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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0/02/26 (18:24) from 203.252.17.113' of 203.252.17.113' Article Number :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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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편에 나타난 신학적 인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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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편에 나타난 신학적 인간학

김이곤 eekon.org

본문사역
1. 성가대 지휘자의 지시에 따라
기띳에 맞춘 시.
다윗에게 속한 시.
2. 오, 야훼, 우리의 주여!
온 땅에 가득 찬 당신의 이름의
그 장엄함은
무슨 뜻이오며(m h)
하늘 위에 있는 당신의
저 영광스러움은
무슨 뜻이옵니까?
3.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술을
가지고서도
원수와 복수자를 꺽고
당신의 대적자들을 막을 튼튼한
요새를 당신이 세우셨습니다.
4. 왜냐하면(k ) 나는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하늘과
당신이 매어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5. 당신께서 기억해 주시는 저―
인간[에노쉬]이란 무엇입니까?(m h)?
당신께서 보살펴 주시는 저―
사람의 아들[벤·아담]이란 무엇입니까?
6. 그러나(w w) 당신은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부족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7. 당신은 그에게 당신이 손수 만드신 것을
다스리도록 하셨으며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8.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들짐승까지도
9. 하늘을 날으는 새와 바다에 노니는 물고기하며
물길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10. 오, 야훼, 우리의 주여!
온 땅에 가득 찬 당신의 이름의 그 장엄함은
무슨 뜻이 옵니까(m h)?
1. 서  론
이스라엘 시를 이스라엘 인근 나라들의 종교시들과 비교해서 읽어온 사람이면 누구나 자연과 인간을 신격화하거나 또는 신학적 맥락에서부터 떠나서 순수하게 자연과 인간을 찬양하는 찬양시가 이스라엘시의 세계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하고는 놀란다. 특히 시편시의 문학쟝르를 분석하는 자들은 지상의 왕과 지상의 왕권 그 자체를 찬양하는 "순수한 제왕시"(purely royal psalm)와 그리고 성전 자체를 찬양하는 순수한 성전찬양 시가 이스라엘 시편시의 세계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는 또한 역시 놀란다. 이러한 이스라엘시의 특징적 현실을 우리는 시편 8편에서 가장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즉 시편 8편은 인간학을 시로서 서술한 대표적 문학작품이긴 하지만 이 시편시의 고전적 인간학은 인간 그 자체가 명상과 사색의 대상이 되지 않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학적 반성이라는 맥락 안에 들어 와 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러한 컨텍스트에서 볼 때 현대의 시편연구서들로부터 우리가 소위 순수 인간학이라는 독립된 주제연구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하겠다. 파스칼의 "팡세"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우리가 시편 8편에서도 들을 수 있는지는 전혀 의심스럽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하나의 갈대, 자연 중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의 생각하는 갈대다. 즉 그를 깨뜨릴 무기를 얻기 위하여 우주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방울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이면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비록 그 인간을 깨뜨려 버릴 수는 있다고 하여도 인간은 그 파괴적인 우주보다는 더 위대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스칼의 이 논지는 시편 8편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파스칼의 경우에 있어서는, "생각하는 갈대"(a thinking reed)로서의 그 사유의 힘을 어디까지나 인간 자체안에 있는 고유한 그 무엇으로서 보는, 이른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cism)를 강변하고 있지만, 시편 8편의 경우에 있어서는 창조자의 지혜를 찬양하는, 이른바, 찬양시의 장르라는 문맥 안에서만 "인간"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시편 8편의 시구(詩句) 속에 그려진 인간은, 구약성서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듯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비로소 그 의미가 문제 삼아진다. 바로 이것이 인간을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맥락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구약성서적 인간이해의 한 특징이라고 하겠다. 아마도, 이것은 고대 수메르인들의 인간학에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즉 고대 수메르인들에게 있어서 완전한 의미의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과 평행어로 쓰이는 "루갈"(lugal ; great mankind) 개념을 홀로 지니고 있는 "왕"만이 완전한 인간이며, 반면에 개개의 일반 인간은 완전히 이 왕 배후로 물러가 있게 된다. 그러나, 시편 8편의 근본적 주제가 인간을 비록 지상의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는 왕관을 쓴 자로서 묘사는 했지만 그 근본주제는 "그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찬양"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 히브리 시의 한 특성을 반영해 준다고 하겠다. 일반적으로 통칭해서 말한다면, 히브리적 찬양시들은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강조해 준다는 특수한 기능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신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 안에서 창조주 찬양이 노래되지 않고, 신(神)들 사이, 즉 등급이 낮은 신들이 등급이 높은 신들을 찬양하는 고대 바벨론 찬양시들이 지니고 있는 그 신학적 현실과는 시편시의 현실은 현저한 차이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즉 다음과 같은 시적(詩的) 스타일은 시편 찬양시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달[月] 神을 향한 바벨론 찬양시
오, 당신! 당신의 말씀이 하늘에서 선포될 때
Igigi 神은 꿇어 엎드립니다.
