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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11/01/28 (16:20) from 1.225.61.106' of 1.225.61.106' Article Number : 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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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사역과 신학의 역할




전쟁 전후의 경험들
신학을 가르치는 자로서의 나의 생활은 2차대전이 종식된 후 베를린 첼렌돌프(Zehlendorf) 에 있는 교회 신학교(Church Seminary)에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 수많은 신학지망생들은 정상 연령을 넘어섰고 전쟁 경험을 한 것이 특징이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모든 것이 파괴됨으로써 극심한 고통이 초래되었다는 측면과 교회의 투쟁과 국가 사회주의에 맞서는 교회(심지어는 공식교회까지에서도)의 고백으로 이루어진 신학교의 특수성으로 인해 주목 할만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회중사역과 신학교육을 긴밀하게 연관시켜야 할 필요성을 교수나 학생 모두가 인식하였다. 치밀한 연구에 따라 결정되는 '학문적(academic)신학'과 실제적인 요구에 따라 결정되는 '목회적 (pastoral) 신학'의 강한 결속을 위해서는 그때가 적절한 시기였다. 교회 신학교들이 학문적인 것과 목회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기초적인 변화를 창출해냈다고 말한다면 오해의 여지가 있겠지만 우리에게 신학교육을 하도록 했던 수많은 특별한 경험들은 비록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렇다 할만큼 인식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두 드러진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되었다. 예배 참석자들 개개인은 단순히 진행순서에 따르기만 하는 수동적인 관망자가 아니라 예배 가운데서 다양하고 활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교회 투쟁기간뿐이었다. 처음 경험했던 것은 공동체적인 것이었다. 즉, 찬송은 곧 신앙고백이었으며 시편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의미라고 느끼게 한 그 무엇을 알게 되었다. 예배 시간에 감옥에 갇힌 목사님들의 명단이 낭독되 었을 때 우리는 '한 지체가 고통 당할 때 모두가 함께 아픔을 나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한편, 정치적 상황 또는 우리의 교육에 영향을 끼쳤다. 처음엔 단순히 전쟁과 그로 말미암은 폐허의 기억들을 통 해서 그랬지만, 처음 몇년 동안 동부와 서부지역 출신 학생들이 베를린의 신학교에서 함께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상황은 우리의 신학 연구가 분단 국가의 정치적 상황을 전혀 무시하지 못하게 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자기중심적인 경건주의 즉, 종교적 자아와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경건주의는 우리 의 부모와 조부모 세대들이 강력히 주장하며 지켜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우리에겐 더 이상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크리스챤으로서 국가 사회주의의 출현에 대해 왜 더욱 분명하게 저항할 수 없었던가 하는 문제로 너무 많은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기에 맞설 수가 없었을까? 여전히 저마다 독립성만을 추구해왔던 교회와 신학은 우리에게 더 이상 합리적이지 못했다.
구약 성경에서의 재발견
이러한 변화는 대전 이후 구약이 신학교와 대학에서 신학교수들에게 더욱 큰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을 뜻했으며, 이는 결코 이전엔 그와 같은 정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런데 이때는 교회가 구약의 중요성을 외면할 때 역사적으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독일교회가 인식하고 있었던 때였다. 독일의 정치권은 교회가 구약과 멀어지길 기대했으며 루드비히 뮐러(Ludwing Muller)를 추종하는 독일교회의 한 유파는 정부의 이 같은 요구를 기꺼이 수락할 채비를 갖추었다. 그것이 그렇게 무리한 것도 아니었다. 당세기 초두에 잘 알려진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 (Adolf Von Harnack)은 교회는 성경에서 구약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가가 이것을 요구했을 때 우리는 오히려 선지자들의 전언(傳言)에 주의를 기울여야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왕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거스려 부당하게 행했을 때 그들을 고발했다. 그러나, 선지자들 전언의 중요성을 교회에서는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선지서들을 본문으로 한 설교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본문들은 기독교식 교육으로 는 결코 부각되지 못했다. 선지자들이 예배 때에 성도들에게 들려줄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다시 올 메시야를 알려주는 한 통로의 의미뿐이었다. 이것이 교회에 대한 그들의 유일한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것이 세번째 독일정부 기간 (Third Reich:1933~1945, 역자 주)동안 극소수 몇 사람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항했던 근본적인 이유였다. 즉, 교회들은 선지자들을 침묵하게 했던 것이다.
'유대인의 성경인 구약'을 포기하도록 하는 국가의 요구는 오히려 우리 젊은 신학자들이 집중적으로 연구해보고자 하는 동기가 되었다. 우리는 동부와 서부 출신의 학생들이 함께 연구하고 있는 신학교에 가게 되었다. 우리는 모임에서 구약을 열띠게 토론하였다. 구약이 성경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비호하는 것과 또 그것 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초래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일까?
