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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0/02/26 (12:49) from 203.252.17.113' of 203.252.17.113' Article Number :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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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인격적 동일성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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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인격적 동일성의 문제    
                                                                  
                         
                                                      문 창 옥  

                              I


 '만물유전'(All things flow). 이 고대인의 막연한 직관을 합리적 구도 속에 끌어들이는 것,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그의 후기 철학에서 집중하고 있는 과제이다. 이 과제는 소위 '생성의 획기성이론'(Epochal theory of becoming)을 기본 축으로 해서 풀려나간다. 이 이론에 따르면 진정한 존재(res vera)는 생성소멸할 뿐, 변화하지 않는다(PR 35/102). 그것은 생성의 기본 단위체로서, 변화의 토대가 되는 연속적인 물리적 시공간에 선행하기에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획기적 존재(epochal entity)이다. 물리적인 시공간은 이 획기적인 단위 존재들이 자신의 생성과 동연장인 단위 시공간 영역(region)을 계기적으로 구현하는 데 힘입어 파생되는 실재이다. 그렇기에 변화라는 것도 이들 획기적 존재들 밖에서, 즉 물리적인 시공간의 연장을 따라 빚어지는 이들의 계기(succession)에서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그들 간의 차이일 뿐이다(PR 73/168). 따라서 물리적 시공간 속을 여행하는 가운데 변화를 향유하면서 자신을 존속시키는 존재는 이런 단위 존재들의 상호 결합과 계기로 구성되는 파생적인 존재(PR 56/139, 73/167, AI 263)이다. 화이트헤드는 생성소멸하는 이 획기적인 단위 존재를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또는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라 부르고, 이런 현실적 존재들의 상호 결합과 계기(succession)로 이루어지는 파생적인 존재를 '사회'(society)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도식에 따르자면 전통 실체철학이 문제삼았던 개체, 즉 시공간의 투명한 장을 헤엄쳐 다니는 지속적 존재(enduring entity)는 근원적 의미의 존재인 '현실적 계기'가 아니라 파생적 존재인 '사회'이다. 그것은 파생적으로 현실적일(actual) 수는 있어도(AI 262) 궁극적, 근원적으로 현실적인 것은 아니다(PR 18/73).
  그런데 이들 두 범주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존재 기술, 곧 우주론은 과정철학에서의 인간의 지위를 가장 논란 많은 논제로 등장시킨다. 화이트헤드도 이미 자신의 범주적 기술이 인격을 '인간의 경험의 계기들(occasions) 사이의 발생적 관계로 약화'(AI 239)시킨다는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이 문제를 그의 우주론이 끌어안아야 할 중요한 항목, 즉 '설명되어야 할 하나의 사실' 로 고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라는 범주는 바로 이 '설명되어야 할 사실'로서의 인격적 동일성, 또는 '변화 속에 부분적 동일성을 한시적으로 유지해가는 인간'에게 화이트헤드가 배정해준 우주론 속의 공간이다(PR 90/193, 119/240, AI 241, 265, 267). 물론 화이트헤드가 사회의 범주를 통해 기본적으로 기술하고자 한 것은 변화 가운데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상의 사물들이다. 그는 인간과 그 밖의 자연물을 범주적으로 구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인격적 사회'(personal society)가 인격으로 정의되는 인간일 수 있음을 단언할 뿐(PR 34-35/101-102, AI 267), 세부적인 구성적 논의는 하지 않는다. 이런 구성 작업은 정통 화이트헤드 학자군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하츠혼(Charles Hartshorne)에 의해 시도되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하면서도 다소간 소박한 차원에 머물고 있는 하츠혼 류의 구성은, Process Studies의 여러 지면을 통해 수차례 제기되어온 비판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인격적 동일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일부 비판적인 논자들은 인격적 동일성에 대한 과정철학의 기술이, 실천적 문제와 연관된 담론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인식 자체에 대한 설명마저 위태롭게 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일적 주체의 해체는 도덕적 개념의 근거를 모호하게 하고 인식 그 자체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없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계기와 