오, 당신! 당신의 말씀이 땅에서 선포될 때
Anunnaki 神은 지면에 키스를 하나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시의 인간학이란 소포클레스(Sophocles), 파스칼(Pascal), 그리고 칸트(Kant) 등등의 헬라 철학자들에게서 제기되었던 문제, "인간이란 무엇입니까?"라는  순수 인간학적 주제와는 상당히 다른 컨너테이션(connotation)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편시의 인간학은 神·人 관계의 맥락에서만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판넨베르그(Pannenberg)는 히브리적 인간학에 관한 한 함축적 암시를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즉 그는
[히브리적] 인간은 그가 의존하고 있는 분, 즉 모든 유한한 것을 초월하고 있는 그분과 마주 대하고 앉아 있다는 것을 언제나 전제하고 있다.
라고 말한다. 실로, 인간에 관한 한 신학적 명상을 찬양시의 시적 수사구로 묘사하고 있는 시편 8편은 바로 이러한 신학적 인간학의 현실을 웅변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시편 8편의 시적 수사(修辭) 안에 표현된 역설적인 신학적 인간학이 무엇인지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2. 시편 8편의 비평학적 컨텍스트
1) 구약성서의 컨텍스트에서 본 시편 8편
구약에 나타난 인간학을 폭 넓게 다룬 책은 아이히롯트(W. Eichrodt, Men in the Old Testament)와 볼프(H. W. Wolff, Anthropology of the Old Testament)의 것들인데 여기서는 희랍적 사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분법적(二分法的) 또는 삼분법적(三分法的) 인간이해, 즉 몸과 영혼(    와      또는     와       )으로 이분(二分)하여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나 또는 몸 혹은 육, 영, 혼(     또는     ,       ,     )으로 삼분(三分)하여 인간을 이해하는(데살 전 5 : 23 참조) 인간이해가 구약의 세계에서는 부정되고 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다룰 쟁점은 결코 구약 전반에서부터 인간학적 서술들을 모두 들추어내어 논쟁하는데 있지 않고 시편 8편과 비교될 수 있는 대표적인 인간학적 서술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는 일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주장하고 있듯이 시편 8편에 나타나는 인간학적 진술은 창세기 1장에 나타나는 창조설화와 특별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주로, 이러한 관련성은 시편 8 : 6-9가 창세기 1 : 26, 28과 평행된다는 점에서부터 추론된 것이다.

