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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11/07/26 (10:40) from 1.225.61.15' of 1.225.61.15' Article Number :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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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 이야기』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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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 이야기』 서평

박창수

1. 들어가는 글

필자가 민중신학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약 20년 전, 서남동 교수의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1983년)를 읽었을 때였다. 지금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성경의 민중을 ‘암하레쯔’로 칭한 부분과 김지하를 인용하여 ‘한(恨)과 단(斷)의 변증법적 통일’을 논한 부분이다. 필자는 민중신학하면 이 두 가지가 바로 떠오르곤 했다.

그런데 올해 민중신학을 오랜만에 두 번 접할 기회가 있었다. 하나는 봄에 열린 한국구약학회·한국신약학회 공동 주최 춘계학술대회에서였다. 구약 분야 중 하나에서 이동규 교수가 “요시야 개혁과 암 하아레츠 - 사회 정치적 이해”를 발제했는데, 암 하아레츠를 “땅을 소유한 일종의 귀족 집단”이며, “사회학적 견지에서 볼 때, 그 사회의 분명한 지배계층”이라고 기술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암 하아레츠는 서남동 교수에 의하면 민중신학의 그 민중이 아니냐고 질문했더니, 그 자리에 참석하고 있던 임태수 교수를 비롯한 민중신학자들이 모두 “암 하아레츠를 민중으로 기술한 것은 오류였고, 지금은 더 이상 민중신학에서 암 하아레츠를 민중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답변하였다. 신선하고 인상적인 경험이었는데, 그 이유는 민중신학을 비롯하여 모든 신학이 오류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했는데, 중요한 것은 오류 그 자체가 아니라 오류가 발견될 때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인정하고 시정하려는 열린 태도라는 점을 그 자리에 참석한 민중신학자들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올해 민중신학을 접한 또 하나의 기회는, 월간 <기독교사상>의 지상 논쟁을 통해서였다. 설교비평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정용섭 목사가 <기독교사상> 4월호에 “진보신학, 비판적 성찰 - 민중신학을 중심으로”를 기고함으로써 논쟁이 점화되었다. 이에 대해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조수현 목사가 그 다음호에 “신학은 민중신학이다 - 정용섭 박사의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읽고서”를 기고하면서 반론을 펼치면서 양자 간에 논쟁이 전개되었다. 정용섭 목사의 민중신학 비판에는 참신하고 공감되는 부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예컨대 민중신학의 민중 개념에 대한 문제 제기와 같이, 이미 지금부터 30년도 훨씬 지난 1975년에 동일한 비판에 대해 서남동 교수가 답변한 것과 같이 오래 전부터 나온 식상한 것들도 있었다. 또 정용섭 목사가 “민중신학 계열의 진보적 인사들”이라고 그릇되게 싸잡아 표현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한미FTA를 반대하는 것은 관념적이라고 치부한 것과 같이, 사실 관계를 잘 모르면서 가한 무례하고 황당한 비판도 있었다.

약 20년 전에 처음 접한 민중신학을 올해 두 번의 계기를 통해 다시 접하면서, 민중신학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났던 차에, 안병무 박사의 『민중신학 이야기』(한국신학연구소, 2005년)를 읽은 것은 흥미롭고 유익했다. 안병무 박사는 확실히 대가다웠다. 잔가지에 매이지 않는, 선이 크고 굵은 대학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안병무 박사의 위대한 점은 지식인으로서 자기비판에 철저하다는 점이었다. 또 상황의 소위 ‘민중사건’도 놓치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성서를 민중신학의 관점으로 꿰뚫고 있다는 점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안병무 박사의 주장들 가운데에는 거칠고 무리한 주장이라서 동의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안병무 박사의 민중신학 이야기를 관통하면서 번뜩이는 중요하고 신선한 통찰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배울 수 있었다.

2. 개요

『민중신학 이야기』는 안병무 박사가 민중과 민중신학을 발견하기까지의 개인적 인생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책의 전반부는 안병무 박사가 쓴 ‘3판에 붙이는 글’과 같이, “성서관, 그리스도론, 신론, 교회론, 죄론, 성령론, 하느님의 나라 등 조직신학에서 가장 중심적인 주제들을 민중신학의 측면에서 풀이해 본 것”인데, 개인사와 더불어 이 책의 전반부는 안병무 박사가 민중신학의 후학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후반부는 “오늘의 한국의 민중사건을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하고 거기에 동참할 것인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일본에서 한 네 편의 강연을 실은 것”인데, 그 강연들은 “성서, 예수, 교회 그리고 부활 등을 한국에서 일어나는 민중사건 속에서 이해”한 내용이다. 이 서평에서는 분량의 한계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을 조목조목 전부 다루지는 못하고 필자가 인상 깊게 읽은 부분들을 10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한다.

3. 평가

 1) 성서와 사회변혁 운동

안병무 박사는 성서로부터 사회변혁 운동의 구체적 대안을 찾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먼저 그는 불트만을 인용하여, 성서로부터 사회변혁 운동의 행동지침, 정책, 방법, 전략전술, 사회윤리 등을 끌어내는 것은 넌센스라고 치부한다.