이들의 계기(succession)로서의 사회를 토대로 하여 일부 정통 화이트헤드 학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구성적 논의에 참여한다거나 이런 구성적 논의의 설득력 여부를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 나의 논의는 다소간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나는 인격을 계기들(occasions)의 사회로 기술할 경우 그로부터, 인간의 행위와 인식에 관련된 불합리한 결론이 도출된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런 기술 자체를 비판하는 귀류법적 논의는 다소간 성급한 것일 수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II). 하지만 이런 필자의 지적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과정철학의 기술을 토대로 하여 인격체와 그 다양한 활동을 구성적으로 설명하거나 이런 설명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형이상학적 상상을 넘어서는 다양한 실증적 정보들, 특히 상당량의 심리학적, 생리학적 정보들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필자가 과정철학의 사변적 기술에 대한 구성적 의미의 보완이나 이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를 후일의 과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필자가 이 글에서 두 번째로,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인격적 동일성과 관련한 과정철학의 논의가 성공적인 결실을 맺기 어렵다고 보는 여러 비판적 시각들의 배경에 공통으로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확신이다. 직접적인 자기 경험에 비추어볼 때 화이트헤드나 하츠혼이 제시하는 자아는 구체적 자아가 아니라 오히려 추상물이라는 확신이 그것이다. 이런 류의 확신은 기본적으로 인격적 동일성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우주론 기술 전체에 대한 전반적인 부정적 평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화이트헤드는 전통철학의 추상개념이 간과하고 있는 '구체적인 것'을 기술한다고 하면서 이를 다시 극단적인 추상개념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배후에서 선도하고 있는 확신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확신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비판은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이 갖는 한계의 핵심을 가장 잘 집약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사실 우리는 과정철학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글인 경우 그 행간에서 거의 예외없이 이런 확신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확신은 화이트헤드가 의도하고 있는 바에 대한 무지와 만날 때면 한층 원색적인 색조를 띠고 나타난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확신과 무지가 가장 두드러지게 작용하고 있는 논제가 바로 '인격적 동일성의 문제'이다. 화이트헤드의 인격적 동일성 논의가 자아에 대한 직관적 앎과 충돌한다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없이 명백하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런 까닭은 아마도 자아에 대한 직접경험이 심리적 명증성을 동반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확신이 다양한 논거를 통해 손쉽게 강화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화이트헤드의 체계내적인 개념을 그에 상응한다고 여겨지는 직관적 경험에 대면시킴으로써 그 부당성을 지적하려는 이와 같은 일련의 시도는 기본적으로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고 있는 것임을 논증할 것이다(III). 화이트헤드가 사용하는 특정의 범주적 개념을 그의 우주론에서의 체계 내적인 지위로부터 분리시켜, 직관적 경험의 내용에 비추어 그 부적절성을 지적함으로써 과정철학 전체의 시도가 수정되어야 한다고 결론하는 처사는 그 자체가 수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적 시각이 설득력을 갖춘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 인간은 또 다른 종류의 궁극적 존재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수정적 입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사변적 구상에 대한 잘못된 진단에서 나온 오도된 처방에 불과하다. 잘못된 확신에 근거한 일련의 비판에 후속하는, 인격체에 대한 그 어떤 대안적 설명이나 기술도, 기본적으로 비판적 논객들의 앞서와 같은 지적이 정당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 그만큼 공허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일련의 대안적 처방이 갖는 공허성을 드러내 보여주고자 할 것이다(IV). 그리고 이에 덧붙여 필자는 그렇게 제시되는 대안으로서의 인격적 동일성에 대한 기술이라는 것도 대개의 경우 고전 실체철학이 안고 있던 난제, 즉 개체존재에 있어서의 변화와 동일성을 합리적으로 조화시켜야 하는 난제를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지적할 것이다.    


