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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1999/10/05 (00:51) from 203.252.22.54' of 203.252.22.54' Article Number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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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개혁과제
2000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개혁과제

강원돈박사 (한신대학교 강사 / http://socialethics.org )


I. 머리말
서기 2000년은 밀레니엄이 전환하는 해이다. "역사는 끝났다"고 주장하고는 있지만, 천년 의 단위가 바뀌다 보니 역사의 진운에 대한 인식과 반성이 새롭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 서 11세기로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장구한 역사를 되돌아 볼 겨를은 없다. 지난 20세기의 역사를 곰곰히 생각해 보고 미래의 과제를 설정하는 것만 해도 벅차다. 20세기는 두 번에 걸친 세계전쟁, 식민주의와 남북문제, 체제간 경쟁과 현실사회주의의 몰 락, 시장논리의 전면화로 특징 지워진다. 20세기가 끝나가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시장에서 인정되는 가치가 지배문화의 잣대가 된 것 같다. 그러면서도 시장은 여러 점에서 실패하고 있 다. 시장의 가치논리에 의해 외부화되는 사회비용과 환경비용, 시장을 통한 분배가 가져오는 사회정의의 후퇴, 세계경제체제에서 자본의 권력에 의해 판가름나는 빈국과 부국의 격차 등이 그것이다. 자본과 노동, 남성과 여성, 경제계와 생태계의 관계는 양극적 분열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20세기를 보내면서 전쟁이 아닌 평화공존, 남북의 지배예 속관계로부터 남북간의 연대와 협조, 시장의 논리를 대체하는 삶의 논리를 새로운 세계의 기 본개념으로 설정하고 이를 미래의 과제로 설정하게 된다. 삶의 문화에서는 사회친화적이고 환 경친화적인 경제가 수립되어야 하고, 자본과 노동, 남성과 여성, 경제계와 생태계의 이해관계 가 합리적으로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는 참으로 거대한 도전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 이다. 한국의 역사는 세계의 역사와 불가분리적으로 얽혀 있다. 20세기의 한국은 식민지 시대와 분단, 전쟁, 남북한 체제경쟁을 경험하였다. 북한이 아직껏 원칙적으로는 주체적 사회주의의 고립된 자급자족 경제를 지향하는 데 반해, 남한은 수출지향적인 국가주도자본화 과정을 밟아 왔고, 지금은 국민경제의 거시조정의 틀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 있다. 이 복잡한 역사과정을 되돌아보면서, 오늘 우리 민족은 남북한의 평화공존과 협력, 통일을 전제로 한 지속 가능한 내 포형 경제제도를 건설하여 남북한 공영의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중 대한 도전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위와 같은 미래의 과제를 위해 준비하면서도 당장 발등에 떨어진 IMF의 경제 관리를 극복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에게는 거대한 미래의 도전이 미증유의 경제위기 와 더불어 닥친 것이다. IMF 경제관리 아래서 우리 사회와 경제는 급속한 변화를 강요받고 있지만, 오늘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는 대략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신자유주의 논리 아래서 저임금 수출경제로 가든지 고실업을 동반한 자본의 고도집중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경제와 기업활동의 거품을 빼면서 국민경제의 자원할당의 효율성을 드높이고, 기 업의 합리적 경영을 도모하면서 통일을 대비한 지속 가능한 내포형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 노 력하는 것이다. 경제의 기본적인 지향이 결정되는 바에 따라 정치문화도 애써 이룩된 민주주 의가 또다시 형해화되던지 참여민주주의가 확대되든지 하는 갈림길에 설 것이고, 생활문화도 시장의 문화와 생명의 문화로 갈라질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주제는 아마도 이러한 거대한 도전과 위기 앞에서 한국교회가 할 일이 무엇 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리라. 도전과 위기의 시대에 한국교회가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세 계를 책임 있게 형성할 수 있는 하나의 주체로 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 면, 그것은 한국교회가 역사현실 속에서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을 감당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이 에큐메니칼한 교회의 현존을 가로막는 신학적 흐름들과 구조들은 없는 가? 2000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개혁과제를 생각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바로 이 신학적 흐름 들과 구조들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근본주의와 물량 적 성공주의, 개교회주의와 교파주의, 사회윤리 문제와 선교의 과제에 대해 닫힌 정치적 신학,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현실로부터 유리된 신학적 담론형성에서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 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본다.