이 두 텍스트는 모두가 창조주께서 그가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인간에게 위임통치케 하셨다는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즉 "다스려라"는 신의 명령을 그 핵으로 하여 그 문학적, 그리고 주제상의 평행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서로 엄격하게 상응하고 있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즉 시편 8편이 인간을 가리켜서 "하나님보다는 조금 부족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 주신" 존재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과 같이, 창세기 1장도 인간을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 소위 말하는 이마고·데이(Imago Dei)로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시편 8편과 창세기 1장 사이에는 주제(主題 : motif)상의 상응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 다음 시편 8편과 창세기 1장이 모두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위임통치권을 인간에게 주셨다고 하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창조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신적 위탁 통치권"이 이마고·데이(Imago Dei)의 기능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그 주제(主題)상의 통일이 또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구약성서신학에서는 어떤 의의를 가지는가? 또는 구약성서적 인간이해란 구약 창조론의 한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폰·라트가 그의 창세기 주석과 그의 유명한 구약성서신학 제1권을 통하여 주장하였던 바, "창조론"이란 구약신앙의 중심대상도 아니요 창세기 1장(P)과 2장(J)의 진술들이 그것을 목표로 한 것도 아닌 단순한 하나의 구원사의 보조적 기능 이상은 하지 않는다고 한 그 주장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대체로, "창조신앙"이 구원사 신앙의 서론 또는 보조로서만 이해될 수 없다는 강한 부정적 반응을 보여 왔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비록 창조주에 관한 신앙이 이스라엘에서도 오래 전부터 그 본래적 자리를 갖고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창조신앙이 이스라엘 역사신앙에 토착화할 때는 그 어떤 특수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신학의 현실로 미루어 보아, 부정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편 8편과 창세기 1장의 인간학은 어떤 역사신학적 의의를 가지는가? 이 문제는 시편 8편과 창세기 1장 사이의 전승사적 연결관계를 통하여 질문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물음에 대한 주석가들의 일치된 견해는 아직 없다. 주석가들의 견해는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그 하나는 시편 8편의 인간학을 창세기 1장, 즉 소위 P 기자의 인간학보다 더 고대의 것으로 보고 바벨론 포로기 이전으로 돌리는 견해이고 그 다른 하나는 시편 8편의 인간학을 창세기 1장의 인간학을 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 둘 사이의 택일의 문제는 그리 손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편 8편과 우가릿(Ugarit) 문헌 사이의 평행은 시편 8편의 시어(詩語)들 중 많은 것이 고대 가나안적 기원을 갖고 있음을 암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도 또한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즉 가나안 문학의 이스라엘적 개작이라는 이스라엘 신학의 특수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아직도 여전히 유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지 여기서 시편 8편과 창세기 1장의 창조론 속에 들어 와 있는 성서적 인간학이 어떤 신학적 맥락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만을 묻는데 머물려고 한다. 이 물음에 대한 더 나은 대답은 우선 시편 8편의 인간학이 구약뿐만 아니라 신약의 맥락에서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고 그리고 일반적인 신학적 사유의 측면에서는 어떻게 반성될 수 있는지를 먼저 언급한 다음에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2) 신약성서의 컨텍스트에서 본 시편 8편
시편 8편의 신약성서적 응용은 마태 21 : 16, 고린도전서 15 : 25-28, 그리고 히브리서 2 : 6-9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가장 직접적인 상응은 히브리서 2 : 6-9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약성서의 응용들은 전적으로 본래의 순수한 인간학이 철저하게 기독론으로 재해석되는 성격을 띄고 있지만 시편 8편에 대한 신약적 재해석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히브리서 2장의 경우는, 그 "주제의 전이"가 괄목할 정도로 강조적인 수사어법으로 표현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히브리서 2 : 6-9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성서에 어떤 이가 이렇게 증언한 대목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잊지 않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저를 돌보십니까? 주님은 그를 <잠시>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으나 영광과 영예의 관을 씌우셨으며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이렇게 만물을 그에게 복종시키셨다는 것은 그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아직도 만물이 다 그에게 복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잠시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셨다가 마침내 영광과 영예의 관을 받아 쓰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의 소치입니다.