“내가 아는 건 이래요. 성서는 우리에게 이때는 이래라 저때는 저래라 하고 세밀한 지시를 하지 않는다. 시대적인 거리도 있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성서로부터 우리의 행동지침이나 사회윤리를 끌어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에 대해선 나는 불트만에 동의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고 현장으로 밀어냅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성서는 함구합니다. 그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싸워야 하는가? 전략전술은 어떠해야 하는가? 데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런 것을 성서에서 찾는다면 그건 웃기는 얘깁니다. 그것은 현실 속에 있는 내가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성서로부터 유리되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서는 내게 계속 사랑과 정의의 행동을 하라고 요구해오는 것입니다. 유리란 있을 수 없어요. 거듭 말하지만, 가령 노동운동을 성서적으로 해 보자거나 농민문제를 성서적으로 풀어보자거나 하는 것은 넌센스예요.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은 보호해야 한다. 성서는 거기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방법론을 얘기하는 데 있어서는 그리스도인이거나 아니거나 전혀 상관이 없이 모두 같은 인간의 자격으로서 얘기할 뿐입니다.”(77쪽).

이어서 안병무 박사는 정책과 방법 등은 성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런 정책이 좋겠다. 저런 방법이 좋겠다. 그건 인간에게 맡기는 겁니다.”(77쪽). 질문자가 “정책 프로그램을 성서에서 구해서는 안된다”는 세군도의 말을 인용하자, 이에 대해 안병무 박사는 동의하면서, “그건 이미 불트만이 한 말”이라고 재차 언급한다(77-78쪽).

그런데 질문자가 안병무 박사에게 “현장에서 목회를 하거나 민중들과 더불어 싸우고 있는 분들은 실제적인 필요에서 그리스도교적인 지침이랄지 그런 것을 절실하게 요청”(78쪽)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자, 이에 대해 안병무 박사는 자신에겐 기독교적 지침을 제공할 능력이 없고 또 그렇게 하려는 것은 자신과 같은 신학자에겐 주제 넘는 생각이며, 그것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몫이라고 답변한다.

“그건 이래요. 내가 거듭거듭 얘기하는 거지만, 내가 일부러 그 문제를 멀리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내겐 그걸 할 능력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해야 한다는 주제넘는 생각을 안 하는 것뿐이지요. 난 오히려 생각하기를, 만일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현실문제의 해답을 구하려고 노력한다면 훨씬 분명한 정책이나 전략의 방향을 민중신학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면에서는 나는 겸손하려고 해요. 그 일은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데 그 분들이 그 일을 자꾸 미루고 있다는 느낌이예요. 그런 일까지 신학하는 사람이 독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78쪽)

안병무 박사는 현실문제의 해답, 정책, 전략은 성서로부터 이끌어내서는 안되고, 또 이것들은 신학자가 아니라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주장이다. 성서를 역사적 상황과 문맥에 관계없이 현대에 문자적으로 관철시키려고 하는 성서주의(Biblicism)는 경계해야 하지만, 성서에 담긴 원리를 찾아내어 현대적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것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인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사회변혁 운동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기독교 사회변혁운동이라면 그 목표뿐만 아니라 행동지침, 정책, 방법, 전략전술, 사회윤리 등 구체적 대안을 위한 원리도 당연히 먼저 성서로부터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안병무 박사가 성서로부터 사회변혁운동을 위한 구체적 대안의 원리를 찾아내려는 노력 자체를 아예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2) 희년

안병무 박사는 “민중신학의 시각에서 성서의 핵심과 그 맥”(78쪽)을 짚어달라는 질문자의 요청에 대해, 성서의 핵심은 ‘해방사건’이며, 그 동안 민중신학에서 가장 많이 언급했던 성서구절들이 바로 그 해방사건의 맥에 속하는 것들이었다고 답변하면서 제일 먼저 희년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맨처음부터 가장 우리의 주의를 끌었던 것은 루가복음 4장 18-19절입니다. 마르코는 예수의 선포의 핵심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1, 15)로 보았는데 루가는 그것은 바로 해방을 뜻한다고 본 것입니다. 18절의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눌린 자를 놓아주고”에서는 둘 다 aphesis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그것은 aphiemi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종을 “해방한다”, 빚을 “면제해준다”, 죄를 “사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결국 해방한다는 뜻이지요. 19절에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희년제도를 말한다는 것이 정론인데 그러면 그것은 바로 해방의 해라고 풀이하는 것이 적절하겠습니다. 희년은 포로를 석방하고 종된 자를 해방하고 뺏은 토지를 돌려줌으로써 잘못된 관계에서 풀려나는 해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다 알다시피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사실상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석방되어 잃었던 자기 땅으로 돌아와 새 나라를 세우는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것입니다.”(78-79쪽).