II. 개혁이 필요한 한국기독교의 몇 가지 측면들

1. 근본주의

근본주의가 미국선교사들에 의해 도입된 후 1920년대로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체계화, 공고화되어 온 과정은 이미 많이 연구되었기에 이에 대한 분석은 생략하기로 한다. 나는 교회 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을 가로막는 근본주의의 몇 가지 측면들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고 싶다. 근본주의를 어떻게 인식하여야 하는지가 우선 분명해져야 한다. 만일 근본주의를 가르는 규준이 5개조 항목이 되었든 7개조 항목이 되었든 15개조 항목이 되었든 전해내려 오는 "근본적인 것"(Fundamatals)들을 교리체계에 담고 있는가의 여부에 있 다고 본다면, 이것은 단견이다. 근본주의는 교회와 신학이 처한 위기들을 풀기 위해 확실하다 고 신봉되는 근본적인 것들로 되돌아가려는 사고의 한 패턴이고, 권위에 순종하는 독특한 멘 탈리티의 기반이며, 기독교인들의 특수한 사회적 태도의 조형자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근 본주의를 교회지도부의 신학노선으로만 보는 것도 단견이다. 근본주의가 평신도들의 신앙형성 에 미치는 영향이 주목되어야 한다. 물론 평신도들의 신앙에서 근본주의 신조들은 여러 가지로 굴절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것 은 우리 사회가 다종교 사회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평신도들은 근본주의 신학노선의 강력한 영향을 받고 있지만, 이 근본주의 신앙은 전통종교들의 여러가지 요소들과 뒤섞여 독 특한 성격을 형성하고 있다. 유교의 체면주의와 가족주의, 샤머니즘의 기복신앙, 통속불교의 내세사상 등이 그것이다. 근본주의 신앙이 구원에 대한 개인의 확신을 강조하지만, 평신도들의 신심 차원에서는 여느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성과 공공성은 별로 발달되어 나타나지 않 는다. 하느님의 말씀의 권위를 금과옥조로 생각하기는 하지만, 자기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위해 신을 부리려는 신앙행태가 굳게 자리잡고 있다. 구원의 확신이 현실형성의 책임의식으로 발전 되지 못하는 것은 전천년설에 경도된 근본주의자들의 일반적인 경향이지만, 평신도들에게서 나타나는 책임의식의 둔화는 사후의 복락을 위한 신앙으로의 퇴행과 더불어 좀더 깊이 있게 분석해 보아야 할 과제이다. 매우 경직되고 비타협적인 근본주의에서조차 최소한 평신도의 신 심 수준에서 종교혼합주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어찌 보면 종교 다원적인 한국문화에 이식된 기독교의 숙명인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교회지도부가 근본주의 신학노선의 차원에서는 종교문 화전통에 대한 과격한 단절을 요구하고, 평신도의 신앙차원에서 무분별하게 혼합되어 있는 여 러 요소들을 책임 있게 성찰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근본주의를 다룰 때 유념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축자영감설의 영향 아래서 종교적 상 징이 생활세계로부터 유리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상징의 의미는 생활세계를 통해 밝혀질 수 있는 것인데도, 성서가 영감으로 쓰여진 정확무오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만 고집하게 되면, 오 랜 옛날 장구한 세월에 걸쳐 서로 다른 생활세계들에서 형성된 종교적 상징이 오늘 여기의 생 활세계에서 형성되고 재해석되어야 할 종교적 상징을 간단히 대체해 버린다. 중요한 것은 축 자영감설이 언어를 지배하는 매우 효과적이고 강력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언어의 지배는 상상 력의 지배를 낳고, 이로 인해 존재의 전면적 지배마저도 가능하게 만든다. 축자영감설의 강력 한 영향 아래서는 생활세계에서 형성되는 상징들이 이미 굳어지고 닫힌 종교적 상징들에 의해 단편화되거나 왜곡되어 삶의 유기적 연관으로부터 유리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 삶의 유기적 연관으로부터 분리된 상징들은 극히 선택적으로 수용된다. 앞에서 예로 든 혼합주의적 현상들 도 이를 보여 주는 실례들이다. 이러한 신앙형성 차원에서는 건강한 삶을 기획하고 스스로 발 전시킬 수 있는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신앙형태에서 어떻게 교회의 에 큐메니칼한 현존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근본주의가 독특한 멘탈리티를 형성시킨다는 것이 또 다른 요점이다. 미국 근본주의의 발 전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근본주의는 위기와 불안의 시대에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겨 지는 근거들로 돌아가 그 권위에 안주하려는 성향을 갖는다. 우리 교회, 특히 장로교회에서는 총회 수준에서 근본주의가 정신학으로 옹호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통과 이단 논쟁에 근본 주의 신앙노선이 커다란 역할을 하였지만, 이 논쟁의 구조를 분석해 보면, "근본적인 것들"로 되돌아가 교회와 신학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였다는데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근본주의 는 "근본적인 것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멘탈리티, 곧 권위주의적 멘탈리티를 전제하지 않고서 는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 권위주의적 멘탈리티의 특징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 동하는 힘을 약화시킨다는 것이고, 위기와 불안의 시대일수록 감염성이 높다는 것이다. 근본주 의적 멘탈리티의 또 다른 극은 적대세력을 히스테리칼하고 판에 박힌 채 규정하려는 태도에서 엿볼 수 있다. 근본주의 신앙노선이 용납하지 않는 견해들이나 운동들은 "사탄의 세력"에 붙잡 혀 있는 것으로 단정되고 이에 대한 전투적인 저항과 배제가 조직된다. 이러한 멘탈리티는 담 론능력을 빼앗아버리는데, 이것이 근본주의적 멘탈리티의 셋째 특성이다. 근본주의의 병폐는 위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도 많다. 근본주의는 전천년설에 의거하여 세 계경영을 비관주의적으로 보고 세계도피적 태도(Weltflucht)를 조장하면서도, 국가와 사회와 가정에 대한 교회의 입장과 관련해서는 지극히 보수적인 세계지배(Weltbeherrschung)를 지 향한다. 이 두 가지 상반되는 경향들은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데, 중요한 것은 이 둘이 서로 병존되면서 사안에 따라 매우 선택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회개혁에 대해서는 극단 적인 반대입장을 취하면서도, 국가의 전횡이 나타나는 경우에도 국가의 권위에 맹종하는 것이 한 예이다. 히스테리칼하고 판에 박힌 적규정이 갖는 위험은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적규 정이 매우 위험한 까닭은 그것이 교회사회학적 요인들(많은 경우 교회엘리트의 헤게모니 요구 와 정치 엘리트의 헤게모니 요구와 맞물려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반공주 의가 대표적이다)과 종교심리학적 요인들(많은 경우, 불안증후들과 결부되어 있다)에 의해 매 개되는 것이 뻔한데, 근본주의적 진리 주장을 전면에 내세운 나머지 이에 대한 비판적 자기성 찰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는 오늘과 같은 위기의 시대에 다시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자본화와 공 업화로 상징되는 현대화 실험이 중대한 위기에 봉착한 요즈음 근본주의는 현대화 자체에 대한 대항 프로그램으로 무장하여 매우 전투적인 태도로 근본주의적 가치들을 내걸고 평신도들의 신앙의식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에 관심 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까지의 현대화 실험이 갖는 문제들에 눈을 돌리지 않고 그것의 극 복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한국교회를 근본주의의 병폐로부터 차단시키는 데 노력하여야 할 것 이다.


