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의미에서 독일은 학파의 나라이다. 예를 들어 지도교수는 그가 가르침을 받은 교수와, 그가 키운 제자의 가설을 바탕으로 신학적 논의를 전개한다. 수업에서 직접 논의되는 학자들은 바르트, 본회퍼, 몰트만, 토마스, 브란트, 에쯔뮐러, 이들이 그의 멀거나 가까운 선생이고 그가 키우고 지금 각지에서 활동중인 제자들이다. 이렇게 서로 협동작업을 통한 가설의 공진화는 고유한 신론, 그리스도론, 종말론, 신학적 인식론을 구성하고 이러한 것들은 구체적인 오늘의 신학적 주제를 해명하기 위해 직접 적용되고 검증을 기다리는 중요한 재료들이다.
물론 이러한 가설의 실험과 적용은 구체적인 학파 내부의 경계를 넘어서서 논의된다. 그리고 다른 학파와의 만남과 토론 속에서, 각각의 학파가 제공하는 가설적 정당성에 대한 냉철한 검토를 요구받는다. 예를 들어 특히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예수의 희생'에 대한 지도교수학파의 가설은 튀빙엔학파인 야노프스키 쪽의 가설에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러한 가설적 정당성은 사실 당대에 모두 검토되고 완결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각자는 '가설의 힘겨루기'에 촛점을 맞추게 되는 것일 뿐 결코 말끔하게 합의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그 가설의 의미 평가와 역사적 합의는 후대의 몫일 뿐이다.
지도교수 학파의 주요한 흐름 안에서는 성령론에 있어서 '우발성', 신론과 그리스도론의 현대적 '시공간' 이해, 특히 서남동의 주장이기도 했던 '현재적 그리스도론'과 궤를 같이 하는 면(이는 몰트만의 미래에서 현재로 도래하는 시간론을 극복한 논의로 보인다), 그리고 독일관념론과, 화이트헤드와 독일의 루만의 논의가 아주 구체적으로 포진되어 있다. 난 매우 기쁘고 흥분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아시아에서 온 신학도로서 어떠한 위기의식 또한 느꼈다. 부러울 것 없이 풍요롭게 신학적 논의와 가설을 주도하고 생산해 내는 이 대학에서, 그것도 모자라, 신학부와 타학부와 타 신학기관과 연계하는 '국제적 학제간 신학 연구소'를 근래에 설립하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여기에서의 신학적 논의, 예를 들어 오늘 검토하였던 종말론과 신론은 뿌연한 흑백사진과 같은 논의가 아니다. 수십 수백년 동안 자신들의 선배들과 선생들이 논의했던 전통적인 주제들을 다시 받아서 구체적으로 오늘의 교회적 문화적 현실적 사변적 고려 속에서 논의를 심화해 나아가고 있다. 이는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한 논의이다. 유럽의 경전 해석과 전통을 바탕으로 번역 신학의 안개와 같은 숲 속에서 신학의 핵심을 추적하려는 일부 한국의 신학동네는, 이런 의미에서 더욱 더 복잡하고 어려운 점을 대면하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어려운데, 남의 이야기를 일부라도 도움 받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러한 난점은 애시당초 매우 자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 신학은 오늘날의 경험의 '현재화'의 작업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전통적인 가설도 이 '현재화'의 작업에 있어서 선별적 특권을 누릴 수 없다. 여기에서는 현재화라는 가설적 작업의 정당성이 중요한 것이지, 전통적인 가설자체의 권위와 정당성과 그 묵시적 강요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의 카르텔이다. 모든 과거적 가설은 그러므로 '현재화'를 위하여 주요하게 검토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설이 지닌 일말의 전통이라 하는 것도 새롭게 '현재화' 속에서 재 검증되고, 또한 오늘날의 '경험'의 충실한 해명을 통하여 의미를 부여받아야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