이러한 히브리서 기자의 시편 8편에 대한 기독론적 재해석은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잠시동안" 낮아지셨지만 마침내는 모든 사람의 위에 높이 오르셨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잠시 동안"(     )인데 이것은 히브리 구약성서의 원문이 말하는 "조금"(   )이라는 그 질적 의미를 시간적 개념의 "잠시"(     )라는 말로 의도적인 개작을 했다는데 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때>와 그리고 <영광의 때> 사이의 시간적 전이(轉移 ; transition)가 여기서는 강조되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기독론적 해석 즉 히브리어의 "에노쉬"(    ) 개념 또는 자주 메시아 개념으로 쓰여 온(단 7 : 13 등등) "벤·아담"(사람의 아들) 개념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보편적인 메시아 칭호인 "휘오스·투·안드로푸"(사람의 아들 :                  ) 개념으로 신학화 하는 일은 단지 신약성서의 신학적 컨텍스트 안에서만 그 고유한 자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학적 진술을 "주제의 전이" (transition of motif)라는 수사적 형태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시편 8편과 신약 히브리서 사이에 놀라울 정도의 수사적 상응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3) 신학적 반성의 컨텍스트에서 본 시편 8편
시편 8 : 5에서 제기되고 있는 물음, "인간이란 무엇입니까?"(m h 'en sh)라는 질문은 만일 우리가 시편 8편의 문맥을 떠나서 본다면 분명 하나의 순수한 철학적 물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에 관한 철학적 또는 존재론적 추구가 구약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구약성서는 그 자신의 특수한 맥락 안에서만 인간의 의미를 추구해 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편 8편 시인의 인간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구약적 이해의 특수한 컬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구약적 인간 이해와 희랍적 인간이해 사이에는 다른 점이 나타나는 것으로 주지되어 왔다.
첫째로 지적할 점은 "몸"을 "무덤"으로 보는, 이른바, "소-마"(    )를 "새-마"(    )로 보는 희랍적 비극주의의 페시미즘(pessimism)을 구약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땅 위에서 서식하며 호흡하는 모든 것 중에서 사람보다 더 불쌍한 것은 없다"라고 탄식한 "호-머"(Homer)의 "일리아드"(Illiad)에 나오는 제우스(Zeus)의 비탄(jeremiad)과 같은 희랍적 비극주의는 구약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인간은 단지 "땅의 먼지"로 빚어져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구약 야비스트(J)의 글에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없고(창 2 : 7), 또 인생의 허무를 우주의 끝 닿는 데까지 절규해 간 구약의 저항시인 코헬렛(Qoheleth)의 저 유명한 허무의 노래에서도 우리는 희랍적 비극주의 같은 것을 찾아낼 수 없으며 뿐만 아니라 자기의 생을 형성시켜준 모태와 자신의 생일까지 저주하는 저항문학의 대표작인 욥기에서도 또한 그러한 "일리아드적 탄식"을 들을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야 80년,
그나마도 그 인생살이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아, 인생이란 것은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는구나.
라고 노래하는 시편 90 : 10의 탄식노래에서도 제우스(Zeus)의 비탄과 같은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약성서의 생(生)에 관한 탄식은 철저하게 배타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맥락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구약성서로부터, 죽음과 직면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그리스도의 그것과 구분케 하는 희랍적 아타락시아(Ataraxia) 같은 것을 발견할 수는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죽음의 기로, 거기에는 실로 조용히 관조하듯 영혼불멸을 강론하며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가 한편에 있는가 하면, 큰 울부짖음과 눈물로 죽음의 심판을 절규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또한 거기에 있다. 분명, 구약성서적 인간이해에는 "살크스"(    )나 "소마"(    )를 "푸쉬케"(    )나 "푸뉴마"(      )로부터 분리하는 희랍적 이분법(Hellenistic dichotomy) 같은 것은 결코 찾을 수 없다고 하겠다. 단지 거기에는 인간 구성의 기본 소재를 전적으로 "땅의 먼지"(            )로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의 입김인 "뉘솨마"(    )를 생명의 핵으로 하는 생명체인 "네페쉬"(   )만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즉 구약성서는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몸" 즉 통전적인 한 생명체로 본다. 그리하여 생명체라는 말 즉 "네페쉬"라는 말은 인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요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통전적 인간" 그 자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탄식}은 "일리아드의 탄식"과는 달리 생명의 근본이신 창조주와의 관계라는 컨텍스트 안에서만 움직이는 그 어떤 것이다.