                                II

  과정철학의 '인격적 동일성' 개념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들을 검토하기에 앞서, 과정철학에서 인격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먼저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위해서는 화이트헤드의 의도를 가장 정통적인 입장에서 대변하고 있다고 평가되는 하츠혼의 구성적 논의가 적절한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츠혼에 따르면 절대적인 동일성을 유지하는 '지속적인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는 선행하는 계기들(occasions)이 후속하는 계기들에 의해 파악되는 가운데 상호 연관되어 있는 계기들의 결합체(nexus)이다. '지속하는' 자아는 일시적인 자아들(momentary selves)의 결합에서 탄생하는 파생적인 통일체(derivative unification), 즉 화이트헤드의 범주로 '사회'(society)이다. 파생적 존재로서의 사회는, 이를 구성하는 계기들 간에 계승되는 '한정특성'(defining characteristic)에 힘입어 '발생적 동일성'(genetic identity)을 유지하면서 한시적으로 시간 속을 여행한다. 물론 고전적인 실체철학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어떤 엄격한 동일성을 주장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하츠혼은 적어도 그들이 실재적이고 수적인 의미에서 비동일성이 있다는 점을 모호하게 하거나 동일성과 비동일성 사이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였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그들은 동일성 속에 차이성이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동일성이 차이성보다 더 결정적이고 구체적인 실재라고 생각하였다. 하츠혼은 동일성(존재)은 차이성(생성) 가운데 깃들어 있는 것이며 동일성 그 자체는 추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현실적 존재들의 계기(繼起)로서의 '사회'는 바로 이와 같은 '차이성 속에 있는 동일성'을 적절히 개념화하고 있다고 하츠혼은 생각한다. 차이성을 대변하는 것은 사회 속에서 생성소멸하면서 계기하는 현실적 존재들이고 동일성을 대변하는 것은 사회 자체의 '한정특성'이다. 따라서 비동일성은 현실적 존재인 완전한 실재와 관계가 있고, 동일성은 파생적 실재인 사회가 그 구성요소로 갖는 한정특성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인격적 동일성은 궁극적 실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파생적인 실재에 속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인격적 동일성은 '지배적인 일직선적 사회를 내포하고 있는 고도로 복잡한 신체적 사회 속에서의 어떤 한정특성의 존속에 근거하고 있는 것'(PR 35/102, 89/193)으로, 이 한정특성의 생성, 변화, 소멸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과정철학이 말하는 인격적 동일성이란 사실상 부분적인 동일성이요, 따라서 부분적인 비동일성이다.
  그런데 하츠혼의 논의를 통해 과정철학에서 간추려볼 수 있는 이런 인격적 동일성의 개념은 그로부터 귀결되는 것으로 보이는 불합리한 결론 때문에 신랄한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베르토치(Peter A. Bertocci)는 인격적 동일성에 대한 하츠혼의 이와 같은 구성적 논의가 인격적 지평에서의 경험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전개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베르토치는 바운(Borden Parker Bowne)의 인격주의를 논거로 삼아, '계기(succession)에 대한 경험이 없이는 경험의 계기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컨대(A.C. Campbell의 예), 한 사람이 열 번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면, 그가 종소리를 계기하는 것으로 경험할 때 그 자신은 자기 동일적 연속체인 통일체(unity)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류의 지적은 기억과 인격적 동일성 간의 관계 문제에 주로 초점을 맞춰 하츠혼의 논의에 비판적으로 다가서고 있는 샬롬(Albert Shalom)의 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샬롬은 하츠혼이 제안한 해결은 '일시적인 자아'(momentary self)라고 할 수 있는 이론적 구성물을 구축하고 이런 일시적 자아들을 단일한 묶음으로 묶어내는 결합자로서 기억의 고리를 제시하고 있으나, 이는 전도된 설명이라고 주장한다. 기억은 인격적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인격적 동일성이 기억에 의해 설명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비판들은 상식의 논리를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으며, 그런 한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심리적 용어인 '기억'과 같은 개념을 통해 인격적 동일성을 형이상학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는 하츠혼 류의 소박한 시도는 일단 결함을 지닌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렇기는 하지만 이런 소박한 지평의 구성적 논의가 안고 있는 결함 자체가 곧바로 과정철학의 한계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격적 동일성에 관한 과정철학의 논의가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으려면 '인격적 사회'(personal society) 내의 현실적 계기들 간의 관계에 대한 보다 세밀한 구성적 논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간 유기체와 관련된 다양한 생리학적 심리학적 정보가 동원되어야 할 것이며 또 이런 정보를 사변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실험적 개념체계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실증적 정보에 대한 세심한 반성에 토대를 둔 이런 개념체계가 마련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현실적 계기들의 계기(succession)에 대한 경험' 가능성을 설명할 수 있는 성공적인 보완 작업으로 평가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사실 비판적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현재의 계기가 그 직전의 계기만을 파악(prehension)하는 것이라면 '계기(succession)에 대한 경험'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현실적 계기는 그에 선행하는 과거의 모든 현실적 계기들을 직접, 간접으로 파악한다. 과거의 현실적 계기들은 현재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파악되는 가운데 현재 속에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공생한다(PR 226/411-412). 현재는 그 직전의 과거를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통해 그 과거의 과거, 그리고 다시 그 과거의 과거를 연쇄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격적 동일성에 관한 과정철학의 사변적 논의를 보완하는 작업에서 해야 할 것은 연쇄적 파악을 통해 이루어지는 현재에서의 과거 전체의 통일과정을 세부적으로 구성해내는 일이다. 이런 보완적 논의가 지극히 빈약한 지금의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대체적인 방향을 짐작해 보는 일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구성적 작업에 대한 전망 자체를 상식적 직관이나 기성의 개념적 이해체계에 근거하여 미리 차단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사실이다.