이어서 안병무 박사는 “우리는 이 성서구절을 계속 반복했고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는 현장에서 인권투쟁의 깃발처럼 내세웠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희년은 민중신학이 내세운 인권투쟁의 깃발이었다. 희년에 대한 이런 강조는 서남동 교수도 마찬가지이다. 서남동 교수는 희년을 그의 책, 『민중신학의 탐구』의 본문이 시작되는 첫 페이지에서 제일 먼저 이야기할 만큼 희년을 중시한다. 서남동 교수에 의하면, “예수님이 30세쯤 되어서 세례와 시험으로, 고난받고 억압당하는 민중과의 동일성을 확인한 다음, 그의 공적 생애에 등장한 제일성(第一聲)은” 바로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서남동 교수는 희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의 출현의 제일성, 그 출현 자체가 ‘주의 은혜의 해’의 선포라고 했다. 이 말은 또 ‘속죄의 날’ 안식년(安息年), 희년(禧年), 성년(聖年), ‘요벨[羊角]의 해’라고도 불리는 경축의 해, 해방의 해다. 『구약성서』의 「레위기」·「신명기」 등에 보면 7년에 한 번씩 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거듭하면 49년이 되고, 그 다음해 50년째 되는 해는 희년, 성년, ‘주의 은혜의 해’로 선포하도록 되었다. 그 해가 되면 매수(買收)했던 농토는 원소유자에게 돌려주고, 집에서 부리던 종들은 해방해서 자기들의 고향에 돌아가게 하고, 모든 금전적인 부채는 없는 것으로 환원하고, 심지어는 농토나 농기구까지 쉬게 하는 해방의 해다. 이것을 가리켜서 ‘속죄의 날’이라고 했다. 속죄는 이렇게 사회적·정치적 해방과 신생의 뜻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것은 도덕적·종교적인 죄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사회와 역사에,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서 누적되고 경화(硬化)되는 구조악(構造惡), 원죄(原罪)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속죄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혁명이다. 그것은 집단적인 회개이고 사회적인 속죄이며 공동체의 종교체험 엑스타시이다.”

그런데 안병무 박사와 서남동 교수의 희년관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이 혼재되어 있다. 먼저 나사렛 메시아 선언에서 선포된 ‘주의 은혜의 해’는 누가복음 전체 맥락에서 안식년과 희년을 통칭하는 것인데, 안병무 박사와 서남동 교수는 희년으로만 해석하고 있다. 다만 안식년은 희년과 그 정신이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넓은 의미에서 희년 연관법으로 함께 묶을 수 있다. 다음으로 안병무 박사는 “희년은 포로를 석방하고 종된 자를 해방하고 뺏은 토지를 돌려줌으로써 잘못된 관계에서 풀려나는 해”라고 했는데, 이것은 신학자들이 흔히 피상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해석이다. 대표적으로 토지의 경우, 희년은 안병무 박사의 해석처럼 ‘뺏은 토지’를 돌려주는 해가 아니라, 서남동 교수의 해석처럼 ‘매수(買收)했던 농토’를 원소유자에게 돌려주는 해이다. 왜냐하면 토지를 사고 팔 때 영원히 매매하는 것은 금지되고 오직 도래하는 다음 희년까지만 한시적으로 토지사용권을 매매하는 것이기 때문에, 희년이 되면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자연스럽게 토지를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에서 부리던 머슴과 종은 히브리 사람인 경우, 그 고용계약이 원래 도래하는 다음 희년까지만 한시적으로 체결한 것이기 때문에, 희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그 머슴살이와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기들의 고향집에 돌아가서 가족들과 재회하고, 희년에 동시에 회복하는 자기 가족의 기업 토지에서 다시 자영 노동을 할 수 있게 된다. 또 채무 탕감은 서남동 교수의 오해처럼 희년이 아니라 원래 안식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안식년과 희년에 대하여 안병무 박사의 해석에서 독특한 것은 안식년이 안 지켜지니까 희년을 정해서 사회대개혁의 해로 삼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의 논거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년과 희년이 동시에 율법으로 이스라엘에게 수여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 주장에 동의하기 힘들다.

“7년마다의 안식년제도가(토지를 쉬게 하는 것 외에는) 제대로 안 지켜지니까 결국 7×7=49년 되는 해를 설정하고 이때를 사회대개혁의 해로 삼았습니다. 독점된 토지를 돌려주고 빚을 면해주고 가난 때문에 스스로 노예가 된 자들을 풀어주는 등 독점화한 것을 놓아주도록 했습니다.”(252쪽).

그리고 안병무 박사는 희년 제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 과정이며 그 성격은 해방이라고 주장한다.

“루가는 하느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느냐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대답해야 할 단계에 왔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희년제도를 하느님 나라 실현 과정으로 본 것입니다. 그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면 해방입니다.”(251쪽).

이어서 그는 “희년 제도에서 해방이라는 것은 하느님 나라 도래의 내용에서 중요한 것의 하나”(252쪽)라고 강조하지만, 희년과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에서, 희년의 한계도 지적한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는 일단계적으로 희년으로 구상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의 행태가 그것을 반영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것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그의 하느님 나라는 희년마저 넘어서는 궁극적인 현실입니다.”(252-253쪽).