세째로는 신의 형상(Imago Dei)로서의 인간에 대한 한 편견, 즉 구약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역자, 소위 70인역(Septuagint) 역자의 신학적 편견과 오해에서부터 기인된 인간이해가 여기서 문제가 된다. 희랍역 구약성서는 창세기 1장 26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평행법적 어휘 즉 "첼렘"(   )과 "데무드"(    )라는 어휘를 "에이콘"(     )과 "호모이오시스"(        )라는 말로서 신학적으로 구별지어 번역한 후, 타락과 더불어 상실되었던 그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은 "데무드"(    ) 즉 "호모이오시스"(        )에만 관련시키므로 마침내 이 "호모이오시스"는 신적인 본질 또는 原義(justatia originalis)와 같은 개념으로 초기 신학자들에게서 인식되게 되었고 그리고 타락 이후에도 상실되지 않고 인간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첼렘" 즉 "에이콘"에게만 관련시키므로 이 "에이콘"은 인간의 이성, 자유 등등과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적 본성에 관한 이러한 이분법적 분석은 히브리적 인간이해와는 전적으로 상반되는 상충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첼렘"과 "데무드"의 병행사용이 70인역 역자가 생각하였듯이 그렇게 그 어떤 인간본성의 본질상의 구별을 목표로 하고 히브리인들에게서 사용된 것이 아니고 히브리어법의 특수성 즉 어떤 의미를 강조하려 할 때는 동의어를 반복하는 히브리 언어의 평행법적 특성 때문에 온 것이기 때문이다. 즉 창세기 1 : 26ff의 문맥은 하나님의 "첼렘"과 "데무드"로서의 기능을 ― 즉 "이마고·데이"의 기능을 ― 주로, 땅을 "다스리는 기능"으로서 설명하여 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 1장의 증언이 "이마고·데이"로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진술과 평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소위, "관계의 유비"라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 이론과 관련해서 사람들은 많이 생각해 왔지만, 시편 8편과 신약의 히브리서가 그 점도 또한 역시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배제하였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히브리인의 인간이해는 우리가 지금까지 서구적 그리고 헬라적 사유의 틀 안에서 이해한 것과는 다른 컨텍스트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그렇다면 이상과 같은 컨텍스트를 감안해 볼 때, 이제 우리는 시편 8편으로 돌아가서 시편 8편의 시인이 고백한 인간이해는 무엇이며 그것의 역사신학적 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그 수사적 어법을 따라가며 간결히 정리해 볼 단계에 온 것으로 보인다.
3. 시편 8편 시인의 인간이해
시편 8편 시인의 인간이해는 비록 위의 세가지 컨텍스트에서 시사된 범위를 크게 넘어가지는 않고 있으나, 그러나 인간의 피조성(J)과 존엄성(P) 사이의 역설적 관계를 시적 어법으로 교묘히 종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창세기의 표현과는 다른, 그리고 희랍적 사유가 가는 길과는 다른 표현양식을 갖고 진행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우선 시편 8편은, 창조 찬양시의 일반적인 문체구성과는 달리, 하나님의 창조업적의 그 장엄함과 영광스러움을 감탄하는 시인의 "놀라움"으로서 시작한다. 그러한 시적 경탄과 함께 저 장엄한 창조물과 거대한 자연을 우러러 보면서 이 시인은 저 유명한 물음,
인간이란 무엇입니까?(마-에노쉬)
사람의 아들이란 무엇입니까?(마-벤·아담)
이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여기서의 특징적인 것은 이 인간학적 질문을 철저히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를 찬양하는 문맥 안에서 제기했다는 점과 그리고 "네페쉬"니 "바살"이니 "앗팔"(먼지)이니 "레브"(마음)이니 "루앗하"(영)니 또는 남자와 여자로서 구성된 "관계의 존재"니 하는 표현 등등을 전적으로 피하고 단지 "에노쉬"라는 말과 "벤·아담"이라고 하는 즉 본래는 전혀 특수한 메시아적 개념이 없었던 단지 통속적인 "인간" 즉 보잘 것 없고 연약한 인간이라는 개념을 그저 평행법(parallelism)이라는 히브리적 어법에 의해서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시편 8편의 인간학은 어디까지나 그 갖고 있는, 그리고, 매우 의도적으로 고안된 특수한 시적 수사법을 통해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 수사어법의 진행과정을 따라가 보면서 시편 8편의 인간학적 서술을 포착해 내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으로 보인다.