2. 물량적 성공주의

2000년을 내다보는 한국교회가 물량적 성공주의의 포로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 이 성공주의는 많은 경우 아이러니칼하게도 성령 운동과 결합되어 있다. 성령운동이 물량적 성공주의와 결합되어야 할 까닭이 반드시 있는 것 도 아닌데, 이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한 특징이다. 성공주의와 결합된 성령운동은 1950년대 말에 우리 사회의 이입되어 우리 사회의 급속한 자본화와 공업화 시대 에 급격한 양적 성장을 구가했고, 오늘의 시점에도 그 교세의 신장이 약화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이미 15,6년 전에 이 현상은 사회학적으로 분석된 적이 있다. 그 당시 부각된 것은 급 격한 자본화와 공업화가 가져 온 아노미 현상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성령운동의 외적 요인을 이루었고, 공동체 속에서 일체감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한 목회경영이 내적 요인을 이르렀다는 것이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분석의 모델이었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의 카리스마 운동도 교리적으로는 근본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 교리를 수용하고 있으면서도 카리스마 운동의 행태는 근본주의자들과 는 퍽 다르다. 카리스마 운동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묘하게도 현실긍정적인 신앙이다. "삼박자 구원"에서 이 경향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구원론에서 영적 구원과 물질의 축복과 건강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구원론이 안고 있는 문제들은 이미 많이 분석되었다. 개인 의 영적인 구원이 되면서 구원의 사회적 차원이 약화되고 탈정치화된 신앙의식을 조장하기 쉽 다는 지적은 두말할 것 없이 옳다. 물질의 축복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성령이 동행하는 표지로 강조되는데, 축복 받은 물질이 어떤 사회적 연관에서 가능한 것이었는지 축복으로 받은 물질 이 어떤 사회적 성격을 갖는 것인지를 전혀 묻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구원받은 사람이 건강의 축복을 받는다고 강조되는데, 자연생태학적으로나 사회생태학적으로 파괴된 생활환경 에서 무엇이 건강한 삶인가를 묻는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물질의 풍요와 건강을 성령의 임 재와 구원의 표징으로 생각하는 데에는 매우 실증주의적인 사고유형이 자리잡고 있고, 그 배 후에 한국인들의 샤머니즘적 종교심성이 한 몫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한국형 카 리스마 운동은 목적과 수단의 전치현상을 가져 올 가능성이 크다. 이 카리스마 운동은 전천년 설의 빛에서 전도의 중요성을 유난히 강조하는데, 목적과 수단의 전치현상은 여기서도 나타날 수 있다. 교회의 물량적 성장과 교인 수 증가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땅 끝까지 복음을 전 하라는 하느님의 선교명령에 충실한 교회로 자처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태도를 교회의 에큐 메니칼한 현존으로부터 짚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물량적 성공주의는 카리스마 교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물론 아니다. 카리스마 교 회가 중요한 모델이 되었겠지만, 이 성공주의의 확산은 개교회주의의 물적 강제(Sachzwang) 로부터 설명되어야 한다.