필자는 하나님의 나라야말로 궁극적이요 희년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단계적 구상이라는 안병무 박사의 지적에 절대 공감한다. 희년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갖는 의미와 한계를 모두 인식하는 것이 오늘날 희년 운동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3) 구원

질문자가 “찬송가나 일반 신도들의 신앙의식에서는 그리스도가 아주 개인적이고 종교적 인격적으로 생각”되고 있다면서, “순복음 교회를 위시해서 많은 교인들이 이 나라의 민중인데 주로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이고 영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하자(119쪽), 안병무 박사는 ‘구원은 물질적 언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펼치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자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먼저 구약 시편을 언급한다.

“시편에는 惡·不義라든지 하는 말들이 많이 쓰이는데 그 때의 사회구조와 관계가 있을 겁니다. 이런 말들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짙게 깔려 있어요. 당시에도 여전히 배고팠겠지만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개념들이 많이 나열되어 있는데 오늘날에는 자꾸 물질적인 표현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아요. 이렇게 바뀌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당연합니다. 요즘 물질적 해석(materialistische Auslegung)이 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니예요. 현대인들은 완전히 물질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리고 물질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마땅히 언어도 물질적인 언어를 써야 합니다. 언어는 그 시대의 세계관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 시대의 언어를 써야 진실합니다. (중략: 인용자) 그런데 오늘의 교회는 이 점을 보려고 하지 않아요. 여전히 2천년전의 시편적인 슬픔을 노래해야 종교적이고 그렇지 않으면 타락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삶은 완전히 물질적인 것에 매여 있기 때문에,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현장에서 물질적인 해석을 하자는 겁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라는 게 아니라 현대인의 언어가 물질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119-120쪽).

그는 계속해서 물질적인 세계관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메시아의 구원을 어떻게 물질적인 언어로 표현하느냐 하는 것이 과제라고 다시 한 번 밝힌다. 이어서 그는 실제로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정신적인 언어를 쓰고 있는 기존 교회의 모순을 질타하고, 동시에 물질적인 언어로써 복음을 말하고 있지만 그 동기가 개인의 욕심에 머물고 있는 순복음교회를 비판한다.

“구원이란 말을 물질적인 언어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새삼스런 일은 아니예요. 전에도 정신적인 언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그 안에는 물질적인 해방, 기근이나 경제적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담겨 있었어요. 결코 정신적인 언어와 물질적인 해방이 유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마저도 그렇다는 것이 이제 드러나고 있지요. 지금 우리는 물질적인 눈이 더 뜨였기 때문에 오히려 구약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어요. 현대인은 민중을 볼 때도 막연한 민중이 아니라 물질적인 차원에서 민중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교회에서는 실제로는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정신적인 언어를 쓰고 있어요. 반면에 순복음 교회 같은 데서는 대담하게도 물질적인 언어로써 복음을 말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렇게 하는 동기가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그 교회에 모인 사람들의 물질적 욕심은 철두철미 개인적인 것인데 개인적인 물질적 고통을 집단적인 고통, 인류의 고통으로 증언하지 않고 개인의 문제로만 보아서 점점 더 개인적인 욕심의 노예가 되도록 하는 데 잘못이 있어요. “너 이렇게 하면 잘 산다. 너 이렇게 하면 부자가 된다.”고만 말하지 말고 “너 혼자 잘 살면 다른 사람들은 못산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네 빈곤의 슬픔”에서 “우리의 빈곤의 슬픔”을 해결하는 데 눈을 돌려야 해요. 이 개인이 집단의 문제, 인류의 문제로 눈을 돌리도록 설교해야 메시아적인 증언이 됩니다. 그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예수 공동체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 것을 움켜쥐는 개인주의에로 떨어지게 되므로 사실은 그 교회가 교인들을 예수 공동체와 이간시키게 돼요.”(120-121쪽).

안병무 박사의 이와 같은 통찰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필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현재 한국교회의 바알주의와 맘몬주의는 회개해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안병무 박사의 이 비판은 비록 세월이 20년 가까이 지났지만 오늘날 한국교회에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 더 유효하다. 그리고 안병무 박사의 구원관에서 독특한 것은 민중 구원(해방)은 민중 스스로 한다는 것이다.

“의미가 모호한 구원이란 말 대신에 해방이라는 말을 쓴다면 민중의 해방은 민중 스스로 하는 거지요. 민중이 자신들의 고통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고통이 혼자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당하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통을 나눠 가질 때 해방을 위한 힘을 얻게 되지요. 민중이 아닌 사람들이 민중 해방을 위한 전략에 대해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민중 해방은 민중이 스스로 하는 것이고 그 전략도 스스로 발견을 해요. 내 가난의 슬픔을 우리의 가난의 슬픔으로 바꿔놓으면 자연히 구원운동으로, 해방운동으로 나가게 됩니다. (중략: 인용자) 이 점에서 의식분자들이 전략을 짜고, 어떤 비전을 제시하고 전투지휘를 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어준다고 하는 공산주의와 갈라질 거예요. 공산주의의 그런 태도에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고 봐요. 민중신학에서는 민중 속에서 메시아사건, 구원사건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처방을 가지고 구원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그리려고 해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126쪽).