1) 시적 평행법에 나타난 신중심적 인간학
시편 8편이 그의 인간학을 서술하는 그 시적 수사법은 히브리 시구의 그 배열구조를 통해서 볼 때 시의 첫 부분(v. 2)과 그리고 정확하게 이 시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그 중간 부분(v. 5)과 그리고 그 끝 부분(v. 10)에서 세번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는 "마-" 문장, 즉 "무엇입니까"라는 말로 시작되는 문장의 그 구조적 배열은 괄목할 만큼 눈에 띈다.
2절  온 땅에 가득찬 당신의 이름의 그 장엄함은 무슨 뜻입니까?(마-앋딜 쉬무카 버콜 ·하아레츠)
5절  인간은 무엇입니까?(마-에노쉬) 사람의 아들은 무엇입니까?(마-벤·아담)
10절  온 땅에 가득찬 당신의 이름의 그 장엄함은 무슨 뜻입니까?(마-앋딜 쉬무카·버콜·하아레츠)
이러한 수사적 구조가 말하고 있는 그 첫번째 의미는 이 시인의 인간학이 철저히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찬양하는 찬양의 틀 안에 들어 와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 두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업적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엄과 존귀에 비하여 인간의 연약함과 비천함이 매우 대비법적으로 대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무엇이냐?"라는 이 시인의 물음이 창조주 하나님의 찬양이라는 문학적 틀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그 물음이 전혀 철학적, 존재론적 물음이 아니고 신학적 성격의 물음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문제는 이러한 물음을 하나님의 창조업적 속에 나타난 창조주 하나님의 높고 위엄 하심에 대한 놀라움과 과장법적 경탄에 날카롭게 대조시키면서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표현의 그 문맥은 창조자의 높으신 위엄과 피조적인 인간의 연약성, 즉 창조자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대비법을 통한 인간의 연약성과 의존성에 대한 강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창세기 제1장의 P신학보다는 오히려 창세기 2장과 3장의 J의 신학에 훨씬 더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야비스트(J)는 이렇게 말한다.
야훼 하나님은 인간을 땅의 먼지를 가지고 빚어 만드셨다(창 2 : 7a)
너는 먼지다. 너는 먼지로 돌아가라(창 3 : 19)
여기서 말하고 있는 "먼지"(앗팔)는 "땅"(아다마)이라는 말의 한 변형으로 간주될 수 있고 또 "땅"(아다마)은 곧 "인간"(아담)의 고향이라는 관념이 매우 설득력이 있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래, 시편 8편이 말하고 있는 연약한 피조물로서의 인간, "에노쉬"와 그리고 낮고 비천한 존재라는 의미의 "사람의 아들", 즉 "벤·아담"의 개념은 창조주 하나님과 그가 지으신 땅에 예속된 {허약하고 연약한 사멸의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며 그것은 전적으로 P보다는 J의 신학과 더 긴밀하게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시편 8편 5절이 말하고 있는 "에노쉬"와 "벤·아담"은, 언어학적(philological) 연구의 도움을 빌려서 살펴보면, 허약한 존재 ― 하나님의 기억과 보살핌 없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연약한 존재 ― 를 지칭한다. 히브리어 "에노쉬"는 "연약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아카드어 en  u, "병약(病弱)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성서 히브리어 "아나쉬 I"(    I), 그리고 "불치의 병을 가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아나쉬"의 수동형 등과 같은 어의(語義)를 갖고 있어서 이 "에노쉬"라는 말은 구약성서는 사멸할 존재, 병약하여 풀처럼 소멸되어가는 존재를 가리키는 말을 쓸 때 사용되는 하나의 대명사적 언어가 되었으며 이 말과 대표적인 시적 평행어는 구약에서는 전적으로 "벤·아담"이라는 말로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시편 8 : 5에서 표현되고 있는
{에노쉬}는 과연 무엇이며
{벤·아담}은 과연 무엇입니까?
