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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신화화 - 신약성서에서 신화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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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7일
                
          비신화화 - 신약성서에서 신화의 문제
                     (James D. G. Dunn)        
                                                            번역 : 김한영 박사

  신화의 주제는 넓고 복잡하다. 신화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초기 그리스 문학과 연극, 종교 비교 연구, 인류학, 심리분석, 그리고 철학의 역사 등에 대한 포괄적인 숙련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약의 신화의 문제에-신약에 신화가 있다는 말일 수도, 아니면 신약의 석의가가 그렇게 다룬다는 말일 수도 있다-있어서 너무 당면한 문제의 지엽적인 부분에 집착할 게 아니라, 신화를 취급하고 연구하는 다른 학문 분야들의 더 넓은 맥락에서 문제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일반적 의미에서의 신화의 개념을 간단하게 살펴볼 것이다(Ⅰ) ; 그런 다음에, 지난 150년 동안 제기되어온 다양한 문제들을 평가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고, 그래서 신화적인 사고와 특정한 신화들이 신약의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표현하는 데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에 특별히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들, 슈트라우스(D. F. Strauss) (Ⅱ). 그리고, 종교사학파(Ⅲ) 또 불투만(Ⅳ)을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1. 개념 정의
 신화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까?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 (1)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는 아주 다양한 의미를 다 집어넣는 잡동사니 가방인가? 아니면, 엄격하게 좁은 의미로 제한되어야 하는 전문 용어인가 - 예를 들면 전설(legend), 역사 이야기(saga), 민담(folk tales), 동화(fairy tales), 상징 그리고 유비등과 선명히 구분되는 것인가? (2) 신화의 기능은 무엇인가; 신화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또는, 필자가 선호하는 식으로 질문한다면, 신화의 진실(truth)은 무엇인가? 우리는 진술과 이야기의 표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신화의 진실은 내제되어있는가 - 인간과 그의 세계에 관한 잠재의식적인, 그리고 의도되지 아니한 노출인가?

(1) 신화란 무엇인가?
 “단일한 신화의 정의는 없다. 모든 실제적인 예들을 압도할 만한 관념적인 신화 형태는 있을 수 없다.” G. S. Kirk, Myth ;Its Meaning and functions In Ancient and Other Cultures (Cambridge 1970), p.7
개념 정의의 문제는 μἶθος 라는 단어의 원래의 쓰임새의 문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원적으로 이 단어는 단순히 “말” 또는 “이야기”를 의미한다. 초기 그리스 문헌에서는 “사실 이야기(true story)", “사실들의 기록,” 또 “사실”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에서부터 꾸며낸 이야기, 전설, 동화, 우화 또는 시적인 창작물들 에 이르기까지 넓은 용례가 나타난다. G. Stahlin, μἶθος, TDNT Ⅳ, PP.766-9 ;cf. also C. K. Barrett, "Myth and the NewTestament", Exp. T 68(1956-57), P. 345
그러나 후기 그리스 사상에서는 mythos가 logos(이성적 사고)와 historia의 반대 개념이 되고, 따라서 “실지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리스-로마의 유산을 받은 서유럽의 사고에서도 그런 식의 “신화”가 사실에 반대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같은 이유로, 이 용어가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어로 된 옛날이야기에 -프로메테우스,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등에 - 붙여져서, “고전적인”(그리고 여전히 대중적인)신화의 개념이 시간의 시작되는 시기, 혹은 시간이 있기 전의 과거에 일어난, 신들(혹은 半神)에 관한 우화적이고, 진실성이 없는 이야기를 의미하게 된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에 와서는 신화의 개념이 잡동사니 용광로에서 건져 올려져서, 그 의미와 정확한 경계 설정을 주제로 하는 활발한 논쟁들이 벌어졌다. 이 주제에 관한 최근의 글에서 판넨베르크는 세 가지 주요한 견해를 구별하고 있다. W. Pannenberg, "The Leter Dimensions of Myth in Biblical and Christian Tradition" Basic Questions in Theology Ⅲ (E. T. London 1973), pp. 1-22.
(a) 인류학자나 비교 종교학자들에 의해 사용되는 “신화” - 그 주제가 원시 시대이고 그 기능은 원시 시대에서 현존 세계와 사회 질서의 기초를 제공해 주는 이야기를 말 한다. - 엘리아데(M. Eliade)가 “원형적 역사”(archetypal history)라고 부른 것이다. “신화는 거룩한 역사를 이야기 한다: 그것은 원시 시대, 전설적인 ”최초의“시간에 일어난 사건과 관련된다. M Eliade, Myth and Reality (London 1964) p. 5:Encyclopaedia BRITANNICA Art. "Myth, Vol. 15, p. 1133. Eliade is criticised by I. Strenski, "Mircea Eliade Some Theoretical Problems", in A. Cunningham, ed., The Theory of Myth (London 1973) pp. 40-78. See also I. G. Barbour, Myths Models and  Paradigms (London 1976), pp. 19ff.
(b) 하이네(C. G. Heyne)에 의해 정의된 신화 - 원시적 개념 형태로서, 아직 현대 과학이 와 닿지 않은 원시적인 의식 구조를 보여주는, 인류가 그 유아기에 갖던 ”개념과 표현의 양식“을 말 한다: 이러한 신화적 사고는 현대 과학에서는 쓸모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앞으로 살펴보게 되겠지만, 이러한 개념은 신약 해석학에 있어서 비신화화 논쟁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었다. See also W. G. Kummel, The New Testament: The History of the Investigation of its Problems (E. T. London 1973), pp. 101ff, 121: and see below  p. 295. R. A. Johnson, The Origins of Demythologizing (Leiden 1974)  points out that the work of B. Fontenelle, De I, origine des fables (1724) considerably predates that of Heyne (pp. 131-4).

(c) 시로서의 신화, 세상의 이해와는 다른 기준으로 판단되어져야 할 영역에 속한 것으로서의 신화, 감정을 일깨우고 “사상을 이끌어내고” 응답을 불러일으키는 상징과 연극으로서의 신화. CF. particularly P. Ricoeur, The Symbolism of Evil (E. T. New York 1967), discussed by J. Rogerson, Myth in O. T. Interpretation (Berlin 1974), chap. 9

 신약성서의 신화의 문제로 관심을 옮길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신화”라는 단어의 다양한 의미를 염두에 두어야 하며, 처음부터 어느 한 개념이 문제를 결정하고 대답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 신화의 진실은 무엇인가?
 한 단어가 “사실”도 의미하고, “꾸며낸 이야기”도 의미할 수 있다는 역설을 그리스인들이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고, 신화의 내용의 진실성 문제도 오늘날도 그러하듯이 고대 세계의 지식인들에게도 까다로운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플라톤은 전통적인 신화를 공공연히 비판하기도 했지만, 거짓도 때로는 어린이 교육용으로는 가치가 있다고 하여 신화 중에 최상의 것들은 어느 정도 인정하기도 했다. Plato, The Republic 376-7.
더욱 중요한 것은 플라톤이 신화적 사고가 합리적 사고(logos)에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신화는 로고스의 차원을 개념적 지식의 한계 넘어 까지 조직적으로 가져다준다...
신화는 다른 방법으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것을 표현할 필요가 있을 때 생겨난다. Stahlin, TDNT Ⅳ PP. 774ff. See also R. M. Grant, The Earliest Lives of Jesus (London 1961), pp. 121f. J. Creed, "Uses of Classical Mythology", in Cunningham, pp. 7-15.

 신화의 진실에 대한 현대의 논의에서 많은 대답들이 제시되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아래와 같다.
 (a) 세기가 바뀔 무렵의 인류학자들 사이에서(E. B. Tylor, J. G. Frazer등) 지배적이었던 견해는 신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원시인에 대한 것들뿐이라는 것이다. 즉, 원시인이 하늘에 대해서, 또 자연이 매년 순환하는 것, 그리고 토지의 비옥함에 대해서 어떻게 사고했는지, 그가 알지 못하는 두려움에(부분적으로는 죽음과 그 너머의) 어떻게 대처했는지, 어떻게 글의 현재 경험을 개념화했는지(신들, 마귀들, 영들), 또 어떻게 그가 그러한 존재들을 의식적인(ritual) 마법을 통하여 다루고 조종하려고 했는지 등을 보여줄 뿐이라는 것이다.
 (b) 위의 견해와 매우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신화가 합법화의 기능(또는 법적 기능)을 담당했다는 견해가 있다: 신화가 의식에서 유래했으며 그 의미는 제의(cult)를 합법화하는 데 있었거나(W. Robertson-Smith), 더 넓은 의미에서는 “신화 헌장”이었다는 것이다. - “신화 헌장”이란 부족의 권리, 충성, 신앙 등을 정당화하는데 쓰이는, 달리 더 심오한 의미는 갖고 있지 않은 이야기를 말 한다(B. Malinoski). Kirk, Myth, pp. 12-29를 보라: 또 Pannenberg, "Myth", pp. 5ff: 신화-제의에 관한 논쟁에 대해 더 보려면 B. S. Childs, Myth and Reality in the Old Testament(London 1960), p. 19. 주 .2 와 제 6장의 Rogerson의 논의를 참조하라.

 (c) 보다 최근에는 정신분석학이 꿈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면서 신화를 잠재의식의 표현으로, 인간 내면에서 유해하여 종종 인간이 대대로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을 끄집어내면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해서 말해주는 원형적 이미지들로 이해하게 됐다. “신화는 무의식적 인지와 의식적인지 사이의 자연스럽고 필수 불가결한 중간단계이다.  ” 신화들은 선(先)의식적 심리(preconscious psyche)의 원래적인 표현이며,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비자발적인 진술이다. C. G. Jung, Memories Dreams and Reflection (E. T. London 1963), p. 343: Kirk. Myth p. 279. See also C. G. Jung and C. Kerenyi, Introduction to a Science of Mythology (E. T. London 1951).

