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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신학논문은행에 대하여

2001/10/29 (18:01) from 129.206.82.104' of 129.206.82.104' Article Number :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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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1 / 진정한 유일신론은 다원론







[지성]

한겨레 21 2001년10월17일 제380호 






진정한 유일신론은 다원론




종교적 배타주의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한국, 문제는 어디에서부터?


  


 최근 테러와 전쟁의 영향으로 기독교와 이슬람간 종교분쟁의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종교간 대화와 상호이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캐나다 리자이나대)와 개신교계의 대표적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로 꼽히는 김경재 크리스찬아카데미 원장(한신대 교수)이 이 문제를 두고 대담을 나눴다. 편집자






오강남|"문자주의적 성서 이해에서 진정한 의미가 뭐냐를 묻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 때다. <심청전>에서 인당수가 있나, 없나는 거의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심청전>의 메시지다."(강창광 기자)



사회: 최근 <예수는 없다> 발간을 계기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커진 것 같다.


오강남(이하 오): 다원주의라는 생각은 전에부터 있었다. 이전부터 김경재 선생님이 해오신 말이다. 변선환 목사도 그런 주장을 하다 변을 당했다. 이번엔 사람들한테 많이 읽혔다는 게 차이점이다.


김경재(이하 김): 전형적 종교다원사회인 한국사회에서 종교다원주의가 집안에 큰 문제처럼 불거진 것은 사실 기독교계의 문제 때문이다. 다른 종교들은 타종교에게 관용적 태도를 취했지만 기독교는 그러지 못했다. 60년대 이후 ‘쉬쉬’ 하고 학교 안에서만 논의되다 이번에 오 교수님 책이 일부 전문학자들만의 얘기를 성숙한 시민적 담론의 광장으로 끄집어냈다.


  


‘하나’가 아니라 ‘한’이다


  


사회: 기독교의 어떤 점이 문제인가.


: 기독교 이외는 열등한 종교,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는 독단적 태도를 견지해왔다. 지금도 대형 교회의 성직자와 신도들은 심하게 말해 그렇게 세뇌돼 있다. 해석학적인 눈뜨임이 필요하다.


: 다원주의는 관용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타종교와 협력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이 가장 큰 의미다. 인류의 당면한 문제, 위기를 타종교와 협력해서 극복하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 이런 일 할 때 내 종교만 맞다고 할 순 없다. 내 종교 중요하다고 인정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도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라고 인정해야 한다.


: 다원주의에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궁극 실재, 절대적 진리를 하나의 산정으로 인정하고,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체험하고 표현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종교 교리와 신관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진리 일반으로서 궁극적 목표지향점을 모든 종교가 다 공유, 전제하고 있다는 온건한 다원주의다. 한편 철저한 다원주의는 종교간 공통점이 없다고 본다. 굳이 그런 공통점을 말할 필요없이 불교며 기독교 등이 각자 병행하면서 서로를 관용하자는 것이다. 책에 나타나는 입장은 전자처럼 느껴진다.


: 두 종교가 완전히 평행된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서로 대화하면서 서로를 도와주고 서로의 종교적 체험, 삶을 심화시키거나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다고 본다.


사회: 다원주의 입장에 설 때 신의 궁극성은 어떻게 이해되나. 기독교는 다른 종교의 신은 우상이라고 보지 않나.


: 궁극 실재는 말 자체로 이미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각 종교가 어떻게 이를 이해하고 표현하는가는 다를 수 있다.


 기독교, 이슬람은 궁극 실재를 인격화해서 봤다. 그러나 꼭 그렇게 봐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불교에선 궁극 실재를 인격적으로 보지 않고도 종교활동을 하고 있다.


: 한국 기독교는 유일신의 ‘일(一)’이라는 글자가 문제다. 일자 때문에 단일신론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셈족 계통 종교의 신만이 신이고, 거기 신이 있으면 다른 곳엔 신이라 불릴 만한 존재가 미치지 않는다고 본다.


: 단일신론(henotheism)은 여러 신 가운데 한 신을 가장 중요한 신으로 모시는 반면, 유일신론(monotheism)은 오직 한 신 이외 다른 신은 없다고 본다. 기독교신 따로, 이슬람신 따로 있다고 믿는 것이 한국 기독교적 전통이다.


: 유일신론의 하나는 하나, 둘, 셋 중 하나가 아니라 한겨레신문사의 ‘한-’에 가깝다. 모든 것을 다 포함한, 숫자를 넘어선 의미의 하나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하나라는 숫자의 의미에 너무 매여 있어서 유일신 개념을 곡해해왔다.


  


종교의 차이는 체험의 표현에서


  





김경재|"한국 기독교 신도들은 불교신, 알라, 한울님 따로 있다고 믿지만 그런 종류의 여호와신이라면 나에게 신이 안 된다. 유일신관에 위배된다. 진정한 유일신론은 종교다원론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강창광 기자)



사회: 알라와 여호와, 한울님이 궁극적으로는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는 의미인가.


