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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11/01/30 (16:09) from 121.129.0.73' of 121.129.0.73' Article Number : 609
Delete Modify 유시춘 외 Access : 4582 , Lines : 41
3.1민주구국선언 사건

1976년 3월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 신도 700여명이 모여 3·1운동 57주년 기념 미사를 올렸다. 늘 그렇듯이 미사는 경건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다면 맨 마지막 순서로 키가 작고 한없이 온순해 보이는 이우정이 다소 긴 성명서를 낭독했다는 점이다.
 
침착하고 또랑또랑한 그녀의 발언을 끝으로 평온한 가운데 신·구교 합동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은 각기 흩어졌다. 그러나 이 평범한 미사는 열흘 후 서울지검 검사장 서정각이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 전복 선동 사건’으로 규정하고 관련자 20여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입건하면서 대형 사건으로 커지고 말았다. 문제가 된 ‘민주구국선언서’는 3·1운동 57주년을 맞는 비장한 감회와 허울만 남은 민주주의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면서 세 가지 주장을 담고 있다.
 
“1.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의 국시이다.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의회정치의 회복과 사법권의 독립을 이루어야 한다. 2. 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는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3. 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질 지상의 과업이다. 민족통일의 첩경은 국민의 민주역량을 기르는 일이며 겨레를 위한 최선의 제도와 정책은 국민에게서 나와야 한다”
 
특별할 것 하나 없이 민주주의의 기본 이념을 온건하게 확인한 이 성명이 나온 경위는 이러하다. 76년 2월19일 오후 6시 서울 수유리 안병무의 집에 문익환·이문영·서남동·문동환·이우정 등이 모였다. 이들은 유신통치에 저항하는 교수들을 합법적으로 해직할 수 있는 조치였던 교수 재임용 제도에 걸려 전해에 한신대·고려대·이화여대·서울여대 등에서 각기 해직된 처지였다. 이때 문익환은 성서공회로부터 위임받은 신·구약성서 공동 번역의 막중한 임무에 골몰하던 중이었다. 그는 히브리어에 정통한 신학자이며 목사이기도 했다. 그는 75년 8월17일 절친한 벗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후, 장준하의 사진을 책상 위에 두고 지냈는데 3·1절을 앞두고 원통하게 숨진 것이 분명한 벗의 음성을 아침 저녁으로 듣게 된다. 장준하가 살아있으면 무엇을 하자고 했을까? 문익환은 3·1정신을 되새기고 오늘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것을 국민에게 호소하는 선언서를 작성하기로 하고 그 초안을 갖고 안병무의 집 모임을 주선한 것이다. 그는 이우정에게 전 대통령 윤보선의 부인 공덕귀와 이태영을 여성계 대표로 하여 서명을 받아 줄 것을 부탁했다.
 
이때 김대중은 이들과는 관계없이 별도로 3·1절 선언서를 준비하고 이태영의 남편이자 국회의원인 정일형에게 서명을 권유하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문익환 등과 함께하게 된다.
 
2월26일 이들은 다시 모여 서명 권유 대상자들 중에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되는 박형규, 성서 번역 임무를 맡은 문익환 등은 빼기로 합의한다. 이리하여 최종 서명자는 함석헌·윤보선·정일형·김대중·김관석·은명기·윤반웅·안병무·이문영·서남동·문동환·이우정 등 12명이었다. 이 성명서는 문익환의 장남 문호근이 필경하여 한빛교회 목사 이해동이 등사했다. 이를 낭독하기 좋게 문익환의 부인 박용길이 특유의 궁체 붓글씨로 써서 이우정에게 건네 주었던 것이다.
 
3월2일 국무회의 석상에서 전날의 명동성당 선언문 소식을 접한 박정희는 노발대발했부활절 새벽송 화제다. 그날 저녁부터 관련자들은 모두 중앙정보부가 ‘한성무역’이라는 위장 옥호를 내건 안가로 연행되었다. 전 대통령 윤보선을 제외하고 모두 조사를 받았다. 함석헌·정일형은 70세 이상 고령이라 하여, 김승훈·장덕필·안충석 등 신부들은 직접 가담자가 아니라 하여, 이우정은 여자라 하여 불구속 처리되었다. 결국 김대중·문익환·서남동·이문영·안병무·윤반웅·신현봉·문정현·문동환·함세웅·이해동 등 11명은 구속기소되었으며 77년 3월22일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았다.
 
불구속 피고인 함석헌은 재판 때마다 법정에 삼베 상복을 입고 나왔다. 이에 호응하느라 신부 신현봉은 판사가 피고인 이름을 부를라치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면서 앞줄로 달려나갔다. 놀란 판사에게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가 죽어서 곡을 합니다요”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달변과 정연한 논리를 비롯해 해직 교수와 목사, 신부들의 유신통치를 향한 항변은 법정을 ‘민주주의 강의실’로 만들었다.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린 암흑기에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설파하는 신부와 목사들은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신독재를 재판하는 모습이었다. 변호인측의 증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재판부에 항의해 변호인단이 사임한 가운데 재판부는 76년 8월28일 문익환·김대중 등에게 유신헌법을 비방하고 그 폐지를 선동한 죄로 8년 징역을 선고한다. 한번의 서명으로 5선 의원 정일형은 의원직을 잃는다.
 