 (d) 이와 어느 정도 비슷한 것으로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정의가 있다. 그는 신화의 정말로 “전하고자 하는 것(message)은 그 내용 자체와는 별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 오히려 신화는 추상 속에서의 인간 마음의 작용을 대수(代數, algebra)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레비 스트로스는 모든 신화의 구조는 인간 마음의 구조와 동일시 될 수 있다고 믿었다. : 인간의 사고는 이원적 분석의 과정이다: 그래서 신화는 사회 속에서 이원적 분리가 행해지는 모델로서, 여기서는 인간의 세계관에서의 모순들이(마을과 밀림, 남성과 여성, 삶과 죽음, 땅과 하늘 사이의) 해소되고 극복될 수 있다. 그 자신도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모순들에서부터 빠져나와 질서를 창조하려고 애쓰는 인간의 모습을 신화는 한 구절로 나타낸다. Kirk, Myth pp. 42-83: Rogerson, p. 105. See further e. g. C. Levi-Strauss, Structural Anthropology (E. T. New Yo가 1963), chap. ⅩⅠ: e. Leach, Levi-Strauss (Glasgow, revised).

 (e) 신화의 진실에 대한 다섯 번째 이해는 시적인 견해로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 신화는 인간의 경험과 인식, (보편적)가치와 진실들의 전체 영역의 표현으로, 그것은 야스퍼스(K. Jaspers)가 “신화의 암호 언어”라고 부른 바, K. Jaspers: "Myth and Religion", Kerygma and Myth Ⅱ (ed. H. W. Bartsch, E. T. London 1962),
p. 145.
상징적 언어로만 나타낼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 이는 먹는 것, 잠자는 것, 일하는 것 “이상의” 것에 대한 시인의 인식으로서의 신화이다. 이때, 그 “이상”(moreness)을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나 상징으로서의 외에는 정의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M. Grant, Myths of the Greeks and Romans (London 1962), p. ⅹvii, 은 아래의 시구를 적절히 인용하고 있다:
      The intelligible forms of ancient poets,
      the fair humanities of old religion,...
      The live no longer in the faith of reason !
      But still the heart doth need a language, still
      Doth the old instinct bring back the old names ...

 (f) 여섯 번째 견해는 신화들 중 상당 부분은 두드러진 종교적 경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는 신화가 신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자체가 신의 계시라는 성격을 갖는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신들에 대한 이야기” 가 언제나 단순한 원시적, 비과학적 개념화인 것은 아니며, 종교적 자각의 최초의 실례, “진정한 종교적 감정으로 들어서는 현관, 신비스러운 자각을 일깨우는 최초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R. Otto, The Idea of the Holy (e. t. Oxford 1923), p. 126. 참조. E. Lliade : "모든 원시인들에게, 세계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은 종교적 경험 이었다“ (Myths, Dreams and Mysteries (E. T. London 1960), p. 19.
그래서 신화와 의식(ritual)중에 “무엇이 먼저냐?” 하는 논쟁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신화와 의식은 둘 다 환원되어 버릴 수 없는 종교적 감정을 표현하려는 원시 인간의 시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융(Jung)의 말을 보자 :
 “어떤 과학도 신화를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 신화는 과학에 의해 파악되어질 수 없다. ‘하나님’이 신화라서가 아니라, 신화는 인간 안에 있는 신적 삶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화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Jung, Memories, p. 373;Kirk는 Jung을 비슷한 입장에서 인용 한다 : “원시인들의 정신 상태는 신화를 고안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Myth, p. 279). 또 N. Berdyaev, Freedom and Spirit (E. T. London 1935), p. 70.

 이와 같이 신화에 있어서 일차적인 문제는 개념 정의의 문제이다. 논의의 범위를 신약성서로 좁히자면, 우리는 신약성서에 신화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신화인가?” “어떤 의미에서의 신화인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신화적 사고가 각기 다른 차원에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 즐거움을 주거나 합법화의 기능을 제공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로서의 신화; 실재에 대한 원시적 개념화로서의 신화. 이런 개념화가 아직도 자각시키는(evoke), 그리고 특히 제의에서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힘으로서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과학적인 연구에 의해 완전히 대체된 부분이다; Cf. N, Smart, The Phenomenon of Religion (London 1973), ch. 3.
인간이라는 실재를 -이 실재가 인간 정신의 구조든지 집단적 잠재의식이든지간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가리워진 창으로서의 신화, 또는 가치와 열망에 관한 인간의 표현으로서의 신화; 예를 들면, 영지주의 신화는 자신의 분리된 본성(정신과 물질)에 대한 인간의 의식과 그로 인한 좌절을 표현한다. Nietzsche의 “신화”와 “초인”은 일종의 갈망, “권력에의 의지”를 표현 한다.
인간의 실재에 대한 경험 가운데서 “초월”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인지로서의 신화. 이 실재는 영감이나 계시의 힘으로 사람에게 다가오는 것이며, 상징, 이미지, 유비 등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그것은 우리의 과학적 연구가 여태 인정해온 것보다 “더 크고”더 복잡한 존재론적 실재에 대한 제 1형태의 증거로 여겨질 수 있다. - 이렇게 여기는 것이 덜 비평적이거나 비과학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참조, Pannenberg : "모든 현상 특히 대단히 충격적이고 비일상적인 사건들을 신들의 개입으로 돌린다는 것은 무지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와의 관계에 대한 - 전제하지 않으며, 그것이 이런 무지의 소산이라고 할 만큼 단순 명료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은 개별적인 현상을 다른 유한한 사건들이나 환경들과의 관련 가운데서 만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실재를 결정하는 ‘힘들’과의 관련 하에서 이해하는 기본적인 종교적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 특수한 종교적인 요소 없이는 진정한 원인들에 대한 무지라는 것도 왜 모든 사건들이 신의 힘으로 돌려지느냐를 설명해 주지 못할 것이다.
신화와 신화적 사고가 신약성서에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위에서 말한 것 중 한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 기능은 무엇이고, 이 신화의 진실은 무엇인가를 각각의 경우에서마다 항상 질문해야 할 것이다.

2. 기적의 문제-D. F. Strauss
 신약 성서에 신화가 있는가? 신약의 기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그 대답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없다”이다. 그 단어 자체는 신약성서에서 다섯 번만 발견되는데(딤전 1:4: 4:7: 딤후 4:4; 딛 1:14: 벧후1:16) 전부 다 저자가 신화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있는 예이다. 이 기자들에게 있어서 신화는 신의 발현에 관한 헬라적 공상이든지, 구약 이야기를 유대교의 공상적인 해석이든지, 하여튼 꾸며낸 거짓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신화는 복음의 실재성, 진실성, 역사성에 상반되는 비실재적이고, 거짓되고, 비역사적인 것들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거부되고 잇는 것은 오로지한 장르의 신화일 뿐이다. 다른 차원에서의 신화와 신화적 사고가 신약성서 안에 존재하느냐는 질문은 제기되지도 대답되지도 않는다.
 이런 더 깊은 차원의 문제와 씨름하려는 시도는 이 문제의 복잡성을 보여주었다. 나는 여기서 알레고리화하여 성서를 해석했던, 주목할 만한 오랜 전통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알레고리 이용자들이 알레고리로 전환하는 이유는 성서 본문의 명백한 의미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겠으며(그것이 교훈적이지 않으며, 시대에 뒤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그래서 보다 깊은 의미를 찾아봐야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서의 이야기를, 그 문자적 의미가 무시될 수 있으며 그 진실이 알레고리적 석의에 의해서 도출될 수 있는 신화의 모형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것 바로 필로가 구약성서를 다루었던 방법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학자들도(특별히 오리겐)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성성의 기록은 신화라는 대적자들의 주장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지로는 그들 자신도 알레고리적 해석을 사용함으로써 성서를 신화 모음집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Stahlin, TDNT Ⅳ, pp. 709f. See also R. M. Grant, A Short History of the Interpretation of the Bible (London revised 1965), pp. 62-8.