안병무 박사가 비록 민중 스스로 자신을 해방한다는 이 말을, 의식분자들에 의해 지도받는 해방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맥락에서 제기하고 있지만, 그것이 혹시 하나님에 의한 타력 구원(해방)을 부정하고 자력 구원(해방)을 긍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구원(해방)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온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그런데 안병무 박사는 한참 후에 필자의 의구심에 답변한다.

“끝으로 제기될 수 있는 물음은 이같은 죄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맑스는 사회구조를 변혁시키면 된다고 했고, 예수는 사탄이 지배하는 현실 즉 유다교체제의 구조악을 타파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의 궁극적 극복은, 전통적인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하느님의 주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중략: 인용자) 구체적인 죄의 현실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되, 인간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완결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궁극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현실을 향하여 그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204-205쪽).

 4) 성령

질문자가 “순복음교회 같은 데서는 성령체험, 초자연적인 체험이 전도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만일 이런 것들이 집단적인 고통을 알게 하고 전하는 데 사용된다면 이런 것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질문하자, 안병무 박사는 성령의 역할은 체제 변혁과 인류 해방에 있다는 요지로 답변한다. 비록 안병무 박사의 언급에 다소 거친 감이 있지만, 누가복음 4장 18-19절을 생각할 때, 가난한 자를 위한 사회 변혁은 성령의 중요한 사역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예수는 한 사람을 상대할 때 그 사람의 문제를 사회구조적으로 보았습니다. 예수에게서는 이 사람은 개인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할도 개인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해방과 관련되어 있어요. 성령의 역할이 종말론적이라는 말을 요즘 말로 하면 체제변혁과 관련되었다는 말입니다. 종말론적인 말의 의미는 인류 전체가 이 체제를 뒤집어 놓음으로써 윤리, 종교, 법같은 것으로 짜여져서 빈틈이 없는 이 체제를 완전히 쓸어버림으로써 우리가 거기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할은 이러한 체제변혁과 인류해방에 있습니다.”(123쪽).

 5) 교회

안병무 박사는 교회의 반(反)종말론적 체제와 체질에 대한 개혁을 역설하면서, 그 교회 개혁을 방해하는 계층이 있는데, 그들은 바로 성직자들이라고 지적한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들만이 교회에서 자리의 주인이 되려고 하고, 모인 사람들에 대한 치리(治理)에 관심을 갖게 마련이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신학자들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필자는 이와 같은 안병무 박사의 지적에 공감한다. 이어서 안병무 박사는 대안 교회의 상으로 민중교회를 이야기하면서, 먼저 성서해석권을 민중에게도 주라고 말한다.

“민중교회는 성직자가 독점했던 성서해석권을 민중의 삶 속에 되돌려 주는 데서 출발해야지요. 교역자나 신학자는 내가 가르친다, 내가 가르치는 것이 옳다 하는 데서 후퇴하여 아주 단순한 눈으로 성서를 읽고 생활(삶)속에서 형성되는 민중의 느낌과 생각을 신학적 언어화하며 교회 지도층은 그것을 제도화해야 한다고 봐요. (중략: 인용자) 제도가 있는 한 지도층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성직자를 위시한 지도층은 삶의 한가운데 고투하는 민중을 존중하고 저들이 고뇌 속에서 성서를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서 계시만큼이나 존중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돼요. 또 저들이 그렇게 자기 소리를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제도적으로 만들어야 해요.”(171-172쪽).

그리고 그는 민중 교회는 사회적 계층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논거로 그가 제시하는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에 대한 해석에 필자는 공감한다. 안병무 박사의 이 해석은 필자가 성서를 읽으며 몇 해 전부터 갖게 된 관점과 비슷하다.

“참 공동체는 바로 이 기존사회의 가치관을 극복해야 하며 따라서 교회 안에 사회적 계층성이 극복돼야 합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사회계층성이 그대로 반영된 것은 아닙니다. 까닭은 그것이 <종교적 집단>이라는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 내에 교권이 형성되었고, 종교 귀족이 등장하고, 교역자와 평신도 사이에 사회의 신분 계층에 뒤지지 않는 계층성이 생긴 것입니다. 교역자가 언젠지 모르게 다스리는 자로 군림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찍부터 생겨서-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시작되기 전 종교 일반의 영향을 빨리 받아 된 것인데-요한복음에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줌으로써 제자들(지도자들)의 역할이 바로 섬기는 데 있음을 강조했고, 마태오에는 <스승>이란 이름으로 권위를 부리는 현상이 두드러졌기 때문에 스승은 한 분 예수뿐이니 사람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가 있을 수 없다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가 세계 안에 있는 한, 가진 자와 가난한 자, 권력권에 있는 자와 이름없는 자가 공존하게 마련이지요. 그러나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바로 가진 자, 권력권에 있는 자는 가난한 자, 이름없는 자의 권익을 옹호하고 섬기려는 자세뿐이 아니라, 바로 가난한 자나 이름없는 자들을 통해서 자신이 가졌기 때문에, 권력권에 있기 때문에 상실된 인간성을 발견하고 회복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진 자와 권력권에 속한 자는 가난한 자와 억압당한 자를 통해서 가진 것과 권력에의 예속에서 해방되고, 또 가난한 자와 눌린 자의 해방에 참여함으로써 스스로도 해방되고 따라서 그 공동체가 해방의 공동체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179-180쪽)