이러한 논의 끝에 우리는 참된 발견을 했다. 구약은, 완전히 무시되지 않았을 때 신약이나 교의학의 관점에서 크게 재해석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구약 그 자체에 대하여 무엇인가 말하려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우리가 먼저 도움을 얻었던 것은 스위스 신학자 빌헬름 피스쳐(Wihelm Vischer)의 저작인 The Withness of the Old Testament to Christ(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성경의 증거, 역자 주)였다.
그러나, 그 책은 구약 본문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읽는 것은, 구약이 그 자체에 대하여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욱 지지하는 셈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칼 바르트(Karl Barth)의 책「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의 구약 부분은 가끔 그 본문이 아무 유익도 끼칠 수 없었다고 진술함으로써 더욱 빗나갔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빈약한 지식과 여러 해석자들의 모순되는 견해 속에서 헷갈렸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신학을 연구하는 동안에 구약본문 해석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얻지 못했다. 나는 시편 해석에 대한 열띤 토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우리의 순전함이 순간마다 우리를 도왔다고 생각한다.
창조에 관한 문제는 그 시대의 변화들에 대한 하나의 모형을 제시해준다. 나는 교의학자가 쓴 창조에 관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성경이 창조주와 창조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하는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 당시 신학자들에게 창조주와 창조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해줄 것이 없었다. 교의학자들이 그 문제에 대하여 오히려 더 잘 알았다. 비록 교회들이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며....."라는 식의 고백을 고수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 고백이 그들에게 더 이상 어떤 의미를 던져주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은 자연과학에 싸워 보지도 않은 채 항복했다. 세계의 기원과 인류의 기원에 관한 것은 과학의 영역이 되었고 신학자들과는 대화조차도 허용하지 않아 제안해 볼만한 것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았다. 실존주의 또한 이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학자들은 인간 존재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모든 것을 집중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것은, 만일 우리가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그것을 탐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이라고 하는 것은 피조물 전체가 포함되는 것이며, 시작부터 끝까지의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곧 '모든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재발견에 대하여 우리의 주의를 끈 것은 성경 속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성경과 자연과학, 어느 것이 옳으냐?' 하는 논쟁은 처음부터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변화된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구약이 참으로 성경에서 꼭 필요한 부분인지를 자문해봤을 때 차츰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구약은 세계의 영역과 우리의 모든 것에 실제로 관련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는 하나의 이야기를 말해준다고 했을 때, 하나님의 피조물이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서의 어느 하나는 모든 것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세계와 인류가 어떻게 존재했는가 하는 것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성경의 지혜전승, 특히 전도서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능력의 한계에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오히려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지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지가 문제이다.
성경이 피조물과 조물주에 대해서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설교, 교육 그리고, 성도들 개개인의 활동에 대해 직접 영향을 준다. 인류와 혹성, 지구를 파괴하는 힘이 바로 인간의 능력 안에 있다면,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우주의 주인이라고 성경이 말하는 바와 사실성을 의심받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토론은 변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창조기사 전체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전체로서만 인류의 창조가 의미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다. 조물주가 남자를 만든 다음 여자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인간의 창조 속에는 훨씬 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게 하신 환경,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음식물과 식료품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일 (동산을 가꾸고 보존하라는 위임-문명의 태동), 언어가 필요한 남자와 여자의 공동체 등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에 하나님의 참된 피조물로서 진실한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비로소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성경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엮어가는 확고한 관계들 속에서만 인간일 수 있다.

성경의 언어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는 성경, 우리가 지금도 성취하지 못한 것은 학문적인 부류 속에서 사용되는 진보적인 언어와 보통사람들의 언어 사이의 간격을 연결짓는 것이다. 내가 구약을 새롭게 발견해가면서 성경 속에 있는 많은 언어들의 종류에 익숙해가고 있던 때에 드러난 많은 것들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신구약 서두의 언어로서 단순한 설화적 언어였다. 뒤에 그 언어는 더욱 어렵고 복잡하게 되어서 사건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상적인 특징을 갖게 되었다. 내게 떠오른 것은, 성경 속에 나타난 간단한 기사들은 이야기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찰은 몇해 동안 어려웠던 전쟁기간에 얻은 경험으로 분명해졌다. 러시아 죄수로서 자신의 삶에 대한 저서인 「Unwilling Journey」(뜻하지 않은 여행, 역자 주)에서 고백교회(Confessing Church)의 주도적인 신학자인 헬무트 골비쳐(Helmut Gollwitzer)는 동료 전쟁 죄수들에게서 얼마나 자주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지와 참을 수 없었던 잠자리의 현실이 이 이야기 때문에 얼마나 견디기 쉽게 되었는지 말해준다. 쓰라리게 추운날 밤, 컬 스크(Kursk) 근처에서 내가 구약 내용의 절반을 얘기했을 때 임무를 다했던 기억이 있다. 신구약의 짧고 간단한 이야기들은 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이 이야기들의 표현 능력을 모두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각 각 다른 상황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들, 그리고 이전에 결코 드러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얘기한다.