법정의 피고인들만큼 위풍당당하고 늠름했던 것은 그들의 가족이었다. 긴급조치의 굴레는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었다. 가족들은 구속된 지 54일 만에야 첫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이 사건 재판이 있는 날이면 다른 모든 재판이 중단된 채 법원 청사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다. 법정을 기관원들로 가득 채우고 한 가족당 5장의 방청권을 발행하는 것에 항의하여 가족들은 공개재판을 요구하며 방청권을 불사르는가 하면 갖가지 소품을 고안하여 중앙청, 덕수궁, 법정 앞을 가리지 않고 유격대적인 소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고난과 승리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한복 유니폼을 통일해서 입고 ‘공개재판’이라고 선명히 쓰인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거나, ‘민주주의 회복’이라고 쓰인 양산을 받쳐든 이들의 모습은 자주 외신의 취재 대상이 되었다. 기관원들의 미행 감시를 따돌리는 절묘한 기지를 발휘하는 이 겁없은 여성들에게 긴급조치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의 평화적이되 명백히 긴급조치 위반인 시위는 길어야 20분을 넘기지 못했다. 출동한 경찰은 이들을 경찰차에 태우고 서울 외곽 한적한 교외에다 부려 놓았다. 전직 대학 교수인 이우정도,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도 기꺼이 경찰차에 실려 을씨년스러운 교외 벌판에 버려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편 이 사건으로 인하여 문익환 등은 평소 일면식도 없던 김대중과 조우한다. 이 사건은 정치인 김대중과 재야 지식인을 연결시킨 최초의 고리로, 이들의 인연은 국민의 정부 탄생 때까지 지속된다. 4년 후, ‘김대중 내란음모’라는 신군부의 터무니없는 조작극의 희생양으로 이들 전원이 기약없는 감옥을 살게 되는 것도 이 때의 인연 때문이다.
 
김대중은 푸른 죄수복 왼 가슴에 수인번호 6888호를 달고 징역살이를 시작한다. 구치소는 그가 늘 복용하는 관절약을 소지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쓸쓸한 그의 심정을 간파한 35세 젊은 신부 함세웅은 포켓 안의 작은 성경을 김대중에게 건네준다. 그런 함세웅에게 이문영이 슬그머니 농담을 날린다. 구치소 입감 절차를 끝내고 담요와 식기 등을 안고 긴 복도를 걸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는 중에. 온종일 똥냄새가 진동하고 오물투성이 쥐들이 운동회를 하는 천장에 빈대 자국이 번들번들한 방이 기다리는 줄 모르고. “이거 꼭 공항 대합실 같네요. 신부님. 안그래요? 함께 가다가 각각 다른 탑승구로 들어가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 감옥은 신앙의 새 지평을 열어주었다. 추위를 몹시 타는 함세웅은 병약한 노모가 영치해 준 담요를 끌어안으면서 비로소 성모 마리아의 고통, 세상 모든 어머니와 자녀 간 사랑의 관계를 깊이 체득한다. 평생 독신이어야 할 신부는 그것이 감옥만이 줄 수 있는 영성임을 깨닫는다.
 
신학 교수인 문동환과 안병무는 감옥에서 민중신학의 터전을 닦는다. 그들은 종교의 벽, 학문의 벽, 지식인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취조실, 고문실, 감방, 세상 한 복판 그 어느 곳이든 그곳이 사제와 목자의 자리임을 체득한다.
 
직계 가족에 한해 한달에 한번만 허용되는 면회. 그나마 면회실 내 감시는 극심했다. 더러 전달되지 않는 편지 등 독재정권의 협량(狹量)하고 비인도적인 처우는 끝없이 이어졌다. 고난의 와중에서도 그들은 변호사 접견 시에 동행한 부인에게 번개같이 달려들어 포옹하고 더러 뽀뽀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당황하는 교도관에게 문동환의 미국인 부인 문혜림은 태연하게 되묻는다. “뽀뽀는 내가 하는데 왜 아저씨 얼굴이 빨개지나요?”. 그녀는 훗날 불우한 기지촌 여성을 위한 공동체 ‘두레방’을 설립해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조용히 봉사한다.
 
머리맡의 물그릇이 얼어터지는 감옥 안에서 문익환은 ‘꿈을 비는 마음’에 충만한 시인으로 탄생한다. 그는 어린 날 북간도 명동촌 친구였던 윤동주의 정결하고 따뜻한 시 세계에 완전하게 다가선다. 감옥은 그들 모두에게 새로운 생명을 준 태반이었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종합기획부장) 김재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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