또 안병무 박사가 밥을 나누어 먹는 것과 성찬을 대비시켜 지적하는 것에는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성찬은 소중한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한 몸의 피와 살을 <나눈다>, 즉 한 몸 되는 의식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누는 일을 종교행사로만 하지 말고 현실 생활에까지 연결시켜야 합니다. 왜 예수의 피는 나누어 먹을 용의가 있는 자들의 집단이 밥을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까요?”(180쪽)

안병무 박사는 현 교회의 사제중심체제, 곧 목사중심체제에 대해, 그것이 기능으로서의 구별을 넘어서 권위화되었고 날이 갈수록 심화된다고 비판한다. 그는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의 집단이라면 평등 공동체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안병무 박사에 의하면, 목사는 사제의 후예가 아니고, 단지 기능상 가르치는 사람일 뿐이다. 그는 성찬을 시행하는 권한을 목사의 특권으로 삼는 것은 성서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안병무 박사는 목사직 자체를 폐기하자는 주장까지는 하지 않고, 목사의 권한을 가르치는 기능에 제한할 것을 주문한다. 이 점은 아예 목사직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재세례파나 퀘이커, 무교회, 가정교회 등과 구별되는 점이다. 그러나 그 가르치는 권한을 목사가 평신도와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파격적인데, 필자는 이와 같은 안병무 박사의 제안에 깊이 공감한다.

“나는 평신도들이 이끄는 밑바닥 공동체가 많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평신도들이 직장을 갖고 공동체를 형성해서 가르칠 능력이 있는 이들이 생활에서 성서 그리고 현실을 증거하는 것이 설교가 됐으면 합니다. 어떤 교단이든 이 길을 터놓고 그런 공동체를 수용하는 제도적 장치를 한다면 그로부터 기존교회의 개혁에 큰 활기를 얻을 것으로 생각합니다.”(185쪽).

 6) 죄

안병무 박사는 죄를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보고 있다. 안병무 박사가 죄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 것은, 오늘날 교회가 죄에 대해 개인적 차원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 차원을 무시하고 사회적 차원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또 다른 균형의 상실이다. 필자는 죄에는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이 모두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 차원을 무시하게 되면, 모든 책임을 사회적 차원으로 전가할 수 있고, 죄에 대해 각 개인이 도덕적 책임을 갖고 있는 인격적 존재라는 사실도 무시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출애굽 사건에서 출발하면 놀랍게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관은 개인적인 죄가 아니라 군주체제의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죄를 문제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주체제(에집트)라는 구조악에 의해 착취당하고 노예화되는 현실을 죄로 보고 이 죄에서 히브리들을 해방시키는 데서 구약의 죄관은 출발하고 있습니다.”(194쪽).

“나아가, 구약에서 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이라는 대전제 아래서 이해됩니다. 이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입니다. 이 계약은 율법이라는 형태로 응결되었는데 두 가지 성격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것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공동체가 맺은 집단적인 계약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구약의 여러 법전들에 여실히 드러나 있듯이 가진 자 혹은 지배계층이 약한 자들을 착취하거나 괴롭혀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가진 것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어긴 것이 구약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죄이지요.”(194쪽).

안병무 박사는 “가진 자가 못가진 자를 구조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구약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죄”(195쪽)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는 사탄의 실체는 구조악이라고 지적한다.

“예수에게 있어서 대전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탄이 지배하는 세계와 상반되는 것이지요. 예수가 하느님 나라를 대전제로 하였다는 것은 곧 사탄과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종식시키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탄의 실체는 무엇이겠습니까? 사탄의 실체, 그것은 구조악입니다. 결국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을 종식시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조악에 의해 속박당하고 그로 인해 죄인 취급을 당하던 민중들을 해방시킨다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예수는 구조악의 法網이 얽혀져 있는 것은 개념치 않고 그것에 의해 속박당하는 소위 죄인들만을 보고 그들에게 뛰어들어가 그들과 더불어 살다 죽은 것입니다. 죄인취급을 당하던 민중의 해방을 위해 끝까지 구조악과 싸웠고 그 구조악에 속박된 소위 죄인들을 죄인이라 부르지 않고 가장 영예로운 이름인 <아브라함의 자녀> <하느님 나라의 새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는 구조악이 없어지면 죄가 없어지고 죄가 없어지면 곧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는 참된 공산 세계가 오면 소유욕도 불평등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보았던 맑스와 일치합니다.”(199-200쪽).

여기에서 구조악에 깃든 사탄의 악마성을 지적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사탄의 실체가 구조악 자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리고 “참된 공산 세계가 오면 소유욕도 불평등도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보았던 맑스”를 언급하면서, “구조악이 없어지면 죄가 없어지고 죄가 없어지면 곧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 나이브하다.