3. 개교회주의

한국교회의 개교회주의가 네비우스 선교방법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개교회가 교회들의 공동체인 상회의 통제권 밖으로까지 나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는 개교회의 물량적 성공이 가시화된 시점에서 매우 커졌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이다. 다만 초기 선교사들의 교회정책에서 개교회의 자치, 자전, 자립이 동시에 강조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진정한 의미의 자치나 스스로 전도할 수 있는 능력의 배양은 뒷전에 있었고 개 교회 차원의 물질적 자립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 초기 선교사 이래의 이 와 같은 교회정책은 개교회 차원의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하여 교회의 양적 성장을 강제하였다. 이것은 목적과 수단의 전치 현상마저도 가능하게 할만큼 강력한 물적 강제였다. 개교회의 재 정적 자립이 교회성장의 목적으로 둔갑할 지경이 된 것이다. 교회재정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 은 교회의 실세로 인정되고, 개교회 상호간의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교회의 양적인 성 장은 목회의 성공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신자 빼오기나 다른 개교회들에 대한 은밀한 혹은 공공연한 비난이 나타나는 것은 약과이다. 하느님이 임재하는 신령한 교회임을 드러내기 위하 여 수많은 성도들이 하느님의 위광을 찬양하는 성전을 화려하게 치장하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 늘의 일이 아니다. 이른바 교회재정의 자립이라는 선교적 요구로부터 성공한 교회의 물량주의 로 세태가 변화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제까지 개교회주의의 병폐들은 지적될 만큼 지적되었다. 교회재정 운영의 폐쇄성이라든 지, 교회간 에큐메니칼한 사귐과 협력이 매우 적다든지, 개교회와 상회의 유기적 연관이 약화 된다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앞에서 잠깐 시사하였지만, 총회나 노회로부터 "성공한" 개교회 들이 사실상 독립한 듯한 인상도 지울 수 없다. 성공한 목회를 위해서는 교단의 신학노선은 가볍게 도외시되고, 노회나 총회의 결의는 서면 결의 뿐, 개교회 운영에 거의 반영되지 않게 되었다. 개교회 역시 에큐메니칼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식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오늘 한국교회가 끊임없이 보수화되고 있는 까닭은 결코 위기와 불안에 대한 한 대응방식 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한 관점은 잘 나아간다고 여겨졌던 문민정부 시대에 진보성향을 취했던 교회마저도 보수화 된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오늘 한국교회를 보수화시키는 것은 개 교회주의의 폐쇄성이고, 목회자들의 위신과 생계가 개교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개교회 주의의 구조적 관행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관행에서는 목회자들이 기득권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른바 "성공한" 목회자들이 카리스마를 지닌 목회자들로 자처하면서 상회들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것도 그 뿌리는 개교회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4. 교파주의