 19세기에 와서 신화의 문제는 기적 문제라고 하는 골치 아픈 쟁점과 함께 재등장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슈트라우스에 의해 신화는 신약성서에서 기적 문제에 대한 결정적인 대답으로서의 중심적이고 긍정적인 역할을 부여받았다. 18세기와 19세기에는 기적에 관한 문제가 신학적 논쟁에 있어 태풍의 눈이었다. 기독교의 진리는 성서에 나오는 기적의 역사성과 그 운명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참조. L. Feuerbach, The Essence of Christianity (1841, E. T. 1854, reprinted, New York 1957) : “신앙의 특별한 목적은 기적이다 : 신앙이란 기적을 믿는 것이다 : 신앙과 기적은 절대로 분리되어 질 수 없다”(p. 126)
- 오랫동안 기독교 변증이 성서의 기적을 기독교의 초자연적 기원과 하나님의 기독교에 대한 승인의 확실한 증거라고 말해 왔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주에 대한 많은 과학적 지식을 소유했으며, 이성의 통찰력과 충족성을 신뢰했던, 계몽주의 이후의 사람들은 신화의 개념에 점점 더 만족하지 못하게 되었다 : 자연법칙들, 즉 인과(因果)의 사슬은 “기적”적 방법에 의해 파괴되거나 유보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그렇게 임의적이고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기적은 더 이상 기독교 변증을 돕는 것이 될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골치아픈 문제거리가 되었다.
 이것이 슈트라우스의 상세한 예수 생애 연구의 출발점이었다. The Life of Jesus Critically Examined (E. T. 1848, 1 vol 1892, reprinted, London 1973), pp. 39f. 이 논쟁에 관하여 여전히 근본적인 공헌을 하고 있는 David Hume의 영향은 Strauss의 전설적인 New Life of Jesus (E. T. London1865)에서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다.: “역사 연구가가 그것을 모든 비교를 초월하여, 좀더 개연성있는 것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고, 기적적인 사실보다는 진실성 없는 기록만을 다루어야 한다는 그런 경우를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Vol. Ⅰ, p. 200)
기적이 자연법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와도 양립할 수 없다: 또 기적이 역사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복음서는 역사적 기록이 아닌 것이 된다. 그렇다면 복음서 설화들의 지위는 무엇인가? 슈트라우스의 대답은 간단하다 : 그것들은 신화들이다. 그러면, 슈트라우스가 말하는 신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복음서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평가가 계몽주의 이후의 합리주의의 영향을 보여준다면, 그의 긍정적인 평가는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보여준다 하겠다. 슈트라우스에게 있어서 신화란 관념(idea)의 표현, 혹은 구체화이다; 그것은 관념을 이해하는 형식이다. 그의 가장 명확한 신화에 대한 정의는 New Life, Ⅰ p. 206: "신화는 그 원래의 형태에 있어서는 한 개인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고안이 아니라, 사람들 혹은 종교적 집단의 공동의식의 산물이다. 물론 시작은 개인이 했겠지만, 그것은 곧 신앙에 합치되었다. 그것을 시작한 개인은 보편적 신념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이다. 신화는 한 현명한 사람이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생각을 무지한 다수들의 입장에서 사용되어지기 위해서 감싸는 그런 덮개가 아니다. 그것은 설화와 동시에 있는 것, 아니, 그가 말하는 설화의 형식 바로 그 속에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아직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이전에 Life pp. 80ff.에서 정리된 것도 보라. 그의 신화 개념에 대한 더 면밀한 분석은 P. C. Hodgson 의 1973년 재인쇄본의 서론 pp. ⅹⅹⅲ, ⅹⅹⅵ, ⅹⅹⅹⅳ를 보라.

 복음서의 경우, 신화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의 표현이다 - 이 관념은 부분적으로는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에 의해, 또 부분적으로는 “예수의 개인적 품성, 활동과 운명이 남긴 특별한 인상”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관념이 복음서에 있는 기적들의 기록들을 낳게 한 것이다; 기록된 사건들의 기적적 요소는 이 관념에 의해 또는 이 관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Life, pp. 86f.
 그런 기록들 중에 어떤 것들은 순수한 신화들이다.- 이 말은 거기에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소경을 고친 일, 5,000명을 먹인 일, 변화산 사건 등인데, 이들은 모두 예수가 메시야이며, 유대인들의 기대를 따라 모세나 엘리야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제자들의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Life, § 95, 102, 107.

 역사적인 신화도 있다 -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다 그리스도에 대한 관념에서 유해한 신화적 개념들이 덧붙여져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물고기를 기적적으로 많이 잡은 사건(눅 5:1-11)은 사람 낚는 어부에 대한 표현이(막 1:17)기적의 역사 안에 변형되어 들어가게 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신화적으로 표현된 예수의 수세도 그 자체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Life, § 71, 51.
한마디로, 신화는 꾸며낸, 상징적 장면이다.
 우리의 주제에 대한 슈트라우스의 공헌은 획기적인 것으로 아직도 현대의 비신화화 작업에 기초가 되고 있다. 개별 설화들의 연구에 기울인 각고의 노력, 신화를 쓴 복음서 기자의 의도가 무엇과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주의 깊은 분석, 복음서의 기적에 대한 합리주의적 설명들이 이지했던 수단과 간계(奸計)에 대한 그의 대담한 폭로는 신약 학자들 사이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가 없다. A. Schweitzer가 Strauss에게 놀랄만한 찬사를 보내는 것을 보라.  A. Schweitzer, TheQuest of the Historical Jesus(E. T. London 1910), p. 84.
역사적 예수에 대한 최근의 논의들이 예수의 “사역”보다는 가르침에 집중된 것은 상당 부분 슈트라우스의 영향이다. 또, 무엇보다도 슈트라우스는 있는 그대로의 본문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의 중요성과, 저자의 의도에 대한 존중을 잘 보여주었다; 복음서에서 기적들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배제하려는 사람들에 맞서서 그는 저자가 기적을 말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그렇게 말한 의도가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가서 그는 단순한 역사성이라는 것 이외에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 자라난 예수에 대한 관념, 또는 부활한 예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그들이 역사적 예수를 표현해 내는 데에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 이런저런 일화나 세부 기록의 역사성이라는 꽁무니만 쫓아다니다 보면 저자의 주안점을 놓치기 십상이다. 이런 생각은 특별히 제 4복음서의 연구에 있어서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런 편집의 중요성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마가복음 6:5f 에 대한 마태복음 13:58의 편집, 마가복음 6:51f.에 대한 마태복음 14:32f. 의 편집 등, 그리고 같은 사건을 이야기 하면서 마태와 누가가 다르게  제시하고 있는 점들에 대해서이다 (마태복음 8:5-13/누가복음 7:1-10)

 그러나, “기적”에 대한 슈트라우스의 기본적인 진술과 그의 “신화”라는 말의 사용에는 비판받아야 할 점이 분명히 있다. 사실 그는 “기적=비자연적/비역사적 사건의 이야기=신화=관념”이라는 등식을 세워 놓고 있다. 그런데, 이런 등식이 타당한가?

 (1) 기적을 “자연 법칙을 이탈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거나(Hume) 보다 만족할 만한 정의는 R. Swinburne, The Concept of Miracle (London 1970): "기적은 신에 의해 수행된, 그리고 종교적 의의를 가지는 비일상적인 종류의 사건이다“ (p. 1). 그의 논문은 주로 철학에 근거한 Hume의 개념에 대한 비판이다.
어떤 사건을 “사건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미 알려진 보편적인 법칙들과 조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Strauss)자연 법칙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다. 물론 인과 “법칙”은 모든 과학적 연구에서는 자명한 것이며 - 불가피하게 그러하다 - 그리고 그 작용은 당구공으로 다른 공을 맞추는 것과 같이 비교적 쉽게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적 관계나 물질세계와(특별히 몸과) 정신의(기질, 의지력, 의도 등 양으로 측정될 수 없는 것들을 포함하여) 관계를 다루게 될 때,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결단이란 무엇이며 또 무엇이 결단을 내리게 하는가? 사랑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것이며,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사랑이란 주제를 제대로 다루는 풀발을 하고 있는 것인가? 베토벤의 교향곡 에로이카를 들으면서 내가 경험하는 즐거움과 심리적 고양은 어떤 음파가 내 고막을 울린 결과에 불과하단 말인가?
 계속해 보자. “인간관계의 화학”은 (다른) “자연 법칙들”에 비해 덜 결정적이긴 하지만, 위와는 다른, 또는 위와 상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원인들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고려는 예수와 같은 카리스마적 인물의 영향을 논할 때 더욱 중요해진다. See J. D. G. Dunn, Jesus and the Spirt (London 1975), ch. 4.
이러한 식으로 추론해 들어가면, 역사의 씨줄과 인과의 연속성을 그것이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그대로 흩트리지 않고서도, “기적”이 하나님의 행위라고 가정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다. Cf. R. Bultmann, Kerygma and Myth (ed. H. -W. Bartsch, E. T. London 1953), P. 197.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자연세계에 맞서 있는 원인으로 보는 이원론적 기적의 개념, 그래서 하나님에게 돌려지는 것을 “위반”이나 “침입” 등으로 묘사되게 하는 개념 정의에 대해 의문을 던져야 한다. 우주에 대한 우리가 가진 고도의 지식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는 실제에 관한 지식의 복잡성과 깊이를 볼 때, 그 문지방을 얼마나 넘어서 있나? 사실, 슈트라우스가 “예수의 생애”(Life of Jesus)를 썼던 시기는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가 “힘의 선들”과 우주가 전자력으로 거미줄 같이 짜여져 있다는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전자 -자기파의 본질을 겨우 깨닫기 시작했을 때였다 - 이것은 과학 연구의 역사에 있어서 비교적 최근의 발견이다.
 단순히 우리가 아직 그것들을 개념화 시키고 측정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또 다른 어떤 에너지의 근원과 “힘의 선들”을(특별히 인간 개인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발견해내야만 하는가? 예를 들면 텔레파시나 공중 부양(浮揚) 등 초(超)심리학적 현상들, 수 세기 동안 그것에 관한 문제 제기가 있어왔지만 연구되어진 바는 거의 없는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잘 검증되어진 이런 경우들과 다른 유사 심리학적 현상을 포함하는 예들이 H. Thurston, The Physical Phenomena of Mysticism(London 1952), 그리고 C. Wilson, The Occult (London 1971)에 있다.
모든 실재는 일종의 물리적, 심리적, 그리고 영적인 힘들의 일종의 상호작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작용은 질서정연한 형태로 이루어지는데, 지금 우리는 그 중에 아주 작은 부분만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귀신들렸다”는 개념은 인간의 인성에 영향을 미치는 복합적인 힘들(영적인 힘은 물론이고)을 인정하던 1 세기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실재를 개념화하는 입장은 범신론에 떨어지거나, 하나님의 “타자성”을 부인하지 않고도, 견지될 수 있다. 현대 과학의 다양한 학문분야들에 대한 충분한 교양을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하려는, 그리고 그것을 통전적인 방식으로 행하려는 최근의 시도들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J. V. Taylor, The Go-Between God(London 1973); M, Kelsey, Encounter with God (London 1974) ; Barbour, Myth. Karl Heim 의 Christian Faith and Natural Science (E. T. London 1953)이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한 이들이 많다. Teilhard de Chardin, Le Milieu Divin (E. T. London 1960)