라는 평행법적 어투는 이 시인의 인간학이 갖고 있는 그 성격이 인간의 허약성과 허무성을 강조하는데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에노쉬"와 "벤·아담"의 어휘사용에서만 그러한 의미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시편 8 : 5 이전에 나타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그리고 시편 8 : 5에 나타나는 그의 창조물을 본 시인이 느낀 경탄과 감탄표현들 사이의 수사적 대비에서는 오히려 더욱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즉 온 땅과 온 하늘에 가득찬 창조주의 위엄은 ― 하늘에 달과 별들을 달아 놓으신 그 놀라운 솜씨는 ― 그리고 갓난아이와 젓먹이의 입술을 통하여서도 능히 원수들을 격파할 튼튼한 요새를 세우실 수 있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그 능력에 비하면 "인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시인은 고백한다. 그리하여 시의 서두, 시편 8:2에 나오는 경탄을 표시하는 의문사 "마-"(  )가 시편 8 : 5에 와서는 전격적으로 탄식을 표시하는 의문사 "마-"(  )의 기능으로 바뀌어지게 된다. 즉 시편 8 : 2에서는
온 땅에 가득찬 당신의 이름이
어찌 그토록(마-) 장엄한지요?
라고 말한 바로 그 시인이 시편 8 : 5에서는
당신께서 기억해 주시고 보살피시지 않으면 안될 저 연약한 {에노쉬}, 저-사멸할 인간은 도대체 무엇입니까(마-)?
라고 탄식한다. 그러므로 시편 8편의 전반부에 나타난 인간학은 제사문서 기자(P)의 인간의 존엄성 이론보다는 인간의 허무성을 강조하는 야비스트(J)적 인간학의 이데올로기와 더 평행을 이루고 있고 또한 동시에 그러한 인간의 허약성에 관한 진술은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맥락을 통하여 진술되는, 이른 바, 신중심적 인간학(theocentric anthropology)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2) "와우"(w w) 반어문장에 의하여 시의 분위기가 바뀐 시편 8편 후반부에
  나타나는 이마고·데이(Imago Dei) 신학
시편 8편 후반부의 인간학은 전반부의 어두운 분위기로부터 현격한  전도(顚倒)와 전이(轉移)를 일으킨다. 이것이 신비이고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신학적 연구의 주목을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에 나타나는 그 전도와 전이에 대한 예고 표시는 "와우" (w w)라는 히브리어 접속사의 특수기능에서 나타난다. 이 "와우" 접속사가 단순히 "그리고"라는 의미만을 갖고 있지 않고 아카드어의 전접어 "-마"(-ma)에서와 같이 "주제전이"를 알리는 기능을 한다는 것은 이 논문의 필자가 이미 다른 곳에서도 밝힌 바가 있지만 시편 8 : 6의 첫머리에 나오는 "와우"(w w)는 분명 야비스트적 인간학으로부터 제사문서적 "이마고·데이" 인간학에로의 주제전이(motif shift)를 나타내는 지시적 기능의 접속사라고 하겠다. 그 전이의 수사적 형태는 다음과 같다.
시 8 : 5 … 당신께서 기억해 주시는 저 "에노쉬"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당신께서 보살펴 주시는 저 "벤·아담"이라는 것은 또한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까?
