트를 중심으로 한 변증법적 신학에 그 자리를 내주면서 신학적 진술은 인간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판넨베르크는 이런 바르트의 신학에 문제의식을 느끼면서 바르트의 신학은 여러 학문의 분야들 속에서 논의될 수 있는 보편 타당성의 기반을 상실하여 타학문들로부터의 신학의 고립을 초래하게 하였다고 보았다. 판넨베르크는 신학이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진술하는 한 신학적 진술은 보편 타당성을 지녀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이런 확신에 의하여 그가 가장 먼저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인간학 연구이다. 그의 저서 What is Man?(1962)이 Revelation as History(1961)이후 그의 주저 Jesus-God and Man(1964년) 보다도 먼저 출판된 되었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제까지 인간 본질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인간의 현존 양식을 세계 개방성과 폐쇄성을 나누어 인간의 본성적 면모를 살펴보았다. 먼저 동물과의 생물학적 행동비교를 통하여 인간만이 지니는 특수한 본성을 세계 개방성이라 보았다. 그리고 이 세계 개방성은 본질적으로 신 개방성(神 開放性)을 의미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는 신 개방성에서 이탈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자기 폐쇄성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개방성과 폐쇄성의 이중적 긴장 속에서 산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개방하도록 촉구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께 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은 인간의 무한한 개방, 즉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한다.
또한 인간은 역사적 존재로서, 자신의 삶의 역사를 형성해 나간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역사는 신의 계시의 장인 동시에 인간 모든 개별적 역사적 사건들을 포함하는 보편적 역사이다. 이 보편적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하여 이미 예기되고 선취된 종말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 이 보편적 역사의 선취의 장을 예수의 부활 사건에서 찾는다. 따라서 인간은 역사적 사건인 예수 부활 사건에 근거하여 신 개방성의 역사를 형성해 나간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역사는 본질상 신 개방성에 깊이 근거를 둔다. 이런 의미에서 판넨베르크의 신학은 보편적 역사를 그의 신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판넨베르크는 이 보편적 역사신학의 방법론을 가지고 신학 이외의 타 영역의 인간학적 연구 결과를 수용하여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여 무한히 개방시켜 나가는 세계 개방적 존재임을 밝혀내었다. 그리하여 신학이 타학문과의 공통적 기반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인간학적 연구가 지니는 한계점을 지적하였고 또한 신학의 고립을 초래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한 해명을 위한 공통적 기반을 제시한 점은 그의 신학적 공헌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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