 (2) 슈트라우스의 등식의 끝항으로 가보면, 그의 신화 개념에는 두 가지 중심적 특성이 있음이 분명하다 : 신화는 비역사적 사건의 서술이다; 신화는 관념의 구체화이다. 이 두 특성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 어떤 기록이 비역사적이면(역사적 개연성이 없고 모순되는 점이 있다는 증거가 있으면)거기에는 신화적 관념이(시적 형태나 메시아 관념으로 증거 되는) 있으며 역사는 없다. 관념(신화)과 역사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런 식의 역사와 관념(우리가 오늘날 흔히 말하는 대로는 역사와 신앙)의 이원론은 너무 날카로운 것이다.
 (a) 모든 기적의 기록들이 관념들을 구체화하여 꾸며낸 것이라고 설명되어질 수 있는가? 우리가 물어볼 수 있는 것은, 기적 이야기를 창조해 낸 관념들이 갈릴리의(?) 다른 카리스마 운동가들, 호니(Honi the circle Drawer, B. C. 1세기)나 하니나(Hanina ben Dosa, A. D. 1세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See G. Vermes, Jesus the Jew (London 1973), pp. 69-78.
아마도 이 이야기들은 갈릴리의 시장이나 장터에서의 이야기꾼들의 상상 이상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호니나 하니나에게 명성을 얻게 해 준 모종의 역사적인 위업들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 있어서, 예수의 기적에 대한 기록들의 자료들은, 갈릴리에서와 최초의 예수 추종자들과 제자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던 예수 사역의 일화들의 모음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E. Trocme, Jesus and his Contemporaries (E. T. London 1973), chapter 7.

 (b) 역사와 관념(신앙)은 상호 배타적인 것인가? 기적 이야기들에서 부활절 이후의 신앙이 발견되는 것은 분명하다(주 27을 보라). 그렇지만, 그 신앙이 이야기 전체를 창조해 낸 것인가, 아니면 가늠자가 되었을 뿐인가? 슈트라우스 자신은 예수가 귀신 축출자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역사적 문서적 근거에 의해서 확고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Strauss, Life, § 92-93. See also H. van der Loos, The Miracles of Jesus (Leiden 1965), pp. 156-175.
그러나 역사적 개연성에대해 회의적인 그의 시각은, 다른 치유들의 역사성을 예수에게로 돌리기를 거부하게 한다. 그의 Life의 3판에서는 이 입장이 동요하고 있긴 하지만 ; Hodgson, pp. ⅹ1ⅱf.를 보라.
그러나 그는 예수 자신이 치유에 광범위하게 호소하고 있다는 것과, 병 치유를 마지막 때의 복의 현존으로 본 사람이 바로 예수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마 11:51/눅 7:22). 역사적 예수의 말씀으로서의 이로기온의 진정성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 R. Bultma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e. t. Oxford 1963), pp. 23f ; R. H. Fuller, The Foundation of the New Testament Christology (London 1965), pp. 128f.를 보라. New Life, Ⅰ p. 364에 있는 Strauss 자신의 해석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설득력이 없다 : 예수가 호소하는바 기적은 “그의 가르침의 도덕적 영향들의 영적인 의미 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바로 여기 예수 자신에게서 관념과 역사가 하나로 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점을 이상에서 정리한 내용과의(p. 7 이하) 관련 하에서 살펴보고자 한다면, 또 이글이 허용하는 분량 이상으로 그 논쟁을 추적해 본다면, 소위 자연 기적이라는 것 까지도 엄격한 역사적 개연성의 입장에서 자명하게 배제될 수 있는 범주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R. Otto 의 제안을 보라. The Kingdom of God and the Son of Man (E. T. London 1938), pp. 368-74.
그리고 특별히 우리가 “부활”이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의 존재 양식의 변화도, 우리가 인간과 사물을 힐끗 보았을 때에 육체와 영 중에 어느 면이 주도적인 것으로 보이는가 하는 패턴의 내적 관계와 관련된 패러다임으로서의 자연법칙의 한 예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힘을 얻을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c) 슈트라우스가 기독론을 신인(神人)의 관념으로, 즉 관념(이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으로가 아니라 신화적으로만 구현되었으며, 이 관념은(이상화된 시각에서의) 인성(humanity) 안에 실현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절하하려는 것을 보면 그의 역사와 관념에 대한 논리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Strauss, Life, 148-151. Strauss는 기독론의 중심에 한 개인 대신 한 사상을 갖다놓는다 - H. Harris, David Friedrich Strauss and his Theology Cambridge 18730, p. 55.
이 점에 있어서 슈트라우스에게는 헤겔적인 관념론이 만개(滿開)해 있는 것이 보인다. 이러한 관념론은 인간이 그 존재를 뿌리박고 있는 역사로부터 너무 철저하게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성의 격랑(激浪) 앞에서는 여지없이 시들어 버리고 말 생각들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들이 예수에게 돌려지고 있는 기적들의 역사성을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슈트라우스의 역사로부터의 비행(飛行)이 섣부른 것이며 신약성서의 신화 문제를 다루는 그의 태도가 부적절한 것임은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신화”(슈트라우스가 말하는 의미의)와 “기적”은 동어의가 아니다.

3. 유대와 헬라 신화들의 영향

 기독교에서의 신화의 문제는 세기 전환기에 종교사학파들에 의해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See Kummel, New Testament pp. 245ff.
슈트라우스 때부터 있어 왔던 타 종교에 대한 점증하는 관심은 기독교의 다양한 기적 이야기들이 결코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귀결되었다. 기독교 외의 기적 이야기들이 비역사적인 신화들로 취급되어야 한다면, 창조나 동정녀 탄생 등과 같은 성서의 기록들이라고 해서 이런 판단에서 예외일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 슈트라우스 이전에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상당수의 영향력 있는 학자들이 기독교가 그 자신의 고유한 신화들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 기독교는 그 형성기에서부터 다른 종교들의 특정한 신화들의 영향을 받아왔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지로 많은 다른 체계들의 평범한 신화적 사고들이 기독교 신앙과 예배의 주요한 부분들을 결정적으로 특징지웠다는 것이다. 그러한 영향의 주요 근원들은 유대 묵시 사상, 영지주의, 그리고 헬라적 밀의 종교의 신화들이라고 생각했었다.

 (1) 유대 묵시 사상을 신화적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타당하다 - 특별히 종말에 대한, 그리고 이 시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 시대에 대한 개념들(처음 낙원의 회복, 시온의 영광 등), 또 종말을 우주적 대재난의 언어로(혼란시키는 용의 살해,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등) 묘사한다는 점에 있어서 그러하다. See p. Vielhauer in E. Hennecke and W. Schneemelcher, New Testament Apocrypha (E. T. ed. R. M. Wilson, London 1965) Vol. 11, pp. 587-90 ; D. S. Russell, The Method and Message of Jewish Apocalyptic (London 1964), 122-7.
그리고 예수가 이러한 묵시 사상에 의해 영향받았다는 것이나, 묵시 사상이 초대 교회의 신학에 구성적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막 13장 전부 ; 살전 2:1-12; 계 4-21장). See particularly K. Koch, The Rediscovery of Apocalyptic (E. T. London 1972), chapter 6.
그러나 유대와 그리고 기독교의 묵시가 신화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분명히 묵시적 언어를 문자적으로나 현학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묵시가들의 상징이나 암호사용으로 볼 때 그것은 분명하다(예. 단 7:9의 “큰 짐승들”과 “칠십 이레”; 살전 2장의 “감금하고”와 “그 입의 기운으로” ; 계 5:13의 “어린 양” 그리고 666이라는 숫자를 가진 짐승. J. F. Walvoord,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London 1966) 는 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는 오류에 빠졌다.

 그러나 묵시적 소망들은 위기의 때를 맞이한 신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데서 나온 미래의 환상들에 의해 고무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언어들의 신화적 성격에도 불구하고(예를 들면, 계 12장 이하의 원시적 용의 신화, 또 사 27:1 ; 51:9 이하), Kummel, New Testament pp. 250ff. 참조. 벧전 3:19ff, 유 6, 14ff.
묵시가 현재에 대한 불만족과 하나님의 것인 미래의 실재에 대한 통찰이나 그것에 관한 계시를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묵시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통찰이나 계시는 전적으로 그리고 조금도 감할 여지없이 기독교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세계에 뿌리박고 있지도, 그것에 의존하고 있지도 않은 이런 희망을 신화적 언어가 아니고서는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Cf. W. G. Kummel, "Mythische Rede und Heilsgeschehen im Neuen Testament", Heilsgeschehen und Geschichte (Marburg 1965), pp. 161ff.