  계기하는 자아에 대한 가설이 빚어내는 불합리한 결론에 비추어 비판을 한층 강화하고 있는 대표적 인물인 몰랜드(J.P. Moreland)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는 인식론적 측면에서 과정철학의 인격적 동일성의 논의를 비판한다. 그는 루이스(H.D.Lewis)와 이윙(A.C.Ewing)에 의해 강조되어 온 논증을 택하여 접근하면서, '지속하는 나'(enduring I)에 대한 거부는 인식 그 자체의 가능성을 무너뜨린다고 주장한다. 현실적 계기들의 연쇄(the chain of occasions) 모델 위에서는 우리가 사유 속에서 일련의 추론을 거쳐 결론을 이끌어내는 식의 완전히 성숙된 인식 행위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그는 연쇄모델이 옳다면, 우리가 아주 복잡한 명제에는 주의를 기울일 수조차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동일한 자아가 그 과정의 처음과 끝에 현존하는 일정 길이의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자아가 복잡한 명제나 논증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명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에는 단 하나의 자아에서의 의식의 통일된 행위가 요구된다. 그러한 행위는 인격의 단계들이 주목하는 계기하는 시간적 순간들의 단순한 더미와 동일한 것일 수 없다.

몰랜드의 이런 지적도 직관적으로 명료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식 가능성을 위해 그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통일은 의식행위의 통일로 족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선행하는(과거의) 의식행위들이 후행하는(현재의)  의식행위에서 계속해서 유기적으로 통일되는 데서 인식작용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몰랜드의 주장에서 보듯이 이 행위의 통일을 다시 하나의 동일적 자아에 근거지우려 하는 것은 실체론적 선입견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아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논의를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단순화시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위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이 이를 잘 보여준다. 화이트헤드의 우주 속에 들어 있는 과거에 대한 경험으로서의 계기들은 결코 과거의 단순한 더미나 집적이 아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그것은 유기적 종합의 과정이다. 더구나 이제 문제의 상황성을 바꾸어, 내적 직관에서 포착되는 주관적 사실로서의 인식 과정을 반성적 시각에서 검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인식하는 동안 그의 인격체에서 일어날 것으로 추정되는 고도로 복잡한 생리적 심리적 작용들을 객관적 시각에서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이 과정을 어떻게 미시적으로 분석하고 또 구성하여 기술해낼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놓고 보건대 누군가의 인식 과정을 이렇게 객관적 시각에서 미시적으로 접근할 경우, 거기서 일정 시간 동안 연속하는 어떤 동일자를 발견해낼 가망은 거의 없는 것 같다.
           

                              III

 그러나 몰랜드는 단순히 이런 귀류법적 비판에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동일적 주체를 역설하는 데로 나아간다. '경험의 계기하는 순간에 있어 나는 이들 계기하는 자아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각각 순간에서 동일하고 지금의 나의 자아와도 동일한 나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인식의 동일적 주체가 되는 나'는 샬롬이 말하는 '기억의 전제가 되는 나'일 것이다. 자아에 대한 직관적 경험에서 주요 논거를 마련하고 있는 베르토치가 이 '나'를 가장 그럴듯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계기에 대한 경험의 조건으로서의 나'는 '변화 가운데 있는 자기동일적인 통일-연속체'(a self-identifying unity-continuity in change)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때 '변화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연속하고 있는 나'는 어떻게 분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인가?  
