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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0/07/05 (22:06) from 203.252.18.128' of 203.252.18.128' Article Number :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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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경제와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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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경제와 기독교

강원돈(신학박사/아시아 경제와 윤리 연구소장)

머리말

"생명의 경제"는 경제학에서 이제까지 전혀 쓰여지지 않았던 새로운 개념 결합이다. 그런 만큼 개념을 정립하기가 쉽지 않고, 또 개념 정립을 위해 검토해야 할 주제들이 많다. 그것은 생명을 인식하는 틀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이다. 생물학, 생태학, 의학, 인류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철학, 신학 등에서 제시되는 생명에 대한 견해는 제각각이다. 여기서는 이 모든 견해들을 다 고려할 수 없고, 다만 경제의 문제를 되새겨 보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측면들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생명의 경제"가 무엇인가를 큰 윤곽에서나마 드러내기 위해 나는 우선 창조신학에 근거하여 "생명의 경제"가 무엇을 지향하는가를 밝히려고 한다.
 그 다음, "생명의 경제"가 유념하고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들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이와 관련해서 경제의 두 가지 기본문제들, 곧 생태계와 경제계의 관계,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검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활동의 생태학적 한계와 사회적 지향을 고려하는 "생명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해 경제활동을 어떻게 제도적으로 규율할 것인가를 기독교 경제윤리의 시각에서 밝히려고 한다.

I. "생명의 경제"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1. 생명을 신학적 주제로 삼은 연구는 오래 전부터 다양하게 이루어져 왔지만, 정작 이 주제가 교회에서 광범위한 토론의 대상이 된 것은 1983년 뱅쿠버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 총회 이후의 일이다. 총회 보고서는 환경파괴, 핵무기, 군국주의, 계급차별, 인종차별, 성차별 등이 오늘의 세계에서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세상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생명을 위협하는 요인들과 투쟁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총회는 생존의 위협에 몰린 인류의 미래를 위해 "정의, 평화, 피조물의 보전"(이하 JPIC)을 주제로 공의회 과정을 조직할 것을 제안하였다.
 JPIC 공의회 과정은 그 이전에 진행되었던 "정의롭고 참여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이하 JPSS)에 관한 논의를 포괄하면서도, 정의의 문제와 생태계 위기의 문제, 그리고 평화 문제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에큐메니칼 전망을 제시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것은 JPSS가 메시아적 해방실천을 강조한 나머지 정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 치중하고 생태계 문제를 부수적으로만 취급해 온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이 포괄적인 전망을 세우는 데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 것은 우루과이의 감리교 해방신학자 호세 미구에즈 보니노였다. WCC 강령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보니노는 1986년 한 비방록에서 "생명의 신학"에 관한 구상을 밝혔고, 그 핵심개념으로서 "연관성"과 "생동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나는 사물들이 서로 결합되고 내적인 관계를 갖고 있으며 여러 측면에서 서로 만날  때 연관성이라는 말을 쓰고자 한다. 서로 다르지만 서로 의존하는 사물들만이 연관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연관성은 체계적인 서술의 논리적 연관성이나 규칙적으로 작동하는 기계들의 기계적 연관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세계교회협의회가 희망을 두고 또 지향할 수 있는 연관성은 생동적이고 생장하는 유기체의 연관성이다. (...) 연관성에 대한 유기적 이해에서 필수불가결한 개념은 생동성이다. (...) 생동적인 유기체는 연관성을 잃을 때 죽고 만다."

보니노의 비방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관계 개념을 생명의 핵심 개념으로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만물의 유기적 연관과 상호의존관계를 강조하는 이 관점은 생태학과 신학을 새로운 차원에서 관련짓고, JPIC 공의회 과정의 신학적 핵심 개념들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예를 들면, JPIC 공의회 과정에서 정의는 "관계에 부합하는 행태(行態)"라는 점이 강조되었고, 따라서 불의는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정의는 동료피조물들 사이의 신실하고 공감하고 동등한 권리를 갖는 관계이다. 거기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것은 '다른 것'이지, 나 자신이 아니다. 이 견해는 하느님의 정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 하느님은 노예화되고 주변화되고 고난당하는 민중을 억압에서 해방시킴으로써 그들과의 관계를 구체화한다."