 (2) 영지주의적 동기(motif)들이, 특별히 기독교 이전 영지주의의 구속자 신화가 See particularly R.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Vol. Ⅰ (E. T. London 1952), pp. 164-83 ; primitive Christianity in its Contemporary Setting (E. T. London 1956) pp. 162-71, 189-208.
신약성서의 사상에 미친 영향에 대한 논쟁은 길고도 복잡하다. See particularly C. Colpe, Die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Gottingen 1961) ; E. Yamauchi, pre-Christian Gnosticism(London 1973) ; cf. J. W. Drane (p. 123 above).
여기서는 초기 신약문서들(바울)이 쓰여졌던 때에 이미 최초의 사람(Primal Man)에 관한 생각들이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틀림없이 신화적인 것이며(“원형적 역사”라는 의미에서의 신화), 바울의 아담 기독론은 바울이 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따라서 그 기독론을 1 세기 사고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것을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 비록 이 기독론에 대한 바울의 기여는 현저히 기독교적인 것이었지만(고전 15:44이하 ; 참조, 빌 2:6 이하). See J. D. G. Dunn, "Ⅰ Corinthians 15. 45 -Last Adam, Life giving Spirit", Christ and the Spirit in the New Testament ; Studies in Honour of C. F. D. Moule (ed. B. Lindars and S. S. Smalley ; Cambridge 1973), pp. 129f, 135f ; also Jesus and the Spirit ch. 10.
아마도 바울이 우주적 용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묘사하는 것도(엡 1:10, 23) 영지주의식의 사고의 영향인 것 같다. 이런 이미지 밑에 깔린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실체에 대한 바울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리스도를 공동체를 표현하는 상징으로나 우주적 정신으로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바울에게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 최초의 사람 사상과 관련된, 고린도후서에 나타난 바울의 대적자들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의한 초기의 기적 이야기들 모음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는 “신인” 기독론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See e. g. R. Bultman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E. T. Oxford 1963), pp. 241, 371 ; H. Koester, "One Jesus and Four Primitive Gospels", in J. M. Robinson and H. Koester, Trajectories through Early Christianity (Philadelphia 1971), pp.187-93 ; R. P. Martin, Mark ; Evangelist and Theologian (Exeter 1972), chap. Ⅵ ; E. Trocme, Jesus and his Contemporaries (E. T. London 1973), chap. 7.
이 세명의 신학자들이 모두,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의해 결정 지워지는 복음의 성격을 강조함으로써, 신인 기독론에 대해 예리한 교정을 가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3) 기독교가 탄생했을 당시의 주요 밀의 의식들의 중심적인 요소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신에 대한 (다양하게 나타나는)신화였다 - 대부분의 경우 이런 신화들은 땅의 풍요를 기원하는 연례행사와 관계된 것이었다. 종교사학파는, 이 제의에의 참예는 신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이 참예자 자신의 것과 동일시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들은 헬라적 기독교가, 특별히 기독교의 세례 신학이 밀의 종교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주장했다. See e. g. Bultmann, Theology 1 pp. 140ff, 148ff.
밀의들을 이렇게 해석하면서 그것들이 기독교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주장은 강하게 그리고 정당하게 도전받아 왔다; 설명과 비판을 위해서는 특히 G. Wagner, Pauline Baptism and the Pagan Mysteries (E. T. Edinburgh 1967).
그러나, 우리가 은혜 또는 성령이 전달되고 주어진다는 점에서 바울의 성례관을 해석할수록, 영지주의나 밀의 종교들의 신화적 사고가 바울에 끼친 영향을 부정하는 것이 더 쉬워진다는 사실이 남아있다. E. Kasemann, "The Pauline Doctrine of the Lords Supper," Essays on New Testament Themes (E. T. London 1964), pp. 108ff.를 보라. 그리고, Dunn, Baptism in the Holy Spirit (London 1970)도 보라.

 신약성서의 신화 문제에 대한 종교사학파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사실, 혹자들은 신약성서의 신앙에 의해 그려진 예수와 유대적 헬라적 신화들 사이의 병행은 대단히 강한 것이며, 따라서 예수라는 것 자체가 신화적 구성물, 즉 유대교의 메시야 희망과 묵시적 희망에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신에 대한 헬라적 신화를 혼합한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생각까지 했었다. See e. g. A. Drews, Die Christusmythe (Jena 1910) ; p. L. Couchoud, The Enigma of Jesus (E. T. London 1924) ;G. A. Wells, The Jesus of the Early Christians (London 1971). But see also M. Goguel, Jesus the Nazarene - Myth or History? (E. T. London 1926) ; H. G. Wood, Did Christ Really Live? (London 1938).
이러한 시도들의 인위성과 별난 변론은 비난받을 점을 그 자체에 갖고 있다. 반대로, 기독교 신앙과 이런 유대적, 헬라적 신화 형식들 사이의 병행이 무너지는 지점이 바로 이곳 이다. 같은 종류의(신화적)언어들을 한 역사적 인물에 적용함으로써 신약의 기자들은 사실상 그것을 비신화화 했다. 이것은 역사의 차원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는 유대 묵시문학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이다 ; 인자는 더 이상 단순히 인간을 닮은 인물이 아니라(단 7:13 -짐승을 닮은 인물에 대조되는, 7:2-12) 나사렛 예수로 나타난다 ; 비슷하게 요엘의 묵시적 희망은(“하늘에서는 기사와....”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등을 포함하는)기독교의 첫 번째 오순절 사건에 의해 성취된 것으로 여겨진다(행 2:16-21). 헬라 신화들과의 대조는 더욱 명백하다. 살루스트(Sallust)는 아티스 신화를 말 한다 ; “이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 그러나 언제나 있는 것이다. Cited by H. Schlier, "The New Testament and Myth", The Relevance of the New Testsment (E. T. London 1967), p. 84.

 이것과는 정반대로, 신약의 기자들은 “이것이 일어났다”(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유대와 헬라 세계가 바라오던 구속이 지금과 후세의 인간을 위해서 역사적으로 현실화 되었다고 선포했다. 따라서 신약성서가 “그리스도 사건”과 기독교적 경험과 구언 희망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같은 종류의 신화적 언어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주목해야할 점은 신약성서가 예수를 언급할 때는 헬라적, 비역사적 의미로서의 신화적 개념은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Schlier, p. 92. 참조. A. Harnack : "모든 신화의 주요 인물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가 되었다“. G. Miegge, Gospel and Myth in the Thought of Rudolf Bultmann (E. T. London 1960), p. 106. 에 인용되어 있음. 확실히, 그리스도의 선재와 동정녀 잉태는 ”신화적“이라고 불리는 것이 마땅하다(참조, Kummel, Heilsgeschen, p. 165f.) ;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성육신의 사상은...신화 자체의 본질과 반대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Pannenberg, "Myth", pp. 71f.).
신약의 신화 형태의 언어와 특정 헬라 종교의 신화들과의 병행 때문에, 신약의 교회 안에서의 그 언어들의 특수한 기능과, 그 특별한 진리를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기능과 진리를 밝혀내는 것이 비신화화의 과제이다. O. Cullmann, Salvation inn History (E. T. London 1967), pp. 139ff.


4. 신을 객관화 하는 문제 - R. 불트만

 슈트리우스와 바이스, 하이트뮐러, 부세트 등의 종교사학파에 의한 예리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세기 전환기의 지배적 신학(프로테스탄트 자유주의)은 신화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할 수 있었다. 신약성서의 신화는 최종 분석에서는 별 중요성을 갖지 못했는데, 이는 신화가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복음의 심장부에 가 닿는 부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 자신이 그의 기적 행위에 대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의 문제는 소홀히 될 수 있었다. 바울에 대한 헬라의 영향이라는 문제도 예수와 바울의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무시할 수 있었다. 예수에 대한 묵시의 영향조차도 묵시란 예수의 메시지를 싸는 껍질에 불과하며, 신화에 의해서는 접근 될 수 없는 초시간적, 도덕적 진리의 핵심을 발견하려면 그런 껍질은 벗겨내야 한다고 함으로써 가볍게 여겨질 수 있었다. 이런 관찰들은 각각이 개신교 자유주의의 고전적 표현으로부터 온 것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다. A. Harnack의 What is Christianity? (E. T. London 1901, reprinted 1958) ; 특별히 제 2,3 그리고 10講을 보라. Weiss, Heitmuller 그리고 Bousset가 이 주안점에 있어서 개신교 자유주의 내에 굳게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 J. Weiss, Jesus, Proclamation of the Kingdom of God (E. T. London 1971), p. 135 (그리고 pp., 16-24의 서론)을 보라. Kummel, New Testament, pp. 230ff., 255ff., 259ff.,; Koch, Apocalyptic, p. 59.

 이런 안일한 입장을, 루돌프 불트만은 복음과 신화가 그런 방법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함으로써 파괴했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케리그마는 신화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지 신화와 나란히 혹은 신화 안쪽의 어디에서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신화와 분리되거나 구분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신약성서의 신화적 언어 안에서 구현되었다. 신화를 제거하는 것은 복음을 제거하는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여, 신화의 문제는 복음 그 자체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고, 이러한 용어들을 쓰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민감한 신경을 건드리게 되었고, 아직까지도 별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논쟁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불트만의 작품들 전체가 이 문제를 다른 여러 각도에서 다룬 것이라 할 수 있지만, Kummel, New Testament, n. 466 ; see also Miegge, Gospel pp. 119ff. ; J. M. Robinson, "The Pre-History of Demythologization", Interpretation 20 (1966), pp. 68f ; W. Schmithals, An Introduction to the Theology of Rudolf Bultmann (E. T. London 1968), p. 250 ;Johnson, pp. 103-14.
현재의 논쟁을 시작하게 만든 것은 1941년에 있었던 그의 강의이다. E. T. Kerygma and Myth, pp. 1-44 의 “New Testament and Mythology" ;이하에 언급하는 페이지는 이 논문의 것이다.
여기서 그 문제에 대한 그의 요약적 진술은 너무 단순화되어 있고 또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신화에 대한 그의 이해는 꽤 분명하게 하이네(G. G. Heyne)의 그것과 일치한다 : 말하자면 신화는 과학 이전 시대의 실재에 대한 원시적인 개념화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신화에는 두 가지 주요한 특성이 있다: 신화에서 추상적 사고는 불가능하며, 신화는 자연과 정신 과정의 진정한 원인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Pannenberg, "Myth" p. 9. See also Johnson, pp. 141-151.
분명히, 신약성서에 대한 불트만의 관점은 신화적이라고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관점이 그런 특징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 예를 들면 신약성서는 바깥 세계를 물질적, 공간적 용어, 즉 3층으로 이루어진 세계(지하, 땅, 하늘)로 표현 한다 ; 또, 신약성서는 정신 이상을 지상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귀신들 탓으로 돌리며, 사건들의 원인을 하늘의 하부 영역을 지배하는 영적 세력들에게 돌린다. 20세기에 사는 우리는 더 이상 그런 용어들로 실재를 파악하지 않는다 ; 과학적 지식의 발달로 인해 그렇게 할 수도 없다 : “이제는 그 누구도 신약성서의 세계관을 진지하게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See also Bultmann, Jesus Christ and Mythology (London 1960), p. 37.