한국교회에서는 교인들의 교파의식이 의외로 낮은 데 비해 교회지도부의 교파의식은 유별 나게 강하다고 한다. 초기선교사들의 선교지역분할정책으로 인해 교인들이 교파의 선택 없이 한 교회에 나가던 관행에서 평신도의 약한 교파의식이 설명되기도 하고, 선교지에서 "단순하고 순수한 복음"을 전하다 보니 교파신학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는 것도 하나의 가능한 설명일 수 있다. 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하던 시기에 이른바 "성공한" 교회들에서 평신도들이 들었던 설교 나 교육이 사실상 교파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도 또 하나의 이유가 됨 직하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교회지도부의 교파의식이 유별나게 강하여 교회들의 에큐메니칼한 협력이 어렵다고 지 적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엉뚱하게도 에큐메니칼한 협력이 어려웠던 것은 교회 엘리트들의 지방색과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의 정치 문화에서 지방색이 건전 하지 못할 정도로 왜곡되어 왔던 것은 잘 알려져 있고, 선교지 분할정책이 교회 안에 어느 만 큼은 지방색을 조장하였다는 것도 인정되고 있다. 지방색 문제는 한국 민족이 매우 빠른 시기 에 뒤섞여 버린 한국전쟁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다고들 한다. 세상의 정치 적 관계에서 지방색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한정된 자원을 모든 사람이 함께 나누는 세련된 민주 주의적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자원을 불균등하게 나누다 보니 폐쇄된 인 간관계가 중시되고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지연이 이 인간관계 형성에서 퍽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이익의 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학연도 이와 비슷한 성격을 갖 고 있다).교회정치에서도 사정은 비슷한 것 같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자원을 배 분하는 과정에서 알력이 없을 수 없다. 이 알력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헤게모니 쟁탈이 나타나 는 것은 여느 인간사회에서와 비슷한 것 같다. 만의 하나 지방색이 교단내의 알력과 교단간의 알력에 작용하여 교회정치를 왜곡하는 현상이 있다면, 그것은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헤게모니 쟁탈의 부수적인 현상일 것이다. 이 알력은 지방색이 가져온 것이 아니다. 이미 조성된 알력이 지방색을 통해 악화된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다. 교회 엘리트들의 헤게모니 쟁탈 이야기가 나왔기에 한 마디 더 덧붙인다면, 한국교회에서 나타난 교회분열은 서로 싸우는 당파들의 신학적인 노선의 차이로만 설명되지 않고, 설사 신 학논쟁의 옷을 입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배후에는 교회 엘리트들의 헤게모니 쟁탈이 깔려 있 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을 가로막는 것은 단지 교회 엘리트들의 교파의식만이 아니고 이 가면 뒤에 숨은 헤게모니 쟁탈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친에 큐메니칼 진영과 반에큐메니칼 진영으로 갈라질 때 극명하게 나타난 바 있다. 한국교회에서의 반에큐메니칼 운동은 미국 극우파 기독교인들의 지원 하에 발전되었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 한 신학적 반대와 정죄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부족한 지식과 선입견에서 비롯되었지만, 이 투쟁의 밑바닥에는 교권의 향배를 둘러싼 인맥들의 헤게모니 싸움이 작용하기도 하였던 것 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정책을 오래 동안 지배하였던 선교사들의 총회지상주의(신학과 교권의 융 합)와 총회에서의 신학논쟁들로 인해 분열된 장로회의 경우, 교파의식은 분명히 신학노선과 연관되어 있다.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신학노선의 차이로 인한 교파의식이 교회의 에큐메 니칼한 현존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의 본령을 전혀 잘 못 이해한 것이다.