 7) 공(公)의 사유화(私有化)

안병무 박사가 죄에 대해 ‘공(公)의 사유화(私有化)’를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다. 안병무 박사는 성서에서 말하는 세상은 ‘우주’라는 의미의 세상이 아니라, ‘윤리화된 사람의 세계, 제도화된 세계’, 곧 ‘사회적 관계’라고 전제하면서, 죄의 뿌리는 ‘公의 私有化’라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창조주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다 하느님께 속했습니다. 땅도 하늘도 바다도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즉 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의 것을 사유화 또는 독점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까닭은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 즉 公을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203쪽).

“사유욕은 결코 물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권력에도 적용됩니다. 성서에서 하느님을 王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고대에는 모든 주권이 왕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大地는 모두 왕의 것이었고 그것은 곧 全權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권력을 사유화함으로써 재산의 독점화는 물론 신분계급이 생겼고, 사람마저도 사유화하는 노예제도가 생겨났습니다. 세상의 악이란 모두 권력의 남용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바로 公權의 사유화를 의미합니다.”(203-204쪽).

안병무 박사는 공의 사유화 구조 안에서는 민중도 무죄하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을 민중신학자가 한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그가 진정한 민중의 중요한 특성으로 ‘자기 초월’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이해된다.

“이같은 구조 안에서는 민중이라고 해서 무죄한 것은 아닙니다. 민중도 소유를 삶의 제1원리로 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삶에서 추구하는 바가 가진 자들의 그것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선망하는 최고의 가치가 바로 독점자, 권력자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뜻에서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204쪽).

“자본주의체제는 바로 이 사유욕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유하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되어 있고 그러므로 누구나 사유욕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다는 말은 여전히 타당성이 있습니다.”(204쪽).

그리고 안병무 박사는 하나님 나라는 “公을 公으로 돌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런 사회적·현세적 차원의 이해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개인적·내세적 차원으로만 이해해 온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을 줄 수 있지만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지적할 것은 여기에서 안병무 박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인적·내세적 차원을 무시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는데 이것은 지나치다. 하나님의 나라를 개인적·내세적 차원과 사회적·현세적 차원 양자 모두를 갖고 있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루가는 하느님 나라가 실제로 뭐냐? 그것은 公을 公으로 돌리는 것이다. 사유화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나 경제나 모든 걸 다 포함해서 사유화함으로써 분열되고 찢겨진 그것을 다시 公으로 돌리는 일은 하느님 나라 성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거예요. 하느님 나라를 자꾸 정신화해버려서 피안적이고 관념화된 그런 하느님 나라는 민중의 입장에선 있을 필요도 없어요. “公은 公으로 돌려라”는 말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돌려라는 말인데, 이것은 결국 민중의 언어로 바꾸면, 다 빼앗긴 사람들, 밭 한뙤기 없이 거덜난 사람들에게 자기 것을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 농민에게 그 생산한 몫을 정당하게 돌려주는 것이예요. 이렇게 잃어버린 제 것을 도로 찾는 운동만큼 하느님 나라를 의식할 수 있는 구체적인 건 없다고 생각해요.”(246쪽).

 8) 부활

안병무 박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서 절망했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보고 새 사람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제자들의 재기가 분리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분명히 절망했던 갈릴래아 민중들에게 일대 전환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것은 결코 主客 圖式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즉 실망했던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보고 새 사람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볼 수 없고, 죽은 예수의 부활 사건과 그들의 재기가 분리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설명할 때 훨씬 더 현실감이 있습니다.”(336쪽).

그리고 그는 다시 “예수의 부활은 갈릴래아 민중의 궐기와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기술하면서, 갈릴리 민중들인 제자들이 바로 부활한 예수님의 분신이라고 강조한다.

“예루살렘에서 도망하여 비겁하게 자기들의 스승을 배신한 저들이 언어의 표현능력을 초월한 어떤 비상한 경험이 없이는 이런 일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 갈릴래아 민중들이 바로 구체적으로 부활한 예수의 분신이 아닐까요? 이들을 떠나서 우리가 부활한 예수를 만날 장소가 따로 있을까요? 예수의 부활은 갈릴래아 민중의 궐기와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건입니다.”(338쪽).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제자들의 재기보다 먼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난 것이며, 갈릴리 민중들인 제자들이 바로 부활한 예수님의 분신이라는 안병무 박사의 주장은 독특하긴 하지만 지나친 것이다. 안병무 박사는 자신의 이런 관점에 대해, 부활에 대한 성서 본문을 가지고 설득력 있는 성서 신학적 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이런 독특한 부활 해석을 툭 던졌다고 할 수 있다. 안병무 박사의 이런 해석은 독특성은 인정할 수 있으나 설득력은 없다고 할 수 있다.  

 9) 사도 바울 비판

안병무 박사는 사도 바울이 밥을 함께 생산해 나누어 먹는 공동체 형성에 무관심했다고 그를 비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까지 갈파한 그(사도 바울: 인용자)가 몸이 한 입으로 먹으므로 유기성을 유지하듯이 밥을 함께 생산해 나누어 먹는 공동체 형성에는 왜 그렇게 무심했을까? 바로 이 점이 그가 간과한 일이며 그것이 그의 후속 부대들이 성취해야 할 과제로 넘겨진 것입니다.”(328-329쪽).