 그러나, 문제는 신약성서의 복음이 이런 용어들로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 마귀에 대한 승리로서의 예수의 치유, 권세들에 대한 승리로서의 그의 죽음, 문자적으로 올라감을 의미하는 그의 “승천”(제2층에서 제3층으로), 문자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그의 “파루시아”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단순히 1세기의 세계관에 집착해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 그것은 “우리의 매일의 일상생활을 부정하게 만드는 그런 세계관을 우리의 신앙과 종교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손상시키지 않고 보전하고자 한다면 신화를 거부할 수도 없다. 올바른 해결책은 신화를 비신화화 하는 것이라고 불트만은 주장 한다 - 말하자면, 신화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신화화하기 위해서는 신화의 진리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불트만은 이러한 통찰력을 가질 것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그의 주장 자체는 임의적인 방식으로, 또 신화적인 사고는(모든 신화적인 사고들이?) 그러나 위의 1부를 보라. K. Barth는 “실존만이 인간의 주체라고 인정하는, 그래서 배타적으로 실존주의적이고 인간학적인 해석만을 요구하는 신화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것인가?” (Kerygma and Myth Ⅱ, p. 116) : 또, I. Henderson, Myth in the New Testament (London 1952), pp. 30ff.를 보라 : “신화적인 것들의 비 단일적 성격” (p. 52). 아마도 불트만은 주객의 구분과 그로 인해 세계로부터 의식적으로 거리를 유지하게 될 가능성은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것의 현대적 발전이라는 데 근거하여 이 주장을 정당화 했을 것이다(cf. Schmithals, Bultmann, pp. 29ff.). 실존주의는 이런 주-객 도식을 극복하고, 데카르트 이후의 과학적 인간에게 데카르트 이전의, 특별히 신약성서의 (신화적) 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준다. F. Gogarten, Demythologizing and History (E. T. London 1955), pp. 48-68 - 특별히 불트만의 신학을 “주관주의”라고 부당하게 몰아붙이는 것에 대한 경고가 주목할 만하다.
정확하게 불트만 자신이 생각한 식대로 일거라는 드러나 있지 않은 가정에 기초하여 표현되기는 했지만.
  “신화의 참 의도는 객관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의 자기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 신화는 우주론적으로보다는 인간학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또는, 실존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신약성서의 신화의 중요성은 그 심상(imagery)에 있지 않고 그것이 간직하고 있는바 실존에 대한 이해에 있다”(pp. 10f.).
 불트만은 자신의 출발점을 정당화하는 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전개 과정을 정당화하려고 애썼다. 비신화화는 단순히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신약성서에 집어넣어 읽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반대로 신약성서 신화의 진리를 결정하는 기준은 “신약성서 자체에 간직되어 있는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이다”). See also J. Macquarrie, An Existentialist Theology (London 1955), pp. 14-21.
불트만이 비신화화는 실존적인 언어의 해석을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변하고 있지만, 그가 가장 많이 비판받고 있는 점은 그는 출발점에서부터 “실존적 언어만”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글의 제2부에서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실존이해”를 정교화하고 있는데, 주로 바울을 근거로 한 것이다. “신앙의 삶”에 대한 자신의 설명이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진정한 실존” “이는 ‘신앙’이 의미하는 바이다 : 우리 자신을 미래를 향해 자유롭게 개방하는 것이다” (Kerygma and Myth, p. 19).
이라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는 또 다시 임의적 방식으로 그러한 진정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만 현실화(이론적인 것으로만 머물러있는 것과 구별해서)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한 걸음 물러나서 신약성서의 언어와 사고의 형태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원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은 구원사건으로서의 십자가와 부활의 선포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며, 그 구원 사건이란 케르그마와의 실존적 만남으로 인한 지금, 여기서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 밖에서, 그리고 우리의 세계 밖에서 일어난
신화적 과정을 우리와 관련시킨다거나 하나님에 의해 행해진 객관적 사건을 우리의 유익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 자신의 십자가로 삼는 것이며 그와 함께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이다. 참다운 부활절 신앙은 감화를 가져다주는 설교 말씀 가운데 있는 신앙이다.“ 참조. Bultmann, Thelogy I, PP. 305f. 또, Schmithals, Bultmann, 6장과 8장을 보라 : “기독교 부활절 신앙은 구원 사건으로서의, 즉 실존적인 경험으로서 예수의 부활 사건에 관심했기 때문에, 역사적 질문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 사건을 구원 사건으로 만드는 것은 말씀(the Word)" : "이 선포를 떠나서는 예수 사건도 평범한 세상사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비슷하게, 세계 교회 협의회(WCC)의 기독론 신앙 고백의 연구를 위해 제출한 논문에서도 불트만은 지금까지 신약성서에 관계되는 한 예수의 신성에 대한 진술들은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한다”고 했다. "The Christological Confession of the World Council of Churchcs", Essays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E. T. London 1955), pp. 280f.

 그러한 시각으로 볼 때 생기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미 불투만의 문제설정을 몇 가지 점에서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면 관계로 세 가지 점만을 다루기로 한다.

 (1) 불트만의 진짜 문제점은 그의 신화적 언어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객관화하는 언어의 문제이다(그래서 이 절의 제목으로 삼았다). 그 문제는 마치 하나님이 객관적 대상인 양, 하나님의 행동이 시간과 공간의 복합체 가운데 있는 객관적인 행동들로 구성되어 있는 양, 그래서 그것이 역사적 탐구를 향해 또 입증이나 반증 가능성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것은 양 말하는 언어와 관련된 문제이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역사적 과학적 연구의 결과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불트만은 그가 그의 스승 W. Herrmann에게 빚지고 있음을 인정한다(Keryma and Myth, pp. 200f.) ; 그러나 Kierkegaard, M. Kaller 그리고 물론 Barth도 같은 주제에 대해 영향력 있는 진술들을 남기고 있다.
이것이 불투만의 신약 신화관의 진짜 문제점이라는 것은 이미 1941년의 논문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특히 고린도전서 15:3-8 에 대한 그의 언급과 (Kerygma and Myth, p. 39) 그 다음 부분을 보라. 참조. 그의 초기 논문, “What does it mean to speak of God?"(1952), Faith and Understanding (E. T. London 1969), pp. 53-65.

 그러나 그것은 그 문제를 계속해서 재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명백해진다: “신화적 사고는....신의 행동을 객관화하는 것이며 그것을 세속적인 일들의 평면에 투사하는 것이다”; “신화들은 초월적 실재에 이 세상적인 객관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신화적 사고는 초월이 마치 이 세상 안에 있는것인 양, 단순히 그것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Kerygma and Myth, p. 197;Jesus Christ and Mythology, p. 19 ; "On. R. Batey; London 19700, p. 41 또 The Theology of Rudolf Bultmann (ed. C. W. Kegley, London 1966) p. 261 에 있는 H. P. Owen 에 대한 그의 응답을 보라. 또, H. P. Owen, Revelation and Existence : a Study in the Theology of Rudolph Bultmann(Cardiff 1957) : "비 신화라기보다는 비 객관화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p.15);Schmithals, Bultmann, 2장; ”모든 신학의 - 심지어는 신앙까지 포함하여 - 근본적인 오류는 ...- 하나님의 행동이 객관화된다는 것이다“ (p. 141); 또 특히 Johnson, Origins, pp. 14f. 그리고 passm, 을 보라. 그는 불트만의 신화와 ”객관화“ 이해에 끼친 H. Jonas의 중요한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pp. 114-26, 207-31).
비신화화가 필요한 것은 신화적 언어가 객관화의 언어이며 그래서 그것이 신앙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들로 해서, 비신화화는 실존주의적 해석의 용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 불트만은 실존적 만남의 언어를 통해서만 신의 행동에 대해 객관화시킴 없이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지금 행동 한다 ; 신앙은 십자가 말씀과의 실존적 만남 가운데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인지한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의 말씀으로 나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불트만은 신앙을 오직 케리그마와 굳게 결합시킴으로써 역사 비평의 변덕으로부터 또 신화로부터 신앙을 건져내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1941년의 논문 끝 부분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 “기독교의 선포를, 신화적이라고 하는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정확히 증거로부터의 면제이다”. 그 후에 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비신화화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지식과 사상의 영역에 근본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신칭의의 교리와 같이, 비신화화는 모든 안전에의 갈망을 무너뜨린다.” Jesus Christ and Mythology p. 84; see also Kerygma and Myth pp. 210f.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신화의 문제를 하나님을 객관화하는 문제와 그렇게 완전히 동일시할 수 있을까? 또 실존적 해석이 정말로 후자의 문제로 표현되어진다면, 그것은 불트만이 주장하는 대로 전자의 문제에 대한 만족할 만한 신학적 해답을 제공할 것인가? 이 두 질문이 아래의 두 가지 사항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2) 신약성서의 신화는 무엇인가? 1941년의 논문에서 불트만은 “다른 세상에 속한 것을 이 세상의 용어로, 신적인 삶의 것을 인간적 삶의 용어로, 저 쪽 면의 용어로 표현하기 위해 심상(imergery)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는 신화의 개념을 너무 포괄적으로 규정했다고 비난받아왔는데, 그런 비난은 옳은 것이다; Miegge, Gospel p. 93.
특히 이 정의는 신화와 유비를 혼돈하고 있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전혀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R. W. Hepburn, "Demythologizing and the Problem of Validity", New Essays in Philosophical Theology(ed. A. Flew and A. Macintyre; London 1955), pp. 229 f.;또 Kummel, "Mythos im Neuen Testament", Heilgeschehen, p. 221; J. Macqarrie, The Scope of Demythologizing (London 1960), pp. 198. ; 반면에, Kegley, Bultmann, pp. 111-6. 에 있는 S. M. Ogden의 보다 긍정적인 평가를 보라.
불트만은 이런 문제점을 인정했으며, 그래서 유비의 용어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의 적법성을 변호하려는 시도를 했다. Kerygma and Myth pp. 196f ; 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68f ; New Testament Issues, p. 42. But see Macquarries comment, Demythologizing, p. 205 n. 1.
그러나 우리가 “다른 세상에 속한 것을 이 세상의 용어로 표현하기 위해 심상을 사용하는 것” 의 적법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즉, 하나님을 객관화시킴 없이) - 은유, 상징, 유비의 사용 - 신약성서의 “신화적 언어”가 사실 어느 정도까지 은유, 상징, 유비인가 하는 문제가 곧 바로 제기된다.
 신약성서의 “하나님 - 언어”는 언제나 불트만이 가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원시적인 개념화를 함의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 2장의 설교가 요엘서 2장의 우주적 장관(壯觀)의 언어를 묵시적 음향효과 정도로만 취급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기자들의 우주 개념이 과연 불트만이 말한 것처럼 세련되지 못한 것일까 하는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한 예로, 요한 계시록의 저자가 자신의 언어가 상징적으로 이해되기를 의도했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미니어(P. S. Minear)가 옳다면, “ 그 선지자는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할 위험, 또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적 차원을 그의 피조세계의 차원으로 축소시켜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P. S. mINEAR, "The Cosmology of the Apocalypse", Current Issues in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ed W. Klassen and G. F. Snyder ; London 1962) pp. 32f. ; "물리적 세계에 대해 단순한 삼층 구조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가 인간 실존의 딜레마를 갖고 씨름한 것을 보면 그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바울이 하나 이상의 하늘이 있다는 당대의 생각을 따라 사고를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이 그것들을 어떻게 개념화 했는지, 또 과연 그가 자신의 생각을 묘사하기에 적절한 언어가 있다고 생각했겠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말할 수 없는 말“ - 고후 12:2 이하) ; 또 바울이 영적인 권세들을 하늘에 있는 실제적인 존재로 말하고 있긴 하지만(예. 롬 8:38; 고전 2:6,8 ; 엡 6:12), 그에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최대의 위협인 ”권세들“이란 인격화된 것들, 죄, 죽음, 그리고 율법 등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참조, Bultmann, Theology I, 21ff. G. Bornkamm은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공격하고 있는 이단은 “신화라는 수단을 통하여 복음에로 나아가고자하는” 시도였다고 한다 - “Myth and Gospel : A Discussion of the Problem of Demythologizing the New Testament Message", Kerygma and History (ed C. E. Braaten and R. A. Harrisville, Nashville 1962), p. 181.