전후, 몇해동안 고통을 겪으면서 좌절감과 더불어 많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베를린 신문들은 매일 아침 기아와 추위로 사망한 사람들의 명단을 보도했다. 그러나, 가끔 자선활동에 의해 굶주림으로부터 누군가가 구제되었을 때 그 소식은 전해지고 또 전해졌다. 복음은, 우리에게 새로운 현실을 맞게 해준 기적임을 설명해준다. 우리 는 이이야기들을 광야에서 방황하던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 기사들과 함께 들을 때에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 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깨달은 것은 성경은 양식(bread)에 대해서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축복의 의미인 양식과 다른 한편으로는 구제의 의미인 양식이 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일용할 양식은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의미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반면에 그 내용은 생사의 문제로서 구제 의 양식을 말한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내게 분명해진 것은 하나님의 구제사역과 축복사역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과 또한 이 두 사역이 사람들과 교제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서 필수적인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이 다. 만일 교회들이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고 관심을 갖는다면, 하나님께서 매일 공급하시는 축복의 양식을 누리는 사람들은 확신하건대 한 조각의 빵이, 임박한 죽음을 면하게 해주는 것만을 주의하는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본문에서와 같이 간구나 요청 또한 성경 언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아브라함 기사에서 반복되는 문장은 "그리고 그는 주의 이름을 불렀다"이다. 간구의 특징은 보통 하는 말과 대조적으로 먼저 가까이 다가가 매달리는 것이고, 그 다음에 응답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부족함으로 말미암은 간구이든 기쁨으로 말미암은 외침이든 부르짖음이 응당 앞선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내가 깨달은 것은 가장 절박한 상황이나 생존이 문제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짤막한 기본 문장들만 사용한다는 것이다. 어떤 종속절도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언어는 초기 인간의 짤막한 외침과 유사하다. 같은 연구를 했던 몇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도 단순한 상황이 단순한 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연구를 함으로써 나는 시편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장(場)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시편의 기도들이 우리가 하는 기도들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의 두가지 기본적인 형태는 탄식시와 찬양시이다. 즉, 극심한 비탄 속에서의 부르짖음과 그러한 슬픈 상황에서도 구원받은 사람의 기쁨에 찬 외침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이 기본적인 기도들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우리 시대의 기로의 위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또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의 기본적인 특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과 관련있다.
성경이 기도에 대해서 말할 때 탄식의 부르짖음과 찬양의 외침에 대한 시편의 구분으로 시작하지 않는 것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성경의 역사서에서 우리는 단지 한 사람의 이스라엘 왕으로부터 두 종류의 시를 듣는다. 즉, 하 나는 찬양이요, 또 하나는 탄식이다 ). 시편이 탄식과 찬양으로 구분된 것은 이 두가지의 형태가 존재한다는 사실 이상을 의미한다. 탄식과 찬양은 각각 깊은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가며 그리고 무한한 기쁨의 정점을 넘어서는 마음 의 경험을 묘사한다. 이들 시편은 기쁨과 고통으로 쌓인 인간의 삶의 모습과 생체 리듬을 마치 호흡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한다. 시편 본문에서 얻은 이런 생각은 오래동안 기도를 포기해온 사람들에게 기도의 의미를 새롭게 해 줄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이 리듬은 삶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게 해주며, 또한 삶의 의미를 찾게 해준다.
설화체와 간구체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기본적인 형태와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오히려 생각 즉, 투사(投射)의 언어로 특징지어지는 말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종종, "내가 생각할 때"(욥 23:15)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성경 속의 많은 투사적 부분에 대해서는 사건의 의미를 아는 것이 사건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 예를들면,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을 세권의 공관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사도요한이 투사적 내용들, 즉 사건들에 부여한 의미들이 더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경석의와 모든 신학적인 시도들에 있어서 사건구조의 본문들 과 투사구조의 본문들 사이에 명백한 구분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말한다. 즉, 성경의 기본 골격은 처음부터 마지막에 걸쳐 움직이고 있는 사건들에 따라서 구체화된다. 사고 구조적 (with a thought structure) 본문들 다시 말해서, 투사와 의미의 본문들은 예외없이 이러한 기본 골격에 입각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신학
지금까지의 논거는 전체적으로 성경에 관련된 것이며 이같은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신학적 과업이 오늘날 여러분야에서 나타난다. 이른바 성경신학에 대한 연구로서 신구약의 통합을 추구한다. 물론 교회의 많은 영역 들 가운데서 상황은 다양하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들,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들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교회들보다 항상 구약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 왔다는 것이다. 후자들 가운데는 예배, 설교, 찬양 그리고 기도 이 모든 것을 신약에만 기초하고 있었던 것은 일률적인 실정이었다. 만일 누군가 성경이 국가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사실에 대하 여 묻는다면 오직 신약 속에서만 답변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성경은 신약과 구약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이 단언되지만 실제로 성경적인 권위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신약성경뿐이었으며 지금도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부분적이나 마 변화를 가져오게 했던 것은 오직 교회 투쟁기간뿐이었다. 게다가 전쟁 후의 유대인 배상에 대한 관심은 이스라엘 민족의 성경 즉, 히브리 민족의 성경으로서의 구약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왔다. 이러한 관심은 계속 확대되어서 재고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끼쳐 왔다. 최종적으로 지금은 토라(Torah)에 대한 유대인들의 해석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다.