: 좀 조심해야 한다. 궁극 실재가 하나라 할 때 알라나 옥황상제 등을 그 하나에 대한 체험, 표현의 다양성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똑같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 진리 자체, 궁극 실재를 서로 인정하고 그것을 체험하고 표현하는 양식이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알라신, 여호와신이 따로 있지 않으며 불교,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 도교, 천도교 등 대표적 종교들은 궁극 실재에 대한 다양한 문명적 체험의 표현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급히 오버센스 해서 그러므로 다 똑같다는 거냐 하면 그건 아니다. 각 종교가 갖고 있는 고유한 색깔의 차이가 공통성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문제는 유일신이라는 단어 자체에 이슬람, 유대교 등 셈족 계통 3대 종교의 때가 많이 묻어 있다는 거다. 유일신 개념 자체가 불교, 도교 등의 궁극 실재 개념을 담아낼 수 있는 좋은 개념이 아니라고 본다.


: 쉽게 말해 나에게 절대적인 어머니라고 해서 다른 어머니는 다 틀렸다고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내 신앙이 절대적이라는 고백적 신앙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신앙은 옳지 않다는 게 꼭 붙어다닐 필요는 없다.


: 대체적으로 한국 기독교 신도들은 불교신, 알라신, 한울님 따로 있다고 믿지만 그런 종류의 여호와신이라면 나에게 신이 안 된다. 유일신관에 위배된다. 한 종교에 귀의한 사람들만 보호해주고 천국에서 건사해주는 신밖에 안 된다. 나의 지론은 진정한 유일신론은 종교다원론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기가 막힌 말씀이다. (웃음)


: 내 상식과 지적 정직성에선 그런 결론밖에 나올 수 없다. 기독교는 유일신관 때문에 종교다원론을 용납할 수 없다는데 다 잘못 이해해서다.


사회: 그럼 왜 굳이 기독교인가의 질문이 따를 수 있다.


: 왜 내 어머니가 내 어머니인가와 비슷한 거다. 나는 내 어머니 아들이기 때문에 우리 어머니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내 어머니가 실존적 절대성을 갖고 있다고 해 다른 어머니를 폄하할 수는 없다.


: 비슷하게 결혼은 궁합이 맞아야 하는 건데, 그런 필이란 게 종교적 차원에서도 있게 마련이다. 나는 유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기독교의 속삭임이 내 자신의 구체적 인생문제를 해결하는데 훨씬 감동적이었기에 개종했다. 그러나 나는 그랬지만, 성철 스님이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실존적 문제의식이 다를 것이다.


사회: 예수는 어떻게 봐야 하나. 기독교는 삼위일체설에 의거해 신격화한 존재로 보고 있지만, 다원주의에 서면 달라질 것 같다.


: <예수는 없다>라는 책 제목이 굉장히 경천동지할 것 같지만, 사실 이 속에서 말하는 것은 굉장히 건전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정통적이다. 기독교의 원점 예수를 나나 손 기자와 동급의 한 인간이다라는 식으로 만드는 경박함은 아니다. 글자 그대로 같은 인간이지만, 진리 자체를 신이라고 할 때, 그분이 도달한 생명체험과 내용에 있어서 신의 아들, 신의 화신이라고 할 만하다는 결론을 이 책에서 담고 있다.


: 제 이해보다 훨씬 깊이 이해해주셔서 고맙다. (웃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살아가면서 건전한 신앙생활과 삶을 산다면 하등 문제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상당수 기독교도는 삼위일체를 믿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못 믿고 괴로워하고 있다. 그런 이중장부를 소유하면서 살 필요없이, 터놓고 건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게 좋다고 본다.


  


오해된 삼위일체에 대하여


  


: 예수를 삼위일체의 제2격으로 보는 신관이 오늘날 아무 의미없다고 곡해될 우려는 조심해야 한다. 삼위일체는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다. 굳이 그리스철학의 배경을 지닌 삼위일체론에 입각해서 예수를 이해할 필요가 있느냐는 오 교수의 입장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어렵더라도 바르게만 이해하면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고 본다.


: 삼위일체 안 믿으면 기독교 아니다라는 식의 오해된 삼위일체는 오늘날 의미가 없다는 거다.


: 삼위일체도 기독교적 진리체험을 표현하는 한 역사적 산물이다. 그 이론엔 시대적 제약과 특성이 있다. 언어적, 논리적 표현체계가 전혀 다른 한국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구조만을 수입해 유포하다보니 왜곡이 일어났다.


: 모든 신학적 응답이란 그때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다. 오늘 한국에선 다른 병을 앓고 있는데, 옛날 처방을 그대로 쓰는 데서 부작용이 온다.


사회: 선교 등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인가.


: 선교사들이 모두 매도당하면 곤란하다. 그러나 그들의 교리 이해가 매우 경직된 이해였고 보수적이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들이 삼위일체로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다.