"하느님 나라의 표징 속에서 인류와 땅, 그리고 땅의 만물들 사이의 관계는 정의를 통하여 올바로 수립된다."

 JPIC 공의회 과정은 "생명의 통전적인 관계의 현실성"에 관심을 집중하였고, 이 에큐메니칼 관심사는 "피조물의 보전"에 관한 논의에서 또렷하게 표현되었다. JPIC의 IC는 "Integrity of Creation"의 약자인데, 이 개념은 많은 경우 "피조물의 보전"이라는 용어로 새겨지지만, 본래는 이보다 더 심원한 의미를 갖고 있다. 1988년 노르웨이의 그랜볼렌에서 열린 협의회에서는 이 개념을 "존재의 거대한 사귐과 나눔 속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맺고 있는 상호연관 혹은 상호의존관계"로 분화시키고 "인류는 이 통전적 전체의 일부분"으로 규정되었다. 인류는 피조물의 일부로서 피조물과 연대하고 피조물을 위해 청지직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뱅쿠버 총회 이후 에큐메니칼 사회사상은 생명을 관계론적 범주로 재해석함으로써 정의의 실현과 생태계의 통전성 회복을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시키는 관점을 제시하는 데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에큐메니칼 생명신학은 창조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터잡고 있다.

2. 지면 관계로 이 글에서 창조신학의 윤곽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창세기 1, 1 - 2, 4a에 근거하여 성서가 피조물공동체의 공생질서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질서로 가르치고, 이 공생의 질서를 형성하는 청지기의 임무가 인간에게 부여되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이 점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주석과 관련된 몇 가지 오해들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창세기 1장 26절 이하는 오래 동안 마치 하느님이 인간에게 생물들과 땅에 대한 무제약적 지배권을 부여한 것처럼 오해되어 왔다. 프란시스 베이컨 이래로 이 성서 단락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정당화한다고 인식되어 왔고, 린 화이트(Lynn White)나 칼 아메리(Carl Amery) 같은 학자들은 생태계 파괴의 사상사적 뿌리가 이 유다적-그리스도교적 전통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창세기 주석에 금자탑을 세운 클라우스 붸스트만(Claus Westermann)이나 오딜 한네스 슈텍(Odil-Hannes Steck) 이래로 이러한 비판은 근거를 잃었다.
 특히 슈텍은 창세기 1장부터 2장 4절 상반절까지의 전체 문맥에서 1장 26절 이하를 읽자고 제안하고, 이 말씀에 피조물공동체를 책임 있게 관리하고 보전해야 할 인간의 청지기직 사명이 함축되어 있다고 강조하였다. 창세기의 해당문맥에서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하느님이 하늘, 바다, 땅 같은 생활공간을 먼저 마련하신 다음에 이 생활공간에 각각 살 생물들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땅에서만큼은 예외다. 땅에서는 뭍짐승과 인간이 함께 살게끔 되었다. 둘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슈텍은 온 생물을 다스리라는 1장 26절의 말씀이 이 잠재적 갈등을 조절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것은 피조물공동체 안에서 공생의 질서를 수립하라는 뜻이다. 그 다음, 1장 29-30절에 보면 하느님은 뭍짐승과 인간에게 채식을 명령하셨다. 뭍짐승에게는 풀을, 사람에게는 알곡과 과일을 먹거리로 삼으라고 분부하신 것이다. 이 채식규정은 생존을 위한 살륙을 애초부터 배제한다. 이 두 가지 분부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 곧 하느님의 대리인으로서 피조물공동체에 내재하는 갈등을 규율하면서 공생의 질서를 형성하도록 위임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제문서의 창조 기사를 읽으면, 이 기사의 클라이막스는 하느님이 공생의 공동체로 지으신 이 세상을 보고 "참 좋다"고 말씀하신 후 안식에 들어가신 장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식공동체는 이 세상이 도달하여야 할 목표이다. 안식공동체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료피조물들 사이의 충만한 관계가 실현된 상태이다. 이것이 곧 샬롬이다. 그리고 샬롬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하느님의 청지기로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 곧 인간이다. 인간의 책임이 그 만큼 무겁고 중요하다는 말이다.