"성경신학"-노이키르케너 페를락(Neukirchener Verlag)은 「Jahrbuch fur Biblische」를 수년동안 출판해 왔다)-이 다양한 관점에서 밝혀보고자 하는 것은 신구약의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그것들을 구별되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신구약의 시간적 중심점 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그분께서 중심되셨던 그 시점 전체를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은 오직 전체를 바라볼 때만 규정될 수 있다. 신구약 모든 성경이 처음에서 마지막까지, 천지창조에서 그 종국까지에 걸친 하나의 얘기를 말하고 있으며, 이 이야기가 세계전체, 인류전체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는 재인식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풍성하심 속에 거하는 모든 것과 피조물 전체와 인간역사 전부와 가장 보잘 것 없는 것부터 가장 위대한 것까지 살피신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혜
나는 늦게나마 지혜전승에 깊이 몰두해 왔다. 좀더 이전에 이것을 연구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 분야의 도서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몇몇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것들을 읽을 가치가 있다거나, 어디에 쓰든지 간에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질문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 자료가 정확히 어떠한 방법으로 "목회를 위한 신학"의 통로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와 관심사에 대해 잠언만큼이나 그렇게 풍성하며, 그렇게 깊이 있게 말해주는 부분은 성경의 다른 책엔 없다. 인간의 말속에 얼마나 기지와 해학이 담겨 있는지 그리고 좋은 것과 힘든 것을 바라보며 경험하는 것이 이전의 전승처럼 부모에서 자녀에게로 전수되는 언어의 형태를 얼마나 물려받는지를 우리는 어디서도 보지 못했다. 그러한 금언들은 하나님의 활동에 근거해서 실재를 묘사한다.
여기에서 인간에 대하여(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다 사람들의 지혜, 즉 오랫동안 알려지며 가르쳐져 왔던 것으로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지혜뿐만 아니라 지구 전역에 걸친 선사시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에까지 부분적으로는 일치하고 있다. 약한 자들, 가난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 그리고 부정으로 희생된 자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가르침들은 모든 금언들의 결집체 속에서 나온다. 예를 들자면, 성경의 내용과 이집트인, 수메 리아인, 아카드인, 바트인 등등 다른 모든 민족들의 금언들이다. 모든 격언들은 신중하기를 권면하고 자제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경고하고 있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과 일치하는 격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잠언은 어느곳에서든지 겪을 수 있는 인간의 경험과 관찰을 담고 있지만, 말씀은 그 말씀이 전해지고 있는 특별한 상황을 말하려고 하는 바로 거기에서 깊은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면, "인간의 호흡은 주님의 등불이다"(잠20:27), "두개의 얼굴이 같지 않은 것처럼 서로 다른 것은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잠 27:19, 예루살렘 성경), "빛은 아름답고 눈으로 해를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전 11:7) 등과 같은 말씀이다.
잠언서가 증거해주는 것은 또한 신약과 구약의 일치점들이, 이전에 알려졌거나 인정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다는 것이다. 잠언에 나온 말씀 가운데 80-100가지 정도가 공관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에서 다시 등장한다. 예수님은 그 백성들의 금언적 지혜들로부터 이 말씀들을 취하셨다. 어린 시절이나 청년 시절에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삶 속에서 접하셨던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이것들을 들으셨고 나중에 말씀하실 때 사용하셨다. 그 외에도 격언들에서 형성된 여러가지 비유들과 단편설화(예를 들면, 말라 버린 무화과나무)들이 있다. 지혜 문학에서도 고대 역사속의 설화들에서처럼 성경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인간성 속에 함께 한다. 성경의 한 부분으로서의 지혜는 서로 다른 민족들과 서로 다른 시대들을 하나되도록 해준다.




클라우스 베스터만/푸프레흐트 칼 대학 구약학 명예교수 | 1990. 6.




http://www.duranno.com/moksin/detail.asp?CTS_YER=1990&CTS_MON=6&CTS_ID=6549&CTS_CTG_COD=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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