  베르토치는 '변화 가운데 있는 자기동일적인 통일-연속체'란 복합 개념이 '자기의식적 경험에서 드러나는 것'의 주요 골격을 명료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변화, 동일성, 통일성, 연속성과 같은 용어들은 부연없이 결합되기 어려운 개념이라는 데 있다. 이들 개념은, 적어도 단순히 나열되는 데 그치는 한, 상보적이라기보다 상충적이다. 베르토치 자신은 '인격체는 매순간마다 그의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자기동일적'(self-identifying)이라는 말과 '연속하는'(continuing)이라는 말에 의미를 주는 방식으로 그의 본성을 보존할 수 있는 복잡한 통일체'라고 덧붙이고 있다. 일견 이 진술은 직관적 경험에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분석적인 기술내용이 없다. 오히려 이 주장은 무엇인가를 정합적으로 기술하거나 설명하고 있다기보다 설명되어야 할 사태를, 다분히 상충되는 개념들의 단순한 나열을 통해 지칭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이와 유사한 주장을 그의 글 곳곳에서 반복 열거하고 있지만 이들 구절은 하나같이 동어반복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화이트헤드도 이런 진술들이 우리의 막연한 직관을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한 잘못된 것이라고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직관과 외견상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적 존재들의 계기를 구상하게 된 것은 이렇게 직관되는 자아 연속체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기술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변화와 동일성이 인격체 속에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이다. 현실적 계기의 '생성', 사회의 '변화'(사회를 구성하는 현실적 계기들 간의 차이), '동일성'(사회의 한정특성)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화이트헤드의 사변적 기술은 바로 이처럼 자연언어의 논리나 개념로는 함께 담아내기 어렵지만 상식적 직관에서는 명백히 공존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사태를 미시적으로 분석하여 기술하려는, 요컨대 합리화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이처럼 의식에 떠오르는 직접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그런 경험 이전의 지평을 분석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형이상학적 존재 개념을 그대로 다시 의식의 직접적 경험과 대결시켜 실증적으로 평가하려는 것은 명백히 빗나간 시도이다. 그렇기에 또한 비판적 논객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어떤 한 순간에서도 자아는 단위 사건들의 계기로 경험되지 않는다'는 따위의 지적도 이런 자아의 구성원으로 상정되어 있는 '현실적 존재' 개념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물론 화이트헤드가 인격적 경험을 모델로 하여 경험의 계기(occasion)로서의 현실적 존재를 구상하였다는 증거는 많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구상한 현실적 존재들은 인간이 갖는 경험의 계기와 유비적 관계에 있을 뿐, 실증적 대응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단순히 개념적 구상의 원천에 대한 언급을 근거로, 존속하는(enduring) 자아를 구성하는 단위 존재들의 계기가 의식 속에 확연하게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사태를 기술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결국 미시적이고 사변적인 지평의 존재를 투명한 의식적 경험에 비추어 실증적으로 검토하려는 처사는 화이트헤드의 추상적인 우주론 체계가 갖고 있는 기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시도들은 모두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에 들어있는 사변적 기술인 현실적 계기에 대한 규정과 상식적으로 직관되는 사태와의 관계에 대한 오해의 산물인 것이다.
  다른 한편 '나'를 통일적인 연속체로서 인식한다고 할 때 내재되어 있는 논리적 문제를 지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몰랜드가 확언하듯이, 우리는 과연 우리의 자아를 인식할 수 있는가?  논리적으로 나는 나를, 적어도 어떤 실재적 연속체으로 간주되는 나인 한, 온전히 직관할 수 없다. 이런 직관적 인식은 인식하는 나를 항상 '이상한 타자'(a strange Other)로 머물게 한다. 이는 자기인식의 역설에 속하는 사태이다. 칸트는 통각의 통일로서의 주관, 인식의 기점이자 가능 조건으로서의 주관을 요청함으로써 이런 역설을 피해간다. 하지만 이 때의 주관은 칸트 자신이 인정하고 있다시피 텅 비어있는 논리적 주관일 뿐, 실체적 주관이 아니다. 따라서 실체적 자아에 대한 직접적이고 온전한 인식의 가능성을 논하는 모든 학설은 어떤 식으로든 이 역설에 답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직접적인 자기 인식의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이를 피해간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어떤 현실적 존재도 그 자신의 만족(satisfaction)을 의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식은 과정의 구성요소가 될 것이고 그래서 그 만족을 변경시킬 것이기 때문이다'(PR 85/185). 모든 인식은 현재의 행위이며 인식되는 것은 과거의 것이다. 따라서 직접 인식되는 것으로서의 자기는 과거의 자기일 뿐, 지금 인식하고 있는 자기가 아닌 것이다.  