3. 창세기의 해당문맥은 경제생활에 대해서도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여기서 경제에 관한 규정은 "땅을 정복하라"는 1장 28절의 말씀에 들어 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을 채우라고 축복하셨다. 이렇게 되면 인구는 당연히 늘게 된다. 이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는 단순한 채집경제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 땅을 경작하여야 한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씀은 dominium terrae라는 라틴어 개념으로 새겨져 땅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 지배권을 인정하는 것처럼 오해되기 쉬우나 본래의 뜻은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은 하느님이 뜻하시는 공생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땅을 경작하면서 늘어나는 인구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살아가라는 뜻이다. 성서 시대에 도미니움 떼레는 농업을 의미했지만, 좀 더 넓게 생각하면 살림을 위한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노동활동이요,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는 경제활동이다. 도미니움 떼레에는 인간이 노동을 해서 책임 있게 살림살이를 펼치라는 하느님의 분부가 담겨 있다. 노동이 하느님의 축복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축복은 생명의 보존과 유지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4. 하느님의 축복 아래 있는 경제활동으로서의 노동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관계 너머에 있고, 인간의 공동체 형성능력과 인격적 통일의 요구 아래 있다. 이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고 주장하는 사제문서의 해당문맥을, 왕이 신의 형상이라고 주장하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왕권이데올로기 신화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신화들에서 왕은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중재자로 서 있지만, 창세기에는 인간이 곧 하느님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 왕권이데올로기 신화들은 신의 형상인 왕의 지배권을 정당화하지만, 창세기는 하느님과 인간을 직결시킴으로써 왕의 지배를 배제하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관계를 정당화하려는 발상이 애초부터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으로서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관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점이다. 대화는 모든 공동체 관계의 출발점이며, 공동체 관계 안에서 인격을 실현하는 근거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대화의 상대자로 지으시고, 바로 이 대화의 상대자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셔서 그들이 대화공동체를 살도록 하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렇게 보면, 성서는 공동체를 향해 열려 있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라고 강조하는 셈이다. 이 살림살이 공동체에서 각 사람은 노동을 통해서 공동체에 이바지하고, 공동체는 노동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배려한다. 공동체가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노동을 조직하여야 하고,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 여러 가지 이유로 일시적으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헌할 수 있도록 살림살이의 틀을 짜야 한다. 성서가 강조하는 이 공동체적인 살림살이의 정신은 경제논리에 의해 일그러지거나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

5. 나는 창세기 1, 1 - 2, 4a의 문맥으로부터 "생명의 경제"가 지향할 바에 관한 중요한 시사점을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생명의 경제"라는 개념은 경제학에서 아직 사용된 적이 없지만, 기독교적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허무맹랑한 말장난이 아니라, 성서에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경제의 새로운 파라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가 희귀성의 조건 아래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생활과정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지만, 인간의 욕망충족을 위한 활동이 아무런 제약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성서적으로 보면 경제활동은 피조물들 사이의 공생관계와 샬롬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 분명한 제약을 받고 있다. 요즈음 말로 하면, 경제활동의 생태학적 한계를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 경제활동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살림살이에 이바지해야지, 경제활동이 이 살림살이의 틀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운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경제활동이 사회적 지향성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II. "생명의 경제"는 무엇을 경계하는가?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경제활동은 생태학적 제약과 사회적 지향이라는 두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이 말은 경제활동이 단순히 경제성의 논리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경제성은 물론 경제활동의 중요한 조건이다. 왜냐하면 경제활동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원의 희귀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자원이 희귀성을 갖는다는 것은 자원을 아껴 써야 하고 욕망충족의 우선순위에 따라 효율적으로 할당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장경제처럼 경쟁이 경제활동의 제도적 조건으로 자리잡은 곳에서 자원할당의 효율성을 실현하지 못하면 적정수익을 실현할 수 없고, 수익을 실현하지 못하는 경제주체는 결국 시장에서 퇴출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이 무엇보다도 중요시되고, 경제적 효율성과 수익성이 경제적 성공을 재는 기준으로 자리잡는다. 시장경제에서 경제적 합리성을 포기하라는 것은 따라서 경제활동을 그만 두라는 뜻이다. 그러나 경제적 합리성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경제적 합리성을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경제활동은 합리성의 이름으로 생태계의 살림살이와 인간세계의 정의를 파괴된다. 이 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경제는 욕망충족을 위해 인간이 세계를 경영하는 한 방식이지만, 경제활동은 근본적으로 생태학적 제약 아래 있다. 신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세계경영은 피조물공동체 전체의 공생과 샬롬을 도모하여야 한다. 피조물공동체에서 만물은 유기적으로 얽혀 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다. 이 틀이 깨어져서는 안 된다.
 