 예를 한 두 개만 들어보자; 예수의 죽음을 희생제사로, 그의 피를 통한 속죄로 말하는 것에는 희생 제사의 실행에 오랫동안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죽음을 이해시키는 강한 은유 이상의 어떤 의도가 있는가? 다시 말하면 씻음, 칭의 , 구속, 양자삼음 등의 상관적인 은유들과 같이 당시의 생활에서 끌어낸 은유가 아닌가? 히브리서의 케리그마가 죄용서와 또 기자의 “지금 여기”에서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인격적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제사 의식과 성전을 “비신화화”했다는 주장은 상당히 정당한 것일 수 있다 Cf. F. F. Bruce, "The Kerygma of Hebrews", Interpretation 23(1969), pp. 9ff.
77) Cf. Barth, Kerygma and Myth Ⅱ, pp. 115f.

 물론 이 주제가 좀더 복잡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신약성서의 “신화적”언어의 상당 부분이 사실은 유비적 은유적 언어라고 하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유비와 은유들은 그 시대에 알맞은 것들이었고, 그해서 그곳들이 그 시대의 언어와 개념을 사용한 것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성(beyondness)이 “과학적 지식의 한계 너머(beyond)어딘가의” 용어들로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면, 1세기의 과학 지식의 범위가 그렇게 넓지 못했다는 사실이 초월을 말하기 위한 1세기의 시도들이 갖는 은유적 유비적 가치를 절하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면, 신약성서의 신화에 대한 불트만의 문제제기가 부적절한 것인 이유는 “어떤 종류의 신화인가?” “어떤 의미에서의 신화인가?”라는 질문들에 대한 철저한 탐구에 의해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신화의 진실은 무엇인가? 실존주의 용어로서의 비신화화가 하나님을 객관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실제로 신화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는가? 불트만이 “하나님 언어(God-talk)", 그리스도 사건의 언어를 지금 여기에서의 케리그마적 만남으로 환원시킨 것이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신화적 언어의 진실을 밝혀내었는가? 역설적으로, 그의 신약성서 신화 개념은 너무 넓은데 반해(2), 신화의 진실에 대한 그의 이해는 너무 좁다.
이와 관련하여 불트만은 양면에서 공격 받아왔다. 더 급진적인 그의 제자들은 불트만이 멈춘 지점이 납득하기 힘들다고 공격했다. 복음서가 남김없이 전부 실존주의적 범주들로 완전히 번역될 수 있다면, 왜 불트만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들을 유지하려고 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활동하는 하나님“에 관해서 계속해서 말할 자신의 권리를 그렇게 강하게 방어했을까?
”신앙의 사람의 자기 이해가 정말 신약성서의 상수(constant)" H. Braun ; " The Meaning of New Testament Christology", J. Th. Ch. 5 (New Yo가, 1968), pp. 117f.
라면,, 도대체 기독론이 설자리는 어디란 말인가? 케리그마 그 자체가 신화적인데, 불트만이 역사로부터 케리그마로 도피해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신화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F. Buri, Kerygma und Mythos Ⅱ (ed. H. W. Bartsch, Hamburg 1952), pp. 85ff. ; "케리그마는 우리가 여전히 비논리적으로 집착하는 신화의 마지막 흔적이다“. 또, Macquarrie의 Demythologizing, 제 5 장을 보라.
만약, 신앙이 인간의 진정한 존재의 가능성일 뿐이라면, 그 가능성의 현실화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만 한정될 수 없다. S. M. Ogden, Christ without Myth (New York 1961), pp. 76-94, 111-16, Van A. Harvey, The Historian and the Believer(London 1967), pp. 139-46 ; see also Jaspers, Kerygma and Myth Ⅱ pp.173f.
그러면 왜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붙잡고 있는가? 우주적으로 초월적인 신에 대한 1세기의 관념이 자기 초월이라는 개념으로 실존적으로 비신화화 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A. Kee, The Way of Ttanscendence (Harmondsworth, 1971), pp. xvi-xxii.