5. 신학담론

근본주의 신학과 성공주의 신학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이미 몇 가지 언급하였지만,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이 있다. 근본주의 신학과 성공주의 신학은 표면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지만, 구체적인 정치공간에서는 "정치적 신학"의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 신학들이 정치적 신학으로 어떻게 기능하였는가를 보여 주는 실례들은 퍽 많 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 예들을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삼선개헌의 와중에서 그리고 유신 독재시대에 근본주의자들과 카리스마 운동의 지도자들은 정교분리의 신조를 내세우며 정치적 사안들에 대한 엄정중립의 입장을 취했고, 정권을 비판하는 교회를 비난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물론 독재정권에 대한 "중립적인 긍정"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신학의 사실상의 정치화이다. 근본주의와 카리스마 신학이 정치적 신학의 역할을 했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또 다른 예는 이 신학들이 반공주의를 신조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신학적 입 장은 반공을 국시로 내건 역대 정권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해 주는 역할을 한 경우가 많 았다. 이 정권들이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운영하였는가에 대한 성찰 없었기 때문에 반공정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 많은 폐해에 대해 눈을 감건 하였던 것이 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올바른 정치의 형성을 위한 교회의 책임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복음과 율법을 구별에서 출발하는 두 왕국론의 입장에서도 율법의 설교는 정치에 대한 교회의 감독을 포괄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전면에 내 세운 고백교회 전통이나 책임윤리나 메시아적 실천을 강조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전통에는 정치적 신학이 설 자리는 없다. 정치적 신학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필요하다. 그것은 정치의 책 임 있는 형성을 위한 정치신학의 한 과제이다.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을 염두에 둘 때,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있 는 강단신학의 문제도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된다. 축자영감설에 기초한 신학의 문제를 일단 도외시하자면, 강단신학이 삶의 문제, 교회의 문제와 유리되기 쉬운 것은 강단신학이 부 르주아적 학문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적 학문 이해는 우리 사회의 역사 적 발전과 무관하게 이입된 것이지만, 그것이 태동되었던 서구에서 부르주아적 강단이론은 대 학강단과 현실사회의 괴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르주아적 강단신학에서 신학교와 교회현실은 겉돌기 쉽다. 자유주의 신학이 많은 경우 상아탑의 신학으로 전락되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 이다. 만일 신학이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을 섬기는 과제를 갖고 있다면, 신학의 출발점은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장이 되어야 한다. 이 현장의 문제를 조명하는 가운데 신학의 전통이 라는 샘에서 길어와야 할 것을 길어와야 하고, 새롭게 해석하고 새로운 상상력으로 개념화할 것을 개념화하여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와 정반대로 신학담론이 형성되고 신학교육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데 있다. 우리의 현실과 전혀 연관없이 발전된 학문의 틀이 소개되고, 그 틀에서 우리의 현실이 조명되고, 나중에 - 그것도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나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 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는 매우 엉성한 작업이 시도된다. 신학담론이 현실의 문제로 직접 뛰어들지 못하고 그 주변을 빙빙 도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다른 나라에 서 발전된 이론들을 연마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꼭 해야 한다. 그러나 왜 그 것을 해야 하나?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타산지석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에 뛰어 들 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것이 타산지석이 되는가? IMF 시대에 우리 사회와 경제와 정치가 봉착한 총체적인 도전에 대해 이런 식의 신학적 담론으로 응답할 수 있겠는가?







III.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역사현실 속에서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을 위해 개혁해야 할 한국교회의 몇 가지 측면 들을 나름대로 지적하였지만, 어떤 식으로 이를 개혁해 나가야 할는지 쉽게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평소에 생각해 왔던 것을 간략히 요점만 간추려 말하는 것으로 그친다.

1.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은 물론 큰 개념이다. 여기에는 참으로 많은 차원들이 있다. 교회를 위한 신학의 정립이나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사회윤리적인 입장 천명, 교회의 선교적 과제 설정 등이 그것이다. 이 현존을 위해서는 인적, 물적 자원을 개발하고 한정된 자원을 적 절하게 배치하는 것도 중요하다.

2. 근본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말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근본주의의 문제 를 도외시하고서는 2000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을 이루어내기 어려울 것이 다. 근본주의의 병폐를 교회사회학적으로, 이데올로기 비판적 시각에서 계몽하고, 근본주의적 멘탈리티를 가지고 있는 평신도들을 종교심리학적으로, 사회심리학적으로 치유하여 에큐메니 칼한 현존에 동참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근본주 의적으로 정위된 평신도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불안과 위기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권위주의적 멘탈리티에 감염될 소지가 많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 서 불안을 떨치고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단하며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요즈음 같은 IMF 시대에 더군다나. 근본주의의 가장 무서운 폐단, 언어의 지배, 상상력의 지배, 존재의 지배가 갖는 심각한 문 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진행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로 인해 왜 곡되는 삶을 치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자면, 매우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루어야 할 것 이다. 위기의 시대에는 근본주의가 표방하는 확실성이 개교회의 성장에 가져다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득이 있기 때문에 개교회의 지도부가 이를 끝끝내 옹호하고 이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사탄으로 규정하여 거룩한 전쟁을 선포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회교육을 통한 근본주의의 종교적 사회화는 분명한 한계를 갖는다. 교회사회학에서 중시되는 개교회지도부와 평신도의 항구적인 갈등은 종교적 재화의 생산과 소비과정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종교의 과제 는 삶의 의미와 건강한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과 뗄 레야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다. 이 종 교적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는 것이 근본주의의 폐단을 극복하는 대안 프로그램이 출발하는 자리이다. 근본주의의 다섯 가지 혹은 일곱 가지 혹은 열다섯가지 교의들을 가지고 삶의 복합 적인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까?