1.1 그러나 오늘의 경제활동은 만물의 유기적 연관과 상호의존관계를 무시한다. 열린 체계(offenes System) 이론의 틀에서 보면, 이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는 파국적이다. 생태계를 하나의 열린 체계로 인식한다면, 생경제계는 태계와 물질-에너지 대사를 나누는 또 하나의 열린 체계이다. 생태계로부터 물질과 에너지가 경제계로 흘러 들어가면, 생산과 소비를 통해 이 물질과 에너지가 변형되어 사용되다가 폐기물과 폐기에너지의 형태로 다시 생태계로 돌아간다. 이렇게 되면 생태계의 엔트로피 수준은 높아지고, 저(低) 엔트로피 수준은 희귀재가 되고, 경제활동을 위한 기반은 극도로 위축된다.
 생태계가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폐기물과 폐기가스가 축적되면 심각한 생태계의 교란이 일어난다. 대기오염, 온실가스 효과, 오존층 파괴, 토양 및 하수오염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각각의 피조물이 생태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인정하지 않고 생물 종의 다양성을 보존하지 않고 생존의 자연적 기반을 무너뜨릴 만큼 생태계에 대한 경제계의 부담이 크다면, 그것은 경제계와 생태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하도록 알리는 엄중한 경고의 신호이다.
 경제계와 생태계의 균형이 파괴되면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제를 운영할 수 없다. 지속가능한 경제는 오직 경제의 생태학적 제약을 인식하고 경제활동의 자연적 기반들을 무너뜨리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1.2 이와 같은 인식은 오늘날 상식화되어 있지만, 시장경제는 이러한 상식을 무시한 채 계속 운영되고 있다. 그것은 자연재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시장경제의 교환논리에 자연재의 시장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장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경제학은, 자연재는 공짜이고 자연으로부터 자원을 아무리 끌어쓴다 할지라도 자연은 고갈되지 않는다는 편견에서 출발하였다. 이 편견을 가리켜 "리카아도 자연상수"(Ricardo'sche Naturkonstanz)라고 한다. 이 편견은 경제를 생산과 소비의 순환과정에 국한해서 살펴보는 데 그치는 제한된 의견이고, 생태계의 경제적 활용 규모가 아직 적었던 시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뿌리 깊은 편견은 생태계와 경제계의 관계에 대한 시스템 이론이 발달한 이후에도 제대로 극복되지 않고 있다.
 생태계의 경제적 활용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이 인식이 경제활동에 제동을 걸 수 없는 까닭은 시장경제의 가장 중요한 조절장치로 알려져 있는 가격장치에 환경재의 시장가치가 반영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환경재에 관한 한, 가격장치는 기능마비 상태에 있다. 나는 이 문제를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자세하게 고찰하고자 한다.
 시장경제가 교환경제라면, 교환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환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다. 교환의 정의는 물건이 같은 값으로 교환될 때 실현된다. 따라서 교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등가교환이다. 등가교환의 기준은 교환가치이다. 교환가치는 하나의 재화를 생산하는 데 들어간 노동비용과 자본비용으로부터 계산된다. 교환가치는 시장가격으로 표시될 수 있지만, 시장가격이 곧 교환가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장가격은 한 재화의 생산비용 이외에 공급과 수요의 양적 관계, 공급자와 수요자의 시장권력, 통화량 등 여러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곧잘 출렁거리지만, 교환가치는 시장에서 교환되는 재화들의 등가성을 표현하기 위한 개념적 추상물이다.
 문제는 자연재에 깃들어 있는 본래의 가치를 이 교환가치로 표현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물론 자연자원도 원료와 같은 형태로 시장에서 교환될 수 있다. 그러나 원료의 시장가치는 원칙적으로 그것을 경제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들어간 노동비용과 자본비용으로부터 비롯되지, 거기에 원료가 갖는 본래적인 가치가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물은 생명을 위해 엄청난 가치를 갖지만, 시장에서 교환되는 물의 교환가치에는 이 재화의 본래적인 가치가 반영되지 않고, 또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길도 없다. 자연과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화의 본래적 가치는 시장경제에서는 이론적으로는 제로이고, 따라서 공짜이다. 경제활동을 영위하면서 자연재를 아껴 써야 한다는 가르침은 따라서 시장경제에서는 공연한 도덕적 가르침에 불과하고, 하등 구속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환경재와 관련된 가격장치의 실패는 가격장치 자체가 현재의 공급과 수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속성을 가진 데서도 비롯된다. 가격은 시장에서 어느 재화가 갖는 희귀성을 반영한다. 그런데 가격에 반영되는 재화의 희귀성은 오직 현재 그 재화가 갖는 희귀성이다. 어느 재화가 장차 희귀한 재화가 된다고 해도, 미래의 희귀성을 현재의 가격에 반영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이와 같은 가격의 속성은 환경재의 경우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면, 화석연료는 현재 충분히 공급되고 소비되고 있지만, 2015년이 되면 화석연료의 공급은 한계에 부딪치고,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희귀재가 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화석연료의 시장가격은 이 미래의 희귀성을 조금도 반영하지 못한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주요 에너지원이 바닥난다고 해도 그것을 흥청망청 써 버리는 관성에 제동을 걸 수 없다. 그리고 그 에너지원의 과도한 소비가 산성비로 인한 삼림과 토양의 황폐화, 혼실효과로 인한 기후변화, 대기오염 등 심각한 생태학적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데도 그 소비에 제동을 걸기 어렵다.