 
  

                              IV


  미시적으로 계기하는 현실적 존재만을 '참된 존재'(res vera)로 간주하는 한, 인격적 동일성과 관련된 문제에 성공적으로 답할 수 없다는 일련의 비판은 인격을 또 다른 의미의 '참된 존재', 즉 미시적인 현실적 존재와 구별되는 '현실적 존재'로 간주하려는 시각의 배경이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격체를 '하나의' 현실적 존재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현실적 존재의 시공간적 규모와 관련된 논란으로 이어져왔다. 특히 월럭과(F. Bradford Wallack)과 부클러(Justus Buchler)는 이런 논란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 양자는 인격체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다양한 규모에 놓여 있는 거의 모든 사물이 다 현실적 존재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야누츠(Sharon Janusz)와 웹스터(Glenn Webster)는 이런 견해의 연장선상에서 인격적 동일성의 문제에 대처한다. 그 두 사람은 공동으로 작성한 한 소논문에서 과정철학의 기술은 인격에 해당하는 모종의 새로운 현실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시간 철학과 물리학에 대한 통찰을 이용하여,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와 미시물리적인 양자 사건(quantum event)을 동일시하는 한편, 폴(Edward Pols)이 논증하고 있듯이 거시적 지평의 인격체는 진정한 의미의 행위 주체이기에, 그것 또한 현실적 존재, 즉 '참된 존재'로 간주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우선 야누츠와 웹스터는 양자 사건이 현실적 계기의 구체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실적 계기와 양자 사건은 시공간적 규모에서 비슷하다. 그리고 양자 사건들은 우리가 시공간과 관련하여 현실적 계기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 두 존재 모두 전반부와 후반부의 계기(succession)로서가 아니라 일거에 생성한다(come to be at once)는 데서 일치한다. 화이트헤드도 {과정과 실재}의 여러 곳에서 우리의 우주시대를 '전자기적 사회'(electromagnetic society)라 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이런 해석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것으로 읽어낼 수 있는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들 두 사람의 이해는,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해도, 화이트헤드의 본래적인 의도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저술 어디에서도 이들 사이의 1:1 대응이나 현실적 계기의 실증적인 사례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양자(quantum)와 현실적 계기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추정적 가설적이다. 이는 필자가 앞 절의 논의에서 밝혔듯이 현실적 계기가 일상적인 경험에서 발견되는 존재가 아니라 이런 경험과 존재를 사변적 분석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범주적 존재로 상정되어 있다는 사실의 연장선상에 있다.
  어쨌든 야누츠와 웹스터는 현실적 계기와 양자사건 사이의 대응성을 천명하고 나서, '현실적 계기들만으로 인격을 설명할 수 없다'고 추론한다. 우선 이들은 '개별적인 계기(occasion)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간이 행위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고 일단 전제한다. 그런데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만이 자기 창조라는 의미에서의 주체적 활동성(subjective activity)을 가질 수 있으며, 주체적 활동성을 갖는 것만이 근원적 의미에서 '현실적'이다(PR 222/340). 그러나 이러한 현실성을, 양자사건에 상응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미시적 지평의 현실적 계기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라면 인간의 주체적 행위는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인격체와 양자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현격한 규모의 차이에 비추어 볼 때 인격체는 결코 '하나의' 현실적 계기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이 주체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또한 인간이 현실적임을 인정해야 한다고 야누츠와 웹스터는 주장한다. '행위 주체로서의 인간'은 현실적 존재, 즉 '참된 사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그들은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에서 어떤 근본적인 변화없이는 인격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결론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물어볼 수 있다. 인격체가 진정한 현실적 존재로 간주될 경우 이 현실적 존재는 어떻게 합리적으로 특징지울 수 있는 것인가? 야누츠는 '무지개가 어느 특정한 물방울 속에 있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인격체는 어떤 현실적 계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구성요소가 되고 있는 어떤 특정의 사회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시간의 한 순간에는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화이트헤드의 기본 신념에편승하여, '하나의 현실적 계기나 구성요소가 되는 하나의 사회에는 인격체가 없다'고 결론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옳다 해도 이것은 문제의 시작이지 문제의 종결이 아니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현실적 존재나 사회들 밖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또 그런 것으로 요청되는 인격체가 어떻게 분석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상 이들이 말하는 대안이라는 것이 공허한 개념놀이로 끝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야누츠와 웹스터는 '인격체는 다양한 지평에서 상호작용하고 있는, 주체적으로 실재하는 다수의 유기적 통일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덧붙여 말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진술은 베르토치의 '연속체'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상식적이면서도 선언적인 언명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이런 거시적 규모의 인격체가 '참된 존재'라면 그것은 고전 실체철학의 난제, 즉 실체에 있어 변화와 동일성을 조화시키는 문제에 또 다시 말려들 것이다. 여기서도 물론 우리의 제안은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하츠혼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시사적이다.