3. 성공주의는 에큐메니칼한 교회의 사회윤리적, 선교적 과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오 랫동안 한국교회는 물량주의 신화에 젖어 있었지만, 이 물량주의 신화의 허구와 이와 결부된 거품은 IMF의 경제관리 시대에 뚜렷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어제까지 성령이 함께 하여 물 질적 성공을 거두고 건강하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폭삭 망하여 건강마저 잃어버린 것을 성공 주의 목회노선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성령이 그토록 변덕스러운가? 어제도 오늘도 기도도 방언으로 열심히 하였고 구역예배부터 대예배에 이르기까지 꼬박꼬박 참여하였는데 왜 성령이 떠나가신 것일까? 성공주의가 한국 자본화와 공업화의 부산물이라면, 한국 사회와 경제의 구조조정이 심각한 현안이 되어 있는 요즈음 한국교회는 성공주의와 물량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은 셈이다. 물론 성령의 알리바이를 제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우리의 "성공한" 목회자들 을 매우 훌륭하게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전만큼 힘이 실리지는 않을 것이다. 고 난을 함께 나누고 물질의 축복과 건강의 인간학적, 사회학적, 생태학적 측면에 대한 성찰이 이 루어짐으로써 성공주의로 인해 둔감해졌던 윤리의식과 선교의식이 되살아 날 수 있을 것이다.

4. 개교회주의의 관행은 한국교회에서 매우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개교 회주의는 감독제 교회의 조직원리마저 무력화시킬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다. 개교회주의는 교회들의 연대와 사귐이라는 장로회의 민주적 조직원리도 허구화시키고 있다. 어떻게 이 문제 를 풀어야 하나? 나는 교회의 민주화에 문제의 해법이 있다고 본다. 개교회주의는 목회자의 지도력을 강화시키는 측면도 있지만, 평신도들의 역할도 신장시키 는 측면도 있다. 한국교회에서는 유교적 가부장 문화의 영향으로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가 수직적인 권위주의 관계로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평신도의 역할이 매우 크면서도 이 역할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시사하였지만, 나는 평신도들과 목회자 들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갈등관계라고 인식하고 있다. 교회에서의 위신과 목회자의 인정(認 定)이 평신도들의 교회생활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평신도들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목회자를 견 제할 수 있다. 목회자의 위신과 생존이 개교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신도들 의 견제에 둔감할 목회자는 없다. 평신도들의 권력이 밑으로부터 다양하게 조직되어 개교회수 준의 교회정책과 재정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평신도 주권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성공한" 목회자들은 다양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타협을 도외시하고서는 갈등 이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이를 통해 평신도 주권은 결과적으로 신장할 수 있다.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은 평신도 주권을 강화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달성되지 않을 것이 다. 에큐메니칼한 교회의 협력이 재정지원 문제를 동반할 경우에 평신도들은 적극적으로 나서 지 않는 경향이 있다. 개교회주의의 뿌리깊은 관행이 그렇게 만들곤 한다. 개교회의 재정 문제 를 해결하기에도 등골이 빠질 지경인데, 개교회 차원을 넘어서는 에큐메니칼한 사업을 위한 헌금이라니! 그러나 한국교회의 재정구조가 갖는 폐쇄성이 잘 알려져 있는 바로 그 만큼, 교회 의 본분에 맞지 않는 재정지출의 폐해도 잘 알려져 있다. 문제는 재정정책의 원칙과 방향을 어떻게 세우고 자원을 어떻게 배당하는 것이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에 합당한 것인가를 계 몽하는 것이다. 평신도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 이 여기 있다.

5. 교파주의도 교회지도부의 헤게모니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쉽게 극복되지 않을 것이 다. 헤게모니의 속성은 폐쇄성이다. 폐쇄된 체계 안에서 헤게모니는 유지되고 강화되기 때문이 다. 에큐메니칼한 개방성과는 정반대의 속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교파주의의 장벽은 특히 에 큐메니칼한 인적 교류와 자원 할당의 효율성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키고 있다. 모든 것이 자기 때문에 악화되는 데도 교파주의가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교파주의가 창이 없는 모나드이 기 때문이다. 교회이기주의와 헤게모니 쟁탈이 그렇게 만들고 있다. 이미 말한대로, 그것도 교 회지도부 차원에서 그렇지, 교회들의 바탕이 되는 평신도들의 차원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신 학적 차이가 에큐메니칼한 협력을 봉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에큐메니칼 공동체는 그리스도 를 구주로 인정한다는 것만을 규준으로 삼고 있을 뿐, 회원 교회들의 교리 문제에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에큐메니칼한 협력이 제대로 되지 않는 까닭은 교단지도부 의 투명하지 않은 태도 때문이다. 궁극적인 것을 향해 궁극이전의 것이 투명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은 회개의 대상이다. 회개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이 투명성을 높이는 제도적인 보완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 투명 성은 교회의 민주화가 진전되지 않고서는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개교회 수준이 아닌 교단 차 원에서 교회민주화는 교회 엘리트들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교회정치에서도 부인하기 힘들게 된 관료주의와 담합주의의 폐단을 줄일 수 있게 할 것이다. 의사결정 과정이 공개되고 의사결정 이 담론공동체의 규칙들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에 논거들과 근 거들을 가지고 반대할 수 있는가? 그것을 반대할 수 없다면, 이제까지 교회들의 에큐메니칼한 협력을 가로 막는 불투명한 관행들은 이성적이고 논증적인 토론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고, 인 사권과 재정권을 쥔 사람들의 "권위"가 민주적으로 투명하게 통제되어야 한다.