1.3 환경재의 경제적 활용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까닭은 시장경제의 조절장치의 문제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재의 공공재로서의 속성에서도 비롯된다. 환경은 모든 사람들의 소유이다. 모든 사람들의 소유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환경보호로 인해 특수한 이익을 얻을 수 없다. 여기서 비롯되는 인간의 태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환경으로부터 얻는 용익에 대해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는 무임승차자의 태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환경에 부담을 주는 당사자가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비용을 스스로 떠맡지 않고 이를 만인의 부담으로 전가하려는 태도이다.
 생태계의 경제적 활용 규모가 엄청나게 커진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둘째 태도이다. 예를 들면, 전력이나 철강을 생산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물질과 에너지를 소비하면 폐기물과 폐기가스로 인해 환경은 오염되고 생태계의 안정은 깨뜨려진다. 오염된 환경을 정화하고 생태계의 안정을 회복하는 데에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만일 전력회사나 철강회사가 그 비용을 물지 않아도 된다면, 그 비용은 만인의 부담, 곧 국민의 세금으로부터 지출되어야 한다. 환경경제학에서는 전력회사나 철강회사가 경제활동을 위해 생태계에 미치는 이 부정적인 효과를 "외부효과"라고 말하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을 "외부비용"이라고 칭한다. 이 외부효과를 최소화하고 외부비용을 내부화하는 제도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물질과 에너지의 과소비에 근거한 전력생산이나 철강생산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적 장치는 아직까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전력회사나 철강회사에 일률적으로 부과되는 환경부담금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적다.

2. "생명의 경제"는 경제활동의 생태학적 제약만이 아니라, 경제생활이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건강하게 북돋는 것이어야 하고, 인간의 대화적 실존에 부합하도록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경제활동의 사회적 지향성은 그러나 오늘의 시장경제에서 무시되거나 우선순위에서 뒷전에 밀려 있다.