사도 바울은 비록 밥을 함께 생산하는 ‘생산’ 측면은 언급하지 않지만, 밥을 나누어 먹는 ‘분배’ 측면은 명확하게 기술한다. 예컨대 바울은 구약의 만나 이야기를 인용해서 경제적 ‘평균’을 강조한다.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후8:14,15). 여기서 바울의 기독교 경제관의 핵심 단어는 바로 평균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균은 곧 일인당 균등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모든 백성에게 그 필요에 따라 일인당 똑같은 양의 만나가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평균케 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나누어 주라고 권면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병무 박사의 사도 바울 비판은 생산 측면에서는 맞을 수 있지만, 분배 측면에서는 틀렸다. 더구나 안병무 박사의 사도 바울 비판의 핵심은 필자가 읽기에는 전체 문맥상 생산이 아닌 분배 측면에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더욱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10) 자연

안병무 박사의 민중신학은 생태신학과 관계가 없다는 점이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생태학적 감수성이 약하다. 안병무 박사는 자신이 자연에 관심이 없고 인간에게만 집중한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나는 자연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자연에서 신을 경험한 체험이 없어요. 소설 하나 읽어도 자연 묘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안 가고 인간 묘사에 집중하게 돼요. 이를테면 톨스토이하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면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끌려요. 톨스토이에게는 자연서술이 많아요. 나는 예수에게서 그런 면을 봐요. 밤낮 자연 속에서 살면서도 거기에서 출발하지 않고 사람을 보고 있어요.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을 경험하거나 또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 신비의 경지를 경험할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153쪽).

그러나 이것은 안병무 박사 개인의 한계일 뿐이지, 다른 민중신학자들을 포함한 민중신학 일반의 한계는 아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

4. 나오는 글

필자는 안병무 박사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비록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의 철저한 정직성과 진실성을 보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 그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끝마쳐도 좋다는 자세를 갖고, 나눔과 무소유와 동참이란 원칙을 실제로 몸으로 실현하려고 애쓰면서 사는 가운데,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민중 현장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을 증언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우리 세대는 더 심하게 가난이란 걸 경험했어요. 나도 주로 간도에서 혹은 우리 집 안에서 가난을 경험하면서 자랐어요. 간도의 농민들은 참 비참했어요. 그래서 가난을 웬만큼 설명해서는 충격을 안 받아요. 저도 대학 다닐 때 그리고 졸업하고 독일가기 전까지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좇아다녔어요. 이 한 사람의 운명을 위해서 내 인생을 여기서 끝마쳐도 좋다는 자세를 가졌어요. 너 한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질적으로 잘 사는 것이지 계획적으로 사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살았어요. 나눔(sharing), 무소유, 동참이란 원칙을 실제로 몸으로 실현하려고 애썼어요. 한푼이라도 저금한다든지, 가구를 산다든지, 두 벌 옷을 마련하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가정이라는 것이 내게는 성립이 안 됐어요. 이런 경험이 내게 있어요. 돌이켜보면 이런 경험은 예수에게서 비롯된 것이예요. 어릴 때 예수를 알기 전, 빈곤과 같은 인간의 비극적인 경험을 많이 했지만 그걸 뼈저리게 공적인 것으로, 집단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된 것은 예수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예수의 사건을 통해서 나는 모든 것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나의 새로운 탄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나의 원경험(Urerfahrung)이고 원계시(Uroffenbarung)라고 할 수 있어요. (중략: 인용자) 아무튼 내가 예수를 만나지 않았던들 밤낮 경험하는 일이 그리스도 사건이란 것을 모르고 그저 일상적인 사건인줄만 알고 ‘에이 나도 돈이나 벌자’든지 여기서 빠져 나오려고 했을 거예요. 그것이 인류의 문제이며 나도 거기 연루되어 있다고 보는 자세, 그런 고통스런 민중의 현장에 대해 인간적인 척도로 재고, 빠져 나오는 게 아니라 겸허하게 그 현장으로부터 아주 새로운 말을 들음으로써 내가 나를 수정할 수 있는 자세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몰랐다면 저도 민중 현장에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을 증언할 수 없었을 거예요.”(121-122쪽).

또 안병무 박사는 자신이 교수로서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현장에 가려고 노력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와중에 감옥살이도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특권 중의 특권이라고 고백한다.

“우리들은 이미 어느 계급, 어느 입장에 서 있습니다. 대학교수가 되고 보면 의식주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하루하루 끼니를 잇는 문제로 고통당하는 사람들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입장에 서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그런 사람들의 생활환경에 가서 직접 생생한 언어를 듣고자 합니다. 그 현장에 함께 있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서남동 선생도 나도 한동안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죽음을 당하거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282-283쪽).

필자는 이와 같은 안병무 박사의 정직성과 진실성에 경의를 표한다. 민중신학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바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들어가서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삶! 그 가운데 자신의 재물을 비롯하여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고, 가야한다면 감옥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삶! 안병무 박사를 통해 필자는 민중신학의 진정한 힘을 보았다. 그런 점에서 비록 안병무 박사가 이야기하는 민중신학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삶이 안병무 박사와 같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들어가서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삶이라면,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민중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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