사건들이 개체들보다 더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의 정신물리적 역사를 구성하는 현실적 사건들의 총체가 이런 정신물리적 사건들이 연관될 수 있는 어떤 단일한 '나'보다 더 결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나'가 행위의 경로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어떤 것처럼 보인다 해도 이 결정행위는 '나'에 귀속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건들 자체에 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결정행위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결정행위로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나'라는 역사적 사건을 구성하는, 심리적으로 혼합되어 있는 시공간적 사건들에 의해 내려지는 무수한 하부결정의 누적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지만 샬롬이나 야누츠와 웹스터는 자연언어의 논리에 비추어, 하츠혼의 이런 구성적 이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샬롬은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의도(intention)와 관련된 모든 술어들은 자의적인 철학적 관심 하에서, 사실상 그것들이 속하지 않은 영역에 귀속됨으로써 그들의 특수한 의미를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야누츠과 웹스터도 인격체와 행위와의 관계를 논하면서 이와 유사한 성격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인격체가 그 구성요소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행위와 의도에 관한 인간의 언어에 의해 전제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하츠혼의 진술만 놓고 본다면 이렇게 해석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화이트헤드의 본래 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인간의 일상언어는 의식되는 세계의 존재들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이 거시적 지평에 관한 한, 화이트헤드에게서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화이트헤드도 일상적 삶의 공간에서 행위 주체가 인간이라거나 인간의 의도에 관련된 자연언어가 이런 인간에 토대를 둔 것이라는 데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연언어는 '사건'보다는 '개체'의 세계, 미시적 생성의 실재 세계보다는 명석판명한 감각의 세계,  따라서 구체적 실재의 세계보다는 '이미 추상된 세계'를 전제로 하고 또 이를 강화할 뿐이다. 그것은 실천적 감각적 지평에서의 삶에는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은 실용적 가치를 가질 뿐, 실재에 대한 기술적(descriptive) 가치를 갖지 못한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의 자연 언어는 '참된 사물'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인간 의식의 산물인 추상의 세계에 근거를 둔 것이다. 따라서 자연 언어의 전제는 사변적 기술을 토대로 하여 설명되어야 할 추상인 것이다. 그렇기에 또한 자연 언어를 실재 그 자체의 구조에 근거지우려 하거나 반대로 자연 언어의 전제라는 미명하에 그 논리를 따라 실재 자체를 재단하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아가 하츠혼의 언급 속에 들어있는 '사건'들과 이들이 갖는 '결정성'이란 자연언어가 간과하고 있는 보다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실재의 특성을 말한다. 이들은 자연언어의 범주 밖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연언어와는 구별되는 언어로 기술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가 상당 수의 개념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설령 화이트헤드가 인간의 의도나 행위를 떠받치고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미시적 세계를 사변적으로 분석하고 기술하면서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이 심리학적, 생리학적, 물리학적 함축을 지니고 있다 해도 이들 용어들은 사실상 이미 감각적 지평에서의 특수한 의미가 상당 부분 사상된 보편적인 구조적 특성만을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화이트헤드의 사변적 용어들은 그 어느 것도 감각적 의식적 지평의 존재나 규정성과 구체적 직접적 연관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이런 용어들에 의한 사변적 기술을 통해 거시적 일상적 지평의 인간과 세계를 미시적 보편적인 모습으로 환원시켜 보여주며, 또 이를 통해 자연언어의 전제, 즉 자연인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온 신념이 감각적 추상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준다. 