 이러한 공격으로부터 무시하지 못할 하나의 논점이 나온다 - 불트만은 그 자신의 과제를 언제나 기독교의 복음전도와 변증의 용어로 보았다는 것이다(신약성서 자체가 이렇게 읽혀지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는 복음을 견고히 하고, 또 신앙이 1세기의 개념으로 객관화되어서 무의미하게 되는 것으로부터 신앙을 “수호”하기를 원하였다. “비신화화 작업은 하나님의 말씀의 부름을 명확히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다.” Jesus Christ and Mythology, p. 43. 1세기 신화의 잘못된 거침돌((skandalon)을 복음에서 제거하려는 불트만의 관심에 대해서는, Schmithals, Bultmann, pp. 255f.
그래서 그는 케리그마와 산화를 구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신약성서는 그 신화적 배경으로부터 상당한 정도로 독립적인 진리를 구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신학은 반드시 케리그마로부터 그 신화적 틀을 벗겨내는 작업, 그것을 ‘비신화화’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Kerygma and Myth, p. 3). "다른 세상의“ 와 ”이세상“ 등에 대한 선험적인 구별에도 주목하라. p. 10 에 이런 정의가 있다.
- 독일 관념론의 유산을 이어받은 그는 거의 선험적으로 케리그마는 신화 속에 있는 진리라고 단언하게 되었다. 그 진리는 20세기의 과학적 세계관과의 충돌 없이 오늘 나에게 도전해 오는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이 옥덴과 같은 이의 비판을 받을 때, 케리그마로부터 탄생한 신앙에 - 사실 불트만은 이것에로 축소해 버렸다. - 자의적으로 호소하지 않고서는 그 비판을 감당해내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설교에서 말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가온다. 그것의 신뢰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Kerygma and Myth, p. 41);또 Jaspers 에 대한 그의 응답을 보라(Kerygma and Myth Ⅱ, p. 190), 그리고 Schmithals, Bultmann, pp. 193f.
그러나 신앙에 대한 그의 의지가 부적절한 것임은 위에서 인용한 바에 의해서, 또 불트만이 비신화화 프로그램을 제안하면서 자신이 호소했던바 기준들에 의해서 명백해졌다. 따라서 변증적 입장은 우측으로 더 나아가야한다.
 불트만에 대한 보수적 입장에서의 비판은 그가 신학을 인간학으로 축소시킨다는 형태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불트만이 “또는 더 적절하게는, 실존적으로”를 첨가하기를 잊었다는 것이다. 기독론을 구원론으로 축소시켰다는 비판은 같은 내용을 좀더 잘 표현한 비판일 수 있다. See e. g. Barth and R. Schnackenburg in Kerygma and Myth Ⅱ, pp. 91-102, 340-9.
또, 그가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간주하면서 신앙이 확증하고자 하는 바를 망원경적으로 관찰하기만 했다는 비판도 적절하다. 반대로, 기독교 신앙이 원래의 기독교와 의미 있는 연속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로서의 예수에 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는 과거와 미래에 관하여 확증하여야 한다(하나님에 관하여서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해서 불트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 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그것을 오로지 “말해질때에만 현존하는 ...종말존적 사건으로” 기술하는 것은 (Kegley, Bultman, pp.172f. 에 있는 Ogden 에 대한 불트만의 응답) Ogden 의 비판과도 걸맞지 않고, 예수에 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의 부활”이라는 어구가 예수에게 일어난 어떤 것에 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그것이 단지 부활절 신앙의 일어남(rise)만을 묘사하려고 했다면, “부활절의 사건이 어떠한 의미에서건 십자가 사건에 이은 역사적 사건이라고 한다면, 부활하신 주에 대한 신앙의 부활(The rise of faith in the risen Lord) 에 다름 아니다. 사도들의 설교를 낳은 것도 바로 이 신앙이었다” (Kerygma and Myth, p. 42). 바르트는 “예수의 실제 삶은 케리그마와 신앙만으로 제한된다”고 평했다.(Kerygma and Myth, Ⅱ, p. 101). 보른캄도 비슷하게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구원하는 사실(saving fact)이 되며, 더 이상한 사람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라고 한다(Kerygma and History, p. 186).
그것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신에 관한 신비 종교들의 신화보다 나을 게 전혀 없다. 기껏해야 그것은 역사적인(한 때만 역사적이었다가 지금은 죽은)인물일 뿐이다. Cf. Kummel, Heilsgeschehen, pp. 157-65, 228f ; see also Cullmann, Christ and Time(E. T. London 1951, revised 1962), pp. 94-106, Salvation in History pp. 136-50, H. Ott, "Rudolf Bultmanns Philosophy of History" in Kegley, Bultmann, p. 58(note Bultmanns response, p. 264).
각 경우에 있어서 기독교의 초점은 신앙의 그리스도에서 역사적 예수에게로 옮겨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 자체가 신비 제의로 환원되어 버릴 것이다 ; 말하자면,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본받자는(imatio Christ) 도덕주의나(처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예수) Demythologizing, pp. 93, 98f, 224, 에 있는 사실상의 그의 입장, 그리고 Principles of Christian Theology (London 1966)에 있는 그의 “그리스도 됨”의 교훈을 참조하라.
현대적 식물제의(생명의 원리로서, 매년 재생하는 이미지로서의 예수) 의 형태로 환원되어 버릴 것이며, 그것을 통해서 경험되는 어떠한 은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당하지도 또 의미있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예수의 부활”이 믿는 자들의 현재와 미래뿐만 아니라 예수의 현재와 미래도 약속해 주는 것으로 말해지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그 본래의 결정적이고 특징적인 요소들이었던 목적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특히 고진도전서 15:12f. 가 “지금의” 현재적 종교 경험으로 부활 소망을 축소하려는 데 대하여 특별히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라(참조. 그린도전서 4:8) ; Dunn, "I Corinthians 15:45" pp. 127f.을 보라. 참조. W. Pannenberg, Jesus God and Man (E. T. London 1968), pp. 106ff. ;J. Moltmann, The Theology of Hope(E. T. London 1967) 제3장. 예수 자신의 메시지의 미래의 임박한 기대를 종말론적 “지금”의 결단의 위기로 축소한 불트만 입장에 대해서도 비슷한 비판이 가해질 것이다(Jesus and the Word(E. T. London 1934, reprinted 1958), pp. 44-7).
확실히, 제 4복음서의 미래에서 과거와 현재에로 강조점의 이동은(“실현된 종말론”) 일종의 “비신화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Jesus Christ and Mythology, pp. 33f, 80f.
그러나 우리는 그 실현된 종말론이 미래적 종말론의 완전한 포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5:28f. ; 6:39f. 44. 54 ; 11:25 ; 12:48 ; 14:2f ; 17:24) ; 이런 단락들을 익명의 “교회적 편집자”의 것으로 돌린 불트만의 임의적인 시도들에 반대하는 글은 - The Gospel of John (E. T. Oxford 1971).
요한에게서 조차 “종말론적 신화”는 비신화화 과정의 산(酸)에 의해서 용해되어져 버릴 수 없는, 여전히 미래적인 희망을 포함한다.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신화가 얼마나 비신화화 되기 힘든 것인가를 깨닫지 못했다. 신약성서의 신화는 기독교 복음에 있어서 근본적인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신화적 용어가 아니고서는 달리 표현될 수 없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Kummel, Heilsgeschehen, pp. 156f, 160, 164, 225ff. 참조. 앞에서 본 플라톤의 mythos와 logos에 대한 구분 ; 그리고 J. Knox, The Death of Christ (London 1959, reprinted 1967), pp. 146ff. ; 또 Myth and Truth (London 1966), 제2장, 3장.

 간단히 말하면, 불트만의 비신화화 프로그램은 일차적으로 신약성서 신화의 더 넓은 문제보다는 하나님을 객관화하는 문제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예수에 대한 역사적이고 존재론적인 확언들을 포기해 버림으로써 신약성서의 신화적 언어들의 진실을 정당하게 다루는 데 실패했다. 그 확언들은 신화적 언어가 신화로서의 고유한 본질을 가짐으로써 담을 수 있는 것들이다. 좀 더 다룰 필요가 있는 부분들이 있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5. 결  론

 신약성서의 신화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기적의 문제로 축소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행위는 자연 법칙에 대한 침입이나 정지라는 용어들로 생각되어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인간 상황의 좌절과 모순들로부터의 구원의 희망을 개념화한 것인 다른 신화 형식들에의 의존의 문제로 축소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한 차용이 있는 경우에도, 신화적 언어의 성격은 역사적 인물인 예수에 대한 언급에 의해서 변형되어진다. 그것은 또 하나님을 객관화하는 문제로 축소되어서도 안 된다; 이 두 문제는 부분적으로만 겹쳐지는 것이며,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신약성서 신화의 진실의 많은 부분을 무시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에 있는 신화의 문제는 신약성서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들을 20세기 사람들에게는 낡고 무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언어와 개념들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약에 있는 신화의 문제는 (1) 결국 하나님을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유비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신약성서의 은유들과 유비들이 고루하고 현대인의 감각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예, 피 흘리는 희생제사) ; (2)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말할까 하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1세기의 세계에서는 신적 존재들의 활동은 우리가 지금 자연적 정신적 관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설명을 위해 생겨난 경우가 많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자연적 인과의 사슬이 파악되지 못했고, 그래서 원인이 신에게만 돌려졌다는 것이다(에, 나병을 귀신들린 것으로 본 것) ; (3) 관찰 가능한 과학적 역사 영역과 “저 넘어” 사이의 공백을 어떻게 개념화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또 이 두 영역을 고가는 “구절”들에 대해 어떻게 말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 이 문제는 시대에 뒤진 개념화들이 그리스도에 관한 신약 신앙의 전통적으로 중요한 표현들을 결정한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특별히 “승천”(행 1:1)과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는” 파루시아(막 13:26; 살전 4:16)는 단순한 은유나 유비가 아니며 문자적 묘사로 의도되었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적용하기는 불가능한 1세기의 우주관의 산물이라는 문제이다.
 문제는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희망을 1세기적 언어와 개념들로부터 쉽게 구별해낼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의 신앙과 희망은 그런 언어를 통하여 표현되었다; 그것은 그 언어와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비신화화 자체가 제기하는 질문은, 복음이 언제까지나 1세기의 사고형태 속에 감금되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20세기의 용어들로 재 표현될 수는 없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똑같은 신앙과 희망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담 기독론, 공중에 권세잡은 자들에 관한 말들, 승천과 같은 1세기의 신학화 작업들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와 똑같은 의미를 가질 수 없다면, 거기에는 어떤 뜻이 있단 말인가?
 이렇게 신약성서 신화의 문제는 복합적인 문제이며, 적절한 대답을 위해서는 많은 관련 본문들을 주의 깊게 석의해 보아야만 한다. 이미 앞에서 광범위한 신학적 사고들을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하며, 이는 나 자신의 견해에 안내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우리 각자가 이 문제를 안고 스스로 씨름해보아야 하며, 어느 누구도 그 씨름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나의 믿음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사건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할수록,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희망을 그들의 자기 이해와 은혜경험에 대한 설명과 해석의 출발점으로 보는 입장이 강고해질 것이다. 물론, 어떤 마술적인 부적을 대하는 것처럼 그 단어들이 표현하고 있는 사랑과 신앙과 희망의 실체를 새롭게 재발견하도록 언제나 노력해야 하며, 그래서 그 실체를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들의 경험에 있어서 의미 있는 언어로 재 표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비신화화의 과정은 전적으로 20세기적으로 조건지워져 있는 나와 또 완전히 1세기적으로 조건지워져 있는 신앙 사이의 대화이다. 이러한 대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단번에 완전한 대답을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각자가 반복해서 의문을 던지고, 또 대답이 나올 때까지 - 물론 이 대답은 더 많은 질문을 일으키기도 한다. - 본문, 그리고 자신과 실존적으로 씨름해야 하는, 계속되는 대화이다.
 이 대화에는 나의 목소리와 과거의 목소리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와 진실에 대한 인간의 폭넓은 탐구의 한 부분일 뿐이며, 다른 목소리들이 들어와서 질문을 일으키기도 대답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우리가 최종적인 형태나 표현에 도달할 수 있는 대화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의 독특한 질문을 갖고 있고, 19세기는 20세기에 자리를 내 주었으며, 또 20세기는 21세기에 길을 비켜주기 시작했고, 각 시대는 그 시대 나름의 의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개개인의 신자들에 의해, 개개의 신앙공동체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되어야 하는 대화이다. 간단히 말하면, 비신화화의 변증법은 살아있는 신앙의 언어이다.
 


                                           2008년 11월 15일 토요일 밤
                                                                      김 한 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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