 사실 한국 개신교가 오늘날 이렇게 배타적으로 경직화한 것은 오 교수 진단대로 결국 문자주의적 성경관에서 비롯된다. 성경 안에는 수소폭탄 수천억개보다 더 위대한 영적에너지가 있다. 지난 3천년 한국 민족사 안에 위대한 세계종교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전부 한문으로 돼 지식인에 독점됐고 민초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한글 번역 성경으로 목마른 사람들이 물 마시듯 마실 수 있게 됐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누가 뭐래도 성경에서 우러나오는 위대한 가르침의 위로와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는 성장은 됐는데, 이제 성숙을 저해하는 원인도 성경문자주의라는 것이다.


: 이제 그것을 극복해야 할 때다. 문자주의적인 성서 이해에서 진정한 의미가 뭐냐를 묻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 때다. 심청전에서 인당수가 있나 없나, 치마를 뒤집어썼느냐 아니냐는 거의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심청전의 메시지가 뭐냐는 거다. 우리 나름의 의미를 문자주의에 집착해선 잃어버릴 수 있다.


사회: 근본주의·문자주의와 다원주의의 접점은.


: 다원주의의 반대는 배타주의이다. 배타주의는 성경 문구 중에 몇 가지를 문자적으로 고집하는 것이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것을 그 문맥과 역사적 배경의 고려없이 문자가 이러니까 다른 것을 인정하면 성경을 안 믿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해석에서 물러서면 그런 해석들이 뭘 의미하는가 하는 깊은 뜻을 알 수 있다.


: 성서가 쓰여진 기간이 3천여년으로 장구하다. 성서 전체를 입체적으로 안 보면, 기독교의 신관은 우주 만물을 넘어서 우주 높은 보좌에 있는 신을 그리는 초월적 유신론이 되기가 쉽다. 아시아 종교들은 내재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내재했다는 소리만 하면 범신론이라고 욕을 했다. 기독교는 인격적인 신관을 갖고 있어 시루떡을 해놓고 범신론이 되라고 빌어도 될 수가 없다.(웃음) 이 책에선 절대적 궁극 실재의 초월만이 아니고 내재만도 아니며, 초월하며 내재하고 초월하기 때문에 내재한다는 역설을 잘 설명했다. 에베소서 4장6절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만유 위에 계시고(초월)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과정성) 만유 안에 계시다(내재)”고 말한다. 바울 초기 공동체가 경험한 하느님은 그런 하나님이다.


 오 교수가 최근의 가장 원숙한 신관을 범재신론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동학 시천주(侍天主)가 또한 바로 그것이라고 본다. 동학과 기독교가 정말 깊은 차원에서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본다.


  


상업적 논리가 탄생시킨 이분법


  





사진/ 목잘린 단군상은 종교적 베타주의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례다.(한겨레 곽윤섭 기자)



사회: 시천주가 뭔가.


: 천주를 몸으로 모신다는 뜻이다. 수운이 동학을 창도할 때 내놓은 대표적인 종지이다. 최제우가 전국을 다니다 천주교 집회에도 참석한 모양이다. 그런 데서 영향을 받아 사람이 한울님을 몸으로 모시라고 말한 것이다. 본래 유가 전통을 났지만, 시천명이나 시천리나 시천 아닌 시천주라고 붙였다. 이미 천주교가 들어와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잡아죽이는 판인데도 그걸 두려워하지 않고 시천주라고 한 건 막연한 우주원리가 아닌, 우주원리이면서도 경애하고 기도하면 감응할 수 있는 분으로 한울님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거나 기독교나 오십보백보다.


: 동학사상이 비이분법적 사고의 가장 전형 같다. 천주, 한울님인데 이는 인격적이다. 동시에 지기(支氣)같은 개념을 쓰는데 이는 초인격적이다. 이런 것을 하나로 가지고 있다.


사회: 이런 주장이 바른 신학적 결론이라고 한다면 왜 이런 주장 자체가 이단시, 불온시되는가.


: 오 교수의 새로운 신관은 미국이나 유럽 기독교단도 100% 다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은 역사가 짧고 지난 역사에서 활동해온 선교사들의 패러다임이 체질화돼 있다. 선교사들의 공과를 정직하게 보는 성숙한 눈이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필요하다. 아직 한국 기독교계가 그렇게 하는 것이 모든 것을 부정하고 선교사들을 배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 성장에선 숫자가 제일 중요하다. 경제성장 논리와 맞아떨어지며 교회가 그걸 제일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였다. 그럴 때는 남의 상품을 좋다고 할 수가 없다. 내 상품만이 참 상품이다고 하는 것이다. 상업적인 멘탈리티의 영향이 컸다.


: 신관을 교회구조에 적용해봐도, 초월적이며 과정적이고 내재적인 신관대로라면 교회구조가 매우 민주적이 될 것이다. 반면 만물을 모두 관찰하고 통할하는 전통적인 초월적 유신론을 따르면, 교회공동체 내 목회자와 신도간 하이어라키가 정당화된다. 교회 지도자들이 무의식적으로라도 굳이 해체하려는 용기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매스컴과 정보화사회의 영향으로 젊은 세대들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근본주의적인 신학교육기관 학생들이 오 교수 책도 많이 사보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 서서히 빙벽은 녹고 있다.


  


 사회·정리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http://www.hani.co.kr/section-021082000/2001/10/0210820002001101703800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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