6. 신학적 담론의 방향전환과 건전화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미 많은 것을 시사하였으므로, 여기서는 2000년을 맞는 한국교회에서 시급히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과제 한 가지를 덧붙이 는 것으로 그치겠다. 머리말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거대한 도전과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국민국가의 차원에서도 그렇고 지역 차원에서도 그렇다. 요즈음 우리나라가 IMF의 경제관리 체제 아래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외환위기를 넘어서고 외환위 기를 초래한 국민경제적 비효율성, 금융의 부실화, 기업의 비효율성 등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 는 물음이 전면에 떠오르고 있지만, IMF 시대 이후를 겨냥하여 우리 사회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논의해야 하고, 한 국교회도 그 일에 나서야 한다. 한국경제의 여러 부문들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이 심각하기 때문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틀을 짜야 한다는 것은 이미 분명해졌다. 그 틀이 요즈음 광풍처럼 불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입각하 여 짜여져야 할까? 신자유주의의 대변자인 IMF의 정책대로 간다면, 우리 경제는 분명히 저임 금 수출경제나 고실업을 동반한 자본집중의 길로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회가 양극화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노동만이 아니라 여성도, 생태계의 안정도 부차적인 의제 가 될 공산이 크다. 외국자본의 지배 아래서는 국민경제적 차원에서 투자와 소비의 건전한 관 계를 수립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잉여가치가 더 많이 추출되는 조건 아래서도 그것은 끊임없이 해외로 유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과 자본의 관계는 매우 불균등해질 것이고, 권 위주의적 통치가 다시 등장하지 말란 법도 없다. 부자들을 위한 시장의 문화가 가난한 사람들 을 배제하지만, 외래문화의 범람과 대중문화의 조작을 통해 사람들은 많은 경우 현실의 문제 를 제대로 보지 못할는지도 모른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박탈감과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이 사회심리학적 증후들은 매우 값싼 대증요법들을 통해 처리될 것이다. 교회의 위로를 찾기 위해 사람들이 절망적으로 모여들는지도 모른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외채위기와 IMF의 경제 신탁 시기에 종교가 다시 되돌아왔던 것과 똑같이. 우리는 IMF의 경제관리 아래서 IMF 시대 이후의 과제들을 발굴하고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할 중대한 국면에 처해 있다. 2000년을 맞는 한국교회를 위해 이 과제보다 더 큰 과제는 없 다. 나는 통일 시대를 염두에 두면서 지속가능한 내포형 국민경제의 틀을 짜고, 이와 연관해서 정치민주화의 과제와 복지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교회의 에큐 메니칼한 현존을 함께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우리 시대의 큰 도전과 위기에 대해 응답 하는 일일 것이다. 이를 위한 토론에서는 매우 광범위한 의제들이 다루어져야 한다. 인간적이 고 사회적이고 생태학적 친화성을 갖는 국민경제의 틀과 기업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한 방향이 지만,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노동과 자본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토론이 있어야 한다. 이 깊이 있는 신학적 토론에 바탕을 두고, 경제, 사회, 정치 문제에 대한 교회의 윤리적 이고 선교적인 원칙들이 개발하고, 현실의 조건들 아래서 실현가능한 정책수단들을 어떤 행동 목표 아래서 조직하여야 할 것인가를 검토하는 것이 목표이다. 한국교회의 평신도들과 목회자 들과 신학자들이 참여해서 능률적인 토론을 한다면, IMF 이후 시대에 관한 청사진을 구체적인 행동 프로그램들과 더불어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담론이 매 우 다양하고 심도 있게 전개될 수 있는 과제가 우리 앞에 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에큐메니칼한 기독교인들의 공헌으로 연결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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