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00자평 Das Leben

2009/12/28 (02:38) from 211.212.69.10' of 211.212.69.10'	Article Number :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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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외출

독일에서 학위를 마칠 때가 2008년 2월이었다. 지친 심신으로 인해 한학기 독일에서 쉬고 7월에 한국에 들어왔다. 이제 다시 독일로 잠시 들어간다. 여러 이유가 있다. 저서 출판의 문제, 하이델베르크의 콜로키움과 뮌휀에서의 타궁, 가족의 보살핌과 이사 준비, 그리고 독일에 있는 해결해야 할 여러 잡무 등등.

방학 동안에 수행해야 할 한국에서의 여러 과제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외출이나 1년 반 동안 방치해두었던 숙제들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전화기를 들고가고 메일로 과제들을 그곳에서 공유하면 그나마 공백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도 한 몫 했다.

짧은 외출이지만 교회 식구과 선생님, 지인들에게 인사를 전했고 고향과 서울의 부모님에게 안부 겸 식사를 하였으며, 저녁에는 외국에서 공부하다가 귀국한 친애하는 벗을 만나서 그간의 삶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7-8년간 머물렀던 그곳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체험하는 것은 별 성과 없는 소망일 것이다. 단지 그곳에 잠시 머무른다는 것은 어찌 보면 1년반 동안 머물렀던 내 자리를 오히려 반추하는 계기로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곳의 새로움을 얻는 외출이기 보다는, 이곳의 의미를 헤아리는 외출이 되기를 새삼 바라고 있다.

가족, 교회, 학교, 연구소, 친구 등등... 그 모든 것은 나에게는 새로움이었고 도전이었다. 어느 공간 하나 소중하지 않은 곳은 없었다. 그곳은 생각보다 즐거운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소중한 공간을 내가 어떻게how 대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치여서, 그 소중한 공간을 내가 왜why 만나야 하고, 무엇을 위해for what 내가 헌신해야 할 것인가를 비교적 간과한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는 한 장면이 떠오른다. 2000년 가을 독일에 도착했을 때였다. 사람은 새로운 삶의 공간에서 새로운 의식에 대한 열망을 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개강도 아직 되지 않아서 학생들도 별로 없는 스산한 에큐메니칼 기숙사 욕실에서 혼자 머리를 깎으려 하였다. 일회용 면도기를 가지고 치기 어린 시도를 하였으나, 날도 별로 좋지 않은 일회용면도기로 머리를 전부 깎기에는 너무나도 역부족이었다. 한 서너시간의 공을 들여도 작업이 완수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뒷머리는 전혀 마무리가 되지 않아서 결국은 삭발을 포기하고 말았다.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되어서야 당시 기숙사 사감이자 지금은 나의 형님이기도 한 페르난도 엔스에게 가서 가위를 빌리게 되어 겨우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은 새로운 길을 떠날 때에는 무엇인가를 표현하고 남기고 싶어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생명의 길을 대면할 때에는 긴 침묵 끝에 큰 울음이 있고,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죽음의 길을 떠날 때에는 유서를 남기듯이 말이다.

이제 외출을 한다. 내 가족이 있는 곳이자, 나의 두번째 고향. 많은 사랑을 만났고, 나의 아버지를 잃어버렸던 곳. 그곳에서 사귄 선생님들 친구들과, 우리를 입양한(^^) 폴커 가족과 목사님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모든 기독교의 핵심은 "지금 이자리"(now and here)에 대한 집중이다. 지혜는 현재에 대한 민감한 직시 속에서 구현되는 언어이다. 그러나 "지금 이자리"라는 집중으로부터 잠시 유예된 시간을 허락받아 외출을 한다.

2000년의 가을이나 2008년의 겨울이나 잠이 안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실 마음의 근심은 그때에 비해 더욱 큰 구석이 있다. 특히 오늘 밤에 만났던 벗과의 대화 가운데 "타인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나의 마음을 미궁으로 몰아낸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나에게는 매우 죄송스러운 시간이었다. 용산의 희생 때문이었다. 용산의 희생이 일어난 후, 그리고 KNCC 예배, 그리고 용산에 가까운 곳에 섬기는 교회가 있어 시간나면 그곳을 어슬렁거리기도 하였으나, 정작 예수가 이땅에 태어난 크리스마스에는 그분들을 위하여 마음의 기도도 못드렸고, 추위를 함께 녹이는 예배도 참여하지 못하였다.

나는 용산을 우리가 얼마나 깊이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와 사회의 도덕성, 그리고 교회의 자리를 더욱 선명하게 감지하고 헤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타인의 고통을 타자화/자기화 하느냐에 따라 나의 도덕성과 믿음의 문제가 드러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학시절 온통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아, 세상이 조금씩 나아질 수 있겠구나 라는 기대였다. 그러나 그렇게 허망한 꿈도 아니었는데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가 않았다. 어깨가 가라앉은 가을과 겨울을 대한민국의 시민은 무기력하게 보내고 있었고 바로 그 우울한 계절의 정점에 용산의 참사가 터졌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수치이며, 이 사건을 도외시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수치이다. 그리고 이 사건을 망각하는 나 또한 언제든지 부조리에 편승하는 수치일 뿐이다.

어디에서부터 타인의 고통을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가. 잔인해지고 강팍해진 나의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 것인가. 진정 국가는 개인의 적이자, 자본의 시녀일 뿐인가. 오늘날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그저 보이는 교회만 있을 뿐인가.

이런 고민들을 가지고 외출을 한다. 그곳의 거리에서, 그곳의 사람들 사이에서 이 고민의 해결은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리와 사람을 가로지르며 최소한 그동안 놓쳤던 점들을 헤아리고 새로운 방향과 통찰을 얻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변화를 되도록이면 글로 남기고자 한다.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한 글을 넘어선, 마음과 혼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글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 아닌가 생각해서이다. 그동안 기술적인 글을 향한 씨름 속에서 마음이 바삭해지고 혼이 말라버린 듯 하였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의 외출에서 많은 고민을 헤아리고 정리하며 영혼의 마찰을 생생하게 글로 남길 수 있는 시간으로 채워지기를 나 자신에게 요구해본다.