시 8 : 6 … 그러나(와우!) 당신은 그를 하나님(Elohim) 보다 조금 부족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그에게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제전이(motif shift)를 나는 야비스트적 인간학과 제사문서적 인간학의 "전이적 연결"이라고 보고 싶은데 창세기 2 : 7의 J문서에 나타나는 "땅의 먼지"로서의 인간고백이 시편 8 : 5의 "에노쉬"와 "벤·아담"으로 표현된 인간학적 주제와 평행이 일어난다면 창세기 1 : 26-27의 P문서에 나타나는 "이마고·데이"로서의 인간고백은 시편 8 : 6의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워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라고 표현된 인간학적 주제와 평행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들 사이의 평행과 상응은 문자적 평행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주제(motif)의 평행이다. P기자의 인간학적 진술과 시편 8편의 그것을 비교해 보면 이러하다. P는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자신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라고 했고
시편 8편 6절은
그러나 당신은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부족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라고 했다. 분명히 시편 8편 시인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어휘 사용을 이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주제상의 동의적 평행어를 사용한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이마고·데이"라는 어휘가 왜 시편 8편 시인에게서는 배제되어 있었는지에 관한 그 신학적 이유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또 이러한 사실이 시편 8편의 연대를 P 이전으로 보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지는 더욱 의심스럽다. 그러나, 곧 이어지고 있는 시편 8 : 7-9의 서술은 창세기 1 : 28과 거의 문자적인 것에 가까울 만큼 문학적, 그리고 주제상의 상응을 이룬다. 즉 창세기 1 : 28과 시편 8 : 7-9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그 본질적 기능을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위임통치권 즉 창조주로부터 그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통치할 통치권을 위임받아 그것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즉 창조주로부터 그 창조하신 만물을 통치하도록 위임통치권을 부여받은 자라는 점에서 인간을 "이마고·데이"를 지닌 존재라고 보는 그런 인간학이 P와 시편 8편 모두에서 전제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시편 8편 시인은, 표제를 제외한 나머지 아홉절의 짧은 시구를 통하여 구약성서적 인간이해, 즉 철저히 신학적 맥락에서만 이해하는 구약 특유의 신학적 인간학을 하나의 "미니아추어"(miniature)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상의 논의를 간결히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들을 얻을 수 있다.
4. 결  어
첫째, 시편 8편 시인은 고대의 문서로 알려진,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이마고·데이" 창조론을 전혀 모르는 기원 전 9세기 만큼이나 먼 고대의 야비스트 문서의 인간학(창 2, 3장 등)과 그리고 바빌로니아 포로 후기의 제사문서 기자(P)의 인간학(창 1장)을 모두 수렴하고 종합함으로써 구약적 인간학의 역설적 양면성, 즉 "먼지"로 표현되는 허약하고 허무한 피조성을 지닌 인간성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최고 최대의 존엄성 사이의 역설적 총화를 수립함으로써 명실공히 구약적 인간학을 집대성하여 완결지은 자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 역설적으로 종합된 인간학을 시편 8편 시인은 철저히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시의 장르 안에서 소개함으로써 소위 "신학적 인간학"(神學的 人間學)이라는 것을 수립하였다고 하겠다. 한스·발터·볼프(Wolff)가 주장하고 있는 바,
하나님 찬양이 중단되고 있는 곳에서는, 인간은 자신의 허약성과 자신의 존엄성 사이에 나타나는 역설적 긴장을 오인하게 된다. 그런 곳에 처하는 사람은 마침내는 다시 비인간이 되고 만다.
라고 한 말은 구약적 인간학에 관한 매우 포괄적인 함축언어라고 생각한다.
둘째, 시편 8편 시인은 야비스트의 인간학과 그리고 제사문서 기자의 인간학을 전이의 형식으로, 즉 rapid transition of motif의 형식으로 연결시키므로, 이른 바, 신약성서 히브리서 기자가 증언한 바, "잠시동안"(     )의 십자가 고난 다음에 부활의 영광과 존귀로 급전이(急轉移) 해 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극적인 생애와의 기독론적 유형론(christological typology)의 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히브리서 2 : 6-9)고 하겠다.
셋째, 시편 8편 시인은 바벨론 포로기의 좌절 속에서 상실됐던 히브리인의 신학적 인간이해속에 P 성서기자의 "이마고·데이"의 신앙적 긍지를 심어 주려는, 이른 바, "미씨오·데이"(Missio Dei)의 동역자들이 항구적으로 사용할 복음선교의 "포아라게"(Vorlage)가 된 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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