2.1 경제생활이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건강하게 북돋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것이 공동체 성원 전체의 기본욕구를 안정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지만,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경제제도로 자리잡은 시장경제는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난제들에 부딪쳐 있다.
 무엇보다도 커다란 난제는 경제활동으로 인해 소득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는데도 소득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자본소득자의 소득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지만, 노동소득자의 소득은 제 자리에 머물거나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소득분배로부터 아예 제외되는 인구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실업자들이 그들이다. 여러 가지 요인들이 겹쳐서 이와 같은 기가 막힌 현실이 나타난다.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거시균형을 이루는 것은 국민경제의 순환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이 거시균형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진행되는 오늘의 세계에서는 현저하게 깨졌다. 일반적으로 자본소득으로부터 투자가 이루어지고 노동소득으로부터 소비가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자본소득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투자과잉으로 결과할 것이고 따라서 공황을 피할 길이 없다. 당연히 자본소득 가운데 상당부분을 퍼내서 노동소득을 증가시키든지 환경보호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여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세계시장에서의 무한경쟁을 외치는 자본소득자들은 더 많은 투자를 위해 법인세 감축을 관철시키고, 더 많은 투자를 통해 합리화 과정을 가속화시킨다. 이로 인해 생산비용 가운데 고정비용이 차지하는 비율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일자리를 없애는 합리화 조치로 실업은 구조적으로 증가한다. 세계적인 경쟁 조건 아래서 자원할당의 효율성을 앞세운 경제의 논리가 인구의 대다수를 빈곤으로 내몰고, 사회국가의 재원을 급속도로 고갈시켜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노동자들이 궁핍화하고, 여성들과 아동들이 삶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사회적 연대가 무너지고, 환경보호가 외면당한다.

2.2 "20대 80의 사회"가 가시화되는 오늘의 세계에서 생산활동은 점점 더 인간의 대화적 실존으로부터 멀어져 가기만 한다. 인간은 생산을 위한 한갓 수단이나 "일하는 동물"(animal laborans)에 그치지 않고 생산활동 속에서도 인간이기를 원한다. 이것이 노동으로부터 비롯되는 권리(Recht aus Arbeit)의 핵심내용이다. 이 권리를 실현하는 강력한 수단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연대와 단결이었다. 오직 이 수단을 가질 때에만 노동하는 사람들은 생산수단의 소유에서 비롯되는 자본의 권리에 대항할 수 있었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인간의 이름으로 극복하기 위한 줄기찬 투쟁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노동자들의 연대와 단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는 오늘날 더욱 더 철저하게 실현되고 있다. 맨체스터 자본주의는 자본의 권력에 대항하는 노동의 권력이 형성되면서 역사적으로 극복될 수 있었지만, 오늘날 자본의 권력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노동의 권력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정도로 강력해졌다. 자본의 권력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하여 노동의 권력이 형성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고, 노동과정의 합리화, 생산기지의 이전, 인터넷을 통한 글로벌 소싱 등을 통해 노동자들이 그들의 사회적 권익을 실현할 수 없게 만든다. 증가하는 직접투자는 피투자국 정부에 노동자들의 저항을 잠재우는 제도적 장치를 요구하고 경제활동에 따르는 사회비용과 환경비용을 회피하는 특권을 요구한다.
 노동과정의 인간화는 점점 더 사치스러운 요구가 되어가고 있다. 선진경제들의 일각에서 컨베이어 벨트 작업을 넘어선 반자율적인 팀의 운영이 실험되고 있기는 하지만, 개발도상국가들의 대부분에서는 여전히 포디즘이 지배적인 노동방식이다. 그것도 글로벌 아웃 소싱에 종속된 포디즘이고, 자본집약도가 점점 더 높아지는 포디즘이다. 운이 좋아서 일자리를 붙들고 있는 노동자들은 집중적인 근육활동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반복적인 손노동이 해소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손노동과 머리노동의 전통적 분리가 해소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노동과정을 기획하고 감독하는 것은 여전히 자본의 기능이고, 노동자들은 그들이 일하는 일터의 형성을 위해 주도권을 발휘할 길조차 완전히 봉쇄되고 있다.