바꿔 말하자면 화이트헤드는 일상언어와 의식적 인식이 공통으로 갖는 추상성을 드러내 보이고, 우리가 이들을 활용하는 가운데 부지부식간에 궁극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관념들을 형이상학적 지평에서 해체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과정철학의 기술에서는 인간의 의도와 관련된 술어들이 그 특수한 의미를 박탈당한다는 샬롬의 지적은 부분적으로 옳지만, 그렇기 때문에 화이트헤드의 사변적 기술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그의 지적은 역시 화이트헤드의 사변적 기술의 지위와 기능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과정철학에서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변적 기술을 통해 전통 철학의 개념이나 자연언어의 추상성과 모호성을 비판하고 설명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위 주체로서의 인격체'에 관한 과정철학의 기술이 어떻게 평가되든 간에, 기본적으로 야누츠와 웹스터가 주장하듯이 인격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실적 존재를 두 종류로 구별하여야 한다고 보는 시각에는 심각한 비일관성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째서 그들은 자연사태에 대한 기술에서는 물리학적으로 논의되는 가설적 이론적 존재, 즉 양자 사건으로 간주되는 현실적 계기의 역할을 인정하면서 인간 유기체에 대한 기술에서는 이를 거부하는 것인가? 직관적 경험 때문인가? 그러나 감각적 직관적 경험을 통해 발견되는 것에만 주목하자면 우리는 인간에서보다도 자연물에서 오히려 순간 존재들의 계기를 포착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자연물에 대한 직관적 경험은 대개의 경우 인격에 대한 자기의식적 경험보다 훨씬 더 안정되어 있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자연사태가 미시적 존재의 이론적 구성을 통해 기술되고 또 이를 토대로 감각적 사태가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한, 인간에 대한 미시적인 가설적 기술의 가능성과 이에 근거한 인간 행태(behavior)의 설명가능성 역시 인정하는 것이 일관된 태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V

  화이트헤드의 우주론이 노리고 있는 것은 막연하게 직관되는 사태를 합리적으로 기술해내는 일이다. 이때의 기술은 인간의 모든 경험현상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주론의 체계가 경험현상에 대한 보편적 구제가능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화이트헤드의 기본 신념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계속되는 변화 속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아, 요컨대 흔히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자아를 결코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계기와 사회라는 두 범주를 활용하여, 자아가 갖는 변화와 동일성을 사변적 지평에서의 기술을 통해 합리적으로 매개하려 한다. 이 기술에서, 의식에 동일적인 것으로 경험되는 것인 한에 있어 자아는 '한정특성'에 주목하여 바라다본 '사회'이며, 가변성을 지닌 것으로 경험되는 한에 있어 그것은 계기(succession)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적 계기들이다.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직관되는 자아'가 완전히 부정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답변이다.
  나아가 인격적 동일성의 내적 구조를 현실적 계기들의 계기(succession)로 규정하고 있는 과정철학의 기술은 의식 속에 직관되는 자아와 충돌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과정철학의 우주론 체계에 근원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있는 현실적 계기는 사실상 인간의 경험 일체를 구제하기 위한 기본적인 기술적 장치이며, 다른 모든 범주적 언명들은 이 기술적 장치를 규정짓기 위해 정합적으로 얽혀있다. 그래서 '체계 내적'으로 볼 때, 현실적 계기는 가장 추상적인 개념으로 나타나 있다. 의식에 포착되는 거시적 규모의 세계는 이 미시적이고 추상적인 존재 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구성적으로 설명된다. 여기서 구성되는 일차적 존재는 '사회'이며, 이 사회는 감각적 의식적 경험에서 예증사례를 갖는다. 따라서 사회는, 비록 모두가 그렇다고할 수는 없지만,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험적 사물이나 현상에 의거하여 그 의미가 검토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토대가 되는 실재로서의 현실적 계기에 대한 의미확정은 실증적인 인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현실적 계기 하나하나는 의식에 있는 그대로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는 의식이란 실재의 단순한 수용이나 재현의 능력이 아니라 실재로부터의 추상능력(MT 123/144), 또는 실재에 대한 선별적인 배제라는 의미의 부정 능력(PR 5/52, 254/455)이라고 특징지움으로써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의식적 인식이 실재, 즉 현실적 계기들의 미시적 생성 과정으로서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부여잡을 수 없는 것임을 천명해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가 스스로 인정하고 있듯이 그의 우주론 체계는 그것이 소화할 수 없는 경험 현상과 충돌할 경우 마땅히 수정되어야 하겠지만, 이 때의 충돌이란 것이 적어도 현실적 계기와 의식적 경험에 떠오르는 어떤 사물과의 직접적인 충돌일 수는 없다. 현실적 계기라는 범주적 존재가 갖는 의미는 의식적 실증적 경험에서 확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의미는 그것이 우주론 전체에서 차지하는 체계내적인 지위와 성격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또한 그것의 적절성 내지 정당성에 대한 평가도 실증적 지평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갖는 설명력에 비추어 이루어져야 한다. 자아를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적 계기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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