3. 이렇게 보면, 오늘의 지배적인 경제제도는 "생명의 경제"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음이 분명하다. 경제활동의 성공규준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수익성원리가 경쟁의 강제 아래서 목적으로 둔갑하고, 시장경제의 제도적 미비점들이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경제"는 이 난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하고, 경제의 생태학적 제약을 존중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북돋고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대안제도를 모색하여야 한다.

III. "생명의 경제"의 선택 -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지향을 갖는 민주주의적 시장경제

"생명의 경제"가 생태계와 경제계의 상호의존관계로부터 생태계의 경제적 활용의 한계를 인식하고, 공동체 전체의 기본적인 욕망을 안정적으로 충족시키고, 일하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생명의 경제"는 사회적이고 생태학적 지향을 가진 경제민주주의를 경제운영 원리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지면관계로 경제민주주의의 일반원리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여기서는 이 경제운영 원리가 앞으로 유념해야 할 몇 가지 과제들만을 거론하기로 한다.

1.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는 시장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것은 시장의 실패가 시장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시장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된 수단은 국가의 시장규율이나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었다. 전자는 시장경쟁의 공정성을 보장하는 법제화로 나타나고, 후자는 축적과정에 국가가 개입하여 강력한 소득재분배를 실현함으로써 국민경제적 차원에서 생산과 소비의 거시균형을 이루려는 일련의 정책들로 나타난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진행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고 있기 때문에, 영토국가를 넘어서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자본을 규율하기 위한 국가들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논의는 여기서는 생략한다.

2.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생태계의 경제적 활용을 제한하는 것을 옹호하고, 이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조직하는 정치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생태계의 경제적 활용이 시장원리에 의해서는 규율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저(低) 엔트로피 수준의 희귀성과 환경재의 미래적 희귀성을 가격장치에 반영할 수 있는 환경시장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저 엔트로피 수준을 경제적으로 고려하기 위해서는 환경경제학이 강조하는 환경용익 개념을 뛰어 넘어야 한다. 왜냐하면 환경용익 개념은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매우 인간중심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에 대한 욕구가 인간의 기본욕구들의 분포에서 하위를 차지한다는 것도 문제다.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국가들이 환경용익에 무관심하다는 것이 단적인 증거이다. 생태계와 경제계의 관계에 시스템 이론으로 접근한다면, 생태계와 경제계 사이의 에너지-물질 교환을 양적으로 계산하고 생태계 안정을 위해 그 규모를 제한하는 "결산" 방식이 도입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에너지-물질-결산에 입각하여 폐기가스와 폐기물 방출의 한도를 정하고 그것을 초과하는 방출량에 대한 부담금을 부과할 수 있다. 이 부담금의 규모는 적어도 방출량을 줄이기 위한 비용지출이 부담금을 지불하는 것보다 적거나, 부담금 지불이 경쟁기업들과의 가격경쟁에서 불리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결정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부담금은 방출량에 따른 차등부과가 원칙이다.
 이 부담금 차등 부과 방식은 행정당국의 업무를 폭증시켜서 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에, 생태계의 안정을 깨뜨리지 않는 한도의 배출허용량을 정하고 이를 명시하는 배출허용권을 발행한 후 이를 거래하는 환경시장을 형성하여 배출량을 통제하자는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나는 이 제안이 환경오염의 권리를 인정해 준다는 도덕적 비난을 받을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생태계의 안정을 기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방안을 담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를 지지한다.

3.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는 생태계 안정을 국가목표로 정하고 생태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법인들의 설립을 뒷받침하는 자연국가적 헌법개정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이것은 환경재가 공공재적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여러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적 방안이다.
 오늘날 소유의 사회적 의무는 거의 모든 국가들의 헌법에 채택되어 있다. 이제는 소유의 생태학적 의무를 명시하는 것이 헌법개혁의 과제이다. 소유권 행사의 생태학적 결과를 고려하는 것을 헌법적 구속력을 갖는 의무사항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소유권 행사로 인해 피해를 볼 수 있는 생태계의 이해관계가 대변될 수 있어야 한다.
 국가는 생태계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국가는 보편적인 이해관계의 실현자이기 때문이다. 누가 생태계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고 이 이해관계를 대변함으로써 얻는 이익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매우 까다로운 법리적 검토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지만, 이 법인이 설립되면 거시경제적 소득분배에 참여하여 생태계의 경제적 활용에 따른 생태계의 손실을 보전하는 비용을 요구할 수 있고, 환경에 미치는 기업활동의 영향을 규율하고 이에 따른 손실보전을 요구할 수도 있다.

4.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경제민주주의는 시장경제의 생태학적 규율을 위한 법제 개혁을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생태계의 권리가 폭넓게 인정되는 조건 아래서 자본의 권리와 노동의 권리가 동등하게 존중되는 제도를 요구한다.

4.1 이를 위해서는 우선 투자와 소비의 사회경제적 성격을 고려하면서 투자와 소비의 국민경제적 거시균형 계획이 수립되고, 이를 위한 이른바 "경제위원회"에 노동과 자본의 이해대변자들이 동등한 지위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과 자본의 동등권은 시장경제에서 노동의 이해관계와 자본의 이해관계가 서로 날카롭게 대립할 수 있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이런 조건 아래서만 거시경제 균형을 위한 소득분배율이 논의될 수 있고, 소득분배율이 일단 결정된 경우에만 성장률, 성장의 속도조절, 성장과 복지의 균형에 관한 거시경제 정책의 윤곽이 마련될 수 있다.
 자연국가적 법제 개혁이 이루어지면, 이 "경제위원회"에 생태계의 이해대변자가 참여할 수 있고, 생태계 보전을 위한 기금을 확보하는 데 노동소득과 자본소득 가운데 어느 만큼을 이 기금에 출연할 것인가를 거시경제 차원에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4.2 기업 차원에서 노동과 자본의 동등권을 제도적으로 실현하여 기업지배구조의 민주화를 달성하는 것도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이다. 여기서는 노동의 기능과 자본의 기능을 원칙적으로 구별하되, 기업의 경제정책, 사회정책, 인사정책 등에 의해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 노동자들이 기업경영을 감독할 수 있어야 하고, 이 감독기구에 노동대표들과 자본소득대표들이 동등성의 원칙에 따라 참여하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수익성 원리를 앞세워서 노동자들의 사회적 요구와 인간적 요구를 무시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노동과 자본의 협력적 대립관계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의사결정과정에 기업의 환경을 이루는 생태계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수 있도록 경영감독 기구에 생태계의 이해대변자가 참여하는 방안을 연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4.3 경제활동이 인간의 대화적 실존을 파괴하지 않도록 일터의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 프로그램들이 실천되어야 한다.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전통적인 지배관계를 노동과 자본의 기능적 분화와 민주적 통합의 원리로 전환시키고, 일터의 형성과 인간화에 일하는 사람들의 주도권을 폭넓게 제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IV. 글을 마치며

"생명의 경제"는 분명히 이 시대에 기독교가 성서에 대한 새로운 통찰에 바탕을 두고 옹호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운영 파라다임이다. 사회적이고 생태학적 지향을 갖는 경제민주주의는 "생명의 경제"가 선택하는 경제운영 원리이다. 이 글에서 밝힌 몇 가지 개혁 과제들은 우리 사회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지만, 선진 경제들에서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은 이 개혁 과제들을 이미 심도 있게 검토한 바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경제개혁이 매우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고 있다. 세계화의 조건 아래서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이 불가피하다고 정부를 위시하여 내로라 하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개혁이며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 자칫 "세계화의 덫"에 빠져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무시하고 여성들과 아동들로부터 삶의 기회를 박탈하고 생태계의 파괴를 더욱 더 악화시키는 결과가 빚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증언하는 경제활동의 본분과 제한조건들을 다시 한번 깊이 헤아리고 경제개혁의 청사진을 새롭게 제시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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